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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영웅적인 캐릭터들과 이야기틀을 깔아뭉개는 작전을 구사해 인기를 얻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로빈훗 등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미녀와 야수>의 결말을 거꾸로 뒤집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식이다. 하지만 디즈니 상품에 오래도록 맛들여온 국내 아동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면? 실제로 <슈렉>의 개봉전 시사회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극히 일부이지만 `엽기발랄'한 주인공들의 장난과 결말에 불만스런 울음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정작 미국의 아동들은 손벽치며 즐겁게 본 장면을 국내 아동들이 낯설어할 수도 있다는 상황은 꽤 역설적이다. <아틀란티스…>는 일본 가이낙스가 만든 텔레비전 시리즈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와 주요 캐릭터와 일부 설정이 닮았다는 이유로 구설수에 올랐다. 인터넷을 통해 진행된 표절시비는 디즈니의 공식적인 대응을 끌어내지 못할 정도로 이렇다할 파급력을 보이진 못했다. 두 작품 모두 <해저 2만리>를 참고하긴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까지 닮은 건 아니다. 다만 <…나디아>가 국내에서 적잖은 인기를 누렸다는 점에서 그 여파가 주목된다. 이성욱 기자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홍준 집행위원장

“어떤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제일 편하세요?”라고 묻자, 김홍준(44) 감독은 ‘감독’도 ‘위원장’도 ‘(영진)위원’도 ‘선생님’도 모두 다 편하다고 말했다. <장미빛 인생> 그리고 <정글 스토리>. 삶의 꺼칠한 얼굴을 맨살 그대로 렌즈에 담은 아주 리얼한 영화를 만들었던 김 감독은, 지난 2월27일부로 판타지영화 축제의 호스트가 됐다. 할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버린다는 그에게, 7월12일 개막하는 영화제 준비가 ‘시뮬레이션 훈련’ 단계에 들어가고, EBS의 <한국영화 걸작선>을 몰아서 녹화하느라 밤을 새면서 영진위 일과 영상원 학생들 성적까지 처리하는 요즘은 ‘게으름 지수’가 마이너스로 치닫는 나날이다. 인터뷰 도중에도 연방 울어대는 휴대폰에 응하며 종이 케이스가 끼워진 다이어리를 꺼내 0.7밀리 샤프펜슬로 스케줄을 채워 가는 김홍준 위원장에게 수첩이 예스럽다고 참견하자 금세 “물에 젖어도 되고 전자파도 발생하지 않는다”며 합리적으로 설명해준다. 그의 말 속에서 언제나 혼돈은 정리되고 문제는 명백해지며, 해결 방안은 가능성의 순서대로 단정하게 늘어선다. 긴 시간을 들여 올해와 더 먼 미래의 부천영화제를 위한 명료한 도면의 두루마리를 펴보인 그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스탠리 큐브릭의 DVD 세트가 막 배달됐다고 소년처럼 자랑하며 자리를 떴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부천영화제 일을 1997년에 처음 맡았고, 영상원의 객원 전임이 된 것은 1998년, 영화진흥위원은 2000년에 시작했다. 본디 이렇게 동시에 많은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책임감의 힘이 크다. 문제는 여러 일을 하다보니 쉬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이제 다른 쪽 일로 모드를 전환하면 그것이 곧 한쪽 일의 휴식이 되는 것 같다. 영진위가 한창 어려웠고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까지 맡아 평생 가장 힘들었던 올해 초는 마침 학교가 방학이었다. 그런데 수업이 없어 고민에 계속 빠져 있게 되니 그게 오히려 곤욕이더라. -프로그래머를 사퇴하게 했던 원인은 해소됐나. 지역사회의 요구와 마찰이 있었던 건 아닌가. =프로그래머로서 일이 더이상 새롭지 않다고 느꼈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사퇴의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 영화를 찍는 일이 그리 절박하지는 않다. 부천 지역사회도 균질적 집단이 아니고 시민들 안에도 영화제를 대하는 다양한 성향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가능하면 각 집단의 요구를 수용하고 일관된 목소리로 설득하는 창구 역할을 할 것이다. -프로그래머로서 일할 때와 차이는. =영화제에 맞는 작품과 게스트 섭외를 공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프로그래머의 일이었다면, 집행위원장으로서는 살림꾼 노릇을 하고 싶다. ‘업무 플로’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사무국 부서별로 각기 갖게 마련인 욕심을 갈등이나 충돌이 아닌 합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첫째다. 영화제를 만들어가는 업무들은 이질적이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이 안 되면 곧장 카오스다. 예컨대 작품 수가 늘어나면 번역, 출판, 카탈로그, 자원활동가, 상영팀으로 연쇄 과부하가 걸리고 결국 펑크가 나 관객에게 피해를 주는 거다. 한편으로는 영화제 집행부 책임자로서 어떻게 인적 자원과 인프라를 안정시킬지 구체적 마스터플랜을 제시하는 바람직한 리더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책방 가면 괜히 ‘훌륭한 리더가 되는 법’ 같은 책을 기웃거리게 된다. (웃음) 프로그래머를 할 때에는 개인 김홍준의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어 김홍준 영화제라는 말도 들었는데 집행위원장은 반대로 스탭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다. 집행위원장이라는 우리말은 왠지 관료적인 느낌을 주는데, 정확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영화제가 영화라면 프로그래머는 감독이고 집행위원장은 익제큐티브 프로듀서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유바리와 도쿄판타스틱페스티벌의 요이치 고마즈자와 집행위원장은 ‘페스티벌 프로듀서’라는 신직종을 만들어냈는데 말되는 표현이다. -영진위의 경험이 집행위원장직 수행에 도움이 되나.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공적 기구 안에서 예산, 조직, 정책을 조율하는 법이라든가, 정관, 규정, 협약 같은 것에 대한 감을 공부할 수 있었다. 또 하나 는 것은 회의 진행하는 요령이고. 대학 다닐 때 답사간 마을에서 만난 이장님은 몇살 때 결혼하고, 집사고, 이장이 되겠다는 계획을 이미 스무살 때 완벽하게 짜놓고 그대로 사신 분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이분과 정확하게 반대의 인간형이다. 초등학교 때도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편의상’ 과학자가 될래요 했지만 그냥 접대용 멘트였다. 지금도 내겐 뭐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몇살쯤엔 기어이 무엇을 성취해야지 하는 개념이 없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마치 모든 일을 예정한 것 같다. 감독이 되기 위해 영화동아리에 들고,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기 위해 공공 기관에서 일을 하고 교수가 되기 위해 책을 쓴 것 같지 않은가. (웃음) 어쨌거나 반복을 싫어하고 호기심이 많고 냉소적이기 때문에 낙천적일 수 있는 나에게 지금 사는 방식은 잘 맞는 것 같다. -부천영화제에서 오래 일할 생각인 것 같다. =‘종신직’이라는 농담 섞인 표현도 썼지만, 집행위원장으로서 영화제 10주년은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10주년 되는 해에 역대 페스티벌 레이디를 다 초청하면 “부천영화제에 스타가 없다”는 말은 다시 안 나오지 않을까? (웃음) -여느 해보다 프로그램의 색깔이 다양하다. 특히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부문에는 언뜻 봐서 ‘판타스틱’이란 표현에 딱 들어맞지 않는 영화들도 있다. =지난해가 도발적이라면 올해는 전체적으로 다양성을 강조한 프로그램이다. 그건 우리가 의도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런 영화들이 나와줘야 가능한 일인데 흐름과 맞아떨어졌다. 경쟁부문 부천 초이스는 ‘판타스틱’을 좁은 의미로 해석한 영화들을 모은 섹션이고 해당 장르 안에서 경력을 쌓았으나 덜 알려진 감독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 반면 월드 판타스틱은 판타지의 정의에 구애받지 않는 대중성에 초점을 둔다. 판타스틱영화제를 장르로 규정된 영화제로 보거나 마니아들을 위한 영화제로 보는 생각은 수능시험적 발성이다. 중요한 건 수용의 맥락이다. 예를 들어 <스탠리 큐브릭: 영화 속의 인생> 같은 다큐멘터리도 부천에서 틀면 관객에게 다르게 다가간다. -올해의 빅 이슈인 호금전 회고전의 의의를 말한다면. =아시아의 판타스틱영화제인 부천영화제가 아시아와 판타스틱이라는 두 화두를 결합하고 과거 영화를 복원 회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측면에서 호금전만한 대상은 없다. 타이밍 면에서는 물론 <와호장룡>의 바람을 탔다. 부천에 오니 의외로 이런 보물이 있구나라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겠다. 한국 로케이션 촬영한 호금전의 영화는 한국적 공간의 재해석도 보여줄 것이다. 전혀 예비지식이 없는 관객도 호금전 영화 속에서 불국사 단청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낄 거다. 이번 부천영화제의 숨은 테마는 인연이다. 제2대 페스티벌 레이디 추상미, 제2회 경쟁 장편 심사위원장 존 베리와의 인연이 특별 상영을 통해 부활하고, 국제영화제라면 의무사항이라 볼 수 있는 자국영화 회고전은 선배 세대와의 인연을 더듬는 자리다. 호금전 회고전도 그렇다. 김영덕 프로그래머의 추억도 <씨네21> 기사를 읽고 알았지만, 나 역시 중1 때 생전 처음 본 홍콩영화가 <방랑의 결투>였고 그것이 <대취협>임을 지난해에야 알았다. 그 이후 고등학교 갈 때까지 한국에 수입된 칼싸움영화는 다 봤다. 나약한 모범생이었던 나의 억눌린 폭력성을 만족시켜준 건지.(웃음) 실은 1회 때부터 감독 오마주를 호금전에게 바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무리라고 다들 말렸다. 호금전 회고전의 성사는 이제 부천영화제에 그만한 내공이 생겼다는 증거다. -부천은 축제의 성격이 강한 영화제다. 