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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에너지는 통제불능 <초지>

한국 애니메이션이 해외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본선에 연이어 진출하고 있다. <마리이야기>가 안시페스티벌 경쟁부문에 오른 것에 이어 김진영의 <초지>, 정진희의 <冬>, 조상석의 <수냐>가 자그레브페스티벌 경쟁부문에 진출했다는 소식이다. 작가 김진영은 단편 <자리 만들기>로 2000년 안시페스티벌 학생부문 본선에 오른 바 있다. <초지>는 셀과 종이 위에 아교 잉크와 아크릴릭으로 수묵담채화의 효과를 낸 7분가량의 단편이다. 생경한 제목은 ‘아무도 밟지 않은 맨땅에 새롭게 솟아나는 잔디’라는 의미로,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겪는 내면의 혼란을 그리는 만큼, 명쾌한 전개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난해하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이다. 먼저, 거친 붓선으로 강조된 산이 보이고 그 산을 가리키고 있는 하얀 손가락이 보인다. 그런데 섬뜩해라. 카메라가 전체를 비추고 보니 주인공은 소복 입고 머리 풀어헤친 여인이 아닌가. 게다가 배경음악은 괴기스러운 기계음과 현악기 소리. 바람 부는 정체불명의 공간에 서 있는 여인을 보고 있자니 구천을 떠도는 넋이 바로 이 모양이 아닐까 싶다. 한국인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소복 입은 여인의 충격에서 벗어나면, 이 여인, 그러니까 초지가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게 보인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으로 허공에 산의 형상을 그리고 있다. 이윽고 버선발로 홀연히 집으로 들어가서는 손바닥에, 종이에 산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기백 있는 붓 놀림.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열정은 더해져서, 강렬하고 폭발적인 기운으로 그리는 행위에 몰두한다. 혼신을 다해 세상을 향한 몸짓을 하는 무용가처럼, 초지의 의식은 두팔로, 온몸으로 산의 형상을 표현해낸다. 산줄기는 범이 되고, 학이 되고, 사슴이 되더니, 다시 구렁이가 되고, 말이 되고, 용이 된다. 그뿐인가. 범이 사슴을 덮치고 구렁이는 범을 쫓는다. 말과 용이 뒤엉키나 했더니 범과 용이 싸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구렁이로 변한 산줄기가 창조주조차 집어삼키려 드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둘둘 감아대는 구렁이를 피해 밖으로 뛰쳐나가는 초지. 슬럼프일까. 매너리즘일까. 절망한 그녀는 벼랑 위에서 몸을 날리고, 그토록 신명나게 산등성이를 그려대던 붉은 정열은 핏빛으로 치환된다. 숨가쁜 전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상이었을까. 어느새 초지는 현실로 돌아와 있다. 무언가 달라진 모습.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시 산과 마주했다. 기쁘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산등성이와 대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하늘까지, 모든 것이 이토록 새롭지 않은가. 초지는 작가의 고뇌를 대변하고 있다. 고뇌와 상상의 끝에 태어나지만 창조물은 필연적으로 작가의 손을 떠난다. 김진영은 “상상이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그 에너지가 다른 대상의 본질을 깨워내는 모습을 구체적인 영상으로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제작과정과 일치했다고 하니, 2001년 이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작가가 겪었을 고뇌와 좌절, 환희가 그대로 보이는 듯하다. <초지>는 카메라 앵글의 변화로 상상과 현실, 그리고 공간의 변화를 무척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컷의 변화 없이도 이곳 저곳 자유자재로 관객을 안내하는 연출이 놀랍다. 존재감 없는 하얀색 배경과 재료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수작업의 성과도 돋보인다. 그러나 어쩌랴. 낙서하다가 우연히 나왔다는 초지의 이미지는,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여전히 ‘처녀 귀신’처럼 보인다. 작가의 상상력은, 어느덧 제멋대로 구렁이와 범처럼 뒤엉켜서 관객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

빅히트 그리고 재개봉 를 이해하는 11개의 키워드 (1)

