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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Review] 묻지마 패밀리

■ Story 세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영화. 80년대 초반, 중학생 명진은 나이키 운동화를 사 신는 게 꿈이다. 그 꿈이 너무 절절해서 밤에 뜬 초승달도, 낮 하늘의 조각구름도 모두 나이키 상표처럼 보인다. 그러나 택시기사인 아버지 밑에서 네 남매와 함께 달동네에 사는 명진이 비싼 나이키를 사기란 힘들다.(‘내 나이키’) 별 세개쯤 되는 중급 호텔의 같은 층에 잠든 애인을 불태워 죽이려는 남자, 킬러를 피해 숨은 조직폭력배, 그 조직폭력배의 두목을 죽이려는 킬러, 젊은 남자와 바람난 유부녀 등 네쌍의 인간들이 투숙한다. 이들의 사연이 우연히 얽히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사방에적’) 청소년 때부터 교회에서 누나, 동생하며 지냈던 남녀의 이야기. 여자가 결혼하자 남자는 군에 갔고, 남자가 휴가나와 둘이 만난다. 뭔가 서로 할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못하고 자꾸 시간만 간다.(‘교회누나’) ■ Review <묻지마 패밀리>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세 단편이 어떤 가족관계인지, 즉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묻지 말라는 말처럼 들린다. 실제로 세 이야기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뉴욕 스토리>나 <에로틱 테일즈> 등 여느 옴니버스영화처럼 안에 담긴 에피소드들을 묶을 공통의 키워드가 없다. 스타 감독들이 모인 것도 아니다. <묻지마…>의 세 감독은 모두 신인이다. 단편영화제에서나 볼 법한 패키지를 꾸려와서 7천원 내고 보란다. 그래놓고 묻지 말란다. 대단한 배짱이다. 세 단편의 공통 키워드가 있긴 있다. 장진이다. 세편의 기획과 각색에 장진 감독이 관여했고 신하균, 정재영, 임원희, 정규수, 이문식 등 연극판에서부터 장진과 함께했던 이른바 ‘장진 사단’ 배우들이 각 편마다 역할을 바꿔가며 출연한다. 그러니까 장진의 이야기 구성력과 장진 사단 배우들의 맨 파워가 이 영화의 배짱의 근거이다. <사방에적>은 각본까지 장진이 쓴 탓인지 셋 중 장진의 냄새가 가장 많이 배어나온다. 810호에 투숙한 남자는 외도한 애인에게 수면제를 먹여 재운 뒤 그녀의 몸에 휘발유까지 부었다. 이제 불만 붙이면 되는데 라이터가 안 켜진다. 장진 영화에 친숙한 관객이라면 눈치챌 것이다. 이 남자가 끝까지 불을 못 붙이리라는 걸. 장진 영화에서 의지를 가지고 중대한 일을 결행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우연한 사건의 방해를 받고 삼천포로 빠진다. 아닌 게 아니라 <사방에적>은 우연한 사건들이 여러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조롱하는, 전형적인 상황극이다. 익숙하다는 듯 장진의 장기가 살아난다. 호텔 각 방에 들어앉은 다양한 인간군상이라는 모티브가 <포룸>과 닮았지만, 화장실의 변기가 막히는 사고 같은 건 확실히 한국적 화장실 유머다. <매트릭스>에서 선보였던 정지시 360도 회전장면을, 카메라를 수백대 설치하는 대신 카메라가 다 돌 때까지 배우들을 정지시켜놓고 찍어서 내놓는, 저예산영화 티를 서슴없이 내는 모습도 재밌다. <교회누나>의 남녀는 20∼30년 전 청춘영화의 주인공들을 닮았다. 서로 마음이 있으면서도 누나, 동생하며 만났던 학창 시절 관계의 틀을 누구 하나 먼저 깨지 못한다. 그 분위기에 맞춰 화면이 한 템포씩 늦게 바뀐다. 시종일관 밝은 배경이 수채화 같은 분위기를 의도하는 듯하지만, 어딘가 의뭉스럽다. 마침내 이별장면에서 둘이 기차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사랑해”를 외칠 때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다. 슬픔이나 아련함이 정점에 오르려 할 때 황당한 사건을 던져 썰렁하게 만드는 것, 이것도 장진의 특기다. <내 나이키>는 셋 중 이야기가 가장 쉽고 호소하는 정서도 보편적이다. 정치적으로 억압되고 경제적으로 가난하던 80년대 초반에 찍은, 빛바랜 가족사진 같은 영화다. 중학생 명진의 아버지는 개인택시 얻는 게 꿈이다. 공부벌레인 고3 큰형은 1등 한번 해보는 게, 둘째형은 주먹으로 ‘짱’되는 게 소원이다. 이 여러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30분 조금 넘는 분량에 꽉 차게 집어넣는 구성이 깔끔하지만, 이 단편에서는 장진 사단의 배우들이 유달리 돋보인다. 큰형 임원희, 작은형 류승범은 얼굴 자체가 캐릭터다. 동네 골목에서 중학생들의 돈 뜯는 고교생 정재영과 신하균은 진짜 양아치 같다. 그냥 교복을 입은 모습만으로도, 공부 못하고 껄렁껄렁한 고교생의 아우라가 절로 나온다. 관객이 웃을 채비가 워낙 잘돼 있어서, 이들이 별말을 안 해도 웃는다. 장진의 유머는 종종 반대되는 항목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의지적 인간과 우연한 사고, 감정의 고양과 썰렁한 사건이 부딪힌다. 어떨 때 그 충돌은 이 사회와 사람 안에 숨은 큰 모순덩어리를 잡아낸다. <간첩 리철진>에서 리철진이 택시강도들을 만나 무기와 공작금을 털리는 대목은 장진식 유머의 백미다. 리철진은 혼자고 강도는 여럿이니 당하는 게 당연한데도, 간첩이 강도보다 약하니까 웃긴다. 나아가 이런 웃음 자체가 또 얼마나 웃긴 것인가. 그러나 웬만큼 치밀하지 못하면 그 유머는 진부하거나 썰렁해기지 쉽다. <킬러들의 수다>에서 장신식 유머는 가끔씩 위태로움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그건 ‘장진 사단’ 배우들에게 힘입은 바 크다. <기막힌 사내들>부터 세편을 거치면서, 다른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들은 개성 뚜렷한 자기 이미지들을 쌓은 것이다. <묻지마 패밀리>는 아기자기하고 맛깔나는 소품이다. 단편의 가벼운 리듬을 타고 장진식 유머가 원기를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진 사단 배우들이 버무리는 갖은 양념이 맛의 더 큰 비결이다. 임범 isman@hani.co.kr

