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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평론가 정성일이 만난 <송환> 김동원 감독

독립영화 <송환>의 개봉(19일)은 독립영화인들뿐 아니라, 충무로 주류영화인들 사이에서도 화제다. 지난 8일 열린 특별 시사회장엔 이장호, 하명중을 비롯해 박찬욱, 김지운, 안성기, 유지태, 배두나 등의 감독과 배우들이 참석했고, 이 영화에 필름프린트 5벌 뜨는 비용을 지원한 강제규 감독도 자리를 함께했다. “예전에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컬럼바인>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많이 부러웠는데 이젠 전혀 부럽지 않다.”(권해효) “처음부터 끝까지 울면서 본 영화는 처음이다. 보는 사람의 감정을 쥐었다 놨다 하면서 감정과 이성을 한꺼번에 움직이는 영화였다.”(박찬욱) <송환>은 화제가 될 이유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다큐멘터리 집단 푸른영상의 대표인 김동원 감독이 92년부터 12년 동안,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쫓아다니며 촬영한 그 분량이 800시간에 이른다. 또 다큐멘터리임에도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촬영 중간인 2000년 9월에 비전향 장기수의 북한 송환이 있었고, 영화의 등장인물 중엔 북으로 간 이도 있고, 남은 이도 있다. 영화는 주제의식을 앞세우지 않고 사람에 주목한다. 신문의 몇줄 기사로 읽어온 우리 시대의 거친 역사가 실제 사람의 삶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체온과 체취를 실어 전하는 <송환>은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미국 독립영화제 ‘선댄스 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받기도 했다. “비전향 장기수 문제 앞서 인간의 삶을 좇은 12년이었지” 지난해 한국 영화 가운데서 <송환>을 최고의 영화로 꼽았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송환>의 김동원 감독을 만나 인터뷰했다. 인터뷰에 나오는 조창손(73) 할아버지는 62년 연락선 부기관장으로 남파됐다가 체포돼 30년간 복역한 비전향 장기수이다. 낙천적이고 유머가 많은 그는 촬영 도중 김 감독과 제일 친해졌고, 2000년 북한으로 송환된 뒤 “김동원은 사실 내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편집자 <송환>은 지난 20년 동안 한국 다큐멘터리 작업 속에서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끝낼 수 있는 순간들이 정말 많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버티게 하는, 여기선 끝낼 수 없다는 그 힘이 느껴져서 2시간28분의 긴 상영시간 동안 긴장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그게 김동원 선배에게는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남북관계가 수시로 변하고 자칫하면 이게 소재주의로 몰려서 작품 전체를 버려야 할 수도 있는 거고. 그걸 12년 동안 버틴 건 감독으로서 뭔가 대답을 기다린 것일 텐데 그 대답이 뭐였을까. 내가 기다렸다 조창손 선생님 얼굴 다시 보고, 조 선생님이 돌아가서 본 북한의 현실, 행복감의 정체 그런 것들을 확인하고 싶다고 할까.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는 건데. 달라진 북한의 모습에 대해 선생들이 머리 속에 상상하던 것과 직접 만나서 본 것과 차이를 어떻게 느끼고 계실지, 질문해도 대답을 잘 안 하시겠지만 미묘하게라도 표정 같은 걸 통해 내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또 이제는 남한에 계실 때와는 다른 관계로 만날 것 같은데 그럴 때 선생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그런 게 궁금해. 북으로 간 조 할아버지, 달라진 현실 행복한지 표정이라도 보았으면… 김 선배가 조창손 선생을 찍은 지 12년이 흘렀다. 12년은 긴 시간이고 조 선생은 이전에 고초를 겪으셨고 나이도 있으시다. 끔찍한 가설이지만 만약 조 선생께서 건강이 악화돼 중간에 운명을 달리했다면, 이 영화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때려치웠겠지. 조 선생 중심으로 찍고 있었을 때인데, 아마 작품을 포기했겠지. 그렇다면 이 영화는 테마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인간에 관한 영화라고 받아들여도 되나. 비전향 장기수라는 건 개념이고 조창손 할아버지는 한 인간이지 않은가. 조 할아버지가 작품의 시간을 못 견뎠을 때 작품을 포기할 거라는 건, 인간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컸던 영화라는 말 아닌가. 아마추어리즘인지는 모르지만, 작품 하려고 만난 건 아니거든. 조 선생 때문에 관심이 촉발됐고,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조 선생을 찍은 건 아니거든. 