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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쉬핑 뉴스

■ Story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소년 코일(케빈 스페이시)은 자라서 불행한 윤전공이 된다. 분방한 페틀(케이트 블란쳇)과 즉흥적으로 결혼한 그는 아내와 딸에게 사랑을 쏟지만, 가출한 페틀은 시체로 돌아오고 부모의 동반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고모 아그니스(주디 덴치)와 함께 선조들의 고향 뉴펀들랜드로 딸을 데리고 이사한 코일은 어촌 킬리클로의 지방신문 <개미 버드>의 기자로 취직해 새로운 생활을 하며 가족사의 어두운 비밀과 삶의 이치를 배워나간다. 그리고 슬픈 기억을 가진 여인 웨이비(줄리안 무어)와 로맨스를 시작한다. ■ Review 그 남자는 언제나 거기 없었다. <쉬핑 뉴스>의 코일은 평생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온 중년이다. 아버지는 헤엄칠 줄 모르는 어린 아들을 물에 빠뜨렸고, 여름날 소나기처럼 그의 인생에 찾아왔던 아름다운 여인은 왔을 때와 똑같은 급한 발걸음으로 황망히 사라져갔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아서 영화 내내 그저 성(姓)인 코일로만 통하는 이 남자의 인생은 평생 발길질만 당하고 산 개처럼 처량하고 비굴하다. 마치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옛 영화 제목처럼. 해법은 간단하다. 구제불능으로 엉킨 매듭을(코일이라는 단어에는 사투리로 매듭의 뜻이 있다고 한다) 풀려면 실타래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고, 메두사의 머리를 베려면 괴물을 마주보아야 한다. 코일과 그의 딸 버니는 먼 뱃길을 따라 해적질과 폭력, 근친상간으로 점철된 조상의 역사가 묻혀 있는 뉴펀들랜드의 바람 많은 섬으로 돌아가 정신적 번제(燔祭)를 치른다. 각기 비밀과 흉터를 안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마을의 괴짜 주민들로부터 인생과 화해하는 방법도 배운다. 케빈 스페이시, 줄리안 무어, 주디 덴치, 케이트 블란쳇이 사방에 포진한, E. 애니 프롤스의 퓰리처상 수상작 원작의 <쉬핑 뉴스>는 승선한 배우의 이름만으로도 아카데미를 솔깃하게 할 만한 영화다. 하지만 <생쥐와 인간>의 존 말코비치가 그랬듯이 흠없는 연기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익히 알고 있는 교활하리만큼 영리한 배우 스페이시의 카리스마는 낙오자 코일의 가면과 다소 불편하게 포개진다. 바닷가 집이 도로시의 오두막처럼 하룻밤 사이 날아가고, 잘린 사람의 머리가 아이스박스에 담겨 표류하는 <쉬핑 뉴스>는 자못 목가적인 풍경 위에 터부를 넘나드는 엽기적 가족사를 새겨넣는 감독의 취향이 또 한번 발휘된 작품이다. <개 같은 내 인생> <길버트 그레이프> <사이더 하우스> <초콜렛>으로 이어진 이력에 <쉬핑 뉴스>를 더함으로써 라세 할스트롬은 황량하지만 낭만적인 그림엽서 같은 휴먼드라마의 브랜드 안에, 그리고 영화제 시장에서 그 상표가 갖는 힘을 잘 이해하는 미라맥스의 지붕 아래 안주했다. 김혜리 vermeer@hani.co.kr

그 가늠할 수 없는 매력, <후아유>의 이나영

이나영은 꽃보다 나무 같다. 아름답고 가녀린 한 떨기 꽃이라기보다는 씩씩하고 건강한 나무. 남몰래 꺾어 방 한켠에 꽂아두고 얼마간 눈을 즐겁게 만들기보다는, 열린 창문 넘어 점점 푸른빛을 발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은, 가끔은 그 그늘 아래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에겐 꽃처럼 알싸한 미향도, 화려한 색감도, 베일에 가린 신비감도 없다. 너무 투명해서, 심심하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한번 이나영에게 빠져들어간 사람이라면 그 매력의 결도, 깊이도 가늠할 수가 없다. 2월22일에 태어난 물고기자리 소녀는 지난해 5월부터 <후아유>라는 수조 속으로 텀벙 빠져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맨몸으로 뛰어든 수조 속에서 홀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1년간의 힘들고 고된 작업은 이나영에게 어떤 수업에서도 얻을 수 없는 나름의 수영법을 체득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뭐든지 열심히’하는 그의 삶의 태도에서 나온 결과일는지도 모른다. 노래방 장면을 찍기 위해서 스탭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몇 종류의 ‘막춤’을 배울 때도, 63빌딩 수족관에서 한컷으로 쳐리되는 인어쇼를 찍기 위해서 보조장비 없이 몇 차례 물을 먹어가며 잠수연습을 할 때도, 그는 곁눈질하지 않고 정말 진지하게 그 장면만을 위해 집중했다. “모두들 작품 하나 끝내면 많이 배웠다고들 하시는데, 정말 그게 뭔지 알겠더라구요. 처음에는 신별로, 그것도 내가 나오는 장면만 집중해서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영화 전체가 보여요. 그런데 너무 열심히 달려와서 결승점을 통과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쑥 빠지는 듯한 느낌, 그런 거 아세요? 순위와 상관없이 말예요. 지금이 딱 그래요.” “내 속엔 남성호르몬이 흐르나봐요.” 화면 속에서야 늘 화사한 옷으로 감겨 있는 이나영이지만 실제로 그가 걸치고 다니는 옷은 무채색투성이다. “생긴 게 너무 여성스러워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오히려 더 사내아이같이 행동하고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손톱은 물어뜯어서 끝이 뭉툭하고, 애교도 없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냥 이런 내가 좋아졌어요.” 물론 이나영이 그동안 대중에게 어필해왔던 방식 역시, 모든 20대 여배우들이 그러하듯, 아름다운 외양과 여성적인 매력이었지만 그가 앞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은 대중의 기대치를 벗어날지도 모르겠다. “브래드 피트가 로버트 드 니로보다 좋아요. 브래드 피트는 훨씬 더 상업적인 영화를 선택할 수도 있을 텐데 나 <스내치> 같은 영화에 출연하잖아요. 그걸 보면, 저 배우 자기 감성대로 가는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저 역시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구요.” 이상하고 기괴한 역도 조연도 주연도 상관없이 감성코드에 맞아떨어지는 영화를 찾아가겠다는 이나영. 스스로를 “털털한 아저씨 취향”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와 함께 어느 바람 시원한 여름밤, 어슬렁어슬렁 ‘추리닝’ 차림으로 걸어나와 동네 치킨집 야외탁자에서 프라이드치킨 뒷다리에 노란 맥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픈 소망이 있다.

