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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 촬영장서 만난 장진 감독

“지금까지 내가 만들었던 영화들과 다르지 않은 영화다.” 24일 낮, 장진(34) 감독은 경기도 파주 헤이리 아트서비스 스튜디오에서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와 “근본적으로 같은 영화”를 찍고 있었다. 차승원, 신하균 주연의 ‘버라이어티 수사극’ <박수칠 때 떠나라>다. 하지만 8월 초 개봉을 목표로 촬영이 중반을 넘어선 이 영화는, 장 감독의 말처럼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상업 영화들과는 다른 영화”다. 기본 얼개는 이렇다. 강남 최고급 호텔에서 카피라이터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되고, 공중파 텔레비전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이 수사과정을 48시간 동안 실황 생중계한다. 소재나 줄거리도 그렇지만 ‘버라이어티 수사극’이라는 장르가 장 감독의 앞선 네 작품들 처럼 새롭고 재기발랄하다. “범인을 잡는 방식에 버라이어티한, 그러니까 다양한 수사방법과 스타일과 구조를 도입했다. 말 그대로 수사의 모든 패턴을 까발려 보여주는 버라이어티한 수사극이다.” 장 감독은 “일단 영화를 봐야 버라이어티 수사극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유쾌하지만 한국형 코미디라 보기 어렵고, 미스터리지만 결코 무겁지 않은 영화”라고 에둘러 영화를 소개했다. 감독은 또 “범인과 수사방식에만 호기심을 쏟아붙는 대중들의 ‘나쁜 취향’이 죽음의 진실을 얼마나 외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이 낯선 장르의 취지를 설명했다. “다양한 수사방법 다 까발려 보여줘” 하지만 장 감독은 “재기발랄하고 버라이어티한 측면이 부각되다 보면 자칫 ‘기본’이 무시되기 쉽다”며 “코미디로든, 수사물로든, 미스테리물로든 기본은 했다”는 자칭 ‘오만한 멘트’를 통해 <박수칠 때 떠나라>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장 감독이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도 떼지 않은 ‘재기발랄하다’는 수식어는 신인감독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영화감독으로 데뷔한지 7년이 지난, 장·단편 영화 8편을 연출한 ‘중견감독’이다. ‘재기발랄한 중견감독’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했다. “기질을 버리지 않았고, 명분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재기발랄하다’는 얘기를 듣는 것 같다.” 장 감독의 기질은 “관습적인 것을 싫어하고, 다른 사람의 기호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또 장 감독에게 명분이란 “대중들에게 재미있는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나한테 재미없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감독 스스로 생각하는 특장점 하나. 장 감독은 “내가 ‘만들 수 있는 영화’와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박수칠 때 떠나라>와 비슷한 시기 개봉될 <웰컴 투 동막골>의 영화화를 박광현 감독에게 맡겼다. 자신이 직접 연극 무대에 올리기도 했던 작품이지만, 직접 메가폰을 잡지 않은 것은 “주민등록 나온 뒤 내린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단다. 자신에게는 “머리 굴리지 않고 정직하게 스케일을 뽑아내고, 300만~400만명 관객을 불러들여야 할 <웰컴 투 동막골>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애초에 저예산으로 재밌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던 <박수칠 때 떠나라>는 “규모를 키우면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영화의 볼륨을 키웠다. 장 감독은 헤이리에 지어진 350평짜리 ‘수사본부’ 세트에만 4억여원 가량을 쏟아부었고, 영화의 총제작비도 50여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제58회 칸영화제 중간 결산 [2] - 거장들의 신작 ①

구스 반 산트부터 짐 자무쉬까지 - 거장들의 복귀작들 <라스트 데이즈> <히든> <아이> <만달레이> <어떤 폭력의 역사> <망가진 꽃들> 우선 이름값에 걸맞지 않게 답보상태를 보인 감독은 <진실이 있는 곳>의 아톰 에고이얀이다. 그는 자신의 캐나다-아르메니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따라 역사의 퀼트를 짰던 전작 <아라라트>에서 한 발짝 후퇴한 결과를 내놨다. 한편, 해상 밀입국자들의 인권을 이탈리아 소년의 눈으로 본 <한번 태어난 이상 숨을 곳은 없다>의 마르코 툴리오 조르다나는 안이한 휴머니즘으로 일관할 뿐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갈팡질팡한다. 말할 것도 없이 범작이거나 실패작이다. 조용하게 자신만의 영화를 건설해온 두기봉과 고바야시 마사히로가 있지만, 작품의 힘으로 나머지 거장들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반면, 구스 반 산트, 미카엘 하네케, 다르덴 형제, 라스 폰 트리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짐 자무시는 전작에서 사용했던 형식을 다듬고, 그 일부에서 영감을 얻어 확장하고, 유사 연작을 만들고, 실제로 연작을 만들고, 같은 개념을 다른 차원의 방식으로 다루고, 자기 스타일의 원류로 되돌아가면서 깊어진 모습을 보인다. 아직 허우샤오시엔의 <최호적시광>,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 아모스 지타이의 <프리존>, 홍상수의 <극장전>이 상영되지 않았지만, 수상여부와 상관없이 거장들의 복귀를 대변하고 보증하는 감독목록은 이들 여섯이다. 구스 반 산트 최고의 걸작 <라스트 데이즈> 구스 반 산트의 이름이 맨앞에 놓이는 것은 크게 문제의 여지가 없다. 구스 반 산트는 <제리>와 <엘리펀트>를 거치며 확실히 자기의 형식을 새로 깨달은 것 같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라스트 데이즈>에 비해 <엘리펀트>는 예습이나 습작에 불과하다. 이미 <엘리펀트>를 만든 구스 반 산트가 27살에 자살한 위대한 로커이자 시대의 아이콘인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나날들을 평범하고 전형적인 전기영화로 만들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심정과 시간이 이토록 압축적인 이미지의 아포리즘으로 탄생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도 못했다. <라스트 데이즈>는 커트 코베인의 실제 삶에 대한 일지를 서술하기보다, 그 시절에 그가 느꼈을 법한 심정을 플롯과 이미지와 음악을 통해 은유적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성공한다. 가령, 영화는 주인공 블레이크(배우 마이클 피트의 얼굴과 차림새는 커트 코베인의 재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영화 속 그의 이름은 블레이크다)가 약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거대한 늪지대와 숲속을 헤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커트 코베인의 행적을 재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을 헤매고 다니는 것은 커트 코베인의 심정이고, 그건 그의 감정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영화적 설정이다. 이런 식으로 구스 반 산트는 블레이크를 둘러싼 장소와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과 그것들에 반응하는 행동을 통해서, 실제로 커트 코베인이 피하고 싶고,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숨기고 싶었던 것들, 그리고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부딪치며 살아가야만 하는 슬픈 심정을 세심하게 재구성한다. 블레이크는 처절하게 노래 한곡을 부르고는 잠을 자듯 죽는다. 자신의 시체 위로 혼령이 된 블레이크가 일어나 나체로 하늘을 기어오르고, 텔레비전에서는 커트 코베인의 자살 당시 뉴스들이 흐른다. <라스트 데이즈>는 <엘리펀트>에 이어 감정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포착한다. 그것을 시간의 다면성으로 재조합한다. 아마도 여기에 이르러 구스 반 산트가 <엘리펀트>를 거치며 얻은 자기 형식의 개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실재의 잔영’을 다루는 것이다. 만약 <라스트 데이즈>가 커트 코베인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을 모를 경우, 또는 커트 코베인을 모르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볼 경우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인가? 구스 반 산트는 <엘리펀트>에서 컬럼바인 총격사건을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컬럼바인 총격사건의 잔영을 영화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과율이 성립할 수 없었고, 또 해석이 없다는 비판도 감수해야 했다. 