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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의 해방일지’ 박해영 작가, "내가 쓴 걸 누군가 연기하는 걸 본 경험은 완전히 다른 경험"

“뚫고 나갈 거야. 여기서 저기로” 박해영 작가는 SBS 보조 작가로 시작해 청춘 시트콤 <행진> <골뱅이> <달려라, 울엄마> <올드미스 다이어리> <청담동 살아요>까지 오랫동안 시트콤을 썼다. 시작할 때 애를 먹었다. “남이 재미있을 만한 걸 가늠하고 웃을 만한 걸 찾아 써야 하는데” 그게 재미가 없었다. “메인 작가님을 찾아가 말씀드렸어요. 사람들이 웃어도 나는 재미가 없다고요. 그때 작가님이 해주신 말씀이 ‘글은 억지로 쓰지 못한다. 그러니까 네가 재미있는 걸 끝까지 파라. 그러다 보면 네 것을 재미있어 하는 감독이 나타날 수 있다. 그 감독 만나면 그때부터 작가 인생 풀리는 거다.’ 그렇게 계속할 수 있게 판을 만들어주셨어요. 감사한 조언이었지요. 만약 ‘극은 이런 거야. 이렇게 써야 하는 거야, 저렇게 하면 재미있대’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오래 못 갔을 것 같아요.” - 그렇게 10년을 파셨어요. 시트콤을 썼던 10년은 무엇을 훈련한 시간이었나요. =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만약 시트콤을 했던 시간이 없었다면 글이 부드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인간이 이럴 때 웃기지’라는 걸 배울 기회였어요. 10년 동안 내가 매일 쓴 걸 배우들의 연기로 다시 보면서 ‘이거 안 사는구나. 이렇게 쓰면 안되는구나’ 훈련했고요. 10년 동안 내가 쓴 걸 누군가 연기하는 걸 본 경험은 10년 동안 내리 자기 글만 쓴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일 거예요. -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고 외쳤던 <또 오해영>부터 “어디에 갇힌 건진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나의 해방일지>까지. 일종의 행복에 관한 탐구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작가님 개인의 화두도 행복인가요. = 행복까지도 안 가요. 평안. 평화. 안온. 내가 지금 뭘 몰라서, 혹은 내가 지금 뭘 못 놔서 불행한 걸 거야. 그러니까 깨우쳐야 하는 거야, 득도해야 된다. 글 쓰는 게 일종의 개인적인 구도 작업 같아요. <또 오해영>을 쓸 때는 제가 40대 중반이었을 거예요. 인생이 되게 재미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태어나면 엄청 쉬운 여자로 살고 싶다. 막 주고 다 하고 오늘 또 사랑하자. 그런 생각으로 빙의해서 쓴 게 <또 오해영>이죠.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지은)과 박동훈의 경우 나와 거리가 있는 처지라 약간은 떨어져서 봤고 <나의 해방일지>는 아, 여전히 행복하지 않네? (웃음) 가끔 깜짝 놀랄 때가 있는데 옛날에 썼던 대사가 또 나와요!(‘사랑으로 폭발해버려’, ‘해갈’ 같은 표현일까요.) 그게 해결이 안된 거예요. 해갈도 안됐고 폭발도 못 해봤고 그러니까 계속 나오는 거죠. 이게 제 로망인 것 같아요. - 이야기를 짓는 일은 작가님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 예전에 <청담동 살아요> 끝나고 나서 쫑파티 자리에서 후배 작가가 ‘어떤 동력으로 글을 쓰냐’고 비슷한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나요. 쓰다보면 나도 몰랐던 것이 내 인생의 문제였구나 훅 알게 되고 ‘이건 왜 이렇지?’ 의문이 생기는 아이템을 가지고 풀다 보면 ‘아 이래서 그랬구나’ 알게 되더라고요. 게다가 주 1회였기 때문에 매주 쓰면서 정리되는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글쓰기가 생계는 물론이고 저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하잖아요. 계속 나 언제 해갈되지. 언제 사랑으로 폭발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풀어가는 일이 쓰는 일 아닐까 싶어요. 에필로그 일과 중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컴퓨터 게임이요. 윈도 컴퓨터에 내장된 카드 게임. 요즘 컴퓨터엔 없어서 다운받아서 해요. 글 쓰려면 힘드니까 회피하나보다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가서도 하고 있을 때가 있어요. 정말 숨도 안 쉬고 해요. 왜 그러는 걸까요? 한번 생각해볼게요.” 마음을 뒤흔든 그 장면은 어떻게 떠올렸는지, 그 대사는 어떻게 나왔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답이 마땅치 않을 질문일 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박해영 작가는 말을 멈추고 “한번 생각해볼게요. 왜 그러는지” “그것도 한번 생각해볼게요”라고 답했다. 그가 그려낸 감정과 대사들이 어쩌면 저 말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건드린 것, 마음에서 놓지 못하는 것을 한번, 그리고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일. 그래서 피곤하다고, 지겹다고 매일 똑같이 불만을 털어놓는 내 마음에 실은 “우리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쨍하고 햇볕 난 것처럼 구겨진 것 하나 없이” 이런 바람이 있다는 걸 간파해내는 게 아닐까. 그는 글쓰기가 일종의 구도 작업 같다고 말했다. ‘나 어디로 가고 싶은가. 뭐가 보고 싶은가.’ 이야기도 거기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가 이번에는 어디로 향할지 벌써 궁금해진다. ‘아직도 해갈되지 않았다’는 그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나, 좀 좋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여전하니까.