[Review] 스페릭스

■ Story 인간이 볼 수 없는 미세세계 스페릭스는 축구를 사랑하는 종족들이 모여 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하지만 그중의 두 종족인 아트모스와 널모스는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트모스는 활기에 넘치고 낙천적인 종족인데 반해 널모스는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종족. 아트모스와 널모스의 치열한 경쟁을 다스릴 수 있는 건, 공정하게 승부를 낼 수 있는 스페릭볼뿐. 스페릭볼의 우승을 위해 각 팀은 훈련에 돌입하고, 아트모스팀과 널모스팀은 결승에서 만난다. ■ Review 2002년 월드컵의 화려한 개막에 발맞추어 개봉하는 3D애니메이션 <스페릭스>는 귀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동원, 축구인구를 어린이로까지 넓히려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야심찬 시도 가운데 하나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기획상품이지만 <스페릭스>는 어른이 보아도 충분히 재미있다. 쓸모없는 패스나 드리블은 피하고 곧장 다음 장면으로 직선패스하는 스토리 덕분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받치는 기둥은 결승에서 맞붙은 ‘선한’ 아트모스팀과 ‘악한’ 널모스팀의 승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널모스팀이 꾸미는 비열한 음모와 정당하게 승부하려는 아트모스팀의 대립을 둘러싼 스토리를 일관되게 밀어붙이면서 사이사이 스피디한 축구경기 장면들을 끼워넣는다. 경기장면은 특히 그럴듯하다. 세계 최고 선수들의 기술을 본떠 만들었다는 경기장면은 액티브하고, 입체적이다. 골인장면도 다양한 앵글을 구사하며, 아슬아슬한 순간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한다. 노랑, 빨강, 파랑 등 형광에 가까운 강렬한 빛깔의 캐릭터들은 당장에라도 가방에 달고 싶을 만큼 귀엽다. 제작사인 영국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슬레이브 스튜디오의 노하우 덕분이다. 재치있고 아기자기한 설정들도 재미있다. 최고의 스트라이커 케즈와 게임 메이커인 니크가 눈앞에 나타난 멋진 오토바이에 한눈을 파는 바람에 경기에 출전하지 못할 뻔해 팀을 위기에 빠뜨린다거나 훌륭한 미드필더인 여자선수 레아가 널모스팀의 섹시한 라이벌 비로를 너무 의식해 실력발휘를 못하는 등의 행동은 주관객층인 어린이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경기 해설자로 목소리 출연한 수다맨 강성범과 성대모사의 제왕 심현섭의 수다스럽고 현란한 경기 중계를 듣는 것도 <스페릭스>의 재미를 더한다. 영화 속에서 아트모스팀이 골을 넣을 때마다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객석의 꼬마 관객을 보면, FIFA가 날린 회심의 골은 그대로 동심의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간 것 같다. 위정훈 oscarl@hani.co.kr

[단편영화 Review] 나는 날아가고… 너는 마법에 걸려 있으니까

■ Story 동대문 어느 건물에서 한 남자가 추락사한 날, 은숙은 애인 민수에게 잠시 이별을 고한다. 그녀는 친구 미희의 애인 상혁을 남몰래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수는 은숙을 잊지 못한 채 노래방에서 일하는 한 소녀와 여관에 들어가고, 은숙은 여관 앞에서 상혁을 유혹한다. 이미 상혁과 결혼을 약속한 미희는 민수에게 은숙을 붙잡아달라고 요구한다. 이 너저분한 관계가 계속되는 한가운데서, 민수는 은숙의 마음을 돌리고자 “나는 날아가고… 너는 마법에 걸려 있으니까”라고 주절거려보지만, 그 목소리는 아무 힘도 갖지 못하는 헛소리일 뿐이다. ■ Review 이 영화의 제목은 묘하다. 유치한 말장난 같기도 하고 지루하고 난해하지만 별 내용없는 치기어린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심지어 외우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날아가고…>는 의외로 일상의 한순간을 낚아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들이미는 영화다. 변하지 않는 사랑의 맹세 따위는 며칠도 가지 못할 객기에 불과하다고, 이 영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놓는다. <나는 날아가고…>는 대부분 이처럼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부끄러운 순간들로 이어져 있다. 46분에 불과한 이 짧은 영화 속에서 여자들은 누가 먼저 사랑에 빠졌는가를 두고 다투고, 남자들은 “네가 사랑을 알아”라는 입에 담기 쑥스러운 대사를 술기운에 실어 외쳐댄다. 한 걸음만 떨어져 있어도 그 모든 상황이 비루하기만 한데, 그들은 세상에 다시 없는 거창한 사건을 만난 듯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않는다. 그 모습은 우리 모두의 기억과 겹쳐지는 것이어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남자를 묶어두기 위해 임신하고 싶어할 수 있고, 바람에 날리는 노끈을 보면서도 아득해질 수 있다. 살인을 꿈꾸다가도 어깨 위에 얹힌 미운 친구의 머리에 더 신경이 쓰일 수 있다. 영상원에서 홍상수 감독에게 영화를 배운 김영남 감독은 사소한 몸짓에도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목하는 법을 익힌 듯하다.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순간을 놓친 뒤 공허하게 되풀이되는 이 영화의 대사와 노래는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쓸쓸하게 환기시킨다. <나는 날아가고…>는 2001년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돼 주목받았던 작품. 그러나 칸영화제가 주는 엄숙함에 짓눌리면서 볼 필요는 없는 영화다. 김현정 parady@hani.co.kr

