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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DVD에 대한 네티즌들의 청원

인터넷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쥔 이후로, 이를 활용해 단순한 관객 혹은 마니아 이상의 역할을 하려 한 영화팬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기자 시사회나 업계 시사회에 몰래 들어가 개봉되기 전의 영화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스타가 된 ‘Ain’t it cool news’의 해리 놀스 정도가 그나마 그 소수에 속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각종 인터넷영화와 인터넷영화제 그리고 다양한 팬사이트와 안티사이트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개인적인 관심사의 표출 이상을 넘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이런 상황은 태생적으로 관객의 수동성을 요구하는 영화의 특성이 그대로 인터넷으로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가상공간의 특성인 익명성으로 인해 네티즌들이 어떤 ‘역할’을 부여받기 어려운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말 이러한 지금까지의 흐름에 변화를 불러일으킬 작은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영화 마니아들이 영화의 제작사 및 감독에게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인터넷상에서 서명운동을 벌이고 나선 것. 그 대상이 된 영화는 열혈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기로는 <스타워즈> 시리즈에 밀리지 않는 <반지의 제왕>이다. 사건은 인터넷상에서 네티즌들이 집단적으로 청원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해주는 ‘Petition Online’(www.petitiononline.com)에 ‘Fellowship of the Ring Directors Cut DVD’라는 제목의 청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반지의 제왕> 팬사이트 중 하나인 ‘Imlandris’의 운영진과 조셉이라는 네티즌에 의해 시작된 이 청원운동은, 이른 시간에 전세계 네티즌, 특히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에 매료된 이들에게 퍼져나갔고 한달도 안 되는 사이에 무려 3만5천명의 온라인 서명을 받아내는 성과를 이뤄내기에 이른다. 그 청원은 아래와 같이 아직 출시도 되지 않은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의 DVD 또는 비디오를 감독판 형식으로 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뉴라인 시네마와 피터 잭슨 감독님께,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의 팬들은 원작에 가깝게 영화를 제작해주신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극장에서의 상영을 위해서는 영화를 3시간여로 줄여야 했기 때문에, 원작이 담고 있던 모든 내용들이 영화 속에 담기지 못한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 속에 담겨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사실 또한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곳에 서명한 모두가 삭제가 되지 않은 상태의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를 보고 싶어하고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우리가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은 DVD와 비디오를 통해 영화의 감독판이 출시되는 것이고, 여기에 서명을 함으로써 그러한 감독판이 충분한 시장성이 있음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와 함께 청원서에는 팬들이 DVD에 포함되길 바라는 ‘Special Feature’들의 리스트가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DVD 타이틀에 대한 팬들의 바람이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 있게 해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다. 그 리스트에 포함된 주요 ‘Special Feature’들은 아나모픽 스크린, 돌비 디지털 5.1, DTS, 모아놓지 않고 본편 영화에 다시 삽입된 삭제 장면들, 아나모픽과 돌비 디지털 5.1로 된 예고편들, 감독의 오디오 코멘터리 트랙, 출연배우들의 추가적인 오디오 코멘터리 트랙, 채널에서 방영되었던 <중간계로 가는 길> 등의 관련 TV 프로그램들, 요정어로 된 자막 등이다. 사실 <반지의 제왕>은 영화 제작 초기부터 DVD의 출시 시기와 포함될 내용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인 12월 초 인터넷 영화 웹진들이 일제히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의 DVD가 2002년 8월 출시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는 루머를 퍼뜨렸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잘 드러내주는 사건. 하지만 지난해 12월23일 피터 잭슨이 기자회견을 통해 잘려나간 장면들을 모두 합하면 30∼40분 분량은 될 것이나, 별도의 감독판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밝히면서 분위기는 일순간에 착 가라앉았다. 네티즌들의 청원운동이 인터넷에서 시작된 것은 그 즈음이다. 이런 네티즌들의 움직임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지만, 올 1월 초 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제작자 배리 오스본이 극장판보다 긴 편집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을 흘리면서 상황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1월16일 이 <쇼비즈 투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사인 뉴라인 시네마가 DVD의 공식적인 발매일을 결정하지 못했지만, 피터 잭슨 감독이 마음을 바꿔 4시간이 조금 넘는 감독판을 만들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제 감독판 DVD의 출시는 기정 사실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DVD 출시에 대한 청원에 팬들의 참여가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DVD만큼은 감독판을 넘어 지금까지 출시된 그 어떤 DVD 타이틀보다도 가장 완벽하게 감상하고 싶은 팬들의 열망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출시된 대부분의 DVD 타이틀들이 크고 작은 문제와 부족한 콘텐츠로 인해 구매자들이 실망을 느낀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청원운동이 어느 정도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인가는 여러모로 관심의 대상이 될 듯하다. 만약 뉴라인 시네마가 어떤 식으로든 이 청원의 내용을 DVD 타이틀 제작에 반영한다면, 앞으로도 유사한 사례가 늘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극장 개봉과는 달리 마니아 집단이 판매량의 대부분을 소화하는 DVD 시장에서는 인터넷을 무기로 제작사에 압력을 가하는 새로운 흐름이 일반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철민/인터넷칼럼리스트 chulmin@hipop.com <반지의 제왕> 감독판 DVD 청원사이트 http://www.petitiononline.com/LoTRdvd/<반지의 제왕> 팬사이트 http://www.lordoftheringsmovie.com/ 사진설명 1. <반지의 제왕> 팬사이트. 2. 감독판 DVD에 대한 청원이 진행중인 사이트. 3. 호주의 한 축제에 등장한 검은 기사단. <반지의 제왕>은 이미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자리잡았다. 4. 국내에도 출시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반지의 제왕> 제작과정 비디오.