[인터뷰] ‘너를 닮은 사람’ 유보라 작가, “시청자들은 사적 복수에 대한 열망이 커진 것 같다”

- 작업 공간이 근사해요. 술과 향초가 많네요. = 처음 들어왔을 때 어떤 냄새가 나는지에 따라 공간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많이 가져다 놨어요. 술 냄새를 빼는 정화용이기도 하고. (웃음) - 위스키 병이 쌓여 있어요. 글 쓰는 데 좋은 파트너인가요. = 글렌모렌지 시그넷에 푹 빠져 있는데요. 초콜릿 향이 나서 안주 없이 훌훌 마시기 좋아요. 제가 의지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때려치우고 술이나 한잔해’, ‘차라리 자고 다음날 리셋해서 다시 생각해’ 싶을 때 마시곤 하죠. - 포스트잇에 쓴 메모가 어마어마하게 붙어 있습니다. = “주저앉았지만 아직은 링 위다.” 최근 본 미국 드라마 <털사 킹>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70대 마피아를 연기하며 한 대사죠. 전 늘 확신 없이 글을 쓰고 다음 걸 또 쓸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인데, 그 장면이 참 좋더라고요. 그리고 여기, ‘희망을 위해 필요한 것은 확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이런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건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말인데 제 오랜 신념이에요. 아주 예전부터 써놨던 메모인데 요즘 더 와닿아요.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허무에 빠지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겠다고 믿고 싶어져서요. - 서재에 좋은 책이 많더군요. = 제 자료실이죠. 책을 공들여 선별해서 사요. 최근엔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를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좋아하는 소설은 정지아 작가의 <검은 방>이에요. 노모가 딸의 방을 바라보며 사념을 풀어놓는데, 이런 게 정말 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917>이나 <덩케르크> 같은 영화를 보면, 서사가 없더라도 ‘저게 영화지’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검은 방>도 그런 소설이에요.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는데 다 읽었을 때 묵직한 울림이 오죠.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다시 쓸 수 있을까>는 77살의 작가가 다시 글을 쓰는 의지를 풀어낸 책인데요.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도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하던 작가가 무기력을 딛고 다시 쓰기 시작하는 이야기예요. 저도 ‘고작 나 따위가 안 쓸 순 없지, 오만하지 말고 정신 차리자’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습니다. - 고현정과 신현빈이 열연한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을 재미있게 봤어요. 복수란 참 강력한 모티브예요. 최근 <더 글로리> 열풍도 그렇고, 사람들은 복수 이야기를 참 좋아하죠. = <모범택시2>도 인기잖아요. 현실에서 벌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벌받지 않는 사회라 사적 복수에 대한 열망이 커진 것 같아요. 그처럼 시원한 이야기가 없기도 하고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보다는 드라마에서 그런 갈망을 충족하는 편이 낫죠. 사실 그런 면에서 저는 <너를 닮은 사람>이 어떤 면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복수 이야기가 ‘사이다’와 카타르시스를 주려면 주인공에게 온전히 이입되고 복수의 대상이 파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하는데, 저는 해원에게 온전히 이입할 수도 없고 희주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복잡한 인물로 만들었으니까요. 이야기는 단순한 게 최고인데 욕심이 앞서 그러질 못했죠. 여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감정을 파고들어 - 저는 한 여자가 자신을 닮은 듯 다른 여자에게 품은 호기심과 선망, 질투심과 애증이 입체적으로 그려져서 좋았어요. 여자와 여자가 맞서는 와중에 사이에 낀 남자는 욕망의 대상이자 예쁜 들러리처럼 보이죠. = 원작 소설에서도 그 부분이 정말 매력적이어서 드라마화를 결심했어요. 두 여자의 관계를 더 밀도 있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미련이 남네요. ‘바람피웠으면 남자를 잡아야지, 왜 여자를 잡아’ 같은 시청자 의견도 있었는데 저는 여자들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어요. -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나의 시작은 여기, 아니야, 내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 너다.” 