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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6부작과 그 전후의 연대기 [4] - 메커닉 사전

밀레니엄 팔콘 Millenium Falcon 밀레니엄 팔콘처럼 극적인 운명을 겪은 우주선도 별로 없을 것이다. 정확한 제작연도를 알 수 없는 이 고물 우주선은 원래 평범한 화물선으로 태어났다. 투박한 밀레니엄 팔콘은 한 솔로의 친구 랜도가 도박에서 이기는 바람에 그의 손에 넘어가면서부터 변신을 시작했다. 양쪽에 블라스터 총을 장착하게 된 것. 밀레니엄 팔콘은 다시 한번 도박을 거쳐 한 솔로에게 갔고, 그때부터 밀수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터보레이저 포탑과 미사일 발사장치, 광속추진장치 등을 보태고 내부에는 좌석 밑에 숨겨진 비밀 창고를 만들었다. 가끔 속도를 내지 못하는 사고를 빚어 주인 한 솔로와 츄바카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는 밀레니엄 팔콘의 디자인은 조지 루카스가 햄버거를 먹다가 떠올렸다고 한다. X-윙 X-Wing 반란군의 상징이 된 전투기. 루크 스카이워커와 동료 파일럿들이 탑승해 데쓰 스타를 파괴하면서 오랜 명성을 입증했다. X-윙은 길이가 12.5m이고 주로 네개의 엔진으로 움직인다. X-윙의 날개는 균형을 유지하고 방어막을 형성할 뿐 아니라 무기를 탑재하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파일럿은 보조 파일럿에 가까운 기능을 수행하는 드로이드의 도움을 받아 적을 공격하거나 광속으로 행성 사이를 운행할 수 있으며, 산소여과장치, 탈출장치 등으로 생명을 보호받게 된다. 제국군은 반란군의 주력무기 X-윙에 대항하기 위해 네개의 강력한 레이저 포를 탑재한 TIE 인터셉터를 제작했지만, 포스가 함께하는 X-윙을 이기지는 못했다. 에어스피더 Airspeeder 공중으로 다니는 자동차 모양의 소형 비행정. <에피소드2>, 코루산트에서 독벌레를 이용한 아미달라 2차 암살기도가 실패한 뒤 범인과 아나킨은 각자 에어스피더에 오른다. 빌딩 사이를 스치며 쫓고 쫓기는 긴박한 추격전은 에어스피더가 훨씬 일상적인 탈것으로 등장하지만, <에피소드1>의 포드레이서 못지않은 스피드와 파워를 갖추고 있음을 웅변한다. 아나킨의 거친 운전 매너에 오비완 케노비는 “이러는 건 정말 맘에 안 든다”는 잔소리를 몇 차례나 반복하기도. 아슬아슬하게 잡히지 않는 범인의 에어스피더를 향해 아나킨은 맨몸으로 뛰어들고, 미끄러운 프레임에 간신히 매달린 채 광선검을 휘두르는 격투를 벌인다. 광선검 lightsaber 광선검은 제다이, 그리고 타락한 제다이가 재건한 시스의 기사들만 사용하는 무기로 요란하고 야만적인 블라스터와 달리 고귀한 시대의 산물이다. 제다이에게 광선검은 포스와 조화를 꾀하도록 정신을 집중하는 도구이자 정밀히 조율된 심신의 기예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고대 제다이의 거점 오수스 행성에서 나는 수정이 내장되어 검의 에너지를 칼날 모양으로 결정시키며 수정의 색이 날의 색을 정한다. 손잡이의 버튼 두개는 칼날 발사와 길이 조정 기능을 한다. 광선검은 수천년간 거의 형태 변화가 없었으나 자체 파워셀이 없던 초기 광선검은 허리의 파워 벨트에 연결해서 썼다. 다스 몰의 양날 광선검은 두개의 칼을 접합한 변형물. 공격이 아닌 방어를 위해서만 무술을 쓰는 제다이들은 시스가 잠들어 있던 세월 동안 수련용으로만 광선검을 썼기에 다스 몰과의 결투에서 콰이곤 진이 고전한 것은 당연지사. CG 이전 시대의 <스타워즈> 제작진은 광선검의 날을 일일이 애니메이션 셀 위에 채색하고 검이 발사되기 직전 숏에서 컷을 나누는 고생을 감수했다. 메이스 윈두의 광선검이 독특하게 보라색인 까닭은? 새뮤얼 잭슨이 좋아하는 색깔이라는 것 외에 다른 심오한 이유는 없다고 한다. 블라스터 blaster 블라스터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무기들의 총칭이다. 블라스터 피스톨, 블라스터 라이플, 터보레이저 포 등이 있는 블라스터는 ‘볼트’라 불리는 에너지원에서 동력을 얻는 테크놀로지. 제국군과 반란군, 무법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블라스터 피스톨은 적에게 육체적인 손상을 입히기보다는 적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블라스터의 방아쇠를 당기면 가스가 일련의 변화 과정을 거친 뒤, 프리즘 크리스털로 초점을 맞춰 광선이 발사되는 것이 기본적인 원리. 블라스터 피스톨은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무기 중 가장 구시대적 디자인이다. 포드레이서 Podracer 타투인의 고속 운송 수단, 포드레이서는 돌출된 조종석 앞 양쪽으로 고성능 엔진이 달려 있고, 컨트롤 케이블이 조종석과 엔진을 연결하는 단순한 구조지만, 시속 800km의 힘과 속도를 낸다. 타투인에는 포드레이서 경주대회가 인기리에 열리곤 한다. 노예 소년 아나킨 스카이워커도 주인의 차량 정비소에서 일하면서 터득한 기술로, 남몰래 고물 포드레이서를 개조해 경주대회 출전을 준비한다. 아나킨은 소박하게 기본만 갖춘, 왜소한 은청색 포드레이서로 경주에 출전하지만, 불법 무기를 장착한 챔피온 세볼바의 최신 포드레이서를 앞질러 우승한다. 아나킨은 경주를 지켜본 제다이 콰이곤 진의 도움으로 자유의 몸이 돼 제다이 수련의 길을 떠나게 된다.

김기덕-장동건의 <해안선> [3] - 김기덕 감독 단독 인터뷰

수십명의 기자가 몰린 <해안선> 촬영현장에서 간단한 대답만 하고 자리를 정리한 김기덕 감독에게 이틀 뒤 전화를 걸어 <해안선>의 이모저모에 대해 들어봤다. <나쁜 남자>가 끝난 뒤 강원도에 <수취인 불명>의 빨간 버스를 갖다놓고 콩과 옥수수를 기르는 등 생활의 변화를 꾀하면서도 창작의 속도를 늦추지 않던 그는 그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해안선> 두편을 준비해왔다. <해안선>을 끝내고 바로 촬영에 들어갈 <봄 여름…>은 동자승이 해탈하기까지를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보여줄 작품. 제작사인 LJ필름은 <해안선>이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는 반면 <봄 여름…>은 다소 다른 색깔의 작품이라 <봄 여름…>을 먼저 찍길 바랐지만 주왕산에 지을 예정인 세트가 환경부와 환경단체의 비협조로 미뤄지는 바람에 <해안선>부터 찍게 됐다. 다음은 예정된 야간촬영이 취소된 6월19일 밤 11시, 위도의 제작진 숙소와 전화로 연결해 진행한 인터뷰. -그간 준비하던 작품이 <해안선>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두편이었다. 이중 <해안선>을 먼저 촬영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실 준비하던 작품은 두편말고 <활>도 있었고 여러 가지였다. <봄 여름…>은 지난해 11월에 찍으려던 건데 촬영협조가 안 되고 해서 미뤘다. <해안선>에 대한 구상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부터 했다. 2억∼3억원 저예산으로 찍을 요량으로 했다가 <봄 여름…>이 늦춰지면서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장동건이 출연하면서 생각보다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보도자료에 인용된 감독의 말을 보면 <해안선>이라는 영화는 당신을 짓누르는 어떤 악몽을 떨쳐버리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마치 이 영화를 거치지 않으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절박함이 있는 듯하다 =<봄 여름…>은 인간이 성숙해가는 어떤 철학적 경지를 그리는 건데 과연 내가 지금 그걸 표현할 수 있을까 의심스런 부분도 있었다. 촬영협조가 문제되기도 했지만 그런 내 상태가 작용하기도 했을 거다. 감독의 말에 쓴 것은 사실이다. 해병대에서 5년을 보낸 뒤 제대한 뒤에도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군대를 갔다온 사람들은 대개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군대생활이 나를 세뇌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격성, 경계심, 의심, 적대감 그런 것이 뿌리깊게 남아 있다. 배우들이 2박3일간 해병대 지옥훈련을 하는 걸 보면서 다시 악몽을 꾸기도 했다. 군대는 굉장히 단순하고 무식한 조직이지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투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이렇게 쉽게 길들여지는구나를 확인하게 된다. 적을 철조망 너머에서 찾을 게 아니다. 군대를 거쳐온 우리, 군대를 갈 우리가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고 총질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건 가학이 아니라 자학이다. -배우들의 2박3일 해병대 지옥훈련은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단순히 그럴듯한 연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광기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퇴소식하던 날, 배우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에 미쳐돌아가는 상황이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훈련이 끝나고 장동건과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고 시나리오에 표현된 광적인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고 하더라. 지옥훈련을 거치면서 배우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지만 옆사람이 하니까 나도 하는 경험을 했다. 그런 훈련을 하고 나면 자신이 위대하다는 생각에 빠진다. 그게 어떤 광적인 집착으로 변하기도 한다. 장동건도 그런 걸 이해하겠다고 말하더라. 영화에 드러날 계급구조, 군대질서를 위해서도 필요한 훈련이었다. -<해안선>은 매우 구체적인 정치적, 역사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악어> <파란 대문> <섬> <나쁜 남자> 등 좀더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영화와 달리 <야생동물 보호구역> <수취인불명> <해안선>은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것은 군대라는 집단에서 경험한 어떤 것이 투영돼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동족과 분단의 모순을 그리고 <수취인불명>에서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그린 것처럼 <해안선>도 어떤 대치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남과 북의 대치에서 비롯된 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끼리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모순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다. 