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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박찬욱이 박찬욱을 말하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한국영화 흥행기록 경신, <복수는 나의 것>의 비평적 찬사, 상업영화의 룰을 깬 <올드 보이>의 흥행성공과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박찬욱(41)은 그야말로 ‘흥행과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쥔 ‘희귀한’ 감독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거장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도 아니고, 거장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아직 나이는 젊고 할 일은 많은 감독이다. 칸영화제에서 싸들고 온 박수와 찬사의 짐을 미처 풀기도 전에 그는 최근 촬영을 끝낸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의 후반작업을 시작했고, 칸에서도 바쁜 일정 가운데 짬짬이 쓰다가 돌아온 <친절한 금자씨>(가제)의 시나리오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 국내 시사회 당시 “또 복수냐”는 기자들의 반복되는 질문에 홧김에 “복수 3부작을 만들겠다”고 호언하면서 정말로 3부작이 돼 버린 복수시리즈의 마지막편이다. 복수극보다는 속죄의 드라마가 강조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영애. 칸에서 돌아온 직후인 26일 캐스팅이 확정됐다. 주인공이 정해진 마당에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져야 한다. 또한 칸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할리우드로부터의 러브콜은 그가 고민해야 하는 여러가지 과제 중의 하나로 덧붙여졌다. 이 모든 찬사와 분주함은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상한 상업영화’ <올드보이>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그가 오늘, 한국영화의 가장 예외적인 자리에 앉게 되기까지의 시간, 인간 박찬욱과 감독 박찬욱이 걸어온 길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본다. 미술사학자를 꿈꾸던 착실한 모범생, 영화를 만나다. 좋은 예술가들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다는 데 난 그런 게 없어요. 작품에 서정성이 부족한 이유가 그래서인가(웃음)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문화적인 환경에서 자란 편이었죠. 부모 양가가 5대째 서울에서 산 서울 토박이였고.(박 감독의 아버지는 건축과 교수였던 박돈서 전 아주대 공대 학장이며, 큰 아버지는 박승서 전 대한변협 회장이다.)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 전시회를 많이 다녔던 기억이 나요. 친가가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것같은데 그 재능은 동생(박찬경씨는 화가 겸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이 더 이어받았고. 10대땐 영화보다 미술에 빠져 친구따라 극장 순례 공부 접어 그에 비하면 영화는 별로 많이 보러 다니지 않았어요.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를 자주 봤고 극장에서 봤던 영화는 007시리즈가 생각나네요. 그걸 보고 초등학생때 콘티 북처럼 스토리를 만들어서 공상하고 그랬어요. 반면 무협영화는 거의 안 봤어요. 장철이 누군지도 몰랐고, 이소룡 영화도 <용쟁호투>만 봤으니까. 그땐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엘 그레코나 카라바치오, 고야, 주세페 디 리베라 같은 화가들의 그림에 푹 빠졌죠. 고문받는 사람들이라든나 화살에 온몸이 수십바늘 찔리는 순교화라든가, 그로테스크하고 드라마틱한 면에 매료됐던 것같아요. 그 영향은 지금 내 영화와 연결되는 지점이 분명 있지요. 그런데 실기에는 재능이 빼어나질 않아서 미술사학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철학과를 선택했어요. 성적이요 의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권유로 이과에 갔다가 도저히 적성에 안맞아서 고3때 문과로 옮겼어요. 착실한 모범생이 그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한 건데(웃음), 제일 친했던 친구가 영화를 좋아해서 그 친구의 인도 아래 의정부까지 영화보러 다니느라 공부는 아예 접었죠. 그때부터 영화광이 됐지만 영화과 진학을 하지 않은 이유는 엄두가 안나더라고요. 영화는 터프가이들만 하는 건 줄 알았죠. (웃음) 대학시절 <현기증>과 데모대 사이에서 현기증을 느끼다 고등학교가 악몽같아서 대학진학은 해방 그 자체였지요. 머리도 기르고 옷도 별나게 입고 다녔어요. 검은 터틀넥 스웨터에 두꺼운 은목걸이하고, 오스카 와일드 책 들고 다니고. 그런데 학생 운동이 치열하던 그때 한 학기 다녀보니까 분위기가 이게 아닌 거에요. 그때부터는 교련복만 입고 다녔어요. (웃음) 그래도 운동하던 선배들에게 이미 찍혀서 나를 제껴놓더라구요. 그때가 가장 충격이 컸어요.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운동하는 서클에 들어갔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다가 내가 가면 다른 이야를 하고. 같이 해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진짜 고독했죠. 서강대 도서관에 영화원서가 많은 편이었는데 책을 빌리면 도서카드에 언제나 몇명의 이름이 반복해 등장했죠. 문과대 바닥이 좁으니까 금방 사귀게 됐고, 이 친구들 통해서 정성일, 강한섭, 전양준, 김소영 같은 선배들을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학교에 영화동아리를 만드는데 참여했어요. 원서강독하고 문화원 다니면서 정성일, 전양준 선배의 구라에 많이 놀아나고(웃음), 유학가 있는 김홍준이라는 천재가 한국영화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듣고. 그때 쯤 <영화언어>라는 비평지가 창간됐는데 가서 잔심부름도 하고 그랬죠. 감독이 되기로 결심을 한 것도 그때였어요. 한 신부 교수님이 영화를 좋아해서 소장비디오로 정기 상영회를 열었는데 그때 히치콕의 <현기증>을 보면서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쫓는 미행장면이나 여자가 미술관에 가서 죽은 여인의 초상화를 보는 장면에 넋이 나갔죠. 또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라면을 먹으러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같은 영화를 본 지금의 아내(김은희), 그때는 이대생이었는데, 를 친구한테 소개받은 거예요. <현기증>은 여러모로 제 인생의 영화가 된 셈이지요. 그런데 그때는 조직에 몸담고 있지 않았어도 모두가 돌을 던지던 시기라 저 역시 맨날 그러고 살았어요. 이쪽 가서는 최루탄에 도망다니고, 저쪽 가서는 히치콕에 열광하는 게 혼란스러웠죠. 저예산 B급에 열광 또 쓴잔, 시나리오 들고 영화사 전전 데뷔에서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졸업하자마자 선배들한테 부탁해서 이장호 감독의 제작사(판 영화사) 연출부 막내로 들어갔어요. 유영진 감독의 <깜동>이라는 영화였는데 세컨드가 곽재용 감독, 막내가 저였죠. 그 연으로 곽 감독의 데뷔작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조감독을 했죠. 그런데 독립영화처럼 찍던 <비오는…>의 현장이 너무 힘들어서 촬영이 끝날 때쯤에 제가 뛰쳐나왔어요. 