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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할리우드보다 소와 대화하는 게 더 좋다니까, 러셀 크로

베를린, “여길 봐 주세요, 러셀!” 여기저기서 포토콜 요구가 이어졌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황급히 걸어 들어간다. 짧은 턱수염과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자란 고수머리, <글래디에이터> 때보다 족히 5, 6kg은 불어난 듯한 육중한 몸집. 그는 기자회견장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드럼치듯 신경질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함께 자리한 감독 론 하워드와 제니퍼 코넬리가 민망할 만큼 질문은 러셀 크로에게만 집중되고, 당일 후보작 발표를 한 오스카 관련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염문설을 뿌렸던 니콜 키드먼에 대해 “그녀는 지금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스웨덴에 있소. 나쁜 날들을 보내고 있을 게 분명하지, 하하”라며 특유의 괴상한 조크를 선사하던 그는, “머리(brain)와 근육(brawn) 중 어떤 걸 쓰는 걸 좋아하느냐”는 황당한 질문이 튀어나는 순간, 마치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듯 과장된 정중함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부탁드리는 바이지만 그런 쓸데없는 질문은 제발 집어치우고 딴 질문으로 넘어가셨으면 정말 감사하겠군요.” <이유없는 반항>의 감독 제프리 라이트 曰_ 러셀은 지금껏 내가 만난 배우 중 가장 무례하다. 반면 가장 집중력이 뛰어나다. 그는 늘 나를 엿먹인 다음엔 놀라운 테이크를 보여준다. 러셀의 辯_ 바보같으니…. 그는 10년 동안 그 말을 하고 다닌다. <이유없는 반항>은 28일간 찍었고 나는 그를 내 인생에서 그저 8주간만 알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에 대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퀵 앤 데드>의 샘 레이미 曰_ 러셀과 함께 일할 때, 문제점은 그는 언제나 좋은 아이디어로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책이 없다. 러셀의 辯_ 레이미가 언젠가는 손꼽히는 훌륭한 감독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피와 고어와 폭발에 신경쓰기보다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먼저임을 빨리 깨달아야 된다. <프루프 오브 라이프>의 테일러 핵포드 曰_ 우리가 흥행에 실패한 건 러셀이 멕 라이언과 벌인 실제 로맨스 때문이다 러셀의 辯_ 글쎄, 그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약해빠진 인간이다. 그래, 그때 우리는 사랑에 빠졌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만약 그가 나와 다른 사람들이 던지는 충고에 좀더 귀를 기울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다. 이런 젠장, 내가 앞으로 ‘미스터 핵포드’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러셀 크로는 무례하다. 사실이다. 기자들에게나 감독에게 그는 결코 다루기 쉬운 별이 아니다. 그에게선 톰 크루즈가 보여주는 팬 서비스 차원의 친절함이나 카메라 플래시를 버튼삼아 튀어나오는 100만달러짜리 미소 따위는 없다. 어찌보면 퉁명스럽고 과격하고 직설적이다. 그에게 열광한다면 그 때문일 것이고 그가 싫다면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관객을 향할 때 그는 세상 어떤 배우보다도 정중하다. 이건 사인해달라고 달려드는 팬들에게 호의적이란 말이 아니다. 그가 맡은 역할에 대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크로에 대한 악몽 같은 기억을 토로하는 감독들까지도 그의 캐릭터에 대한 집중력만큼은 부정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나 뿌려대는 스캔들은 박스오피스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영화의 질만이 관객을 영화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이다.” 실존인물을 원형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론 하워드와 각색자 아키바 골드버그 그리고 러셀 크로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시는 오히려 러셀 크로와 상당부분 닮아 있다. 자신감과 확신이 넘치지만 어떤 부분 세상의 리듬에서 벗어나 있는, 그 안의 세계에서는 누구보다 유연하지만 한 발자국만 넘어서면 경직되고 마는, 강한 외양 속에 신산한 속내를 품고 있는. “하워드는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생각이 없다고 했고, 나 역시 동의했다. 그러기 위해선 기본적인 맥이 흐트러지지 않는 선에서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야 했다.” 실비아 네이사의 전기를 읽거나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임상 테이프를 보며 행동패턴을 체크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는 촬영 전까지 실존인물을 만나는 것조차 피했다. 그저 촬영 3회차, TV인터뷰에서 러셀 크로를 본 존 내시가 ‘뭐 저렇게 생긴 게 내 역할을 하나’ 싶어서 예고없이 촬영장을 방문한 것이 첫 만남이었다. 15분의 짧은 만남, 차와 커피에 대한 기호를 묻는 하나의 질문이 오고간 게 다였지만 내시와 크로에게는 서로를 안심시키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만남 이후에도 촬영 전 잡았던 존 내시의 캐릭터에 변화는 없었다.” 다만 그가 신고 온 오버슈즈와 빨간색 니트모자는 영화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글래디에이터>가 내 인생을 바꿔놓은 건 확실하다. 그 영화가 개봉 전까지 사람들은 내 어깨를 토닥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괜찮아 러셀,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시드니에서 북동쪽으로 340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한 콥스 하버. 560에이커의 농장에서 소와 말을 키우는 전원생활에 대한 자랑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이 서른일곱의 뉴질랜드산 오스트레일리아인은 농장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소들과 대화를 나누는 편이 화려한 할리우드 생활보다 훨씬 좋다고 말한다. “모든 가십 잡지들은 나를 좀생이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내가 뭘하든지 부정적으로 비추고 바람둥이 짓만 하고 다니는 쓰레기로 취급한다. 내가 투스카니에 있는 별장을 샀다거나, 젠장, 나는 투스카니에는 머리털나고 가본 적도 없다. 오스카 시상식날 밤 커트니 러브와 잤다는 이야기도 정말 뜬금없다. 정말 엿먹으라고 해라.” 오스카의 부름을 받은 것도 벌써 3번째다. <인사이더>로 후보에 올랐고 <글래디에이터>로 첫 번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으며 올해 <뷰티풀 마인드>로 톰 행크스나 스펜서 트레이시를 잇는 오스카 2관왕으로서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러셀 크로. 그러나 “나는 찬사를 얻거나 상패를 모으기 위해 영화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말을 스스로 증명이나 하듯, 이 한 차례의 파티가 끝나면 그는 주저없이 떠날 것이다. 피터 위어의 <세상의 먼 곳>(The Farside of the world)과 감독 데뷔작 <길고 푸른 해변>(The Long green shore)의 촬영이 기다리는 고향, 오스트레일리아로 말이다.

