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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5] - 유운성

과거와 추억에 대한 반복되는 오해 거짓 기억과 거짓 치유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최근의 한국영화가 역사와 기억, 혹은 노스탤지어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 건 벌써부터 진부하게 들린다. 아니, 그게 얼마나 되었다고? 게다가 이를 주제로 삼은 비평적 분석들도 이미 꽤 되는 것 같다. 이런 글들은 대부분 동시대의 과거지향적 한국영화들에 나타난 미숙하고 퇴행적인 징후들을 지적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들이 어떤 식으로든 과거재현의 문제에 매달리고 있으며 스크린은 점점 그 재현된 과거와 대중의 욕망이 한데 만나 얽히고 융합되고 때로는 충돌하는 경합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뿐인가? 영화적으로 재현된 과거와 대중의 욕망이 뒤섞이는 저 스크린은 과거의 영화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절대적이고 숭고한 만신전이 아니다. 매끈한 육체를 지닌 스타급 남자배우들의 육체가 단련되기도 하고 상처입기도 함으로써 매혹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이 스크린,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표면에만 천착하는 텔레비주얼한 이미지 혹은 비디오-이미지들이다. 역시 진부한 이야기다. 플래시백? 플라시보! 그러니 잠시나마 좀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영화가 과거를 재현한다고 말할 때 정확히 우리는 어떤 과거를 지칭하는 것일까? 물론 (고전적인 개념의) 영화를 통해 재현되는 것은, 실시간 스크린(real-time screen)에서 떠오르는 텔레비주얼한 이미지가 아닌 이상 모두가 과거의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지금 상대적으로 그보다는 좀더 먼 과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역사로서의 과거? 기억으로서의 과거? 공적역사와 사적기억의 대립을 설정하고 나면 논의는 쉬워진다. 영화 속에 재현된 다양한 발화주체들의 사적기억을 보듬어 안으면서 공적역사의 균열을 섬세하게 탐색하는 영화는 당연히 상찬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몇몇 목소리들의 억압을 감행했다는 사실이 감지되거나(<말죽거리 잔혹사>), 지나치게 사적기억에 밀착하면서 역사를 탈색시켰다는 혐의가 발견될 때(<친구>) 그것은 사유의 천박함의 증거가 된다. 여기서 문제제기하고 싶은 것은 동시대 과거지향적 한국영화들이 어떤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은 공적역사와 사적기억의 조율의 실패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의 다양한 범주들을 그 고유의 자리에서 이탈시켜 어울리지 않는 문맥 속에 가져다두는 데서 그 한계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혹은 이 영화들이 불러들이는 과거와 대중의 기억, 그리고 개개인의 추억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영화적 사회’에서 영화들이 불러일으키는 플래시백 효과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혹시 그것은 우리를 오도하는 환상을 구태여 추억이라고 부르면서 과거의 상처, 죄의식, 그리고 부채감을 떨쳐내기 위한 거짓된 몸짓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때 플래시백 효과란 결국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아무런 약효도 없는 가짜 약을 진짜 약인 것처럼 속여 환자에게 복용시켰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을 일컬음. 위약효과라고도 한다- 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거짓 기억의 영화들 우선 과거의 다양한 범주들을 좀더 공적인 것에서부터 사적인 것의 순으로 나열해보자. 일단 단선적이고 인과관계에 따라 기술되는 공식적인 역사가 있다. 다음은 비록 공식적으로 사료화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대중의 뇌리에 잠재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비인칭적(impersonal)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은 종종 불균질적이고 다수적인 것들의 공존으로 특징지어지는데- 따라서 다중(多衆·multitude)의 기억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과거지향적 한국영화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중의 이러한 비인칭적 기억을 자극하고자 한다. 이보다 더 사적인 것에 속하는 과거는 개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적인 역사들로 미시사적 연구의 대상이 될 법한 것들이다. 마지막 범주는 역사나 기억이라기보다는 추억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단편적이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지만 강력한 반짝임 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극히 개인적인 과거의 이미지들 말이다. 추억 앞에서 재현은 무력해진다. 혹은 추억은 재현의 강요와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과거를 불러들인다. 좀더 관심을 좁혀 <친구> <해적, 디스코왕 되다> <품행제로>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르는 이른바 ‘노스탤지어 영화’들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위의 목록에 과거의 범주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 사실 노스탤지어라는 말은 이 영화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기에는 다소간 부적절한 용어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 과연 우리의 반짝이는 추억을 붙드는 영화들이란 말인가? 날카로운 반짝임을 무디게 하고 남은 것은 무용담이다. 날카로움이 사라진 자리가 크면 클수록 ‘사나이’들의 몸짓은 더더욱 격한 것이 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멋들어지게 춤추고, 부수고, 찢고, 베고 해봐야 사라진 추억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사실상 이런 영화들은 ‘○○○세대에 바쳐진 영화’가 아니라 추억이 없는 세대에 바쳐진 영화들이다. 개개인의 수많은 추억들은 단조로운 거짓 기억 앞에서 제물이 된다. 그런데도 그 영화들을 통해 재현된 과거는 여하간 추억이라 불린다. 차라리 우리는 이들 영화를 ‘거짓 기억(false memory)의 영화’들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디테일은 사라진다. 더 정확하게는 이러한 재현으로부터 우리가 바르트적인 푼크툼(punctum)을 발견할 가능성은 사라진다. 대신 얼른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환유적 대상들- 교련시간, 복장검사, 폭력적인 교사들, 패싸움, 디스코 그리고 이소룡 기타 등등- 이 우리 눈으로 불쑥 침범해 들어온다. 문제는 우리가 이 환유적 대상이 범람하는 것을 흔히 디테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속임수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숏은 바뀌고 인물들은 날뛴다. 인물들은 점점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기 시작하고, 환유적 대상들은 과장되고 변형되어 고달프고 억압적이었던 시대를 뜻하는 거대한 상징물이 된다. 또한 실재했던 환유적 대상들을 요소로 취하는 허구적 관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들 영화의 재현은 우리가 차마 마주하길 두려워하는 과거를 대신하는 거짓 기억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과거와 대면하는 대신 상상적으로 이 대상들만을 처리하면 된다. 트라우마 내세우기 여기까지의 논의를 통해 짐작했겠지만, 추억을 가장한 거짓 기억은 어느새 비인칭적인 대중의 기억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한다. 때로 그것은 실재했던 환유적 대상들을 요소로 취하는 허구적 관계들을 향한 허구적 저항을 ‘억압적이었던 과거’를 향한 발언으로 내세우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교련복은 벗어던질 수 있어도 기억에 문신처럼 새겨진, 의식의 약한 틈을 뚫고 끝없이 반복해서 빠져나오는 외상(trauma)은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법이다. 혹은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처럼 의도적으로 공식적 역사나 대중적 기억에 대한 거리두기의 전략이 취해지기도 하지만, 이건 자신도 모르게 그 시기를 지나쳐오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가 스스로의 당혹스러움- 그 시기를 지나쳐온 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죄의식, 부채감, 상실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당혹감. 혹은 아무런 외상도 없다는 데서 생기는 허구적인 외상- 을 감추기 위해 휘감은 가장(假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에게 각인된 외상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영화가 외상에 역사성을 부여하려 하면 할수록 그건 점점 더 기이한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이때 우리는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기원을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하고 일부러라도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이른바 ‘노스탤지어 영화’들이 흔히들 생각하듯 탈역사적, 반역사적, 혹은 무역사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더더욱 외상을 내세우고 그 기원에 집착함으로써 지나치게 역사적이고자 하기 때문에 한계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 말이다. 여기서 ‘노스탤지어 영화’들은 <살인의 추억>이나 <실미도> 같은 ‘역사실화극’들과도 만난다. ‘추억으로서의 영화’는 아직껏 없었던 대신 추억과는 다른 과거의 범주들을 어떻게든 추억으로 위장해 보여주려는 영화들만이 존재한다. 참으로 이상한 플래시백이다.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1]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2] - 이동진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3] - 정한석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4] - 심영섭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5] - 유운성

