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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섹스, 그리고 대한민국

이송희일(30) 감독은 커밍아웃한 게이다. 2년 전부터는 어머니의 성을 따서 부모 성을 함께 쓰고 있기도 하다. 사정 모르는 이들은 그래서, 이름이 ‘송희일’이냐고 묻는다. 한술 더 떠 자기 추측대로 ‘이송희’ 감독이라고 잘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본인은 그런 반응에 외려 무덤덤하다. 99년 한 방송사의 토론회에 나가 전국적인 ‘커밍아웃’을 하고서 고향인 익산의 전주 이씨 문중으로부터 ‘죽일 놈’ 소리까지 들었는데, 그 정도가 무슨 대수랴. 당시 동성애자 인권연대 모임인 ‘친구사이’의 회장이었던 그는 그 사건으로 “서울가서 못된 짓만 배운 증손을 잡아들이기 위한” 체포결사대까지 조직됐었다고 웃는다. ‘젊은영화’ 차리고, 접고, 낙향하고 그는 독립영화계에선 몇 안 되는 스타 감독으로 꼽힌다. 이런 분류에는 그런 개인적인 이력이 작용하기도 했다. 또 최근 2년 동안 내놓은 <슈가 힐>과 <굿 로맨스>가 경쟁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며, 지면에 오르내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의 등장은 90년대 후반 독립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정치적인 검열과 자본의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80년대 커다란 독립영화의 축에 그는 ‘퀴어영화‘라는 다소 생경한 깃발을 내걸었다. 그리고 <슈가 힐> <굿 로맨스> 등 두편의 영화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사를 진지한 어법과 세련된 연출로 넓혀왔다. 그런 이송희일 감독이 독립영화 진영에 결합한 지도 내년이면 벌써 7년이다. 95년, 약수동에 열평 남짓한 사무실을 차려놓고, 김성숙, 고은기, 박경목, 김규철 등과 함께 ‘젊은영화’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가 처음부터 꼭 집어 영화를 하겠다고 맘먹은 건 아니었다. 팬티 2장에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싸서 밤차 타고 상경할 때의 뜻은 학술운동을 계속하기 위한 대학원 진학에 있었다. 신촌의 6만원짜리 싸늘한 독서실에서 기거하며, 근처 대학의 도서관에 처박혀 생활한 지 6개월. “책 읽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겠다 싶어” 관심을 갖고 있던 영화운동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그래서 합류한 곳이 독립영화 워크숍. 거기서 만난 김성숙 감독과 독립영화 상영회를 준비했지만, “틀 만한 것이 있네, 없네 궁상떨지 말고 차라리 우리가 찍자”고 의기투합한 것이 젊은영화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만치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는 모두들 기획이 돋보이는 프로젝트부터 시작하고, 이 순서대로 서로의 작품에 품앗이하자는 계획을 세웠지만, 모두 연출을 지망하는 상황에서 다섯이 의견일치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해야 했고, 순번이 밀린 그 역시 그러면서 활동에 열의를 잃었다. 그 무렵, 한달 동안 술로 날을 지새운 탓에 장염을 얻었고, 교통사고로 인해 허리에 철심 박고서도 매일 밭에 나가서 일하시는 시골의 홀어머니 생각도 자주 났으며, 그게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낙향한 이유가 됐다. 덧붙이자면 그의 중도 포기에는 “여전히 영화가 부르주아적인 매체”라는 의심도 작용했다. 거슬러, 대학 시절 그는 지독한 교조주의자였다. 학생운동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중·고등학교 시절 시내의 재개봉관을 안방삼아 주윤발의 우아한 총알발레부터 에로물인 인신매매 시리즈까지 가리지 않고 보았던 그는 대학물을 먹고선 “이데올로기 오염의 주범인 영화”를 멀리했다. 4년 동안 그가 본 영화라곤 <사랑과 영혼>, 딱 한편.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는 영혼을 경작하는 트랙터”라는 경구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분명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꾹꾹 눌러놓았던 영화에의 짝사랑은 그렇게 다시 불붙었다. 정작 본인은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그가 감독의 길을 택한 데는 영화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천성이 착했지만 게을렀다는 아버지는 군산에 있는 외갓집에 다녀올 때면 아들을 끼고서 꼭 극장을 들렀다. 병석에 누운 이후로 그런 기회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봤던 영화들과 배우들에 대한 기록을 빼곡이 적어놓은 비밀수첩은 지금 감독의 길을 걷는 아들에겐 더없는 격려다. 어쨌든 금마 황복골에서 반바지 입고, 클래식 들으며, 쇠스랑으로 밭 갈던 1년은 행복했다. 남는 시간엔 대학을 졸업할 무렵 받은 장학금 70만원으로 장만한 TV와 비디오를 껴안고 살았고, 고등학교 때부터 끼적이던 소설 습작에도 다시 몰두했고, 초등학교 시절 일찌감치 배운 경운기와 오토바이로 드라이브를 즐기며 바람을 쏘이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영화를 포기하고 얻은 달콤한 휴식은 이내 곤궁한 생활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금이야 자신이 신세를 지는 처지지만, 여동생 둘이 막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 몰라’ 하고 모든 걸 어머니에게 맡겨둘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두 번째 상경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처음 1년은 그저 착실한 직장인이었다. 글 재주 덕에 문학아카데미라는 출판사에 다니면서 저축도 했고, 적은 액수지만 집에 돈을 부치기도 했다. 독립영화의 미래? 낫싱. 동성애자 인권단체인 ‘친구사이’를 알게 된 것은 그 즈음,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영화에 대한 갈증도 마침 일기 시작하던 차에, 그는 월급 모아 마련한 300만원으로 주말마다 게이 친구들을 출연시켜 자신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의 첫 번째 영화 <언제나 일요일 같이>를 만든다. 아무래도 그의 존재를 알린 건 지난해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슈가 힐>. 영화내용은 이렇다. 서로 사랑하는 두 남자가 있다. 이중 한 남자는 결혼을 재촉하는 가족들의 성화에 시달린다. 그런 그에게 동성 애인은 자신의 누나와 결혼할 것을 종용한다. 남자는 이를 받아들이고, 둘은 그렇게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는 두 남자의 사랑을 목격한다. 예고된 불행은 이제, 현실이 된다. 백수이다보니 ‘친구사이’ 사무실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상근을 자처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라면으로 연명하던 시절, 아는 형으로부터 우연히 들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올해 여름에 내놓아 제26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굿 로맨스> 역시 30대 여성과 10대 고등학생의 원조교제를 삐딱한 시선이 아닌 평범한 두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관계로 묘사한 뛰어난 디지털영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더불어 한치 끼어들 틈도 없는 긴장선이 팽팽하게 흐른다. 그것은 마치 시소를 타는 듯한 느낌인데, 영화 속 인물들을 따라 관객 또한 구속하는 제도에 포섭되면 하강의 고통을, 에로스적 욕망을 택하면 상승의 쾌감을 번갈아 맛보는 식이다. 사자성어 프로젝트 중 하나인 <마초사냥꾼>을 끝낸 지금, 그는 아쉬움이 많다. 시간이 촉박해서 자신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도중에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다른 감독들과 스탭들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접었다. 현재 충무로의 한 영화사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을 나누고 있는 중. 하지만, 그는 충무로 진입보다 지난해 이스트만코닥단편영화 제작지원에 선정됐지만, 몰아친 한국영화 붐 때문에 정작 제때에 카메라를 구하지 못해 미뤄진 <이발사의 곤돌라>에 관심이 쏠려 있다. 53살의 이발사가 어느날 불현듯 동성애에 대한 끌림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는 단편이지만, 그는 이를 시작으로 레즈비언, 양성애자, 장애인, 청소년 동성애 등을 다룬 연작 에피소드 묶음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주위에선 너무 섹슈얼리티 문제에 함몰된 것 아니냐고 우려하지만, 그는 당분간은 이를 화두로 주변의 인간관계에 천착하고 싶다고 말한다. “독립영화의 미래”는 “낫싱”이라고 답하는 이 괘씸한 이단아는 그런 자기부정을 동력으로, 지금껏 미지의 영토를 발견해왔다. 이영진 anti@hani.co.kr <굿 로맨스> 는 어떤 영화? 여관으로 간 유부녀와 고등학생 미현은 33살의 유부녀다. 그녀는 한달 만에 18살 고등학생인 원규를 찾아간다. 원규 역시 그런 그녀가 싫지 않다. 둘은 재회의 장소로 여관을 택한다. 하지만 이내 미현은 목에 난 상처를 두고 원규에게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탓하고, 원규는 전화번호조차 알려주지 않는 미현의 일방적인 태도에 화를 낸다. 결국, 둘은 그렇게 헤어지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눈 내리는 거리에서 서로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원조교제를 소재로 했지만,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세간의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고 대신 ‘굿 로맨스’라 부른다. 좁은 방안에서 팽팽히 맞서는 두 배우의 연기에, <눈물>의 이두만 촬영감독의 카메라까지 더해져, 영화는 연극무대 위의 생생한 갈등을 그대로 도려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한국 독립영화계의 두 이단아 김정구, 이송희일 감독 ▶ <샴·하드 로맨스>의 김정구 ▶ <슈가 힐> <굿 로맨스>의 이송희일 감독