<오션스 일레븐>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과거에 그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었건, 2002년 현재 스티븐 소더버그는 주류 할리우드 제1급의 재능을 지닌 감독이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인디와 메인스트림 양쪽 진영을 향해 영구 중립을 선언하고, 포커 테이블에 앉은 ‘꾼’처럼 조용히 이분법을 무너뜨려가는 전략으로 지금의 의자를 차지했다. 3월1일 개봉하는 그의 신작 <오션스 일레븐>은 범죄영화를 매만지는 그의 숙련된 솜씨와 스타의 육체에 신선한 피를 돌게 하는 재주를 마음껏 자랑한 영화다. 8500만달러짜리 오락영화를 만들면서도 특유의 근면함과 기동력을 잃지 않았다. 일요일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트래픽> 촬영을 마친 이튿날 캘리포니아 버뱅크로 날아와 점심을 먹으며 <오션스 일레븐>의 시나리오를 수정했던 그는 지난해 3월 오스카 시상식 이튿날 새벽 6시부터 라스베이거스 현장에서 ‘액션!’을 외쳐 소더버그의 감독상 수상을 핑계로 밤새 축배를 들며 여유를 부렸던 <오션스 일레븐> 팀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에린 브로코비치> <트래픽>에 이어 피터 앤드루스라는 가명으로 촬영감독 겸업도 계속했다. 소더버그가 당분간 팔자에 없는 게으름을 억지로 피워야 할 일은 없을 듯. “스티븐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밀림에라도 따라가겠다”고 공언한 바 있는 줄리아 로버츠와 같이 찍는 <풀 프론탈>, 조지 클루니, 캐서린 제타 존스를 기용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리메이크가 그의 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현재 조지 클루니와 설립한 프로덕션 섹션 에이트를 꾸려가고 있으며 스파이크 존즈, 데이비드 핀처, 알렉산더 페인 등과 함께 끌어갈 감독 중심의 새 영화사 구상에도 참여하고 있다. <오션스 일레븐>은 리메이크다. 어떻게 당신의 개성을 불어넣었나. 나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매우 고전적인 혈통, 즉 1940년대 영화의 번쩍거리고 야한 스타일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욕설도 폭력도 없었고 실제로 권총조차 제대로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 끌렸다. 나는 마침 아주 하드한 영화(<트래픽>)를 완성한 참이었고, <오션스 일레븐>은 괜찮은 전환처럼 보였다. 스타일 측면에서 소재에 어떤 식으로 접근했나. 나는 <오션스 일레븐>이 스타일리시한 영화가 되길 바랐으나, 스타일이 너무 튀어 관객과 영화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션스 일레븐>은 정보가 조금씩 드러나는 방식이 매우 중요한 영화인 만큼, 이야기의 전개와 정보의 시각적 전달이 다같이 정확하고 일관되기를 원했다. <오션스 일레븐>은 모종의 추진력을 내장하고 있지만 숨가쁘거나 열에 들뜬 영화는 아니다. 말하자면 내가 원한 건 일종의 우아함이었다. 오스카 수상자라는 새로운 경력이 보탠 중압감이 있었나. 아니다. 그저 내 스스로 훌륭한 영화를 원해서 자신에게 부과한 부담감이 있었을 뿐이다. <오션스 일레븐>을 연출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내가 도달하고 싶었던 기술적 세련됨을 성취했다고 판단한 많은 영화를 봤다. 결과적으로 내 손에는 초기 스필버그의 작품 여러 편과 데이비드 핀처의 모든 영화, 존 맥티어넌의 영화가 남았고 그들의 시퀀스 레이아웃을 분석했다. 촬영중에도 나는 밤마다 이 영화들의 비디오를 끊임없이 반복 시청하며 그 감독들이 어떤 종류의 렌즈를 썼고 카메라를 어디에 세웠고 어디쯤에서 커팅하고 배우들을 어떤 식으로 배치했는지 연구했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감을 잡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좀더 세련된 감독이며 나는 캐릭터에 이끌리는 연출자에 가깝다는 뜻이다. <오션스 일레븐>에서 인용한 영화들의 목록을 말해달라. 하워드 혹스와 조지 쿠커의 영화들을, 예컨대 <대탈주>나 <황야의 7인> 같은 영화보다 더 열심히 봤다. 그러니까 강도를 소재로 한 영화보다 혹스나 쿠커 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는 일종의 클래시컬한 느낌을 의도했지만 동시에 동시대적인 느낌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10년 뒤의 관객이 “딱 2001년 스타일인데?”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의 느슨한 동시대성을 원했다. <트래픽>은 스토리라인이 겹치고 액션의 시간대가 교직된 옷감 같은 영화였다. <오션스 일레븐>에서도 그런 스타일을 생각해봤나. 아니다. 내 생각에 이야기의 교차와 시간의 전환은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영화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낮 시간에 이리저리 걸어다니다보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옛날 일과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뒤섞는 것은 인간정신의 자연스런 작동이므로 영화로 그 과정을 모방하기도 쉽다. 하지만 영화에 따라 적합한 스타일이 따로 있다. <오션스 일레븐>은 특수기동대 출동과 관련된 플래시백 하나만 제외하면 대체로 한 방향으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라스베이거스는 하나의 등장인물이나 다름없다. 현장은 어땠나. 오리지널 <오션스 일레븐>은 놀랄 만큼 라스베이거스라는 공간의 색깔을 적게 활용했다. 라스베이거스는 매우 기묘한 장소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절정을 맛보고 바로 나락을 경험한다. 그 극단적 공기는 언제나 당신을 에워싸고 있다. 라스베이거스는 전형적으로 미국적인 동시에 과장되어 있는 장소다. 촬영중에 도박할 시간이 있었냐고? 한번도 없었다. 나로 말하자면 스튜디오의 돈으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웃음) <오션스 일레븐>을 오리지널처럼 일종의 ‘패밀리영화’로 만들 생각을 해본 적 있나. 오늘날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오리지널의 인물들은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엔터테이너들이었다. 아니, 옛 <오션스 일레븐>의 출연자 중 대부분은 먼저 엔터테이너로 시작해서 뒤에 배우가 됐다. 라이브 공연자는 반응을 즉석에서 얻지만 영화배우들은 기다려야 한다. 그건 큰 차이다. 어떻게 이 많은 스타들의 동참을 끌어냈나. 조지 클루니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나와 전 과정을 같이했다. 우리 둘은 많은 스타를 참여시키면 바람직하지만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렇게 많은 스타의 출연료를 감당할 영화는 없을 테니까. 그러자 조지는 “내 출연료를 깎겠어.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같은 비율로 출연료를 삭감하는 타개책을 고안해낼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결국 모두가 똑같은 조건을 받아들였고 조지는 참으로 큰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다. 스튜디오에 큰돈을 절약시켜주지 않았나.(웃음)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는 잘 지냈는지.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명백했고 하나의 프레임을 기꺼이 공유하는 그들의 관계를 나는 실컷 이용했다. 두명의 영화스타가 그처럼 편안하게 함께 있는 광경을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두 사람 외에도 열한명의 등장인물이 각각 또렷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다. 제작과정에서 늘 관객을 염두에 두었나. 물론. 나는 관객과의 관계를 자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즐겨 빗댄다. 우리는 아이의 행복에 관심을 갖지만 그것은 아이의 모든 변덕과 욕구를 맞춰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이들을 늘 의식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조지 클루니의 감독 데뷔를 어떻게 돕고 있나. 영화를 하나 만드는 것은 지뢰가 가득 묻힌 벌판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저 그에게 어디에 지뢰가 있는지 지도를 그려주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다. 인디영화보다 스튜디오영화를 만드는 게 쉬운가. 작품에 따라 다르다. 만약 만들고 싶은 영화를 갖고 있다면 스튜디오와 일할 경우 대답을 더 빨리 얻게 된다. 이른 시간 안에 가능 여부를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트래픽>과 <오션스 일레븐>에서 촬영감독으로 일했다. 카메라를 직접 들 때 장점은 영화에 대한 밀착도가 높아지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점은 촬영감독으로서 내가 얼마나 잘해낼 수 있느냐는 또다른 차원의 고민이다. 다음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존경하는 촬영감독이 많지만 나로서는 옛날로 돌아가 다른 촬영감독과 일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이제 이런 식의 필름메이킹은 내게 아주 유기적인 과정이 돼버렸기에 중간에 누군가를 끼워넣는 것은 쉽지 않다. 예컨대 지금 만들고 있는 새 영화와 올 봄에 만들 영화의 비주얼을 나는 예전에 비해 훨씬 이른 단계부터 마음속에 그리게 됐다. 자신의 영화 만드는 스타일을 묘사한다면. 나는, 매우 독창적인 언어를 가지고 영화의 풍경 자체를 바꿔버리는 구로사와나 베리만, 펠리니, 큐브릭, 알트만과 같은 감독 중 하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 나를 모방하려고 노력한다면, 아무도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감독이 못된다.나는 손에 주어진 소재를 들여다보며 이 소재를 다루기 위해 어떤 종류의 감독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가늠하고 시도하는 감독일 뿐이다.