이것이 최근 구스 반 산트가 실제했던 사건이나 인물을 다룰 때 활용하는 방법론이다. 그 실제 대상의 재현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남긴 잔영을 파고들어 구조화를 시도하기. <라스트 데이즈>를 볼 때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커트 코베인의 마음을 외부의 풍경으로 그려내어 한편의 영화로 만든 <라스트 데이즈>는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인상’이라고 부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다. 별점 1위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 이번 영화제 최고의 문제작으로 주목받는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윤리극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특별할 것 없는 어느 집 앞 풍경이 보인다. 그 화면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모두 깔리고, 그것이 지워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카메라는 꿈쩍을 할 줄 모른다. 도대체 뭘 보여주고 싶은 건지 묻고 싶을 때쯤 어디선가 서서히 인물들의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화면에는 목소리의 임자가 없다. 그리고 이제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냐고 묻고 싶을 때쯤, 갑자기 화면은 일그러지고 뒤로 감긴다. 이때서야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본 영화의 첫 장면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보는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자기 집 앞을 찍어서 보낸 이 테이프 화면을 보며 프랑스 중산층이자 텔레비전 문학 프로그램 사회자인 조르주는 아내와 함께 공포에 질린다. 이 처음 시작은 앞으로 보게 될 이미지와의 싸움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앞으로 이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등장하더라도 그 내용이 우리가 보는 무엇인지 아니면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우리도 역시 따라 보고 있는 것인지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까지 미정이라고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진 한계, 관객이 갖는 수동적인 시선의 권력을 미카엘 하네케는 교묘히 이용하면서 이 영화가 ‘어디에도 없는 자의 시점’에 끌려가는 영화가 될 거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테이프는 다시 반복해서 배달된다. 그걸 보여주는 방법은 처음과 같다. 조르주는 문득 어린 시절 함께 살다가 자신의 계략으로 쫓겨난 알제리인 입양아 마지드의 뒤늦은 복수극이라고 믿고 그를 찾아가 그만두라고 협박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드를 협박한 장면 또한 녹화되어 다시 배달된다.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어린 아들이 하루 동안 실종되는 사건이 생기자, 조르주는 마지드와 그의 아들까지 경찰에 신고하여 잡아넣는다. 하지만, 그들 부자는 자신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한다. 조르주는 믿지 않는다. 어느 날 경찰에서 풀려난 마지드가 조르주를 집으로 부른다. 거기에서 드디어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히든>에서 이 테이프를 누가, 왜 보내는지에 대한 설명은 끝까지 없다. 경악의 장면까지 치닫기 위한 조건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특별히 이유가 있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만약 영화가 이 충격의 정점에서 끝났다면 <히든>은 잘 만든 사기극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얄팍한 충격요법이 하네케의 영화에는 항상 있지만, 그래도 영화를 그 강도의 고조점에서 끝내지 않는다는 것이 근래 하네케 영화에 대한 일종의 믿음이라면 믿음이다. 아마도, <늑대의 시간>을 본 사람이라면 <히든>이 그 영화의 마지막 엔딩신을 확장하여 만든 영화 한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될 것인데, 누구의 것인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어떤 인칭 시점도 아닌 것 같은 그 모호한 시점의 위치. 그 시점이 도화선이 되어 <히든>을 비윤리에 대한 고발장으로 만든다. 짧은 시간 안에 머리와 눈을 휘어잡는 영화가 유리한 영화제에서 충격요법은 언제나 주목을 끄는 한 방법이다. 그래서 <히든>은 현재 경쟁작을 대상으로 별점을 매기는 영미권과 프랑스 언론 양쪽 모두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다르덴의 ‘인간 구제’ 연작 <아이> 다르덴 형제는 이번 영화에서도 역시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다. <아이>에서 주인공 소년 브루노는 장물을 팔아넘기거나, 가끔씩 물건을 훔쳐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러다가 브루노는 어느 날 갑자기 아기 아빠가 되어버린다. 여자친구 소니아는 너무 좋아하지만 브루노는 돈에 욕심이 나서 자신의 아기를 누군가에게 팔아버린다. 그 충격으로 소니아는 혼절하고,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브루노는 다시 아기를 데려온다. 하지만, 소니아의 마음은 이미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뒤고, 아기를 되갖고 갔다는 이유로 브루노는 폭력배들의 금전 협박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그 협박을 모면하기 위해 날치기를 해서 돈을 구하려고 하지만, 경찰에 쫓기는 상황까지 간다. 브루노는 결국 철창신세가 된다. 정말 무엇을 해도 되는 일이 없이 절망은 점점 더 가까이 온다. 다르덴 형제는 쓸모없어 보이거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인간들의 절망을 영화에 담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주인공들의 등뒤를 졸졸 쫓는 것이다. 그러나 끝내는 그 단 한명까지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화의 구조를 갖고 간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서 인물 중 하나가 죽어야만 그때부터 진짜 윤리와 비윤리에 대한 문제를 묻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과 반대로, 다르덴 형제는 죽을 것 같은 상황까지 가더라도 끝내 그 주인공을 구제의 문턱 앞에까지 되돌려놓는 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영화적 윤리의 최선이라고 늘 생각하면서 모든 귀결을 마련한다. 면회장에서 만난 브루노와 소니아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슬프지만 그것은 희망이다. <약속> <로제타>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영화는 어느 순간 시작해서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호흡의 감동으로 몰아친다. 그것이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절망 속에 기적 같은 희망의 전조를 심는 다르덴 형제의 방식이다. 작품의 수준에서 <아들>보다는 못 미치지만, 이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영원한 인간 구제의 연작 중 하나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제58회 칸영화제 중간 결산 [4] - 4인의 신성