남성만화의 광포한 쾌락

80년대 스포츠 극화와 기업만화가 불러일으킨 호쾌한 바람에 비하면, 90년대 한국 남자만화의 나날은 지지부진했다. 대본소 공장제 만화가 열심히 파들어간 그 자리가 찬란한 금광의 터전이 되기는커녕 그들의 무덤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드래곤 볼> <슬램덩크> 등의 도움으로 열린 만화 단행본 시장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고, 연이은 각종 파동으로 인해 지금은 무릎뼈가 꺾이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들 속에서 새로운 발전의 흐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만화 작가군의 한 부분은 외형적, 기교적인 면에서는 일본만화에 비해 전혀 뒤질 것이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본만화의 영향력이 한국만화와 일본만화의 외형적인 차이를 거의 없앴다는 점은 우리에게 만화적 독자성을 상실했다는 자괴감을 갖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독자성을 잃어버린 대가로 훌륭한 실력을 가진 그림작가가 일본이나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막을 만한 장애는 없어졌다. 당연한 결과로 해외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만화가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아직은 마이너리그에 머물러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그들 중 누군가가 만화 메이저리그의 올스타로 선발되는 영광을 얻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아일랜드> <신 암행어사>의 윤인완·양경일 콤비, <프리스트>의 형민우, <교무의원>의 임광묵은 현재 가장 세련된 외형의 만화로 한국만화의 국제성을 시험해나가는 만화가들이다. 그런데 제각각의 개성있는 선들을 갈고 닦아가는 이들의 작품이 분명한 하나의 경향으로 읽힐 정도로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스토리 작가 윤인완, 그림작가 양경일 콤비는 이들 중 가장 대중적인 경향의 작품을 펼치고 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퇴마사의 이야기 <아일랜드>에 이어 우리 고전을 전혀 새로운 각도로 재해석한 <신 암행어사>는 말끔한 입체형의 주인공들과 잔혹한 괴물들의 싸움을 엇갈리게 배치하면서 복합적인 감각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캐릭터의 외형이나 작품의 전개방식에서, 현재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의 경향에 부응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장점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돋보이는 것은 역시 양경일의 그림실력이다. 하지만, 일본 스토리 작가와 결합한 <좀비 헌터>가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와 활력없는 조연 캐릭터들 속에서 다소 지루한 사건의 연결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양경일 세계의 내러티브를 가장 잘 구사해내는 콤비 윤인완의 존재를 절대 무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임광묵의 <교무의원>은 여러 면에서 미완의 작품이긴 하지만,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다양한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섞어가면서도 독창성을 획득해나가려는 실험적 시도가 돋보인다. 이후의 작품행로가 어떠하든 임광묵은 양경일의 대중노선 외곽에서 한국 남자만화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자질을 지녔다. 그리고 더욱 바깥에는 형민우의 <프리스트>가 있다. 흑백의 장편 스토리 만화라는 점을 제외하면 <프리스트>는 영미권의 서부물과 고딕호러의 전통을 이어받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낯설지만, 만화가의 훌륭한 데생과 격렬한 이야기 흐름은 상당한 흡인력을 만들어낸다. 통합적인 판타지의 세계 <프리스트>의 고딕호러, <교무의원>의 초현실 판타지, 그리고 <아일랜드> <신 암행어사>의 퇴마 판타지. 얼핏 외형적으로는 다른 영역의 벽을 쌓고 있는 듯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내면 이들은 매우 비슷한 종류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만화들은 각종 요소들이 뒤범벅되어 있는 통합적인 판타지의 세계를 구현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악으로 뒤덮여 있는 무질서의 공간이다. 남성 주인공은 약간의 콤플렉스와 함께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고, 선악의 양분법에서 벗어나 있다. 베고, 찌르고, 쏘고, 터뜨리고, 부수는 폭력의 선혈이 빈 공간을 허락하지 않고, 만화 전반에 강력한 비트를 만들어낸다. 한편으로 이들 만화는 무협 전통에 뿌리박은 한국만화의 남성성을 분명하게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선악을 넘어선 광포한 쾌락의 세계를 안내한 것은 아마도, <데빌맨>에서부터 시작되어 <베르세르크> <무한의 주인> <배가본드> <지뢰진>으로 이어지는 일본만화의 한 맥락일 것이다. 형민우의 작품은 기독교와 서구 호러의 세계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괴물의 형상화와 세계관에서 상당한 유사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일본 만화가들 역시 벡신스키, 기거 등 유럽 호러 판타지의 피를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떠한 만화든 완전한 독창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들 만화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기시감과 모방의 흔적을 어느 정도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그토록 복잡하게 설정한 세계가 겉멋만이 아니라면, 그 철학적 기초를 분명한 이야기로 전달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껍질은 화려하지만 아직 그 알맹이는 알 듯 말 듯한 것이 사실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O.S.T

오늘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관해 영화음악 이야기도 하겠지만 영화 자체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좀 하겠다. 영화 자체가 음악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 지면에서 가능하리라 판단해서이다.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도 ‘밤무대 예술인 연합회’ 비슷한 단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후배 중에, 몇해 전 그 단체의 회장을 하던 분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분이 쓰던 기타를 물려받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보여준 그 기타는 고색창연한, 그러나 엄청난 아우라를 지닌 금색 팬더 스트라토 캐스터였다. 어느 인터넷 클럽에 가입하면, ‘00호텔 무빙팀 싱어 구함 숙식 제공 29세 이하’ 등등의 제목이 붙은 메일을 하루에도 몇건씩 받을 수 있다. 재즈 드러머를 지향하는 후배 하나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수원 어딘가 나이트클럽에서 밤무대 예술인 노릇을 얼마간 한 일이 있는데, 돈을 꽤 벌긴 했지만 빤짝이를 입어 피부병이 생겼다고 했다…. 내가 아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 것은, 나이트클럽 뮤지션들이 여전히 하나의 ‘세력’으로, 삶의 한 ‘스타일’로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카바레 가수는 분명 주목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실패한 예술인’의 부류에 든다. 