배우의 신체치수 일일이 기억, 시나리오 원작까지 읽으며 의상을 고민

58년에 유현목 감독이 <인생차압>이라는 현대물을 찍는데, 틈만 나면 자기 영화에 출연해 달라고 조르는 거야. 현목이랑 나랑은 동갑이라 무척 친했거든. 다른 사람 영화엔 출연해주면서 자기 영화엔 왜 얼굴을 안 내미느냐는 거지. 그래서 대신 의상을 해주마 했지. 그게 첫 현대물이었어. 현대물 의상은 사극에 비하면 할 일이 거의 없어. 배우들이 배역의 성격에 맞춰 직접 자기 의상을 준비해 와서 찍는 게 다반사였거든. 그 당시엔 얼굴 좀 알려졌다 하는 배우들은 자기만의 의상점이 하나씩 있었어. 지금은 앙드레 김이 연예인들 의상해주는 걸로 유명하지만, 그땐 노라 노(Nora Noh)가 양장점을 차려서 이름을 크게 알렸지. 상고물(삼국시대물)이랑 현대물은 그이가 거의 도맡다시피 했어. 그이가 상고물 의상을 지으면 양장 분위기가 나는 특이한, 지금 말로 하면 개성있는 한복이 연출됐지. 나도 그이 옷 하는 건 마음에 들더라구. 솜씨가 아주 깔끔해. 요즘도 서대문에서 예식장을 하고 있다지. 당시 그이 양장 짓는 솜씨에 반해 단골 삼은 여배우들이 한둘이 아니었어. 배우 엄앵란씨는 아예 그 집을 전속 의상실로 정해두고 옷을 해 입었지. 요새야 협찬이란 게 있어서 연예인들 옷을 공짜로 대준다지만, 그땐 배우들이 자기 이미지에 맞는 옷집을 골라 직접 의상을 마련해야 했거든. 종로의 크레타 리(Creta Lee)라고 또 한 사람 있었어. 87년 한해에 연산군 일대기를 다룬 두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는 내가 맡고, 이혁수 감독의 <연산군>은 그이가 맡았어. 아무래도 같은 내용의 영화이다보니 관심이 쏠리게 마련이잖아. <연산군>의 의상들은 돈은 엄청 들였어도 시대에 꼭 맞지도, 그렇다고 그림이 되지도 않게 어정쩡했어. 내가 더 잘했다고 말하는 게 아냐. 영화 의상하는 사람은 영화의 성격이 어떤지, 어느 배역에게 옷을 입히는지, 시대적 배경이 어딘지 배우나 감독 못지않게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대본 읽기는 기본이고, 원작이 있다면 원작부터 구해다 읽고, 영화 속 시대를 말해주는 자료가 있다면 구비해놓는 게 의상이 해야 할 일이야. 배우들의 신체치수를 외운다니까 놀라는 사람들이 있어. 그게 뭐가 놀랄 일이야. 치수뿐만 아니라 특징까지 다 알고 있어야 해. 저 배우가 목이 긴지, 붙었는지, 어깨를 벌리고 다니는지, 구부리고 다니는지, 다리가 휘었는지, 같이 사는 가족마냥 알아야 해. 그래야 옷을 입는 배우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자기 옷이라 느끼게 되지. 현장에서 옷을 풀어놓으면 배우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어. 배우의 몸을 아는 사람이면 어디가 안 맞아서 불편한지 단박에 알 수 있지. 한데 요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가 문제인지 도통 몰라. 협찬이다 뭐다 잔뜩 얻어와서 되는 대로 입히는 코디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손으로 지은 옷도 어디가 문제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배우의 몸을 몰라서 그래. 난 영화가 시작되면 대개 주연의 집으로 가지. 만나서 요구사항을 들어. 내 몸이 이러이러하니 요 부분은 신경 써달라든지, 어디를 가려 달라든지 드러내 달라든지, 무늬가 있었으면 혹은 없었으면 좋겠다든지, 천은 보들한 걸로 혹은 뻣뻣한 걸로 해달라든지 쭉 듣고, 이제 감독의 요구사항을 듣는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의 요구사항을 종합해서 한벌의 영화의상을 짓는 거지. 간혹 무리를 해서 의상을 해가도 마음에 안 든다고 감독이나 배우들이 퇴짜를 놓을 때가 있어. 엄앵란, 김지미, 문정숙, 조미령, 도금봉 그때 내 손을 거쳐갔던 여배우들이 지금 와서 이런 얘길 해. “그때 어떻게 자기들 비위를 다 맞췄는지 대단하다”고. 그냥 배우 하나 붙잡아서 삯바느질이나 해주며 편하게 돈 벌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고, 그때 그 흔한 한복집 하나 냈어도 지금 떼돈을 벌었겠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어디 그런 생각할 틈이 있었나. 현장 뛰어다니는 데 지쳐서 가게 내는 건 엄두도 못 냈지. 남의 삯바느질이야 돈은 벌겠지만, 내가 만든 의상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들 바라보는 뿌듯함에 비할라고. 얼마 전 임권택 감독이 만든 <춘향뎐>이 칸영화제에 입성하면서 여배우가 진홍빛 한복 치마를 차려입고 주단을 밟아서 화제가 됐잖아. 60년대 국내, 국제영화제에 참여하는 여배우들은 모두가 한복차림이었어. 지금처럼 드레스니 양장이니 하는 옷들은 찾아보기 힘들었어. 조미령이나 도금봉이 시상식에 참여한다고 나한테 와서 옷을 맞춰 입고 가곤 했지. 최은희도 어디 갈 땐 꼭 나를 찾아와. 하지만 꼭 좋은 시절만 있던 건 아니었어. 3년마다 영화판에 부도 바람이 몰아닥쳤고, 흥행사 하나가 몰락하면서 대여섯개의 제작사들을 연쇄로 끌고 들어가는 위기가 끊이지 않았어. 그 통에 돈도 못 받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이사를 다닌 게 셀 수도 없었지. 그 와중에도 모아놓은 의상만큼은 목숨 걸고 챙겼어. 시대를 증명할 의상들은 그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 구술 이해윤/ 1925년생·<단종애사> <마의 태자> <성춘향> <사의 찬미> <금홍아 금홍아> <서편제> <친구> 의상 제작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콜래트럴 데미지>

● 요즘 미국을 휩쓸고 있는 새로운 호전적 분위기 덕을 가장 많이 본 영화는 <블랙 호크 다운>일 것이다. 이 작품은 최근의 슬픈 상처와 딱 맞아떨어지는 면모들 덕분에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9·11 테러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피해자인 양 느끼게 만들었고 그래서 마치 1993년 소말리아 작전에 투입된 불쌍한 군인들처럼, 약자를 맘놓고 괴롭히는 역할을 스스럼없이 맡도록 부추기고 있다. <블랙 호크 다운>을 호전적인 영화라고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대립구도를 맹목적인 “우리 vs 그들”로 나눈 것 역시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드디어,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오랫동안 관객을 기다리게 한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새 영화 <콜래트럴 데미지>를 만난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이 작품은 <블랙 호크 다운>을 몰아내고 미국 극장가의 가장 매력적인- 그리고 가장 비난받는- 박스오피스 성적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9·11 테러 발발을 보고 민첩하게 개봉일을 늦춘 이 영화는 아내와 아이를 희생시킨 콜롬비아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LA 소방대원의 복수를 다루고 있는데, 진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테러사건에 힘입어 매우 뜻있는 영화인 양 재조명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테러 직후인 9월12일에는 이런 영화가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민망한 노릇으로 생각되었을 텐데, 그로부터 다섯달이 지나니 마치 애국적인 선견지명이라도 지닌 영화라는 듯 새로이 각광받고 있다. 전혀 놀랄 일이 아니지만, 워너브러더스는 이제, 관객이 9·11 테러 이전보다 지금 훨씬, 이런 종류의 영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이 영화의 개봉버전은 원본에 비해 수정이 가해져서, 세계무역센터 학살의 현장이라도 되는 듯한 곳에서 아놀드와 동료 소방대원들이 인명을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준비됐나! 시작이다!” 마치 하이재킹 진압팀의 작전신호 “시작이다!”(Let's roll!)를 예감이라도 하듯 스타 아놀드가 외친다. 한 신이 흘러가면, 아놀드의 아내와 아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콜롬비아 테러리스트의 폭탄테러 제물로 사라져버린다. 이 폭발로,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을 기준으로 보자면 작은 피해라 할 만한 9명 사망 24명 부상의 피해를 입지만, 이 정도면 테러리스트 엘 로보를 상대로 한 아놀드의 1인 전쟁을 시작하기엔 충분하다. 아마도 새로 삽입된 신 중에는 후드를 걸친 게릴라 대장이 비디오테이프를 보내 “미국 전쟁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불러일으켰다며 비난하는 신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감정적 호소를 더욱 자극하는 것은 한 콜롬비아 좌파가 테러리스트들을 노골적으로 동정하며 미군이 즐겨쓰는 용어 “무고한 희생자”를 사용해 아놀드 가족의 희생을 합리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아놀드로 하여금 야구방망이 하나 들고 쳐들어가도록 만드는 대목일 것이다. 