4인의 신성 발견 - <상그레> <천국에서의 전쟁> <불타버린 극장의 예술가들> <그림 그리기 또는 사랑 나누기> 작은 변명을 먼저 덧붙이면, 여기서 ‘신성의 발견’이란 이름으로 간추린 네명의 감독 중 아마트 에스칼란테를 제외한 세 사람은 순수하게 신성도, 순수하게 발견도 아니다. 캄보디아 출신의 리티 판은 1985년 <사이트2>를 시작으로 20년간 활동해온 다큐멘터리스트이자 극영화 감독이고 8편의 작품 가운데 2편이 칸에 초청된 적이 있으며 지난해 EBS와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는 각각 그의 영화 <앙코르의 사람들>과 <방황하는 영혼의 땅>을 국내에 소개했다. 몇년 전 미국에서는 리티 판의 회고전도 열렸다. 멕시코 감독 카를로스 레이가다스는 데뷔작 <하퐁>(2002)으로 2002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의 아르노 라리유와 장 마리 라리유 형제는 지금까지 1편의 단편, 1편의 중편, 그리고 3편의 장편영화를 모두 공동작업해왔다. 프랑스 주간지 <텔레라마>는 칸영화제 개막주에 ‘내일의 시네아스트 40인’을 커버로 내세우며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와 함께 라리유 형제를 기대주로 꼽았다. <할리우드 리포터>에 따르면 심지어 아마트 에스칼란테도, 애초 경쟁부문에 진출할 가능성 높은 신인 중 하나였다. ‘신성’이란 말은 이들 넷을 거장이란 단어로 묶을 수 없어 핑계 삼아 끌어들인 반의어에 가까운 셈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데뷔작 <상그레> 아마트 에스칼란테의 <상그레>(Sangre, 90분, 멕시코, 주목할 만한 시선)는 마룻바닥 위에 죽은 사람처럼 반듯하게 누운 한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는 곧 일어난다. 일어나지만 디에고의 삶은 주로 반쯤 죽어 있다. 행정기관의 문을 지키고 서서 오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는 일을 하는 그는 집에 오면 아내 블랑카와 나란히 누워 TV연속극을 보거나 아내의 요구로 섹스를 하는 것이 삶의 전부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블랑카 모르게 만나오던 디에고는 집을 뛰쳐나온 딸아이에게 모텔 방을 잡아준다. 다른 거처를 곧 알아봐줄 터였는데, 어느 날 퇴근 길에 여느 때처럼 들러보니 딸이 죽어 있다. 디에고는 아이의 시체를 검은 비닐로 싸서 쓰레기 하치장에 내다버린다. 제목이 ‘피’로 번역되지만 피 한 방울 볼 수 없는 <상그레>는 감독이 1979년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굉장히 대담한 태도로 미니멀하게 만들어졌다. 침대 위에서 시작되는 아침, 소파 위에서의 TV 관람, 군역처럼 의무감에 벌어지는 섹스가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사이, 삶의 감각을 잃어버리고도 세상을 겁내는 인간의 비참한 이야기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간다. <상그레>는 리얼리즘의 외피를 썼을 뿐 감독이 자기 의도대로 세상을 제한하겠다는 의지가 시네마스코프 비율의 화면을 지배하는 극영화다. 인물을 잡아내는 클로즈업은 화가 치밀 정도로 갑갑한 반면 풀숏 안에서는 감정이 넘실거린다. 데뷔작의 과욕이 남긴 흔적조차 대담한 에너지에 잡아먹히는 <상그레>는 첫 공식 시사 다음날 <리베라시옹>과 <르몽드>로부터 “틀림없이 영화는 죽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적인 성찰이 돋보이는 영상시 <천국에서의 전쟁> 이 징그러운 데뷔작의 제작자는 카를로스 레이가다스다. 에스칼란테가 조감독으로 일했던 레이가다스의 두 번째 극영화 <천국에서의 전쟁>(Batalla En El Cielo, 120분, 2005년, 멕시코, 경쟁부문)은 <상그레>보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옷감 위에 종교적, 정치적 서명까지 새겨넣은 작품이다. 장군의 오랜 운전사 마르코스는 장군의 젊은 딸 아나를 어릴 때부터 봐왔다. 아나는 재미 삼아 몸파는 일을 하고, 마르코스는 (가난 때문에) 이웃집 아이를 최근 유괴했다가 죽게 하고 말았다. 아나의 일터에 이끌려간 마르코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나와 섹스를 한다. 물론 섹스는 자신만큼이나 뚱뚱하고 못생긴 부인하고도 한다. 마르코스는 아름다운 아나를 사랑한다. 그녀도 자신을 사랑해주면 자기 삶은 구원받게 될 지도 모르는데, 아나는 그를 외면한다. 마르코스는 아나를 죽인다. 자기 계급의 주제를 파악 못하는 인간들의 영화인 <천국에서의 전쟁>은 천국을 믿지 않는다. 성기를 보듬어주는 완전한 사랑이 절망한 인간에게는 가장 직접적인 구원이 될 수도 있다. 군인들이 게양하는 멕시코 국기는 하늘을 뒤덮고, 마르코스가 아나와 함께할 때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인간은 지상에서 천국의 위엄과 기쁨을 경험한다. 마르코스가 높은 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멕시코의 풍경, 바실리카 성당에 모여든 순례자들의 거대한 인파, 천천히 훑어내려가는 마르코스와 아나의 나신, 섹스를 끝내고 누운 두 사람을 중심으로 360도 패닝 안에 담기는 도시. 매우 지적인 성찰들로 가득하면서도 <천국에서의 전쟁>은 A4지 수장 분량의 이야기를 압축시킨 시적인 컷 하나가 보는 이를 먼저 매혹시키는 영화다. 레이가다스의 두 번째 영화는 버릴 것이 없다. 예술의 의미를 묻는 <불타버린 극장의 예술가들> 리티 판의 9번째 작품 <불타버린 극장의 예술가들>(The Artists of The Burnt Theater, 85분, 2005년, 캄보디아, 비평가주간)도 아주 지적인 영화다. 불에 탄 극장에 남아 생활하는 연극단원들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가란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놀라운 것은, 따분해서 기절할 것 같은 이 질문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리티 판의 재능이다. 비전문배우들을 데리고 6개월간 불탄 극장에 기거하며 영화를 촬영한 리티 판은 20년간 연극을 해온 극장주 호인을 중심으로 10명 남짓한 구성원들의 가난해서 불만스럽지만 게을러서 느긋한 일상을 영화 안에 흩어놓는다. 극장 보수 작업을 하거나 TV를 보거나 가끔씩은 무대에 올리지도 못할 연극을 연습하거나. 박쥐를 잡아 모처럼 고기 요리도 해먹는다. 극단주 호인은 예술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해 혼자 종이인형극을 하거나 깃털 달린 모자에 긴 칼을 들고 희곡의 주인공 연기를 해본다. TV 보는 극단원들 곁에서 낮잠 자는 개가 찍혔을 정도로 매 순간 작위적인 냄새가 없는 <불타버린 극장의 예술가들>은 마지막에 비로소 “이렇게 고생하는데 내가 예술을 왜 하지?”라고 호인의 입을 통해 묻는다.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이 질문만큼 크게 다가오는 것은 영화의 형식이다. 리티 판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극영화 안에 연극, 영화, 종이인형극 등의 형식을 다시 집어넣고 형식 안과 바깥의 경계를 종종 허물어뜨린다. 다큐멘터리의 자연스러움을 전반에 깔고 지적인 주제의식과 지적인 형식을 고민하는 리티 판의 영화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는 호인의 얼굴을 비추는 것으로 끝난다. 이 영화가 심장을 두드리며 하나의 기적처럼 다가오는 순간도 바로 그때다. 작지만 매서운 힘을 가진 소품 <그림을 그리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아르노 라리유와 장 마리 라리유 형제의 <그림을 그리거나, 사랑을 나누거나>(Peindre ou Faire L'amour, 98분, 2005년, 프랑스, 경쟁부문)는 앞서 세편과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영화다. <상그레> <천국에서의 전쟁> <불타버린 극장의 예술가들>이 리얼리즘편에 서 있다면 라리유 형제의 <그림을 그리거나…>는 장르영화에 속한다. 영화는 외동딸을 로마에 보내고 한적한 교외에서 지내는 50대 부부의 이야기다. 마들렌과 윌리암은 서로에게 여전히 애정표현이 후한 커플이지만, 우연한 계기로 젊은 부부와 스와핑을 하게 되고, 그 재미에 빠질 무렵 그들과 이별하게 된다. 허탈해진 두 사람은 이사를 결심하지만, 팔려고 내놓은 집을 보러온 젊은 커플과 새롭게 눈빛을 교환한다. <그림을 그리거나…>의 고전기 할리우드의 장르영화를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으로 변형시켜놓은 영화다. 점점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워지는 상황은 로맨틱코미디의 그것과 비슷하고, 인물들이 감정을 쏟아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영화가 뜬금없이 먼 산을 바라보며 샹송을 들려주는 낭만은 뮤지컬영화를 연상시킨다. 그 안에 있는 마들렌과 윌리암은 애정과 욕망 때문에 고민하고 당황하고 실수하는 에릭 로메르의 인물들을 닮았고, 말끔한 무대는 연극적이다. 칸영화제 경쟁작으로 치면 소품의 느낌도 있지만 그 작은 몸집이 날렵해도 가볍진 않다. 꽉 짜여진 신과 정곡을 찌르는 대사들이 부르주아들의 티타임 수다거리같은 얘기를 심각하고도 웃기게 100분 동안 몰아간다. 그 힘에는 좀처럼 빈틈이 없다. 독특한 데뷔 감독들 황금카메라상 후보에 오른 배우 출신 감독들 배우가 연출을 하거나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물려받아 데뷔하는 건 적잖게 마주할 수 있는 스토리다. 올해 황금카메라상 후보들 중에는 그런 이력을 가진 감독이 세명이나 된다. 토미 리 존스, 후안 솔라나스, 니키 카리미가 그들이다. 이름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후안 솔라나스는 아르헨티나의 감독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영화 <구름>의 촬영감독으로 참여하고 데뷔작 <노르데스테>(Nordeste, 104분, 2005년, 아르헨티나, 주목할 만한 시선)를 내놓았다. ‘북서쪽’이란 뜻을 가진 <노르데스테>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40대 독신의 프랑스 여성이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아르헨티나까지 날아갔다가 버려진 집에 살고 있는 가난한 모자를 만나 겪는 이야기다. 헬레네의 불법 입양과 후아나 모자의 가난이 아르헨티나의 사회문제로 커다랗게 뭉쳐져가는 과정을 리얼리즘 방식 안에 담았다. 너무 정직한 대사들이 간혹 영화를 무르게 만들지만 이야기 구조는 전체적으로 아주 단단하다. 니키 카리미는 1993년 <사라>로 데뷔해 타미네 밀라니의 영화 등 8편의 영화에 출연한 이란의 여배우다. 그의 감독 데뷔작 <하룻밤>(Yek Shab, 90분, 2005년, 이란, 주목할 만한 시선)은 이기적인 엄마와 불화하는 십대 소녀가 집 밖에서 보낸 하룻밤을 다룬다. 애인과 지내야 하니 자리를 피해달라는 엄마의 말에 네가르는 화가 잔뜩 나서 무작정 밖으로 나온다. 길에서 세번 차를 얻어타는 네가르는 일부다처제를 신봉하는 택시운전사, 사랑은 상대방을 구속하는 도구가 아니라고 믿는 독신 의사,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 바람난 아내를 죽여버린 남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세 종류의 차 안에서 벌어지는 인물들간의 대화를 있는 그대로 찍어냈다. 대중적인 유명세로 가장 관심을 끄는 신인감독은 할리우드의 노장 배우 토미 리 존스다.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번의 장례식>(The Three Burials of Melquiades Estrada, 120분, 2005년, 미국, 경쟁부문)은 텍사스 사막 한가운데에서 죽은 한 남자가 말 그대로 세번 땅에 묻히는 이야기다. <21그램> <아모레스 페로스>의 작가 기예르모 아리가가 시나리오를 썼다. (이 기사가 쓰여지는 시점에서) 아직 상영 전이라 영화를 가늠할 길은 전혀 없다. 토미 리 존스는 1946년생이다. 영화 <스페이스 카우보이>에서 네명의 늙은 우주비행사들 중 가장 열정이 넘친 그의 캐릭터에 겹쳐지는 것은 프랑스 평단이 일찌감치 작가로 인정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배우 출신의 늦깎이 천재감독이 또 한번 할리우드에서 나타나려는 걸까. 어쨌거나 존스의 데뷔작은 올해 황금종려상 후보이기도 하다.