죽음 워크숍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계간 <문학과사회>가 추모특집을 꾸몄는데, 병상에 누운 그의 마지막 나날들을 지켜본 제자 이인성씨의 <죽음 앞에서 낙타 다리 씹기>라는 글이 실렸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하나의 큰 지성이 지상에서 소멸하는데 결코 세상이 조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인성 소설의 톤과는 정반대로 감정이 격앙돼 있던 그 글이 낯설었고 좀 호들갑스럽다고 느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고 나는 40대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오빠가 암으로 투병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며칠 전 세상을 떠나보냈다. 그제야 나는 그때 그것이 호들갑도 감상주의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반납하고 세상에서 물러가는 절차는 참으로 참담하고 어이없다. 국립 서울대 교수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가 침대 위에 배설하고는 제자에게 기저귀를 사다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런 절차인 것이다. 내 오빠는 죽음 앞에서 의연하려 했고 자존심 때문에 진통을 참았고 의식이 남은 마지막 순간까지 농담을 해서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죽음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왔고, 처음엔 팔과 다리가 기능을 잃고, 명료하던 의식이 흐릿해지고, 자존심과 염치가 무너지고, 농담하던 혀가 굳어지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고, 듣지 못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호흡이 멎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한때 병원 뒷곁에서 휠체어에 담요를 덮고 앉아 내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하숙생>을 부르던 그 사람이 지금은 한줌의 하얗고 보드라운 재가 되어 오대산 기슭의 수풀 사이에서 비와 바람을 맞으며 공기와 흙 속으로 조금씩 흩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진실이란 사방에 널려 있지만 자기 발끝에 채여야 비로소 알게 된다. 형제의 죽음을 겪고나니 무심코 흘려듣던 말들이 다시 의미를 싣고 내게 되돌아온다. ‘사람은 세상에 잠시 머무는 손님’이라거나, ‘한번 왔다가는 인생인데’라는 말 같은 것들도. ‘인생은 나그네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하숙생> 가사도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가 왜 불세출의 덕담인지도 알 것 같다. 나는 이제 막 3년간의 ‘죽음을 주제로 한 워크숍’을 마친 셈이다. 워크숍을 끝내고 보니 나도 오빠가 빠져나간 그 문 앞의 긴 줄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다. 노화(老化)란 죽음의 과정이다. 유기체의 기능을 한 가지씩 반납하는 절차다. 내 몸에서도 이미 노화의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치열에는 의치가 끼어 있고 흰 머리카락이 자꾸 새로 돋아난다. 눈가에 주름이 깊어진다. 자살하는 사람은 적어도 한 가지 행복은 누리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도 함께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고독과 소외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죽음이란 절대적인 고독과 소외의 세계이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건 육체적인 고통 이상의 정신적 고문이다. 그 고문으로 인해 죽기 전에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워크숍 과정을 이수하면서 나는 죽음의 운명을 시인하게 됐고 내 앞의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일회적 삶이라는 운명이 사람에게 지시하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점검해본다. 아주 뻔한 얘기지만,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일이 잘 풀리거나 잘 안 풀리거나 간에,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도 존재의 축복인 것이다. 노화가 완만한 죽음이라면 완만한 안락사도 있을 것이다. 고통없이 편안하게 늙어가는 방법도 여러 가지일 텐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일을 갖고 있는 게 그중 한 가지 아닐까. 마르케스 소설 <미로 속의 장군>을 보면 19세기 남미 해방운동의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는 권좌에서 물러난 뒤 보름 뒤에 폐결핵으로 죽는다. 의사에게 가보라고 조언하면 그는 “두 가지 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는 없다”는 말을 했다. 해방전쟁 하기도 바쁘다는 얘기다. 물론, 나라면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해방전쟁을 그만두고 집에서 푹 쉬었을 것 같다. 하지만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죽음이 코앞에 닥쳐왔더라’는 인생도 나쁘지는 않았겠다 싶다. 올해 일흔여덟의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고스포드 파크>를 찍으면서 유사시에 대비해 스티븐 프리어즈를 대타로 지정해두었다 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신발을 신은 채 죽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한참 동안 이 구절의 의미를 머리 속에서 굴려보았다. UPI기자 헬렌 토머스는 <백악관 맨 앞줄에서>를 쓰던 2년 전만 해도 여든둘의 나이에 백악관 출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하고 싶은 두 가지 일은 여행하는 것과 책 쓰는 일이라고 했다. 만일 누가 내게 인생의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일을 묻는다면 나도 그렇게 대답할지 모른다. 여행과 글쓰기. 실존의 위태로움을 잊고 그 모든 ‘무의미’들과 싸워나가기 위해 그건 효과적인 방략인 것 같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칸을 추억하며…

바야흐로 칸 국제영화제 주간이다. <취화선>이 경쟁부문에 초청되고, 언제나처럼 세계 국제영화제 중 가장 큰 마켓이 열리는 터라 수백명의 한국영화인들이 칸으로, 칸으로 몰려간다. 올해는 그 숫자가 5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잠시, 충무로가 칸으로 옮겨간다고 해도 그리 큰 과장은 아닐 듯싶다. 2년 전 처음으로, 칸 국제영화제에 간(촌스럽다!) 나는, 일단 그 영화제의 화려한 위용에 놀랐고, 칸의 해변을 끼고 온 거리가 인파로 바글거리는 데 놀랐으며, 끔찍하게 비싼 물가에 놀랐다. 공식 상영의 세리머니를 위해 붉은 주단을 밟는 감독과 배우들에게 미리 사전연습을 시키는 그 용의주도함과, 팔레 드 페스티벌이라는 거대한 5층짜리 본부 건물의 거만한(?) 위용과, 공식 경쟁작들을 상영하는 뤼미에르 대극장의 2100석짜리 좌석의 규모와 가로 20, 세로 90m짜리 스크린의 크기에 놀랐다. 바로 옆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상영작들이 상영되는 750석짜리 클로드 드뷔시 극장은 뤼미에르 극장과 그 크기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그 ‘영악한’ 영화제를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그해 영화제에 참석했던 모 배우는 시간이 남아서인지, 뤼미에르 대극장에 깔린 빨간 주단과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깔린 파란 주단과 ‘감독 주간’에 초청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깔린 비닐(?)의 폭과 길이를 면밀히 검토(!)하며, 이후엔 빨간 주단을 밟는 배우가 반드시 되겠노라며 농담 섞인 다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2년 전, 모 영화가 비평가 주간에 초청되어 갔을 때, 시골에서 올라와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처럼 열심히 스케줄을 체크하고, 영화보고, 마켓 시사 반응을 체크하고, 일찍 들어가 자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들이 내 영화사의 영화 한편을 초청했다고 해서 이곳에 와서 왜 이 많은 돈을 쓰며(엄청 비싼 숙박비, 밥값, 교통비, 진행비) 못하는 영어 때문에 얼굴 붉히며 영화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밤마다 벌어지는 파티에 어쩔 수 없이 가끔 얼굴 내밀고 쑥스럽게 서 있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해, 그 빨간 주단을 한국인으로는 처음 밟은 <춘향뎐>팀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그 거대한 상영관에 들어선 임권택 감독, 이태원 대표, 정일성 촬영감독이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서로 어깨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진귀한 구경을 했다. ‘세 사나이의 눈물’을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것이나 저만큼 객석에 서 있는 모 신문사 영화담당 기자의 까만 드레스와 또 어떤 이의 어색하게 보이는 나비 넥타이와 턱시도 차림을 보면서 키득거린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던 셈이다. 자신들이 불러들인 영화에, 현란한 장식을 달아주는 거대 영화제의 요란한 제스처에 이 촌스런 아줌마는 비위가 상하기도 했지만, 영화제 기간중 어느 늦은 밤에 상영관을 들어섰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좋은 영화와의 조우는 영화제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이기도 하다. 어쨌든, 영화제에 참석한 한국영화인들에게 각자 모두 좋은 성과있기를. 술 취해서 가방 잃어버리지 않기를. 카페 의자에 무심히 가방을 걸어놨다가 소매치기당하지 않기를. 돌아오는 비행기가 안전하기를, 텅 빈 충무로에서 하릴없는 바람을 가져본다.

