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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어느 일본 여배우의 초상, 미야자와 리에 [1]

1992년 바다 건너온 한 일본 소녀배우의 누드집은 ‘누드냐, 예술이냐’라는 논쟁을 일으키며 근엄한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결국 재판정까지 갔다. 한국 서점가에 비닐로 포장된 누드집이 당당하게 진열되었던 건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긴 아직 배꼽티도 등장하지 않았던 때였다. 92년은 한국 여가수 유아무개씨의 누드 사진집이 나왔고, <즐거운 사라> 사건이 일어났던 해였다. 미야자와 리에의 <산타페>는 꽁꽁 숨겨서 더 음란했던 90년대 한국사회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잊었던 사이, 그녀는 아이돌에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배우가 되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고혹적인 한순간을 빚어내는 건, 꿈결처럼 흘러가는 영상이나 고독한 시간을 똑똑 두드리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뿐이 아니다. 고스란히 스크린에 재현된 ‘하루키 월드’의 가운데엔, 숨막히는 아름다움과 함께 다 길어낼 수 없는 고독함을 메마른 몸에 가득 안고 있는 미야자와 리에가 있다. 한국 관객에겐 사진집, 유명 스모선수와의 약혼발표와 파혼, 자살 미수 사건 등 십수년 전의 시끌벅적한 스캔들로만 기억됐던 그녀를 ‘배우’로 다시 불러내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녀를 만나는 약속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도 안 되고, 질문은 미리 제출한 내용의 범위를 넘지 말라…. 한낮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기기가 예사인 도쿄의 9월, 시부야의 한 스튜디오에서 앞뒤로 일정이 꽉 차 있는 그녀를 겨우 만날 때쯤엔 조금 심통스런 마음까지 되어버렸다. 어쩌랴, 원래 연예인들 관리가 쫀쫀할 정도로 엄격한 일본인데다 그녀는 가장 잘 나가는 이른바 ‘메이저’다. “자, 시작할까요?” 보통 사람들보다 1도 정도는 키가 높은 예의 그 가는 목소리로, 상냥하고 싹싹하게 말을 걸어왔다. 작품에 대해서는 신중하지만 정열적인,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선 예의바르지만 냉정한 대답이 돌아온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유명해졌고, 너무 이른 나이에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도 경험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데뷔한 이래 20년 넘게 톱으로 살아오며 그녀는 자신을 적절히 지키는 방법을 터득한 프로일 터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래가지곤 안 되겠다. 결국 내 멋대로 그녀를 뜯어보기로 한다. 그러니까 이건 도쿄에서 만난 미야자와의 이야기에 덧붙인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문이다. “새파란 하늘보다는 구름과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보다 쓸쓸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바닷가가 더 좋듯이, 50%는 표현해도 나머지 50%는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영화가 좋아요.” 일본에서 대배우로 성장한 아이돌 스타의 예가 없는 건 아니지만, 미야자와 리에에겐 뭔가 극적인 느낌이 있다.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기억을 저편으로 밀어내고 최근 몇년간 그녀는 일본 영화계에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1995년 텔레비전 드라마 <북의 나라에서>로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숲속의 요정 같던 18살 싱싱한 아이돌이 아니었다. 얼굴에 각이 드러나 퀭할 정도로 커보이는 눈, 바싹 말라버린 가슴의 그녀는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부유하는 공기처럼 보였다. 그뒤 연극 몇편에만 출연하던 미야자와는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찾게 된다. 1988년 10대 시절 <우리들의 7일간 전쟁>으로 신인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그녀가 화려하게 돌아온 건 2000년대다. 2002년 홍콩영화 <유원몽경>으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2002년 <황혼의 사무라이>, 2004년 <아버지와 산다면>으로 그녀는 각각 다음해 대부분의 영화상을 휩쓸었다. 지난해 연극 <투명인간의 증기>로 연극상과 문화청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예능인’으로 표창까지 받았다. 야마다 요지, 구로키 가즈오라는 노장들과의 작업에 이어 현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대극 <꽃보다도 더욱>을 막바지 촬영 중이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그녀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건, 가수활동이나 오락 프로그램 등을 쉴새없이 겸업하는 게 보통인 여느 연예인과 다른 그녀의 행보 때문이다. 텔레비전은 띄엄띄엄 특집드라마에 출연하는 정도이고, 그나마 방송 중인 몇편의 CF도 그녀의 ‘고급스런 이미지’를 해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고른 느낌이다. 서양계 아버지의 혈통을 느끼게 하는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졌음에도 일본인들은 그녀에게서 고전적인 일본 미녀 여배우를 연상한다. 특히 2년 전 시작한 한 녹차음료 광고는 ‘기모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예인’, ‘투명하고 깨끗한 이미지’라는 그녀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굳혔다. 결코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는, 구름 사이 보이는 새파란 하늘처럼.

어느 일본 여배우의 초상, 미야자와 리에 [2]

“인간에겐 희로애락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잖아요. <토니 타키타니>는 물건으로도 말로도 다 채워질 수 없는,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품이에요.” 이치카와 준 감독은 언제나 미야자와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은 감독이었다. “자기 신념이 강하고, 테마가 뚜렷하지만 영상이나 대사는 굉장히 절제하는 그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다만, 그때마다 “리에씨는 너무 메이저라 내 영화와 안 어울려”라는 반농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치카와 감독도 “먼 세계로 긴 여행을 떠나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두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옷을 걸치고 있”는 에이코의 모습을 미야자와 이외의 배우에게서 찾기는 힘들었다. 감독의 말에서 이치카와는 “막상 영상으로 옮기려 했을 때 하루키의 원작이 인물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하면 ‘얼굴’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소설에 흐르고 있는 투명감과 낮은 온도를 영상으로 옮기는 데 있어 미야자와 리에는 최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스크린 속 그녀의 핏기없는 얼굴과 휘어버릴 듯한 몸에선 고독의 유전자가 느껴진다. 그건 노력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타고난 도구다. 미야자와 또한 영화를 촬영하며 자기가 예상할 수 없었던 감정을 겪었다. 에이코와 같은 치수, 체격이라는 이유로 토니에게 채용된 히사코가 에이코의 옷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 우는 장면. 리허설 없이 단 한번에 촬영된 신이다. “촬영 직전까지 내가 어떤 감정에 휩싸일지 몰랐다. 안개 속에 쌓여 있는 기분이었다. 감독에게 일단 한번 카메라를 돌려봐달라고 부탁했다. 슛이 들어가자 갑자기 눈앞에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슬프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굉장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어요. 이런 얼굴도 있었구나, 하는. <아수라성의 눈동자> 같은 큰 규모의 상업영화에 출연했던 것도, <토니 타키타니>나 <아버지와 산다면>처럼 작은 영화를 한 끝이라 선택했던 거고요.”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최근 그녀의 작품들 가운데 상업적이거나 트렌디한 영화들은 드물다. 예상 밖 흥행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야마다 요지 감독의 <황혼의 사무라이>는 작가영화에 가까운 시대극이며, <토니 타키타니>와 <아버지와 산다면>은 작은 규모의 작품이다. “테마가 확실한 작품이면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반 정도는 결심해버리고 만다. 