제58회 칸영화제 중간 결산 [5] - 한국영화

한국영화 사상 최다 진출… 김기덕의 <활>부터 장률의 <망종>까지 현지 반응 올해 58회 칸영화제에는 장편 6작품, 단편 1작품 등 총 7작품의 한국영화가 진출했다. 한국영화 사상 초유의 일이다.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이 경쟁부문, 김기덕 감독의 <활>이 주목할 만한 시선,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이 비경쟁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과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가 각각 비공식 감독 주간, 조선족 장률 감독의 <망종>이 비공식 비평가주간에 포진됐다.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는 심민영 감독의 단편 <조금만 더>도 포함됐다. 각 부문에 고루 초청받은 것이 특기할 만하다. 김기덕의 <활>, 호응도 좋은 편 5월18일 현재, <극장전>을 제외한 모든 감독들의 영화가 이미 상영을 마쳤고 호평과 관심 속에 기자회견 등을 열었다. 먼저 주목할 만한 시선 개막작으로 선정됐던 김기덕 감독의 <활>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개막일인 5월11일과 다음날 12일 이틀간 공식 2회 상영 동안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극장의 규모에 상관없이 모두 만석으로 채워졌다. 베니스와 베를린에서 각각 감독상을 타며 주가를 올린 김 감독의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12일 상영 직전 배우 한여름, 전성환 두 배우와 함께 무대에 오른 김 감독은 “세상에는 이런 영화도 있습니다”라며 간단한 영화소개를 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상영 직후 관객은 영화에 대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활>에 대한 현지의 평도 대체로 좋은 편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재능있고 생산적인 한국 감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리베라시옹>처럼 “가장 생산적이지만, 가장 과대평가받은 감독”이라는 비판적 논조도 있었다. 한편, ‘이번 영화에 대해서 말로 설명하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며 국내 모든 언론인터뷰를 거절했던 김 감독은 칸에서 처음으로 소수 매체들을 상대로 말문을 열었다. 칸영화제 공식 텔레비전 채널 <텔레 페스티벌>의 인터뷰에 응한 그는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어려운 영화다. 예를 들어, 내 다른 영화들에서는 사람들이 진짜 대사로 타인과 의사소통하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이 영화는 오히려 관념으로만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김지운은 분위기의 대가” 5월14일 첫 상영을 갖고 기자회견을 연 <달콤한 인생>의 기자회견장에는 김지운 감독을 비롯, 이병헌, 신민아 두 주인공이 참석했다. 상당수 일본 취재진들이 회견장을 채운 것이 이채로웠다. 김지운 감독은 특유의 말솜씨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가령, “왜 <킬 빌>을 모방했냐”는 비난조의 질문에 “한국에서 영화 첫 시사를 하고 나서 이 영화를 ‘멜빌’과 <킬 빌> 사이라고 말했던 게 그렇게 와전된 것 같다”면서 “앞으로는 <다이하드>와 <터미네이터> 사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평자가 <달콤한 인생>을 나쁘게 봤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그런데 그 나쁘게 말한 기자 명함이나 연락처 받아놓은 거 있냐”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이병헌의 경우에도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동안 칸에 올 기회가 있었지만, 구경꾼의 입장에서 오기 싫어 일부러 안 왔다. 호텔 숙소 바닥도 전부 레드 카펫이라 떨지 않기 위해 거기에서 연습 많이 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기자회견은 대체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영미권 데일리 <스크린 인터내셔널>은 여섯째날 리뷰에 “김지운은 그의 전작 사이코 호러 장르 <장화, 홍련>에서처럼, 분위기의 대가”라고 말하면서 “액션 팬들이라면 싸움장면에서의 깔끔한 숏들과 편집에 재미를 얻게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역시 “홍콩영화의 총격전을 흉내내어 만들어진 이 영화를 즐겁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면서 <달콤한 인생>의 대중적 만듦새를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그때 그 사람들> 역사를 재해석한 수준작” 비공식 감독주간이라고 해서 무시할 일이 아니다. 감독주간에 초청된 한국영화 중 5월13일 가장 먼저 상영회를 가졌던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서 <카이에 뒤 시네마>는 5월호 칸 특집 섹션에 영문 리뷰를 프랑스어로 옮겨 크게 실어놓으며 관심을 표명했다. 진보적 일간지 <리베라시옹>도 큰 지면을 할애해 “네 번째 영화를 통해, 우리는 한국 감독 임상수의 기이한 경력을 더 명확히 이해하게 된다. 그는 해방(리베라시옹)의 시네아스트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적 해방이든(<처녀들의 저녁식사>), 성적(<바람난 가족>)이든, 세대문제와 관련해서(<눈물>)이든 정치적인 것(이 믿을 수 없도록 사실주의적인 <그때 그 사람들>의 경우에서처럼)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피에 물들고 미스터리로 둘러싸인 역사의 에피소드에 대한 해석이다”라며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기자회견 직후 임상수 감독은 사석에서 “한국의 역사를 모르면 이해를 잘 못할 거라고들 했는데, 뭐 막상 와보니 다들 재미있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감독주간 책임자이자 프랑스 감독협회 회장 파스칼 토마도 “아이러니를 잘 살린 굉장한 작품”이라고 하면서 칭찬으로 환대를 아끼지 않았다. 류승범은 제2의 로버트 드 니로? 16일 상영됐던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 기자회견장에는 배우인 류승범이 동석하여 관심을 끌었다. 회견장에 모인 관객은 실제로 어떻게 권투 연습을 했는지, 이 영화가 얼마나 실제 이야기에 기대고 있는지 등을 궁금해했다. “이 세상 어떤 영화도 실제 배우들에게 권투를 하게 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으로 시키게 됐다. 하지만 미안해서 배우들의 얼굴을 잘 못 본다”고 류승완 감독은 전했다. 그중 류승범에 관해서 어느 질문자는 “<성난 황소>의 로버트 드 니로만큼이나 연기의 힘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해 “로버트 드 니로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다”는 류승완 감독의 재치있는 화답을 끌어냈다. 한편, “류승완 최고의 영화가 나온 것 같다”고 기자회견의 인사말을 열었던 사회자가 회견 도중 “동생과 일한 것은 처음이었냐”고 물어, 아는 사람만 아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장률 “조선족을 알리는 게 중요했다” 비공식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조선족 장률 감독의 영화는 5월18일 첫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그의 영화 <망종>은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 여자의 슬픈 삶과 몸부림에 가까운 항거를 다루는 영화다. 상영 직후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영화의 무게를 따라가듯 진지한 문답들이 오고 갔다. 주인공 여자에 관해 묻는 질문에 장률 감독은 “중국에는 200만명의 한인이 있다. 