독립·단편영화 <링반데룽> <데자뷰>

살다보면 누구나 착각을 경험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로 착각하여 등을 친 경우도 있지만, 현재 애인을 옛 애인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착각에 해당할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에서 남자는 애무 도중 옛날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는 당황했다가는 이내 그게 뭐가 그렇게도 잘못된 일이냐고 오히려 따진다. 냉소적인 장면이지만 한편으로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면 독립영화에서는 ‘착각’을 아주 심각하게 다루거나 그것을 통하여 삶의 풀리지 않는 구석에 대해 발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하다. 독립영화관(KBS2TV 토 새벽 1시10분)에서 방영할 <링반데룽>(감독 박종용, 16mm, 컬러, 14분, 2001)에서는 안개, 폭우, 폭설, 피로 등으로 산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역을 맴돌게 된다는 뜻의 등산 조난 용어를 제목으로 삼고 있다. 밤 등산을 하던 세 친구는 서로 줄로 묶은 채 가다가 도연이 실족하는 바람에 모두가 길을 잃게 된다. 이틀 만에 텐트 속에서 깨어난 도연에게 벌어지는 일은 거의 똑같은 일이다. 칡즙을 마시게 하고, 발가락 뼈를 맞추며 무릎의 고름피를 입으로 빠는 것 등이 바로 그 똑같은 일들이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약간씩 숏 크기와 각도를 바꾸면서 보여준다. 반면 <데자뷰>(감독 조창렬, 16mm, 컬러, 18분, 2001)는 기시증을 일컫는 제목이다. 어디선가 경험했다는 착각, 어떤 사건이 눈앞에 벌어졌는데 그 상황이 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증세를 말한다. 영화에서는 같은 상황을 경험하는 한 남자의 데자뷔와 한 여자의 데자뷔가 번갈아 일어난다. 신기한 구경거리지만, 이 심각성이 유머 혹은 어떤 통찰로 낙찰되지 않는 것은 참 불편하다. 이효인/ 영화평론가·경희대 교수 yhi60@yahoo.co.kr

`우리끼리 하고 싶은대로 정말 신나게 만들었어요`

오는 31일 개봉하는 <묻지마 패밀리>는 적어도 제작비에서 만큼은 충무로에서 ‘기적’같은 영화다. 신하균, 유승범, 임원희, 정재영, 이문식, 정규수, 방은진, 박선영, 임하룡… 제법 한 몸값하는 이런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의 순제작비가 2억7천만원이라니 말이다. 출연료 없이 참여한 건 배우 뿐 아니다. 편집, 컴퓨터그래픽, 사운드 등 대부분의 스탭들이 돈을 안 받았다. 놀라운 것은 제작비만이 아니다. 신인 감독 세명의 단편 세편을 모아 극장에 내거는 ‘배짱’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아마 문화창작집단 ‘필름있수다’(줄여서 ‘수다’) 아니곤 생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99년 <간첩 리철진> 제작 이후 혜화동에 달랑 간판 하나 내걸고 출범한 ‘수다’는, 다양한 문화분야에 손을 뻗치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연극 <박수칠 때 떠나라>, 영화 <킬러들의 수다><디지털 삼인삼색>, 가수 김종국의 뮤직비디오 등이 그 가시적 성과물이다. 물론 이제 ‘수다’도 체계를 갖추고 장사를 하는 회사다. 하지만 여전히 프로젝트마다 게릴라 집단처럼 몰려다니며 과시하는 ‘맨 파워’의 비밀은 사람들에게 항상 관심거리다. 이 괴이한 집단의 정체를 밝혀보기 위해, 장진 감독과 배우 임원희, 정재영 등 수다스런 세 남자를 만나봤다.-편집자장진 감독과 두 배우는 서울예대 1년 선후배 사이로 처음부터 ‘수다’에 참여했다. 장 감독은 “이들 둘만 있으면 든든하다”고 말한다. 정재영 장 감독과 전 같은 동아리에 있었지만, 원희는 ‘정극’을 하는 동아리였어요. 우리가 민족극할 때 번역극을 하던 친구죠. 그래서 대사가 아직도 ‘문어체’에요. 임원희 또 2:1로 공격하는군.장진 그런데 원희는 내 군대 고참이에요. 우리가 사단 연극대회에서 공연한 2인극 <오해>가 있었는데, 정말 내 3대 작품중 하나라니까요. 재영이는 내가 95년 처음 연출한 <허탕>에 출연했고 한동안 슬럼프 끝에 돌아온 작품도 제 연출이었어요. 이 나이, 이 가격대에 이만한 배우는 없어요. 임원희 이 가격대에 없다는 말이 중요하죠. ‘수다’가 벌이는 일들의 규모가 커졌지만, ‘동인들의 모임’이란 성격엔 변함이 없다고 이들은 강조한다. 임씨는 “우리에게 ‘도장(정식계약)’은 별 의미없어요. 서로 필요할 때 달려갈 수 있는 친구이고 동지”라고 말했다. <묻지마 패밀리>도 그 연장선에서 만들어졌다. “좋은 신인감독을 발굴하자”는 취지에 흔쾌히 동의한 배우들은, 애초 이 영화가 개봉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진 만들 땐 우리끼리 극장 하나 빌려 음식차려 놓고 파티하며 틀자, 이런 생각이었어요. 예상보다 일이 커져 부담스러워요. 초심을 잃을까 싶어서. 정재영 누구한테 비판받을 생각 않고 참여했기 때문에 당혹스러웠어요. 다른 상업영화와 달리 봐줬으면 하고요. 하지만 단편영화를 상업적으로 개봉한다는 사실은 후발주자들이나, 배우들이나, 힘없는 감독들에게나 매우 고무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장진 후반작업, 컴퓨터 그래픽, 편집 이런 사람들한테 ‘장사 신경쓰지 말고 우리 하고 싶은대로 한번 해보자’ 하니까 모두 오케이 하고 정말 신나게 일하더라고요. 그들 모두 원래는 아티스트에요. 근데 평소 오퍼레이터 기능만 하고 있었던 거죠.임원희 사실 영화 한편 계약하는 건 힘든 일이죠. 돈 뿐 아니라, 자기인지도나 이미지 모두 고려해야 하고요. 그런 제약 없이 영화를 찍어서 행복했어요. 개봉할 줄 알았으면 좀 좋은 역을 맡는건데…. ‘수다’표 영화의 대표는 역시 코미디다. 세 사나이의 수다는 코미디 이야기가 나오자, 좀더 진지해진다. 임원희 쉬운 코드 같지만 코미디 만큼 어려운 게 없어요. 게다가 한국에선 코미디가 대접받는 장르도 아니잖아요. 웃다가 나와선 비난하는 관객들 하며…. 피에로의 비애 같아요. 정재영 억지 웃음을 끌어내는 작품들이 있는데, 그런 작품은 성공하기도 하고요. 갈수록 헷갈려요. 장진 시나리오 쓰고 있을 때 누가 전화해서 뭐하냐고 물으면 “나는 지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해요. 누군가 <묻지마 패밀리>를 보고 잊었던 친구에게 전화 한 통 걸 마음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묻지마 패밀리>는 영화 제목이자 ‘수다’의 장기 프로젝트명이다. 올해는 영화였지만, 내년엔 퍼포먼스가 될 수도, 그 다음엔 뮤직비디오나 인디밴드의 록 콘서트가 될 수도… 이렇게 어디로 튈 지 몰라 영어제목으론 ‘노 코멘트’이다. 이들은 이 프로젝트가 “중심에 충격을 주는 작은 ‘진동’이 되길” 바랐다. 김영희 기자dora@hani.co.kr

