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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챔피언

■ Story ‘애비없이 자라난’ 강원도 산골소년 김득구는 14살 되던 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다. 갖은 고생을 거쳐 어느덧 청년이 된 김득구는 우연히 본 권투포스터에 이끌려 동아체육관을 찾게 되고 이곳에서 자신의 꿈을 발견한다. 코치 김현치의 강력한 지도 아래 권투선수로 단련되어지는 김득구. 그 사이 이상봉, 박종팔 등 체육관 동료들과의 걸쭉한 우정과 순수한 아가씨 이경미와의 사랑이 싹튼다. 아마추어 활동을 거쳐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까지 승승장구하던 김득구는 어느덧 마지막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을 치르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 Review 부산에서 나고자란 네 친구들의 얄궂은 운명을 그린 <친구>가 곽경택 감독 본인의 먼지쌓인 기억의 복원이라면, 198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운명을 달리한 고 김득구 선수의 일대기를 담은 <챔피언>은 20년간 감독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처절했던 투쟁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다. 실존인물의 일대기란 녹록지 않는 구성을 놓고 크게 연대기적 진행에 몸을 싣긴 하지만 <챔피언>은 스피디한 리듬 속에 과감한 생략과 적절한 재배치의 미덕을 보인다. 영화의 정점인 마지막 링에서 시작되는 <챔피언>의 카메라는 마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듯 빛바랜 김득구의 사진을 차례로 디졸브시키며 강원도 산골 어드메쯤 머문다. 그러나 먼지나는 버스에 몸을 실은 소년 김득구의 고생스러운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은 잠시 미뤄둔 채 시간은 훌쩍 뛰어 가정의례준칙과 관상책을 “단돈 100원에 모시는” 버스 잡상인으로 살아가는 청년 김득구의 모습으로 단시간에 몰핑된다. 팍팍한 생활 속에 “밥달라 그러믄 쪽팔려도 물달라 그러면 안 쪽팔리니까”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피뽑아 받은 돈으로 풀빵을 사먹던 그의 시야에 잡힌 권투포스터는 마치 바람에 날아온 전단에 ‘반칙왕’이 되기로 결심했던 송강호의 경우만큼이나 운명적으로 다가온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시작했지만 “세상에 권투만큼 정직하고 공평한 게 없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복서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된다. 주로 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80년대 초반을 아우르는 <챔피언>의 정서는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하던 임춘애의 ‘헝그리정신’을 촌스러운 어떤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들지만 순수했던 ‘그때 그시절’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다. “배고플 때면 들깨를 갈아서 참기름 하고 섞어 먹으면 좀 낫다”는 민간요법부터 “빰 빰빠바 빰빠바∼바라바바∼”로 시작되는 권투중계음악, 도끼빗 장발에 미스코리아 파마머리까지, 롤러장과 교복이 주었던 <친구>의 감동이 그러했듯 <챔피언> 역시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과 배경을 효과적으로 배치했다. “스타일의 반복을 피하고 극에 부합하는 액션신을 만들기 위해” 총 4가지 스타일로 찍어냈다는 <챔피언>의 액션은 무게가 느껴지지만 괜한 폼을 잡진 않는다. 오히려 꽹과리소리, 북소리 등의 국악과 경쾌한 가요가 믹스된 god의 주제가와 김득구의 섀도복싱 실루엣이 겹쳐지는 장면은 여타의 권투영화에서 선보이는 장엄한 음악보다 더 큰 울림을 선사한다. 득구와 경미와의 멜로도 소박한 감동과 재미를 준다. ‘이사떡’으로 시작된 어리버리한 첫 만남이 불러오는 훈훈한 웃음과 체육복 등판에 써 있는 ‘김·득·구’라는 이름 석자를 보여주기 위해 버스보다 빨리 뛰어가려는 순정어린 질주, 통닭이 식을까 한시라도 집에 빨리 들여보내고 싶어하는 따뜻한 배려까지, “여자란 인생의 걸림돌”이란 문구를 ‘디딤’돌로 고쳐 적게 만든 온기있는 로맨스는 튀는 핏방울까지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액션신과 교차되며 한 복서의 성장드라마에 정서적인 큰 축으로 자리잡는다. 사진설명 “이거이 어데가는 버스래요?” “어디까지 가는데?” ”끝까징요.” 14살 소년 김득구는 먼지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무작정 서울로 향한다.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서. “원래 복싱선수는 미스코리아보다도 거울을 보는 시간이 많다. 자세도 자세지만 그보다 니가 싸워야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안에 있기 때문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김현치 코치는 김득구를 떠돌이 싸움꾼이 아닌 진정한 스포츠맨으로 키운다. 득구와 상봉은 승부를 뛰어넘는 우정을 보여준다. “내가 왜 개득구인 줄 아니?” “독구잖아, 독구 멍멍멍.”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이상봉의 사정을 들은 김득구는 “백극구, 이득구, 김득구, 아버지가 바뀔 때마다 성을 바꿔야했”던 힘들었던 성장과정을 털어놓으며 울먹인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뒤 회환과 기쁨에 터져나온 김득구의 울음은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샤워실을 가득 메운다. “느그가 요게 온 이유는 한마디로 복싱 참피언이 돼서 맨주먹으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쥐고 싶다, 이거 아이가?”며 솔직한 속내를 드러낼 만큼 건강하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 누구도 대성통곡하지 않을 만큼 절제력을 보이는 <챔피언>은 스포츠스타를 영웅화하려는 함정이나 신파의 웅덩이를 가볍게 비켜간다. 그러나 망자의 무덤 앞에서 진심어린 송가를 부를 뿐 감히 무덤을 파헤치진 못했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제외하면 뚜렷한 악인도 큰 갈등도 없는 드라마는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또 <친구>처럼 ‘남자영화’라는 혐의도 지우기 어렵다. ‘숨은그림 찾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를 “21년 된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는 아이 같은 경미의 캐릭터에는 순수함에 대한 강박이 느껴진다. 오로지 남성의 시선 속에서만 등장했던 <친구>의 보경처럼 경미의 캐릭터 역시 남성의 ‘현모양처’ 판타지에 복종한다. <챔피언>은 한순간도 부족한 적이 없었지만 홀로서기에 대한 우려 역시 적지 않았던 배우 유오성에게는 의심없는 굳히기 한판이다. 김득구의 혼이 내린 유오성에겐 <친구>에서 날선 혹은 징그러우리만큼 유연했던 준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대부분의 신에서 어벙하고 순진한 표정에, 무언가에 잔뜩 억눌린 눈빛을 보이다가 링 위에서만큼은 분노나 위협이 아닌 강철 같은 복서의 기운을 뽑아내며 좌중을 압도한다. “웃고 있다보니 눈물이 나는 영화”를 만들겠다던 곽경택 감독의 의지만큼 <챔피언>은 시종일관 웃음이 터지는 영화지만 김득구가 죽음으로 치닫는 결말을 아는 이상 웃음의 끝엔 늘 아릿한 슬픔이 동반된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다음 세대를 향한 희망적인 판타지를 선사하며 이렇게 속삭인다. 우리 역시 이시간도 조금씩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그러나 삶은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서 충분히 가치있는 거라고.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복서를 굳이 스크린까지 불러들인 곽 감독의 진심이 느껴지는 전언이다.백은하 lucie@hani.co.kr▶ 챔피언 / 백은하 기자 ▶ <챔피언>의 맛깔나는 조연들

