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 검색결과

기사/뉴스(2003)

아동 판타지의 핵심에 다가간 <피터팬> [5]

동화 판타지의 비극까지 직시하다 감독 P.J. 호건 빈사의 팅커벨을 관객의 박수로 살려내는 연극의 명장면은 영화 <피터팬>에도 남아 있다. 다만 영화는 객석의 박수를 “나는 요정을 믿어!”(I do believe in fairies)라고 곳곳에서 독백하는 사람들의 몽타주로 대체한다. 온 세상 아이와 어른이 환희의 미열에 들떠 “아이 두!”의 후렴을 거듭 외친다. 마치 주례 앞에 선 <뮤리엘의 웨딩>의 토니 콜레트처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카메론 디아즈인 양 복숭앗빛 홍조를 만면에 떠올리고. 지금 와서는 P. J. 호건 감독의 ‘I do 3부작’이라고 묶어도 그럴싸하지만, 결혼식이 등장하는 코미디 두편으로 주목받은 감독을 대규모 예산의 실사영화 <피터팬>의 감독으로 낙점한 것은 약간의 상상력을 요하는 결정으로 보인다. 소니 스튜디오를 떠나면서 <피터팬> 기획을 지참금 삼아 들고 나온 제작자 루시 피셔는 자신의 <피터팬>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판을 갱신한 실사판도 아니고 〈101마리의 달마시안〉을 실사로 가공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과제임을 숙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피터팬>은 ‘완역판’이어야 했다. 이는 원작의 대사를 한줄씩 옮긴다는 뜻이 아니라 희곡과 소설, 원작자 J. M. 배리의 삶을 이해하고 원작을 ‘독해’하는 영화가 돼야 한다는 의미였다. 팀 버튼이나 알폰소 쿠아론에 비하면 엉뚱한 인선으로 보이지만, P. J. 호건은 제작자에게 여러모로 현실적인 답이었다. 장르와 캐릭터의 원형을 이해하되 복제하지 않고, 체질적으로 희비극에 능하며, 감동을 끌어안으면서도 도피주의 판타지로 쏠릴 위험을 근심하지 않아도 좋은 감독, 그것이 제작자 피셔가 이해한 P.J. 호건이었다. <크로커다일 던디>의 폴 호건과 아무런 혈연, 친연이 없다는 점을 한사코 강조하는 폴 존 호건(44)은, 호주 휴양도시 골드 코스트에서 자랐다. <뮤리엘의 웨딩>에 나오는 퍼포이즈 스핏을 닮은 그곳은 소년 호건에게 스쳐가거나 떠나가라고 만들어놓은 듯한 지겨운 도시였다. 일광욕이나 드라이브가 정상적 인간 활동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머리 쓰는 놀이를 선호한 말라깽이 호건은 괴짜로 통했다. 장성한 호건은 언론사에 취직했으나 취재원의 말을 윤색했다는 비난을 받고 (순리에 따라) 픽션에 눈을 돌렸다. 카메라 근처에 얼쩡거려 본 적도 없는 그는 순전히 스크립트 쓰는 실력으로 호주 영화 텔레비전 학교의 입학허가를 받아냈다. 영화학교에서 만난 아내 조슬린 무어하우스(<프루프> <아메리칸 퀼트>의 감독)와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뮤리엘이 결혼을 꿈꾸듯 간절히 영화를 꿈꾸었다. 잘 풀리지 않는 시절을 거쳐 1994년 발표한 300만달러 예산의 영화 <뮤리엘의 웨딩>은 <피아노> <댄싱 히어로>와 더불어 90년대 초 호주영화의 간판스타가 됐다. 이어 할리우드에 초빙돼 연출한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1997년 여름 시즌의 슬리퍼 히트였다. 물론 P. J. 호건은 <콘택트>의 마이클 골든버그가 쓴 <피터팬>의 시나리오 초고에 코미디를 가미했고, 영원한 소년의 신화 뒤에 가려진 소녀의 러브스토리를 끌어냈다. 그러나 국내에 알려진 전작 <뮤리엘의 웨딩>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피터팬>에 새긴 감독 호건의 서명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피터팬>이 “모든 아이의 비극은 성장해야 한다는 것. 성장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의 어린이 피터팬의 비극은 바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수’하는 판타지라는 점을 호건은 직시한다. 그의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역시 사랑을 통해 어떤 목표에 이르기를 포기하는, 장르의 관습에 비추면 ‘패배주의적’인 로맨틱코미디였다. 터놓고 말해 섹슈얼리티와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성장’의 개념은 아동판타지에서 불편한 소재다. 하지만 호건은 수줍음도 호들갑도 없이 <피터팬>의 관능과 폭력에 접근한다. 요란한 코미디 <뮤리엘의 웨딩>이 실상 배신, 난치병, 자살의 비극으로 고비마다 내러티브를 끌어간 드라마였다는 점을 새삼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P. J. 호건의 <피터팬>은 후크의 잘린 팔뚝을 보여주고 아이와 어른의 가차없는 칼싸움을 보여준다. 웬디의 관심을 두고 경쟁하는 피터와 후크는 성적인 질투심을 감추지 않고 성년의 언저리에 선 웬디는 그들이 대표하는 남성성의 두 얼굴에 대한 매혹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호건은 원작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도 한다. 원작의 웬디는 해적을 무시하는 캐릭터였지만, 영화의 웬디는 모성과 모험에 동시에 이끌리며 검을 치켜드는 21세기 소녀다. 스타일도 여전하다. 달링가 남매들이 색색의 태양계를 지나 날아가는 장면이나 집채만한 악어의 디자인에는, 난데없이 초현실적인 뮤지컬 무대를 벌이던 <뮤리엘의 웨딩>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키치적 감수성이 펄떡인다. 그의 <피터팬>은 결코 조용히 당도하지 않았다. 일부 관객은 “최고의 동화를 포르노그래피로 망쳐놓았다!”고 분개했지만, BBC는 “감정과 어드벤처의 균형을 찾는 마술에 있어 <해리 포터> 시리즈가 풀어야 할 과제를 업그레이드했다”고 호평했다. ‘크로커다일 던디’와 헛갈리는 것이 싫어 이름 표기법까지 바꾼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터팬>에 이르러 악어와 씨름하는 비운을 맞긴 했지만, 폴 호건과 P. J. 호건을 혼동하는 관객은 장차 대폭 줄어들 것 같다.