[파리] <아르테>, 영화지원 정책 본격화

“유럽인들을 위해 문화적, 세계적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 방영할 것”을 슬로건으로 삼고 있는 프랑스-독일 중심의 유럽 합작 텔레비전 채널인 <아르테>(Arte)는 1991년 창사 이후 10여년 동안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예술 채널로서 기능해오면서 동시에 영화분야(제작 및 배급)에도 관심을 보여왔다. 2003년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아르테>는 연간 총매출액의 약 5% 이상을 영화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프랑스의 다른 텔레비전 채널들의 투자비율(약 3.2 %)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치다. 제롬 클레망 <아르테> 회장은 2004년 2월3일 공식발표를 통해 향후 <아르테>의 영화지원 정책을 표명했다. <아르테>는 앞으로 연간 20여편의 비상업적 독립 장편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제작 지원과 함께 창작 다큐멘터리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러한 정책을 기반으로 <아르테>는 2004년에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연작영화, 샹탈 애커만의 <내일 우리는 이사간다> 등을 공동 제작했으며, 현재 베누아 자코, 왕가위, 로베르 게디기안, 라스 폰 트리에,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의 영화들이 <아르테>의 지원에 힘입어 제작 중에 있다. 정보와 지식의 전달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방송 다큐와는 달리, 창작 다큐멘터리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작가 고유의 관점과 관객과의 문제의식의 공유라는 특성을 지닌다. 2003년 니콜라 필리베르의 다큐멘터리 <마지막 수업>(사진)의 세계적 성공에 고무된 <아르테>는 앞으로 1년에 3편의 창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계획이다. 지난해 칸영화제에 초청되고 2004년 2월 상영관 개봉 뒤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는 캄보디아 출신 시네아스트 리티 판의 는 <아르테>가 공동 제작한 창작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사 신문 제32호 (1975∼1976년)

