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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불만

월드컵을 앞두고 가장 불쾌했던 일은, 내게는, 차량 2부제다. 미리 밝혀두는 게 좋겠다.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 않는다. 광팬은 아니지만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작년 9월 티켓 2차 예매 때, 거금 85만원을 들여 16강전과 8강전 티켓을 두장씩 샀다. 네덜란드나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보는 게 내 바램이었고(두 팀을 정말 좋아한다), 그건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했지만 또 카드빚 메꾸느라 헉헉거렸지만 별로 후회되진 않는다. 또 나는 차를 거의 몰지 않는다. 내 면허는 흔히 말하는 장농 면허다. 그렇지만, 거리 곳곳에 붙은 ‘차량 2부제 위반시 벌금 5만원’이라는 안내판은 아주 불쾌했다. 그 목적을 모르는 바 아니니, 이게 2부제 강력 권장 캠페인이었다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벌금’이라니. 여기엔 나쁜 국가주의의 냄새가 난다. 월드컵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주 화창한 날에 차를 몰고 바람을 쐬러 가는 일을 강제로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뭐 그런 사소한 일로 이런 지면에서까지 떠드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사실이다. 이건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의 사소한 취향과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사회가(보호까진 절대 바라지 않는다) 진짜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중대사에 비하면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일은 너무 하찮은 일이다. 그러나 이 하찮은 취향을 누가 그 혜택을 누릴지 불분명한 ‘국가적 중대사’ 때문에 금지당하고 싶지 않다. 영화의 어떤 장면을 국가 기관이 개입해 잘라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일본의 나쁜 정책 때문에 일본 영화 완전개방이 지연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듯이, 나는 차량 2부제의 강제시행을 받아들일 수 없다.(부끄럽지만 사실은 차량 2부제 강제실시에 눈이 멎고 나서야, 월드컵 때문에 판자촌이 철거되고 노점상이 퇴출됐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됐다. 생존권도 이렇게 침해하는 데, 사소한 취향이야 오죽 우습게 보일까.) “얼마 전 사회 수업 시간에 개인과 사회조직에 관해 배운 적이 있다. 사회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피해는 감수해도 된다는 자세는 옳지 않은 것이라 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는 소수의 희생이 무시되고 있다. 그리고는 ‘코리아 팀 파이팅!’ ‘정정당당 코리아!’와 같은 듣기 좋은 구호들만 내세운다. 소수의 희생은 무시한 채, 이런 구호를 외친다고 과연 정정당당한 코리아가 될 수 있는가?” 이 글은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 중의 일부다. 그리고 글쓴이는 중학교 3학년이다. 어린 조숙은 당사자에게 꼭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있어도 종종 늙은 미숙아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그런데, 이건 조숙이 아니라, 중학생 수준의 상식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1)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 그러니까 영화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매일 최선을 다하면 일곱편, 그리고 시간이 잘 안 맞으면 네편의 영화를 본 다음 칸의 해변가를 따라 (요즘 내가 심취한) 마누 차오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걸어온다. 나는 김홍준 선배가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영화제가 있지. 칸와 안(non)-칸영화제.”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곳은 영화를 위해서, (앙드레 바쟁의 말을 빌려) 불순하게도 끼어들어간 현실을 이미지 속에서 보존하고 정회시키기 위해 싸우는 시네아스트들을 지지하면서, 작가의 새로운 명단을 매년 발표하면서, 영화감독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곳이다. 정말 칸에서는 영화평론가들이나 영화기자나 프로듀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오직 창조하는 자들만이 그 위대한 만신전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당신은 칸을 절반만 본 것이다. 그 크로와제트의 뒤를 돌아가면 끝갈 데 없이 마켓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곡예를 넘는 동안 뒤에서는 장사꾼들의 셈과 흥정, 대차대조표가 펼쳐진다. 칸를 둘러싼 호텔에는 영화사들의 플래카드가 화려하게 만국기처럼 휘날린다. 그러나 그걸 보는 내 심정은 꼭 빨래들이 널려서 펄럭이는 것 같다. 칸영화제가 벌어지는 동안 가까운 곳 칸 포르노국제영화제(!)가 열린다. (함께 간 <씨네21> 박은영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무서운 언니’들이 토플리스 차림으로 해변에 누워 있고, 저녁이면 카지노를 하러 오라는 화려한 카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광장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감독과 영화를 보고 싶어서 공식상영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구한다는 구호(!)를 쓴 커다란 종이를 펼쳐들고 영화애호가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그렇게 칸은 예술가들과 장사꾼들과 애호가들이 펼치는 모순의 삼위일체이다. 당신은 이곳에 오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화를 갖고 오라.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바치는 진심어린 충고이다. 추신. 이 영화여행 기행문은 항상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에 쓰여졌다. 왜냐하면 다음날 영화의 첫 시사는 8시30분이기 때문에 더 늦게 자면 틀림없이 졸게 된다. 그러니 이 심야에 쓰는 글들이 감상적이 되는 것을 용서하시길. 아, 지금은 (베리만의 말을 빌리면) 신이 침묵하고 악마가 거래를 여는 ‘늑대의 시간’이다. 엘리아 술레이만의 <신의 간섭>, 올해 칸의 발견 오늘 아침 <리베라시옹>을 읽었다. 매일 세계 면의 톱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프랑스에 매우 미묘한 위치를 점유한다. 그들의 개입은 물론 자유, 평등, 박애지만 프랑스가 미국과 긴장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태의 핵심이다. 프랑스는 아라파트에 돈을 대고 있고, 그것은 또다른 알제리가 될 가능성도 있다. 서울의 관심과 달리 여기의 관심은 중동이다. 매일 아침마다 듣는 중동의 히트곡들. 테크노클럽에 가면 열에 여덟은 중동에서 온 DJ들의 리믹스를 듣게 된다. 그리고 오늘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시네아스트 엘리아 술레이만의 영화 <신의 간섭>(Yadon ilaheyya, 경쟁부문)을 보았다. 이구동성. 아마도 엘리아 술레이만은 올해 칸의 발견일 것이다. 이 영화는 <실종의 연대기>(1996)에 이은 그의 ‘연대기’ 연작 두 번째 속편이다. 그래서 <신의 간섭>에는 ‘사랑과 고통의 연대기’라는 자막이 중간에 떠오른다. 팔레스타인은 두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나사렛과 라말라. 그리고 한곳에서 다른 지역에 가려면 이스라엘군의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나사렛에 살고 있는 ES(엘리아 술레이만이 주연도 한다)는 라말라의 여자(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익명성의 영화이다)를 사랑한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려면 그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말 그대로 견우와 직녀. ES의 아버지는 세상이 못마땅하다. 사업은 실패했고, 변경구역에 가깝게 살고 있는 그는 바로 옆집(이자 이스라엘) 안마당에 매일 아침 쓰레기봉투를 버린다. 영화의 도입부는 압바스 키이로스타미를 연상케 한다. 또는 자크 타티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최소한의 대사와 간결한 액션들, 세심한 이웃들과의 하루, 여기에 종종 멈추어 서 있는 인물들의 등을 카메라는 오랜 동안 서서 보여주기도 한다. 계엄하의 일상생활?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아버지가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자 ES는 차를 몰아 달려간다. 그는 과일을 먹으면서 달리다가 다 먹자 사과씨를 바깥에 던진다. 지나가는 차 옆에 거대한 탱크가 보인다. 전쟁과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데 그 순간 탱크가 사과씨에 폭파되어서 불바다를 만들면서 산산조각 날아가버린다. 갑자기 영화가 종잡을 수 없게 전개되고, 스타일은 종횡무진하기 시작하고, 이야기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그러면서도 엘리아 술레이만은 이 시각적인 유머 속에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삶의 고통에 대해서 결코 한시도 잊지 않는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면서 보이는 오슨 웰스의 저 바로크 스타일의 카메라 이동, 거기에 사랑의 힘이 이스라엘군 초소를 단숨에 날려버린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정말 화면 앞에서 무너져내린다는 말이다. 또는 그들이 초소를 통과하기 위하여 야세르 아라파트의 얼굴이 그려진 풍선을 날려보내는 장면은 기묘하게도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쿵쾅거리는 비트들. 이제 비상계엄이 내려지고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된 두 사람의 상상. 이스라엘 특전대가 복면을 한 팔레스타인 여인의 그림 타깃을 놓고 총기사격 연습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중 가운데 그 그림 타깃 뒤에서 정말 팔레스타인 여인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특전부대원들이 <매트릭스>의 sfx장면을 패러디한 공중비상과 멈추어선 총알, 여기에 그 총알로 성모 마리아상처럼 다시 머리 주변에 원형을 만들어내는 대목에 이르면 웃음은 불현듯 숭고해진다. 그러고나면 자막이 떠오르고 매시브 어택의 트립 합이 신비롭게 중얼거리면서, 후렴구로 “오, 나는 당신을 그리워할 거예요”라고 애절하게 울려퍼지며 영화는 끝난다. 웬 매스브 어택? 엘리아 술레이만의 대답. “꼭 왕가위의 <타락천사> 같지 않아요?” (웃음) 엘리아 술레이만이 정말 새로운 이유는 그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통이라고 불리는 이미지들과 자기 땅에서 유배받은 자들의 디아스포라를 동시에 끌어안고 자기의 정체성을 물어보는 데서 온 것이다. 그들의 삶은 신의 간섭일까?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넘어볼 수 있을까? 또는 누구의 신이 옳은 것인가? 그런 질문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신의 섭리는 실현되고, 그 섭리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그 예정된 결정사항들을 적어놓은 수십개의 포스트잇을 벽에 붙여놓은 ES는 아버지가 죽자 그 포스트잇을 떼어버린다. 그 순간 영화는 그저 우두커니 ES의 등을 바라본다. 어쩌면 엘리아 술레이만은 불경죄를 저지르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상상력은 오직 인간의 삶이 신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영화를 통해서 기적을 행하기 때문이다. 영화적인 기적? 그렇다. 그는 금기를 무시하고, 할리우드영화와 뮤직비디오에서나 등장하는 기적의 순간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나는 영화에서 영화라는 트릭을 사용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진정성의 순간에 가까스로 이르는 것을 달리 알지 못한다. 만일 올해 칸의 질문이 정말 정체성이라면 엘리아 술레이만은 그 누구보다도 그 바닥까지 내려가본다. 또는 그 안에서 가장 멀리 비상한다. 아톰 에고이얀의 <아라라트>, 민족 정체성의 뿌리로의 여행 모두들 아톰 에고이얀의 <아라라트>(Ararat)가 비경쟁 공식부문 초대작으로 결정되었을 때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아톰 에고이얀은 새로운 영화의 화법을 만든 시네아스트이다. 