그때 영화를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생각해놓은 스토리가 있어서 각본이라도 써보고 그만 둬야겠다 싶더라구요. 노조파괴전문가인 제임스 리를 모델로 쓴 하드보일드 미스테리였는데 다 쓰고 보니까 마음에 드는 거예요. ‘이런 재능을 썩히면 한국영화에 큰 손실이다’라고 혼자 생각하고는(웃음) 어떻게든 다시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죠. 그리곤 구멍가게만한 영화수입사에 취직을 했어요. 돈 모으면 영화 찍게 해준다는 말에 혹했죠. 외화 고르고, 자막번역하고, 보도자료 쓰고 온갖 잡일 다 했죠. 심지어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빈센트>가 길어서 극장에서 잘라달고 했을 땐 그 영화 편집까지 했어요. 누군가 저질러야 할 범죄라면 업자보다는 그래도 내가 하는 게 낳을 것같다고 생각한 거죠. 돈이 좀 모이니까 대표가 약속을 지켜줘서 첫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을 찍게 됐죠. 조건은 유덕화의 <천장지구> 냄새가 나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만들어 달라는 거였고. 그때 이미 저예산 B무비에 열광했기 때문에 그런 조건을 거절하는 건 상업영화 감독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어떤 악조건에서도 창조성은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최재성으로 내정했던 남자주인공이 갑자기 이승철로 바뀌면서 갈등이 생겼죠. 결과적으로 이승철은 힘닿는 한에서 프로답게 했고, 다들 열심히 했어요. 이승철이 방송출연이 금지됐던 때라 팬들이 극장으로 몰려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첫회는 그랬어요. 첫회만(웃음). 스탭들끼리 우리가 해냈다고 감격했는데 2회부터 텅텅 비었어요. 서른에 데뷔했다 싶어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다음 영화 <삼인조> 찍을 때까지는 계속 글쓰면서 보낸 시간이었어요. 그 적은 원고료와 아내의 지독한 알뜰함으로 근근히 살았지요. 그 사이에 엎어진 시나리오는 셀 수도 없어요. 제작이 확정된 다음에 파놓았던 명함만 열개가 넘었으니까. 95년쯤인가 안동규(영화세상 대표)형이 프랑스에서 <레옹>을 보고 와서는 그 영화처럼 폭력적인 총싸움 영화를 만들자고 하더군요. 나야 안봤으니까 상상도 안되고, 마침 그 전에 해보고 싶었던 기획이 이종대, 문도석의 칼빈총 강도사건이어서 그걸 모티브로 <삼인조>를 준비하게 됐죠. 처음 시나리오는 완전히 달랐어요. 거칠고 난폭하게 가려고 했죠. 직전에 봤던 아벨 페라라 같은 감독의 영향도 있었고. 그런데 중간에 제작사가 바뀌고 시간을 끌면서 영화가 변질돼 주류영화에 가까워져 버린거지요. 제작자 탓이라기보다는 제가 잘 못한 거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첫 영화보다 <삼인조>가 훨씬 후회되고 더 한심하게 느껴져요. 결국 두번째 영화도 흥행, 비평 모두 실패했죠. 보통같으면 그게 유작이 됐을 거에요. 복수 완결편 주연은 이영애, 편집권 배제 할리우드행 갈등 또다시 시나리오 몇개씩 가방에 넣어서 제작자들 찾아다니는 보따리 장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 명필름 심재명 대표한테 설명했던 아이템중에 <복수는 나의 것>도 있었는데 거절당했고. 그런데 심 대표가 <삼인조>를 잘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소설 의 감독을 제안해왔고 소재나 미스테리 플롯이 괜찮아 보여서 덥석 한다고 덤빈 거죠. 안한다면 또 어떡하겠어요(웃음).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거고. 독특한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다. 전에는 내가 상업영화감독이라고 말할 때 입장료 받고 내 영화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의미가 좁아지는 것같아요. 좀더 적극적으로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영화를 만들자는 건데 가장 큰 이유는 배우와 스탭들이예요. 칭찬받고 상받는 것도 좋지만 흥행보다 이 친구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건 없거든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맥빠져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죠. 다만 상업영화이되, 독특한 상업영화를 하자는 생각이예요. 흥행도 독특해야 잘되잖아요. 또 관습에만 매달리면 만드는 일도 지루해지니까. 할리우드 진출이 망설여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예요. 칸에서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감독 제안을 해오면서 하는 말이 최종 편집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갈등하고 있죠. 만약 한다면 웨스턴이나 에스에프를 찍어보고 싶고, 그쪽에 그런 말도 했어요. 한국에서 찍을 수 있는 영화를 굳이 할리우드까지 가서 할 이유는 없잖아요. 박찬욱은... 1963년 8월23일 서울출생 건국대부속중학교, 영동고등학교 1987년 서강대 철학과 졸업(82학번) 작품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삼인조>(1997) <공동경비구역 JSA>(2000) <복수는 나의 것>(2001) <여섯개의 시선-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 <올드 보이>(2003)

영상자료원 5월3일부터 서비스, 비싼 열람료에 이용자들 불만 토로

한국영상자료원(이사장 이효인, 이하 영상자료원)의 고전영화 DVD와 VHS 열람료가 지나치게 비싸 이용자들에게 불만을 사고 있다. 영상자료원은 지난해 김기영 감독의 <하녀>(사진)(1960),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1961) 등 영화제가 아니면 쉽게 만날 수 없는 1950, 60년대 한국영화 52편을 선정해 DVD와 VHS로 제작했고, 올해 5월3일부터서 일반인들에게 열람을 허용해 주목받았으나, 열람료가 편당 5천원이나 돼 이용자들이 열람을 꺼리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로 영상자료원이 주최하는 상영회의 관람료가 2천원이고, 일반 비디오 자료의 열람료가 500원이다. 이에 비하면 열람료가 지나치게 높은 것이 사실. 영화과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저변을 넓히고 공공성을 강화해야 할 영상자료원에서 극장 관람료에 버금가는 가격으로 비디오물의 관람료를 책정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영상자료원쪽은 제작에 들어간 비용을 고려한 가격이라고 항변한다. 영상자료원 보존2팀의 이선희 팀장은 “텔레시네까지 포함해서 1편의 영화를 DVD로 제작하려면 150만원이 들어간다”며 “편당 300회 열람한다는 가정 아래 가격을 5천원으로 책정했다”고 해명했다. 열람료를 낮추기 위해선 상식적으론 해당 DVD와 VHS를 복사해 영화진흥위원회 및 대학 도서관 등에 배포, 열람케 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 팀장은 이마저도 “영상자료원이 법적으로 도서관에 속해서 수익사업을 할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시장에 정식 출시하는 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운데다 소비자들의 호응이 낮아 더욱 요원한 방법. 영상자료원은 앞으로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연간 100편씩 고전영화를 DVD로 제작할 계획이며, 라이브러리가 풍부해지면 열람 횟수도 늘어나고 따라서 열람료 또한 낮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용자들에겐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지점이다.

