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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피겨 소녀, 달동네 봉자 되다,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의 한채영

소녀 시절엔 은반 위의 요정을 꿈꾸었다. 키가 너무 자라 7년 동안 했던 피겨스케이팅을 접었을 때가 고교 1학년 때였으니 연기자의 길은 어린 시절의 꿈은 아니었다. 그러나 필연은 언제나 우연과 종이 한장 차이. 8살 때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갔던 한채영은 12년 만인 2000년 여름, 잠시 다니러 왔던 서울에서 인사동 카페 ‘학교종이 땡땡땡’에 갔다가 인연과 조우했다. 개그맨 전유성씨가 사진을 찍어주겠다면서 ‘얼굴에 뭔가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던 것. 연예계에서 일해보자는 섭외를 받았고, 그해 겨울, 미국의 대학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밀리오레, 샤워껌, 에버랜드, 프렌치카페 등 CF와 함께 SBS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뒤바뀐 운명 때문에 은서를 미워하는 신애, SBS 주말 드라마 <아버지와 아들>에서 과수원집 딸 강자 역 등으로 얼굴을 알렸다. 지금 촬영중인 김동원 감독의 80년대풍 코믹액션영화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는 ‘바비인형’ 같다는 소리를 듣는 한채영의 ‘미모’를 한껏 살릴 영화다. 맡은 역은 ‘강북 최고의 미인’ 봉자. 달동네에 살고 있는 청순가련형 미녀로, 오빠 봉팔의 친구인 해적을 한눈에 사랑의 포로로 만들지만, 똥지게를 지던 아버지가 다치자 생계를 위해 나이트클럽에 나가기도 하는 고운 마음씨의 소녀다. 사실 한채영의 영화 데뷔작은 2000년 여름을 ‘난도질했던’ 10대 공포영화 중 한편인 <찍히면 죽는다>다. 그러나 한채영은 그 영화에 대해 “기억하지 마세요”라고 딱 자른다. 한국에 온 지 4개월 만에 찍은 영화로, 살도 지금보다 10kg은 쪘고 대사도 억양 하나하나를 외워서 했을 정도로 미숙했던 영화였으니까. 한국에서 일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한국말.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라”라는 뼈아픈 충고를 들으며 대사 전달 연습을 한 날도 있었다. 지금도 대사는 될 때까지 연습한다. 최하 50번, 때로 밤새도록. 촬영 현장의 에피소드 한 토막. 80년대 달동네 풍광을 재현하기 위해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 팀이 택한 촬영지는 난곡 재개발지역이었다. 계절은 한겨울인데, 고지대라 모질게도 바람은 몰아쳤고, 영화 마지막 부분 해적과 디스코를 추는 장면을 찍는데 너무 추웠다. 내복을 몰래 껴입었는데, 감독의 눈을 피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들켜서 혼이 났다. 그렇게 ‘초보’ 배우는 영화를, 연기를 하나씩 배웠다. “연기는요, 재밌을 줄 알았는데, 재미없어요. 힘들어요.” 가식이라곤 없는 대답을 친구들과 수다떨 듯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다. “<봄날은 간다>가 왜 슬퍼요?” 되묻기도 한다. 1980년생, 00학번. 아직은 무척 ‘젊은’ 한채영은 그렇게 솔직하고 낙천적이다. 겉모습도 취향도 밝다. 우는 드라마는 싫고, 해피엔딩이 좋다. “와이어 액션도 해봤어요.”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 나이트클럽 큰형님의 회상장면에서 삽입된 2시간 정도의 액션연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 스물셋, “지금은 젊으니 <툼레이더> <쉬리> 같은 몸을 날리는 액션을 해보고 싶어요. 로맨틱코미디는, 나이가 더 들면….”

따뜻하고 아름다운 진흙투성이

꽃샘추위는 남아 있겠지만 요즘은 간혹 어마, 봄볕이네, 싶게 따사로운 햇살을 불쑥불쑥 만난다. 내집 근처의 북한산 자락을 오르다보면 졸졸졸 물흐르는 소리도 귀에 섞이기 시작했다. 흰바위는 더욱 희어 보이고 다소 풀이 죽은 듯했던 소나무는 푸른색이 생기있게 되살아났다. 무슨 까닭인지 계곡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어 내내 얼음 속에 서 있던 나무의 밑둥(벌써 몇해째 겨울이면 그 길을 오갈 적마다 그 나무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에도 지난해처럼 또 얼음이 풀렸다. 기회가 있어 일본엘 며칠 다녀왔는데 교토의 용안사에 깃들기 시작한 햇볕도 따사로웠다. 각국의 사람들이 길쭉하고 널따란 마루에 발을 뻗고 앉아 론리 플래닛 같은 책을 들여다보거나 나른하게 졸거나 나무 한 그루 없는 돌의 정원의 비질의 자취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속에 나도 끼어 앉아 있던 순간, 햇살이 머리에 어깨에 등짝에 어찌나 따사롭게 내려앉던지 잠시 내가 여행자라는 것도 잊고 조용해질 수 있었다. 그저껜가는 양평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바람은 불었으나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급히 나오느라 아침도 거른데다 만나기로 한 분과 약속이 늦어 허둥지둥하다 점심시간도 지나버린 때에 메밀로 비빔국수나 물국수, 막국수를 만들어주는 집엘 들어갔다. 식당의 가운데 자리가 비어 있었기에 거기 앉으려 하니 예약된 자리라 하였다. 다시 보니 앞뒤로 스무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는 다른 빈자리와 달리 흰 물컵이 놓여 있었다. 단체 손님인가보다 생각하며 꽤나 시끄럽겠네, 어서 먹고 나가자, 생각하며 비빔국수와 두부구이를 시켰다. 배가 고프던 참이라 먼저 나온 두부구이를 열심히 먹고 있는데 이미 노년에 들었거나 중년의 끄트머리에 있는 것 같은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예약된 자리에들 앉았다. 