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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외신기자클럽] 척추장애인 배우들의 비극적 운명 (+불어원문)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는 조니 뎁 옆에서 100번 복제된 딥 로이가 눈길을 끈다. 이 척추장애인 배우는 혼자서 모든 움파 룸파족의 역을 해내는데, 초콜릿 공장의 종업원인 이 작은 종족은 영화 틈틈이 열광적인 뮤지컬 장기로 자리매김한다. 여러분은 아마도 이 배우를 이미 <빅 피쉬> <혹성탈출> 혹은 <다크 크리스탈>이나 <네버 엔딩 스토리> 등에서 보았을 것이다. 본인에겐 한 열정적인 영화광이 자비로 파리에서 출간한 <영화 속 난쟁이들>이란 책을 다시 들춰볼 계기가 되었다. 영화 속 척추장애인 배우들의 역사에서 1939년은 중요한 해로 남을 것이다. 역마차 습격, 싸움질 등으로 볼 때 <작은 마을의 공포>는 모든 출연 배우가 척추장애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전통적인 서부극이었다. 배우들은 무척 심각하게 연기를 하지만, 촬영 세트와 소품들은 실물 크기여서 결과적으로 난쟁이 여배우가 엄청나게 큰 콜트 자동소총을 휘두르거나 카우보이들이 주점의 여닫이문 아래로 지나가는 등… 만약 모든 배우들이 몇주 뒤 빅터 플레밍 감독의 <오즈의 마법사> 촬영장에 다시 합류하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하나의 일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으로 스튜디오의 대작 영화를 위해 40명의 척추장애인 배우가 모였다. 컬버 호텔에 묵은 그들은 필연적으로 매스컴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술잔치, 난교파티 등의 온갖 종류의 기만적인 풍문이 촬영 기간 내내 맴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사람은 할리우드에 머물며 배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역사적 재구성에서 봤을 때 척추장애인들은 그들이 회화에서 맡았던 왕의 어릿광대, 신비로운 조언자와 같은 역할을 영화에서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루이스 브뉘엘 감독도 이 전통에 맞닿아 있다. 그는 <나자린>과 <사막의 시몽>에서 척추장애인 헤수스 페르난데즈를 캐스팅했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는 피에랄에게 한 역을 맡겼다. 프랑스 출신의 이 뛰어난 척추장애인 배우는 특히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저녁의 방문객들>과 장 들라노이 감독의 <영원한 귀환>에서 연기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체로 척추장애인 배우들은 질이 떨어지는 작품에서 사디스트적인 역을 맡았다. 조세희의 걸작을 각색해 이원세 감독이 1981년 영화화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아주 예외적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척추장애인은 한 개인으로서의 위상을 뛰어넘어 비천한 상태로 머물러 있게끔 강요당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상징하게 된다. 필리핀에는 척추장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가적으로 유명한 왱왱이 있다. 그 나라의 대스타로서 ‘007 ½’ 요원 역을 맡은 그는 가라테를 하고,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릴 땐 이불보를 낙하산으로 이용하기도 하며…. 이 간략한 개관에 포르노영화도 빠지지 않는다. 나폴레옹이란 척추장애인은 콧수염을 기른 포르노 배우로 <결코 저항할 수 없는>(1991) 등으로 1990년대 초반 전성기를 누렸고, 미젯은 <마이크로슬럿>(1996) 등으로 1990년대 후반 포르노계의 여주인공이었다. 척추장애인 배우들은 종종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다. 텔레비전 시리즈인 <마법사>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라파포트는 산 페르난도의 한 공원에서 심장에 총을 쏴 자살했다. 마이클 던은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넌 이젠 어른이야>(You are a big boy now, 1966)에도 출연하고, 돈 시겔 감독의 <마디간>(헨리 폰다 주연, 1967), 조셉 로지 감독의 <붐!>(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 1968), 조지 쿠커 감독의 <져스틴>(1968)에도 출연했고, 텔레비전 컬트 시리즈인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나 <스타트랙> 같은 작품에도 출연했다. 그는 1973년 런던에서 자살했다. 브로드웨이에서 한동안 활동한 뒤, 프랑스인 에르베 빌쉐즈는 1973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첫 작품인 <강탈>에 출연했고,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선 악한을 연기했다. 그는 1993년에 자살했는데, 자신의 시신을 전문의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의학용으로 기부했다. 묘하게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촬영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자신의 마지막 역을 통해 빌쉐즈는 영화의 실패를 기록한 것일까? 영화예술은 그가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자신의 다른 점을 표현의 방법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스크린은 한 사회의 비천한 시선을 비춰줄 뿐이었다. 카메라는 단지 차가운 도구로서 감독의 시선에 종속될 뿐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자기에게 맞는 역을 찾기 위해 남은 것이라곤 홀로 죽어가는 자신을 찍는 것 외엔 없었던 것이다. Breves et tragiques histoires de nains Dans Charlie et la Chocolaterie, on remarque a cote de Johnny Depp la presence de Deep Roy, multiplie par cent. Cet acteur nain interprete a lui seul tous les Woompa Loompas, ces petits employes de la chocolaterie qui ponctuent le film de delirants numeros musicaux. Vous l’aviez peut-etre deja vu dans Big Fish, La planete des singes ou encore Dark Cristal, L’histoire sans fin... L’occasion de relire un livre de chevet : Les nains au cinema publie a Paris et a compte d’auteur par un cinephile passionne. Dans l’histoire des nains au cinema, 1939 restera une annee clef. Attaque de diligence, bagarres… The terror of Tiny Town est un western conventionnel sauf qu’il est entierement interprete par des nains. Les acteurs jouent tres serieusement mais les decors et accessoires sont a taille reelle : une naine brandit donc un colt demesure, les cow-boys passent sous les portes battantes du saloon… The terror of Tiny Town serait une anecdote si toute la distribution ne s’etait retrouvee quelques semaines plus tard sur le tournage du Magicien d’Oz de Victor Flemming. Pour la premiere fois, un grand film de studio reunissait 40 nains. Loges au Culver Hotel, ils attirerent inevitablement l’attention des medias. Beuveries, orgies… toutes sortes de rumeurs fallacieuses ont circules pendant le tournage. Certains nains resterent neanmoins a Hollywood et y firent carriere. Dans les reconstitutions historiques, les nains ont repris le role qu’ils ont dans la peinture : fous du roi, mysterieux conseillers… Luis Bunuel se rattache a cette tradition. Il employa le nain Jesus Fernandez dans Nazarin et Simon du desert. Pour Cet Obscur Objet du desir, il fit tourner Pieral. Ce superbe acteur nain francais joua notamment dans Les Visiteurs du soir de Marcel Carne et L’eternel Retour de Jean Delannoy. De telles occasions sont rares. Globalement, les nains ont plutot droit aux roles de sadiques dans des films bas de gamme. La petite balle lancee par un nain, adaptation du chef-d’œuvre de Cho Sehui tourne par Yi Wonse en 1981, est bien une exception, mais le nain depasse alors son statut de personnage pour devenir un symbole : celui du peuple opprime, condamne a rester petit. Aux Philippines emergea le seul heros national nain : Weng Weng. Immense vedette en son pays, l’agent 007½ pratique le karate, utilise un drap comme parachute pour sauter du toit d’un immeuble… Ce bref panorama ne saurait oublier le X : Napoleon, hardeur moustachu, connut son heure de gloire au debut des annees 90 (A little irresistible 1991…) puis Midget fut l’heroine de pornos a la fin des annees 90 (Microslut 1996…). Les acteurs nains eurent souvent de tristes destins : David Rappaport, heros de la serie The Wizard, se tira une balle en plein cœur dans un parc de San Fernando. Michael Dunn tourna avec Francis Coppola (You are a big boy now - 1966), Don Siegel (Madigan - 1967 avec Henry Fonda), Joseph Losey (Boom ! - 1968 avec Elizabeth Taylor), George Cukor (Justine - 1968) et dans des series tele cultes comme Wild Wild West ou Star Trek. Il se suicida a Londres en 1973. Apres une carriere a Broadway, le francais Herve Villechaize avait joue dans Seizure (premier film d’Oliver Stone tourne en 1973) et interprete le mechant dans le James Bond L’homme au pistolet d’or. Il se suicida en 1993, leguant son corps a la medecine pour qu’un specialiste puisse l’etudier. Etrangement, il avait pris soin de filmer sa propre mort. Dans son dernier role, Villechaize pointait-il l’echec du cinema ? Cet art ne lui avait pas permis de transcender son handicap, de porter sa difference au rang de moyen d’expression. L’ecran n’avait fait que renvoyer le regard lamentable de la societe. La camera n’etait qu’un outil froid, qui dependait de l’oeil du realisateur. Alors il ne lui restait plus qu’a se filmer tout seul et mourir, pour enfin trouver un role a sa hauteur.

