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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TV 애니메이션 오딧세이 [2]

천하무적 아줌마 <아따맘마> 백화점 세일 상품에 눈에 불을 켜고 무섭게 달려드는 아줌마, 지하철에서 철판 까는 아줌마, 뒤늦게 몸매 관리한다고 주책 떠는 아줌마,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 사춘기 아들의 숨기고 싶은 사정까지 시시콜콜 이야기해버리는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 흔히 아줌마만큼 무서운 존재가 없다고들 하지만, 세상에는 ‘귀여운 아줌마’도 있다. 귀여운 아줌마라니 믿을 수 없다고? 그야말로 판타지가 아니냐고?! 무슨 말씀을. 이만큼 리얼한 ‘아줌마’가 등장하는 이야기도 없다. 깔끔한 화면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생활 속의 이야기를 10분 단위의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로 묶어놓은 <아따맘마>는 온 가족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즐겁게 볼 수 있는 그야말로 건강한 엽기 가족 애니메이션이다. 엄마와 아빠, 아리(누나), 동동(남동생)이라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4인 가족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저도 몰래 “맞아! 맞아!”라고 박수치며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작 만화도 같은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만화책쪽도 추천한다. 덤으로, ‘아따맘마’의 뜻이 궁금해서 밤잠 못 이룰 사람들에게 한마디. 이 의미불명 제목은 사실 일본 원제인 ‘아따신치’(우리집)와 발음이 되도록 비슷했으면 좋겠다는 일본쪽의 희망에 따라 완성된 산물이라고 하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 텔레토비는 가라! <뽀롱뽀롱 뽀로로> “노는 게 제일 좋아∼♬”로 시작되는 오프닝 주제가는 한번 들으면 자꾸만 따라 부르게 되는 중독성이 뛰어나다. 그 파워는 나도 모르는 새 휴대폰 벨소리로 등록을 하게 될 정도! ‘남북한 합작 3D애니메이션’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도 한 <뽀롱뽀롱 뽀로로>는 호기심 많은 꼬마 펭귄 뽀로로와 그의 친구들이 벌이는 크고 작은 소동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둘리의 뒤를 잇는 제2의 국민 캐릭터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얼음 나라 작은 숲속 마을에∼”로 시작하는 내레이션은 이전 유아 대상용 프로그램이었음에도 어른들을 더욱 열광하게(?) 만들었던 <꼬꼬마 텔레토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엽기 코드로 화제가 되었던 <…텔레토비>와는 달리 개성있고 귀여운 캐릭터가 등장하여 펼치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이야기의 작품으로 정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재미난 작품이다. 덧붙여, <뽀롱뽀롱 뽀로로>의 ‘전설적인’ 오프닝과 엔딩 동영상은 <뽀롱뽀롱 뽀로로> 공식 홈페이지(http://www.pororo.net/)에서도 맛볼 수 있으니, 꼭 한번 찾아보고 그들의 귀여움에 마음껏 빠져보기 바란다. 예외를 허락한 인기! <이누야샤> 최근 애니메이션 채널을 틀면 희고 긴 머리카락에 각막을 자극하는 선명한 빨간색 옷을 입고, 자기 키만큼 큰 칼을 들고 화면을 누비는 강아지… 가 아니라 인간… 도 아닌 녀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은 인간과 요괴 사이에서 태어난 ‘반요’(半妖)라는 설정의 이누야샤. <이누야샤>는 <란마 1/2>로 유명한 다카하시 루미코가 그린 동명의 원작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다. 국내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들마다 모두 장기간 황금시간대에 이 작품을 편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 인기를 짐작해볼 수 있을 정도로 현재 애니 방송계에서 많은 인기와 반응을 얻고 있다. 평범한 여중생 가영이 어쩌다 일본의 전국 시대로 떨어지고, 그곳에서 이누야샤와 함께 조각조각 깨져 흩어진 사혼의 조각을 모으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는 기본 스토리 맥락은 정통적인 모험 판타지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 국내 방영되기 전부터 국내의 만화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었던 작품인 만큼 국내 TV 방영이 결정되고는 팬들의 투표에 따라 성우진을 결정하고, 일본과 국내에서 V6, 하마사키 아유미, BoA, 신화 등 쟁쟁한 인기 가수들이 주제가를 부른 한편, 일본 전통 의상을 비롯해 일본색이 강한 작품임에도 이례적으로 거의 수정을 거치지 않은 방영이 이루어지는 등 여러 가지 화제를 낳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렇듯 기존 애니메이션 팬들을 신경 쓰면서도 일반 시청자들의 눈을 잡는 데에도 성공한 <이누야샤>의 마지막 6기(파이널) 시리즈는 올 7월부터 방영될 예정이다. 깐따삐야 별의 배은망덕 족제비?! <행복한 세상의 족제비> 이야기는 조금 무뚝뚝하지만 평범한 대학생 용준의 집에 족제비 한 마리가 뛰쳐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용준은 그 족제비를 키우기로 하고 ‘제삐’라는 이름까지 붙여준다. 제삐의 정확한 학술 명칭은 흰족제비, 족제빗과에서 가장 작은 종으로 애기족제비라고도 불리는 종이다. 하지만 이들 종족은 귀여운 외모와 달리 육식에다 성격이 포악하다. 그래서인지 제삐도 용준의 집에 들어와 사는 식객 주제에 야생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난폭하게 굴며 집 안에서 대장 행세를 하려든다. 우리는 이런 주객전도의 건방진 녀석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바로 투덜대면서도 사람 좋게(?) 거둬준 길동이 아저씨를 애완동물 취급하던 깐따삐야 별 출신 우주인 도우너가 그러하다. 하지만 자신을 거둬들여준 고마운 은인에게 오만방자, 기고만장한 태도를 취하는 도우너 같은 제삐의 말은 인간들에게 “샤- 샤-”라는 소리 이상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의사소통의 문제로 인한 인간과 제삐간의 오해가 이 작품의 가장 큰 볼거리다. 상황을 멋대로 판단, 해석하는 제삐 이하 동물 캐릭터들의 입담과 그들의 돌발적인 행동에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동요하는 일이 없는 포커 페이스 용준 역시 만만치는 않다. 신선한 웃음을 선사해줄 <행복한 세상의 족제비>는 현재 국내에 <춤추는 족제비>라는 제목으로 원작 만화도 소개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만화책쪽도 체크해보길 바란다!