영화가 아직은 공동체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가. =디지털이 부상하면서 영화를 제작하고 수용하는 방식은 점점 개인화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파는 쪽에서도 그걸 강조한다.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은 매체 민주주의라기보다 시장 확장의 의도다. 브뤼셀영화제를 가보니 그쪽 사람들은 디지털을 하나의 테크놀로지로서 관심을 가질 뿐 지각변동이 올 듯 요란을 떨지 않더라. 영화가 예술이자 산업으로서 영상산업의 종가 역할을 했던 시대가 가고 물적 토대가 바뀌면서 영화제의 역할도 달라진다. 영화제는 사회적 의의로 봐서도 도리어 아날로그로 가는 방향이 맞지 않나 싶다. -그와 관련해 ‘메이드 인 코리아’ 섹션에서 인터넷영화를 굳이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뜻이 궁금하다. =파편화된 맥락에서 소비되는 인터넷영화를 집단적 경험의 장인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셈이다. 영화는 복제물일지 몰라도 관람은 극장이 어디냐 관객이 누구냐에 따라 하나하나의 상영이 라이브 퍼포먼스다. 이제 35mm와 화질 구분이 안 되는 디지털영화가 프로젝터로 상영되는 시대가 오면, 영화제를 가야만 영사사고를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영사사고, 그거 얼마나 재미있는 건지 모르지?”하면서 말이다. 즉 영화제가 영화의 고전들을 창작자가 의도하는 형태로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교회 제단화. 귀족 초상화가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박제화되어 나란히 걸려 있는 미술관과 달리, 영화제에서 필름을 튼다는 것은 그 영화가 태어나서 살았던 공간을 관객만 바꿔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다. 내가 있는 한 부천영화제는 아날로그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단편 상영작을 동영상으로 미리 틀지말자고 했다. 앞서가는 ‘퇴행’이랄까. -회고전의 한국영화는 젊은 관객에게는 오히려 이국적인 오락이 될 것 같다. =영화 교육, 영화 수용에 단절이 없던 미국의 영화광이라면 고전 할리우드영화를 주말에 TV만 틀어도, 비디오 가게만 가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미국에는 산업적 연속성, 유럽에는 문화적 연속성이 있는 반면 한국영화의 70, 80년대는 단절이다. 각국 영화제를 다녀봐도 ‘화합’이라는 갈등을 전제로 한 정치적 용어를 영화계에 쓰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래서 옛날 한국영화를 본다는 것은 한국영화로서는 자신의 옛모습을 보는 일인 동시에 낯선 일이다. 어찌 보면 타자의 영화이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외국영화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한국영화에 대해 국내외 관심이 고조된 지금이, 한국영화를 단순히 복고취향이나 호사가적 관심, 자기 비하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로서 재발견, 재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 유니버설 호러나 해머 호러 같은 특수한 회고전을 부천에 기대하는 사람도 많다. =기획이 좋아도 문제는 섭외다. 미라맥스가 호금전 영화 판권을 전부 사들이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모르긴 해도 아마 흩어져 있는 판권 소유자 수십명에게 팩스하다가 지쳤을 것이다. (웃음) 스탠리 큐브릭 회고전도 여러 영화제가 약속까지 받아놓았지만 워너가 올 스톱시켰다. -해외 판타스틱영화제들과 프로그램 교류성과를 자평한다면 =판타스틱영화제는 비주류의 대안영화제들인 까닭에 우정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서로 친구가 되어 영화를 추천하고 섭외를 돕는 인적 네트워크가 구축된 점이 중요하다. 부천영화제는 유럽판타지필름페스티벌연합의 준회원이고, 헬싱키를 필두로 판타스포르투, 브뤼셀, 판타아시아, 북미의 유일한 판타스틱영화제인 몬트리올에서 한국영화 스페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지금까지는 홍콩영화로 버텼는데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그들에게 한국영화가 대안이 될 거라고 말했다. -여름에 열리는 부천영화제의 고충은 한국영화 프로그래밍이다. 이번 부천에 출품된 <나비>와 <소름>에 대한 소감은. =영화가 그 영화제에 도움이 되느냐, 그리고 영화제가 그 영화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판단에 따르면 <나비>와 <소름>은 그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각각 경쟁작과 폐막작으로 상영되는 것이 각 영화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진정성이 드러나는 영화가 상대적으로 적은 요즈음 미덕이 있는 영화들이라고 영화를 오래 봐온 관객으로서 느꼈다. -예산이 24억5천만원이다. 영화제 기간 시설에 장기적으로 투자할 계획은 없나. =부천의 문제는 영화 전용관이 아닌 공공 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에 상시적으로 영화관으로서 닦고 조이고 기름칠 수 없다는 점이다. 시설이 영화제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제 예산으로 교체할 수 없고 그렇다고 건물 운영주가 영화제를 위해 자기 예산을 투입하기도 어렵다. 올해는 스크린 교체, 영사기 보수, 렌즈 확보를 영화제 예산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영 건물에서 영화제를 하는 장점도 있다. 타이베이영화제에 갔더니 직배사가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2∼3관에 세들어 행사를 치르는 모습이 딱했다. 멀티플렉스 때문에 관객의 기대치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를 볼 때 화질이 전부가 아니듯 시설이 다는 아니다. -사무국이 연중 상설 운영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이나 영화제 노하우가 잘 축적되지 않는다는 고민이 있을 것이다. =운영 노하우의 매뉴얼화는 90%쯤 이루어졌다. 이제 문제는 시스템을 채워주는 인력을 어떻게 안고 가느냐다. 영화제 치르는 것만 일이라면 사무국은 프로그램팀을 제외하고 6개월 이상 일할 이유가 없다. 전문성을 생각하면 상설 조직이 필요하지만 단기간의 연례 행사를 치르는 효율을 생각하면 반대라는 데에 고민이 있다. 영화제 사무국이 영화제 행사뿐 아니라 영화제로 조직된 인프라와 인적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다른 사업을 통해 상시적으로 시민과 만나 지역 문화, 경제, 영상 문화 안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중이다. 예컨대 부천영화제가 꼬마 영화제와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래밍을 맡는다거나 부천 미디어센터 같은 기관을 통해 시민들에게 매체 교육을 실시하고 시민들이 영상 기자재를 사용해 매체 민주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게 한다거나. 이런 식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면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면서도 영화제 스탭들의 개인적 전망이나 재원 확보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별도 합의된 바는 없지만 집행위원장으로서 이러한 내용을 제안해 놓은 상태다. 신자유주의 원산지인 미국에서도 공적 서비스 기관의 성과는 이익의 폭이 아니라 기관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인구를 끌어들였느냐로 평가된다. -EBS <한국영화 걸작선>에 대한 애착은. =기술적인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텔레비전에서 한국영화가 제대로 대접 못 받는 것은 제대로 포장이 안 됐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가위질이 분명한데 맥락에 대한 아무런 안내가 없고 엔딩 크레디트도 뜨기 전에 광고가 치고 들어온다. 이래서는 영화를 이미 알고 애정을 가진 극소수를 제외하면 부정적 인식만 확산될 뿐이다. <한국영화 걸작선>의 진행 섭외를 거절못한 것은, 감히 말하건대 영화에 대한 존경을 갖고 필름을 원형대로 보여주는 것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유일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같은 경비로 텔레시네를 새로 뜨고 극장 협찬으로 촬영을 하고 원로 영화인들 인터뷰를 따는 데 모든 스탭이 인건비 개념없이 일하고 있다. 가끔은 레터박스로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내보내면 “왜 가려서 보여주냐”고 항의하는 어르신도 있다. (웃음) 이 프로그램의 예기치 못한 수확은 워낙 판권 섭외가 어려워 가능한 영화를 다 틀다보니 라이브러리가 완벽했다면 간과했을 영화 중에 보석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이번 부천영화제에서도 상영되는 <아! 백범 김구 선생>의 전창근 감독님 영화에서 대단한 진정성을 보았고, 임권택 감독님이 20대에 만든 영화, 유현목 감독님의 코미디를 보는 재미도 대단하다. 영화한다는 사람으로서 창피하지만 허장강이라는 배우가 세계 영화사를 통틀어 최고의 배우임을 재발견했고 김지미, 전계현 같은 옛날 여배우들의 매혹도 발견했다. <한국영화 걸작선>을 통해 영화인협회의 원로 영화인들이 당신들의 작업에 대해 몸담았던 한국영화의 시대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화상 같은 영화를 한번쯤 찍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의 자전적 이야기라기보다 내가 자란 시대가 제대로 대변된 걸 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였다. 무시험 고교 진학 세대로서는 전혀 모르는 1970년대 후반 일류 고등학교의 문화를 그려보고 싶다. 하도 엘리트 의식을 주입해서 축구를 해도, 놀아도, 예술제를 해도 꼭 일등하고 잘해야 하는 아이들에겐 참 재미있는 면이 있었다. 반마다 작은 예술가들이 있었고 나는 그런 애들을 동경하며 <종합영어> 대신 <한국회화 소사>를 학교에서 읽던 ‘딜레탕트’였는데, 문학상 휩쓸고 나팔 불던 친구들도 다들 의사가 되고 법관이 됐다. 동창회에 가면 나는 연예계 대표 인사 대접을 받는다. 아마 장르는 코믹멜로 판타지가 될 것 같다. (웃음)