반백의 여성도 있었고 모자를 눌러쓴 밑으로 색깔있는 안경을 쓴 남성도 있었다. 등산화가 말짱한 사람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흙투성이인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는 어디 질퍽한 곳을 밟았는지 물흙이 묻어 진창이 된 등산화를 신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지긋이 든 분들이고 등산복 차림들이라서 무슨 모임에 있는 분들이 봄을 맞아 함께 산에 왔나 보다, 고만 생각하고 뒤에 배가 고프던 참이라 뒤에 나온 메밀국수를 비벼먹는 일에 몰두했다. 다 먹고 좀 느긋한 마음으로 오차를 마시다가 나는 그제야 뭐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이 앉은 자리가 너무 조용하질 않은가. 봄날, 그것도 저리 여럿이 산행을 나와 점심을 먹고 있으면 당연히 그 자리가 왁자해야할 것 같은데, 예약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 모두가 조용히 얘기를 하거나 음식을 가만가만 먹고 있을 뿐이었다. 여럿이 모인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에 익숙한 나로서는 좀 낯선 모습이라 주의를 끌었다. 어느 순간 나와 가까운 축에 앉은 사람이 그 옆사람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무슨 개울물소리처럼 귀에 잡혔는데 이건 물김치입니다, 하며 옆사람의 숟가락을 물김치 그릇에 담가주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자세히 그들을 살펴보았다. 국수를 비벼서 주는 사람, 백김치를 집어서 입에 넣어주는 사람, 주전자 채 나온 육수를 따라주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사이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앉아 있었다. 앞이 보이는 사람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짝을 맞추어 봄맞이 산행을 나온 모양이로구나, 깨닫는 순간 왜 그렇게 정신이 반짝 들었는지. 다시 보니 등산화에 유난히 흙이 많이 묻거나 진창이 된 분들은 대개가 앞이 보이는 분들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분들에게 마른길을 가게 하느라 그리 된 것일 터였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누가 시각장애인이고 누가 아닌지를 알 수 없게 그들은 나직나직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오래 만나 서로를 아는 사이들 같았고 또 웬만큼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듯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분이 그런다. 세상에는 좋은 일 하는 분들이 참 많아요. 다 먹은 비빔국수 접시를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식당의 의자가 따사로운 햇볕이 등짝을 간질이던 돌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마루 같았다. 그들이 온화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또 볼일도 잊어버리고 잠시 조용해졌다.신경숙/ 소설가

“돈 너무 많이 줘서 신필림 나왔어”

1961년은 홍성기와 신상옥 감독의 ‘춘향이’ 대결이 화제였어.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최은희와 막 샛별처럼 떠오른 김지미를 두고 누가 더 연기를 잘하느냐, 어떤 옷을 입고 나올 것이냐에 온통 관심이 쏠렸지.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내가 의상을 맡았어. 하지만 이 흥행 대결은 어느 정도 결과가 예상되는 싸움이었어. 당시 최은희의 인기는 김지미를 압도할 정도로 절정에 오른 것이었고, 신상옥의 작품 역시 홍성기 것보다야 입소문이 잘 났어. 예상대로 신상옥의 <성춘향>이 홍성기의 <춘향전>을 훨씬 앞지르며 성공적인 흥행결과를 안았지. 두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의상만큼은 김지미의 것이 훨씬 화려하고 정교했어. 홍 감독이, 어리고 예쁜 김지미의 매력을 한껏 살려달라고 부탁해서 장식이며 바느질에 훨씬 공을 들였거든. 최은희는 자신의 옷을 직접 지어 입었기 때문에 <성춘향>에선 그저 엑스트라만 챙기고 말았지. 다행히 60년대 들어서 갑사니 준중사니 하던 것에서 인조갑사와 포프린 등 합성섬유들이 더 추가됐어. 물론 60, 70년대 촬영 현장이라고 나아진 건 없었지. 동대문시장에서 천을 끊어와 손수 나염을 해야 했는데, 요즘 파스텔톤이라 부르는 색상을 그때 혼자서 만들어 썼던 것 같아. 나염한 갑사와 준중사에 풀을 먹일라치면 나중에 마르는 과정에서 그 냄새가 아주 굉장했어. 인조갑사하고 포프린은 또 어떻고. 나일론 제품들은 방충과 방부를 위해 옷감 전체에 포르말린을 뿌려 놓는데, 바느질을 할 때 그 냄새에 눈을 못 떠. 눈이 시큼거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고운 옷감에 들러싸여 있자니 기분은 천국이지. 예전에는 너무 천들이 없어서 고민이었지만, 어느 정도 골라 쓸 형편이 되자 다시금 의욕이 생겼지. <춘향전> 찍을 때 그래서 열심히 의상을 만들었어. 감독이 특별 주문도 했겠다, 김지미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나름의 옷 짓는 노하우가 모두 동원됐지. 의상이 다 지어지면 일일이 다림질을 해야 하는데, 다리미에 쓸 숯을 피우는 것도 큰 일이었어. 그럴 땐 조명부나 촬영부 사람들이 도와줬어. 그이들이 숯을 피우는 동안 나는 배우들 머리를 빗기고. 숯 다리미와 발로 밟는 재봉틀은 현장의 필수품이었어. 그 두개만 있으면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았지. 그렇게 신이 나서 일을 했는데도 <춘향전>이 실패하는 바람에 아무 돈도 받지 못했어. 다만 한 무더기의 의상만 손에 돌아왔지. 