이 시각은 한편으로 정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확하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그 진부하게 양식화된 사운드와 레퍼토리를 수단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여러 지면에서 소개된 바 있는데, 대체적으로 그 내용들을 요약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쳐다보았다는 데 의견이 집약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실패한 예술가’라는 상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의 구도처럼, 예술가가 이 시장판의 세상에서 예술가로 존재하길 고집할 때 변방의 룸펜으로 전락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가이기를 그치면서도 계속 ‘예술’을 하는 길도 있다. 그것이 3류로 살아가는 길이다. 여기서 3류는 저질이라는 뜻이 아니다.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지지를 받는, 끈질긴 진부함을 힘으로 하여 형식화된 어떤 문화적 스타일을 말한다. 그것은 생활에 직결되므로 거기서부터 생활을 길어낼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꼭 3류라고는 할 수 없어도 광고음악에서 심지어 영화음악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양의 음악이 그런 일종의 ‘포기’로부터 자신을 정립시킨다. 바로 그 대목, 즉 3류가 하나의 형식으로 솟아오르는 그 대목에 존재하는 페이소스들을 더 치열하게 물고늘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삶에 대한 순정을 담은, 진솔한 시각의,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나를 감동시킴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예술가-그에 적대적인 생활 세계’의 이분법적 구도가 음악가들이, 아니 수많은 ‘생활음악인’이 살아가는 이야기의 일부만을 부각시키지 않았나 싶다. 그 점이 조금은 아쉽다. 그건 그렇고, 이 영화는 나로서도 추억에 잠길 수밖에 없는 대목이 여러 군데 있다. 특히 어렸을 때 합주실을 빌려 연습을 하는 밴드 지망생들의 이야기는 리얼하게 잘 묘사된 것 같다. 거기 쓰이는 레퍼토리들도 나의 귀를 추억에 젖게 한다. 특히 <내게도 사랑이>는 반가웠다. 한국 로큰롤사에서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혼혈 밴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음악성을 발휘한 팀이 이 팀이다. 70년대의 음반을 들어보면 사이키델릭하기 이를 데 없다. 이들의 히트곡 중의 하나가 바로 그 곡. 이 노래들은 모두 복고적인 감수성에 호소하고 있다. 3류와 복고의 결합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3류는 전통적 형식의 진부함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대목도 조금 더 집착해서 추구해 들어가볼 대목이었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고은 시집 <두고 온 시>

최근 몇년 동안 고은의 시는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김대중 정부 수립 직후부터. 그가 ‘김대중 정부 시인’인 듯 비쳐졌을 때부터다. 정치와 문학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라는 것은, 당연히 거리를 전제한 명제다. 그 거리가 관계를 허용하고 만남의 변증법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게 ’너무 정치적’인 고은의 시는 행태와 구분되지 않았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던 걸 게다. 그런데, 이번 시집 제목이 요상하고 흥미롭다. ‘두고 온 시’라. 뭔가 다른 얘기를 좀 하시려는가…. 그런 생각쯤으로 미적미적 시집을 뒤져 읽는데 갈수록 신기하다. 어허, 이런이런…. 그렇게 감탄 혹은 탄식을 하다가 나는 흡사 정신을 차리려 기를 쓰는 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허, 허랑방탕, 광대무변, 허랑방탕, 광대무변… 그러다보니 꼭 색즉시공공즉시색을 되뇌는 중과 다를 바 없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많은 평자들이 얘기했던 그 반성조, 이를테면 12쪽 ‘최근의 고백’의 ‘한밤중 혼자 흐득흐득 울고 울었던/ 그 울음의 소용돌이 어디로 갔나/ 이토록 내 등뼈에는 슬픔이 없어졌다/ 모든 감탄사는 허망하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회고에 물든 반성은 반성이 아니다. ‘거침없는 상상력’(황석영 표4문)도 아니다. 왜냐면 고은의 상상력은 언제나 거침없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파란만장(고은의 대명사였던)의 이전인 허랑방탕과 그뒤인 광대무변을 한데 뒤섞어버리는, 과감하고 위대한 허무의 몸짓이다. 그때 허무는 회고를 벗고 미래를 향해 무거워진다. 가령, 62쪽 ‘향노봉’. 첫행 ‘바람 속에 서 있을 때가 가장 사람다웠다’는 회고의 위험이있지만 ‘저 검은 동해/ 가득한 파도소리도/ 여기까지 오지 못한다/ 여기는 돌멩이들 휭휭 날아가는 바람소리’의 허랑방탕이 ‘북쪽을 보라/ 온통 산들이다/ 인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남쪽을 보라/ 온통 산들이다’의, 현실인식을 담지하는 광대무변에 가닿고 그 둘의 혼융이 ‘무거운 짐을 지고 내려가면 가까스로 살아남’는, ‘가벼움은 죽음’이라는 허무의 무게와 깨달음에 달한다. ‘문의 마을에서’ 이래 나는 고은 시가 지닌 죽음의 미학의 순결성이 파열하는 것이 늘, 갈수록 괴로웠다. 하지만, <두고 온 시>를 보니, 쓸데없는 고통이었다는 생각이든다. 파란만장을 심화-확대하는 허랑방탕과 광대무변의 중첩. 그 속에서는 그의 정치‘행각’도 한낱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감사 또 감사….(창작과비평사 펴냄)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 (2)

그날 나는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를 망치고 과음을 했다. 술에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어디서 술을 깨고 갈까 고민하였다. 내 고민의 끝은 극장이었다. 술로 깔깔해진 입 안을 헹구기 위해 콜라라도 마시려고 매점 앞에 섰다. 매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크린에서는 당시 섹스어필의 대명사였던 남자 배우가 지적인 바람둥이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극장 안을 살피다 말고 잠이라도 좀 자볼까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같은 줄에 여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블라우스가 스크린에서 비치는 빛을 따라 울긋불긋 변하였다. 매점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삼류극장 매점에 앉아 있긴 하지만 이런 영화는 전혀 안 볼 거라 생각해오던 터라, 그녀를 발견하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얼마전 극장에 왔을 때 불쾌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인지 곧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이미 잠을 잘 생각은 달아나버렸다. 나는 여자를 흘낏흘낏 곁눈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술김에 옆자리로 가서 수작이나 부려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왕에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 생각을 하자 못할 것도 없지 하는 호기가 생겼다. 그러나 나는 여자 옆자리로 가지 못했다. 여자에게 걸어가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자가 앉은자리로 점점 다가가면서 나는 그녀가 기묘한 자세로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는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긴 목을 앞으로 죽 빼고 손은 무릎에 얹은 채, 초록색 스커트 위로 굵은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고 있었다. 