이들을 보여주는 것이 내게 중요했다. 조선족은 중국사회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어를 하고 있지 않는 한 외모로는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여자가 한국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제 칸의 한국영화에 관해 남아 있는 주요 관심사는 19일 오후 상영될 <극장전>의 수상여부다. 홍상수 감독 및 배우 일행은 같은 날 레드카펫을 오른다. 합작영화 <무극> 중국·한국·일본·홍콩이 만든 범아시아 블록버스터 합작영화 <무극>의 밑그림이 칸에서 공개됐다. 12분짜리 프로모션 필름의 마켓 상영과 함께 개막 2일째인 5월12일 아시아 언론을 대상으로 열린 기자회견에 감독 첸카이거와 배우 장동건, 장백지, 사나다 히로유키, 사정방, 리우예, 촬영감독 피터 파우 등이 참여했다. 한국, 중국, 미국 등 3개국의 자본 3천만달러와 중국, 한국, 일본, 홍콩 등 아시아 4개국의 인력으로 만들어진 <무극>은 문자 그대로 범아시아 블록버스터 프로젝트다. <무극>의 범아시아 블록버스터적인 성격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는 부분은 스토리다. 국적과 역사를 지운 <무극>은 인류에 존재한 적 없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신분제를 거스르는 역경의 멜로를 다룬다. 흔들리는 왕조와 암살자를 앞세운 반란세력이 있고, 거대한 전쟁이 일어나며, 노예(장동건)와 장군(사나다 히로유키)과 공주(장백지)는 삼각관계에 놓이고, 초인간적인 능력과 마법이 등장한다. 공동각본을 맡기도 한 첸카이거 감독은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랑에 관한 영화”라며 “에픽은 아니다. 판타지라고만 말할 수도 없고 액션과 멜로 등 모든 장르를 다 결합했다. 한 영화를 통해 모든 문화를 보게 만드는 시도”라고 부연한다. 영화의 비주얼도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첸카이거 감독은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스토리를 설명하고자 했다”고 말한 피터 파우(<와호장룡>)는 이번 영화를 인물의 감정을 따라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으로 촬영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프로덕션디자인은 아시아 각국의 전통 미술양식의 특징들을 다양히 드러내며, 붉은색이 강조된 의상디자인은 곡선이 많고 화려하다. 무술감독은 <스파이더 맨2>와 <매트릭스> 시리즈의 무술팀으로 참여한 디온 람이 맡았다. 130일간 내몽골을 비롯해 중국 대륙 곳곳에서 궂은 날씨를 이기고 촬영된 <무극>은 현재 후반작업 중이다. 개봉은 중국과 한국이 12월경, 일본은 내년 신정께로 예정돼 있다. 베이징21세기솅카이, 차이나필름그룹, 베이징티안유오, 문스톤엔터테인먼트, (주)쇼이스트 등이 공동제작하며, 아시아를 제외한 해외배급을 미라맥스가 맡았다.

내게 영화를 가르쳐준 책 [6] - <영화 만들기>

촬영현장에서 생긴 일 시드니 루멧의 <영화 만들기> 연극의 유산과 텔레비전의 현장성을 잘 결합시킨 시드니 루멧의 영화를 개인적으로 퍽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국내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 못 된다. 주목할 만한 데뷔작 <12인의 노한 사나이>나 <전당포> 같은 고전이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을뿐더러, 명작 <네트워크>도 비디오숍에서 금방 찾기 힘들다. 이런 국내 사정을 고려하면 시드니 루멧이 자신의 영화제작과정을 토대로 쓴 <영화 만들기>는 얼핏 흥미가 덜할 수도 있다. 오히려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교과서적으로 충실히 풀이한 다른 이론서가 도움이 클지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영화 만들기>를 추천하는 것은 이 책이 먼저 연출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용서이면서도 동시에 영화에 이론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드니 루멧은 거장답게 자신의 특수한 체험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영화미학으로 일반화한다. 영화 스타일에 관한 그의 견해, 배우의 연기가 필름에 기록되는 양상을 묘사한 부분, 영화음악에 대한 연출가로서의 통찰력 등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이론서라도 전해 주기 힘든 신뢰감이 느껴진다. 따라서 영화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적절한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추천 도서로 선뜻 시드니 루멧의 이 책을 떠올린 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 체험 때문이기도 하다. 1994년 가을부터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에서 1년간 객원연구원으로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인터넷으로 서적을 주문하는 것은 아직 생각도 못할 당시에, 가자마자 들른 서점의 영화 코너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영화감독, 그리고 배우들의 자서전과 전기물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서울의 외서 수입점에서는 간혹 서가에 꽂혀 있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종류의 책들이었다. 구체적인 삶의 모습보다 사변적인 영화이론에 더 가치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앤드루 새리스를 비롯한 몇몇 교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작품 분석에서도 그들이 일차적으로 실증적 사실들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서울서 영화와 관련해 지겹도록 들은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용어는 들을 수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차츰 나는 영화인들의 전기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빌리 와일더 감독의 할리우드 생활을 길게 기록한 책, <이브의 모든 것>의 배우 베티 데이비스가 스튜디오의 횡포에 맞서 투쟁한 이야기를 담은 전기물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뿐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도 사랑하게 되었다. 시드니 루멧의 책을 읽은 것도 같은 시기였다. 1995년 봄 그는 컬럼비아대 영화과를 방문해 학생들과 함께 <전당포>를 감상한 뒤 방금 출간한 자신의 책 <영화 만들기>를 중심으로 강연을 했다. 비록 이 책은 전기물은 아니었지만 감독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쓴 영화론이라는 점에서 비슷하게 인상적이었다. 마침 국내에도 번역이 되어 있기에 쉽게 이 책을 추천 도서로 선정할 수 있었다. 조금 빗나간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전기물에 대한 관심에 꽤 인색한 편이다. 며칠 전 서울의 큰 서점에 가 보았는데, 엄청난 양으로 늘어난 영화서적 가운데 영화인들의 전기물은 여전히 찾기 힘들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그리고 <나의 인생 나의 영화>라는 제목의 장 르누아르 자서전 정도였다. 타인의 삶과 체험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관심없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사랑없이 진정으로 큰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구로사와 아키라, 장 르누아르, 베티 데이비스는 단순히 일본 감독, 프랑스 감독, 미국 배우가 아니다.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들은 훌륭한 인생 선배, 자랑스러운 영화 선배이기도 하다. 적어도 영화 학부생들에게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메마른 이론보다는 이같은 서적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시드니 루멧의 책은 그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시드니 루멧 1924년 필라델피아에서 출생. <전당포> <개 같은 날의 오후> <네트웍> <허공에의 질주> 등을 만들었다. 4살 때 뉴욕의 연극무대에서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시드니 루멧은 26살에 에서 연출제의를 받고 감독의 길에 들어섰고 57년 <12인의 노한 사나이들>로 데뷔한 뒤 뉴욕을 본거지로 작업하면서 존 카사베츠 같은 후배를 키우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략 세 덩어리로 묶이는데, 연극을 영상화했거나 가족 문제에 관심을 보이거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그것. 장르를 봐도 드라마, 코미디, 로맨스, 뮤지컬 등에 폭넓게 퍼져 있다. 76살인 그는 여전한 현역으로 올해에는 <휘슬> <아름다운 세이든만 부인>, 두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 예정이다.