간첩이 들어온다고 삼면이 바다인 나라의 해안선에 모조리 철조망과 군부대가 있다. 많아야 1년에 1∼2명 들어올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 그래서 이상하게 해안에만 감도는 적대감, 긴장감, 초조함이 있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라 매우 민감한 소재이다. <해안선>은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모순에 대해서 솔직히 자백해보자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메시지에 공감할지 모르지만 정작 하고 싶은 얘기가 꼭 군대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거 아닌가 싶다. 구획을 지어놓고 적은 저 너머에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죽이려 드는 것 아닌가. -다른 한편 <해안선>은 가장 홀대받은 영화 가운데 하나인 <실제상황>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상황>에서 증오심으로 인해 살인에 이른 한 남자의 모습이 <해안선>에 투영돼 있다. =졸병이 고참에게 대드는 하극상에 대한 이야기가 비슷할 거다. 군대에선 물리적 우월성이 지적인 우월성을 누르는 일이 흔하다. 매우 체계적이고 확고한 것 같지만 군대에서 질서는 겉보기만큼 완전하지 않다. 계급장이 그걸 은폐할 뿐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스타와 작업하지 못했다. 이번에 장동건과 작업하게 됐는데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김기덕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목표로 하는 건 아닌데 스타를 기용함으로써 흥행에 대해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건 아닌가. =부담스런 것은 없다. 장동건도 그런 부담이 있다면 출연할 수 없다고 했다. 장동건이 출연하면서 더 멋진 엔딩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했는데 본인 스스로 거부했다. 작품 때문에 여러 번 만났고 촬영을 시작했지만 볼수록 좋은 배우인 것 같다. -다른 영화들에서도 그렇지만 <해안선>은 ‘경계’라는 단어가 핵심인 것 같다. 출입통제구역과 관광지, 군인의 의무와 살인, 정상인과 미친 사람, 고참과 졸병, 군대질서와 사회질서 등의 경계가 있고 영화는 그걸 넘나들며 교란시킨다. 동어반복이라는 말도 듣겠지만 김기덕 영화의 주제 중 하나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쁜 남자>에서 유리를 통해 표현된 것이 <해안선>에선 철조망을 통해 드러난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면 유리를 깨야 하지만 <해안선>의 철조망은 다가가면 찔리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 해병대 초소 연병장에 철조망으로 네트를 만든 족구장을 만들었고 족구장 바닥에 남과 북의 지도를 그렸다. 군인들은 단순한 게임에서도 주입된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 그게 내가 이 사회에서 거듭 느끼는 답답함이기도 하다. 완전히 길들여져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바다만 해도 그렇다. 그건 우리 것인데 남에게 내주고도 그건 원래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당신의 영화는 야외 공간이 중요하다. 이번에 촬영장으로 택한 위도도 그럴 텐데 관광으로 먹고사는 을씨년스런 마을과 아름다운 자연, 거기 떡 하니 버틴 해병대 초소가 매우 이상한 조화를 이룬다. 이곳에 버티고 있는 해병대 초소는 그야말로 아주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의 장소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인가. =원래 동해안에서 찍고 싶었지만 국방부에서 촬영 허가를 내주지 않아 못했다. 전방부대와 유사한 모델을 찾다가 화진포에서 찍으려 했는데 군에서 <해안선> 촬영에 협조하지 않았다. 대안을 물색하다 섬은 군부대 관할이 아니라 경찰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위도를 택했다. 와서 보면 알지만 여기는 대단히 아름답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들은 전부 군부대가 지키고 있는 곳이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아름다운 장소일수록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다. -강원도에서 빨간 버스를 개조해 살고 있다던데 생활환경의 변화는 없나. 어쩐지 지난 영화들이 보여준 격정에 비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잡아보는 영화가 나올 듯한 느낌도 든다. =촬영 때문에 자주 못 가는데 언젠가 제대로 농사를 짓고 싶다. 땅을 사서 콩이랑 옥수수를 심었는데 지금은 땅에 대한 책임을 못 지고 있다. 대단히 아름다운 곳이 아닌 평범한 시골이지만 새소리, 물소리만 들려서 좋다. 뭔가 달라져서 환경을 바꾼 게 아니라 달라지고 싶어서 환경을 바꾼 것이다. 영화에 대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꼭 이래야 하나 혼란스럽기도 하고.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 사이에 균열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 그러다 스스로 남이 아는 나를 진짜 나로 착각하는 거 아닌가 싶은 두려움도 있다. -<봄 여름…>은 어떻게 진행할 예정인가? 이미 주왕산에 세트를 짓고 있다던데. =주왕산에 암자 세트를 짓고 있는데 그 장소는 이미 4년 전에 발견한 곳이다. 수백년 전 왕이 만든 연못이 있고 300년된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어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장소다. <해안선>이 끝나면 바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Review] 스피릿

■ Story 스피릿은 미국 서부의 광활한 평원 ‘올드 웨스트’를 달리는 야생마 무리의 지도자다. 태양과 바람, 숲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한 그는 강인하고 자유로우며 꺾이지 않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 스피릿이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한 어느 밤, 그의 운명은 예상하지 못한 고난 속에 내던져진다.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을 하던 백인들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스피릿은 미국 기병대 요새에 갇힌 뒤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역시 포로로 잡힌 인디언 청년 리틀 크릭과 함께 탈출한다. 그러나 이들 앞에는 더욱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 Review <스피릿>은 제작비 8천만달러를 ‘올드 웨스트’의 탁 트인 대기 속에 모두 날려버릴 수도 있었을 모험을 감행했다. 야생마의 시선으로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야생마의 언어를 택한 것이다. 대사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팬터마임에 가까운 <스피릿>. 이 영화는 지루해질지도 모르는 위험과 함께 애니메이션의 한 고비를 넘어야 하는 도전을 떠안고 있었다. 표정과 동작만으로 드라마틱한 감정을 전달하려면, 애니메이터의 손과 창조력이 연기를 대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난한 과정을 앞에 두었던 때에도 선택의 여지는 크지 않았다. 감독 켈리 애즈버리는 “말이 말을 하면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고 결단의 순간을 회상했다. 가장 먼저 던져진 과제는 말의 움직임과 울음소리, 그에 실려 발산돠는 감정을 익히는 일이었다. 맷 데이먼의 내레이션과 군데군데 흐르는 노래가 사건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스피릿>은 야생마에게 극의 흐름을 온전히 내맡긴 영화였다. 그 때문에 애니메이터들은 말 조련소에서 비슷한 도약에도 공포와 기쁨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 구분할 수 없는 울음에도 각기 다른 용어로 정의되는 범주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다행히 작가 존 푸스코는 스피릿의 종자이기도 한 머스탱을 스무 마리 넘게 키우는 사람이었고, 말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커다란 굴곡은 없어도, 그의 시나리오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스피릿> 제작진은 이처럼 어려웠던 임무 위에 몇겹의 숙제를 동시에 떠안았다.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는 “손으로 쓴 편지와 이메일이 다른 것처럼” 컴퓨터 그래픽이 애니메이터의 공들인 터치를 대신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3D 배경 위에 2D 캐릭터를 싣고자 했고, 연필 그림을 스캔해 사용하는 ‘툰슈터’처럼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옆으로 긴 말의 신체와 여덟 군데 국립공원을 바탕으로 창조한 ‘올드 웨스트’에 적합한 시네마스코프 화면, 디자인 단계에만 아홉달을 소비했던, 아찔하게 평원과 계곡을 가로지르는 3분의 오프닝, 해부학자의 조언을 받아가면서 연기에 적합하도록 개조한 말의 이목구비. 상영시간이 84분밖에 안 되는 <스피릿>은 이렇게 수많은 고난도의 장애물을 넘으며 야생마 스피릿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제프리 카첸버그가 이 영화는 디지털과 수작업을 합성했다는 의미에서 ‘트래디지털’(tradition+digital)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한 것은 순박한 외양 밑의 고충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스피릿>은 “모든 규칙을 깨겠다”는 카첸버그의 선언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는 영화다. 예정된 해피엔드로 치닫는다 해도, <스피릿>은 한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보지 못한 자, 그러나 한시도 정체성과 책임감을 잃지 않으면서 싸워온 자의 자긍이 담겨 있다. 스피릿은 하늘을 날듯 널찍한 벼랑 사이를 도도하게 뛰어넘는 야생의 종마다. 