<오아시스> 촬영현장

청계고가도로에서 맞는 늦봄의 새벽은 묘하다. 차를 타고 달리면서밖에 오를 수 없는 곳에 두발로 멈춰 서서 평화시장 상가를 바라보면, 시간을 잠시 정지시키고 세상을 구경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기분좋을 수 있는 특권이지만, 평화시장이라는 공간이 품고 있는 역사적 시간의 처연함이, 낮게 내려앉은 구름과 아직 남은 한기와 어울려 낯선 과거와 대면하고 있는 듯한 착각과 밑모를 불안감을 함께 자아낸다. 일요일인 5월19일 새벽 3시부터 청계고가도로 반을 막고 <오아시스>의 막바지 촬영이 이루어졌다. 이날 분량은 청계고가에서 차가 막히자 설경구가 문소리를 안고 고가도로 위에서 춤을 추는 장면. 청계고가를 다시 막을 수도 없고, 영화 속 시간이 저녁 무렵이어서 해뜨기 전에 빨리 찍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테이크가 많기로 이름난 이창동 감독이지만, 이날만은 두 시간에 여섯컷을 찍는 놀라운 속도전을 펼쳤다. 이창동 감독은 촬영중에는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날은 촬영이 거의 끝나가는 탓인지 기자들에게 “이 영화가 감동적인 멜로라는 점, 다시 한번 강조해달라”라고 웃으며 말을 건네기도 했다. <오아시스>는 전과자 남자(설경구)와 장애자 여인(문소리)과의 사랑을 다룬 ‘감동적인’ 멜로드라마로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에 이은 이창동 감독의 세 번째 작품. 지난해 11월에 촬영에 들어갔으며, 이번주 타이에서의 3일간 촬영일정을 끝으로 크랭크업한다. 관객에겐 8월 초에 선보일 예정. 글 허문영·사진 이스트필름 제공 사진설명 1. 자장면을 함께 먹고 최고의 데이트를 마친 두 사람이 공주(문소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로가 막히자 종두(설경구)가 갑자기 공주를 안고 나와 춤을 춘다. 2. 1의 장면 촬영을 위해 차량 100여대와 스탭 80여명이 동원됐다. 촬영은 날이 밝은 아침 6시쯤 끝났다. 3. 신중하고 꼼꼼하게 찍기로 이름난 이창동 감독도 이날만은 두 시간에 6컷을 찍었다. 촬영허가를 받은 시간이 길지 않은데다, 날이 밝으면 저녁의 색감을 낼 수 없기 때문. 4. <박하사탕>에 이어 <오아시스>에서 다시 연인으로 만난 설경구와 문소리. 지금까지와는 달리 하도 순식간에 오케이가 나는 바람에 설경구는 "오늘은 다른 감독님하고 촬영하는 기분"이라고.