새 드라마 ‘사랑찬가’ 대본리딩 현장

지난 21일 오전 10시, 문화방송의 새 주말드라마 <사랑찬가>팀의 대본리딩 현장을 찾았다. <사랑찬가>는 가난하지만 밝은 에너지의 여주인공 순진(장서희)의 사랑과 성공을 그린 드라마로, 시청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기획의도로 만들어졌다. <떨리는 가슴>, <한강수타령>, 그리고 이에 앞선 문화방송의 ‘여러’ 주말드라마들의 ‘천적’이었던 저조한 시청률을 깨려는 야심작이다. “짜증나”를 연발하면서도 꼬박꼬박 챙겨봤던 <인어아가씨> 장서희, ‘기자준비 그만두고 한의학과나 가?’ 하는 상상을 하게 한 <허준> 전광렬을 만날 수 있는 기회! 두근두근 용춤을 추는 심장을 다스리며 서울 여의도 문화방송 사옥 3층 대본연습실 문을 열어젖혔다. 한눈에 ‘서열’ 알수있는 좌석배치 ‘헉!’ 숨막힐 정도로 무거운 연습실 분위기 탓에 목구멍까지 널뛰던 심장이 순식간에 자리를 되찾았다. 테이블과 의자가 꽉 들어찬 5평 남짓한 공간은 열악한 회의실을 연상시켰다. 테이블 정중앙 상석에는 연출을 맡은 조중현 피디가 앉아 있었다. 작가는 조 피디의 왼쪽 옆, 조연출은 오른쪽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연출자 양 옆 좌석에 두 주연배우와 조연배우가, 또 그 옆에는 중견배우들이 나란히 앉았고, 테이블에 끼지도 못한 보조 의자는 단역배우 4명의 몫이었다. 한눈에 봐도 맡은 역할의 비중과 서열을 알 수 있는 좌석배치였다. 장서희는 리딩에 앞서 주홍색 필통에서 꺼낸 주홍형광펜을 꺼내들고 눈으로 대본을 읽어내려갔다. 나란히 앉은 전광렬은 4색 볼펜으로 대본에 밑줄을 그었다. 두 주연 배우는 물론, 박근형·임현식·정혜선 등 원로급 무게를 지닌 중견배우들과 임지은·김민·김지훈·이승민 등 젊은 배우들은 하나 같이 브리핑 직전 초치기에 몰두하는 회사원 같았다. 스타다운 거드름은 명함도 못 내밀 분위기. 리딩 현장 분위기를 좌우하는 요소는 여러가지다. 20분전에 대본…‘초치기’ 긴장감 연출자나 출연진 등 멤버가 어떻게 짜이느냐에 더해 대본의 만족도, 시청률도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사랑찬가>는 과묵한 연출자와 ‘선생님급’ 중견연기자들의 대거 출연으로 분위기가 엄숙해진 경우. 대본 리딩은 말 그대로 ‘대본을 읽는 것’이다. ‘선수’들은 이 과정을 ‘대본을 맞춰본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나 연극과 마찬가지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대본 리딩은 공식적인 연습의 시작이다. 연기자들은 대본 리딩을 통해 다른 출연진들과 처음으로 연기 호흡을 맞춰보고, 연기의 톤을 조절한다. 또 연출과 작가는 이 과정에서 발음과 속도 등 배우들의 연기를 교정할 뿐만 아니라, 대본의 문제점을 찾아내 촬영 전 이를 수정하기도 한다. 1시간 남짓 동안 1번만 까르르 “시작하죠.” 10시21분, 연출을 맡은 조중현 피디가 입을 열자 7, 8회의 대본리딩이 시작됐다. “순진(장서희)이 밀고 오는 전채 요리가 올려져 있는 수레…” 조 피디가 첫번째 장면의 상황설명을 읽고 난 뒤, 동파(박근형)과 새한(전광렬)의 대사가 이어진다. 리딩 시작 직전에 대본이 나오는 바람에 리딩 전 배우들에게 주어진 개인 연습 시간은 20여분. 대부분의 연기자들이 순서에 따라 대본을 그야말로 ‘읽어’ 내려갔다. “주말드라마는 대본리딩 4~5일 전까지 대본이 나와주면 좋지만, 방송에 임박해서 제작을 시작하다 보니 대본도 리딩 직전 나올 때가 많습니다. 촬영장으로 쪽 대본이 날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미니시리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대본리딩 하기에 썩 좋은 여건은 아닙니다.” 조연출을 맡은 김영민 에이디의 말이다. 하지만 양금석 등 몇몇 연기자들은 그 와중에도 지문에 맞춰 몸짓까지 시연해 보이는 노련함을 과시했다. 숨 막힐 듯 엄숙한 분위기는 8번째 장면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이어진 9번째 장면, 제작진과 출연진의 웃음보를 터뜨려준 건 아니나 다를까 배꼽 잡는 애드리브의 달인 임현식. 그는 딴 생각에 잠긴 나머지 대사 칠 타이밍을 ‘확실히’ 놓쳤다. 연기자들은 조 피디의 눈치를 살피느라 웃음을 참아보는 듯했지만, 임현식의 ‘웃긴 아우라’를 거부할 수 없는 건 연기자나 감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열 네번째, 수정(김민)의 오피스텔 씬. “누구세요?”라는 수정의 질문에 강혁(김지훈)이 “나, 엄마 없는 애”라고 받아치는 장면이다. 대사를 읽던 신인 연기자 김지훈에게 박근형의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진다. “그게 뭐야, 그게! ‘나’ 하고 ‘엄마’ 사이를 띄워야지, 그걸 왜 붙여 읽어!” 그 뒤 김지훈은 거의 모든 대사마다 박근형의 애정어린 꾸중을 들어야 했지만, 얼굴은 붉어져도 불만은 없는 낯빛이었다. 조 피디는 “보통은 연출자가 직접 연기자들의 연기를 교정한다”면서도 “박근형씨처럼 알아서 연기지도를 잘 해주는 중견 배우들이 많은 작품에서는 특별히 피디가 코멘트 할 게 없을 때도 있다”고 말했다. 조 피디는 이날 신인 연기자 이승민에게 “갑자기 너무 교태를 부린다, 그거 오버야”라는 지적을 했을 뿐 말을 심하게 아꼈다. 대본 리딩은 오전 11시27분에 끝났다. 그리고 10여분 동안 장서희가 샹송을 부르는 장면과 야외촬영분 등 대본에 관한 비공개 회의가 이어졌다. 이날 연습한 7~8회는 이튿날 오전부터 몸동작을 곁들인 리허설 및 촬영에 들어가 세트촬영 하루, 야외촬영 3~4일을 마친 뒤 다음달 4, 5일 방송된다.

벤처시대 충무로 3인방 [1]

충무로에는 돈이 많다? 온나라가 벤처열풍에 몸살을 앓는데 충무로가 무사할 리 없다. 대기업, 금융에 이어 몰려오는 제3의 자본은 벤처. 그러나 벤처는 영리하다. 흥행성이 없으면 투자하지 않는다. 충무로에서 자본을 투자할 만한 파워를 가진 이들로 강우석, 차승재, 강제규를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활화산' 충무로를 재편하는 3인방이 펼칠 인터넷 신삼국시대가 궁금하다. ‘돈은 넘치는데 영화가 없다.’ 최근 충무로의 상황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발에 채는 게 돈”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자본은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영화시장의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다. 영화제작에 투자하는 목적으로 모은 펀드만 해도 100억원 규모 자본이 4개나 된다. 일신창투 수석심사역이던 김승범씨가 독립해 만든 튜브엔터테인먼트의 투자조합, 미래에셋창투에서 모은 코리아픽처스 1·2호, 유니코리아에서 내건 드림캐피탈, 무한기술투자가 차승재씨를 내세워 만든 무한영상벤처투자조합 등이 모두 100억원대 펀드들. 이 밖에도 종합기술금융, 국민기술금융, 산은캐피탈, 제일창투, 시그마창투 등 이른바 벤처투자사들이 어떤 식으로든 충무로에 한쪽 다리를 걸쳐놓고 있다. 억억억, 벤처자본이 밀려온다 밀려드는 벤처자본에는 국경도 없다. 현재 시네마서비스에 투자할 계획으로 자산가치 실사작업을 하고 있는 워버그 핀커스(Warburg Pincus)는 미국에 있는 다국적 벤처자본이다. 인터넷, 정보통신, 콘텐츠사업 등 고부가가치 사업이라면 어느 나라든 가리지 않는 다국적 벤처자본이 한국의 영화사를 투자대상으로 고른 것은 한국에서 영화가 강력한 성장산업이라고 판단한 탓일 것이다. 워버그 핀커스와 시네마서비스의 계약이 아직 성사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예가 계속 이어질 가능성은 크다. 종합기술금융(KTB)으로부터 57억5천만원 투자를 유치한 강제규필름은 투자자들 사이에서 기업 공개시 자산가치가 1500억원대에 이를 것이라 평가되고 있다. <쉬리> 흥행으로 인한 결과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없는 평가액이긴 하지만 투자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3월20일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는 우노필름이 종합엔터테인먼트회사 싸이더스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알리는 행사가 있었다. 영화제작은 물론 매니지먼트, 인터넷영화, 드라마제작, 음반사업 등을 동시에 추진할 싸이더스는 새롬, 다음, 한글과 컴퓨터와 함께 인터넷 4인방이라 불리는 정보통신기술 벤처기업 로커스(대표 김형순)가 투자해 설립됐다. 출범식을 통해 밝힌 싸이더스의 목표는 “엔터테인먼트의 콘텐츠화, 기업화, 산업화, 국제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충무로는 지금 폭발 직전의 화산같다. 대기업자본이 금융자본으로 바뀌면서 어지럽게 이뤄진 이합집산은 부글거리는 용암의 뜨거움이 느껴지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대체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끝날 변화인지 냉정히 따져보지 않으면 비약과 추락의 운명이 눈 깜짝할 사이 바뀌어버릴 판이다. 우노필름 차승재+로커스+웹시네마=싸이더스 우노필름 차승재 대표가 로커스와 손잡고 만든 회사 싸이더스의 사업계획은 최근 동향을 분석할 수 있는 프리즘이 될 만하다. 우노필름과 싸이더스의 차이는 일단 외양으로 볼 때 사업영역이 대폭 확장됐다는 점이다. 정우성, 박신양, 장혁, 전지현 등의 매니지먼트를 했던 EBM 대표 정훈탁씨와 H.O.T, S.E.S, 신화 등을 발굴한 전 SM기획 대표 정해익씨가 차승재 대표와 한배를 타고 매니지먼트와 음반사업을 하기로 했다. 싸이더스 출범 전부터 차승재씨와 함께 인터넷 영화판권구매에 주력했던 웹시네마(대표 김창규)도 한축을 이루고, 스타급 PD를 영입, 드라마와 연예프로그램 제작까지 준비중이다. 차승재씨는 3년 전부터 이처럼 다양한 사업을 포괄했을 때 생길 시너지효과에 주목하며 종합엔터테인먼트회사를 꿈꿔왔다. 영화사에서 종합엔터테인먼트회사로 규모를 키운 싸이더스의 자본금은 80억원. 로커스가 55% 지분을 확보, 최대주주이며 구성원들이 나머지 지분을 나눠 가졌다. 싸이더스 출범은 투자자인 로커스에 주목하지 않으면 단순한 사업확장처럼 비친다. 하지만 컴퓨터, 인터넷, 전화, 텔레비전 등의 경계를 허무는 정보통신기술을 개발하는 업체 로커스가 차승재를 파트너로 택한 데는 미지의 영토를 선점하려는 야망이 있었다. 로커스뿐 아니라 인터넷과 관련된 정보통신업체가 공통적으로 도달하는 결론은 사업의 중심을 하드웨어와 네트워크 구축에서 콘텐츠사업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문자와 소리뿐 아니라 영상까지 고속으로 전송되는 현재 기술발전 속도로 볼 때 정보고속도로에 올려놓을 그럴듯한 차량이 필요하다는 것. 정보고속도로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쪽이 엔터테인먼트산업이라는 진단은 이미 오래 전에 난 결론이기에 로커스와 차승재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다. 시네마서비스+핀커스, 강제규필름은 일본·홍콩과 접촉 시네마서비스, 강제규필름 등이 구상하는 사업계획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는 싸이더스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워버그 핀커스가 시네마서비스에 투자할 금액은 약 340억원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시네마서비스의 사업영역이 영화제작, 배급에 국한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올해 20여편의 영화를 제작, 수입, 배급할 시네마서비스의 매출목표는 300억원. 