[파리] 독립다큐멘터리의 활로는 어디에?

파리 생미셸의 한 작은 극장에서는 두달 전부터 <국경의 작가들>(Ecrivains des frontieres)이라는 영화가 상영 중이다. 매일 저녁 7시 상영이 끝나고 나면 관객은 이 영화를 만든 사미르 압달라와 호세 레이네스와 함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만든 영화가 좋았다면,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이 포스터를 여러분들이 가는 곳에 붙여주세요.” 영화관람 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관객에게 압달라와 레이네스는 절실한 부탁의 말을 전한다. 텔레비전 채널이나 영화시장의 개입없이 만들어진 독립다큐멘터리로서 <국경의 작가들>은 파리 시내 단 하나의 극장에서 개봉한 뒤 한달 만에 4천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일반 극장이나 멀티플렉스에서는 상영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단지 만들어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관객을 만나지 못한 영화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비디오로 촬영된 독립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 규격화의 범주를 벗어난 내용과 형식을 지닌 영화들은 기존의 상영 및 배급 시스템 아래에서는 관객과의 만남의 기회를 가지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35mm 필름의 포맷이 규격처럼 되어 있는 대다수 일반 극장들의 상영 시스템에 들어가기 위해서 비디오나 디지털로 제작된 영화들은 키네스코파주(kinescopage: 비디오 밴드를 영화필름 위로 옮기는 과정)를 거쳐야 하며, 이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전체 제작비용을 초과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비용문제는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설사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하더라도 영화의 내용이나 길이 또는 형식이 규격을 벗어난다면 여전히 그 영화는 관객을 만나기가 어렵다. DV카메라와 디지털 매체의 대중화에 따라 소규모의 독립적 영화제작의 가능성은 급속히 늘어났고 독립적 제작 여건을 지닌 많은 시네아스트들이 다양한 대안적 작업들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영화들이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상영을 포함한 배급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현재 프랑스 내에서는 영화제(특히 리옹 뉴제네레이션영화제), 유토피아(Utopia)와 MK2의 독립영화 전용관, 다큐멘터리스트협회(Addoc) 등 여러 기관들이 규격을 벗어난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영화들을 위한 상영 및 배급 시스템(비디오 및 디지털 프로젝션)을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칸의 거리에서 만난 <올드보이>의 최민식

<올드보이>가 레드 카펫을 밟기 하루 전인 5월14일 밤 10시, 배우 최민식을 만났다. 일부러 늦은 밤을 택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한낮의 크로와제트 거리는 인파로 미어터진다. 그렇다고 그를 반라가 즐비한 해변가에 세워놓는 건 예의가 아니다. 둘째, 그가 어둠이 내린 칸의 거리에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될 것 같았다. 배우 최민식은 새 작품에 들어가면 언론과의 접촉을 완전히 끊다시피한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던 그를 지면으로 초대해준 건 뜻밖에도 칸이었다. 그는 기꺼이 <씨네21>과 함께 칸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이야기는 가볍게 시작됐으나 ‘배우는 죽는 순간 창작의 작업이 끝난다’는 말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2년 만에 칸에 오니까 어떤가. 솔직히 별 감응이 없다. 한번 겪어봐서 그런가. 기분 좋은 건 정말 뜻밖의 경사라서. 난 비경쟁으로 확정됐다고 들었었다. 영화의 특색이나 모양새에서 순수히 영화적 의미로만 어필했구나, 소통이 됐구나 하는 의미에서 기쁘다. <올드보이>가 장르영화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칸도 변화를 모색한다고 들었다. 지난해 라인업이 아주 안 좋았다고 하던데. 현재 세계의 주류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영화들 중심으로 기획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런 점에서 <올드보이>를 택한 게 아닐까 싶다. 한국 현역 감독 중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하고 자유분방한 감독을 말이다. 배우로서 영화제에 가는 게 어떤 기분일까. 아무래도 감독 중심의 영화제인데. 칸! 칸! 영화제 명성이 대단하다. 뭔가 수상하면 굉장한 명예이기도 하고. 이런 현실적인 면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제 우리 이야기가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하는구나, 그런 소통의 장에 당당히 참석한다는 데 의미를 둔다. 영화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어떻게 느꼈는지 들으러 왔다. 