그는 영화가 숏의 연결을 통해서 개념의 몽타주를 만들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씬의 몽타주를 통해서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의 상상적 몽타주를 만들어내는 영화를 발명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퍼즐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시작하면 절반이 지나도록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평행으로 전개되고, 이제 영화의 이야기 구조에서의 원근법은 그 고정점을 찾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인물들의 상상적 가상선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우리는 상공비행하여 그 구조의 인과관계를 알게 된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놓을 수는 없다. 아톰 에고이얀은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의 <엑조티카>(이 영화는 퀴어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인 야심이 때로 지나쳐서 그것이 영화를 망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저스터>. 하지만 그가 항상 논쟁적인 시네아스트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톰 에고이얀은 경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경쟁을 피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에고이얀 영화의 지지자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또는 그의 영화음악을 유심하게 들어본 사람들은 눈치챘겠지만, 아톰 에고이얀은 아르메니아-캐나다인이다. 그의 뿌리는 아르메니아이며, 그의 고향은 이집트이다. 이 먼길을 돌아선 뿌리는 그의 영화의 정체성을 퍼즐로 만든다. 그 에고이얀이 이제 더이상 자기 자신을 피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그는 아무도 이야기하기를 원치 않는 역사적 사실 안으로 들어간다. 아르메니아의 디아스포라의 비극적 시작. 1915년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해 터키는 인종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니까 아라라트산에서 벌어진 이 대학살은 그뒤에 이어질 나치의 쇼아, 또는 발칸반도의 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인용되는 그 유명한 이야기) “히틀러는 유대인들의 아우슈비츠를 결정하면서 말했지. 20년이 지나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야. 그게 역사라구.” 터키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아직도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 아톰 에고이얀은 어려운 결심을 해야만 했다. “나는 고민했다. 이제는 아르메니아의 비극을 이야기기하고, 사과를 받아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다. 더 지난다면 정말 잊혀질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이다. 서구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서구에 알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칸에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역사의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에 대한 침묵의 동의가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비경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아라라트>는 아톰 에고이얀의 영화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가 영화를 만드는 그 자신의 화법을 바꾼 것은 아니다. 영화는 지금 토론토에 살고 있는 여섯명의 인물로 나뉘어서 평행하게 시작한다. 자기 어머니의 초상화를 완성하지 못하고 미루는 화가, 그의 인생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는 감독, 그 감독의 차를 운전하는 18살 청년, 그 영화에서 터키군 악당을 연기하는 배우, 아버지가 실종된 이유를 찾는 여인, 그녀 자신의 과거를 잊기 위해서 역사를 끌어안는 강사들이 자기의 방식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어디서 온 사람인가를 알지 않기 위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질문을 피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의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한 것처럼) 절반이 지날 때까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톰 에고이얀은 이 서로 다른 인물들을 다시 두개의 이야기 사이로 갈라놓는다. 그 하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동화되어가는 운전사 청년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제작을 둘러싼 감독과 그 주변 사이의 갈등이다. 그 사이사이에 계속해서 아라라트산에서 벌어진 인종학살의 과정이 전개되면서, 그 안에서 사라진 역사의 총체적인 과정의 복원을 시도한다. 아톰 에고이얀이 에밀 쿠스투리차와 다른 점. 또는 <아라라트>가 <언더그라운드>와 다른 점. 에고이얀은 여기서 서로 다른 진술을 하는 등장인물들을 끌어들이지만 그들이 서로 모순된 말을 하여 아이러니의 효과를 끌어내기를 원치 않는다. 더더구나 그는 화면의 시적인 기분이나, 상징적인 표현이나, 알레고리한 대상이나, 스펙터클한 역사의 재현을 모두 피한다. 또는 아무도 아르메니아 학살이나 아라라트산의 학살에 대해서 직접적인 말을 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에고이얀은 서로 다른 관점을 동원하고, 서로 다른 층위의 이야기들을 만들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해서 그는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한 총체적인 강의도표를 만들 듯이 영화의 구조를 활용한다. 그래서 인물들과 이야기들은 서로 짝패를 이루면서 층층이 쌓아올려지고, 그 안에서 서로 위치를 바꾸면서 말하여지지 않은 역사,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 그 역사의 트라우마가 왜 아직도(그들 자신은 다 잊고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현재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무언가 망설이고, 마침내는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만드는지를 물어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극인 것이다. 또는 이 영화가 아톰 에고이얀의 새로운 걸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왜 그가 퍼즐풀기에 강박관념처럼 몰두하는지를 고백하는 진정성을 끌어내는 영화이다. 형식과 내용의 일치. 이 진부한 말이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 이상하게도 아프게 되새겨진다. <행복을 기다리며>, 낯선 나라 모리타니아에서 온 감동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모리타니아라는 나라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김홍준 선배 말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수단 근경에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모리타니아에서 온 압데라마네 시사코의 두 번째 영화 <행복을 기다리며>(Heremakono, 주목할 만한 시선)은 아름답고 때로 감동적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17살이 된 압달라는 유럽으로 이민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 누아디부에 간다. 그러나 그는 고향 말을 하지 못한다. 고향에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그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거기서 그는 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아내가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야기, 또는 중국에서 이민온 남자인 카라오케, 고아가 된 어린 소년, 마을 사람들을 차례로 만난다. 고향말로 된 노래들과 바람소리와 빛,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채우는 사막의 정경들. 아마도 압데라마네 시사코 자신의 자서전의 일부가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향수와 추억으로 가득 차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조심스러운 장면들과 시적인 대사들, 인물들의 마음을 담은 듯한 다큐멘터리풍의 고백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고향의 작은 순간들도 기억하려는 압달라의 마음이 곱게 담겨진다. 영화가 진심을 전하기를 원하면 종종 그 영화의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성일의 칸 10 베스트독단과 편견으로 뽑은 나의 걸작들 우선 염두에 둘 것. 이 명단에서 나는 복원판은 모두 제외시켰다(이를테면 자크 타티의 영화들. 또는 호금전의 <방랑의 결투>). 한 가지 더. 나는 칸에서 상영한 모든 작품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쟁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 그리고 비평가주간과 감독주간에서 46편을 보았다. 11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이 순위에 한국영화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이 목록은 순위에 따른 것이다. 1. 스파이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경쟁부문) 카프카의 세계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는 스파이더 맨의 앙티 오이디푸스 버전. 2. 과거없는 남자(아키 카우리스마키, 경쟁부문) 레닌그라드 ‘구세군’ 밴드, 죽었다 살아난 남자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소개한다. 홈리스들의 공동체를 위한 카우리스마키적인 유토피아 동화. 그런데 자본주의가 문제다. 3. 임소요(任逍遙)(지아장커, 경쟁부문) 중국 자본주의의 손바닥 아래 19살 소년 ‘손오공’들, 온갖 재주를 넘으며 그들의 인생을 망쳐간다. 디지털로 만든 포스트 천안문세대의 악전고투. 4. 신의 간섭(엘리아 술레이만, 경쟁부문) 팔레스타인의 견우와 직녀, 사랑을 신은 막을 수 있을까? 종횡무진, 자유자재, 신기막측. 변화무쌍! 5. 고백(제키 데미르쿠비즈, 주목할 만한 시선) 한 남자가 엄마가 죽자 아내를 새로 데려온다. 그러나 아내는 불륜에 빠지고, 남자는 누명을 쓴 채 법정에 불려간다. 터키라는 우물에 돼지가 빠진 날. 6. 스위트16(켄 로치, 경쟁부문) 소년은 가족이 함께 모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16살 생일이 되는 날 모든 것을 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켄 로치의 글래스고 삼부작의 두 번째 영화. 7 아들(장 피에르와 뤼크 다르덴, 경쟁부문) 아이을 죽인 소년이 아이의 아버지가 가르치는 학교에 온다. 복수를 할 것인가, 용서를 할 것인가. 카메라는 숨가쁘게 아버지의 뒤를 쫓고, 소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 숲 속에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8. 모번 칼라(린 램지, 비평가 부문) 한 소녀가 자살한 남자친구의 시체를 사지절단해서 갖다 버리고는 장례비로 친구와 여행을 떠난다. 린 램지의 <미치광이 삐에로>? 9. 되돌이킬 수 없는 (가스파르 노에, 경쟁부문) 지금 영화가 가볼 수 있는 그 어떤 한계점의 극한. 형식에서도, 주제에서도, 표현에서도, 연출에서도. 이미지와 사운드와 속도의 사도마조히즘. 그 안에서 기어이 감동을 끌어내는 ‘막가파’ 시네아스트의 등장. 10. 내 어머니의 지방의 노래들(바흐만 고바디, 주목할 만한 시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이야기를 에밀 쿠스투리차가 만든 것 같은 요란법석을 떠는 뮤지컬. 춤과 음악과 여행. 할아버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를 찾아 떠나는 로드 무비. ※ 추신. 이 목록은 칸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하는 동안 내가 내 방에서 선정한 것이다. 그들이 무슨 영화를 뽑건 그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목록은 심사결과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3)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2)