작품을 하려다 보니 테마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꺼냈지만, 인간적인 관심이었던 건 분명한 것 같아. <송환>은 찍는 것보다 편집이 지옥이었을 것 같다. 800시간 촬영분을 2시간반으로 줄이려면 편집에 원칙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테마를 뭘로 하느냐에 따라 수십편이 나올 수도 있었을 거다. 원칙이 있었다면 뭐였는지. 다큐멘터리에 선전 선동의 액티비즘이 빠지면 좀 싱겁지. 조 선생의 삶이겠지. 다 표현되진 않았지만 함께 남파돼서 몇 사람 죽고 몇사람 전향하고, 못 간 사람도 있고. 그게 이야기 축이었고. 또 하나는 그 과정에서 시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를 배치하고. 그 다음에 옛날에 찍은 화면은 너무 듬성듬성해서 그걸 연결시키려고 내레이션을 넣고. 편집하는 과정이 힘들지는 않았어. 옛날 일기를 다시 끄집어내서 읽어보는 기분 있잖아. 저거 쓸 건가 말 건가보다 저 때 재밌었는데, 저런 일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으로 즐거웠다. 사실 이게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첫번째 본격 다큐멘터리 같다. 만약 이전에 이런 영화가 많았다면 <송환>은 한 사람 이야기만 다룰 수 있었겠지만 처음이어서인지 <송환>에는 계몽적인 부분도 있고, 설명적인 부분도 있다. 처음 하니까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는 큰형 같은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닌가. 다큐멘터리를 모르고 찍었던 80년대, 막 설명하고 선전 선동하고, 뭔가 행동을 촉발하려고 하는 그게 다큐멘터리라고 알고, 왜 액티비즘이라고 말하는 것 있잖아. 나는 성격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시작했단 말이야. 그 뿌리를 지우기 힘든 것 같아. 아직도 액티비즘이 빠진 건 좀 싱겁게 느껴지고. 계몽적인 게, 선전이 나쁜 게 아니고 어떻게 계몽하고 선전하느냐가 우리의 관심사라고 생각하는데. <송환> 보고 나보고 짓궂다는 사람도 있고, 포스트모던의 경향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하는 이도 있어. 나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 것 같아. 70년대 성향을 이어받았지만 자유주의적 기질이 있는 것 같고. 그러면서도 액티비즘의 고집 같은 것도 남아있고. 다큐멘터리는 저널이고 아트이면서 액티비즘이라고 하는데, 셋이 잘 조화되는 걸 실험해볼 기회가 별로 없었어. 이 영화엔 장기수들의 지금 삶과 관계없는, 그들의 기억에 의존한 진술들은 다 뺐다. 어차피 기억이 역사인데 어떤 불안함이 있었던 건 아닌가. 그들의 기억에 의존하면 다른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기억하는 현재에 관한 영화나 기억 자체에 관한 영화가 되든가. 그건 너무 포스트모던한 것 같지 않은가. 영화는 기억 이후만 찍는데, 거기에는 라이프만 믿을 만하지 메모리는 못 믿겠다는 원칙이 있던 것 아닌가. 민가협 같은 단체에서 선생들의 기록을 내놓고 있었고, 텔레비전 프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도 전향공작을 다뤘고. 그게 내 부담을 덜었던 것 같다. 또 지난해 개봉한 홍기선 감독의 극영화 <선택>의 영향도 커. 그 영화에 다 있으니까 굳이 내가 다 담을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지. 기억에 의존한 진술, 학습으로 나온 대답, 내면과 상관없어 뺏다. <송환>엔 의외로 한 사람과의 장시간 인터뷰가 없다. 어쩌면 장시간 인터뷰할 만큼 가깝지 않다는, 김 선배가 가까이 가긴 했지만 거리를 느낀다는 것을 읽게 된다. 예를 들어 그들의 북한관이나 수령론 같은 문제로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정면으로 선생들에 대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거나 문제제기를 한 적은 없는 것 같아. 매우 조심스러워졌던 게 사실이야. 너무 잔인한 질문이 될 것 같았고. 어쩌면 호기심일 수도 있잖아. 남한의 자유주의자가 퍼붓는 진지하지 않은 호기심 어린 질문일 수도 있잖아. 또 질문을 하게 되면 나오는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고. 그건 우리가 익히 아는 북한 선전물의 대답이야. 내겐 재미가 없었어. 넣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 나는 그게 선생들의 진정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학습받은, 내면과는 상관이 없는. 조창손 할아버지에게 이 지면을 빌려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건강하시라는 말을 하고 싶지. 건강하면 언젠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1년 안에 꼭 찾아가겠다고 두번이나 큰 소리를 쳤거든. 4년이 됐는데 아직 못 간다는 게, 부시를 원망해야 할지. 송환이 있었던 2000년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지금은 화딱지 나는 현실이지. 그렇지만 또 기다리다 보면 만날 거라고 믿지. 일개 영화평론가로서 노무현 대통령께 간절히 바라건대, 김동원 감독이 조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도록 해주시길 바라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합니다.