마지막 진실이 연극에 있는 까닭, <박수칠 때 떠나라>

어쩔 수 없이 사담으로 시작하는 것을 독자 여러분께서 부디 용서하시기를. 여기에는 좀 복잡한 사정이 있다. 나는 장진을 지난해 가을, 부산영화제에 가기 위해서 김해공항에서 차를 기다리면서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길다고 해봐야 김해공항에서 해운대 메가박스에 자리한 영화제 사무실까지 가는 40분 정도의 동행길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장진의 영화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기막힌 사내들>은 새롭기는 했지만 그만큼 나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영화는 뒤죽박죽이었고, 내 생각에 장진은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런 다음 <간첩 리철진>은 좀 나았다. 하지만 그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다른 사람이라면 훨씬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와 재치있는 상황을 만들 줄 알지만 영화는 어디선가 꼬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갑자기 혼란에 빠져들었다. <킬러들의 수다>는 그냥 보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그의 네 번째 영화 <아는 여자>를 본 다음 처음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뭐랄까, 갑자기 영화가 다른 수준으로 올라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재영의 힘이 컸고, 거기에 ‘마치 외계에서 온 소녀’ 같은 이나영은 드물게 자기에게 맞는 인물을 만나서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는 여자>를 본 다음 그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때 장진의 다음 영화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연극의 장점을 영화에서 살리려는 시도 장진은 조용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차라리 수줍게 말한다고 하는 편이 맞다. 그런데 지금 준비하는 다음 영화를 말하면서 조금 흥분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비평담론들, 그중에서도 비평가들이 아니라 충무로의 영화감독들, 혹은 동료들이 그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사람들은 내 영화를 연극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차라리 그 사람들이 연극을 아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내가 나한테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혹시 보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무대 연출한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연극이 있는데 그걸 영화로 옮겨볼 생각입니다. 그것도 연극 무대처럼 만들어서 그 위에서 영화로 만들면 그게 연극적인 영화인지 영화적인 연극인지 질문할 생각입니다. 사실 그 연극은 무대에서 연출할 때 영화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미안하게도 나는 그 연극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제목은 알고 있었다. 장진의 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박수칠 때 떠나라>를 보러갔다. 이 영화는 장진의 가장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가장 야심적인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정말 자기 말 그대로 연극을 영화로 옮겼다. 이 말은 희곡을 영화로 각색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옮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극의 틀은 그대로 남긴 채 그걸 영화로 옮긴 다음 다시 그 안에서 연극적인 시도를 한다. 그냥 더 간단하게. 장진은 연극과 영화 사이에서 오고간다. 장르 사이의 왕복, 이 제스처에서 저 액션으로, 저 동선에서 이 프레임으로, 연극이 요구하는 전체성에서 영화가 요구하는 입체성으로, 그 안에서 시각적으로 혼합된 조건들. 그리고 오인받을 수밖에 없는 그 안에서의 왕복의 구별 불가능한 방법의 오류들. 장진이 여기서 그의 한계를 놓고 벌이는 게임은 흥미있지만, 그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영화에 오면 연극을 그리워한다. 그가 연극 무대를 연출할 때도 그럴까? 이야기는 간단하다. 5월20일 밤 11시40분, 호텔 1207호에서 미모의 카피라이터 정유정이 아홉 군데 칼에 찔린 채 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그런 다음 검사 최연기(차승원)가 등장한다. 현장에서 용의자 김영훈(신하균)이 잡히고, 그에 대한 취조에 들어간다. 그걸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48시간 생방송 중계를 시작한다. 취지는 범죄예방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라이브 쇼일 뿐이다. 문제는 너무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이 사건이 의외로 꼬이기 시작한다. 사건보다 인물에 집중하는 하드보일드 추리물 취조실에서 이미 잡은 범인과 검사 사이에서 심리적인 대결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 영화보다 연극이 잘할 수 있는 게임이다. 영화가 더 잘할 수 있는 게임은 그 범인을 잡으러 돌아다니는 일이다. 아마 장진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진은 자기가 세운 한계를 먼저 받아들인다. 아니, 차라리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다. 영화는 실내로 들어오고, 일단 들어오면 거기서 끝날 때까지 나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설정 자체가 장진의 게임이다. 두개의 게임. 검사와 범죄자의 심리적 게임, 그리고 장진의 영화와 연극의 게임. 물론 그 안에서 끝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 검사 최연기도, 용의자 김영훈도, 검찰청 직원들도, 방송국 프로그램 스탭들도, 물론 영화감독 장진도, 그리고 그가 이끌고 세트 안으로 들어온 그의 주력부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연기자들도 아무도 끝나기 전에 나갈 수 없다. (잠시! 여기서부터 스포일러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읽지 말거나, 보지 않을 분들만 읽으실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은 다음에는 나를 원망하지 말 것.)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원작이 아니다. 혹은 반 다인과 같은 추리라는 논리의 게임을 벌이지도 않는다(이를테면 마지막에 갑자기 무속신앙의 원귀와도 같은 덧없는 해결의 결말). 엘러리 퀸처럼 무시무시하지도 않다. 레이 브래드베리와 같은 반전의 유머도 없다. 최연기는 페리 메이슨이 아니며, 더더구나 브라운 신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금방 이 영화의 이야기에 관심을 잃었다. 그 대신 그걸 나는 장진의 메시지로 읽었다. 그는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추리가 아니라 인물을 보아주길 기대한다. 그것도 연극적인 인물들의 제스처를 바라보는 영화적인 프레임과 카메라의 이동과 쉴새없는 편집을 보아달라고 요구한다. 같은 말이지만 연극과 영화를 보아달라고 간청한다. 이 희곡은 (내 생각에) 앤서니 세이퍼나 데이비드 마멧의 희곡의 그림자 아래 놓여 있다. 하드보일드와 추리물에 적당히 걸쳐 선 이 영화는 사건 해결을 위해 촘촘하게 구성된 드라마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 대신 최연기 검사를 중심으로 인물들 사이의 거미줄을 따라간다. 그들이 던져진 취조실(이자 방마다 중계방송되고 있는 공개 무대)인 방과 방의 연속은 일종의 거미줄처럼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진 (카메라들이 감시하는) 투명한 아케이드이고, 그 안에서 영화는 마치 무대처럼 방과 방을 옮겨가면서 진행된다. 투명함, 하지만 탈출 불가능. 거미줄처럼 칭칭 동여맨 줄거리. 그런데 어리둥절한 것은 그 커다란 세트에, 그 안에 불려온 그 많은 인물과 그 인물들을 따라다닌 분주한 카메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이 모든 노력을 그냥 허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만일 사건을 추궁하는 영화라면 추리로 풀어내든지 아니면 (검사가) 머리가 나쁘다면 완력으로 풀어내든지 해야만 했을 것이다(그것도 아니라면 주인공을 위해서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관객 자신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의 누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은 그냥 허위로 귀결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 사건이 왜 풀리지 않는가, 라는 해결의 불가능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의 가장 이상한 점은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에 시작된다. 이 영화는 왜 48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이 시간은 영화에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추리의 시간이 아니라 죽은 시체 정유정을 시체 부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영화는 물론 시체 부검하는 정유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종일관 진행된 추리의 논리를 모순으로 만드는 것은 마지막에 도착한 단 한장의 팩스, 그러니까 이 사건이 결국에는 정유정의 자살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내내 본 것은 누가 죽였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시체를 누가 훼손시켰는가, 라는 다소 역겨운 시체와의 숨바꼭질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알게 된다. 이것은 왜상효과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두개의 위치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이중의 잉여지식의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한쪽을 알면 다른 한쪽은 무의미해지는 진위 판단의 진술이다. 물론 장진이 속임수를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중간에 죽은 정유정의 유령이 찾아와 그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쓰는 최연기 검사에게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 선물한 다음 떠나가는 장면을 포함시켰다. 영화는 죽은 정유정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저 커피 한잔 주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죽은 정유정 역의 김지수의 ‘사소한’ 등장은 지나치게 인상적이어서 누구라도 의심을 품을 만하다. 장진은 마지막 순간 연극에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이것이 장진의 이중의 게임으로 읽힌다. 지나칠 정도로 무대와도 같은 세트 안에서 영화적인 프레임과 카메라의 이동과 쉴새없는 편집을 동원한 이 영화에서 정유정의 유령이 최연기 검사 곁에 등장하는 장면은 신기하게도 연극적으로 찍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김지수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이 다른 장면과 다르게 찍혔기 때문에 인상에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연극이 영화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던 표현주의 영화 시대, 혹은 알프 쉐베르그 이후의 스웨덴영화의 전통, 그리고 물론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 이후 보여진 영화의 연극적인 무대화, 카메라 앞에서 펼쳐지는 필름 다르의 유산, 그 이후 반복되어온 영화 안의 연극의 자리를 재빨리 복원시키려는 방법의 반복이다. 영화가 죽은 자를, 유령을, 귀신을, 망령을, 특수효과 없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아 있는 자 곁에 앉힐 때 그것을 성립시키는 영화적 전제는 연극적 유산의 인정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근본적으로 현실의 기계적 복제의 이미지에 물리적 운동을 부여하면서 시작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의심은 이 영화의 마지막, 그러니까 최연기 검사가 모두 다 떠난 거대한 세트와도 같은 취조실 스튜디오에서 저 한쪽 방문을 열자 마치 다시 한번 연극처럼 재현되는 정유정의 자살장면의 광경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확신이 되었다. 장진이 사건의 진실, 죽은 자의 진심, 비밀의 재현을 시도할 때 기꺼이 자리를 내주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연극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기만, 소란스러운 속임수, 재미있는 버라이어티 쇼, 스펙터클한 액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진실을, 혹은 진심을 보지 못한다. 그걸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연극뿐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 연극에로 고개를 돌린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장진의 첫사랑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더 좋아졌으면 고맙겠다.