참석자들 프로필

프로듀서/ 심보경 1967년생.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광고회사에서 광고기획 일을 했다. 언니(<명필름> 심재명 대표)의 권유로 영화라는 고난의 길로 접어들었다. 93년 <그여자, 그남자>의 홍보, 마케팅을 시작으로 명필름의 기획, 제작 전반적인 과정에 참여했으며 97년 <접속>으로 성공적인 프로듀서 데뷔전을 치름. <공동경비구역 JSA> 프로듀서를 거쳐 2000년 TTL 등의 광고를 제작한 화이트와 손잡고 디엔딩닷컴을 만들어 이사로 취임했다. 디엔딩닷컴의 창립작이자 3번째 프로듀싱작인 <후아유>의 개봉을 앞두고 이 자리에 불려나올 때만 해도 영화를 공부한 젊은 친구들과 좀더 속깊은 대화를 나누겠다고 생각했으나 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 ‘학생들이 학생들이 아님’을 알고 조금 놀라다. 최호/ 감독 1967년생. 계원예고와 중앙대 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집단 ‘장산곶매’에서 활동했고 91년 <닫힌 교문을 열며>를 공동연출했다.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영화학과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 한국으로 돌아온 뒤 만든 첫 작품이 유지태, 김하늘 주연의 <바이준>.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이 영화가 실패한 뒤 4년간, 터널 같은 공백을 지나야 했다. 그리고 그 터널의 끝에, <후아유>를 만났다. 처음에 영상원 학생들과의 만남이라기에 ‘필름은 뭐 썼나’ 같은 질문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영상이론과’ 학생들이라 예상과는 다른 질문들이 많이 터져나옴. 그러나 성실히, 최선을 다해 답하는 자세를 보여줌. 이원재 1976년 7월24일, 서울 이문동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단과대 학생회와 서울지역사범대학생협의회 등에서 활동했다. 워런 비티의 <레즈>를 보고 영화란 것이 날아와 가슴팍에 ‘콱’ 하고 찍힘. 누군 유치원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고 했지만, 대학 4년 교육도 모자라 올해 2002년 봄학기에 영상원에 들어온 1학년(정말 1학년이다, 그리고 정말 76이다, 믿기 싫으면 관둬라). 지나온 세월은 그렇지 못했지만 ‘이번엔’ 열심히 학교 다니고 있다. 이건 정말이다. 황정현 1975년 서울 출생. 초등학교 6학년 때 교육열에 불타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강남으로 이사. 아직도 본인은 강남으로 이사오며 받은 문화적 충격이 트라우마처럼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믿고 있음. 대학교 낙방 뒤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재수학원에 등록했으나 두번의 쓰디쓴 연애경험만을 얻었을 뿐, 의대는 예비합격자 5번이라는 ‘사람 놀리는 듯한’ 순번을 받은 채 낙방. 그뒤 홍대 전파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일찌감치 공학이란 것엔 별다른 재주도 흥미도 없음을 깨닫고 홍대신문사로 ‘전과’. 3년간의 신문사 생활을 마치고 군입대. 제대 뒤 ‘전망고민’ 한답시고 반년가량 민노당 지부에서 상근간사 생활을 함. 영상원 시험 뒤 일년 반 동안 영화전문웹진 기자로 활동하기도 함. 현재 영화 제작수업에 흠뻑 빠져서 말도 안 되는 자작 시나리오들 끼적거리는 걸로 소일하는 중. 관심있는 분야는 프로듀서. 김화범 1971년 대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는 동네 만화방과 전자오락실을 전전하며 속칭 동네(하위)문화랑 친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홍콩영화를 즐겨 봤다. 93년, 방위병으로 근무중 삶의 회의와 허무를 밀려와 이리저리 마음의 방황을 하다가 서울로 영화 찍으러 가다. 김영철 촬영기사가 주도한 영화제작워크숍에서 영화를 찍으며 인생의 중대결심을 하다. 대구에서 후배가 시작한 시네마테크에서 죽지 않을 정도의 술과 적당량의 영화를 탐닉했다. 후배가 영상원 시험 본다고 해서 덜렁 나도 같이 시험 봤는데, 후배를 떨어지고 나는 붙었다. 그렇게 시작한 영화공부. 지금은 3학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졸업하고 뭘 할까 고민중이다. 백승록 1973년생. 디지털 특수 효과에 매료된 나머지 영화 영상의 신기원을 이루겠다는 청운의 푸른꿈을 안고 전자 공학과에 진학했으나 전혀 공대생다운 모습을 갖추지 못한채 6년간 방황한뒤 과감히 자퇴. 2년간 이리저리 떠돌다가 2000년 영상원 영상이론과에 입학. 단 한 번 연극 무대에 서본 기억을 자랑스러워 하고, 나이 서른에도 꿋꿋이 좋아하는 사람의 팬클럽 가입을 주저하지 않으며, 밥 대신 영화에서 에너지를 얻고, 간식보다 애니메이션과 만화책과 인터넷에서 더 많은 양분을 얻는 피터팬. 지난 2년간 책읽은 시간보다 현장에서 단편 영화 스탭을 하며 보낸 시간이 훨씬 많아서 이제는 공부를 더 해야하지 않을까 반성하는 중. 졸업후 진로에 대해서는 애니메이션 기획일쪽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음. 이안젤라 65년생. 서울대 미학과. 평화방송 PD 10년 했음. 외환위기니 IMF니 해서 어수선하던 시절, 다니던 회사의 부서가 없어지는 바람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됨. 직장운이 없는 건지 성격이 모난 건지 평탄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데 비해 학교는 휴학 한번 하지 않고 그럭저럭 무난히 다니고 있는 편. 전공은 이론이지만 제작에도 관심이 많아 영화과를 부전공으로 기웃거리면서 영화제작의 달콤함과 씁쓸함을 몸소 겪어봄. 영화관람 스타일은 부지런히 수시로 개봉작을 보러 다니기보다는 영화제에서 한꺼번에 왕창 몰아보는 편. 이재희 1976년생. 16살 때부터 심리학을 공부하겠다고 다짐했지만, 4년의 학교생활 끝에 남은 건 단골 만화방과 비디오방뿐. 묘하게 과선배들 중 영상원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많아, 어떤 곳인가 싶어 시험을 쳐봤는데 덜컥 붙었고, 졸업에 대한 아쉬움 없이 입학. 한 학기는 반짝 스스로 놀랄 만큼 부지런하게 보내봤지만, 이후 지금까지의 생활을 보면 이전 학교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80%쯤. ‘집이 극락’주의자랄까. 방에 들어앉아 노래듣고, 동화책 읽고, 오락하고, 가끔 방송도 하고, 비디오 보고, 추리소설 읽고…. 적어도 빈둥대는 데 있어선, 혼자서도 잘해요 체질이다. 얼마 전 공짜 DVD 플레이어가 생긴 이후로 두근두근했지만, 동네의 문화적 인프라가 워낙 ‘후져서’ 빌려다 볼 일이 막막하다. ▶ 영상원 대학생, 감독·프로듀서와 <후아유>를 논하다 (1) ▶ 영상원 대학생, 감독·프로듀서와 <후아유>를 논하다 (2) ▶ 참석자들 프로필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의 원숙현