여자의 어깨가 가녀리게 흔들렸다. 스크린에서는 섹시 스타가 안소영의 몸 위로 올라가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 다음날 극장에는 새로운 영화가 붙었다. 새로운 영화가 붙었는데도 한동안 새 간판이 오르지 않았다. 간판을 그리던 남자가 극장을 떠난 것이었다. 사내가 떠났지만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매점 여자는 매점 안 간이의자에 풀이 죽어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입덧이 시작됐는지 입가에 물기를 자주 묻히고 있었다. 나는 덩달아 우울해졌다. 저기요…. 콜라를 건네주며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자가 말을 건 건 그게 처음이었다. 오래 생각을 하고 말을 한 건지 한마디를 하곤 입을 앙다물었다. 나는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에 감격했다. 저… 영화보고 시간 있어요? 예? 예…. 그럼… 요 앞 분식점에서 좀 뵐 수 있을까요? 영화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가 내게 만나자고 한다. 나를 말이다.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일찌감치 분식점에 나가 여자를 기다렸다. 여자는 늦게 나타났다. 급히 걸어 왔는지 숨을 좀 헐떡이고 있었다. 땀을 닦는 하얀 손수건 아래 감춰진 상기된 볼이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여자는 입덧 때문인지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나는 여자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어쩐지 걱정의 말도 하지 못했다. 부탁이 있거든요… 병원에 좀 같이 가주실래요? 보호자랑 같이 오래요. 예? 어디 아프세요? 나는 끝까지 모른 체하고 싶었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는 남자이고 싶었다. 여자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여자의 눈을 피했다. 여자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수술을 해야 하는데… 같이 가줄 사람이 없어서요. 여자는 아이를 지우려고 했다. 보호자로 발탁된 것은 나였다. 이미 설명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 나도 더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수술을 하던 날 가는 비가 조금씩 흩뿌렸다. 여자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병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산도 받지 않아서 여자의 어깨는 젖어 있었다. 병원으로 들어서기 위해 문을 미는 그녀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수술 동의서에 내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기분이 묘했다. 여자는 병원 대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서 생각에 잠긴 듯 사시가 되어 있었다. 일을 보고 내가 옆자리로 돌아오자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셔도 돼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술실로 걸어 들어가던 그녀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 공포의 빛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미 그녀와 병원에 들어올 때부터 그녀의 보호자다. 보호자가 돌아갈 수야 없다. 수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산부인과 병원 로비 의자에 걸터앉아 주변 산모들의 눈치를 보며 두어 시간을 보냈다. 매점 여자는 회복실에 잠깐 누워 있다가 비틀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나는 뛰어가서 여자를 감싸안아 부축했다. 그토록 꿈꿔오던 포옹은 이렇게 어이없는 순간에 이루어지고 말았다. 여자는 몹시 힘이 든 듯 몸을 완전히 기대어왔다. 병원을 나올 때 빗줄기는 더 거세져 있었다. 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극장 앞으로 돌아왔다. 여자는 다시 매점에 돌아가야만 했다. 극장으로 들어가려는 여자의 손을 잡아끌고 나는 분식점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잘 먹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좀 먹어보라면서 여자를 재촉했다. 어디… 살아요? 예? 예… 이 동네 살아요. 오늘 고마워요. 여자는 음식을 반이나 남기고 일어났다. 따라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혼자 가고 싶어요. 아… 예… 예. 나는 그 이후로도 극장을 드나들었다. 매점에서 콜라도 사먹었다. 그러나 여자는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나는 그녀에게 돈을 주고 그녀는 나에게 콜라를 건네주는 사이로 돌아가 있었다. 그해는 그렇게 갔다.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동네를 떠났다. 극장에는 그 이후로 한번도 가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 극장 1층에 들어선 상가 중에 식당이 보였다. 식당 안은 텅 비어 있다. 구석자리에 앉아 설렁탕을 한 그릇 시켰다. 마음이 급하지는 않다. 어차피 어디 갈 데도 없다. 애초 생각이 극장을 찾아보자는 거였을 뿐 다른 계획도 없었다. 식당 문이 열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년의 여자가 한 사람 걸어 들어왔다. 앞머리로 가리긴 했지만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 식당주인이 주방에서 반가운 듯이 나왔다. 식당주인이 나오다 말고 한마디를 했다. 그 인간 또 왔어? 응? 여기 앉아봐. 아이고 몹쓸 놈. 서방이라는 것이…. 여자는 식당주인이 가리키는 자리로 가 앉으면서 천천히 말을 했다. 설렁탕 한 그릇 우리 집으로 배달해주고요. 우리는 비빔밥 5개. 목소리! 나는 여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식당주인이 여자의 앞머리를 들어 올려 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멍이 든 홑겹의 눈. 무언가 생각할 땐 사시가 되던 그 눈! 바로 매점의 그 여자다. 세월을 비껴가지 못한 그녀의 얼굴에 가득 찬 피로. 언제나 단정히 입던 하얀 블라우스 대신 그녀는 낡은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있다. 식당주인의 손을 스르르 빼더니 여자는 일어서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주인여자를 불렀다. 저기 저 방금 나간 아줌마 말입니다. 전에 극장에서 매점 보던 분 아닙니까? 주인여자가 나를 찬찬히 바라봤다. 지금도 매점 봐요. 극장 로비는 좁고 옹색했다. 매점은 간이 스탠드 형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매점 여자는 등을 돌린 채 간이의자에 앉아 비빔밥을 먹고 있었다. 콜라 하나 주십쇼. 여자는 내 말소리에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콜라를 내밀었다. 한손으론 입가에 묻은 고추장을 쓱쓱 닦아냈다. 700원이에요. 나는 만원 지폐를 냈다. 여자는 귀찮다는 듯이 금고를 열어 거스름돈을 꺼냈다. 그리고 돈을 건네주면서 흘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어떤 빛이 스쳐갔다. 멍이 든 여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가도 싶었다. 한순간 여자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듯하더니 다시 침착해졌다. 여자는 내게 돈을 주고는 간이의자로 돌아가 앉아 숟가락을 다시 집어들었다. 나는 물끄러미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콜라 캔을 집어들고 돌아서 나왔다. 코너를 돌다가 잠시 뒤돌아보았다. 