나, 요즘 코미디의 왕입니다, 로버트 드 니로

여기는 미국판 <경찰청 사람들>에 해당하는 리얼리티 쇼 <쇼타임> 촬영현장입니다. 평소 연기 오디션에 목숨 건 보람이 있어 카메라 앞에서 날고 기는 촐랑이 파트너 옆에서, 코를 꿴 들소처럼 씩씩대며 끌려나온 베테랑 형사 미치는 풀먹인 빨래보다 뻣뻣하군요. 연기 지도를 위해 초빙된 왕년의 경찰 드라마 스타가 한숨을 토해냅니다. “저 인간은 사상 최악의 배우야!” 그 한마디가 펀치라인이 되는 까닭은 단 하나. ‘그 인간’이 다름 아닌 로버트 드 니로(59)이기 때문이지요. 천의 얼굴로 유명한 명우 피터 셀러스의 이름을 꿔다 쓴 것은 에디 머피가 맡은 교통순경 트레이 셀러스지만, 정작 10대 시절부터 스물다섯까지 변장을 한 프로필 사진을 들고 오디션을 섭렵한 주인공은 액터즈 스튜디오의 가장 자랑스런 졸업생 로버트 드 니로입니다. 밥(로버트의 애칭)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수군거리는 팬도 있을 법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로버트 드 니로를 보고 웃는 일이 부쩍 늘어난 느낌입니다. <미트 페어런츠>로 만난 것이 이태 전인데, 올해는 형사버디 코미디 <쇼타임>에 이어 <애널라이즈 디스>의 속편 <애널라이즈 댓>이 날을 받아놓았고 <미트 페어런츠>의 후일담 <미트 폭커스>가 2003년 필모그래피에 올라 있습니다. 1700만달러에서 2천만달러에 걸쳐진 개런티도 드 니로 평생 어느 때보다 두둑해서, 코미디를 팝콘처럼 마냥 가벼운 장르로 믿는 사람 틈에서는 <히트> 이후로는 드 니로가 은행계좌 관리에 주력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옵니다. 하지만 코미디언 드 니로는 갱스터 드 니로의 흐릿한 복사판이 아니라 네거티브 사진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 같습니다. 드 니로가 누굽니까. 알 카포네였고 비토 콜레오네였고 프랑켄슈타인이었습니다.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뿐인가요? 그와 공연하는 배우들은 개런티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오한부터 느낀다고 합니다. <미트 페어런츠>의 제이 로치 감독은 드 니로에게 겁먹은 벤 스틸러의 긴장을 연기에 끌어들이고 싶어 툭하면 “아, 당신이 낸 그 아이디어 말이지, 밥이 좋아할까 모르겠네”라고 변죽을 울리곤 했다지요. 기자들은 또 어떻구요. 고심 끝에 내놓은 정성어린 질문을 “뭐, 별로(침묵)”라고 줄곧 깔아뭉갠 인터뷰를 읽다보면 기자가 딱해 코끝이 시큰해져 옵니다. 만약 눈앞에서 그가 못마땅한 듯 눈썹이라도 꿈틀할라치면 “그래, 난 버러지야”라고 저절로 자학하게 될 듯한 사나이 드 니로가 탁월한 코미디언이 되는 것은 바로 그 겁나는 카리스마 덕택입니다. 살짝 훌쩍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박장대소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코미디에는 이른바 ‘물 밖에 나온 생선’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졸지에 낯선 환경에 내던져지는 바람에 ‘품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인물의 허둥거림에 초점을 맞춘 코미디를 뜻하는 말이지요. 1970년대 이후 여러 걸작을 통해 완성된 신화적인 마초 드 니로는, 금이 갈 궁지에 몰린 남성적 자존심이 자아내는 웃음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피에로인 것이죠. 참, 이 대배우의 생애 최초 배역은 열살 때 연기한 <오즈의 마법사>의 겁쟁이 사자였다죠? 하긴 무슨 변명이 필요할까요? 배우 몇명의 필모그래피에서 취합할 만한 숫자의 걸작을 영화사에 일찌감치 헌정한 그가 뭘 선택한다 해도, 드 니로의 재능에 진 해크먼처럼 나쁜 영화를 업그레이드하는 배려의 자질이 없다 해도 우리는 감히 불평할 수 없겠지요. 그래도 용기를 짜내 물어볼까요. “코미디와 드라마 뭐가 더 어렵죠?” “글쎄… 미묘한 유머, 그건 내가 갖고 있는 자질 같고. 아이러니, 그건 내가 좀 아는 거죠. 그리고 이런저런 연기?, 그건 내가 최고로 잘하는 일이고.” 저런, 그러고보니 그의 영화 중에 <코미디의 왕>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인용된 인터뷰 출처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입니다.

단단한 스물다섯, 굳세어라 투지야,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이정진

이정진은 단단한 사람이다. 그가 유독 ‘단단하다’라는 형용사를 자주 쓰기 때문도 아니고, 소문난 대로 근육이 단단해서도 아니다. 그저 처음부터 그런 인상을 줄 뿐이다. 너무 더워서 짧게 깎은 머리부터 조금 살이 빠졌다는 단정한 어깨선까지, 야물게 속이 들어찬 배추처럼, 헤쳐보고 싶을 만큼 빳빳하고 싱싱하다. 그런데 스물다섯 젊은이가 무심코 하는 말까지 단단하기 그지없다. 3년 동안 연기수업을 받은 뒤 변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랑을 알게 됐어요”라며 이해 안 될 대답을 한다. “모든 영화에는 사랑이 깔려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을 하고 있는 배우와 하고 있지 않은 배우는 다를 수밖에 없죠.” 아버지가 됐든 여자가 됐든 그는 연기를 알수록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 성실한 배우는 <해적, 디스코왕 되다>를 찍으면서 연기와 사랑과 함께 추위와 피로도 뼈저리게 알아버렸다. 그가 연기한 해적은 굳센 주먹과 날렵한 발길질로 뒷골목을 주름잡는 십대 소년. 폼나는 액션을 만들기 위해 한번에 서너 시간씩 무술 연습을 하다보니 끝나고 나면 숟가락 드는 손이 떨릴 정도로 피로에 절어 살았다. 심지어 사고를 칠 뻔한 적도 있었다. 해적이 디스코 수련을 하는 겨울장면을 찍다가 여름에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차가운 웅덩이 속에서 얼어죽고 빠져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것도 동료들이 태평하게 웅덩이를 바라보며 삼겹살을 구워먹고 있던 옆에서. 그래도 여기까지는 깔끔한 편이었다. 두 친구와 함께 재래식 변소의 똥을 푸는 장면을 찍은 뒤엔 모두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바람에 버스 옆 추운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 서러움까지 당했다. 그 정도면 한번쯤 몰래 울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씩씩하게 “그런 경험이 내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됐을 때 내 허술한 틈을 단단하게 메워줄 것”이라고 되받아친다. <해변으로 가다>에서 살인마의 희생물이 되는 젊은이들 중 한명으로 영화를 시작한 그는 쓰린 기억 하나도 그대로 놓쳐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고 취직해서 평범하게 생을 마칠 거라고 생각했던 스무살 청년. 그가 우연히 모델이 되고 배우가 되면서 기댈 수 있었던 기둥은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충고였다. 영화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기회이므로, 남들 눈엔 실패로 비치더라도, 그 자신에겐 항상 거름으로 남는 시간인 것이다. “잘못이 그대로 들통나버리는” 커다란 스크린 앞에서도, 그는 앞으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그리 많이 두렵지 않다. 3년 동안 개인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아온 이정진은 아직 연기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는 동안엔 연기만 할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런 이정진이 유일하게 먼 미래를 바라볼 때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는 순간뿐이다. “남자라면, 그리고 배우라면 부정(父情)을 연기로 표현하는 경지에는 가야 하지 않겠어요?”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아이를 낳지도 말아야 하지만, 그 자신은 분명 아이의 인생을 책임질 만한 능력을 키울 거라고 못박는 새파란 청년. 연일 계속되는 영화홍보 활동과 드라마 촬영중에도 전화로 열심히 연기 수업 스케줄을 잡던 이정진은, 스스로 빛을 찾아 익어가는 단단한 열매 같았다.