그 순간 퍼뜩 이 의상을 그냥 버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어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역사적 고증도 확실한 옷들이기에 충분히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했거든. 그래서 그 작품부터 의상을 모으기 시작했지. 그게 시작이었어. <성춘향>이 끝나고 신 감독이 신필림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더라구. 그땐 뭐 누구 소속으로 일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 그래서 얼른 그러마고 했지. 그래서 신필림 소속으로 찍은 작품이 같은 해 <연산군>(1961)과 이듬해 <폭군 연산>(1962)이야. 왜 두 작품만 찍고 나왔느냐, 돈을 너무 많이 주는거야. 다른 의상하는 사람들이 2만원을 받으면 나는 6만원을 주는 거야. 난 이게 마음에 부담이 되더라구. 하루는 신 감독과 동향인 제작부 김씨에게 물었어. “날 돈을 이렇게 많이 줘도 돼? 회사는 문제없어?”하니까 그이 하는 말이 “문제없긴요, 그냥 허세죠.” 그 말 듣고 바로 나와버렸어. 돈이 없어도 맘이 우선 편해야잖아. 신필림을 나와 다시 예전처럼 식구들이랑 밑에 애들 몇을 모아 인현동에 집을 얻었어. 1층은 창고로 쓰고 2층에서는 옷을 지으면서 다시 새 작품을 맡았지. 60년대 중반으로 가자 국군이 주인공인 반공영화가 이만희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어. 그러자 이번에는 군복과의 싸움이 시작됐지. 군복의 종류만 해도 일본군(그 가운데서도 패잔병의 군복이 따로 있었고), 인민군, 중공군, 미군, 노서아군(러시아군), 국군이 있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나라 군인들의 옷이 제일 까다로웠어. 다른 나라 군복은 대체로 형태가 잘 바뀌지 않는 반면에 우리나라 군복과 경찰복은 시기마다 달라지니 이거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지. 게다가 그땐 국군보다 타국 군인이 멋지게 입고 나오면 사상을 의심받아 끌려가던 때였어. 일년에 두번 있는 반공교육이나 이북영화 관람도 그런 이유에서였지. 몸에 걸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나 심지어는 밥그릇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우리보다 못한 것으로 비쳐져야 했어. 그런데도 이만희 감독은 확실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63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필두로 (1965)을 만드는 와중에도 그이가 습관처럼 하던 말이 ‘인민군이 한번 멋지게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였으니까. 그러다 드디어 사단이 나고 말았어. 구술 이해윤/ 1925년생·<단종애사> <마의 태자> <춘향전> <사의 찬미> <금홍아 금홍아> <서편제> <친구> 의상 제작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딥 레인지>(Arachnid)

2001년, 감독 잭 숄더 출연 알렉스 레이드, 크리스 포터, 루이스 로렌조 장르 액션스릴러 (아이비젼) <딥 레인지>는 명백한 싸구려 영화다. 특수효과는 허술하고, 배우들은 무명이고,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끌어온 티가 역력하다. ‘거대 거미’가 등장한다는 것말고는 봐야 할 이유가 그다지 없다. 그러나 공포영화의 팬이라면,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리빙 데드3>와 <소사이어티>의 브라이언 유즈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 80년대에 활동했던 감독의 이름을 유난히 많이 기억한다면 ‘잭 숄더’라는 이름도 입 속에서 맴돌 것이다. 카일 맥라클란이 외계인으로 나왔던, 입에서 입으로 외계인이 옮겨다니는 수작 SF영화 <히든>의 감독이 바로 잭 숄더였다. 실패작이긴 했지만 평이 엇갈리는 <나이트메어2>도 만들었고. 잭 숄더는 <레니게이드> 이후 TV로 잠입하여 10여년간 TV영화와 시리즈물을 연출했고, <수퍼노바>을 연출하다가 밀려난 뒤 스페인영화 <딥 레인지>의 감독으로 돌아왔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잭 숄더는 장인 축에 끼지 못한다. <딥 레인지> 역시 느슨하고, 조잡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적어도 <딥 레인지>는 비디오를 끄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번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그냥 ‘시간을 죽이며’ 보게 된다. 잡다한 인물의 성격은 꽤 다채롭고, 사건들도 아기자기하게 구성되어 있다. 산 사람의 눈알이 튀어나오는 등 엽기적인 장면도 가끔 나온다.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체에게 공격당한 사람이 발견된다. 원주민과 생태계 보호를 위해서 탐험대가 조직된다. 의료진과 거미 학자, 그리고 그들을 경호하기 위한 군인들. 그러나 섬의 상공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전기장치가 멈추고, 엔진마저 꺼지는 바람에 불시착을 한다. 정글로 들어선 탐험대의 일원이 진드기에게 물리는데, 이 진드기는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 신체에 알을 낳는다. <딥 레인지>는 일관성과 거리가 멀다. 서두에 등장한 외계인은 이야기 진행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진드기와 거미의 연관성도 나오지 않는다. 외계인은 그저 ‘돌연변이’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어설프게 제시된다. <딥 레인지>는 싸구려답게 모든 것을 베낀다. 