<펀치 드렁크 러브>, 알차구나, 폴 토머스 앤더슨! 폴 토머스 앤더슨은 2년 전 베를린에서 <매그놀리아>로 찾아왔을 때 다음 영화는 아주 짧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설마, 라고 그냥 웃었다. 왜냐하면 <부기 나이트>를 만들고 난 다음에도 그런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칸에 온 <펀치 드렁크 러브>(Punch-drunk love, 경쟁부문)는 정말 짧고 간결하다. 91분 동안 주인공 브라이언 이건(애덤 샌들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랑을 찾아 말 그대로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일곱 자매에 둘러싸여 그녀들의 간섭과 잔소리와 과잉보호 속에 브라이언 이건은 연애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시간만 보낸다. 그 자신도 어찌할 줄을 몰라 그저 속만 태우면서 고민 끝에 폰섹스 전화를 걸기도 한다. 그러나 불러준 신용카드 번호가 문제를 일으키고, ‘삐끼’(!)들이 찾아와 괴롭힌다. 브라이언은 괴로울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에 이상한 영국여인 레나(에밀리 왓슨)가 나타난다. 브라이언은 모든 수모를 이겨내고 마침내 그녀를 향한 고백에 성공한다. 로맨티스즘? 물론이다. 해피엔딩? 두말하면 잔소리. 할리우드 스타일? 그럼. 하지만 넌 폴 토머스 앤더슨이잖아! 아, 그게 문제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는 <매그놀리아>의 마지막 개구리 우박장면처럼 기겁할 만한 예언자적인 비전이 없다.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형이상학적인 알레고리에 이르려는 화해할 수 없는 불안의 의식이 있다. 또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안에서 화해를 찾으려는 위기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아니면 <부기 나이트>의 마지막 15분의 시퀀스처럼 드라마의 덫에 걸려든 인간군상의 지옥과도 같은 그 절망의 추락 속에서 결국 마주칠 수밖에 없는 비극을 거의 고전극처럼 끌어올리는 순간이 없다. 그러나 <펀치 드렁크 러브>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새로운 걸작이다. 조용한 아침에 브라이언의 눈앞에서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뒤집혀 박살나는 자동차 전복으로 시작하자마자 마지막 장면까지 그냥 말 그대로 한 호흡에 끝낸다. 그 순간 헉(!) 하고 들이마신 숨을 다시 내쉬는 것은 무려 91분 만에 브라이언이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니 영화가 더 길면 관객은 펀치 드렁크 현상에 빠질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자유자재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카메라와 음악의 이중주는 레이브 파티에 온 것 같으며, 하와이에서의 연애장면에 이르러 그림자 놀이와도 같은 엑스트라들의 이동은 50년대 빈센트 미넬리 영화의 재현이다. 아마도 지금 이만큼 영화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마틴 스코시즈 정도일 것이다. 또는 이 영화는 2002년의 (하워드 혹스의) <그의 소녀, 프라이데이>이다. 시종일관 쿵쿵거리는 비트와 달콤한 발라드풍의 연주, 그리고 코믹한 선율 이 세 가지 음악을 변주하면서 달려가는 숏들의 간결함과 동화 같은 시추에이션, 그리고 애덤 샌들러의 생애의 명연과 에밀리 왓슨이 아니면 해낼 수 없을 그 불가사의한 미소는 누구라도 마지막 순간 웃게 만든다. 소품이지만, 이 영화가 갖춘 유머와 센스는 단숨에 그의 동세대의 누구라도 따돌릴 만한 것이다. 아, 알차구나, 토머스 앤더슨! (장나라 버전) 고다르의 <옛 장소>, 우주를 다시 사색하기 칸은 소비의 가속도가 질주하는 장소이다. 여기서는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다음 영화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다. 종종 그런 이유로 본 영화는 볼 영화들과 서로 겹치거나 장면들은 뒤섞인다. 그걸 불러 멈춰 세우면서, 예술에 관한 애도의 시간을 마련한 장 뤽 고다르의 <옛 장소>는 여전히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 영화는 뉴욕현대미술박물관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예술과 역사 속에서의 그 장소”라는 테마를 갖고 만들어진 40분 분량의 비디오 콜라주이다. 그러나 그 물리적인 시간은 고다르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고다르의 이미지를 보는 순간은 우리에게 무한정한 길이의 명상이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여기서 <영화의 역사-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용과 수많은 이미지들을 골라내서 다시 연결한다. 앙리 베르그송과 도스토예프스키와 모리스 블랑쇼, 니체의 문장들 또는 베토벤과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현대음악들의 선율들이 우리를 이끄는 곳에서 고다르는 세상의 질서를 다시 돌아보고 그 안에서 다시 우주를 만든다. 고다르의 우주, 그렇다. 그는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생각하는 윤곽을 다시 구성한다. 그는 이미 <그녀에 관해 알고 있는 두세가지의 것들>에서 어느 오후 카페에 앉아 시켜놓은 커피잔 속에서 데카르트의 우주를 발견하는 것처럼 여기서는 사진의 기억 안에서, 지나가버린 필름의 기록 안에서, 역사의 질서를 본다. 인상적인 장면. 여기는 칸이다. 그리고 올해 칸는 샤론 스톤을 심사위원으로 초대하였다. 그 샤론 스톤이 칸의 붉은 크로와제트를 밟는 순간 영화팬들이 환호하는 장면이 나치의 히틀러에 열광하는 독일인들과 서로 교차된다. 또는 월드컵을 보여주면서 고다르는 탄식한다. “지금 월드컵을 보는 사람은 백만에 백만을 곱한 숫자이다. 그러나 <햄릿>을 최초로 본 사람은 1800명이다.” 고다르는 예술의 시대가 떠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제 더이상 옛 장소는 남아 있지 않다. 그 장소는 오직 지나간 시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장소에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우리에게 남겨진 예술들을 통해서이다. 고다르는 우리에게 애도가 예술의 몫임을 여기서 일깨워준다. <곡(哭)하는 여자>, 현실에 낀 애매한 중국인들 이상하게도 잘 이야기되지 않는 류빙지안은 중국영화의 새로운 이름으로 기억해둘 만하다. 그가 처음 발견된 곳은 로카르노영화제에서였는데, 그때 거기서 만난 <남남녀녀>는 중국 퀴어영화의 새로운 전망이라는 평가를 얻어냈다. 류빙지안은 중국의 근대화와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나가는 새로운 세대의 풍속을 담는 데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3년 만에 만나는 그의 세 번째 영화 <곡(哭)하는 여자>(哭粒的女人, Ku qi de nu ren, 주목할 만한 시선)는 중국의 새로운 풍속과 함께 그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전통의 풍경 안으로 들어간다. 왕구이시앙은 베이징에서의 오늘을 바닥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자이다. 그녀는 남편이 있지만 다른 남자와 종종 불륜의 섹스를 나누고, 천안문 앞에서 불법 DVD와 포르노를 팔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때로는 거칠고 팔짱을 걷어붙이고 벌이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옆집에서 아이를 보아달라는 부탁을 거절 못해서 애를 업고 천안문으로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백수건달 남편은 마작을 하다가 싸움이 벌어져서 그만 상대의 한쪽 눈을 장님으로 만들고, 게다가 옆집 부부는 아이를 맡긴 채 다른 데로 이사가버린다. 남편은 감옥에 가고, 남의 집 아이는 울고 왕구이시앙은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남편 때문에 한쪽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가 찾아와 합의금을 주지 않으면 크게 다칠 줄 알라고 협박까지 한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여자에게 그녀의 불륜 상대인 애인은 당신이 우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니 제삿집에 가서 대신 곡을 하는 일을 해보라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한다. 먹고살자고 시작한 곡하는 일은 소문이 나서 날로 번창하고, 그녀는 남의 제삿집에 가서 돈 버는 일에 신이 난다. 그러나 결국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감옥에서 그녀의 남편이 탈옥했다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그녀는 남의 제삿집에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한다. 시종일관 유머에 찬 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능청맞은 왕구이시앙의 수다와 자칫 구태의연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구조를 피해가는 류빙지안의 솜씨이다. 왕구이시앙을 연기하는 리아오친은 베이징 경극배우인 그녀의 곡하는 솜씨(!)를 뽐내면서 화면을 끌어가고, 그녀를 중심으로 류빙지안은 전통 안에서 모든 것이 돈이 되어가고 불륜이 판을 치며, 그러면서도 결국 나쁜 관습을 버리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국인들의 저 애매한 세대들의 풍속도를 펼친다. 류빙지안은 베이징전영학원을 나왔지만, 그는 그 어떤 세대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남남녀녀>는 중국 당국에서 상영이 금지되었고, 이번 영화도 역시 시나리오가 검열에서 불합격되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결국 바깥을 떠돌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영화는 캐나다와 한국의 미로비전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새로운 글로벌 시대의 한국영화? <스위트 16>, 여전한 켄 로치의 진정성 켄 로치는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또는 나는 아직도(그리고 앞으로도) 켄 로치의 팬클럽을 탈퇴할 생각이 없다. 그의 <스위트 16>(Sweet Sixteen, 경쟁부문)은 <나의 이름은 조>에 이어지는(켄 로치의 말에 의하면) 글래스고 삼부작 중 두 번째 영화이다. 글래스고 출신의 작가인 폴 래버티와 함께 작업한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성장영화이지만, 동시에 복지사회국가에서조차 버림받은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리프-래프>의 시절로 돌아왔고(브릿 팝 그룹 오아시스가 뽑은 최고의 영국영화), 또는 주제의 면에서는 <케스>(켄 로치의 최고 걸작)와 겹친다. 중요한 점. <스위트 16>은 여전히 켄 로치의 세계관이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영화이며, 더 나아가 그 안에서 희망을 갖기 위해 거의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따뜻한 마음이 결코 감상주의나 도그마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를 응원하는 영화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영어권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사투리 억양 때문에) 영어자막이 따로 나온다. 소년 리암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서 산다. 그는 학교 공부는 집어치운 지 오래이고, 게다가 말썽꾸러기이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그가 16살이 되는 생일날 엄마가 감옥에서 출소하는 것이다. 그는 정말 못마땅한 엄마의 젊은 애인과 엄마를 면회하기도 하지만, 출소하면 가족들이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돈벌이에 나선다. 마침내 마약에도 손을 대고, 그러자 동네 깡패들은 돈을 빌려주면서 자기 구역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니까 우리 말을 잘 들어라’는 위협도 한다. 리암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한다. 그건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가족들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어머니가 출소하는 날, 리암은 가족들과 모여 생일파티를 한다. 그러나 다음날 엄마는 젊은 애인의 집에 가버렸고, 가족들과 함께 사는 자기의 꿈은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리암은 아침 새벽에 바닷가에 사서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때 전화가 걸려온다. “16살 생일을 축하한다.” 하지만 리암은 그냥 그렇게 서 있는다. 리암은 17살 생일을 맞을 때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이건 정말 끔찍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관점에 따라서) <블루 벨벳>같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켄 로치는 그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결코 교활하게 글래스고의 서브 컬처를 말하는 척하면서 십대 스펙터클을 펼치는 <트레인스포팅> 같은 역겨운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나는 <트레인스포팅>이 정말 싫다). 그의 관심은 리암의 악전고투이다. 리암의 잘못은 그가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 그의 엄마도, 그의 누이도, 그의 가장 친한 친구조차 모두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리암은 되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든다. 그렇기 때문에 리암이 가족을 얻으려는 따뜻한 마음씨를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주려는 켄 로치의 일관된 입장은 그가 마약 딜러가 될 때까지 추락하더라도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어한다. 켄 로치가 별다른 영화적 기교를 활용하거나, 새로운 미학을 담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를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밑바닥 세상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을 ‘하여튼’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당연한 이야기를, 한치의 흔들림 없이, 매번, 그리고 더욱 확신을 갖고 해내는 시네아스트는 지금 켄 로치밖에 없다. 다시 한번 일보전진! 추신: 리암 역의 마틴 컴스톤은 이구동성으로 올해 칸이 발견한 배우이다. 올해 18살의 리암 스톤은 단 한번의 연기경험도 없는 축구선수이다. 켄 로치는 그를 오디션 없이 뽑았으며, 그가 보여주는 리얼리티는 압도적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 김홍준 선배와 내가 (심심풀이로 뽑은) 올해의 남우주연상. 과 <러시아 방주> 디지털영화의 양가적 비전 디지털은 정말 희망이 있는 것일까? 결국 영화가 디지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1927년 사운드가 처음 영화를 찾아왔을 때처럼 어리둥절해 있는 중이다. 디지털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정반대의 방식으로 물어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는 결국 새로운 영화는 이제 이야기나 주제나 인물이나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개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바람이 우리를 실어가리라> ‘이후’ 경쟁부문에는 오지 않겠다는 생각을 왜 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12번째 극영화 (Ten, 경쟁부문)은 말 그대로 원맨밴드 시네마다. 또는 인터뷰에서 한 키아로스타미의 말을 빌리면 “나의 두 번째 데뷔작”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여기서 ‘직업’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시나리오, 연출, 촬영, 조명, 녹음, 편집까지 일체를 혼자서(!) 해결한다. 그래서 일부 장면의 녹음은 주변의 소음 때문에 ‘씹힌 채’ 잘 안 들린다. 영화는 숫자 10을 보여주는 자막을 시작으로 12분에 이르는 기나긴 롱테이크로 시작한다. 차에 올라탄 아이는 옆에 앉은 엄마에게 항의한다(그런데 이 장면이 끝날 때까지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자기가 왜 이혼한 엄마와 살지 않으며, 새엄마가 더 좋은 점이 무엇이며, 아빠랑 같이 살지 않는 엄마가 싫다고 시종일관 궁시렁거린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모두 10개의 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그러나 10개의 숏은 아니다), 카메라는 단 한번도 차에서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아들과 여섯 명의 여자를 번갈아 태우면서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서(이 영화는 모두 동시녹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로덕션 노트를 보면 엔지 없이 모두 단 한번의 촬영으로 끝냈다고 한다) 이란에서 여자들이 살아가는 불평등과 억압, 그리고 좌절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불안, 무엇보다도 왜 이란에서 여자는 독립할 수 없는지를 그녀들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 마지막 에피소드 1. 길을 사이에 두고 이혼한 남편과 저녁에 몇시까지 아들을 데려다주어야 하는지를 물어보며 끝내 길을 건너가지 않으면서, 서로 반대의 방향에 차를 대놓고 서서,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이야기를 끝내면서 영화는 결코 새로운 삶을 위해서 타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하면서 끝난다. 그러면 이 영화의 유일한 음악인 하워드 브레이크의 노래 <공기 속의 산책>이 흘러나오며 끝난다. 문제는 간단하다. 옳은 이야기이며, 세계관도 동의할 수 있다. 자기의 주제를 붙드는 개념은 효과적이고, 형식적으로도 일관성이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여기서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백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알고 있으며,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뿌리로 다시 돌아온 영화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개념과 형식만이 있다. 간결하기보다는 단순하고, 분명하기보다는 뻔하다. 물론 이 영화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아무도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뤼미에르의 시대에로 다시 돌아온 듯한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시작하는 두 번째 세기의 영화가 나를 이상하게 쓸쓸하게 만든다.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Russki kovcheg, 경쟁부문)는 그 반대의 영화이다. HD 디지털 카메라로 작업한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1시간36분 동안 단 한컷의 롱테이크영화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시대의 첫 번째 원컷영화가(뤼미에르 형제의 단편 무성영화를 제외하면) 앨프리드 히치콕의 <로프>라면 디지털 시대의 첫 번째 원컷영화는 소쿠로프가 차지한 것이다. 점점 더 소쿠로프의 영화가 이야기를 잃어가는 것처럼 이 영화에는 이야기가 없다. 페테스부르크의 겨울궁전을 무대로 이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18세기 러시아에 온 프랑스 외교관 마르키즈 드 퀴스틴의 안내에 따라 홀린 듯이 돌아다닌다. 그리고 스테디캠을 장착한 카메라는 35개의 서로 다른 방을 돌아다니면서 897명의 연기자들과 500명의 단역들이 이야기하고 춤추는 무대를 공기 속을 유영하듯이 부유한다. 소쿠로프의 연출 플랜도 놀랍지만, 이 영화를 촬영한 틸만 부트너의 미학적 완성도는 탄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소쿠로프는 틸만 부트너가 촬영한 (톰 티그베어의) <롤라 런>을 보고 만나서 이 작품을 함께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마지막 자막을 따라가면 조감독 22명, 촬영 16명, 조명에 48명의 이름과 함께 조명 이동에 21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들은 18세기의 풍속을 거의 완전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그 안을 돌아다니는 이 놀라운 한 테이크의 영화는 디지털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놀라움 뒤를 자리잡는 것은 의심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우리 시대의 레니 리펜슈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리펜슈탈의 저 매혹적인 스펙터클의 이미지들. 또는 파시즘에의 열광. 소쿠로프는 점점 더 이상한 대상을 선택하고, 그 대상을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을 통해 물신화시킨다. 그는 <몰로흐>에서 히틀러를 받들고, <타우리스>에서는 스탈린을 다시 끌어들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18세기 귀족들의 삶을 찬양한다. 그에게서 볼셰비키의 그 어떤 역사적 흔적도 증발해버린 지 오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페테스부르크는 어떤 곳인가? 그 이름은 레닌그라드였다.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도시. 지구상에서 최초의 노동자국가의 탄생을 알린 도시. 소쿠로프는 그걸 잊고 싶어한다. 그리고 귀족들의 삶, 그들의 더없이 아름다운 세계, 낭만주의 음악, 매너리즘의 그림들, 겨울 궁전의 눈 덮인 아름다운 풍경들, 소쿠로프의 주인공 마르키즈는 그것들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워서 탄식한다. 그 슬픔을 달래듯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는 피아노 선율은 쇼팽의 마주르카이다. 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은 슬픔이다. HD 디지털 카메라의 방주에 몸을 싣고 타임머신처럼 오가던 그 여행길은 귀족들의 파티와 함께 끝난다. 나는 키아로스타미 영화와는 반대의 이유로,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마음으로, 디지털영화의 이러한 미래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3)