일상의 관찰에서 웃음 끌어내는 시트콤 <동물원 사람들>

(KBS2TV 월∼금 저녁 7시45분) 시트콤은 클리셰의 집합이 되었다. <잘난 걸 어떡해>(KBS2TV, 종영)에서 스포츠센터 아가씨들이 말 잘하는 사람에게 속아서 다이어트 용품을 사는 이야기(1월29일)가 방영된 다음날(1월30일) <뉴 논스톱>(MBC 월∼금 6시50분)에서 ‘어리버리’ 장나라가 말 잘하는 사람에게 속아서 필요없는 상품을 사는 에피소드가 방송되었다. 결말도 둘다 물건을 잘 샀다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연일 방송되었으니 베끼지는 않았을 테다. 시트콤은 더듬이를 서로 맞대 기억을 복사하는 개미의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첫 장면을 보았다면 전개가 빤하다. 소중한 것이 등장하면 꼭 그 물건은 누군가가 잠깐 쓰다가 없어져서 소동이 벌어지고, 누구에게 용감하게 보이고 싶으면 희롱하는 남자와 여자라는, 그리고 자기는 그를 구해주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전술을 짠다. 친구들 사이에 거짓말이 빈발한다. 어떻게 친구 사이가 유지되나 의문스러워지는 악수를 두면서도 시트콤은 건재하다. 그래서 시트콤은 정말 편리한 장르같이 보인다. 아이디어 공모가 일반화되어 있고, 네티즌들이 올리는 줄거리들은 방영분에 버금가는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시트콤은 사소한 장르라는 것. 일일극보다도 사소하다면 더 사소하다는 것. 매일매일의 일상사를 견뎌내야 하므로 견고한 장르라는 것. 그리고 그 사소함과 견고함은 인간에 대한 지독한 관찰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사마다 하나씩의 일일 시트콤이 방영되는 때에 시트콤 불황을 이야기한다. 그런 중에 희망 하나를 건진다. <동물원 사람들>이다. 이 시트콤은 불모지에서 나왔다. 따져보면 한국 시트콤의 역사에서 걸출한 시트콤은 불모지에서 나왔다. <남자 셋 여자 셋>은 청춘 시트콤이라는 말을 프로그램 앞에 붙이고 스타없이 출발했다. 지금 <남자 셋 여자 셋>은 시트콤의 전형이 되었다. <세 친구>는 성인들 대상으로 밤 시간대를 포진했다. 세명의 남자는 그 이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남자들이었다. <순풍 산부인과>는 일일드라마 다음, 미니시리즈 전이라는 ‘끼인’ 지역에서 출발했다. 6개월 동안 그 화법에 사람들이 낯설어했다. 그리고 <동물원 사람들>. KBS는 지금까지 한번도 시트콤이라는 장르에서 피치를 올린 적이 없다. <동물원 사람들>의 전작 <잘난 걸 어떡해>는 4개월 만에 종방되었다. 3월11일 시작한 이 시트콤은 지금 한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동물원 사람들>은 훌륭하다. 술자리에서 공중에 들어올린 소주잔이 1초간 머무르는 순간, 갑자기 카메라가 원을 그리면서 그 소주잔을 관찰하는 순간, 음악은 띠리리∼라는 깨달음이 묻어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묻어나는 순간의 포착 <동물원 사람들>은 동물원과 동물병원이 주요한 장소다. 동물원 가까이에 동물원장 고대식(전무송)과 그의 아들 한길(김찬우·동물병원 원장), 두길(심지호·동물원 사육사) 그리고 프랑스에 부인을 보내고 집안일을 하는 고대식의 동생 현식(천호진)과 그의 딸 미나(정화영)의 집이 있고, 그 집 옆에 동물원 주임 정운종(정성모)과 그의 부인 양하영(김현주), 부부의 아들 민호(<순풍 산부인과>의 정배), 하영의 동생 민영(이민영·동물병원 의사)의 집이 있다. 동물병원에는 한길과 민영 외에도 정성화가 의사로 김재인이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고대식은 위치로는 <순풍 산부인과>의 오지명에 비교될 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대식에게는 코미디적인 면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가식적인 사람이란 면에서 장진구(<아줌마>)와도 흡사하다. 하지만 밉지 않다. 비슷하지만 독자적인 아우라를 완성한다는 면에서는 전무송의 연기가 한몫할 것이다. ‘사랑과 용서’라는 가훈을 걸었다가 그럴듯한 얼굴로 ‘철저한 자기 관리’로 가훈을 바꾼 뒤, 궁지에 몰리자 ‘사랑과 용서’라는 가훈을 바꿔 달 때의 얼굴에는 일파만파의 인간적인 이기심, 욕심, 권위, 부끄러움이 스쳐 지나간다. 양하영은 평균적인 젊은 아줌마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면에서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시어머니를 봉양하지도 친정어머니와 패거리를 형성하지도 않으면서 통닭집에서 일하는, 드라마에서는 흔치 않지만 현실에서는 일반적인 아줌마다. 현식과 퀴즈쇼에 출연하고서는 상품을 타자 모두 자기가 가진다. 현식이 보다 못해 상품을 자기가 갖겠다는 각서를 비디오에 녹음하지만 하영은 그것을 편집한다. 그러고는 말한다. “제가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아직까지 틀이 덜 잡힌 캐릭터도 있다. 비슷한 또래의 현식과 운종은 독자적인 성격을 탑재했지만 <순풍 산부인과>의 영규의 소시민적 성격을 나눠 가졌다. 현식은 잡기에 능하고 운종은 절대로 돈을 내지 않는다. 하지만 승부욕 강하고 계획적인 현식이 공짜로 음식을 얻어먹을 궁리를 하는 에피소드와 운종이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잘못을 덮어 나가는 에피소드에 이르면 둘의 성격이 헷갈릴 때도 있다. 민영과 한길은 <동물원 사람들>의 드라마 라인을 지키고 있다. 둘은 모두가 의심하는 연인이다. 한 에피소드에서는 사진사가 찾아와 둘의 사진을 찍고, 한 에피소드에서는 둘이 같이 밤을 샜다고 의심받는다. 민영의 옛 남자가 찾아왔을 때 한길을 남자친구라고 속이는 바람에 결혼식까지 치르게 된다. 민영을 짝사랑하는 성화와 한길을 짝사랑하는 재인은 둘의 사이를 항상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둘은 긴긴 세월을 친구 사이로 지내왔다. 그런데 급기야 스스로도 서로의 관계에 대해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길과 민영 사이는 핑크빛으로 채색된다. <동물원 사람들>에서 지금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펼쳐지는 것은 민호와 미나 사이다. 민호는 미나를 속이고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간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민호가 미나에게 원반을 던지며 화해를 청할 때 미나의 눈물이 그득하던 눈에는 웃음이 번져 나간다(이후 전개에서 이 사랑은 더욱 더 안타까움을 자아낼 것으로 보인다. 한길과 민영의 사랑이 맺어지게 되면 둘은 사돈관계가 된다. 바뀐 가족법에 따르면 사돈은 친척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은 근친상간). 왈왈 동물병원의 병아리 치사사건은 그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그들은 친구들을 모아 데모대를 조직한다. 이 사건에서도 유희는 볼 수 없었다. 어린이가 어른들의 세계를 모방함으로써 그 세계를 낯설게 하는 것을 넘어, 이것을 어린이 권리선언쯤으로 읽어도 될 듯하다. 시트콤, 즐거움을 위해 혹사당하는 장르 일일시트콤은 먼먼 아프리카에서 잡혀와 인간들의 눈에 신기할 목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원 동물의 운명과 비슷하다. 헌신적이고 기특하다.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혹사당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노동강도로 시트콤은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동물원 사람들>의 조건은 더 열악하다. 방영 시간도 길다(그래서 인물도 많아졌다). 보통의 시트콤이 30분인 데 비해 35분이다. CM을 빼면 30분이 실질적인 방영시간. 주병대 PD는 “보통 시트콤은 메인이 70%, 서브가 30% 가면 되는데, <동물원 사람들>은 메인, 서브 없이 둘이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두 가지 이야기에 새끼를 친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똬리를 틀기도 한다. “일일드라마의 경우 시간이 되면 거기서 스톱하면 되지만 시트콤은 계산을 해야 한다. 엔딩에서 계산해서 앞으로 간다. 시간이 길다보니 가끔 반복해서 보여주고 필요없는 이야기가 끼어드는 경우도 있다.” 장소도 넓고 많다. 동물원 촬영이 일주일에 하루 있다. 병원, 동물원 원장, 대식 집, 운종 집 등으로 많아서 한 세트에 다 못 짓기 때문에 세트 촬영도 이틀에 걸쳐진다. <동물원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죽어간 동물을 기리는 동물 위령제, 기린 이름 짓기 등 동물원의 스케줄에 맞춰서 이야기를 짜기도 한다. 동물의 내레이션이 끼어드는 일이 많다. 철창에 갇힌 동물들이 인간을 구경하는 것이 내레이션의 주요한 목적일 텐데 이 ‘환기’는 때로 너무 지나쳐 이야기를 잇기보다 맥을 끊어놓는다. <순풍 산부인과>가 인간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철학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었지만, 산부인과라는 장소에 목 매달지 않았듯이 <동물원 사람들> 역시 그런 강박을 벗어던져도 될 듯하다. 그런 동물이 바라보는 인간의 희화가 없어도 이 시트콤은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주병대 PD도 말한다. “동물을 다룬다는 것이 발목을 잡았다. 동물원이 배경이므로 동물을 많이 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타잔 만들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친구의 이야기가 재밌으면 된다. 배경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다.” 1회보다 다음회가 더 재미있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일일시트콤 시청자들에게는 말 그대로의 ‘삶의 보람’이다. 글·사진 구둘래 kuskus@dreamx.net ▶ 일상의 관찰에서 웃음 끌어내는 <동물원 사람들> ▶ <동물원 사람들> 주병대 PD 인터뷰