슈워제네거는 <콜래트럴 데미지>가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관객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다. 그는 여자와도 일대일로 싸워야 했으니까. 열대우림을 질주할 때든 폭포에 뛰어들 때든 아놀드 선생은 엘 로보의 마스크 뒤의 능글맞은 웃음을 걷어낼 정도로 터프하긴 했다고만 말해두자. 혁명가들의 대사는 알 카에다의 경전 해적판에서 대개 나왔다. “미국인들은 가족의 가치라는 방패 뒤에 숨는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전쟁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망각했다” 그리고 이 “현실”은 사디스틱한 게릴라들이 잔혹한 본성을 발동시켜 그들 중 하나에게 산 뱀을 삼키도록 강요할 때 명백히 드러난다. 영화는 또, 일종의 균형잡힌 대립을 추구하려 한 건지, 격렬한 액션이 전개되다가도 갑자기 정색을 하고 생뚱맞게 논쟁을 제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윤리적으로 선한 복수와 악한 복수가 따로 있느냐는 것 등이다(“당신네 미국인들은 참 순진하기도 하다. 어째서 필부에게도 복수의 총이 필요할 수 있는지, 당신들은 의구심을 품어보는 법이 없다. 독립을 위해 싸우는 건 왜 오로지 미국인들뿐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무엇을 위한 독립이었나? 여자들과 아이들을 맘놓고 죽이기 위한?” 등). 그러나 이런 부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콜래트럴 데미지>는 투박하고 성긴 액션영화의 좋은 예일 따름이다. 한 가지 우연은 또다른 우연으로 이어지고 내러티브상의 필연이란 술 취해 길을 잃어버린다. <콜래트럴 데미지>는 미국이 당한 것보다 훨씬 더 앙갚음을 해댄 영화인데, 이 경우 이것은 엄청난 수익과도 일맥상통한다. 조지 부시의 의심스런 대통령 자격과 리더십이 이번 “테러와의 전쟁”을 계기로 신성화되어버렸듯이, 슈워제네거의 쇠잔해진 영향력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소방대원은 통치자를 위해 다시 한번 일하리라고 마음먹을 것이다. 그럼 이제 다같이 외쳐보자. “준비됐나! 이제,… 시작,… 이다!” 짐 호버먼/영화평론가. <빌리지 보이스>(<빌리지 보이스> 2001.11.5.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anivision] <숲은 살아있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TV에서 우연하게 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물이 맘에 들었다 해도 1화부터 꾸준하게 녹화할 수 있는 근면한 성격이거나 학원에 가지 않는 초등학생 정도로 한가하지 않은 이상 시리즈물의 전화를 보기 힘들다. 나중에 비디오로 보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국내에서 출시되는 애니메이션 비디오는 보통 60분(2화 분량) 기준으로 10개 미만으로 나오기 때문에 26화 이상인 시리즈물은 <드래곤볼>이나 <포켓몬스터> 정도의 인기가 아니면 전편이 제대로 출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따라서 CATV에서 방영된 <지구방위가족> <레인> 같은 소수 마니아층 성향의 작품, 혹은 방학이나 연휴 때 방영되는 <공룡아 불을 뿜어라>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단편으로 끝나는 특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게 되면 그 작품을 다시 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하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일이 발생한다. 필자만 해도 어릴 때 명절날 방영된 <재크와 콩나무>나 <백사전>같은 작품을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수천, 수만개의 비디오가 쌓여 있는 황학동 비디오도매상이나 일본 아키하바라의 비디오샵을 몇 년 씩 뒤지고 다니던 경험이 있었다.일본의 `IVC`는 클래식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기획, 제작하는 회사다. 이곳에서 <눈의 여왕>이나 폴 그리모의 <왕과 새> 같은 DVD를 출시한 덕분에 희귀 LD를 구하려는 노력이나 지글거리는 저화질의 복사본을 봐야 하는 고생을 덜 수 있게 됐다. 역시 이 회사에서 출시된 1956년작 러시아애니메이션 <숲은 살아있다>는, 러시아의 동화작가 사무일 마르샤크의 원작에 바탕해 구소련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이반 이바노프 바노가 연출한 명작.제멋대로인 여왕이 엄동설한에 봄꽃을 가져오는 자에게 큰 상금을 주겠다는 공고를 내자, 욕심많은 모녀에 떠밀려 겨울 숲속으로 꽃을 찾아나선 소녀가 12달의 요정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작 자체가 무대에서 먼저 인기리에 공연되었던 영향 탓인지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 유려하게 흐르는 동작과 대사들, 절대권력이나 관료주의를 은근히 비꼬는 듯한 풍자성 등은 디즈니와 다른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힘과 시간을 뛰어넘는 `클래식`의 전형을 느끼게 해준다. 국내에서는 80년대 명절날 시간 때우기용으로 이란 제목으로 방영됐지만 정식으로 출시된 적이 없기 때문에, 비록 일본어 더빙으로 출시됐다 해도 이 작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는 사람에게는 큰 행운일 것이다.스토리는 같은데 그림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같은 원작을 가지고 일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을 봤을 것이다. <명작극장>풍의 캐릭터가 나오는 이 작품은 국내에 이란 제목으로 출시됐다. 예전 그대로의 한글 더빙으로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GOLD STAR`(지금의 LG)란 딱지를 달고 1986년에 나온 비디오라 오히려 더 구하기 힘들 수도 있다.최근 <은하철도999>나 <마크로스> 같은 추억 속의 애니메이션들이 국내에서 속속 DVD로 출시되는 복고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1976년작 <로보트 태권V>가 2월 말에 출시될 예정이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최대한 좋은 화질을 위해 원본 필름을 찾아다닌 노력을 기울인 타이틀이라 화질이나 음질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어린 시절 추억 속에만 묻어뒀던 많은 애니메이션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

조명기를 든 부부 최성원. 남진아 이야기 (1)

최성원씨와 남진아씨는 오랫동안 한 팀으로 손발을 맞춰온 선후배이자 27개월된 아들을 사이에 둔 4년차 부부. 감독과 배우, 제작자, 홍보담당자, 스탭 등 범영화계에서 일과 생활을 나누는 부부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들처럼 문자 그대로 같은 일에 몸담고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더구나 30kg이 넘는 조명기를 들고 뛰는 조명 일이 워낙 물리적인 ‘힘과 체력’을 요하는 터라 오랫동안 여성 인력에 대한 벽이 높았던 사정을 감안하면, 여간해서 보기 힘든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같은 현장에서 서로 볼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대단한 희소식이었다. 남진아씨로서는 “계집애가 무슨 조명이냐, 분장이나 해라”던 일각의 시선을 버텨내고 바라던 조명감독에 첫발을 디디면서 늘 좋은 후원자였던 남편, 같은 꿈을 꾸는 여자후배들을 볼 면목이 생겼고, 최성원씨로서는 같은 입장에서 일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끊임없는 자극을 주고받을 든든한 동료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 두게 된 셈이니 말이다.그들이 조명기를 들기 전에는… 부부이기 한참도 전에, 영화현장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92년 이두용 감독의 <뽕3>를 찍으면서다. 임재영 조명감독의 휘하로 촬영에 합류한 당시, 최성원씨는 이미 수년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조명 퍼스트였다. 딱히 영화에 관심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덕공고를 졸업하던 81년, 동네 선배인 박만창 조명감독의 소개로 우연히 촬영장을 드나들며 일을 거들다가 조명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본격적으로 해보겠다는 욕심이 나기 시작한 것은 군대를 다녀와서부터. “조명부에서 좀 ‘빠릿하다’ 싶으면 촬영부에서 오라고 하는, 손윗부서 같은 분위기”를 아직 풍기던 때라 더욱 조명에 대한 오기가 생겼다. 