여자가 일어나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급하게 의자에 앉았다. 극장 안에 들어서자 어둠이 내 눈을 찌른다. 곰팡이 냄새가 공기 속을 떠돌고 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멍하게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어제 여관방에서 본 것과 비슷한 비디오용 에로물이다. 과장된 여자의 신음소리가 극장 안에 가득하다. 주위를 두리번 둘러본다. 동네 건달인 듯한 청년이 두엇. 영화보기보다는 애인의 몸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한 커플도 두엇. 갈 데 없는 중늙은이들이 서넛. 한심한 삼류 비디오용 영화관의 관객다운 구성원이다. 극장은 작고 더 낡아졌다. 수줍고 단정하던 매점의 여자는 삶에 찌들어 옛모습을 잃어버렸다. 안소영은 가슴이 작고 왜소한 여자로 변했다. 나는 실직을 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도 없다. 그냥 조금씩 낡아가고 옹색해지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다. 왜소해진 안소영도, 우스꽝스러워진 극장 건물도, 매점의 여자도, 나도…. 콜라는 병에서 캔으로 변했다. 목이 말랐던 나는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갑자기 사레가 들었는지 기침이 튀어 나왔다. 격렬하게 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기침이 멈춰지지가 않는다. 입 속의 콜라가 바지 위로 쏟아졌다.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김정미/ 시나리오 작가 ◀ 이전 페이지▶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 <애마부인> 감독 정인엽 인터뷰 ▶ 1982년 <애마부인>, 그리고 에로영화는 어떻게 달려왔는가 ▶ 기억1 <애마부인>을 따라 욕망의 비빔밥을 맛보다 ▶ 기억2 고교 졸업식 예행연습날 <애마부인>을 만나다 ▶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

기억1 <애마부인>을 따라 욕망의 비빔밥을 맛보다

1981년 겨울 달구벌 본영에서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둔 나를 불러 사단장이 훈시했다. “아들아! 서울 가면 두 가지를 꼭 지켜라. 첫째 식욕이 없을 때는 영양의 균형을 위해 비빔밥을 사먹어라. 둘째 사리분별이 안 되는 일을 만나면 사람 많은 줄 뒤편에 서거라.” 나는 이 두 가지 주문 중 첫 번째 주문은 미심쩍었고, 두 번째 주문은 못마땅했다. 그래도 부하의 도리를 다해 첫 번째 주문만큼은 지켜야겠다고 작심하고 서울로 왔다. 82년 서울의 봄은 언제나 교정에 최루탄 입자가 눈처럼 흩날렸다. 강의실은 한산했지만 학교 앞의 막걸리집은 색깔 다른 말들로 늘 소란스러웠다. 술잔이 날아가고, 병이 깨지고, 비수 같은 말들이 오가고…. 아침이면 밀주의 숙취가 머리통을 술판처럼 혼란스럽게 흔들어놓았다. 나는 아침마다 국물, 국물, 국물을 찾아야 했다. 비빔밥의 나물로 영양 불균형을 우회통과하라는 사단장의 지시는 아득해졌다. 군자금이 올라올 때 한꺼번에 몰아서 도가니탕이나 꼬리곰탕으로 정면돌파하는 전략으로 나는 명령을 거역했다. 사단장의 훈시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잊혀졌다. 하지만 사단장은 위대했다. 인간을 지배하려면 공포와 수치를 장악해야 한다는 통치의 공리를 통찰했음일까? 82년의 어느날 나는 <애마부인>을 상영하는 극장 매표구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뒤편에 서 있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서 십수만의 관객이 이미 안소영을 보고 간 시점이었다. 이런 시국에 저걸 봐, 말아 하고 망설이는 포즈를 취하다 그제야 사람 많은 줄 뒤편에 슬쩍 붙은 꼴이었다. 그러니 ‘사람 없는 줄의 앞’과 ‘사람 많은 줄의 뒤’를 이항대립시킨 사단장의 수사의 정치는 그 의미론적 적실성을 판별할 수 없는 노예의 공포에 어김없이 작용했던 셈이다. 대학 입학하던 해에 안소영이 타고 왔던 애마를 이듬해에는 오수비가 몰고 왔다. 나는 다시 극장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좀 앞줄에 섰다. 동행도 있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몇달을 감옥에 있다가 출소한 친구와 같이 갔다. 영화를 보자고 제의한 건 나였지만 <애마부인>을 강력히 우긴 것은 그 친구였다. 물론 나의 의지도 그와 같았다. 영화를 다 보고 우리는 좀 머쓱했다. 종로의 학사주점에 가서 술을 마시는데 평소보다 속도가 좀 빨라 일찍 취했다. 그때 우리는 지성파 애마로 홍보된 오수비 얘기를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애마는 줄기차게 나타났다. 백마도 있었고 흑마도 있었던 듯싶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세간의 관심은 누가 마부가 되느냐에 쏠려 있었다. 해외여행이 통제되던 시절 <파리애마> 유혜리는 관객을 파리의 뒷골목까지 데려가 넋을 빼놓았다. 이국적인 용모와 건장한 신체로 금발의 남성과 대등한 연기를 펼쳤던 <짚시애마> 이화란은 아시아의 남성성에 한방 먹이며 관객의 콧구멍에서 긴긴 한숨이 새어나오도록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종마로 분류되는 애마의 계보다. 이후 퇴마가 된 애마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는 <짚시애마>를 마지막으로 입대했고 애마와의 인연도 끝이었다. 3년 전 멜로드라마 관련 논문을 쓰면서 자료를 뒤적거리는데 애마와 관련된 대목이 있었다. 한국 멜로드라마를 시대상과 연관지어 그 사회적 의미를 자리매김하는 논문이었는데, 거기에 애마는 ‘신군부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불기 시작한 성개방 바람의 첨병’으로 정리돼 있었다. 성개방의 표면적 논리 아래 여성육체를 볼거리로 전시하면서 군사주의의 근육질을 투사시킨 이미지가 애마라는 것이다. 나는 논문을 쓰면서 애마의 역사를 이 논법에 따라 정리했다. 하지만 산 자가 죽은 자의 기억을 불러내 가지치기한 역사보다 산 자의 기억은 좀더 사연이 많은 법이다. 나는 자문해본다. 그때 애마는 무엇이었을까? 애마는 그때까지 세미 포르노 한편 못 본 내게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포르노였다. 또 랭보의 시집을 끼고 다니며 폼잡던 내게 프랑스의 뒷골목을 보여주기도 한 취향의 동조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간혹은 감옥에 간 자와 안 간 자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불편함을 지워주는 윤활유 역할도 했다. 적어도 그때, 애마는 최루탄 소리와 정치담론에 짓눌려 정서적 영양불균형 상태에 빠져 있던 젊음에 개인적인 욕망과 허영의 숨통을 틔워준 비빔밥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비록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남성주의에 오염된 불량식품이라 할지라도. 얼마 전 개 먹지 말라던 브리지트 바르도 할머니를 보면서 애마의 주인공들을 떠올렸다. 가슴이 만월이어서 영향력도 만월인 생을 구가한 서양배우와 가슴이 만월이어서 졸지에 토사구팽당한 한국배우들이 대비됐다. 오수비나 이화란은 처음부터 분위기가 뒷받침되지 않아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인물들이었을까? 아니면 한번 전시된 육체에는 다시는 사랑이라는 치장을 걸칠 자격을 박탈하는 우리 안의 아버지의 계율 때문이었을까? 애마는 우리가, 우리의 육체가 기억을 배신하는 그 자리에 화석으로 묻혀 있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신문방송학) ▶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 <애마부인> 감독 정인엽 인터뷰 ▶ 1982년 <애마부인>, 그리고 에로영화는 어떻게 달려왔는가 ▶ 기억1 <애마부인>을 따라 욕망의 비빔밥을 맛보다 ▶ 기억2 고교 졸업식 예행연습날 <애마부인>을 만나다 ▶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편집실을 급습하다