그는 포기하려는 순간에도 눈발 속에서 돌아가야 할 고향을 떠올리며 무릎 꿇은 동료들을 추동한다. 몸을 던져 리틀 크릭을 구해주면서도 자신이 지켜야 하는 야생마 무리를 잊지 않는다. 브라이언 애덤스와 한스 짐머가 사운드트랙 중에서도 을 가장 먼저 완성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자유로운 영혼을 강조하는 <스피릿>은 또한 편협한 구분 대신 긴장 속에 언뜻 스쳐가는 교감을 발견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스피릿을 길들이지 못해 안달했던 기병대 대령이 절벽 위로 날아오른 스피릿과 리틀 크릭을 보내는 장면은, 마치 고수들이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는 절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스피릿은 대령이 악당이 아니라 개척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충실한 군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스피릿과 리틀 크릭이 주고받는 눈빛엔 미치지 못한다. “포기하지 않을 친구니까”라며 잠시 틈을 내주는 스피릿, “너는 누구도 네 등 위에 태우지 않겠지”라며 울타리 문을 활짝 여는 리틀 크릭. <스피릿>은 둘이 아무리 친밀하다 해도, 스피릿이 인디언 마을에 주저앉는 순간 갇히게 된다는 사실에 눈감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정직함이 있기 때문에 <스피릿>은 패기있게 초원을 질주하며 잊혀진 역사를 되살려낼 수 있다.김현정 parady@hani.co.kr▶ [Review] 스피릿 ▶ 총괄 애니메이터 제임스 박스터 인터뷰

요코하마프랑스영화제2002 작품선정 디렉터 유키코 이마이즈미

요코하마의 6월은 눈부신 태양과 청량한 바람이 번갈아 뺨을 어루만지는 계절이다. 하나 더. 6월은 프랑스영화의 계절이기도 하다. 고급호텔과 컨벤션센터 등 메가톤급 건물들이 항구의 결을 따라 위풍당당하게 늘어선 이곳에선 올해로 10년째 프랑스영화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영화제요코하마’는 요코하마시와 유니프랑스가 절반씩 예산을 들여 프랑스영화 근작들을 상영하는 영화제. 올해 프랑스영화제요코하마에서 상영한 영화는 장편 18편과 단편 6편. 유니프랑스가 제공한 장편 100편, 단편 80편 가운데 상영작을 섬세한 손길로 골라낸 유키코 이마이즈미 마탱은 4년째 작품선정 디렉터를 맡고 있다. 작품선정 디렉터란, 글자 그대로 상영작을 선정하는 사람이다. 세월의 풍화를 달게 받아들인 주름과 사람좋은 미소, 나직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유키코는 온순한 첫인상과 달리 ‘신여성’으로서 꽤 강단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1934년 도쿄 스기나미구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 연극학과를 졸업, 에서 1년 동안 조감독 생활을 했는가 하면, 각켄이라는 회사 영화부에 입사해 사회교육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971년부터 <도쿄신문> <키네마순보> <시네프론트> <닛케이신문> 등에 프리랜서로 영화에 관한 글을 기고하는 한편 오사카에서 열리는 유서깊은 축제인 ‘오사카밤바쿠’ 준비팀에 합류, 2년 동안 일했다. 당시 영화제 스탭 가운데 홍일점이었던 그녀가 눈길을 끌었는지 불가리아, 에티오피아 대사관 등에서 취재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불가리아영화에 관한 기사가 <마이니치그라프>에 실리는 등 저널리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던 중 체계적으로 저널리즘을 공부할 필요를 느껴 75년 뉴욕으로 날아갔고, 컬럼비아대학 저널리즘 스쿨을 수료했다.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마르셀 마탱과 결혼하여 파리에 정착했던 그에게 4년 전 프랑스 대사관에서 작품선정 디렉터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고, 그때부터 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유키코의 프랑스영화 사랑은 유년 시절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남녀의 연애감정과 희로애락에 대한 탁월한 심리묘사에 끌려” 어릴 때부터 줄리앙 뒤비비에, 장 르누아르의 영화부터 챙겨보았던 그가 프랑스영화제와 인연을 맺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 올해 프랑스영화의 경향에 대해 “9·11 테러 때문인지 지난해에 비해 재미있는 것이 별로 없고, 심각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 좋은 것이 많았다”고 평한다. 영화제에서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 뒤에 교황청의 묵시가 있었다는 내용을 다룬 코스타 가브라스의 <아멘> 등이 인기가 많다고. 그 밖에는 “<로망스>의 감독 카트린 브레이야의 신작 <섹스 이즈 코미디>, 오페라 <토스카>를 그대로 영상으로 재현한 브누아 자코의 <토스카> 등이 관객의 호응을 많이 얻었다”고 귀띔한다.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기까지의 로맨스를 묻자, “71년 모스크바영화제에 취재차 갔다가 만났다”고 말문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대개의 프랑스 사람과 달리 과묵했던 그가 도쿄로 돌아온 그녀에게 뜻밖에 파리에서 전화를 걸어왔고, 뉴욕으로 공부하러 간 뒤에도 파리에서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고. 방학 때면 뉴욕과 파리를 오가는 ‘값비싼’ 데이트와 수많은 편지의 공방 끝에, 77년에 ‘이마이즈미’ 뒤에 ‘마탱’이라는 성을 덧달고 파리에 정착했다는 꽤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수줍은 미소와 함께 털어놓는다. 지금도 <시네프론트>에 매달 기고하는 등 저널리스트의 행보도 이어가고 있는 그는 “영화제 덕분에 매년 요코하마에 올 수 있어 기쁘다”는 한마디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쳤다.요코하마=글·사진 위정훈 oscarl@hani.co.kr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걸작이다. 모자를 벗어라! 이만하면 가히 전 인류적 스케일의 주제다. 그러면서도 고도의 만화적 테크닉이 발휘되어 재미가 있다. 초현실주의 시인 필립 수포의 자동기술을 방불케 하는 거대진폭의 상상력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무한탐욕의 폭식성을 자랑하는 일본의, 나아가 세계의 자본주의적 신경증을 밑으로부터 정신분석해내고 있기까지 하다. 영화는 탐욕과 집착에 관한 생태학적, 동화적 보고서이다. 800만 정령들이 노는 거대한 목욕탕. 먹을 것, 놀 것, 여자, 금, 모든 쾌락이 있는 그곳에는 틀림없이 일제 전범의 혼도 놀고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미야자키는 일종의 역사적 속죄를 수행한다. 그래서 전 인류적 스케일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시선은 줄곧 열살짜리 깡마른 소녀의 것이라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위대하다. 음악은 그의 단짝 히사이시 조가 맡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소개할 때 이미 그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영화적으로 볼 때에는 <바람계곡…>보다 이번 작품이 좀더 나아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음악적인 개성은 <바람계곡…>이 더 진하다. 이번 영화의 음악도 가끔씩 히사이시 특유의 월드뮤직 느낌을 주는 감수성이 드러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강하다.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동원하여 좀더 풍부한 느낌을 강조했다. 가끔씩 등장하는 일본 민속음악에서 따왔음직한 화성들은 예전보다도 훨씬 더 요소로서만 작용한다. 물론 일본의 전통적인 온천장 문화를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더 일본음악에 가깝지만, 그것도 장면과의 일체감을 주는 한에서만 그렇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민속음악적 요소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예전보다 줄었다. 뭐 그래서 아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련된 것으로 치면 예전보다 점수를 더 줘야 할 것 같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원래가 철저히 영화음악적이다. 영화를 앞서가지 않고 쫓아가는 음악, 스스로의 개성보다는 분위기 유도에 더 신경을 쓰는 음악이다. O.S.T를 들어보면, 이번에도 역시 테마에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어딘지 약간은 싱겁고 촌스러운 듯하지만 순진한 느낌을 잃지 않는 그 멜로디. 아마도 히사이시 조의 팬들이 좋아하는 대목이 거기일 것이다. 통속적 호소력을 잃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쉽고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순진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음악은 보통 사람들의 감수성을 은근히 자극하는 면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평범함이 좀더 진지하게 깊이를 이루는 단계가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한다. 히사이시 조가 거기까지 이르렀다는 뜻은 아니다.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우리는 ‘자고 깨어나니 세계적 수준’인 어떤 실력이 과연 우리 소유인지 스스로도 확인할 길이 없는 채로 축제의 밤을 보내곤 했다. 내심 일본이 16강에서 떨어진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인류 전체를 품는 문화적 포용력을 예술로 걷어올리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아직 지독히 먼길을 더 달려야 한다. 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스틸맨이 감독보다 부자야, 영화를 남기는 사람이거든”