설특집. 설연휴 볼거리, 읽을거리 [3] - 만화

2003년 추석, 나는 약간의 각오를 하고 고향집으로 갔다. 내게는 집과 작업실에 몇 마리의 고양이 동거자들이 있는데, 부모님이 잔소리를 하실까 지레 겁을 먹고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실제로 전화를 하다가 내 방의 고양이 소리가 들리자, ‘고양이는 안 좋네’ 하면서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하셨다. 그때는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라고 둘러대기도 했지만, 그 이후 내가 고양이에 관한 책을 냈고 이제는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렇게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집에 들어간 순간, 나를 먼저 반긴 것은 어머니도 조카들도 아닌,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였다. 그 사이 형의 가족이 시추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고, 녀석의 애교에 부모님이 이미 넘어가버리셨던 것이다. 덕분에 나의 고양이 동거 생활도 은근슬쩍 묻혀버리게 되었다. 두세집 건너 한 마리씩 동물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물론, 새와 물고기, 파충류와 곤충류도 차례상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사실 만화만큼 동물들과 친한 매체도 없다. 공룡 둘리, 강아지 강가딘, 펭귄 만마루, 해달 보노보노…. 이들은 사람처럼 두발로 걸어다니고, 나불나불 사람 말로 떠들어대고, 시건방진 장난으로 인간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화를 통해 ‘진짜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동물의사 닥터 스쿠르> <왓츠 마이클> 등을 시작으로 펼쳐진 ‘동물만화’의 세계는 점점 그 폭과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이들이 ‘가장 가족적인 만화’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파란만장 견공일기 <시바오> 누노오라 쓰바사 지음 I 삼양출판사 펴냄 눈이 녹은 도로에서 미끄러져 꾀죄죄한 행색으로 돌아다니는 시바오. 공사장 하수관에 들어갔다가 몸이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시바오. 칼 든 강도한테 붙잡혀 인질 신세가 된 시바오. 작은 몸집에 동그랗고 복스러운 꼬리를 가진 강아지 시바오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비록 귀여운 눈빛과 앙증맞은 행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만, 발가락 사이의 넓적한 물갈퀴가 증명하듯 녀석에게는 떠돌이 개의 피가 만만찮게 흐르고 있다. 이 만화는 떠돌이 강아지 시바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에피소드 연작인데, 요즘에 보기 어려울 정도의 따뜻한 서정이 깃들어 있다. 시바오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행복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요정과도 같다.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유모차를 몸을 던져 멈추는 영웅적인 행동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배고픈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곤경에 처한 그를 도와주면서, 나도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 길거리 가수가 잃어버린 휴대폰, 부동산 할아버지가 떨어뜨린 지갑, 엄마와 헤어진 아기…. 시바오는 그것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안내하면서, 그 스스로는 여전히 방랑 중이다. 언젠가 이 꼬마 강아지가 머물며 함께 평생을 보낼 수 있는 집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주인공은 당신일지도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시라. 우리는 고양이로소이다 <묘한 고양이 쿠로> 개인적으로 2003년에 나온 동물만화 가운데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개와 고양이를 1인칭으로 두고 이야기를 펼쳐가는 만화는 적지 않지만, 그들의 삶을 이렇게 사실적이면서도 귀엽게 그리는 작품은 보기 어렵다. 쿠로는 자신의 여동생 칭코와 함께 ‘수염’이라고 이름 지은 너절한 싱글 남자의 연립주택에서 살아가고 있다. 비오는 날 놀이터에 버려졌다가 이 남자에게 거두어졌지만, 그를 주인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집의 안과 밖을 오가며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 만화는 쿠로의 1인칭 일기처럼 그려지는데, 길거리 고양이 세계의 권력 다툼, 발정난 고양이들의 사랑 싸움, 교통사고로 죽은 새끼 고양이의 무덤 만들기와 같은 실제 고양이 세계의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펼쳐진다. 어쩌면 나스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유머와 귀여움를 좀더 담은 시점이라고도 여겨지는데, 쿠로의 친구 고양이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도 딱 고양이 발치에서 바라다본다.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만 왕따에 가까운 소년, 커다란 몸집과 못생긴 얼굴로 실연의 상처를 입은 듯한 괴인 여자, 마른 몸에 신경질적으로 보이지만 고양이들을 챙겨주는 여우 여인. 정말 고양이가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겠구나 싶은 이야기들이 계속된다. 뾰로롱, 짹째꿀∼ 문조 몇 마리 키워보세요 <문조님과 나> <백귀야행> <어른의 문제> <키다리 아저씨들의 행방> 등으로 국내에도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이마 이치코의 작품이다. 이미 그는 <백귀야행>에서 까마귀 요괴 오지로와 오구로를 등장시켜 새들을 인간과 교류하게 만들었고, 화실일기식의 단편을 통해 자신의 문조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문조 이야기가 만만찮은 인기를 얻어 이렇게 독립된 작품으로 내놓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원산으로 작은 몸집, 아름다운 외모, 놀라운 음악성, (잘만 키우면) 다정다감한 인간과의 사교성. 일본에서 문조는 반려동물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개가 모두 틀리지는 않았지만, 실제 여러 마리의 새들을 키우면 그들의 성격 차이와 기묘한 행동 때문에 놀라운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다. 그리고 그 공간은 마감에 찌들려 야생과도 같이 어질러진 만화가의 화실이다. 거울을 보고 구애를 하는 나르시스트 후쿠, 그의 아내로 데려왔지만 곧 버림받는 하나, 그들의 아이로 인공 사육된 나이조, 나이조의 처로 데리고 왔지만 곧 남자로 밝혀지고 후쿠와 동성애 징후까지 보이는 스모모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려온 새로운 식구가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것은 이마 이치코의 만화 세계와도 꼭 닮아 있다. 사사키 노리코의 <동물의사 닥터 스쿠르> 덕분에 일본의 시베리안 허스키 값이 10배로 뛰었다던데, 이 만화 덕분에 문조 값도 폭등하지는 않을까? 뻔뻔해도 좋다 같이만 살아다오 <메이(May)> 메이(May). 오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이웃의 토토로>의 여자아이만은 아니다. 이 통통한 뺨에 앙증맞은 꼬리를 가진 골든 레트리버 강아지의 이름도 메이다. 골든 레트리버라고? 