아시아 영화 기행: 이란 [3] - 검열·제작현장

검열의 벽과 제작 현황 파흐란 메흐란파르와 바흐람 베이자이를 만난다는 것은 이란 내 소수민족의 문제와 검열의 문제를 만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쿠르드족 출신의 감독 메흐란파르는 <종이 비행기> <생명의 나무> <사랑의 전설>로 유명하다. 만난 감독들 중 가장 선한 인상을 보여준 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쿠르드족, 혹은 이웃하고 있는 탈레쉬족에 이르기까지 소수 민족의 언어와 풍습과 전통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시학과 다큐멘터리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스스로는 “드라마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다. 서로를 키워주는 것이다. 키워주는 것은 사랑의 징표이다. 키워주지 않는 것은 증오의 증표이다.” 외우는 시 한편을 들려달라고 하니, 서슴없이 즉석에서 몰러너(외국에는 ‘루미’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고 한다)의 시를 한수 들려줄 만큼 낭만파다. 그러나 상당한 유명세를 갖고 있는 해외의 상황과 달리 메흐란파르 영화의 국내 상영은 힘들기만 하다. 그의 영화들은 쿠르드족 지역에 짧게 상영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식으로 상영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메흐란파르는 같이 일하던 제작자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바람에 더 힘들어졌다고 긴 한숨을 쉰다. 바흐람 베이자이의 집에는 책들이 가득하다. <바슈> <여행자> 등 영화 대표작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문학 및 연극에 대한 저술서를 냈고, 연극연출도 여러 편 한 그는 혁명 전 영화세대로서 연극적인 영화 또는 실험적인 영화들을 만든다. <여행자>는 그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가 시작하면 언니는 동생의 결혼식에 간다. 그러나 차를 타기 직전 뒤돌아 카메라를 향해 쳐다보며 “우리는 지금 동생 결혼식에 갑니다. 하지만 곧 죽게 될 겁니다”라고 말해 관객을 따돌린다. 결국 죽은 언니는 끝내 동생의 결혼식에 거울을 들고 유령이 되어 찾아온다. 그는 이 영화의 주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실패에 겁을 내지 않는 자들은 죽음 앞에도 절망하지 않는다. 난 암울한 현실에 혼자 대항하여 현실을 바꾸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행자>의 이 주제는 영화 검열을 대하는 베이자이의 강철 같은 태도이기도 하다. 많은 작품들이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던 베이자이, 그가 들려주는 검열과의 싸움 하나. “<여행자> 상영 당시 처음에는 37장면을 삭제하라고 통보받았고, 나는 하지 못하겠다고 알렸다. 그뒤 그 영화는 상영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다시 9장면을 줄이면 된다는 말에도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작자들이 자신들의 비용을 거두기 위해 상영 직전 삭제했고, 결국 이 영화는 아무런 선전도 없이 아주 나쁜 조건으로 상영되고 말았다.” 베이자이는 “이번주 토요일에도 왜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 승인을 아직까지 안 해주는지 협회에 따지러 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에게 검열과의 싸움은 진행 중이다. 이란영화의 문제점이 바로 이 열악한 상영과 삼엄한 검열의 조건이다. 그만큼 표현의 제약이 많다는 얘기다. 가령, 대략 4∼5단계 정도의 사전 검열이 있는데, 그걸 모두 통과한다고 해도, 3등급으로 분류받아 개봉 허가를 받는다. 꽉 죄는 여성의 옷, 여성 신체의 일부 노출, 여성과 남성의 육체적인 접촉이나 애정행각, 군인이나, 경찰, 가족에 대한 조롱, 수염 기른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캐릭터, 외국 음악사용 등이 금지 사항들이다. 베이자이의 한탄. “우리는 영화 속에서 남녀를 서로 떨어뜨리기 위해 뭔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불필요한 시간을 소요해야만 한다. <여행자>에서 나는 같은 장소에 있는 커플을 따로 떨어뜨리기 위해 남편은 쇼핑을 하고, 아내는 다른 곳에 머물거나, 여자는 창가에, 남자는 창 밑에 있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고 한탄한다. 사전 검열의 조항들을 지키지 않을 경우 상영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지켰다고 해도 겨우 통과한 영화는 질과 상관없이 나쁜 조건을 부여받는다. 가령 3등급 중 1등급을 받아야만 텔레비전에서 광고도 하고 좋은 시기에 좋은 극장에서 상영을 할 수 있다. 만약 3등급을 받으면 텔레비전 광고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좋은 시기에 극장에 걸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제약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형식이 발전했다는 일부 내부의 논리가 있지만 그건 위험한 발상이다. 이란영화의 미래를 진지하게 말하는 자리는 여기여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현실을 먹고 자란다 이제 여행의 끝에 왔다. 이란의 공휴일인 금요일에 본 예배장면이 눈에 선하다. 전 국민의 90%가 넘는 무슬림들은 개인예배 외에도 금요일이면 집단예배를 위해 사원을 찾는다. 테헤란 시내 가장 많은 무슬림이 모여 기도를 올린다는 테헤란대학. 엄청나게 많은 인파 중에도 차도르의 물결과 녹색 군인의 물결이 가장 눈부시다. 정문 앞에서 서로 교차하더니 각자 정해진 남녀 입구로 따로 휩쓸려 들어간다. 대학 내부로 들어가면 연이어져 걸려 있는 천조각이 남자와 여자의 기도 장소를 표식으로 가른다. 남자들의 경우 꼭 정해진 장소에서만 기도를 올릴 필요는 없다. 몇몇 사람들은 돔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작은 카펫을 깔고 기도를 올린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화장실에 줄을 서서 예배 전 손발과 얼굴을 닦는 의식 ‘우두’를 행하는 장면은 기도를 올리는 장면만큼이나 성스럽다. 의식이 끝나고 돌아가는 군인 한 무리에게 웃음을 보낸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들도 웃는다. 그들에게서 둔덕에 앉아 꽃을 따던 <체리 향기>의 그 군인들을 본다. 끝끝내 이곳의 현실은 영화와 구분되지 않으려나보다. 그러나 이제 놀라지는 않는다. 구분되지 않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가 그들의 생활과 의식과 사고 어딘가에서 풀려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시네마>에서 이란영화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 천일야화의 방법을 사용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살롬! 시네마>에서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밀려드는 현실의 사람들을 포착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비록 영화작업을 위해 타지키스탄으로 건너가 있는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또 한명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포함하여 다른 이란의 감독들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정의 귀중한 결과였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소년이 끝내 공책을 전해줬다면, 나는 적어도 이란영화의 한 페이지를 건네받았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테헤란을 떠나오는 날 일행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나는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연락할 길이 없었다. 공중전화기 앞에 한참을 망연자실 서 있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무섭고 무뚝뚝하게 생긴 어떤 남자에게 전화카드를 빌려 전화를 한다. 아니, 사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걸어준다. 손짓 발짓과 미소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니, 이 무뚝뚝하면서도 정 많은 남자를 언젠가 어느 이란영화 한편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란영화의 역사 1969년 <암소>로 해외에서 인정 이란영화의 태동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주장이 있다. 1900년 왕궁에서 일하던 미르자 에브라힘 칸 아카스 바시가 촬영한 것이 그 시작이라는 설과 1930년에 촬영된 최초의 극영화 오바네스 오가니안스의 <아비와 라비>를 그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다. 이미 1920년경부터 이란에서는 검열의 형태가 존재했다. 혁명 전까지 대체로 대중의 입맛을 맞추던 영화들은 이른바 ‘필름 파르시’(Film Farsi)라 불리던 장르들로서, 인도와 이집트 등지의 상업영화를 모방한 형태의 영화들이었다. 전문적인 상업영화로서의 스타일이 결정된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다. 동시에 1963년에는 시인 포루흐 파로허저드가 생전의 단 한편의 영화, 그러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검은 집>을 남기면서 한획을 그었다. 이란영화가 국내를 벗어나 외부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다. 무엇보다도 이란영화의 예술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 건 다리우스 메흐르쥐의 1969년작 <암소>였다. 이때가 혁명 전 이란영화 뉴웨이브가 태어난 시기다. 자신의 암소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소라고 행세하는 어느 농부의 이야기인 <암소>는 정부로부터 상영금지당했지만, 1972년 베를린영화제에 몰래 출품되었고, 자막이 없는 상태로 상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면서 이란영화의 건재함을 과시했다(다리우스 메흐르쥐는 이번 23회 파지르영화제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이란영화는 혁명을 지난 80년대 이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등을 중심으로 다시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아시아 영화 기행: 이란 [4]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인터뷰