희주의 내레이션과 함께 카메라는 남자를 비추다 해원에게로 향하죠. 그 의도는 선명하게 보였어요. = 둘은 서로에게 분신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해원도 남자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가장 믿었던 언니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던 거죠. 단순히 바람피워서 복수하겠다는 게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언니기에 그냥 말해줬으면 보내줬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해원이 깊이 상처받은 거예요. - 젊은 신인 김화진 작가의 소설 <나주에 대하여>를 보면, 자기 남자 친구보다 남자 친구의 전 여자 친구가 훨씬 더 신경 쓰이는 여자가 나오거든요. = 진짜 그렇지 않아요? 내 남자가 누구랑 사귀었는지 사귈 건지 되게 궁금하고 저 여자는 어땠을까, 저 여자는 왜 좋아했을까 되게 궁금하지 않아요? (웃음) - 여자들은 여자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미워하기도 하고요. (웃음) = 그런 이야기가 늘 우리를 사로잡죠. <너를 닮은 사람> 원작인 정소현 작가의 소설을 보면, 여자주인공이 젊은 여자를 보면서 자신의 젊을 때와 닮았지만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빛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죠. 그 감정을 파고들고 싶었어요. - 작가님도 <너를 닮은 사람>이나 <비밀>의 주인공처럼 누군가를 애증해본 적 있나요. = 저라면 지쳐서 끝내죠.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의 이야기는 드라마가 안돼요. 저를 닮은 인물이라면 허무주의에 빠져 알코올중독자처럼 술이나 마시는, 영화 <어나더 라운드> 같은 이야기가 최선이겠죠. (웃음)

‘우리들의 블루스’ ‘라이브’ 노희경 작가 [22 WRITERS㉒]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도,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 순 없을 거야.”(<그들이 사는 세상>)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입산 금지래. 백록담 못 가. 백록담은 저기. 저기 가면 사슴도 오고 노루도 와서 거기서 물 먹고 그래. 보이나? 나중에 눈 말고 꽃 피면 오자. 엄마랑 나랑 둘이. 내가 데리고 올게. 꼭.”(<우리들의 블루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사건들로만 채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않을까. 대개 삶은 즐겁기보다 힘겹고 달콤하기보다 씁쓸하다. 가족, 친구, 연인에 대한 근심을 둘러메고 원망하고 후회하고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웃고 울고 노래하고 악을 쓰며.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엔 그런 사람, 그런 삶이 있다. 1995년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드라마 작가로 데뷔, <거짓말> <꽃보다 아름다워> <굿바이 솔로> <그들이 사는 세상> <디어 마이 프렌즈> <우리들의 블루스> 등을 선보이며 얄궂은 삶에서도 기어이 빛나고 뭉클한 한순간을 길어내고야 만 작가. 한때는 뜨거워서 델 것 같았고 예리해서 벨 것 같았던 그의 글은 최근 힘을 뺀 투박한 생활어로 온기와 생기를 전한다. 30년 가까이 뜨겁고 치열한 현재형 작가로 대중의 마음과 접속하고 있는 노희경 작가를 2월17일 서울 연남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드라마 2022 tvN <우리들의 블루스> 2018 tvN <라이브> 2017 tvN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2016 tvN <디어 마이 프렌즈> 2014 SBS <괜찮아, 사랑이야> 2013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 2011 JTBC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 2010 KBS2 <드라마 스페셜-빨강사탕> 2008 KBS2 <그들이 사는 세상> 2007 KBS2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가지 질문> 2006 MBC <기적> 2006 KBS2 <굿바이 솔로> 2005 KBS2 <유행가가 되리> 2004 KBS2 <꽃보다 아름다워> 2002 KBS2 <고독> 2001 SBS <화려한 시절> 2000 KBS2 <바보같은 사랑> 2000 SBS <빗물처럼> 1999 MBC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1999 KBS2 <슬픈 유혹> 1998 KBS2 <거짓말> 1997 KBS2 <드라마 스페셜-아직은 사랑할 시간> 1997 MBC <내가 사는 이유> 1996 MBC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1996 MBC 1996 MBC *이어지는 기사에 <우리들의 블루스> <라이브> 노희경 작가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인터뷰] ‘디어 마이 프렌즈’ 노희경 작가, “캐스팅을 할땐 누가 이런 역을 안했는지부터 생각”