23일 막 내리는 <대장금> 김영현 작가 인터뷰

“장금이는 보통사람 호기심·열정이 달랐을뿐” 매주 월·화요일 밤 10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두가구 중 한가구를 불러모았던 문화방송 텔레비전 드라마 〈대장금〉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23일 54회로 막을 내리는 〈대장금〉을 드라마가 거둔 최고 시청률 수치만으로 기억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극 후반부, 최 상궁 일가를 향한 장금의 복수극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짜임새가 엉성해져 짜증 나기도 했지만 “다른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움과 긴 여운을 남겨주었다”는 평가를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꿋꿋한 장금이라는 캐릭터에 시청자들이 매료됐기 때문은 아닐까. 막바지 원고쓰기에 여념없는 〈대장금〉의 작가 김영현(37)씨를 지난 9일 여의도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돌이켜보면 장금은 어떤 인물이었나 장금이 성인(聖人)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썼다. 기본욕구에 충실하다 보니 성공했다더라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호기심과 열정, 단순함을 주려고 했다.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친, 복잡함이 없는 인간, 성공하고 싶은,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굉장히 강한 여성이 바로 장금이다. 어머니한테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왜 안돼요’라고 따져묻는 게 장금의 캐릭터다. 장금을 맡은 배우 이영애의 지성적인 면과 품위가 캐릭터 표현에 큰 힘이 됐다. 극 초반 한 상궁한테 만날 혼나다가도 헤헤거리며 ‘칭찬해주세요’라고 하는 부분이 시청자들에게 정감있고 귀엽게 다가왔던 것도 이영애라는 연기자 때문일 것이다. 이영애 덕에 캐릭터 표현 큰힘 장금이 궁으로 돌아와 복수극을 벌이면서 지나치게 호흡이 빨라지고 에피소드 중심으로 엮다보니 드라마 맛은 많이 떨어진 느낌이다. 한 상궁 이후 복수에 대한 시청자들의 갈망이 많이 생겼다. 처음 기획의도는 아니었는데 한 상궁, 정 상궁을 그렇게 보낸 사람들을 그냥 뒀다가는 결론이 안나겠더라. 그게 복수라면 복수고 진실규명일 수도 있는데 불가피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 강퍅해진 느낌은 있다. 또 시청자들이 한회로 완결구조를 갖는 단막극처럼 느꼈다면 내가 본격적인 연속극 형태는 두번째 쓰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형식이 시청률을 급하게 올라가게 하는 데 기여했지만 역경극복의 과정이 생략되면서 덜 드라마틱해진 것 같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장금>의 차별성은 여성주의적 시각에도 있는 것 같다. 후반부 들어서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 때문에 흐려지긴 했어도 여성끼리의 따뜻한 동료애나 관계는 다른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는데 … 혹시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웃음) 시청자들은 한 상궁이라는 스승, 연생이같은 동무를 가진 장금이를 부러워하는 것 같다. 장금이를 자기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드라마 구조상으로는 궁궐이라는 폐쇄 공간에서 사실상 거세된 채 살아가는 궁녀집단의 특수성 때문에 어머니와 딸 같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설정은 불가피했다. 엄마를 떼어놓고 온 아픔을 같이 겪었기 때문에 여자들끼리의 남다른 동무애가 있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궁녀집단을 가족으로 그리자는 기획의도가 있었다. 말하자면 연생이와 장금은 동기간이고 한 상궁과 장금이의 관계는 모녀지간이었던 셈이다. 드라마의 주제를 어머니로 가고 싶었다. 어머니라는 굴레를 강조하다 보면 여성을 옭아매는 측면이 있지만 여성의 가장 큰 강점은 ‘어머니성’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장금이 다시 궁에 돌아온 뒤 최고상궁이 된 금영을 만나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셔야 할텐데요”라고 싸늘하게 말하던 부분이나, 세자를 죽여달라는 중전의 권유에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권력의 손맛을 묻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라고 거절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특별히 공들인 대사가 있는가 가능하면 시청자와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대사를 쓰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13부 이후에는 원고를 쓰기 바빴다. 전체적으로는 1부에서 장금의 아버지가 도사를 만나 세 여인에 대한 계시를 받는 대목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부분이라 가장 공을 많이 들였다. 한상궁 죽은뒤 시청률 압박감 시청률을 얼마나 의식했나 2001년에 내 이름을 걸고 쓴 첫 드라마 〈신화〉의 첫 시청률이 11%가 나왔다. 그때는 일주일 동안 잠이 안오더라. 그 다음 대본을 쓰고 어떡하든 잠을 자려고 애썼지만 중압감 때문에 못잤다. 시청률 무섭다는 것 뼈저리게 느꼈다. 이번 드라마 하면서는 내 생활 내가 요리하면서 글을 쓸 수 있어 행복했다. 초반에 시청률이 너무 올라 한 상궁 죽고 나서 안 보면 어쩌나 하는 압박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 때문에 드라마 완성도에서 조금 떨어진 부분이 있을 거다. 장금이 관비로 내려간 제주도 부분이 간단하게 다뤄진 것도 빨리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했다. 민정호의 사랑은 조금 모호하다. 여자가 주인공이다 보니 남자가 부각 안돼 솔직히 조금 괴롭다. 장금이와 그의 하는 일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남자로 그릴 수밖에 없는데 현실의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싫어하지 않느냐. 이 드라마에서 멜로를 쓰는 게 힘들다. 멜로를 못 써서 그럴 수도 있지만 궁녀라는 신분에서 멜로를 펼치는 게 초반에는 힘들었고 그 다음에는 장금의 석세스 스토리가 중요해지면서서 남자가 끼어들 틈이 좁아졌다. 그래서 철저하게 그 여자를 인정하고 후원하는 인물에 그쳤다. 다음 작품 계획은 김종학 프로덕션 소속으로 다음 작품도 이병훈 프로듀서와 함께 하기로 했다. 애초 〈토지〉를 하고 싶었는데 에스비에스에서 먼저 해 개인적으로 아깝다. 사극보다는 시대극이 더 매력적인데 마땅한 원작이 없어 〈대장금〉이 끝나면 감독님과 독서토론을 해야 할 것 같다.