그날의 상냥함은 어디로…

아주머니께서는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나 계신 것 같았다. 수화기에 대고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분노와 답답함이 최대한 압축된 채 꽉꽉 눌려져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높은 액수의 연체료를 외상으로 달아놓고 여러 차례 비디오와 만화를 빌려간 손님과의 통화였다. 그녀는 가게 전체에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울려퍼질 정도로 꼼꼼히 몇월 며칠 몇시(!)에 어떤 것을 빌려갔으며 며칠 뒤인 몇월 며칠 몇시에 연체료를 물지 않은 채 무엇을 빌려갔는지 낱낱이 체크하며 낭독하고 계셨다. 물론 상대방의 입장은 단호했다. 자기는 단연코 연체료를 냈다는 거였다. 장시간의 동어반복적인 통화와 가게 안의 손님처리를 아슬아슬하게 병행하고 계시던 아주머니는 기어이 화를 버럭 내시고야 말았다. “아니, 그럼 제가 지금 돈 받아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 컴퓨터에 이렇게 뻔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갑자기 몰려든 손님들이 카운터 앞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그녀의 얼굴도 차츰 빨개져갔다. 가까스로 “화를 내는 동시에 고객처리, 스티커 배포, 웃는 낯으로 목례하기”라는 멀티태스킹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녀는 결국 갑자기 가라앉은 짧은 한마디로 그 길고긴 통화를 끝냈다. “저희 아르바이트생이 뭔가 착오를 했나봅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처음 가게를 열 때 사람들에게 떡과 작은 선인장 화분을 나눠주던 화사한 표정은 바람도 불지 않는 그 작은 공간 안에서 풍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손원평/ 자유기고가 thumnail@freechal.com

