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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 중앙대 교수 이충직

지난 5월28일 제2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뽑힌 이충직(45) 중앙대 교수는 대외적인 활동이 크게 부각됐던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90년대 중반 김동원 감독이 독립영화 비디오 제작으로 구속됐을 때 3인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했고, 스크린쿼터 사수운동 때 교단을 대표해 1차로 머리를 삭발했다. 인권영화제 일을 처음부터 꾸준히 해왔고, 영화법 개폐 운동을 비롯한 영화계의 현안이 있을 때 뒷전으로 물러서지 않고 해야할 일과 발언을 했다. 다만 공식직함을 걸고 나선 경우가 드물 뿐이다. 아울러 같은 중앙대의 이광모, 이용관 교수가 대외적 활동을 비중있게 할 수 있도록 학교 행정의 여러 일들을 처리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영화계를 신구파로 나눈다면, 그의 입장은 분명히 젊은 쪽에 서 있지만 이번 영진위 위원장 호선 때 구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쪽에서도 이렇다할 반대가 없었다. 사람과 술 좋아하고 대인관계가 크게 모나지 않은 그의 기질이 장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2기 영진위의 위원장 자리는 1기 때보다 훨씬 업무량이 많아졌다. 부위원장 자리가 상근에서 비상근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위원장 가운데 가장 실세 위원장이 될 수밖에 없다. 편안한 인상이 자유인 같은 냄새를 풍기는 이 위원장은, 취임 직후부터 자유를 잃었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서 홍릉으로 향하고, 업무보고를 받고 현황을 파악하고, 영진위 위원장이 참석해야 하는 공식 행사와 관혼상제를 챙기고 나니 저녁 9시 뉴스가 끝나면 졸음이 쏟아진다. 새벽 2시까지 영화를 보던 습관도 바뀌었고, 위원장이 된 뒤 술자리에 한번도 끼지 못했다.인터뷰가 있던 날도, 인터뷰 바로 뒤에 임금협상 등을 둘러싼 노조와의 약속이 잡혀 있어 마음이 바빠 보였다. 위원들과 함께 회의를 연 것이 이제 겨우 두 차례. 아직 2기 영진위의 노선 같은 게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세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대답을 하기 힘듦을 이해해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상업영화보다 독립·예술영화 지원을 강조하면서 “예산을 소진하지 않고서는 진흥이 있을 수 없다, 영화를 진흥하라고 책정된 예산을 보전하기에 급급해하는 건 일을 안 하겠다는 말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때는 단호한 원칙주의자 같은 표정이 읽히기도 했다. 위원장을 갑자기 맡게 된 것으로 아는데. 지금 같은 위원 인선 과정은 문제가 있다. 무슨 ‘007작전’도 아니고. 갑자기 연락받고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영진위에서 한번 활동해보겠다고 미리 나서면 물밑작업 한다고 하고, 아무런 준비없이 들어가면 또 그것도 문제라고 하고. 3기 위원회 인선 때는 정부가 미리 ‘준비 좀 해주십시요’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이 됐으면 좋겠다. 위원장직은 기왕 위원을 하겠다고 했으면, 좀더 책임을 갖고 해보자는 생각에서 나선 것이다. 2기 영진위 위원 중에 교수들이 많다보니 ‘교수협의회’라는 별명이 생겼다. 영진위 노동조합에서도 교수협의회로 전락해선 안 된다는 걱정어린 성명서를 내기도 했는데. 걱정 안 해도 된다. 현장을 나몰라라 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오히려 세미나에 자주 참여해서 그런지 자유롭게 토론할 줄 안다.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따르는 합리적인 소통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원활한 업무 진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현장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도 좀더 객관적인 사업 집행을 가능케 할 것 같다. 그래도 제작·배급업 등에 종사하는 현장실무형 인사들이 빠져, 발빠르고 적극적인 지원의 공백이 불가피하지 않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답은 있다고 본다. 소위원회를 활성화해서 외부 현장 인력들을 최대한 끌어들이고, 사안별로 전문가 간담회를 수시로 여는 방법 등이 있지 않나. 좀더 유기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한다면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어 영화 스탭들의 모임인 ‘비둘지둥지’에서 제기한 스탭 처우 문제 같은 건 본질적으로는 영진위가 나설 일이 아니지만, 스탭들과 제작자의 대화가 합리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지난번 회의에서 기존 영진위 6개 소위원회를 개편, 재구성하는 문제가 논의됐지만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위원들과 함께 고민중이다. 2기 위원회의 역할 설정을 위해서라도, 1기 위원회에 대한 평가는 필수적인데. 1기 영진위의 중요한 과제는 이전에 정부조직이었던 영화진흥공사를 민간조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조직을 민간화하는 데에 내부잡음이 불가피했다고 본다. 그러나 1기가 했던 구체적인 업무들에 대해선 솔직히 ‘잘한 건 뭐고, 못한 건 뭐다’라고 꼬집을 만큼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해해달라. 이제 1주일됐다. 개인적으로는 업무보고를 받았지만, 아직 다른 위원들은 업무 파악조차 못했다. 다음주부터 위원들과 함께 1기 위원회가 결정한 사업들의 집행이라든지 현안에 관해 집중적인 토론을 열 것이다. 1기와 2기 사이에 한국의 영화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여건변화가 영진위의 중심사업에도 영향을 끼칠지. 그때의 영화산업은 수공업에서 막 벗어나려던 때였다. 그래서 산업적 형태를 구축하는 데 지원의 초점이 맞춰졌던 것 같다. 지금 한국 영화산업은 마케팅비가 제작비를 상회할 만큼 시스템이 갖춰졌다. 1기 때는 제작편수 증대를 위해 투자조합을 결성하고, 제작비를 지원했지만 이제 한국영화 시장은 영진위의 개입을 바라지 않을 만큼 커졌다. 2기의 주요 사업이 저예산영화, 독립영화, 애니메이션 등 비주류영화쪽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상업영화와 꼭 분리할 게 아니라, 비주류영화에 대한 지원 가운데 인력양성 같은 데에도 비중을 높인다면 그 인력들이 산업적 측면에서도 기여하는 걸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기 위원회도 지난해 말 여론을 수렴해서 저예산영화전문투자조합, 시네마테크 전용관 확보 등의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는 소진성 예산이라는 이유를 들어 변경 승인했고 이로 인해 한때 영화계에서는 영진위의 자율성을 훼손한 조치라는 비판이 강하게 일기도 했다. 바깥에서 말하는 것은 쉬운 것 같다. 나도 그때는 문화관광부가 영진위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으니까. 들어와서 막상 이 부분을 정부와 협의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보니 말처럼 쉽지가 않다. 문화부가 예산승인권을 갖고 있는 것이 영진위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진흥금고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정부가 약속한 1500억원의 금고는 내년까지 차질없이 모아지겠지만, 실제 가용할 수 있는 돈은 얼마 안 된다는 점이 아쉽다. 서울종합촬영소가 큰돈을 벌어다주는 상황도 아니고, 문예진흥기금 또한 곧 폐지될 텐데. 