낭독의 상상력

혹시 TV를 틀어놓고 화면을 보지 않은 채 흘러나오는 소리만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화려한 스타군을 등장인물로 가진 드라마의 경우에 인물들의 대사를 귀로만 수용하다 보면 그 단순성과 유아스러움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가 과연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무엇을 선사하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 어떤 스타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안이한 시청 상태로 들어간다. 발음이 분명치 않고 대사조차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라도 그 탤런트가 몇번 얼굴이 드러나 내게 눈으로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그 청각적인 껄끄러움을 참아내며 그가 우리에게 편안한 연기를 선사해줄 날을 기다리는 인내심을 키우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결코 ‘멀티’미디어의 시대가 아니다. 미디어 세계의 왕처럼 군림하는 텔레비전은 ‘시각’이라는 감각을 빼고 나면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시각편식증에 걸려버린 시청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TV 광고 화면들의 한컷 한컷을 보라. 내게 그것은 놀라운 시각중심 문화의 결정적 성과물들이다. 인간에게 마치 눈만이 확대되어 달려 있는 듯한 기형을 만들어 세대를 물린다 해도 우리는 시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멀티’라는 용어가 무색하게도 청각, 촉각, 후각, 미각들은 시각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다 어느 고즈넉한 늦은 밤, TV에서 누군가 책을 펴고 조용히 읽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낭독으로 느끼는 제3의 감각이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소리를 내어 스스로 몸을 통하여 느끼는 것이다. 시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틈새가 없다. 왜냐하면 보는 것이 듣는 것을 압도하여 아무런 공간을 만들어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공간과 여유가 바로 사람들에게 ‘울림’과 ‘느낌’을 소생하게 해주는 산실이다. <낭독의 발견>에서 ‘잘 읽는’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들려주는 아름다운 말에는 리듬과 절주가 있었다. 말과, 시와 음악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그 시간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보여줌’이 아니라 ‘들려줌’의 미학이 다양한 진동을 선사하면서 빡빡하고 강요된 감정의 획일 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때 우리는 하나에만 지배당하지 않는 다양한 즐거움을 알게 된다. 성시경과 송선미는 함께 김종완 시인의 <그의 시 & 그녀의 시>를 조용한 음악 속에서 낭독해주었다. 그때 난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그 시가 말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시각으로 보여주었으면 간단하고 유치하게 처리되었을 장면들이 시 속에서 얼마나 다양한 여운을 남겨주는가를 말해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남자)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침에 그녀는 꼭 커피를 마신다. 밀크가 아닌 블랙으로 2잔/… 그리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여자)그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그는 아침에 내가 뽑는 커피 한잔이 그의 것인지를 모른다…∥ (남자)그녀는 하기 싫은 부탁을 받을 때는 그냥 웃는다/ 그리고, 내색을 안 하는 그녀이지만 기분이 좋을 때는/ 팔을 톡톡 두번 건드리며 이야기를 건넨다…∥ (여자)그는… 나의 침묵에 담긴 긍정의 의미를 모른다/ 난 내가 기분이 좋을 때 그의 손을 잡고/ 얼마나 이야기하고 싶은지 그는 모른다…∥ (남자)… 그리고,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여자)… 그리고, 그는/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그녀가 타는 커피 두잔 중에 한잔이 그의 것임을 모르며 그녀가 싫을 때와 좋을 때의 표현이 그 때문에 연유하는 것임을 그는 모른다. 그래서 결국은 그녀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그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 그녀를 관심있게 바라보고 있는 그는 진정 그녀의 사랑을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같은 근원에서 움직이는 데도 그녀와 그는 얼마나 다르고 보고, 다르게 느끼며 다르게 결론짓고 있는가. 나는 진정한 문화의 힘은 서로 다른 개인에게 건강하게 자기만의 울림을 가질 수 있게 하고 그것들이 조화롭게 공명하도록 해줄 수 있을 때 나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조금은 천천히, 조금은 깊숙하게, 조금은 낮게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의 감각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자. 빨리 좋은 것을 보여달라고 하기 전에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그래서 차분하게, 다르지만 또한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할 수 있도록…. 素霞(소하)/ 고전연구가

