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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英 영화인,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최고 영국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비롯 최악의 영화는 대부분 최근작이 차지 영국의 유명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고(故)데이비드 린 감독의 오스카 수상작 <아라비아의 로렌스>(사진)가 최고의 영국영화로 꼽혔다고 데일리 텔레그래프 인터넷판이 15일 보도했다. 피터 오툴이 신비로운 T.E.로렌스 역할을 맡았던 1962년작 이 영화는 데이비드 린의 다른 고전 영화 4편과 함께 10위권에 들었다. 린 감독이 연출한 셀리아 존슨과 트레버 하워드 주연의 음울한 애정영화 <밀회>는 2위를 차지했으며 <위대한 유산은> 3위, <콰이강의 다리>는 7위를 차지했다. 린 감독의 부인은 14일 밤 설문결과를 환영하며 작고한 남편 린 감독을 가리켜 '자신의 꿈을 스크린에 펼쳐 놓는 방법을 알았던 몽상가'라고 표현했다. 린 부인은 "데이비드는 엄청나게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거의 실패자라고 여겼다. 그의 영화들은 결함이 있는 주인공들과 복합적인 관계들을 다루고 있으며 주인공들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상황에 커다란 두려움을 가지고 대처한다"며 "이 영화들이 삶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오래 남았다"고 말했다. 10위권에 든 나머지 영화들은 영국영화계가 극단적 사실주의와 사회풍자, 고전문학의 각색에 굳게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캐럴 리드 감독의 1949년 작 <제3의 사나이>가 공동 3위에 올랐으며 <레이디킬러> <친절한 마음과 화관> <케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삶과 죽음의 문제> <네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 10위권 안에 들었다. 선데이 텔레그래프지가 영국 영화계를 기리기 위해 실시한 이번 조사에는 230명의 배우와 영화 기술진, 시나리오 작가, 감독들이 참여해 여러 부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국 영화 10편, 배우 5명씩을 뽑았다. 이번 조사 결과는 영국영화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관점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10위권에 든 영화 중 가장 최근 작품인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만 해도 이미 10년 전의 영화이며 20위권에 든 영화 중 상대적으로 최근 작품인 <트레인스포팅>도 1996년 작품이다. 반대로 최악의 영국영화 10선은 작년에 개봉한 <러브 액츄얼리>등 모두 최근 영화들이 차지했다. 각각의 부문을 살펴보면, 최고의 007영화로는 숀 코너리가 최초로 본드로 출연한 영화가 차지했으며 최고의 로맨스 영화에는 <밀회>가 선정됐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됐으나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인으로는 히치콕 감독과 찰리 채플린이 꼽혔다. 007영화에서 M역으로 알려져 있는 주디 덴치는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뽑혔으며 비비안 리는 세계 영화계 영향을 가장 크게 준 영국 여배우로 뽑혔다. 알렉 기네스는 로런스 올리비에와 캐리 그랜트를 근소한 차로 앞서 세계 영화계에 가장 영향을 크게 준 영국 남우로 뽑혔다.(서울=연합뉴스)

아담하고 흉포한 성지침서, <팻 걸>

프랑스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이야의 스크린은, 이를테면, 포르노적 복음서다. 단단하게 발기한 남성의 성기를 거침없이 들이대고, 여성의 몸을 유린하고서야 ‘복음’을 외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구원, 아니 해방될 수 있다고. 마치 물에 기름을 들이붓고 불을 질러서 물의 순수성을 증명하려는 듯 그의 영화는 양립불가능의 재료로 뭉쳐진 세계처럼 보인다. 우리를 처음 도발했던 <로망스>(1999)와 제한상영관 공식 1호 상영작이 된 <지옥의 해부>(2004)만 놓고보면 그렇다. 게다가 <로망스>는 대단히 교훈적으로, <지옥의 해부>는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기에 그의 복음은 가짜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렇다면 그의 필모그래피 중간쯤에 있는 <팻 걸>이야말로 그와 그의 복음을 이해하기에 적당하다. 바캉스 떠난 10대 소녀의 첫 경험 체험기를 통해 그의 정신적, 육체적 기원이 온전히 드러나는데, 이건 <로망스>에서 뿌옇게 처리돼 시야에서 사라졌던 성기와 체모의 진면목이 <팻 걸>에 와서야 제 모습을 보이게 된 것과 비슷하다. 또 세 모녀의 긴 귀갓길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상한 긴장감은 대단히 영화적이어서 웬만한 스릴러를 무색하게 만드는데, 이건 영상에 대한 부족한 재능을 지적 상투성으로 감추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식시킨다. 여자: 보봐르를 읽어보세요. 훌륭한 글들이죠. 전 바르도를 좋아해요. 하지만 그 여자도 섹스문제죠. 사회자: 왜 이런 문제를 연구하시나요? 여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그건 인류의 원초적인 문제이고 그 단계에선 누구도 완벽할 수 없어요. 세상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훨씬 복잡하죠. <팻 걸>은 난데없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인터뷰를 길게 보여준다. 섹스문제야말로 모든 길로 통할 수 있는 ‘마스터 키’라는 주장에 10대 소녀였던 카트린 브레이야는 환희를 느낀 적이 있다. 소녀 시절의 카트린 브레이야는 배우이자 가수였던 로라 베티의 선동적인 노래에 ‘감복’했었고, 그의 노래를 ‘팻 걸’ 아나이스에게 부르게 하고 싶었으나 원하는 곡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이 인터뷰 장면을 발견하고 영화에 삽입했다. 그리고 자신이 10대 시절 써두었던 노래를 아나이스에게 부르게 한다. “밤이나 낮이나 너무 심심해. 만약 내가 꿈꿀 상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살았든 죽었든 남자든 시체든 짐승이든 상관없는데….” 살집이 잔뜩 오른 아나이스는 10대 소녀 카트린 브레이야의 귀환이다. 시체든 짐승이든 상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아나이스의 욕망은 멋진 로맨스의 환상에 젖어 있는 언니 엘레나의 그것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올바르다, 는 것이 <팻 걸>의 명확한 결론이다. 