해방이 된 걸 안 건 1945년 8월18일경이었어. 5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두 번째 전쟁을 경험할 때까지 여전히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어. 그저 매일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게 바람이라면 바람이었지. 전쟁이란 사람을 지극히 수동적으로 바꿔놓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 능동적으로 내 삶을 꾸릴 기회가 올 것이라고 늘 생각했어. 그 생각이 없었다면 과연 나를 지탱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두해 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술을 놀리지 않으려고 이 일 저 일을 찾아다니던 중이었어. 그때 이화여고에서 사진 한장이 날아왔지. 어린 태가 가시지 않은, 이화여고 학생 유관순의 사진이었어. 당시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씨가 순국녀 유관순을 기리기 위해 유일하게 학교에 남아 있던 작은 명함 사진을 들고와 크게 확대 복사를 부탁한 거야. 어려울 것이 없었으므로, 정성을 들여 확대를 시켜줬더니 무척이나 고마워하며, 보물처럼 소중하게 안고 돌아갔어. 나중에 얘길 들으니, 지금껏 학교 금고에 잘 보관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게 이화여고와 인연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와의 인연이 다가왔지. 당시 <아리랑>(1936), <청춘부대>(1938) 등에서 배우로 활약하는 동시에 감독을 겸업하던 윤봉춘 감독이 영화 <유관순>의 제작에 들어갔어. 유관순을 기리는 영화다보니 이화여고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뭔가 도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학생들을 대거 엑스트라로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나봐. 촬영장이 경주였는데, 200여명의 여학생들이 그리로 내려갈 채비를 했어. 일종의 수학여행을 겸한 촬영 일정이었지. 그때 이화여고 미술부 선생이 현장 수업의 일환으로 자신의 부원들을 데리고 경주에 함께 내려가기로 한 거야. 그리고 신 교장의 소개로 나에게 연락을 준 거야.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달라고. 그럼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물론 술을 좋아하는 나를 알기에 “좋은 술 한잔에 콩잎 안주”라는 유혹도 빼놓지 않았지. 일도 하고 여행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일 것 없이 허락을 했어. 새로운 인생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인 줄도 모르고. 경주에 내려가 학생들의 사진을 찍어주는데, 현장에 있던 윤봉춘 감독이 날 보더니 “사진사라… 잘됐네, 이리 와서 현장 사진 좀 찍어주게” 하는 거야.그땐 스틸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셔터를 눌러댔어. 그리곤 곧이어 전쟁이 터졌지. 그렇게 다시 군에 들어갔다가 제대를 하기까지 꼬박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 그간 금화전투, 금성전투, 백마고지 입성을 겪었고, 나는 무쇠처럼 단련되었지. 군대생활을 마치고 나온 내 나이 34살. 무엇을 시작하기에 그리 이른 나이는 아니었어. 뭐든 해야겠다고 살 궁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 당시에 길거리마다 일자리를 구하려는 젊은이들로 북적댔어. 요즘의 ‘교차로’나 ‘벼룩시장’처럼, 그땐 구인, 구직 소식이 빼곡히 실리던 <평화신문>이라고 있었어. 여느 실업자들과 마찬가지로 <평화신문>을 뒤적이던 어느 날, 눈을 잡아끄는 광고를 보게 된 거야. 수도영화사에서 촬영 스튜디오, 편집실, 녹음실, 현상실, 분장실, 심지어 수중 촬영장까지 갖춘 대규모 안양촬영소를 세우면서 각 부문 영화스탭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어. 그중에 스틸도 있더라구. ‘됐다.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거다. 기왕 응모할 거면 꼭 붙자.’ 단단한 각오로 면접에 임했어. 당시 응시자가 몇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스틸 부문에 뽑힌 사람이 다섯에 불과한 걸 보면 대단히 경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었지. 수도영화사에 입사한 이후, 간단한 교육을 거쳐 바로 현장에 투입돼 <생명>을 찍었어. 이강천 감독, 김학성 촬영기사와 문정숙, 김승호씨 등 쟁쟁한 배우들이 모여 만든 영화 <생명>은 두달여의 제작 기간 중 대부분이 밤샘작업이었을 정도로 힘들게 찍은 작품이라 가장 기억에 남아. 일은 힘들어도 참을 만했지만, 신접살림이 늘 고달팠지. 입사 당시 이미 서른넷이었던 난, 그해 중매로 장가를 들었는데, 회사 형편이 그닥 좋지 못해 1년여를 봉급없이 생활했어. 막 세워진 신생 영화사가 촬영소 건립과 첫 작품에 무리한 투자를 해댄 통에 막상 직원들에게 줄 돈이 없었어. 다행히 30년 넘게 살아온 동네 인심 덕에 외상이나마 끼니를 이을 수 있었어. 월급이 나오면 그간 진 외상빚을 갚느라 사나흘 만에 다 없어져버렸지. 배고픈 신혼에 지친 아내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지만, 카메라는 도저히 놓을 수 없었어. 다른 일을 하면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만큼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버티자. 버텨보자. 남의 등쳐먹고, 남의 눈에 피눈물내는 일 않고 이렇게 살면 되는 거다. 이게 떳떳한 내 일이다.’ 지금도 우리 자식들은 영화엔 별 무반응이야. 영화하는 아버지가 고생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꼭꼭 박힌 탓일 게야. 어쩌면 영화에 대한 격한 감정을 무심함 속에 슬쩍 가리고 있는지도. 아버지의 열정이 영화 안에서 천천히 소진돼가는 모습이 그애들의 마음과 머릿속에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는 나도 알 수 없어. 다만 떳떳한 아버지, 늘 한길을 걷는 아버지로 기억되면 족해. 예전엔 종종 “스틸맨이 영화하는 사람 맞아?” 하는 비아냥과 무시를 당했지만, 지금 난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길 해. “스틸맨은 그 영화를 ‘남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감독보다 촬영보다 조명보다 더 부자다”라고. 구술: 백영호/ 스틸 작가54년간 영화현장 사진에 몸담음.<유관순> <생명> <임꺽정> <만다라> <바보사냥>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싸이더스 HQ 대표 정훈탁 [2]

정우성과의 만남, 그리고 긴 기다림 이렇게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정훈탁은 오래 전 실패했던 배우 매니지먼트를 재개한다. 소속 배우라곤 EBM 출범 직전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났던 정우성뿐이었다. “처음 만나 눈을 바라보는데 바람이 솨-하고 불어오는” 느낌을 받았던 그는 정우성에게 의형제를 제안했고, 정우성도 마음이 통했는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방송사나 영화계에 인맥이 없었던 그로서는 그저 “기다리라”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1년 가까이 백수처럼 지냈음에도 정우성은 조급한 내색을 하지 않았고, 다른 매니지먼트로부터의 스카우트 제의도 모두 뿌리쳤다. 업계에서 자리를 잡은 뒤, 정훈탁이 가장 먼저 신경쓴 일이 정우성을 키우는 것이었음은 당연했다. 그는 신철 사장을 다시 찾아가 <구미호>에 캐스팅해줄 것을 간곡히 사정했다. 당연하게도 초반 반응은 안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철 사장이 정훈탁을 불러 양주를 따라주며 위로의 말 비스무레한 것을 건넸다. 술에 취한 그는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너무한 것 아니냐. 처음부터 배우인 사람이 어딨냐. 우성이는 백지다. 당신들이 쓰기 나름이다.” 그의 열정에 감복한 탓인지, 신철 사장은 결국 오케이를 했다. 개런티도 받지 않았다. 신철 사장이 개런티를 묻자, 그는 “그 돈으로 필름을 더 사서 우성이를 더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김지호와의 만남은 그의 입지를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94년 아르바이트 삼아 일을 해보겠다고 찾아온 김지호를 만났을 때, 정훈탁은 딱히 예쁘지는 않지만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두 시간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느낌이 팍 오더라. 아, 탤런트들이 얘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거구나, 하고.” 다른 연기자들이 건강미, 발랄함을 ‘연기’하고 있지만, 김지호는 이미 자신 안에 체득하고 있어 그것을 밖으로 보여주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하지만 사진을 찍어 방송사 PD들에게 돌렸을 때만 해도,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시큰둥한 표정의 PD들을 뒤로 하고 여의도를 나온 그는 뭔가를 찍어서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생각을 하게 됐고, 신승훈의 <그후로 오랫동안>의 뮤직비디오에 출연시키게 된다. 그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다시 방송사를 찾았고, 좋은 반응이 나왔다. 결국 윤석호 PD가 <사랑의 인사>에 중성적인 여성 역할로 김지호를 캐스팅했고, 방송을 시작한 지 한달이 채 지나기 전에 기자와 CF 관계자들로부터 전화가 폭주했다. “자고 일어나면 CF 제안이 몇개씩 들어와 있었다. 나중엔 귀찮아지더라.” 하지만 정훈탁은 김지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처음 겪는 일이다보니 뒷날의 이미지 관리 같은 데 신경쓰지 못하고 무리한 스케줄을 그대로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곧 정우성도 <아스팔트 사나이>를 통해 성공의 가도에 올라섰고, 한재석도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정훈탁은 승승장구의 나날을 보낸다. 학교 동기인 박신양도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 와중에 장혁과 전지현을 만났고, god도 만들었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운 그는 이들을 혹독할 정도로 단련시켰다. 책을 읽어라, 독후감을 써라, 영화를 봐라, 음악을 들어라, 인간이 돼라 등등 시어머니처럼 많이도 말을 했던 그의 노력과 그들의 재기가 차츰 어우러져 나갔다. 공장에서 만든 비료가 아니라 천연 퇴비로 거름을 주듯, 느리지만 단단하게 키우려는 그의 전략이 성공을 거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시련의 순간은 있었다. 