‘영화듣기’를 위한 안내서

미셸 시옹, <오디오-비전>(L’audio-vision)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간다고 말하지 ‘들으러’ 간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한 보다가 놓친 이미지를 아쉬워할지언정 미처 듣지 못하고 무심결에 흘려넘긴 소리 때문에 안타까워하지는 않는다. 분명 영화는 시청각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매체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처럼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시각적인 것에 집중하여 기억하게 된다. 또는 무언가를 귀기울여 듣는다고는 해도 대개의 경우 말(parole)에 집중하게 마련이다. 1990년에 초판이 나온 <오디오-비전>은 <영화와 소리>에 이어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미셸 시옹의 주저 가운데 하나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책은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청각적-시각적 경험, 특히 시옹이 ‘시청각적 계약’이라고 부르는 바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을 제공하고 있다. 간혹 심리학적 용어들이 눈에 띄기는 하나, 엄격한 인지심리학적 이론에 기반하고 있다기보다는 시옹의 다분히 직관적인 통찰의 결과물들을 명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옹이 영화사운드의 분석을 위해 제안하고 있는 다수의 생경한 용어들- 음원이 화면상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지칭하는 ‘아쿠스마틱’(acousmatique) 사운드, 청각적 현상과 시각적 현상이 동시에 맞아떨어질 때 생겨나는 정신적 융합을 의미하는 ‘싱크레즈’(synchrese) 등- 과 분류법 등을 음미하면서 우리의 영화 듣/보기의 경험을 재고해보는 것은 꽤 흥미진진한 일이다. 한편 ‘소리와 영상 저 너머’라고 이름 붙여진 두 번째 장에서, 시옹은 지금까지의 유성영화가 그 이름에 걸맞은 사운드 활용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텔레비전이나 뮤직비디오와 같은 매체들- 통상 시네필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곤 하는 매체들- 이 시네마(cinema)와 근본적으로 다른 소리의 활용을 제시하고 있음을 입증하면서 조심스럽게 그것들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한다. 어느 정도 교과서로 쓰일 목적으로 집필된 책이니만큼 시옹의 이전 저서인 <영화와 소리>나 특히 <자크 타티의 영화> 같은 작가론 등에서 빈번히 눈에 띄었던 문학적 표현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줄었고 논쟁적인 쟁점들 또한 드문 편이다. <오디오-비전>의 영역판을 낸 클라우디아 고브먼에 의해 “이론가의 외피를 두른 시인”이라고도 일컬어진 바 있는 시옹 특유의 문장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옹의 이론적 작업의 전반을 개괄하고 영화사운드 이론의 현재를 파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안내서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한국영화 세대교체와 르네상스의 신호탄, <칠수와 만수>

DVD에 들어 있는 감독과의 인터뷰를 보자. <칠수와 만수>는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1988년 올림픽 개막일의 분위기를 이용해야만 했단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사회와 영화현장의 열악함을 기억하는 것은 <칠수와 만수> DVD를 감상하는 데 필요한 통과의례라고 하겠다. 영화로서 <칠수와 만수>는 한국영화 세대교체와 르네상스의 신호탄을 쏘아올렸으며, 연출을 맡은 박광수의 전후에 위치한 유영길, 황규덕, 김동빈, 이현승, 안성기, 박중훈, 김수철의 이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만 소설이 원작인 연극으로 먼저 인기를 얻었던 <칠수와 만수>는 영화로 영역을 옮긴 뒤에도 사실성을 잃지 않았다. 비전향 장기수의 아들과 기지촌 출신의 두 청년이 마주한 현실사회를 가감없이 표현한 <칠수와 만수>엔 상업영화로선 드물게 힘과 진실이 담겨 있다. 16년 사이에 세상은 바뀌었지만 칠수가 타던 버스의 모양은 그대로인 지금이고 보면, 칠수와 만수가 2인승 자전거를 몰고 가던 모습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새로이 제작된 영화가 아니라면 리마스터는커녕 텔레시네의 과정을 거쳐 DVD로 제작되는 것만도 고마운 한국영화의 현실은 <칠수와 만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화질은 그런대로 감안한다고 쳐도 갈라지는 음성을 듣는 건 괴롭다. 짧은 감독론과 인터뷰를 포함한 20여분의 부가영상은 영화와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준다.