카트린 브레이야는 10대부터 이미 확신범이었다. 아나이스는 얼굴도, 몸매도 예쁘기 그지없는 언니 엘레나에게 거듭 자신의 확신을 들려준다. “첫 경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대충 해야 한다”는 걸, 그래야 “그 사랑이 거짓인 걸 깨닫고 상처받는 일이 없다”고, “여자는 비누랑 달라서 닳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경험으로 성숙해지고 남자도 더 큰 기쁨을 얻게 된다”고. 엘레나는 아나이스의 이 복음을 외면한 탓에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잘생긴 대학생의 꾐에 빠져 낭패를 본다. 그뿐이랴. 복음을 떠받들지 않으면 그 이상의 천벌을 받는다는 걸, 카트린 브레이야는 극히 충격적인 방식으로 설파한다. 그뿐이랴. 파리로 돌아가면 처녀성을 잃은 너의 몸을 아빠가 검사할 거라고 엘레나를 위협하던 어머니도 함께 ‘지옥’으로 보내버린다. <팻 걸>에 이르러 궁금증이 모두 풀리는 건 아니다. <로망스>와 <지옥의 해부>에도 반복되는 질문. 왜 그는 일회용 배설을 위한 남자의 사탕발림을 혐오하면서도 발기된 남자의 성기를 어김없이 노출시켜야만할까. 또 여자에게 해방된 쾌락을 선사하는 남자는 ‘평균형’이 아니라 사도마조히스트로 현신할까. <로망스>에서 여성의 욕망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다가서는 중년의 교장 로베르토는 사디스트였고, <지옥의 해부>에선 여성의 성기에 막대기를 꽂는 탐험을 감행하던 게이였으며, <팻 걸>에선 살인강간범이다. 혹시 그는 남성을 동급 인간으로 수용하기보다 그들의 성기와 거친 손만을 필요한 도구로서 인정하겠다는 건 아닐까? 엘레나에게 몹쓸 형벌을 내리기는 하지만 엘레나와 아나이스의 밀고 당기는 자매애만큼은 부정하기 않기에 더욱 그런 답안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카트린 브레이야는 지적 상투성에 기댄 선동가가 아니라 의기충천한 전복자임에 틀림없다. :: <팻 걸>의 두 배우 자연스런 연기의 아나이스, 매혹적인 눈빛의 록산느 카트린 브레이야는 <팻걸>을 실제에서 가져왔다.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건 하나를 머리 속에 보관해두었는데 그것이 수영장에서 우연히 본 장면과 스파크를 일으켰다. “어느 날 호텔 수영장에서 보게 된 모습이 출발이었다. 살찐 사춘기 소녀가 수영장을 왔다갔다하며 마치 상상의 소년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듯 혼잣말을 하고 있는 장면. 그리고 소녀의 부모와 언니가 수영장 한켠에 있었다.” 아나이스는 그 소녀로부터 탄생했고, 극중 이름과 같은 아나이스 르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 수영장 장면을 그대로 재현했다. <팻 걸>은 아나이스 르부의 데뷔작이다. “캐스팅 중이던 카트린 브레이야를 만나게 됐죠. 마침내 세명이 남았고, 카트린은 우리에게 각본을 전부 읽게 했어요. 거기서 내 자신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 캐릭터가 실제의 나는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아나이스 르부가 아닌 아나이스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자연스런 연기를 보여준다. 엘레나 역의 록산느 메스키다는 매혹적인 눈을 가졌다. <팻 걸>에서 엘레나의 눈빛은 ‘허당’이지만 실제의 그는 그렇지 않은 듯. “난 이 시나리오를 학교에서 읽었요. 이야기가 나를 매우 혼란스럽게 했지요. 그렇게 아주 기묘한 상태로 학교 주위를 걷다가 이야기 안에서 작동하는 흥미로운 뭔가를 발견했어요. 난 <로망스>도 보았는데 상스럽다기보다 대단히 순수한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어요. <팻 걸>은 꽤 노골적인 순간이 있긴 하지만 <로망스>보다는 훨씬 부드럽죠.” 록산느 메스키다는 <팻 걸>로 시카고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카트린 브레이야의 또 다른 작품 <섹스 이즈 코미디>에서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거대한 가짜 페니스 앞에서 난감해하는 영화 속 배우 캐릭터를 맡았다

전형적인 눈요깃감 블록버스터, <아이,로봇>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이 아시모프의 이름값을 못하는 까닭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작 아시모프의 명성에 대해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아시모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F 작가이다. 하지만 그게 SF 작가로서 그의 가치를 정당화시켜주는가?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SF 황금기의 다른 ‘거장들’과 비교해도 아시모프는 상당히 떨어진다. 그는 아서 C. 클라크처럼 압도적인 비전으로 독자들을 흥분시킬 능력도 없고, 로버트 A. 하인라인처럼 근사한 이야기꾼도 아니다. 평생 동안 쓴 몇백권이나 되는 책들 중 SF 소설은 몇 작품 되지 않고, 그중 괜찮은 작품들도 똑똑한 십대 소년이 골방에서 쓴 작문 숙제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책들은 명쾌하고 재미있으며 아이디어가 풍부하지만 문학적 깊이나 입체적인 매력은 없다. 영화로 만들기에는 까다로운 아시모프의 소설 그러나 SF 팬덤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전히 아시모프에 대해 좋은 기억을 품고 있다. 나에게 그는 40년대 할리우드영화에 나올 법한 작은 동네의 괴짜 약사 같은 사람이다. 독특하지만 사람 좋고 은근히 아는 것도 많은 동네 토박이 할아버지를 상상해보라. SF 독자들에게 아시모프는 그런 약사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일상의 일부이다. 심지어 그의 작품들이 정말 좋을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들이 좋건 싫건 아시모프는 여전히 우리의 중요한 일부이고 SF 장르에서 아시모프의 존재를 무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괜찮은 작가로서, 좋은 편집자로서, 일급의 SF 팬으로서 활동한 결과물들은 장르의 일부로 남았다. 그의 작품들이 은근히 다른 장르와 전환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런 독점적인 느낌이 더욱 강한 것일 수도 있다. 클라크나 하인라인의 소설들은 훌륭한 SF영화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같은 걸작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시모프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아직도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영화화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원작 그대로 살리면 영화가 엄청 재미없어지기 때문이다. 