특히 IMF 경제위기가 다가온 시절, CF 요청이 뚝 끊겼고, 장혁, 전지현, god는 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직원 임금에다 신인에 들어가는 돈 하며, 비용은 지속적으로 많이 들어갔지만 도무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드 네개를 돌리다가 일제히 ‘빵꾸’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속 배우, 매니저들과 쌓아놓은 신뢰를 바탕으로 상황을 돌파했고, 2000년에는 차승재와 함께 힘을 모아 싸이더스를 출범해 매니지먼트의 기업화를 앞장서 현실화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인간관계” 한국의 매니지먼트계 풍토 속에서 싸이더스 HQ는 별난 곳임에 틀림없다. 돈과 환경을 좇아 배우와 매니저들의 이동이 빈번하기 그지없는 이 동네에서 이곳만큼은 거의 인력변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 EBM 시절의 매니저는 한명도 퇴사하지 않았고, 싸이더스로 통합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배우 역시 김지호 외엔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정훈탁 본인에 따르면, 이곳을 탄탄하게 묶어주는 요소는 돈이나 권력, 아부가 아니라 ‘파이프’다. “일도 좋고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다. 상대방과 내가 믿고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괴로움이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상대방의 그것도 내게 전할 수 있는 관이 설치돼야 한다. 일은 그 다음에 배우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배우건 매니저건 그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 마음의 관을 설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떠들썩하게 ‘배관공사’를 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방에서 속옷 하나만 입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면서 울고 웃는다”(장혁), “오너보다는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하루에 4시간씩 자던 정 대표의 리듬에 맞춰 일하다가 쓰러질 뻔했다”(김상영 팀장)는 주변의 증언을 들으면 그 ‘파이프’의 정체가 어렴풋이 잡힌다. 싸이더스 출범 전, EBM 시절엔 배우들과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는 얘기도 그의 스타일을 짐작게 한다. 장혁의 이야기. “계약서를 안 쓰기에, 배우가 나갈 수도 있는데 불안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훈탁이 형은 마음에 들면 있고,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 나가라고 얘기하더라. 그러면서 만약에 나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형, 동생 사이인 것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더라.” 정훈탁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다.더 열심히 일해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 배우가 나갈 리가 있나. 배우도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려면 열정을 갖고 일할 것이고. 그리고 이런 사람냄새 나는 맛을 들이면 계속 함께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싸이더스 이전부터 함께해온 배우들의 경우, 싸이더스 출범 때 쓴 계약서에 위약금 조항을 아예 넣지 않았다. 상호간에 ‘파이프’가 단단히 연결돼 있다는 얘기, 즉 그만큼 신뢰가 두텁게 쌓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배관작업’은 그의 사무실 바깥을 넘어서진 못한 듯 보이기도 한다. 충무로에선 여러 제작자들이 그에 대해 ‘칼을 간다’는 소문도 들리고, ‘영화계의 물을 흐리는 공적 1호’로 찍혔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그에 대한 비난은 배우들과 제작자, 감독 사이에서 ‘장난질’을 친다는 것에서부터 “남들이 공들여놓은 프로젝트를 훼방놓으려 하거나 넙죽 받아먹으려 한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결국 배우들의 힘으로 영향력을 쌓은 뒤, 이를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만 한다는 것이다. 사업파트너이자 업계 선배인 차승재 대표와의 ‘파이프’에 금이 간 듯 보이는 점도 그에겐 부담이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나비픽처스의 조민환 대표는 “내가 아는 한, 시나리오를 가장 잘 보는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하며 김성수 감독은 “배우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현재를 던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훈탁 자신도 “나와 함께 일해본 사람이 비난한다면 받아들이겠지만, 대부분의 소문은 그렇지 않은 이들이 퍼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동안 그 또는 그의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제작자와 감독은 극히 소수였지만 말이다. 이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도 정훈탁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숨가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루 평균 8∼10건의 비즈니스 미팅을 가지며, 하루 180통 가까운 전화를 휴대폰으로 받아야할 정도다. 그의 입에서 “이젠 숨을 좀 고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신인도 발굴하고 생각도 많이 했으면 한다는 그의 소박한 소망이 당장 이뤄지긴 어려울 듯 보인다.올해 초 싸이더스 HQ로 독립하면서 그가 품었던 계획을 실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제작의 정착, 연기 아카데미의 설립, 아시아를 위시한 세계시장 진출 등은 그의 계획 중 일부에 불과하다. 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했던 전용주 변호사를 재무담당 이사로 끌어들였고, 금융이나 법조계 등 비엔터테인먼트계 인사들을 모아나가려는 것도 더 큰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보인다. 그가 자신의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을지, 그를 견제하는 힘들을 이겨낼 수 있을지, 그가 만들어놓은 ‘파이프’가 언제까지 탄탄하게 버틸지 등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해 보이는 것도 있다. 그는 계속 소수일지라도 사람을 설득하고 믿게 하는 일을 할 것이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장렬하게 전사할 수 있다’는 각오로 전진할 것이라는 점 말이다. 정훈탁이 회고하는 운명적 만남의 순간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그에게서 여백을 느낄 때인 것 같다. 완벽하다는 느낌이 오면 그렇구나, 하는데 여백이 느껴지면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을 보태면 저 여백을 채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얘기다. 그런 느낌은 정우성, 전지현, 장혁뿐 아니라 김지호, 신민아, 조인성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성 93년경이던가, 아는 선배가 괜찮은 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는데, 그 며칠 전 방송사에서 모르는 청년이 와서 인사를 하더라. 당시 <백한번째 프로포즈> O.S.T를 홍보하기 위해 주제곡 제목 ‘세이 예스’를 스티커로 만들어 자동차에 붙이고 다녔는데, 그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 청년이 그때 날 보고 “정훈탁 형님 아니세요”했는데, 눈에서 바람이 솨- 불어오더라. 마음이 확 끌리더라. 너무 좋았다. 정식으로 만나서 구두로 계약을 했고, “우리 평생 가자”며 의형제를 맺었다. 그렇게 만났지만, 사실 내겐 어떤 커넥션도 없었기에 “일단 기다려달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정말 아무 불만도 없이 8개월 동안 기다리더라. 그는 내가 어려울 때 가장 큰힘을 준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와서 그러더라. “어떤 PD가 날보고 다른 매니지먼트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해서, 난 훈탁이 형에게 계약금 100억원을 받았어요. 평생계약이에요”라고 말했다고. 그 말을 듣고 난 정말 감동을 먹었다. 전지현 잡지모델로 등장한 그녀를 보고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때가 전지현이 고1 올라갈 때였을 텐데, <레옹>의 마틸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려보이면서도 성인 같은 느낌이 있고, 남자아이 인상도 있는. 뭘 물어봐도 잘 대답도 안 했고, “네”라고 대답을 하면서 눈을 치켜뜨더라. 그래서 얘는 다른 매니저에게 발탁되면 안 되겠다는 이상한 책임감이 들었다. 길을 오랫동안 잘 닦아줘서 키우자는 생각 말이다. 프린터 광고로 스타로 떠올랐을 때도 배우로서의 카리스마를 살려주기 위해 쇼 프로그램에 출연시키지 않은 것도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장혁 혁이가 스무살 때 처음 만났다. 정우성을 닮기도 했는데, 좀 편안한 느낌도 있었다. 얘기를 해보니까 이 친구는 지나치게 순수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게 엄청난 무기가 될 것이라는 게 보였다. 넉살도 좋아서 그날로 바로 우리 집에서 며칠 동안 같이 지냈다. 무조건 책을 많이 읽고, 영화를 많이 보라고 했다. 혹독하게 다루기도 했다. god와 함께 합숙시키면서 야단도 많이 쳤고, 매일매일 독후감을 쓰도록 하기도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오디션을 보기만 하면 떨어졌다. 오죽하면 ‘오디션맨’이라고 불렀을까. 드라마 <모델>로 데뷔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더라.