처음 그의 자전거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온 것은 20년 전, 외화가 느지막이 수입되던 시절의 한국 관객에게는 꼭 18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동안 10살 소년 엘리엇은 서른의 청년이 됐고, 흥행성 약하다는 이유로 콜럼비아 영화사로부터 기획을 퇴짜맞았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메이저 스튜디오의 공동대표가 됐다. 20년이 지나고 재회한 영화 는 예전 그대로이면서 또한 다르다. 요즘 10대 관객의 입맛에도 달라붙는 일급 오락영화라는 점에서 는 여전하다. 하지만 한편의 영화가 완결되는 모멘트가 셀룰로이드 표면이 아닌 관객의 지각 속에 있다는 믿음을 가진 관객에게 는 예전엔 들리지 않던 감정의 박동을 전해온다. 하늘을 나는 희열과 이별에 눈물 흘렸던 소년·소녀들은 이제, 상실감의 그늘이 드리운 가정의 어린 남매 사이에 피어나는 묘한 긴장과 위로, 엄마의 외로움을 읽어낼 것이다. 정확한 연출 리듬에 감탄하고, 엘리엇과 E.T.에게서 분열된 의 데이빗을 보는 여유도 부릴 것이다. 2002년 성년이 되어 돌아온 에 대해 품어봄직한 호기심들을 11개의 색인 아래 모았다. 그리고 유년의 어느 날 근접 조우한 E.T.로 말미암아, 영화의 우주로 눈을 돌린 민동현 감독의 추억담도 싣는다. ★ 재개봉 솔트레이크에서 처음으로 티켓이 팔리기까지 재개봉에 관한 소문이 처음 들리기 시작한 것은 2001년 7월이었다. 캐나다 뉴스 사이트 Canoe.ca는 이 영화의 프로듀서 캐슬린 케네디가 20주년 기념 재개봉에 관해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케네디는 1985년 의 후일담을 다룬 동화책 <녹색별의 가 나오기는 했지만 속편은 결코 없을 것이며, 대신 스필버그는 관객을 위한 무언가를 준비중이라고 암시했다. 2001년 가을부터 DVD에 관한 소문이 나돌고 새삼스럽게 장난감들이 다시 나오면서 이 소문은 점점 믿을 만한 것이 돼갔다. 마침내 2001년 10월20일 스페셜 에디션 포스터가 공개됐고, 며칠 뒤에는 비공식 예고편까지 인터넷에 등장했다. 2001년 11월이 되자 스필버그는 재개봉에 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티켓이 최초로 판매된 곳은 동계올림픽이 열릴 예정이던 솔트레이크 시티였다. “세계가 하나 되는 올림픽이 이 영화를 첫 상영하기에 가장 적당한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2002년 2월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첫 상영을 가진 뒤, 재개봉 준비에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할리우드 닷컴> 등은 앞 다투어 과거 의 주인공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취재하기 시작했고 NBC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으며 허쉬는 20년 전 E.T.가 먹던 캔디를 다시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개봉한 첫주 박스오피스 3위에 그쳤지만, “나는 엘리엇 같은 소년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 스필버그에게 이 이벤트는 자신의 개인적인 꿈을 보다 완벽한 형태로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됐을 것이다. ★ 있다·없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20년 만에 귀환한 를 보러 갈 만한 이유가 무엇이건, 추가된 인물이나 플롯을 보는 재미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스필버그는 하다못해 선생님 뒤통수로 출연했던 해리슨 포드의 앞모습을 슬쩍 끼워넣는 애교조차 부리지 않았다. 약 140개 숏을 손질하고 디지털 테크놀러지로 ‘리마스터링’한 신판 는 1990년대 후반 조지 루카스가 내놓은 <스타워즈> 3부작의 스페셜 에디션에 비해 아주 경미한 ‘성형수술’을 거쳤다. 1982년에 볼 수 없던 장면은 두 시퀀스. 엘리엇과 E.T.가 욕실에서 벌이는 해프닝, 그리고 마이클과 거티가 할로윈 날 E.T.를 찾아다니는 장면이다. 클래식 반열에 오른 도 9·11 테러의 여진은 피하지 못했다. 할로윈 가장을 한 아들에게 엄마가 던지는 “너, 테러리스트로 분장하진 않겠지?”라는 대사가 “너, 히피로 분장하진 않겠지?”로 바뀐 것. 이 밖에 20주년판에 생긴 변화는 ‘수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본디 모형을 써서 찍었던, 자전거를 타고 날아가는 달 배경의 실루엣이 사람을 써서 재촬영됐고 구름의 흐름, 하늘을 날 때 바람을 받아 흔들리는 옷자락의 표현과 같은 세부가 기술의 발전으로 명확해졌다. 쥘 베르느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된 우주선의 디테일도 다소 현대화됐다. 스필버그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E.T.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로 접근했다.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은 보완됐으나, 열두개의 케이블로 조종되는 인형과 신장 60센티미터 내외의 인간이 모델 안에 들어가 만들어낸 E.T.의 어수룩한 움직임은 그대로다. 어떤 CG의 마술보다 그것이 E.T.의 캐릭터에 걸맞기 때문. 그렇다면 새로운 에서 사라진 것은? 바로 E.T.를 데리고 도망치는 아이들을 쫓는 요원들이 들고 있던 총기다. 무장하지 않은 아이들을 추격하면서 어른들이 총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손톱 밑의 가시처럼 불편하게 여겼던 스필버그는 이번 기회에 총들을 CG기술을 이용해 아예 지우거나 무전기로 대체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 올림픽과 모토를 공유하는 블록버스터가 보편화된 요즘에 와서 다시 보는 는 특수효과를 매우 검소하고 겸손한 스타일로 구사한 SF영화이며 산문적인 일상의 실감에 굳게 발 디디고 있는 판타지다. 숭배하는 영화에 더해진 가필을 참지 못하는 순수주의자들을 배려해, 의 DVD는 1982년판과 2002년판이 모두 출시된다. ★ 세 남매 ET의 지구인 친구들은 지금 를 찍을 때 일곱살이었던 드류 배리모어는 함께 출연한 두 남자아이가 정말 자기 오빠들인 줄 알았다. 당시 영화치고는 보기 드문 결손가정이었지만, 스필버그가 바라던 대로 “서로의 문제를 이해하며, 깨져버린 가정을 지키고자 손을 잡았던” 세 아이는 그런 착각이 이해될 정도로 서로 닮았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더이상 남매가 아니다. 그들 중 가장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은 열네살의 장남 마이클을 연기한 로버트 맥노튼이다. 그는 에 출연한 뒤 몇편의 TV영화와 극영화 <아이 엠 치즈> 등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87년 이후에는 출연한 작품이 없다. 완전히 연기를 포기한 그는 피닉스로 이사해 우편물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 배우로서 미련을 버린 그는 가끔 네살짜리 아들과 함께 를 보는데 그때마다 아들은 “아빠가 아이인 척하고 나오는 영화”라고 말한다. 엘리엇 역의 헨리 토마스는, 비록 예전의 그 소년이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꾸준히 영화에 출연해왔다. 애증으로 얽힌 형제 중 섬세하고 연약한 막내를 연기했던 <가을의 전설>이 가장 눈에 띄는 영화. 작지만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아직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그는 올해 여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출연한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집을 나간 아빠가 멕시코에 간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 꼬마 거티의 현재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십대가 되기 전에 이미 알코올과 마약에 빠져 세월을 탕진했던 드류 배리모어는 뒤늦게 개심, <미녀 삼총사> 등에 출연한 배우이자 제작자로 어린 시절을 보상받고 있다. 이 세 아이에겐 누구도 진짜 얼굴을 알지 못하는 형제 하나가 더 있었다. E.T.를 연기한 난쟁이 배우 팻 빌런이 그다. E.T.는 다리 없는 장애인과 두명의 난쟁이가 번갈아 인형 속에 들어가 연기했는데, 빌런은 그중에서도 메인 배우에 해당했다. 그는 촬영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지만, 맥노튼은 주말마다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 놀곤 했던 그가 “진정 인생을 즐겼다”고 기억한다. ★ 1982년, 미국 언론 “<미지와의 조우> 비공식 속편격인 작은 영화” 는 1982년 6월11일 미국 극장가에 착륙했다. 