큰 작품에서 대규모 스탭들과 일하는 긴장감도 좋지만 작은 영화에서 팀워크가 딱 맞아 일하는 분위기를 너무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다른 얼굴을 끄집어내보인다. ‘투명함’이 그녀 이미지의 대명사처럼 되었지만, 실제 그녀들의 작품을 보면 단 하나도 똑같은 이미지는 없다. <아버지와 산다면>에서 첫 장면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 딸 미즈에가 환생한 아버지와 장 속에 꼭꼭 숨어 나누는 긴 대화로 시작한다. 방재 모자를 뒤집어쓰고 아버지와 얘기하는 미야자와는 순수한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다. <토니 타키타니>의 에이코는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상대를 고독으로 밀어넣는 팜므파탈이다. <아수라성의 눈동자>에선 아예 삼면의 얼굴을 가진 아수라가 된다. 커다란 스크린에 삼면의 얼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여배우는 그리 흔치 않다. “촬영 뒤 오케이 사인이 내려질 때의 해방감, 두려울 정도의 기쁨 같은 마음은 88년 영화에 데뷔할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다만 내 안의 허들이 자꾸 높아져감을 느껴요.” 하지만 이렇게 이미지로만 그녀를 바라려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사실 지독한 노력으로 답한다. <유원몽경> 출연 당시 중국 경극을 통째로 암기했다는 그녀는, <황혼의 사무라이>에선 “옷 매무새 하나, 바느질하는 모습 하나가 머리가 아니라 세포에서 나오도록 준비”했다. <아버지와 산다면>을 보노라면 그녀는 또 하나의 허들을 넘은 듯하다. “이렇게 감정의 구석구석까지 연기가 가능하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히로시마의 원폭자료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사진집을 보고 “전쟁과 핵문제를 내 인생의 테마로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녀는 올 가을 일본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특집드라마 <여자의 일대기>에서 실제 인물인 작가 세토우치 자쿠초를 연기한다. 학생 때 결혼, 불륜, 작가 활동, 51살 때 출가 등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여성이다.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들의 감정 폭은 자꾸 넓어져 간다. 미야자와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는 <바바파파>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기 몸을 의자로도, 물병으로도 만드는 그 프랑스 그림책 속 바바파파 말이다. “어렸을 땐 몸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게 재미있었지만 왜 이 나이가 되도록 좋을까 어느 날 생각해보니, 유연성이랄까, 몸을 변해가며 얻는 풍성한 감정이 좋더라.” 아직까진 무엇을 해도 ‘아름답다’라는 말을 듣는 그녀지만, 언젠가는 그 틀마저 스스로 부수는 연기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2살의 배우 미야자와 리에는 바바파파를 꿈꾸고 있었다. 미야자와 리에의 한국 미공개 최근작 3편 <황혼의 사무라이> 2002/ 감독 야마다 요지/ 출연 사나다 히로유키 일본의 시대소설 작가 후지사와 슈헤이 원작. <남자는 괴로워>의 노장 야마다 요지 감독의 건재를 알렸으며,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됐다. 막부 말기, 녹봉 50석으로 살아가는 야마가타현의 하급무사 이구치 세이베이는 늙고 병든 어머니와 두딸을 돌보느라 일만 끝나면 집으로 직행해 동료들로부터 ‘황혼의 세이베이’라 놀림받는다. 어느 날 그는 친구의 여동생이자 첫사랑이었던 도모에에게 행패를 부리는 난폭한 그녀의 남편을 말리다가 결투를 벌이게 된다. 이 결투를 통해 그의 귀신과 같은 칼솜씨가 소문나고, 절대 사람을 베지 않으려던 그는 번주로부터 자객의 임무를 명받게 된다. 할리우드영화의 폼나는 사무라이가 아니라, 사랑에 가슴 저려하고 힘겨운 삶에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급변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정중하게 그려진다. <아버지와 산다면> 2004/ 감독 구로키 가즈오/ 출연 하라다 요시오, 아사노 타다노부 동명의 연극이 원작. 구로키 가즈오 감독의 ‘전쟁 레퀴엠 삼부작’의 마지막 편인 이 묵직한 반전영화는, 핵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보편적으로 그려내는 데까지 이른다. 1948년 히로시마, 도서관에 근무하는 미즈에는 3년 전 원폭으로 사랑하는 친구와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은 상처 때문에 새로 다가온 사랑에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딸의 사랑을 맺어주기 위해 나타난 아버지가 딸의 곁에 머문 나흘간을, 마치 2인 무대극처럼 그려나간다. 아사노 타다노부는 거의 우정출연 수준의 비중. 보는 이가 숨찰 정도로 많은 양의 대사를 히로시마 방언으로 아름답게 소화해내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부녀의 모습을 멀리서 나직이 비춰주는 장면, 마지막 인물 위로 서서히 올라간 카메라에 나타나는 히로시마의 원폭 돔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수라성의 눈동자> 2005/ 감독 다키타 요지로/ 출연 이치가와 소메고로 동명의 무대극이 원작. <바람의 검 신선조> <음양사>의 다키타 요지로 감독, 일본 가부키의 인기 스타 이치가와 소메고로의 첫 영화 출연, 스팅의 노래 <마이 퍼니 밸런타인> 삽입 등 개봉 전 화제가 많았다. 초닌문화가 번성했던 19세기 초 에도, 인간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오니(귀신)들이 공공연히 활개치며 자신들의 왕 아수라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처치하는 결사대의 일원이었던 이즈모는 5년 전 무고한 소녀를 베었다는 상처에 결사대를 떠나 가부키 극단의 배우가 되어 있다.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도적 츠바키라는 여성과 사랑하게 되지만, 5년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은 츠바키는 몸에 이상한 문신이 점점 커져가며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빠른 이야기 전개와 가부키 무대의 매력, 데카당스한 배우들의 분위기가 돋보이는 오락영화. <음양사>보다 짜임새는 한수 위지만 흥행은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허진호의 <외출>

이미 허진호의 세 번째 영화 <외출>에 관한 아름다운 글은 김혜리가 썼다(“허진호의 멈추어선 느린 발걸음”, <씨네21> 제518호). 그 문장 가운데 “인수와 서영은 같은 흙탕물을 뒤집어쓴다. (중략) 둘은 극히 서먹하고 불편한 거리에 있는 동시에, 졸지에 서로에게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정직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인수와 서영은 단순하고 천진하게 성실한, 말하자면 같은 당파에 속하는 인간들이다. 자, 이제 남은 일은 등식의 한쪽 변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상한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라는 선언에 가까운 구절은 이 영화의 울림을 서늘하게 전한다. 특히 마지막 문장. 그런 다음 김소영은 이 영화의 장점에 대해서 충분히 따뜻하게 껴안았다(“그들이 외출해야 했던 이유”, <씨네21> 제520호). 그러므로 다행히도 나는 이 영화 전체를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만일 허진호의 영화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글들을 읽으면 된다. 나는 그 대신 그 글들에 기대어 두 장면에 관한 다소 긴 주석을 쓰려고 한다. 그 두 장면은 내용상으로는 그렇게 결정적인 대목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장면은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이상할 뿐만 아니라 무언가 영화 전체를 위협한다는 느낌이 있다. 나는 “이상한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이 영화에서 그 이상한 사랑의 잉여, 그 사랑의 이상함을 만들어내는 얼룩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런 다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관한 짧은 설명을 더 할 것이다. <외출>은 사랑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때 영화는 머뭇거린다. 나는 머뭇거리는 그 순간을 말하려는 것이다. 김혜리의 표현을 빌리면 ‘희미한’ 그 순간. 그가 혹은 우리가 그녀에게 듣고 싶은 말 (좀 장황하게 설명을 하자면) 두 장면 중 첫 번째 장면은 인수(배용준)가 아내의 자동차 사고 소식을 듣고 삼척에 있는 병원에 가서 병상에 일종의 코마 상태로 누워 있는 아내를 본 다음이다. 