<고양이를 부탁해>, 그녀들의 선택!

<고양이를 부탁해>·전지현·차태현, 여성관객이 뽑은 올해의 베스트 올 한해 극장을 찾은 여성관객이 직접 채점한 페미니즘 성적표가 배달됐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이 주관하는 여성관객영화상 심사 결과, 최고의 한국영화로는 <고양이를 부탁해>가, 최악의 한국영화로는 <썸머타임>이 선정됐다. 최고의 한국남녀배우로는 <엽기적인 그녀>의 엽기 커플 전지현-차태현이 나란히 선정됐다. 외화부문에서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최고 영화의 영예를 안았고, <나는 네가 지난 13일 금요일 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에 최악의 영화라는 불명예가 돌아갔다. 최고의 외국여배우로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르네 젤위거가, 남자배우로는 <슈렉>의 슈렉이 선정돼 눈길을 끌었다. 다큐멘터리 <고추 말리기>, 특별상 수상 올해로 6회를 맞는 여성관객영화상 시상식이 12월27일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렸다. 얼마 전 올해의 여성영화인으로 선정된 데 이어, 여성관객의 지지로 최고의 영화상을 수상한 정재은 감독은 “재밌는 영화로 다른 영화(<엽기적인 그녀>)가 선정된 걸 보고, 다음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극영화가 건드리지 못한 여성의 문제를 다뤘다”는 의미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고추 말리기>의 장희선 감독은 “여성관객과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소감을 대신했다. 전지현과 차태현을 대신해 수상한 <엽기적인 그녀>의 곽재용 감독은 “나보다 배우들에게 이런 상이 돌아간 것이 더 기쁘다”며 유난한 배우 사랑과 팀워크를 과시했다. 배우 추상미의 사회로 진행된 이 시상식에는 영화진흥위원회 유길촌 위원장과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이혜경 대표가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지난 11월20일부터 12월15일까지 25일간 <씨네21>과 각 대학, 여성단체, 인터넷을 통해 전국 거주 16살 이상 여성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올 한해 여성관객은 어떤 영화를 즐겨 보았고, 어떤 영화에 열광하고 또 분노했는지, 어떤 캐릭터를 바람직한 여성상 또는 남성상이라고 느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가 기본 항목. 유지나 준비위원장은 “부익부 빈익빈, 혹은 대박영화 대 일주일용 영화 식의 단순한 구분을 낳고 있는 작금의 한국영화 대박시대, 여성관객영화상은 영화산업론이 간과하는 젠더의 문제를 핵심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친구>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의 기록적인 흥행 속에서, 올해 여성관객은 무엇을 보고 또 느꼈을까. 여성관객이 즐겨 보고 또 좋아하는 영화 목록은 2001년 전체 흥행 순위와 적잖은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친구>와 <엽기적인 그녀>는 여성관객도 많이 관람한 영화이긴 하지만, 최근 흥행에 성공한 <조폭 마누라>와 <달마야 놀자>보다 오히려 <번지점프를 하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멜로물을 더 많이 관람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화의 경우도 <미이라2> <버티칼 리미트> <캐스트 어웨이> 등이 흥행에 선전한 영화들이지만, 여성관객은 이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왓 위민 원트> <아멜리에>처럼 여성이 중심에 선 영화를 많이 봤고 또 좋아했다. 또 많이 본 영화와 좋아한 영화 사이에도 소소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친구>, 최악의 영화 3위 올해 최고의 영화, 최악의 영화를 고르는 데 있어서의 잣대는 여성 캐릭터가 어떻게 설정되고 또 투영됐는지의 문제.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 많이 본 영화로 꼽히는 <친구>가 최악의 영화 3위에 오른 것이나, <조폭 마누라>가 최악의 영화 2위에 올랐으면서도, 최고의 여성 캐릭터(여배우) 3위에 오른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최고의 영화로 꼽힌 <고양이를 부탁해>는 “여성의 묘사가 현실적”(66%)이라서, 차점작인 <엽기적인 그녀>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묘사”(52%)됐기 때문에, 여성관객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반면 <썸머타임>은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부각”(84%)했기 때문에, <조폭 마누라>는 “여성의 묘사가 비현실적”(81%)이라서, 최악의 영화들로 꼽혔다. 여성관객영화상 준비위원인 영화평론가 권은선씨는 “<조폭 마누라>나 <엽기적인 그녀>보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최고의 영화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여성주인공의 비중이 낮았던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세 번째로 지지함으로써, 여성관객은 결국 장르적 규칙과 변용에 따른 허구적인 여성 이미지보다는 다양한 여성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과 양태를 성찰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여성 이미지를 좀더 바람직한 여성 재현으로 선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영화 속 여성 이미지, 개선됐다 관객은 한국영화 속 여성의 이미지가 전반적으로 개선됐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이미지가 현실적으로 묘사됐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관객이 66.9%로 많았고, 여성 캐릭터가 좀더 다양화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86.7%가 긍정했다. 여성을 주체적으로 묘사했냐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답한 관객이 60%였다. 특히 캐릭터 한정에 대한 불만은 올해 들어 처음 해소된 것. 하지만 응답자의 63%가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답함에 따라, 여성관객은 한국영화가 여전히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또는 가학의 대상으로 다룬다고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과 관련한 소재로, ‘여성의 솔직한 욕망을 제시하는 영화를 기대한다’(31%)는 답변은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지난해만 해도 대안적 여성상 제시를 바란다는 답변이 우세했다. 전문직 여성, 마녀, 전사처럼 외향적 성취를 강조하는 영화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점차 햐향세를 보이고 있고, 대신 여성의 솔직한 욕망을 제시해주길 바란다는 답변이 늘고 있다. 젊은층이 특히 그렇다”는 것이 준비위원으로 활동한 영화평론가 심영섭씨의 전언이다. 여성관객이 열광한 남성 캐릭터는 한국영화와 외국영화가 미세하긴 하지만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한국영화의 경우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 <번지점프를 하다>의 이병헌, <선물>의 이정재 등이 수위에 올랐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여성에게 헌신하는 순애보적 인물이라는 것. 하지만 해외영화에서는 <슈렉>의 슈렉, <왓 위민 원트>의 멜 깁슨,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콜린 퍼스가 상위에 랭크돼 있다. 이들은 여성의 외모에 대한 편견이 없고 권위적이지 않은, 진보적인 남성상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다. 대중영화의 발전을 일구는 것은 관객이고, 또 그 관객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번 여성관객영화상 결과는 올해 국내외 개봉작에 대해 절반의 관객이 전하는 사랑과 응원, 질책과 경고의 목소리다. 올해 영화 속에서 참 많은 여성들과 만났지만 그 만남이 모두 유쾌하진 않았던 모양. 이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땅한 답사를 들려주길, 모두가 바라고 있다. 박은영 설문조사결과 최고의 한국영화 가장 많이 본 한국영화 1위 <고양이를 부탁해> 1위 <친구> 2위 <엽기적인 그녀> 2위 <엽기적인 그녀> 3위 <와이키키 브라더스> 3위 <번지점프를 하다> 4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5위 <선물> 최고의 외국영화 가장 재밌게 본 한국영화 1위 <브리짓 존스의 일기> 1위 <엽기적인 그녀> 2위 <아멜리에> 2위 <번지점프를 하다> 3위 <초콜렛> 3위 <친구> 4위 <파이란> 5위 <와이키키 브라더스> 최악의 한국영화 가장 많이본 외국영화 1위 <썸머타임> 1위 <슈렉> 2위 <조폭 마누라> 2위 <왓 위민 원트> 3위 <친구> 3위 <브리짓 존스의 일기> 4위 <미스 에이전트> 5위 <치킨 런> 최악의 외국영화 가장 재밌게 본 외국영화 1위 <나는 네가 지난 13일 금요일 밤에 한일을 알고 있다.> 1위 <슈렉> 2위 <브리짓 존스의 일기> 2위 <일곱가지 유혹> 3위 <아멜리에> 3위 <오리지날 씬> 4위 <진주만> 5위 <왓 위민 원트> 한국영화 속 주체적인 여성상 영화에 관한 정보를 얻는 곳 1위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1위 인터넷, PC통신 2위 <고양이를 부탁해>의 배두나 2위 TV, 라디오 3위 <조폭 마누라>의 신은경 3위 영화, 잡지 한국영화 속 주체적인 남성상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 1위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 1위 내용 2위 <번지점프를 하다>의 이병헌 2위 영화평 3위 <선물>의 이정재 3위 주위 사람 외국영화 속 주체적인 여성상 영화 관람 빈도 1위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르네 젤웨거 1위 1~2회/1달 2위 <아멜리에>의 오드리 토투 2위 3~4회이상/1달 3위 <초콜렛>의 줄리엣 비노쉬 3위 6~11회/1년 외국영화 속 주체적인 남성상 여성으로서 영화로 선택하고 싶은 소재 1위 <슈렉>의 슈렉 1위 여성의 솔직한 욕망 2위 <왓 위민 원트>의 멜 깁슨 2위 대안적인 여성상 제시 3위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콜린 퍼스 ,<진주만>의 벤 애플렉 3위 여성간의 관계 올해 관람 편수 (비디오 포함) 한국 영화 1위 7~12편, 2위 6편 이하 , 3위 13~24편 외국 영화 1위 6편이하,2위 7~12편, 3위 13~24편