내게 영화를 가르쳐준 책 [7] - <히치콕과의 대화>

시네필, 작가를 만나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 히치콕(1899∼1980)은 이제 신화다. 살찐 이중턱 위로 삐죽 나온 아랫입술과 불룩 나온 배가 그려내는 특유의 실루엣으로 한눈에 그임을 알아보게 하는 이 감독이 영화사에서 거의 신격화된 존재임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바로 지난해 전세계 영화계가 이 거장의 탄생 100주년을 ‘경건하게’ 기념한 ‘사건’이다. 세계의 영화인들은 20세기, 즉 영화의 세기를 히치콕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함으로써 보낸 것이다. 영화탄생 100주년과 맞먹을 정도로 자신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인이 도대체 또 어디에 있을까? 나에게 히치콕은 중고등학생 시절 텔레비전의 흑백 브라운관을 통해 다가왔다. 당시 나는 앨프리드 히치콕이란 이름을 ‘서스펜스의 거장’ 정도로 알고 있었다. 여기에 그가 자기 영화에 어떤 방식으로든 한번씩 얼굴을 내미는 독특한 감독이며, 한 장면 한 장면 손수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완벽주의자고, 형식상의 실험과 카메라테크닉 구사에 특출하다는 것 등이 나의 ‘상식’에 포함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좀더 지나면서 나는 히치콕이 단순한 테크니션이 아니라 ‘작가’로 간주된다는 것을 알았고, 조금 더 지나자 그가 만든 영화들이 아예 정신분석학이나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됨을 알게 되었다. 히치콕을 바로 ‘작가’로서 재발견한 사람들이 <카이에 뒤 시네마>에 포진하고 있던 프랑스의 젊은 비평가·감독들이었고, 그 중 한 사람으로 프랑수아 트뤼포가 있었다. 그 자신이 누벨바그를 주도하는 중요한 감독의 한 사람이었던 트뤼포는 이 선배감독에 대한 한없는 흠모의 마음을 안고 히치콕을 찾아가 장시간의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 결과가 바로 <히치콕과의 대화>이며, 1968년에 영어본이 간행된 이 책 자체가 ‘히치콕=작가’라는 인식을 영미권 전체로 확산시킨 주요 공신이기도 하다. 히치콕을 만나러 가던 도중 트뤼포가 연못에 빠진 일로부터 시작되는 이 책에서, 우리는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게 핵심을 짚어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직접 보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 예컨대 히치콕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하게 되었는가(이 방면에서도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이다), 또는 <의혹>에서 케리 그랜트가 들고 가는 우유잔이 어떻게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발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히치콕의 작품세계 전모와 그것을 형성하는 그의 세계관 자체를 살펴볼 수 있다. 히치콕을 보고 읽어야 할 이유는 많다. 좀더 큰 문화적 맥락에서 보더라도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은 그의 영화들에서 무의식과 욕망의 논리를 다시 읽어내고, 페미니즘은 그것이 성차화되는 메커니즘을 재발견하며, 어떤 철학자는 인물들간의 관계 그 자체가 이미지화하는 방식을 본다. 이 모든 성찰들은 다음과 같은 지점으로 귀착된다. 히치콕의 영화는 감독과 카메라와 관객이 서로 연루되는 방식을 드러내 준다. 즉, 그의 영화들은 우리가 영화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가에 대하여 반성하게 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치는 질문하는 사람과 대답하는 사람이 공히 가진, 영화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흔치 않은 책이라는 데 있지 않을까? 히치콕은 순수한 영화적 방식 그 자체의 구현에 가장 근접한 작가다. 그는 인물의 감정 및 그가 처한 상황과 관계를 순전히 시각적으로만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런 점에서 배우란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그리드 버그만이나 그레이스 켈리 또는 티피 헤드런의 아름다움(이른바 쿨 뷰티)을 그보다 더 잘 포착해낸 감독이 누가 있는가?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결국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그의 애정 덕분이 아닐까? 바로 그런 그가 영화사랑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트뤼포와 만난다. 히치콕이 영화사상 역시 손꼽을 시네필 트뤼포와 만난 것은 그로서는 또한 행운이었다 할 것이며, 이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우리로서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인 것이다. 저자 소개/ 프랑수아 트뤼포는 누벨바그를 이끈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1950년대에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을 비판하고 ‘작가 정책’을 천명하였으며, 1959년 <400번의 구타>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감독 활동에 들어섰다. 그는 사실상 누벨바그 작가들 가운데 가장 따뜻한 감성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변혁 vs 이정재 [1]

다큐|픽션, 경계의 영화 <인터뷰> <인터뷰>는 멜로드라마이되 멜로드라마가 아니고, 다큐멘터리이되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픽션이되 픽션이 아니고, 영화만들기에 관한 영화이되 또한 영화만들기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변혁 감독의 <인터뷰>는 하나로 매듭지어 버리기 곤란하게 풍성한 결을 지닌 영화다. 그리고 그 결 사이사이에는 카메라란 영화란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이 깔려 있다. 변혁 감독은 또, 심은하 이정재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으면서도 스크린에서 그들의 스펙터클을 지워냈다. 이것만으로도 주류영화에서는 파격적인 실험이라고 할 만하다. <인터뷰>는 따라서, 배우 이정재에게도 커다란 도전이었을 것이다. <인터뷰>를 위해 극중 감독 이정재가 실제 감독 변혁을 인터뷰했다. 극중 감독은 성실히 물었고, 실제 감독은 골똘히 대답했다. 그들은 인터뷰를 나누며 <인터뷰>에서 이런 생각거리들을 길어 올렸다. 진짜이자 가짜, 진실이자 거짓 이정재 | 영화를 찍으면서 실제로 인터뷰 촬영에 참여했는데, 정말 어려웠다. 은석을 카메라를 든 인터뷰어로 설정했을 때에는 특별한 기대가 있었을텐데. 변혁 | 보통 인터뷰에서는 주로 말하는 사람이, 그가 하는 말이 중요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많은 인터뷰만 봐도 찍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느냐를 중시한다. 나는 찍는 사람의 입장도 들어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찍히는 사람만큼은 안 나오지만 카메라 든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주인공이 카메라를 든 사람이라서 자칫 잘못하면 영화만드는 과정만 보여주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우려도 했다. 어쨌든 찍히는 사람의 이야기와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 얼마나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지를 다루고 싶었다. “카메라 뒤로 몸을 숨기고 싶어요”라는 대사처럼 인터뷰 대상만이 아니라 찍는 사람도 인터뷰의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이 | 비디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치과부부들은 다큐멘터리 인물인데,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서 필름으로도 찍었다. 