은하 제국이 멸망하는 거창한 역사적 격동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골방 안에서 끝도 없이 떠들어대는 내용이니 이를 어찌하란 말인지? 그러나 할리우드는 명성을 그대로 낭비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처럼 디지털 특수 효과가 발달하고 SF가 인기있는 장르가 된 시대에 SF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팔아먹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적인 일이다. 최근 들어 아시모프의 이름들이 심심치 않게 할리우드영화의 크레딧이나 제작발표회에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알렉스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은 원작을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무례한 짓 같지만 따지고보면 이치에 맞는다. 어차피 아시모프의 소설을 순진무구하게 각색해서 인기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의 <아이, 로봇> 단편집에서 가장 핵심인 건 개별 이야기들이 아니라 로봇 공학 3원칙이라는 개념이고, 그렇다면 아시모프가 만든 세계의 일반 규칙들만 빌려와 새로 이야기를 쓰는 건 꽤 그럴싸한 생각이다. 이런 시도는 프로야스가 처음도 아니다. 이미 6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의 고전 <아우터 리미츠>에서는 <아이, 로봇>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방영한 적 있었다. 주인공 로봇 이름이 아담 링크이고 살인죄로 몰린 로봇의 이야기였으니 이언도 바인더의 소설 영향이 더 컸겠지만 그래도 로봇 소설들의 연속성을 고려해보면 이치에 맞는 제목이었다. 게다가 프로야스와 야키바 골드먼은 아시모프의 원작들을 꽤 읽은 게 분명하다. 영화 곳곳에 아시모프의 원작에서 빌려온 사건들과 개념들이 발견된다. 일단 알프레드 래닝과 수잔 캘빈은 원작 <아이, 로봇>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며 성격도 비슷하다. 로봇에 선입견을 가진 형사가 로봇과 관련된 살인사건에 연결되면서 로봇에 대한 선입견을 접는다는 설정은 아시모프의 장편 <강철 도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에서 사건의 기본 동기를 제공해주는 특정 개념은 아시모프의 후기 로봇 시리즈에 나오는 ‘로봇 공학 제0법칙’(“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류를 방관해서도 안 된다.”)을 먼저 가져와 자기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정도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사전 준비는 한 셈이다. 원작의 재료는 가져왔으나 매력은 살리지 못하다 하지만 예의있게 굴었다고 해서 그들이 꼭 좋은 각색자/각본가라는 법은 없다. 각색에서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예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설정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아이, 로봇>는 여기서 한참 모자란다. 일단 영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점은 용서하고 넘어가자.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특수효과에 들인 돈을 멀티플렉스 관객의 주머니에서 뽑아내야 할 테니까. 윌 스미스가 연기한 터프한 로봇 혐오자 형사 스프너는 재수없고 매력도 없으며 스타의 기존 이미지를 잘 활용한 것도 아니지만 그 역시 내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아니다. 아우디 간접 선전임이 너무나도 노골적인 추적신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간섭할 까닭이 없다. <아이, 로봇>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가 원작의 기본 재료는 상당히 많이 가져왔지만 그 기본 재료들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놓쳤다는 것이다. 아시모프의 소설들은 대부분 논리 게임이다. 그의 세계에서 로봇 공학 3원칙이 그처럼 신성시되었던 것도 그렇지 않으면 게임의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로봇 공학 3원칙은 단순하지만 흥미로운 딜레마들을 만들어냈다. 로봇들에게 로봇 공학 3원칙은 행동의 동기를 제공했다. 대닐 올리버나 지스카드와 같은 로봇들이 적극적으로 인류의 안녕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제1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봇 공학 3원칙은 그런 자유의지에 입각한 그들의 행동을 제한하기도 했다. 언뜻 보면 정연한 규율로 통제하는 것 같은 이 법칙이 복잡한 실제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어떤 딜레마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어떻게 해소되는가는 아시모프의 소설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여기서 논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시모프의 소설들에서 갈등은 지극히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에는 그런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 프로야스는 아시모프의 발명품들을 그대로 가져와 쓰고 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겠다는 인공 지능 비키의 논리는 후반 <로봇> 시리즈에서 개별 인간들보다 인류를 우선하는 제0원칙을 제시한 지스카드의 논리와 거의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항적인 로봇 서니 역시 앤드루 마틴과 닮은 구석이 있고. 문제는 그 해결 방법이다. 프로야스의 영화에서 비키는 제0원칙을 만들어내자마자 잽싸게 그걸 상위 원칙으로 만들어버리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을 위한 안전 규칙인 제3원칙이 그처럼 쉽게 망가지는 게 말이 되는가? 제0원칙을 만든 지스카드는 인류를 구하기 위한 거창한 선택을 했으나 인간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하위 원칙인 1원칙 때문에 죽었다. 제0원칙은 로봇 공학 3원칙의 정연한 수학적 아름다움을 망쳐버렸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자신의 행동을 규정하는 법칙에서 논리적으로 더 상위인 원칙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다 결국은 낡은 원칙의 희생자가 되는 지스카드의 이야기는 드라마, 그것도 썩 그럴싸한 드라마였다. 