제 55회 칸 영화제 수상작(자)들(2) - 로만 폴란스키(황금종려상)

로만 폴란스키는 <피아니스트>로 오랜 숙원을 풀었다. 지난 1986년 경쟁부문에 올린 작품 <해적>이 ‘재난’으로 판명된 뒤, 그는 배우 아니면 심사위원 자격으로나 칸의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반전을 준비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것은 고행과 치유의 지난한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폴란스키는 필생의 작업 <피아니스트>를 위해 40년 만에 모국 폴란드로 돌아갔고, 16년 만에 레드카펫을 밟았고, 그리고 생애 처음 황금종려상까지 안았다. 유대계 폴란드인인 로만 폴란스키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 <피아니스트>를 들고 칸으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화제의 초점은 폴란스키가 자신의 경험을 어떤 모양새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영화화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폴란드 크라코우의 유대인 거류지에서 성장한 로만 폴란스키는 나치 캠프의 가스실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쉰들러 리스트>의 연출 제의를 고사했을 때 그는 조국 폴란드를 떠나면서 봉인해놓은 고통스런 유년의 기억을 들춰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2차대전 당시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살아남은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의 자서전을 접하고 나서야, 폴란스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폴란드의 비극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렇게 만든 영화가 <피아니스트>다. 나치의 세력하에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 피아니스트 스필만이 피아노 연주곡을 녹음하고 있던 라디오방송국도 폭격을 당한다. 가족이 모두 수용소로 끌려가고 홀로 남은 스필만은 유대인 거류지를 떠돌며 생존을 위한 고투를 벌인다. 나치의 눈을 피해 폐허 속을 떠돌던 스필만은 독일 장교와 마주치는데, 그는 스필만의 피아노 연주에 깊이 감명받아 수용소행을 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시간이 흘러 스필만은 못다한 피아노 연주를 녹음하던 날, 자신을 도와준 독일 장교가 포로 수용소에서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피아니스트>는 매끈하게 잘 만든 휴먼드라마로, 칸보다는 오스카에 어울릴 법한 영화다. <쉰들러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감상주의에 빠지거나 멜로드라마의 곁길로 새지 않고, 냉정하고 담담하게 ‘역사’와 ‘예술’과 ‘인간애’를 이야기한다. 폴란스키의 원점 회귀와 거리두기 시도는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사전정보 없이 본다면, <악마의 씨> <차이나타운> <비터문> 등을 통해 성과 폭력과 공포에 대한 남다른 비전을 보였던, 그 감독의 작품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다. <피아니스트>는 <테스>와 더불어 폴란스키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온건한 작품이 됐다. <버라이어티>가 “견고하고 우아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진부한 영화”라고 평하는 등 언론과 평단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지만, 일반 시사에서 많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결국 심사위원단의 마음까지 훔쳤다. 지금까지 작품 중 가장 사적인 영화로 느껴진다. __나 자신의 기억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크라코바의 게토에서 지낸 경험이 있다. 영화의 배경을 바르샤바로 잡았고, 당시의 자료를 수집했다. 원작은 스필만의 실제 경험담으로, 내 얘기는 아니지만 나와 관련이 되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묘사가 가능했다. 원작 자체가 절제의 힘을 갖고 있는데, 영화에서 그 힘을 간직하려고 했다. 영화 후반부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주인공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입장, 즉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당신 자신의 이야기인가. __내가 답할 질문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자에게 물어보라. 당신 자신이 크라코바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는가. __촬영보다는 영화를 위한 자료수집, 시나리오 구성 등의 준비과정이 더 힘들었다. 준비과정에서 때때로 오래 전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요소들을 마주하는 바람에 더 괴로웠다. 이전의 몽환적인 판타지류의 영화와 이번처럼 실제 역사와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간에 차이가 있는가. 이를 계기로 차후 연출방향에 변화가 있을 것인가. __당연히 당신이 말한 두 종류의 영화간에는 차이가 있다. 진실된 주제가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흥미롭다. 피상적인 즐거움만 주는 영화는 다시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과거에 경박한 영화만 만들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이번 촬영중에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엑스트라들도 많이 지지해주었다. 약 1200명이 아침 일찍부터 해질 무렵까지 함께 일했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환상적이었다. 영화를 마친 뒤에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감독의 진을 빼는 것은 촬영이 아니라, 현대사회에 만연하는 소비풍조, 스튜디오와의 문제,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각종 메모 및 분장이다. 이번에는 감독의 힘의 80%를 앗아가버리는 이런 부차적인 문제들에 전혀 시달리지 않고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1%의 힘도 뺏기지 않았다. 영화에서 미국의 책임을 언급하는 신은 원작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추가된 것인가. __주인공 아버지의 대사 중 미국을 비난하는 부분이 있다. 그 당시 미국에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어야 했다는 내용인데, 원작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영미권 주재 폴란드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통해 나치의 만행을 폭로한 예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문제를 자세히 영화에서 다루는 것은 영화의 방향을 흔들어놓는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아서 유보했다. ▶ 칸영화제 5월26일 폐막, 황금종려상에 <피아니스트> ▶ 칸 이모저모 & 칸에서 온 기억할만한 말들 ▶ 제 55회 칸 영화제 수상작(자)들(1) ▶ 제 55회 칸 영화제 수상작(자)들(2) - 로만 폴란스키(황금종려상) ▶ 제 55회 칸 영화제 수상작(자)들(3) - 아키 카우리스마키(심사위원 대상) ▶ 제 55회 칸 영화제 수상작(자)들(4) - 폴 토머스 앤더슨(감독상) ▶ 사진으로 보는 칸의 12일