그런 다음 그 사고의 곁에 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남자도 중태에 빠져 있는데, 그 남자의 아내 서영(손예진)도 만난 다음이다. 둘은 같은 모텔에 머물게 되고, 하필이면 같은 층이다. 아마도 사고가 난 그 이튿날 혹은 그 다음날 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밤, 서영은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산다. 그 약국에 인수도 약을 사러 온다. 약을 먼저 사고 앞서 가던 서영이 모텔에 들어가려다가 그 문 앞에 서 있다. 인수는 모르는 척하고 들어가려고 한다. 그때 서영이 말한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러자 인수가 멈칫 선다. 서영은 “돌려드릴 것도 있고요,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인수가 대답한다. “문자 메시지를 봤습니다. 그쪽은요?” 서영이 대답한다. “저도 메시지를 봤어요, 그 사진기, 남편 게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우선 이 장면은 나눠 찍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서영이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말한 다음 숏을 나눈다. 물론 그걸 나눌 것인가, 말 것인가는 허진호의 마음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다음 왜 사운드를 그렇게 넣었을까, 라는 것이다. 서영이 말을 하는 장면은 모텔 문 바깥에서이다. 물론 카메라도 바깥에 있다. 그런 다음 숏을 바꿀 때 카메라는 모텔 문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런데 인수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서영이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하자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 멈춘다. 멈추자 문이 닫힌다. 문이 닫힌 다음 두 사람은 문 바깥에 머물면서 대사가 이어진다(투숏). 그때 카메라는 모텔 문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앞의 숏과 아무런 톤의 변화없이 진행된다. 더 이상한 것은 문이 닫혀 있는 저편의 빗줄기 소리까지 천연덕스럽게 들린다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 모텔의 문을 사이에 둔 대화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 문이 듣고 싶은 대사만 듣기 때문이다. 바로 그 다음날 같은 문 앞에 후배 광일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 인수가 “밥 먹으러 가자, 자고 갈 거야?”라고 묻자 광일이 “아뇨, 내일 공연이 있어서요”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인수는 문을 열고 광일과 함께 나서면서 “아, 그렇구나”라고 대답한다. 그때 카메라는 문 안에 있다. 그 둘은 문이 닫힌 다음 걸어가면서 무언가 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닫힌 문 때문에 더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서영이 한 그 말은 반드시 듣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모텔 안으로 들어와서 방문 앞에서 서영이 인수에게 카메라를 건네는 것이 보이고, 서영의 방 안에 들어가서 서로의 배우자의 휴대폰 문자를 보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음 신은 인수가 자신의 방 안에 들어와서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아내 수진과 서영의 남편 경호가 침대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숏이 뒤이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불가능한 목소리의 성립. 그 신의 대사 자체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문 앞에서 나눈 숏의 사운드는 문에 의해서 ‘구태여’ 그 대사의 디제시스에 어떤 주관성을, 내면화를, 착각을, 부정확성을, 무엇보다도 비현실성을 부여한다. 그 숏은 한신 안에서 객관적, 현실적, 실제적 장면을 보여준 다음, 갑자기 숏을 나누어서 뒤이어지는 대사에 의혹, 기대, 착각, 환청, 무엇보다도 모호함을 통해서 무언가 그 자연스러운 장면을 기괴하게 만든다. 이 숏은 갑자기 사실상 객관성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무나도 자명해 보이는 이 광경이 불현듯 서영이 이 말을 한다, 로부터 서영에게 이 말을 듣고 싶다, 로 바뀐다. 닫힌 문 저 너머에서 들리는 말, 문을 닫은 다음 귀기울이는 인수의 자리에서 들리는 서영의 대사. 그러니까 이 장면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서영은 틀림없이 인수를 불러 세웠다. 그런 다음 서영은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주관적 착각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차라리 그런 대사가 나오기를 기대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혹은 그렇게 들리기를 기대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기대하는 것, 그 기대 안에서 상상하는 것, 그것이 기대의 지평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라면, 그래서 문 바깥에 인수와 서영을 그대로 둔 채 문을 닫은 다음 서영의 말에 귀기울이는 인수의 그 청각의 자리에 우리를 가져다놓을 때, 우리가 그것을 듣는 데 성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밀의 공유, 고통의 공유 나는 이 장면과 마주하는 순간 즉시 그 바로 앞의 장면, 그러니까 모텔 복도에서 인수가 서영을 불러 세웠던 대목이 떠올랐다. 마치 반복 같은 두 장면. 그때는 인수가 서영을 불러 세웠다. 인수가 서영을 “잠깐만요”라고 불렀고 (그런 다음 똑같이 숏을 나누었다. 게다가 두 사람을 똑같이 180도 수평으로 마주보게 세워놓았다. 이 영화에 투숏은 많지만 두 사람을 수평으로 세워놓은 경우는 거의 없다) 서영이 “무슨 일이시죠?”라고 묻자 “남편 분이 출장 중이었던 것 맞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서영이 “네, 맞습니다”라고 하자 “제 아낸 휴가 중이었습니다. 저는 부업 때문에 같이 내려왔다고 말했습니다. 그쪽도 그렇게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한다. 이 말은 거짓말의 제안이다. 인수는 그런 요구를 할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요구가 아니라 제안이 맞다. 그 제안에 대해서 서영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 복도에서 인수는 거짓말을 제안하고, 그런 다음 모텔 문 앞에서 서영은 인수에게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인 사진기를 돌려주어서 진실을 직면하게 만든다. 만일 진실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실재의 지식을 (그 둘 사이에서만) 결국 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 두 장면은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행동이다. 복도에서 인수가 거짓말을 제안했을 때 서영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거짓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약속을 통해서 비밀을 함께 감추는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함께, 에 있다. 그런 다음 모텔 문 앞에서 사진기를 건네주겠다고 제안할 때, (마찬가지로 서영이 인수에게 그것을 건네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감정적 고통의 대상과 함께 마주하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방점은 함께, 에 있다. 그런데 복도에서 그들이 사진기를 건네주고 건네받을 때 그들은 배신을 당한, 그동안 속은, 알지 못했던 배우자의 불륜에 관한 실재의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알았다는 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에 있다. 혹은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것이다. 알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의 배우자의 불륜 상대가 그들의 부부 생활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침입했다는 뜻이며,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부부 생활이 세 사람이 함께 살아왔다는 그 잉여의 부분이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인수와 서영은 서로의 상대방에게 고통에 직면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위로이다.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고통을 공유한 다음 고통을 전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 안에서 그 문제의 각자의 답을 찾는 대신 (왜 내 아내는, 내 남편은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는가? 