이야기꾼이 아닌 마음 탐구자 -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배우들이 작가님의 드라마에서 새로운 옷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의 이병헌도 그랬죠. 툭 하면 엄마한테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남루한 차림새의 만물상 장수를 어떤 작가 어떤 감독이 선뜻 이병헌에게 제안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 다행히 배우 복이 있죠. 나이대만 맞으면 거의 모든 대본이 병헌씨한테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역할은 안 해봤지 싶어서 대본을 주는 거예요. 이병헌 같은 배우가 내 작품으로 무슨 더 큰 부와 명예를 얻겠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안 해본 역할을 하는 게 배우로서의 바람 아니겠어요. 그래서 큰 배우들이 올 경우에는 더더욱 지금까지와는 다른 역할을 맡겨요. 차승원씨는 그간 설정 연기를 많이 했잖아요. <우리들의 블루스> 때도 설정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왜 꼭 설정을 해야 돼요? 그냥 평범하게 말하면 안돼요?” 그랬더니 3초쯤 말없이 가만 있더니 “그렇네, 내가 너무 설정을 하고 연기했네. 그래 그냥 하면 되는데. 여태까지 너무 설정을 했네” 하더라고요. 캐스팅을 할 땐 누가 이런 역을 안 했는지부터 생각해요. 이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 연기는 잘하는데 이 역할을 지금껏 안 해본 사람을 떠올려요. - 김혜자, 고두심, 나문희, 윤여정 같은 선생님들의 경우는 어떤가요. 워낙 오랜 시간 연기해온 분들이라 그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 최근에 안 했던 걸 찾는 거죠. 김혜자 선생님은 최근에 소녀소녀한 역할만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들의 블루스>에선 그러면 안되거든요. 고두심 선생님도 제주도 사투리를 살벌하게 쓰는 척박한 역할인데 최근엔 그런 역을 안 하셨죠. - 10대 시절에도 글 쓰는 게 꿈이었나요. = 네. 초등학생 때부터요. 그때 글을 써서 상을 탔어요. 다른 걸로는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내가 글 쓰는 데 재능이 있나?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거죠.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절박해졌고, 딱 1년만 드라마 공부하고 안되면 때려치우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동안 난 왜 작가가 되지 못했을까? 왜 시도 안되고 소설도 안됐을까? 그렇다면 드라마로도 안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 때 스스로에게 질문했어요. 넌 왜 안된 것 같니? 그때 이미 젊은 나이에 데뷔한 시인들이 많았어요. 이병률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도 동기고, 함민복 시인도 또래인데 다들 졸업하자마자 데뷔를 했단 말이죠. 그런데 넌 왜 안됐니? 생각해보니 나는 선생님들이 쓰라는 대로 안 썼어요. 내가 누구의 조언을 듣지 않는 애였구나. 그렇다면 드라마 공부할 때는 선생님이 쓰라는 대로 한번 써봐야겠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딱 1년 공부해서 드라마 작가가 된 거죠. 지금도 저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에게 존경할 만한 스승이 있나 봐요. 스승을 모신다는 건 겸손한 거죠. 소통할 때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신뢰가 생기니까요. - 시나 소설에 대한 미련은 없으세요. = 없어요. 솔직히 저는 우리나라 문학보다 드라마가 더 좋다고 생각해요. -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 이야기를 짓는다는 것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 나는 이야기를 짓는다는 생각은 잘 안 해요. 그런데 어떤 관계, 어떤 마음을 궁금해하는 탐구심은 있어요. 우리는 왜 상처받고 어떻게 그 상처를 이겨내는지, 우리는 어떤 순간에 행복하고 어떤 순간에 절망하는지. 그렇게 탐구하다 보면 거기에 부합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들의 블루스>의 동석과 옥동(김혜자), 부모 자식간 얘기야 뻔하잖아요. 그런데 동석이 그 순간에 느꼈던 마음과 엄마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과정을 쓰는 거예요. 그 장면 쓸 때 좋았어요. 동석이, 저수지가 된 엄마의 고향 집을 찾아가는 길에서 엄마의 과거를 듣는 장면. 사실 그게 무슨 스토리예요. 그냥 그 사람의 마음의 경로지. 장황한 이야기가 아니라 명징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죠. 탐구하면 할수록 예뻐요, 그 마음이. 그렇게 본다면 나는 이야기꾼은 아니에요. 재벌 드라마에서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거 보면서 막 감탄해요. 엄청난 이야기꾼들이구나 하면서. (웃음) 나는 사라져가거나 빛을 잃어가는 것들에 현미경을 대고 그 순간을 자꾸만 보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리뷰] ‘어떤 영웅’, 거짓말쟁이 영웅의 우화