장진과 수다 패밀리 [4] - 수다배우 7인방이 장진에게

이문식 장진 감독을 처음 만난 날 개고기 집에 가서 술을 한잔 했다. 그때까진 함께하기로 한 연극 <매직타임>의 캐릭터도 나와 있지 않아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런데 평소대로 막 떠들고 나서 며칠 있다 다시 만났더니 그새 내 캐릭터를 바탕으로 두세장 분량의 대본을 써오지 않았겠는가. 잠깐 봤을 뿐인데 나라는 인간을 너무 잘 잡아내 놀랐다. 그는 심지어 상대방 기분 안 나쁘게 하면서 자기 할말은 다하고 있는 대로 화도 낼 줄 안다. 좀더 시간을 가지고 내공을 쌓으면 딱 좋을 텐데. 중대한 단점도 하나 있다. 술을 못 마신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은 잘 먹인다. 신하균 장진 감독이 밥 사주고 술 사줄 때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감탄하게 된다. 농담이다. 나에게 장진 감독은 감독이라기보다 십년 가까이 사귀고 배워온 선배에 가깝다. 연기라는 걸 아예 까맣게 모를 때, 내 첫 번째 연극을 연출한 사람이 장진 감독이었으니까. 그땐 정말 대단하게 보였다. 학생이 연출도 하고 희곡도 쓰고 연기도 하고. 연기는… 열심히 한다. 그 이상은 말 못한다. 근데 그때 이후로 연기하는 건 거의 못 봤다. 장진 감독이 너무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게 아니느냐는 말이 많은데, 나처럼 한 가지 일에 에너지를 모두 써버리는 사람은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다. 지금은 굳이 그가 쓴 극본을 보지 않더라도 매번 달라지는 이야기가 어떤 틀과 결론을 가질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다. 김일웅 장진 감독은 말투나 목소리는 쌈마이 같을지 몰라도 생각만은 매우 올바른 사람이다.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고 냉정하면서도 자상한 면이 좋다. 정말 잊지 못할 일이 하나 있다. 연극 <택시 드리벌> 끝나고 다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장진 감독이 그날은 이상하게도 술을 ‘엄청나게’, 소주 반병이나 마시고 엉엉 울면서 “미안해. 일웅이 너 용돈도 못 챙겨주고. 우리 조금만 참자” 이러는 거다. 그때 신하균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칼국숫집을 냈는데 그 얘기도 했다. “하균이 칼국숫집도 한번 못 가보고… 미안해…엉엉.” 그런 일은 절대 못 잊을 것 같다. 사람들한테 장난도 많이 치고 슬렁슬렁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실제로도 그렇지만, 서른이 넘은 지금도 범접 못할 카리스마가 있는 장진 감독이다. 임원희 장진 감독은 부지런하다. 잠을 잘 안 잔다. 같은 과 1년 선배라 서로 알고는 있었지만, 가까워진 건 군대 문선대에서 같이 있을 때다. 장진 감독은 천주교 군종병이었는데, 조그만 사무실 같은 게 있어서 밤마다 둘이 거기서 떠들곤 했다. 연극 얘기, 수다의 전신쯤 될 문화창작집단 얘기. 정말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10년도 안 돼서 실현됐다. 천재라고들 하기도 하고, 쉽게쉽게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노력의 결과다. 잠을 못 잘 만큼. 한 가지 바람이라면, 일을 너무 벌여서 몸 상하지 말고, 여유도 찾아가길. 정재영 장진 감독은 말이 많다. 괜히 ‘수다’라는 이름이 나온 게 아니다. 남이 잘 안하는 짓, 해봤자 잘 안될 것 같은 짓을 하겠다고 늘 큰소리 친다. 그런데 큰소리 치고 나서 그걸 해치운다. 큰소리 칠 땐 말리고 싶은 적도 있지만, 그걸 해치우니 할말이 없다. 그래서 같이 수다 떨게 됐다. 술은 잘 못해 차를 마시면서 같이 수다 떤다. 아니면 PC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를 하거나. 8∼9명이 다같이 들어갈 PC방 찾느라 삼만리 한 적도 많다. (장진 감독이 “길게 얘기한다?”며 끼어들자) 아, 이거 꼭 써주세요. 사실은 꽤 독선적이고, 진짜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웃음) 류승범 <화려한 시절> 하게 된 게 장진 감독 때문이다. 드라마를 할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자기가 좋아했던 드라마가 노희경 작가의 작품들이라며, 젊을 때 방송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고 권유해서. 내가 큰 덕을 본 거다. 관객으로서 장진 감독의 영화를 참 좋아하지만, 연출자로는 아직 잘 모른다. <킬러들의 수다>에서 두컷 한 게 전부니까. 직접 연출하진 않았지만 <사방에적> 현장에서 같이 작업하면서 많이 배웠다. 지금껏 감각에 많이 의존해왔는데, 감정이 넘치지 않도록 절제하는 법에 대해서. 신기한 사람이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또 많은 걸 아는지. 정규수 배우로 처음 만났다. 연희단거리패에서 <홍도야 우지 마라>를 할 때 같이 무대에 섰으니까. 서로 잘 모를 때라 뭐 하는 친구지, 그랬는데 연극계의 흐름을 벗어난 사람 같았다. 그땐 연극을 잘 몰라서 그런 줄 알았지.(웃음) 처음에는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는데, 결국 정도에서 벗어나지는 않더라. 지금도 장진 감독에게 연기에 대해 많이 배운다. 연기 자체라기보다는, 사회의 정서랄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연기에 대해서 더 잘 아니까. 그러고 보니 작품 얘긴 참 많이 했는데, 개인적인 얘긴 별로 못했다. 예전엔 술도 못 먹더니, 이제 술이 좀 늘어서 같이 마실 만 하니까 서로 너무 바빠졌다.