투자액이 더 많다는 것은 사업이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씨앤필름(대표 장윤현)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오래 전부터 애니메이션 연출을 염두에 뒀던 장윤현 감독은 애니메이션 제작은 물론 드라마를 비롯한 방송물 제작, 인터넷사업 등을 구상, 사업을 추진해왔다. 독자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다 강우석 감독과 마찰을 빚기도 했던 그는 “시네마서비스에서 독립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과정만 놓고보면 또다른 파트너와 제휴할 수도 있지만 강우석 감독이 이런 사업에 관심을 갖는다면 투자자로 나설 수도 있는 상황. 강제규필름도 사업확장이 불가피한데 강제규 감독은 “직접 제작하는 영화 외에 수입, 투자, 배급, 극장 등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상당한 규모의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아시아시장을 하나로 묶는 구상을 추진중인데 올 4월 이후 일본, 홍콩쪽 파트너와 구체적인 접촉을 할 예정이다. 신삼국시대, 물밑 제휴는 계속된다 최근 산업이 이들 세 사람, 강우석, 차승재, 강제규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90년대 중반 시네마서비스, 삼성, 대우가 이룬 3강체제에서 90년대 말 시네마서비스, 삼성, 일신창투의 짧은 3국시대를 거쳐 신흥 3거물이 영토를 분할한 셈. 이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비장의 무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강우석에겐 서울극장 배급망이 있고, 차승재는 기존의 탄탄한 제작시스템에 덧붙여 박신양, 정우성, 김혜수, 전도연 등 중량감 있는 배우를 거느리게 됐으며, 강제규는 홍콩, 일본에서도 욕심낼 정도로 핵폭탄 같은 잠재력을 가진 감독이다. 콘텐츠가 결국 재능과 실력을 갖춘 사람한테서 나온다는 걸 아는 벤처자본이 이들 3인에게 몰리는 건 자연스럽다. 튜브엔터테인먼트, 미래에셋창투, 유니코리아 등이 독자행보를 걷고 있고, 대규모 멀티플렉스와 드림웍스 영화가 버티고 있는 CJ엔터테인먼트가 3인체제와 부분 협력하며 경쟁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들 중 또다른 강자가 출현할 수도 있다. 관계자들은 지각변동이 상당시간 지속될 것으로 본다. 현상적으로 세 사람이 전면에 나와 있지만 필요에 따른 이합집산도 언제든 있을 수 있다. 차승재씨가 운영하는 무한영상벤처투자조합에서 시네마서비스 영화에 투자하고, CJ엔터테인먼트가 강제규필름에서 제작하는 <단적비연수>에 투자하는 것처럼, 상호 투자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전술적, 전략적 제휴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마이클 만 [1]

칼날 위의 삶, 감독은 실수할 수 없다 마이클 만은 시시한 이야기를 재미있는 영화로 만드는 재능이 있다.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가 나왔던 <히트>는 강력한 스타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사실 시시한 영화다. 수많은 영화에서 써먹었던 형사와 범죄자의 대결 구도에 전문가의 윤리의식 문제를 입힌 것일 뿐이지만, 또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는 허장성세에 가까운 것인지만, 이 영화는 굉장한 흡인력이 있었다. 담배회사의 압력으로 시사프로그램 <60분>의 중견기자와 제보자가 겪었던 시련이라는 실화를 소재로 한 <인사이더>도 미국인들에게는 그리 새롭고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대기업의 이익과 개인의 도덕이 대립하는 이야기 구도에 굉장한 힘을 불어넣는다. 시시한 이야기에 웅장한 배경을 입히고 성격파 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끌어내는 만은 현대 미국영화 감독의 계보에서 가장 뛰어난 세부묘사와 시각 표현력을 지닌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장르를 현대화한, 재능있는 미국 영화감독이 누리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다. 종종 만 감독은 지나친 표현의 과장법 때문에 허세를 부린다는 평단의 빈정거림을 사기도 하지만 지나침은 때로 보상받는 법이다. 대다수 미국영화는 대체로 너무 안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가 두손 든 완벽주의자 영국 영화월간지 <사이트 앤 사운드>의 닉 제임스는 <히트>의 첫 장면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하는 빈센트 한나 형사의 모습이 바로 영화 촬영장에서 볼 수 있는 만의 모습이라고 했다. <인사이더>에서 만의 지휘를 받으며 알 파치노와 공연했던 러셀 크로는 사람들이 호기심에 차 “완벽주의자인 마이클 만과 함께 일했던 경험은 어땠나요?”라고 물으면 쌍소리로 대꾸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제작과 각본과 감독을 곧잘 겸하는 만은 자기 영화의 세계를 폐쇄적으로 다스리는 좀처럼 보기 드문 감독이다. <히트>의 빈센트 한나 형사가 “형사들은 실수할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만은 한치의 틈도 없어 오히려 질식할 것 같은 그런 세계를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할리우드에 소문난 만의 완벽주의는 늘 등장인물의 성격을 통해 스크린에 관철된다. <히트>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하는 은행털이전문가 닉 매컬리는 15초 안에 버리고 떠날 수 없는 것은 옆에 두지 않는다는 신념의 소유자다. 닉의 집에는 변변한 가구 하나 없다. 닉은 파치노가 연기하는 빈센트 형사와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이 아닌 일에서 낙원을 찾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불안해지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삶은 칼끝 같은 날 위에 선 삶이다. 자신의 성격으로 세상을 제압할 것 같은 등장인물들의 세계에 만은 관객을 몰아넣는다. 언제 베일지 알 수 없지만 결코 지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세상이며 화려한 대도시의 이면에 감춰진 악몽 같은 세상이다. 그를 키운 건 8할이 TV 만은 영화보다는 텔레비전을 통해 먼저 유명해졌다. 만은 1943년 시카고 태생이지만 영국의 런던영화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화학교 재학중에 텔레비전 CF와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CF에서 잔뼈가 굵은 리들리 스콧, 알란 파커, 에이드리안 라인 등 영국 출신 감독이 할리우드로 건너와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만은 TV시리즈인 <스타스키와 허치> <경찰 이야기>의 각본을 써 인정받은 뒤 79년 TV영화 <제리코 마일>로 데뷔했다. TV영화지만 해외에서는 극장판으로도 배급됐을 만큼 팽팽하고 지적인 긴장을 주는 감옥 스릴러였다. 만의 본격적인 극장영화 데뷔작 <도둑>은 제임스 칸이 금고털이전문가로 나온 범죄영화였는데 훗날 이 장르를 세련시킨 만의 재능을 볼 수 있다.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탠저린 드림의 배경음악이 깔린 가운데 보여주는 초반의 금고털이 장면은 말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로 관객을 내리누른다. 이 영화에서 제임스 칸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말을 삼가는 것 같은 표정과 몸짓 연기로 고독한 현대 영웅의 이미지를 변주해냈다. 그리고 거의 추상화 수준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도시의 거리와 밤풍경은 주인공이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불타버릴 것 같은 초조한 격정을 시각적으로 옮겨내면서 범죄스릴러 영화에 현대적인 명상을 불어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플롯이 아니라 분위기로 관객의 기선을 제압하는 만의 스타일은 나치 병사가 루마니아의 한 성에서 원시 괴물과 만난다는 기발한 발상의 공포영화인 두 번째 작품 <킵>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만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스타일을 이야기에 끌어들여 전쟁영화와 공포영화의 관습에 두루 걸쳐 있으면서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한 공포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야기는 들쭉날쭉하지만 회색과 초록색이 압도하는 화면 분위기를 통해 이 영화는 두 악의 세력, 나치와 괴물이 대립하는 이야기를 초현실적으로 끌고 간다. 독특한 영화였지만 미국 배급업자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배급할지 몰라 허둥댔고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으며 만은 다시 TV로 돌아갔다. <마이애미 바이스> <맨 헌터>, 미국의 어두운 초상 그리고 TV매체를 통해 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만이 제작하고 각본, 연출에도 관여한 <마이애미 바이스>와 <범죄 이야기>는 고금의 범죄영화 스타일을 인용하고 또 인용하는 자기 반영적인 스타일에다 MTV의 속도감을 입힌 박진감 넘치는 내용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 때부터 만은 TV매체의 전설적인 작가 감독으로 자리잡았다. 알란 파커, 리들리 스콧, 에이드리언 라인 등 CF를 영화에 접목한, 만과 비슷한 감각을 지닌 영국 감독들이 때로는 할리우드에서 레이건과 부시시대의 소비 이데올로기에 공헌하는 장식적이고 현시욕에 가득찬 속 빈 강정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면, 만은 지나치게 폭력묘사가 많다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보수적 매체인 TV에서 당대 미국의 어두운 초상을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실험적인 화면에 담아냈다. TV에서 작업했는데도 만의 스타일은 영화적으로 보일 만큼 과감하고 치밀하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맨 헌터>는 TV에서 성공한 만이 영화로 금의환향한 작품이다.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맨 헌터>는 연쇄살인범을 좇는 FBI 요원의 이야기로 그 유명한 한니발 렉터라는 인물이 나온다. 