비주류영화에 대한 지원은 아무래도 소진성 예산의 증대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기 위원회 역시 정부를 설득하는 데 꽤 많은 공을 들여야 할 것 같다. 과실금만으로 지원사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핵심사업에 소진성 예산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써야 한다. 진흥하라는 건 돈을 쓰라는 얘기다. 영화진흥에 책정된 예산을, 쓰기보다 보전하기에 급급해하는 건 일을 안 하겠다는 말이다. 소진성 예산으로 지원할 경우에는, 지원 대상 선정에 공신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중요할 것 같다. 물론이다. 1기 위원회도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애썼지만, 몇몇 사업에 있어 잡음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이번 출판사업지원 결과를 놓고서도 선정되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이 게시판에 오른다. 2기 위원회는 투명한 절차와 확고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애쓸 것이다. 문제제기는 있을 수 있고, 대신 위원회는 심사가 공정했음을 증명할 수 있으면 된다. 조직적인 차원에서 2기 영진위의 차별점은. 지난 영진법 개정으로 인해 부위원장이 비상임직이 되면서 사무국의 비중이 커졌다. 이건 1기 때와 달리 큰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1기 때는 위원들이 사소한 것까지 결정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 그런 만큼 사무국은 소극적이 됐다. 정작 일해야 할 사람들이 손놓게 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시스템은 없지 않은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1기 위원들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2기 위원회가 그것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소소한 것까지 위원들이 결정하면, 나중에 현장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이 다 결정한다고 할 것 아닌가? 사무국이 좀더 열성적이고 창의적으로 사업을 제안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위원회가 최대한 조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권한만큼 책임도 주어지겠고. 그러다보면 위원회는 취지 그대로 사업을 심의, 의결하는 몫만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기자들이 위원들을 찾는 게 아니라, 사무국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들을 먼저 찾게 되는 게 바람직한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2기 위원회의 안살림을 책임질 사무국장 인선 결과에 대한 관심이 높다. 내부적으로 검토중이다. 업무능력이 뛰어나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면 된다. 인간관계의 융화력도 뛰어나면 좋겠다. 내게 추천권이 있지만, 단순히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1기보다 위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났다. 엄청나게 많아졌다. 부위원장 역할까지 다 해야 하니까. 이제 1주일 했는데 피곤하고 힘들다. 공식적으로 챙겨야 하는 행사도 한두개가 아니다. 관혼상제 없는 곳에서 살고 싶기도 하고. 그런 데에 다니는 게 익숙해져야 하는데 아직은 사람들 만나는 데에 여러 가지 신경이 쓰인다. 하다보면 나아지지 않겠나. 글 임범 isman@hani.co.kr·이영진 anti@hani.co.kr 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스노우맨> 등의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이언 하비

푸근한 풍채의 눈사람이 살아나고, 그와 함께 밤하늘을 날아 환상의 여행을 떠나는 소년의 꿈을 기억하는지. 이언 하비는 해외는 물론 국내에도 비디오로 소개돼 꾸준한 인기를 누려온 영국 애니메이션 <스노우맨>의 프로듀서다. 영국의 대표적인 동화작가 레이몬드 브릭스의 원작에 바탕한 <스노우맨>과 <산타할아버지의 휴가> 등 주로 동화를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으로 옮겨왔다. 올해 전주영화제의 ‘전쟁과 애니메이션’에 소개된 장편 <바람이 불 때>와 단편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 역시 그의 손을 거친 애니메이션. <지상에서…>는 그의 작품을 국내에 배급해온 인피니스에서 최근 비디오로 출시되기도 했다. 전쟁에 대한 우회적인 경고를 담은 2편의 작품과 함께, 그는 지난 5월 초 한국을 다녀갔다. 은빛 수염 아래로 나이를 가늠키 어려운 천진한 미소를 띠곤 하던 그는, 스노맨만큼, 자신이 제작해온 작품들의 판타지만큼 선량한 인상이었다.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런던에서 나고 자란 하비는 셰필드의 대학에서 회계와 경영을 전공했다. 어렸을 때야 부모님의 손에 끌려 극장에 가길 좋아했지만,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는 아이들이 선뜻 직업으로 꼽을 수 있는 업종이 아니었다. 잡지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하비는 즐거움만큼 “텅 빈 흰 종이를 메워야 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우연히 출판업계로 발길을 돌렸다. 아직 인쇄매체가 TV 이상의 문화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70년대의 해미시 해밀턴 출판사. 마침 <스노우맨>의 출판을 준비하던 그곳에서, 인쇄도 거치지 않은 레이몬드 브릭스의 오리지널 작품을 마주한 그는 섬세한 그림과 색감에 한눈에 반했다고. 출판사에서 영화 관련 판권 계약을 담당했던 하비는, <스노우맨>을 애니메이션으로 기획하던 프로듀서 존 코츠를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항로를 틀었다. <스노우맨> 그림책을 오려서 찍고 하워드 블레이크의 음악을 깐 5분짜리 테스트 비디오를 보고, 경영진들에게 나머지 제작비를 대자고 적극 제안할 만큼 움직이는 눈사람의 동화에 빠져든 것이다. 제작비와 제작기간이 예상을 초과했고, 투자 및 제작과정에 대한 책임이 늘어나면서 하비는 자연스레 프로듀서 수업을 톡톡히 쌓았다. 82년작 <스노우맨>과 마찬가지로 브릭스의 동화에 바탕한 지미 T. 무라카미의 86년작 <바람이 불 때>는 일상을 파괴하는 핵전쟁에 대한 경고를 아기자기한 파스텔 색조로 드러낸 장편애니메이션. 몇편의 TV시리즈, 91년작 <산타할아버지의 휴가>까지 존 코츠와 함께한 하비는, 자신의 제작사 일루미네이티드필름즈를 차렸다. “아무래도 영화가 첫사랑”이라는 그에 따르면 ‘일루미네이티드’(illuminated: 빛, 조명을 밝힌)란 이름도 “극장 뒤편에 앉아 스크린에 영사되는 빛에 매혹됐던 유년의 기억” 때문에 지은 것. 에릭 칼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배고픈 애벌레>는 아동용이었지만, 피트 크룬 감독과 함께한 97년작인 단편 는 누아르와 스릴러의 장르, 에피소드에 따라 여러 애니메이터의 그림으로 모자이크를 이룬 매력적인 실험이었다. <바람이 불 때>의 제작비 일부를 지원했던 <채널4>나 등 영국 애니메이션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방송사들의 지원이 급감한 90년대 중반 이후에도 딱히 상업애니메이션도, 오락성 없는 실험도 아닌 작품들로 뚝심있게 줄타기를 해온 비결. “언제나 문제는 돈이고, 돈을 찾아내는 게 프로듀서의 일”이라며, 베스트셀러는 아니라도 세계 곳곳에서 스테디셀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넘친다고 말한다. 전쟁 3부작으로 기획한 <지상에서…>의 뒷이야기 두편 역시, 그리고 앞으로의 작품들 역시 <스노우맨>처럼 그리운 온기를 지니지 않을까.