황홀한 첫 경험의 추억이여! <끝없는 사랑>

2001년, 영화가 없었다면 이 팍팍한 시간들을 어떻게 참을 수 있었을까? 올해 나는 입버릇처럼, 내가 걸어온 인생길 속에서 내 자신이 실제로 <친구>의 ‘상택’이 같은 고교 시절을 거쳐, 서울로 유학와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 같은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봄날은 간다>의 ‘상우’ 같은 사랑의 열병을 앓았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조소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그건 100퍼센트 진실이다. 극장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스크린 속 영상과 내가 하나되는 즐거움,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를 이렇게 영화의 바다로 뛰어들게 만든, 이렇게 지칠 줄 모르게 영화를 보게 한 그 마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마치 <원더풀 라이프>의 행복했던 순간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처럼 내 감성을 자극한 최초의 영화를 찾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녹화를 하루 앞두고 밤새 미싱 돌리듯 방송분량의 영화를 편집하다 섬광처럼 스치는 한 장면을 잡아낼 수 있었다. 앗! 그건 바로 내가 처음 본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였다. 그랬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할리우드 키드요, 나 스스로를 가리켜 시네마 천국의 토토라고 말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고향은 이제 가히 영도(映都)라고 할 만한 부산인데다 우리 아버지는 영사기사이셨던 것이다. 당시 친구들은 아버지가 극장에 있다고 하면 공짜로 영화 볼 수 있어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시사회가 없던 그 시절 공짜영화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나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아이들도 많았다. 실제로 나는 고교 시절까지 거의 안 본 영화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금기가 있었으니 모든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들은 접근금지였다. 오히려 몰래 보는 아이들보다도 사정이 더 안 좋았다.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극장가에 좌악 깔려 있는 상태에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들은 내겐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엄격한 단속에도 허점은 있는 법. 내가 혈기 왕성한 중3이었던 시절, 부산에 나름대로 깔끔한 동시상영관이 생겼고 드디어 소심한 나에게도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갈 용기가 생겼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중 내 황홀한 첫 경험의 상대로 나는 브룩 실즈를 선택했다. 그 영화가 바로 <끝없는 사랑>이며 그뒤로 지금까지 영화 제목처럼 나에게 ‘엔드리스 러브’가 된 것은 물론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열병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열병의 근원은 까까머리 중학생에겐 너무 부담스러운 브룩 실즈의 육감적인 미모도, 라이오넬 리치와 다이아나 로스가 부르던 감미로운 주제곡도 아니었다. 까까머리 소년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영웅이 되기 위해 여자의 집에 불을 지르던 남자 주인공의 심정이었다. 사랑에 대한 깨달음…. 그토록 TV 연속극을 열심히 봐도 다른 세상 얘기만 같던 남녀간의 사랑의 실체가 이런 것이구나, 또한 그것은 사람을 무모하게 만들기도 또 그 무모함으로 인해 완전히 인생을 망칠 수도 있을 만큼 강렬한 것이구나 하는 사실…. 그렇다. 영화 한편으로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랑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이다. 나도 제대로 한번 사랑에 빠지면 저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하지만 봄날은 그렇게 갔다. 이미 두 딸의 아빠가 된 나에게 <끝없는 사랑> 같은 사랑은 영화 속에만 있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끝없는 사랑>의 경험은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아니라 사랑으로 기억되는 (중3 때까지의 내가 습득해왔던 인생에 대한 그리고 영화에 대한) 가치들이 전복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당시 동기놈들 중 누군들 내 앞에서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까? 스스로 많은 영화들을 보았다고 자부했지만 그때까지 내가 볼 수 있었던 영화들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취권> <소림사> 등 이연걸과 성룡의 쿵후영화들, 혹은 <죠스> <레이더스> 같은 초기 블록버스터들,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단체 관람용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영화역사는 <끝없는 사랑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끝없는 사랑>이라는 영화를 만나기 전에는 영화를 본 뒤 내가 본 것들을 흉내내려 든 적은 있어도 내가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주인공의 갈등에 대해 고민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끝없는 사랑>은 나에겐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데미안의 고통을 맛보게 한 셈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영화 <끝없는 사랑>은 나에게 분명 영화에서 일상을 발견케 해준 고마운 영화다. 나는 영화 속의 판타지와 일상을 모두 사랑한다. 언젠가는 ‘트레저 헌터’가 되어 아프리카를 떠돌 꿈을 꾸고 있지만 지금 당장은 2002년엔 내가 또 어떤 영화, 어떤 인물 속으로 빠져들게 될지가 궁금하다.