하워드 혹스나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 만은 주어진 일을 이뤄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색채, 세트, 카메라 움직임, 음악 등 영화의 시청각적 요소를 모두 동원해 악마 같은 주인공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어두운 본성을 그려낸다. 이 영화의 복잡한 카메라 움직임과 표현주의적인 구도와 참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음악은 등장인물의 내면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살아가는 악몽에 가까운 세계를 시청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만의 연출은 강력하고 놀랍도록 정교한데, 폭력은 클라이맥스에 이르기 전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되기보다는 그저 암시만 될 뿐이다. 그런데도 하다못해 벽이나 마루바닥 같은 소도구를 통해서도 관객은 형사가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온몸으로 전달받게 된다. <맨 헌터>로 만은 장르 영역 안에서 작업하지만 치밀하게 이미지를 짜는 능력으로 장르를 현대화할 수 있는 감독이란 신뢰감을 얻었다. <라스트 모히칸>, 아방가르드에서 주류감독으로 <라스트 모히칸>은 3천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7천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으며 TV 출신의 아방가르드 감독에서 대번에 주류 감독으로 만의 위치를 올려줬다. 제임스 페이모어 쿠포의 소설을 원작으로 36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리메이크한 <라스트 모히칸>은 영웅주의, 비겁함, 충성심, 복수와 사랑 등 고리타분한 요소를 죽 심어놓은 대작이었으나, 이 영화에서도 단테 스피노티가 맡은 촬영의 아름다움은 눈부신 것이었다. 만은 단테 스피노티의 실력을 빌려 넓은 와이드 스크린에 19세기의 풍경화가인 토마스 콜, 알버트 비어스타트의 회화미에 맞먹을 만한 아름다움과 질감을 만들어냈다. <라스트 모히칸>은 <마이애미 바이스> 유형의 형사 범죄영화에서 벗어나 마이클 만이 다른 것을 해낼 수 있는 감독임을 보여줬지만 만은 다시 본래의 장기인 형사와 범죄자의 이야기를 다룬 <히트>로 돌아갔다. 만은 이 영화에서 돈 심슨과 제릭 브룩하이머가 구축한 액션영화의 유행 장르에 자기만의 변형을 가하는 강렬하고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내면서 전문가주의 윤리를 찬양한다. 날렵한 양복 차림의 닉 매컬리 일당이 은행을 털고 난 뒤 도시 한복판에서 벌이는 시가전은 과장된 수사법으로 액션영화를 장식하는 흔해 빠진 설정처럼 보이지만, 꼬마 소녀를 인질로 잡은 은행강도가 아빠처럼 다정하게 소녀에게 속삭이는 것과 같은 색다른 파멸과 모순의 순간을 잡아낸다. 만의 영화에서 영웅주의는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질주하면서 그것을 통해 고독한 삶을 초극하려는 인간상은, 하워드 혹스가 이미 오래 전에 완성했던 미국영화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받으려는 만의 야심을 보여준다. 세밀한 인물화 그리느라 3시간 걸린다 <필름 코멘트>의 리처드 콤브스는 80분짜리 형사 대 강도의 이야기가 감독의 세밀한 인간탐구 때문에 세시간짜리로 늘어난 작품이라고 평했다. 특히 일중독자이자 완벽주의자인 빈센트 한나 형사와 은행털이 강도 닉 매컬리가 커피숍에서 마주하고 앉아 대화하는 장면은 두 인간의 대결 묘사에서 희열을 느끼는 만의 취향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만은 이 두 사람의 삶에서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냄새를 암시적으로 화면에 배어나게 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들의 삶에는 출구가 없다. 삶의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고 피로와 싸우면서 대결하는 순간의 긴장을 통해 삶을 진정으로 감각하는 자들의 삶은 덧없다. 단테 스피노테가 유려하게 잡아낸 LA의 풍광은 이 덧없는 삶의 유한함을 아이러니로 비유해낸다. 만의 영화는 다른 할리우드영화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막강한 시각적 묘사의 힘이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에 매혹당하고 그 매혹을 화면으로 옮겨 보여주려는 만의 충동은 <히트>와 <인사이더>에서 계속 작업한 배우 알 파치노에 대한 호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만은 두편의 영화 연출이 파치노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이것은 알 파치노의 영화다. 스크린을 응시하면 당신은 그 남자가 하는 대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만은 말했다. <인사이더>는 시사프로그램 <60분>의 기자 로월 버그만 역의 알 파치노와 담배회사에서 해고당한 뒤 회사의 비리를 폭로하는 제프리 와이갠드 역의 러셀 크로가 나누는 일련의 대화 장면으로 대부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두 사람은 호텔과 식당과 차와 야외를 오가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전화로, 팩스로도 소통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묘사한 두 남자의 관계는 <히트>의 빈센트 한나와 닉 매컬리의 관계와는 다르다. 버그만은 와이갠드를 설득해 담배회사가 니코틴의 중독성을 알고 있었다는 진상을 공개하게 하고 와이갠드에게 닥치는 인신공격과 살해위협으로부터 와이갠드를 지켜주려고 애쓴다. 버그만은 세상의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지만, 정작 고독하게 버티며 시련을 맞는 이는 와이갠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와이갠드는 버그만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호텔 방에 틀어박혀 자살을 결심한다. 와이갠드가 절망에 차서 호텔 방의 벽을 쳐다볼 때 벽은 갑자기 와이갠드의 두딸이 놀고 있는 스크린으로 바뀐다. 두딸은 낙오자가 된 아버지를 조롱하듯한 시선을 보낸다. 바로 그때 멀리 떨어진 해변에서 강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버그만이 열심히 휴대폰으로 와이갠드의 소재를 알아내려 애쓰고 있다. 마침내 와이갠드의 소재를 알아낸 버그만은 와이갠드와 통화하고 대화중에 문득 와이갠드가 자살을 결심했다는 것을 알아챈다. 버그만은 필사적으로 와이갠드의 마음을 돌리려하고 바로 그 순간에 버그만의 얼굴 너머 저편에는 넓은 바다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성격과 처지가 다른 두 남자가 필사적으로 마음을 나누려하는 이 장면의 시각적 설득력은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화려한 고독, 그 뒤의 그림자 만의 영화는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관계 맺기가 불가능한 인간들이 절망적으로 부여잡는 안간힘과 고독의 흔적 같은 것이 배어 있다. <히트>에서 해변에 위치한 그림처럼 아름다운 닉의 집이 닉에게 별다른 위안을 주지 못하듯이, 만 영화의 유려한 화면은 등장인물의 어두운 삶에 아무런 윤기도 더해주지 못한다. 만은 현대적이고 장식적인 수사법으로 인물을 꽁꽁 포위해놓고 거기에서 비극적인 장엄미를 얻어내는 감독이다. 장식적인 스타일과 지나친 기술숭배가 팽배한 현대 미국영화에서 뒤늦게 정상에 오른 이 완벽주의자 감독은 영화가 기교 이상의 무엇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외신기자클럽] 아시아를 알아야, 한류를 안다 (+영어 원문)

한류가 2010년에도 계속 붐을 일으킨다면, 그 이유: 한국 대중문화는 강한 경제적 인프라의 지탱을 받으며 후한 정부 지원을 받는다. 한국 영화인과 예술인들은 정열적이며, 교육과 경험이 풍부하며, 대체로 검열로부터 자유롭다. 한국 제작사들은 계속해서 위험을 부담하며 영화와 드라마와 두드러진 대중문화의 다른 형태들을 지원하고 있다. 한류가 2010년에 잊혀진 유행이 된다면, 그 이유: 한국 제작사들은 위험을 더이상 부담하지 않으며 똑같은 종류의 영화와 드라마를 매년 반복해서 생산해낸다. “일방적인” 현상이라 인식된 한류에 대한 풀뿌리 수준의 반발이 나타난다. 중국은 일관성 있게 효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여 좀더 젊고, 쿨하고,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더욱 잘 통하는 번드르르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독자도 나와 같다면 아마 “한류”란 말을 계속 반복해서 듣는 것도 지겨워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정부도 덩달아 일에 뛰어들어 아시아 전역에 퍼져나가는 한국 대중문화를 강력히 지원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이미 믿을 수 없는 금액의 자금이 소비되는 상황이다. 대부분의 정부지원 사례와 마찬가지로, 제일 효과적으로 쓰이는 돈은 이미 성공적인 프로젝트들을 강화하는 데(관광 진흥 등) 들어갈 것이며, 훨씬 더 높은 금액이 무에서 창출되는 새로운 야망의 프로젝트들을 만들어나가는 데 낭비될 것이다(‘한류우드’?). 그렇지만 한국 정부와 영화와 텔레비전 업계들은 한류가 한국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영화와 TV드라마와 음악은 모두 ‘메이드 인 코리아’지만, 한류 현상 자체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예를 들어 홍콩에서 한국 대중 문화상품들은 홍콩 평론가들과 배급업자, 웹마스터, 기자, 팬클럽, 가정주부들의 노력으로 소개되고 마케팅되며 평가되고 지탱되고 있다. 한류를 둘러싼 관심과 인기가 앞으로도 계속될지 여부는 한국에서 내린 어떤 결정보다도 각 지역의 상황에 걸려 있을 것이다. 한류 지원을 책임지는 공·사의 관리들이 이 현상의 진정한 원동력이 되는 주체들이 누군지 초점을 맞추기보다 관광객에게 팔 새로운 것들을 생각해내는 데 너무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사실, 한류가 유지되는 것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은 한국이 문화적으로 아시아 타국들과 좀더 가깝게 융합되는 것이다. 