김형태의 오! 컬트 <택시 드라이버>

이를테면 이런 경우가 있다. 여자와 공원에서 데이트를 하던 한 남자가 옆이 소란스러워서 힐끗 쳐다보았는데 소란스러운 쪽은 이른바 깡패, 혹은 양아치, 혹은 이유없이 원래 나쁜 놈이다. 깡패: 뭘 봐 새꺄! 남자는 잠시 혼란에 빠진다. 뭘 봤는지 대답을 해야 할 것인지, 왜 반말에 욕지거리냐고 따져야 할지, 그리고 그것을 존대말로 대답해야 할지 아니면 받은 대로 반말과 욕설을 섞어서 대답을 해줘야 할지 몹시 혼란스럽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유의 혼란은 아무렇게나 뭉쳐던진 실타래가 머리 속에 뇌 대신 자리한 것과 같은 막막함을 갖게 한다. 1. 왜 반말이세요? 2. 너 봤다 새꺄! 3. 죄송합니다. 4. …(그냥 무시한다) 위의 셋 중에 하나 골라서 대답했다고 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자. 여자는 공포에 질려 울고 서 있고 남자는 안경이 깨진 채 코피를 흘리며 자빠져 있다. 남자가 작살이 난 까닭은 위의 대답 중에 정답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 아니다. 정답은 없다. 그냥 깡패가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아무나 걸리면 작살을 내주기로 결심한 날, 하필 그를 쳐다봤기 때문에 상대역으로 캐스팅이 돼버린 것이다. 깡패는 ‘오늘 누구든 걸리면 죽여버린다’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고, 안경이 깨진 남자는 오늘 그녀에게 근사하게 프로포즈를 할 로맨틱한 설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반된 스토리가 만날 때는 언제나 나쁜 스토리가 계획대로 완성될 확률이 훨씬 높다. 악이란 그런 것이다. 폭력이란 그렇게 편리한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 밤 아무 집이든 하나 골라서 불을 지르겠다고 결심하면, 서울 시내의 모든 집들 중에서 하나를 불태울 수 있다. 불을 지르겠다는 계획은 절박한 것도 아니요, 필연적인 목적도 없고 간절한 소망도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절박한 소망- 우리집이 불타기를 원하지 않는- 당연한 바람을 쉽게 능가해버린다. 쉽게 부숴버릴 수 있다. 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결심만 필요하다. 그러나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과 장치들과 금욕이 필요하다.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불철주야 방어벽을 세우고 무인보안장치도 해야 하고 더 정교한 자물쇠 장치들을 구입해야 한다. 폭력을 행사하고 싶으면 밤길에 나다니며 기습을 자행하면 된다. 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둡고 한적한 길을 피해야 한다. 그렇다. 악은 돌아다니면 되고 선은 피해다녀야 한다. 악은 한결 편리하다. 남자를 유효타 두어대만으로 작살을 낸 깡패가 나자빠진 채 난감해진 남자에게 카리스마 넘치게 지껄인다. 깡패: 이 씹새끼야 죽을래? 역시 이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작성하기란 쉽지가 않다. 우선 가장 급한 대답은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 대답을 해줘야 할 것인데, 그 대답을 하자니 그럼 내가 ‘씹새끼’라는 것에 자동으로 동의를 하게 되는 꼴이 되므로 살든지 죽든지 어쨌든 나는 씹새끼가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나는 씹새끼로 살든지 아니면 씹새끼로 죽든지 선택을 하라는 것인데, 그러자니 일단 “나를 씹새끼라고 부르지 마세요”"라고 먼저 요구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은 “죽을래?”라는 심각한 질문에 대해 뚱딴지 같은 대답이 돼버리고 만다. 1. 무조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2. 깡패를 작살낸다. 이 모든 것은 부당하게 시작되었으므로 부당하게 끝난다.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든지 더 강력한 폭력으로 복수를 하든지. 부당한 폭력에 대해서 정당한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악의 힘이다. 폭력의 힘이다. 깡패를 작살내도 결과는 폭력의 승리다.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베트남전에서 살아 돌아와보니 세상이 온통 개판이었다. 사회악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아 그냥 쓸어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밖에 생기지 않는, 하지만 결과는 정의의 사도의 승리인가 새로운 살인마의 탄생인가. 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http://hshband.net

예스터데이/레지던트 이블/마고/클래스 하우스

■ <예스터데이> 한반도가 통일된 뒤인 2020년. 은퇴한 과학자들이 잇따라 살해되고 이 사건에 투입된 특수수사대의 반장 석의 아들까지 납치된다. 인질극 현장에서 석은 아들을 쏜다. 석은 아직 죽지 않은 아들을, 완전히 회생시킬 의료기술이 발달할 때까지 냉동보관시킨다. 정윤수 감독, 김승우, 김윤진 출연, 미라신코리아 제작, CJ엔터테인먼트 배급, 상영시간 120분 김봉석 기본기가 없다 ★★ 박평식 줄거리를 정확히 알려면 세번은 봐야 한다 ★★★ 심영섭 다음번에는 <스타워즈>를 만들 수 있을 거요? ★★★ 유지나 <블레이드 러너>에의 도취, 미로 속에 침몰하다 ★★☆ ■<레지던트 이블> 21세기, 엄브렐러사 비밀연구소에서 바이러스 유출사고가 벌어진다. 연구소를 통제하는 슈퍼 컴퓨터 레드 퀸은 연구소를 봉쇄하고 감염을 우려해 전 직원을 말살한다. 엄브렐러의 특수부대와 입구를 지키던 안전 보안요원 앨리스는 레드 퀸을 찾아간다. 김봉석 더울 때, 졸릴 때 보면 별 다섯이네 ★★★☆ 박평식 머리칼은 쭈뼛쭈뼛, 속은 느글느글 ★★★ ■ <마고> 오염되고, 파괴되고, 더이상 복구할 수 없는 세상. 한웅은 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외면하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들이 괴로워하는 환영과 악몽에 시달린다.그러던 어느 날 한웅 앞에 천무가 나타나 환영 속에 등장하는 12정령의 실체를 알려준다. 강현일 감독, 가애, 권유진 출연, 상영시간 80분 박평식 소란스런 퍼포먼스로 포장한 계몽극 ★★★ ■ <글래스 하우스> 16살 소녀 루비와 동생 레트는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고아가 된다. 이들의 후견인은 오랫동안 옆집에 살았던 글래스 부부. 하지만 이들은 어딘지 믿기 힘들다. 불행한 남매에게 또 다른 위험이 찾아온다. 대니얼 샤케임 감독, 릴리 소비에스키, 다이앤 레인 출연,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수입·배급, 상영시간 106분 김봉석 스릴없는 스릴러영화는 낙제점 ★★