“시(詩)도 영화의 일부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란에 와서 키아로스타미를 제외하고 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초조하게 기다리던 터였다. 기다리게 한 선물이었을까? 방문을 허락했을 때 그는 흥분되는 이야기 하나를 덧붙였다. 엘 샤드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체리향기>에서 자살하기 위해 자동차를 몰고 테헤란 시내를 헤매다니던 그 중년의 주인공 남자를 기억하는지? 그가 바로 엘 샤드다. 도착한 그의 집. 작은 마당을 건너 안으로 들어서니 1층 거실에는 의자와 거울 등 가구들이 즐비하고, 2층에는 작은 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아마도 손님은 아래층에서 맞이하고, 작업은 위층에서 하는 모양이다. 뭔가 구획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지럽지도 않은 그의 영화구조 같은 집에서 키아로스타미가 반갑게 맞는다. 여기서 그 신기한 이미지들이 구상되었나보다. -알리 악바르 사데기가 38년 전 사진 한장을 보여주었다. (보여주며) 기억나는가? 페르세폴리스에 놀러갔을 때라고 하던데. =(웃으며) 이 사진을 사데기의 집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시절은 참 순수했었다. 보면서 친구들과 회상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 다시 이런 사진을 찍더라도 20년 뒤에는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만…. -첫 장편 <리포트>를 만들 때 당신의 제작 여건은 어떠했는가. =당시는 커눈에서 안정감 있게 작업하던 때다. 영화 마케팅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제작을 맡은 친구가 일 처리를 잘해서 이 계통에선 대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신뢰했으며 그 신뢰를 바탕으로 기회를 준 것이었다. <리포트>는 당시 다른 영화와는 꽤 다른 시도들이 있었다. -이란영화는 곧 아이가 등장하는 영화라고 인식시킨 것은 당신이다. 요즘 이란의 어린이 영화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두개의 질문을 같이 한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는가? 우선, 나를 세상에 알린 것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인 건 맞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단편영화 데뷔작 <빵과 골목길> 같은 영화 작업을 할 때부터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순수한 내 영화적 경험으로만 그 영화를 만들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제작한 것이 18년 전이지만, 그 영화는 지금 영화와 비교해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의 영화 스타일이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요즘의 ‘어린이 영화’에 대해서는 평하기가 좀 힘들다. 나는 다른 영화나 영화감독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은 시(詩)가 영화에 끼친 영향을 많이 강조한다. 시와 당신의 영화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달라. =시도 영화의 일부분이다. 단어를 조합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런 이미지들은 내겐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말하기가 힘들 정도다. 어떤 때는 차라리 시나리오를 쓰기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까지도 한다. 나는 사진도 찍는데 그 작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시에서 나는 특히 일본의 하이쿠를 좋아한다. 낭송하는 것도 즐기는 편이다. 내가 미니멀한 영화를 선호하는 것은 다 그런 나의 성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당신은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클로즈업>을 꼽은 적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지금으로서는 <클로즈업>이 나의 최고의 영화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어떤 의미에서 오히려 더 오래된 영화 <여행자>를 최고로 꼽을 수가 있다. 그 영화는 30여년 전 낭트영화제에서 이미 알려졌지만, 그 가치는 지금에서야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신선한 면이 있는 거다. <클로즈업>은 15년 전쯤 만든 영화 아닌가? 그렇다면, 역시 15년쯤 지나 30년 뒤에 다시 관객과 보았을 때 비로소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거다. -<클로즈업>의 주인공이었던 후세인 샤브지안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 당신은 그의 요즘 근황을 안다고 하던데(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실제 후세인 샤브지안이라는 청년이 이란의 유명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사칭하다 발각되고 용서받는 것까지의 과정을 영화로 만든 바 있다. - 편집자) =연락을 하고 지내기는 하지만…. 그는 좀 특이한 성격의 사람이다. 연속적인 관계가 어려울 때도 있다. 돈과 관련하여 사소한 오해를 낳거나 주변 사람에게 오해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룬 영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신 영화에 있어서 어떤 한 국면을 마감하는 마침표, 또는 전환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50대에 접어들자 내 머릿속은 복잡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죽음이란 의미가 내게 새롭게 각인된 것이다. 몸과 마음이 허약해지고, 태만해지기도 하는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아마도 그건 이란의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과 결합해서 온 게 아닌가 짐작된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게 됐다. 하루 중 낮이 끝나면, 그 세계는 밤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환한 불빛과 네온사인 등 어둠을 밝히는 것들 또한 있지 않나. 그 불빛 속엔 어둠을 밝히는 새로운 힘과 삶의 영위가 있으니 그것 역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이란 전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세월이 갈수록 생각은 더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희망은 의지로 바뀌었다.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거다. 일본 시구 중에 이런 게 있다. ‘높은 곳이 무섭다. 떨어지는 것이 두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불이 무섭다. 불이 뜨겁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별이 두렵다. 이별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두렵지 않다. 죽음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지금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알지도 못하는데 왜 두려워하겠는가? - 역시 여러모로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당신의 첫 번째 디지털영화이고, 첫 번째 이란 바깥에서 제작한 영화다.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이 영화를 보고나서 당신이 초창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디지털카메라 2대를 갖고 그 영화를 촬영했다. 유네스코의 승인을 얻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간다 어린이들을 돕는 것이 애초 목적이었다. 그런데 촬영을 하고 나서 돌아와보니 그 처음 목적에 덧붙여, 순수영화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영화에는 영어는 물론, 아프리카 토속어 등 여러 언어가 나오지만, 영화는 그 언어의 한계를 넘어 순수 내면성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현재 갖고 있는 이란영화에 대한 염려와 희망은 무엇인가. =유명한 영화감독의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하고 싶다. 이란영화는 양과 질로 보아도 다양한 영화예술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지향적인 작품이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매년 새로운 감독들이 배출되고 있다. 또한 아무리 어렵더라도 헤치고 성장하고 있다. 희망적이다. <체리향기>의 주인공 엘 샤드 인터뷰 “키아로스타미에게는 특정한 공식이 없다” -원래 전문 배우는 아니었다. <체리향기> 이후 바뀐 것이 있나. =원래 난 건축가다. 