시나리오 공모전 유감

무슨 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시나리오 공모에도 많은 낙수가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심사결과나 입선작과 관련된 내용만 발표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몇년 동안 <씨네21> 시나리오 공모와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를 진행하면서 겪은 일 중에는 묻어두기 아까운 게 좀 있다. 몇해 전 <씨네21> 시나리오 공모 마감날, 쉰을 훌쩍 넘긴 듯한 아저씨가 고운 분홍색 보자기를 들고 나타났다. 큼직한 이 보자기 속에는 볼펜으로 꼭꼭 눌러 쓴 200자 원고지 묶음이 들어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 원고지의 높이가 두 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청년도 있었다. 이 청년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전화했는데, 담당자를 만나서 직접 전달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길이 많이 막혀 늦었다는 변명과 함께 청년이 도착한 것은 밤 10시쯤. 그는 여수에서 왔는데 돌아갈 차비가 모자란다며 2만원을 꿔갔고, 지금까지도 나는 그 돈을 돌려받은 기억이 없다. ‘잡범’들도 많다. 봉투 안에 디스켓만 달랑 넣어 보낸 사람도 있고, 시나리오 접수하러 와서 귀빈 대접을 요구하는 무뢰한도 있고, 접수 절차가 너무 간단하다며 신경질을 내고 간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 심부름 왔으니까 접수했다는 확인서 써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한 학생은 프린트할 곳이 없다며 프린트를 부탁해놓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바람에 졸지에 프린트한 시나리오를 묶어서 대신 접수까지 해준 적도 있다. 기막힌 일 한 가지 더. 마감날에 찾아와서는 한달 전에 접수했는데 몇 군데 고쳐야 하니까 자기 시나리오 찾아달라고 울먹이던 한 여고생이 있었다. 몇백편을 다 뒤져서 겨우 찾아줬더니, 쓱 훑어보고는 천연덕스럽게 하는 말이 ‘안 고쳐도 되겠다!’. 이런저런 친분과 인연으로, 이번에 처음 열린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와 출판사 실천문학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인터넷 신춘문예의 시나리오 부문 공모 운영과 심사를 맡았다. 이번 공모는 인터넷으로만 접수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뒷이야기는 별로 없었지만 심사를 하면서 몇 가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먼저 의외로 맞춤법이나 표기법을 틀린 경우가 너무 많고, 시나리오를 읽기 좋고 보기 좋게 편집하는 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더라는 것이다. 영화로 만들어져야 본디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 시나리오의 ‘운명’이라면, 특히 공모전에서는 보는 사람들의 눈에 들도록 하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응모작들을 읽다보면 사투리나 은어, 속어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쓴 것도 아닌데, 단순 실수로 보기 어려운 오자, 탈자, 오기가 심심찮게 눈이 띄고, 심지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낱말을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뜻만 통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글을 쓰는 태도와 자세가 치열해야 하는 것은 작품의 완성도에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주최쪽에서 제시한 요강을 전혀 지키지 않고, 다른 공모전에 냈던 작품을 그대로 다시 내는 예의없는 응모자들도 거슬렸다. 기획의도, 시놉시스, 주요 등장인물 소개를 따로 붙이라는 공지에도 불구하고 본문만 달랑 내거나, 이미 냈다가 떨어진 무슨 공모 응모작이라는 타이틀을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낸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귀띔하자면 부쩍 공모전도 많아졌는데, 다른 공모전에서 떨어진 작품을 낼 때는 적어도 제목이라도 바꿔서 내는 것이 예의 이전에 입선 가능성을 높이는 요령이라는 것이다.