<올드보이> 궁금점 DVD에서 쏜다

<올드보이> DVD가 두 가지 버전으로 출시된다. 이것은 “영화가 잊혀졌을 무렵, DVD가 나오는 것이 좋다”라는 박찬욱 감독과 DVD 제작사인 스타맥스의 절충안이다. 4∼5월 중에 일반판 <올드보이> DVD를 출시하고, 10월경 UE(Ultimate Edition) <올드보이> DVD를 내놓는다는 계획이 최근 3월8일 공개되었다. <올드보이> DVD 텔레시네는 네거 상태가 불안해서 마스터 포지로 진행되었다. 2월25일 일본에서 텔레시네 작업이 완료되었고 현재 HD 테이프 마스터가 확보된 상태이다. DVD제작에 참여한 이상우 PD는 “DVD가 본래 SD급 화질임에도 불구하고 HD급 마스터를 사용하는 것은 엔코딩 과정에서 생기는 화질과 정보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수공으로 제작되는 아웃케이스, 다섯 파트로 나눠지는 코멘터리, 철저한 사전주문 제작 등이 10월에 출시될 <올드보이> UE의 특징이다. 코멘터리의 다섯 파트는 제작스탭들의 독립적인 코멘터리 셋, 비평가의 장면 분석에 의한 코멘터리 하나, “제일 걱정되는 본인” 박찬욱의 코멘터리로 이루어진다. 그외 서플먼트에 들어갈 내용은 <올드보이>의 메이킹을 다큐전문가가 재편집한 <다큐멘터리 올드보이>, <올드보이> O.S.T와 화보집이 추가된다. 사운드 지원은 일반판은 DTS이며 UE는 DD 5.1이다. 제작사인 스타맥스의 김환기 대리는 UE가 수작업 패키지라는 특성으로 인해 “100장을 제작하든, 1만장을 제작하든 추가이익은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한정기간 주문을 받는 것은 물론 1인 주문 상한선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극장판과 다른 삽입장면에 관해서는 펜트하우스에서의 마지막 대결에 앞서 “우진이 최면술사를 만나는 장면이 가장 긴 신이 될 것”으로 박찬욱 감독은 예상했다. 김수경 ozu@hani.co.kr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 열풍의 핵심은 무엇인가 [3]