이란에 오기 전 12년간 캐나다에 살 때도 내 일은 건축이었다. <체리향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뒤 다른 영화 출연 제의가 쇄도했고, 그렇게 전문 배우의 세계에 입문했다. <체리향기>가 계기가 되어 이후 7∼8개 영화에 출연했고, 몇편의 텔레비전 방송에도 출연했다. 지금은 건축 일을 잠시 접어둔 상태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어떤 스타일의 감독인가. =키아로스타미가 어떤 특정한 공식을 갖고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있고, 또 그 공식을 누군가 알고 있다면 누구나 키아로스타미가 되지 않겠는가? 그는 우선 특정한 공식이 없다. 이란의 한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사탕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면 끄집어내서 사용하는 사람”이다. 내 경우를 들어보자. 알다시피 난 프로배우가 아니었다. 그래서 키아로스타미가 내게 와서 “당신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선택되었어요”라고 했을 때, 나는 “내가 당신의 영화를 망치면 어떡하나요”라고 걱정했다. 그랬더니 그는 다시 “만약 영화를 망친다면 그건 당신 책임이 아니라 내 책임이에요”라면서 나를 편하게 해줬다. -키아로스타미는 어떤 식으로 연기를 주문하나. =그는 정해진 시나리오를 주지 않았다. 당일에 같이 촬영지 선택을 나가기도 했다. 키아로스타미는 차 안에 앉아 시나리오를 썼고, 내 제의를 듣고 그걸 바꾸기도 했다. 키아로스타미는 내가 나 자신이 되도록 격려했다. 그런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운전하는 연기를 하고 있었는데, 평소 습관대로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톡 치고 있었다. 그랬더니 키아로스타미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 나는 “당신이 나보고 스스로가 돼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이건 당신만 알고 있는 당신이다. 관객이 보기에 지금 당신은 연기를 하고 있는 거다”라고 했다. “관객이 당신에게서 찾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말한 대로 그에게는 특정한 공식이 없는 셈이다. -<체리향기>의 결과는 불분명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살 자체가 희망을 찾기 위한 행동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수없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다. 나 역시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살 경험을 갖고 있는 어떤 젊은이는 이 영화를 보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내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영화의 주제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연속이라고 보고 있다.

사회적 은유도, 정신병자의 심상사례도 아닌 <파이트 클럽>

세 가지 각도에서 한번 접근해보자. 데이비드 핀처의 신작 <파이트 클럽>은 무뇌아적인 우수마발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존을 훌쩍 뛰어넘는 걸작도 아니다. (척 팔라닉의 도발적인 데뷔작을 꽤 충실히 재현한) 이 위악적이리만치 쾌활한 풍자극은, 도발이라는 측면에 관한 한, 지극히 재미있고, 놀랄 만큼 연기가 뛰어나고, 기획 또한 대담하다. 적어도 강철에 크롬 도금을 입힌 것 같은 그 외양이 달걀찜 거죽처럼 갈라져나갈 때까지는. 마천루는 마천루를, 총은 그저 총을 뜻할 뿐인 때도 가끔 있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남근주의로 떡칠갑한 억압적 장치들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 <파이트 클럽>은 일련의 심리적 사정행위를 목표로 삼는다. 내레이터를 겸하는 이름없는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은 입에 총구를 문 모습으로 처음 소개된다. 이후, 영화는 이 순응주의적 무산자가 왜, 그리고 어떻게 그의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 수위에 불을 지피며, 왜 그리고 어떻게 원시적인 패거리들과의 육탄전을 통해 그의 내면에 숨은 남성성을 해방시키는지를 시시콜콜 회상한다. 그러는 한편으로, 핀처는 불가능하리만큼 매끈한, 다시 말해서 디지털 기술에 의지한 일련의 카메라워크로, 그 분야에 관한 한 도사임을 다시금 뽐낸다. <파이트 클럽>은 작가 J.G.발라드(<태양의 제국> <크래쉬> 등의 원작자. ‘귀류법의 왜곡된 전도’, 즉 모순된 논리적 전개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거짓이 아닌 진실을 드러내는 작품세계로 유명하다.-옮긴이)가 창조해낸 무미건조한 근미래적 환경 속에서 전개된다. 대기업의 ‘리콜 심사관’이라는 주인공의 직업에서도 발라드의 흔적이 느껴진다. 노튼은 그 직업 때문에 사고 자동차들을 조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역을 날아다니며, 그 과정에서 비행기의 공중충돌 공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핀처가 <쎄븐>에서 이미 그려보인 바 있는 것과 비슷한 분위기의 도시 꼭대기에서 이케아 가구회사의 카탈로그 속에 파묻혀 사는 이 신경증적 불면증 환자는, 환자들의 자구모임들을 순례하며 밤시간을 때운다. 그중에서도 그가 선호하는 쪽은, 물론 고환암 남성들을 위한 모임. 거기서 그는 호르몬 때문에 망가진 전직 레슬러(미트 로프)와 눈물젖은 관계를, 여성인 또다른 ‘자구모임 순례자’와는 좀더 애증이 엇갈리는 관계를 맺게 된다. 시커먼 눈화장을 하고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서랍에 딜도(여성 자위기구)가 들어 있는 돼지우리에서 사는 야만적 미인, 말라(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극 에서보다 한층 더 밀도있는 연기를 선보인다)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여성이다. <파이트 클럽>은 사나이들의 극단적인 밤외출 얘기다. 주인공의 삶은 비행기에서 우연히 타일러 더든의 옆좌석에 앉는 순간부터 180도 달라진다. 빨간 가죽재킷과 격자무늬 셔츠, 체크무늬 바지를 입은 이 날티나는 무법자적 인물을 연기한 브래드 피트는, <12몽키즈>에서 이미 과시했듯이, 극도로 카리스마적인 미치광이 연기가 되는 배우다. 콘도가 폭발해 버리자, 주인공은 예측불허의 새 이상형 대체자아의 집으로 들어가고, 이후 두 사내는 도시의 유독성 산업쓰레기 야적장의 자연스러운 풍화물처럼 보이는 습기차고 낡아빠진 빅토리아식 저택에 함께 살게 된다. 영사기사라는 타일러의 야릇한 직업에도 나름대로의 뜻이 있기는 하지만, 노튼은 맨주먹 폭력에 대한 이 친구의 무분별한 취향에 훨씬 더 매료된다. 머지않아 두 사내는 인근 주점의 주차장에서 야밤의 주먹대결을 벌임으로써, 스스로 구경거리가 된다. 넘쳐 흐르는 재기와 도발적이리만치 쇠락한 장면의 미장센으로 봐서, <파이트 클럽>은 <브라질>(테리 길리엄 감독의 근미래영화. 국내에서는 <여인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됐다.-옮긴이)의 변주곡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은 밤이면 웃통 벗고 주먹을 휘둘러 대고, 다음날 아침에는 깨지고 멍든 얼굴을 자랑스럽게 쳐들고 출근한다. 그러다간 이윽고 말라와 타일러가 서로 얼킨다. “저 여잔 내 자구모임에 쳐들어 오더니, 이번엔 내 집에까지 쳐들어왔어”라고 노튼은 투덜거린다(주인공의 분열적 정신상태를 암시하는 이 ‘동침 뒷날 아침’의 불평은, 타일러로 하여금 다시 부모집에 들어가 사는 것 같다고 짜증내게 만든다). 싸우는 재미와 멍든 상처에 대한 그 온갖 사도마조히즘적인 찬양에도 불구하고, <파이트 클럽>의 결론은 주로 형이상학적이다. 주인공과 타일러는 화장비누를 만들기 위해 지방흡입술 시술병원에서 지방을 훔친다(“우린 돈많은 여편네들한테 지네들 궁둥이 비곗살을 되파는 셈이야”). 타일러의 이런 헤비메탈적 실존주의가 추종자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하는 건 불가피한 수순. 머지않아, 그는 기괴한 ‘램로드 클럽’ 지하실에서 주먹질 모임을 이끌면서 그 동네 멍청이들의 정신을 빼놓을 뿐만 아니라, 한층 더 야심적인 반사회적 농담들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차를 박살내고, 진열창을 폭파시키고, 세븐 일레븐의 점원들을 겁주는 따위의. 결국, <파이트 클럽>은 타일러의 전위적인 비전을 은밀히 조직화하는 내용까지 극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고, 의상으로 대변되는 파시즘 비판극으로 전환하면서, 망각의 운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닫는다. 지난 겨울 개봉됐다가 거의 묵살당한 독립영화 와 같은 플롯의 반전이 있음직하건만, 영화의 마지막 한 시간은 지겹다 소리가 절로 나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특수효과가 만들어낸 묵시록인 마지막 장면의 허세만만한 허무주의는 기다린 보답이 있는 클라이맥스였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사회적 은유인가 아니면 한 정신병자의 임상사례인가? <파이트 클럽>을 흔히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와 견주곤 하지만, 이 영화의 태도는 좀더 감상적이고, 덜 예리하다. 도무지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파이트 클럽>은 고뇌하는 남성 캐릭터들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강조한다. “우린 여자들이 키운 남자들의 세대야… 우린 신의 실수로 태어난 아이들이야” 하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와 싸울 힘이 없는 그들은, 서로를 두들겨팬다. 이 영화의 핵심적인 장면에서, 주인공은 사장에게 대들면서 피곤죽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폭행한다. 이 자작 폭력극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이트 클럽>은 니체철학이 말하는 권력의지마저 농담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 텔레비전 낮방송 제작자들에게 던지는 질문 하나. ‘아빠’ 없는 세상에서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요?