일단 는 <조스> <미지와의 조우> <레이더스>로 연타석 만루홈런을 날린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이라는 프로필만으로도 안 보면 큰일나는 구경거리(must-see phenomenon)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의 실체가 불러온 파장은 예상된 ‘이벤트’ 이상이었다. 가 영화사의 슈퍼스타로 등재된 지 오래된 지금으로서는 생경하지만 개봉 당시 리뷰들은 공통적으로 가 모험담과 특수효과가 만발한 대작을 즐기던 스필버그가 정서에 호소한 ‘작은’ 영화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미지와의 조우>에 대한 비공식적 속편이라고 묘사했다. <박스오피스 매거진>은 를 예술품이라기보다 선물 같은 영화이며 특히 극장주들에게 큰 선물이라고 썼다. 로저 에버트는 호평에 덧붙여 그해 칸 영화제에서 의 자전거가 날아오르는 장면이 냉정한 저널리스트조차 숨죽이게 했던 일을 회상했다. <버라이어티>는 “디즈니가 만들지 않은 최고의 디즈니영화”라는 표현으로 가족오락물로서의 가치를 강조했다. 평자들의 호평이 집중된 대목은 엘리엇 역 헨리 토마스의 연기와 E.T.를 창조한 상상력. 는 1982년 LA비평가협회 작품상과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고 오스카 시상식에서 오리지널 스코어, 음향, 음향효과 편집, 시각효과 4개 부문 트로피를 안았다. 그해 작품상은 리처드 아텐보로의 <간디>에 돌아갔다. ★ 1984년, 한국 극장 “에라! 맥주나 한잔!” 1984년 8월3일자 조선일보는 한 칼럼에 를 ‘구경하러’ 몰려든 가족들의 사진을 실었다. 당시 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였고, 정부요원들이 E.T.를 조사하는 장면처럼 “동양의 조그만 나라 관객들은 미국의 그 거대한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하이테크놀러지의 영화였다. 광고 역시 이 영화가 얼마나 볼 만한지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마닐라의 어느 거지는 동냥을 해서 기어코 이 영화를 두번씩이나 보았다”, “마이클 잭슨은 왜 이 영화를 36번이나 보았을까?”, “단숨에 전국 40만 관객이 눈시울을 적셨다!” 등이 의 카피. ‘연소자 관람가’였던 에는 연소자 관람불가에 해당할 만한 광고문안도 하나 있었으니, “고향별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에라! 맥주나 한잔!”이었다.▶ 빅히트 그리고 재개봉 를 이해하는 11개의 키워드 (1) ▶ 빅히트 그리고 재개봉 를 이해하는 11개의 키워드 (2) ▶ 민동현 감독의 첫사랑에 바치는 헌사

시나리오 작가 노르마 바르즈만 인터뷰

1920년 뉴욕의 유대가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노르마 바르즈만 여사는 시나리오 작가였던 남편 벤 바르즈만과 함께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 소용돌이를 몸소 겪은 이제 몇 남지 않은 역사의 증인이다. 81살의 할머니는 조금도 피곤함을 내보이지 않은 채 파란만장했던 경험을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올 봄에 출간될 자신의 회고록에도 실릴 거라는 정보와 함께. 할리우드에는 언제 들어갔는가. 1941년 대학을 졸업한 뒤 시나리오 수업을 받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할리우드는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했던 조카 헨리 미어스를 통해 가까워졌다. 공산당원이었던 조카는 할리우드의 노조를 설립한 사람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 그를 따라 할리우드 어딘가에서 상영하는 소련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거기엔 350명에 가까운 할리우드의 진보주의자들이 다 와 있었다. 사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컬럼비아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언니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해선 많이 알고 있었다. 언니는 나중에 미국에서 최초로 전국 노조의 변호사가 됐다. 언니를 통해 대학에서 일어나는 공산주의와 트로츠키의 학생모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았고 그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다. 40년대 초에 할리우드의 진보단체는 히틀러와 프랑코의 파시즘을 피해 미국에 온 정치망명객에게 삶터를 마련해주고 전쟁고아들을 치료해주는 등 연대활동을 많이 했다. 그러다 나는 1943년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던 벤 바르즈만(1911~1989)과 결혼했고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된 걸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당시 미국의 공산주의자는 얼마나 많았는가. 내 기억으로는 약 4만3천 정도였는데 인구가 1500만 정도였으니까 많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들은 국내외의 인종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싸웠다고 생각한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포드 자동차 사장 헨리 포드는 히틀러를 밀어준 파시즘의 추종자였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려던 꿈은 어찌됐는가. 결혼 뒤 1944년부터 1년간 <로스앤젤레스 이그재미너> 잡지의 견습기자로 일했다. 상당히 보수적인 잡지였는데 편집장은 내가 공산당 회원이라는 걸 알고는 해고시키겠다고 하면서도 좋은 기자라고 하면서 계속 일을 맡겼다. 주로 2차대전에 참전한 병사들의 부인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첫 시나리오 <네버 세이 세이 굿바이>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썼다. 무명작가의 글이었지만 남편의 도움으로 쉽게 제작자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제작자가 주연배우 에롤 플린의 스타일에 맞춰 코미디로 뜯어고치는 바람에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영화가 돼버렸다. 그뒤 남편의 권고에 따라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1947년 존 브람이 연출한 누아르 영화 <더 로키트>의 시나리오를 남편과 같이 썼고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RKO 사장 하워드 휴즈는 크레디트에 우리 이름을 세리던 기브니로 대치했다. 휴즈는 우리 이름이 이미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조셉 로지가 연출한 <파란머리의 소년>의 시나리오 작가는 벤 바르즈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애드리언 스코트는 우리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 스코트 부부는 전쟁 고아를 양아들로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신문에서 한 꼬마가 자고 났더니 머리가 파래졌다는 기사를 읽고는 양아들의 전쟁 경험과 파란머리 소년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 반전 영화를 하나 만들 생각으로 남편에게 시나리오를 부탁해왔다. 마침 그 무렵 우리는 조셉 로지 감독이 브레히트의 원작을 바탕으로 연출한 연극 <갈릴레오>를 보고 그의 뛰어난 연출력에 끌려 있던 때라서 스코트에게 그를 감독으로 추천했다. 로지 감독에겐 첫 장편영화였기 때문에 남편은 촬영 내내 세트에서 살다시피 했다. 뮤지컬과 판타지를 섞은 우화적 스타일의 영화였는데 뮤지컬을 연출한 경험이 있던 남편은 로지 감독에게 큰 도움이 됐었다. 아무튼 로지 감독은 스튜디오의 사장 톰 쉐리와 일부 스타들로부터 최근에 본 영화 가운데 수작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유럽에서도 평이 아주 좋았다. 그럼에도 배급자인 하워드 휴즈는 냉전을 의식하여 몇달 동안이나 극장상영을 미루다 나중에 재정난 때문에 극장상영을 했다. 제작자인 애드리언 스코트는 유명한 블랙리스트 10인의 하나였다. 영문학과 사학을 전공한 스코트는 공산당 회원이었다. 처음엔 시나리오와 영화평론을 쓰다가 40년대 제작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가 1947년에 제작한 <크로스파이어>는 미국의 인종주의를 파헤친 뛰어난 명작으로 오스카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블랙리스트 10인이 되면서 감옥에 갇혔고 감옥에서 나온 뒤 명예회복을 위해 스튜디오와 10년간 법정 싸움을 했지만 그의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가명으로 TV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60년대 런던의 MGM 지사에서 익명으로 일하다가 할리우드에 다시 돌아오지만 TV부문에서만 일할 수 있었다. →헐리우드 블랙리스트, 반세기의 상처 →매카시즘 시대의 영화인들