처음부터 `급습`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1월 하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의 편집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김현 편집실을 아무런 예고도, 통보도 없이 불쑥 찾았던 사정은 이렇다. 한국영화 사상 최대 프로젝트인 <성소>의 후반작업 풍경과 장선우 감독이 짓고 있을 표정이 못 견디게 궁금했던 기자는 지난해 말, 장 감독에게 “부디 편집실을 찾아가게 해달라”는 취지의 간절한 이메일을 띄웠다. 거기엔 이미 몇 차례 <성소> 촬영장에서 장 감독과 마주쳤던 터라 흔쾌히 승낙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함께 담았다.며칠 뒤 장 감독은 “… 편집실을 들키고 싶진 않네요…. 모 해둔 거도 없고…. 그렇게 대단하구 무지막지한 영화는 아닌데다가…. (편집도) 아직은 오리무중이에요. 암튼요 깊은 관심 고맙구요…. 나중에 봅시다…”라며 편집실 공개가 곤란하다는 뜻을 밝혔다. 못내 아쉬웠지만 그의 의사를 존중해 편집실 방문을 포기하려던 어느날, ‘장 감독이 편집실을 찾은 여러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며 자신감을 표하고 있다’는 미확인 정보가 레이더망에 잡혔다. `편집실 습격사건`을 실행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은, 어쩌면 그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 미확인 정보는 단지 핑계였을 뿐, `설사 내쫓기야 하겠냐`는 호기와 `참을 수 없는 <성소>에 대한 호기심`이 적당히 뒤범벅된 결과였을 법도 하다. 결국 무턱대고 편집실에 발을 들여놓은 뒤, 장 감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별 도리는 없었다.장 감독, 와인 한병에 무장해제 “… 뭐야, 이래도 되는 거야, 이렇게 그냥 막 쳐들어오는 건가?” 막 편집실 방 문턱을 넘어선 불청객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장선우 감독이 한마디 던졌다. 경우에 따라선 살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을 던지는 그의 표정이 그리 적대적이진 않다. 일단 성공이다. 와인 한병을 사왔다는 이야기에 “와인? 하, 그건 좋지”라며 노기를 조금 더 누그러뜨린 그가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영화를 왜 자꾸 보려고 해?”라는 말을 하며 슬쩍 미소를 비쳤다. 속으로 진입완료, 작전성공, 을 외친다. 결국 그는 “오늘 편집 끝날 때까지 구경할 거야?”라며 이날 편집이 끝날 때까지 있어도 좋다는 뜻을 돌려 말했다.3개월째 <성소>의 편집이 이뤄지고 있는 김현 편집실은 서울 혜화동의 한 아파트에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분위기였다. 평소에는 제작팀으로 버글버글거린다지만, 이날 따라 스크립터와 연출부 몇명만이 편집실을 지키고 있어 더욱 평안한 느낌이었다. 수많은 스탭, 배우에다 각종 지원을 해주는 군·경찰 병력까지 뒤얽혀 어지럽기까지 하던 촬영장 분위기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아비드 편집기로 이뤄지는 편집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장선우 감독의 인상에서도 촬영장에서 잠시나마 느껴졌던 초조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 10월31일 9개월 동안 부산에서 진행된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후, “일주일에 닷새는 편집, 하루는 <바리공주> 사무실에 가고, 일요일엔 쉬면서” 편집에 매달려온 그는 서서히 겉모습을 드러내는 영화를 보며 활기를 찾는 모양이었다.편집실을 찾을 당시, 이 영화의 편집작업은 절반을 훨씬 넘긴 상태였다. 32만자 정도 되는 촬영분에서 필요한 컷을 뽑아 일단 순서를 맞추는 순서편집은 며칠 전 완료됐고, 컴퓨터그래픽과 사운드, 일부 미촬영분을 뺀 상태의 A편집본을 완성해나가는 단계였다. 장 감독의 예정대로라면 2월 중순까지 A편집본을 완성한 뒤 미촬영분을 찍고, 3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컴퓨터그래픽(CG)과 사운드 작업에 임하게 된다.여유있는 듯 보여도 7월 개봉에 맞추려면 일정은 빡빡한 편이다. 블록버스터영화답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운드와 음악을 집어넣어야 하고, 상당부분 장면이 CG의 손길을 거쳐야 하기 때문. 특히 이 영화의 배경은 대부분이 사이버 공간이며, 이에 대한 표현 역시 “현실과 게임의 중간 정도”로 맞출 계획이기 때문에 CG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만약 편집이 끝났다고 이후 작업에서 방심했다간, 100억원이 넘는 돈과 수많은 스탭의 숱한 세월을 녹여낸 이 초대형 프로젝트가 `저연령 아동물`로 전락할 것은 자명한 일. 장 감독이 CG작업에도 참여해 이것저것 챙겨보려는 이유도 이같은 사정 때문이다. “나야말로 이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는 장 감독의 말이 엄살이 아님은 분명하다.2시간이 넘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잘라내지이날 편집한 부분은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대략 초반 30분부터 1시간 지점까지. `성소`라는 게임에 접속한 중국집 배달부 주(김현성)가 성소(임은경)를 찾아가는 길에서 라라(진싱)를 만나는 장면들과 악당 패거리인 오인조와 비련파 등이 성소를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는 신들이다. 총 3단계로 나뉘어 있는 이 영화의 1단계에 해당되는 지점이라 대형 액션신이나 긴박한 상황 전개는 많지 않았지만, 처음 만나는 <성소>의 화면은 기대감을 부풀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대사와 지문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일반적인 시나리오와 달리, <성소>의 시나리오는 “소녀!… 분위기 잡는 순간 창고 벽을 뚫고… 또는 날아서 차가 들어옵니다. 비련파들이죠. 일제히 뛰어내려 주먹과 발로 번개같이 오인조를 제치고… 성소를 탈취해갑니다…”식으로 일종의 설정만을 부여하는 탓에 어떤 장면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던 터라, CG 등으로 ‘화장’하지 않은 영상도 흥미롭게 보였다. 80%가 액션장면으로 이뤄져 있다는 장 감독의 말마따나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대목은 화려한 액션. 특히 `올바르게 살기운동본부` 간부에게 끌려가는 성소를 구하는 라라의 공중액션은 홍콩에서 데려온 무술감독의 액션 연출 솜씨가 두드러져 보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공중으로 붕 날아 기관총을 쏘고, 다시 공중회전을 해 오토바이에 착지하는 이 신은 며칠 동안 부산 서면 롯데백화점 앞길을 통제한 채 촬영했다는 그 장면. 홍콩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는 액션장면이었다. 오인조의 아지트를 비련파가 습격하는 장면의 액션도 그 못지않았다. 수직벽을 타고 달리는 라라의 모습이나 속도감이 느껴지는 자동차 추격신 등은 한국영화에선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었다. 2단계, 3단계로 갈수록 액션의 스케일과 속도, 난이도 모두 커지고 빨라지고 높아진다는 것이 장선우 감독의 설명이다.이어 눈에 띈 것은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수시로 화면에 나타나는 자막이었다. `라라-크로프트를 연상하면 됨. 하지만 여기선 레즈비언임. 공격력 뛰어나지만 정신력 산만함`식의 자막을 사용하는 것은 이 영화의 화면이 게임 인터페이스를 응용하기 때문이다. 캐릭터에 관한 설명뿐 아니라 게임 화면처럼 ‘공격력 얼마, 아이템 무엇’식의 팝업창도 개성있는 디자이너 최정화씨의 디자인과 CG작업을 통해 보여질 것이란다. 자칫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을 수 있는 자막과 팝업창을 지속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이 영화는 현실과 가상공간과 판타지 중간의 어디쯤으로 관객을 인도할 듯하다. 비단선적 내러티브도 이같은 효과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롯데백화점 앞길 장면에서 영화는 라라가 멋지게 공중회전을 한 뒤 오토바이에 착지하는 장면을 보여준 뒤, `원래 의도는 이렇지만…`이라는 자막과 함께 비디오의 ‘되감기’ 버튼을 누른 듯 이전 상황으로 돌아간다. 이어지는 화면은 `실제로는…`이란 자막과 함께 공중회전을 한 라라가 땅바닥에 민망하게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이다. 