야심찬 여왕, 그 위험한 불꽃, <디 아워스>의 니콜 키드먼

카바레 물랭루주를 엑스터시로 출렁이게 한 오펜바흐의 <천국과 지옥> 서곡은, 니콜 키드먼(35)의 2001년 주제곡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10년을 동반한 톰 크루즈와의 결별, 소송과 유산(流産)으로 어질러진 그녀의 거실은 지옥이었지만, <디 아더스>와 <물랑루즈>로 이어진 은막의 삶은 한없이 천국에 가까웠다. 11살 때부터 텅 빈 극장의 연기 연습으로 고독과 열등감을 해소해온 니콜 키드먼에게, 상상을 통해 더 강인한 존재로 거듭나는 일은 익숙한 치유법이었으리라. 무거운 커튼으로 잿빛 정적을 가둔 실내를 맥베스 부인처럼 거니는 <디 아더스>의 그레이스와 100만 와트의 빛을 스스로 발하는 <물랑루즈>의 새틴. 두 여자 사이에 놓인 깊은 간극을, 본인의 표현대로 “10년만에 마음놓고 하이힐을 신을 수 있게”된 니콜 키드먼은 사뿐히 건너뛰었다. 한 사람의 스타를 십수년쯤 보고 있자면, 그를 둘러싼 웅성거림 가운데 어떤 말은 바람과 비에 깎여 사라지고, 어떤 말은 완고하게 남는다. 니콜 키드먼에 관해 점점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면 가톨릭인 그녀가 일에 관해서만큼은 독실한 청교도라는 점이다. 해리 포터의 깍쟁이 친구 헤르미온느처럼 친구들의 대사까지 모조리 외워버리는 야무진 꼬마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키드먼은, 요즘도 신작에 들어갈 때마다 개강을 앞둔 여학생처럼 독서 목록을 만든다. 키드먼의 엄격한 절제- 혹은 탐욕- 는 때로 자학의 수위를 넘나든다. 촬영 내내 아예 코르셋을 조이고 생활하다 탈진한 <여인의 초상>, 무릎 연골을 너덜너덜하게 만든 <물랑루즈>, 불면증의 고통을 자처한 <디 아더스>의 무용담은 다 같은 속내를 지닌 일화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최고로 못생긴 여자애”를 보았던 빨강머리 꺽다리 소녀의 초조함으로 여지껏 자신을 채찍질하는 키드먼이지만, 할리우드가 지금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여왕’의 역할인 것처럼 보인다. 세상을 굽어보는 신장과 스포트라이트를 위해 빚어진 듯한 육체, 거기에 ‘격조 높은’ 불행의 향기까지.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클래식 스타들이 두르고 다니던 빛이 난다. 그리고 그건 할리우드가 영원히 목말라하는 광채다. 그러나 니콜 키드먼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아름다운 여왕이기보다 강한 보스가 되는 편을 택할 야심가다. 하물며 <디 아더스>의 저택만큼이나 많은 방을 가진 배우혼을 막 탐험하기 시작한 지금에야. 자신이 품은 불꽃의 열기와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니콜 키드먼은, 새 하인을 맞은 엄격한 안주인 그레이스가 그랬듯, 스스로를 차갑게 타이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열었던 하나의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는 또다른 문을 열지 말라고. <디 아더스>는 관객에게 공포와 충격을 주는 영화다. 객석의 반응을 즐겼나? 그처럼 극적인 반응은 처음이었다. 나 역시 배우로서나 관객으로서나 심리 스릴러를 즐긴다. 단순히 유혈을 보여주기보다는 관객을 뒤흔들어놓는 게 좋다. 그레이스는 복잡한 캐릭터다. 강한 사랑을 품고 있으나 표현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1945년이라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겠다. 그녀의 아이들이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환자라는 사실도 무관하지 않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레이스의 애정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박적인 사랑으로 변질된다. 또다른 이유는 남편이 떠난 것, 아니 그녀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레이스가 되기 위해 어떻게 준비했나. 그녀를 진정 느끼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가 되기 위해서 내 자신을 그레이스의 구두 속으로 밀어넣어야 했다. 내가 했던 일 중 하나는 자신으로부터 잠을 빼앗는 것이었다. 영화 제작기간 내내 매일 4시간 이하로 잠을 줄인 덕분에 심리상태가 매우 예민하고 약해졌다. 마치 그레이스처럼. 감독으로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에 대해 말해달라. 아메나바르는 정말 예측불허다. 그는 우리의 피부 밑으로 기어들어와 휘저어놓는다. 그것은 쇼크 이상이다. 아메나바르의 전작 <오픈 유어 아이즈>는 ‘모던한’ 스릴러였고 <디 아더스>는 ‘클래식’ 스릴러다. 그는 <디 아더스>를 약간은 동화적인 말머리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꽝! 이 영화의 처음은 종말의 서두라 할 만하다. 대단하다. 가족에 대해 말해달라 나는 부모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대의 공포는 두분을 잃는 일이다. 두분은 내게 언제나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제 집에 좀 와라”라고 말씀하신다. 부모님은 내가 땅에 발을 붙일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힘이다. 여가를 어떻게 보내나. 나는 면허를 따기 위해 헬리콥터 조종을 연습해왔다. 비행의 센세이션을 사랑한다. 모든 컨트롤을 벗어난 듯하고 꿈을 꾸는 것과도 비슷하다. (웃음) 나는 몽상가인데다 가능할 때마다 잠자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일없이 백사장에 앉아서 시간 보내는 것은 싫다. 차기 프로젝트는. 알려졌듯이 라스 폰 트리에의 새 영화 <도그빌>에 출연한다. 그와 일할 수 있다니, 흥분된다. 심오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유희를 벌이고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그의 방식을 좋아한다. <도그빌>은 세트에서 인공광으로 조명을 밝히며 ‘안티 도그마’ 스타일로 촬영할 예정이다. 제인 캠피온과도 계속 신작을 협의중이다. 아마도 에밀리 디킨슨이나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바는 없다. 그 프로젝트에서는 내 구실은 제작자다. 출연도 할 수 있지만 여부는 전적으로 작품을 위한 최선이 무엇이냐에 달렸다. (이상 인터뷰는 수입사 미로비전을 통해 2001년 9월6일 마드리드에서 진행된 <디 아더스> 정켓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두사부일체> 제작부장 정성일

별로 어렵지 않은 문제니 한번 풀어보자. 엑스트라(현장에서는 조합원이라 부른다) 한명이 받는 돈은 12시간에 3만5천원, 6시간이 초과될 때마다 1만5천원씩 추가 지급된다. 촬영에 필요한 엑스트라의 수가 30명, 그중 10명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나머지 20명은 그뒤 24시간 대기 예정이다. 조합비의 간단한(!) 계산이 끝났다면 나머지는 제작부장 정성일(34)에게 맡기자. 특수장비인 조명 크레인과 지미집(크레인의 일종), 그리고 소품으로서의 버스 한대의 렌털비 계산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다. 야식비와 담뱃값을 포함한 각종 잡비, 스탭들의 하루 식대까지 차례로 기입된 예산안이 만들어지면 제작자의 데스크에 올릴 차례다. 정성일의 일이 더욱 바빠지는 순간이다. 제작자와 투자자의 심사를 거쳐 경리부에서 돈이 지급되면 이제 몸이 고달플 차례. 지난번에는 차량 렌털업체만 믿고 있다가 색상과 디자인이 완전히 틀린 버스를 받고서 부랴부랴 뒷수습을 한 그는 꼼꼼히 장비와 인원을 점검해나간다. 어느새 주문품(?)들이 제자리를 찾아 현장에 속속 들어앉지만 구경꾼 단속하랴, 담배 심부름하랴, 쓰레기 주우랴, 배우들 간식 챙기랴 잠시도 쉴 틈이 없다. 간혹 밑에 있는 동생들이 “우리가 담배 심부름에 쓰레기까지 치워야 하냐”고 따져 물으면 “스탭과 배우는 손님”이라고 딱 자른다. 그에게 제작부의 위치란 엄마 혹은 하숙집 아줌마, 더 나쁘게 말하면 파출부와 같은 존재다. 집에 묵는 손님들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 불편없이 챙겨주는 엄마의 마음으로 “최대한 봉사하자”는 게 정성일의 업무지론인 셈. 영화판에 몸을 담은 게 올해로 8년째라지만 그의 제작부장 이력은 고작 <두사부일체>가 전부다. <테러리스트>로 시작해 <쉬리>와 <자카르타>로 끝나는, 10여편이 넘는 필모그래피 옆에는 스틸 작가라는 전혀 의외의 직함이 새겨져 있다. 어찌된 노릇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내공 이력이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진 하던 선배에게 기술을 배워 웨딩사진 등을 찍다가 우연히 <테러리스트>의 스틸 작업을 맡게 됐다고. 워낙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유들유들한 성격이었던 정성일은 북적대는 영화판의 매력에 처음부터 빠져들었다. 수습 시절을 거쳐 <남자이야기>로 입봉한 뒤에도 제작부 일에 대한 유혹이 끊이지 않았단다. 제작부 경력만 18년인 시네마 제니스 김두찬 대표 역시 정성일의 숨은 끼를 느꼈던지 “넌, 임마 제작부쪽이 딱인데…”라며 틈만 나면 권유하더니 결국 <두사부일체>의 제작부장 자리에 앉히고야 말았다. 돌이켜보면 스틸을 찍으며 스탭들 틈에 엉켜 가장 밑바닥의 고민과 불만을 공유한 점이 제작부 생활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누가 어떤 표정만 지어도 어디가 아픈지 아는 엄마의 노련함을 배운 지난 8년이었다. 제작부 일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는 3년 뒤쯤에 그는 다시 카메라를 잡을 예정이다. 하루종일 현장에 붙어 있어도 쓸 만한 사진 몇장 못 건지는 현재의 스틸 작업의 맹점을 극복하고 “스틸=홍보”의 도식에 꼭 맞는 그런 사진을 찍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제작부장이나 스틸 작가가 아닌 영화쟁이로서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글 심지현 simssisi@freechal.com·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프로필 68년생 <테러리스트> <런어웨이> <귀천도> <학생부군신위> <미스터 콘돔> <남자이야기> <조용한 가족> <마리아와 여인숙> <할렐루야> <주노명 베이커리> <쉬리> <자카르타> 스틸 <두사부일체> 제작부장 현재 곽지균 감독의 신작 준비중 제니스 엔터테인먼트(시네마 제니스) 소속