정글에서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와 싸우는 광경은 영락없는 <프레데터>, 동굴에서 알을 낳는 거대한 거미를 만나는 장면은 <에이리언2>다. <딥 레인지>는 태연하게 이것저것을 얼기설기 엮어놓으면서 거칠게 영화를 진행시킨다. 그 뻔뻔하고, 태연자약한 오락성이 <딥 레인지>의 장점이다. 전혀 새롭거나 탁월한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킬링타임에 충실한 영화. 그것이 싸구려 영화의 미덕이고,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 것이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새로운 남성상 창출한 삼성카드 광고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 박빙의 승부를 겨루는 신용카드업체의 CF들을 들여다보면 다소 거창해보이는 이 광고 카피가 제법 실감난다. 앞서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광보가 BC카드 CF였으니 '또 카드 애기야?'라며 지겹다는 반응도 나올 수있겠지만 별 수 없다. 이상적인 남성상을 경쟁하듯 배출하고 있는 카드업게에서 두각을 드러낸 정우성 주연의 삼성카드 CF에 대한 얘기를 지체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0.001초의 차이로 메달 색상이 달라지는 쇼트트랙 경기처럼 아주 미세한 우위에 불과할지라도 삼성카드 CF는 소비자의 환상을 기분좋게 부추기고 있는 선두 주자다. 부러움을 살 만한 남성의 향기를 흩뿌리고 있는 에로 배용준 주연의 LG카드 광고. '코리안특급' 박찬호 주연의 국민카드 광고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삼성카드 CF는 멋진 남성상을 주무기로 내세웠다는 측면에서 이들과 한 울타리에 묶인다. 모두가 광고계가 창출해 온 남성상이 어디만큼 진화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누가 가장 넓고 깊게 공감의 파장을 낳고 있느냐란 질문을 던지면 차등을 보인다. 정우성을 새로 모델로 기용하면서 삼성카드 CF는 정우성과 바람직한 삼성카드의 소비자상을 동격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우성에게 이 시대가 선망하는 남성의 모습을 부여하고, 그토록 멋진 남성이 사용하는 카드가 바로 삼성카드임을 강조해 브랜드에 대한 호감을 높인다는 목적이다. 지난해엔 서비스 종류와 같은 장점을 알리는 카드 광고가 많았지만 카드사의 실질적인 특징이 대동소이해진 현재는 브랜드 이미지의 차별화에 더 주력하는 상황인데 이들 광고에서 그 같은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삼성카드 광고는 '남자'편과 '여자'편 등 두 종류로 나뉜다. 전자는 동성친구의 시선에서 바라본 정우성. 후자는 아내(고소영)의 눈으로 평가한 정우성을 그리고 있다. 먼저 '남자' 편. 친구와 더불어 즐겁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정우성을 활기차게 비춘다. 신사복에 배낭을 둘러메고 스니커즈를 신은 그야말로 '퓨전' 옷차림의 정우성은 친구와 헤어진 뒤 상점에 들러 물건을 산다. 정우성의 일상을 따라잡은 화면 위로 흐르는 친구의 목소리. "참 멋진 녀석이죠?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나요?" 다음은 '여자' 편. 정우성은 자전거 바구니에 물건을 싣고 웃음을 띤 채 귀가하고, 그런 그를 아내 고소영은 행복한 미소로 맞는다. 화면 위로 흐르는 고소영의 내레이션. "제 남편이에요. 능력있는 남자죠. 여자를 사랑할 줄도 알고요." 바게트 빵을 한 아름 사들고 온 정우성은 아내에게 특별 선물도 건넨다. 선물 상자를 열자 안에서 빨간 인형이 튀어나와 '사랑해'를 외친다. 남편의 깜찍 선물에 고소영은 파안대소한다. 아무렴 이런 남편이 있다면 어는 여성인들 입을 헤벌쭉 벌리지 않겠는가. 긍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멋진 요소만을 버무려놓았다. 가정을 생각하는 자상한 가장이고, 게다가 아득바득 성공에 집착하는 형도 아닌데 능력도 있단다. 적지 않은 나이일 텐데 청년의 자유정신과 개성도 잃지 않은 듯 보인다. 한마디로 세련된 보보스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정우성의 행복한 표정을 사진틀처럼 블루박스로 처리한 마지막 대목은 앞으로 이 CF가 시리즈물로 이어지면서 일관되게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급승용차인 재규어를 배경으로 웨딩드레스 숍을 구경하며 "아, 장가가고 싶다"고 소박하게 푸념하는 '스포츠재벌' 박찬호나 수영, 사격, 색소폰 연주 등 못 하는 게 없는 배용준의 이미지도 "어휴, 너무 멋져"란 감탄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냉정하게 말하면 '재규어'나 '자전거'의 이미지 모두 일상의 에로 들기에는 자신없는 몽상의 산물일지 모른다. 존재한다고 박박 우기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자전거를 탄 샐러리맨이 좀더 가슴에 와닿는다면 그것은 손에 잡히는 판타지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멋진 년석' 정우성의 이미지를 이루는 자전거, 배낭 같은 소품, 관찰자의 내레이션 등이 바로 비교우위의 신선한 공감을 돋우는 장치로 톡톡히 작용하고 있다. 카드 사용으로 주위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이타적인 면에 주목했다는 점도 차별성이다.정우성의 얼굴에 더불어 사는 삶을 존중하는 조화로운 개인주의의 빛깔을 채색했다는 것은 구구절절 긍정적인 남성상의 스펙트럼을 더욱 윤기나게 만든다. 백일몽이라고? 그래도 가끔은 그런 남성이 도처에 살고 있을 것이란 착각의 늪에 빠지고 싶다.조재원/스포츠서울 기자jone@sportsseoul.com

<버스정류장> 너도 세상과 담 쌓고 살았구나