나의 아내, 나의 남편은 저 남자, 저 여자에게서 나보다 더 나은 그 무엇을 찾았는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그들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불륜의 선택, 그 음란함과 부끄러움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수와 서영의 불륜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결과적으로 수진과 경호의 불륜은 인수와 서영의 알리바이이다. 인수와 서영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덜 자유롭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그들이 각자 서로의 배우자의 불륜을 알게 된 다음 인수와 서영이 만들어내는 불륜이 자신의 배우자인 수진과 경호의 불륜보다 더 음란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인수와 서영은 사실상 수진과 경호의 불륜의 형식에는 관심이 많지만 그 내용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그 두 사람은 정말 사랑한 것일까? 그러하면 나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두 사람은 수진과 경호를 매개로 하여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장면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처음 이 장면을 볼 때는 그냥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갑자기 이 숏이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고통 속에 숨어 있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음란함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 것은 그 목소리의 잉여, 그 고통스러운 목소리의 이면에 지금부터 시작될 불륜의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그렇다. 드러난 것으로부터 숨겨진 것으로의 후퇴, 객관적 현실로부터 주관적 상황으로의 이행에 끼어든 그 어떤 중재, 무언가 숨기고 싶은 베일의 (외설스러운) 요구. 이미 닫혀버렸지만 투명한 유리문. 아무리 달리 말해도 이 영화는 불륜에 관한 영화이다. 불륜에 대한 불륜이란 없다. 그 실재의 지식을 마주하기 위해서 사진기를 돌려주어야 할 때, 그것을 건네주기 위해 서영이 인수를 불러 세운 다음, 그 대사를 할 때, 그 숏은 불가능한 장면이 된다. 그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설명하기 위해서 숏은 객관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숏은 어딘가 비밀스럽고, 그 안에 무언가를 숨기고 싶은, 남이 들어서는 안 되는, 모호한 주관성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 실재의 지식은 그들만의 것이 된다. 그러고 나면 이 영화는 갑자기 그 자신의 은밀한 구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인 순간. 인수와 서영이 술을 마시다가 서영이 인수에게 물어본다. “언제가 제일 행복하세요?” 인수가 대답한다. “음, 잠잘 때.” 그러자 서영도 자문자답한다. “저두요.” 두 사람은 지금 병원에 불륜에 빠졌다가 사고를 당한 자신의 아내, 혹은 남편을 곁에 두고 온 그 남편과 아내로 만나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 대답은 외설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잠을 잘 때 가장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나는 그 대답이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핵심은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어느 쪽이건 사실상 그것은 같은 내용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약간의 우회. 부부는 잠을 잘 때만 그 혼자가 된다. 어디서? 꿈속에서, 혹은 밤의 무의식 안에서. 잠자리에서 그 두 사람은 배우자를 곁에 두고 거기서 도망쳐나올 때 행복해진다. 그것도 ‘제일’ 행복해진다. 진실이라면 그 두 사람은 밤마다 아내에게서, 혹은 남편에게서 도망치는 중이며, 거짓이라면 서로가 서로의 배우자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고백하는 중이다. 나는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 영화가 슬픔이나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 짧은 사랑, 혹은 (이루어진 불륜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불륜이 아니라 매우 음란한 상상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출>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이상하게도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인수의 주관적인 태도에 의지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 주관적 사운드와 프레임의 은밀한 메시지. 인수가 서영을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대신 그 자신은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면서 그 마음 안에서 자기를 유혹해달라고 은밀하게 욕망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수동적인 자리에 머물면서 유혹하는 행위, 혹은 요구하지 않는 욕망. 이를테면 두 사람이 처음으로 그들 사이의 대화를 시작하는 장면의 첫숏. 인수는 눈 내린 주차장에서 눈을 뭉쳐 던지고 있다. 서영은 텔레비전을 끄고 난 다음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창문을 내다본다. 그걸 내려다보면서 서영은 처음 웃는다. 그때 이 장면은 투숏으로 찍혔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한 까닭은 서영의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 우리가 보는 것은 유리창에 비친 서영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화면에서 인수가 창문 아래 ‘함께’ 보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는 이 장면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찍혔다. 누가 누구를 보는가? 다시 한번 김혜리의 문장을 빌리면 이 사랑은 ‘희미하게’ 시작된다. 지적할 만한 점. 내려다보기 전 서영이 방 안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이러저리 돌리다가 끌 때 우리는 (성인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두 남녀의 음란한 신음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배우자를 매개하지 않고 그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는 첫 번째 신에서 서영의 방에 놓인 텔레비전으로부터 섹스소리를 듣는 것은 내게 사실상 그들이 아무리 스스로에게는 그들 자신의 만남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도 그래봐야 결국에는 고스란히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그 배우자들의 역겨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예고편처럼 절망적으로 들렸다(그 수많은 채널 중에서 허진호는 그 순간 그 채널을 선택했다). 그때 인수는 차 안에서 “슬픔은 모두 버려, 인생은 아름다워, 슬픔은 모두 버려”라고 있는 힘을 다해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른다. 인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렇게 큰소리로 말한 적이 없다. 이 장면을 정확하게 복기하면 인수가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 다음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끄는 서영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눈을 던지고, 그걸 서영이 내려다본다. 그러니까 이 신은 인수가 모두 버리라고 호소한 다음, 마치 거기에 호응하듯이 서영이 반응한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 그 호소와 대답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앞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모호한 나눠찍기의 진실 그 다음 (첫 번째 장면에 연관지어서) 두 번째 장면. <외출>에서 내 생각에 인수와 서영이 횟집에 앉아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에서 허진호는 필요 이상으로 장면을 나눈다. 허진호가 그의 두편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가 180숏 내외로 찍었고, <외출>이 321숏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신의 숏 나누기는 더 눈길을 끈다. 