한 여자가 비디오를 비디오데크에 밀어 넣은 뒤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눕는다. 곧 모니터 화면에는 <인어공주> 동화의 영상이 흘러나온다. 영화 속 영화인 <인어공주>에서 주인공 인어공주는 인간이 되기 위해 문어에게 몸을 바치고 그물에 걸려들어 쥐에게 하체를 갉아먹혀 사람의 다리를 얻는다. 인어공주가 문어에게 강간당하기 직전, 비디오 보던 여자는 잠시 비디오를 스톱시키고 욕조에 물을 받고 들어간다.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의 팔이 그녀를 물 속으로 밀어넣자 곧 인어공주가 강간당하는 비디오의 화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웃나라 공주와 왕자가 결혼을 할 때, 어느새 비디오를 보는 건 여자가 아니라 인어공주 인형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모호하다. 점점 남성화되어가다 결국 남성의 성기를 달게 된 여자는 영화의 끝에 인어공주 인형을 불태워 죽이고 그 불로 담뱃불을 붙인다. 해피엔드를 보여주지 못한 인어공주를 없앤 뒤, 여자는 다시 처음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안고 분홍색 인형상자 안에 들어가 웅크린다. ♧ 안데르센 “다른 동화 속 공주들은 다 행복하게 사는데, 인어공주만은 그렇지 않은 게 너무 불쌍했어요. 왜일까, 왜일까, 끊임없이 생각했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왜 불행해지는지, 영화를 찍고 난 지금도 다는 이해할 수 없어요. 여전히 갈증을 느껴요.”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의 ‘원작’인 <인어공주>는 원숙현(24)씨가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한 동화다. “완벽한 여인의 모델”인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이상했다”고 그는 돌이킨다. 스물넷이 되어 오랫동안 품은 그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는 동대문에서 바비인형을 산 뒤 그 하체에 수산시장에서 산 은빛 생선의 껍데기를 꿰매 인어공주를 만들었다. 학교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충전기 없는 디지털카메라를 빌려 독점했고(왕자와 이웃 나라 공주가 만나는 장면을 동해에서 찍은 걸 제외하면 이 영화의 배경은 모두 그의 집 안이다), 예전에 외국여행중 사놓은 발목까지 오는 긴 가발도 꺼냈다. 바비인형과 생선껍데기의 결합체인, 이상하지만 여전히 예쁜 인어공주를 가지고, 원숙현은 동화의 기본골격은 따르되 세부적인 사건들과 정조는 사뭇 다른 그만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거기서 인어공주는 문어에게 강간당하고 쥐에게 갉아먹히고 자신을 조종해온 ‘분라꾸 여인’에게 불태워 죽임을 당한다. ♧ 미인 처음에 원숙현씨를 보았을 때 ‘미스코리아풍’으로 생겼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미인대회 출전 경험이 있었다. 그는 지금 졸업반인 단대 연극영화과에 들어오기 전 가톨릭대 철학과 1학년일 때 ‘미스 유니버시티 선발대회’에 나갔고 ‘미스 월드 평화’로 뽑혔다고 한다. 미국의 선케어 브랜드의 동양권 모델인 ‘미스 하와이언 트로픽’이 되어 칸영화제에서 시가행진도 했다고. “창피했지만 재미도 있었어요. 합숙을 하는데 제 스스로 몰라보게 몸이 변하는 거예요. 이상하죠. 꼭 남자들이 원하는 모양대로 몸이 진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런 ‘미인’이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조금은 아이러니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이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는 비판적인 생각을 담아내는 거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여자의 심리상태를 그냥 묘사하고자 했어요. 바비인형 같은 외모는 남성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저 자신이 그런 외모에 대한 갈증이 많이 있거든요.”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에 원숙현 자신의 존재는 ‘<인어공주> 비디오를 보며 자신과 인어공주를 동일시하는 소녀’와 ‘인어공주 인형을 조종하는 분라꾸 여인’에 분열적으로 투사돼 있다. ‘분라꾸’는 일본의 고전연극.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얼굴도 검은 천으로 가린 인형사가 인형을 조종한다. 이 작품에서 인형인 인어공주를 움직이는 동력이 바로 여자를 조종하는 남자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은 분라꾸 인형사다. 원숙현은 동화의 화사한 오리지널 스토리에도, 그 이면의 추한 어두움에도 모두 흠뻑 젖어 있는 듯, 여성으로서 스스로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태도를 분라꾸 기법과 시종일관 미소짓는 바비인형을 통해 이 영화에 담았다. 마지막에 분라꾸 인형사가 인어공주를 불태우는 건, 그래서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도, 혹은 그것에 대한 집착으로도 읽힌다. ♧ 신디 셔먼 “혼자서 제작, 연기, 촬영, 조명, 편집을 다 할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신디 셔먼처럼. 처음엔 인어공주도 인형으로 안 하고 제가 직접 연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촬영을 할 수 없어 인형을 썼어요.” 분라꾸 인형사에 동생들, 미술에 조각가인 어머니, 연기에 아는 언니, 촬영과 편집을 친구가 도운 것을 제외하면 원숙현은 소망대로 거의 모든 것을 혼자서 해냈다. 외모에 있어 그녀의 모델이 인어공주라면, 작품 활동에 있어 그녀의 모델은 신디 셔먼이다. 신디 셔먼은 70년대 후반부터 활동한 사진작가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많이 찍었다. 청순한 여자, 창녀, 주부, 남자, 커리어우먼, 소설 속의 주인공 등으로 스스로를 변장시켜 사진을 찍었고, 후기에 컬러로 작업을 하면서는 인형을 소재로 이용하기도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은 원숙현이 처음으로 만든 영화다. 단국대 연극영화과에 연기 전공으로 입학한 그는 졸업작품인 이 작품 전에는 친구들의 영화에 연기자로만 참여했다. 그녀가 맡은 캐릭터는 “술집 아가씨 같은 이미지나 남자친구 바람맞히는 독한 여자, 귀신 혹은 시체” 같은 평범치 않은 것이었다고. 신디 셔먼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만들었다는 첫 영화에서 그는 처음으로 카메라 앞이 아닌 뒤에 섰고 인형에게 자신을 대체하는 연기를 시켰다. 처음 해보는 연출이 연기보다 훨씬 재미있었다고. 원숙현의 앞으로의 계획은 미디어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다.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시카고 미술대에서 실험영화를 공부할 생각이란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도 유학을 위한 포트폴리오용으로 찍었다고.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을 계속했던 그는 상업영화적인 카테고리 안의 영화작업보다는 미술에 가까운 미디어 아트를 하는, 실험영화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은 지금 실험영화를 향해 있다. 글 최수임 sooeem@hani.co.kr 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 인디포럼에서 만난 독립영화 감독 3인의 세상보기, 영화 만들기 ▶ <반변증법>의 김곡, 김선 감독 ▶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의 원숙현 ▶ <삼천포 가는 길>의 윤성호