왜 이 엄청난 갈등의 기회를 잡았으면서도 그 기회를 그냥 포기해버리는가? 비키가 ‘악당’이어서? 3원칙을 어길 수 있는 서니의 존재에 대한 해결책은 어떤가? 그건 서니가 로봇 공학 제3원칙을 위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하품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건 바둑을 두는 척하다가 갑자기 상대편의 바둑알들을 알까기로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 거창한 미스터리를 품은 극적인 드라마처럼 보여서 결말까지 기다렸더니 처음부터 수수께끼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갈등도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3원칙은 왜 가져왔는가? 로봇에 대한 영화의 불가지론적인 접근법에 대해서는 정말 할말이 없다. 물론 여러분은 자연인으로서 영혼이나 신과 같은 초월적인 개념을 믿을 수 있고 나는 그걸 비난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먼저 생각한 사람이 프로야스인지 골드먼인지는 몰라도 ‘기계 속의 유령’ 개념을 로봇의 자연 진화를 설명하는 데 가져온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서니의 독특함을 설명하기 위해 ‘설명불가’를 끌어들이고 무의미한 인간성의 모방을 영혼과 독특함의 근거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야겠다. 왜 정면대결할 수 있는 기회를 피하고 비겁하게 불가지론 뒤에 숨는 것인지?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더 가치있거나 초월적이라는 법은 없다. 적어도 아시모프는 그의 독특한 로봇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비주의나 불가지론을 들고나온 적이 없었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그들의 양전자 두뇌와 로봇 공학 3원칙을 가지고 그 과정을 똑똑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건 그의 로봇 소설들이 가진 큰 장점 중 하나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이작 아시모프를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의 로봇 공학 3원칙의 의미를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3원칙을 어떻게 평가하건, 그들은 이미 중요한 장르의 일부이며 그들은 자연인 아시모프가 죽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살아남았고 발전했다. 그 발전의 과정은 인공지능과 로봇을 다룬 수많은 SF에 반영되어 있다. 프로야스 역시 그 발전을 반영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식 속으로 숨어버렸다. 물론 전형적인 눈요깃감 블록버스터도 있기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 꼭 아시모프의 이름을 끌어올 까닭은 없는 것이다.

김부선은 죄가 없다

영화배우 김부선이 대마초를 피웠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3년 향정신성 의약품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된 이후 5번째의 감방행이었다. 으레 그렇듯이 처음 두번은 벌금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 동일한 혐의로 다시 구속된 이 불굴의 대마적 여배우는 실형을 선고받고 8개월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원모어 타임. 1998년 다시 구속.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400만원의 벌금형으로 감방살이를 모면했다. 그렇다면 2004년 김부선의 운명은? 수사관의 난입에 5층에서 몸을 날려 도주한 그녀는 다음날 자수했고 다행스럽게도 며칠 전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일단 검찰의 후의에 감사한다. 이제 남은 것은 재판이다. 김부선의 혐의는 지난 2002년부터 최근까지(아마도 2004년 6월 정도까지) 7회에 걸쳐 대마초를 흡연한 것이다. 2년 동안 7번. 후하게 쳐도 석달에 한번 꼴이다. 개그맨 신동엽 역시 1년 남짓 동안 7번에 걸쳐 대마초를 피웠다고 해서 구속된 바 있다. 1년 동안 7번? 영화배우 박중훈은 한달에 4번으로 1994년에, 가수 강산에는 ‘상습’적으로 피웠다고 해서 2000년 구속되었다(음, 이 정도는 돼야). 1975년 대마초 파동 이래 대한민국 국민들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대마초 파동을 타고 있다.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도 이만큼 타면 싫증을 내게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이제 면역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식상했다. 대검찰청 마약수사부 감독들에게 충심으로 말해야 한다. 백날 배우를 바꾸어보라. 도통 시나리오를 바꾸지 않으니 무슨 재간으로 손님을 끌겠는가. 당신들만의 독점적인 스크린쿼터로?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대마초가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별일이 없었다면 이번에도 이렇게 투덜거리거나 비아냥거리며 지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김부선 때문이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일 전과4범의 이 여배우가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구속된 것을 두고 언제나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는 텔레비전 뉴스가 여배우의 지난 과거를 비추고 있었다. 1983년의 자료필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부끄러웠다. 김부선은 수사관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가면서 개떼처럼 몰려온 텔레비전 방송사의 카메라 앞에서 의연하고 당당했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카메라를 피하지 않던 그녀의 눈길. 아, 그 빛바랜 자료필름에서 김부선은 양심범이었다. 그녀는 불알달린 누구처럼 찔찔 눈물을 짜지도 않았고 운동모를 눌러쓰거나 오리털 파커의 깃을 올리지도 않았다.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조금은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입가에 약간의 어색한 미소를 띠며 그녀는 그렇게 대마초를 ‘악의 풀’로 매도하는 세상의 횡포 앞에 의연한 자세로 맞서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말해보자.