그렇게 양쪽에 나오니까 전문배우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느낄까. 변 | 나 보고도 그 치과부부가 진짜 배우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혼식이 진짜냐고 묻기도 하고. 난 인터뷰할 때마다 틀리게 말한다. 다 진짜예요 했다가, 다 배우예요 했다가. 뭐냐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도대체. 심은하가 배우인지 모르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이 사람은 배우예요’ 하면 감동이 없어지고, 진짜라고 하면 감동이 샘솟 듯 솟아나는 건 아니다. <인터뷰>는 모호한 지점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앞으로는 인터뷰할 때마다 어떻게 대답할지 미리 짜자. (웃음) 박청화 부부 인터뷰 중에 재현된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필름으로 찍었다고 가짜고, 다큐로 찍었다고 해서 진짜인가. 그렇지 않다. 이 | 누구나 경험했다고 하지만 쉽게 꺼내놓기 어려운 게 사랑이야기다. 특별히 이런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변 | 누구나 다 품고 있는 이야기이고 누구나 다 한마디씩은 할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해서다. 사실 <인터뷰>는 주제가 다른 것이었어도 큰 상관이 없었을, 그런 영화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할 만한 주제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이 | 사랑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애초 생각한 것만큼 풍부하게 표현됐다고 생각하나. 변 | 다양성은 보여준다. 인터뷰 대상들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다 다르니까. 글쎄, 잘 모르겠다. 이 | 그게 잘 표현이 안 된 것같아서 묻는다. 인터뷰 중에 “담배피운 여자와 키스하면 재떨이를 빠는 것 같아서 싫었는데, 지금 여자는 담배를 피우는데도 키스할 때 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있다. 근데 영화를 보는데 “재떨이 맛이 나서 싫다”라는 대사에 관객이 웃는 바람에 뒤는 잘 안들리더라. 여자를 사랑하게 되니까 키스할 때도 담배 맛이 안 난다는 게 핵심인데. 변 |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다. 웃기는 인터뷰만 고른 게 아니냐는 지적도 들었다. 박청화씨 얘기처럼 잔잔한 얘기가 있음에도 몇 가지 얘기가 강력해서 그런 것 같다. 모든 예술 작품이 다 그렇지만 영화는 만드는 과정에서 끝나지 않는다. 미적인 향수, 곧 관객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작품의 끝이기 때문이다. 그런 훈련이 돼 있지 않은 채 그저 웃으려고 극장에 오면 재떨이 운운하는 얘기에 막 웃어버리고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심은하 예쁘다고 박수치고, 이정재 머리 죽이는데 하고 박수치는 거로 끝난다. 그러나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영화를 보면 더 중요한 얘기가 들린다. ‘아 이런 얘기를 하고싶었던 거구나’하고 알게 되는 거다. 영화를 만드는 우리의 몫이 50%, 70%라면 관객이 읽고 재창조하는 몫이 50%, 30%는 된다. 멜로드라마의 탈을 쓴 카메라에 대한 성찰 이 | <인터뷰>는 멜로드라마라는 장르로 구분이 되지만, 난 오히려 “그대는 진실을 찾고 있는가”라는 대사가 굉장히 중요한 화두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얘기가 몇번이나 반복되고. 변 | 관객 60∼70%는 이 영화를 이정재, 심은하 주연의 독특한 멜로드라마로 읽겠지만, 좀더 훈련된 사람은 <인터뷰>를 영화, 이미지, 진실에 대한 성찰로 읽을 것이다. 굳이 광고카피를 말한다면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탈을 쓴 카메라에 대한 성찰’쯤이 될 거다. 멜로드라마의 ‘탈’을 썼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멜로만을 기대하면 채워지지 않는 게 생긴다. 이정재가 정말로 심은하를 좋아하면 감정이 더 드러나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아쉬움을 느끼는 거다. 흔히 드라마의 완결성을 기대한다. 나는 약간 시작하는 듯한 감정까지를 영화화했는데, ‘그래서 이정재가 심은하랑 결혼을 했어, 안 했어’, 이런 걸 묻고 싶어하는 거다. 이 | <인터뷰>를 멜로드라마로 국한시키지 않고 스스로 장르를 지정한다면 어느 서랍에 넣겠는가. 변 | 좋은 질문이다. 그냥 영화라는 서랍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이 영화의 진짜 의도 중의 하나는 영화에 대한 정의들을 부정하는 거다. 영화의 첫 시작은 이래야 되고, 끝은 이래야 되고, 멜로는 이래야 된다는 따위의 규정들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 멜로의 탈을 썼기 때문에 멜로처럼 만들면 안 되는 게 나의 숙제였다. 다큐, 픽션 중 무엇으로 분리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런 분리 자체가 무의미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런 구분 자체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그냥 여러 가지가 혼재된 ‘영화 한편’이다. 어떤 틀로 맞추려고 들면 거기에 비하면 이게 아쉽고, 여기에 대면 그게 아쉽고,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정재를 ‘영화배우 이정재’로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사랑하기가 힘들어진다. 이정재라는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고 수사어를 붙이고 규정하고 카테고리로 묶으면 총체는 없어져버린다. 이 | 이번 영화에서 그런 틀을 깨고 싶었나. 변 | 가능하면 영화의 수많은 정의들을 거부하거나 질문하고 싶었다. 상당히 많은 영화학도들이 그랬을 텐데, 타르코프스키를 추앙하는 영화학도의 입장에서 과연 그의 영화가 우리에게 좋기만 했나, 그로 인해 아류들이 나온 건 어떻게 봐야 하나, 예술은 이런 거다라고 제한해버린 건 아닌가. 이런 걸 질문하고 싶었다. 영화의 맥이 끊기는 건 안 좋고, 감정이입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영화 끝내고 나서 핑계만 많아지는지도 모르겠다. 공부하면서, 작업하면서 스스로에게 ‘영화는 이래야 한다’라고 제시했던 것들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싶었다. 다시 인터뷰를 한다면 또다른 것을 성찰하겠지. 예를 들어 내가 담배피우는 걸 싫어해서 이 영화에는 단 한 장면에도 담배피우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조금 자세히 보면 신기호씨 인터뷰 장면에서 담배 연기가 살짝 올라온다. 이건 아무리 내가 감독이라고 해도 다큐의 인물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증거다. 정말 기분나쁘면 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배우라면 다시 찍을 수 있겠지만 진짜 인물의 삶은 그럴 수가 없다. 다큐와 픽션에 차이가 있긴 있는 거다. 이 | 프랑스에서 더 작업을 많이 했는데, 충무로와 프랑스의 차이를 많이 느꼈는지. 변 | 촬영과정 자체는 별로 차이가 없는데 프리 프로덕션의 차이가 크다. 프랑스에서는 프리 프로덕션이 훨씬 치밀하고 길다. 기획한 촬영 횟수와 실제 사이에 오차율이 5% 미만이다. 심지어 배우와의 계약도 횟수를 예상해서 개런티를 선정한다. 프로덕션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치밀해진다. 프리 프로덕션에 1년에서 3년이 걸린다. 후반작업기간도 훨씬 길다. 편집에 최소 4개월, 사운드에 2개월이 걸리고 믹싱은 하루에 10분 이상을 하지 않는다. 충무로라고 해서 힘들었던 건 별로 없다. 좋은 조건에서 찍었다. 여전히 창작하는 입장에서 내 안의 문제들을 정리하는 게 더 힘들었다.