토니 레인즈,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를 인터뷰하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죽어도 좋아>가 일반인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던 날, 상영관인 모악관에는 칸 비평가주간에 선정된 작품이라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해외 게스트들이 유독 많이 몰려들었다. 그중 ‘한국영화통’으로 불리는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상영관 앞자리에 착석해 영화를 관람했고 이 새롭고 진귀한 영화의 출현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리고 며칠 뒤 서울에서는 프레스용 영문소개자료를 만들기 위한 토니 레인즈와 박진표 감독의 만남이 해외배급과 국내배급을 동시에 진행하게 될 미로비전의 아늑한 응접실에서 마련되었다. “어떻게 보았냐”라는 박진표 감독의 질문에 “좋았으니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고 응수하던 토니 레인즈는 <죽어도 좋아>가 자신이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로 있는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으로 첫인사를 대신했다. 토니 레인즈 아마도 당신을 외국에 소개하는 첫 자료가 될 테니 영화에 깊숙이 다가가기보다는 꽤나 기본적인 의문을 충족시키는 인터뷰가 될 거예요. 좀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우리 나중에 하자구요. (웃음) <죽어도 좋아>가 첫 작품인가요? 박진표 그렇죠. 영화로는요. 대학다닐 때 단편 2편 찍었던 것과 10년 동안 TV다큐멘터리 찍었던 걸 제외하면 첫 영화죠. 토니 레인즈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다고 했는데 영화만드는 데 좋은 경험이 되었겠군요. 박진표 글쎄요. 개인적으로 좋았지만 커다란 영향을 끼쳤거나 하진 않았어요. 영화란 공부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토니 레인즈 영화과를 나와서 바로 영화계에 입문하지 않고 TV쪽으로 간 건 조금 의외네요. 박진표 나름대로 선택의 기로에 서긴 했지만, 그때 당시엔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송사에 입사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10년 동안 TV다큐멘터를 만들면서 수없이 많은 주제들과 사람들을 다루어야 했거든요. 쉴새없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하는 그곳에서 끊임없이 대상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았던 것이 극영화를 할 수 있는 좋은 자양분이 되었던 게 아닐까요? 토니 레인즈 영화에 출연하는 두 주인공과는 이미 TV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만났던 걸로 압니다. 그 작업과 영화작업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박진표 연관성요? 음… 애초에 영화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차에 내가 할 수 있는 영화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그러다 외로운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사랑>이란 3부작 TV다큐멘터리를 하게 되었죠. 총 7, 8쌍 정도의 노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엔 노인들의 욕망이란 것에 대해, 즉 사랑이나 성적 욕구들을 터부시하고 추하게 느끼는 사회적 통념이 자리잡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사랑이 없을까? 혼자 사는 데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의문들이 강하게 들었어요. 하지만 TV의 한계상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고 결국 영화를 하자고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토니 레인즈 7, 8쌍을 찍었다고 했는데 그중에 유독 이분들을 영화에서 선택한 이유라도 있나요. 박진표 당연히 이 사랑이 특별했기 때문이죠. 할아버지 할머니의 캐릭터라든지 그분들이 살아왔던 모습들, 그리고 현재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에 와닿았고 내가 생각했던 주제와 일치했구요. 가족과 과거를 벗어난 절박한 사랑 토니 레인즈 영화를 보면 두 주인공의 과거라든지 가족이라든지 개인적인 디테일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듯해요. 그리고 현재의 감정적인 부분에만 포커스를 맞추죠. 이런 선택을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박진표 외롭게 살다가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사랑이란 말이죠. 이들의 격정적이고 배려해주는 모습 속에 이 세상 모든 사랑이 담겨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멈춰버렸으면 좋을 이 순간만을, 절대사랑의 순간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만약 역사나 가족이나 과거의 관계들이 보여진다면 이들의 사랑이 훼손될 여지가 많았던 거죠. 그저 이 사랑 자체가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도록,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애타는 절박함을 담을 수 있도록. 토니 레인즈 할머니가 잠깐 친구 만나고 왔는데 할아버지가 기다림에 지쳐 화를 내던 그 장면이 바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하는 그들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드라마적 장치가 아니었나요. 박진표 맞는 말씀이에요. 할머니가 ‘잠깐 나갔다 올게요’라고 한 그 몇 시간 동안 할아버지는 옛날 부인이 죽고 이 할머니를 만나기까지 가졌던 그 외로운 공간과 시간과 느낌을 다시 체험하는 거죠. 그 공포스럽고 두렵운 감정과 동시에 혹시 내 사랑을, 차마 도망갔을 거란 생각은 못하고, 누가 업어갔을까, 잡아갔을까, 하는 유치한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말 그대로 만감이 들어 있는 장면이에요. 토니 레인즈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가봐요. 박진표 크랭크인하기 3달 전에 두분이서 친구들하고 단체관광을 가셨는데 할머니가 옆방에 잠깐 놀러간 사이 할아버지가 찾아 헤맨 사건이 있었다는 걸 자료조사 때 듣게 되었어요. 결국 장소만 달라졌지 본인들에게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감정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구요. 토니 그런가요? 전 정말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인 줄 알았어요. 박진표 음… 기쁘네요. 사실 연출이 안 보인다든지, 연출을 안 한 게 아니냐, 카메라 뻗쳐놓고 기다린 게 아니냐는 말을 들으면 감독으로서 뿌듯해요. 쾌감을 느끼죠. 영화란 설명이 필요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니까. 개인적으로 감독이 보이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구요. 실제로 연출되지 않은 장면은 ‘노래자랑’ 장면뿐이에요. 그 신은 과거에 다큐를 찍을 때 포착한 실제장면이죠. 신의 앞뒤 장면만 연결해서 연출해 찍었어요. 사실 그 장면 때문에 이 영화 전체가 기획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강렬한 장면이었어요. 왜 노래자랑에 나가서 할머니가 마이크잡고 “사랑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거다. 밥먹고 그것만 연구해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만 연구하라”고 말하는데 그 이야기를 실제상황에서 들었을 때 아, 저들의 사랑도 젊은이들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죠. 토니 레인즈 진실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작품이다보니 영화를 보면 현실과 너무나 가까워서 과연 시나리오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거든요. 얼마나 문서화해서 작업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박진표 어차피 편집과정에서 드러내자는 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전체를 꿰는 게 아니라 신바이신으로 70% 정도 대사가 들어 있는 시나리오가 있어요. 그것은 자료조사 차원에서 찍었던 다큐멘터리 속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도 있고 제가 만든 것도 있고, 현장 느낌을 살려 추가된 것도 있지요. 20, 30% 정도가 그분들 생활에서 나오는 실제 애드리브였어요. 예를 들어 ‘할아버지, 일어나셔서 바지 입고 할머니 한번 보시고 나가시면 돼요’라고 지시하면 할아버지는 한두번의 디테일을 더 주신단 말이죠. 이불을 덮어준다든지…. 이런 할아버지의 자상한 마음이 연기로 표현되었고 그런 면에서 실제인물들이 연기하는 어드밴티지를 많이 얻은 것 같습니다. 토니 레인즈 이들의 성생활을 포함시키자는 건 처음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박진표 물론 제가 그랬죠. (웃음) 토니 레인즈 어려웠겠네요. 박진표 물론 어렵고 어색했지만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던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었죠. 이분들의 삶에 섹스란 즉 살아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었어요. 그것이 단지 발기된 상태의 성기가 드러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일상들처럼 살아 있다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의 증거가 섹스라고 생각했고 그건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분들을 때려서, 강제로 찍었던 것이 아닌 이상은 설득이 어려웠느냐, 설득은 어떻게 했느냐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분들을 어떻게 만나고 또한 어떻게 컨트롤했는가가 과연 중요할까요? 영화는 영화 자체로 존재하는 건데 왜 궁금하지 하는 식의 의문 말이죠. 이말 역시 별로 중요한 말은 아니지만…. 그런데… 제가 하나 질문해도 될까요? 토니 레인즈 물론이죠. 박진표 그 약 7분간의 섹스장면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토니 레인즈 부러웠어요. (웃음) 박진표 그 장면이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에서 섹스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한컷이잖아요. 왜 그렇게까지 찍었느냐, 왜 그렇게 길게 갔느냐는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아요. 저한테는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고민됐던 장면이었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아름답게 포장하지 말자 솔직함만이 그 사람들의 삶을, 사랑의 순간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만약에 앵글을 예쁘게 간다거나 음악을 깐다거나 조명을 어떻게 한다는 식의 장치가 더해진다면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늙고 추레하고 건조한 데서 드러나는 솔직한 아름다움이 훼손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사랑장면에는 젊은이들의 사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배려가 있거든요. 준비가 될 때까지 서로 기다려준다든지 하는 것들요. 젊은이들에게 보고 배워라 하는 구체적인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성기노출보다 그들의 사랑이 크게 보이더라 토니 레인즈 좀 민감한 이야기를 하자면, 영화제 외에는 일반 개봉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만들었을 것 같아요. 심의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나요. 박진표 먼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가 궁금한데요. 토니 레인즈 한국에서는 영화에서 성기노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에요. 박진표 글쎄요. 저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의 영화정책에 반기를 들겠다거나, 한국에서 금기시돼오던 소재를 다룸으로써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겠다는 식의 의도는 추호도 없었어요. 그냥 이 영화를 만들다보니 성기노출이나 오럴섹스가 나오는 클로즈업이 정말 필요했거든요. 필요하지 않았으면 집어넣지도 않았을 거구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분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런 장면들이 상영할 수 없는 이유로 작용한다면 양보할 생각은 없어요. 그저 나에게는 그런 논란이나 제지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굉장한 부담이고 혼란스러운 일이에요. 토니 레인즈 그래도 조금은 예상하지 않았나요. 박진표 예. 솔직히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를 본 관객 중 대부분은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느끼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분들의 사랑으로 느끼지 성기노출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거죠. 토니 레인즈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는 건, 내가 장선우 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 <장선우 변주곡>을 만들었을 때의 시기가 <거짓말>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물론 장 감독도 그 영화를 누군가를 자극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고 관객 역시 그렇게 받아들였지만 등급위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박진표 저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고 읽는 사람이 있다고 보는데 영화는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 영화의 경계가 다큐멘터리나 극영화냐는 것의 구분조차 읽는 사람의 것이고 그게 어디에 귀속되든지 관객에게 불필요한 거거든요. 만약에 등급을 못 받는다 해도 언젠가는 받을 날이 오겠죠. 저는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있어요. 토니 레인즈 진심으로 잘되길 빌어요. 박진표 영화에 대한 촌평을 하신다면 어떠세요. 보셨나요, 읽으셨나요? 토니 레인즈 그 중간쯤이었던 것 같네요. 금방도 이 영화에 대한 리뷰 하나를 썼는데 단순하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화라고 했어요. 가끔 어떤 영화는 제발 나를 분석해다오 외치는 영화들이 있는데 이 영화는 보는 사람들에게 보게 만들지 읽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아요. 또한 아까 말씀한 대로 감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성공하신 것 같고 그 강한 캐릭터들을 표현해낸 것이 놀라웠어요. 박진표 다른 나라에서도 보편성을 띠고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하시나요? 토니 레인즈 당연하죠. 물론이에요. 어떤 사회든지 노인들의 삶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잖아요. 노인들에 대한 편견이나 나이든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끼는 문화가 있죠. 그런 면에서 상당히 도전적인 영화라고 봐요. 그나저나 두분이, 즉 할머니 할아버지가 완성된 영화를 보셨나요? 박진표 그럼요, 영화에 표현된 모든 것에 대단히 흡족해하세요. 모르죠. 사랑은 가끔 깨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현재까지는 자신들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된 데 대해 만족해하고 행복해하시던 걸요. 정리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70대의 사랑 담은 박진표 감독의 다큐멘터리 <죽어도 좋아> ▶ <죽어도 좋아>는 어떤 영화? ▶ <꽃섬>의 감독 송일곤, <죽어도 좋아>의 경이로운 힘에 감탄하다 ▶ 토니 레인즈,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를 인터뷰하다