견종을 잘못 안 거 아냐? 2등신도 안 될 것 같은 커다란 머리에 왕방울만한 눈. 도대체 뉘 집 강아지야? 그렇다. 뉘 집 강아지인지 알면, 메이의 체형이 왜 그런지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빨간머리 앤> <사각사각>의 개그 만화가 김나경이다. 그녀의 주인공은 모두 그 체형이 아닌가? 자신이 직접 키우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은 만화가만이 가진 특권. 김나경 역시 그런 특권을 내버리지 않고, 강아지 메이를 주인공으로 네칸 만화를 펼치고 있다. 전통적으로 만화가의 분신 역할을 해왔던 ‘보바’도 등장하고, 그 가족들까지 메이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며 나름의 활약을 펼친다. 뻔뻔하고 고집 대장인 강아지의 이야기가 만화의 주를 이루지만, 직접 개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생활상의 지식도 담겨 있어, 육견(育犬)만화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물론 작가 특유의 앙증맞으면서도 시니컬한 개그 감각은 빠지지 않는다.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기쁜 절망감’이 유머로 승화되어 있다. 기억하세요? 똥닦는 고양이? <캣>(CAT) 강현준의 <캣>은 이미 한국 동물만화의 대표작으로 높은 명성을 떨쳐왔기 때문에, 그 지명도로 보아서는 새삼 소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최근 애장본으로 발간되어 새롭게 소장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기에 한번 더 강조의 방점을 더한다. 한쪽으로는 고양이의 습성 깊숙이, 다른 쪽으로는 만화적 상상력의 극단으로. 이것이 이 만화의 숨어 있는 전략이 아닐까? 어벙벙한 만화가 K,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검은 얼룩 고양이가 만화의 주인공으로 여러 주변의 미스터리한 인물들과 어울려 예측 불능의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일상은 아주 리얼하고 쪼잔하게, 망상은 대단히 거대하고 과격하게 탁구공을 튀긴다. 강호의 무림 고수가 고양이에게 참패하고 마는 묘권(描拳), 고양이가 나무를 긁는 바람에 벌어지는 지구 종말의 아마겟돈과 같은 에피소드에서는 고양이의 능력을 가공할 정도로 끌어올리지만, 오징어 냄새나 낚싯대의 멸치만으로 인간에게 농간당하고 마는 고양이의 비참한 모습도 쾌활하게 묘사한다. <캣>은 현실파와 망상파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상의 동물만화라 할 수 있지만, 고양이 자체를 과도하게 의인화하지 않고 주변의 세계가 알아서 고양이에게 종속되도록 하는 점이 절묘한 유머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최근 <납골당 모녀>에서도 컬트적인 개그 감각을 선보이고는 있지만, 강현준의 발랄한 유머가 깃든 고양이 만화를 계속 이어서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당근있어요? <센타로의 일기> 일러스트레이터인 주인공 바쿠가 미니 토끼인 센타로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사건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작은 몸집이지만 타고난 건강 체질로 항상 이런저런 사고를 벌이게 되는 센타로. 처음에는 토끼에 대해 잘 몰라 허둥대던 바쿠도 점차 이 놀라운 가족에 적응해가게 되는데, 서로 다른 습성의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은 언제나 흥미롭다. 만화 속에는 토끼 이외의 여러 반려동물들이 등장하는데, 토끼와 고양이가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의 에피소드가 특별히 재미있다. 고양이는 사냥을 통해 먹이를 섭취하는 육식동물로 이 작은 토끼 정도는 먹이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나름의 우정을 가지고 접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 그래서 고양이는 토끼를 보고 야성에 번뜩이며 ‘본능!’이라고 손을 내밀다가, ‘우정!’이라며 이성을 회복하기를 반복한다. 토끼 역시 인간의 꽁치를 훔쳐먹는 고양이를 보고 자신의 채식 습성에 대해 고민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만화의 여러 소재들이 ‘사고’ 혹은 ‘사건’과 연결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자기 몸이 아프면 동물들의 밥을 챙겨주지 못해 더욱 걱정이 되고, 동물들까지 아픈 경우가 없지 않다. 자신없는 사람들은 섣불리 동물 식구를 들이는 것보다는 동물만화로 만족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토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유머가 유행했을 때 <당근있어요?>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나온 작품. 모두 24권으로 동물만화로는 거의 최장의 작품에 속한다. 싸워!… 아니 싸우지 마 <하얀 전사 리키> <이겨라 벤> 스페인에 가서도 동물 학대라는 이유만으로도 투우 보기를 극력 사양했던 나이기에, 이 만화들을 동물 애호인들에게 감히 권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긴 하다. 그러나 이것도 동물과 우리가 관계맺고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하얀 전사 리키>와 <이겨라 벤>은 투견을 소재로 하는 한·일 만화다. 두 만화의 성격은 아주 비슷하다. 둘 다 1970∼80년대 열혈만화의 분위기로 깊은 우정을 나눈 소년과 개가 투견에 도전하고 승리해가는 이야기다.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스파르타식 훈련이 벌어지고, 흡사 ‘마구(魔球)만화’를 보는 듯한 필살기가 펼쳐진다. 라이벌들 역시 만만치 않지만, 주인공은 여러 핸디캡을 극복하며 그들을 물리쳐간다. 인간의 전투 본능을 해소하기 위해 개를 내세우는 ‘투견’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 처절한 과정에서 개와 인간이 나누는 우정만큼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투견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면서도 싸움을 계속하는 개들, 그리고 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항복의 표시를 하지 못하는 주인들. 적어도 이 만화가 추구하는 주제는 분명하다. 투견과 주인의 사랑과 우정이 담긴 관계가 아니면, 그들은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 반려견 흉포하다 <생각하는 개> 사실파의 동물 주인공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건방진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오산이다. 현실 속에서는 약자인 동물 주인공이 만화를 통해 인간 머리 위에 설 때 생겨나는 유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하다. 다이몬지는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중년의 남자다. 직장으로 보자면 일류 출판사의 존경받는 편집장이며, 가정으로 보자면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딸로부터 알뜰한 사랑을 받는 가장이다. 그런데 비오는 밤 종이상자에 버려진 강아지 한 마리를 ‘완전한 선의로’ 집에 데려온 것이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장 85cm, 체중 83kg의 대형견으로 자라난 (그러나 아직도 자라고 있는) 개 몬지로는 마치 다이몬지의 권위를 깔아뭉개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듯 그를 무지막지한 발로 밟으려 하는 것이다. 