[LA] 폴 해기스의 <크래쉬>, 인종문제에 대한 촌철살인 돋보여

한밤중 고속도로에서의 무차별 총격사건이 11건째. 숱하게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강도, 총격사건보다 이 불특정 고속도로 총격사건이 ‘엔젤로’들의 발길을, 아니, 운전길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브랜트 우드, 사우스 캠튼, 다운타운, 샌타모니카, 차이나타운 등 지명만 들어도 그곳에 사는 사람의 계급과 피부 색깔이 감이 잡히는, 자기만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비슷한 혹은 어울림직한 ‘색깔’의 안전지대에 가기까지 대개 거쳐가야만 하는 곳이 로스앤젤레스의 고속도로이다. 이 고속도로야말로 로스앤젤레스의 컬러풀한 다인종들이 가장 평등하게 공유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물론, 돈 치들이 <크래쉬>(Crash)에서 읊조렸듯이, 이 잠깐 동안의 ‘공유’도 자신의 차창 너머 안전이 보장될 때의 얘기다. 거기서 어디선가 차창을 뚫는 총알을 만난다? 어떡하라고. 그런 식으로 굳이 접촉을 하지 않아도 좋단 말이다. 내 안전지대로 가게 해달란 말이다. <크래쉬>, 고속도로 총격사건 파헤쳐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시나리오 작가 폴 해기스의 장편 데뷔작, <크래쉬>가 요즘 무의식을 짓누르고 있던 고속도로 총격사건의 두려움의 실체를 속시원히 밝혀준다. 5월6일 개봉된 <크래쉬>는 로렌스 캐스단의 <그랜드 캐년>,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 최근의 <매그놀리아>에서 그려진 복잡하고 삭막한, 복합 인종 도시 로스앤젤레스의 이미지를 다시 파고든다. 그러나 <크래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의 로스앤젤레스판이라 할 만한, 이 도시를 정의하는 인종문제에 대한 그 촌철살인의 시선 때문이다. 와의 인터뷰에서 해기스 감독은 이 영화가 인종문제라기보다는 9·11 사태 이후 ‘타자와의 접촉’으로 신경증과 불신의 골이 깊어진 미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힌다. 하지만 일찍이 미국의 TV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강도 높은 인종 차별주의적 발언과 스테레오 타입들의 하룻밤 소동을 보고 있노라면, ‘인종’이야말로 미국사회에서 이방인을 정의하는, 그리고 엔젤로들의 삶의 반경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척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크래쉬>는 90년대 초반 실제로 자신의 차를 도난당했던 해기스 감독의 경험에서 잉태됐다. 해기스 감독은 ‘과연 그 강도들은 누구였는지, 초범이었는지, 어디 사는지, 평소에는 뭘 할지’에 대해, 강도사건 이후 현관열쇠를 바꾸러 왔던 열쇠공이 ‘갱단 멤버가 아니었을까’ 하는 등등의 꼬리를 무는 궁금증을 시나리오로 옮겼다고. 캐나다 출신으로 오랫동안 로스앤젤레스에서 텔레비전 극작가로 활동해온 해기스 감독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감독 데뷔를 할 뻔했으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메가폰을 넘겨준 상실감을 자신의 목소리로 되찾은 셈이다. ‘정치적 올바름’ 아래 숨은 두려움 <매그놀리아> 스타일을 연상케 하는 이 멀티 캐스팅 드라마에서는 앵글로색슨, 라티노, 흑인, 아시안, 페르시안 등 로스앤젤레스의 대표적인 인종들과 경제적 계층의 조합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예상 가능한 모든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들이 타인종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로스앤젤레스의 하루를 불태운다. 진보주의자든 인종차별주의자든 막상 상황에 부딪히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밑에 숨겨진 두려움과 현실과 타협하고 마는, 그래서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돈 치들, 샌드라 불럭, 맷 딜런 등의 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뼈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겉으로만 보면 할리우드 메이저급 영화이나 실제론 돈 치들이 나서서 제작비를 모아야 했을 정도로 작은 영화다. 그런데 이 작은 영화가 엔젤로들과 부딪치는 소리는 꽤 짱짱하다. 고속도로따라, 방향감각을 유지하며, 내 안전 지대의 반경을 매일 그려봐야 하는 엔젤로들에게 이른바 ‘움직이는 게토’라 불리는 로스앤젤레스 시내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왜 시내버스의 창문이 그렇게 큰지, 영화 속 인종차별주의 노이로제에 걸린 아프리칸 아메리칸 건달의 명답(?)이 생각날 것이므로.

[팝콘&콜라] 극장에 금속탐지기? 불법 북제 그만좀 하자고요

지난 17일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 언론시사회가 열린 서울시내 한 극장 입구에서는 인천공항 출국 검색대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극장에 들어가려는 이들은 예외없이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금속탐지기가 설치된 문을 통과해야 했다. 또 조그만 가방이라도 들었다면 무조건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시켜줘야 했다. 극장을 폭파하려는 테러범이 두려워서일까? 이처럼 ‘살벌한’ 수색작전을 펼친 이유는 다름 아닌 불법 동영상 유출을 막기 위해서다. 시사회에 참석한 누군가가 영화를 몰래 녹화해 개봉도 하기 전에 인터넷에 퍼뜨린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를 크게 두려워한 영화사가 “시사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를 감수하면서까지 까다로운 수색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영화사의 이런 물샐 틈 없는 방어막에 끝내 구멍이 생기고야 말았다.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한 19일 인터넷에 불법 동영상 파일이 버젓이 올려진 것이다. 이날 하루만에 1만6천명 이상이 이 동영상을 내려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개봉 전날인 18일에도 이미 한 인터넷 사이트에 동영상이 올려졌다. 여기에는 특히 시간기록까지 나와 있는 걸로 미뤄 시사회에서 몰래 녹화한 것이 아니라 영화사 내부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보여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열린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관객들의 가방을 검사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북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앞에서였다. 북한 영화를 몰래 녹화하던 사람을 잡아낸 뒤 재발을 막기 위해 취한 조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당당하게 명함을 내밀며 ‘녹화 좀 하면 뭐 어떠냐’는 식으로 나왔다고 한다. 명함에는 국내 유수의 영화제작사 이름이 찍혀 있었다. 영화계 내부에서조차 ‘불법 복제는 범죄’라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음반업계는 이미 불법 엠피3 파일 문제로 심각한 위기에 빠진 지 오래다. 좋은 음악을 만들어도 돈을 벌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만사를 젖혀두고 음악에 몰두하는 이들은 점점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즐길 만한 좋은 음악들을 야금야금 잃게 되는 대중이 최대의 피해자다. 영화계도 이와 비슷한 전철을 밟을 날이 곧 올 것이라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요즘 극장에 가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공익광고가 있다. 불법 동영상을 내려받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자동차를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내용의 광고가 바로 그것이다. 문화 콘텐츠도 엄연한 재산이며 이를 즐기려면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를 잡을 때 좀더 양질의 고급 문화 콘텐츠를 즐길 기회가 생긴다는 설교가 그리 고리타분하게만은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