이 술집 대목은 단 하나의 신을 29숏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영화는 말 그대로 그들의 표정, 얼굴,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대사를 따라가면서 (처음에는 팬을 한 다음) 숏을 나눈다. 나는 허진호의 바람대로 대사에 집중했다. 그때 서영이 인수에게 묻는다. “깨어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러자 인수가 대답한다. “복수하려구요.” 그러자 서영이 말한다. “우리 사귈래요?” 그 말을 듣고 인수가 서영을 본다. 그때 서영이 대답한다. “둘이 기절하게.” 만일 이 대화가 두 사람의 진심을 말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두 사람의 비극, 혹은 <외출>이 지닌 비극성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이 두개의 대사를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한 말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래서 여기서 그들은 자기의 주관적 선택의 자리에 상대방을 가져다놓고 서로 다른 내용의 동일한 형식으로서의 불륜을 행동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인수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 서영과 사귄 것이고, 서영은 인수와 사귀고 싶었던 것으로도 그 대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같은 것이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의 의도는 정반대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인수가 복수를 할 때 그의 목표는 서영이 아니라 지금 병석에 누운 아내 수진이다. 그러나 사귀려는 서영의 의도는 사랑의 대상을 남편 경호에서 (남편 경호를 사랑한 수진의 남편) 인수로 옮겨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호한 나눠찍기의 순간이 두번 있다. 한번은 서영이 “일단 깨어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할 때이고, 다음 한번은 서영이 “우리 사귈래요?”라고 말한 다음 “둘이 기절하게”라는 덧붙일 때이다. 그때 대사를 따라가면서 나누던 숏이 갑자기 카메라는 인수쪽을 바라보고 있고 서영은 프레임 바깥에서 말한다. 그때 인수가 그 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그 말을 하는 서영의 표정을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표정이? 왜 그것이 보여지지 않는 것이 중요해진 것일까? 그 대답은 한참 뒤에야 알 수 있다. 이 나눠찍기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정확하게 인수의 태도와 그의 아내 수진의 운명으로 반복된다. 인수의 아내 수진이 깨어난 다음 병실에 누워서 곁에 앉아 참외를 깎고 있는 인수에게 묻는다. “인수씨, 나에게 궁금한 거 없어? 언제까지 안 물어볼 거야?” 인수는 그냥 담담하게 대답한다. “처음엔 궁금한 게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졌어… 수진아, 그 사람 죽었어.” 그런 다음 인수는 병실에서 나온다. 좀더 정확하게 거기서 숏을 나누었다. 그 말에 대한 수진의 상대 숏은 없고, 카메라는 병실 문 바깥으로 나온 인수를 보여준다. 그때 인수는 수진의 표정을 보지 않는다. 혹은 인수는 수진의 표정에 관심이 없다. 그냥 병실 바깥에서 수진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물론 그 울음은 인수가 서영에게 말한 복수에 대한 수진의 응답이다. 그것을 복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숏 이후 수진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수진에게 인수가 한 마지막 대사는 “그 사람 죽었어”라는 말이다. 인수는 그 말을 하기 위해 기다린 것이다. 잔인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숏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인수와 서영의 셈치르기 그런 다음 나는 문득 인수와 서영의 마지막 대사가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라고 생각해보니 서영의 마지막 대사는 서영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한참을 더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같은 말이지만 서영은 남편 경호가 죽은 다음에도 한참을 더 나온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입을 봉한 것처럼, 말을 잊은 것처럼, 아니 차라리 말하는 것이 금지된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혹은 못한다. 만일 좀더 기억을 환기한다면 서영이 영화에서 한 첫 번째 대사는 인수에게 했다는 사실이 떠오를 것이다). 서영의 마지막 대사는 인수와 나눈 한마디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화장면은 좀 이상하지만 의미심장하다(게다가 카메라는 그때 멀리 떨어져 있다). 서영이 인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침대에서 고스톱을 치다가) “진짜요? 다시 계산해보세요”이다(마지막 장면, 눈 내리는 자동차 안에서 들리는 건 서영의 목소리의 보이스 오버뿐라는 것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게 서로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 줄 그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서영과 인수의 만남의 장부에 대해서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질문이다. 매우 치사한 셈이긴 하지만 계산을 해야 한다면 인수는 이 외출의 대차대조표에서 유일하게 거의 모든 것을 얻었다. 그는 아내 수진에게 복수를 했고, 그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남자는 죽었고, 그는 그 남자의 아내 서영과 섹스를 했다. 그런데 그는 행복하지 않다. 서영은 반문한다. “진짜요? 다시 계산해보세요.” 인수의 계산은 어디서 틀린 것일까? 서영이 인수의 계산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말은 무시무시하게 집행된다. 영화는 갑자기 이 대사가 나온 다음,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정확하게 셈을 치르기 시작한다. 서영이 인수와 호텔 방에 있는 동안 그의 남편은 15시23분에 죽는다. 서영은 호텔에서 인수와 함께 있으면서 간병인 아줌마에게 “내일 아침 일찍 들어갈게요, 부탁 좀 드릴게요”라고 말했지만 아침에 가지 않았다. 서영은 전화를 받고서 오후 늦게 남편이 죽은 다음에야 병원에 도착한다. 인수가 서영을 다시 만나는 것은 장례식장에서이다. 인수는 분향을 한 다음 서영에게 아무 말 없이 인사를 한다. 이때 다시 한번 서영과 인수를 수평 투숏으로 찍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서영과 인수 사이에 서영의 죽은 남편 경호의 영정 사진을 세워놓았다. 그래서 인수가 고개를 숙여 서영에게 인사할 때 인수는 정확하게 그녀의 남편 경호의 사진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인수는 그걸 알지 못한다. 물론 서영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때 인수는 서영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지만, 서영은 인수와 그의 남편 경호에게 인사하는 것이다. 서영은 여기서 끝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서영은 자기의 외출이 소망을 이루기는 했지만 반대의 방식으로 집행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사귈래요?”라는 말이 남편의 자리에 (남편과 사귄 여자의 남편) 인수를 가져다놓는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남편이 죽었을 때 그 자리는 폐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인수는 나가야 한다. 두 사람이 거기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장소를 찾은 것이다. 불길한 엔딩의 예감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에필로그가 더해져 있다. (‘아마도’ 아내와 헤어지고) 이사 간 인수의 아파트 방이 보이고, 인수는 짐더미 속에서 자장면을 먹는다. 그런 다음 야외무대 공연장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인수와 그 곁에 앉은 후배 광일이 보인다. 그런데 공연이 끝난 다음 봄날의 늦은 밤에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누구라도 여기서 인수와 서영이 삼척의 해변을 걸으면서 한 대사가 떠오를 것이다. 인수의 질문, “어떤 계절 좋아해요?” “봄이요, 인수씨는요?” “전 겨울을 좋아해요” “저두 눈은 좋아해요”. 그러자 인수가 대답한다. “봄에 눈이 내려야겠네요.” 봄에 눈이 내리는 것은 서영의 소망이 아니라 인수의 욕망이다. 그리고 정말 봄에 눈이 내린다. 