[할리우드작가열전] 셰익스피어와의 농담따먹기, 톰 스토파드

지난해 아카데미를 휩쓴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보고 있노라면 열등감에 휩싸인다. 희대의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세계를 마치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은 상태에서 이리 빠지고 저리 붙이고 하며 자유자재로 스토리를 펼쳐나가는 작가적 기량에 기가 죽을 뿐이다. 그뿐인가? 원전에서 따온 대사들을 위트 넘치게 각색하고,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비주얼의 강점들을 낱낱이 구사할뿐더러, 얄밉게도 상업영화의 핵심인 대중성 내지 흥행성까지도 단단히 틀어쥐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솜씨라니… 도대체 이런 수준의 시나리오를 쓰는 놈은 어떤 녀석일까? 자막에 크레딧이 떠오르는 순간 이 시새움 섞인 볼멘 투정은 쑥 들어간다. 바로 톰 스토파드다. 톰 스토파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츨린에서 태어났다. 두살 때 가족 모두가 싱가포르로 이주했으나 그곳에서의 체류 역시 길지는 않았다. 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오는 바람에 다시 인도로 피난을 떠난 것이다. 이때 남편을 잃은 그의 어머니는 톰이 아홉살 되던 해 영국군 장교와 재혼해 그들 가족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온 끝에 비로소 영국의 브리스톨에 정착하게 된다. 톰의 성인 ‘스토파드’는 바로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에게서 받아온 것이다. 분방했던 성격의 톰 스토파드는 열일곱살이 되던 해에 학교를 때려치워 버린다. 그는 일찌감치 작가를 꿈꾸며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20대에 접어든 그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연극을 위한 대본들을 닥치는 대로 써나가는 한편 소설에도 손길을 뻗쳤다. 그렇게 고달픈 작가지망생으로서 근근이 연명해가던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것은 1964년 베를린의 포드재단이 주최했던 극작세미나였다. 세미나에 참가한 그가 과제물로 제출한 작품이 바로 저 유명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이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본래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잠깐 등장하는 별볼일 없는 캐릭터였다. 오죽했으면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1948)에서는 아예 삭제된 배역이 됐을까! 톰 스토파드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햄릿>을 패러디했다. 이들이 파악하고 있는 <햄릿>의 내용은 완전히 엉뚱한 허방짚기의 연속이어서 관객은 배가 아프도록 웃어젖혔다. 그러나 톰 스토파드의 이 독창적인 코미디에는 심오한 철학적 주제 혹은 실존적 슬픔이 배어 있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끝끝내 자신들이 그 스토리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초연(1966)은 대학축제의 일환으로 옥스퍼드대학 연극반에 의해서 초라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반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들은 결국 런던을 떠들썩하게 만들더니 이듬해인 1967년에는 기어코 내셔널시어터컴퍼니에 의하여 영국 최고의 무대에까지 올라선다. 그것은 서른살이 채 안 된 청년 톰 스토파드에게는 현기증이 날 만큼 대단한 성공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읊조린 셰익스피어와의 농담따먹기가 그를 유럽 최고의 신세대 극작가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후 톰 스토파드가 펼쳐온 작품활동들은 눈부시다. <점퍼스>(1972), <더러운 속옷>(1976), <밤과 낮>(1978) 등의 작품들이 발표될 때마다 평단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관객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양극단의 결합이다. 즉 진지한 철학적 주제를 위트와 풍자가 넘쳐나는 대사와 유머러스한 비주얼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인권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여 세계 전역의 양심수 혹은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구명운동에 앞장서온 작가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조국인 체코를 방문하여 바츨라프 하벨(훗날 대통령이 된 극작가)을 만나기도 하였고, 앰네스티의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반체제인사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갖고 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유럽 최고의 극작가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진출한 까닭에 영화계에서의 그의 행로 역시 탄탄대로였다. 필모그래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는 늘 최고의 감독들과 함께 일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여인의 음모>가 아카데미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된 이후로는 바다 건너 할리우드로부터의 구애도 끊이지 않았다. 비록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태양의 제국>이나 <러시아하우스> 같은 작품에서 그가 살아온 인생편력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출세작인 <로젠크란츠…>를 직접 연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그가 또다시 <셰익스피어 인 러브>로 기어코 아카데미 각본상까지 거머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톰 스토파드와 셰익스피어 사이에는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톰 스토파드의 최신작은 <슬리피 할로우>. <쎄븐>(1995)의 작가 앤드루 케빈 워커와 그가 공동집필한 시나리오에다가 할리우드의 기괴한 천재 팀 버튼 감독이라…, 그들의 이름만으로도 짜릿한 흥분이 느껴진다. 듣자하니 미국에서는 이미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어디 이번에도 우리를 열등감에 휩싸이게 할지 지켜볼 일이다.