얄팍한 영혼이 거둔 상업적 성공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센세이셔널리즘 비판 데릭 엘리/ <버라이어티> 수석 영화평론가각 영화관객 세대는 자기가 받아 마땅할 역사 서사물을 받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어떻든 간에 신세기 영화에 어울리는 반영이다. 영상에 찌들고 MTV에 길들여진 세대를 위한 성서드라마로서 이 영화는 과잉 자체를 메시지로 받아들이며 영화와 텔레비전 폭력을 종교로 삼는 관객을 위한 영화이다. 또한- 우연에 의한 것인지 의도된 것인지 몰라도- 이 영화는 <블레어윗치> 이후 미국에서 나온 가장 영리하게 마케팅된 영화이다. 이 영화가 지금까지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것은- 3억달러를 거둬들일 전망인 듯한데- 요즘 다른 할리우드 제작물의 거의 절반이 갖는 무미건조한 보수성과 미국 이익단체들의 상업적 인식을 생성할 수 있는 힘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미국 평단의 의견은 대략 50 대 50으로 갈렸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것이 불러일으킨 격한 감정들- (복음서 자체가 분명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조직이 영화의 ‘반유대주의’를 한탄하는 것에서부터 영화평론가들이 드디어 무언가 정열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나타나 기뻐하는 것- 때문에 화젯거리가 됐다(이 기사 역시 다를 바 없다. 만일 이 영화를 메이저 할리우드 스타가 만들지 않았고, 북미 2800개 스크린에 개봉하지 않았고, 미국의 마케팅 연동장치의 국제적 위력 덕을 보지 않았다면, 독자 여러분도 <씨네21>에서 자막 입힌 그리스도영화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영혼을 가진 자, 그 이름 멜 깁슨 우선적으로 말하자면, 멜 깁슨의 이 영화는 처음 발표된 바와 같이 작고, 비의(秘儀)의, 리얼리즘영화가 절대 아니다. 와이드스크린이며 의상과 촬영이 CGI(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표현)와 특수효과(사탄의 시험 표현)를 포함하여 멋지게 된 영화이다. 깁슨이 진정으로 개인적인 작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했다면 이런 외양을 갖추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사람을 할리우드에서 빼낼 수 있다 하더라도 할리우드의 영향을 사람에게서 빼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영화의 외견상 “리얼리즘” 역시 문제삼을 만하다. 영화는 (셈계의) 아람어와 라틴어로 대사를 쓴다 해서 드라마 면으로 득하는 것이 별로 없다. 단지 겉치레의 리얼리즘 한층- 그리고 독특한 홍보 관점을 보태주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다. 라틴어로 찍힌 유일한 다른 영화는 1976년 영국에서 제작된 데릭 저먼의 저예산 동성애주의영화 <세바스찬>(Sebastiane)으로, 이 영화 대사는 부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없었다. 이것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이탈리아인들이 대부분 라틴어 대사를 맡음으로써 좀더 유창해지긴 했지만, 일부 발음(뿐만 아니라 어휘까지도)이 고대 라틴어보다 오히려 오늘날 이탈리아어에 가까울 때가 많다. 리얼리즘을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영화의 극심한 폭력성 때문에 무산된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를 오랫동안 피고문한 부분은 역사적으로 의문스러울 뿐만 아니라(왜냐하면 로마 군사는 전문 군인이었지 깔깔대는 사디스트는 아니었기 때문에), 믿기 어렵다. 영화 속에 나타난 학대 정도를 받았다면 거대한 목조 십자가를 끌고 가기는커녕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순수하게 드라마틱한 면에서만 평가해도 영화는 부족하다. 단지 그리스도 생의 마지막 12시간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멜 깁슨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리스도의 목회활동 전체, 이른바 “지상에서의 시간”의 절정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무시한 것이다. 이 수난이 아무런 드라마틱한 긴장감의 고조없이 동떨어져 재현됐을 때, 그저 고집과 고난의 일람에 그치게 될 뿐이다. 시나리오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그리스도의 목회활동에 대한 짤막한 플래시백을 가미했는데, 이것들은 영화의 감정적 질감을 더해주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특히 대부분의 다른 인물들이 이름으로 소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유일한 역할은 본디오 빌라도로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대계 불가리아인 배우 흐리스토 나우모브 쇼포브가 연기한 것이다. 그리스도 역할에 미국 배우 제임스 카비젤은 무미건조하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역과 막달라 마리아 역에 유대계 로마니아인 여배우 마이아 모르겐스턴과 이탈리아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는 그저 중세의 교회당 성화상처럼 카메라에 시선을 보낼 뿐이다. 너무도 빈약한 21세기 역사 서사물의 시금석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보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실제 개인적인 작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멜 깁슨에 관한 것이다. 영화의 핵심은 육체적 고난이다. 가톨릭 교회의 극단적이고 엄격한 순수주의 종파 교인인 것을 떠나서(가톨릭 교회 자체도 고난과 참회의 교리에 근본을 두고 설립됐지만), 깁슨은 그의 연기자 커리어 동안 마조히스트적인 면을 강하게 드러내는 인물 역을 곧잘 선택해왔다(<브레이브 하트> <리쎌 웨폰> <랜섬> <매드 맥스> 등).<벤허> <왕중왕> <엘 시드> <클레오파트라> <바라바> <로마제국의 쇠망> <성서> 등과 같은 50년대와 60년대의 위대한 역사 서사물들에 감탄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 장르의 부흥이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영화들 중 최고의 것은 개종한 사람에게 설교를 하는 쓸데없는 참견을 하거나 충격성의 가치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 영화들은 다이얼로그, 아이디어, 훌륭한 연출법, 그리고 명백하고 전통적인 엔터테인먼트성을 이용했다. 1962년작 <왕중왕>은 당시 많은 평론가들의 비웃음을 받았지만, 그 이후 복음서를 드라마틱하게 재해석하고 심지어는 20세기 시오니즘에 대한 풍유까지 포함하여 정치적인 영화로 인정받게 됐다. 영적인 것과 리얼리즘을 혼합한 것이라면 프랑코 제피렐리의 1978년작 <나자렛 예수>가 영국 배우 로버트 파웰의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연기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삶의 가장 훌륭한 재현으로 남는다. 50년대와 60년대의 가장 훌륭한 역사 서사물들은 풍부한 프로덕션디자인과 대형 인물들로 관객에게 경외심을 심어줬다. 비교를 하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빈약한 영화제작이고 보잘것없는 인물들과 통탄할 정도로 진정한 영성이 부족한 영화이다. 이미 믿음이 있는 자들이라면 이 영화는 의심할 여지없이 강렬한 경험이 될 것이다. 교회 설교단에서 두 시간 동안 호통을 맞는 것에 상당하는 영화적 경험일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스페인, 이탈리아, 필리핀, 라틴아메리카 등 지배적으로 가톨릭 국가인 데서는 흥행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비신자나 하루 저녁 엔터테인먼트를 찾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길고, 과도하게 폭력적이며, 반복적이고, 표면의 창의성이 재빨리 신선미를 잃는- 그렇다- 지겨운 영화이다. 이 모든 것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멜 깁슨의 영화가 오늘날 세대의 서사물 시금석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글래디에이터>는 잔혹성의 표준을 높였지만 동시에 강렬한 휴먼드라마로 남는 데 성공했다. 이제 모든 것은 볼프강 페터슨의 다가오는 <트로이>(Troy)와 올리버 스톤의 <알렉산더>(Alexander)가 이 장르가 한때 누렸던 품위와 진정한 힘을 회복하는 데 걸려 있다. * 런던에 거주하는 데릭 엘리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업계지 <버라이어티>의 수석 영화평론가이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대학에서 공부했고, 서적 <서사영화: 신화와 역사>(The Epic Film: Myth and History, 1984)를 저술했으며, 기독교인도 유대인도 이슬람교도도 아니다(!)