[News] 출발! 환상특급여행!

고루한 일상의 전복과 탈출. 무한한 상상력과 도발적인 영화적 감성으로 관객을 낯선 환타지의 세계로 안내하게 될 제5회 부천 국제 환타스틱 영화제가 11일 오후 7시 전야제를 서곡으로 9박 10일간의 여름 환상여행을 시작한다. 11일 오후 7시 부천 중앙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리는 전야제에서는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추억의 영화음악과 팝과 클래식, 재즈가 어우러진 퓨전 음악을 들려준다. 콘서트가 끝나는 밤 9시부터는 부천 시청 야외 잔디광장에서 석래명 감독의 <고교얄개>(1976)를 무료 상영해 이번 영화제를 가족 축제의 마당으로 자리매김한다. 7월12일 오후 7시 부천 시민회관에서 원혜영 조직위원장의 환영사와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임창열 경기도 지사의 축사로 팡파레를 울리는 개막식은 영화팬에게 친숙한 방송인 홍은철, 배유정의 사회로 진행될 예정. 부천 필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자우림’의 김윤아가 <인디안 썸머> 주제가를 공연할 개막 잔치에는, 임권택, 박찬욱 감독과 제작자 이태원, 배우 최지희, 안성기, 문성근, 최종원, 유호정, 김석훈이 한국 영화계를 대표해 참석하며 부천 초이스 장편 부문의 심사위원인 로이드 카우프만 감독, 마지드 마지디 감독도 함께 한다. 신작 작업으로 방한하지 못한 개막작 <레퀴엠>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도 8시 개막작 상영에 앞서 영상 메시지로 부천 시민과 인사를 나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총 35개국 140여편(장편:75편/단편:65편)의 영화가 다섯 섹션으로 나뉘어 상영된다. Let’s go! Pifan 2001 The 5th PiFan will open its curtains at 7 o?lock on the 11th with a Pre-opening ceremony. The Puchon Philharmonic Orchestra will play a fusion mix of original sound tracks from the past, pop music, classic and jazz at the Puchon Central Park Outdoor Music Hall. After that at around 9 pm, director Seok Rae Myung? will be shown for free, making the atmosphere all the more ?amily?festive. The opening ceremony will ba held in citizen hall, at 7 o?lock on the 12th. Won Hye Young, the chairman of the PiFan organizing committee will give his welcoming speech, Puchon? Phil String Orchestra and Kim Yun Ah, singer of ?aulim?will perform ’s theme song that very night. Director Lloyd Kaufman and Majid Majidi who will judge the Puchon Choice Feature films will be there. Darren Aronofsky? opening film ?equiem for a Dream?will be screened at 8 and the director will greet the citizens of Puchon via videotaped message before the actual screening. This year? festival will deliver 140 films (75 feature films/ 65 short films) from 35 countries divided into 5 sections.

<슈렉>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전략 [3]