반려동물은 작고 귀엽다는 이미지는 여기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인간의 덩치보다 클 뿐 아니라 때론 자신의 방식으로 인간을 속여먹을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은 어떤 방법으로도 통제가 되지 않는다. 침실에서 아내의 옆자리를 빼앗고, 아끼는 잠옷에 초대형의 변을 보고, 암캐의 냄새를 맡더니 내 몸에 ‘마운트’까지 한다. 물론 다이몬지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귀엽고 큰 개일 뿐이다. 동물의 편애와 기만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 만화를 통해 똑똑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의 사실파 동물 주인공들 미소년 아니면 누더기 견, 무엇을 키우시겠습니까? <무당 거미> <황금 박쥐> <토끼> <미운 오리 왕자님>의 공통점은? 제목과는 달리 동물 주인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만화라는 점이다. 반면에 만화의 전면을 장악하지는 않지만,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을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여주는 조연급의 주인공들이 적지 않다. 해롤드 사쿠이시의 <벡>은 록 뮤지션이 되고 싶어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제목과 같은 이름의 ‘벡’이라는 개가 등장한다. 온몸이 누더기처럼 기워져 있어 보기에도 불량스러워 보이지만, 주인공에게는 특별히 불친절하다. 야마시타 가즈미의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서는 유 교수와 고양이 타마와의 관계가 매우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어쩌면 이 만화에서 유 교수와 가장 평등하게 맞서는 존재가 고양이일지도 모른다. 특히 타마가 사라진 뒤 그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극의 구성에서, 고양이가 이 집 저 집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서로 다른 존재로 행동해왔다는 점이 재미있다. 정준규의 <얼렁뚱땅 하이파이브>에는 주인공 소년이 ‘반찬이’라고 부르는 비루먹은 피학대 강아지가 나온다. 소년이 부르면 미친 척하는 등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가장 비열한 행동까지 감내해야 한다. 한국 전통의 강아지상이라고나 할까.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카오루의 일기>에 나오는 고양이도 카오루로부터 ‘건전지를 넣는 로봇’ 취급을 받으며 가벼운 학대를 당한다. 후루야 미노루의 <이나중 탁구부>에서 이자와와 마에노가 닭 대신 키우는 산체나 <너는 펫>에서 미모의 30대 전문직 여성인 스미레에게 사육당하는 미소년 모모 등 인간이지만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경우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모두들 한번쯤 이렇게 편안히 살아보았으면 하는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비평 릴레이] <페이 첵> - 정성일 영화평론가

필립 K. 딕의 팬 사이트( www.philipkdickfans.com) 입구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리얼리티는 ‘단지’ 관점일 뿐이다.” 이보다 더 그의 소설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는 그의 소설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어버릴 것이며, 언제나 피해자인 내가 찾아낸 범인은 나 자신이다(<토탈 리콜>). 혹은 구조 안의 블랙홀 속에서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만큼 나쁜 결과는 필연적이 되어간다(<마이너리티 리포트>). 결국 세상은 환상의 시나리오이며, 그 안에서 주어진 나의 배역이 밝혀진 마지막 순간은 이미 때늦은 존재론적 대답이다(<블레이드 런너>). 빈틈없는 시간 안에서 의지와 무능력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이 기괴한 놀이가 제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이 도착하자 영화는 필립 K. 딕을 끌어냈으며, 할리우드는 그의 이름을 빙자해서 멋대로 각색하였다. 열혈 팬들은 비분강개하였고, 대학원생들은 이론적 각색을 동원해서 라캉과 보드리야르의 비빔밥으로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명단은 점점 불어났으며, 각색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 오우삼이 할리우드에서 6번째 만든 영화 <페이 첵>은 필립 K. 딕 소설의 (텔레비전물을 제외하고) 8번째 영화화이다. 먼저 오우삼 버전. 미래세계. 프로그램 분해공학자 제닝스(벤 애플렉)는 알콤이라는 거대기업으로부터 9천만달러의 주식을 ‘페이 첵’(급료)으로 제공받는 대신 3년 동안의 기억을 삭제한다는 조건이 붙은 일을 한다. 그러나 보수를 찾기 위해 은행을 갔을 때 제닝스는 자신이 직접 서명한 주식포기각서와 그 대신 보관한 19개의 하찮은 물건이 든 봉투를 받는다. 게다가 총을 든 사나이에게 쫓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찮은 물건들은 그를 구하는 구사일생의 도구가 된다. 제닝스는 레이첼(우마 서먼)을 다시 만나면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결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3년 동안 개발한 것은 미래를 보는 프로그램이었으며, 그 결과가 핵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막기 위해 제닝스는 ‘자신이 미리 본 미래를 따라가면서’ 악전고투한 것이다. 물론 ‘완벽한’ 해피 엔딩. 그 다음은 필립 K 딕의 버전. ‘거의 2년 동안’ 레이첵 회사에서 일을 하고 기억을 삭제 당한 제닝스가 살고 있는 미래는 강력한 정부에 의한 관리사회이다. 제닝스는 ‘페이첵’ 5만불(환율상승) 대신 7개의 하찮은 물건을 받았고, 정부의 추적을 당하는 제닝스는 ‘의문의 여인’ 켈리와 함께 레트릭 본사로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담판을 지을 작정이다. 자신을 회사의 운영진에 포함시켜 달라고. 거기서 제닝스의 목표는 그들과 함께 미래에 있을 정부에 대항하는 혁명을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불길한’ 엔딩.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미래가 아니라 자기 시대와의 매듭에 있다. 필립 K. 딕이 1953년에 쓴 소설은 냉전시대의 창백한 아메리칸 ‘드림’의 히스테리이다. 그 세상은 조지 오웰적 비전과 매카시즘의 공포가 가득 찬 구조의 억압과 엄격한 예정인과율의 세계이다. 그 안에서 제닝스는 사실상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처럼 전모를 알 길이 없는 위기에 빠져든다. 그리고 질문한다.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이 질문은 불만족스러운 ‘드림’이다. 오우삼이 2004년에 만든 영화는 이라크 전쟁시대의 비만한 아메리칸 드림의 판타지이다. 여기서 미국은 세상의 시간을 걱정하고, 질서를 되찾기 위해 잉여를 제거해야 한다는 자기 중심의 강박증에 빠진다. 그래서 제닝스는 사실상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맹목적인 액션에 매달린 채 주어진 상황의 비극적 현실을 잊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미래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대답은 불가능한 ‘드림’이다. 불만족과 불가능 사이에서 왕복 달리기를 하며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미국’이라는 침대 위의 끔찍한 몽유병의 나르시시즘. 그 옆에서 횡설수설하는 남의 잠꼬대를 참고 들어주는 것은 정말 지겨운 일이다. 그런데 참, 오우삼 당신은 왜 그 침대에 ‘비둘기를 날리며’ 함께 누워 계십니까.