재섭(김태우)은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시간강사다. 소설을 써보려고 끄적거리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 학원 동료들과 회식자리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피해 다닌다. 좋아했던 대학 동기 혜경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임에 나가보지만 주식투자 따위가 화제인 술자리가 부대끼기만 한다. 재섭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유일한 사람은 그가 ‘혜경’이란 이름을 붙여준 창녀뿐이다. 재섭이 출강하는 학원에 여고 1학년 소희(김민정)가 새로 등록한다. 수다스럽고 당돌한 아이들의 도발을 받아넘기는 데 이골이 난 재섭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숙하고 냉소적인 소희는 왠지 무시하기 어렵다.어느날 재섭은 우연히 지하철 역에서 중년 남자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소희를 목격한다. 재섭의 집까지 따라온 소희는 진실을 하나만 포함시켜 말하는 ‘거짓말 게임’을 제안한다. “우리 아버지는 뇌물 받아먹는 공무원이고, 엄마는 수영 강사와 바람났고, 제 친구 미정이는 성적 때문에 오늘 자살했고, 난 원조교제를 하고 있어요.” 소희는 거짓말 게임을 빌려 열일곱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끔찍한 비밀들을 털어놓는다.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닫아걸었던 재섭과 소희는 조금씩 소통의 가능성을 느껴간다. 원조교제를 하던 소희는 임신 사실을 알고 중절수술을 받는다. 이후 소희는 학원에 나타나지 않는다. 재섭은 새삼 자기 마음속에 자리한 소희의 존재를 강하게 느낀다. 며칠이 지난 뒤에야 소희는 정류장에서 밤늦게 돌아오는 재섭을 기다린다. 재섭은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한다.이미연 감독의 데뷔작 <버스, 정류장>은 조금 색다른 멜로 드라마다. 서른두 살 학원강사와 열일곱 살 여고생의 만남이란 소재 자체가 우선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그럼에도 감독은 이런 ‘불온한’ 발상이 전혀 음습해 보이지 않도록 밝고 말끔하고 따뜻하게 처리했다. 다만 뭐든지 한 박자 이상씩 빠른 듯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화의 호흡이 좀 가쁜 듯해 자연스럽지 못한 건 작은 흠이지만, 두 주인공의 감정의 흐름이 관객을 많이 앞질러 간 건 작다고 하기 어려울 것같다. 가령 거짓말게임을 하며 재섭이 “언제부턴가 네가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어”라고 고백하는 대목이 그런 예이다. 이런 대목들은 영화를 설명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8일 개봉.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상처’깊은 소희 온몸으로 느끼려 휴학까지 했어요

전락2 <버스, 정류장> 관객의 감성에 다가가라

“멜로영화의 흥행요인은 결국 명확한 컨셉과 확실한 스타, 그리고 음악이다. 특히 스타는 영화시장이란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다.” 통신이 이루어준 사랑, 한석규, 전도연이라는 스타, 같은 달콤한 음악. 3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접속> 같은 ‘대박형 신경향’ 멜로영화를 제작했던 명필름은 <버스, 정류장>의 마케팅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일단 눈물짜는 신파멜로도 아니고, 달콤 쌉싸름한 연애담도 아니고, 서른둘 남자와 열입곱 여자아이의 내밀한 심리가 주가 되는 이야기라니. 게다가 인지도와 호감도에 비해 스타성이 떨어지는 김태우와 김민정이라는 두 배우를 캐스팅한 것만으로도, 흥행으로 가는 길이 편치 않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멜로영화는 결국 스타가 보여주는 사랑의 환상이나 아름다움에 의존하려는 관객들이 대부분”임을 고려할 때 이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라는 <접속>의 대사를 웅얼거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어떻게 감독과 관객을 만나게 할 것인가! “결론은 기존의 것과 다른 방식을 택해 스타의 부재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접속>이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PC통신이나, LP음반, 호출기 등의 소재들에 소소한 재미를 실었다면 <버스, 정류장>은 제목 자체가 주는 감성적인 울림을 놓치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은 어찌보면 지나치게 문학적인 공간이라는 단점을 지녔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지나쳤을 법한 공간, 복합적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장점화했다. 결국 ‘버스 정류장’에 얽힌 추억이나 이야기들을 담은 에세이집 출판이라는 아이템을 생산해내는 고마운 공간으로 탈바꿈하기도 했고. “2천만원 정도 제작비가 들었다. 이것은 종합일간지 광고 2번 정도의 돈이다. 하지만 영화로 가는 정서적 접근을 용이하게 함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광고효과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영화와 관련된 책의 출판은 보통 스타들의 사진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북이 대부분이었던 데 비해 컨셉북 <버스, 정류장>은 메인타겟으로 잡은 20대 후반의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가 신경숙을 비롯해 영화감독 김지운, 정지우 영화감독, 만화가 정훈이 등 스물두명의 문화계 인사들의 글을 받아 묶여졌다. 