<내일을 향해 쏴라> <아메리칸 뷰티>의 콘래드 홀

한편의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건 사각의 스크린에서 훌훌 벗어나 관객의 마음에 무한히 각인되는 영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969년 당시 서부영화 흥행사상 최고 수입인 2900만달러라는 기록(이 기록은 21년 뒤인 <늑대와 춤을>이 갱신하기까지 이어졌다)을 세우며 순식간에 주연인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퍼드를 할리우드의 영웅으로 등극시키는 위력을 발휘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의 한 장면 또한 예외일 수 없다. B. J. 토머스의 감미로운 가 흐르는 가운데 폴 뉴먼과 캐서린 로스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서정적인 영상은 지난 시절의 영화를 오늘에 되살리는 묘약으로 기능한다. 뉴스영화를 연상시키는 세피아톤의 화면 안에서 미국 중서부 시대는 완벽히 재창조되었으며, 확 트인 조망과 어우러진 정확한 초점은 두 무법자의 황폐한 삶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작은 기술의 변화로 이야기를 한층 강화시키는 촬영감독 콘래드 홀의 움직임은 마지막 순간 탄환 속으로 질주하는 두 주인공의 죽음에 이르러 예의 주시를 멈추고 고정됨으로써 영화를 하나의 전설로 끌어올리기에 이른다. 안정감 있는 촬영으로 인물의 심리를 포착해내는 데 주력해온 콘래드 홀은 1956년 촬영을 시작한 이래 50여년을 카메라와 함께한 촬영계의 달인이다. 1926년 타히티 태생인 홀은 작가인 아버지 제임스 노먼 홀의 영향으로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이후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던 그가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형편없는 실력으로 전공에는 통 흥미를 갖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단순한 흥미에서 시작되었다지만 영화로 전공을 바꾸면서 동료들과 함께 실험영화를 찍었으며, 미국촬영가협회에서 최초로 촬영 장학금을 받는 실력을 발휘한다. 졸업 뒤, 동료들과 독립영화 작업을 하던 홀은 TV시리즈 로 촬영감독에 데뷔하였으며, <엣지 오브 퓨리>(1958), <인큐버스>(1965)와 같은 저예산영화를 작업하면서 촬영감독으로 자산이 될 실력을 갖추어나간다. 처음 촬영한 극영화 <와일드 씨드>(1965) 이후 <모리터리>(1965)와 (1966), <인 콜드 블러드>(1967)로 연속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되면서 빠르게 할리우드의 주류 촬영감독으로 인정받은 홀은 한때, 10년간의 공백기를 갖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하스켈 웩슬러와 광고회사를 경영하였으며,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하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실제 그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각색하기도 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들추어보면 73살의 나이에 촬영한 <아메리칸 뷰티>가 번쩍 눈에 띤다. <내일을 향해 쏴라>에 이은 두 번째 오스카상 수상작인 이 작품의 성공은, 1994년에 이미 그가 경력이 황혼에 접어든 베테랑 촬영감독에게 주어진다는 미국촬영가협회의 평생공로상을 수상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들지 않는 촬영에 대한 열의와 연륜으로 이루어진 노장의 렌즈는 이 영화로 감독에 데뷔하는 신참 샘 멘데스를 뒷받침해줄 훌륭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좋은 작품이라는 판단이 있었기에 보수는 개의치 않았으며, <위대한 승부>에서 스티브 자일리언 감독과 함께했던 것처럼 첫 작품을 연출하는 감독과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에게 주위의 평판이나 성공에 대한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새로움을 향한 도전이다. 그간 여러 편의 영화에서 섬세한 어둠의 이미지를 포착해낸 홀의 시선은 이 한편의 영화를 그려내는 데 집약된다. 미국 중산층을 관통하는 어둡고 그늘진 이미지는 내부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와 대비되어 긴장을 고조시켜주며 재조명되었다. 자신 앞에 펼쳐진 빈 백지를 채워나가는 심정으로 홀은 기술을 손끝에 담아 스크린에 차곡차곡 영상화시켜나간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촬영 또한 감정을 담아내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의미에서의 기술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바로 ‘어떻게’가 아닌 ‘왜’ 이 장면을 찍는지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칠 줄 모르는 저력을 가진 촬영감독으로 홀은 이렇게 충고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진 면모를 그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단지 기술적인 면에서뿐만이 아니라, 좀더 명석하고 훌륭한 인격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이것이 작품을 꾸준히 살아 있게 만드는 비결이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Conrad Hall 필모그래피 <더 로드 투 퍼디션>(The Road to Perdition, 2001) 샘 멘데스 감독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1999) 샘 멘데스 감독 <시빌 액션>(A Civil Action, 1998) 스티븐 자일리언 감독 <톰 크루즈의 위다웃 리밋>(Without Limits, 1998) 로버트 타운 감독 <러브 어페어>(Love Affair, 1994) 글렌 고든 캐런 감독 <위대한 승부>(Searching for Bobby Fischer, 1993) 스티븐 자일리언 감독 <제니퍼 연쇄 살인 사건>(Jennifer Eight, 1992) 브루스 로빈슨 감독 <집단 소송>(Class Action, 1991) 마이클 앱티드 감독 <불타는 태양>(Tequila Sunrise, 1988) 로버트 타운 감독 <블랙 위도우>(Black Widow, 1986) 밥 라펠슨 감독 <마라톤 맨>(Marathon Man, 1976) 존 슐레진저 감독 <스마일>(Smile, 1975) 마이클 리치 감독 <부서진 세월>(The Day of the Locust, 1975) 존 슐레진저 감독 <캣치 마이 소울>(Catch My Soul, 1974) 패트릭 맥구한 감독 <일렉트라 글라이드 인 블루>(Electra Glide in Blue, 1973) 제임스 윌리엄 구에르치오 감독 <팻 시티>(Fat City, 1972) 죤 휴스톤 감독 <해피엔딩>(The Happy Ending, 1969) 리처드 브룩 감독 <트릴로지>(Trilogy, 1969) 프랭크 페리 감독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 조지 로이 힐 감독 <헬 인 더 퍼시픽>(Hell in the Pacific, 1968) 존 부어맨 감독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 1967) 리차드 브룩스 감독 <폭력 탈옥>(Cool Hand Luke, 1967) 스튜어트 로젠버그 감독 (The Professionals, 1966) 리처드 브룩스 감독 <하퍼>(Harper, 1966) 잭 스마트 감독 <인큐버스>(Incubus, 1965) 레슬리 스티벤스 감독 <모리터리>(Morituri, 1965) 베른하드 위키 감독 <와일드 씨드>(Wild Seed, 1965) 브라이언 휴톤 감독 <더 아웃터 리미트>(The Outer Limits, 1963) 레온 벤손 감독 외 <엣지 오브 퓨리>(Edge of Fury, 1958) 로버트 거니 주니어 감독 외