촬영 중인 <꽃피는 봄이 오면>의 현우 캐릭터에 몰입해야 하는데 <올드보이>의 ‘오대수’를 다시 기억해야 하는 게 혹시 방해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너무 피곤하게 작업하게 되는 거고. <꽃피는…>은 50% 정도 찍었다. 몰입보다는 오랜만에 친구들하고 막걸리 한잔 하는 기분으로 편하게 찍고 있어서 괜찮다. 이상하게도 <파이란> <올드보이> <꽃피는…>의 주인공은 깊은 나락으로 추락한 상태에서 로맨스를 시작한다. <꽃피는…>은 나락까지는 아닌데. 그럼 패배감? <꽃피는…>의 현우는 일상적인 피로에 지쳐 있다. 잘 나가는 뮤지션은 아니지만 아주 불행한 건 아니고, 전형적인 비극을 안고 있는 캐릭터도 아니다. 누가 봐도 그 정도의 피로감을 안고 사는 인물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이번에는 해피엔딩인가. 글쎄, <올드보이>나 <파이란>에선 목졸려 죽거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갖고 살아가야 했지만, 여기선 뭔가 다시 시작한다. 완전히 정리되고 회복되기보다 나름대로 해법을 찾아서. 우리 인생사가 그렇지 않나. 무 자르듯 여기까지 고생했고 이제부터 행복 시작, 그런 게 아니라 여기저기 찢어지고 흠집나고 긁히는 상황에서 뭔가 재정비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영화가 그래선지 얼굴에서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배우는 배역에 따라서 삶의 모양새가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면 개인 최민식의 피로감은. 70, 80은 늘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떨어지거나 올라가는 것 없이. 사는 것 자체가 피곤하니까. <올드보이> 이후 <꽃피는…>의 선택이 의외의 선택이라는 반응이 많지 않았나.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나의 선택이지. 그 전에는 자극적이고 센 영화들이었다. <파이란>도 사실은 세거든, 서정성을 많이 담았지만 감정의 진폭이 큰. <올드보이>는 말할 것도 없고. 육체적으로 쉰다기보다 정신적으로 해방되고 싶은, 그러니까 다른 음식을 맛보고 싶은, 청양고추에 고추장에 비벼먹다 속도 좀 쓰리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부드러운 죽으로 좀 달래고 싶었다. 한겨울에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방에 들어와 아랫목에 손 넣으면 훈훈해져서 옷도 안 벗고 잠들어버리는 느낌의 시나리오였다. 항상 그랬듯이 흥행여부와 상관없이 시나리오가 준 서정성이나 일상사들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와닿았다. 그런 말랑말랑한 세상에 스스로를 달래고 추스려야 하지 않나 하는. (웃음) 다음번 음식은 뭐가 될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수상 여부에 대한 생각은. 칸영화제라는 고유명사가 개개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천차만별이다. 상 못 받아 안달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담담한 이들도 있고. 만에 하나 <올드보이>로 누군가 상을 탄다면 축하받을 만한 일이고 팀으로서 영광된 일이나 운동선수처럼 금메달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칸에서 상받았다고 그 사람의 작품세계가 완성되는 게 아니니까. 이놈의 일은 죽을 때까지, 밑도 끝도 없이 계속 더 뭔가를, 다른 이야기를 추구해야 한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받으면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는 거지만 여기는 뭔가 새롭고 공감을 같이 했다는 개념에서 상을 주는 영화제니까. 상을 받는 게 결코 종착역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끝없이 가야 한다는 건 부담인가, 더욱 욕망을 자극하는 것인가. 예컨대, 최고를 위한, 외형적으로 세상이 규정한, 칸 그랑프리라고 하면 어쩌면 가장 우수한 영화라는 인정일 수 있으나, 배우로서 연기 인생의 완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연출가로서도 마찬가지고. 난 거기를 올라갈 거야, 난 그것만 잡으면 끝나, 이런 건 없다. 내가 지금 40대이지만 30대의 연기, 20대의 연기, 처음 연극 시작했을 때의 기분, 생각들과 비교하면 정말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더 나이를 먹어서 카메라 앞에, 연극 무대에 섰을 때의 그때 받아들이는 정서는, 사람에 대한 분석은, 세상에 대한 이해는 또 다를 것이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완성이 없다. 죽으면 끝난다. 배우는 죽어야 창작의 작업이 끝난다. 그걸 고통의 연속이라고 받아들이나 즐거움으로 여기나. 고통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고… 알아가는 작업이다.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허무맹랑한 이야기든 사실적인 영화든 다 사람이 나오지 않나.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있을 법한 이야기들. SF든 호러든. 우리 인생도 힘든 게 있으면 즐겁고 기쁠 때도 있듯이. 그 배역에 들어가 그 인물로서 살려고 할 때, 비록 픽션이지만, 염세적으로 라이프사이클이 변한다. 폭력적이다 그러면 터프해지는 것 같고, 민감한 인물이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별일도 아닌 것에 찡해지기도 하고. 난 이런 표현을 즐겨쓰는데, 음악인은 악기를 통해 표현한다면, 우리는 생겨먹은 몸이, 사고방식과 인생관이 악기다. 그래서 내 기분이 꿀꿀하면 몰입이 안 돼. 애로사항이 많은 악기다, 하하하∼.