장동건을 주연으로 한 <무극>과 같은 전 아시아적인 제작물들은- 특히 한류가 빛을 잃는다면 -‘순수’ 한국영화보다 스타를 알리는 데 훨씬 더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즈니스 측면에선, 한국과 아시아 타국의 회사들이 협력하여 콘텐츠를 생산할 경우, 타국에서의 홍보가 좀더 효과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어느 정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결정적인 효과를 가지려면 훨씬 더 확장되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일반 한국인이 아시아 타국에서 오는 대중음악이나 영화에 마음을 더 연다면, 아시아 전역에 걸친 좀더 넓은 문화적 트렌드에 대한 감을 개발하는 것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친선을 약간 전개하는 효과도 있으리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 대중문화가 현재 성공적인 것은 해외에서 새롭고 색다르다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지만, 이 새로움은 사라져갈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서 한국이 같은 관객을 끌어들일 생각이면 갑자기 아시아 문화 트렌드에 대한 감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한국 관객은 미야자키 하야오나 주성치와 같은 유명한 이름들 외에 아시아 타국에서 나온 문화상품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 가수가 대만에 가면 흠모하는 군중이 마중나온다. 그런데 대만 가수가 서울을 방문하면 누가 인식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한국인들은 이것이 자랑스럽게 얘기하지만, 한류가 2010년에 이르러서 머나먼 기억이 돼버린다면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에 이런 무관심이 랭킹을 차지할 것이다. It's the year 2010. Does anyone even remember the word "hallyu" anymore? Reasons why hallyu is still be booming in 2010: Korean pop culture is supported by a strong economic infrastructure with generous government support. Korean filmmakers and artists are passionate, well-trained, and largely free of censorship. Korean production companies continue to take risks, supporting films, dramas and other forms of pop culture that stand out from the crowd. Reasons why hallyu is a forgotten fad in 2010: Korean production companies stop taking risks, turning out the same kind of films and dramas year after year. A grassroots backlash emerges against hallyu, as it is perceived as being a "one way" phenomenon. China gets its act together, and starts putting out glossy films that are younger, cooler, and more in touch with the rest of Asia. If you're like me, you're probably growing sick of hearing the word "hallyu" over and over again. The government has now jumped into the game, declaring its strong support of the spread of Korean pop culture throughout Asia, and incredible amounts of money are already being spent. As with most cases of government support, the most effective money will be spent on strengthening projects that are already successful (promoting tourism, etc.), while far greater sums will be wasted on trying to build ambitious new projects from scratch (Hallywood?). Yet the Korean government, and the film and TV industries, should remember that hallyu is not something that was created in Korea. Of course, the films, TV dramas and music are all "made in Korea," but the hallyu phenomenon itself was born in other Asian countries. In Hong Kong, for example, Korean pop culture products are introduced, marketed, evaluated, and sustained by the efforts of Hong Kong critics, distributors, webmasters, journalists, fan clubs, teenagers, and housewives. Whether or not the buzz surrounding hallyu continues into the future will depend more on local conditions than on any decisions made in Korea. Sometimes I wonder if the public and private officials in charge of supporting hallyu are too focused on dreaming up new things to sell to tourists, instead of focusing on who is really driving the phenomenon. Actually, the best way to ensure the continuation of hallyu would be for Korea to integrate a bit more closely into the rest of Asia, in a cultural sense. Pan-Asian productions such as The Promise, starring Jang Dong-gun, can be a far more reliable means of promoting a star than a "pure" Korean production - particularly if hallyu fades. On a business level, if Korean and Asian companies work together to create content, then they will be more effectively promoted in other countries. To a certain extent this is already happening, but it needs to expand much further if it is to have a deciding impact. Meanwhile if ordinary Koreans were to become more open-minded towards pop music and films from other Asian countries, then it would be easier to develop a sense of broader cultural trends throughout Asia (not to mention spreading a bit of goodwill). Korean pop culture is successful right now because it is perceived abroad as being new and different, but soon this newness will fade. When that happens, Korea will suddenly need to have a sense of Asian cultural trends if it expects to reach these same audiences. Except for the biggest names, such as Miyazaki Hayao or Stephen Chow, Korean audiences often seem little interested in the cultural products produced by other Asian countries. If a Korean pop star travels to Taiwan, she's met by adoring crowds. Yet if a Taiwanese pop star visits Seoul, does anyone even notice? Some Koreans talk about this like it is something to be proud of, but if hallyu has become a distant memory by 2010, this sort of indifference will rank as one of the most fundamental reasons.

<사구> 원작에 충실한 미니시리즈

기회가 왔을 때 데이비드 린치가 멋지게 영화를 하나 뽑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프랭크 허버트의 <사구>는 린치가 능숙하게 다룰만한 원작은 아니었다. 스케일은 징그럽게 컸으며 제작비를 뽑기 위해 끝없는 타협이 요구되었다. 결국 린치의 작품은 어정쩡하게 편집되고 형편없는 특수효과가 날아다니는 범작이 되고 말았다. 물론 흥행에서도 말아먹었고. 린치 팬들도 실망이 컸겠지만 진짜로 실망한 사람들은 프랭크 허버트의 팬들이었다. 드디어 그네들이 몇 십 년 동안 사랑하던 소설이 영화화될 기회를 잡았는데 나온 결과물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색한 영화였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그래도 세상이 망하라는 법은 없다. 존 해리슨이라는 야심찬 인물이 허버트의 소설을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로 만들 계획을 세웠으니까. 이 작품은 1999년 싸이파이 채널을 통해 방영되었고 반응이 좋아서 속편도 나왔다. 이야기는 어떠냐고? 린치의 영화와 같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모래행성 아라키스에서 온갖 정치적 암투가 벌어진다. 사악한 하코넨 남작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자기도 거의 암살당할 뻔한 주인공 폴은 수많은 역경 끝에 원주민의 리더가 되고 결국 그들의 메시아가 된다. 물론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그건 직접 보면서 즐길 일이다. 두 편의 작품들을 비교한다면 해리슨의 작품 쪽이 더 이야기가 즐길 만 하다. 비교적 넉넉한 러닝타임의 덕을 보고 있기도 하지만 해리슨에게 린치만큼의 예술적 야심이나 개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허버트의 소설을 정성껏 받아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한다. 영화는 린치의 작품보다 원작에 충실하고 더 정상적이다. 허버트의 소설 팬들에겐 린치의 영화보다 해리슨의 시리즈를 더 추천하고 싶다. 괴상한 건 비주얼이다. 전설적인 비토리오 스토라로가 이 영화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는데, 어렵게 구한 거물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특수 효과가 아주 괴상하다. 일반적인 방식인 블루 스크린이나 그린 스크린을 쓰는 대신 행성의 배경을 표현하기 위해 스튜디오 벽에 벽화를 그려 넣은 것이다. 이 특수효과는 너무 노골적이고 복고적이라 오히려 신선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두 편의 다큐멘터리와 갤러리로 구성된 부록들은 그냥 예의만 차리는 편. 다큐멘터리엔 한글 자막이 지원되지 않는다.