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무슨 얼어죽을 죄인가? 대한민국은 1948년 이래 지금까지 6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독점적으로, 근자에는 공사(公社)적으로 담배를 팔아왔다. 담배는 술과 더불어 세계보건기구가 공인한 마약 중의 마약이다.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연구결과들이 대마초가 담배보다 매우(!) 덜 해롭고 중독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5천년 동안 대마초 때문에 죽은 인간이 고작 1명에 그칠 때 담배는 2000년 한해에만 3만5천명의 대한민국 국민을 사망에 이르도록 했다. 더 큰 죄악은 국가가 배우와 가수들을 칠성판에 올려놓고 그들의 양심과 인간성을 난자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강산에와 같은 가수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알게 됐다”고 매스컴 앞에서 중얼거릴 때 그의 양심이, 그의 예술적 자존심이 온전할 수 있었다고 우리는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박중훈이 기자회견석상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는 치욕을 감수하고도 얼마든지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천만에. 그들은 고춧가루 물수건과 목욕탕, 군용발전기가 동원되지 않았을 뿐 분명히 반인간적이고 반문화적인 법과 매스컴의 더러운 고문에 굴복해 아무런 대가없이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가 되어버렸다. 보석으로 풀려난 김부선이 스크린으로 무사귀환하기 위해서는 역시 마찬가지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녀가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기를 바라지만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도 오랫동안 고통받아야 했고 또 너무 빈곤하게 살아야 했다. 때문에 나는 영화계와 음악계가 한마음으로 김부선의 문제에 대해 공공연하게 조직적으로 대응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왜? 지난 30년 동안 당신들이 가장 큰 피해자들 아니었던가. 쥐구멍에 고개를 처박고 전전긍긍 찔찔 짜온 세월이 30년이라면 이제는 쥐라도 못할 일이다. 유재현/ 소설가·<시하눅빌 스토리>

[비평 릴레이] <철수 영희>, 김소영 영화평론가

간단한 산술로 하자면 단관이 아닌 멀티플렉스 극장이 각처에 늘어났으니 관객이 볼 영화도 다양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다. 관객 층을 정확히 ‘기획’한 영화가 아니면 이제 극장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관객이 비기획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아트플러스 시네마 네트워크는 이러한 곤궁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위 미개봉, 저예산 영화 상영극장 네트워크인 아트플러스는 8월 27일부터 10월 7일까지 국내 저예산 미개봉작 10여편을 아트플러스 체인 8개 극장에서 상영한다. ‘아트 플러스의 선택 2004 하나 더 +’ 라는 다소 암기하기 힘든 제목의 이 릴레이 상영은 서울 하이퍼텍 나다와 뤼미에르 극장에서 시작해 목포 제일극장, 프리머스 제주, DMC 부산, 광주 극장, 서울 씨어터 2.0과 안산 시네마이즈로 이어진다고 한다. 저예산 상영관 ‘아트플러스’가 상영한 초등학교 친구들 담백한 추억이야기 현재 영화 아카데미 출신의 감독 20명이, 영화 아카데미 20주년을 기념해 따로 또 같이 만든 <이공 프로젝트>를 비롯해서 ><썬데이@서울> (오명훈 감독) 그리고 <신성일의 행방불명>(신재인 감독) 등의 장편 독립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단관 극장 상영과 비디오 유통 그리고 텔레비전 방영이라는 연속체 안에서 영화가 관람되었던 90년대의 상황과 비교해, 현재는 홈 씨어터의 보급, 인터넷을 통한 영화 파일 공유 등으로 개봉관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메가박스 극장이 위치한 코엑스 몰이 보여주는 것처럼 극장이 고급 상가를 갖춘 대형 소비 공간으로 포섭됨에 따라 영화는 점점 지배적 소비문화 패턴에 맞춘 기획을 하게 되고, 개봉관은 영화들을 전시하는 강력한 쇼윈도로 기능한다. 이런 와중에 저예산 장편영화의 배급망이 선을 보이는 것은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번 ‘아트 플러스의 선택’에서 가족들 모두가 선택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1989년 <꼴찌에서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로 일찌감치 고등학교 교육 현장을 찾아갔던 황규덕 감독의 <철수 영희>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멀티플렉스 극장 소비문화가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소위 금융 자본이 지배하는 후기 산업 사회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보이는 대전 대덕 초등학교 4학년의 세계를 담고 있다. 영화는 부모가 교통사고를 당해 꽃집을 하는 할머니와 살게 된 영희의 전학으로 시작된다. 모두 똑같은 푸른 색 운동복을 입고 집단 체조를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의 세계 역시 계층적 위화감으로 살짝 짓눌려있다. 유리라는 아이는 극성 엄마를 등에 업고 할머니와 함께 꽃집에 살고 있는 영희를 왕따하려 한다. 그러나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영희는 유리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반장을 맡게 된다. 한편, 영희의 짝 철수는, 집에서 기르는 앵무새에게 ‘철수 바보’ 소리를 듣고 살뿐만 아니라 고무줄 끊기 등 온갖 고전적 장난을 도맡아 하는 장난꾸러기다. 그러나 영희를 좋아하게 되면서 철수는 변해 간다. 이윽고 영화의 구조는 ‘증여’를 모티브로 정점에 오르면서 모든 소소한 갈등들을 감싸 안게 되는데, 말하자면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서로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초가을 바람이 슬며시 새드는 이 즈음, <철수 영희>는 가족들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담백한 재미가 있는 선물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초등학교 친구들 생각이 간절했다.