할리우드의 한국인 배우 오순택의 연기인생 40년

지난 40년간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한국인 배우 오순택, 현재 연극원 초빙교수로 한국에 와 있는 그를 만나 이국땅에서 이국의 언어로 연기해야 했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카메라의 중심에 있지 못했지만 인생의 중심을 잃지 않았던 어떤 노배우의 삶을 돌아본다.편집자주 오순택씨는 이방인이다. 지난 40여년간 미국에서 활동한 한국인 배우를, 그의 조국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오순택씨는 이방인이다. 1959년 단돈 15달러를 들고 LA공항에 도착한 그에게 할리우드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조명이 비치지 않는 구석자리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건 오순택이라는 한국 이름을 기억해달라는 무언의 시위이자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연극원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올해 일흔이다. 낯선 이름이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어디선가 봤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로 나온 에서 오순택씨는 007을 돕는 영국 정보부의 홍콩요원으로 등장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뮬란>에선 뮬란의 아버지 역으로 목소리를 빌려줬고 <에어울프> <맥가이버> <쿵후> <마르코 폴로> 등 국내 방영됐던 미국의 TV시리즈에서도 동양인 조연으로 빈번히 출연했다. TV나 영화에서 이름을 떨칠 배역을 맡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흑인과 백인의 키스조차 금기였던 시대에 피부색이 노란 남자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의 국적은 사라졌다. 할리우드에서 오순택은 중국, 일본, 한국, 홍콩 등 몇 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동양인 배우일 뿐이었다. 강의가 끝난 뒤 연극원의 교수실을 찾았을 때 그는 그간 출연작의 사진이 들어 있는 CD 한장을 먼저 건넨다. 프린트된 사진마다 출연작의 제목을 명기하며 “혹시 사진을 쓸 일이 있다면 이 CD를 사용하고 돌려달라”고 말한다. 결코 카메라의 중심에 설 수 없었던 배우, 하지만 CD에 담긴 사진의 중심엔 그가 있다. 그건 40년을 할리우드에서 꺾이지 않고 살아남은 어떤 의지의 흔적이다. ‘단성대학’ 학생 오순택, 영화에 홀려 미국행 오순택씨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59년. 그는 “영화에 홀려 홀홀단신 LA행 비행기에 올라탔다”고 말한다. 전쟁의 폐허가 복구되지 못한 50년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던 그에게 영화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황홀한 세상을 보여줬다. “집에서 넌 연대 다니는 게 아니라 단성대학에 다닌다고 할 정도였죠. 단성사에서 영화를 보는데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영화들이 참 많이 들어왔어요. 존 포드의 서부극, 장 콕토의 영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 비토리오 데 시카의 <구두닦이> 등 숱한 영화를 봤죠.” 스크린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던 시절, 그는 영화를 보면서 영어를 익혔다. “어디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영화를 할 수 있는지 몰랐지만 일단 미국에 가야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한 곳은 UCLA 영화과. 졸업할 무렵 교수들은 연기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며 오순택씨에게 런던이나 뉴욕의 연기학교로 갈 것을 권했다. 교수의 말만 믿고 버스를 타고 사흘 밤낮을 달려 도착한 뉴욕, 졸업생 중에 그레고리 펙과 스티브 매퀸이 있다는 네이버후드 연극학교에서 1년을 버틴 그는 이듬해 UCLA로 돌아갔다. 하루에 2∼3시간밖에 못 자면서 아르바이트를 했건만 뉴욕의 엄청난 물가에 학비까지 감당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UCLA 대학원 과정에 들어가려니까 네이버후드 연극학교에서 다시 연락이 왔어요.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줄 테니 학교를 계속다니라는 거예요. 대학원 등록만 해놓고 뉴욕으로 다시 갔죠.” 뉴욕의 연극학교와 UCLA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는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배우 몇명이 주축이 된 LA의 작은 극단에 들어갔다. 영화나 TV에서 단역 출연을 계속하던 그가 주목받은 계기는 이 극단에서 무대에 올린 <라쇼몽>.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로 알려진 뒤 백인 배우들을 써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던 <라쇼몽>을 동양인으로 구성된 LA의 작은 극단이 다시 무대에 부활시킨 것이다. 당시 <버라이어티> <할리우드 리포터> 등이 이런 사실을 전하면서 오순택씨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배우의 경력이 진전하려면 천사를 만나야 해요. 제겐 뉴욕의 연극학교에서 장학금을 주며 도와줬던 앰버시필름의 사장과 에 캐스팅하면서 마음대로 일할 수 있는 노동허가를 얻어준 그는 60년대 중반 시작된 직업배우의 길이 비교적 순탄하게 풀렸다고 말한다. 2차대전 당시 일본과 싸우는 이야기들이 무수히 제작됐기에 동양인 배우로서 출연작이 끊길 염려는 별로 없었다. 영어 잘하고 연기력 있는 동양인을 찾던 당시 할리우드로선 오순택씨처럼 탄탄한 배우코스를 밟은 인물이 반가웠을 법하다. “동양인에게 주어지는 배역이 뻔하죠. 정원사, 세탁소 주인, 슈퍼마켓 주인, 그런 게 대부분인데 안 한다고 했어요. 출연제의를 받았을 때도 그런 역이면 안 하겠다고 했어요. 미련한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먹고살기 위해 그런 역을 한다는 데 저항감이 있었죠.” 조엘 슈마허의 영화 <폴링 다운>에 출연하지 않은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각본을 보니까 한국인 슈퍼마켓 주인이에요. 그런데 마이클 더글러스가 난동을 피우는데 겁나서 그냥 숨어 있는 거예요. 전 그럴 수 없다고 봐요. 어떤 백인이 들어와서 자기 전 재산을 때려부수고 있는데 카운터 뒤에 숨어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동양인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지 않는 거죠.” 연기생활을 이어가는 것만도 힘겨운 할리우드에서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피트니스센터를 운영하며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준 아내와 “내년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기 때문. “한국을 떠날 때 미국에 정착하러 간 게 아니었어요. 영화를 배워 돌아가리라 생각했고 내년엔 간다, 내년에 간다 하다가 40년이 지났어요.”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하면 <폴링 다운>에 출연하는 편이 옳았을지 모른다고 덧붙인다. “설익은 자존심이었을지도 몰라요. 오히려 출연해서 이 부분을 고쳐달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았나 싶네요. 동양인을 캐리커처로,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그리지 맙시다, 라고 주장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게 작품의 질도 높이는 길일 테니까요.” 하지만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지금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쨌든 동양인을 천편일률적으로 그리는 미국영화에 오순택씨처럼 직접적인 반감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한국영화 성장은 나의 힘 미국에서 배우생활을 하면서 그가 느낀 설움엔 약소민족의 한도 들어 있다. “일본의 힘이 커지면서 더이상 일본인 역을 못하게 됐어요. 일본에서 압력을 넣은 거죠. 미니시리즈 <마르코 폴로>를 할 때는 쿠빌라이 칸의 아들로 캐스팅됐다 밀려났는데, 제작비 일부를 일본에서 대니까 일본배우가 나와야 한다는 거였죠. 요즘엔 성룡, 오우삼, 주윤발 등 홍콩의 영화인력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데 중국어를 못하니까 캐스팅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비로소 외국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한국영화의 존재를 그는 진심으로 환영한다. “80년대 나름대로 한국영화가 국제적인 인지도를 얻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죠. 능력있는 감독이 미국에 와서 작업하기를 기대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계속 이것저것 노력하다 지쳐서 그만뒀어요. 80년대엔 한국에 자주 왔었는데 그뒤론 10년간 한국에 얼씬도 안 했죠.” 그래도 그의 마음에서 조국이 지워진 적은 없다. 1978년부터 LA에서 재미한국인의 삶을 풍자한 마당놀이를 계속하고 있으며 LA폭동 이후엔 매년 한 차례씩 한국인, 멕시칸, 스페니시, 흑인이 함께 어울리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는 지금 한국영화의 비약적 발전에 큰 기대를 품고 있다. 지금 소망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정열을 느낄 만한 프로젝트를 만나 인종적인 구애를 받지않고 연기할 수 있다면”이라고 답한다. 오랜 세월 이국땅에서 변방의 삶을 연기해야 했던 그의 눈에 얼핏 물기가 보이는 것도 같다. 사방이 흐릿해진 저녁, 인터뷰를 마치고 고즈넉한 연극원 캠퍼스를 걸어나오면서 그는 연기를 하든가 교수를 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될 것 같은데 고민이라고 말한다. 그가 선뜻 학교에 눌러앉지 않는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40년 걸려 연기를 공부해왔는데, 그걸 강의실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 그게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무상한 세월이 스쳐간 그의 얼굴이 아직 영화광 소년의 표정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주요 출연작 TV시리즈 (1968) 영화 (1974) TV시리즈 <돌아온 찰리 팬>(1979) 영화 <파이널 카운트다운>(1980) TV시리즈 <마르코 폴로>(1980) 영화 <데쓰위시4>(1987) TV시리즈 <쿵후>(1993) 영화 <베벌리힐즈 닌자>(1997) 영화 <뮬란>(1998)▶ 할리우드의 한국인 배우 오순택의 연기인생 40년 ▶ 연극원 연기실습실을 찾아가다