게다가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 있는 이 책은 스토리라인을 쫓아가기보다는 인물을 통해 자꾸만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의 성격과 일맥 상통한다. 영화 외적 방법으로 확대된 마케팅 튜브뮤직의 음반차트 판매순위를 보면 얼마전 신보를 낸 아이돌그룹 SES 다음으로 <루시드 폴 버스, 정류장>이 2위로 랭트되어 있다. 현재 7천장이 넘게 팔린 이 음반은 “있는 장점은 극대화, 정서적으로 접근한다”는 전략의 일부분이었다. 영화의 감성과 잘 닿아있는 루시드 폴의 음악은 영화클립을 재편집하는 형식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따로 제작된 뮤직비디오에 실려 개봉보다 훨씬 일찍 관객들을 찾아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뮤직비디오는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클로즈업이나 리드미컬한 편집으로 승부가 나는 건데 영화는 보통 그보다는 풀샷과 롱테이크가 많다. 그래서 영화의 기본 내용은 전달하되 영화적인 리얼리티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화면을 새로 제작해보는 것도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상업적으로 관객을 만나는 예고편 역시 뮤직비디오 영상을 이용함으로써 액션영화가 아니고서야 다소 밋밋할 수 있는 영화 예고편의 단점을 보완했다. 이 외에도 공식 홈페이지가 나오기 전인 작년 12월부터 포탈 사이트 팟찌나 엠파스와 연계해 가동한 티저 홈페이지에는 ‘소희의 이야기’ ‘재섭의 이야기’ 등, 온라인 스토리가 순서대로 진행되면서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었고, 지난 2월 컨셉북 출판기념회, 3월1일 루시드 폴의 콘서트를 겸한 시사회 등을 잇따라 가졌다. 물론 <버스, 정류장>이 선택한 정서적 마케팅이 옳았는지는 3월8일이 되어야 판명이 날 것이다. 하지만 마케팅의 개념을 영화 내적인 데서만 찾지 않고 외적으로 확장시킨 것을 비롯, <버스, 정류장>이 보여준 일련의 적극적인 마케팅 방식들은 “이 영화를 보아야 할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스쳐가는 낭패가 없도록” 하는 선에서 분명 의미있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버스, 정류장> 마케팅 책임 명필름 박재현 팀장 인터뷰 “출판편집자도 되었다가, 공연기획사 직원도 되었다가” 개봉을 앞두고 잠잘 시간도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충혈된 눈이었지만 “<버스, 정류장> 관련 일이라면 쓰러져도 한다”는 각오로 이른 인터뷰에 응한 박재현 팀장은 기본적인 마케팅, 홍보과정 외에도 공연기획사, 출판사 업무까지 겸해야 했던 이 예사롭지 않았던 영화에 대해, “모험한 만큼 얻은 것도 많은 영화”라고 말한다. 초반 컨셉잡기부터 만만치 않았겠다. 일단 멜로영화의 범주에 포지셔닝을 했지만 신파멜로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치밀한 컨셉과 다양한 접근방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기존의 멜로영화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해보면 결국 쉽고 명확하게 잡히는 컨셉의 영화가 성공하더라. 어린 여자와 나이든 남자가 서로의 상처를 알아본다, 는 이야기 속에서 ‘나이차’와 ‘상처’라는 말에 주목했다. 2001년부터 이어지는 흐름을 짚어볼 때 애매함 없이 확실하게 풀어주는 것과 다소 자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봤고, 그렇게 나오게 된 것이 ‘17+32’라는 지금의 카피다. 1차적인 영화홍보 외에도 컨셉북 발간 등 부가적인 일들이 많았다.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이해하면 되는데 일단 <버스, 정류장>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워낙 보편적인 공간이다보니 그 속에 사연도 이야기도 많을 거란 판단 아래 정서적인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색다른 뭔가’에 필이 꽂히는 바람에 나온 ‘포스터는 홍콩가서 찍자’는 말이나 커플 티셔츠 제작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뮤직비디오 별도 제작, 뮤지션 음반을 겸한 O.S.T 발매, 에세이집, 멜로적인 느낌의 캔커피 광고 등은 진행되었다. 그러다보니 영화사 직원이 출판사 직원도 되었다가 공연기획사 직원도 되는 카멜레온적인 생활을 해야 했다. 루시드 폴이라는 뮤지션과의 작업이 이채롭다. 음악쪽은 심보경 이사가 주로 진행을 했는데 조윤석, 즉 루시드 폴과는 <씨네21> 황혜림 기자가 다리를 놓아준 인연으로 이루어졌다. 초반에는 <동감>의 임재범, <엽기적인 그녀>의 신승훈 등의 케이스처럼 익숙하고 유명한 가수로 갈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드 폴의 음악과 영화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결과적으로 너무 만족한다. 그전에 <…JSA> 홍보를 책임진 걸로 안다. 이번 영화마케팅과 비교한다면. 물론 지금껏 ‘따논 당상’이었던 영화는 없었다. <…JSA>도 뚜껑열기 전까진 별다른 큰 기대를 받지 못했다. 군대이야기라 칙칙하겠다는 선입견과 몰이해를 뚫고 나가야 했으니까. 하지만 거기엔 빅스타가 있었다. 송강호, 이영애, 이병헌 같은 경우엔 별다른 요구 없이도 언론홍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데 비해 이번엔 언론노출에 대한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내가 송강호면 이런 부탁 안 한다, 는 말을 해야 했던 순간도 있었으니까. (웃음) 하지만 ‘잦은 노출’보다는 ‘노출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그저 스타의 얼굴로 밀고 나가자는 생각보다는 영화를 제대로 많이 알리자는 생각이 더욱 컸다. ▶ <나쁜 남자> <버스, 정류장> <질투는 나의 힘> 마케팅 사례 연구 ▶ 전략1 <나쁜 남자> 감독을 브랜드화하라 ▶ 전락2 <버스, 정류장> 관객의 감성에 다가가라 ▶ 전략3 <질투는 나의 힘> 관객의 힘을 빌려라