미국 영웅심 내세운 <배드 컴패니>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작 제작자인 제리 브룩하이머가 올 여름 세계 동시개봉을 위해 내놓은 작품은 조엘 슈마허 감독의 〈배드 컴패니〉다. 이 두 사람을 22일(현지시각) 뉴욕에서 잇따라 만났다. 면도도 하지 않은 까칠한 얼굴에 수수한 스웨터 차림의 브룩하이머는 미다스의 손을 가진 사내라기보다는 고시 공부하는 수험생처럼 보였다. 9·11 테러가 터지기 전에 완성한 〈배드 컴패니〉엔 아랍 계열로 보이는 자살테러범이 등장한다. 영화가 〈아마겟돈〉 〈진주만〉에 이어 또다시 미국의 애국주의와 영웅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이어서 외국에서 개봉할 땐 거부감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이 노련한 흥행의 귀재는 약간 모르쇠 반응을 보였다. “〈진주만〉은 일본에서 1억달러를 벌고, 〈아마겟돈〉은 전세계에서 5억5천만달러를 벌어들이는 등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이런 걸 보면 이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이어 세계 동시 배급하는 할리우드 대작을 아시아와 남미 등 각국의 문화 정체성을 침해할 수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해선 경제 논리로 맞섰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거다. 미국은 (블록버스터에)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보아 그런 영화를 만들어 세계에 배급하는 거다. 가령 우린 〈진주만〉에 4억달러를 투자했다. 다른 나라는 이런 작품에 그만한 돈을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 거다. 그 차이일 뿐이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다른 나라의 문화 정체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믿는 건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의 모습이 개성이 부족하고 그 때문에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영웅을 만드는 영화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악한 반대편을 묘사해내는 거다. 가령 나치 같은 경우는 누구나 악의 세력인 줄 알고 있으므로 설명이 필요없지만, 다른 경우는 매우 어렵다.” 〈플릿라이너〉 〈8Ŧ〉 등 저예산 작품에서 〈배트맨 포에버〉 같은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온 슈마허는 “뭔가 대작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브룩하이머의 제안에 응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93년작 〈폴링 다운〉이 로스앤젤레스의 한국인 상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점이 논란이 됐던 걸 많이 인식한 듯했다. “〈폴링 다운〉이 한국에서 상영 금지되는 바람에 홍보차 한국에 방문할 기회를 놓쳤다. 그 영화가 겨냥한 건 한국인 상인만이 아니라 한가하게 골프나 하러 다니는 백인, 라틴계 사람들과 동성애자 등 다양한 계층의 정치적으로 잘못된 행태를 꼬집었다.” 〈폴링 다운〉 이후 그는 다른 문화권에 대해 좀더 많이 생각할 기회를 얻은 듯했다. “〈진주만〉 개봉했을 무렵 미국 대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일본 하면 생각나는 걸 꼽으라 했더니 1위가 ‘천안문 사태’였다. 비극적인 일이다. 미국에서 아시아 인구가 늘고 그에 따라 학교 교육내용도 달라지면 개선될 거라고 생각한다.” 〈배드 컴패니〉에서 서로 호흡이 매우 잘 맞는 파트너임을 확인한 브룩하이머와 슈마허는 이미 다음 작품 〈베로니카 게린〉을 함께 만들기로 약정한 상태다. 아일랜드의 범죄조직을 취재하다 목숨을 잃은 더블린 기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슈마허와 브룩하이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기대작이다. 뉴욕/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사진: <배드 컴패니〉의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왼쪽)와 감독 조엘 슈마허. )