마침 염효상, 고영광, 박종환 등 동네 친구들도 다 조명일을 하고 있었고, 각자 일이 끝나면 서로의 촬영장으로 놀러가서 1년에도 예닐곱편의 현장을 경험하곤 했다. 전쟁물이나 사극을 많이 하면서, 연결신이 있을 때마다 지방 촬영장을 오가는 엑스트라들의 경비를 줄일 겸 <뽕3>의 일본군 헌병을 비롯해 가마꾼, 포졸 등으로 이방 수염을 달고 카메라 앞으로 불려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던 때였다. 최성원씨에 비하면 남진아씨는 조명보다 영화에 대한 애착이 먼저였다. 중학교가 국악시범학교인 탓에 취미활동으로 가야금을 배운 그는, 공부에 별 관심없던 고교 3학년 때 입시를 치를 겸 가야금을 전공했었다. 그렇게 서울예대 국악과에 진학은 했지만, 흔한 말로 돈도 백도 없으면 교내 악단조차 들어가기 힘든데다 딱히 흥미도 재능도 없다는 생각에 그저 관두고 싶을 뿐이었다. 마냥 영화가 좋았던 그때는 뭐가 됐든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다른 관객과 마찬가지로 조명이 뭔지도 눈에 안 들어왔다. “카메라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마술”이라고 여겨 촬영을 지망했으나 그러려면 조명을 알아야 한다는 충고에 옆길로 샜다. 졸업 직후 이제는 제목도 가물가물한 심형래 영화에 촬영 도중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최입춘 조명감독 밑에서 <김의 전쟁>을 찍는 등 서너편의 현장을 지나온 뒤였을까. ‘대마이’(카메라), ‘사시코미’(전환 잭) 등 일본어가 많이 쓰이던 장비 용어를 여전히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현장수업에 정신없는 막내로, <뽕3>와 임재영 조명감독 팀에 들어갔다. 우스갯소리지만 이들에 따르면, 당시 <뽕> 시리즈는 시리즈마다 커플이 하나씩 있었는데, 1편에서 여배우와 결혼한 차정남 조명감독과 또다른 2편의 커플에 이어 결과적으로 “<뽕3> 커플”이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때였다. 물론 최성원 감독은 조명협회가 있던 남산 건물 옆에 선 파마 머리의 남진아씨를 처음 봤을 때, “쟤가 조명한다는 여자애구나” 싶어 눈여겨봤다지만 말이다. <뽕3>는 <키드캅> <미스터 맘마>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애니깽> 등 임재영 조명감독 아래서 보낸 3년여의 작업을 포함해 <퇴마록>까지, 30여편의 영화에서 함께 빛을 다루게 되는 10년지기 인연의 시작에 불과했다. <키드 캅>을 끝내고 프랑스 유학 준비를 마쳤던 남진아씨가 티케팅까지 해놓고도 “기재를 아는 애가 없어서 엉망진창”이라며 급하다는 전화에 달려갈 수밖에 없을 만큼 믿는 선후배지간이었으니까. 떠날 생각도 함께 품어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두 사람은 ‘조명계’를 영영 떠날 생각을 품기도 했었다. 아직 임재영 감독의 조명부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와 <애니깽>이 겹치는 바람에 팀이 나뉘었던 94년. 서른살이 되면서 일에도 예전 같은 흥이 나지 않을 무렵, 최성원씨는 사업계획서를 내보라는 아버지의 제의에 마음이 동해 정말 뚝배기 라면집 주인으로 업종변경을 할 뻔도 했다. 밤에는 촬영장에 김밥을 배달하고, 낮에는 라면 뷔페를 하는 사업 구상에 한창일 때, <애니깽> 촬영차 멕시코에 가야 했던 임재영 감독이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맡기고 떠났다. 본의 아니게 <헐리우드…>의 촬영을 70% 정도 도맡아 하게 되고는, “처음엔 로케이션 잘 나가다 나이트신 닥치면서 3번을 헤맸다”. 극중 최민수가 하늘에 달이 하난데 왜 그림자는 두개냐며 조명감독들에게 대드는 장면인데, “발전기 세대랑 크레인에 이동차까지 갖다놓고도, 도무지 답이 안 나왔기” 때문. 하지만 그렇게 헤매고 난 뒤에는 라이트 하나로도 조명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고, 무엇보다 ‘오너’를 해보니까 사업계획은 까맣게 잊을 만큼 신이 났다. 더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던 그는 <어린 연인>을 끝으로 독립한다. <애니깽> 때문에 멕시코에서 7개월을 뒹굴면서 지칠 대로 지쳤던 남진아씨는 돌아오자마자 일단 영화를 떠났지만, 결국 현장을 잊지 못해 발길을 되돌리면서 선배 최성원씨를 따라나섰다. 독립 혹은 자립은, 달콤한 자유만큼 가볍지 않은 책임을 대가로 지웠다. 몇몇 후배들과 함께 온라이팅(On Lighting)이란 조명사무실을 차렸지만, 남진아씨는 물론 최성원씨도 정식 입봉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진 않았다. 최성원씨는 김진한 감독의 <경멸>과 <햇빛 자르는 아이> 등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한편, 문화영화와 비디오 작업으로 돈을 모아 장비를 마련하고, 남진아씨는 조명 관련 책을 긁어모아 교재도 만들어가며 후배를 키우겠다는 의욕에 넘쳤다. ‘동네 친구들’인 조명감독들도 온라이팅에 합세한 뒤 모두 스무명 정도로 식구가 늘어나면서는, <진짜 사나이> 같은 영화에 조명기와 인력을 빌려주며 버텼다. 하지만 빚을 져가며 HMI 같은 고가의 장비에 투자하고, 한달에 600만∼700만원에 이르는 경상비를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98년 IMF 이후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남은 건 빚뿐. 두 사람은 당장 손에 잡히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두 사람의 기억에 깊이 새겨진 작품이 96년의 <유리>다. <유리>는 최성원씨의 입봉작이자 남진아씨가 처음 조명 퍼스트를 맡은 영화. 조명협회의 인준을 받은 작품만 하게 돼 있는 규정을 어긴 탓에 입봉과 동시에 제명을 당한 비운(?)의 영화기도 하다. 당시로서는 자신의 작품을 하고 싶은 혈기가 우세했지만, 두 사람 다 입봉한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입봉을 빨리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비를 충분히 해서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라고. 하지만 마을회관에 들어가서 외부의 빛을 일일이 차단한 뒤 촛불승의 움막을 짓고, 움막 주위에 화이트보드를 360도 둘러 반사를 주면서 짚으로 된 움막 틈새로 비치는 빛까지 꼼꼼히 고려해가며 찍은 <유리>는 최성원씨가 처음으로 마음껏 빛을 실험한 영화라 큰 후회는 없다. 아직도 어떤 기재를 썼는지 기억한다는 남진아씨 역시, 외딴 바위만 있는 허허벌판에서 라이트의 2/3를 하늘로 쏘아올리는 천공반사란 걸 처음 알게 된 <유리>가 특별한 경험이다. ▶ 조명기를 든 부부 최성원. 남진아 이야기 (1) ▶ 조명기를 든 부부 최성원. 남진아 이야기 (2)

전수일이 만든 영화들

<내 안에 부는 바람>출연 : 1부 - 이충인 박철, 2부 - 조재현 김명조, 3부 - 유순철 유년기, 노년기를 맞으면서 달라지는 시간의 의미를 탐색하는 영화. 유럽 모더니즘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난해한 영화라는 평을 받았지만 감독 자신은 누구나 한번쯤 떠올렸을 이야기를 담는다는 점에서 `대중영화`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다.유년기를 다루는 1부 <말에게 물어 보렴>은 감독이 프랑스에서 계획했던 단편 프로젝트에 고향은 그대로인데 자신만 변했다는 낯선 느낌이 더해진 10분짜리 영화다. 천둥번개가 휘몰아치고 난 아침, 산골에서 사는 할머니는 손자에게 마을에 가서 시간을 알아 오라며 심부름을 보낸다. 산비탈을 내달려 마을에 도착한 아이는 외양간에서 소에게 장난도 걸고 여기저기 열심히 한눈을 판다. 노인이 혼자 지키고 있는 시계방에서 확인한 시간은 아침 열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놀다보니 어느덧 산자락에는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아이는 할머니에게 열시라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시간은 어른과 다른 의미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감독은 물리적으로 정해진 시간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자연 속에서 시간을 느끼는 아이의 모습으로 영화의 시작을 연다.2부 <내 안에 우는 바람>은 유년기에 이어지는 청년기의 시간이다. 항상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에 서 있는 청년은 꿈을 잊기 전에 녹음기를 찾는다. 그뒤 녹음한 내용을 글로 옮기는 것이 그의 일. 어느날 여자친구와 함께 그녀의 고향 속초에 간 청년은 자신이 기억한 이미지가 이미 바래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그동안의 기록을 모두 불사른다. 