독립영화계의 돌연변이 김지현 감독의 이상한 장편 만들기

김지현 1968년 서울생 동국대 불교학과, 프랑스 ESEC 졸업 1995년 Digital 8mm 16분 2000년 <웃음> DV 6mm 9분 2000년 <연애에 관하여> DV 6mm 31분 2001년 <바다가 육지라면> DV 6mm 41분 2002년 <뽀삐> 촬영중 31분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과연, 어떤 내용일까. “자, 지금부터 제가 라면 하나를 끓여 보이겠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라면은 안성탕면인데요. 가격 대비 제일 양이 많은 라면이라 이걸로 택했습니다…” 그렇다. 라면에 관한 영화다. 한국사람이라면 그 요리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라면을 소재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저마다의 요리법과 거기 곁들여진 사연을 담은 친숙하고도 참신한 영화가 바로 지난해 인디포럼 개막작이었던 <바다가 육지라면>이다.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차례로 조리대 앞에 서서 자신만의 라면요리법을 소개하는 옴니버스 요리강좌 형식의 이 영화는 가장 친숙한 것들을 통해 새로운 것에 도달했고, 라면이라는 일상적 소재가 ‘기본 스프’ 외에 그다지 큰 양념 없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입증해 독립영화계 내에서도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라면 다음은 강아지 이 괴상한 단편을 만들었던 독립영화감독 김지현이 요즘 라면에 이어 애완견을 찍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장편이다. 물론 누가 나오느냐 어느 제작사에서 만드느냐를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그냥 라면 요리법을 찍듯 주변 사람들을 불러모아 좀 길게 찍고 있을 뿐이다. 김지현은 그런 사람이다. 친숙한 소재를 찾아 친숙한 사람들과 마치 집에서 요리하듯 영화를 찍는다. 그에게 영화 만들기란 생활의 일부다. 뭐 장편이라도 아마추어의 습작이겠군, 하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이라면 <바다가 육지라면>을 꼭 보길 바란다.(요즘 아트선재 등에서 독립영화 상영회를 자주 한다). 라면 끓이기라는 단순한 행위가 반복되는데 거기엔 기묘한 리듬감과 썰렁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유머감각, 섬세한 인류학자적 관찰력까지 느껴진다. 김지현 감독의 첫장편은 뽀삐라는 이름의 요크셔테리어 강아지를 키우는 남자 김수현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변 사람들의 개에 관한 이야기가 릴레이 토크다. 제목도 극중 애완견의 이름을 딴 <뽀삐>. 강아지의 죽음이라는 드라마적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인트로인 셈이고 영화의 대부분은 주인공 수현과 그 주변인물들, 그리고 개에 관한 나름대로의 이야기거리가 있는 다양한 다른 이들의 ‘이야기’ 자체로 이루어져 있다. 버스를 타고 이사간 집을 찾아왔다는 개, 피 속에 흐르는 바람 따라 베란다에서 가끔씩 찬바람을 음미한다는 시베리안 허스키, 사람들을 자신이 지배한다고 믿는 개 등 개에 관한 각종 경험담은 물론이고 동양 고전에 등장하는 개에 관한 기록까지, <뽀삐>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이야기’ 자체로 성립되는 영화다. 한국판 디지털 살롱 열어 김지현 감독은 단편 작업에서부터 이 같은 인터뷰 위주의 영화를 시도해왔다. <바다가 육지라면>이 한사람씩 ‘발표’를 하는 식이었다면, <연애에 관하여>의 말하기 방식은 둘러 앉아 ‘이야기 주고받기’였다. <연애에 관하여>에서 세 명의 여자는 어느 정원의 테이블에 모여 앉아 연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의 남자는 이들이 모두 아는 사람. 게다가 그로부터 실연을 당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 여자가 바로 그 남자의 새 애인이라는 미묘한 상황이 삽입되는 드라마 장면으로 알려진다. 이 같은 방식은 <뽀삐>에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사람이 개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 그 개의 실제 모습이 이야기의 내용대로 비춰지는 것. 스토리와 드라마보다 인물들의 대사가 주를 이루는 김지현의 작품들은 얼핏 에릭 로메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모여 앉아 자근자근 이야기 나누기, 웃을 듯 웃을 듯하며 안 웃고 장난스레 말 주고받기, 고모할머니의 일화에서 동양철학까지 시대와 권위를 넘나들며 참고자료 인용하기, 무엇인가를 마시거나 요리하기, 고백하기 혹은 감추기, 공감하듯 흉보기. 금테 두른 커피잔과 귀족 부인들의 부풀려진 드레스만 없을 뿐, 이런 것을 통해 김지현 감독은 종종 자신의 단편영화 안에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어울리는 한국판 디지털 살롱을 열고 있다. 그것은 <웃음>(2000)에서처럼 ‘웃음의 다양한 의미’에 관한 에피소드적 담론이기도 했고, <연애에 관하여>(2000)에서처럼 아는 사람 사이에 모르게 벌어지곤 하는 연애에 대한 은밀한 보고이기도 했으며, <바다가 육지라면>(2001)에서는 이 시대의 생필품이라고 할 수 있는 라면을 급거 화제로 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편 <뽀삐>는 이를 장편으로 확대하는 시도다. Free & Easy, 나의 스타일 김지현 감독이 사석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곧잘 채택하는 살롱식 주제들, 그것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의 의미망에 걸리면 자못 진지한 생각거리가 된다. ‘왜 우리는 잠에 관해서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나. 