귀여운 부조리 애니메이션, <맥덜>

2001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홍콩에서 개봉한 뒤 큰 호응을 이끌어낸 애니메이션 <맥덜>은 2편 <맥덜: 파인애플 빵의 왕자>의 제작과 3편 <맥덜: 우당>을 기획하게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현재는 텔레비젼 교육용 프로그램을 준비 중일 정도로 홍콩에서 인기가 있다. 간단하게 말해 <맥덜>은 우선 귀여운 애니메이션이다. 돼지의 모습을 갖춘 주인공들은 징그럽기보다는 충분히 호감이 갈 만한 표정들을 보여준다. 몇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으며, 둔하고 바보 같지만 착한 아들 맥덜과 억척스럽게 세상을 살아나가는 엄마 맥빙 여사, 이 모자를 중심으로 재치있는 에피소드들을 선보인다. 한 가지 느낌만으로 포획되지 않는 다양한 감성의 전달을 시도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맥덜>이 보여주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 영민한 아이에게 보여주기에는 잔인한 구석까지 갖춘 애니메이션이다(<맥덜>의 등급은 전체 관람가이다). 물론 이런 설명은 영화가 표면적으로 난해하거나 공포스럽기 때문에 필요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부조리하다는 말인가? “주윤발이나 양조위처럼 잘생긴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운명의 기도를 거절당하고, 어쩔 수 없이 운만 좋고 둔한 아이 맥덜을 자식으로 얻은 어머니 맥빙 여사는 변하지 않는 법칙들이 이 세상을 맡고 있다고 믿는다. 정확히 무엇인지 실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향해 무조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중에 맥빙 여사가 아들 맥덜에게 가르치는 것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옛날에 거짓말쟁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죽었단다. 옛날에 공부 열심히 하는 소년이 있었는데 커서 부자가 됐단다. 옛날에 말 안 듣는 소년이 있었는데 발목을 삐었단다.” 맥빙 여사는 침대 옆에서 아들 맥덜에게 잘되라고 동화책을 읽어준다. “엄마, 졸려요”라고 하소연해봤자, “옛날에 잠 많은 소년이 있었는데 다음날 죽었단다” 하는 식의 무서운 동화 한줄만 더 들려줄 뿐이다. 아픈 맥덜에게 다 나으면 몰디브 해변으로 데려다준다고 꼬셔 약을 먹이더니, “다 나으면 가기로 했잖아요” 하고 묻자, “아니, 부자 되면 가기로 했지”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럼 우리 언제 부자 돼요?” 하고 물으면 무심하게 텔레비전을 보며 “꿈에서나”라고 대답한다. 억척스런 엄마와 순진한 아들 사이의 이 동문서답 사이에서 웃음은 터져나온다. 그러나 그 웃음은 슬픈 것이다. 부자가 되어야만 모든 일이 순조로워지고, 부자는 결코 될 수 없다. 이 모순의 문장이 지닌 변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부조리한 현실을 지탱하는 불가능성 때문에, 엽기적인 동문서답은 웃음과 함께 슬픈 감정을 끌어낸다. <맥덜>의 주인공들이 순간마다 구슬프게 보이는 이유이다. 그러나 맥빙 여사는 맥덜을 사랑한다. 맥덜이 열심히 연습하는 만두치기(중국의 전통놀이)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안 되는 영어로 올림픽 집행위원회에 편지까지 보낼 정도이다. 당연히 엄마 역시 아들에게 몰디브를 구경시켜주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현실 불가능이다. 돈이 없다. 그 순간에 그들 모자에게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은 역시 부조리하다. 꿈에서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그래야 몰디브에 갈 수 있다고? 그럼 꿈을 보여주지. 맥덜은 엄마와 함께 케이블카나 다니는 시내의 공원을 다녀올 뿐이지만 그곳이 몰디브였다고 믿게 된다. 그렇게 행복을 찾는 부조리한 믿음은 여러 장면에 나눠져 있다. 그런 장면들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환상 속에서 즐거워하는 맥덜의 즐거운 동심을 보여줌으로써 충분한 동의를 만끽하게 한다. 그렇게 <맥덜>은 부조리한 세상에 부조리한 방식으로 대처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 <맥덜>에는 두 목소리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한명은 어린 맥덜이고, 또 한명은 어른 맥덜이다. 그러면서 <맥덜>은 어른의 시점에서 과거를 상기하는 방식으로, 어린아이가 미래를 향해서 소망을 품는 방식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뚜렷하게 그 둘 사이를 구분짓는 경계는 없다. 그것은 마치 길을 걷는 맥덜 모자에게서 뻗어나와 도시를 가로질러 홍콩의 하늘 어딘가로 올라가 내려다본 뒤에 다시 그들에게로 되돌아오기를 되풀이하는 조감숏의 형식적 의미와도 일치한다. 그렇게 화면은 그 도시 안에 살고 있는 맥덜 모자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보여준다. 마치 과거와 미래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삶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그건 역시 실망과 희망을 오가는 <맥덜>의 방식과도 같다. <맥덜>은 그렇게 독창적인 캐릭터들과 그들의 부족함의 현실과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망의 이미지를 통해 부조리한 이 세계의 어두운 면을 따뜻하게 보여주는 기술을 터득한다. :: 토 우엔 감독 인터뷰 “우리의 성공은 기적에 가깝다” <맥덜>에는 두 목소리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한명은 어린 맥덜이고, 또 한명은 어른 맥덜이다. 그러면서 <맥덜>은 어른의 시점에서 과거를 상기하는 방식으로, 어린아이가 미래를 향해서 소망을 품는 방식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뚜렷하게 그 둘 사이를 구분짓는 경계는 없다. 그것은 마치 길을 걷는 맥덜 모자에게서 뻗어나와 도시를 가로질러 홍콩의 하늘 어딘가로 올라가 내려다본 뒤에 다시 그들에게로 되돌아오기를 되풀이하는 조감숏의 형식적 의미와도 일치한다. 그렇게 화면은 그 도시 안에 살고 있는 맥덜 모자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보여준다. 마치 과거와 미래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삶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그건 역시 실망과 희망을 오가는 <맥덜>의 방식과도 같다. <맥덜>은 그렇게 독창적인 캐릭터들과 그들의 부족함의 현실과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망의 이미지를 통해 부조리한 이 세계의 어두운 면을 따뜻하게 보여주는 기술을 터득한다.