감독이 “아마 조재현은 연기하기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뭐가 뭔지도 모를 주문을 했으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2부는 모호하면서, 또 허무하다. 1부가 `순수의 시간`이라면 2부는 `허무의 시간`이라는 것. 이 허무를 지나 영화는 노년기로 넘어간다. 3부 <길 위에서의 휴식>은 어느새 시간의 끝을 맞게 된 노인의 일상이다. 노인은 수의를 준비하고 영정 사진을 찍고 초상화를 남기며 가깝게 다가온 죽음을 준비한다. 가끔 치매 증상까지 보이게 된 그는 어느날 밤 자신의 무덤을 파는 꿈을 꾼다. 각각 고향과 레오스 카락스의 선물이 동기가 된 두편과 달리 3부는 2부를 끝내면서 구체화된 작품이다. 죽음을 삶이 어쩔 수 없이 동반하는 무언가로 생각하는 노인들에게서 `구체적 시간`을 발견하는 이 영화는 “시간 사이의 충돌”을 담는다는 점에서 3부작에 적절한 마침표를 찍는다.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출연: 설경구, 김소희 지방대 영화학과 교수 김은 현실의 표면만을 떠도는 것 같은 인물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나쁜 피>에서 비상하는 듯한 몸짓으로 정지한 드니 라방의 모습을 보여주며, 스스로도 새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그는 날개가 답답한 현실과의 끈을 끊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연인 영희는 그런 김을 자신이 발딛고 있는 땅 위에 끌어내리고 싶어한다. 위태롭게 지속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영희의 부탁을 받은 김이 영희 고향집에 함께 인사하려 내려가면서 파국을 맞는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때문에 갈등하는 남자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은 현실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러 오는 것처럼 황량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부산 출신 록밴드 레이니 썬이 영화음악을 맡은 점이 눈길을 끈다.▶ 전수일감독의 나홀로 영화 만들기

전수일감독의 나홀로 영화 만들기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는 모든 점에서 예외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전수일 감독의 첫 장편인 이 미니멀리즘 작품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말로 들려준다기보다 암시해준다. 창백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영화는 홍상수의 현대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영화 계열에 속한다.” _(<르몽드> 2001년 6월16일자)“이번 한국영화제에서 발굴된 보석은 전수일 감독의 장편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이다. 전수일은 대사가 거의 없는 롱숏을 많이 쓴다. 따라서 주인공 김은 뭔가 결여된 듯 낯설어 보이고 여인과 함께 든 침대에서조차 고독해 보인다.” _(<카이에 뒤 시네마> 2001년 6월호)“은밀하게 전율하는 전수일의 작품 세계는 걸음을 멈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_(<르몽드> 2001년 6월, 문화예술부록) 3월1일 서울의 단 한개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가 있다. 제작된 지 3년 만에 어렵게 관객을 만나게 된 이 영화는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이후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부산 경성대에서 영화 실기를 가르치는 전수일 감독이 혼자 힘으로 만든 영화다. 94년부터 부산에서 독립적인 제작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고 있는 감독이다. 모든 영화가 서울에 집중돼 있을 때 “이런 사람도 있어?”라는 냉소를 견디며 부산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상품이 아닌 영화도 관객을 만날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수일 감독. 그의 험난하면서도 행복한 영화 만들기가 여기 있다. 편집자주인터뷰가 끝나고 막 일어서려는데 전수일 감독이 급한 손길로 서류 파일 하나를 건넸다. 그 속에는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제작발표회 사진과 촬영 현장에서 찍은 스틸 사진, 지난해 파리에서 한국영화제가 열렸을 때 <르몽드>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새는 폐곡선…> 관련 기사, 그 기사들을 직접 번역한 문서 몇장이 어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베니스영화제 ‘새로운 영역’ 부문을 비롯해 영화제 출품 경력은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한국에선 3년을 기다린 뒤에야 간신히 극장 하나를 잡을 수 있었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그는 사람들이 잊어버리고만, 어쩌면 처음부터 기억할 마음조차 품지 않았던 자신의 영화가 스스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렇게 시간을 견뎌왔다고 확인받으려 했던 것일까. 그러나 “창백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영화”라거나 “정지와 운동을 하나씩 포착하는 전수일의 섬세함은 앞으로 수작들을 예고한다”는 찬사는 이해하지 못할 낯선 언어로 적혀 있어 외로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먼 부산에서, 혼자, 고집스럽게 영화를 만들고 있는 전수일 감독 자신처럼. 영화 두편, 빚은 2억5천 전수일 감독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넷. 중견 감독으로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그는 지금까지 단 두편의 영화를, 그것도 본 사람이 거의 없는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네편의 영화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첫 영화 <내 안에 부는 바람>은 10분짜리 단편영화 하나와 그 단편이 실마리가 된 중편영화 두편이 모여 완성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각기 아이와 청년, 노인에게 다가오는 시간의 의미를 사색하는 <내 안에 우는 바람> 중 조재현이 출연하는 2부는 그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고 서울과 부산에서 잠깐 개봉도 했다. 열흘 동안 부산 시민회관에서 이 영화를 본 관객은 3500명 정도. 대담하게도 독립영화를 35mm로 찍은 그는 관객과 만나는 데 실패한 이 영화 때문에 상당한 액수의 은행 빚을 지게 됐다. “<내 안에 우는 바람>이 칸영화제에 초청되자 삼성영상사업단이 해외 판매를 맡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돈이 될 것 같지 않자 중간에 손을 떼버렸다”고 아직도 화를 삭이지 못한 듯 말하는 그는 “그런 분노 때문에라도 계속 영화를 만들게 된다”고 했다.그러나 그는 오직 분노에 기대 투사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부산 경성대 영화학과 1기 입학생으로 모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는 사람이며 대도시의 빠른 호흡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안에 우는 바람>이나 <새는 폐곡선…>은 모두 말을 아끼는 전수일 감독이 직접 목소리를 내지 못한 사연을 대신 전하는 영화들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바이 마을이라고 불리는 강원도 속초의 청호동.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이 외로운 마을은 쇠줄을 당겨 호수를 건너도록 되어 있는 갯배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이제는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은서와 준석이 안타깝게 서로 스쳐 지나가는 장소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이사간 전수일 감독은 20년 만에 다시 찾은 이 고향에서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청호동엔 그가 살던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어린 새들이 있는 새집을 통째로 가져와 소중히 기르고 날마다 가까운 바다에서 수영을 하던 소년은 사라졌다. 