[새영화] <허니>

<바람의 전설>(4월9일 개봉), <더티 댄싱>2편(4월15일 개봉) 등 올 봄 극장가에 불 ‘춤바람’의 첫 스탭을 밟는 영화 <허니>가 26일 개봉한다. 거리와 뒷골목에서 아이들이 추는 힙합 춤을 스크린 안으로 옮겨온 <허니>는 매력있는 춤꾼의 꿈과 투쟁이라는 면에서 80년대 춤영화의 최고 인기작이었던 <플래시 댄스>와 같은 모태를 가지고 있다. 뉴욕 브롱크스의 청소년 센터에서 댄스 강사를 하는 다니엘즈(제시카 알바)의 꿈은 전문 안무가가 되는 것이다. 연줄도 돈도 없어 번번이 오디션에 낙방을 하던 어느 날 댄스바에서 발휘한 실력이 유명한 뮤직비디오 감독에 눈에 띄면서 다니엘즈는 쇼비즈니스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역학논리 앞에서 그가 꿈꾸던 춤의 세계는 치졸한 욕망과 권력의 투기장으로 변질된다. <허니>는 ‘춤의 달인’이 되고자 하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플래시 댄스>와 통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건전’하다. 그 건전함은 영화의 관객층을 더 넓힐 수는 있겠지만 춤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은 반감시킨다. 다니엘즈의 꿈은 프로 안무가가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춤을 추면서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을 마약과 범죄의 음지에서 끌어내 양지의 무대 위로 올려놓으려고 한다. 이런 그의 꿈은 뮤직비디오 감독의 음험한 욕망으로 좌절된다. 이제는 지극히 상업적인 대중문화의 코드가 됐기는 했지만 무기력한 현실에 대해 내뱉는 독설같은 거리의 힙합문화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학예회’같은 무대로 끌어놓는다는 발상이 지나치게 계도적으로 느껴진다. 그 탓인지 춤 자체가 관객을 빨아들이는 흥분도 그리 강력하지 않다. 다만 이 영화로 주인공 데뷔를 한 제시카 알바의 상큼한 매력은 영화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다크 엔젤>에 출연했던 제시카 알바는 할리우드의 최고 유망주 가운데 한 명이다. 역시 이 영화로 장편영화 감독 데뷔를 하게 된 빌리 우드러프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백스트리트 보이즈 등 미국 최고 스타들과 작업했던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다.

[새영화] <어린 신부>

로맨틱 코미디라는 산 정상에 ‘결혼’이라는 고지가 있지만, 고지를 점령했다고 해서 반드시 두 남녀 간의 로맨스가 끝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개봉작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가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결혼이 곧 인격적 성숙의 척도라고 말했다가는 구시대의 유물을 보는 듯한 눈초리를 받을 법한 요즘, 영화도 결혼이라는 분기점에서 가족드라마로 넘어가기보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2차전, 또는 속편을 따라가고 싶어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김래원, 문근영 주연의 <어린 신부> 역시 결혼 뒤에 펼쳐지는 로맨틱 코미디를 그린 영화다. 결혼한 남녀의 아웅다웅 싸움과 달콤한 화해를 그리지만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나 텔레비전 드라마 <천생연분>보다 극단적인 설정이다. 열여섯 여고생과 스물넷 대학생이 결혼을 했으니 한세기 전이 아니고서야 정상으로 보일 리 만무다. 그러나 이게 말이 되나라고 흥분하거나 두 사람이 결혼한 이유의 빈약함을 꼬투리잡는 건 ‘이유없는 반항’처럼 보인다. 영화의 관심사는 오로지 상종가를 치고 있는 두 청춘배우의 모습을 좀 더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여주는 데만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별다른 줄거리나 굴곡 없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며 특별한 캐릭터도 없는 인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건 남녀 주인공 김래원과 문근영의 힘이다. 특히 뽀얀 얼굴과 맑은 눈망울의 문근영은 영화 속 가장 사랑스러운 신부 베스트에 꼽힐 만큼 깜찍하다. 할아버지의 ‘협박’으로 얼떨결에 결혼한 둘에게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소꿉장난이다. 음식을 한답시고 주방에서 야채를 서로에게 던지며 놀거나, 친구들과 우루루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놀아제끼며, 할인마트에 가서는 장바구니용 카트를 놀이기구처럼 타고 논다. 여기에 남편 상민이 교생실습 간 보은이네 학교 노처녀 여교사의 육탄공세와 아내 보은의 학교 야구선수 ‘오빠’를 향한 당돌한 첫사랑이 끼어들어 웃음의 조미료를 첨가한다. 두 사람의 갈등조차 부드러운 솜사탕 같이만 느껴지는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여고생의 결혼이라는 ‘센’ 설정이 ‘약한’ 이야기를 온전히 만회하지는 않는다. 결혼을 하고 나면 여자는 모두 억척스럽게 남편을 챙기는 아줌마로 변한다는 진부한 발상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도 영화의 매력을 깎아먹는다. <편지> <산책>의 조감독을 했던 김호준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4월2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