70대의 사랑 담은 박진표 감독의 다큐멘터리 <죽어도 좋아>

미지의 영화 한편이 영화계를 술렁이게 하고 있다. 감독도 배우도 내용도 모두 낯설기만 한 <죽어도 좋아>.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됐으나 한국에선 채 1천명도 보지 않았을 이 이상한 영화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면서 올해 최대의 문제작이 될 조짐까지 보인다. 무슨 영화인지, 그리고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송일곤 감독의 평, 그리고 영국평론가 토니 레인즈와 감독의 대담을 곁들여 살펴본다. 편집자 올해 칸영화제 라인업이 발표되었을 때 <취화선>의 경쟁 부문 진출을 기뻐하던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한 작품에서 멈추었다. ‘<죽어도 좋아>(Too Young to Die), 감독 박진표.’ 알 만한 사람들은, 편집실에서 흘러나온 풍문으로, 몇몇 영화인들의 입을 통해, 혹은 ‘70대 노인들의 섹스’라는 다소 말초적인 카피로 소개된 기사들을 통해 익히 이 영화의 이름을 알고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어도 좋아>는 여전히 생소하고 낯선 미지의 영화다.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감독의 이름도 낯설다. 게다가 이야기는 더욱 낯설다. 꽃다운 청춘이 아닌 70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누는 죽어도 좋을 만큼 열정적인 생의 마지막 사랑. 방송사 다큐멘터리 PD 출신의 신인 감독이 만들어낸 이 이상한 로맨스는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어 지금은 프랑스 칸의 한 극장에서 영사되고 있을 것이다. 시스템의 태반에서가 아니라 독립의 시험관에서 자라나 출산 몇달 전에 인큐베이터로 옮겨진 이 영화는, 그러나 그 어떤 기존 충무로 영화들보다 건강하고 묵직한 사자후를 토하며 세상에 태어났다. 질퍽한 소리가락 같은, 70대의 사랑 “이팔은 청춘에 소년 몸 되어서 문명의 학문을 닦아를 봅시다. 청춘 홍안을 네 자랑 말아라 덧없는 세월에 백발이 되누나. 요지일월(堯之日月)은 순지건곤(舜之乾坤)이요, 태평성대가 여기로구나.”<청춘가> 중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거친 화면, 연기라고 보기 힘든 두 노인의 대화와 몸짓, 얼핏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기 쉬운 <죽어도 좋아>는 사실 박치규(73), 이순예(71)라는 실존 인물의 사랑을 극화한 67분짜리 극영화다(어쩌면 감독의 말대로 “다큐멘터리냐, 극영화냐 하는 구분은 별로 필요치 않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작단계를 이해하는 편의상 이런 식으로 구분하자). 경기민요 <청춘가>의 가사로 크게 챕터를 나누는 영화는 무료한 삶을 살아가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둥지를 틀고 섹스를 하고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결국엔 입모아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것으로 끝맺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따른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의 주체다. <죽어도 좋아>에서는 젊은 남녀의 싱싱한 육체가 뒤엉키는 대신 논바닥처럼 갈라진 손이 바람 빠진 타이어 같은 서로의 육신을 더듬는다. 와인잔에 거품욕조가 아니라 막걸리에 화장실 구석 ‘다라이’에 몸을 구겨넣고 서로를 희롱한다. 그러다가 알몸으로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내일은 다시 할 수 없을 것만큼 격정적인 섹스를 나눈다. 폭력이 아니라 배려의, 정복이 아니라 어울림의 섹스를. 사랑이란 건, 섹스란 건 어차피 젊음에 귀속된 것이라 믿어오던, 혹은 사회적으로 강요받아오던 우리에게 <죽어도 좋아>가 전하는 70대의 사랑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다. 우아한 실내악이 아니라 가슴을 후벼파는 질퍽한 소리가락 같은 그들의 사랑은 냉소적이고 심드렁한 젊은이들의 사랑을 향해 내일이면 늦을 거라고 웅변한다. “청춘 청춘을 말로만 말고요, 청춘 시절에 게을리 맙시다” 같은 <청춘가>의 가사는 <죽어도 좋아>의 노래자랑신에서 “사랑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거다. 밥먹고 그것만 연구해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만 연구하라”는 할머니의 대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인생이 늙기는 바람결 같구나. 천금을 주어도 세월은 못 사네 못 사는 세월을 허송을 말아라.” <청춘가> 중에서 <청춘가> 노랫말에 든 인생사 “죽기 전에 영화를 한편 찍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 인천방송 등에서 다큐멘터리 PD로 재직해오던 박진표 감독은 늘 영화를 꿈꾸었다. “솔직히 직장을 관두는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요. 10년이 넘는 경력이면, 원한다면 언제라도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만약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작은 비디오가게나 빵집을 차려야지 각오했구요.” 그러나 기존의 것을 버리는 어려움과 시작의 용기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30대 중반 나이에, 물론 이창동 감독은 그러시기도 했다지만, 조감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런 증명도 안 된 나에게 충무로가 호락호락 영화를 맡기지도 않을 테고. 결국 이 방법이 내가 영화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박 감독은 주저없이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렸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인천방송에서 제작했던 3부작 다큐멘터리 <사랑>을 찍으며 만난 박치규·이순예 부부에게로 뻗어나갔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취재하며 처음으로 <청춘가>라는 민요를 들었지요. 가사 안에 인생사가 들어 있었어요. 이게 인생이구나, 이게 사랑이구나. 결국 <청춘가>의 가사로 챕터를 나눈 것은 삶에 대한 고찰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또한 신에서 신으로 넘어가는 것이 내러티브라면 그런 걸 무시하고 가자는 생각도 있었구요.” 다행히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박 감독의 뜻에 너그럽게 응해주었고, 인천방송에서 함께 일하던 이수미 작가와 공동촬영을 맏을 정용우 PD, 전병호 조명감독과 박철호 조연출까지 ‘초경제형’ 제작진이 꾸려졌다. 보통 영화현장의 1/10도 안 되는 사람들이 60분짜리 테이프를 서른다섯권 찍어내려갈 동안 4개월의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수도 없는 기획을 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도 없는 삶을 대변하고, 그걸 찍고 구성하고 골격을 세우고 편집하는 많은 단계를 늘 거쳐야 했던 TV작업이 어떤 현장학습보다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몇명 안 되는 스탭들이 일대 다수의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내공인 것 같구요.” “보이지 않는 연출”을 위해 낡은 난로와 그 위에서 끓고 있는 찌그러진 주전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이들처럼 물장난을 치던 팥죽색 ‘다라이’, 터덜터덜 그 긴 여름을 지켜주던 고물 선풍기, 낮잠 자는 할아버지 배 위에 누워 있던 꼬질한 종이부채, 사랑한 날이 꼬박꼬박 기록되던 전지 크기 달력. 이 모든 소품은 제작진이 사오거나, 빌려오거나 아니면 만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때 묻은 삶과 닮아 있는 그 낡은 소품들은 영화를 위해 그곳에 배치되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 의도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은 이 영화 전체의 미덕이기도 하다. “자연스럽다는, 연출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가장 뿌듯한 칭찬이에요. 개인적으로 감독이, 나 이것을 이렇게 찍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영화는 싫거든요.” 하지만 전문배우가 아닌, 그것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자연스러운 영화를 찍기란 수월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 신들이 다 붙어 있으니 괜찮아 보이지,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썰렁하고 어색하겠어요. 감정 끌어내기까지 늘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고 한컷에 10번 이상의 테이크로 갔고 그분들 체력을 생각하면 하루에 한신 이상은 찍기가 어려웠어요.” 