축구 열풍 탄 TV 광고 속 남성·여성상

삼성카드-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삼성카드 대행사 및 제작사 제일기획 딴소리를 내뱉기가 멋쩍은 시기다. 일제히 ‘오 필승 코리아’, ‘히딩크, 짱’ 등을 외치며 16강 진출을 희망하고 있는 이때에 월드컵과 무관한 광고를 얘기한다면 곁다리 긁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현재 국내 광고계는 너나 할 것 없이 월드컵을 벗삼아 맹렬히 뛰고 있다. 이른바 FIFA 월드컵 공식파트너인 기업을 비롯 유수의 업체들이 한국전 중계방송의 전후 광고시간대를 배정받기 위해 치열한 장외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15초 광고 한번에 일반 프라임타임대의 광고비보다 3배나 많은 3천여만원의 엄청난 광고비를 기꺼이 지불하고 있다. '월드컵 심(心)'을 겨냥한 광고들은 주제의 한계 때문인지 얼핏 키재기하는 도토리마냥 고만고만해 보인다. 그럼에도 남다른 반응을 자아내는 데 성공한 튀는 사례가 몇몇 있다. 먼저 히딩크 감독의 컴백으로 화제를 낳은 삼성카드 CF를 빼놓을 수 없다. 삼성카드 광고는 지난해 히딩크를 내세워 ‘Just one’이란 슬로건을 알렸다가 히딩크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기대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린 바 있다. 그 이후 삼성카드와 히딩크의 연결고리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16강 진출의 꿈이 현실로 무르익으면서 히딩크의 주가가 치솟았고, 이때를 놓칠세라 삼성카드 광고는 순발력 있게 히딩크 감독을 떠올렸다. 히딩크와 체결한 모델 계약기간이 불과 1개월밖에 남지 않는 상태였다. 이번 광고는 <마이 웨이>란 배경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주먹을 힘차게 올리는 골 세리머니 장면 등 경기장에서 만날 수 있는 히딩크의 모습을 다큐형식으로 담고 있다.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허구보다 더 극적인 효과를 살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의 특성을 잘 활용해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삼성카드를 상징하는 블루박스로 환희에 찬 히딩크의 얼굴을 포착한 뒤 ‘히딩크,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란 나직한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마지막 대목은 인상적이다. 뭉클한 감동과 더불어 광고의 말대로 정말이지 히딩크가 능력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절로 인다. 그런데 국민의 열망을 대변하는 ‘구세주’로 화려하게 격상돼 광고에 돌아온 히딩크 감독의 모습은 세상의 인심이란 게 참 변덕스럽다는 쌉쌀한 뒷맛도 준다. 삼성카드 광고는 정우성-고소영 커플을 내세운 ‘능력있는 남자’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히딩크를 주연으로 재기용해 월드컵 시류를 절묘하게 활용했고, 절제있는 표현기법으로 소비자의 마음과 귀를 매혹하고 있다. SK텔레콤의 스피드 011 ‘붉은 악마’ 캠페인은 월드컵 관련 광고의 보편적인 형태인 응원형 가운데서도 군계일학이라 할 만하다. 이 CF는 전속모델인 한석규를 응원단장으로 내세워 응원방식을 알려주며 SK텔레콤이 붉은 악마를 후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박수 다섯번)’, ‘오 필승 코리아’ 등이 국민적인 목소리와 몸짓으로 퍼져나간 데에는 이 광고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후원자의 겸허한 자세로 무료 응원교육을 실시한 듯 보이지만 한편으론 붉은 악마의 구단주 같은 위풍당당함을 풍기면서 기업의 위상을 높이는 데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렇다면 남성의 축제인 월드컵에서 여성은 어떤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 KT, KTF, BC카드 등의 CF를 보면 월드컵과 여성의 관계를 대략 가늠할 수 있다. KTF 상금프로모션 광고와 BC카드 광고는 귀엽고 깜찍한 여성스타의 응원을 선보인다. KTF CF는 ‘황선홍 아저씨 한골’, ‘안정환 오빠 한골만 더’ 등을 외치며 뽀뽀세례를 퍼붓는 장나라를, BC카드 CF는 월드컵 경기 관중석에서 ‘부자되세요’의 말투로 ‘잘하세요. 꼭이요. 제가 맛있을 거 사드릴게요’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김정은를 내세우고 있다. 히딩크 감독과 한석규가 각각 국민염원의 실천자, 국민통합의 주도자로 나서고 있는 것과 달리 이들 여성스타는 살가운 서포터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KT-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KT 대행사 휘닉스커뮤니케이션 제작사 까치 앤 까치(감독 김영배) 그런가 하면 KT 광고는 르네상스 시대의 천장화처럼 축구선수들의 경기장면이 하늘을 수놓고 있는 어느 광활한 벌판에 여신 같은 차림의 이영애가 신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난이도의 합성기술을 동원해 빚어낸 환상적인 분위기의 영상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여성성의 한축에 애교가 있다면 다른 축엔 모성이 있다는 듯 이영애가 아늑하고 성숙한 이미지로 월드컵의 수호천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한켠에선 프랑스의 지단 같은 세계적인 축구스타가 속속 글로벌브랜드 CF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유머와 재치로 무장된 광고에서 철저히 엔터테이너로서 스타성을 발휘하고 있는 게 특징. 반면 여러 광고 속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땀으로 범벅된 비장한 표정으로 국민적 열망이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안방극장을 뒤덮고 있는 월드컵 광고엔 이렇게 기업의 갖가지 욕망, 여성과 남성의 비교되는 역할론, 외국과는 다른 우리네의 특수한 상황 등 다채로운 풍경이 들어 있다. 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