오랜 외국생활 끝에 기억 속의 자신을 더듬고 싶어져 고향을 찾은, 서른을 넘긴 어른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제각기 다른 속도로 흘러간 것 같은 시간 앞에서 그는 <내 안에 우는 바람>의 1부 <말에게 물어 보렴>을 떠올렸다. 아침 일찍 시내로 시간을 알아보러 떠난 꼬마가 온갖 일에 한눈을 팔다 어둠이 내릴 무렵에야 돌아와 할머니에게 “지금 열시야”라고 말하는 <말에게 물어 보렴>은 그의 말에 의하면 “아주 단순하고 쉬운 영화”였다. <내안에 우는 바람>, 레오 카락스의 선물이 아이디어 줘 그 자신에겐 평범한 어조로 말을 거는 영화였을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못했다. 전수일 감독은 16mm 상영 공간이 부족한 부산에서 작업했기 때문에 이 영화를 35mm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즈음 부산을 찾은 <퐁네프의 연인들>의 감독 레오스 카락스가 그에게 소형 녹음기를 선물하면서 “이제 꿈을 글로 기록하려 한다”는 말을 했고, 이 말 때문에 꿈이 사라지기 전에 녹음해 뒀다가 글로 옮기는 청년의 이야기인 2부 <내 안에 우는 바람>이 나오게 됐다. 사정이 달라진 것은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이왕 35mm로 시작한 일, 그는 겁도 없이 내리 두편의 중편영화를 35mm로 밀어붙였다. 이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함께 학교를 다닌 인연으로 출연하게 된 그 당시의 조재현은 관객을 끌 수 있을 만한 스타가 아니었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색적인 영화의 내용 역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직접 제작사 동녘필름을 차려 은행 대출을 받기로 했다. 4년에 걸쳐 <내 안에 우는 바람>을 만들면서 생긴 빚은 당연히, 아직도 갚지 못했다. 지금은 부산에서 영화 찍는 일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내 안에 우는 바람>을 만들 때만 해도 부산은 그 고장에서 영화를 배운 학생들마저 채 수용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 도시에서 무명의 배우들과 영화를 찍고 있으면 부산지역 특유의 텃세를 과시하면서 촬영을 방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차라리 신기하다며 몰려드는 사람들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고작 몇 백명이 극장에 들른 서울과 달리 부산에선 객석이 절반은 찼고 “이런 영화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새로운 맛을 느꼈다”며 고마운 말을 전하는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 안에 우는 바람>의 칸영화제 출품 비용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일이 엉켜 있던 상황 속에서도 그런 밝은 면만을 마음에 남기기로 했다. 그의 첫 장편 <새는 폐곡선…>은 그래서 가능했던 영화이다. <새는 폐곡선…>은 전수일 자신의 일상과 고민이 많이 담겨 있는 영화다. <내 안에 우는 바람>의 스탭 일부와 경성대 영화학과 학생들을 불러모아 만든 이 영화는 지방대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교수 김의 이야기. 가족과 떨어져 혼자 부산에서 지내는 김의 아파트는 전수일이 사는 집에 갈색과 푸른 색조를 더한 곳이며, 지방에서 영화를 배우는 일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하는 학생들은 정말 그의 학생들이다. 끊임없이 외부와 충돌하며 영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김의 싸움 역시 전수일의 현실과 고스란히 겹쳐 있다. 그는 “<새는 폐곡선…>은 내 자신에 대한 것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어 만들었다”고 말했다. “내가 바라보는 주위 상황을 영화로 표현할 수 있을지 실험해봐야만 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작가가 책을 쓰듯 감독은 영화를 만든다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이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면서 느리게 들이마셔야 하는 영화도 있는 거라고. 그러나 <새는 폐곡선…>은 <내 안에 우는 바람>이 잡은 개봉의 기회마저 잡지 못했다. 투자를 받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부산지역 언론이 모인 가운데 제작발표회까지 했지만, 투자를 약속했던 친구는 결국 돈을 주지 못했다. 지원이 아니라 대출 형식으로 돈을 댄 부산의 어느 학원 재단이 아니었다면 그는 <새는 폐곡선…>의 후반작업을 마치지 못할 뻔했다. “사실 <박하사탕>이 아니라 <새는 폐곡선…>이 설경구가 처음 주연한 영화인데…. 이제 빚이 2억5천만원이 됐다. 월급으로는 이자를 갚는 데 바빠 원금은 갚지 못하니 빨리 늙는 것 같다”라고 쓰게 웃으며 몇 마디 덧붙이는 그에게는 뒤늦은 영화 열기로 들떠 있는 부산의 뜨거운 공기도 아주 쌀쌀하게만 느껴질 것 같았다.부산은 뭔가 ‘다른’ 영화의 고향사실 전수일 감독은 1년 동안 <가슴 달린 남자>의 조감독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막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한국 사정을 잘 몰랐던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깨닫고선 먼저 경험을 쌓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서울도 충무로도 그에겐 잘 맞지 않았다. “서울에선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서울 사람들은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는 것처럼 바빠 보인다.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하는 것도 너무 싫고.” 그때 마침 모교인 경성대에 교수 자리가 생기자 서울에 미련을 둘 까닭이 없어졌다. 부산에서도 영화는 만들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바다를 앞에 두고 살 수 있었다. 속초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바다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장소였다. 부산은 그것말고도 의미있는 조건 하나를 더 제공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얻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김이 따분하다면서 피하는 <새는 폐곡선…>의 학생들과 달리, 그의 학생들은 일주일에 세번은 함께 술을 마시며 전수일과 어울리곤 한다. 지금은 영화 때문에 수업을 간간이 빼먹어 “옛날보다 애정이 식었다”는 투정을 듣지만, 그는 항상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교수가 된 동기를 유감없이 충족시켜왔다. 영화란 무엇인지, 가끔은 외면하고 싶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은 그에게 배우면서 그를 가르치는 존재가 됐던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관계 역시 성립했다. 전수일은 자기 영화의 스탭 70%를 학생들로 충원한다. 현장 경험을 할 기회가 많지 않은 부산에서 그는 실기에 목마른 학생들 앞에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현장을 던져주는, 거의 유일한 원천이나 다름없다. 동녘필름, ‘다른 영화’의 기반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제작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요즘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영화는 스스로 제작비를 충당하고 방학을 이용해 촬영을 하던 기존 제작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작품이다. 투자자를 끌어모아야 하고, 더이상 수업을 빼먹기가 미안해 학교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부산까지 떠날 생각은 없다. “후반작업만 해결할 수 있다면 부산은 영화를 만들 만한 조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 도시다. 장비와 인력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서울에 있으면 투자자를 만나기가 쉽겠지만, 그처럼 쉽게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자본이 영화를 기획 상품처럼 만들고 있다. 나는 다른 영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다른 영화’의 기반이 될 중심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제작사 동녘필름이다. 