마론인형에서 배우로, <킬 빌 Vol.2>의 대릴 한나

<블레이드 러너>(1982)의 여자 안드로이드를 기억하는가. <킬 빌>의 애꾸눈 킬러로 등장한 대릴 한나를 발견하는 순간 그 이미지가 곧바로 떠오른다. 탐스러운 금발을 푸석푸석한 파마로 대신하고, 짙은 눈화장으로 표정을 숨긴 채, 기계 같은 몸을 무기처럼 사용했던 <블레이드 러너>의 프리스 이후, 긴다리를 하늘거리는 푸른 지느러미 속에 감춘 <스플래쉬>(84)의 ‘인어공주’를 지나, <투명인간의 사랑>(1992), <투 머치>(1996) 등 금발 미녀의 몇 가지 변주만을 보여준 영화까지, 흘러가는 세월 속에 금방이라도 잊혀질 듯했던 그가 그렇게 돌아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거짓말 같은 금발, 그리고 더욱 거짓말 같은 몸을 가진 이 배우는 자신의 신체를 왜곡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번에는 검은 안대로 푸른 눈을 가리고, 모든 감정을 얼굴에서 지워버렸다. 저마다의 사연을 남기고 죽어간 데들리 바이퍼 단원(딸 앞에서 살해된 버니타,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목격했던 오렌 이시, 브라이드가 안겨준 배신감에 엄청난 학살을 감행했던 빌)들에 비해 별다른 과거가 없는 엘르 드라이버는 다소 밋밋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없지만 그만이 가진 것들이 있다. 브라이드를 살해하려 병원에 침투한 뒤 간호사복과 함께 안대까지 ‘간호사용’으로 바꾸는 센스(?), 혹독한 훈련을 못 견디고 사부에게 대들어 단번에 ‘눈알 뽑힌’ 뒤, 가차없이 스승을 독살해버리는 ‘성깔’ 등이 그것이다. 물론 우마 서먼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를 향한 타란티노의 배려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깨닫게 되는 증거들이다. 런던에서 연극 공연 중이던 대릴 한나를 찾은 타란티노는 앞뒤 설명도 없이 “당신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며 출연제의를 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보내주기 전에 75개가 넘는 비디오 테이프들을 보내줬고, 나는 공부하는 기분으로 70년대 홍콩영화, 일본 애니메이션, 스파게티 웨스턴 등을 봤다. 예전부터 타란티노 감독의 광팬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그 시간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가능한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려고 했다.” 자신이 연출한 단편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기도 했던 이 감독지망생은,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앞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대릴 한나는 이제야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깨닫게 된 것 같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전율의 텔레파시>(The Fury, 1978)로 데뷔한 이후 30년이 걸린 일이다. 그는 최근 미국 독립영화계의 대부 존 세일즈(<메이트원>) 감독의 최근작 〈Casa de los babys>(2003)과 그 감독의 차기작 <은빛 도시>(Silver City)에 출연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이클과 마크 폴리시 형제의 기괴한 작품 〈Northfork>에는 “꽃”(말 그대로!)으로 등장했다. 모험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보면 어떤 친구는 폭삭 늙었는데 어떤 친구는 몇 십년 전과 그대로다. 전자는 ‘난 이제 배울 게 없어. 그냥 여기 눌러 앉아도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려고 애쓰는 이들이다.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을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등, 다른 단계로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것은 너무나 재밌는 일이다.” 완벽한 외모를 가진 여배우가 진짜 연기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30대 이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할리우드의 생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 시작을 할 수 있는 배우들도 한정된 상황. 관객의 입장에서 지금의 대릴 한나는, 기꺼이 시선이 가는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LA] 그들이 없는 재난을 상상하라!

4월 마지막 주, LA 도심 곳곳에 수상쩍은 가두 광고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할리우드에서 한 라티노 시민의 항의로 광고판이 철거되고, 미디어가 앞다퉈 사건을 보도하기에 이르렀는데. 문제의 광고는 “5월13일, 캘리포니아엔 단 한명의 멕시코인도 없을 것이다- 확인 www.adaywithoutamexican.com”이라는 해괴한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법 라티노 이민자들에 대한 주정부의 각종 법안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가운에 이 의문스런 광고는 5월13일 개봉하는 <멕시코인이 없는 하루>(A Day without a Mexican)의 홍보용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캘리포니아의 모든 라티노(라틴계 사람)가 사라져버렸다면. 라티노 인구가 총인구의 34%에 육박하는 캘리포니아의 상황에선 이것이야말로 재난이다. 이 독특한 재난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캘리포니아의 56개 스크린에서 개봉 첫주 스크린당 평균 1만달러의 수입을 올리며 <트로이>에 이어 흥행 2위에 올랐다. 비록 이 영화가 불법 이민 노동자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똑 부러진 해답은 제시하지 않지만 가정부, 식당, 공사장의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불법 이주 노동자부터 교사, 경찰관, LA다저스의 선수들, 주지사에 이르기까지 라티노가 몽땅 사라진 캘리포니아의 아노미 상태를 신랄한 풍자와 코미디를 곁들인 가짜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TV 미디어와 디지털 비디오의 미학을 효과적으로 차용해 일반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비판의 목소리를 들려준 이 영화의 감독은 멕시코 출신의 세르지오 아라우. 마지막 라티노 생존자로 출연한 부인 야렐리 아리즈멘디와 함께 1998년에 만든 동명의 단편영화를 리메이크했다. 캘리포니아 전 주지사 시절, 불법 이민자들의 사회복지 혜택을 제한하는 법안 187에 대한 비판으로 만들어진 단편영화를 리메이크하기까지 4년이 걸린 것은 제작비 확보의 어려움이었다. 하도 당연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라티노 이민자들의 존재를 “보이게” 하고 싶었다는 제작진의 소망에 관심을 가질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있을 리 만무해서, 개인 자금과 멕시코의 각종 단체에서 받은 지원금으로 150만달러의 제작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고. 결국 투자, 제작, 배급에 이르기까지 순수 멕시코의 파워로 만들어진 최초의 멕시코산 영어영화가 되었다. 크레딧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처음으로 영화 배급에 참여한 텔레비사 시네(Televisa Cine)사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미디어 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멕시코 제일의 미디어 재벌, 텔레비사는 라티노 관객의 파워를 증명한 이번 영화의 흥행 성공에 고무되어 올해 안으로 몇편의 영화를 더 배급할 것이라고. 없을 때 아쉬운 자들의 목소리는 곧 미주 다른 지역으로 확대 개봉될 예정이다.