김승우, <비밀>에 캐스팅

김승우가 박기형 감독의 새 영화 <비밀>을 새 영화로 골랐다. <비밀>은 98년 <여고괴담>으로 주목받은 박기형의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일상에 지친 30대 남자와 15살 초능력 소녀의 신비한 교감을 그린 초현실 감성영화”로 돌연 일상에 끼어든 신비한 한 소녀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에서 “세기말을 지나 새로운 세기의 희망을 제시한다”는 영화다. 박기형 감독이 1년 넘게 시나리오를 매만져온 <비밀>은 1월중 촬영을 시작한다. <비밀>에서 김승우가 연기할 30대 남자 이구호는 “정체불명의 소녀를 보호하면서 소녀와 에너지를 교류”하는 인물이다. 제작진은 “10대의 해맑은 순수함과 30대의 뜨거운 열정을 동시에 가진 김승우가 <비밀>의 남자 주인공이 가진 평범함 속에 감추어진 격정과 고독을 표현하기에 적격”이라는 것이 캐스팅 이유라고 밝혔다. 또 박기형 감독은 “영화의 초현실적인 체험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가 필요한데, 김승우는 연기력은 물론 열정적인 자세가 돋보이는 미더운 배우”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김승우는 벌써 텔레파시, 원격투시 등 초능력에 관한 공부를 하며 영화 <비밀>의 백미가 될 것으로 알려진 수중 촬영신에 대비한 테스트 촬영과 수중 훈련에도 참여하고 있다. <여고괴담>에서 보여준 사회적 문제의식을 공포가 아닌 신비한 교감 속에서 담아내겠다는 박기형 감독의 시도에 주목하는 것처럼, 99년 <신장개업>에 출연해 여성 관객의 ‘환심’을 더한 <남자의 향기>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의욕을 보였지만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김승우의 열연을 기대하는 관객도 적지 않다. 또 <비밀>은 이야기를 영화 제작과정과 맞춰 만화로도 출간하기로 화제가 되고 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공동감독 김태용ㆍ민규동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 이상한 선물 하나가 우리에게 배달되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라는 글씨가 총총 박힌 붉은 포장지 안에서 어떤 이는 ‘못생긴’ 공포영화 한편을 꺼내들고 투덜거렸지만, 어떤 이는 생경한 광채를 발하는 작은 보석을 발견하고 가슴을 두근거렸다. 이 묘한 선물을 보내 온 산타클로스는 영화아카데미 13기 동기생인 김태용(30) 감독과 민규동(29) 감독. <여고괴담…>은 16mm 단편영화 <열일곱>(1997), <창백한 푸른 점>(1998)에 이은 그들의 세 번째 공동 연출작이자 첫 번째 상업영화다. “민선이(민아 역)가 잠깐 자리 비운 동안 심심해서 예진이(효신 역)랑 영진이(시은 역)랑 우리 둘이서 누가 많이 관객 끌어오나 경쟁했어요.” 개봉날 극장 앞에서 보낸 즐거운 하루를 천진한 말투로 들려주는 두 감독은, 맑되 가볍지 않았고 열정적이되 그 열정에 대해 담담했다. 마치 동급생 친구라도 되는 양 영화 속 소녀들에 관해 애정을 담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은, 그들이 지은 교실 속의 민아처럼 다감했고 지원이처럼 발랄했으며 효신이처럼 조숙했다. 그리고 겸손한 목소리로 여성영화, 퀴어영화, 성장영화의 범주를 향해 힘들게 노저어 온 <여고괴담…>의 여행담을 털어놓았다. “이거 괴담 아니잖아?”라는 불평 앞에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첫 상업영화를 세상에 내보낸 소감은. 김: 우리는 영화 만들기를, 좀 멋있게 얘기하자면 영화 보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화하고 장난치며 노는 축제 분위기가 아니다. 컴퓨터 통신에 들어가면 감상이 주르륵 뜨고 주변에 긴장하는 관계자도 많고. 시스템의 존재를 느낀다. 그래도 우리 마인드는 그대로지만. 민: 아침 일찍 영화를 찾아오는 관객이 신기하고 고맙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망하는 관객에게 미안하다. 영화가 재미없으면 그것도 일종의 죄악이겠구나 싶고. -‘여고괴담’이라는 제목과 전편의 흥행 성적(서울관객 68만)이 안긴 부담이 컸을 텐데. 민: 사실 몇십만이라는 수치에 대한 감각이 없다. 그리고 별 몇개가 내 영화를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효신의 대사를 본뜬 말에 모두 웃음.) <여고괴담>은 두 가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하나는 교육 환경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고, 하나는 무서운 영화라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은 이 영화의 의무와 정체성에 관해 이미 확신을 갖고 있으며 고정된 감상법을 갖고 영화를 보러 온다. 마치 바이킹을 타러 갈 때처럼. 반면 스타도 없고 특이한 얘깃거리가 없는 데도 관심을 끄는 것은 속편의 혜택이다. 익숙한 틀 안에서 색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 2편이라는 점이 운명적 딜레마다. 김: 여고라는 공간에서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반드시 괴담일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컨셉과 관련된다고 믿었다. 공포 장르의 미덕을 못 갖췄다는 질책이 있는가하면 공포영화 관습을 새롭게 변형했다는 칭찬이 있다. 둘 다 우리 영화가 적절히 소통되는 방식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끼리는 여성영화나 퀴어영화로 이해했으면 했다. -넓고 얕은 반응보다는 좁고 깊은 반향을 구하는 영화로 보인다. 모험이라는 생각은 없었나. 민, 김: 그런 생각 안 했다. 만드는 입장에서는 누구나 특별한 이미지와 주제로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한국에서 10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화두로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도달했을 뿐 별나게 파낸 건 없다. 다만, 피해자나 피교육자로만 그려져 온 10대들을 99년의 생동하는 이미지로 그리려 했다. 에너지를 갖고 밝게 살아가며 자기 욕구를 펼치는 데에 주춤거림이 없고 선생님과 대등한 인간 관계를 맺는 존재로. -고교 시절이 궁금하다. 동성애적 유대의 경험도. 김: 학교에는 잘 적응 못했지만 시절 자체는 재미있었다. 기도원 가느라 학교를 빠져가며 성직자가 되려하기도 했다. 특별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답답했다. 민: 2학년 때 세상과 제도, 선생님, 모든 것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한 순간이 있었다. 간혹 사고도 쳤지만 내내 모범생이었기에 무난히 넘어갔다. 졸아가면서도 자율학습 시간에 <데미안>, <죄와 벌>을 읽으며 그게 저항이거니 했다. 그때만큼 절실하고 죽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 절박함이 효신이를 통해 반영되기를 바랐다. 남학생들도 단짝이 있지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이성애 형태의 감정을 가지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의리나 특별한 우정이라는 개념이고, 호의를 표시하는 방식도 여학생들과 다르다. 김: 남자들 관계는 좀더 폭압적이고 권력적이다. “여자 때문에 친구를 버려?”하는 식의 힘에 관련된 배타성이지 사랑이나 우정의 배타성은 아니다. -여고 취재 과정이 낯선 세계로의 여행 같았겠다. 민: 영화가 내게 있어 늘 보는 것과 떨어져서 볼 수 없던 것을 찾아가는, 보던 돌멩이도 뒤집어보는 모험이었으면 한다. 내 영화의 관객도 그러기를 바라고. 여고생들과 같이 수업도 듣고 끈끈하게 더불어 생활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서 연극반에 들어가 아이들과 영화를 만들었다. 민아, 지원, 연안의 세 캐릭터는 거기서 만난 친구들에게서 나왔다. 연안과 지원은 실명이고 몰래 카메라 에피소드도 실화다. -첫 만남이 궁금하다. 서로를 본 순간 효신이처럼 종소리라도 들었는지. 민: 종소리가 아니라 카메라 플래시 소리였다. 아카데미 입학식에서 사진 촬영하는데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오는 애가 있었다(민 감독은 96년 <지각대장 태용이>라는 단편을 만들었다). 살아온 역사가 비슷한 친구 같았다. 김: 첫 만남부터 불발된 애니메이션 준비까지 포함해 네 작품을 같이 만든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흘러왔다. 왠지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 같았다. 그나저나 나는 다른 애들이랑 잘 지낼 수 있었는데 규동이 덕분에 이지메 당한 피해자다. “애들이 보잖아” 하는 데도 자꾸 덤벼들고, “네가 창피해” 해도 무시하고. (웃음) 민: <여고괴담…> 찍으면서도 이 영화가 창피하냐고 태용이한테 따졌다. 김: 그래서 창피하다고 대답했는데도, 이 친구는 효신이랑 달라서 끝까지 안 죽더라. (폭소) -오기민 프로듀서와의 작업, 상업영화의 첫맛을 총평한다면. 김, 민: 오 PD도 속편을 안일하게 만들 분이 아닌 만큼 조바심난 적도 있었을 거다. 시나리오가 덜 정리된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가 감독이 급박한 결정을 내려야할 상황이 많다보니 프로듀서가 힘들었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찍을지 불확실한 상태인데도, 전적으로 신뢰해 준 오 PD와 씨네2000 이춘연 대표, 시네마서비스 강우석 감독이 고맙다. 신기한 것은 충무로 제작자들은 간섭이 심하고 충무로 스탭들은 다 무섭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자율성이 컸고 스탭들도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있나 싶었다. 영화 만드는 감독으로서는 단편과 큰 차이를 못 느꼈다. 흥행 성적을 매긴다는 것 정도? 