미이케 다카시 틀별전 - V시네마의 아지테이터를 만나다

Focus on Takashi Miike 미이케 다카시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이전에 만났을 때, “당신이 가장 만들고 싶은 영화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미이케는 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영화라고 답하면, 사람들이 ‘아, 미이케 다카시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 혹은 세상의 틀이나 질서에 가두기 싫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미이케의 사상이고, 행동양식이고 또 그의 영화가 아닐까?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천개의 얼굴을 가진 불상과도 같다. 데뷔작인 <후도>를 보았을 때는 기발하고 희한한 만화 같은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오디션>을 보았을 때는 섬세하고 오랜 세월 숙련된 칼로 뜬 생선회를 맛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표류가>에선 모든 것을 초월한 잡동사니로 들끓는 에너지를 보았다. <천연소녀 만>을 보았을 때는 정말 심하게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이번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들의 면면 역시, 천국에서 지옥까지 각양각색이다. <아지테이터> <레이니 독> 같은 한 경지에 이른 전형적인 장르영화가 있는가 하면, <이치 더 킬러>처럼 장르를 구분할 수 없는 잡탕도 있다. 뮤지컬인 <가타쿠리가의 행복>도, 선뜻 뮤지컬이라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인간의 지극히 순수한 마음을 전달하는 아름다운 영화가 있는가 하면, 다다미 위에 나뒹구는 인간의 내장처럼 날것의 참혹한 폭력으로 점철된 영화도 있다. 미이케 다카시는 속세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의 영화 하나하나는,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종종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그의 마음만은 늘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이번 미이케 다카시 회고전에서는 모두 7편의 영화가 선보인다. 1년에 적어도 3, 4편의 영화를 만드는 다산의 작가인 미이케 다카시의 지형도를 완벽하게 숙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대강의 행로는 살펴볼 수 있다. 특히 V시네마의 주력 장르이며, 미이케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당 부분을 점유하는 야쿠자영화 <레이니 독> <블루스 하프> <아지테이터>를 볼 수 있는 것은 큰 수확이다. 장르의 규칙 안에서, 장르의 한계와 공식을 뛰어넘는 미이케의 세련된 연출력을 감상할 수 있다. 미이케 다카시의 무정부주의와 폭력의 미학은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의외로 그의 작품에서는 ‘가족’을 읽을 수 있는 구석이 많다. <가타쿠리가의 행복>은 워낙 소재 자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레이니 독>이나 <데드 오어 얼라이브> 등에서도 ‘가족’이란 단어가 새삼스레 마음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러고보니 <오디션>도 핵심은 ‘가족’이다. <표류가>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랬고. 미이케 다카시는 천변만화의 작가다. 그의 작품은 저열한 속(俗)에서 궁국의 지향점인 성(聖)을 끌어낸다. 그런데 그냥 단순하게 일직선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데드 오어 얼라이브>의 마지막 장면에서 난데없이 드래곤 볼의 필살기가 연상되는 것처럼, 미이케는 상식을 초월한다. <중국의 조인>에서 ‘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도시인들이, 결국은 날개를 달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처럼.김봉석/ 영화평론가 ◆ 이치, 더 킬러 Ichi the Killer 감독 미이케 다카시 출연 아사노 다다노부, 오모리 나오, 쓰카모토 신야, 사부 일본 / 2002년 / 129분 1년에 적어도 3, 4편의 영화를 만드는 미이케 다카시가, 무려 1년여의 사전제작 기간을 거친 뒤 촬영에 들어간 역작. 원작인 야마모토 히데오의 만화 <고로시야 이치>는 지나치게 폭력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야쿠자 조직의 보스 안조가 행방불명된다. 안조의 심복인 카키하라가 수색에 나서 용의자들을 잔혹하게 고문한 끝에 찾아낸 용의자는 이치라는 이름의 킬러. 안조에게 맞으며 희열을 느끼고, 얼굴 곳곳에 피어싱을 한 카키하라는 ‘완벽한 사디스트’ 이치에게 매혹된다. 이치는 동급생이 강간당하는 모습을 보고도 돕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강해지기로 결심했고, 킬러가 됐다. 자신을,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을 죽이지만 그 폭력은 오히려 이치 자신을 고통에 빠뜨린다. 인간의 폭력성의 근저를, 지독한 ‘고어’와 함께 치열하게 드러내는 문제작. 이와이 순지의 <피크닉>에 출연했던 아사노 다다노부가 ‘사이코’ 카키하라를 맡았고, 감독으로 유명한 쓰카모토 신야와 사부도 조역으로 출연한다. ◆ 아지테이터 Agitator 감독 미이케 다카시 출연 다케나카 나오토, 가토 마사야 일본 / 2002년 / 150분 모든 혁명은 부패한다. <아지테이터>의 노회한 야쿠자들은, 강직한 의리와 분노로 살아가는 히구치를 두려워한다. 마침내 축출한다. 세상 어디서나, 모든 원칙은 동일하다. 소도시의 야쿠자 조직 요코미조는 시라네와 경쟁하고 있다. 시라네의 조직원이 요코미즈 구역에서 고의적인 시비를 걸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수습책을 논의하던 중 요코미즈의 보스가 암살당한다. 요코미즈의 일파인 히구치 조장은 당장 전쟁에 나설 것을 주장하지만, 다른 조장들은 타협책을 찾는다. 시라네는 전국 조직인 텐세이카이에 중재를 의뢰한다. 텐세이카이의 카이토는 시라네의 보스를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양대 조직을 자신의 손에 넣어려 한다. 걸림돌은 물론 히구치. 음모를 알아차린 히구치파는 독자적으로 전투에 나선다. 미이케 다카시의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야쿠자영화의 최신작. ◆ 데드 오어 얼라이브 Dead or Alive 감독 미이케 다카시 출연 아이카와 쇼, 다케우치 리키 <데드 오어 얼라이브>는 영리한 액션영화다. 화끈하게 눈을 사로잡는 오프닝으로 출발하여, 서서히 관객을 인물들에게 끌어들인다. 주인공들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아버리며 감정을 고조시킨 뒤, <데드 오어 얼라이브>는 어느 틈에 현실 너머로 도약해버린다. 신주쿠에서 야쿠자들이 중국계 마피아 조직에 연거푸 살해당한다. 죠지마는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에서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닌2, 중국계 일본인의 영웅 류이치를 만난다. 난치병에 걸린 딸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형사 죠지마. 유학을 보낸 동생과 함께 조직을 확장할 꿈을 꾸는 중국계 일본인 류이치. 그러나 그들의 미래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버린다. V시네마의 최고 스타 아이카와 쇼와 다케우치 리키가 연기하는 죠지마와 류이치가 등장할 때마다, 화면은 꽉 들어찬다. <데드 오어 얼라이브>는 두 스타의 카리스마를 한껏 살리면서, 미이케 다카시의 기발한 액션이 영화 전편을 수놓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누구도 예측불허. ◆ 레이니 독 Rainy Dog 감독 미이케 다카시 출연 아이카와 쇼, 가오 민춘, 첸셴메이 일본 / 1997년 / 94분 야쿠자의 세계를 다룬 미이케 다카시의 ‘흑사회’ 3부작의 하나. 조직의 명령으로 살인을 하고 대만으로 피신한 유지. 밤에는 정육점에서 일하고, 낮에는 자거나 컴퓨터로 <고지라>를 보고, 중국 마피아 보스 호우의 명령으로 가끔 살인을 한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찾아와 유지의 아들이라며 첸을 남기고 가버린다. 유지는 버려진 개를 보듯 대하고, 첸은 졸졸 유지의 뒤를 따라다닌다. 심지어 살인의 현장까지도. 다른 조직의 보스인 쿠를 죽이러 간 유지는 창녀인 리리를 알게 된다. 아무런 꿈도 없던 리리에게, 유지는 날개가 된다. 쿠는 죽였지만, 호우의 배신으로 유지와 리리, 첸은 쫓기는 처지에 놓인다. 미이케 다카시가 그려내는 야쿠자영화의 기본 정서가 쓸쓸함과 박탈감임을 잘 보여주는 영화. ‘비맞은 개’의 외롭고, 힘겨운,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여정을 비정하게 그려낸다. ◆ 가타쿠리가의 행복 The Happinessof the Katakuris 감독 미이케 다카시 출연 사와다 켄지, 마쓰자카 게이코 일본 / 2001년 / 113분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을 뮤지컬로 리메이크한 기묘한 영화. 가족의 행복만을 원하며, 퇴직금을 몽땅 쏟아부은 ‘가타쿠리가’의 산장. 딸 시즈에는 이혼하여 딸 유리에를 데리고 돌아왔고, 감옥에서 나온 말썽꾼 아들도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행복은 요원하다. 첫 손님은 자살하고, 두 번째 손님인 스모 선수와 애인은 복상사에 질식사한다. 오로지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가타쿠리가는 시체를 유기한다. <가타쿠리가의 행복>이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춤과 노래다. 솜씨가 세련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색함이, 어떻게든 행복만은 지키려는 가타쿠리가의 진심을 드러낸다. 웃음을 참으면서도,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가족과는 거리가 먼 듯한 미이케 다카시의 눈이, 사실은 가족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 ◆ 블루스 하프 Blues Harp 감독 미이케 다카시 출연 와타나베 세이이치 일본 / 1997년 / 106분 미군 사병이었던 아버지는 베트남에서 죽었고, 창녀였던 어머니는 10살의 츠지를 고아원에 버리고 떠났다. 청년이 된 츠지는 거리에서 마약을, 라이브 클럽에서 술을 판다. 