또 액션 위주의 영화라지만 오인조들의 덜떨어진 행동이나 라라와 주의 대화 등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미뤄볼 때 완급조절에도 꽤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상식적인 얘기지만, 편집의 기능은 이야기를 짜맞춰나가는 것만은 아니다. 불필요한 장면을 빼내 이야기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러닝타임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역할 또한 중요하다. <성소> 역시 순서편집된 분량이 2시간40분 남짓되는 탓에, 이날 편집의 핵심도 결국 장면들을 매끄럽게 잘라내는 일이었다. “2시간을 넘기면 안 되는데…. 아직 한국영화는 2시간이 넘어가면 뒷심이 달리는 것 같아. 이 영화도 뒷부분에서 힘이 떨어지면 끝장이거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분량을 줄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장 감독이었지만, 막상 편집실 조수가 신을 과감히 들어낼라치면 “그 장면을 꼭 빼야 할까?”라며 은근히 제동을 걸었다. 감독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펴는 방법을 아는 듯한 김현 기사도, 한컷 한컷을 자식처럼 애지중지 여기는 감독의 뜻을 완전히 꺾진 못했다. 그는 “러닝타임이 2시간…10분, 아니 2시간3분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모르겠어”라며 말을 뒤집는 장 감독에게 슬쩍 눈을 흘기기만 할 뿐이었다. 이것도 팀워크일까. <꽃잎> 이전까지 줄곧 함께 작업했던 김현 기사에 대해 장 감독은 “그와 일하는 건 익숙해서 좋다”고 설명한다(김현 기사가 디지털 편집시스템인 아비드를 도입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때문에 장 감독은 <꽃잎> <나쁜 영화> <거짓말> 등 최근작 3편은 다른 편집 기사와 작업했다).“넉넉한 사람이면 영화에서 나비를 볼 것” 전체 영화 분량의 25%에 불과하고, 그나마 완성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잠시나마 접할 수 있었던 <성소>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장선우식 액션영화`, 그것도 구도(求道)라는 주제를 보일 듯 말 듯 품고 있는 영화답게 여태껏 한번도 보지 못한 독특한 스타일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편집과정을 조금이나마 보고나면, 이 영화의 정체가 어느 정도 밝혀지리라는 애초의 기대가 가당치 않았다는 점 또한 확실했다. 홍콩 액션팀이 연출하고 장 감독이 마무리하는 액션은 어떤 모양새를 갖추게 될 것인지, 게임이라는 가상공간을 주배경으로 삼은 것이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인 호접몽(胡蝶夢)과 어떻게 연관을 갖는 것인지,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악은 현대사회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 것인지 등등, <성소>에 관한 궁금증은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간다. 그러고보면 “정신없이 보고, 극장 밖을 나설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이 영화에 대한 장선우 감독의 바람도 <더록> 같은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처럼 화끈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선언만은 아닌 듯하다. “그릇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나비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또다른 말처럼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의 뒤통수에 묵직한 한방을 날리겠다는, 관객의 마음속 깊은 곳을 `습격`하겠다는 뜻도 함께 담고 있는 건 아닐까.문석 ssoony@hani.co.kr사진설명1. 장선우 감독2. 80%가 액션장면으로 이뤄진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대목은 화려한 액션. 편집실에서 본 <성소>의 액션은 한마디로 특이했다. 수시로 나오는 자막과 게임 화면 같은 팝업창은 어떤효과를 가져올까?3. 거리에서 자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 총격을 가한 성소(임은경)는 발전소 꼭대기로 올라가 자신을 생포하려는 보위대와 대치한다. 그 과정에서 성소를 짝사랑하던 오비련이 살해되자 절망한 성소는 지상으로 뛰어내린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장선우 감독을 둘러싼 소문과 진상

1982년 <애마부인>, 그리고 에로영화는 어떻게 달려왔는가

1982년 말, 동물 최초로 에로리그에 출전하다 국내 에로리그는 정규시즌에 돌입하자마자 시비에 휩싸였다. 도화선은 <애마부인>. 일부 관계자들은 “지금까지 금기시해온 동물까지 끌어다 타석에 내보내는 건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난다”며 미등록 선수의 출전이 불법이라며 강하게 문제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KEO(Korea Erotic film Organization)는 ‘미국에도 선례가 있고, 또 지극한 동물애호로 보여지므로 별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으로 갈무리. 이어진 하반기 리그는 ‘이변’으로 시작됐다. 타선의 응집력이 약한 것으로 평가됐던 <반노>는 원미경, 마흥식 등 오랜 ‘중고 신인’ 콤비의 활약으로, <애마부인>의 거포 안소영, 임동진 두 선수가 이적해 기대를 모았던 <산딸기>를 눌렀던 것이다. 승부는 일체의 보호 장구 없이 들어섰지만 원미경이 타석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좀더 적극적으로 덤볐던 것에서 이미 <반노>쪽으로 기울었다는 게 당시 대부분의 관전평이다. 이에 비해 첫선을 보인 <빨간앵두>는 기대 이하의 전력만을 노출했는데, 방희, 신영일 등이 있긴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서 한방을 날려줄 슬러거의 부재가 쓴잔을 들이켠 이유라는 게 중평이다. 내용 역시 <애마부인>과 비슷하며, 말 또한 등장하지만, 그저 그런 소품에 불과할 따름이라 별 재미를 못 본 케이스. 이에 비해 <애마부인>의 구단주인 연방영화사의 <탄야>는 야성미 넘치는 하명중을 3번에, 지적인 외모의 강석우를 5번에 기용한 뒤, 실의에 빠져 있던 안소영을 독려해서 4번 타자로 기용, 탄탄한 진용만으로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82년 총관중 수는 3917만명으로 집계됐는데, 약 200만명 정도가 줄어든 수치. 이는 전년도에 비해 92.2%나 늘어난 TV 수상기의 보급 때문이다. 특히 이탈자 중 상당수가 <명랑운동회> 등 사이비 운동 프로그램 등에 중독되면서, 휴일 오전 시간을 응원에 허비하느라 정작 경기장을 찾을 시간에 수면을 취하는 사태 등이 빈번히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5년 <뽕> <변강쇠>등 신토불이 에로 줄이어 97개나 됐던 3년 전에 비해 전체 팀 수가 80개로 줄었고, 관중 수까지 소폭 감소할 움직임을 보이자 5공 정부는 국내리그 활성화 방안을 담은 긴급 시책을 발표한다. 이전까지는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구단주만 팀을 만들 수 있었으나, 이제는 등록만 하면 리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 하지만 에로지구의 경우에는 주어진 혜택만큼 제한도 따랐다. 특히 구단이 자주 이용하는 버스나 홈 경기장에 지나치게 외설적인 광고물을 부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게 된 데는 ‘풍기문란 근절하여, 정의사회 구현하자’는 정부의 의지가 작용하기도 했지만, 연초부터 유지인, 금보라, 나영희, 오수비, 이보희 등 국내 리그에서 내로라 하는 여자 선수들이 KEO에 일언반구도 없이 재팬 리그에서 발행하는 모 잡지에 나란히 모델로 등장, 신체의 일부분을 노출한 사건이 발각되어 경고조치당한 것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의 경우, 아시안게임을 1년 남겨두고 벌어진 전력누수 사태인 만큼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도 했으나, 결국 고의성이 없었다고 판단해서 개별 선수들에게는 경미한 처벌이 내려졌다. 대신 가위를 든 심판진인 공륜은 에로리그에 곧장 ‘검열강화’라는 엄청난 전체기합을 가했다. 