그 다음 장면에서 눈 내리는 차창 바깥이 보이고 달려가는 차 안에서 “춘분을 훨씬 넘긴 절기가 무색하게 함박눈이 쉴새없이 쏟아집니다”라는 뉴스 소리에 뒤이어 두 사람, 서영이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라고 묻자 인수가 “어디로 갈까요?”라는 대답을 두 사람이 다시 만난 해피엔딩으로 보는 것은 가장 진부한 설명일 것이다. 나는 반대로 이것이 불길한 엔딩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 반복해보자. 공연이 끝난 무대 위로 눈이 내리자 인수는 그 눈을 본다. 그런 다음 숏은 창문 바깥에 눈을 바라보는 서영의 숏이다. 그런데 그 숏은 서영을 찍은 것이 아니라 서영의 얼굴이 비치는 유리 창문을 찍었다. 그 장면은 눈 그친 그날 밤, 삼척에서 눈을 뭉쳐 던지고 있던 인수를 바라보던 그 유리 창문에 비친 서영의 반복이다. 그때 나에게 서영은 이상할 정도로 인수의 환상처럼 보였다. 아니, 차라리 욕망의 대상처럼 보였다. 인수는 봄날에 눈이 내리자 즉각적으로 서영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계절에 관한 그 대화를 나눈 그 해변가 장면, 바로 직전의 신은 두 사람의 섹스장면이었다. 그러므로 이 눈이 인수에게 불러일으킨 것은 서영과의 섹스이다. 그러나 섹스가 떠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회하여) 계절이 떠오른 것은 인수의 부끄러움이다. 비 오는 날 밤, 모텔 앞에서의 문으로 전이된 부끄러움의 알레고리. 그런 다음 숏은 조명기 앞에 떨어지는 눈이고, 그때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인수가 서영에게 한 전화라고? 그렇게 생각하기엔 납득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 하나는 창문 앞에서 눈을 바라보는 서영의 숏 다음 다시 눈을 보는 인수의 숏이 있다. 여기서 전화를 꺼내들고 번호를 누르면 된다. 혹은 전화를 꺼내들면 된다. 그런데 그냥 눈을 보는 인수를 찍었다. 그런 다음 조명기의 숏. 전화벨 소리는 조명기에 덧붙여졌다. 말하자면 여기서도 구태여 숏을 나누었고, 전화벨 소리는 인수가 아니라 조명기를 따라간다. 그 다음. 나는 그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이 영화가 검은 페이드 화면 위에 들리는 전화벨 소리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그것은 불길함의 기호이다. 혹은 욕망의 소리이다. 모든 전화벨 소리는 사실 욕망의 호소이다. 누구의 전화일까? 누구이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그 전화를 받으면서 무슨 말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것이 누구의 전화인지, 무슨 말일지 알기 전의 나를 부르는 호명에 대한 대답 직전. 이미 예정된 결과에 대한 질문, 혹은 나를 부르는 당신 안의 나. 그런데 핵심적인 질문은 그 전화를 한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것은 인수인가, 서영인가? 허진호는 의도적으로 전화를 받기 전에, 여기에 목소리가 개입하기 전에 눈 내리는 화단에 피어난 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대답이 아니다. 그것은 대답의 무한정한 지연이다. 그런 다음 달리는 차 안에서 눈 내리는 차창을 보여주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핵심은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때 서영이 묻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인수가 대답한다. “어디로 갈까요?” 물론 이것은 대답이 아니다. 차라리 반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을 이미 들은 적이 있다. 저 뜬금없는 장면, 삼척 교외버스 터미널에서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서영에게 낯선 군인이 다가와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물었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황량한 질문이다. 지금 이 두 사람은 정확하게 그 자리에 가 있다. 그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미 막차는 떠났고, 그런 다음 그 한 사람은 (카페에 앉아 몰래) 쳐다보고 다른 사람은 그 순간 자기 곁에 없는 상대를 위해서 서럽게 (이 영화에서 단 한번) 운다. 그런 다음 다시 반복되는 이 마지막 장면은 무엇보다도 불길하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무표정한 목소리만이 거기 남아 있을 때, 내가 그들의 표정을 보지 못할 때, 나는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 수 없다. 정말 그들이 함께 떠나는 것이라면 그들은 가장 나쁜 선택을 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추억에 의지하지 않고 그래서 결혼을 한다면, 그들이 이제까지의 과정을 배우자의 자리에서 반복하지 않는다는 그 어떤 보장이 있는가? 그래서 인수와 서영이 또다시 그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그 어떤 믿음이 가능한가? 그것은 추억을 배신하는 것이며, 비로소 그들이 실재와 마주하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윤리적 선택을 포기했고, 그래서 그들은 도덕적 주체로 행동하는 대신 정념적 주체의 자리에서 그 자신들을 정당화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두 번째 섹스가 끝난 다음 바다를 보면서 서영이 “우리 미쳤나봐요”라고 한 말에 인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수는 “우리가 나중에, 아니면 아주 전에 만났으면 어땠을까요?”라고 묻는다. 서영은 대답 대신 반문한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더 나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덜 나쁜 선택은 하나뿐이다. 미루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그들의 자유이다.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는 정확하게 그 지점에 있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그 자유를 즐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대신 나는 인수와 서영에게 질문한다. 당신들의 진정한 선택은 무엇입니까? 혹시 당신들에게 그 선택이라는 내기의 기회 자체가 기만은 아닙니까? 당신들이 사랑 뒤에 숨으려는 그 눈물은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것입니까? 욕망을 위해서, 아니면 환상을 위해서?

[단신] 부산영상센터 '두레라움' 건립기념식外

부산영상센터‘두레라움’내일 건립기념식 2008년 완공 예정인 부산영상센터가 이름을 ‘두레라움’으로 확정하고 10월7일 건립기념식을 연다. 두레라움에는 200~1200석 규모의 상영관 6개와 영상문화관, 시청각실, 전시장, 시네마테크 등이 들어설 예정. 건축설계는 7명의 해외건축가들을 초대하여 공모하며, 영화제 기간 내내 해운대 PIFF 파빌리온존 내 10주년 특별전시관에 전시되는 공모작 중에서, 폐막일인 14일에 당선작이 발표될 예정이다. 두레라움 건설은 전용극장이 없어 어려움을 겪어온 부산영화제의 숙원 사업이기도 하다. 순 우리말인 두레라움은 ‘(다)함께 (영화를) 즐기는 것’이라는 의미. 밤에는 파티를 즐기세요 부산의 밤은 파티의 연속이다. 장동건과 이정재가 출연하는 대작 <태풍>은 10일 그랜드호텔에서 ‘태풍의 밤’을 열고, 마침내 12월 개봉을 눈앞에 둔 <청연>은 PPP 폐막과 발맞추어 웨스틴 조선호텔에 ‘청연의 밤’을 준비했다. 이밖에도 영화 <연애>와 <야수> <데이지>, 영화사 쇼이스트와 MK 픽처스 등이 부산을 찾은 손님들을 파티에 초대할 예정이다. 함께 KTX타고 싸게 갑니다 KTX가 보편화되면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이 동반승객을 구하는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나고 있다. KTX열차 가운데 위치한, 마주보고 있어 다른 좌석보다 다소 좁은 4석을 성인요금 기준 37.5% 할인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한꺼번에 사야 하기 때문에 2~3명 짝지어온 관객들이 인터넷에 “함께 할인받아 부산가요!” 등의 글을 올리고 있는 것. 절약한 돈으로 영화 한 편이라도 더 보고 싶은 관객은 부산국제영화제 자유게시판에 들러보도록 하자. 외국언론들 부산 취재 열기 영화제 개막을 하루 앞둔 부산이 외신들의 취재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다. 세계 3대 영화 업계지인 <스크린 인터내셔널>, <버라이어티>와 <헐리우드 리포터>는 영화제 기간동안 부산국제영화제 특집호를 발간할 예정이며, <스크린 인터내셔널>은 최근 발행호의 라는 기사를 통해 주요 작품들의 프리뷰를 포함한 전반적인 영화제 모습을 소개했다. 프랑스의 아르테 TV와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AZN 텔레비전에서도 대규모 취재진을 특파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아시아 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아시아 무비위크>는 영화제를 맞이하여 창간호를 발행할 예정. 가장 대규모 취재단을 보낼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일본과 중국의 매체들. 중국국립영화채널 CCTV 6와 NHK를 비롯한 두 나라의 주요 언론매체들은 한류열풍을 등에 업고 속속들이 부산항에 상륙하는 중이다.