악의 꽃, <천국의 계단>의 태미라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으로는 바다 속 깊은 곳에 살고 있는 강장동물류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저 오색찬란한 산호를 보라. 그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 어떻게 그런 순색의 조화를 만들어 살고 있는가? 빛을 비추고 카메라를 들이대어서야 그들은 어둠 속에서 제 색을 내뿜는다. 그 가운데에서도 촉수를 세우고 닿는 물건이면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말미잘의 화려한 위용이야말로 섬뜩하게 저려오는 통각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천국의 계단>을 보았다. 천국에 가는 서로 다른 방법들을 보여준다던 네명의 연인들은 계속해서 숨바꼭질과 술래잡기를 하고 잡힐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한 순간들로 애간장을 태운다. 정서(최지우)의 기억 상실은 송주(권상우)의 피를 말리고 태화(신현준)의 잠적은 정서의 연민을 자극한다. 송주가 자신을 사랑하고 지켜주지 않는 것에 치를 떠는 유리(김태희)는 어떻게 해서든 정서를 망가뜨려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누군가는 나서서 악의적으로 연인간의 만남을 방해하고 누군가는 지순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걸고라도 함께 있고 싶어한다. 정서가 걸핏하면 우는 바람에 나도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하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송주와 정서의 세팅에 태화는 희생과 온정의 끈이고 유리는 증오와 탐욕의 끈이다. 서로가 그 끈을 잡아당기며 드라마가 돌고 있었다. 지나치게 잡아당기지도 아주 놓아버리지도 않은 채. 그러나 나는 지순한 사랑의 연인들 앞에서 탄성을 지르기보다는 탐욕과 패악의 화신 앞에서 자지러졌다.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또한 얇기도 하고 두툼하기도 하면서 먹이를 향해 내뻗는 말미잘의 촉수와도 같이 내뿜어대는 태화와 유리의 생모, 태미라(이휘향)의 고혹적인 위용 앞에서였다. 그녀가 내놓는 한마디 한마디는 예술이었다. 사랑이라는 너절하고 시시한 것과 화려한 글로벌 그룹의 회장부인이 되는 것은 결코 맞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것을 유리에게 역설할 때, 자식이라도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팽개쳐버리고 심지어 해칠 수 있다고 그녀의 전남편에게 으름장을 놓을 때, 사람 꼴이 되려면 적어도 삼년은 핏덩이 자식을 키워야 하는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신 공자님이 무색하게도 태미라는 그대로 지순한 악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부모라는 이름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그 현장은 이상하게도 너무나 순수해서 정신이 아득해왔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딸아이가 유리의 표독스러운 눈빛을 지켜보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더니 갑자기 TV 속으로 달려들어가 따귀를 한대 시원하게 때리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난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절대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가르쳐주어도 부족한 나이에 그 아이를 벌써 악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게 만들다니…. 매체의 힘 앞에 다시 한번 굴복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순한 사랑은 사악함을 배경으로 해야만 드러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지순한 사랑을 안고 올라갈 수 있는 천국으로의 계단은 없었다. 태미라와 유리의 그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눈빛이 없이는 정서와 송주의 사랑도 제 빛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복수의 망치를 들고 노려보던 머리 위에 얹힌 동충하초파마(!)에다가 백여 마리가 넘는 달마시안의 가죽을 벗기지 못해 머리끝까지 울화로 쭈뼛 세우던 크루엘라처럼 근사한 모피를 걸친 태미라의 고혹적인 모습에서 난 무르익은 인간 욕망의 끝을 본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따로 없었다. 미학은 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그녀의 자태에 난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나는 바란다. 제발 정서와 송주가 승리하고 태미라와 유리가 망가지는 상투적인 결말로 그 아름다운 악의 모습을 변질시키지 않았으면 하고.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하는 그 끝을 애타는 시청자들이 끝끝내 양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치졸하거나 변형된 비정상의 모습이 아니라 꿋꿋하고 당당한 악의 화신으로 사라져주었으면 하고. 철없는 딸아이에게 순수한 사랑을 가르치지 못하는 엄마의 가슴은 아프지만 태미라의 말대로 세상과 현실은 어쭙잖은 사랑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춥고 가난하기에 악의 지순하고도 본질적인 모습만이라도 끝까지 화려한 위용을 자랑해주기를 나는 너무도 학수고대한다. 어둠 속에서 꼬물대지만 생존을 위해서 촉수를 세우는 말미잘들이 카메라 불빛 아래에서 아름다운 몸체를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보여주는 것을 생명으로 하는 TV는 무엇이든 순색의 것을 보여주는 데에 인색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素霞(소하)/ 고전연구가

일본적 슈퍼히어로의 변주, <자토이치>

1962년과 2003년의 '자토이치'들과 기타노 다케시 장님에 머리를 깎은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 이야기>와 노랑머리에 장님 흉내를 내는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 1962년 처음 <자토이치 이야기>로 시작된 뒤, 영화, 텔레비전 등 많은 다양한 시리즈를 거쳐 2003년 다시 탄생한 <자토이치>. 2003년 기타노 다케시는 왜 새로운 <자토이치>를 만들었을까? 진정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새로운 자토이치일까? 2003년의 <자토이치>는 1962년의 <자토이치 이야기>와 어떤 연결점을 갖는가? 영화를 보면서 계속 머리 속을 맴도는 이와 같은 의문들.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통해 이런 의문점들을 하나씩 풀어갈까 한다. 장님과 장님 행세, 이중의 무장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1960년대 일본사회를 돌아보자. 1959년의 미-일안보조약을 반대하는 격렬한 데모에도 불구하고 1961년 신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1960년대 본격적인 신안보체제 확립에 돌입한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를 인정하는 신안보체제란 일본이 미국을 완전히 일본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 불완전한 형태의 국가체제를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1962년은 이와 같은 불완전한 일본을 새로운 ‘일본’으로 정당화해야 하는 임무가 시작된 해이며, 안보투쟁에서의 좌절을 상대적인 일본사회의 안정의 무드로 무마시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해이다. 같은 해 일본의 영화계에서는 이와 같은 안보투쟁의 좌절을 넘어서 이미 확립된 신안보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련의 일본식 슈퍼맨적 영웅을 내세운 시대극이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흥미롭게도 이 시기 슈퍼맨적 일본의 영웅은 건강하고 완전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외팔이에 외눈박이인 단게사젠이나, 장님인 자토이치처럼 신체에 결함을 가진 인물로 설정된다. 이들은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일본이 오히려 더욱 강한 일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영웅상이었다. 그러므로 장님인 자토이치는 두눈을 가진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 눈으로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볼 수 있는 슈퍼맨이다. 일본의 한 평론가는 장님이라고 하는 것이 역으로 말하면 모든 퍼스펙티브(시점)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장님이란 0의 시점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시점이며, 바로 마이너스의 시점이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플러스의 시점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토이치의 무기는 칼만이 아니라 그가 장님이라는 사실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두개의 무기를 가진 셈이다. 불완전해 보이는 일본은 오히려 이중의 무장을 한 셈이다. 이런 일본의 이중적 무장이 현실화된다. 2003년의 일본은 유사법을 통과시키고, 자위대의 위상을 바꾸어 이라크에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지금은 테러리즘과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대비책이라는 핑계로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우려가 가장 극대화되고 있는 시기이다. 