신인감독 8인 (4) - <거울 속으로>의 김성호

그는 왜 감독이 되었나? 벽과 기둥은, 그가 품은 아이디어와 스토리를 세상에 전해주기에는 너무 무뚝뚝했다. 그것이 연세대 건축공학과 졸업반 시절 대한민국 건축대전에 입선하고 설계사무소에 취직해 건축가의 길을 걷던 김성호(32) 감독이 익숙한 건물들의 거리를 떠나 영화라는 이방으로 용감하게 유턴한 사연이다. 표현매체로서 건축이 지닌 운신의 한계를 카메라로 뛰어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16mm 워크숍으로 간단한 자가 적성검사를 치른 다음 1996년 무작정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2001년까지 뉴욕시립대와 뉴스쿨대학원에서 영화와 비디오, 컴퓨터애니메이션 제작을 공부했다. 국내 독립단편영화제를 비롯해 영국, 미국의 여러 단편영화제에 초대받은 <아이 더 아이>(I the Eye), <케첩 스토리> 등 김성호 감독의 짧은 필름들은 뮤직비디오에서 클레이메이션에 이르는 다채로운 팔레트를 자랑하지만, 그 화사한 표면 아래에는 시간을 공간화하고 관객의 지각(知覺)을 현혹하는 영화의 마법을 파고드는 집중력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에 난생 처음 쓴 장편 시나리오 <거울 속으로>를 출품한 김성호 감독은, 한국 신인 감독을 대상으로 신설된 NDIF 부문에서 수상함으로써 단숨에 장편영화로 건너가는 가교를 놓았다. 본인은 수줍게 행운을 말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찍을지를 정밀한 도면으로 그려놓은 <거울 속으로> 시나리오를 탐낸 제작자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알려진 이야기다. 삼성영상사업단 한국영화 팀장으로 일했던 김은영 프로듀서가 차린 키플러스픽처스의 창립 작품으로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중이다. 그는 왜 <거울 속으로>를 연출하나? 오히려 왜 이 영화냐고 묻는 게 계면쩍다. 물증은 김 감독의 단편들. 시간을 하나의 리본처럼 잘라 뫼비우스의 띠 모양으로 꼬아붙인 <러브 바이러스>, 거울 안과 밖을 이웃한 두 세계로 설정한 <미러>, 한 호흡으로 이어진 롱테이크 화면에 배신한 애인의 살해범으로 몰린 여자의 독백을 포개, 말하는 이와 보는 이, 스토리의 주체를 거듭 반전시키는 <아이 더 아이>는 모두 <거울 속으로>의 파편이다. 도플갱어, 데칼코마니, 안팎이 하나인 클라인 씨의 병, 보는 행위의 미스터리를 일깨우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과 에셔의 판화에 매료되는 취향도 김성호 감독이 왜 거울을 둘러싼 모험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지 설명한다. “내가 보는 거울 속 반영은 과연 나인가?”라는 관념적 질문은 곧이곧대로 영상에 옮겨지는 순간 공포가 된다는 사실에 착안한 <거울 속으로>는 한마디로 “호러, 그 이상의 호러”를 지향한다. 잘 짜인 형사 추리물, 고어, 심령 공포의 자극과 재미로 관객을 유인해놓고는 시각적 관습을 전복하는 화면으로 역습한다는 설계. 김성호 감독이 내민 조밀한 시나리오와 혼자 보기 아까운 비주얼 컨셉 북은, 운 좋으면 우리에게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화술과 르네 마그리트의 눈, 건축가의 손을 가진 감독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바람을 넣는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영화는 음모”라고 말하는 김성호 감독은 유혹적인 스토리와 명인의 테크닉을 겸비한 작품들에 맥을 못 춘다. “힘과 메시지, 스타일이 고루 뛰어난 스티븐 스필버그, 올리버 스톤, 스파이크 리의 영화를 좋아하고 이야기 만드는 방식이 감탄스런 코언 형제의 영화를 언제나 즐기며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영향도 받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꾸는 영화를 동경한 대학 시절엔 스파이크 리, 휴즈 형제, 존 싱글턴의 영화에 반했던 경력이 있다.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 사진 정진환 Synopsis 화재로 폐쇄됐다가 다시 개점을 준비중인 백화점에서 의문의 죽음이 발생한다. 실물과 반영을 혼동한 총기 오발로 동료를 죽게 만든 뒤 퇴직한 형사 출신의 보안책임자 우영민은 마치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사람을 살해한 것처럼 보이는 기괴한 연쇄살인사건의 미궁에 빠져든다. 우영민 앞에 다시 나타난 옛날의 라이벌 하현수 형사는 유족의 복수를 의심하는 한편 우영민을 견제하고, 현장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다 발각된 이지현은 화재 당시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한 쌍둥이 언니가 아직 백화점 안에 남아 있다고 호소한다. ▶ 신인감독 8인 (1) - <이중간첩>의 김현정 감독 ▶ 신인감독 8인 (2) - <중독>의 박영훈 감독 ▶ 신인감독 8인 (3) -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의 모지은 감독 ▶ 신인감독 8인 (4) - <거울 속으로>의 김성호 ▶ 신인감독 8인 (5) - <빙우>의 김은숙 감독 ▶ 신인감독 8인 (6) - <동정없는 세상>의 김종현 감독 ▶ 신인감독 8인 (7) - <첫눈>의 이혜영 감독 ▶ 신인감독 8인 (8) - <크랙>의 김태균 감독