늦잠 가지고는 얘기를 잘하면서’ 등 생경한 주제도 그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으며(구성연과 최근 심각하게 나눴다는 이야기), 라면물을 얼만큼 넣느냐도 그녀의 영화 속에서는 자못 의미심장해진다(<바다가 육지라면>). 하물며 개에 관한 기억(<뽀삐>) 정도라면…. 당연히 스타는 아니지만 <뽀삐>의 출연진은 꽤 흥미롭다. 주인공 김수현 역에 어어부 프로젝트의 백현진씨, 그의 친구 중 한명으로 김지현 감독의 영화에 최다출연한 사진작가 구성연씨가 그들이다. 구성연씨와 백현진씨는 이미 김지현 감독의 전작에서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 백현진씨는 <바다가 육지라면>의 요리실연자 중 한명으로, 대파 조각이나 작은 배춧잎 등 재료를 주머니에서 꺼내 라면을 만들며 형이 라면을 줄창 먹어 영양실조가 됐던 일 등 가족사를 이야기했던 출연자다. 한편 구성연씨는 <뽀삐>가 네번째로 출연하는 김지현 감독 영화일 만큼 감독의 단짝배우인데, <웃음>에서는 잠깐 뒷모습이 나오는 엑스트라였고, <연애에 관하여>에서는 모여 앉아 이야기하는 세 여자 중 한명으로 주로 묻고 듣는 인터뷰어의 입장이었다. <바다가 육지라면>에서는 아마도 등장한 인물들 중 가장 인상적인 라면요리를 ‘선보이지 않고 말로만 들려준’ 사람. “인연의 사슬을 끊는 구도의 자세로 구부러진 라면발들을 모두 쪼개 방안에 늘어놓은 후 거둬 물 속에 끓인다”는, 절대 사실이 아닌 계룡산식 라면조리담을 설파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구성연씨는 김지현 감독과 동국대 선후배 사이이며, 일러스트레이터(<씨네21>에도 그린다) 겸 보컬리스트에다 연기까지 겸하고 있는 백현진씨는 <바다가 육지라면> 촬영직전에 우연찮게 김지현 감독을 만나 캐스팅됐다. <꽃섬>으로 영화에 재미를 붙였고 구경차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촬영장을 찾았다 뒷모습을 찍히기도 한 백현진씨는 흥미로운 감독의 새 영화 출연제안에 “화폐벌이도 할 겸” 단박에 OK했다. <뽀삐>의 촬영에서 이들이 대본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평소의 옷차림으로 평소의 말투로 평소의 표정으로 연기에 임한다. 그런데 그게 바로 김지현 감독이 원하는 연기고 <뽀삐>가 필요로 하는 연기다. 백현진씨가 말하듯, 언젠가 김지현 감독이 입은 옷에 쓰여 있었다는 글귀대로 ‘Free & Easy’가 김지현 감독의 연출 스타일. 어쩌면 그것은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하는 영화로서는 당연한 연출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뽀삐>는 이야기꾼 김지현 감독이 그간 단편에서 흘낏흘낏 보여왔던 끼를 긴 버전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며, 구성연과 백현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연인 자신과 캐릭터를 뒤집어가는 다큐멘터리적인 연기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초대손님이다. 아마도 <꽃섬>에서 조금은 튀었던 백현진의 연기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채로 완성된 영화 <뽀삐>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어우러져 있을 것이다. 구성연의 입담이야 말할 것 없고. 화장지와 개 사료가 제작비 보충 <뽀삐>는 CJ CGV 기금에서 2500만원, 영진위 기금에서 750만원을 받아 만드는 예산 3250만원짜리 저예산 장편영화에 소니 PD150 카메라로 촬영되는 디지털영화다. 출연배우들은 선금없이 수익이 나면 출연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일하고 있으며, 카페 등 촬영지 사용료로는 ‘뽀삐’ 화장지 회사인 유한킴벌리에서 지원해준 휴지 ‘뽀삐’와 역시 협찬받은 개 사료 ‘퓨리나’가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청담동 한 카페의 주인으로부터 구한 강아지 뽀삐의 출연료와 조련비에 쓰이고 있다니, ‘뽀삐프로젝트팀’의 살림이 얼마나 알뜰한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제작비 때문은 아니지만, 각자의 ‘전공’을 살려 구성연씨가 영화 스틸을, 백현진씨가 포스터를 맡고 있기도 하다. 현재 이 작품의 촬영은 총 25회 중 17회가 진행된 상태. 8월 개봉이 목표다. 친구들과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잡아 지적인 유머를 나누기. 이야기 함께하기 좋은 이들을 불러모아 친구 되기. 68년생 감독 김지현의 소박하지만 화려한 장편 데뷔는 이렇게 재미나게 진행되고 있다. 뜻맞는 사람들과 즐겁게 단편작업을 해오던 김지현 감독과 그녀의 친구들은, 지금 그들로서는 유례없이 큰 판돈을 가지고 좀더 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사 다른 누구를 의식하는 것일랑은 하나 없다. 괜히 거창한 스토리를 갖고 나온 것도 아니다.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자세히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하려할 뿐. 처음처럼 원래대로 그들의 영화만들기는 태연자약하다. 오히려 더 느긋할지도 모른다. 김지현의 영화 자체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글 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화계의 돌연변이 김지현 감독의 이상한 장편 만들기 ▶ 김지현 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