사라진 돌들아, 지구를 지켜줘! <수호전사 맥스맨>

지구 평화에 다시 위기가 닥쳤다. <지구용사 벡터맨> 이후 4년 만에 등장한 26부작 SFX 합성 애니메이션 <수호전사 맥스맨>은 이번에도 외계 왕국의 암투와 위험에 빠진 지구, 그리고 영웅의 활약을 그릴 예정이다. 8개월의 기획 기간을 마치고 지난 5월15일 촬영을 시작한 이 작품을 지휘하는 것은 <지구용사 벡터맨>의 최성덕 감독. <…벡터맨> 방영 당시 시청률 22%를 이끌어냈던 장본인이다. 배경은 평화로운 스텔라 성운. 이곳 레오니아 왕국을 강탈한 데빌로스 제국의 드가는 에너지의 근원인 수피아 공주를 이용해 전 우주를 통치하고자 한다. 이에 수피아 공주는 지구로 탈출, 황실에 전해오는 경전에 적혀 있는 맥스 로봇을 찾아내 드가 일행에게 대항하려고 마음먹는다. 한편 어느 기암절벽에 수천년 동안 숨져져 있던 로봇 메가 체인저는 지구에 온 수피아 공주 일행의 신호를 감지한다. 동시에 물, 불, 바람의 형태로 변신해 싸울 수 있는 전사 ‘맥스맨’으로서 자신을 조종할 사람을 찾는데…. 마침 근처에서 야영하고 있던 고교생 기훈이 그 주인공이 되고, 맥스맨으로 변신한 기훈은 메가 체인저와 함께 수피아 공주를 보호하고 에너지 재충전을 위한 아홉개의 ‘레오니스톤’을 구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드가는 더욱 강력한 괴수와 로봇들을 보내어 수피아 공주를 생포하려 하고, 이에 맞서는 기훈도 만만치 않은데. 결국 관건은 태양계에서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아홉개의 레오니스톤을 로열 팬던트에 부착할 수 있느냐다. 사탄제국에 쫓기는 비너스별 레디아 공주가 세명의 지구인을 벡터맨으로 만들어 악당과 맞선다는 <…백터맨>과 흡사한 스토리 라인이다. 그러나 <수호전사 맥스맨>의 매력은 단순한 스토리를 박진감 있는 영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전작에 비해 3D 비중이 늘어날 계획이라니, 변신 장면뿐 아니라 각종 로봇과 괴수들이 어떻게 등장할지 기대된다.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를 추구하는 대신, 코믹함도 가미했다. 다이어트 약초를 캐러간 기훈 일행이 악당의 습격을 받고 맥스맨으로 변신, 멋지게 승리하지만 알고보니 약초는 잡초였다든가, 기훈 학교로 전학온 수피아 공주와의 에피소드 등, 스탭진은 전작과는 다른 시도를 할 것으로 보인다. 등장하는 무기와 괴수, 로봇의 종류 또한 대폭 늘렸다. 대원씨앤에이홀딩스와 라퓨타엔터테인먼트는 11월 말 실사 촬영을 마치고 12월에는 3D 합성을 마친 최종 필름 완성을 목표로, 총 34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방영은 내년 초. 3분가량의 데모영상은 이미 한국의 칠드런 엑스포와 일본의 동경아니메페어에서 소개된 바 있다. 실사를 촬영해 내보내던 기존의 특촬물에, 특수효과를 더해 ‘SFX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간 것은 국내에서 <…벡터맨>이 처음이다. 그리고 그뒤를 잇는 <수호전사 맥스맨>은 본격적으로 ‘SFX 합성 애니메이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특수효과를 200% 살리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향유층이 대부분 겹치는 까닭에 애니메이션의 영역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특촬물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일본에 비해 한국에서 특촬물은 아직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꾸준히 이 분야에서 노력하는 스탭들이 있는 한, 앞날은 밝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스탭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이 계속 늘었으면 좋겠다.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1)

<비밀>에서 <베일>로, 다시 <예스터데이>로. 제목이 바뀌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관객을 만나기까지 최소한 몇년의 시간을 야금야금 베어먹는 것은 영화의 어두운 숙명일지도 모른다. 과장도 엄살도 아닌 현실. 기획에서 촬영종료까지 3년여의 시간이 걸린 <예스터데이>도 그 현실을 비켜갈 순 없었다. 애초에 작은 영화로 기획되었던 <예스터데이>는 제작비 80억원짜리 블록버스터가 되면서 감독의 ‘고난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고 결국 촬영기간 9개월, 촬영횟수 112회를 기록했다. 관객과의 조우를 앞둔 <예스터데이> 감독이 털어놓는, 현장에서 생긴 일들. 편집자 감독을 존중한다, 제목은 <예스터데이>!1999년 5월 혹은 6월│프롤로그 1999년 5월인가 6월의 어느 날- 아! 그날은 명동에서 스크린쿼터를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삭발 집회가 있었다- 삭발한 안병주 미라신코리아 대표를 처음 만났다.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거기엔 또 그 이전의 역사가 있다. 