빌린 돈을 갚지 않아 교도소에 수감됐던 라힘(아미르 자디디)이 어느 날 귀휴를 얻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라힘은 일부나마 돈을 갚고 채권자에게 석방을 요청하려 한다. 그의 애인 파르크혼데(사하르 골두스트)가 우연히 은행에서 주인 없는 핸드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꽤 많은 양의 금화가 들어 있었고, 두 사람은 그 금화를 팔아 돈을 마련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금값이 떨어져 생각한 만큼 돈을 구하지 못하고, 채권자 바람(모센 타나벤데)은 빚의 일부를 변제하는 것으로 라힘을 석방시켜줄 생각이 없다. 일이 그렇게 되자 라힘은 계획을 포기하고 핸드백의 주인을 찾아주기로 한다. 파르크혼데가 핸드백을 주운 은행에 분실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연락처를 남긴 뒤에 그는 교도소로 돌아간다. 영화는 핸드백의 주인이 나타나면서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라힘의 의도하지 않은, 하지만 완전히 의도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선행이 교도소 외부로 알려진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타인을 도운 선한 사람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고, 그가 채무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우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하지만 더욱 뜻밖인 것은, 도덕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라힘이 아닌 관객을 향한다는 사실이다. 딜레마이기보다 모호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의 상황, 우연히 선행을 펼쳐 영웅이 된 거짓말쟁이의 상황을 관객 앞에 제시하기 위해 라힘은 무엇보다도 무책임한 거짓말쟁이에 기회주의적인 인물이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그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라힘의 선택은 도덕의 문제이기보다 관객과의 게임을 위해 준비된 운명처럼 보인다. 제74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기획] 송혜교 배우론: 멜로드라마의 마스터, 높이 도약하다

어릴 때 TV에서 보았던 송혜교의 모습 가운데 유독 잔상이 남는 이미지들이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기억할 <순풍산부인과>의 오혜교, 핑클 멤버들과의 친분, 여배우들의 외모를 분석하던 어떤 방송에서 그의 얼굴형과 이목구비 위치가 완벽한 황금 비율을 자랑한다며 최고의 미녀 1위로 꼽았던 풍경, 그리고 <이홍렬쇼> ‘쿠킹 토크 참참참’에 출연했을 때다. 사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는데 “바이킹은 줄을 서서 기다려서라도 무조건 맨 뒷좌석에 타야 한다”, “올라갔다 내려올 때 그냥 앉아 있지 말고 엉덩이를 한번 들어줘야 더 스릴 있다”고 당차게 말하는 모습이 너무 공감 가 집에서 박수까지 치면서 봤다. 과학적(?)으로 따져도 한국에서 가장 예쁘다는 배우가 의외로 소탈한 매력이 있었다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무살 송혜교는 <가을동화>의 주연으로 발탁됐고, 출연작이 연달아 성공한 후 <올인> 같은 대작에 꼭 필요한 배우로 성장했다. TV는 톱스타 송혜교의 일거수일투족을 이슈화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이제 송혜교는 바이킹을 타지 않겠지? ‘옆집 소녀’에서 ‘톱스타’로 송혜교의 필모그래피에는 <가을동화> <호텔리어> <올인> <풀하우스> <태양의 후예> 등 흥행에 성공한 작품과 <그들이 사는 세상>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 공존한다. 영화 출연작이 크게 성공한 적은 없지만 그는 <일대종사>에 출연한 이후 왕가위와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왕가위 감독 제작사 ‘쩌둥영화’와 계약까지 맺었다. 이미 흥행 스코어만으로는 얻지 못할 입지를 다진 배우에게 성적을 논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진다. 하지만 송혜교는 그가 이룬 성과에 비해 유독 저평가된 배우이기도 하다. 그가 보여준 흥행력만큼 연기력을 대중에게 인정받은 적은 거의 없었고, 똑같이 공개 연애를 한 다른 배우에 비해 유독 그를 향한 시선은 날카로웠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과거에는 더욱 극심했던) 여성 연예인을 헐뜯는 것을 일종의 오락으로 여기는 부류에게 송혜교는 유독 자주 소환되는 이름 중 하나였고, 연기력이 도마에 오르는 이유는 창조적이기까지 하다. 이를테면 대사가 빨라지면 발음이 완벽하지 않다거나, 너무 밝은 척한다거나, 특유의 ‘쪼’가 거슬린다거나.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에 먼저 자리 잡은 1970년대생 배우들, 사회 곳곳에서 여성 혐오에 대한 자성이 시작됐던 시기에 스타가 된 1990년대생 배우들에 반해 1980년대생 배우들은 그들의 저력을 가장 인정받았어야 할 때 가장 손해 본 세대다. 