제74회 아카데미 영화상

“74년이나 걸렸다. 시간을 좀더 줘야 된다.” 울음을 삼키느라 목이 멘 할리 베리의 목소리에, 장내는 사뭇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다. 미국 L.A. 현지시각 3월24일 저녁,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던 할리우드&하이랜드 컴플렉스의 코닥시어터. 단골 행사장이던 슈라인 오디토리엄을 떠나 42년 만에 아카데미가 시작된 ‘할리우드’ 거리로 돌아와 마련한 새 거처에서,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고 있었다. 아카데미 사상 처음으로 흑인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사형수 남편을 잃고 백인 간수와 사랑에 빠지는 여성을 통해 흑백문제의 깊은 골을 들여다보는 <몬스터스 볼>로 트로피를 거머쥔 할리 베리. “오, 마이 갓!”만 연발하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던 베리는, 역대 수상자 가운데 가장 긴 소감을 토해냈다. “도로시 댄드리지, 리나 혼, 다이앤 캐롤, 그리고 내 뒤의 제이다 핀켓, 안젤라 바셋, 비비카 폭스 같은 여성을 위한 순간이다. 이제는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수많은 유색인 여배우들에게 기회가 오겠지. 오늘밤 그 여인들을 위한 문이 열렸다.” 원래 수상소감에 할당되는 시간이 1분 이내인 관례를 고려하면 5분을 넘긴 베리의 경우는 전무후무할 기록이지만, 74년 만에 새롭게 쓰인 역사를 형용하기엔 그것도 부족한 눈치였다. 베리의 눈물, 워싱턴의 미소 같은 부문 경쟁자였던 르네 젤위거, 니콜 키드먼의 눈까지 촉촉하게 적신 베리의 말처럼, 이번 오스카는 오랫동안 등한시했던 흑인 배우들에게 활짝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유례없는 자리였다. 베리와 덴젤 워싱턴, 윌 스미스까지 동시에 3명의 흑인 배우가 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은 73년 이후 두번째. 1939년 헤티 맥다니엘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유모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이래 오스카의 높은 문턱을 넘은 흑인 배우는 모두 6명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주연상 수상자는, 1963년 <야생의 백합>으로 흑인 남자배우로서는 첫 오스카상을 따낸 시드니 포이티에가 유일했다. 흑인 배우들이 스크린에서 하인이나 짐꾼이길 요구받았던 50년대부터 사려깊은 지성을 연기에 실어온 포이티에는 마침 이번 74회 시상식의 공로상 수상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포이티에가 기립박수와 함께 덴젤 워싱턴으로부터 공로상을 전달받을 때만 해도, 흑인 오스카 수상자가 8명으로 늘어날지는 미지수였다. “나보다 앞서 어려운 시절을 살아간 모든 흑인 배우들을 기억하며 이 상을 받는다. 그들의 어깨에 기대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 수 있었다”며 조셉 맨케비츠, 스탠리 크레이머 등 편견에 맞서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감독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은 포이티에의 말에서 지나온 싸움을 기억해냈을 뿐이다. 하지만 베리가 포문을 연 오스카의 하이라이트는, 또 하나의 흑인 배우 덴젤 워싱턴의 수상으로 이어지면서 각종 매체에 “역사를 만든” 순간으로 기록됐다. 89년 <영광의 나날>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워싱턴은 <말콤 X> <허리케인 카터> 등에서 놓쳤던 주연상을, 부패한 형사로 능청맞은 변신을 꾀한 <트레이닝 데이>로 차지했다.“40년간 시드니를 뒤쫓아왔는데, 드디어 오스카가 상을 주는군. 그것도 시드니와 같은 날 밤에. 시드니, 난 항상 당신을 쫓아갈 겁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믿음직스런 특유의 미소와 함께 차분한 헌사를 바치는 후배와, 퇴장한 그의 어깨를 감싸며 함께 기뻐하는 선배의 모습을, 유니버설 픽처스의 대표 스테이시 스나이더는 올해 오스카의 명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여느 때보다 흑인 후보들이 많아 시상식 전부터 인종문제가 부각되면서 정치적인 배려가 작용하지 않겠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워싱턴이나 베리나 연기 자체로도 상을 탈 만하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었다. 올해 네번째로 사회를 맡은 우피 골드버그가 역대 조연상 수상자인 것까지, 과연 <타임>의 기사 제목대로 “블랙 히스토리 나이트”라 할 만한 밤이었다. 아카데미가 사랑한 <뷰티풀 마인드> 남녀주연상의 극적인 드라마에 좀 가려지긴 했지만, 올해 오스카의 또 다른 주인공은 감독상과 작품상을 독식한 <뷰티풀 마인드>다. 7개 부문 후보에 오른 <뷰티풀 마인드>는 시상식의 첫 순서로 제니퍼 코넬리가 거의 모든 매체에서 예견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두번째 트로피를 받기까지 3시간여를 기다려야 했지만, 각색상, 감독상, 작품상을 차례로 접수하면서 마지막 승자가 됐다. <아폴로 13> 때 받지 못한 감독상을 수상한 론 하워드는, 로버트 레드퍼드, 케빈 코스트너, 멜 깁슨 등 오스카를 수상한 배우 출신 감독 대열에 들어섰다. <뷰티풀 마인드>는 존 내시의 생애에서 부정적인 부분을 빼며 사실을 왜곡했다는 비방 캠페인에 시달렸으나, 수상에는 별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다만 성인용 농담과 풍자로 시상식의 감초 역할을 한 우피 골드버그는, “올해는 얼마나 흙칠(비방)을 해대는지 모든 후보들이 시꺼메보인다”며 갈수록 후안무치해지는 오스카 캠페인 행태에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레드 카펫을 지나 코닥시어터로 입장할 때 어떤 상을 가장 원하냐는 물음에 “작품상”이라던 하워드의 바람은 이뤄졌지만, “감독상은 몰라도 작품상과 각종 기술부문 등 5개의 오스카를 지켜보겠다”던 피터 잭슨의 기대는 빗나갔다. 13개 부문의 최다 후보지명을 받은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는 실제 작품상과 감독상 중 하나는 탈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분장상, 촬영상, 시각효과상, 음악상에서 4개의 오스카를 모아 눈과 귀를 감탄케 한 스펙터클 판타지로서의 체면을 차리는 데 그쳤다. 이언 매켈런의 수상이 유력시됐던 남우조연상도, <아이리스>에서 천재 작가인 아내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지켜보는 짐 브로드벤트에게 돌아갔다. <뷰티풀 마인드>와 오스카 수는 같지만, 주요 부문을 모두 놓친 맥 빠진 수확이었다. 아카데미의 선택이 요정과 호빗들의 신화적인 서사의 1부보다, 자기세계에 갇힌 천재의 분열적인 삶과 사랑의 실화를 견실히 담은 전기영화란 것이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지만. 이미 몇 차례 아카데미의 외면을 받았던 로버트 앨트먼과 데이비드 린치가 감독상 후보에만 그친 것 역시 예상된 탈락이었다. <빌리지 보이스>의 평론가 짐 호버만은, “론 하워드 같은 인재가 한 자리에 있는데 어찌 그들이 감독상에 호명되겠는가”라고 시니컬한 촌평을 남기기도. 영국 상류사회에 대한 정밀한 앙상블 드라마인 앨트먼의 <고스포드 파크>는, 그나마 오리지널 각본상을 수상해 빈손을 면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감독상과는 후보의 연뿐이었던 리들리 스콧의 전쟁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편집상과 음향상을 차지했다. 상복이 없었던 것은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비롯한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물랑루즈>도 마찬가지. 할리우드 고전장르인 뮤지컬을 부활시킨 화려한 쇼와 음악, 동화 같은 사랑의 마술 같은 이미지는, 의상과 미술을 담당한 캐서린 마틴과 동료들에게 2개의 오스카를 몰아줬을 뿐이다. 바즈 루어먼의 아내이기도 한 캐서린 마틴은, “이 오스카는 당신의 것”이라며 감독상 후보에는 오르지도 못한 남편에게 경애를 표했다. 각각 <반지의 제왕>과 <물랑 루즈>에 참여한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스탭들을 필두로 영국, 이탈리아 등 외국영화인들의 후보지명 및 수상이 늘어난 것은, 해외 로케이션이 많아진 할리우드 영화의 현 주소와 함께 오스카 역시 자국 영화인 위주의 문턱을 낮춰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의 의미 짚은 한편의 쇼 “이 쇼는 아주 길어질 것 같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설명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은 아니더라도.” <물랑 루즈>의 니콜 키드먼처럼 천정에서 그네를 타고 등장한 우피 골드버그의 농담 섞인 예측대로, 올해의 오스카는 4시간21분 동안 계속된 가장 긴 쇼였다. 9·11 사태를 언급하며 “과연 (지금) 영화가 가져다주는 환희와 마술을 찬미해야 할까? 그 어느 때보다 더. 사소한 장면, 제스처,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시선이라도 어떤 경계선을, 장벽을 넘어서고, 편견을 녹여내거나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있다”고 한 톰 크루즈의 오프닝 멘트는, 올해 오스카의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9·11의 사회적 파장과 추모의 뜻을 강조하면서도, 세계의 관객이 지켜보는 최대의 쇼이자 영화의 자축연임을 잊지 않는 것. 그래서 다큐멘터리 감독 에롤 모리스의 오프닝 클립 역시, 새삼 ‘영화란 무엇인가’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천차만별의 답변자들에게서 영화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때로는 그저 ‘셜리 템플’처럼 단순하고, 때로는 꿈 혹은 삶과 닮은 영화. 오프닝 클립은 물론 다큐멘터리상 60주년 기념 편집 필름, 노라 애프런이 편집한 뉴욕에 대한 영화들 등 수많은 트리뷰트 필름과 더불어, 볼거리만큼이나 행사의 러닝타임이 늘어난 것도 일견 당연하다. 후보에만 20번, 그중 2번은 수상까지 했지만 오스카에 참여한 적 없는 우디 앨런이 오로지 영화의 도시 뉴욕, 뉴욕에 대한 영화들에 헌사를 바치기 위해 기꺼이 턱시도를 입고 나타난 것은 유쾌한 깜짝쇼. 스팅, 폴 매카트니, 엔야 등과 함께 주제가상 후보 공연을 장식한 랜디 뉴먼이, 로 16번째 후보지명 끝에 오스카를 받은 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가 됐다. 공로상은 아니지만 영화음악가로서 그의 오랜 공로를 치하하는 즉흥적인 기립박수가 터져나오자, 뉴먼은 “동정은 원치 않는다”며 웃음으로 받아치기도. 신설된 장편애니메이션상은 일찌감치 예견된 대로 드림웍스의 <슈렉>에게 돌아갔지만, 뉴먼의 수상으로 <몬스터 주식회사>도 한개의 트로피는 챙겼다. 그 밖에 <아멜리에>가 보스니아영화 <노맨스 랜드>에 외국어영화상을 빼앗긴 것, 비평가상과 독립영화상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던 <인 더 베드룸>이 5개 부문 후보에만 그친 것 등이 이번 오스카의 작은 이변들. 두 흑인의 주연상 수상으로 할리우드의 영화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밤이 지나고, 74번째 쇼도 끝났다. 가장 많은 관객과 교신하는 할리우드의 판타지가 존재하는 한, 매년 그 판타지로 채워지는 오스카도 다음 쇼를 예비하고 있겠지만. 제74회 아카데미 수상작 및 수상자 명단 작품상 브라이언 그레이저, 론 하워드 <뷰티풀 마인드> 감독상 론 하워드 <뷰티풀 마인드> 여우주연상 할리 베리 <몬스터스 볼> 남우주연상 덴젤 워싱턴 <트레이닝 데이> 여우조연상 제니퍼 코넬리 <뷰티풀 마인드> 남우조연상 짐 브로드벤트 <아이리스> 오리지널 각본상 줄리언 펠로즈 <고스포드 파크> 각색상 아키바 골즈먼 <뷰티풀 마인드> 촬영상 앤드루 레스니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시각효과상 짐 라이질, 랜달 윌리엄스 쿡, 리처드 테일러, 마크 스텟슨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편집상 피에트로 스칼리아 <블랙 호크 다운> 음향상 마이크 밍클러, 마이런 넷팅거, 크리스 먼로 <블랙 호크 다운> 음향편집상 조지 워터스 II, 크리스토퍼 보이즈 <진주만> 미술상 캐서린 마틴, 브리지트 브로치 <물랑루즈> 의상상 캐서린 마틴, 앵거스 스트라디 <물랑루즈> 분장상 피터 오언, 리처드 테일러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외국어영화상 <노 맨스 랜드> 단편영화상 <회계사> 레이 매키넌, 리사 블런트 단편애니메이션상 <포 더 버즈> 랠프 이글스턴 장편다큐멘터리상 <일요일 아침의 살인> 장 자비에르 드 레스트라드, 데니스 퐁세 단편다큐멘터리상 <도드> 사라 케노천, 린 애펠 오리지널 스코어상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하워드 쇼어 주제가상 랜디 뉴먼 황혜림 blauex@hani.co.kr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장의 코멘트들 ▶역대 아카데미 탈락작품 ▶오스카의 불행아 톱 5