이 연출일기를 영화로 본다면 첫 장면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몇 년간 감독 데뷔를 실패하고 공전을 거듭하던 나는 당시 준비하던 <레인트리>라는 영화가 또 장기전에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본능처럼 예감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원더풀데이즈>와 <레인트리> 때문에 나와 2년 이상 같이 작업을 하던 그 영화사는 미라신코리아와 같은 건물에 있어서 가끔씩 미라신코리아의 기획실 이유진 실장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곤 했었는데 어느날 그녀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동안 내가 쓴 시나리오를 좀 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며칠 뒤 시나리오를 본 이유진 실장은 나의 사정을 묻고 듣더니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을 다룬 심리학자의 리포트를 모티브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인 <비밀>이란 영화를 진행하고 있는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비밀>은 실제 일어난 민감한 사건이라는 점,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호소하는 세련된 추리물이길 원하면서 막상 무대는 평범한 시골마을이라는 점, 비극적인 아이들의 실종을 소재로 그저 단지 스릴 넘치는 오락물을 만들 수 없다는 점 등 영화화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이유진 실장은 나의 지적에 공감한다며 <비밀>을 맡아줄 것을 권했다. <비밀>이 어떻게 다르게 바뀌든 나에게 전권을 준다고 약속하며, 아니 바뀌어야 한다면서. 빈털터리에 신인인 나는 돈도 필요했다. 좋은 영화 몇 작품 해본 영화사라는 크레딧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일을 하고 싶었고, 멋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안병주 회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예스터데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원래 제목은 <비밀>이었는데, 박기형 감독이 <비밀>이란 영화를 만드는 바람에 제목이 가제 <베일>로 바뀌었다. <텔미썸딩>이 개봉한 뒤 미스터리 스릴러에 대한 우려의 소리도 높아져 있었다. 초고가 나오고 회의를 하고 또 2고가 나오는 사이 이미 한번의 더위가 지나고 겨울이 와 있었다. 징그러웠던 시나리오 수정과정을 거치면서 나다운 <베일>을 생각다 못해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근미래 SF로 설정을 바꾸었다. 안병주 대표도 SF라는 상업적 설정을 즐거워했다. 하지만 작고 꽉 찬 밀도의 <베일>이 갑자기 덩치 큰 블록버스터로 변한 것이다. 제작 주변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연기자와 파이낸싱 등 모든 게 더 높은 상업적 기대수준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2000년 11월 여자주인공 김희수 역으로 김윤진을 만났다. 그녀는 흔쾌히 이 작품에 참여하기로 했고 또 시나리오 수정과정에 의견을 주는 적극성도 보였다. 그 사이 제목에 대해 <베일>과 <예스터데이>를 두고 수없이 많은 저울질이 오갔다. 연출자인 나의 입장은 단연코 <예스터데이>였다. <베일>이란 제목은 쉽지만 사건을 풀어헤치는 실마리와 이야기의 표면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예스터데이>는 언뜻 모호하지만 인물들의 내면과 행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어차피 이 영화는 할리우드식의 외공이 강한 볼거리 위주로 만들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영화의 경우 설정을 아예 애매하게 하고 가야 한다. 알 수 없는 시간, 무국적의 애매한 장소. <예스터데이>라는 제목에는 그런 여백이 있다. 어느 봄날 안 대표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결론을 내려주었다. 감독을 존중한다. 예스터데이. 시원했다. 우연인지 제목이 결정되고 일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최민수가 조연격인 골리앗 역할을 하겠다고 수락한 것이다. 최민수에 대해서 주변에서는 골리앗으로는 적역이지만 같이 작업하는 일 자체에 대해 우려를 많이 했다. 워낙 에고가 강한 배우라…. 하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인가! 그리고 김승우를 석으로 정했다. 김선아와 정소영도 합류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투자자들이 붙기 시작했다. “신이여, 지난 날은 다 거시기 하고 날좀 도와주소”2001년 6월9일, 서울 신사동 대림아파트 모델하우스│크랭크인 솔직히 중고 신인이라 신인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긴장이 됐다. 촬영장소는 모델하우스. 나를 본 김승우가 친근한 농담을 건네왔다. 진짜 오래 기다렸나보다. 첫 촬영에서 이렇게 농담 주고받는 여유있는 신인 감독 첨 봤다고…. 몰래 아무도 없는 모델하우스 2층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등돌리고 지낸 사이인 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신은 나에게 무슨 다른 뜻이 있는지 몰라도 사사건건 세상과 가족과 갈등을 빚게 하고 나를 마치 현실 부적응자처럼 만들어놓았었다. 나는 심지어는 머피의 법칙에 시달릴 만큼 그 부분에 자격지심마저 갖고 있었다. 절대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런 치졸한 수법으로 신이 나에게 굴복을 요구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라도 굴복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 내가 기도를 했다. 협박성 기도였다. 그동안 당신과 나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었다면 지난일은 다 거시기하고 날 좀 도와주십쇼. 더도 말고 나 준비한 만큼 우리 애쓴 만큼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촬영이 시작되고 석의 방. 김승우와 무척 오랜 형, 동생 사이처럼 친근한 분위기에서 끝냈다. 석의 집. 최민수가 욕심을 좀 부린다. 받아주었다. 더 찍어놓고 보면 손해 볼 건 없을 것이다. 다음 촬영은 희수의 차 안. 끔찍하게 악재가 겹쳤다. 항공사 파업, 호텔의 촬영불가. 리무진의 펑크. 그런데도 일본에서 김윤진 취재를 나와서 할 수 없이 테스트 겸 찍었다. 김윤진이 약병 소품이 좋지 않다고 지적한다. 옳은 말씀. 결국 쓰지도 않을 장면, 스탭들 괜한 고생만 시켰다. 미안해서 더 잘 해보려고 했는데…6월16일, 안성 미리내 성당과 양재동 다리변 카페│2차 촬영 성당은 영화의 시작을 여는 첫 중요한 큰 그림이다. 1차 촬영 때 잡혀 있던 분량이라 그날 먼저 안성에 내려왔던 전무송 선생은 이미 한번 바람을 맞은 터였다. 미안한 마음에 더 잘해보려고 하는데 성당이 미리내 김대건 신부 순교지라 성지화되어 있어서 무척 진행이 조심스러웠고 어려움도 많았다. 