어느 날 츠지는 다른 야쿠자들에게 쫓기던 켄지를 구해주고 친구가 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래의 길이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 그뒤 츠지는 술집에서 만난 토키코와 동거하게 된다. 처음으로 츠지는 가정이란 것을, 평온함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다. 츠지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던 하모니카 연주가 음반제작자의 눈에 띄고, 눈앞에 희망이란 글자가 보인다. 하지만 혼혈아인 츠지와, 야쿠자 조직의 이단아인 켄지의 미래는 암흑이다. 이 지독한 사회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살아가려면 냉정하고, 잔인해져야 한다. 이방인의 종말을 처연하게, 비극적으로 담아낸 영화. 개인적인, 강추! ◆ 중국의 조인 The Bird People in China 감독 미이케 다카시 출연 모토키 마사히로, 이시바시 렌지, 마코 일본 / 1998년 / 118분 미이케 다카시의 상용어가 폭력만은 아니다. <중국의 조인>에는 마오쩌둥이 누군지도 모르는 중국의 변방 마을에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마을에 도착한 도시인들은, 돌아오고 싶지 않다. 돈도, 명예도 필요없는 세상에서. 와다는 난데없이 담당자가 입원하는 바람에 중국의 운남성으로 출장을 간다. 우격다짐으로 끼어든 야쿠자 우지이에와 티격태격하며 찾아간 마을에는 하늘에서 온 조인의 전설이 있다. 조인의 전설은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와다와 우지이에는 마을에서 도시인의 이상향을 발견한다. 미이케 다카시는 와다와 우지이에가 오지의 마을에 매혹당하고 빠져드는 과정을 통하여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현대인의 갈망을 그려낸다. 아름답고 순수한 영화.▶ Pifan2002 올 가이드: 개 ·폐막작 ▶ Pifan2002 올 가이드: 부천 초이스 ▶ Pifan2002 올 가이드: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1) ▶ Pifan2002 올 가이드: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2) ▶ Pifan2002 올 가이드: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 ▶ Pifan2002 올 가이드: 미이케 다카시 특별전 ▶ Pifan2002 올 가이드: 피터 잭슨 특별전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 - 웃음과 반전의 스타카토

부천의 단편들은 해마다 많은 관객과 조우한다. 올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편영화가 단순히 러닝타임이 짧은 영화인 것이 아니라, 극의 밀도가 높고 장르적 실험이 왕성한, 젊은 영화임을 관객이 먼저 알아보는 것이다. 한때 호러와 스릴러의 비중이 높던 부천의 단편들은 최근 들어 특정 장르에 편중되거나 한두 마디로 정리할 만한 경향을 보이진 않는다. 다만 다양한 장르 속에서의 기발한 세태 풍자, 극적 재미를 배가시키는 반전의 묘미 등이 두드러진다. 해외부문 - 새로워라 애니메이션 최근 단편에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가장 빠른 팽창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단연코 애니메이션이다. 도무지 시각화하기 힘들던 상상 속 이미지들에 날개를 달아줄 만큼 기술력이 발전한 덕이다.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의 빌 플림턴이 내놓은 신작 먹이도 그중 하나다. 인간의 사지육신과 오장육부를 떡주무르듯 하는 과격한 상상력의 대가인 빌 플림턴의 <먹이>는 뜻밖에도 프랑스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잖게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곧 신체 변형과 토사물의 잔치로 둔갑하며 본색을 드러낸다. 사슬을 풀고는 한때 양몰이 챔피언이었던 수캐가 암양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터전을 잃게 되는 기구한 운명을 그린 실사 합성 애니메이션. 슈퍼맨과 스파이더맨 등 인류를 구원하는 슈퍼 히어로의 자리에, 볼품없고 우쭐대기 좋아하는 ‘썬더 피그’를 앉힌 천둥 돼지도 기발한 풍자와 패러디가 돋보이는 코믹한 작품이다. 페르시아 카펫을 이용한 이란의 이국적인 애니메이션 샹골과 망골, 사후세계를 인상파 화풍으로 풀어낸 환상적인 작품 꿈꾸는 엘리펀트맨도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한 수작이다. 실사영화 중에서 ‘발군’은 인터뷰와 재연드라마를 섞어 구성한, 가짜 전기영화 보이첵의 마지막 교향곡이다. 피터 잭슨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픽션’임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길이 다르다. 소련의 프라하 침공 당시 덴마크로 이주한 보이첵은 작곡가의 꿈을 접지 못하고, 퀴즈쇼의 실로폰 연주자로, 포르노의 영화음악가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려 한다. 그러나 파렴치한 교수, 무데뽀 마피아, 속물적인 제작자 등이 끼어들면서, 그의 운명은 뜻하지 않게 뒤틀린다. 삶과 예술에 관한 통찰, 유머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영리하면서도 따뜻한 연출의 영화. 장르적으로는 호러의 코믹한 변주작들이 눈에 띈다. 지게차 운전수 클라우스는 안전규칙을 지키지 않은 새내기의 실수로, 선배와 동료들이 사지절단당하는 등 일터가 피바다가 되는 과정을 그린 스플래터영화. 산업현장의 안전교육 비디오를 천연덕스럽게 패러디하고 있다. 고딕호러 스타일의 고이 잠드소서역시 죽은 남편의 부활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는 대목에서 폭소를 참기 힘들다. 좌회전은 비오는 밤의 토막 살인 사건, 그 아이로니컬한 운명을 그린 영화. 현대사회의 삭막한 풍경들을 포착한 풍자영화들도 탁월하다. SF호러 테스트는 폐차장에 간 남자가 안전사고 실험용 마네킹들의 습격을 당한다는 섬뜩한 이야기. 메트로넨시스는 기나긴 생산의 과정이 순식간에 소비되는 장미꽃 자동판매기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노동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이버 연인에게 줄 새로운 모듈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외로운 중년남자 이야기 플리카는 다마고치 열풍을 연상시킨다. 홈쇼핑에 중독된 여인이 어떻게 구원되는지를 보여주는 배달 왔습니다는 앞선 영화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해답’이 될 만한 영화. 이 밖에도 실사영화 위에 CG를 덧입혀 흑백판화 애니메이션의 효과를 낸 폭풍의 뱃노래, 촬영분을 거꾸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역순으로 배치해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를 뒤집은 영화 팔린드롬등 형식적인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한국부문 - 웃음을 원하는 그대에게 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단편걸작선(한국) 부문에는 실사영화 12편과 애니메이션 9편이 포함되어 있다. 웃음을 선사하는 코미디부터 실험성 짙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도 제법 넓은 편이다. 복수의 엘레지(윤종석)는 취중 강도를 당해 칼에 찔리고 소지품을 빼앗긴 사내가 강도가 남기고 간 시계를 지니고 있다가, 일년 뒤 우연히 이 시계를 알아보는 남자를 만나게 되어 복수를 노린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복수는 단지 칼에 찔려 쓰러져 있는 사내의 환상이었음이 밝혀진다. 코미디 감각이 발휘된 추격장면이 일품이다. 이와 비슷하게 생사의 경계에 놓인 자의 환상을 다룬 작품으로 흥미를 끄는 것은 Prognosis(우원석)가 있다. 밤중에 잠이 깬 재스퍼는 그의 사망증명서를 들고 온 집주인의 방문을 받는데 이때부터 그는 이미 자신을 죽은 이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혼란에 빠진다. 보르헤스적 환상이 미궁과도 같은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다. 실험적인 영화들로는, 가장 인상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는 手花(오현주), 3개의 에피소드를 묶은 인톨러런스(송미나), 이유없이 눈물을 흘리는 병을 앓고 있는 두 남녀의 조우를 다룬 <눈물>(부지영), 그림 그리는 한 여자의 고독하고 자폐적인 삶을 대사가 절제된 영상으로 묘사한 몰락취미를 꿈꾸다(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웃음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일단 나무아미타불 Christmas(박관호)를 권할 만하다. 좋아하는 여자친구로부터 크리스마스날 교회에 놀러오라는 초대를 받은 동자승은 고민에 빠진다. 대단히 새로울 것은 없는 영화지만 귀여운 동자승을 매개로 이질적인 종교 사이를 넘나들면서 훈훈한 미소를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특히 국악기로 연주된 캐럴송이 영화의 주제를 적절히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뭇 진지한 내레이션을 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와 병치시킴으로써 폭소를 유발하는 Too Happy to Die(최진영), 아규라 불리던 한 권위적인 고교선생이 사고로 정신을 잃었다 6년 만에 깨어나 추락한 교권을 확립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는 내용의 우유팩 살인사건 阿Q正傳(김방현, 김영민)도 있다. 한편 수사반장 트위스트 김(김태윤)에는 트위스트 김이 직접 출연해 춤 솜씨를 보여주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부문 작품들 가운데는 주목해 볼 만한 것들이 많다. 컴퓨터에 딸린 마우스 안에 진짜 쥐가 들어앉아 조종간을 움직이고 있다는 기발한 상상력을 완성도 높은 비주얼에 담아낸 클레이애니메이션 Mouse without tail(박원철)은 웃음을 선사하는 한편 직장인의 애환을 제법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손가락을 코에 넣고 입에 넣기를 반복하는 한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사내의 기이한 환상에 관한 보통사람들(박생기), 마지막 남은 식물을 살려내기 위해 스스로의 희생조차 마다않는 로봇의 이야기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Recycling(박재오), 두드러진 색채감각으로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동화공간을 잘 묘사한 <연분>(이애림),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오늘날 영상미디어가 쏟아내는 이미지들의 괴물스러운 모습을 고발하고 있는 3-D 디지털애니메이션 <잠식>(주성호) 등도 하나 같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박은영·유운성/ 영화평론가 ■ 부천 초이스 단편부문 (경쟁) 오 마이 갓, 절로 웃음이 난다아!