<배틀로얄>, 그 폭력과 피와 결핍의 아수라

2000년 일본 최고의 화제작 <배틀로얄>이 4월5일 무삭제로 개봉한다. 폭력성 논쟁을 낳으며 빅히트를 기록한 이 영화는 지난해 부천영화제에서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지만 일본영화 수입제한규정 때문에 한동안 국내 관객과 만나기 어려웠다. 산세바스찬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면서 개봉요건을 갖춰 곧 극장에 걸리는 <배틀로얄>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보고 야쿠자영화의 대부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망해본다. <씨네21> 통신원 사토 유가 직접 진행한 감독인터뷰까지 <배틀로얄>에 대한 모든 것을 모았다. 편집자 바흐의 가 흘러나오는 총격전을 본 적 있는가?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울려퍼지는 학살극을 상상해보았는가? 지난해 봄 화창하게 개인 어느 날, “좋아하는 애 있니?”라고 묻던 친구가 눈앞에서 목이 잘려 쓰러져도 반항할 수 없었던, 겁먹은 소년의 창백한 눈동자를 들여다본 경험이 있는가? <배틀로얄>은 숨이 멎을 듯 격렬하게 전개되는 폭력장면과 상실의 아픔이 배어나는 시적 이미지로 이뤄진 ‘레퀴엠의 영화’이다. ‘죽음’은 <배틀로얄>의 시작이자 끝이다. 죽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간 소년, 소녀조차 영원히 쫓겨다니는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선생님(기타노 다케시)은 말한다. “인생은 게임이다. 다들 열심히 싸워서 가치있는 어른이 되는 거다.” <배틀로얄>은 오직 살아남은 자만 가치있는 어른이 되는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정치 스캔들로 오히려 폭발적 흥행 2000년 일본에서 이 영화는 자국에서만 25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히트작이지만 흥행 이전에 정치권을 들쑤신 스캔들이었다. 영화를 미리 본 일부 국회의원들은 청소년에게 이런 폭력적인 영화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성토하기 시작했다. 한 국회의원은 청소년 입장가 영화에서 섹스와 폭력묘사를 보고 강력히 제한하자는 법률개정안을 내놓았고, <배틀로얄> 상영을 금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폭력묘사에 관대한 입장을 보였던 일본에서 정치권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엔 당시 사회분위기가 결정적이었다. 고베에선 15살 소년이 초등학생을 납치해 머리를 잘라 학교 정문 앞에 놓아둔 사건이 있었고, 17살 소년이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때려죽인 일도 발생했다. 청소년 강력범죄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중학생들이 오직 한명만 남을 때까지 같은 반 친구를 죽인다는 설정은 등골이 서늘해질 만하다. 한마디로 무서운 10대들에게 겁이 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권이 보인 특별한 관심은 <배틀로얄>의 상업적 성공에 대단한 도움이 됐다. <타임 아시아>에서 일본 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정치적 논란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흥행을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정치인들에 대한 항거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배틀로얄>은 만화로도 만들어진 다카미 고순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가까운 미래의 일본, 실업률 15%, 실업자 1천만명, 등교거부학생 80만명 등 사회는 불안하고 학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신세기 교육개혁법’이라는 명분을 갖고 탄생한 ‘배틀 로얄’(Battle Royale)은 전국의 중학교 가운데 1개반을 무작위로 선택해 고립된 섬에 데려다놓고 1명만 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도록 만드는 법률이다. 중학교 3학년 학생 42명이 간택되고 살인게임이 시작된다. 얼핏 누가 살아남는가를 놓고 내기를 벌이는 단순한 액션영화 같지만,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1930년 태어나 종전되던 1945년에 영화 속 인물들처럼 15살 소년이던 노감독 후카사쿠 긴지가 원작소설에 관심을 보인 것은 조금 다른 이유이다. <타임 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15살 때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공장은 매일 폭격을 당했고 나는 또래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치워야했다. 그걸 한군데 모아서 태우는 것이었다. 거기서 전쟁과 죽음의 의미를 배웠다. 그런 뒤 갑자기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 어른들은 자신감을 잃었고 아이들과 소통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니까 후카사쿠는 원작소설에서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 ‘전쟁’과 ‘죽음’을 본 것이다. 거꾸로 말한다면 <배틀로얄>은 영화 전체가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영영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이뤄져 있다. 정수리에 칼과 도끼가 꽂히고, 입에 수류탄을 문 채 터져 날아가고, 낫에 목이 잘리고, 온몸에 총알이 박히고,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는, 그 모든 잔인한 장면에 드리운 그림자는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내몰린 자들을 향한 연민이다. 그 애틋한 감정은 <갓 앤 몬스터>에서 등장하는 감독 제임스 웨일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웨일은 평생 1차대전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적군과 아군 중간 지점에서 철조망에 찢겨죽은 연인이 썩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던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게 전쟁의 상처를 이식했다. 괴물의 이마에 선명히 드러나는 꿰맨 흔적은 철조망에 찢어진 것처럼 흉하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진정 ‘친구’를 갈망했지만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시스템 - 15살의 순정의 추억을 난도질하는 괴물 <배틀로얄>에서 진정한 괴물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생존경쟁으로 몰아넣는 시스템이다. 한명만 남을 때까지 친구를 죽인다는 설정이 단지 철모르는 10대들한테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니라는 건 영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죽음이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데서 드러난다. 어느 날 학교에 돌아온 아들은 “슈야, 힘내라”라는 한마디 유언을 남겨놓고 목을 매단 아버지를 발견한다. 아버지가 겪은 절망과 무력감이 ‘배틀 로얄’에 선발된 아들에게 유전된다. 두번째 등장하는 죽음은 ‘배틀 로얄’에 반대한 담임선생님이다. 피눈물이 흘러 채 눈을 감지 못한 선생님의 시체가 학생들 앞에 등장하면, 살인게임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는 동안 등장인물들의 선택은 ‘죽느냐 아니면 죽이느냐’밖에 없다. 친구를 믿었던 소녀는 배신당하고, 현실도피를 꿈꾸던 소녀들은 서로를 의심하다 공멸하며, 혁명을 꿈꾸던 친구들에겐 날아오는 총탄에 대적할 무기가 없다. 그렇다고 죽이는 쪽에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태연하게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르던 소녀는 너무 일찍 세상의 더러움을 알았기에 언제나 외톨이였다. “강해져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랐던 그녀는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난 그저 빼앗는 쪽이 되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살인게임을 지휘하는 선생님 역시 시스템의 희생자이다. 지난날 학생들에게 수모를 당했던 그는 ‘배틀 로얄’의 의미를 한마디로 단정한다. “이 나라는 이제 끝장이야.” 후카사쿠는 스크린에 피 칠갑을 하는 이 영화를 “우화 혹은 동화”라고 말한다. “전쟁의 견고한 이미지를 전달하되 그 방식은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방식이 아니라 동화처럼 풀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이 말한 ‘동화’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솝우화나 그림동화 같은 종류는 아니다. 미소년, 미소녀로 이뤄진 학생들의 면면에다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짧은 교복치마까지, <배틀로얄>은 순정만화 혹은 저패니메이션의 필체와 감수성을 따른다. ‘배틀 로얄’이 그들을 죽음의 경주로 밀어넣는데도 아이들은 삼각관계에 휩싸이거나 짝사랑에 몸달아한다. “니 앞에서 영원히 달릴 거야”라고 말한 소녀와 “그럼 난 니 뒷모습만 볼게”라고 답한 소년은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기 직전 만난다. 마지막 숨을 내쉬며 소녀는 소망을 빈다. “주여, 한마디만 더 할게요.” 묘하게도, 낯이 뜨거울 만큼 유치한 이런 대목들이 <배틀로얄>의 차디 찬 폭력묘사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다. 짝사랑하던 소년이 다치자 붕대를 감아주며 소녀의 가슴은 벅차오른다. 소년을 간호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 그녀는 말한다. “난 너에 대해 다 알아. 이 의미를 알겠어?” 소녀는 다음 순간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그녀가 남긴 한마디만이 소년의 머릿속에 맴돈다. “이 의미를 알겠어?” 전쟁이, 살인게임이, 생존경쟁이 정말 몸서리쳐지는 순간은 그들의 풋풋하고 설익은 사랑과 우정, 바로 순정만화의 세계가 무너지는 때이다. 후카사쿠는 15살 아이들에게 순정의 추억을 빼앗아가는 것이야말로 시스템이 저지르는 가장 잔인한 범죄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서구 평자들이 이 영화를 무인도에서 권력투쟁을 벌이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이나 서바이벌 게임을 다룬 영화 <러닝맨> <롤러볼> 등에 비견하면서 놓치고 있는 대목도 이런 부분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지극히 감상적인 어떤 측면을 <배틀로얄>은 주저없이 품에 안는다. 이제 어른들은 어떡하면 좋을까? 후카사쿠가 연출하려다 포기하는 바람에 연출까지 맡게 된 영화 <그 남자 흉포하다>로 데뷔한 기타노 다케시는 <배틀로얄>에서 살인게임을 지휘하는 선생님 기타노로 나온다. 기타노의 존재는 아이들이 꿈꾸는 순정만화적 세계와 대척점을 이룬다. 학생은 선생님을 무시하고, 딸은 아버지를 멸시한다. 더이상 10대들과 대화할 수 없게 된 기타노는 복수를 감행한다. 반항하는 아이들에게 그는 망설임 없이 칼을 던지고 리모컨 단추를 눌러 목을 터트린다. 아무 표정없이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기타노의 이미지는 <소나티네>나 <하나비>에서 봤던 대로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타노의 복수는, 그러나 자해에 가깝다. 오래 전 비오는 날 강가에서 소녀는 기타노의 진심과 만났던 것을 기억한다. “처음 수업에 들어가면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돼. 시간이 지나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고 사랑스러워져.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말하자면 기타노는 <프랑켄슈타인>에서 더이상 친구도, 가족도, 대화할 상대도 없어 좌절한 괴물이다. 이마에 꿰맨 흔적이 뚜렷한 흉한 몰골이 아니라 단지 얼굴 근육을 실룩거릴 뿐인 무표정한 중년 사내지만 영화는 어느 순간 기타노에 대한 동정심을 자아낸다. <배틀로얄>에서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10대들을 향한 안타까운 시선은 기타노처럼 망가진 어른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2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전쟁을 경험한 기성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전후세대간 단절을 경험했던 후카사쿠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세대간 소통부재의 현실에서 ‘친구’와 ‘가족’을 목말라하는 괴물을 본다. 3년 전 ‘배틀 로얄’의 생존자였던 소년이 다시 전장에 뛰어들어 그 의미를 깨닫고 싶어했던, 사랑하던 소녀의 미소가 뜻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어른도 아이도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꿈에서나마 보고 싶어한다. 일본에서 2000년 12월 개봉했던 <배틀로얄>은 이듬해 4월, 8분이 추가된 ‘특별판’으로 재개봉됐다. 국내 개봉되는 영화는 이 특별판으로, 덧붙여진 8분은 몽환적으로 처리된 레퀴엠이다. 원래 엔딩은 감독이 10대들에게 들려주는 당부였다. 죽은 친구의 칼을 품고, 세상이 그들을 이방인으로 몰아세워도 두손을 꼭 잡고 “뛰자!”. 특별판은 이 엔딩 다음에 3개의 레퀴엠을 붙여놓았다. 아마 후카사쿠는 영화의 엔딩에서 등장인물들의 소망이 이뤄지는 모습을 보고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아이들이 서로 아끼고 위하던 순간을 붙잡아두며 기타노의 진심이 깃든 염려로 고별사를 쓴다. “이제 어른들은 어떡하면 좋을까?” 자막으로 다시 한번, “이제 어른들은 어떡하면 좋을까?” 남동철 namdong@hani.co.kr▶ <배틀로얄>, 그 폭력과 피와 결핍의 아수라 ▶ <배틀로얄>의 아이돌 스타들 ▶ 폭력미학의 거장 후카사쿠 긴지(深作欣二) 감독 탐구 ▶ 후카사쿠 긴지 인터뷰