전 <씨네21> 편집장이었던 신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안정숙

지인들에 따르면, 안정숙(54)씨는 궂은일을 결국엔 마다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백발이 될 때까지 평기자로 남겠다던 그의 고집은 5년 전 <씨네21> 편집장을 떠안게 되면서 깨졌고, 쉰 넘어 카메라를 잡겠다던 그의 꿈도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멀어졌다. 임기 시작 3일째인 5월31일. 앞으로 3년 동안 3기 영진위를 이끌게 된 안정숙 신임 위원장을 만났지만, 바쁜 업무 때문에 인터뷰는 수시로 끊겼고 뒷전으로 밀렸다. “업무혁신 관련 부서가 있는데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모태펀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이제 겨우 해결했다는 안 위원장은 “바깥에선 영진위가 하는 일이 뭔지 대략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모르는 것 투성이”라며, 아직 업무 보고(본인은 위원장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를 받지 못했고 다른 위원들과의 협의 사항인 사안도 있어 앞으로 영진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은 다음으로 미뤄달라고 했다. 대신 그는 곁에서 일했던 동료들에게도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던 다소 사적인 질문들에 관해선 비교적 자세히 털어놨다. -허리 세우고,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 전방을 주시하는 평소의 운전자세가, 그동안 차 얻어타는 후배들에겐 사실 좀 불편했고, 불안했다. 이젠 관용차를 타고 다니는지. =혼자 다니는 것보다 좀 불편하다. 그래도 주차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 -저런 고급 의자는 싫어하지 않나. =<씨네21>에서도 그래서 바꿨잖나. 컴퓨터 치는 것도 난 (모니터에) 바짝 붙어서 치는 스타일이라서 저런 의자는 좀 불편하다. 영진위에는 김봉석씨처럼 수면을 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의자를 바꿔줄 만한 사람이 아직 없는 것 같다. -위원들이 왜 위원장으로 뽑았다고 생각하나. =현장에서 직접 경험을 쌓으면서 (영진위의) 필요를 발견하는 영화인들이 맡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기자가 현장과 가깝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체감온도가 다르고 또 현장과는 벽이 있게 마련이니까. 영화인들도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다들 작품을 해야 한다, 다른 책임을 맡은 지 얼마 안 됐다, 그렇게들 고사해서 결국 나 같은 영화계 구경꾼이 이 자리에 앉게 된 것 같다. -위원직만 하더라도 많이 망설였던 것으로 아는데. =<송환>처럼 뛰어난 작품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고 그냥 일기 같은, 에세이 같은 사적 다큐나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이다 생각하고 푸른영상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그렇게 된 거니까. 음… 내가 쉰다섯인가. 1951년생인데. 여자 나이를 이렇게 공개하다니. (웃음) 3년 지나면 쉰여덟이다. 내가 결심이 굳은 사람도 아니고. 이번에 하지 않으면 3년 뒤의 나를 보장 못하겠고, 그래서 많이 망설였다. -영진위 일을 하겠다고 맘먹은 계기가 있나. =지금으로선 관찰하고 발굴하고 길을 찾고 전망하고 여태껏 해왔던 직업적 특성을 영진위에서 발휘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뿐이다. -잠깐이지만 1기 때도 위원으로 활동했다. =활동을 했다고 말 못하지. 그때는 모든 사안을 두고 변화를 추구하는 쪽과 거부하는 쪽의 긴장과 갈등이 워낙 심했으니까. 생산적인 논쟁을 거의 못했고, 자괴감에 결국 정지영 감독, 문성근씨 등하고 같이 중도에 그만뒀다. 다행히 후반기부터 이용관 부위원장이 위원들과 함께 코피 터지게 일하면서 안정적인 2기로 넘어올 수 있었고, 3기까지 온 것 같다. -영진위는 1기의 경우 산업에, 2기는 문화 또는 공공쪽에 포커스를 맞추겠다고 했고, 그 기조 아래서 사업을 펼쳤다.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영화계 안팎의 여론 자체가 영진위의 그런 정책 방향에 동의했다고 본다. 하지만 3기의 경우, 양쪽의 이해와 요구들이 격하게 부딪치는 것 같다. 부담이 전보다 더 클 것 같은데. =1기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동력이 분산되는 일이 계속 있었고, 재원, 인력,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또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안들이 놓여져 있었고. 일단 시급한 일부터 풀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투자조합 사업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그때는 언제 대기업들이 나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안정적인 제작자본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2기의 경우, 1기 때 우선 순위에서 밀렸던 공공, 문화쪽에 관심을 갖긴 했는데 아무래도 재원문제 때문에 완벽하게 지원을 해주진 못했을 것이다. 3기의 경우,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문예진흥기금도 없어졌고, 유럽처럼 방송의 이익 몇 퍼센트를 영화에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국고지원의 몫이 더 늘어나야 하는데. 현재로선 돈 끌어모으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지원 방향은 산업과 문화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고 그렇게 판단할 사안은 아니고 동시에 고민할 문제다. -영화계 안팎의 의견을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 =사견이지만, 대토론회 형태는 아닌 것 같다. 필요한 사안도 있겠지만. 이번 위원들 면면을 보면 화학구조가 괜찮은 것 같다. 각자 의견을 개진하는 것뿐 아니라 각 분야의 대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견 수렴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본다. -2003년에 기자를 그만두고 LA에서 1년 동안 영화공부를 했는데. =스스로 A급 기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자 일이 나에게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씨네21>에 있다가 신문사로 돌아와보니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어떨까 싶더라. 한때 가판대만 보면 <한겨레>를 맨 앞으로 끄집어내놓던 꼬맹이 아들도 다 커서 나보고 <한겨레>는 엄마 없어도 나온다고 하질 않나. 그러던 차에 연수 기회가 있었다. 1년 코스인 USC 영화·텔레비전 스쿨의 영화이론과 객원연구원 자리였는데. 말이 연구원이지 학교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 골프 쳐도 그만, 낚시 해도 그만인 처지였다. -가기 전에 무엇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게 있었나. =그때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새로운 생각을 하나쯤 얻어서 오자.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혼자 있어도 된다는 안도감 같은 것도 얻고 싶었고. 사실 그쪽 학교에서 ‘너, 왜 오려고 하는데?’라고 묻는데, 지원서에 그냥 필름 보존이라고 적었다. 필름 프리저베이션을 하려면 UCLA로 가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쓴 거다. 어쨌든 30년 가까이 쉴 틈 없이 일에 쫓기다가 혼자 딱 떨어져 학교에 가서 영화만 보고 책만 보고 하니까 기막힌 신선놀음이더라. 브레히트의 희곡에 보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왜 발표하지 않느냐는 제자에게 “학문은 지 재미로 하는 거다”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딱 그 재미다. 큰 강의 위주로 들었는데, 마이클 레노프 교수의 다큐멘터리 강의가 특히 재밌었다. 내 짧은 영어로 3분의 1이나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다큐멘터리를 영화학 내부로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 중 한명인데, 그거 들으면서 다큐멘터리 하면 재밌겠네 싶었다. -미국 가서 영어는 많이 늘었나. 누가 그러는데 단어가 쓰인 포스트 잇으로 자동차를 도배했다던데. =남동철 편집장이 그랬나?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그런 건데 한번 붙여놓고 바꿔 붙인 적이 없다. 외운 것도 다 까먹었고. 변명을 하자면, LA에 가면 통역해줄 친구들도 바글바글하고 하다보니 독립적으로 영어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더라. 그래서 지금은 그런다. LA에서 영어 배웠다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평소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위원장직을 맡기 전에도 푸른영상에 출근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은 좀 오래됐다. 87년엔가 뒤늦게 80년 광주 비디오를 봤는데 충격이었다. 이후 좋은 다큐를 보면 관심이 갔고,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싶더라. 푸른영상은 어떻게 된 거냐면, <송환>이 선댄스에 갔잖나. 