문제없는 부부없고 비밀없는 집안없다, <위기의 주부들>

한국방송 2텔레비전(매주 일요일 밤 11시15분)과 케이블 텔레비전 오시엔(매주 월~목요일 오전 11시)에서 방영 중인 <위기의 주부들> 시즌1이 종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가운데 인기몰이가 한창이다. 한국방송의 경우 첫 방송 때 5%대 시청률로 시작해 7.5%까지 시청률이 올랐다가 5~6%대를 유지하고 있다. 일요일 밤 11~1시인 방송시간대를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한 수치다. 평범한 주부들의 은밀한 일탈 촌철살인 대사에 뛰어난 연출 로라 부시가 왜 밤 9시면 TV 앞에 앉았는지 알겠다 <위기의 주부들> 시즌1은 평범해 보이지만 각자 개성과 환경이 다른 주부 4명이 친구의 자살을 접한 뒤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살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바람난 남편과 이혼한 뒤 새로운 사랑을 갈구하는 수전, 대기업 간부로 유능한 커리어우먼이었으나 별난 세 아들과 갓난아기를 키우느라 매일 허덕이는 리네트, 완벽에 가까운 ‘살림왕’이지만 그 완벽주의 때문에 가족들을 숨막히게 하는 브리, 부와 잘 생긴 남편 등 원하는 것을 모두 갖고도 어린 정원사와 바람을 피는 전직 모델 가브리엘이 주인공이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부인 로라가 “남편은 밤 9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고, 나는 혼자 ‘위기의 주부들’을 틀어요.”라는 말로 유명세를 탔던 이 드라마는 탄탄한 스토리에 정곡을 찌르는 톡톡 튀는 대사,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 세련된 영상 등 인기를 누릴 수밖에 없는 요소를 두루 갖췄다. 특히 전형적인 미국 중상류층 40대 주부들인 주인공들이 겪는 일탈과 비밀스런 사생활에 얽힌 이야기는, 주시청자층인 주부들에게 공감과 함께 대리만족을 줌으로써 가장 큰 인기 요인이 되고 있다. 넷이나 되는 자녀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리네트가 피임을 하지 않으려는 남편에게 주먹을 날리고, 가브리엘이 미성년자인 정원사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 등은 가사와 육아에 시달리는 주부들에게 공감을 주고, 실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마음 속에 품어봄직한 일탈의 욕구를 대리충족시킨다. 시청자들은 또 매너좋은 브리의 남편이 사실은 ‘피학대 성욕주의자’라거나 리네트의 남편이 함께 사는 젊은 보모에게 은근히 호감을 품는 등 별 문제없어 보이는 부부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문제나 비밀이 있다는 점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 드라마의 작가 마크 체리는 2002년 다섯 자녀를 욕조에 익사시켜 살해한 ‘안드레아 예이츠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이 드라마를 썼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와 함께 뉴스에서 이 사건을 접한 마크 체리는 어머니에게 “자식들을 죽일 만큼 자포자기에 빠진 여성을 상상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어머니가 자신도 그런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완벽한 주부이자 어머니로만 알았던 그는 충격과 함께, 세상의 주부들이 저마다 절박함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히치콕 스타일의 이 코믹 스릴러 드라마는 요소요소에 배치된 코믹한 설정과 진행될수록 깊어지는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또한 매력적이다. 에피소드마다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며 서스펜스와 스릴을 증폭시켜 재미를 더해준다. 이혼녀 수잔이 매력적인 배관공 마이크에게 끌리는 속마음을 드러내면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마이크의 미스터리한 모습을 보여줘 반드시 다음 회를 보게 만드는 식이다. 극중 출연자들이 죄를 숨기려다 또다른 죄를 짓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죄의 연결고리에 얽혀든다. 그래서 <위기의 주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서로 숨기고 캐내는 비밀들로 인해 이야기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서스펜스가 쉴새없이 이어진다. 오프닝과 클로징 등에서 죽은 사람을 화자로 내세운 독특한 내레이션도 시청자를 드라마에 몰입시키는 좋은 장치이다. 이 작품은 방송 첫 회에 자살한 메리 앨리스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됨에도 분위기가 전혀 공포스럽거나 슬프지 않다. 오히려 미스터리를 은근히 암시하는가 하면, 겉과 속이 다른 우리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면들을 초월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인생사에 교훈을 준다. 내레이션을 들으며 시청자들은 좋은 부모의 구실이나 바람직한 이웃과의 관계 등 인생살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히든> 충격요법과 해석의 덫

감독 미카엘 하네케/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2005년/ 99분/ 월드시네마 사소해 보이는 기류가 어느 순간 목숨을 위협하는 거대 인과로 변화하는 이야기 속에서 미카엘 하네케는 게임을 제의하고, 충격 요법을 사용하고, 또 해석의 덫을 놓는다. <히든>의 경우 그 작동 구조는 ‘시선’에 있다. <히든>은 윤리에 대한 내기임을 드러낸다. 별다를 것 없는 어느 하루의 평온한 일과적 풍경으로 시작하여 순식간에 끔찍한 인류의 절멸로 영화를 끝내 버릴 수도 있는 감독이 <히든>의 미카엘 하네케다. 사소해 보이는 기류가 어느 순간 목숨을 위협하는 거대 인과로 변화하는 이야기 속에서 미카엘 하네케는 게임을 제의하고, 충격 요법을 사용하고, 또 해석의 덫을 놓는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는 언제나 빙산의 일각을 보는 것에서 빙산을 보는 것으로 옮겨 가도록 요구한다. <히든>의 경우 그 작동 구조는 ‘시선’에 있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면 프랑스 어느 중산층의 집 앞 풍경이 한참동안이나 보인다. 그러고 나면 그 화면 바깥에서 인물들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온다. 이것은 관객이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이 보고 있던 화면을 관객이 따라 보는 것이었다는 것이 그때서야 밝혀진다. 텔레비전 문학프로그램 사회를 맡고 있는 조르주 부부는 이후 반복적으로 이 테이프를 받는다. 누가 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화면은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며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러다 조르주는 별안간 어린시절 자신이 모함해서 쫓아낸 알제리인 입양아 마지드가 뒤늦게 복수극을 펼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들이 하루동안 실종되자 서슴없이 마지드 부자를 경찰서에 처넣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드는 ‘목숨을 걸고’ 맹세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히든>은 마지드의 그 맹세를 증명하는 충격 요법으로서의 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이것이 윤리에 대한 한 내기임을 드러낸다.