존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유작이 된 <살로, 소돔의 120일>. 파졸리니는 이 영화 촬영을 끝내고 3주 뒤 , 그의 영화배경으로 여러 차례 등장했던 오스티아 해변에서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했다. 파졸리니, 의문의 죽음 시체에 난 상처 단독범행 의구심 파시스트 테러 가능성 등 '배후설 제기 누가 파졸리니를 죽였는가? 이탈리아 경찰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살해를 17살 소년 피노 펠로시의 단독 범행으로 잠정 결론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졸리니의 죽음을 둘러싼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 가고있다. 펠로시의 단독 범행으로 보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펠로시의 뒤에 ‘누군가’ 있다는, 이른바 배후설이 제기되고 있다. 파졸리니는 1976년 11월2일, 로마 근교의 오스티아 해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은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가슴에는 자동차 바퀴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이에 경찰은 파졸리니가 심하게 얻어맞은 뒤 자동차로 가슴을 치인 것으로 추정했다. 사건 직후 살인 용의자로 검거된 피노 펠로시는 “파졸리니가 죽을 때까지 때렸다”라고 시인했지만 “차로 친 기억은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펠로시는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Sal o le 120 Grinate di Sodoma)에 출연하기도 했던 소년으로 동성애자인 파졸리니는 사건 당일 밤 오스티아 해안 근처의 빈민가에서 그를 ‘픽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경찰은 이번 사건을 ‘성범죄’로 단순 결론지었다. 하지만 곧 의문들이 제기됐다. <에우로페로>는 “펠로시 혼자가 아니다. 범인은 두명의 폭주족이며, 마약세계의 깡패들이 개입되어 있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심지어 <코리에레>는 파졸리니의 죽음을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추측했다. 이같은 의문들이 제기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17살 소년이 혼자만의 힘으로 성인 남성을 때려죽였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정황상 누군가 파졸리니를 붙잡고 여러 명이 함께 두들겨패지 않고는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파졸리니에게 ‘적’이 많았다는 점도 이러한 배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좌파였던 파졸리니는 소설과 시, 영화를 통해 이탈리아 정부와 지배계급을 정면으로 비판해왔다. 죽기 일주일 전에도 그는 “모든 지배계급을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라는 ‘급진적인’ 글을 발표했다. 이같은 행보가 여당인 기독교민주당과 급부상 중인 네오파시스트 집단의 심기를 건드렸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1971년 군부와 네오파시스트 집단이 쿠데타를 기도한 뒤 지금까지 이탈리아 정국은 혼란 상태이며, 그 와중에서 극우파의 테러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정치 상황이 파졸리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이번 배후설의 핵심이다. 하지만 펠로시의 배후에 대한 수사는 아직 이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영화, 이렇게만 파시오 마케팅의 승리로 기록된 <죠스>의 흥행 신기록 27살의 애송이 감독이 만든 영화 한편의 대성공으로 할리우드는 지금, ‘마케팅’에 미쳐 있다. 이 영화가 흥행 신기록을 거둠에 따라 때로는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파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제작자 리처드 D. 자눅이 이 영화 한편으로 그의 아버지이자 전설적인 제작자인 대릴 자눅이 평생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가 바로 그 영화다. 유니버설은 <죠스>를 개봉하면서 대대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죠스> 제작비 1200만달러의 1/5 수준인 250만달러를 마케팅 비용으로 쏟아부었으며, 그 대부분을 개봉 1주일 전에 몰아서 썼다. 우선 개봉 전 관객에게 <죠스>를 인식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홍보전을 펼쳤다. 무려 70만달러를 들여 텔레비전 프라임 타임대에 광고를 내보내는가 하면, 스탭들이 개봉 8개월 전부터 토크 쇼에 출연해 <죠스> 홍보에 열올렸으며, 죠스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간명하고도 강렬한 포스터로 거리를 도배하고 존 윌리엄스가 만든 주제음악을 라디오로 내보냈다. 사전에 판권 계약을 한 원작소설은 개봉에 맞추어 출판되었다. 또한 유니버설은 <죠스>를 ‘와이드릴리즈’했다. 지금껏 와이드릴리즈는 별볼일 없는 영화를 개봉하면서 나쁜 입소문이나 리뷰가 나돌기 전에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 취하던 전략이었다. 하지만 유니버설은 와이드릴리즈가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는 1975년 6월20일 북미 전역, 464개의 개봉관에 <죠스>를 풀었다. 관련 상품들도 흥행에 바람몰이 노릇을 했다. 곧 사운드트랙, 티셔츠, 플라스틱 컵, 비치 타월, 상어 복장, 포스터 등 갖가지 상품들이 영화와 함께 끼워팔기(tie-ins) 품목에 올랐다. 이같은 홍보전에 힘입어 <죠스>는 250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모두 1억295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아듀, 버너드 허먼 영화음악가 버너드 허먼이 1976년 12월2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살. 13살에 작곡상을 수상하고 20살에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설립했던 허만은 30년대 오슨 웰스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위해 곡을 썼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허만은 웰스의 데뷔작 <시민 케인>의 음악을 맡으면서 영화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이후 <싸이코> <현기증> <새> 등 히치콕 영화 9편에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유작은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 그는 이 영화의 녹음을 끝낸 지 몇 시간 뒤에 세상을 떴다. 한편, 마틴 스코시즈는 <택시 드라이버>를 허만에게 바치겠다고 밝혔다. 그리말디, <1900년> 후폭풍 불까 '노심초사' 흥행 참패로 신작일정 줄줄이 삐걱… 유럽예술영화계까지 할리우드 투자 위축될까 걱정 이탈리아의 명제작자 알베르토 그리말디가 요즘 고민에 빠졌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신작 <1900년>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그의 이후 일정이 차질을 빚게 된 탓이다. 당장 대시엘 해밋의 <피의 수확>을 영화화하기로 한 베르톨루치의 차기작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그리말디가 제작하고 세르지오 레오네가 연출하기로 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제작이 연기되었다. 하지만 더욱 큰 걱정은 <1900년>의 실패로 유럽예술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의 투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간에는 광범위한 합작이 시도돼왔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감독들 등 수많은 유럽 감독들이 미국의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할리우드의 투자가 가장 활성화된 곳은 이탈리아였다. 