일본이 자신의 완전한 군대를 갖는 날, 일본은 완전한 국가로 탄생할 것이다. 이제 자토이치는 완전한 장님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장님인 것처럼 행동한다. 완전히 눈을 뜰 날을 기대하며…. 그리고 1962년의 일본의 슈퍼맨 장님 검객 자토이치가 2003년에 새롭게 장님 행세를 하는 자토이치로 부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 시대극의 모자이크 기타노 다케시는 <자토이치>를 만들면서 비오는 날의 칼싸움 장면을 구로사와 아키라의 에서 빌려왔다고 말했다. 사실 그가 직접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빌려온 모티브는 영화 안에서 더 많이 찾아낼 수 있다. 농민의 등장이 그렇고, 마지막 화합의 춤이 그렇다. 그러나 <자토이치> 안에는 이와 같은 단순한 모티브 이상으로 더욱 다양한 일본의 시대극이 계승되어 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기타노 다케시는 이를 영화 첫 부분에 모두 고백하고 있다. 영화는 길가에서 쉬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로부터 시작한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론가 떠나는 방랑의 중간단계인 쉼으로 시작되는 이 첫 장면은 가쓰 신타로의 방랑자객 자토이치의 계승임과 동시에 일본 마타다비 시대극의 계승이다. 마타다비영화로 불리는 일련의 시대극의 역사는 길다. 어디로 나갈 곳 없이 사방이 바다로 막혀, 완전히 폐쇄되어 있는 섬나라 일본에서 실제로 떠난다는 것이 얼마만큼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떠나고 싶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 마타다비영화를 탄생시켰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의 처음을 마타다비의 계승으로 연다. 그 다음 신은 바로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는 남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복수는 일본 시대극의 가장 전형적인 소재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국을 누비는 소가 형제의 이야기는 부모의 원수 갚기의 한 예이며, 나아가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어서는 47명의 사무라이의 이야기인 <츄신구라>는 일본 복수시대극의 전형이다. 다음은 자릿세를 받으러온 야쿠자가 등장한다. 악한 야쿠자와 사무라이, 혹은 착한 야쿠자가 대결을 벌이는 것 역시 일본 시대극영화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 다음 신은 바로 칼잡이인 아사노 타다노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칼잡이의 등장이 일본 사무라이 시대극영화의 전형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토이치>에서 칼잡이 아사노 타다노부는 단지 그가 칼잡이 사무라이라는 것 이외에도 두 가지 면에서 또 다른 일본 시대극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아사노 타다노부의 첫 등장 장면을 보면 칼싸움을 하는 그의 등 뒤로 폐병에 걸린 부인의 모습이 보인다. 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칼잡이가 되어야 하거나, 병에 걸린 아내 때문에 고뇌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요쓰야괴담을 상기시킨다. 또한 아사노 타다노부와 기타노 다케시가 벌이는 해변에서의 마지막 결투장면은 <미야모토 무사시>의 마지막 장면인 사사키 고지로와 무사시와의 결투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이처럼 기타노 다케시가 영화의 첫 부분을 일본 전통 시대극의 대표적인 4가지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자토이치>가 <자토이치 이야기>를 그대로 담아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본의 전통적인 시대극의 틀마저 모두 벗어던질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아니 아무리 그가 노랑머리의 자토이치를 등장시키고, 마지막에 장대한 탭댄스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해도 근본적으로 일본 전통 시대극을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이 영화의 첫머리를 전형적인 일본 시대극영화들로 열고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토이치>에 등장하는 이와 같은 일본 전통 시대극의 요소들이 이미 기타노 다케시의 다른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와 LA로 상징되는 일본 밖으로의 열망, 늘 어딘가로 걸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인 기타노 다케시 영화 속의 비트 다케시, 해변과 야쿠자, 병든 부인…. 그러므로 아론 제로가 말하듯이 기타노 다케시는 <하나비>를 통해 비로소 일본적인 것으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장 일본적인 것을 영화 속에 담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하나비>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어 보여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가 일본 시대극 <자토이치>를 만들기 전에, <돌스>를 통해 전통 분라쿠의 형식을 실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웃기 시작하는 다케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 이야기>와 다른 지점을 분명히 갖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다른 지점이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를 더욱 일본적인 영화로 만든다. 우선 자유인 자토이치에 대한 접근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토이치는 방랑자, 자유를 좇는 자이다. <자토이치 이야기>는 여인이 기다리는 큰 거리를 뒤로하고 그만이 알고 있는 뒷길을 따라 유유히 걸어가는 것으로 끝맺는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는 자신의 임무를 모두 수행한 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길을 따라 떠난다. 그러나 <자토이치>는 길을 떠나려던 기타노 다케시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정지화면으로 끝을 맺는다. <키즈 리턴>의 두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계속 운동장을 돌던 것처럼 결국 기타노 다케시는 먼길을 떠날 것 같아도 떠나지 못하고 돌아온다. 일본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결코 그는 일본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여성에 대한 시선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는 여성이 배제된다. 등장한다 하더라도 죽거나 아프거나 그렇다. 아사노 타다노부의 아내는 남편이 죽자 바로 할복자살로 영화 속에서 사라진다. 부모님의 복수를 갚기 위해 전국을 떠도는 남매 중에서 영화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여장을 한 남동생이다(<자토이치 이야기>의 마지막 칼싸움 장면에서 자토이치의 칼에 맞은 칼잡이 히라데가 자토이치의 등에 업히는 장면 등을 남성간의 동성적 코드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자토이치 이야기>에서는 여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는 위험에 빠진 여성을 구해줌으로서 여성을 영화 속에 남겨놓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영화 속의 여성 배제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무라이 정신이 가득한 일본영화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영화 속에서 웃음을 감추어왔던 기타노 다케시가 영화 속에서 웃기 시작한다. 일본 최고의 코미디언인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 속에서 자신이 코미디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숨겨왔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그는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 일본의 관객이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에 동화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자토이치>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웃기 시작한다. 그가 TV에서 늘 보여주는 기타노 군단적 코미디 요소를 도입할 뿐 아니라, 자신이 웃기 시작한다. 사실 웃음이란 가장 국가적, 문화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요소이다. 일본의 대중들이 아는 웃음, 함께했던 웃음이 <자토이치> 안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가 노랑머리의 자토이치를 등장시키고 탭댄스로 변화를 주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온 일본인이 함께 춤추는 진정한 화합의 일본적 <자토이치>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정수완/ 일본영화사 연구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형태의 생각도감] 집9 - [러브하우스]