웨인스타인 형제의 야심찬 첫 발

웨인스타인 형제가 디즈니와 공식 결별을 선언했다. 디즈니의 계열사인 미라맥스 사장 자리를 떠나 새 회사 웨인스타인 컴퍼니(TWC)를 설립한 것. 올해 칸영화제를 방문했던 웨인스타인 형제는 10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받아 10월 중 새 미디어 그룹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웨인스타인 컴퍼니는 이미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사 ‘TF1’을 비롯하여 18개 투자사로부터 2억3050만달러를 끌어모은 상태다.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현재 협상 중인 투자자까지 포함할 경우 다음주에는 4억2천만달러 정도의 설립금이 모일 예정이다. 웨인스타인 컴퍼니의 야심찬 출발은 2주 전 실린 ‘뉴욕타임스’ 주말판 두 페이지 광고를 통해서도 한눈에 알 수 있다. 맨해튼의 도심 풍경을 배경으로 왼쪽에는 “특별했던 시기의 끝”이라는 제목하에 미라맥스 시절 그들이 제작했던 100편의 영화, 249개의 오스카 노미네이션과 60여개의 수상 목록을 나열하고 있고, 오른편에는 “그리고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라는 제호 아래 웨인스타인 컴퍼니가 현재 준비 중인 작품들을 길게 열거하고 있다. 하비 웨인스타인은 “11월11일 개봉할 미카엘 하프스트룀의 <디레일드>가 첫 번째 영화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뒤를 이어 리처드 셰퍼드의 <마타도르>, 로렌스 둔모어의 <더 리버틴>, 첸카이거의 <무극>, 앤서니 밍겔라의 <브레이킹&엔터링>, 쿠엔틴 타란티노의 <그린드 하우스>, 케빈 스미스의 <패션 오브 더 클락> 등이 대기 중이다. 웨인스타인 컴퍼니는 전 포커스 피처스의 전무이사였던 글렌 바스너를 인터내셔널 부문 배급 및 세일즈 사장으로 영입한 뒤, 올 11월 열리는 아메리칸필름마켓(AFM)에서의 선전을 겨냥하고 있다. 이 밖에도 IFC, AMC, WE 등의 회사와 제휴하여 케이블 네트워크를 맺어가고 있다. 반면 디즈니는 웨인스타인 형제가 떠난 미라맥스의 세를 다소 축소하여 운영할 방침이다. 미라맥스의 새로운 사장 대니얼 바섹은 대규모 경영보다는 가능성 있는 소규모 인디펜던트영화에 초점을 맞췄던 초창기 스타일로 돌아가 회사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1년 예산도 웨인스타인 형제가 운영하던 때의 절반 정도인 3억5천만달러로 낮췄다. 이제는 더이상 <갱스 오브 뉴욕> <콜드 마운틴> <에비에이터> 같은 1억달러짜리 모험을 감행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니얼 바섹은 토론토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하트 오브 더 게임>을 100만달러에 구입하는 등 그 실질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외신기자클럽] 표준화된 영어 제목이 필요하다 (+영어 원문)

한국영화가 국제시장에 개봉될 때, 영어 제목은 누가 붙이는가?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실제로 마지막 결정은 국제 세일즈사가 하게 된다. 그들이 선택하는 제목은 영화제 상영이나 영어권 국가에서의 일반개봉 때 사용된다. (지역 배급업자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정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북미 개봉 때 <친절한 금자씨>의 영어 제목은 에서 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수많은 과거의 한국 고전영화와 같이 국제 세일즈사가 없는 영화들은 어떤 실정인가? 신상옥 감독의 고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를 살펴보자. 한국영상자료원의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는 로 되어 있다. 2001년 부산영화제에 상영될 때는 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200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있었던 신상옥 회고전 상영에서는 라고 제목이 붙었다. 한편 이번 봄학기 하버드대 강의에서 이 영화를 가르칠 때는 라는 제목이 사용됐다. “Shin Sang-ok”으로 구글 검색을 해보면 같은 제목이 뜬다. 신상옥 감독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감독이 어머니와 숙박객에 관한 영화를 한편이 아니라 연작을 만들었다고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혼동은 다른 영화에서도 발생한다. <자유부인>(1956)이 전형적인 예다(? ? ?). 영화사 학생에게 두통을 안겨주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표준화된 제목이 없어서 일어나는 또 다른 문제들이 있다. 최근 한 영화학자는 1980년대 호주 텔레비전에 방송됐던 한국영화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음에도, 영어 제목으로는 어떤 영화인지를 알아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나 인터넷 검색의 문제들이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영어로 풍부한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로, 실로 놀라울 정도의 리소스를 만들어냈지만 영어로 검색할 땐 무언가를 찾아낸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본인이 아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곧 포기하고 만다. 이런 문제들은, 중국과 같은 나라에선 학교에서 배우는 표준화된 로마자 표기법인 병음 체계가 있는 반면, 한국어 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데 있어서 폭넓게 동의를 이룬 체계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더 악화되어 나타난다. 한국 밖의 학계는 한 체계를 사용하고, 한국 정부는(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또 다른 체계를 사용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로마자 표기를 하곤 한다. 그래서 로마자로 표기된 한국어 제목을 갖고 온라인 정보검색을 하는 것 역시 가망없는 일이다. 복수 제목의 문제는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중국, 프랑스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이런 문제에 종종 부딪히게 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중앙의 공식적인 영어 제목 리스트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분야에서든 표준을 세우려면 폭넓은 협조와 정치적 감수성과 잘된 홍보가 필요하지만, 한국영화를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한국과 외국의 영화학과 교수, 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사학자, 비평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완전한 목록을 갖고,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문법적으로 올바른 영어 제목을 만든다고 상상해보자(만약 1919에서 2000년 사이에 제작된 5천편 이상 되는 모든 영화를 하기 힘들다면, 적어도 선별작업을 통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모든 제목이 들어간 단순한 엑셀파일을 영진위와 영상자료원 웹사이트에 올리고, 앞으로 참조할 수 있게 전세계 영화제나 대학에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런 목록이 있다면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혼동의 수준을 굉장히 많이 낮출 수 있을 것이다. When a Korean film is released into international markets, who gets to choose the English title? For all practical purposes, it is usually the international sales company that has the final say. The title they choose is then used for festival screenings and its commercial release in English-speaking countries. (Unless a local distributor decides to change it ? the English title of <친절한 금자씨> will be changed from Sympathy for Lady Vengeance to Lady Vengeance for its North American release) But what about films with no international sales company, such as the many classic films from Korea's past? Let's consider Shin Sang-ok's classic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 The Korean Film Archive's online database refers to the film as Mother and a Guest. When PIFF screened the film in 2001, it used the title Mother and a Guest in the Master's Room. When a retrospective of Shin's films screened at the MOMA in New York in 2002, the title was My Mother and Her Guest. When the film was taught in a course at Harvard this spring, the title The Houseguest and My Mother was used. A Google search for "Shin Sang-ok" also turns up titles like Mother and the Houseguest, My Mother and the Lodger, and Mama and the Boarder. People with a limited knowledge of Shin Sang-ok might be forgiven for believing that the director made not one, but a whole series of films about mothers and houseguests. Such confusion also exists for other films -- <자유부인> (1956) is a classic example (Madame Freedom? A Free Woman? Mrs. Liberty?). Apart from giving film history students a headache, other problems arise from this lack of standardized names. A film scholar recently told me that, although she was able to find records of Korean films screened on TV in Australia in the 1980s, she couldn't figure out from the English titles what films they were. Online databases and internet searches are another problem. The Korean Film Archive has made a truly amazing resource in its online database, with a wealth of information available in English, but most foreigners I know quickly give up because it's so hard to find anything when searching in English. These problems are made worse when considering that, in contrast to a country like China, that has a standardized Pinyin romanization system that is taught in schools, there is no widely-agreed upon system to romanize Korean words. The academic world outside of Korea uses one system, the Korean government uses another (which very few Koreans know how to use ? it's more complex than most people realize), and the majority of people simply romanize words however they feel like it. So searching for information online with romanized Korean titles is also a non-starter. The problem of multiple titles is not unique to Korea ? people studying Japanese, Chinese or French films often run into similar issues. But how nice it would be if there were a centralized, official list of English titles that everyone could refer to? Establishing standards in any field requires wide co-operation, political sensitivity and good publicity, but it would probably be possible to do such a thing for Korean cinema. Imagine a committee made up of local and foreign film professors, festival programmers, film historians, and critics who could go through a complete list of films and establish grammatically correct English titles that everyone could use. (If not all the 5000+ films produced between 1919-2000, then at least a selection) A simple Excel file containing all the titles could then be posted on the KOFIC and Korean Film Archive websites, and sent to universities and film festivals around the world for future reference. Of course, there is no guarantee that everyone would use it, but such a list would go a long way towards reducing the level of confusion that currently exists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