예컨대 1968년 이탈리아영화에 투자된 900억리라 가운데 이탈리아 자본은 220억리라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미국의 자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알베르토 그리말디는 1967년 미국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사와 계약을 맺고 미국-유럽 합작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파졸리니의 <켄터베리 이야기> <데카메론> <아라비안 나이트> 등이 그가 제작한 영화들이다. 그리말디의 목표는 위대한 예술영화 감독들을 상업영화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영상예술과 스펙터클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1972년 그리말디는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제작한다. 이 영화는 X등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만 4천만달러의 수익을 거두어들였다. <파리…>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갖게 된 그리말디와 베르톨루치는 대작인 <1900년>의 제작에 돌입했다. 그리말디는 제작비를 높이기 위해 파라마운트, 폭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등 세 회사에 영화를 팔았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를 본 스튜디오 관계자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상영시간이 무려 6시간15분이었던 것이다. 계약 당시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3시간20분을 넘어선 안 된다고 못 박았던 터였다. <1900년>의 편집을 둘러싼 논란은 끝내 법정 공방으로까지 비화됐다. 그리고 메이저 영화사들은 상영시간을 4시간8분으로 축소한 버전을 극장가에 풀었다. 하지만 <1900년>은 비평에서도, 흥행에서도 죽을 쑤고 말았다. 그러자 영화사들은 그에 대한 ‘응보’로 그리말디의 신작에 대한 투자를 철회했다. 영화계 '우먼파워' 물결 메자로스 <어돕션>으로 베를린 그랑프리 <인디아송> 등 페미니즘영화 잇따라 발표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라! 최근 들어 여성감독들의 스크린 진출이 괄목상대하고 있는 가운데,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성감독이 영예의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헝가리 여성감독 마르타 메자로스의 <어돕션>이 1975년 7월8일 폐막한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성감독이 그랑프리를 차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마르타 메자로스의 <어돕션>은 유부남 애인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43살의 독신여성 케이트와 그녀의 삶에 갑자기 뛰어들어온 보호소 소녀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성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흑백영화다. 메자로스는 남편인 미클로시 얀초, 이스트만 자보와 함께 헝가리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돕션>의 그랑프리 수상은 여성영화의 현주소를 가늠하게 하는 시금석의 의미를 갖는다. 60년대 중반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여성영화는 질과 양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1975년 한해만 살펴보아도 모더니즘영화의 사건으로 평가받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송>,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 마가레타 폰 그레타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영예> 등이 발표되어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이론진영에서는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라는 논쟁적인 글을 발표했다. 베리만, 무니치에 안착하다 스웨덴의 대표 감독, 조국을 등지고 독일에 정착하게 된 사연 <마술 피리>. 잉마르 베리만이 스웨덴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감독 잉마르 베리만이 마침내 독일 무니치에 정착했다. 스웨덴을 등진 뒤 여러 곳을 떠돌던 베리만은 “스톡홀롬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무니치를 제2의 고향으로 택했다. 베리만이 스웨덴을 떠나게 된 건 느닷없이 벌어진 세금포탈 사건 때문이었다. 외국에 유령 회사를 차려 세금을 포탈했다는 게 그에게 덧씌워진 혐의였다. 1976년 1월30일, 베리만이 4월 프리미어를 앞두고 <죽음의 춤>을 연습하고 있던 극장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용의자’인 베리만이 도주할 것을 우려해 극장 입구를 봉쇄한 경찰은 세금포탈 혐의로 베리만을 연행해갔다. 사단은 이렇다. 베리만은 1967년 스웨덴 은행의 허가 아래 스위스에 ‘페르소나 리미티드’라는 재단법인을 설립한다. 페데리코 펠리니와 함께 신작 <러브 듀엣>을 찍기 위해서였지만 이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이어 추진하던 영화마저 무산되자 그는 법인을 해산했다. 하지만 스웨덴 국세청은 “페르소나 리미티드가 한 일이 없으므로 세금포탈을 위해 설립한 유령 회사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단정지었다. 그리고는 쉽게 연락이 닿지 않는 베리만을 붙잡기 위해 극장을 급습했던 것이다. 베리만은 <죽음의 춤> 연습에 몰두하느라 외부와 거의 연락을 끊고 지냈다. 이날 베리만은 경찰에 끌려가 3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때 그를 따라온 경찰은 그의 아파트를 뒤져 개인문서와 여권 등을 압수해갔다. 하지만 경찰은 그에게서 특별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일은 베리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에게 쫓기는 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2달간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퇴원 뒤 3월22일치 <엑스프레센>에 실린 서한을 통해 스웨덴을 떠날 계획임을 밝혔다. 이 서한에서 그는 “창작을 할 수 없으면 존재할 수도 없는데, 이 나라에서는 더이상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밝혔다.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도 숨기지 않았다. 스웨덴을 떠난 베리만은 파리로 갔고, 파리를 거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를 둘러본 그는, 하지만 미국에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여러 나라의 수도를 떠돌다 무니치를 망명지로 선택했다. 호금전의 <협녀>, 칸에서 기술 인정 호금전의 <협녀>가 1975년 칸영화제에서 기술대상을 수상했다. 1966년 <대취협>으로 데뷔한 이래 무술영화 장르를 크게 혁신해온 호금전 감독이 대만으로 이주, 무술영화를 위한 스튜디오를 설립해 만든 <협녀>는 제작에 3년이 걸린 대작. 홍콩에서는 이미 1971년에 개봉됐다. 소련 자본 ‘구로사와’표 영화, 미국서 수상 구로사와 아키라가 소련 자본으로 만든 영화로 미국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도데스카덴>의 실패 이후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구로사와는 소련의 모스필름에서 제작한 <데루스 우잘라>로 197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데루스 우잘라>는 이미 1975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편집인 이유란