영상자료원 DVD·VHS 열람료 비판에 대한 반론

지난호 <씨네21>에 실린 ‘고전영화 DVD와 VHS 열람 입방아’(454호 26쪽 리포트 인사이드 충무로)라는 제하의 기사는 한국영상자료원의 “고전영화 DVD와 VHS 열람료가 지나치게 비싸 이용자들에게 불만을 사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거명된 한국영상자료원의 실무자로서 해명하고자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에서 이 영화들을 열람할 수 있기 전까지 내방객들이 고전영화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상영회를 통하거나 영화필름을 시사실에서 열람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비교적 비용이 저렴(2천원)하지만 프로그램 일정에 맞춰야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며, 후자는 사전 이용신청 절차를 거쳐 고가의 비용인 대관료와 필름사용료로 약 20만원(스텐백 사용의 경우 약 15만원)를 부담해야 했다. 참고로 외국의 경우는 부담이 더 큰 것으로 알고 있다. 영상자료원은 지난 5년여 동안 고전영화를 중심으로 영화필름 600여편의 텔레시네 작업을 진행해왔으며 지난해에 처음으로 이중 36편을 DVD로 제작했다. 지난해에 저작권법이 개정되면서 자료원 보유 자료에 대한 자체 디지털 복제와 내부에서의 열람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료원 고전영화 이용자 수는 많지 않다. 아니, 우리가 들인 노력에 비하면 실망스러울 정도로 적다. 영화과 학생들조차 페이퍼 제출 등의 이유로 일시적으로만 몰려든다. 상영회 또한 1회에서 3회로 횟수를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관람률은 기대 이하다. 이는 프로그램과 홍보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얼마나 보편적인 목소리를 지난주 기사가 담았는가에 대해 회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영상자료원은 한명의 목소리라도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따라서 좀더 전향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열람 방식과 쿠폰제, 회원제 할인 운영 등 서비스 개선을 검토할 계획이다. 고전영화의 이용률이 높아진다면 전용 부스도 확대할 것이며, 열람이 용이하도록 모니터링 시스템도 보완할 것이다. 자료원은 올해 100편의 DVD제작을 진행 중이며, 또한 저작권 시효가 만료되어 현재 온라인 서비스가 되고 있는 초창기 영화들을 대상으로 빠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DVD 출시도 기획 중이다. 어떤 분들은 자료의 복제를 이상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자료원이 제작한 영상물을 공공 및 학교 도서관에 배포하고 이용자에게 복사 제공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행 저작권법을 위반한 서비스를 할 수는 없다. 도서관 문헌자료 원문에 대한 보상금 제도와 같이 영상물에 대한 보상금 제도가 포함되도록 저작권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열람료 자체에 대한 불만은 ‘인류 공통의 유산 그리고 국민의 자료’에 대한 이용 권리의식보다 수혜자 부담의 의무에 대한 의식이 낮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현행 열람료를 극장 입장료(7천원)나 자료원 행사 입장료(2천원) 그리고 자료실 이용료(500원)와 비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수십명, 수백명을 대상으로 하는 상영과 비교하는 것도 그렇지만, 희소가치가 있는 자료의 재생산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의 5천원은 한명이 보든 두명이 보든, 혹은 빔 프로젝트 사용료를 별도로 지불한다면 100명 이상이 보든 모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금액이다. 귀중한 자료라면 그것이 마멸될 순간을 대비한 최소한의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 문화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클로드 미셀 “문화다양성 협약, 출발부터 강력해야”

CCD총회참석 '프랑스 공연예술노조 위원장' 올해 칸영화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개선 시위를 벌인 프랑스 공연예술노조의 클로드 미셸(49) 위원장이 4일까지 열리는 ‘제3회 국제문화전문가단체(CCD) 총회’ 참석차 한국에 왔다. 사회학 교수에서 유럽의회 문화 담당 의원, 프랑스 영화감독노조연맹 대표 등 문화운동가로 나선 클로드 미셸은, 프랑스가 현재 WTO 무역협상에서 문화상품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유럽의 대표국가임을 감안할 때 매우 비중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칸영화에 운영위원도 10년째 맡고 있다는 그를 지난 1일 만났다. 프랑스에서 문화다양성 보장을 위한 운동이 시작된 건 언제부터인가. 97년 다자간무역협상이 시도됐을 때, 문화상품 예외를 인정받기 위해 문화단체들의 위원회를 만들었다. 정부는 이 문제에 소홀한 상태였다. 그때 문화단체들의 운동 덕택에 98년 다자간무역협상이 결렬됐다. 그래서 한동안 뜸했는데, 2000년 들어 WTO 협상을 앞두고 다시 전열을 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2001년 9월 몬트리올에서 열린 ‘1차 CCD총회’에 참석하고 2002년 파리에서 2차 총회를 열었다. 문화다양성과 관련해 한국에선 스크린쿼터가 최대 쟁점인데, 프랑스는 어떤 쟁점이 있는가.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방영할 때 일정 비율을 유럽연합 영화를 틀도록 하는 텔레비전 쿼터제와 영화관람료에 영화지원기금을 물리는 것, 데뷔 감독에게 제작비를 지원해주는 보조금 지급제도 등이 미국 요구와 상충될 소지가 있다. 또 몇몇 감독들은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극장을 점령해 예술영화들이 개봉할 공간이 없어지는 현상에 분개해 한국의 스크린쿼터 같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내고 있다. 텔레비전 쿼터제는 유럽연합 법안으로 채택했으나 의무적인 건 아니어서 다른 나라들은 쓰지 않고 있다. 문화다양성 보장을 위한 운동이 유럽 다른 나라에선 프랑스 만큼 활발하지가 않다. 내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하려고 하는 ‘문화다양성 협약’의 의미는. 문화다양성을 보장받을 국제법이 없다. 선언문, 결의문만 많다. 미국이 움직임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법제도가 필요하다. 그게 유네스코 협약이다. 야심찬 계획이지만 처음부터 강력하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임범 기자, 사진 CCD총회 제공