그 때문인지 <애마부인3>만이 8만6천명의 관중을 불러모아 그해 랭킹 톱10에 끼었을 뿐, <산딸기2> <반노2> <빨간앵두2> 등은 모두 자멸했다. 여기에 <먹다버린 능금>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 <깊은 숲속 옹달샘> <깊고 깊은 그곳에> <뼈와 살이 타는 밤> <밤을 먹고 사는 여인> <피조개 뭍에 오르다> 등 고만고만한 팀들의 처지는 더욱 딱했다. 선우일란, 오수비 등 대어급 신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 역시 한해 5팀을 옮겨다니며 ‘최다 이적선수’라는 영예 아닌 영예만을 얻었을 뿐이다. 다만 경기장에서 정권에 대한 비난 발언을 간헐적, 우회적으로 암시해 화제를 모았던 <어우동>만이 서울에서 관중 39만2천명을 동원했다. 이를 기화로 86년에는 <내시> <뽕> <변강쇠> 등이 전체 리그순위 10위 안에 들 정도로 사극에로 강세경향이 두드러졌다. 1988년 <매춘>의 외인구단 vs <파리애마>의 해외 전지훈련 지상 최대의 쇼, 올림픽이 코리아에서 열렸지만,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는 국내 에로리그는 다른 리그에 비해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당시에는 ‘신토불이’ 구호 아래 연이어 제작됐던 <가루지기> <뽕2> <변강쇠3> 등이 꾸준한 팬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단순한 애국주의의 발로라기보다는 짧은 스토브 리그 중에 강문영, 하유미, 최미선 등 곧바로 실전에 투입할 만한 대어급 신인선수 발굴에 각 팀들이 애를 쓴 것이 큰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 <변강쇠> 팀은 요란법석한 쇼맨십과 허풍가득한 퍼포먼스로 관중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던 이대근 선수 대신 좀더 무게있고 진중한, 그러면서 토속적인 마스크의 김진태를 타석에 기용하는 모험을 감행, 무난한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88년은 ‘찍히면 자른다’는 기조 아래 가위 들고 설치던 심판위원회 공륜의 기세가 누그러진 한해이기도 했다. 특히 대표주심이 바뀌면서 그동안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팀들이 대거 팀조직과 재정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깜동>은 어둠 속에서 이보희, 김희라 두 선수가 보여준 타격 자세가 규정에 나와 있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아, 별로 괴이하지 않은데도 전체 장면이 모자이크 처리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88년 에로리그의 양대산맥은 <매춘>과 <파리애마>. 특히 <매춘>은 FA시장에서도 팔리지 않던 나영희, 김문희 등을 불러들여 만든 일종의 외인구단. 올림픽이 열리던 기간에 서울 명동의 중앙 경기장에서 첫날 게임을 가졌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예상치 않았지만, 43만2천명을 불러모을 정도로 매일 연타석 홈런포를 작동했다. 물론 <매춘>의 경우 팀 내 여자선수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부당한 처사가 바깥으로 흘러나와 일부 여성 관중이 이례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말썽을 빚기도 했다. <애마부인>의 초대 조련사로 알려진 정인엽 감독의 <파리애마>는 해외 전지훈련에다 외국인 선수를 스카우트한 것이 관중 10만명을 돌파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마이너리그라 불리던 비디오 시장에서도 당시로서는 거액인 1500만원에 팔릴 정도였다고. 1992년 마이너로 향한 에로팀들, <젖소부인…> 성공신화 일궈 사실 에로리그의 폐업 선언은 3∼4년 전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88년 <위험한 정사>를 시작으로 할리우드의 거대 구단들이 대거 입성하게 되고, 국내 팬들의 상당수가 화려한 개인기 위주의 할리우드 직배리그 팀들에 관심을 돌리게 된 것. 한때 할리우드 직배리그 상륙 결사반대를 위한 투쟁위원회 등이 결성되어 일부 경기장에 국산 구렁이를 푸는 등 강한 반발이 있긴 했지만 그러한 저항도 오래지 않았다. 92년은 이미 대세를 거스르기엔 너무 벅찬 상황. <원초적 본능> 소속 샤론 스톤이 특유의 거만한 자태로 다리 꼬기 타법을 선보이는 상황에서 국내 에로리그는 고작해야 <탄드라 부인> <캉캉69> <데카당스 37˚2> 등 외국 팀을 본떠 이름을 짓는 고육책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중 관중 5만명 이상이 몰려든 국내 경기는 단 한편도 없었다. 여기에 <결혼이야기>를 필두로 국내 여타 리그들에서도 에로리그의 룰을 적극적으로 변용해서 끌어들인 것도 에로리그의 대내외적인 위상이나 입지를 좁혔는데, 이로써 국내 에로리그는 마이너로 분류됐던 비디오숍과 안방으로 자리를 옮겨 게임을 치르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마이너리그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다. 떨어지는 몫이 쏠쏠한 편이었던 것. 결혼 필수품으로 VTR이 각광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보급률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관중은 생생함은 극장에 비해 떨어지지만 안방에서 경기를 그것도 은밀히 즐길 수 있게 됐고, 이에 부응하는 <야시장> 등 자극적인 컬러의 팀들이 출현했으며, 경기를 맘껏 골라 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비디오숍 역시 2만여곳에 이를 정도로 호황을 맞았다. 이 당시 유호프로덕션과 한씨네마타운 산하의 팀들이 벌인 선의의 격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승부. 리그 창설에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한 유호프로덕션은 <야시장>에 이어 94년부터는 세계 각국의 대표선수들을 기용한 <성애의 여행>팀과 코믹으로 승부한 <어쭈구리> 시리즈로 기선을 잡았다. 유호보다 후발주자인 한씨네마타운은 물량공세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일단 <정사수표> 시리즈로 자리를 잡은 뒤 한지일 대표가 직접 배우로 출연하는 등 구단의 운영비를 최대한 줄이는 슬림화 전략을 기조로 운영해오다 94년, 진도희라는 희대의 걸출한 에로스타를 발굴, <젖소부인 바람났네>라는 장수팀을 이끌어 유호와 함께 양강체제를 구축했던 시기였다. 1996년 이후 우리는 언제 다시 뜨거워질까? 그러나 거품은 금세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리그는 어떠한 자각도 없이 97년과 98년, 연이어 대대적인 베끼기 경쟁에 들어간다. 팀명을 따와서 비트는 기술에 승부를 걸었는데, 충무로 메이저리그의 작품들이 1차적인 대상이 됐다. <유월의 화이트데이> <간첩 리철순> <모텔성인장>을 시작으로, 이젠 지겨울 법도 하건만 아직도 <자취방 습격사건> <번지점프 중에 하다> <털수선> 등 기막힌 제목들이 끊이지 않고 쏟아진다. 물론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얼마나 많은 선수가 어떤 자세로 기예를 보여주냐는 차이일 뿐이다. 1차 관중격인 비디오숍들은 9천개 수준으로 대거 줄어든 상태. 여기에 누구나 휘두를 수 있는 값싸고 가벼운 디지털 캠코더라는 ‘신종 배트’가 등장한 것과 맞물려 지금은 40여개 업체들이 3∼4일에 한 작품씩 내놓고 있는 이른바 난립·혼란 상황이다. 이러니 이른바 ‘공회전’과 ‘끼워팔기’와 ‘사은품 살포’등의 로비가 아니고선 아예 관중과 만나기조차 불가능한 형국이다. 비좁은 비디오 필드에서 아웅다웅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중과 만나는 대부분의 팀들 역시 90분 분량의 ‘체위 버라이어티 쇼’를 보여주는 데만 정신을 팔고 있다. 마이너의 세계에 갇혀버린 에로영화의 탈출구는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들은 언제쯤 다시 격상할 수 있을 것인가. 이영진 anti@hani.co.kr▶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 <애마부인> 감독 정인엽 인터뷰 ▶ 1982년 <애마부인>, 그리고 에로영화는 어떻게 달려왔는가 ▶ 기억1 <애마부인>을 따라 욕망의 비빔밥을 맛보다 ▶ 기억2 고교 졸업식 예행연습날 <애마부인>을 만나다 ▶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