첫컷은 타바코 필터를 써서 늦은 오후, 혹은 과거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특수효과가 아직 계약이 안 돼서 연출부가 스모크를 뿌렸다. 안쓰럽다. 현실에서 가능한 많은 미래의 이미지를 담자8월20∼22일, BEXCO 옥상, 외부│18차 촬영 운동장처럼 넓은 콘크리트 옥상은 잘 달궈진 프라이팬이다. 하얀 바닥에 정면으로 반사되는 일광과 열을 막아보려고 제작부 영준이와 특효팀이 소방호수를 동원해 계속 물을 뿌려댔지만 리허설에 뿌린 물이 슛 들어갈 때 마를 지경이다. 부산 전시 컨벤션센터의 뒤편에서 본 건물은 기하학적이면서 그림같이 푸른 하늘과 무척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이런 특징은 꼭 살려야 한다. 미래적인 느낌을 되도록 CG에 의지하지 않고 담아낼 수 있는 한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망원 렌즈를 많이 써서 인물 위주의 숏, 혹은 종군기자의 눈 같은 뉴스릴 타입의 현장감을 강조하는 이 영화 성격상의 문제를 배제하고 와이드 렌즈의 앵글을 썼다. 청장의 납치극이 벌어지는 현관 입구를 비롯해 몸 숨길 그늘이 없는 그 주변은 세컨드 카메라의 위치까지 고려해 촬영상의 이동거리로 치자면 500m가 족히 넘는다. 한컷을 찍고 다음 컷 순서를 한번 잘못 판단해 갔다 돌아올라치면 좀 과장해서 시간은 반나절이고 스탭들은 잘 익은 구이가 된다. 촬영장에서 항상 곁에 있는 스크립터 지연이가 어느 순간 선글라스를 벗어버렸다. 이미 늦은 짓이지만 타다못해 기미가 낀 얼굴에 선글라스 그림자가 더 흉하게 남기 때문에….▶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1)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2)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3)

<갱스 오브 뉴욕> 20분 시사기

<갱스 오브 뉴욕>은 길지 않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절이었던 19세기 초반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초기 이민자들이 평화로운 공존을 거부한 채 갈등하고 다투고 죽고 죽이는 사이,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그 와중에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1860년대까지, 그 자체로 드라마틱했던 격변의 시대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두르고 있다. 이야기는 당시 뉴욕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초기 이민자의 사악한 리더, 그에게 아버지를 잃고 오랜 세월 복수를 꿈꾼 아일랜드 소년, 그리고 그들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바람 같은 여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도살자 빌’로 통하는 빌(대니얼 데이 루이스)은 미국에 정착한 초기 이민세대로서, 과격한 이민반대주의자다. 밀려드는 이민자들을 무단침입자로 규정한 빌과 그의 패거리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발론 신부(리암 니슨)와 그의 추종자들을 살해한다. 발론 신부의 어린 아들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현장을 목격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암스테르담은 빌 패거리에 접근해 빌의 신임을 얻기에 이른다. 그러나 한때 빌의 연인이었던 제니(카메론 디아즈)를 사랑하게 되면서, 복수를 향한 여정에 잠시 먹구름이 끼기도 한다. 하지만 암스테르담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권리 찾기에 앞장서고 폭동을 주도하는 등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는 일에 두려움 없이 매진한다. <갱스 오브 뉴욕>의 20분 버전은 이 방대한 서사극의 흥미로운 ‘맛보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로마 치네치타 스튜디오에 세웠다는 세트는 19세기 초반의 뉴욕을 고스란히 불러내온 듯 보였고, 도입부에 선보인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이민반대주의자들의 유혈 격돌장면의 스펙터클은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자칫 상투적으로 비칠 수 있는 캐릭터들에 유니크한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은 배우들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우수에 찬 소년에서 강인한 영웅의 면모를 아우르며, 카메론 디아즈는 남자들을 이용해 생존과 부활을 꿈꾸는 팜므파탈로 변신했다. 그러나 이들의 앙상블보다 훨씬 눈길을 잡아끈 건, 악마로 환생한 대니얼 데이 루이스다. 그는 때때로 스코시즈의 오랜 동지이자 페르소나인 로버트 드 니로를 연상시키곤 했으며, 시사 당시 언론의 찬사를 한몸에 받아냈다. ▶ [마틴 스코시즈 & 켄 로치] 마틴 스코시즈, 신작 <갱스 오브 뉴욕>을 말하다 ▶ [마틴 스코시즈 & 켄 로치] <갱스 오브 뉴욕> 20분 시사기 ▶ [마틴 스코시즈 & 켄 로치] <스위트 식스틴>의 켄 로치가 이야기하는 ‘좌파영화만들기’ ▶ [마틴 스코시즈 & 켄 로치] 켄 로치-폴 레버티의 파트너쉽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3)

조명기 타는 동안, 기사의 마음도 탔겠지?2001년 10월1일, 부산 동래별장│43차 촬영 추석 연휴 기간 내내 스탭들은 부산에 붙들려 있다. 동래별장이라는 이 멋진 일식풍의 고가(古家)는 박정희의 별장이었다가 뒤에 요정을 거쳐 지금은 큰 일식 요리집으로 바뀐 곳이다. 그런 사연인지라 빌리는 과정도 어려웠고 겨우 빌린 게 영업을 하지 않는 연휴 즉 추석 전후 3일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빌려야 했다. 이런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일상적인 가옥보다 훨씬 특별한 곳- 영화 속에서 SI의 안전가옥 같은 곳으로 쓰이기 딱 알맞다. 이 장소에서 석과 희수의 유일한 멜로도 만들어진다. 어제 무척 많은 수의 컷들을 소화했지만 오늘 내일 사이 낮-밤-낮에 걸쳐 40여컷을 찍어내야 한다. 더구나 어젠 발전차가 불이 나는 사고로 국내 하나뿐인 새 조명기 루비세븐과 아우라 소프트가 타버렸다. 드러내진 않지만 염기사 속도 그렇게 까맣게 탔을 것이다. 