더군다나 ‘옆집 소녀’와 ‘톱스타’ 사이의 시차가 짧았던 송혜교의 기세는 종종 시청자에게 혼란을 줬는데, 그게 내게는 “이제 송혜교는 바이킹을 타지 않겠지?”였고, 여기서 더 비뚤어진 사람들은 스타가 된 젊고 예쁜 여자를 열성적으로 시기했다. 여전히 송혜교는 <풀하우스>에서 친구들에게 사기를 당해 가정부가 된 평범한 여성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이면서 해외에서 국빈 대접을 받는 한류 1세대 톱스타로 매체에 등장했다. 원래 쇼 비즈니스는 스타를 향한 동경과 친근함을 적절히 배합하며, 누군가를 빠르게 띄우다가도 금세 추락시키고, 종종 부정적인 감정까지 연료 삼아 굴러가기 마련이다. 여기에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은 집단적 안티 문화를 만들었다. 언제나 스타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송혜교는 산업의 명암을 모두 흡수한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송혜교의 행보는 흥행 성적 내지는 작품 밖 이슈로 소비되어온 까닭에 충분히 그 의미가 조명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풀하우스>와 <태양의 후예> 사이 필모그래피를 한데 모아서 복기할 때 그 의미가 보다 선명해진다. <풀하우스>의 성공 이후 안전한 길보다는 영화 <파랑주의보>를 선택해 TV와는 다른 영화 연기의 기술을 처음 배웠고, <황진이>는 계급과 윤리의식을 거부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했던 기생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고전 텍스트를 민중의 이야기로 다시 읽어낸 작품이었다. 아직 마니아층에만 주로 소구됐던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선택해 노희경 드라마와 대중과의 접점을 넓힌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실험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양식화된 연기를 일부러 감행한 장준환 감독의 SF 로맨스 영화 <러브 포 세일>,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유학생 출신 감독이 인디 영화산업에서 만든 오컬트영화 <패티쉬> 등 송혜교의 리스트에는 의외의 즐거움이 있다. 로맨틱 코미디는 분명 송혜교가 가진 가장 중요한 재능 중 하나지만, 그는 검증된 영역 너머 자신의 저변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이어왔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확장과 발전, 그리고 송혜교 공교롭게도 <더 글로리>로 ‘재발견’됐다고들 하는 송혜교의 재능은 엔터 산업과 사회상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여성배우들이 로맨스 장르를 넘어 다양한 장르물을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고, 카메라도 배우의 아름다움을 고집스럽게 취하지 않는다. 스타 산업과 소비 문화에서 유독 여성 연예인에게 엄격했던 잣대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과거보다 그들의 성취를 먼저 주목하는 움직임이 생긴 것도 중요한 변화 중 하나다. 송혜교는 <더 글로리> 이전에도 <오늘>에서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고,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자식을 잃은 젊은 엄마의 고통을 연기했다. <더 글로리>는 기술적으로 노련한 데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망까지 있는 배우가 적시에 만난 작품일 뿐, 원래 송혜교에게 내재돼 있던 가능성이다. 더군다나 송혜교가 하이틴 스타였던 시절 보여줬던 일상적인 매력은 작품 외 노출이 줄어든 이후에도 종종 힘을 발휘한다. 아마 그와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털털함’을 언급할 만큼 원래 그에게도 내재된 특성이기 때문이리라. <태양의 후예>의 성공적인 코미디는 대부분 그가 연기한 강모연에게서 나왔고, 복수를 위해 의식적으로 웃음을 지운 문동은에게서 종종 터져나오는 일상성은 고통 외에도 감정이입할 만한 요소를 만든다. 지금의 송혜교는 30년 가까이 화제성을 유지한 독보적인 스타이면서 그렇기에 평가절하됐던 면면이 발견되는 시점에 서 있다.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스타와 배우의 속성이 그의 안에서 충돌하고 융합되고 진화하고 있다. 산업의 곡절을 고스란히 체화하며 버텨온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곽재식의 오늘은 SF] 양자 중력 이론으로 보는 별나라 삼총사