텔레비전은 때때로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요술 같은 능력으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 기적을 만드는 텔레비전은 가난과 절망으로 도탄에 빠진 헌집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집으로 바꾸어주기도 한다. 일요일 저녁 ‘MBC 러브하우스’ before - 라면박스와 빨갛고 파랗고 조악한 플라스틱 수납등과 짙은 고동색 가구들과 무너질 듯한 행거 위로 난지도의 넝마 같은 옷가지들. 쓰지도 못하고 쓸 일도 없지만 버리지 못하고 마냥 쌓아놓은 살림살이들이 쓰레기와 폐품들 사이에서 아무런 구분도 없다. 천장은 쥐오줌에 찌들어 있고 청테이프로 버티고 있는 벽지와 비닐이 처진 창문으로 겨울바람이 요동치고 있다. 아쉬울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사모은 살림살이들은 아무런 디자인도 라이프 스타일도 없다. 가난한 집이란, 쓰지도 못할 것을 버리지도 못하고 껴안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after - “자! 공개합니다!” 외침과 함께 현관문과 방문과 화장실 문이 열릴 때마다 탄성이 쏟아져 나오고, 눈물과 고마움과 감격과 또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는 감정들이 복받쳐 오른다. 사랑과 감동의 러브하우스는 어두운 그림자는 하나도 없이 눈부시게 하얗다. 아. 행복이 가득한 집. 병든 노모를 위한 홈 오토메이션 빌트인 가전제품에, 자동문과 멜로디가 나오는 변기가 마냥 신기할 뿐이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전에 쓰던 살림살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넝마 같은 옷가지가 귀신처럼 웅크린 자리엔 하얀 수납장에 곰인형만 예쁘게 앉아 있다. 찬장에도 꽃그림 접시 몇장만 예쁘게 진열되어 있다. 전기밥통과 냉장고는 아직 쓸 만해도 미관상 처분되었으리라. 잘사는 집이란, 구질구질한 것들을 다 내다버리고 고급자재로 하얗고 푸르게 인테리어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러브하우스’는 사랑은 알지만 가난은 모른다. 하얀 집은 ‘가난해도 살기 좋은 집’은 아니다. 그래도 고마운 건 사실이다.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전쟁의 고통과 굴레, <태극기 휘날리며>

99년 전국 597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쉬리>로 ‘한국형 블럭버스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한국영화사를 <쉬리> 이전과 <쉬리> 이후의 시대로 구획지은 강제규 감독은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순제작비만 145억원 이상 쏟아부으며 많은 이들의 기대와 그 못지않은 우려의 시선을 함께 받았던 강제규의 신작 <태극기 휘날리며>가 3일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강 감독은 한국전쟁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우직할 만큼 정공법으로 다루면서도 한 장면 한 장면의 디테일에 놀랄 만한 공을 들여 148분의 상영시간이 지난 뒤 객석으로부터 진심어린 박수를 받았다. 영화는 6ㆍ25 참전용사 유해발굴단의 작업현장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장에서 이진석 하사의 유품이 발견되지만 신원조회 결과 이진석은 77살로 생존중이다. 이진석은 유해가 형 진태의 것일 수도 있다는 기대로 손녀와 함께 현장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카메라는 진석의 손에 놓인 오래된 수제구두에 북적이는 50년 6월 종로거리를 포개며 수많은 가족과 개인의 삶이 파탄난 상처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두를 닦으며 가족을 돌보는 진태(장동건)와 서울대 입시를 준비하는 모범생으로 온가족의 희망인 진석(원빈) 형제는 국수집을 하는 엄마와 엄마를 돕는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은주)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꾸려간다. 그러나 난데없는 전쟁 소식에 이들은 모두 피난길에 오르고, 대구역 앞에서 진석과 진태는 국군 의용군으로 소집돼 전선으로 끌려간다. 영화는 낙동강 전투에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평양 시가전과 중국군 개입 등 한국전쟁의 주요 일지를 따라가며 포연 가득한 전투현장을 잡아낸다. 고막이 터질 듯 전후좌우에서 끊임없이 터지는 포탄과 떨어져 나가는 팔다리, 생존자의 얼굴에 쏟아지는 피와 살점 등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장면은 소름이 끼칠 만큼 빼어난 사실성을 담아낸다. 특히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수만명의 중국군이 달려오는 인해전술 장면은 압도적이라 할 만큼 거대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그러나 카메라는 수천미터 상공에서 진석과 진태의 얼굴 가까이로 옮겨가며 수치와 물량, 체제의 대립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 겨누어진 전쟁의 칼날을 잡아낸다. 진태는 무공을 세워 그 보상으로 동생을 집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전투의 앞줄에 선다. 그러나 전쟁영웅으로 찬사를 받을수록 진태는 전쟁의 광기에 휘말려가고 진석은 미쳐가는 형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구두닦이 시절 함께 다니다가 북한군 의용군에 끌려간 어린 소년, 총 한 자루 없이 허름한 옷차림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꼬마에게 총을 겨누는 진태의 눈빛에는 가족을 보듬으려는 평범한 한 인간의 연민은 지워지고, 증오 가득한 살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진통일을 앞둔 압록강 전투에서 진태는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전쟁은 끝이 보이는 듯하다가 중국군 개입으로 형제의 운명은 다시 한번 비극적인 엇갈림을 맞는다. 그리고 진석은 집에 돌아온다. 그를 기다리는 건 죽음과 실종, 증오와 절망으로 갈갈이 찢겨져 폐허가 된 삶이다. 광기에 휘말리는 형과 아우, 전쟁의 고통과 굴레 잔잔히 다뤄. 낙동강 전투·중국군 인해전술등 빼어난 사실감·스펙터클 ‘압권’ 2000년 한국전쟁 유해발굴에 관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50년 만에 발견된 남편의 유해 앞에서 흐느끼던 백발의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강제규 감독은 영화를 통해 놀라운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도 값싼 영웅주의나 상투적인 이념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개인사 속에 새겨진 전쟁의 고통과 굴레를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전쟁터의 아수라장에서 형제간의 미묘한, 때로는 격렬한 갈등을 보여주는 장동건과 원빈의 연기와 공형진, 오영란 등 조연들의 탄탄한 뒷받침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6일 개봉. “생소한 전쟁극 걱정 많았지만 고집 좀 세웠죠”, 강제규 감독 인터뷰 전쟁사극이 흥행이 검증된 장르가 아닌데 이처럼 대작으로 만들게 된 계기는. 개인적으로 장르와 흥행의 상관관계를 믿지 않는다. 어떤 장르이든 그걸 잘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주변에서 걱정이 있었다. 전쟁영화라서 너무 무거울 것 같기도 하고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도 쉽지 않을 거라는. 내 고집으로 밀고 갔다. 우리 영화가 다른 나라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지점이 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게 이 영화를 탄생시켰다. 개인적으로도 어릴 때부터 전쟁영화를 하고 싶었다. 한국전쟁은 아직도 민감한 소재인 만큼 극화하는데에 여러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실미도>는 역사적인 사실이니까 그 사실을 쫓아가는 거고, 물론 거기에 단점도 있겠지만, 우리는 6·25라는 배경이 있지만 어쨌든 픽션이다. 관객들이 영화에서 전쟁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관심을 가질 것이고, 그걸 어떻게 잘 엮느냐가 큰 부담이었다. 두 형제의 갈등과 감정이 전쟁의 비극과 잘 맞물려가야 하니까. 너무 다큐처럼 해도 안 되고, 너무 허구여도 안 되고. 전쟁 장면의 사실감이 압권이다. 우리에겐 전쟁 장면을 찍을 노하우가 많지 않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필름의 선택부터 많은 테스트를 거쳤다. 폭격에 화면이 흔들리는 느낌을 연출하는 카메라 장비도 우리에겐 없어서 할리우드에서 빌릴까 하다가 자체 개발했다. <진주만> 같은 데서 잘 쓰는 개각도 촬영, 화면에 파편 같은 게 튀는데 그게 다 살아움직이는 것 같게 하는 이 촬영도 이번 영화에 맞게 하려고 연구를 많이 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고민을 많이 해서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총제작비가 170억원으로 한국 영화 사상 최대다. 국내에서 관객이 얼마나 들면 손익분기점이 맞는가. 550만~600만명이면 손익분기점을 맞출 것 같다. 흥행부담 글쎄. 최선을 다했다. 여한이 없다.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제작과 감독을 병행해왔는데 어느게 더 좋은가. 제작도 재밌긴 한데, 체질적으로 감독하는 게 훨씬 재밌는 것 같다. 이번에 명필름과 기업결합한 것도 감독 일에 주력하려고 싶어서이다. <쉬리> 이후에 5년만에 감독했는데, 이런 식으로 작품하다가는 하고 싶은 영화는 많은데 반도 못할 것 같다. 또 명필름과 실질적으로 한 회사 개념이니까 내가 제작에 관여를 덜 해도 되지 않을까.