[Review]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Story 열살의 소녀 치히로, 그리고 식구들은 이사가던 중 길을 잘못들어 터널을 지나게 된다. 치히로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돌아가자고 조르지만 엄마, 아빠는 아이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낯선 곳에 차려진 음식을 먹던 엄마 아빠는 돼지로 변해버리고 치히로는 하쿠라는 소년을 만난다. 마을 온천에서 일하게 된 치히로는 궂은 일을 하면서 엄마 아빠를 사람으로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는다. 한편, 온천장엔 밤이 되면 신들이 모여드는데 이름을 '센'으로 바꾼 치히로는 가마할아범, 린 등과 어울려 생활한다. 치히로는 자신을 돌봐준 하쿠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그를 돕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하쿠가 목숨을 잃을 기미를 보이자 치히로는 죽음의 기차를 친구들과 함께 탈 것을 결심한다. ■ Review 참 낡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런 첫인상을 남긴다. 3D 애니메이션이 득세하는 시대에 이 작업은 시대착오로 보일수 있다.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 일본 전통문화의 흔적이 배어있는 캐릭터들, 전형적인 판타지 구조. 어딜 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몇걸음 거리를 두고 있다. 컴퓨터 작업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속도감 있는 몇 장면에선 컴퓨터 작업의 흔적과 정확한 계산력이 돋보이는 구석도 있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섹시하고 윤기나는, 그리고 게임을 닮은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얻는 요즘, 낡고 기이한 애니메이션이다. 첫인상엔 이유가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근작이다. 1970년대 <미래소년 코난> 등의 TV 애니메이션에서 <이웃집 토토로>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까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한눈팔지 않고, 한길을 걸어왔다. 그의 작업방식은 늘 같다. 수공업적 방식을 선호하고, 셀 애니메이션의 색감을 사랑하며 비행(飛行)과 유토피아의 모티브를 작품에 각인시킨다. “난 언제나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철학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몇십년 동안 되풀이했던 이야기다.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발언도 근래 들어 그가 즐겼던 엄포성 멘트다. 모든 건 같은 선로에 있고, 커다란 변화는 없다. 그런데 기묘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여전히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아놓는다. 우리 마음 속의 무언가를 움직여 놓는다. 사진설명 주인없는 가게에서 탐욕스레 음식을 먹던 치히로의 부모는 돼지로 변한다. 그리고 치히로의 모험이 시작된다. `이상한 나라`에 머물게 된 치히로가 구해야 하는 것은 부모님만이 아니다. 용이 된 하쿠가 위기에 처하자, 치히로는 그를 구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애정이 싹튼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소녀 치히로의 모험담이다. 소녀는 극히 평범하고 눈에 띄는 구석이라곤 없다. 부모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것 외엔. 아이의 부모는 주인 몰래 잔치상에 차려있던 음식을 먹고는 돼지로 변한다. 치히로는 부모를 다시 사람으로 돌려놓기 위해 고심한다. 동화와 민담에서 우리가 익히 만났던 이야기다. 교훈적인 이야기 아닌가, 싶은 편견을 허물어주는 건 재미있는 캐릭터다. 치히로가 일하게 된 온천장은 (우리 식으로 이해하자면) 정령들의 집합소. 온천장 입구를 지키는 개구리, 가면 쓴 귀신,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마녀에 이르기까지 진기한 캐릭터가 모습을 비춘다. 캐릭터들의 아기자기한 장기자랑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훈훈한 웃음으로 채워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본 적 있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낯설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선 <이웃집 토토로>에 나왔던 숯검댕이 캐릭터가 나온다. 후에 이름을 ‘센’으로 바꾸는 치히로와 하쿠의 우정과 사랑은 미야자키 감독이 간접적으로 관여했던 <귀를 기울이면>의 후속편 같다. 토착신앙의 영향권 내에 있는 일본적 판타지라는 점에선 <원령공주>, 그리고 어른들 몰래 정령 세계와 소통하는 아이의 이야기는 <이웃집 토토로>와 닮은 꼴이다. 다시 말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제까지 해왔던 일을 다른 모양새로 바꿔 솜씨좋게 주무른 형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래된 신념을 담는다.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이곳에선 필요없다”는 것이 온천장을 지배하는 모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돼지같은 동물로 변한다. 고전적인 노동 예찬론이다. 신도(神道)라는 전통신앙의 흔적도 있다. 치히로가 일하는 온천장엔 기이한 정령의 출입이 잦다. 심지어는 오물신이라는 존재도 등장해 몸에 묻은 오물을 온천물로 씻어내려고 한다. 자연 만물에 혼이 깃들어있다는 토착신앙의 믿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애니미즘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 일본적 애니메이션이다. 사진설명 치히로가 파이프를 타고 달리는 장면에서 미야자키 감독은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한 연출력을 과시한다. 치히로는 가마할아범을 졸라 일자리를 얻는다. 여기서 치히로는 숯을 나르는 일을 하며 가마할아범을 돕는 숯검댕이(<이웃집 토토로>에 나왔던)들을 만난다. 얼굴없는 정령 가오나시는 황금으로 치히로를 꾀려 하지만 치히로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나 이 따뜻하고 신나는 모험의 끝자락에는 가오나시를 위한 해피엔딩도 준비되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고답적인 길을 밟는다. 애니메이션이 관객을 감동시키는 경로는 복잡하지 않다. 그중 하나는 움직임의 테크닉. 치히로는 소동극을 벌이다가 건물 바깥에 위치한 파이프를 타고 달린다. 아래는 캄캄절벽이다. 잰걸음으로 달려가지만 파이프는 곧 모양이 휘어버린다. 아이의 걸음은 더 빨라진다. 그리고는 앞에 버틴 벽에 폭 감싸이듯 부딪힌다. 유머감각이 배인 캐릭터 움직임으로 미야자키 감독은 부드러우면서 유연한 연출력을 과시한다. 이건 확실히 거장의 실력이다. 황금으로 자신을 꾀려는 어느 정령의 유혹에 치히로는 “난 받을 수 없어. 내게 정말 소중한 것은 이게 아니야”라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화려함 대신, 소박함과 잘 드러나지 않음의 미학을 품고 있다. 마치 사랑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수 있지만 일단 내뱉고 나면 의미가 하찮아지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불투명함이 가득한 애니메이션으로 관객들 마음의 온도를 슬며시 높여놓는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세련되고 힘있는 판타지”라는 평을 얻으며 금곰상을 수상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센과 치히로..> 배경, 다테모노엔