[비평릴레이] <여.친.소>, 김소영 영화평론가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를 비평적으로 소개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기는 좀 힘들다. 그러나 아시아를 잇는 한국의 대중문화, 아시아 상호간의 대중문화교류를 이해하는 텍스트로서는 중요하다.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의 전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엽기적인 그녀>가 홍콩, 대만, 일본, 타이의 젊은 관객들에게 한국 영화를 감정적으로 친밀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를 보면 중국에서 <엽기적인 그녀>는 <나의 야만적인 여자 친구>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불법 DVD 판매이긴 하지만 300만장에서 1000만장까지 DVD가 유통되면서 중국권의 젊은 관객들에게 엽기발랄한 이미지의 전지현이 알려지게 된다. 대만에서 <엽기적인 그녀>를 본 젊은 여성들은 엽기적인 여자 친구가 되고 싶어 했고, 홍콩의 젊은 남자 관객들의 호응도 열렬했다. 아시아에서 할리우드의 문화지배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동아시아와 동남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열풍과 맞물린다. 이어 1990년대 말,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가요가 한류라는 명칭으로 유통되기 시작하고,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가 주목을 끌면서, 한국 영화는 일본 등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123분 상영시간 고역. 그러나 관심을 보낼 필요는 있다 <여친소>는 이렇게 <엽기적인 그녀>의 연장선에서 아시아의 젊은 관객들에게 다가가려 한다. 홍콩의 제작자가 제작비를 부담하고, 홍콩, 중국, 한국에서 동시 개봉을 하는 등 <여친소>는 한국 영화가 범아시아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사례 연구를 제공할 수 있다. <엽기적인 그녀>의 핵심인 성 역할의 전도는 <여친소>에서도 두드러진 요소다. 능동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여자와 심약하고 착한 남자가 벌이는 (헛)소동이 멜로드라마와 액션 장르의 관행들을 적극적으로 취하면서, 개연성이 없는 사건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낸다. 영화가 시작되면, 여자 경찰인 경진(전지현)은 곧 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명우(장혁)를 소매치기로 오인해 경찰서로 끌고 온다. 이후 명우는 경진의 구타와 구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범인 검거 현장에 경진을 돕는답시고 서성거리다가 가슴에 총을 맞고 죽게 되는데, 이후 영화는 <고스트>의 관행을 따라 죽은 남자 친구가 살아있는 여자 친구의 지킴이가 되는 고스트 러브 스토리로 변한다. 로맨틱 코미디라고 자신의 장르를 소개함에도 불구하고, <여친소>에서 흥미로운 점은 젊은 남녀의 로맨스가 결코 어떠한 성적 접촉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데 있다. 명우가 키스를 하려하자 경진은 심지어 불쏘시개로 그의 입술에 화상을 내기도 한다. 엽기 속의 이해 불가능한 ‘순수‘가 감독 곽재용의 로맨틱 코미디의 핵심인 셈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는 성인이지만, 관계 속에서는 미성숙한 남녀의 이야기가 스타 만들기와 홍보 등을 통해 아시아 영화로 자신을 재포장해 내는 과정을 증후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반면 억지춘향의 순수와 엽기를 123분의 상영시간 동안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고역이다. 그러나 <겨울연가>의 배용준과 <여친소>의 전지현이 제조해내는 순정과 엽기 문화가 왜 아시아의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는가에 진정한 관심을 보낼 필요는 있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중문화 지배 속에 있던 아시아에서 생성되고 있는 새로운 대중문화의 기류를 읽을 수 있는 풍향계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개의 정체성 두겹의 눈, 아시아의 한인감독들 [2]

<당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방법을 찾아낼 것” 오기처럼 시작하게 된 〈11세>의 촬영 첫날, “미리 준비했던 시나리오는 현장에서 방해만 될 뿐이었다. 모든 것이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주변의 스탭들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건 처음이니까 연습하는 셈 쳐라’라고 말했지만, 최선을 다하려던 영화를 연습으로 찍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오전 내내 헤매고 버벅대던 그가 오후부터 전열을 가다듬었다. 현장에서, 배우로부터,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영화만의 흐름과 리듬은 무엇일까. 쓸데없는 이야기는 버리고, 정서만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천천히 영화를 완성하면서, 자신만의 대답을 찾아갔다. 그리고 〈11세>는 아무런 대사도 없이 음향과 실험적인 음악만으로 풍부한 사운드를 재현하는 영화, 이야기는 모호하지만 영화적 의미로 꽉 차 있는 영화가 되었다. 두 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장편인 <당시>는 여기서 더욱 나아간다. 그 누구도 찍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물을 배치하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유일한 배경이 되는 주인공의 집 구조는 도저히 파악되지 않고, 인물들은 언제나 뒤늦게 등장하여 뒷모습이나 깜깜한 옆모습을 보이며, 배우들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움직일 뿐이다. 영화교육을 받은 바도 없고, 그 어떤 작가영화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그는 온전히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기준으로 영화를 찍고 있었다. 장률 감독은 뒤늦게 시작한 영화가 너무나 즐겁고 신기하다. 찍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아서 겨울배경인 영화를 한시라도 빨리 찍기 위해 여름을 배경으로 고쳐서 촬영에 들어갈 정도. “내맘에 맞지 않는 것이면, 아무리 남들이 좋은 것이라 해도 가장 힘든 일”이라고 느끼는 그에게는 내로라 하는 거장의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없고, 그들이 영화를 찍는 방법에도 관심이 없다. 그의 영화에 그 흔한 시점숏도, 리버스숏도, 인서트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 영원처럼 컷이 길어진 것은 감독의 마음속에서 그 인물이 그처럼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화는 그렇게 감독의 진심을 담고 있다. 2003년 영화진흥위원회 키네코 지원작으로 <당시>가 선정될 무렵, 이 영화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일부는 허우샤오시엔의 아류 같아 흥미없다고 했고, 누군가는 너무나 아트과(科)라며 일단 판단을 보류했다. 어떤 이는 그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찍어낸 감독의 용기를 칭찬했고, 다른 사람은 한편의 시처럼 풍부한 행간을 만들어낸 영화의 형식에 매료됐다. 한편 부산영화제프로그래머 김지석씨가 6월2일 베이징을 방문하여 <망종>을 촬영 중인 장률 감독을 만날 예정이다. <당시>의 완성이 늦어져서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그는, “<당시>는 수많은 영화제 관계자들이 눈독을 들일 만한 놀라운 영화였지만, 대중과의 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번에 찍고 있는 <망종>은 그러한 부분을 최대한 보강하여 대중성을 추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장률 감독의 영화적 재능을 알기에 그것이 전혀 거짓이 아닐 것임을 믿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 더욱 기대가 된다”고 말한다. <망종>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될지의 여부는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이번 베이징행에서 판가름날 예정. 