권교정의 <올웨이즈>

결국 문제는 이야기다. 연이은 술자리에서 요즘 도대체 어떤 만화를 보아야 되는가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나서 얻은 결론이다. 재미있는 만화의 핵심은 이야기에 있다는 말이다. 만화가 스타일이 되고, 캐릭터가 기호가 되면서 이야기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편집자와 작가는 독자들의 1차적 반응, “캐릭터가 열라 예뻐여!”라는 환호에만 관심을 갖는다. 새로운 만화를 연재하려 할 때, 시놉시스의 충실성을 검토하기보다 컬러로 멋지게 그려진 캐릭터의 뽀시시함을 확인한다. 확인된 수치가 데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잘생긴 미남 배우를 캐스팅하듯 그렇게 캐릭터를 선택한다. 결국 미소년, 미소녀들이 지면을 장악하게 되었다. 나는 미소년이 좋다는 식의 언술만이 힘을 얻고, 이야기는 미소년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장치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이야기를 잊게 되었고, 잃어버리게 되었다. 미소년을 돋보이게 하는 것도, 미소년의 두근거림에 동참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이야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꽃배경이 흩날려도, 강한 카리스마를 강조해도 이야기가 힘을 잃고 나니 미소년도 무미건조해질 뿐이었다. 독자들은 점점 만화를 외면했고 만화는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페이지마다 애드리브를 질펀하게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사라진 상처는 처참했다. 오스칼(<베르사이유의 장미>), 카즈야와 미츠루와 시노부(<여기는 그린우드>), 미스터 블랙(<굳바이 미스터 블랙>), 유리핀 멤피스(<북해의 별>), 레디온(<별빛속에>)과 같은 꽃미남(녀)들이 단지 외형적 디자인만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힘을 얻었다는 당연한 진리를 잊고 살았던 대가는 처참했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승승장구하며 한국만화의 대안으로까지 불리던 순정만화는 한해를 결산하는 만화를 골라내기도 힘겨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야기의 힘을 아는 작가 <올웨이즈>의 작가 권교정은 이야기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작가다.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에 대한 문제에 접근한 <헬무트>나 SF라는 시공간 속에서 시간 속에서 불멸하는 주인공과 그리고 고립된 우주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을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그려낸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에 기초한 학원물 <어색해도 괜찮아> <정말로 진짜!>의 공통점은 이야기가 읽힌다는 점이다. <올웨이즈>는 작가 스스로 ‘F물’이라 명명한 장르의 만화다. 꽃미남들의 정신적·육체적 사랑을 그린 야오이 만화를 지칭하는 ‘Y물’과의 의식적인 거리두기를 위해 고안된 장르명이다. 요컨대 멋진 두 남자 친구의 돈독한 우정은 있지만 끈끈한 애정고백이나 육체적 관계는 없다는 말이다. 간혹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묘한 감정의 묘사나 얼굴 붉어짐, 가슴 두근거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그만이다. <올웨이즈>는 멋진 남자 고등학생 안기현, 이태경이 처음 만나 서로에게 끌리고, 일상 속에서 친해진다는 이야기를 그린 만화다. 분량도 1권에 불과하다. 서로 부딪쳐 상처나기, 비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가기, 서로 얼굴 바라보고 부끄러워지기 같은 익숙한 컨벤션이 등장하지만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의 취향과 해석에 따라 <올웨이즈>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서로에게 끌리고 친구가 되어가는 일상의 우정을 다룬 만화가 되기도 하고, 미묘한 동성애만화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남자들의 우정, 사랑보다 아름다운 전자거나 후자이거나 이 만화의 힘은 멋진 두 주인공 안기현과 이태경의 매력에서 찾을 수 있을 텐데, 작가는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한 어떤 잔재주도 부리지 않는다. 꽃이나 독특한 문양 따위로 주인공의 뒷배경을 메꾸거나 아니면 몇개의 칸을 가로질러 주인공이 등장할 법도 하지만 주인공들은 칸 속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데만 열중한다. 그 이야기도 대개가 일상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것들로 억지로 만들어낸 가공의 냄새가 없다. 만화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각각 다른 성격의 두 인물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친해지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보면 캐릭터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고, 그들의 고민도 나눌 수 있다. 디지털 서사라는 낯선 담론이 등장하고 있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서사가 힘을 얻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가 작품과 나를 이어주기 때문이다. 한없이 얇아진 이야기의 무게, 그래서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처럼 나약한 이야기의 뼈대에 과도하게 무거워진 캐릭터들과 애드리브와 개그가 얹혀 있다. 이 비극적인 영양결핍의 상태가 오늘 한국만화가 독자들에게 외면받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일 것이다. 다시 문제는 이야기다. 박인하/만화평론가