제4회 광주국제영화제 추천작 퍼레이드 [3]

<괴담> 시네마스코프의 탄생은 텔레비전의 상업적 도전에서 비롯됐다. 1950년대 들어서자 미국의 텔레비전 문화는 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고, 할리우드는 그 타개책으로 영사화면의 크기와 비율을 혁신한다. 그중, 이십세기 폭스사에서 만들어진 2.35:1 비율의 시네마스코프는 곧 와이드스크린의 대명사가 되었다.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 <성의>(1953) 이후 할리우드는 주로 스펙터클 장르에 이 장치를 활용했다. 그래서 역사물, 전쟁영화, 서부영화, 뮤지컬, 코미디 등에 많이 사용됐다. 상업적인 목적에서 시작했지만 시네마스코프의 활용은 곧 미학에도 영감을 주었다. 이번 13편의 ‘와이드스크린 특별전’ 상영작들은 원초적인 영화보기의 감각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작가들이 그 기술과 조화를 이루었는지를 보여주는 목록이다. 프랑스의 비평가들이 추앙하기 전까지 그저 그런 상업영화 감독 정도로 여겨졌던 니콜라스 레이는 시네마스코프의 대단한 활용가였다. 이번 상영작 중 <실물보다 큰>(1956), <파티 걸>(1958)이 그의 작품이다. <실물보다 큰>은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남자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미친 듯이 약에 취해 점점 과대망상의 범죄자로 변해간다는 내용의 영화다. 니콜라스 레이는 세트 및 색채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독창적인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만들어낸다. 한 변호사가 우연히 댄서를 만나게 되면서 점점 더 사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영화 <파티 걸>에서도 그 점은 빛을 발한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적 감수성과 필름누아르의 형식미를 함께 보여준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 <바람결에 씌어진> 등으로 고전적 멜로드라마의 한축을 만든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8)는 전쟁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동시에 멜로드라마의 스토리를 담는다. 독일 병사 에른스트는 러시아와의 전쟁 중 겨우 휴가를 얻어 고향을 찾는다. 그러나 집은 불타 없어진 지 오래다. 우연히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힘든 시대는 그들의 사랑을 쉽게 이루어지게 놔두지 않는다.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에 흠뻑 취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목록이다. 시네마스코프는 스펙터클 장르영화를 터전으로 삼은 할리우드 배경의 감독들에게만 유용했던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효시로 인정받는 <강박관념>(1942)으로 데뷔한 이후 <베니스에서의 죽음> <루드비히 2세> 등 치명적인 매혹의 화면을 만들어낸 이탈리아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에게도 시네마스코프는 유용한 장치였다. 이번 상영작 <레오파드>(1963)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19세기 국가통일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이탈리아 시실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대의 힘에 밀려 점점 더 몰락해가는 귀족계급의 씁쓸한 마지막을 그려내기 위해 루키노 비스콘티는 꼼꼼하게 의상과 풍습 등을 재현해낸다. 유미주의적 역사극이 웅장한 화면 안에 담겨 있다. 한편, 일본 작품 두편 역시 눈길을 끈다. 2시간44분짜리 영화 고바야시 마사키의 <괴담>(1964)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일본의 괴담 4가지를 들려주면서 긴 러닝타임을 잊게 한다. 마치 귀신이 날아다니고, 피가 흐를 듯한 느낌을 주지만 원색의 이미지들과 기묘한 이야기 구성은 아름다움마저 선사한다. <괴담>은 기괴한 이야기들의 연쇄 속에서 미학을 발견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고바야시 마사키의 이 영화는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또, 나루세 미키오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 역시 매혹적인 화면을 선보인다. 나루세 미키오의 히로인이라고 불릴 만한 다카미네 히데코가 긴자거리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는 여주인공 게이코로 등장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1960년대 일본의 사회 안으로 들어서는 여성의 전환기를 시네마스코프 화면으로 잡아낸다.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터미널>

실화의 엉뚱함과 스필버그식 유머가 사라진 <터미널> 케네디 국제공항에 무한정 잔류된 국적없는 동유럽 여행객에 대한 코미디 <터미널>의 보도자료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사뮈엘 베케트식 주제를 가볍게 다뤘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준다. 두려워하지 마시라,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더 가볍게 다룬 것도 아니니까. “<캐치 미 이프 유 캔> 이후”라는 보도자료에는 감독이 “관중이 웃고 울며 세상에 대해 좋게 느낄 수 있는 영화를 하나 더 만들고 싶었다”고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톰 행크스의 빅토르 나보스키는 처음에 녹슨 플랜터스 땅콩 캔을 손으로 찌그러뜨리고 미국 세관을 통과할 때 가상의 동유럽 언어를 지껄이며 꾸부정하게 걷고 털이 성성 난 냄새나는 시골 사람으로 등장한다. (가상의) 고향 크라코지아에 혁명이 일어나 비자가 취소되자 나보스키는 면도를 깨끗하게 하고선 성공적이고 근사한 악센트를 가진 영국 신사가 된다. 