물론 70% 이상이 주인공들이 직접 격은 이야기지만 무수한 토론과 동선에 대한 고민이 오갔다. 가장 흐뭇한 웃음을 유발시키는 할아버지의 ‘국민체조신’ 역시 건너편 옥상에서 카메라를 설치하고 하루종일 그 장면만 찍고 또 찍었다. 게다가 앞선 다큐멘터리 작업의 이력이 주는 장점의 이면에는 ‘너무 많이 안 사나이’로서의 절제가 요구되었다. “욕심이 왜 안 났겠어요. 방송사 생활 10년에 대중들이 어떤 장면에 감동을 받고 어떤 음악을 쓰면 눈물을 흘리며, 어떤 앵글이 더욱 효과적인지를 모를 수가 없거든요. 나름대로 그런 면에서 선수 아닌 선수가 되어버린 거죠. 끊임없이 꾸미고 싶은 마음을 억제해 나가는 과정이었어요. 그러지 말자고, 보이는 대로 찍는 것이 어쩌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가장 솔직하고 성실한 작업방식일 거라고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하면서요.” 사실 촬영시에는 관망의 풀숏이 아닌 감독의 느낌이 묻어나는 컷도 많았고, 이쪽저쪽 ‘누끼’(두 사람 이상이 등장하는 신에서 한쪽을 몰아서 찍고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상대편 또한 몰아서 찍는 것)로도 안 찍은 게 아니다. “길고 좁은 골목길의 계단이 그들의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해서 계단을 올라가는 3분짜리 한컷을 붙여야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하지만 문인대 편집감독으로부터 ‘꼭 당신이 표현할 모든 컷들이 드러날 필요는 없다’는 충고를 들었죠.” 그렇게 이러저러한 장면들은 “붙인다기보다는 버려갔던” 편집과정 속에서 떨어져 나갔고 결국 포장지를 벗기고 수식어를 빼낸 67분의 솔직한 사랑의 기록만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침침칠야에 달이 떠서 좋고요 만산편야에 꽃 피어 좋구나.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리고 정든 님 말 한마디 내 가슴 풀린다.”<청춘가> 중에서 정신적 후원자인 동생 막상 촬영이 끝났을 때 이미 3천만∼4천만원 이상의 돈이 깨졌다. 후반작업에 들어갈 돈은 여의치 않았고 방송 프로그램 마무리하듯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위기였다. 그러나 다행히 중앙대 후배인 박제현 감독이 있는 메이필름에서 “영화를 보지도 않은 채 제작결정을 내려줬고” 후반작업부터는 여느 영화 못지않게 충무로 시스템 속에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모든 일은 가속도가 붙었다. 미흡한 부분의 보충촬영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음악의 박기헌씨, 문인대 편집기사와 편집보를 맡은 황호설씨, 김홍백 PD 등 노련한 후반작업 스탭들이 가세했다. 영진위 녹음실의 성지영, 홍예영씨는 화면 곳곳에 끼어들어간 ‘초보감독’의 목소리를 지우는 까다로운 작업을 불평없이 해주었다. 디지털로 찍힌 화면은 키네코 작업을 통해 필름 속에 담겼고 3시간짜리 가편집본을 본 미로비전은 해외배급과 국내배급까지 맡아서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던 중 칸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그렇게 <죽어도 좋아>는 한편의 영화로 세상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든든한 정신적 후원자는 단편 <런치>(Lunch)로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었던 뉴욕대 영화학과에 재학중인 동생(탤런트 송채환의 남편이기도 한) 박진오였다. “내가 영화과를 다녔던 환경 때문인지 어린 동생은 영화를 꿈꾸었고 내가 방송사에 다닐 때 결국 동생은 먼저 영화를 찍기 시작했죠. <죽어도 좋아>가 완성되자마자 테이프를 들고 동생이 있는 뉴욕에 갔다왔어요. 조금은 긴장하고 조금은 걱정했는데 좋아해줬죠. 다른 누구보다 동생한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제일 뿌듯했어요.” 이들 형제는 박진오가 <리퀘스트>라는 작품으로 올해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오르면서 함께 칸을 향해 날아갔다. 스포트라이트, 반갑지 않았다 “영화를 준비하고 만들 때가 가장 행복했고 요즘이 제일 힘든 때”라고 말하는 박진표 감독은 조용히 만들어냈던 <죽어도 좋아>에 쏟아지는 세상의 갑작스런 관심과 영화 이상의 사회적인 문제제기가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물론 이 영화가 젊은이들이 섹스를 한 게 아니고 70대 노인이 섹스를 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거겠지만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걸 보면 안타까워요. 전주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하기 전까지 영화사로 찾아와서 본 사람이 총 50명도 안 되는데 왜 지레 논란을 만드는지….” 발기된 할아버지의 성기가 카메라에 노출되고, 그것을 입으로 어루만지는 할머니의 오럴섹스 장면이 이어지는 7분간의 롱테이크 섹스신은 이 영화에서 양날의 칼인 장면이다. 감독도, 관객도 “이들의 절대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솔직한 장면”으로 꼽고 있지만 일반 개봉을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성기가 노출되는 이 장면에 검열쪽에서 얼마만큼의 아량을 베풀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간지에서는 ‘20대가 하면 포르노고 70대가 하면 칸에 가냐?’는 식의 기사를 냈던데, 그걸 보며 참 속상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 정작 영화를 본 관객 중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한명도 못 봤는데 말이죠. 결국 영화를 보지도 않고 서툰 정보만 얻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는 거죠.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는 격이에요. 저는 이들의 늙은 몸이 곧 삶이라고 생각했고 할아버지의 성기가 노출되는 장면이야말로 그가 살아 있다는 자신감의 표시라고 믿었어요. 그 섹스가 사실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왜 중요한가요? 만약 그것이 상영할 수 없는 이유로 작용한다면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멜로드라마, 혹은 로맨틱코미디 “어디선가 ‘그레이 로맨틱코미디’라고 말해놓은 걸 봤는데, ‘그레이’란 표현만 빼면 참 마음에 드는 표현이었어요. 재밌는 사실은 어느덧 내가 ‘대한민국 노인전문가’가 되어 있더라는 거예요. 나는 이 영화를 통해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에 방점을 찍은 건데 사회적으로는 ‘노인’이라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거죠. 하지만 두 노인을 제외한 주변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도 멜로드라마의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될 거예요. 절대사랑의 순간을 훼손시켜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 만약 할아버지, 할머니의 가족을 그리고 주변을 그렸다면 저는 정말 노인 전문가가 되었겠죠.” 이제 칸에서 돌아오면 박진표 감독은 30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극영화를 준비할 거라고 했다. “빨리 잊어버리고 다음 작품 하려구요. 뭐 당분간은 개봉이다 뭐다 바로 집중할 수는 없겠지만 언제까지 여기에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하고 싶은 영화는 너무 많아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는 건 열 번째 영화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태생이 이래서 계속 째려보지 않을까요?” (웃음)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두 연인에게도, ‘죽기 전엔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감독에게도 <죽어도 좋아>는 매우 특별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죽어도 좋아>와 함께라면 우리가 그릴 노년의 풍경 역시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살면은 몇백년 사느냐 살아 생전에 선심을 합시다.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요 이내 가슴에 희망도 많구나.” <청춘가> 중에서 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70대의 사랑 담은 박진표 감독의 다큐멘터리 <죽어도 좋아> ▶ <죽어도 좋아>는 어떤 영화? ▶ <꽃섬>의 감독 송일곤, <죽어도 좋아>의 경이로운 힘에 감탄하다 ▶ 토니 레인즈,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를 인터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