[Review] 하치 이야기

■ Story 1924년 1월. 도쿄의 대학교수 우에노 선생(나카다이 다쓰야)의 집에 태어난 지 두달된 아키다견 한 마리가 선물로 온다. 우에노 선생은 강아지의 다리가 8자라서 여덟을 의미하는 ‘하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외동딸 치즈코(이시노 마코)가 갑자기 결혼하는 바람에 하치를 자식처럼 맡아 키우게 된다. 매일같이 우에노 선생을 역에 배웅하고 저녁때면 마중을 나가는 충견 하치. 그러나 우에노 선생은 강의 중 뇌출혈로 급사하게 되고, 주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하치는 매일 저녁 시부야역에서 우에노 선생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 Review 개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늘 있어왔다. 굳이 플란다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도 민담 속에 등장하는 충견들에서부터 최근의 백구에 이르기까지 숱한 이야기들이 있다. 지능이 높을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정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데 인색할 줄을 모르는 개들은 여러 일화들을 통해 인간의 귀감이 되고 그것이 바로 개가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생각되는 이유일 것이다. <하치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기다림을 주제로 하고 있다. 주인과 1년5개월 동안 나눈 정을 10년의 기다림으로 죽을 때까지 간직하는 하치는 인간처럼 합리적으로 망각하고 슬픔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여운어린 감동을 선사하는 이야깃거리다. 다만 영화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 영화는 동물과 인간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가장 크게 부각시켜야 할 교감의 문제를 다소 소홀히 다루고 있다. 하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 부인이 서운해한다든가, 벼룩을 잡아준 뒤 하치와 탕 속에 들어가 같이 목욕을 한다는 등의 코믹한 설정 몇개가 제스처처럼 제시되는 것 이외에 우에노 선생과 하치의 개인적인 우정이 세심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에피소드들은 얽혀가면서 감정을 상승시키는 대신 계속해서 병렬적으로 이어질 뿐이고 그 호흡도 너무 짧게 끊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을 위해 어마어마한 액수를 들여 건설한 1930년대 시부야역의 세트는 그다지 인상 깊게 각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늙고 병든 하치가 마침내 기다림에 지쳐 역 앞 눈밭 위에 자는 듯이 누워 있고 그 곁을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을 조용히 비추는 장면은 아름다워서 슬픈지 슬퍼서 아름다운지 모를 느낌을 자아낸다. 그 어떤 감정이나 기억도 언젠가는 증발시켜버릴 수 있는 인간에게 끝까지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는 참으로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뒤늦게 찾아온 1987년작의 <하치 이야기>는 괜한 너스레나 눈물짜내기 작전없이 찬찬하고 솔직하게 그런 증거와 위안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손원평/ 자유기고가 thumbnail@freechal.com

[Review] 이성강 감독 단편애니메이션 모음전

■ Review <두개의 방>과 함께 초기작에 속하는 <넋>은 인간의 삶을 불교적 윤회사상에 녹여낸 작품이다. 퉁퉁거리며 장의차가 달려오고 깊게 팬 구덩이에 관을 집어넣는다. 관을 뚫고 들어온 벌레와 쥐, 뱀은 육신을 다 갉아먹고 남은 것은 노란빛의 무언가뿐이다. 그 빛은 나무뿌리 속으로 들어가 열매로 바뀐다. 이때 한 여인이 무덤 앞에서 흐느껴 울고 한 남자가 나타나 그 열매를 여인과 나눠 먹는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단순한 선으로 묘사됐지만, 묵직함이 느껴지는 이야기. 하지만 그의 다른 단편 작품들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왼쪽부터 <두개의 방>, <넋>, <연인> ‘기억 속에 거울이 있다. 거울 속에 골목이 있고 그 끝에 그녀가 서 있다’는 말로 시작해 ‘기억 속에 거울이 있다. 그리고 그 끝에 내가 있다’는 이야기로 끝나는 <연인>은 인간의 기억과 자아 정체성에 관한 작품이다. 콘크리트로 가득한 도시, 한 여자 또는 남자가 아스라한 환상에 시달린다. 또는 즐기는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 또는 그는 거울을 바라본다. 유채 느낌의 밝은 컬러와 회색빛의 도시 풍경이 대비를 이뤄 더욱 강한 느낌을 전달한다. 3D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우산>은 자살을 앞두고 있는 한 화가의 기억 또는 환상을 다룬다.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도시. 한 남자가 창 밖으로 몸을 빼고 있다. 갑자기 푸른 초원 속의 한 소년이 보인다. 비바람이 심하던 그날, 소년은 버려진 인형을 줍는다. 시냇물 옆의 나무 밑둥에 인형을 집어넣어놓은 그는 물이 불어나 인형이 떠내려갈까봐 우산을 들고 나무를 향한다. 파스텔톤의 색채, 검은 테두리 선이 없는 그림, 어린 날의 순수와 희망 등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이성강 감독 스스로 <마리이야기>와 닮아 있다고 말하는 영화. 98년 히로시마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초청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우산>, <덤불 속의 재> 인디록 밴드 레이니 선의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은 다른 작품들보다도 더 내러티브가 아닌 이미지에 치중한다. 음울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이 밴드의 음악처럼 영화는 바다를 자유롭게 상상하고 헤엄쳐 간다. 정좌한 한 사람이 심해를 탐사하며 생명과 죽음, 그 오묘한 순리를 체험한다. 인디밴드들의 뮤직비디오를 여러 편 제작한 남지웅의 실사화면과 이성강의 그래픽이 어우러진다. <덤불 속의 재>는 이성강 감독의 명실상부한 대표작. 99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단편부문에 한국 최초로 초청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가장 선호한다는 회색빛의 낮은 채도가 우울하게 마음을 짓누르는 이 작품은 우연히 UFO를 목격한 한 남자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UFO를 본 뒤 자신의 몸의 절반이 찢겨져 버리는 환각에 사로잡힌다. 그의 몸은 거울처럼 산산조각나기도 하고 담뱃재처럼 바람에 날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 환상은 현실로 다가오며 그의 연인에게도 이 증상이 전염된다. 이 작품은 사회라는 시스템에 의해 분열되고 마침내 스스로도 자신을 알지 못하게 된 현대인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냉정한 듯 보이던 회색빛이 어느새 보는 이의 가슴속을 섬뜩하게 파고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석 ssoony@hani.co.kr