원더키드, 마침내 마법을 훔치다 <슈렉>의 영주 파콰드는 악당이다. 게다가 키가 아주 작고 얼굴은 큰데 매우 못생겼다. <슈렉> 시사회가 열린 직후부터 파콰드의 모델이 디즈니 회장 마이클 아이스너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미국의 점잖은 언론들도 이를 앞다퉈 보도했다. 아이스너를 골려먹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미국 언론의 단정적인 태도가 좀 의아스럽다. 물론 <슈렉>이 흉한 외모를 찬미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과시하면서도, 유독 파콰드의 작은 키만은 계속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게 수상쩍긴 하지만. 어쨌거나 미국 언론의 호들갑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슈렉>의 제작자이며 드림웍스의 실질적인 리더 제프리 카첸버그와 마이클 아이스너의 30년 묵은 애증관계를 목격해왔다. 1999년 5월에는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상대로 낸 2억5천만달러(추정액)짜리 소송에서 승소한 일도 있다. 무엇보다 눈부신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추앙되다가 아이스너와의 불화로 디즈니를 뛰쳐나온 카첸버그로선 디즈니와 아이스너를 제압하려는 욕망을 떨치기 힘들 만했다. 카첸버그는 갖가지 인터뷰에서 파콰드와 아이스너의 닮은꼴에 대해선 “난센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드림웍스)에게 없는 것은 디즈니가 종종 이뤄온 흥행기록 경신”이라며 날선 경쟁심을 감추지 않았다. <슈렉>은 카첸버그에게 드림웍스 7년의 어떤 성과보다 큰 기쁨을 준 선물이 될 만하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것도 영광이지만, 경쟁작인 디즈니의 <아틀란티스>가 1986년 이래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기록하는 동안 <슈렉>은 흥행수익 2억달러를 넘기면서 올 여름 박스오피스 챔피언 자리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카첸버그는 자신의 주전공인 애니메이션으로, 도저히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던 애니메이션 왕국을 함락시킨 셈이다. 물론 승부는 단판이 아니며 디즈니는 재역전을 이룰 만한 내공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1998년 <개미>가 디즈니의 <벅스 라이프>의 아이디어 도용이라는 의심을 샀고 지난해 <엘도라도>가 실패하면서 체면을 구겼던 카첸버그로선 이번의 역전승은 그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간지 <인더스터리 스탠더드>는 ‘미키 마우스의 최악의 악몽’이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썼다. “카첸버그는 디즈니와 갈라선 뒤부터 이 마법의 왕국에서 마법을 훔치려고 애써왔다. <슈렉>으로 마침내 그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카첸버그&아이스너, 세기의 복식조가 되기까지 1950년 뉴욕생인 제프리 카첸버그는 영악한 소년이었다. 뉴욕 시장 후보로 나선 공화당 정객 존 린제이의 선거운동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게 14살 때였으니 세속적 성공에 놀랄 만큼 일찍 눈뜬 셈이다. 카첸버그는 지속적으로 린제이 진영에 참여했고 선거자금을 관리할 정도로 린제이의 신임을 얻었지만, 린제이가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닉슨에게 패하자 그는 현명하게도 쇼비즈니스로 눈을 돌렸다. 카첸버그는 처음엔 에이전트가 될 생각으로 인터내셔널 페이머스 에이전시에 잠시 들어갔다가 1년 만에 관두고 24살 때 파라마운트의 젊은 사장 배리 딜러의 조수로 들어갔다. 2년 뒤 배리 딜러는 또다른 젊은 인재 마이클 아이스너를 ABC에서 스카우트했다. 할리우드를 떠들썩하게 만들 두 수재의 파트너십은 이렇게 시작됐다. 배리 딜러의 지휘 아래 76년 파라마운트는 1년 만에 흥행실적 1위의 스튜디오가 됐고, 카첸버그는 고속승진을 거듭하며 마케팅 담당, 텔레비전 담당을 거쳤다. 마침내 <스타트렉> 시리즈의 영화화 임무가 그에게 떨어졌다. <클로스 인카운터> <스타워즈> 등 다른 스튜디오들의 성공적인 SF에 파라마운트가 자극받은 것이다. 카첸버그는 최초 예산 1800만달러를 들고 고집세고 늙은 배우들, 특수효과 경험이 전혀 없는 감독 로버트 와이즈와 악전고투를 벌여가며 스케줄대로 제작을 마쳤다. 그러나 제작비는 4500만달러로 치솟았다. 당시 평균제작비가 1천만달러 정도였으니 경영 재난이 우려됐지만, <스타트렉>은 8천만달러를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둬 원더키드 카첸버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리스2>의 실패 이후 제작담당 이사 돈 심슨이 밀려나자 82년 카첸버그가 어린 나이에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일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아이스너의 마스터플랜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둘의 파트너십은 <레이더스> <사관과 신사> 등을 잇따라 성공시켜 파라마운트의 기세를 80년대 초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84년 배리 딜러가 갑자기 20세기폭스로 자리를 옮기자, 아이스너는 디즈니 회장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고 망설임 없이 34살에 불과한 카첸버그를 디즈니의 스튜디오 책임자로 기용했다. 당시 디즈니는 쇠락해가는 왕국이었다. 실적에서 메이저 중 말석을 못 면했고, 테마파크의 수입도 뚝 떨어져 기업사냥꾼들의 인수합병 메뉴 앞머리에 오르는 신세가 됐다. 당시 디즈니엔 디즈니 순수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전통파들이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디즈니 테마파크에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존스>의 테마를 들여오자 “월트라면 그런 꼭두각시를 빌리는 짓은 하지 않으며 오히려 캐릭터를 창조해낼 것”이라며 반발할 정도로 66년에 사망한 창업주 월트 디즈니에의 향수에만 빠져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천재 디즈니의 비밀>이란 책에서 한 직원은 “외부인이 들어와 우리의 뺨이라도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들의 뺨을 때려 정신들게 한 외부인이 다름 아닌 아이스너와 카첸버그였다. 디즈니 재건작전, 200% 성공 카첸버그 같은 사람을 상사로 모시고 사는 일은 누구라도 선뜻 반기기 힘들 것이다. 아침 6시에 출근하기, 일요일에도 일하기, 툭하면 회의하기, 없던 일 만들어내기가 그의 습관이요 일과였다. 디즈니영화가 개봉하면 직원들은 전국의 상영관을 돌아다니며 로비 장식까지 점검해야 했다. 디즈니의 신화와 자존심을 복원한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그는 존경만 하기엔 너무 ‘위협적인’인물이었다. <…디즈니의 비밀>에 따르면 94년 그의 사임이 알려지자 “사내의 많은 이들은 카첸버그와의 이별을 마치 자전거에서 연습용 바퀴를 떼어내는 것처럼 느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임을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다른 사람들에겐 그는 “없으면 불편한 자연의 힘”이 됐다. 그를 따르는 수십명의 직원들은 그와 함께 드림웍스로 옮겨갔고, 남은 직원들도 몸값이 뛰어오르는 망외의 기쁨을 누렸다. 이 덕에 카첸버그는 잠시나마 디즈니 애니메이터들 사이에서 ‘성자 제프리’로 불렸다. 카첸버그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소생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인어공주>를 비롯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으로 이어지는 히트 행진은 추억의 레퍼토리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당대의 팝 아이콘이란 명예를 돌려주었으며, 디즈니는 아이스너-카첸버그 체제가 들어선 지 10년 만에 최고의 메이저 자리에 올랐다. 디즈니의 전통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변화한 대중의 감각을 민감하게 반영한 까닭이다. 좀더 자연스럽고 빨라진 동작의 캐릭터들엔 X세대의 발칙함이 가미됐고, 흥겹고 모던한 음악과 굽이치는 이야기의 재미는 어른들까지 매혹시켰다. <가디언>의 앤드루 풀버는 <제시카와 로저 래빗>(1988)이 카첸버그 이력의 분기점이라고 말했다. 음모가 판치는 이야기에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절묘하게 결합하면서도 결국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판타지를 찬미하는 이 획기적인 영화는 애초 예산을 두배나 초과하는 고투 끝에 완성됐다. 이 일을 통해 카첸버그는 자신의 일, 특히 애니메이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의 구상을 처음부터 싫어했던 아이스너는 카첸버그와 “미친 듯한 언쟁”을 수차례 벌였고, 이 세기의 복식조에 심각한 이견이 있음을 드러냈다. 어쨌거나 외적으로 두 사람의 디즈니 재건작전은 완벽한 성공 가도를 달려갔다. 특히 <라이온 킹>(1994)은 미국 박스오피스에서만 3억12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려 카첸버그 이력의 정점을 이뤘다. 카첸버그는 실사영화에서도 거의 실패를 몰랐다. <귀여운 여인> <시스터 액트>는 저렴한 제작비에다 발랄한 컨셉으로 모두 극장수익 1억달러를 훌쩍 넘겼으며, 반디즈니적인 영화 <펄프 픽션>에까지 손대 칸 황금종려상과 흥행 대박이라는 믿기 힘든 성과를 낚아올렸다(미라맥스와 디즈니 자회사 터치스톤이 공동제작한 <펄프픽션>은 카첸버그로서도 선뜻 응하기 힘든 프로젝트였다. 미라맥스의 와인스타인 형제가 이 프로젝트를 설명했을 때, 카첸버그는 “20분 동안 웃었다”고 한다). ‘디즈니’를 벗어나, ‘디즈니’에 맞서다 1994년 10월 카첸버그는 디즈니를 나와 최고의 흥행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음반업계의 거두 데이비드 게펜과 자타공인의 ‘드림팀’을 구성 드림웍스를 창립했다.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떠난 이유는 아이스너 회장의 암묵적 불신임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담당 사장이던 넘버2 프랭크 웰스가 헬기 사고로 사망했는데도, 아이스너는 넘버3 카첸버그를 승진시키지 않고 자신이 웰스의 자리를 접수한 것이다. 19년의 파트너십이었지만 카첸버그가 아이스너가 더이상 다루기 힘든 거물로 성장한 까닭으로 관측됐다. 결국 넘버2와 3을 한꺼번에 잃은 아이스너가 충격으로 심장질환을 앓다 채식주의자가 됐다는 후일담도 있다. 카첸버그는 제작수입의 2%를 보너스로 준다는 약정 불이행을 근거로 디즈니를 고소해 아이스너의 상처를 깊게 했다. <엘도라도>를 빼면 드림웍스에서 카첸버그가 제작한 <개미> <이집트 왕자> <치킨 런>은 일정한 성공을 거뒀지만 디즈니 시절의 위업에 비하면 아무래도 왜소했다. 드림웍스의 <딥 임팩트>가 디즈니의 <아마겟돈>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먼저 개봉했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이 패턴은 <개미>와 <벅스 라이프>에서도 반복됐다. 디즈니가 의구심을 제기하고 카첸버그는 “허위사실 유포”라고 맞섰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드림웍스의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긴 힘들었다. 소송까지 겹쳐 아이스너와 카첸버그는 돌이킬 수 없는 앙숙이 된 것으로 비쳐졌다. 둘 중에서도 내로라 할 만한 독창적 작품을 못내놓고 있던 카첸버그의 심기가 더 불편했을 것이란 짐작을 하기란 어렵지 않다. 스필버그가 관여한 실사영화 <아메리칸 뷰티> <글래디에이터>가 작품성과 흥행에서 성가를 드높였다는 것도 초조해할 만한 일이었다. 총제작기간 5년이 걸린 <슈렉>이 칸에 초청되자 카첸버그는 “나는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를 휩쓰는 것보다 칸 경쟁에 진출한 게 훨씬 영광스럽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아이스너의 디즈니는 피터 슈나이더 사장을 해임하고 애니메이션 예산을 25% 삭감하는 등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7년 전 드림웍스가 창립될 때 <타임>의 리처드 콜리스는 “1920년대의 디즈니 이후론 어떤 메이저도 새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만일 이 규칙을 깬다면 그건 카첸버그 팀일 것이다”라고 썼는데, 콜리스의 예측은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휘봉은 카첸버그가 쥐고 있다. 디즈니에서 일하던 91년 초 카첸버그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멘털리티가 위험수위다. 예전처럼 온건하고 스토리 중심의 영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내부용 메모를 돌렸다가 외부로 유출돼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스튜디오 책임자에 의한 최초의 블록버스터 마인드 반성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지만, 그 메모가 대작화 경향을 되돌리진 못했다. 메이저로 군림한다 해도 드림웍스라면 80년대 이후의 스튜디오들이 피하지 못한 대물숭배의 위험에 쉽게 빠질 것 같진 않다. 카첸버그는 그의 파트너 스필버그와 마찬가지로 아주 단단하고 알뜰하게 그리고 다양한 메뉴로 승부하고 있다. 관객으로서도 이 편이 훨씬 재미있다. 그러고보면 카첸버그는 이제야 아이스너의 진정한 라이벌로 우뚝 선 셈이다.

할리우드 여전사 나가신다!