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아리아>(피요트르 사페긴)는 여자의 머리에 내려앉는 한 마리 나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곧 인형들의 격렬한(?) 정사가 이어지고 남자는 임신한 여자를 남겨둔 채 항해를 떠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엽기적인 감각은 갈수록 심해져, 탯줄에 매달린 아이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가 하면, 버림받은 여자는 (말 그대로!) 얼굴을 쥐어뜯고 다리를 절단하고 마침내 산산이 부서져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인간세상의 변화과정을 바위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의 바퀴>(크리스 스태너, 아비드 위벨, 헤이디 비틀링거)는 인간의 역사 내지는 문명의 역사라는 사뭇 무거운 주제를 재미나게 풀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산중턱에 앉아 무심히 저 너머 인간들의 세상을 관찰하는 두 바위한테는 그야말로 인간들의 시간은 일촌광음에 불과한 것. 마을이 세워지고 길이 닦이는가 했더니 어느새 아스팔트가 깔리고 거대한 빌딩들이 하늘을 가릴 만치 솟아오른다. 그리고 모든 것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바위들이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가 섞여 있는 <고양이의 손>(로버트 모건)에는 인간의 몸을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기괴한 고양이가 등장한다. 매우 짧은 단편이지만 같이 상영되는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하울링>이나 <늑대의 혈족>을 떠올리게 하는 호러 감각이 발휘된 작품. 그리스 단편 <날 기억해?>(알렉시스 알렉시우)는 함께 상영되는 작품들 가운데 가장 사색적인 내레이션과 비주얼을 보여준다. 슈퍼 8mm로 촬영된 영상과 35mm로 촬영된 영상이 함께 공존하는 가운데, 영화는 자유로이 시제를 넘나들며 기억의 의미에 대한 명상에 잠긴다. 주인공 미칼리스는 10살이 되던 해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거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날 기억해?” 11살 생일에 앞으로 그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미칼리스, 이후 그가 여자들과 만나 사랑에 빠지려는 찰나가 되면 어김없이 “날 기억해?”라고 쓰인 발신인 불명의 쪽지가 그에게 도착한다. 후반부에 가면 감독은 어떻게 과거가 현재에 개입하면서 삶을 결정하게 되는가를 반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소 짐작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반전의 묘미가 있는 또 다른 단편으로는 <오 마이 갓?!>(크리스토프 반 롬페이)이 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여자는 자신이 차 트렁크에 갇혀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녀는 가게에 식료품을 사러 갔다가 얼굴을 알 수 없는 괴한에게 납치되었던 것. 과연 그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짧은 무언극의 형식으로 된 <플랫폼>(로빈 월터스) 또한 어처구니없을 만큼 우스운 결말이 준비되어 있다. 재기발랄한 유머를 보여주는 스페인영화 <양상추 여자와 송어 남자>(구스타보 살메론)도 놓치지 말 것. 제목 그대로 양상추 여자와 송어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성인 남녀 배우들이 양상추, 게, 송어 등의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다. 잘게 갈린 양상추가 남자의 입 속에 들어가 똥이 되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내시경을 이용한 촬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압권이다. 한 남자가 자신이 구상한 영화에 대한 수다를 정신없이 늘어놓는 <불후의 명작>(내시 애드게톤), 그리고 지난해 만들어져 호평받은 한국 단편 <8849m>(고영민)도 함께 상영된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 Pifan2002 올 가이드: 개 ·폐막작 ▶ Pifan2002 올 가이드: 부천 초이스 ▶ Pifan2002 올 가이드: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1) ▶ Pifan2002 올 가이드: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2) ▶ Pifan2002 올 가이드: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 ▶ Pifan2002 올 가이드: 미이케 다카시 특별전 ▶ Pifan2002 올 가이드: 피터 잭슨 특별전

왜, 성룡은 지방에 가면 더 쎄지는가?

“성룡 영화는 지방관객이 서울의 2배이고 예술영화는 그 반대다.” 서울과 지방의 관객성향을 비교할 때 흔히 하는 얘기다. 실제로 올해 설에 개봉한 성룡 주연의 <엑시덴탈 스파이>는 서울관객이 약 16만5천명이었던 반면 전국관객은 62만여명. 지방관객이 서울관객의 3배에 달했다. 성룡 영화를 자주 수입·배급한 한 관계자는 “성룡 주연의 영화인 경우 평균적으로 지방이 서울의 2배에서 2.5배가량 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퍼즐처럼 복잡해서 머리 쓰는 재미로 보는 <메멘토> 같은 영화는 어떨까? <메멘토>를 수입·배급한 씨네월드는 “대학생이 많이 찾는 강남과 신촌지역에서 잘된다”고 말했다. 종로, 중구나 영등포지역 극장에서 동원하는 관객 수가 강남이나 신촌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는 얘기. 지방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광주에서 <메멘토>를 본 사람은 부산이나 대구의 절반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메멘토> 관객의 서울 대 지방 비율은 1 대 1 정도지만 젊고 유행에 민감한 관객이 많은 곳이 아니면 반응이 안 좋다. 씨네월드 관계자는 “가끔 눈에 띄는 30∼40대 관객 가운데 극장 문을 나서면서 영화를 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전한다. 아직 통합전산망이 없어 관객 통계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지역별 차이를 자주 실감한다. 메가박스의 황병국 차장은 “20대 오피스 레이디가 많은 곳이어서 멜로드라마, 로맨틱코미디가 강세”라고 말한다. 예로 들 수 있는 영화는 <썸원 라이크 유>나 <브리짓 존스의 일기> 같은 영화들. 할리우드 스타가 나오는 달콤한 영화를 찾는 관객이 종로권 극장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전국관객 동원에서 기대에 못 미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이웃집 토토로>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도 메가박스에서 선전했다. 이중 <이웃집 토토로>는 메가박스, 센트럴6시네마 등 강남의 멀티플렉스를 찾은 관객이 녹색극장 등 신촌지역 극장을 찾은 관객보다 월등히 많았다. “상대적으로 한국영화보다 외화가 잘되는 극장”이라는 게 메가박스의 특징 중 하나. <엽기적인 그녀>나 <친구>처럼 초대형 흥행작인 경우는 메가박스의 관객 수가 앞서지만 <선물>이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처럼 중급 흥행작은 서울극장이 메가박스보다 조금 앞선다.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무조건 서울극장부터 확보하려고 하는 데는 이런 관객성향도 작용하는 셈이다. 메가박스가 회원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 극장을 찾는 연령층은 20대가 68%, 10대 12%, 30대 18%, 40대 이상 2% 정도다. 주관객층이 대학생, 미혼 직장남녀라는 게 한눈에 드러나는 수치이다. CGV강변11은 메가박스처럼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지 않는다. CGV 관계자는 “전국 평균치에 가까운 관람형태를 보여준다는 게 오히려 특징”이라고 말한다. CGV강변11의 관객 수 변화가 전국 관객 수 변화와 비슷한 추세를 보이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분당에 있는 CGV야탑8과 CGV오리10의 관객 성향이다. 관계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강세이며 한국영화도 초대형 흥행작 위주로 소비된다”고 말한다. 소득수준이 높은 베드타운에선 다양한 영화가 고루 잘되는 게 아니라 특정 영화에 집중적으로 관객이 몰린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무조건 영화보는 횟수가 늘지는 않는다. 레포츠 등 다른 여가 수단이 영화를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의 일반적 해석이다. 지난해 12월 영화진흥위원회가 리서치플러스연구소에 의뢰해 작성한 관객성향 조사자료를 보면 서울의 권역별 관객 구성비는 종로, 중구권 27.9%, 강남권 19.8%, 신촌 9.4%, 강변CGV 9.3% 등이다. 여전히 종로, 중구권의 비중이 크지만 1999년 47%를 넘었던 것에 비해 현저히 줄었고 메가박스 등장 이후 강남권의 비중은 급격히 올라갔다.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웬만한 대도시에 멀티플렉스가 들어선 올해는 어떨까? 정확한 집계는 연말이 지나야 가능하겠지만 서울관객의 비중이 줄고 지방관객의 비중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실제로 시네마서비스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신라의 달밤>과 <엽기적인 그녀>, 두 영화 모두 서울관객은 전국관객의 36%를 차지했다. 과거 서울 대 지방의 관객 비율을 1 대 1로 봤던 것과 상당히 달라진 수치. 멀티플렉스 건설열기가 뜨거운 지금, 지역별, 극장별 관객취향을 면밀히 분석해보는 것도 지금의 영화산업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잡는 데 필요한 일일 것이다. 남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