해외신작 <윈드토커>

에드워드 즈윅의 <영광의 깃발>이 남북 전쟁에 소수자로 참전한 흑인 병사들의 기억을 복구했다면, 오우삼의 <윈드토커>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다. <윈드토커>가 망각으로부터 불러낸 용사들은 나바호 인디언 혈통의 병사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군에 의해 암호 체계에 구멍이 뚫려 고심하던 미국은 나바호 인디언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든 신종 암호를 개발하고 나바호족 출신 병사들을 ‘윈드토커’라고 불리는 암호병으로 태평양 전선에 투입한다. 부하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전투의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조 앤더슨 상사(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암호병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앤더슨과 부대원들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은 암호병이 아니라 암호다. 그 대가는 윈드토커들의 목숨도 포함한다. 의리와 의무의 틈새에 낀 남자의 딜레마. 오우삼 감독의 유서 깊은 테마는 <윈드토커>의 고막을 찢는 폭음 속에서 또 한번 변주된다. 앤더슨은 자신들의 임무가 암시하는 바를 짐작하고 동료들에게 암호병과 너무 가까워지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서로를 알아보는 ‘진짜 사나이’들은 그만 선을 넘어 마음을 나누고 만다. 나바호 인디언 플루트와 하모니카의 멜로디는 피비린내 스민 전장의 슬픈 바람 속에서 하나로 섞인다. 실화에 바탕하고 메시지를 앞세운 전쟁드라마이긴 하지만, 액션 안무와 폭력의 리얼리티도 불꽃놀이를 벌일 전망. 하긴 격투의 시학을 고집스럽게 연구해온 오우삼 감독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블랙 호크 다운> <위 워 솔저스>에 지고 싶을 리 없다. 김혜리----

주관적인 상반기 결산 / 심재명

올 한해도 절반을 채워간다. 상반기, 그러니까 1월부터 6월까지 개봉한 영화 중 돈을 번 영화는 내가 알고 있기론 네다섯편이다. <나쁜 남자> <공공의 적> <집으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 혹자는, 그만한 성적이면 예년과 비슷한 수준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다. 60편에서 70편 가까이 제작되는 한해의 영화 중에 통상적으로 10여편의 정도가 흑자를 본다고 할 때, 올해도 남은 절반인 하반기를 감안하면 그리 낙담할 일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들춰보면,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 외의 영화들의 손해액이 너무 크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충 특정 영화를 들어 예를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망해서 속상한데 기자도 아닌 니가 거명까지 해가며 속을 긁을 이유가 뭐가 있냐고 따져들까봐 언급은 못하겠고, 우리 영화가 공동제작, 개봉한 최근작 <후아유>의 예를 들어보겠다. 이 영화는 순제작비 20억원에 마케팅비 약 12억원을 썼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국 약 20만명이 들었다. 극장수익 포함 기타수익을 예상해도 물경 20억원이 날아갔다. 밤 새우고, 코피 쏟고, 땀 흘리며 몸과 마음을 바쳐가면서 돈을 날릴 수도 있는 것 중 대표적인 일은, ‘도박’과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일깨우게 한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친구>의 연이은 성공, <엽기적인 그녀>와 <신라의 달밤>과 <조폭 마누라>와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의 놀라운 ‘떼성공’ 이후, 지금 한국영화 시장은 코피 쏟는 제작사와 투자사로 가득하다. 과장하자면, 피바다다. 지난해, ‘와라나고’ 영화로 묶여 불렸던 이른바 상대적으로 중·저예산의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영화가 용감하게 개봉하는 예도 올 상반기엔 드물다. 모두 상업적으로 성공해보겠다고 야심찬 칼을 휘둘렀던 만만치 않은 제작비를 들인 영화들이 번번히 깨져 나갔다. 그래도 지금 현재, 쉼없이, 여전히 가열찬 영화만들기는 계속된다. 6월 말 현재 제작중인 영화만도 30여편 가까이 된다고 한다. 올해는 근 몇년 중 가장 많은 편수가 제작될 것이라고도 한다. 어떤 벤처 캐피털의 CEO가 한 말이 기억난다. “성공이 가장 큰 적이다”라는. 2∼3년 동안의 성공이 주는 달콤함이, 두려움과 긴장을 없애고 배짱만 키워놓은 거 아닐까. 논리의 비약인가? 영화사는 셀 수 없이 늘어나고, 제작비는 겁없이 올라가고, 시장의 변화 논리에 따라 마케팅비는 미친듯이 퍼부어대는 작금의 영화시장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너, 두편 연달아 망하더니 쓸데없는 비관주의자가 다 됐구나라는 비웃음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한 심정은 지금 ‘낙담중’이다. 지난해 <씨네21>에 실린 본인의 인터뷰 기사 중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어쩌고의 중간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실패를 두려워하진 않았다. 또한 매번 최선을 다했다고도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영화 산업의 욱일승천하는 성공가도가 가져온 ‘빠른 변화’-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에 기민하고 냉정하게 대처했는가라고 자문한다면 아니올시다이다. 한국영화의 미래에 대해 자만하진 않았지만 너무 우직했다고도 생각한다. 남들은 어떤가? 혹은 약삭빠른 생각을 했는가? 한국영화 산업의 바람직한 그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면서 상반기를 접는다. 바야흐로, 월드컵 특수 이후, ‘월드컵 후유증’에 시달릴 대중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하반기는 시작된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shim@myungfilm.com