알리바이는 추리의 기본이다. 사건 발생 시각에 어떤 사람이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말은 곧 그가 사건 장소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등장한 과학 이론인 양자 이론은 알리바이가 모든 물체에 대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양자 이론은 무엇이든 정밀하게 따져 계산할 때에는 한 물체가 동시에 두 군데 이상의 위치에 있을 수도 있다고 치고 계산하는 방식을 택한다. 상식을 초월하는 생각이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그게 말이 되나 싶어 어디인가에 잘못 생각한 것이 있을 것 같다는 의심도 든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양자 이론은 검증을 견뎌냈고 지금은 가장 믿을 만한 과학 이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양자 이론과 함께 현대 과학의 두축으로 인정받는 다른 이론으로 상대성이론이 있다. 이해하기 어렵기로는 상대성이론도 양자 이론 못지않다. 상대성이론은 돌을 허공에 던지면 땅에 떨어진다는 아주 단순한 움직임에 대해서도, 돌의 속도와 날아간 거리를 정밀하게 계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4차원 시공간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 상황에서 시공간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따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무슨 특별한 마법의 돌을 던지기 때문에 시공간 왜곡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모든 물체의 무게와 움직임을 따질 때에는 항상 4차원과 시공간의 왜곡을 따지지 않으면 오차가 생긴다는 것이 상대성이론의 결론이다. 대학 강의에서도 양자 이론과 상대성이론은 어려운 과목으로 자주 거론된다. 과학자들에게 더욱 어려운 것은 양자 이론과 상대성이론, 특히 그중에서도 일반 상대성이론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양자 이론과 상대성이론은 모든 물체에 항상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이므로 무슨 물체든 그 물체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움직임을 계산하려면 두 이론을 동시에 활용해야만 한다. 당연히 그런 일이 쉬울 리가 없다. 양자 이론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깔끔하게 하나로 연결해서 활용하는 일에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상의 뛰어난 학자들이 불나방처럼 뛰어들었지만 여태껏 그 누구도 훌륭한 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상대성이론이 중력을 계산하는 데 활용되기 때문에 이렇게 두 이론을 동시에 사용하는 법을 흔히 양자 중력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2023년, 지금까지도 완성되어 검증된 양자 중력 이론은 없다. 그런데 1974년 영국 과학자 스티븐 호킹이 이 문제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그는 블랙홀도 온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따지다가, 블랙홀의 온도를 계산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때 호킹은 블랙홀이라는 대단히 이상한 물체에 대한 계산법을 만들기 위해 양자 이론과 상대성이론을 어느 정도 동시에 고려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많은 학자들을 감동시킬 만한 결과였다. 블랙홀은 실제로 우주에 있는 물체이고, 어느 정도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호킹처럼 블랙홀을 자세히 연구하고 실제 블랙홀을 면밀히 관찰해보면 언젠가는 양자 이론과 상대성이론을 동시에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그 어려운 과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곧 온갖 분야의 과학자, 수학자가 블랙홀에 전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블랙홀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과학 이론을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꿈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기술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1970년대 중반이 되자 블랙홀 이야기는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호킹의 연구 결과로 발표된 지 불과 3, 4년이 지나자 SF 만화, 소설에서도 대중이 사랑하는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대단히 심각한 과학 이론이 흥겹게 즐기는 대중문화에 자연스레 섞여들었다. 1979년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아예 제목이 <블랙홀>(<스타워즈>의 아류작 취급을 받긴 했다)이라는 영화도 개봉되었다. 한국에서도 <스타워즈>의 아류작이 나왔고, 그 영화에도 스티븐 호킹이 불러일으켰던 과학계의 새 관심, 블랙홀이 소재로 잠시 등장한다. 단, 당시 한국에서는 SF라면 만화나 어린이 영화의 소재로 적합하다는 고정관념이 강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어린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바로 <블랙홀>과 같은 해인 1979년에 나온 영화 <별나라 삼총사>다. <별나라 삼총사>를 심각하게 블랙홀에 대해 따지는 영화로 받아들일 순 없다. 