제 1장 그 감독, 이상하다

한살 터울의 두 감독, 박찬욱과 김지운은 어딘지 닮았다. 체내에 흐르는 영화광의 피가 잡아당겨서 그런지 시사회나 회고전을 비롯해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에서 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류승완 감독이 “우정의 가교”였다고 말하는 두 감독은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로 21세기 첫해의 스타 감독으로 떠오른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영화세계가 겹치는 교집합은 그간 만든 영화보다 그간 본 영화쪽에 훨씬 폭넓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두 감독이 만나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근사할 것이라는 발상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진정 서로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해줄 수 있는 두 감독의 이야기는 엿듣는 즐거움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해보였다. 김지운은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나라면 두려워서 코미디로 피해가는 부분을 과감히 치고나간 영화”라며 박찬욱을 “늘 나보다 한두발 앞서 나가는 감독”이라 말한다. 송강호에게 코믹연기가 아닌 전혀 다른 이미지를 뽑아낸 것만 봐도 김지운의 이런 말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두 감독의 대화는 서로에게 장풍을 날리는 내공 겨루기가 아니다.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서 김지운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남들이 못 보는 면을 샅샅이 뜯어본다. 때로 정말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우고 때로 아무도 눈치 못 채는 연출자의 진정한 성과를 추어올리면서 대화는 훌쩍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일단 글을 썼다 하면 기자, 평론가들이 펜을 꺾고 싶게 만드는 두 감독은 대담도 정말 멋지게 해치우려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떤 담화를 펼쳐야 근사하다고 소문날 것인가에 대한 은근한 탐색전으로 시작했다. 김지운: 요즘 뭐 하고 사는지. 박찬욱: 개봉 전 막바지 인터뷰하면서 한동안 접하지 못했던 책 읽고 영화 보고 산다. <복수는 나의 것>이 메가히트가 되면 인터뷰 요청이 다시 쇄도하겠지만. (웃음) 인터뷰까지는 참는데 사진 포즈 취하는 게 고역이다. 김지운: 모 잡지에 실린 박 감독 사진 보니까 전날 밤 술 많이 했는지 눈이, 거의 한번 빼서 술에다 담갔다 다시 끼운 안구 같더라. 박찬욱: 배우들과 매일같이 술 많이 했다. 인터뷰가 재미있으면 인터뷰어와도 좀 마시고. 요즘 본 영화 중에는 DVD로 본 <존 말코비치 되기>가 최고다.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막히더라. 서플먼트는 또 어떻고. 조수석에 앉은 기자가 질문하며 캠코더로 찍고 감독이 운전하면서 대답하는데, 상투적인 일련의 질문에 줄곧 메슥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아예 차를 세우고 마구 토하는 게 아닌가! 기자들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연출한 조크겠지만. 김지운: 나도 얼마 전 잉마르 베리만과 그의 오랜 동료였던 요셉슨이라는 사람의 대담을 봤는데 어찌나 재밌던지. 압권은 ‘평론가 폭행사건’에 관한 수다였는데, 베리만의 평론가에 대한 증오심이 <복수는 나의 것> 수준이더라. 내가 폭력을 가했지만 언어폭력도 신체에 가해진 폭력 이상의 상처가 된다면서. “우발적이었나?” 물으니 “아니, 철저히 준비했다”고 하고 “고인이 됐지만 그놈은 정말 죽일 놈이었다”고 못 박았다. (웃음) 당시 평론가협회에서는 회의를 하고 난리였던 모양이다. 베리만은 82살, 요셉슨은 77살인데 그 연배의 두 대가가 만나서 죽음이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잠깐 하고 여자이야기만 30분 이상 낄낄거리면서 했다. 누군가 “두분이 만나면 자주 이러냐?”고 물으니까 “사실 그것밖에 할 게 없다. 우리 둘의 명랑함은 계속될 거다”고 말했다. 그 염세적인 ‘암울쟁이’가 말이다. 그 인터뷰를 보다 박 감독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질문이 떠올랐다. 잉마르 베리만이 아들한테 “내가 네게 나쁜 아버지라는 걸 인정한다”고 하니까 아들이 “나쁜 아버지조차 못 된다”고 빽 소리를 지르던데 당신은 좋은 아빠인가? 박찬욱: 많은 감독이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집에 오래 못 있고, 있어도 머리가 딴 데 가 있는 직업상 결함 탓이다. 그래서 “이건 집중력의 문제다” 생각하고 집에 있을 때만큼은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딸내미라(서우) 아빠를 따른다. 얼마 전엔 방학숙제한다고 해서 우리 둘이 조그만 동화를 하나 만들었다. 김지운: 박찬욱 감독 딸 서우는 내가 만나본 여자 중에 최고로 매력적이고 도도한 숙녀다. 그 카리스마는 실로 압도적이다. 영화야 물론 내가 한참 더 따라가야 하지만(박찬욱, 쿡 웃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영화 속에 아내와 딸을 향한 사랑이 보이는 지점이었다. 박찬욱: 서우는 자기 아빠가 감독이라는 사실, <공동경비구역 JSA > 감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무척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나 좌중의 누가 그 얘기를 꺼내면 그러지 말라고 아빠 싫어한다고 몸을 날려서 막곤 한다. 김지운: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오는 보배는 전형적이지 않으면서도 독특한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인물이다. 감독의 딸에 대한 감정이 들어간 부분일 거다. 박찬욱: 시나리오는 96년에 썼지만, 아빠가 된 뒤 만들기 잘 했다는 생각도 들더라. 특히 고만한 아이를 둔 내 또래의 아빠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신하균이 누나의 자살을 알게 될 때 보배가 <보노보노>를 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치마 들추는 장난하고 하균이 다리 포개면 보배가 올라타서 턱을 괴는 동작의 연출은 ‘애 아버지’가 만든 영화다운 순간이다. 내게 애가 없었다면 그저 건조하게 찍었겠지. 김지운: 6년 전 시나리오와 지금 영화가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박찬욱: 범죄를 부추기기만 하는 작은 역이었던 영미의 비중이 캐스팅 이후 야금야금 커졌다. 그건 전적으로 배두나 책임이다. 김지운: 책임이라니? 박찬욱: 귀여우니까. 돈도 많이 줬으니까 본전 생각도 나고. (웃음) 엔딩에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것도 뒤늦게 들어갔다. 그건 전적으로 봉준호 감독 책임이다. 고민하고 있는데 봉 감독이 나서서 “이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술자리에서 송강호도 ‘전향’했다. 혹자는 남의 영화라서 그렇게 용감했을 거라고 하더라. 김지운: 어쨌거나 <복수는 나의 것>을 전작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휴머니즘과 웃음과 감동의 <…JSA >에서 180도 바뀌었다는 식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특이한 행보 아닐까. 박: 뭐, <배트맨> 만들던 사람이 <에드 우드> 찍는 거나, <위험한 관계> 만든 감독이 <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만든 거나, <크라잉 게임> 감독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찍은 거나. 나는 날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내 영화에 감독의 흔적이나 일관성이 없었으면 좋겠고 심지어 한 사람이 만든 영화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 제 2장 그 영화, 이상하다 ▶ 제 3장 그 배우, 더 이상하다 ▶ 제 4장 리얼리즘, 그것도 이상하다 ▶ 제 5장 이상해서 좋다