임권택 감독에 관한 책을 써서 국내에서도 유명한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가 그때 김동원 감독을 USC로 초청했다. 상영도 하고 관객과의 대화도 하고 그랬는데 거기서 만나서 ‘나 한국 가면 푸른영상에서 받아줄 거냐’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하더라. 나중에 안 것이지만 김동원 감독이 푸른영상의 실력자가 아니더라. 전원 합의제다보니 지원서도 내서 합격하면 한달 동안 자원봉사하고 6개월 동안 수습 끝내야 정회원이 되는 건데. 그래서 자원봉사부터 시작한 거다. -자원봉사 일이 구체적으로 뭐였나. =자원봉사 일이 뭐냐고 나도 물었었다. 그랬더니 “다큐멘터리 많이 보세요” 하더라. 편집을 위해 사전에 데이터를 받는 일도 하고, 인터뷰 번호 매겨가면서 대사도 풀고 그랬다. 나중에는 기합이 빠져서 농땡이 많이 쳤지만. 조선희, 최보은에게는 내가 서치도 하고, 로깅 작업도 하고 그런다고 자랑했는데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더라. 어쩌면 옛날에는 영화를 많이 만들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툴툴거렸는데, 시간이 많아지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게 이건가, 회의도 들고 어쩌면 거기서 도망쳐 나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언제였나. =1973년인가. 프랑스영화주간이란 행사를 조선호텔에서 했다. <쥴 앤 짐>을 그때 거기서 봤다. 감독이 누군지도 모르고 봤었다. 그때 신문들은 누벨바그가 뭔지 소개도 안 하던 때니까. 그러고나서 대전에 가서 독일어 선생을 하다가 1977년에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프랑스 문화원이 근처에 있어서 점심시간에 영화보러 갈 기회가 많았는데, 사실 <무도회의 수첩>이니 <장미빛 인생>이니 <밤의 문>이니 그런 감상적인 영화들을 보러 갔었는데 거기서 <도살자>니 <네멋대로 해라>니 <히로시마 내사랑>이니 하는 영화들을 본 거지. 그러면서 ‘어… 어… 어…, 영화도 예술이네’ 했던 거다. 잘 모르지만 한번 관심을 가져봐, 했던 거고. -그 관심이 이어져 서른 넘어 영화과에 입학한 건가. =사실 위대한 작품 보면 주눅들어서 접근이 어렵잖나. 고다르 영화 보면서 영화 만들겠단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언젠가 아주 평범한 프랑스 코미디영화를 봤는데, 지금도 제목은 기억 안 나고, 상쾌한 영화긴 했는데 보고 나서 ‘어 저 정도는 나도 만들 수 있지 않나’ 싶었다. 80년 7월30일에 해직되고 난 뒤였을 것이다. 기자 생활 한 건 3년밖에 안 됐지만 80년에 그만둔 기자들은 다들 언젠가 신문사로 복귀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일을 해도 부수적인 것처럼 느꼈었다. 다른 직장에 다니고 있었던 나도 별로 애착이 없었고, 그렇다면 이 기회에 영화를 한번 만들어봐 하는 마음으로 서울예대 85학번으로 편입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내가 정말 영화를 굉장히 잘 만들 줄 알았다. -그런데 들어가보니 아니었나? 학교 다니면서 단편 작업을 했을 텐데. =하나는 <봄소풍>이라는 제목이었고, 또 하나는 <창밖에서>였나. 기말 발표회 앞두고 가편집 한 거 보고 있는데 그때 누가 들어와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영사기 렌즈를 손으로 막은 적도 있다. 되게 못 만들었다. 상영 뒤에 전혀 반응이 없었고, 나중에 한 후배가 자신의 영화에 내 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했다는 말을 듣긴 했다. 치졸하지, 라는 대사 앞에 끼워넣었다고 해서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맘먹었는데 결국 못했다. -<한겨레> 입사 이후, 15년 가까이 문화부에서만 일했다. =젊었을 때는 문화부가 싫었다. 그거 하려고 기자 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해직 이후 1년 반이지만 영화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문화쪽으로 관심이 고정되어버린 거지. <한겨레>에 와서도 다른 기회를 가져보지 않아서 문화부에 정착을 한 것일 수도 있고, 또 기질상 잘 맞아서일 수도 있고. 당시 문화부에 고종석, 조선희 이런 친구들이 있었는데 같이 떠들고 그러는 분위기가 좋았다. 매일매일이 MT고, 학습이고 그랬으니까. 서커스 기사를 문화면에 넣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런 것 가지고도 논쟁을 벌였던 시기였다. -영화기자 시절, 취재원들에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깍듯하게 대했다고 하던데. =특별한 건 없다. <한국일보> 해직 동기들끼리 다시 기자 하게 되면서 무슨 특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진 말자고 하긴 했지만. 아마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하고 싶어서 힘들게 노력하던 사람들이었을 테고, 내 입장에선 그런 모습들이 보기 좋았고, 그래서 호기심을 유지하며 취재를 한 결과일 순 있겠지. -평기자로 남기를 고집했던 이유는 뭔가. =지금 생각하면 싸구려 낭만인 것 같은데. 입사했을 때 30년 뒤에도 머리 허연 평기자로 남고 싶었다. 조직이 정한 단계를 밟기도 싫었고. 원래 책임을 맡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땐가. 선생이 반장하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전근 가신다고 해서 면한 적이 있다. 5월쯤 돼 선생이 전학 안 가는 나를 이상하게 여겨 ‘아버지 전근 안 가시냐?’고 묻기에 ‘이미 전근 가셨어요. 전 자취해요’ 그랬었다. 게다가 어느 날 남편이 정치를 한다고 하니까. 공연한 오해를 받기 싫었다. 바르게 처신한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 남에게 이상한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잖나. 찜찜한 거지. <씨네21>은 상관없을 줄 알아서 간 건데. 편집장이 나서야 한다는 대선후보 인터뷰 때 고민하다 결국 뒤로 빠져야 했다. -기자 일 하다보면 때론 ‘기생하는 자’의 비참함 같은 게 있다. 창작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는 이에겐 특히 더할 텐데. 일하면서 갈등은 없었나. =<한겨레> 기자였잖나. 그 정열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다 그랬지만 자나깨나 <한겨레>, 눈 떠도 눈 감아도 꿈 꿔도 <한겨레>, 뭐 그랬다. 그랬으니 자의식이 싹틀 기회가 없었지. 그런 말 있잖나. 없는 집에선 자식들이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고. <한겨레>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린 기사라도 잘 써야 한다, 뭐 그랬었다. 93년이었을 텐데. 아버지가 투병 중에 하루는 ‘정숙아, 니 글은 언제 쓸래?’ 하셔서 ‘저, 만날 써요. 기명기사 나오잖아요’ 했던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글 잘 쓰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진 ‘아니, 니 글 언제 쓸 거냐고, 제발 니 글 보고 싶다’고 계속 그러셨고. 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서야 처음으로 내가 글 쓴다는 행위가 뭔지 곰곰이 따져보게 되더라. 그뒤로 글 말곤 딴 일을 벌이진 못했다. -영화기자 하면서 만났던 이들 중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나. 스승 같은, 때론 친구 같은. =임권택 감독님을 참 좋아했다. 서울예대 다닐 때 현장 가서 밑에서 연출부 하고 싶은 감독이었다. 장선우, 박광수 감독은 시대가 바뀌었지만 <한겨레> 시작할 때 함께 영화를 시작했던 사람들이라 동시대를 살았다는 느낌이 있고. 뒤통수 얻어맞은 듯한 영화를 만들어 질투와 경외심을 갖게 했던 홍상수 감독과의 인터뷰도 좋았고. 좋은 영화 만든 감독들과의 만남은 다 그랬다. 정지영 감독 같은 경우엔 <남부군> 지방 촬영 끝내면 피곤할 텐데 서울 올라와서 각종 성명서 내던 열정이 맨먼저 떠오르고. 김혜준 국장(현 영진위 사무국장)은 외국에서 한밤중에 전화해서 뭘 물어볼 정도로 살아 있는 데이터베이스였고. 아, 그리고 유영길 촬영감독. 그분이 눈이 되게 형형하잖나. 인터뷰 첫머리에 80년 광주 이야길 하시면서 자신이 필름을 전달하러 송정에 가던 날 광주에서 발포가 있었다고, 그런데 카메라 기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길 하시던 때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유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 거기 한국의 빛이 잡혀 있잖나. 촬영할 때 필름 색온도를 계산한 거는 아닐 테고, 경험이 쌓여서 그런 것일 텐데,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빛, 골목의 빛을 보면서 내가 경험한 오후의 빛이다,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신문 만들다가 잡지를 만들었을 때 어떤 재미가 있던가. =깊이 볼 수 있다는 재미는 있는데 피가 마르지. <한겨레>가 어떤 기사를 썼는지가 그날 부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진 않지만, 주간지는 편집이든 문체든 독자들 꼬시려고 악을 써야 하니까. -악 쓰다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었을 텐데. 화를 좀처럼 내지 않았던 것 같다. 부처님 혹은 호호 아줌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 =<씨네21> 간다고 할 때 신문 문화부 후배들이 나한테 한 이야기가 있다. ‘안 선배, 여기서처럼 성질 부리지 마세요.’ 울끈불끈 성질 내지 말자, 이번 기회에 성격 개조하자 다짐했지. -개인적으로 영진위에서 일하면서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국영화가 영화제에서 상받는 것뿐만 아니라 외국 극장에서도 활발히 상영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내에선 시네마테크들이 많이 생겨서 좋은 프로그램 많이 돌려볼 수 있으면 좋겠고. 한국영화의 난관들을 풀어가지 못하면 영진위가 일을 잘 못해서라고 욕먹을 텐데, 힘 모아서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을 만드는 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장호 [48] - 안타까운 흥행작, <어우동>