제작까지 떠맡아야 했기 때문에 만든 동녘필름은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모이는 회사다. 이 회사는 전수일의 영화 두편 외에도 네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했다. 그중에는 <내 안에 우는 바람>을 시작한 94년부터 그의 조감독으로 일해온 이정애 감독의 <집>도 포함돼 있다. 오직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영상만 만들고 싶다는 사람이, 서울의 빠른 리듬이 피곤해 부산에 머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화를 제작하고 싶을까. 그런데 그는 동녘필름의 규모를 확장해 본격적인 프로듀서 일을 시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른 영화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 계속 만들 수 있다! <내 안에 우는 바람> 1부를 만든 뒤 벌써 8년이 지났는데 전수일의 상황은 뚜렷이 나아지지 못했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걱정도 여전하고 2억5천만원에 달하는 빚도 언제 갚을지 기약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그는 <나는 나를 파괴할…>이 수익을 안겨줄 영화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그 소설 속에서 자신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발견한 일만이 기쁘다. <나는 나를 파괴할…>은 너저분한 삶을 끝장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죽음이라는 해결책을 속삭이는 남자의 이야기. “자신의 삶을 언제 끝낼지 결정한다는 설정이 매력적이지 않으냐”면서 동의를 구하는 그는 차분한 말투를 들쑤시며 올라오는 희망을 감추지 못했다. 받기 싫은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삐삐만 가지고 다니는 사람. 영화를 만들기 전에는 아주 오래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3, 4년에 한편 정도밖에 영화를 만들지 못할 것 같지만, 일단 현장에 나가면 테이크는 세번만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미 급한 사람. 그는 이런 모순들이 충돌하는 와중에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갈 사람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이루고 싶은 그의 소망 하나가 있다. 돈이 생기면 부족한 예산 때문에 참아야 했던 <내 안에 우는 바람> 사운드 보정 작업을 다시 하는 것이다. “빚은 언제?”라는 질문에 “지금부터 갚아나가면 되니까”라고 느긋하게 대답하는 그는 30년 뒤에라도 <내 안에 우는 바람>을 들고 사운드를 고치러 나갈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글 김현정·사진 이혜정<사진설명>1.전수일 감독 2,3,4,5 영화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전수일이 만든 영화들

<일단 뛰어!> 촬영현장

조기유학 때 사고치고 돌아온 뒤 한국생활에 몸이 근질근질했던 21살의 고등학생 성환(송승헌), 가정방문 호스트 아르바이트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좋은 우섭(권상우), 인터넷 방송사를 운영하며 방송사 PD를 꿈꾸는 엉뚱한 행동의 진원(김영준). 그들은 시끌벅적한 고3의 하루를 마치고, 성환이 ‘그 자식’이라 부르는 졸부 아버지의 생일에 다녀오던 길에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차 지붕 위로 떨어진 피투성이 시체와 수십억대의 달러를 만난다. 순식간에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 “이걸 갖고 튀어? 말어?” 강남 아셈센터와 압구정, 둔촌동 창덕여고 등에서 촬영중인 <일단 뛰어!>는 세명의 청춘스타가 등장하는 바람에 항상 많은 여성팬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외진 지역에 위치한 창덕여고에서의 촬영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많은 팬들이 모여 스탭들이 통제하기 힘들 정도였다. 난데없이 떨어진 수억대의 돈을 둘러싸고 압구정동 한복판에서 악동들과 신참 형사가 벌이는 좌충우돌 추격전을 그리는 청춘명랑영화 <일단 뛰어!>는 기획시대가 제작하고 4월 개봉 예정이다. <사진설명> 1. 지각해서 물구나무서기 벌을 받고 있는 세 악동. 사실 이들 배우의 발은 스탭들이 잡고 있다. 그중 권상우가 제일 힘들어했다. 2. 전교생에게 피자를 배달시키고 아우디 승용차를 사고 뽐내며 학교에 도착한 성환은 우섭과 진원에게 돈이 든 통장을 나눠준다. 3. 학교 옥상에서 진원이 촬영하는 동안 성환은 ‘그 자식’이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생일에 가야 하고 우섭은 호스트 알바를 뛰러 가야 한다. 4. 경찰서의 온갖 궂은 업무에 시달리는 신참 형사 지형(이범수)은 거액 도난사건 용의자로 이 고삐리 세명을 수사하고 있다.

<버스, 정류장>의 재섭 김태우

“… 강우기가 뿌려대는 빗줄기 속에 놓여진 평창동의 버스 정류장에서, 늦가을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고 있는 성북동의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의 상처를 감당하기 버거워 훌쩍 사라져버리는 어린 소녀를 기다렸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재섭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태우 - ‘컨셉북 <버스, 정류장> 중’ 남자가 운다. 꺽꺽 소리내어 서럽게 운다. 열일곱 어린 소녀 앞에서 엄마품에 안긴 소년처럼 서럽게도 울어댄다. “어떻게 울어야지, 이런 느낌을 살려서 울어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어요.” 어쩌면 꿍 하니 웅크리고 살아왔던 초라한 서른둘 인생을 위한 한 바탕, 어쩌면 찰 것도 빌 것도 없던 마음에 큰 구멍 하나를 내버린 소녀를 향한 한 바탕. 차곡차곡 쌓아왔던 감정들이 분출구를 찾은 순간, 재섭도 김태우도 아무런 계산없이 그렇게 울고 있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김태우를 알아왔다고 자부해도, 그의 연기를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차례 봐왔다고 방심해도, <버스, 정류장>의 김태우는 다르다. “<…JSA>처럼 딴 생각 안 하고 끊임없이 사건과 인물을 따라가는 식으로 즐겨야하는 영화도 있을 거고, 영화를 보면서 내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도 있다고 생각해요. <버스, 정류장>은 후자에 가깝고 저는 그런 영화가 좋더라고요.” 결국 뚜렷하고 단선적인 캐릭터 설정으로 해결될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역할에 접근하는 방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는 인물설정을 완벽히 해버리는 스타일이었어요. 시나리오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고, 한 인물을 온전히 만들어버리는 방식이랄까. 하지만 재섭은 그냥 받아들였고, 공감했고, 설정없이 조금씩 묻어나길 바랐어요.” <…JSA>와의 비교점은 그래서 더욱 명확하게 나뉜다. 소심하고 우유뷰단한 남한 병사 남성식에 대해서는 이런 성격이라면 이렇게 커피잔을 쥐겠지 하는 A=B라는 등식이 성립했다면, 재섭의 행동에는 늘 딱 떨어지는 답이 없었다. “가령 재섭이 어둡고 닫혀 있는 사람이다, 라고 설정한다면 교무실에서 학생들이 ‘선생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했을 때 ‘그래?… 그건 이런 거야…’식으로 심심하게 대답해야 맞아요. 그런데 재섭이는 ‘어디 물으려고?’라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한단 말이죠. 그렇다고 그게 틀렸냐, 그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 사는 게 다 그렇잖아요. 지금 기분이 안 좋아도 딴 장소에서 딴 사람 만나면 그 전 감정에 배반하는 감정상태로 대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게 정말 본인이라면 캐릭터의 일관성에 떨어지니 하는 말은 안 할 거란 말이죠. 그렇다면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그 인간에 대해 공감을 하느냐는 거거든요. 게다가 설정없이 자연스러움이라는 걸 핑계로 방심하다보면 재섭이 아니라 인간 김태우가 튀어나올 수 있잖아요. 100% 공감은 아니겠지만 가장 근사치에 가기 위해 노력했어요.” 분명코 <버스, 정류장>의 시네마스코프사이즈 화면에서 운동하는 것은 지금껏 보아오던 김태우가 아니다. 서른둘의 네 번째 영화, 김태우가 이 정류장을 지나치지 않고 내린 건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