아바오오우우우∼ 혈투는 끝나지 않았다, <용쟁호투>

내가 처음 극장이란 델 간 건 일곱살 때다. 신작로에서 놀던 반바지 러닝 바람 그대로 부모를 따라 제천의 어느 극장에서 동시상영하던 왕유의 <돌아온 외팔이>와 유현목의 <공처가 삼대>를 봤다. 이 두편의 영화는 재미있었다는 기억 이상의 자극을 내 뇌의 주름에 남기지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열광한 영화는 중1 때 본 <용쟁호투>였다. 주연배우는 나만큼 쌍절곤과 괴조음을 잘 구사했고, 성까지 같았다. 이소룡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한 영화 속 나의 영웅이었다. 지금껏 배우의 브로마이드나 팬북을 산 건 그의 것이 유일무이하다. 특히 쌍절곤. 이소룡은 내게, 쌍절곤만 있으면 세상 누구와 맞서도 두려울 게 없을 거란 환상을 심어줬다. 서울 변두리의 유명한 깡패학교를 중·고등학교 합해 6년씩이나 다녀야 했던 나로선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쌍절곤에 머리통 팔꿈치 맞아가며 지성으로 돌렸다. 요즘 더러 흐린 날 팔꿈치가 시려오는 건 혹시 그 때문이 아닐까. <용쟁호투> 등 그가 남긴 네편의 주옥 같은 영화에서 압권은 늘 결투 장면이었다. 작은 체구의 내 영웅은 조직이나 집단에 기대지 않고 늘 혈혈단신 적진 한가운데서 상대와 정면대결을 벌였다. 그의 결투 장면은 스크린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광기를 뿜어냈다. 미안하게도 내가 성룡이나 이연걸을 ‘졸’로 보는 건, 그들에게선 이소룡에게서 느꼈던 귀기 서린 투사의 숭고미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용쟁호투> 다음으로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는 잉마르 베리만의 적장자 빌 어거스트의 <정복자 펠레>(1988)였다. 이 영화에서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친척에게 강간당한 철부지 소녀가 알몸으로 하얀 드레스의 선혈을 샘에서 닦는 장면도, 농장 여주인이 바람둥이 남편의 성기를 가위로 잘라버리는 장면도 아니었다. 내겐 펠레의 아버지 라세(막스 폰 시도우)가 악독한 농장관리인 앞에서 분노가 끓어올랐을 때의 시퀀스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식의 계급행동주의를 최고의 미덕이라 여겨왔던 당시의 나로선 당연히 피지배계급 라세가 쇠스랑을 움켜쥐고 지배계급의 하수인의 머리통을 갈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계급의식도 없게시리, 라세는 울분과 쇠스랑을 함께 내려놓았다. 그는 관리인의 머리통을 가만 놔두는 대신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것이 차가운 현실이다! 그런 비루함이 삶의 진실이다! 혁명? 계급투쟁? 그건 다 관념이다! 세상은 흑백으로 나뉘지 않으며, 세상을 잿빛으로 만드는 요인은 너무도 많다. 나는 내 눈에서 비늘이 한 꺼풀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펠레> 다음으로 내게 인상을 남긴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나를 가장 많이 울린 영화다. 난 이 영화를 두번 봤는데, 볼 때마다 엉엉 울었다. 그 시절 ‘이쪽’에 서 있었든 ‘저쪽’에 서 있었든 그 저주스런 세월을 피해갈 수 없었던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 남루한 젊은 시절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다. 난 내가 너무 비겁하게,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에 <…펠레>를 보며 “그것이 현실”이라 깨닫고, <박하사탕>을 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한다. 지혜를 깨닫고 옛일에 연민의 눈물을 뿌리는 일은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현실이 잿빛으로 변하고 회색논리가 지혜로 받아들여질 때, 그런 이중성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진작 암세포라도 불러들여 무덤으로 갔다. 아마 <용쟁호투>의 악당 ‘한’도 젊었을 땐 이소룡처럼 혈혈단신으로 세상과 맞서려 한 투사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순리’를 받아들이면서 그는 어느새 거대한 조직을 거느린 보스로 변한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우리의 귀는 두 개이고, 세계엔 대개 두 가지 목소리가 흘러다닌다. 하나는 모든 걸 거부하는 부정의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걸 포용하는 ‘지혜’의 목소리다. 지혜의 소리가 나쁠 건 없지만, 그건 일쑤 비굴이나 기회주의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부정의 소리 대신 ‘지혜’의 소리에 귀를 더 많이 기울인다는 뜻일 터이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이 모호한) 지혜와 회한은 점점 자리를 넓혀갈 게 틀림없다. 그러나 난, 몸은 늙어가겠지만, 정신으로는 부정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싶다. 그런 까닭에 난 내게 지혜와 통한을 일깨워준 영화 대신 온몸으로 싸우는 혈투의 정직함을 보여준 <용쟁호투>를 여전히 내 인생의 영화로 기억할 것이다(아바오오우우우∼).

빚지면서도 꾸준히 일에 전념, 영화의상에 관한 깨달음 얻어

<오싱>을 찍던 해인 85년도에 <어우동>을 찍으면서 나에게 의상철학 비슷한 게 생겼어. 영화의상은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는 것. 영화의상이란 모름지기 유행을 선도하고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영화에서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액세서리를 하고 나왔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곤 하잖아. 그게 흥행한 영화라면 말할 나위가 없지. 근데 영화매체라는 게 만들어지는 시기와 유포되는 시기가 어느 정도 간격이 있거든. 그러니까 만들 당시엔 획기적이고 시대를 앞서도 만들고 나서 상영될 즈음이면 어느새 남들이 다 하는 한물간 패션이 되곤 했어. 그렇기 때문에 의상을 만들 때 더욱 신경을 써야 했지. 앞으로 어떤 패션이 주목을 받겠구나 하는 시대감과 더불어 그 이후의 이미지까지 만들어내는 창조력이 함께 필요한 작업이었어. <어우동>이 관객을 만나서는 ‘그저 그런 에로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극중 의상의 작은 변주들이 보여주는 신선한 개성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었어. 어차피 영화는 하나의 그럴 듯한, 있음직한 거짓말이잖아. 따라서 의상도 정확히 사실에 근거하여 만들기도 해야겠지만, 감독의 상상력과 의상장이의 창조력이 만나 전혀 새로운 복장을 선보일 수 있는 거겠지. 고증이 필요하고, 또 고증을 받아야만 하는 영화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영화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그간의 작업을 통해 내 안에 자리잡기 시작했어. 실제로 사실을 중시하고 조금 더 본질에 가까운 것을 찾는, 예컨대 임권택 감독이나 이두용 감독, 배우 김승호씨 같은 경우에는 나와 작업하는 것을 기꺼워하고 좋아했지만, 그렇지 않은 감독들은 굳이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의상부와 일하려고 하지 않았거든. 대충 손바느질이나 익히고, 소품이나 만지다 온 젊은 사람들도 흉내는 낼 수 있었으니까. 까탈스런 잔소리나 의견 대립 없이 그저 감독이 하자는 대로 해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기도 할 테고. 어쨌거나 내 안의 그런 신념과는 상관없이 상황은 자꾸 어려워져만 갔어. 지금 생각하면 희안하게도 그런 고된 시간들이 그런 신념을 더욱 부추긴 것 같기도 하지만. 87년 또 한번의 화재를 겪어 경황이 없으면서도 찍고 있던 <연산일기>를 소홀히할 수 없었어. 오랜 영화 지기인 임권택 감독이 의뢰한 작품이기도 하고, 유독 연산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손에 자주 떨어져 ‘더 낫게 만들어야지’ 하는 조바심도 있었고. 뇌출혈로 병원 신세를 질 때 얻었던 빚을 채 갚지도 못했는데, 의상을 제대로 짓겠다고 또 빚을 냈어. 영화가 잘 되면 일거에 해소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겠지. 그런 바람 때문인지 영화가 개봉되고 많은 호평 속에 대종상 네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이뤘어. 그 영화 덕에 감독이든 배우든 다 한몫 단단히 잡았겠지만, 나는 여전히 예외였어. 영화를 시작하면서 받은 수표 한장을 제외하고 영화가 개봉된 뒤, 상을 받은 뒤 내게 온 몫은 단 한푼도 없었으니까. 조금도 청산되지 않은 빚을 고스란히 지고 한 동네에서 버티다 지쳐 다른 동네로 떠나는 ‘이사 전쟁’도 여전히 계속됐지. 그렇게 상황이 어려웠어도 현장을 떠날 수는 없었어. 이유는 한 가지야. 내가 바보라서 그래. 누구든 그런 상황이라면 다 떠났겠지만 내겐 천형처럼, 천직처럼 쉽게 저버릴 수 없는 자리였어. 그리고 89년 <애란>을 만났지. 내가 어떤 영화를 기억해내는 이유는 다른 게 아냐. 그저 아주 힘이 들었기 때문이야. <애란> 역시도 앞의 다른 영화들처럼 고생이 심했어. <깜보>라는 영화로 신선하다는 평을 받던 이황림 감독이 박영규, 임성민 등을 데리고 영화를 찍는데, 엑스트라 500여명이 강물로 뛰어드는 전쟁 신이 있었어. 벌써 여기까지 얘기했으면 말 다했지. 미사리 개울가에 500명을 죽 모아놓고 물로 뛰어들라고 하는데 나는 감독 옆에서 애만 바짝바짝 타는 거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신도 아닌데, 감독은 그렇게 해야 좀 볼 만한 장관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겠지. 한 신을 마치고 엑스트라들이 물을 줄줄 흘리며 나오는 걸 한벌씩 벗겨서 물에 흔들어 씻어서 바위 위고 어디고 말리는데 장마통이라 당최 마르질 않아. 다음 신 찍을 때는 됐고, 옷은 덜 말랐고, 또 그렇게 애만 바짝바짝 태웠지. 아마 반은 더 썩었을 거야. 그땐 감독이 일부러 나를 이렇게 골탕먹이나 싶어 얼마나 야속했던지. 엑스트라들도 협조 안 하기는 매일반이야. 버선이나 고무신은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맨발로 돌아다니기 일쑤고, 촬영이 끝나면 의당 의상을 벗어놔야 하는데 그냥 입고 가는 사람도 있고. 그러면 나 혼자 애가 달아 버선 한짝이라도 눈에 띄면 다 주어와 떨어진 곳은 꿰매놓고, 그렇게 짠순이에다 깍쟁이 노릇을 해야 제작비를 한푼이라도 줄일 수 있으니까. 구술 이해윤/ 1925년생ㆍ<단종애사> <마의 태자> <성춘향> <사의 찬미> <금홍아 금홍아> <서편제> <친구> 의상 제작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밝은 이미지의 여자 모델 내세운 소주 광고 두편