‘저리가, 이년아!’(Get Away, Bitch!) 우리 모두는 이 대사를 알고 있다. 시고니 위버가 <에이리언2>에서 번득이는 안광으로 에일리언에게 주문을 퍼부었을 때, 그것은 곧바로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전사의 동굴로 가는 ‘열려라 참깨!’의 마법이 되었다. 지나 데이비스나 데미 무어 같은 당대의 스타들은 기꺼이 긴 머리채를 자르고 포화 자욱한 연병장으로 달려나갔고, 이윽고 그녀들의 경력은 현재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성차와 그 재현에 관한 한, 2001년 할리우드는 더욱더 요지경 속이 되어간다.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가 맨발에 피에 젖은 러닝셔츠를 벗어던지고, <키드>나 <스토리 오브 어스>에서 다감한 윌리로 변모하는 사이, 천하의 멜 깁슨은 스타킹을 신고 여자들의 심리를 연구하겠다고 호들갑을 떤다. 한편 <와호장룡>의 멋진 언니들- 양자경과 장쯔이는 주윤발을 사이에 둔 한판 승부를 이미 끝냈으며, 안젤리나 졸리는 자신의 집 천장에 매달아놓은 번지점프 줄로 이소룡 버금가는 이단 옆차기를 선보인 상태이다. 여성전사의 이미지는 어쩌면 섹슈얼리티와 시선의 권력, 관객의 동일시라는 고전적인 영화이론이 아직도 유용하다는 하나의 증명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50년대 최초의 페미니스트 서부극 <쟈니 기타>에서 조앤 크로퍼드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메르세데스 매캠브리지와 희대의 여성 대 여성의 결투를 벌였지만, 당시 이 대결에 환호하는 여성관객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올 여름, 전세계 관객은 팝콘을 먹으며 남자들의 어눌하고 단순한 동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화려한 발레 액션을 펼쳐보이는 미녀들의 대결에 숨죽일 것이다. 국내에서도 개봉된 영화 <미이라2>에서 레이첼 와이즈와 패트리샤 벨라스케즈는 숨이 멎을 정도의 우아한 금빛 대결을 펼치는데, 이러한 여전사간 혈투는 첨단의 CG나 또다시 떼로 몰려드는 딱정벌레들에 비할 바 되지 않는 <미이라2>의 백미이다. 물론 2000년대 여전사들이 외우는 새 주문은 80년대 초반의 시고니 위버의 ‘저리가, 이년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세대 감각이 반짝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사 새계명 하나. 괴물 대신 남자와 싸운다 2001년 여름, <툼레이더>에는 순수한 의미에서 <배트맨>의 캣 우먼 같은 사악한 여성 타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안젤리나 졸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는 상대는 남자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여성전사들이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하지 않고 ‘인간’ 혹은 ‘남자’들과 싸운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여성전사가 등장하는 1980년대 초반, <에이리언1>이나 <터미네이터1>에서, 시고니 위버와 린다 해밀턴은 모두 남자도 여성도 아닌 괴물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남성성기와 여성성기를 모두 지닌 에일리언은 어쩌면 에이즈시대의 타락한 우주 자궁에 대한 증후이자 변장한 모습으로 기어나온 또다른 백설공주의 마녀, 또다른 여성 타자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이러한 여성타자와의 간극은 좁혀지기 시작한다. 90년대는 여성전사들에게 순수한 혼돈과 악몽의 시기였다. 폭탄을 둘둘 감은 샌드라 불럭은 키아누 리브스 앞에서 어린애처럼 줄줄 짜고, <컷스로트 아일랜드>에서 남장을 한 지나 데이비스는 악당의 목 대신 자신의 성대를 자르는 부적절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롱키스 굿나잇>에서 그 지나 데이비스는 기억상실증과 사만다/찰리 즉 어머니/첩보원이라는 분열된 이중의 여성정체성에 시달리기도 한다. 90년대 여전사의 혼돈의 악몽은 뭐니뭐니해도 데이비드 핀처의 <에이리언3>일 것이다. 에일리언이 임신한 리플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저 유명한 에일리언/리플리의 투숏은 여성전사의 거울상으로의 에일리언을 형상화한다. 에일리언은 내부에서 나온 것이다. 세 제곱된 <에이리언> 속편에서 시고니 위버가 싸워야 했던 것은 자신의 육체였고, 몇년 동안 여자 구경 한번 못해 본 28명의 남성들이었다. 둘. 모성 이데올로기는 거부한다 또한 80년대 여전사들은 아무리 알통 굵기를 자랑해도 여전히 어머니들이었다. 어머니=강한 여성이라는 가치는 일종의 여성의 강인함을 모성 이데올로기의 그물을 통해서 저울질하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초창기 여성전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불가리지 않는다. <에이리언>의 여전사 리플리에게는 유사 자녀인 뉴트가 있으며, <터미네이터1>에서 린다 해밀턴은 지구를 구할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 아니, 90년대 후반에도 <롱키스 굿나잇>의 지나 데이비스에겐 악당한테 납치된 딸이 있다. 또한 초창기 여성전사의 대모들은 흥미롭게도 남성동료들의 죽음으로 실질적인 보호막과 처녀막 모두가 없어져야 본격적인 여성전사의 행보를 내딛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에이리언>과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거쳐 확대되는 여성전사들의 남성성은 신성한 어머니라는 면죄부에 의해 설득력을 얻고, <터미네이터2>의 사라 코너는 망해 가는 지구를 위해서 정신병원에 갇히면서도 지구 종말을 대비해 싸우는 단 한명 남은 근육질의 성모로 격상된다. 80년대 뮤직비디오 속 마돈나의 어떤 면과 정확히 겹치는 이러한 이미지는,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어갔다. 당분간, <미녀 삼총사>의 카메론 디아즈나 안젤리나 졸리가 ‘애들이 커졌어요!’라며 소리지를 일은 없지 않을까? 셋. 내 갈 길은 내가 결정한다 94년 나온 <스피드>에서 폭약에 둘둘 말린 샌드라 불럭에게 악당 역의 데니스 호퍼는 이렇게 말했다. “안심해. 니가 여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야.” 섹슈얼리티와 희생자라는 전통적인 맥락에서 할리우드 여전사들에게 일격의 한방을 가한 영화는 저 멀리 홍콩에서 날아들었다. 스스로 액션 히어로가 되기를 원한 <와호장룡>의 양자경과 장쯔이는 기술적인 면에서나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 할리우의 여전사의 이미지에 화룡점정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와호장룡>의 장쯔이는 더이상 니키타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총을 들어야 하는 가련한 여자가 아니라 스스로 무협 고수가 되고 싶어하는 자기 결정적인 액션 히어로이다. 