[주말 극장가] 학교간 록커, 허리붙은 쌍둥이 "누가 더 웃길까"

한국영화 개봉작이 없는 이번 주말은 움츠렸던 외화들이 간만에 '기를 펴는' 타이밍이다. <붙어야 산다>, <베로니카 게린>, <실종>, <스쿨오브락>, <브링 다운 더 하우스>, <타임라인>, <리지 맥과이어>, 까지 8편 모두가 외화다. 코미디부터 멜로, 액션, 드라마, 스릴러까지 장르도 다채롭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여전히 극장가를 주름잡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외화들이 얼마나 선전할지 김은형 기자를 따라 주말 극장가를 미리 가본다. 편집자 주 학교에 간 록커·허리붙은 쌍둥이 “누가 더 웃길까” 이번 주에는 코미디의 두 강적이 극장가에 뜬다. 젊은 코미디 배우 잭 블랙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스쿨 오브 락>과 화장실 유머의 시조로 추앙받는 패럴리 형제 감독의 <붙어야 산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주인공과 감독으로 만났다가 이번에는 경쟁자로 만나게 됐다. <스쿨 오브 락>은 재능은 없지만 열정만은 차고 넘치는 록커가 우연히 사립초등학교에 임시교사로 들어가 어른들의 등쌀에 풀죽은 아이들에게 록음악의 에너지를 불어넣어준다는 이야기다. <붙어야 산다>는 허리가 붙어있는 쌍동이 형제가 할리우드에 오면서 벌이는 좌충우돌을 발랄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두 영화 모두 가족 코미디의 공식에서는 약간 비껴나 있는 영화지만, 가족나들이로, 또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모두 모자람없는 만족감을 줄 만한 영화다. 강한 여성상을 연기해왔던 실력있는 여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한 두 영화도 나란히 개봉한다. 혼자서 거대 마약책과 전쟁을 벌이는 아일랜드 여기자의 실화를 그린 <베로니카 게린>과 어린 딸을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유괴당한 어머니의 분노와 투쟁을 그린 <실종>. <실종>은 <뷰티풀 마인드> <랜섬> 등의 론 하워드가 감독한 작품으로 서부개척시대의 거대한 자연풍광이 볼 만하며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올랐던 작품이다. 지난해 초부터 개봉이 잡혔다 미뤄졌다를 반복했던 프랑소아 오종 감독의 도 드디어 개봉한다. 크리스마스날 교외저택에서 고립된 한 가족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뮤지컬 형식으로 그리는 이른바 ‘스릴러 뮤지컬’로 카트린 드뇌브를 비롯해, 이자벨 위페르, 임마누엘 베아르 등 쟁쟁한 프랑스 여배우들이 총출동한다. ‘붙어서 뜬’ 형제 떨어지면? 바인야드라는 시골마을에서 햄버거집 ‘번개 버거’를 운영하는 밥과 월트 형제. 얼굴도 따로 손도, 발도 따로지만 하나의 간을 같이 쓰는 샴쌍둥이인 이들은 이 마을 인기‘짱’이다. 야구면 야구, 축구면 축구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스포츠맨에다가(이 ‘따로 또 같이’ 커플이 골키퍼로 나서면 이미 경기 끝이다) 연례행사인 마을 연극에서 늘 주인공을 맡는 빼어난 배우이며, 식당에서는 손 네개, 발 네개로 순식간에 햄버거 열세트를 뚝딱 만들어내는 이들을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영화는 말하지만 뭔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사진 한번 공개되면 전국민의 연민의 대상이 되는 희귀장애인들이 인기스타가 되다니.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와 난장이(<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 팔없는 볼링선수(<킹핀>), 엄청난 뚱보(<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연민이나 조롱없는 코미디를 만들어온 패럴리 형제의 영화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붙어있을 때 기쁨 두배’가 되는 두 형제가 언제나 함께 일해온 패럴리 형제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붙어야 산다>는 붙어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황당한 에피소드를 유쾌하게 펼치는 코미디 영화다. 운동신경 탁월하지만 소심한 밥(맷 데이먼)과 예술가적 기질과 바람둥이 기질 다분한 월트(그렉 키니어)는 서로의 취향과 일상을 존중하면서 함께 살아간다. 밥이 좋아하는 운동을 할 때는 월트가 함께 뛰고 월트가 연기를 할 때는 밥이 관객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 스타킹을 입고 무대에서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월트가 할리우드 진출을 선언하고 나서면서, 그리고 밥이 채팅으로 사귄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비밀을 공개할 때가 되면서 ‘붙어있음’은 이들에게 장애로 다가온다. <붙어야 산다>는 전작들에서 형제감독의 편집증적인 집착처럼 보였던 ‘비정상’, 또는 비주류에 대한 관심이 실은 진심어린 애정이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월트는 비록 약발 떨어진 늙은 여배우 셰어(그는 실명으로 등장해 자신을 연기한다)의 이용 목적으로 텔레비전 드라마 캐스팅이 되기는 하지만 인기스타가 된다. 밥을 카메라에 등장시키지 않기 위해 벌이는 제작팀의 조야한 트릭은 영화의 가장 웃기는 장면 중 하나. 가슴성형수술을 받은 배우 지망생 에이프릴이 이들의 모습을 보며 “와아, 그건 어디서 수술받은 거야”라고 묻는 장면은 일반인보다 훨씬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드는 할리우드의 편견을 살짝 꼬집는다.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밥을 위해 월트는 분리수술을 결정하고 실행한다. 그러나 30년 이상 붙어살아온 이들에게 분리된 환경은 또 다른 재난으로 다가온다. ‘붙어있음’은 사랑이고, 중요한 건 남에게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서로를 ‘내몸같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짓궂은 감독형제는 따뜻한 결론을 내린다. 다만 훈훈해진 만큼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지체없이 ‘막 가는’ 유머의 통쾌함은 다소 완화됐다. 화장실 유머의 시조로서 패럴리 형제를 모셔왔던 관객들에게는 이렇게 착한 결론이 밋밋하거나 느끼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27일 개봉. 막강원작·감독 만나 어수선한 시간 여행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마이클 크라이튼의 베스트셀러 소설 <타임 라인>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중세 고성의 유적 발굴 작업을 하던 일군의 젊은 고고학자들은 우연히 600년 이상 꽁꽁 숨어있는 지하유적을 발견한다. 그런데 양피지 필사본 등 내부 유물 가운데 이들의 지도교수인 존스턴의 안경알과 직접 쓴 구조요청 편지가 들어있다. 후원사인 ITC에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이들은 ITC가 양자 원격 이동 장치를 발명했고, 존스턴은 며칠 전 이 장치를 타고 중세로 갔다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타임 라인>은 액션 블록버스터 가운데 명작으로 꼽히는 <리썰 웨폰> 시리즈의 리처드 도너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다. 막강 원작자와 막강 감독이 만났지만 시너지 효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듯해 아쉽다. 프랑스-영국 간 백년 전쟁의 한가운데 뚝 떨어진 인물들을 통해 감독은 중세시대의 액션 스펙터클을 끌어내고자 한다. 그런데 특별한 연유도 없이 죽어가는 대원들을 비롯해 영화 전체가 어수선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컴퓨터그래픽을 마다하고 실제 크기로 만들었다는 고성의 위용이나 중세의 우아한 스펙터클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10대 겨냥한 <리지 맥과이어> 무모하리만치 깜찍한 디즈니표 <로마의 휴일> 동화 속 그림 같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 꽃미남 소년과의 달콤한 데이트, 눈부신 조명 한가운데 서는 스타 되기. 십대의 한 시절에는 누구나 한번쯤 빠져봤을 몽상이다.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며 예쁜 스티커로 다이어리를 알록달록 꾸미는 십대 소녀들을 겨냥해 만든 <리지 맥과이어>는 이런 판타지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틴에이저 영화다. <평범한 여중생의 일상을 그린 디즈니의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리지의 사춘기>를 극장판으로 확장한 이 영화는 <로마의 휴일>의 십대 버전 같다. 다만 <로마의 휴일>에서는 로마라는 비현실적 공간에서 공주가 평민이 되지만, <리지 맥과이어>에서는 평범한 학생이 공주로 변신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로마에 단체 답사여행을 떠나는 리지 맥과이어. 학교에서는 실수 투성이에 공주님들의 구박덩이지만, 일상을 벗어난 이곳에서 뭔가 특별한 일을 기대하는 건 당연지사다. 길거리에서 만난 이탈리아의 아이돌 스타 파올로는 리지를 자신의 연인이자 듀엣 파트너인 이사벨라로 착각한다. 파올로는 <로마의 휴일>의 그레고리 펙처럼 스쿠터를 타고 리지를 로마의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그리고는 사라진 이사벨라 대신 자신과 함께 뮤직비디오 시상식장의 무대에 올라가자는 제안을 한다. <리지 맥과이어>는 십대소녀의 콩닥거리는 가슴 대신 늙고 심각한 이성으로 보기에는 말 안 되는 구석이 많은 영화다. 또한 디즈니표답게 십대의 우울함이나 고민 대신 밝고 귀여운 부분만 부각한다. 그러나 무모하리만치 깜찍한 판타지 역시 젊기 때문에 꿀 수 있는 꿈 아닌가. 그래서 <리지 맥과이어>는 십대 소녀의 철없는 몽상이라는 전제를 깔고 봐도 싱그럽고 유쾌한 영화로 즐길 만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이어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은 17살의 힐러리 더프는 리지 역을 통해 영화 속 리지의 꿈을 이룬 10대 스타다. 짐 폴 감독. 27일 개봉.

[런던] 영국 아카데미는 할리우드를 좋아해?

지난 2월15일 열린 브리티시 아카데미필름 앤 텔레비전 아트(BAFTA)는 예년과 다름없이(!) 할리우드영화들이 강세를 보인 행사였다. 이미 노미네이션에서 예상됐듯이, 각 분야의 후보에 오른 대부분의 영화들이 할리우드영화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 수상 결과가 놀라울 이유는 전혀 없는 것 같다. 단지 예외라면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최고 작품상을 수상한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피터 잭슨 감독이 최고 감독상을 놓치고, 최고 각색시나리오상을 수상했다는 것 정도. 최고 감독상은 역시 영국산 소설을 바탕으로 한 해양모험영화를 선보인 호주 출신 감독 피터 위어에게 돌아갔다. 한편,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주연을 맡았던 빌 머레이와 스칼렛 요한슨이 각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특히 <진주 귀고리 소녀>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동시에 두번 오른 스칼렛 요한슨은 영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여우조연상은 <콜드 마운틴>의 르네 젤위거가, 남우조연상은 <러브 액츄얼리>에서 나이들어서도 여전히 짓궂은 록스타 역할을 연기한 빌 나이히가 수상, 유일하게 영국영화의 자존심을 세웠다. 이외에 영국영화로는 산악다큐멘터리영화 <터칭 더 보이드>가 알렉산더 코더 특별 영국 영화상을 수상했고, 에밀리 영이 <키스 오브 라이프>로 영국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에게 주는 특별상을 수상했다. BAFTA 안에서도 영국영화가 발붙일 자리는 영국영화에만 한정해서 주는 상들에만 국한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등의 영화로 유명한 영국 감독 마이클 윈터보텀은, 정작, 아프가니스탄 난민 소년의 여정을 다룬 영화 <인 디스 월드>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런 정황들 때문에, BAFTA는 영국영화에 대한 시상식이라기보다는, 영어권 영화들을 대상으로 상을 주는, 미국 아카데미처럼 되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는, 미국 아카데미의 덜 글래머러스한 사촌 정도라는 자조적인 시선이 지배적이다. 런던=이지연 통신원

VOD상영관, 예술영화의 새로운 배급모델?