장진과 수다 패밀리 [3] - 장진이 수다배우 7인방에게

임원희 군대고참. 내가 ‘빠따’도 진짜 많이 맞았다. 그를 생각하면 항상 군대에서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머리가 하도 커서 ‘화이바’가 안 들어갔던 임원희.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위병소 근무를 도맡아 했던 임원희. 운동신경도 참 안 좋아. 축구를 하면 자기편 골키퍼가 그를 제일로 무서워했으니. 쩝쩝. 하지만 그는 정통이다. 옛날 자장면이 아니라 정통 자장면이란 말씀이다. 그는 최소한 어디에다가 내놔도 손색없는 배우로서의 계보가 있다. 이문식 나한테 절대로 연락 안 하는 배우. 문식이 형이 낮에 나한테 전화걸면 잘못 건 거고, 밤에 전화하면 경찰서다. 술 먹고 택시기사랑 같이 있을 때만 나에게 전화한다. 놀 줄 아는, 잘 노는 배우 이문식. 대사를 까먹어도 걱정이 안 된다(99년 <매직타임> 할 때 뼈저리게 느꼈다). 하긴, 놀러왔는데 정해진 대사가 뭐가 필요하랴. 자연스러움이 의도되지 않고 심금을 울리기란 쉽냐? 이문식! 누구도 그를 시골스럽다 말하지 말라. 자연스러운 거다. 안성기가 국민배우라면 이문식은 넥스트 서민배우다. 정규수 누구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마음이 여린 사람. 우리 또래한테 그는 선생님이었다. 그 시절 연극을 공부한 아이들 중에 규수 형의 <품바> 테이프를 들으면서 흉내를 안 낸 놈은 없었다. 또한 그는 형이다. 우리에겐…, 최소한 그는 불변의 형이다. 그의 광기는 형의 광기고 그의 눈물은 우리 형의 눈물이다. 늘 무대에서 온갖 기를 다 쏟아버리기 때문에 무대에 서 있는 그는 너무너무 아파 보인다. 이젠 건강을 신경쓸 나이야. 형! 올해만은 제발 연극 좀 쉬어. 신하균 유일하게 내가 피우는 도라지 담배를 따라서 피웠던 놈. 내가 신발 사면 똑같은 거 사고 내가 뭘해도 따라하는 통에 나랑 닮았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난 정말 몰랐다. 신하균 잘생겼더라. 아니, 솔직히 잘생겨지더라…. 신하균과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옛날이 그립다. 아! 품성도 이젠 닮고 싶어라…. 참, 내 첫 작품인 <폭탄투하중>이 하균이의 첫 작품이었다. 그와 함께 나의 마지막 작품을 하고 싶다.(무섭지?) 정재영 군대에서 역기가 떨어져서 이마에 맞는 바람에 뼈가 부러져서 아직도 위험한 상태. 그 이후 기억력이 감퇴되었는지 빌린 돈을 잘 안 갚는다. 몸도 좋고 운동도 많이 해서 어디 가서 맞을 걱정 없는 놈인데 태어나서 딱 두번 맞아봤다고 한다. 그게 모두 나한테라지… 미안하지. 몽둥이 부러지도록 맞았으니, 그것도 눈물 흘러가면 맞았으니…(학교에서 동아리 후배라서. 흑…). 하지만 나는 3년째 부르짖고 있다. ‘우리 나이 또래에서 연기만큼은 정재영이가 다잡을 거예요.’ 그건 예언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증명수순이었다. 이제 확인만 남았다. 류승범 승범이 생일날 ‘거꾸로 타임’을 했는데 그때 깨달았다. 아… 일찍 태어나길 잘했다. 보통 때는 얌전하고 숙맥인 놈이 ‘야자타임’할 때 우리 모두를 죽여버렸다(아! 정말 일찍 태어나길 잘했다). 처음에 <화려한 시절>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을 때 방송에 안 맞을 거라고 겁을 많이 냈다. 내가 일주일 정도를 설득했다. 지금도 승범에게 잘한 일이라고 백번천번 자신한다(앗, 그런데 아직 밥을 안 산다). 류승범은 내가 만난 배우 중 최고의 감염경로를 지녔다. 그의 삶은 어떤 관습과 제도적 교육없이 배우의 연기로 감염돼버렸다. 그것을 당국과 어떤 수사기관도 눈치채지 못했다. 김일웅 군대에서 휴가 나왔던 날. 학교 앞 술집에서 일웅이를 처음 봤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배, 선배’ 부르는데 이 녀석은 초면에 나를 ‘형, 형’ 부르는 거다. 첫인상은 그래서 참 마음에 안 들었다. <교회누나>의 주인공으로 내가 그를 정말 ‘적극’ 추천했다(6,7년 나와 함께 온 배우 중에 이제 일웅이 하나 남았다. 떨궈내야 한다. 마음의 짐이다). 하지만 말은 “이 작품으로 너를 확실히 보여줘! 너만 잘되라” 그랬다. 하지만 <교회누나>를 봐라. 이젠 김일웅이다. 난 그를 믿었고… 우린 다시 뭔가를 만들어낼 거다. 정말 이젠 바야흐로 김일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