<진로> 제작연도 2002 광고주 진로 제품명 참이슬 대행사 인터막스애드컴 <잎새주>제작연도 2002 광고주 보해양조 제품명 잎새주 대행사 베이직거손 광고계는 지금 명랑자매의 전성시대다. 밝고 맑은 이미지가 일맥상통하는 김정은(26)과 장나라(21)가 광고계를 갈짓자로 휘젓고 있다. 현재 TV를 켜면 방긋방긋 웃는 이들의 모습을 만나기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지난해엔 ‘산소 같은’ 이영애가 ‘이영애의 하루’란 유머스토리를 낳을 만큼 다작모델로 이름을 날렸다. 올해에는 단연 두 사람이 그 몫을 담당하고 있다. 먼저 명랑자매의 언니인 ‘김정은’. 올해 초 BC카드 광고의 ‘부자 되세요’란 덕담으로 홈런을 날리면서 ‘CF퀸’이란 영예를 새롭게 거머쥔 주인공이다. 그의 ‘맛있는 입’을 통하면 모든 광고카피가 유행어로 변한다는 통설이 있다. ‘딱 좋아’(하이주 CF),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캄사합니다’(대우전자 김치냉장고 CF), ‘만지지마’(장인가구 CF) 등이 ‘김정은 입’ 주연의 히트카피. 아무리 밋밋한 내용일지라도 김정은이 소화하면 갑자기 통통 튀는 마력을 발휘, 소비자의 뇌리에 쏙쏙 박힌다. 마법 같은 입담 및 표정연기의 소유자. 정상급 스타로 부상하기 전 이미 한솔엠닷컴의 018 CF에서 ‘묻지마, 다쳐!’를 진지한 코믹어투로 연주해 뛰어난 말재주를 과시한 바 있다. 현재 주류, 카드, 가구, 화장품 등 10여개의 광고에서 맹활약중. 다음은 명랑자매의 동생인 ‘장나라’. ‘…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로 유명한 파파이스 CF에서 맷돌 가는 처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언니 김정은이 광고 속 활약에 힘입어 ‘톱’이란 수식어를 단 데 비해 장나라는 시트콤,가수 활동 등 연기자 겸 가수로 본업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다음 광고계의 빗발치는 초대를 받기 시작했다. 현재 ‘요 알은’으로 시작해 ‘알차구나’로 끝나는 KTF의 10대전용 이동통신 브랜드 비기 CF를 비롯 주류, 제과, 음료, 화장품, 면류 등 주요 광고분야를 섭렵. 교복 입은 소녀(비기 CF), 귀여운 공주(해태제과의 하몬스 CF), 실연당한 대학생(웅진식품의 초록매실 CF) 등 희비극을 오가는 다양한 이미지를 표출중이다. 강아지 같이 순진무구한 눈빛 빛내기, 병아리처럼 입 삐죽거리며 투덜거리기 등이 장기. 이렇게 현 광고계는 ‘명랑숙녀’ 김정은과 ‘명랑소녀’ 장나라를 탐욕스럽게 소비하고 있다. 그런데 명랑자매의 득세에 일각에서는 의아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광고가 사랑해온 전통적인 여신 이미지와 거리가 있는 매력 때문이다. 광고의 빅모델 하면 으레 심은하, 이영애, 김희선, 고소영 등 뭔가 특별한 게 있는 미모와 신비한 카리스마를 겸비한 스타가 꼽혀왔다. 김지호, 채림 등 탁월한 외모가 없어도 통통 튀는 이미지로 CF를 누빈 예가 있지만 이들은 일정 시기를 풍미한 뒤 급격히 쇠락하는 부침을 보였다. 생기발랄한 이미지는 순간의 파급력 못지않게 휘발성도 강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무리 선망하는 여신 이미지가 변화를 겪는다고 해도 우러러볼 수 있는 신전의 핵심부는 늘 타고난 공주(같은 스타)의 차지였다. 김정은과 장나라는 도도하지도, 조각 같은 이목구비와 몸매를 타고나지도, 개성이 철철 흐르지도 않는다. 심지어 김정은은 B급 이미지로 분류되기 십상인 푼수끼도 지녔다. 그러나 진정한 주연은 헤프게 만발하지 않고 한번에 깊숙이 찔러넣는다는 통념을 뒤집으며 아주 잘 나가고 있다. 종횡무진하고 있지만 이들의 영향력을 ‘깊은 맛이 없다’고 평가절하하기는 곤란해보인다. 광고 속 김정은과 장나라는 친절한 치어리더 같다. 김정은은 ‘부자 되세요’란 덕담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싫지 않은 바람을 넣는가 하면(BC카드 광고) 직장동료가 와이셔츠를 제대로 빨아입고 왔는지를 요리조리 살피는 오지랖을 발휘한다(옥시 광고). 그는 소소한 일상의 영역에 침투해 관심의 촉수를 들이대며 소비자를 다독거린다. 김정은에 비해 다소 낮은 연령대의 소비자를 겨냥하고 있는 장나라 역시 제품의 장점을 친구처럼 또박또박 설명하며(비기 광고) 주입식과 다른 공유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 이들은 내숭없는 맨얼굴로 승부한다. 술집이 떠나가라 ‘나 술 못 마신다’고 목청을 높이거나(김정은의 하이주 광고) 게으른 한량 남자친구를 구박하는(장나라의 파파이스 광고) 모습 등은 솔직한 감정표현의 카타르시스를 자아낸다. 때로는 이들도 ‘공주’티를 낸다. 김정은은 참이슬 광고에서 얼굴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이슬만 먹고산다’고 천연덕스럽게 외치고 있으며, 장나라는 잎새주 광고에서 깜찍하게 윙크하면서 스스로를 ‘싱그럽다’고 주장한다. 과장법을 섞은 이들의 귀여운 잘난 체는 무게를 잡는 기존 공주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 술 권하는 미녀가 섹시한 캘린더 걸에서 명랑자매로 달라졌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명랑자매의 득세는 만만한 대중적인 화법이 유행하고 있는 광고계의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 현재 명랑자매는 잡초 같은 꿋꿋함과 생명력으로 적극적인 세일즈맨십을 발휘하고 있고, 소비자는 여신이 아닌 비슷한 눈높이의 친근한 미녀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kr

고구마의 영화작업들

<죽이는 이야기> 1997 고구마의 영화데뷔작. 음악 때문에 여균동 감독을 만났다가 여관 종업원 역에 전격 캐스팅됐다. 여관방에다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촬영을 해 그걸 깡패에게 ‘바치는’ 동시에, 문성근이 분한 영화감독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는, 중요한 조역. 몰카 비디오를 처음 찍은 후 하는 대사 “이제 어떻게 살지 필이 와요, 필이”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구마의 첫 영화이자 고구마 출연작 중 백미. 고구마는 극중 전혜진이 클럽에서 부르는 감미로운 노래를 작곡, 음악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1998 <죽이는 이야기>를 끝내고 얼마 안 있어 순전히 ‘배우’로 캐스팅된 영화.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잘 되고, 영화가 처음인 나를 배려 많이 해 주는” 행복한 작업이었던 <죽이는 이야기>와 달리, 이 영화는 “하고 나서 후회”를 하고 만다. “영화판을 제가 잘 몰라요. 사실 지금도. 무슨 영화를 해야 하고 말아야 하는지, 그런걸 지금도 잘 할 줄 모르는데 그땐 아예 그런 게 없었죠.” 이 영화에서 고구마는 그림을 그리는, 이상 동호회 회원 ‘캔버스’를 연기했는데, 영화 초반 고층빌딩에서 떨어져 죽는 관계로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우렁각시> 2002 고구마의 첫 주연출연작. 주윤발을 흠모하는 뒷거래철공소 건태는, 어느날 우렁이를 사람으로 변신시키는 독을 얻고 거기서 우렁각시를 만난다. 고구마가 이 영화 촬영을 하면서 평소 좋아하던 기주봉 씨와 함께 출연해 좋았단다. 예전에 어느 단편영화 음악을 할 때 처음 영화 속 기주봉 씨를 봤는데, 그때부터 팬이라고. 이 영화에서 고구마는 희한한 판타시틱 무비의 결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잘 읽어내는 연기를 했다. 음악은 원래 하기로 했던 사람이 두손들고 나가는 바람에 하게 됐다고. 멜로디언, 피리, 북 등 초등학생들이 쓰는 악기들을 많이 써 판타지 분위기를 살렸다. <러브 러브>에 이어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O.S.T. 작업. 2002 신윤철씨를 음악에 소개하다가 ‘걸려든’ 작품. 정은표와 함께 ‘바텐더-웨이터’ 커플로 나온다. 영화의 화자라 할만한 중요한 조연이지만, “계속 맞는다”고. “<죽이는 이야기>에서 맞는 연기를 한 후에, 그런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그런 걸 시켜요. 안하면 되는데, 또 시키면 하니까. 진짜 하고 싶은 건, 조용조용히 연기 별로 안 하고 하는 역이에요.” 너무 ‘양아치’ 영화라 기억이 좋지 않은 듯. 신윤철씨를 도와 음악작업에도 참여한다.▶ <뽀삐> <꽃섬> 출연한 어어부프로젝트 보컬 백현진 ▶ 백현진이 쓴 노랫말들 ▶ <죽이는 이야기> <우렁각시>, 삐삐롱스타킹의 고구마 ▶ 고구마의 영화작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