2월20일 한국영화 최초로 온라인·오프라인 동시개봉한 <욕망>의 흥행 성적이 흥미롭다. 네이버의 VOD상영관에서 하루 평균 500∼600명의 유료 관객이 몰리며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데 반해 예술영화전용관 네트워크인 아트플러스를 찾는 관객은 그 10분의 1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26일 현재 3천원의 관람료를 내고 <욕망>을 본 관객 수는 5천명선. 이 속도라면 개봉 3주차에 1만명 돌파가 가능하다. 네이버쪽은 <욕망>이 2만∼3만명 선에는 무난히 도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지금까지 네이버의 VOD상영관 최고 흥행작은 4만명을 기록한 <몽정기>다). <욕망>의 이같은 ‘선전’은 제작사인 명필름도, 네이버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터넷의 VOD상영관이 예술영화의 대안적 배급망의 하나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명필름의 박재현 마케팅 실장은 “예술영화인 동시에 디지털영화라면 유력한 개봉관으로 상영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면 온라인으로 개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HD 카메라로 제작된 디지털영화 <욕망>은 텔레시네라는 가공의 과정을 거친 필름 제작 영화에 비해 VOD상영관에서 화질과 사운드에서 월등한 경쟁력을 보인다는 것이다. 수익 규모의 측면을 감안하면 저예산영화여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할 수 있다. 관객 1만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제작사에게 돌아오는 몫은 1700만원. 9억원이 들어간 <욕망>의 제작비 회수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관객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간판’을 내리지 않는 VOD의 특성을 고려하면 ‘지속성’의 문제에선 오프라인 극장보다 유리해 보인다. 네이버 웹기획자 박문칠씨는 “3∼4년째로 접어드는 VOD상영관은 현재 과도기적 단계여서 배급·유통만 담당하는 지금의 기능에서 멈출지 아니면 더 확장할지 검토 중”이라며 “우리 입장에선 성인 코드의 영화뿐 아니라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관객 사이에 이슈가 되는 예술영화도 온라인 상영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새DVD] <참을수 없는 사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외

<참을 수 없는 사랑> 감독 조엔 코언/출연 조지 클루니, 캐서린 제타 존스/화면비율 1.85:1 아나모픽/사운드 DD & DTS 5.1 돈 밝히는 변호사 남자와 남편을 속옷 갈아입듯 갈아치우며 거액의 위자료로 살아가는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 코언 형제의 영화답게 로맨틱 코미디지만 낭만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냉소적인 영화다. 그럼에도 부록으로 들어있는 감독의 영화소개에서는 코언은 “그저, 사람들이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로맨틱 코미디니까” 라고 얘기한다. 유니버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화면비율 1.85:1 아나모픽/사운드 DD 모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애니메이션. 디스토피아적 미래세계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웅대한 서사시처럼 그려냈다. 부록 가운데 98년 일본 텔레비전에서 방영했다가 DVD용으로 다시 편집한 28분짜리 ‘지브리 탄생 이야기’를 놓치기 아깝다. 지브리 타이틀 가운데 음성해설이 처음으로 들어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 원화를 담당했던 안노 히데아키가 해설에 나섰다. 대원C&A홀딩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 감독 로베르트 로드리게즈/출연 안토니오 반데라스, 셀마 헤이엑, 조니 뎁/화면비율 1.78:1 아나모픽/사운드 DD 5.1 & 2.0 초저예산 영화 <엘 마리아치>, 이 영화의 대박을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한 뒤 만든 <데스페라도>를 이은 로드리게즈 감독의 ‘엘 마리아치’ 3부작 완결편. 감독이 직접 HD 카메라를 들고 찍은 제작 과정을 비롯해 DVD에서만 즐길 수 있는 부록들이 풍성하다. 영화지망생들을 위한 ‘10분 영화 교실’은 HD카메라로 찍은 장면을 컴퓨터에서 가공해 영화의 장면을 완성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셀프 카메라로 찍은 감독의 깜짝 요리교실도 귀여운 부록. 콜롬비아.

<논스톱> 시리즈, 그 얄팍한 매력에 대하여 [2]