예전에는 시나리오 복사하는 것부터 비디오 떠서 운반하는 일까지 우리가 전체를 통괄하며 리듬을 파악했는데 이제는 연출자로서의 내용만 갖고 있다보니 전체 프로덕션을 끌어가는 감각은 굉장히 무뎌진 것 같다. 전에는 끝나고 조명기 나르지 않는 게 큰 소원이었는데… 집단 예술로서 성격이 훨씬 진해졌다고 할까. -일은 어떻게 가르나. 민, 김: 태용은 운전을 잘하고 규동은 타자를 잘 친다. (웃음) 산업적 특성을 살리는 분업 개념이라면 우리 둘은 실패할 것 같다. 지난 4년간 아마 3년은 같이 지냈을 거다. 대화로 결정해야 할 부분은 이야기해서 해결하고, 만약 결정이 안 되면 상대방의 고집을 믿고, 그 외에는 각자 더 관심있는 부분에 치중해 끌어간다. 우리 장점은 많은 대화를 통해 화학 반응처럼 질적 비약을 이뤄내는 것인데, 이번에는 그런 여유가 없다보니 여느 때와 달리 다투기도 했다. -영화로 들어가 보자. 제3의 여성 캐릭터가 두 여자의 관계를 관찰하는 구도가 민 감독의 단편 <허스토리>와 닮았다. 민: 애초에 <여고괴담…>은 삼각구도가 아니었다. 학교에 살면서 거리로 나가고 싶어하는 아이와 반대로 거리를 떠돌며 학교를 바라보는 아이를 1인2역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러다 효신이가 분열돼 민아라는 캐릭터가 나왔다. <허스토리>의 동성애 모티브는 이어진 셈이다. 그때는 어떤 선언을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동성애를 다루는 가장 도발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은 동성애를 정치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만들었다. -시나리오부터 완성까지 영화가 많이 변했다는데. 김: 원래 일기 속 세계에서는 성장과 사랑이, 현실 속에서는 커뮤니케이션과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괴담이 양대 모티브였다. 왜 한 친구가 자살한 날, 물병이 떨어지면 왠지 무섭고 전깃불이 깜박여도 죽은 애랑 연관짓지 않나. 그렇게 그날 하루가 아이들 스스로 괴담을 만들어가는 과정처럼 보였으면 했다. 죽은 애를 다시 불러내지 않고 현실인 듯 환상인 듯 줄타기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도중에 시나리오가 압축됐다. 효신의 유년기를 보여주는 성장 코드가 축소된 대신 사랑의 비중이 커졌고, 효신이의 혼도 재림하게 됐다. 민: 귀신이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결국 귀신을 등장시킨 것이 제일 안타깝다. -<창백한 푸른 점>이나 <열일곱>도 그랬지만, 다양한 매체와 기법으로 화면 전체 ‘때깔’을 바꾸는 실험을 즐기는 것 같다. 김, 민: 아직 치기가 있어서인가? 공동 연출도 남들은 꺼리는 일이라 더 재미가 있고, 남들이 스토리 위주로 영화로 생각할 때 영화 매체만의 고유한 특질을 구체적 영역에서 탐구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충돌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데에 욕심이 많다. -교환일기 모티브는 소설 <회색 노트>를 생각나게 한다. 참조한 성장영화는 없는지. 김, 민: 소설은 못 읽어봤는데, 제목이 마음에 든다. 사실 ‘옐로다이어리’나 ‘노란 일기’ 같은 제목으로 바꿀 수 없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연출부 추천으로 <캐리>를 봤지만 별로였고, 에릭 종카의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은 10대 여성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 공존하지만 화해할 수 없는 두 아이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됐다. -10대 여성들의 하위 문화는 스펙터클하지 않은 데다 사적 공간에 숨어 있는데. 민: 중학교 때는 오히려 여자애들이 와서 섹스에 관해 가르쳐 주면 남자애들이 얼굴이 빨개져 도망가곤 했다. 책상 위를 뛰어다니며 체육복 갈아입는 모습에 겁을 먹기도 했고. 싸움할 때 소녀들의 과격한 모습, 성적 욕구의 표현 등에 대해 솔직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김: 10대 여성의 하위 문화가 로맨스 문화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했다. 남자들이 성을 폭력적으로 이해한다면 분명 여자애들은 로맨스의 눈으로 성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을 로맨스 문화로만 묘사한다면 그 친구들이 갖고 있는 생기발랄함과 솔직함이 깨질 것 같았다. -영화 속에 상징과 수수께끼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김, 민: 영화 속에서 새와 거북이, 사슴은 모두 네모진 공간에 갇혀 있다가 결국 탈출한다. 교실 안에 날아든 빨간 새는 한 아이의 죽음에 대한 ‘애원’일 뿐 아니라, 그 아이와 살아남은 아이들이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묻는 키워드다. 이 새의 깃은 소통의 통로였던 일기장 표지와 같은 색이다. 수조에서 벗어나 위태위태하면서도 무수한 발들에 밟히지 않고 돌아다니는 거북은 시은이 보호하고 있던 효신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실은 사슴처럼 거북과 새도 ‘이미지용 컷’으로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으면 했다. 물의 이미지도 지배적이다. 물은 첫 장면에서 자궁 속 양수의 느낌으로 쓰였는데, 한 세상에서 죽음으로써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는 ‘생일’의 이중적 의미를 머금고 있다. 도입부에서 민아가 수도꼭지를 틀다가 시은과 효신의 일기를 발견하고, 뒷부분에 가서 말랐던 수도에 다시 물이 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교사 캐릭터가 1편과 많이 다르다. 민, 김: 고 선생은 효신 안에서 자신의 고독과 무기력을 이해해 줄 유일한 친구를 보았던 슬픈 어른이다. 매혹당하고 끌려다닌 것은 고 선생쪽이다. 효신이 죽은 날까지 그는 자기 감정의 순수함에 대해 흔들림이 없었으나, 그날 처음 학생을 때려보고 자기가 학교에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달은 후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착취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에 시은이 민아에게 “일기는 다시 쓰면 된다”는 텔레파시를 보내고 옥상으로 올라가는데. 김: 끊겼던 시은과 효신의 소통이 복구될 뿐 아니라 민아를 통해 확장된다는 의미를 주려 했다. 시은이 옥상 문을 열면 다시 낮 풍경이 보이게 한 것은 거기에 죽음말고도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리의 소망이 들어간 것이다. -“아, 재수없어”하는 대사에서 보듯 10대들은 의외로 보수적이다. 교실 키스 신 촬영은 어땠나. 민: 교실의 키스 장면은 너무나 오랫동안 머릿속에 있었기에 내게는 숙원 같은 이미지다. 처음엔 두 배우가 걱정하는 기색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걱정한 것은 입냄새였다. 촬영중에 워낙 단짝이 되어 입맞춤도 어색하지 않았다. 김: 반 아이들이 질색하는 모습은 연기가 아니라 10대 단역 배우들의 실제 반응이다. (웃음) -누구를 미워하고 무엇을 겁내야 하는지 분명치 않은 영화라 실망하는 관객도 있을 거다. 민: 가해자-피해자 대립은 없었으면 했고, 성적 고민하는 아이들의 어두운 얼굴이 한 장면도 없기를 바랐다. 그 주제는 많이 다뤄지기도 했지만 나도 대안을 모르겠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게 아니었다. -파트너십의 전망은. 민, 김: (서로를 보며) 우리한테 기회를 다시 줄까?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있고 둘의 시간과 하고 싶은 작품이 맞는다면야. 공동 연출은 여러번 해봤으니 아트디렉터와 사운드 슈퍼바이저, 작가와 연출 등 다양한 관계로 한 영화 안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본다. 우선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

스펙트럼, <서편제> 등 한국영화 대표작들 출시

명성에 비해 좀처럼 DVD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한국영화 대표작들이 출시를 앞두고 있다. 태흥 영화사와 DVD 제작, 판매 계약을 맡은 스펙트럼DVD는 오는 10월부터 <서편제> <장군의 아들> 등 한국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명감독들의 영화들을 소개할 예정.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지난 20세기의 명작들을 망라하고 있는 이 라인업에는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창> <축제> <아제아제 바라아제> <태백산맥>,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 <경마장 가는 길>,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 배창호 감독의 <꿈> <기쁜 우리 젊은 날>,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1993년 최초로 1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던 <서편제>의 경우, 일본 등 해외에서의 DVD 출시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국내 발매가 이루어지지 않아 한국영화를 아끼는 팬들의 아쉬움을 샀던 작품이다. 이렇듯 출시 자체만으로도 반가운 이 작품들은 모두 새로운 텔레시네와 사운드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게 되며, 유명 타이틀의 경우 해외 팬들을 위한 영어자막과 일어자막이 포함된다. 국민 감독으로 추앙받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들은 박스세트로도 발매가 예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