SK텔레콤과 KTF 등 경쟁업체들의 월드컵 광고 대결

제작연도 2002년광고주SK텔레콤대행사TBWA한·일월드컵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이 글이 실릴 때쯤이면 한국 대표팀이 4강에 올랐는지 여부에 따라 전국을 점령한 붉은 바람이 새 국면에 들어가 있겠지만, 어쨌든 8강전에 진출한 현 결과만 갖고도 충분히 벅차고 감격스럽다. 생애에 또 다시 이렇게 열광적인 이벤트를 경험할 수 있을지 싶다. 월드컵이 막을 내리면 광고계는 주판알 튕기는 소리로 요란할 전망이다. 월드컵 기간 내내 월드컵 특수를 겨냥한 광고로 브라운관과 신문 지상을 방문해온 업체들이 손익계산서를 작성하느라 바쁠 터이기 때문이다. 사실 손해났다고 울상 짓는 곳은 없을 것 같다. 월드컵을 향한 국민들의 놀라운 집중력으로 영화계 및 음반업계가 찬바람을 맞은 가운데 광고계만큼은 월드컵을 화제로 소비자들과 어깨동무한 채 앞으로 행진했다. 그럼에도 광고비 대 효과를 따졌을 때 분명 희비는 엇갈릴 것이다. 특히 이 현상은 ‘오~, 필승 라이벌’을 외치며 ‘눈치 코치’ 게임을 펼쳐온 경쟁업체들간에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이동통신서비스 분야의 쌍두마차로 누구보다 왕성하게 월드컵 관련 CF를 배출한 SK텔레콤과 KTF를 사례 삼아 월드컵 광고의 라이벌전을 엿본다. 먼저 SK텔레콤은 아직 총평을 내놓기가 이른 시점임에도 광고사에 남을 만한 사례를 제공했다는 기분 좋은 소리를 듣고 있다. SK쪽은 자사 브랜드인 스피드011이 한국대표팀의 공식응원단 ‘붉은 악마’를 후원한다는 사실을 광고의 무기와 방패로 십분 사용했다. ‘Be the reds’를 캠페인 주제로 정한 SK쪽은 월드컵의 막이 오르기 전 전속모델인 한석규를 내세운 일종의 계몽 광고로 눈길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같은 붉은 악마의 응원구호를 가르치며 전 국민을 통일된 규격의 붉은 악마로 만드는 데 톡톡히 기여한 것이다. 월드컵 열기를 형성하는 대표적인 세축으론 히딩크 감독과 대표선수들, 그리고 붉은 악마가 있을 터. 이중 SK쪽이 붉은 악마를 고른 것은 지혜로웠다. 이는 소비자의 편에 섰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며, 비록 결과론이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응원열풍에 힘입어 국민정서를 대표한다는 상징성마저 갖추게 됐으니 말이다. 월드컵 기간 구사된 SK광고의 순발력 있는 변신술도 돋보였다. 경기 시작 전 양국 선수들이 입장하고 국가가 연주되는 순서에서 진행되는 ‘국기세리머니’(관중석에서 출전국의 대형 국기를 펼치는 진풍경)를 활용한 광고는 심장박동 수를 높이는 멋진 예고편 역할을 담당했다. 게다가 한국전의 상대국에 따라 국기를 교체한 ‘타이밍’(timing) 전략은 절묘했다. 폴라드전을 앞둔 시점에는 ‘마침내 폴란드입니다’라며 폴란드 국기의 세리머니 장면을 선보이더니, 폴란드전 중계가 끝난 직후 광고시간대부터는 미국 국기로 상대국 국기 세리머니 장면을 발빠르게 교체한 채 ‘이번엔 미국입니다’라는 문구로 다음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겼다. 이는 새로운 광고를 선보이기 위한 제작비를 최소화하면서 생방송 뉴스처럼 실시간으로 소비자의 관심사를 파고든 효율적인 수였다. 16강 진출 여부를 가름하는 포르투갈전이 종료한 뒤에도 마치 16강 진출을 예상했다는 듯 ‘하나된 사천만이 이루어냈습니다’란 자막 아래 환호하는 시민의 모습을 극적으로 포착한 다큐 형식의 광고를 내보냈다. 물론 16강 진출 좌절이란 결과를 얻었다면 준비된 다른 광고가 이 시간을 메웠을 것이다. 이렇게 SK텔레콤 광고는 월드컵과 남다른 친분이 있음을 소비자의 뇌리에 심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SK텔레콤은 CF를 통해 단 한번도 월드컵을 언급한 적이 없다. 국제축구연맹인 FIFA의 후원기업이 아니면 ‘월드컵’이란 용어를 사용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월드컵을 말하지 않으면서 월드컵 시류를 가장 역동적으로 대표한, 독특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KTF 대행사웰콤 반면 FIFA 공식파트너인 KTF는 월드컵을 맘놓고 얘기할 수 있는 좋은 여건에서도 처음엔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붉은 악마를 후원하면서 SK쪽이 투자한 금액보다 십여배나 높은 액수를 FIFA쪽에 들인 KTF쪽으로서는 적잖게 애가 타는 상황이었다. 다만 국민의 입에서 ‘한국팀 파이팅’ 대신 ‘코리아팀 파이팅’이란 외침이 나올 때마다 광고효과를 실감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대표팀 23인의 사진을 모자이크처럼 배치한 CF 등으로 KTF란 브랜드와 ‘Korea Team Fighting’의 관계를 알려왔기 때문이다. 근데 뜻밖에도 좀더 강력한 대박은 변방에서 터졌다. 조연 정도로 투입한 장나라 주연의 16강 진출 기원 상금프로모션 CF가 친근한 화젯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장나라가 깜찍하게 뽀뽀세례를 퍼붓으며 ‘황선홍 아저씨 한골’, ‘안정환 오빠 한골’ 등을 외친 광고의 내용이 한국전에서 골을 넣은 주역과 일치하는 통에 장나라, 곧 KTF 광고가 점쟁이처럼 경기내용을 예견했다는 예상치 못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KTF측은 퍼블리시티(언론 홍보) 작업 및 장나라의 길거리 응원전 프로모션 등으로 이 화젯거리를 적극 확대 재생산하면서 마케팅 위세를 자랑했다. 월드컵 관련 CF의 서바이벌 게임은 나름대로 치열했다. 그렇다고 설마 그 장외경쟁의 열기가 월드컵의 한국전에 비하겠는가. 스포츠는 재미나게 즐기라고 존재하는 것인데 마치 국가의 흥망을 책임지고 있는 듯 비장함과 처절함을 내뿜는 한국팀의 월드컵 출전기를 보면 이들 광고의 힘겨루기는 부담없이 감상할 수 있는 작은 전쟁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kr