part2 유운성이 건진 아까운 걸작

섹슈얼 이노센스 The Loss of Sexual Innocence 감독 마이크 피기스 주연 줄리언 샌즈, 새프론 버로즈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크림 마이크 피기스의 영화를 볼 때엔, 조금쯤은 의혹의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뭔가 실험적인 것 같기는 한데 어딘지 모르게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아마 이런 느낌이 가장 덜한 영화는 <브라우닝 버전>이었을 테지만 그건 또 지나치게 평범하고 점잖은 이야기였다. 라틴어를 가르치는 노교사와 그의 어린 제자간의 따뜻한 우정. 짐작건대 스스로의 유년 시절에서 소재를 끌어온 것인 듯한 <섹슈얼 이노센스>는 아예 거의 스토리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이미지들의 흐름을 따라 자유로이 전개되는 영화다. 성적 모험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한편, 아담과 이브의 우화가 지극히 탐미적인 영상을 통해 재구성된다. 결국 신화의 인물들은 점점 현실적 공간으로 이동해오고 현실의 인물들은 너른 사막을 배경으로 한 신화적 공간 속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일디코 엔예디의 <나의 20세기>와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적절히 섞인 듯한 한 쌍둥이의 이야기가 갑자기 개입해 들어오면서 우리를 의아하게 만드는데, 결국엔 하나의 내러티브 안으로 무리없이 통합되는 걸 보면 피기스의 재능이 그래도 범상치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넬리 앤 아르노 Nelly & Monsieur Arnaud 감독 클로드 소테 주연 에마뉘엘 베아르, 미셀 세로, 장 위그 앙글라드 제작연도 1995년 출시사 엠브이넷 영화를 좋아하는 주변의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단 한번도 클로드 소테에 관한 언급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영화는 골수 작가주의 영화광들에게는 영 밋밋한 것일 터이고, 영화란 자고로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썰렁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프랑스영화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본 그의 멜로드라마 몇편은 개인적으론 최고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데이비드 린의 <밀회>, 그리고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 등과 함께 그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내내 줄곧 공감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소테의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낭만주의가 완전히 거세된 모더니즘 이후의 멜로드라마이다. <금지된 사랑>의 주인공 스테판은 사랑이란 없으며 오직 게임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금지된 사랑>처럼 <넬리 앤 아르노>에서도 이른바 비극적 사랑이라는 낭만적 유희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의 도피란 말 그대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것이 된다. 또한 해피엔딩도 비극적 결말도 없으며 오직 관계의 재구성만이 있을 뿐이다. 무언가 놓쳐버린 것, 지나간 것을 아쉬워하지만 결코 크게 동요하지는 않는 인물들을 엄격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소테는 역설적이지만 진정 ‘즐거운 인생’을 느끼게 해주는 감독이다. 혐오 Repulsion 감독 로만 폴란스키 주연 카트린 드뇌브, 이언 헨드리, 존 프레이저 제작연도 1965년 출시사 9FILM 올해 출시된 영화 가운데 가장 반가운 영화. 대학 시절 나로 하여금 감탄을 내뱉게 만들었던 두편의 폴란드영화는 안제이 바이다의 <재와 다이아몬드> 그리고 폴란스키의 <물 속의 칼>이었다. 폴란스키는 초기에 만든 영화들에서 인물들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내몰고는 거기서 묘한 웃음을 끌어내는 재능- 이 점에선 <궁지>가 단연 압권이다- 을 선보였는데, <혐오>는 이런 그가 정색하고 달려들 때 영화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이 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다. 최근작 <나인스 게이트>는 그 강도는 덜하지만 그래도 초반 30분간은 훌륭하다. 원 프롬 더 하트 One from the Heart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주연 프레데릭 포레스트, 테리 가, 나스타샤 킨스키, 라울 줄리아 제작연도 1982년 출시사 파워 오브 무비 발표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영화가 왜 갑자기 출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반가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 시리즈나 <지옥의 묵시록> 정도의 영화를 기대하면서 <원 프롬 더 하트>에 접근한다면 낭패보기 십상이다. 이 영화는 코폴라가 80년대에 만든 자잘한 범작과 실패작들의 첫머리에 놓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돌이켜보면 <아웃사이더>나 <터커> 등은 그리 나쁘진 않다). 오히려 코폴라보다는 음악가 톰 웨이츠의 팬들이 더 반길 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 소주 한두어병 걸치고 나면 나올 목소리로 묘하게 심금을 울리는 웨이츠의 광팬이라면 만사 제치고 봐도 괜찮을 영화. 인페르노 Inferno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 주연 이렌느 미라클, 레이 매클로스키 제작연도 1980년 출시사 빅스 몇몇 사람들이 그토록 무섭다고 말한 <서스페리아> 같은 건 사실 어이가 없다 못해 낄낄거리며 봤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를 보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게 웬만한 코미디영화보다 더 우습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오 바바의 <사탄의 마스크> 같은 영화가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르젠토의 이 영화는 제법 볼 만한 고딕호러 가운데 하나다. 양식화된 세트와 조명- 광원이 무엇이냐 따위는 절대로 묻지 말 것- 을 통해 잔뜩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는 난데없이 잔혹한 난도질을 선보인다. 아나모픽 렌즈를 이용해 촬영한 영상을 그대로 텔레시네하는 바람에 화면이 위아래로 길게 늘어져 보이니 이를 감수하고 볼 것. 치즈케, 블랙커피 No Looking Back 감독 에드워드 번즈 주연 에드워드 번즈, 로렌 홀리, 존 본 조비 제작연도 1998년 출시사 폭스 원제 ‘No Looking Back’을 이렇게 바꿔놓은 이유가 궁금해지는 영화. 여주인공이 식당 웨이트리스라서? 영화를 잘 보다보면 전개방식이 꽤 흥미롭다는 걸 알게 되는데, 처음엔 고향에 돌아온 한 남자의 연애담처럼 보이다가 점점 그의 옛 애인인 여자의 자아발견에 관한 이야기로 옮아가는 것이다. 즉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가 주인공을 달리하는 셈이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소도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다룬 미국영화들이 꽤 재미나게 다가온다. 존 본 조비가 남자 주인공의 친구이자 연적으로 등장한다. 스크리머스 Screamers 감독 크리스천 더과이 주연 피터 웰러, 로이 듀피스 제작연도 1995년 출시사 SKC 우연히 보게 된 B급 공상과학영화. 극중에서 스크리머스란 사람이 가까이 가면 갑자기 튀어올라 공격을 가하는 무시무시한 대인지뢰의 이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기계장치가 자가 진화를 거듭하여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외양을 갖추게 됨으로써 인간들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 특히 주인공이 소년의 모습을 한 변종 스크리머스를 만나게 되는 장면은 정말이지 섬뜩하기 짝이 없다. 사실 영화가 지닌 흥미의 대부분은 원작소설에서 연유한 듯한데 원작은 필립 K. 딕-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자- 의 단편 <두 번째 변종>으로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에디 머피의 라이프 Life 감독 테드 드미 주연 에디 머피, 마틴 로렌스, 네드 비티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콜럼비아 여기서 같이 소개하는 에드워드 번즈의 <치즈케, 블랙커피>가 마음에 든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훨씬 매력적인 테드 드미의 <뷰티풀 걸> 또한 반드시 한번 보기를 권한다. 재미로 따지자면 <라이프>는 <뷰티풀 걸>에 한참 못 미친다. 다만 여타의 영화들에서 엄청나게 빠른 수다로 우리의 넋을 빼놓았던 두 흑인배우가 여기선 적절한 수준에 머물면서 제법 연기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서 제목 <라이프>는 두 주인공의 인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극중의 그들이 처한 상황 즉 ‘종신형’을 지칭하는 것. 뛰는 백수 나는 건달 Office Space 감독 마이크 저지 주연 론 리빙스톤, 제니퍼 애니스톤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폭스 정말이지 제목 죽이는 영화다(새삼 출시사들의 유머에 감탄하는 바이다). 이것도 제목이 하도 괴상해서 호기심에 빌려본 비디오 가운데 하나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영화는 <비비스와 버트헤드>로 이미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크 저지가 만든 극영화이다. 여기서 마이크 저지는 다분히 상황에 기댄 유머를 선보인다. 흡사 만화책의 컷 구성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까. 굉장히 느린 페이스의 영화인데 어느 순간(약간은 어이없어서이기도 하지만) 폭소를 터지게 하는 힘이 있다. 직장생활에 지친 이들을 위한 영화판 ‘무대리’. 철십자 훈장 Cross of Iron 감독 샘 페킨파 주연 제임스 코번, 맥시밀리언 셸, 제임스 메이슨 제작연도 1976년 출시사 영화랑 물론 이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되기도 했고 오래 전에 비디오로 출시까지 되어 잘 알려진 영화다. 하지만 굳이 여기서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철십자 훈장>이 올해 새로 출시된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쯤 다시 한번 페킨파의 영화들을 되씹어볼 것을 권유하기 위해서이다. 페킨파의 영화는 <고원을 달려라>와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등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출시되어 있다. <메이져 던디> <와일드 번치> <어둠의 표적> <게터웨이> <관계의 종말> <가르시아> <킬러 엘리트> 그리고 <오스타맨>까지(모두가 출시된 지 상당기간 지난 것들이라 미처 리스트에 포함시키지 못한 영화들임). 유운성/ 영화평론가▶ part1 김봉석이 뽑은 B급영화 ▶ part2 유운성이 건진 아까운 걸작 ▶ part3 손원평이 사랑하는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