오늘은 그런 대로 순조롭게 진행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신인 석과 희수와의 인간적인 교감이 오가는 대사와 껴안는 장면을 남겨놓고 날이 밝으려 한다. 김윤진이 다소 초조해한다. 꼭 다른 것 찍다가 정작 중요한 장면은 서두르게 된다고…. 희수가 석과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석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린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첫 테이크. 희수가 아예 펑펑 울어버린다. 감정이 과했다. 다시 한번. 윤진의 눈물 때문에 어색해진 승우. 다시 한번…. 이번엔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절제된 눈물을 흘리는 희수. 석도 눈가가 빨개진다. 됐다. 두 사람의 눈물 때문에 다소 상기된 내가 뛰어나가며 OK를 외친다. 스탭들 사이에서 박수가 나온다. 여름 다 보내고 겨울에 물 속에 뛰어들라고?10월13일 50회 촬영 춘천 가일리│50차 촬영 내가 아는 한 북한강에서 유일하게 밤마다 물안개가 그림처럼 피어오르고 주변에 횟집, 낚시터 하나 없는 곳은 여기뿐일 것이다. 이곳이 로케이션 촬영지로 적절치 않은 건 불편한 이동로뿐이다. 깎아지른 계곡이 병풍처럼 펼쳐져 자못 인적이 닿지 않는 과거 비무장지대처럼 보이는 곳도 실제 비무장지대를 제외하고는 여기뿐일 것이다. 세트팀은 이곳에 자재수송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바지선을 이용해 보드워크를 지었다. 그리고 보드워크에서 보이는 이장님댁 앞부분을 영화상 신부의 은신처 오두막으로 꾸몄다. 촬영 3일째. 어제부터 촬영에 합류한 최민수는 교통이 불편한데 이 정도의 그림이라면 서울 주변 어디 가도 있다고 투덜거렸다. 어제 그는 더운 여름 다 보내고 가을이 되어서야 자기를 추운 물 속에 집어넣는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담요를 뒤집어쓰고는 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그렇게 열을 낼 때는 크게 다른 연출의도가 없다면 그냥 두는 게 낫다. 제 풀에 신이 나서 더 많은 컷을 스스로 연출하긴 하지만 촬영 전에 연출자인 나와 의논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는다. 지출이 초과되더라도 제대로 가자2001년 10월27일, 제비표페인트 두바이 호텔│59차 촬영 며칠째 총을 쏴대고 있다. 오늘의 포커스는 자동차 폭파 컷. 폭도들 때문에 고립된 매이(김선아) 일행은 호텔로 진입하려다 문 폭파로 좌절된 조 일행을 구하러 가야 한다. 그 순간 바주카포가 보이고 매이 일행은 죽어라 뛴다. 그 뒤로 발사되는 바주카포. 자동차를 폭파시킨다. 구사일생 다른 건물로 뛰어들어와 총탄을 피하는 매이 일행. 이 장면의 중심 인물은 매이다. 김선아는 며칠 전 바로 이 과정에 이르는 전투장면을 찍다가 자동차 파편이 튀어 왼쪽 뺨과 엉덩이에 부상을 입었다. 요즈음 두바이 총격 신 때문에 말이 많다. 촬영 기간이 늦어지는 데 대해 배우들이 이제 투덜대기 시작했고 시간과 돈이 예상보다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지출이 초과되더라도 폭파 같은 효과를 더 넣자고 생각해낸 건 정작 안 대표다. 그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베팅으로 보인다. 단지 그 베팅이 좀 늦은 관계로 준비 기간이 짧아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욱이 이럴수록 안전을 외면하면 안 된다. 안 대표는 잔뜩 기대하고 지금 현장에 와 있다. 몇번 연습을 해본다. A카메라는 랜지로버 짐칸에 타고 매이 일행이 뛰는 것을 정면에서 같은 속도로 이동하며 잡는다. 그들의 뒤로 화염이 솟아오른다. B카메라로는 측면에서 일행이 빠져나가고 폭파되는 차를 잡는다. C카메라는 거의 정면 부감으로 올라가 정면 불길을 조금 피한 자리에서 잡는다. 문제는 이동숏인 A캠이다. 인물 위주의 가장 다이내믹한 순간을 잡아내야 하기 때문에 인물과 폭파거리, 렌즈 사이즈와 앵글, 인물 이동 속도와 운전 속도와 롤링 정도, 폭파 타이밍과 렌즈 거리, 포커스, 폭파를 전후한 인물들의 액션, 리액션. 모두 약속대로 NG없이 성공해야 하는 작업이다. 카메라가 돌고 배우들이 뛴다. 언제 무거운 엉덩이 때문에 훈련 때마다 핀잔을 들었다더냐! 김선아 총을 쏴대며 진짜 살려고 뛴다. 펑! 붉은 불꽃이 모니터에서도 선명하게 인물들의 뒷배경을 감싸며 치솟는다. 인물들은 약속대로 폭파후풍에 휩싸이듯 몸을 비틀고 주변에 총을 쏴대며 오른쪽으로 프레임 아웃되어준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차는 여전히 높은 불길로 타고 있다. 가슴이 후련해진다. 흥분된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해 등 뒤에서 열기가 느껴지던 순간을 스탭들에 설명하며 수다를 떨어대는 김선아. 그래, 결국은 끝이 나는구나2002년 2월22일, 여수 선박수리공장에서 루카스호 연구실│109차 촬영 여수 촬영 마지막날이자 이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이자 실질적으로 9개월간의 촬영이 끝나는 날. 아직 3회 분량가량 보충, 인서트 촬영이 남았지만 오늘은 상징적인 날이다. 그래. 결국 끝은 나는구나. 오늘은 낮, 밤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긴 하루가 될 것이다. 우리의 세트가 되어주는 이 배는 30년간 오사카에서 대만을 운행하던 호화 여객선이었다. 지금은 팔려나갈 날을 기다리며 묶여 있는데 덕분에 배가 약간 기울어져 있다. 골리앗과 석의 마지막 대결, 과거의 망령과 탈출, 희수의 기억 같은 환상적인 장면도 찍었다. 물론 내부에 인테리어를 이용한 세트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점심을 먹고 갑판에 나와 앉아 있으려니까 오늘은 그런 것까지 기분좋게 느껴진다. 바람이 제법 봄냄새를 풍긴다. 그래. 여기는 반도의 남쪽 끝 여수! 이 땅에서 가장 먼저 봄의 기척을 느낀 파수꾼처럼 그 시간을 즐긴다. PS.그때 감상은 건방진 낙관이었다. 그날 밤 배 갑판 위에서 위험한 촬영을 진행하느라 긴장한 채 밤을 지새며 우리는 얼어죽다 살았다. 현실은 언제나 그랬다. 모든 촬영이 끝난 건 3월7일 112회째. 결국 3월8일 아침이 되어서였다.글 정윤수(<예스터데이> 감독) / 디자인 임정숙 norii@hani.co.kr▶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1)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2)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