강백호, 레이싱카를 타다, <범퍼 킹>

애니메이션계의 ‘큰손’들이 뭉쳤다. SBS프로덕션과 대원씨앤에이홀딩스, 손오공, 에펙스디지탈은 2003년 4월 방영을 목표로 39부작 30분 TV시리즈 <범퍼 킹> 제작에 들어갔다. 지난해부터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이들 회사는 여러 작품을 검토한 끝에 레이싱 카 경기를 다루는 <범퍼 킹>을 함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방송사, 해외 배급사, 캐릭터 유통사, 제작사가 전략적으로 한 작품을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주목을 끈다. 그만큼 마케팅 전략을 확실하게 세우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범퍼 킹>이 여타 TV시리즈와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26부작이라는 공식을 깨고 39부작으로 구성되는 점이다. 이는 자본금 회수 사이클이 긴 애니메이션의 특징을 고려한 것이라고. 제작사인 에펙스디지탈은 “애니메이션이 오래 기억되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이 오래 작품을 기억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13부작이나 26부작은 기억될 만하면 끝나고 만다. 그렇게 보면 39부작도 오히려 짧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시리즈 구성을 마음대로 늘리다니, 방송사의 확실한 지원을 받는 작품의 특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갈수록 이런 작품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한편 기획단계부터 캐릭터 상품화가 고려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방영이 시작되면 각종 레이싱 카와 변신모형, 게임 등이 출시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주목할 것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오히려 게임을 중심으로 기획된 듯한 느낌이 드는 점이다. 어쩌면 당연한 게 작품 전체가 하나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범퍼 킹>을 움직이는 축은 바로 ‘범프 크로스 게임’. 레이싱 경기장은 스피드 존과 크래시 존으로 나뉘고, 크래시 존에서 필요한 충전 아이템을 스피드 존에서 획득하는 방식이다. 스피드 존을 통과한 레이싱 카들은 다시 크래시 존에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범퍼, 에어 스포일러, 타이어, 부스 등의 튜닝 아이템은 경기장 외부에서 업그레이드하면 된다. 잦은 충돌을 하면 에너지가 바닥나고, 차가 뒤집혀도 움직일 수 없다.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일단 아웃이다. 게임을 연상시키는 영상과 스토리가 주효해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레카>를 보건대, 코믹 액션물을 표방하는 3D애니메이션 <범퍼 킹>의 인기에도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제작진은 스피드와 비주얼, 액션에 치중할 생각이라고. 때는 2034년, 지구 어딘가에 있을 법한 작은 나라 코레가 무대다. 주인공은 고물선에 사는 12살 소년 타이온이다. 범퍼 카 대신 고물로 놀던 어느 날, 범프 크로스계의 천재로 촉망받는 소년 제비오를 만난다. R/C 범퍼 카 조종에 재능있는 이 소년은 이제 천재도 이기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제비오의 도전을 받은 탓에 당장 범퍼 카가 필요했던 타이온은 밤 12시에 유령 붙은 범퍼 카로 불리는 재퍼를 찾아간다. 재퍼에 붙은 유령은 옛날 최강의 범퍼 파일럿으로, 범퍼 킹이 되기 직전에 상대의 비열한 반칙으로 꿈이 좌절된 것이다. 유령은 원수를 갚기 위해 새로운 몸을 원하고 있다. 마침 타이온을 본 유령은 몸을 빼앗겠다고 덤벼들지만 잘못되어 뚱뚱한 박쥐의 몸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타이온은 깜찍한 박쥐로 전락한 유령의 도움으로 범프 크로스 세계에 뛰어들게 된다. 이후 벌어지는 제비오와 타이온의 양상은 마치 <슬램 덩크>의 강백호와 서태웅을 보는 듯한 느낌. 천재 소년에게 자극받아 주인공은 차근차근 성장해 간다는 이야기다. 결국 ‘범퍼 킹 쟁탈전’인 것이다. 한편 주변 인물들의 등장은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적 요소에 한몫한다. ‘큰손’들의 프로젝트인 만큼 <범퍼 킹>은 안전하게 제작에서 방영까지 이어질 듯하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뇌리에 오래 남는 비결은, 완벽하고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플러스 알파’에 있음을 제작진은 기억해줬으면 한다.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