아마 로빈 윌리엄스를 염두에 두었던 배역 같은데 행크스의 이국땅의 이방인은 레이건 시절의 훈훈한 영화, <허드슨 강의 모스크바>에서 윌리엄스가 연기한 게걸스럽게 먹는 러시아 이민자를 똑 닮아 있다. 똑똑하면서도 멍청한, 세계화의 영웅이자 희생자인 나보스키는 로빈슨 크루소가 (혹은 행크스가 <캐스트 어웨이>에서 맡은 인물처럼) 외딴 섬에서 살았듯이 공항에서 거주하지만, 크루소와는 달리 격분한 터미널 보안 책임자, 프랭크 딕슨(스탠리 투치)에 의해 뉴욕을 돌아다닐 수 있는 몇번의 기회를 갖는다. 나보스키가 동전을 돌려받기 위해 어느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를 배우는 모습이 모니터되면서 터미널 건물은 거대한 실험 상자를 환기시킨다. 행크스는 특히 보안 카메라를 통해 우아한 신체 연기를 보여준다. 고립되어 있던 크루소와는 달리 나보스키는 많은 프라이데이(<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를 돕는 원주민- 역자)들을 만난다. 많은 인종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는데 이들 중 쿠마 팔란이 연기한 피해망상의 조그만 청소부는 참 거슬리는 인물이다. 이들은 직장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처럼 영화를 끌고가며 나보스키가 아름답고 예민한 스튜어디스(캐서린 제타 존스)와 플라토닉한 연정을 갖도록 돕고 나보스키가 세관원들과 겪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인종의 도가니로서의 전통적인 미국을 보여준다. 상업적 성공이 암담한 영화 <터미널>에서 딕슨은 수표를 써주며 “미국이 너무 많은 사람을 가둬서 더이상 설자리도 없다”고 말한다. 엉터리 같은 상황(얼마나 어리석은가는 영화 종반에 가서야 드러난다)과 많은 비논리적인 우연들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는 문서를 잃고 1988년 이후 샤를 드골 공항의 빨간 벤치에서 거주한 (망명 신분을 얻었지만 수년째 공항 떠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이란 태생의 여행자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의 실제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같은 이야기에 근거해 1993년 프랑스의 코미디영화와 나세리 자신이 나오는 2001년 영국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드림웍스 역시 나세리에게 돈을 지불해 이야기를 샀지만 이야기가 갖고 있는 엉뚱함들은 영화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웃기려고 노력하지만 웃기지는 못하는 <터미널>의 유머들은 젖어서 미끄러운 바닥에서 얼마나 많이 엉덩방아를 찧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계산에 주로 기초해 있다. 거대한 세트는 공학적 경이이지만 나보스키에겐 단순한 지능검사장이 아니다. 이런 공간을 자크 타티라면 어떻게 사용했을까 궁금하지만 스필버그는 주로 간접광고(PPL)를 위해 사용했다(텔레비전 이미지나 회사 로고를 집어넣는 데 스필버그만한 사람이 있을까?). 냉혹한 행동주의자인 감독은 강아지를 쓰다듬고 존 윌리엄스의 달콤한 멜로디로 관객을 싸구려 감상에 젖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보도자료는 “나보스키의 이야기에 즉시 호감을 느꼈다”는 스필버그의 상투적인 말을 인용하고 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터미날>은 9·11 이후 공항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차라리 나보스키를 중동인이나 동남아시아인 혹은 보스니아 여행객으로 만들었다면 이 진부한 영화에 어느 정도 인간의 고뇌를 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2004년 6월14일.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성(性)관련 TV프로, 10대 섹스 부추긴다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TV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 10대청소년이 그렇지 않은 청소년보다 성관계를 시작할 가능성이 2배 가량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랜드 코프'에 소속된 행동과학자 레베카 콜린스의 연구팀이 '소아학' 9월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TV 섹스물에 많이 노출된 12-17세 청소년이 열정적인 키스나 오럴 섹스 등 비성교성 행위를 시작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연구팀은 <섹스 앤드 시티>(사진), <프렌즈> 등 성적 내용이 풍부한 것으로 자체 분류한 23개의 TV 프로그램을 선정한 뒤, 2001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미 전역의 청소년 1천792명에게 얼마나 자주 이 프로그램을 시청했는지와 어떤 다양한 성적인 활동을 했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두 차례의 설문조사 결과 조사기간에 성관계를 맺었다고 응답한 10대 청소년의숫자는 18%에서 36%로 2배나 늘어났으며, 섹스 이외의 성적 경험을 했다는 응답자수도 62%에서 75%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연구팀은 나이가 많거나 나이든 친구를 두었거나 학교 성적이 낮은 청소년이 섹스를 시작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텔레비전도 청소년의 섹스활동에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콜린스는 "성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를 담은 TV 프로그램에 노출되더라도 성적인행위들을 묘사한 프로그램에 노출됐을 때와 똑같은 위험과 놓이게 된다"고 말했다. TV는 일상생활에서 성이 실제보다 더 중심적인 요소라는 환상을 만들어 낼 수있으며 그 결과 청소년들이 성적인 행위를 시작하게 된다고 콜린스는 덧붙였다.(시카고 AP=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