장쯔이는 기존의 <스피드>나 <트위스터> 같은 영화에 나오는 샌드라 불럭과 헬렌 헌트의 톰 보이 이미지- 다 자라지 못한 여성, 그래서 필연적으로 남성 파트너의 조력을 얻어야 하는 위치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주막터의 싸움에서 혼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시험해 본다. <와호장룡>의 순수 여전사들의 등장은 이전의 호러영화 장르나 이후의 액션영화에서 벌어지는 희생양(victim)의 가능성에서 여성전사들을 완전히 거두는 어떤 계기가 되었다. 2000년 들자 여성전사들에게도 이윽고 액션영웅으로의 완벽한 독자성과 영웅으로서의 판타지가 찾아든 것이다. 2000년대 여전사들은 말 그대로의 여신이다. 넷. 섹시하되 섹스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90년대 중반의 데미 무어나 지나 데이비스가 여성전사로 실패한 까닭은 바로 지나친 여성성의 거세에서 출발되었다고 진단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90년대는 시너드 오코너를 비롯해 데미 무어, 시고니 위버 등 여전사들의 삭발시대였다. 이제 와서는 얼굴에 멍이 들고 피 흘리는 카메론 디아즈나 안젤리나 졸리를 상상할 수는 없지만 당시 <커리지 언더 화이어>의 멕 라이언이나 <지 아이 제인>의 데미 무어는 뽀얀 운동장의 먼지와 땀 속에서 온갖 고생 끝에 자신의 기존 스타 이미지를 혹은 섹슈얼리티를 거세시켜나갔다. 이들은 장 클로드 반담이나 스티븐 시걸류의 ‘걸어다니는 거대한 알통’을 따라하려다 자멸해간 것이다. 관객 특히 여성관객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냉담했다. 지나 데이비스가 피를 철철 흘리며 총을 들었을 때, 데미 무어가 해병대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 지 아이 제인이 돼갈 때, 그녀들은 남성들과 피 흘리게 경쟁하고 상처입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여성성은 ‘약한 것, 지는 것, 열등한 것’을 의미했는데, 끝끝내 혹독한 해병대 훈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데미 무어에게 같이 훈련을 받는 흑인 병사는 이렇게 대꾸한다. “넌 뒤늦게 도착한 또다른 흑인과 같아. 너무 늦게 이사를 왔지.” 그런데 여성성을 도려내면서, 그들의 스타 이미지도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2000년이 되자, 여성전사들은 진흙탕에서 뒤엉켜 싸우는 대신 이제 ‘여신’이라는 여성 판타지의 위치에서 액션 영웅을 거두어들인다. 2000년 겨울 개봉한 <미녀 삼총사>의 흥행전략은 세명의 여전사 카메론 디아즈, 드루 배리모어, 루시 리우의 늘씬한 몸매에 여성 007의 이미지를 이식시키는 것이었다. 본드걸들이 본드맨들의 그림자 주변을 맴도는 사이, 이들은 <매트릭스>의 최첨단 CG방식으로 남자들을 일격에 쓰러뜨린다. 2000대의 여성전사들은 그만큼 화려하다. 최첨단 무기, 쭉쭉 빵빵한 몸매에, 배트맨이 지녔던 남성 집사까지 부리고 막대한 부와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기도 한다. 막강 여전사 라라 크로프트는 이전의 어떤 여성 영웅도 도달할 수 없는 흠집없는 여성전사 그 자체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교정된 폭력 변화하는 여성전사들에 대해 여성관객은 늘어가는 박스오피스상의 지각 변동으로 화답하고 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쭉쭉 빵빵한 2000년대의 여전사들은 지금까지 남성관객 전유물로만 여기던 액션영화에 여성이라는 새로운 관객을 줄서게 만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2000년대 여성전사들이 여성관객에게 어떤 심리적 만족감이나 보상심리뿐 아니라 실질적인 여성 정체성에 변화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SF와 액션영화를 적당히 비빔밥하여 남성들의 눈요기를 충족시켰던 <바바렐라>의 제인 폰다나 라켈 웰치류의 백치미인형 여성전사도, 물신화된 근육이 그대로 남성성을 보장하는 여자 장 클로드 반담도 아니다. 새로워진 여성전사들의 대공포화 속에서 90년대를 풍미했던 화장도 거의 안 한 비쩍 마르고 유약한 기네스 팰트로 타입의 여성들이 할리우드를 점령하던 시절은 끝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학적인 면에서 보면 적어도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어도, 공격성이라는 행동이 남성하고만 연합되어 있다는 성적인 편견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조지타운대 사회학 교수 수잔 월터즈는 <보스턴 헤럴드>에 확신에 찬 여전사의 당당한 행동을 ‘정치적으로 교정된 폭력’이라고 명명했다. 90년대 텔레비전 시트콤에서 로잔 바가 오천평 같은 몸매로 착한 여성 혹은 예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행동을 파괴하면서 정형화한 이상적 여성성에 파격을 가하던 것과도 달리, 이들은 로잔의 자해적인 방식을 피하면서도 여성관객에게 빈약하고 비쩍 곯은 보이시한 양성성 대신 건강하고 싱싱한 육체를 소유한 양성성도 꽤 세상을 헤쳐나갈 만하다는 확신과 환상을 동시에 심어주고 있다. 과연 여전사들은 페미니스트의 원군인가 그러나 이러한 여전사의 뇌쇄적인 매력에 대해 모든 여성 평론가들이 두손 들어 환영하고 있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새로워진 여성전사들의 화려한 액션과 몸매가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진정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여성전사의 변화에 더 커다란 심리적인 혜택을 얻는 것은 바로 남성들임을 지적하면서 여성전사의 이미지가 여성의 몸과 마음을 이중구속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일례로 남성관객은 라라 크로프트에게서 강한 여성에게 보호받고 싶은 본능과 싱싱한 여성 육체에 대한 관음증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 오히려 2000년의 또다른 안젤리나 졸리들은 과거 신데렐라가 착한 여성 콤플렉스를 만들어냈듯, 여성들로 하여금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양산시키고, 액션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과 사회적 성취를 혼동시킬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이 여성전사들은 ‘섹시하되 섹스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략은 성적 관심을 끌되 성 행동은 억압한다는 1900년대 초반 히스테리 환자들의 전략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여성 영화평론가 바버라 크리드는 90년대 여성전사들의 무성적 전략과 관련, 그들의 양성성이 레즈비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바버라 크리드는 여성전사의 몸을 lesbian body라 명명했다) 동성애 공포에 사로잡힌 주류사회에서 이러한 여성전사의 몸은 공포와 매혹의 근원이라고 분석한다.(<에이리언3>에서 리플리의 몸은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남성 판타지 안에서 재구성된 또다른 괴물일지도 모른다.) 2000년대 여성전사의 강화된 섹슈얼리티는 궁극적으로 여성전사의 계보상에서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퇴행의 기미라고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 할리우드 여전사 나가신다! ▶ 여전사 캐릭터 열전 심영섭/ 영화평론가