김혜준을 말한다

문성근 ● ● ● ┃배우·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 97년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를 처음 본 게. 아마도 한국영화연구소에 안성기 선배와 함께 이름을 끼워넣게 되면서 인사를 나눴던 것 같다. 빛도 못 보고, 욕만 먹는 자리인데도 용케도 버텨왔구나 싶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나 문화체육부에서 지원하는 연구 프로젝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늘 선정명단에서 배제됐는데, 그런 사정을 알고 나서부터는 이 사람이 뭘 먹고사나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못 먹어서 저렇게 삐쩍 말랐구나 하고 웃고 말았지만. 그가 무척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정지영 감독 등과 스크린쿼터 감시단 활동을 하면서부터 뼈저리게 느꼈다. 깃발 들고 나섰지만, 뒤에서 논리적으로 백업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나. 자, 가자, 하고 영화계 현안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영화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까지 관심을 넓혀 문화정책 전문가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기적인 바람은 고시가 아니더라도 현장에서 잔뼈 굵은 그와 같은 이론가들이 정부 관료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한다. 김동원 ● ● ● ┃독립다큐멘터리 감독·푸른영상 대표혜준이를 만난 건 오래됐지. 나랑 같이 일을 한 적은 없어도, 인권영화제 일이나 영화진흥법 개정을 논의하는 세미나 같은 데서 자주 얼굴을 봤어. 술을 잘 안 먹는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야. 물론 처음 보면 여리게 보이고, 너무나 합리적이어서 답답할 때도 있어. 근데 뚝심 같은 게 있어. 중심을 잃지 않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독립단편영화 심의 거부 문제를 놓고 우리쪽과 다소 의견 차이를 보인 적은 있어도 여전히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 싶어.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그 친구가 전에 영화진흥법을 파고들 때 난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근데 나도 음비법 위반으로 한번 옥살이를 하고 나오니까 아, 공부를 해야겠구나 싶더라고. 다들 대장만 하려고 할 때 묵묵히 뒤에서 연구해온 선각자라 할 수 있지. 조광희 ● ● ● ┃변호사·법무법인 한결영화계 사안을 두고서 변론을 할 때면 그가 정리해놓은 그간의 자료들에 기대 도움을 받은 적이 많다. 개인적으로 놀랐던 것은 그가 증인으로 법정에 섰을 때다. 상대 변호사가 거칠게 다룰 수도 있고, 법정이라는 공간 자체가 원래 불편한 곳이다. 그런데 어떤 질문에도 논점을 잃지 않더라. 언제나 자신의 입장이 잘 구축되어 있는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그 논리가 반복이나 환원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더 풍부하고 조밀해진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이론가지만, 강퍅하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 것도 그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검열문제만 해도 그렇다. 표현, 창작의 자유 같은 주제는 변호사들도 정치한 논리를 세우기가 힘든 사안이다. 그러나 그는 웬만한 변호사들보다 한발 앞서 있다. 이효인 ● ● ● ┃영화평론가·경희대 영상예술학과 교수언젠가 누가 와서 그가 요즘 텃밭 가꾸는 데 재미붙였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올해 한 일 중에 그게 제일 잘한 일이라고 그에게 전하라고 했다. 주위에서 불편할 수도 있을 정도로, 무슨 낙으로 사나 싶을 정도로 일에 매여 있는 스타일이다. 물론 그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성실성 덕을 보고 살아온 것을 부정할 순 없다. 민족영화연구소 시절, 그는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이성교제 근절이 철칙이었던 80년대 그곳이었지만, 지금의 부인과 연애할 때도 그가 밉게 안 보였다. 다 그런 미더움 때문이다.명계남 ● ● ● ┃배우·이스트필름 대표이창동 감독 데뷔시키겠다고 해놓고 영화사를 차리긴 했는데 막막했다. 어디 영화제작이라는 게 마음만으로 되는 건가. 들은 풍월만으로 메우긴 힘든 일이다보니 다급한 마음에 정지영 감독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놈의 충무로 판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고, 좀 알려달라고 했다. 그때 정 감독의 말은 “김혜준한테 가 봐”였다. 당시 같은 건물을 쓰고 있던 한국영화연구소 기획실장인 그를 찾아가면, 제작에서 배급까지 필요한 사항을 소소히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연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크린쿼터 수호를 위한 영화인들의 집회에서 사회자로 나서 마이크를 잡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에게 신세를 지는 경우도 많아졌다. 여기저기 대학 등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는데, 다 김혜준에게서 알게 모르게 과외수업 받지 않았으면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안정숙 ● ● ● ┃한겨레 기자·<씨네21> 전 편집장 영화진흥법이건 스크린쿼터건 기사를 쓰려면 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해외 출장을 가서도 급한 일이 터지면, 그에게 팩스 넣고 전화 걸고 그랬을 정도니까. 한눈판 적 없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사생활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그에 대한 인상과 기억은 그게 전부다. 그를 영진위로 끌어들였던 건 이런 사람들이 주류로 들어와서 제구실을 해야 지원책이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반대도 심했다. 일부에서는 그를 주적으로 몰아세웠을 정도니까. 그들은 학계에 연구경력과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왜 하필 김혜준이냐고들 저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영화 정책을 만들고, 다듬는 데 있어 그의 머리와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그가 유일했다.▶ 한국영화 정책이론가,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장 김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