그렇다면 <논스톱>이라는 장르가 해낸 것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시리즈가 아직 능력과 가능성이 입증되지 않은 반반한 외모의 젊은 신인들을 위한 신병훈련소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인정받는 스타가 된 장나라, 조인성, 정다빈, 양동근, 김정화와 같은 배우들은 모두 본격적인 스타로 진입하기 전에 <논스톱>을 거쳤다. 그들에게 처음으로 맞는 이미지를 찾아준 것도 <논스톱>이었고 일주일에 5일 방영되는 일일 시트콤의 강행군을 통해 배우로서 어느 정도 수준으로 기능할 수 있게 도와준 것도 <논스톱>이었다. 이런 신병훈련식 접근법은 시리즈의 이야기와 캐릭터들에 예측 못할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논스톱>에서 캐릭터는 계획대로 만들어지는 대신 시리즈가 흐르는 동안 배우들과 함께 성장과 탐색을 거듭했다. 캐릭터들의 발전은 종종 예측불허였으며 덕택에 설정만 따진다면 무개성적이기 짝이 없는 로맨스들의 성과도 높아졌다. 지금도 기억되는 경림과 인성, 동근과 나라의 로맨스는 반쯤은 의식적이고 반쯤은 장르와 습관에 갇힌 진부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들의 상품 가치를 높이고 7시 시간대의 시청자를 되찾기 위한 방향없는 시도가 서서히 고유의 개성을 구축했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할 듯하다. 말 그대로 <논스톱>은 코미디를 만들기 위해 뭐든지 했다. 필요하면 캐릭터의 성격을 중간에 바꾸었고, 제4의 벽을 깨뜨렸고, 물리법칙을 비틀었으며, 한동안 그래도 안 해보려던 패러디도 결국 쏟아부었다. 그러는 동안 시리즈와 시리즈가 그리는 세계는 일종의 무책임한 매력과 같은 것을 얻기 시작했다. <논스톱>의 세계에서도 학교수업과 취업고민, 경제적 격차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뭐든지 한다’의 진행 속에서 서서히 자기만의 규칙을 갖기 시작했다. 학부생에게 수업보다 교수의 세미나가 더 중요하고 부모 세대의 사람들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연애에서부터 경제문제에 이르기까지 평균보다 훨씬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심지어 경림이나 몽처럼 심각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의 고민도 진짜 현실세계의 고민에서 살짝 벗어나 유형화된다. 이 시리즈에서는 현실에선 심각한 고민인 것도 과장된 농담과 캐릭터 구성을 위한 장난감이 된다. <논스톱>에서 대학은 현실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해방구가 된다. <논스톱>의 핵심도 그것이다. 예쁘거나 재미있는 젊은이들이 자기만의 장난감과 고민을 가지고 마음껏 놀 수 있는 환상 속의 공간만 존재한다면, 이 시리즈는 어떤 배우들이나 캐릭터들이 등장해도 여전히 <논스톱>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환상은 텔레비전 광고만큼이나 가짜이다. 하지만 비슷한 세계를 좀더 사실적으로 다루는 다른 시리즈나 영화에 비교해본다면 <논스톱>은 오히려 더 솔직하다. <논스톱>의 설정과 이야기는 너무나도 허황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그 이야기와 설정에 몰입하는 동안에도 그 환상을 현실에 그대로 대입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논스톱>이 주는 20여분간의 오락은 솜사탕처럼 입 속에서 사라진다. 특별히 남는 건 없지만 바로 이 시리즈가 원하는 오락 역시 바로 그런 것이다. <논스톱>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시청자들과 제작진들이 원하는 것처럼 계속 등장인물들과 배경들만 바꾸어가며 비슷한 농담들로 대를 잇는 프로그램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러는 동안 어떤 발전과 변화를 모색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에 안주하고 싶을 것이다. 지금까지 7시대 시트콤에 변화와 발전을 주려는 대부분의 시도는 좌절을 맛보았다. 사체과나 밴드부로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는 다 어디로 갔는가? 결국 흔한 짝짓기 이야기로 흘러갔다. <논스톱>의 성공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가장 안전한 길을 알아서 따라주는 데 있었다. 결국 <논스톱>의 고민은 장르물의 고민으로 연결된다. 어떻게 되면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온 단단한 공식들을 서서히 변해가는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추어가며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진부한 음악에 맞출 새로운 춤을 부여할 것인가. <논스톱4>가 가까스로 회복한 에너지로 이 고지를 넘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이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논스톱>이 배출한 스타들 여기에 실린 이름은 스타들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의 캐릭터의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의 시트콤이 배우들의 실명을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전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논스톱> 시리즈는 어느 순간부터 기존의 스타가 아닌, 새로운 얼굴들을 끌어들여 시청자들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그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대부분 적중했고, <논스톱>을 통해 이름이 알려진 ‘캐릭터’들은 이미 익숙해진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드라마나 영화로 활발하게 진출했다. <논스톱>을 계기로 무명의 딱지를 떼게 된 그 이름들을 다시 짚어보자. 어리버리 캔디_ 장나라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어리버리의 원조. 구리구리 양동근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에 어김없이 넘어가고, 매번 약점을 잡힐 때부터 수상쩍더니 이후 <뉴 논스톱> 후반부의 대표적 언밸런스 커플로 엮였다. 꾸밈없이 솔직한, 언제나 당하는 쪽이지만 굴하지 않는 캐릭터는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로 반복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영화 데뷔작인 <오! 해피데이>의 무시무시한 스토커도 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만한 인물. 아무리 망가져도 여전히 귀여운 캐릭터는 그의 전공 분야다. <논스톱3>의 이진 등이 그 계보를 넘보았으나 일단은 귀여움에서 그를 능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수려한 외모 어설픈 젠틀맨_ 조인성 “얘는 멋있다. 지금은 아닌 거 같아도 멋있어질 거라고 시청자들을 세뇌시킨다.” 권익준 PD의 표현에 따르면 ‘작정하고’ 멋지게 보이도록 만든 캐릭터. 수려한 외모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경림과 커플이 됐고, 덕분에 확실한 인기를 누렸다. 이후 굵직한 드라마 <별을 쏘다> 등은 물론이고, 영화는 <마들렌> 이후 세편에 출연했다. 충무로에 젊은 피를 수혈한 <논스톱> 시리즈의 공로가 확실하게 인정된다. 젠틀한 바른생활 사나이의 캐릭터는 이후, <논스톱3>의 조한선, <논스톱4>의 전진으로 변주된다. 속물이라고? 웬일이니, 웬일이니∼_ 정다빈 <단적비연수>에서 최진실의 아역을 맡았던 것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정다빈의 성장이 <논스톱> 시리즈의 공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뉴 논스톱>의 조연에서 시작하여, <논스톱3>에서는 짠돌이 최민용과 커플을 이루면서 주연급으로 연결된 케이스. 속물스러우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의 원조이다.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서는 김래원과 함께 ‘현실적인 그 모습이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확실히 각인시킨다.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미학은 가히 감동적이라고나 할까. 썰렁해도 멋있어_ 조한선 <논스톱3>가 시작된 지 몇달 뒤 합류한 ‘일종의’ 완벽남. 태우에 대한 마음 때문에 고생하던 정화를 남몰래 짝사랑하다가 결국은 커플로 맺어지고, 시리즈의 중심으로 진출했다. 정화가 유학을 떠난 뒤에는 다나와 의남매가 되면서 또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반반한 외모이면서 얼굴값은 못하고 썰렁한, 바른생활 캐릭터의 계보를 잇는다. 고구마와 치즈를 양손에 들고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는 CF에서 보여지는 썰렁함. 드라마 <좋은 남자>에서 보여지는 단순무식과격하지만 정에 약한 형사 강태평은 모두 <논스톱3>에서 익숙해진 그의 모습들의 일부였다.