아버지 명연기 3인 3색 [3] - 주현

허한 어깨 위에 희비극이 내려앉다 주현씨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시청각을 총동원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자면, 우린 금새 참새떼처럼 모여 침이 흐르는지도 모른채 이야기에 빠져드는 벌거숭이 아이가 되어 버린다. “최신식 월남장비는 우리한테만 지급되었거덩…” 하는 장교 시절 ‘JSA’이야기부터 “사실은 찰턴 헤스턴이 말이야…”로 이어지는 <벤허>의 캐스팅 비화까지, 짐짓 비장한 듯 적당히 씰룩거리는 입선에, 묘한 서울사투리에, “뚜뚜뚜뚜…” “쏴∼아” “캬∼아” ”하∼아” 같은 추임새를 적절히 섞어쓰면서 그는 쉴새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상한 것은 얼핏 방대하고 정신없는 듯 한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하나의 ‘극’을 본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정확한 ‘야마’(포인트)를 결코 놓치지 않는 화술은 살며시 줌인으로 들어갔다가 어느새 줌아웃이 되어 빠지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 속도감과 조바심을 내게 만드는 교묘한 긴장과 반전 속에 마지막 한방, 물기어린 감동적인 한 마디를 향한 호흡을 남겨둔다. 이런 주현의 이야기 방식은 그의 연기방식과 참 많이도 닮아 있다. 탁구 코미디론과 원초적 팔자 연기론 한바탕 질펀한 섹스신으로 시작되는 <해피엔드>의 오프닝 시퀀스가 끝날 무렵, 침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잔뜩 긴장했던 관객에겐 무심하게 등장하는 헌책방 주인 주현의 존재는 고마울 정도다. 구석에 앉아 연애소설만 탐닉하는 최민식을 향해 “여그가 구멍가게여 뭐여, 만화가게여? 양복은 멀쩡하니 입고 다니면서…”라고 질책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헌책방 주인 주현은 그렇게 겨우 3신이지만 매번 아슬아슬한 불륜과 치정 사이에 숨가쁜 영화의 호흡을 달래준다. “딸애가 안 해주면 안 된다고 해서 그러마 했는데, 워낙 작은 역할이라 헐 게 있어야지. 하지만 작은 역이라도 연기란 게 그 사람의 지금만 생각하고 하는 거랑 그 사람의 전 시간, 그 사람의 어제를 생각하는 거랑 큰 차이가 있거든.” <친구>의 준석 아버지 역시 신의 수가 그 존재감과 비례할 수 없음을 증명시켜준 경우였다. 지방 조직 보스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서서히 기세가 꺾여가는 ‘아버지’. 살가운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던 무뚝뚝한 그 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길을 가기 위해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한참을 응시한다. 보스라 해도 변변한 양복 한번 입을 일 없이 줄곧 러닝셔츠와 ‘추리닝’ 차림으로 주현은 채 두줄이 넘지 않은 각 대사 속에 영화 내내 친절하게 설명되지 못했던 그 아버지의 역사를 가늠케 만든다. “그림이 오래 그렸다고 잘 그리는 건 아니잖아. 배우도 그래. 똑같이 가르치고 똑같이 배워도 달라. 타고나는 거야. 거울을 보면 어떻게 이 얼굴 가지고 배우를 해먹었나, 하는 생각을 해. 만날 술처먹어서 얼굴 퉁퉁 붓고 머리통도 크지. 배때기는 나왔지. 그런데 뭐 연극 출신도 아니고 연기를 학교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런데 삼십몇년간 연기하면서 밥먹고 살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연기는 팔자야, 원초적인.” 정말 배우가 되라는 ‘팔자’였는지 그의 배우 데뷔도 우연찮게 다가왔다. GP장교 출신인 그는 제대 뒤 임학송 감독의 ‘월남드라마’의 자문관으로 베트남길에 올랐다. “배우들에게 시범 보여주는 모습에서 끼가 보였었나봐.” 자문비에서 200달러 더 준다기에 덜컥 맡아버린 중대장 역할. 특유의 걸출한 입담으로 교신을 하고 “총 쏘고 뛰고 하는 게 예사롭지 않았던” 그의 연기는 시사회장에 온 KBS국장의 눈에 띄었고 주현은 당시 연수중이던 공채 9기 탤런트들과 함께 ‘특채’ 탤런트로 방송사 문을 열었다. “텔레비전이란 게 집집마다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우리 마누라는 못 산다고 집나가기도 했다니까.” 2개월간 큰 몸짓 덕에 엑스트라 장군은 도맡아하던 시절을 거쳐 70년 <사랑의 훈장>이란 드라마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군인역할을 하라면 잘하겠는데, 씨팔, 연기고 뭐고 기본이 있냐 뭐가 있냐. 고은아가 상대역이었는데 ‘사랑합니다’ 이런 게 될 리 있나. 내깐에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는데 감독은 ‘누구 잡아먹을 거냐’고 호통을 치고… 결국 즈이들끼리 작당을 해가지고 날 10회에 죽였어. 도봉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고은아 애를 살리고 내가 죽었지.” 드라마에서는 죽었지만 본인은 ‘살았다’ 싶었다. 주인공 한번 해봤으니 더이상 배우에 미련도 없었고 정치외교학 전공을 살리기 위해 외교관시험이니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있었다. “근데 이상한 게 나를 죽이고 나니까 방송사에 전화가 많이 오는 거야. ‘그 사람 연기는 못해도 순박한 데는 있었다’ 뭐 이러구, 그래서 결국 회상신을 만들더라구. 뭐 그런 거 있잖아, 뿌연 연기 속에서 아무 말 안 하고 서 있는….” “짜안… 2탄, 또 전화가 왔어. 출연하래. 제목은 <먹구름 흰구름>, 배역은 벙어리. 근데 해보니 벙어리역할이 더 힘들어, 방송사도 시켜보니 또 안 돼, 안 되겠다 또 죽여. 이번엔 장마에 어깨로 둑을 막고 죽는 거야.” 극의 1/3을 채 못 채우고 ‘죽어버린’ 배역이었지만 그의 말없는 연기는 당시 최고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 <실화극장> 작가 김동현씨의 눈에 띄었다. 신구 등과 출연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야간비행>편에서는 김동현은 주현을 모델로 대본을 쓰기도 했고 그 역시 잇단 출연과 함께 서서히 배우로 단련되어가고 있었다. “곽경택 감독이 초등학교 다닐 때 <야간비행> 보고 그게 잊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를 <친구>에 캐스팅했다고….” 이후 <등신불> <열녀문> <갯마을> 등의 TV문학관을 통해 배우 주현의 존재는 서서히 어떤 대체물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확고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코미디, 재미있지. 근데 코미디란 것은 서로가 경지에 오른 사람끼리 해야 해. 코미디는 탁구 같거든. 내가 스매싱 매길 때도 있고, 받을 때도 있고, 컷트 짜를 때도 있고, 열번 받고 한번 튀길 때도 있는 거야. 근데 배우들이 연기를 가지고 싸움을 해. 이기려구 한다구. 누구랑 연기하면서 누굴 잡아먹었다, 이겼다, 이런 게 어딨어. 그 사람 캐릭터, 생긴 거, 분위기, 다 다른 거지. 자연스러운 순발력과 내밀한 연기로 승부해야 해. 누가 먼저 나오느냐에 신경쓰고 대사를 높이고 이럴 필요가 어디 있냐고.” 이광수 원작의 TV문학관 <무명>은 그 속에 잠재된 코믹연기를 외부로 내오는 역할을 한 작품이었다. 감방의 사기꾼으로 등장해 질퍽한 사투리와 다양한 장기를 선보인 이후 ‘주현표’ 코믹은 <서울뚝배기>의 “아자씨∼ 껄랑요” 하는 능청스런 서울사투리나 <옥이이모>에서 “야, 니 몇개 묵었냐”며 이빠진 아랫잇몸을 드러내는 풀빵장수, 전과 12범의 ‘간큰’ 도둑 <도둑의 딸>로 이어졌다. “너무 정신차리고 사는 인간을 보면 저게 배운가 싶어? 너무 약고, 너무 완벽하게, 너무 계산하고 가는 건 모사지 배우가 아니야. 풀어질 때는 정신없이 풀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 계획하고 짠 것 같은 연기는 순발력있는 연기를 대면 못 당하지.” 그러나 그의 코미디는 결코 가볍고 얕은 유행어나 ‘개인기’의 늪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것은 예의 코믹한 표정이 숨쉬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배반하는 뒷모습 때문이다. 100kg이 넘는 큰 몸짓에 드리우는 응당 크고 먼 그림자. 그 어깨가 드리우는 ‘허’한 중년의 풍경은 주현에겐 묘한 상실의 이미지를 만든다. 엉뚱하고 코믹한 역할 속에서도 상처한 남자, 자식 잃은 아버지, 버림받은 외사랑의 아픔이 종종 묻어나는 연유도 다 그 뒷모습 때문이다. 배우혼이 실린 뒷모습 “구라와 허풍 빼면 시체”라며 혼을 쏙 빼놓는 이야기솜씨와 유머를 늘어놓다가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나누던 대사를 풀어놓으며 금세 두눈 가득 눈물이 고이는 배우. 세 아들의 아버지이자 양어장 주인인 ‘강태걸’로 분할 새 주말드라마 <아버지와 아들>과 젊은 형사 김민종, 임원희를 조율하는 묵묵한 형사반장으로 나오는 영화 <이것이 법이다> 등을 통해 올해 예순의 배우 주현은 아직도 할말이 너무나도 많은 듯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조감도와 세밀도, 희극과 비극을 앞뒤로 품고 있는 이 배우의 이야기를 거부할 힘이, 전혀 없다. 내가 본 선배 주현 “절대 대본을 들고 다니시지 않는다” <해피앤드>에서 헌책방은, 허구와 현실이 부딪히는, 즉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기획단계부터 꼭 주현 선생님이 하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하셨는데 따님이 나와 대학동기라는 ‘학연’(?)을 이용하여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다. “정 감독, 이사람, 그냥 폐지수집하다 늙은 사람이 아니야. 인텔리야, 몰락한 인텔리….” 대사 중에 책방 주인이 소설가가 내놓은 헌책 꾸러미를 들고 오면서 “글쓰는 놈이 책이나 팔아먹고…”하며 욕하는 부분이 있는데, 캐릭터가 응축된 대사라고 생각하고 쓴 부분이었다. 사실 그냥 장사꾼이라면 좋은 책이 나온다는 건 좋은 일 아닌가.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대사 속에서 주현 선생님은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계셨다. TV 연기에 익숙해져 있는 경우엔 좋은 연기자들에게조차 종종 이상한 습관 같은 걸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주현 선생님은 매체와 상관없이 안정된 연기를 할 수 있는 천상배우이다. 아, 그리고 그를 만나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일 테지만 선생님은 정말 ‘내추럴 본 이빨’이다. <해피엔드>/ 정지우 감독 주현 선생님은 절대 대본을 들고 다니시지 않는다. 녹화 전날 대사를 달달 외워오시지도 않는다. 일단 처음 시놉시스 단계에서 캐릭터를 파악하시고 나면, 현장에서 그날의 분위기를 잡아나가시는 ‘현장제일주의자’시다. “혼자 공부하듯이 대본을 보는 습관도, 훈련도 안 돼 있어. 이 신에서 ‘운다’라고 되어 있어도 현장에서 눈물이 안 나오면 안 울거야. 하지만 정 울어야 된다면 미리 이야기를 해줘.” 어떤 이에게는 충분한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이런 습관이 신기하게도 선생님에겐 장점으로 작용한다. ‘주현표’ 자연스러움은 그렇게 탄생되는 것이다. <거짓말> <푸른 안개>/ 표민수 PD

배틀 로얄 Battle Royale

배틀 로얄 Battle Royale 2000년 일본 113분 감독 후카사쿠 긴지 출연 기타노 다케시 경제 불황으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하자 전통적인 가치관도 엉켜버린 근 미래. 학생들의 학교 보이콧이 늘어나며 누구도 어른을 공경하거나 신뢰하지 않자 정부는 배틀 로얄 법안을 발표한다. 이는 무작위로 중학교 한 학급을 선발해 무인도에서 3일간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법. 누구는 자살하고 누구는 살인자가 되면서 소년, 소녀들이 지옥도를 그리는 동안 아이들의 숨겨진 꿈과 애증도 드러난다. 기이한 행동의 교사를 연기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서정적 광기는 이 영화의 백미다. In the near future, the society system collapses from an economic recession, tangling its traditional values. As students start rejecting school, and none of them respect elders let alone confides in them, the government announces an act called Battle Royale According to this law, a middle school class is chosen randomly and the students are forced to kill one another on an inhabited island for three days until only one person is left. Some begin to commit suicide while others become killers. The boys and girls reveal their hidden dreams, love and hatred through drawing a map of hell. The eccentric teacher, Kitano Takeshiㄳ poetic madness is by all means the essence of this film.

<소름> 주연 장진영 “새벽4시면 악몽에 악!”