장률 감독은 이제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떤 스타일이나 일관성을 부여하고 이를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영화마다 만드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매번 찾는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장률 감독도 꺼릴 만한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만의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쉽게 지치지 않고, 손쉬운 길을 선택해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않는다. 매번 영화를 찍을 때마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바와 그것을 위한 방법을 고민했고, 그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장률 감독.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아는, 현명한 감독의 필수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처음에는 친해지기 어려워도 한번 누군가를 믿으면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가 나와 전속으로 작업을 하면서, 중국에서 가질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한국과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최두영씨의 말이다. <당시>는 어떤 영화 간결한 문체, 풍부한 감정 〈11세>(2000): 한 사내와 한 소년이 터널 밖으로 걸어나온다. 사내는 공사가 중단된 공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끝없는 졸음에 몸을 맡기고, 소년은 또래아이들의 공놀이를 멍하니 바라볼 뿐, 그들 속에 감히 섞이지 못한다. 해는 저물고, 모두가 떠난 공터에서 혼자서 공을 차는 소년. 그러나 불도저로 자신의 공을 덮어버리는 사내의 또 다른 폭력 앞에 소년은 또다시 무기력해진다. 영화를 보고나면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소년은 왜 따돌림을 받는 것이며, 계속해서 졸고 있는 이 남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공사는 왜 중단돼 있는지. 정답은 없다. 소년은 소수민족일 수도 있고, 그저 가난한 건지도 모른다. 남자는 소년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선생일 수도 있고, 관료일 수도 있으며, 그냥 일자리를 잃고 동네에 머물게 된 중년 사내인지도 모른다. 대답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당시>(唐詩, 2003): 손을 다쳐 소매치기를 할 수 없게 된 한 남자의 집에 제자인 듯한 여자가 불쑥불쑥 찾아온다. 여자는 마지막으로 한탕을 성공시켜 이곳을 뜨자고 부추기지만 남자는 결국 정해진 시각, 정해진 장소에 나가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당시(唐詩)는 중국 문학사 내에서, 엄격한 형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의 산물이다. 5언 절구, 혹은 7언 절구의 시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지만, 그 안에는 천지(天地)가 있고 산수(山水)가 있다. 그리고 희로애락의 변화무쌍한 감정들은 자연에 빗대어 무심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형식은 ‘당시’처럼 엄격하기 그지없다. 언제나 프레임 내 프레임 속에 배치된 인물들, 절제된 대사만으로 고독을 표현하는 전개방식, 무표정하게 극심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배우의 움직임…. ‘당시’의 간결한 문체가 풍부한 감성을 돋보이게 만들듯이, 영화 <당시>의 무표정함은 주인공의 처절한 감정을 섬세하게 극대화시킨다. 감독은 이어, <송사>(宋詞) <원곡>(元曲)으로 이어지는 중국 문학 3부작을 계획 중이다. 최두영 인터뷰 -장률은 참 큰 사람이다 =〈11세>의 촬영 이후 장률 감독의 모든 영화적 행보는 최두영(42)씨로 인해 가능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색보정기사로 잘 나가던 와중에, <화석의 언덕> 등 독립영화를 촬영하고, 장편영화 <오구>의 촬영감독과 프로듀서였던 그는 현재 장률 감독의 평생 제작자를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며, 장률 감독에게는 영화에 대한 결심을 지탱하는 쐐기와도 같은 존재다. 〈11세>의 후반작업을 총괄했고, <당시>의 제작과 배급을 맡았으며, <망종>의 제작과 영화 후반작업을 책임질 예정이다. 감독과 제작자이기 이전에 10년지기 친구 못지않은 그들 사이의 신뢰를 보고 있으면, 백아와 종자기의 만남이 이처럼 애틋했을까 싶다. -장률 감독과 만나게 된 계기는. =2000년 겨울. 이전부터 장률 감독과 평소에 알고 지내던 감독 한 사람이, 중국동포가 만든 단편의 후반작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11세>의 비디오 편집본을 처음 봤다. 너무 느낌이 좋아서 꼭 완성을 돕고 싶었고, 그 이후 영화의 편집, 믹싱, 텔레시테, 색보정 등을 한국에서 할 수 있게 해줬다. -장률 감독의 첫인상이 어땠나. =(장)률이는 처음부터 이상할 정도로 편했다. 대륙적인 기질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는 참 큰 사람이다. 같이 있으면 나의 순수했던 70년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그 친구의 작업의 제작을 맡게 되면서, 일 때문에 우정이 깨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두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만들었다고 하던데. =장률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만든 회사다. 요즘에는 사무실 유지비라도 벌어야 된다는 생각에 배우 매니지먼트도 겸하고 있다. <효자동 이발사> <발레교습소> <남극일기> 등에 출연하는 조연들이 이 회사 출신들이다. -프로듀서로서, 감독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가 나에게 전적으로 제작쪽을 위임하면서 나름대로 손해를 감수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준다는 것은 결국 그에 대한 믿음과 그리움이 아닐까. 어떤 영화를 만들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다. -전작인 <당시>로 미뤄볼 때, 다음 영화 <망종>의 상업적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둘은 이 영화로 돈도 많이 벌고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개인적인 계획이 궁금하다. 계속 제작을 할 생각인가. =내가 제작을 하게 된 것은 내 친구를 돕기 위해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촬영감독으로 알려지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목표다. 올해 <중원> 촬영을 마치면 촬영을 한편쯤 하고 싶고, 나중에 장률 감독이 한국에서 영화를 혹시 찍게 되면, 내가 촬영을 해주기로 약속도 했다. 그것 때문에 아주 관계가 파탄나는 게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