넉살 좋은 홍반장과의 귀여운 로맨스, <…, 홍반장>

내로라 하는 부잣집의 금지옥엽 외동딸이지만, 아버지의 돈으로 쉽게 인생을 꾸려가는 대신 당당한 홀로서기를 꿈꾸는 치과의사 혜진(엄정화). 그러나 삶이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치과의사의 권리를 주장하며 기세 좋게 내던진 사표가 단번에 수리되는 바람에 갈 곳을 잃은 혜진은 착잡한 마음을 달래러 바닷가를 찾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어머, 이런 데가 다 있었네!” 공동 빨래장에서 사이좋게 빨래를 하는 아주머니들, 지나가는 이들에게 늠름한 인사를 건네는 갈매기, 허허실실 인심 좋은 동네 할아버지들, 지중해 풍광을 뺨치는 바닷가 풍경…. 혜진은 이곳에 치과를 개업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에서 일생일대의 적수를 만나게 되다니. 딱 한살 위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반말을 찍찍 날리는 홍두식, 일명 홍반장이 그녀의 ‘진상’이었던 것이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그만하면 쓸 만하고 수리면 수리, 배달이면 배달, 요리면 요리, 노래면 노래, 싸움이면 싸움…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백수 건달, 그러나 그 덕분에 마을의 모든 대소사에 반드시 끼어들며 그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단돈 일당 5만원으로 날품팔이하는 이상한 남자 홍반장. 그런데 ‘소셜 포지션’이 달라도 너무 다른 이 두 사람 사이에 서서히 로맨스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하 <홍반장>)은 제목에서부터 스스로의 정체성을 언명한다. 분명 귀에 익은 제목 아닌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짱가 엄청난 기운이. 얏! 틀림없이 틀림없이 생겨난다….’ <우주소년 짱가>의 주제가에서 곧바로 따온 기나긴 제목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숨어 있을 법한, 겉으로는 무척 평범한 이웃이지만 사건만 터지면 곧바로 해결사로 등장하는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을 예고한다. 그러니까 <홍반장>의 주요 축은 홍반장이라는 낯선 영웅의 디테일 묘사, 그리고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에서 시작되어 로맨스라는 놀라운 판타지의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개그 만화적 관점에서 따뜻한 웃음을 유발시킬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홍반장은 보기 드물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섬세하게 그려진다. 그는 만능 재주꾼으로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받지만 정작 자신은 마음 한구석을 꽁꽁 싸매고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소년 같은 남자이며, 제대 뒤 3년 동안 마을을 떠나 있던 공백기의 미스터리어스함으로 더더욱 호기심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홍반장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되도록 삭제한 채, 그저 이 특별한 남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권유한다. 그리고 관객은 논리를 일일이 따지지 않은 채 기분 좋게 그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무엇보다 영화의 두 번째 축, 개그 만화의 감수성을 제대로 포착한 디테일의 승리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작은 상황 하나만으로 캐릭터의 느낌이 충분히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폭과 양아치들이 난립하던 슬랩스틱코미디가 결여하고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캐릭터로부터 웃음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이끌려나와야 한다는 기본을 제대로 지키는 영화인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꾸 자기 주위를 맴돌며 도움을 주는 홍반장의 속을 떠보려는 혜진이 짐짓 시침떼며 물어본다. “너 나 좋아하는구나?” 남자,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짜증나…”라며 한숨을 쉰다. 닭살 돋는 로맨스의 억지 춘향, 우연 남발, 운명 지향주의는 깔끔하게 제거된 채 최대한 현실에 밀착된 대사와 더불어 고고함과 썰렁함을 오가는 남녀주인공의 순정 개그 만화적 감각을 최대한 확장시키는 순간에 비어져 나오는 웃음들은, 웃어야만 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웃으면서도 불쾌감을 떨칠 수 없었던 일련의 영화들과 달리 상쾌한 뒷맛을 남긴다. 여기에서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 <추억은 방울방울>의 정서가 얼핏 끼어든다. 도시 여자와 시골 남자, 환경과 계급과 성격이 너무 다른 두 남녀가 만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끌어안는 과정에 있어, 차가운 도시와 대비되는 시골의 수려한 자연 공간이 ‘여기야말로 사람 사는 곳’이라는 낭만적 판타지를 심어주며 두 남녀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도움을 주는 과정 말이다. 홍반장의 재촉으로 전공 분야도 아닌 산부인과 의사 노릇까지 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은 혜진이 홍반장과 함께 바닷가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는 장면의 지극한 센티멘털리티는, 그만큼 갑작스럽고 당황스럽게 지금까지의 착한 명랑함의 균형을 뒤흔드는 장치이다. 낭만을 최고치로 한껏 끌어올리고 난 뒤 영화는 그 낭만성의 반동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나머지 30여분은 전반부와 달리 약간 맥빠진 느낌의 순정만화로 일관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런 한계와 단점에도 불구하고 강석범 감독의 데뷔작 <홍반장>은 억지스럽지 않은 캐릭터의 탄탄한 구축으로부터 작은 웃음들을 직조해낼 수 있는 산뜻한 코미디영화의 좋은 예로 남을 만하다. 소박하게 휴머니즘의 가치에 찬사를 보내는 이 착한 영화 앞에서 미소짓지 않고는 배겨나기 힘들다. :: <홍반장>이 발굴한 매력남 ‘공구하고 싶은 남자’ 김주혁! <홍반장>에는 배우들이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엄정화와 김주혁, 간호선 미선 역의 김가연이 영화의 주요 파트를 책임지고 이끌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영화 <홍반장>과 캐릭터 홍반장의 매력을 최대로 살려낸 주인공 김주혁은 발군의 세련된 코미디 감각을 과시한다. 귀신도 울고 갔다는 확실한 배짱밖에 믿을 게 없는 사내 홍반장, 텔레비전 화면에서 막 기어나온 <링>의 귀신이 그 앞에서 훌쩍훌쩍 울며 “잘못했어요...”라고 칭얼거리는 장면에서의 김주혁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TV 드라마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도 어느 정도 선보인 바 있지만) 이 점잖고 차갑게만 보이던 배우의 어디에 이토록 능청맞고 허점투성이의 매력이 숨어있었나 싶게 놀라게 된다. 지금까지 주로 상대 여배우와의 협업을 통해서 ‘커플 파워’를 발휘해왔던 김주혁은 <홍반장>의 타이틀 롤을 연기하며 비로소 확실한 눈도장을 찍는다. 어쩌면 20대 초반까지의 여성들은 왜 혜진이 홍반장에게 매혹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굳이 찾아낸다면 라스트 신의 ‘와인 수십 병’이라는 낭만적인 장치 때문? 그러나 20대 중후반부터 30대에 이르는 미혼 여성들은 모두 하나같이 영화를 보는 내내 ‘홍반장 같은 남자라면...’라고 남몰래 한숨을 내쉴 것이다(그리고 일제히 그를 ‘통장’으로 추대할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김주혁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