미스터리 스릴러 <소름>(감독 윤종찬, 개봉 8월4일)의 공포는 아주 새롭다. 피와 살을 흩뿌리지 않고 이야기는 느릿느릿 흘러가는 데도 신경이 쭈뼛쭈뼛 일어선다. 엄청난 공포감을 일으키는 건 주검이나 악령이 아니라, 사람들이 빚어내는 슬프고도 비비꼬인 인연과 사랑이다. 멜로로 소름 끼치는 두려움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아주 지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주연배우 장진영(27)씨가 `페스티벌 레이디'로 선정된 것은 아주 적절해보인다. 장씨는 완성된 영화를 처음 본 뒤 스태프들과 식사하러 가서 혼자 멍하니 밥도 못먹고 앉아있었다고 한다. “촬영 후반에 들어섰을 때, 한동안 새벽 4시만 되면 깨어나서는 무서워서 눈도 못감고 고통스러워했어요. 똑같은 악몽을 되풀이해서 꾸는 거예요. 그만큼 몸과 맘이 많이 황폐했는데 그런 기억이 되살아나는 바람에….” 그를 이 지경에 몰아넣었던 건 `선영'이란 캐릭터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아이를 잃어버리고, 남편의 주먹질에 시달리는 선영의 눈빛은 시퍼렇게 멍든 자국만큼 절망적이다. 단지 본능적으로 살아갈 뿐인데, 악마적 심성을 갖고 있는 용현(김명민)을 만나 작은 위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과거에 도사리고 있던 지옥같은 악연이 문제였다. 선영으로부터 벗어나려 색깔있는 렌즈를 끼어가며 스스로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중이고 다음 영화에선 반드시 행복한 배역을 하겠다지만, 장씨는 선영 덕분에 `진짜 배우'가 됐다. <자귀모> <반칙왕> <사이렌> 등에 출연했지만 거기서 그의 매력을 온전히 보기는 어려웠다.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라서가 아니라 <소름>에선 고운 외모와 달리 `터프'한 속내를, 시에프(CF) 모델의 가공된 미소가 아닌 살냄새나는 얼굴을 화면에 폴폴 풍긴다. “목소리도 그렇고 남성적이란 얘기를 많이 들어요. 실제로 터프해서 여자 같은 내숭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제가 불편해요. 하지만 여자로서의 삶이 고달플 때, <파니 핑크>(사랑도, 인생도 잘 안풀리는 여자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기분을 풀어요.” 혹시 기존 배우들을 분류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스타와 배우', `실제 생활과 연기가 같거나 혹은 딴판인 배우' 등으로 나눠본다. 자신은 어느 자리에서나 한결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한다. “97년 데뷔했으니까 늦게 시작했죠. 갓 스물 넘은 이들이 스타덤에 오르는 걸 보면서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일찍 시작했으면 천방지축이었을 거예요. 일을 제대로 해나갈 생각이 부족했을 거란 말이죠.” 그의 몸 안팎은 텔레비전이나 스크린 속보다 훨씬 단단하고 풍성해 보였다. “운동을 즐겨하고, 집에서 조용히 차 마시기를 좋아해요. 술요? 물론 좋아하죠.”

판타지 영화는 거의 종교적 체험

평화로운 교외 중산층 주택가가 악몽과 판타지의 세계로 변화는 <공포의 집>은 랜스 드리센과 클린트 허치슨이라는 두 이야기꾼의 감독 데뷔작이다. 조지아주 애틀랜타 출신의 단짝 친구인 두 감독은 단편영화와 <찰리스 고스트 스토리> <아서의 탐험> 등 아동영화를 비롯한 수 편의 시나리오를 거쳐온 시나리오 작가 출신. 190cm는 족히 넘는 거구에, 막힘없이 영화라는 꿈의 노정을 들려주는 드리센은 과연 이야기꾼이었다. 교외 중산층의 주택가를 공포의 무대로 삼았는데, 안정돼 보이는 삶의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우리도 교외에서 자랐지만, 늘 ‘모든 게 좋아 보이는데, 정말 저 문 뒤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하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원래 각본은 <납골당의 미스테리>에 나오는 묘지지기처럼 섬뜩한 캐릭터가, 미국의 각각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가 다 집에 얽힌 거고, 그 집들을 다 이웃에 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다. 시나리오 작가, 연기 강사 등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감독 데뷔한 계기는. 프로듀서인 리처드와 나, 클린트는 모두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친구들이고, 언젠가 같이 영화를 만들자고 얘기해왔다. 유니버설에서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한 적도 있는데, 큰 영화사에서는 스탭을 아주 쉽게 갈아치운다. 그래서 직접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셋은 자이언트 리프(Giant Leap)란 영화사를 만들어 영화를 찍었다. 완전히 독립적으로. 당연히 확정된 배급라인 같은 것도 없이 찍었다. 만들고 나자 반응이 좋았다. USA필름에서 영화를 샀고, 비디오와 DVD로도 잘 됐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나.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스타워즈>나 <미지와의 조우>같은 영화를 봤다. 둘다 77년에 개봉됐고, 난 십대였는데, 너무 아름답고 황홀해서 거의 종교적인 체험에 가까웠다. 와,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걸 하고 싶어, 그랬다. 그때는 정말 판타지 영화를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겐 최고의 시대였다. 살아오면서 사랑하고,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어떻게든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굉장하다. 새 작품은 어떤 영화인가. . 성경의 묵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따왔지만, 물론 종교적인 영화는 아니다. 액션 스릴러, 서스펜스 SF물이다. 환경주의자인 테러리스트(ecoterrorist)에 대한 액션 영화이고, 현재 각본을 쓰고 있다. 황혜림 기자 "A Spiritual Experience" director Lance W. Dreesen A peaceful middle class suburban neighborhood turns into a world of nightmares and fantasies in Lance W. Dreesen and Clint Hutchison's debut film . The two storytellers, best friends ever since their childhood in Atlanta Georgia, started off as scenario writers for various films, not to mention children's films like and many more. At an astounding 6 feet 3 inches the two tell us about their dream journey called films, certainly living up to their reputation as storytellers. You used a middle class suburban neighborhood as the scary setting. Did you want to reveal what lies underneath a stable looking life? Growing up in the suburbs, we always had this question in the back of our minds "Everything looks sound, but what lies behind those doors?" We initially planned for a grotesque graveyard keeper kind of character like the one in to tell stories happening all over different parts of the U.S. But all the stories in the film have something to do with houses, so we thought it would be better to gather all of them in one neighborhood. What made you debut as a director after working as a scenario writer, acting tea- cher, etc.? The three of us, Richard, me and Clint (now producers) all grew up together, talking about making a film together someday. We worked on a feature film scenario at Universal Studios one time, but you know how easily big film productions replace staff members, so we decided to make a movie on our own. We founded a film production called "Giant Leap" and made films. We shot the films without secured distribution routes. After we made the film, it turned out that many people liked it. USA film bought the movie, videos and DVDs sold well, and now it is being shown around the world. Why did you want to become a film director? I don? know if it's a blessing or a curse, but after seeing and , both released in 1977 when I was a teenager, I was completely enraptured by such beauty that I almost went through a spiritual experience. Wow, I don't know what that is, but I'd give anything to make one of those. Yes, it was a great period for people like me who liked fantasy films. I think it's really great to be doing something you really want to, and love doing. Could you tell us about your new film? The title is . We got the idea from the Book of Revelations, but of course it isn't a religious movie. The film is a mixture of an action thriller full of suspense and a science fiction movie. It's about an ecoterrorist and the script is currently underway.

티어스 오브 더 블랙 타이거 Tears of the Black Tiger

티어스 오브 더 블랙 타이거 Tears of the Black Tiger 2001년 태국 114분 감독 위시트 사사나티엥 출연 스텔라 말루치, 수파콤 키추원 상류층 룸포이네 가족은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시골로 피한다. 둠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도시소녀 룸포이와 시골 소년 둠은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9년 뒤 룸포이와 재회한 둠은 그녀의 명예를 지키려다 대학에서 쫓겨난다. 귀향한 둠은 아버지가 도적떼에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 ‘블랙 타이거’라는 이름의 갱스터가 된다. 이 영화의 복고풍은 필름을 베타테이프로 옮긴 뒤 색을 덧칠하는 작업 등을 통해 얻어낸 결과. 감독은 여기에 60년대식 타이 영화의 전통과 연극 양식을 차용해 태국식 스파게티 웨스턴을 요리해냈다. Rumpoey and her high class family flee to the countryside as the Pacific War breaks out. Dum's father arranges a place for them to live, and the city girl and the shy mountain boy develope a feeling for each other. 9 years later, Dum who reunites with Rumpoey, gets kicked out of university after he gets into a fight to keep her dignity, but vows to earn a lot of money and marry her someday. Dum becomes a gangster calling himself "Black Tiger" after he finds his father killed by a group of thieves. In the midst of all the fighting and commotion, Dum's destiny to protect his love falls into a tragedy of hell. Intentionally painting the set with bright colors, and transferring the film to a beta tape overlapping it with colors is what reels off ㄳ old fashion style. Wisit Sasanatieng used a 60's Thai film tradition and theater style, stirring up a kind of Thai spaghetti weste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