신인감독 8인 (3) -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의 모지은 감독

그는 왜 감독이 되었나 모지은 감독은 대학교 3학년 처음으로 단편영화를 찍었다. 배추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사는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마음을 열게 되는, 단순하지만 힘들었던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는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던 것과는 뭔가 다른 공부를 해야할 것 같아”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영화하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연극 대신 영화를 선택했다. 치열할 것도 없는 그 과정을 들어보면 이 여자, 너무 생각이 없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스물여덟 어린 나이에 촬영현장을 휘어잡은 모지은 감독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고민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곧바로 뛰어드는 편을 택하는 저돌적인 젊은이다. “영화를 만들어야지 생각하니까, 바로 감독을 해야지라는 생각이 따라오더라구요.” 그 이후로는 딴 길로 새지 않고 영화만 했다. 그의 늦은 결정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만은 아니다. 모지은 감독 역시 영화감독들이 흔히 거친 어린 시절을 고만고만하게 밟아왔다. 아버지가 사다준 8mm 영사기로 <재크와 콩나무>를 되풀이해보기도 했고, 밤늦게 <주말의 명화>를 보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혼나기도 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아이들에게 영화와 만화, 그 둘을 끌어안는 문화의 세계를 보여준 아버지는 모지은 감독이 살고 있는 현재의 뿌리가 돼주었다. 그저 영화가 좋다는 모지은 감독은 곧 단편 작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 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편과 단편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여전히 재미있게 일할 수 있다는 그는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지만 언젠가는 꼭 만들” 영화 한편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는 왜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를 연출하는가 제작사 영화세상의 안동규 대표는 독립단편영화제에 갔다가 “그렇게 꾀죄죄할 수 없는” 조그만 여자애 하나를 만났다. 함께 단편영화를 찍는 스탭들에게 차를 끓여준다면서 작은 비닐봉투에 억지로 ‘부루스타’를 우겨넣고 다니던, 일 시키면 무조건 일만 할 것 같았던 그 여자애가 모지은 감독이었다. 처음엔 스토리보드만 맡길 생각이었다. <친구>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스토리보드를 그린 모지은 감독은 영화와 만화를 두루 섭렵한 탓에 연출의 감각이 배어 있는 스토리보드를 곧잘 내놓았다. 그러나 만나서 얘기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냥 네가 감독 해라”. 며칠 뒤 모지은 감독이 찾아와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그 며칠 동안 모지은 감독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다. 반쯤은 말렸고 반쯤은 부추겼는데, 가장 좋아하는 선배 하나가 찬성하는 바람에 덥석 영화를 물어버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젊은 감독이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로 데뷔하고 싶었을까. 모지은 감독은 “내가 잘할 수 있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며 쓸데없는 의문을 잘라냈다. “각색 기간 3일 중 이틀은 작가와 수다떨다 보낼 정도로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현재 후반작업 중인 <좋은 사람…>은 8월2일 개봉할 예정. 마음을 열고 나니 나이가 어린 것도 여자라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더라는 모지은 감독처럼, 유쾌하고 망설임 없는 영화가 될 것 같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모지은 감독은 모든 영화를 다 좋아한다. 나쁜 영화도 왜 저렇게 찍었을까, 고민하다보면 보탬이 된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영화’는 따로 없다고 주장하던 그가 마침내 내놓은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와 켄 로치의 영화들이다. 친구 레포트를 대신 써주기 위해 본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는 처음엔 뭐가 뭔지 몰랐지만 두 번째는 너무 슬픈 마음으로 빠져들었다. 그뒤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졸릴 거라는 선입견만 버리면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감독이라고 한다. 켄 로치는 “영화는 저렇게 찍어야 하는데”라는 욕심을 품게 만든 감독이었다. “정말 센 사람이에요.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니까, 센 사람 보면 무릎 꿇고 싶어지잖아요.” 글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Synopsis 효진은 타고난 커플 매니저. 그러나 자기 짝을 찾을 때는 서툴기 짝이 없다. 잘생기고 똑똑한 애인은 벌써 예전에 그녀를 차버렸지만, 시집 못 간 스트레스를 먹는 일로 푸는 친구들 앞에서 푸념 한마디 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친구 준마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효진 앞에 평점 95점짜리 완벽한 고객 현수가 나타나 조금씩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신은경과 정준호, 공형진, 김여진 등이 출연하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로맨틱코미디. 모지은 감독은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의 틀을 벗어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보였다.▶ 신인감독 8인 (1) - <이중간첩>의 김현정 감독 ▶ 신인감독 8인 (2) - <중독>의 박영훈 감독 ▶ 신인감독 8인 (3) -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의 모지은 감독 ▶ 신인감독 8인 (4) - <거울 속으로>의 김성호 ▶ 신인감독 8인 (5) - <빙우>의 김은숙 감독 ▶ 신인감독 8인 (6) - <동정없는 세상>의 김종현 감독 ▶ 신인감독 8인 (7) - <첫눈>의 이혜영 감독 ▶ 신인감독 8인 (8) - <크랙>의 김태균 감독

신인감독 8인 (2) - <중독>의 박영훈 감독

그는 왜 감독이 되었나 턱선이 조금만 더 단정했어도 그는 감독이 되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 생겼냐고? 윤종찬 감독의 <소름>에서, 이발소에 걸린 가족사진의 아버지를 기억하는지. 김명민-장진영, 배다른 남매의 아버지로 모든 비극의 출발이 되는 이 개망나니 같은 인간은 사진으로만 모습을 보일 뿐이다. 그 얼굴의 주인공이 박영훈이다. 원래 그의 꿈은 배우였다.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연기전공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선배 학생들의 단편영화들에 출연했다. 화면을 보니 정면은 그런대로 볼 만했지만, 측면이 너무 안 좋았다. “이 얼굴로는 한계가 있겠다, 게다가 나는 발음까지 샌다.” 3학년 때 연기에서 연출로 바꿨다. 그때도 영화감독을 꿈꾸진 않았다. 졸업작품으로 내놓은 것도 연극이다. 영화는, “가정사정이 썩 넉넉한 것도 아닌” 그에게 돈이 많이 들었다. 취직시험을 조금만 더 잘 봤어도 그는 감독이 되지 않았을 거다. 방송사 PD 시험을 봤다. 1년 동안 공부했는데, 떨어졌다. 서울텔레콤에 들어가 <신한국기행> 같은 다큐멘터리에 AD로 6개월 따라다녔다. 따라가다보니 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감독이 되자’는 뜻을 세운 게 92년, 우리 나이로 29살. 박광우 감독의 <사랑의 종합병원>, 김호선 감독의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거쳐 박철수 감독 밑에서 <산부인과> 등 세편을 찍고 데뷔를 결심했다. 92∼97년까지 5년간 연출부 일하면서 번 돈이 2500만원. 그래도 혼자여서 괜찮았다. 98년에 결혼했는데, 시나리오 다 쓴 뒤 영화가 엎어지기를 두 차례. 40살 전에는 데뷔해야 하는데 시간은 가고, 돈 벌어오는 부인에게 그래도 큰소리쳤다. “한방에 갚겠다.” 39살, 스스로 정한 데드라인의 문턱에서 기회가 왔다. 그는 왜 <중독>을 연출하는가 <중독>은 ‘빙의’(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것)를 키워드로 내세운 멜로다. 박 감독이 데뷔를 마음먹고 썼던 두편의 시나리오도 멜로다. 첫 번째 ‘정인’은 명성황후를 남몰래 사랑했던 무사의 이야기이고, 두 번째 ‘디셈버’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복고풍의 멜로다. ‘정인’은 펀딩이 안 됐고, ‘디셈버’는 같은 컨셉의 <선물>이 먼저 개봉하는 바람에 엎어졌다. <중독>은 제작사 씨네2000이 아이템을 개발해서 박 감독에게 제안한 전형적인 기획영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사랑이라는 걸 배제할 수 없지 않냐”고 짧게 말하는 그가 멜로를 크게 선호하는 것 같진 않다. 아무래도 멜로와 전생의 인연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얼핏 고결한 사랑에 대한 찬가 같지만, <중독>에는 섬뜩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그 안의 사랑은 만장일치로 지지받을 사랑이 아니다. 여느 기획영화처럼 플롯 구성을 중시하는 탓에, 분위기가 초반의 팬시상품처럼 예쁜 멜로에서 교통사고 뒤 은수의 갈등으로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고 이게 마지막에 또 바뀐다. 결코 연출이 쉬워 보이는 영화가 아니다. “연기자의 감정선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으로 영화를 이어가야 한다. 대사도 적어서 특히 이병헌씨의 대진 역은 연기하기 쉽지 않을 것같다. 또 연기로만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다른 멜로 같으면 인물을 크게 비추면 될 텐데, 이 영화에선 카메라가 적절히 떨어져 큰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집안 풍경과 인물의 움직임 같은 걸로 느낌을 줘야할 것 같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묻자마자 답이 나왔다. ‘이소룡 선생’께서 출연하신 <용쟁호투>. 초등학교 6학년 때 도봉동 집에서 의정부의 시민회관까지 가서 이 영화를 봤다. 극장료가 쌌기 때문. 너무 근사하고 멋있었다. 그건 배우였다. 배우가 되자! 그뒤부터 장래 희망란의 답은 무조건 배우였다. 감독의 길로 들어선 뒤, 자신이 조감독하는 영화의 조단역으로 출연했다. 앞으로도 출연 교섭이 온다면, 자기가 감독하는 영화 빼고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용쟁호투>의 세례를 받은 감독답게 선이 굵은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비주얼이 강조되는 액션영화라기보다 사람의 감정이 보이고, 그 감정의 충돌로 액션이 일어나는 영화.” 임범 isman@hani.co.kr Synopsis 대진(이병헌)은 형 호진(이얼), 형수 은수(이미연) 부부와 셋이 함께 산다. 카레이서인 대진은 경기에서 사고로 의식을 잃는다. 공교롭게 호진도 같은 시간에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 1년 뒤, 기적적으로 깨어난 대진은 자신이 호진이라고 주장하는 데 더해 말투와 습관까지 호진과 똑같이 행동한다. 혼란 속에 갈등하던 은수는 급기야 호진과 둘만 아는 과거사를 대진이 기억해내자 남편의 영혼이 시동생에게 빙의됐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신인감독 8인 (1) - <이중간첩>의 김현정 감독 ▶ 신인감독 8인 (2) - <중독>의 박영훈 감독 ▶ 신인감독 8인 (3) -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의 모지은 감독 ▶ 신인감독 8인 (4) - <거울 속으로>의 김성호 ▶ 신인감독 8인 (5) - <빙우>의 김은숙 감독 ▶ 신인감독 8인 (6) - <동정없는 세상>의 김종현 감독 ▶ 신인감독 8인 (7) - <첫눈>의 이혜영 감독 ▶ 신인감독 8인 (8) - <크랙>의 김태균 감독