영화감독이 인터뷰에서 자주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자신의 연출 가운데 가장 아끼는 작품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어떤 인터뷰에선가 “차기작”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도 가끔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지난 작품들은 이미 여러 사람에게 공개됐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자랑스러운 마음보다 참담한 마음에 가깝다. 지난 시절의 한국 영화판처럼 연출자의 의도를 50%도 반영하기 어려운 척박한 문화풍토에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진실이다. 그래서 그게 최선이 아니라는 자존심이 고개를 든다. 차라리 불쌍한 작품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작품이 떠오른다. 흥행이 안 된 작품, 또 흥행은 잘됐지만 평자들에게 평가를 얻지 못한 작품, 관객에게 잘못 이해된 작품… 등 아쉬움이 있는 작품들이 더러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영화 <어우동>이다. <어우동>은 내가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관객을 많이 끌어낸 영화였지만 내가 바랐던 올바른 평가는 받지 못했다. 나는 <어우동>을 연출하면서 우리 시대극의 변천사를 상당히 의식했다. 종래 시대극의 모습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사극들은 대개 전에 만들어 놓았던 의상과 소도구를 대부분 그대로 이용하게 된다.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사용하는 의상이나 소도구까지 철저히 새로 제작하려면 엄청난 경비가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이나 조연급의 의상과 소도구 일부분만 제작하는 것이 상례인데 어쩔 수 없이 기존의 형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궁중사극을 많이 만들었던 60년대 신필림의 경우에도 철저한 고증보다 웬만하면 거의 같은 형태의 의상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시장에 나와 있는 싸구려 원단을 사용하게 되므로 시대에 맞지 않는 인공염료의 색감이 그대로 드러나 미학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혁명적인 제작이 아니고서는 바꿀 길이 요원하다. 나는 신필림 시절의 시대극과 결별하고픈 욕망이 너무 커서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을 설득해 엑스트라의 의상까지 모두 새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천연염료의 느낌을 주기 위해 원단부터 면과 무명을 주로 사용했고 지금까지 양반의 도포나 바지저고리에 흔히 이용했던 옥색이나 회색. 또는 연보라, 연분홍, 흰색 등을 피하고 복식사에서 밝힌 것처럼 잿빛, 쪽빛, 그리고 갈색 등 지금껏 영화나 TV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천연염료의 느낌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또 궁궐에서 착용한 공복 역시 청색, 홍색 모두 서양의 인공염료의 색감이 그대로 노출되어 천박스럽기만 했던 것을 천연염료의 은은함과 깊이를 살리기 위해 어두운 청, 홍으로 힘들여 만들었다. 충무로 영화판에는 참으로 오랜 세월 살아 있는 역사처럼 영화 의상만 전담했던 이혜윤 여사가 있다. 내 청년 시절엔 충무로 영화판에서 흔히 짱구 아줌마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분의 영화의상 한평생에 <어우동>의 의상과 소도구의 대변혁은 잊을 수 없는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감히 확신한다. <어우동>의 의상 고증은 고 석주선 교수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한복연구가 이헌정씨의 솜씨와 성의로 아주 큰 성공을 이루어냈다. 특히 기생 전모를 비롯한 독특한 장신구들을 직접 제작해준 전통복식 연구가인 허영씨의 도움이 컸다. 영화 <어우동>의 대성공은 그뒤 한국영화와 TV에서 사극의 모습을 다양한 시대 고증에 충실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자신한다. 영화 의상의 기초가 되는 엑스트라의 복식들이 다양해졌으므로 선택의 폭이 널널해진 것이다. 개봉과 함께 단성사 앞에는 이보희의 얼굴을 복제한 어우동의 마네킹이 대형 유리상자 속에서 예쁜 전통 한복의 옷맵시를 뽐내게 되었다. <어우동>의 인기는 대단했다. 신인 여배우 이보희의 인기는 금세 정상으로 올라섰다. 연일 계속되는 매진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 이어 다시 나에게 횡재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상한 투서에 의해 영화 <어우동>은 한국영화 검열역사에 다시 없는 난센스 해프닝을 일으켰다. 영화관에서 한참 인기리에 상영중인 <어우동>의 필름이 다시 공연윤리위원회에 실려가 대폭 삭제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당시의 공연윤리위원장 최창봉씨는 <어우동>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전격 경질되고 말았다. 그렇게 된 내막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게도 모든 게 감사원장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 이름을 영영 잊을 수 없는 당시의 감사원장은 군장성 출신의 황영시라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영화인 중에서 이 사람에게 투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영화 <어우동>이 민중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운동권의 의식화된 영화로 현 대통령을 조선조의 왕으로 비유한 불손한 영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어우동>은 왕의 권위에 섹스로 도전하는 상징적 성애의 장면들이 여기저기 잘려나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 행패에 속수무책으로 그저 당했던 분하기 그지없는 기억들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정말 불과 얼마 안 되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KBS 새주말극 ‘슬픔이여 안녕’ 출연 가수 김동완

“주말 드라마는 오랜 기간 방영되기에 출연하고 싶었어요. 연말에 방송이 끝날 때쯤이면 배역에 완전히 동화돼 있을 것 같아요.” 11일 첫 전파를 타는 한국방송 2텔레비전 주말극 <슬픔이여 안녕>(극본 최현경·연출 문보현)에서 다시 연기자로 나선 그룹 ‘신화’ 멤버 김동완(25·사진)은 안방극장에 자주 얼굴을 내밀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내비쳤다. 김동완을 7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났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지방대 졸업 뒤 집안 일을 거들며 취업 준비를 하다 장서영(박선영 분)과 사랑을 키워가는 한정우 역을 맡았다. 한정우는 천성이 느긋하고 배포가 두둑하며 기죽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얼마 전 끝난 문화방송의 <신입사원>에서 에릭이 열연했던 강호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에릭은 멋있잖아요. 분위기도 있고요. 제가 만약 <불새>에서 에릭이 맡았던 역을 연기했다면 그런 분위기가 안 나왔겠죠.” 김동완은 같은 ‘신화’ 멤버이면서 연기자로 활동하는 에릭의 장점을 칭찬하면서도 “감성적인 표정 연기는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에릭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의 자신감처럼 이제 김동완의 이름 앞에 ‘연기자’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괜찮을 듯싶다. 그는 그동안 영화 <돌려차기>와 한국방송 드라마 <천국의 아이들>을 통해 연기자로서 신고식을 치렀고, 최근 문화방송 드라마 <떨리는 가슴>에서 “연기가 어색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수로서는 신화 멤버 6명이 텔레비전에 함께 나오다가 드라마에선 저 혼자 크게 나오니까 좋더라고요. 예전에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는 하지 않았던 대본 분석도 요즘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서는 배우로서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김동완은 서로 다른 성격의 네 형제가 힘을 합해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그린 이번 드라마에서 막내인 한정우에 대해 “되는 일이 없지만 항상 희망에 부풀어 있는 건강한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정우가 긍정적이고 털털한 성격의 자신과 닮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주말 드라마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연령층이 높다는 점도 신경쓰인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어른들이 ‘김동완이 연기자구나’라는 생각을 확실히 가지도록 열심히 연기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