제7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1]

단단한, 그리고 새로운 내일의 작가들 <씨네 21>, 한국코닥 주식회사, 부산국제영화제가 공동주최하는 코닥 이스트만 단편영화제작지원제도가 제 7회째를 맞아 당선작을 배출했다. 당선작은 권지연 감독의 <빨간 메니큐어>, 유은정 감독의 <흡연모녀>, 손광주 감독의 <단속평형>이다. 응모한 총 61편의 작품 중 시나리오 및 제작계획서를 바탕으로 심사가 이뤄졌고, 오윤홍 감독의 <감독님, 저 윤희예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 이원식 감독의 <생장점>이 당선작들과 함께 최종 심의까지 올랐다. 올해의 심사는 이현승(영화감독), 정재은(영화감독), 남동철(씨네 21 기자), 박도신(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램 팀장)이 맡았다. 당선작 세편은 35mm 필름 1만 피트 제공, 필름의 무료 현상과 인화, 35mm 카메라 장비 대여, 편집 작업료 할인, 텔레시네 작업료 할인, 사운드 작업료 할인 등의 제작지원을 받게 되며, 예년에 비해 보다 폭넓은 혜택이 주어진다. 당선작 세 편은 심사를 거친 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에 출품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심사평/ 맛깔스러운 단편영화가 보였다 시나리오 제출 마감을 4개월이나 앞당긴 탓에 작년에 비해 제출편수가 대폭 줄었다고 한다. 총 61편의 시나리오와 제작계획서를 심사한 결과, <단속평형>, <빨간 메니큐어>, <흡연모녀>가 제작지원작에 선정되었다. 세편의 시나리오 모두 단편영화로서의 매력을 잘 살린 작품이었다. 심사기준은 시나리오의 완성도와 작품제작의 가능성여부, 그리고 영화에 새롭게 접근하는 스타일등을 기준으로 정하였다. <단속평형>의 경우 신선한 기획의도와 새로운 스타일에의 기대로, <빨간 메니큐어>는 단편영화적인 간략한 구성과 의외의 엔딩으로, <흡연모녀>는 튼튼한 캐릭터의 구축과 단순하면서도 힘있는 이야기로 각각 선정되었다. 세편 모두 완성될 영화에 대한 기대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들이고 감독들의 전작들을 볼 때 좋은 작품들이 나오리라 기대한다. 올해 제출된 시나리오들은 소재면에서 겹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노인과 아이를 등장시키는 성장드라마와, 노인들의 질병과 죽음을 다룬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아이들의 성장드라마는 단편영화의 하나의 유행이라 할만큼 이미 많이 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 시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단편영화들이 제시하는 결론은 모호한 화해와 이해, 그리고 농촌공간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오늘날 가속화되고있는 가족해체에 대한 무의식적인 일종의 반동적 저항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예선을 통과한 작품의 시나리오는 총 11편이었다. <나의 더티댄싱> <어느날 김만수씨에게 생긴일> <사랑은 꿈이었을뿐> <마중>등은 모두 큰 단점없는 단편 시나리오의 안정성을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최종 인터뷰에 올랐던 <용서받지못한자> <생장점> <감독님 윤희예요> 등은 새로운 소재, 드라마틱한 상황이 담긴 시나리오로 최종결정에 어려움을 주었던 작품들이다. <용서받지 못한자>는 군대라는 공간을 경험하는 섬세한 남성의 이미지로 <생장점>은 식물과 여성에 대한 개념으로 <감독님 윤희예요>는 여배우의 시선으로 본 감독에 대한 이야기로 각각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였다. 하나같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작품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새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원제는 ‘Lost In Translation’)는 단순한 이야기 안에 많은 단상과 감정을 실어나르는 매력적인 영화다. 중년의 한 미국 남자가 일로 도쿄에 갔다가 딸 뻘되는 미국 여자를 만난다. 배우인 남자는 일본에 산토리 위스키 광고 찍으러 갔고, 여자는 사진작가인 남편의 출장에 따라왔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탓에 자주 마주친다. 남자는 일에든 가정에든 활기를 잃은 상태이고, 결혼 2년차의 젊은 여자는 자기 삶의 갈피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막연해진 상태다. 말 안 통하는 낯선 도시의 공간은 고립감을 가중시키고, 그로 인해 남녀는 서로를 아는 정도에 비해 더 깊은 동지애를 느낀다. 소통의 단절을 받아들이고 나면, 적은 것으로도 많은 소통을 하게 되는 법.(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소통을 요구하며 산다, 혹은 충분히 소통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산다.) 그러나 남자나 여자 모두 맥이 없다. 여기저기 찾아나서거나 영어가 되는 일본인을 만나 그곳의 문화를 탐해볼 수도 있을 텐데, 고층 호텔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있거나(여자) 혼자 호텔의 수영장과 헬스클럽과 바를 전전한다(남자). 그러니까 겁이 많고 열정이 대단히 크지도 않은 보통 사람들이다. 둘이 남달리 외로울 이유도 없다. 중년의 위기라지만 남자는 부인에게서 형식적이나마 매일같이 안부전화가 걸려오고 자식들을 보고 싶어한다. 여자도 남편과의 관계에 이렇다 할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의 로맨스가 극적으로 치닫기 힘들다는 건 일찍부터 읽힌다. 우리말 제목엔 ‘사랑’이란 단어를 넣었지만 이 영화는 로맨스에 주목하기보다, 이 보통 남자의 일주일 도쿄행에 동승해 그의 눈과 머리, 가슴에 다가오는 풍성한 디테일에 푹 빠져들(원제처럼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영화다. 도쿄 고층건물의 감각적인 광고판과 시끌벅적한 사람들, 수다스런 텔레비전 쇼, 극한의 관음증을 연출하는 나체쇼 클럽 등은 이국적이면서도 친숙하고 시간대가 불명확한 듯하면서도 동시대적이다. 옅은 블루 톤으로 찍힌 도쿄 시가지는 조금 멀리서 비추면 이내 우수를 머금는다. 여하튼 그 풍경을 우리가 보면서 어떤 단상을 갖는다. 동시에 국외자인 이 남자의 눈으로도 그걸 본다. ‘나는 이걸 봤는데 당신은 뭘 봤어’ 하는 식으로 그 남자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둘이 공감할 땐 기꺼이 웃음이 나온다. 그러면서 객지의 스산함과 외로움도 함께 깊어진다. 남자 역의 빌 머레이는 미남은 아니지만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 좋은, 편안한 얼굴이다. 대사가 적고 여백이 많은 이 영화는 인물의 심리를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해주지 않는다. 여자와의 관계에서 극적인 계기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건 남자와 여자의 작별 키스, 그리고 남자의 귀향이지만 거기까지 설레임, 갈등, 자책 등의 복잡한 심리가 이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