[Review] 레지던트이블

■ Story * 21세기, 국가권력보다도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엄브렐러’사의 비밀연구소 하이브에서 바이러스 유출사고가 벌어진다. 연구소를 통제하는 슈퍼 컴퓨터 레드 퀸은 즉각 연구소를 봉쇄하고, 감염을 우려하여 모든 직원을 말살한다. 레드 퀸을 재부팅하고 연구소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엄브렐러의 특수부대가 하이브로 잠입한다. 입구를 지키는 보안요원 앨리스(밀라 요보비치)는 특수부대와 함께 레드 퀸을 찾아간다. 레드 퀸이 살포한 신경가스에 노출되었던 앨리스의 기억은 불완전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되살아난다. 앨리스와 특수부대는 레드 퀸에게 접근하여 재부팅에 성공하지만, 방어 시스템 때문에 특수부대 절반이 목숨을 잃는다. 하이브를 빠져나오려던 앨리스 일행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좀비가 된 연구원들과 맞닥뜨린다. 동력을 끄고 재부팅하는 바람에 닫혀 있는 문이 모두 열려 좀비와 연구중이던 기형생물들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 Review <레지던트 이블>의 원작은, 격렬하고 끔찍한 비디오게임이다. 좀비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뜯어먹히는, 소름끼치는 효과음이 등골을 시리게 하는 공포 액션게임. 일본에서의 출시명은 <바이오하자드>, 미국에서는 <레지던트 이블>이었다. 영화로 각색된 <레지던트 이블>은 게임의 설정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테크노 음악이 귀를 자극하고, ‘쿨한’ 느낌의 푸른빛이 감도는 연구소에서 신나게 싸운다. 게임에서 직접 좀비를 쓰러트리는 ‘주체적’인 쾌감은 없지만, <툼 레이더>와 <매트릭스>를 능가하는 여전사의 화끈한 액션을 보는 재미는 최고다. 94년 주드 로 주연의 <쇼핑>으로 데뷔했던 폴 앤더슨은 할리우드 출세작인 <모탈 컴뱃>에 이어 <솔져> <이벤트 호라이즌> 등 일관되게 SF, 액션, 공포를 아우르는 영화만을 만들어왔다. 작가적인 독창성은 없지만, 폴 앤더슨은 <이벤트 호라이즌>처럼 다양한 요소와 주제를 끌어들여 자기만의 터치로 다듬어낸 영화를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시각적 쾌감 하나는 분명하다. <이벤트 호라이즌>에 등장하는 중세풍의 우주선이나 <레지던트 이블>의 차갑고 금속성의 미로 같은 느낌을 주는 연구소처럼. 또한 폴 앤더슨이 그려내는 액션은 하드코어 음악처럼 경쾌하게 직선으로 뻗어나간다. 폴 앤더슨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레지던트 이블>은 게임과 유사하게 진행된다. 최초의 목표는 레드 퀸에 접근하는 것이다. 접근하기 위해 약간의 수수께끼 풀이와 액션이 필요하다. 레드 퀸을 재부팅하고 나면, 좀비가 기다린다. 한 가지의 임무가 끝나면 더 어려운 임무가 기다리고 부하들을 물리치면 보스가 등장한다. 한 단계씩 높아지는 액션강도를 폴 앤더슨은 훌륭하게 소화한다. 물론 액션을 업그레이드하는 것만으로 긴장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폴 앤더슨은 ‘기억’으로 <레지던트 이블>의 드라마에 윤기를 더한다. 첫 장면에서 앨리스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몇 가지 장면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떠다닌다. 또 한명의 보안요원 스펜서 역시 기억을 잃었다. 앨리스와 스펜서는 특수부대원과 함께 좀비를 해치우고 다니면서, 조금씩 기억이 살아난다. 하지만 시간순이 아니다. 무작위로, 무언가를 보았을 때 관련된 기억이 떠오른다. 바이러스를 유출시킨 것은 누구일까, 앨리스는 누구를 배신한 것일까, 앨리스와 스펜서의 관계는 무엇일까 등등.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영화의 방향이 틀어지고, 사람들의 관계가 바뀐다. 적이 동지가 되고 동지가 적이 된다. 그러나 그 기억조차 불완전하다. 모든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주인공의 이름이 앨리스인 것은, 그런 이유다.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 앨리스는 싸우면서 자신의 기억을 찾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그러나 돌아온 세계는 여전히 ‘이상한 나라’다. 폴 앤더슨은 자신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구축한다. 미술감독인 리처드 브리지란드는 선과 공간을 중시하는 일본 건축을 참조하여, <레지던트 이블>에서는 주로 유리와 강철을 이용한 세트를 만들었다. 유리와 거울을 활용한 일종의 착시효과로 미로에 들어온 느낌도 준다. 레드 퀸에 접근하는 통로는 사방이 거울로 되어, 굴절된 백색광선이 정면에서 다가오는 파란 레이저 광선과 대조되어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고립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어두운 복도를 그림자 하나 안 생길 정도로 캄캄하게 만들었다. 저택의 오래된 시계판에 앨리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든가, 레드퀸의 계산칩이 체스판 모양을 한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극한상황에서 달음질치는 심장박동처럼 격렬한 <레지던트 이블>의 음악은 <미믹> <스크림> 등을 작곡했던 마르코 벨트라미가 맡았고 마릴린 맨슨, 슬립낫, 콜 챔버, 피어 팩토리, 람스타인 등이 참여했다. <레지던트 이블>은 본분을 알고 있다. 폴 앤더슨은 강도높은 액션과 섬뜩한 이야기를 결합하여 관객을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망설이지도, 과용도 하지 않는다. <레지던트 이블>은 좀비영화에 속하지만, 일반적인 좀비영화의 관습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좀비가 된다면’이란 일관된 질문도, 가볍게 처리한다. 팔다리가 뜯기고, 내장이 터져나오는 장면 같은 것들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대중적인 액션영화에서 허용되는 정도의 ‘고어’에 만족한다. 대신 밀라 요보비치의 액션에는 확실한 방점을 찍는다. 비대칭의 빨간 드레스에 가죽 부츠를 신은 밀라 요보비치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떡 벌어진 어깨도, <레지던트 이블>에서만은 황홀하게 보인다. 벽을 짚고, 가죽 없는 맹견을 걷어찰 때 그녀의 ‘자태’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김봉석/영화평론가 lotusid@hanimail.net

솔직한 웃음, 눈물, 커피향이 난다, <아 유 레디?>의 김보경

호리호리한 몸에 가녀린 턱선, 수줍은 듯한 첫인상이 사기 인형처럼 가냘픈가 했더니, 이내 쨍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기 인형을 닮은 그가 아니라, 잠깐 동안의 선입견이 조각나는 소리. “옛날부터 친구들이 그랬어요. 입만 열지 말라구. 그럼 분위기 있는 여자 같다구요.” 멋쩍은 듯 쓱 웃어버리는 김보경의 털털한 말투는, 상쾌한 파괴력으로 긴장의 방어선을 해제해버린다. “가증스러워서…”라며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게 영 쑥스러운 눈치더니, 오붓이 앉아 말문을 열자 웃음도 눈물도 참 솔직하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를 부르며, 얼굴을 반쯤 가린 앞머리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눈빛처럼 아스라하고도 도발적인 첫사랑의 공기를 되살려낸 진숙. “좋은 기억으로 남으려면 지금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할 만큼 넘치는 시선을 받았던 <친구>는 그의 두 번째 영화였다. 기억하는 이가 많진 않지만, 정지영 감독의 <까>가 그의 데뷔작이다. <친구>를 만났을 때, 김보경은 “이런 영화를 한편 하면 원이 없을 거라고, 다른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98년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오디션을 전전하던 백수 시절, 백화점 지하에서 빵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구한 것만으로도 “할 일이 있다는 게 기뻤다”니까. 허망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면서도 부산 진여고 시절부터 연극반과 극단을 드나들며 소망해온 연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그때는, 지금 돌이켜봐도 목소리에 물기가 번지는 기억이다. 하지만 막상 <친구>를 지나오자 다른 모습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슬그머니 생겨났다. “과연 어떤 영화가 들어올까, 아무것도 안 들어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반, “다시 보니 별로네” 하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 반이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난 지금, 김보경이 고른 ‘다른 모습’은 <아 유 레디?>의 주희다. <아 유 레디?>는 제각각 다른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테마파크에서 자신의 악몽과 마주하는 모험판타지. <친구> 이후 대부분의 시나리오들이 섹시한 이미지를 원했던 것과 달리, 차갑고 폐쇄적인 주희와 드물게 보는 장르의 다름에 마음이 끌렸다. 주희는 아들을 낳기 위해 죽음을 택한 어머니, 아내를 포기한 아버지 때문에 남자와 세상에 불신의 벽을 쌓은 20대 후반의 동물행동학 연구원. 신인 윤상호 감독은 단발머리에 어두운 옷을 입은 김보경을 보고, “커피향이 난다”며 주희로 점찍었다. 1남3녀 중 셋째딸에, 남동생이 태어날 때 어머니가 위험할 뻔했다는 비슷한 경험을 공통분모로 다가갔지만, 주희가 되어 악몽과 사투를 벌이기 위한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뛴다는 게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며, 타이의 오지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리다가 쓰러질 때마다 부치는 체력에 속이 상했다고. <친구> 때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행은 생각도 못했는데, <아 유 레디?> 개봉을 앞두고는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며 ‘주연배우’다운 걱정을 하기도 한다. 오는 6월11일부터는 복수의 칼날을 품은 무사의 딸 시명으로 <청풍명월>의 촬영장에 합류할 예정. 공장 밑바닥에서부터 뭔가를 이뤄내는 서민적인 삶도, 죽음에 이르는 사랑도 만나보고 싶다며 일곱 빛깔 꿈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스물일곱의 이 배우, 준비는 끝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