외계 행성을 찾아간 한국 어린이들이 <스타트렉>의 커크 함장을 흉내내는 내용이 중심이다. 게다가 어린이들이 태권도를 선보이자 거기에 감탄한 외계 행성의 임금님이 한국 어린이를 우주 전함에 태워 적진으로 내보내 싸우게 한다는 내용을 태연히 보여준다. 실감나고 짜릿한 영화라기보다는 어린이들이 요정을 믿으면 피터 팬을 따라 하늘을 날아가 해적과 싸울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에 훨씬 더 가깝다. 어찌보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SF 소설 팬들이 그렇게나 증오했던, “SF는 애들이나 좋아하는 유치한 것”이라는 편견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영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런 영화가 한국인들이 어릴 때부터 얼마나 SF를 가깝게 즐겨왔고, 과학과 관련된 소재는 언제든 대중에게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위험하지만 블랙홀을 통과하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소재로 등장한다. 팅커벨을 따라가는 웬디 일행의 감성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그렇지 내용만 보면 21세기에 나온 천만 영화 <인터스텔라>의 소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별나라 삼총사>가 어린이 영화를 폄하하던 시대에 힘겹게 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일 만한 사실이다. 실제로 <별나라 삼총사>는 어린이 관객 사이에 꽤 인기를 끌었다. 나는 한국인들이 현실 문제에만 매달리는 민족이기에 기초과학이나 과학의 근본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주장이나 SF는 본래 한국인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이야기였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그런 해석을 무심코 반복하며 퍼뜨려온 당국이나 언론의 분석이야말로 오히려 성의가 없지 않았나 싶다.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연재가 끝났지만

오지은 작가의 에세이집을 읽었다. <당신께>는 같은 제목으로 독자들에게 보내던 뉴스레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편의 글이 한통의 편지가 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공들여 쓴 글이다. 그의 글은 술술 읽히면서도 왠지 쓸쓸하다가 웃기고 힘이 나곤 한다.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페이지가 슬금슬금 넘어가는 바람에 열심히 오랫동안 만든 음식을 한입에 홀랑 먹어버린 것만 같았다. 괜히 감자튀김 봉투를 뒤집고 손가락을 한번 빨게 되는 기분이다. 항상 그랬지만 유독 이번에 더 그렇게 느낀 것은 왜일까. 정확한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전자책으로 읽었던 것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새로 산 아이패드에서 전자책으로 보는 <당신께>는 놀라웠다. 두쪽을 모아 읽으니 작은 크기의 책을 펼친 것과 비슷해서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화면의 해상도나 터치에 반응하는 것도 내가 알던 것보다 자연스러웠다. 한편의 글이 보통 두어 페이지 정도였기 때문에 편지 한통을 한 화면에 볼 수 있는 것이 좋았고, 마지막에 남기는 유머러스한 인장이 화면의 끝에 잘 정렬되어 완결성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아, 이래서 태블릿PC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억눌렀던 도서 구입 욕구가 조금 차올라서 이것저것 결제를 했다. 몇권의 책을 구입해서 이래저래 들여다보고 나서 알게 된 것은 전자책에 PDF와 EPUB가 있다는 것. PDF는 문서 파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원본 책의 서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디지털화가 되어 글씨 배치를 바꿀 순 없지만 책 위에 마음대로 줄을 긋거나 글씨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PUB는 글씨 크기나 서체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그동안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전자책 구매 페이지 위의 구분이 뚜렷하게 보인다. 교과서나 논문이라면(실제로 논문을 구매할 일은 없지만) PDF 형식도 좋겠지만 역시 직접 읽는다면 EPUB가 좋겠다. 하지만 전자책에 홀딱 빠져버렸던 처음과는 다르게 지금은 살짝 열기가 식어버렸다. 첫 체험 이후로 상대적으로 조악하게 편집된 책을 연달아 보고 있다보니 아쉬움이 크다. ‘자간을 좀 벌리고 싶은데 이런 건 조절이 안되나’ 싶기도 하고, ‘굳이 이런 모양으로 전자책을 낸다면 종이책을 스캔한 거랑 뭐가 다르지’ 하는 책들도 있었다. 역시 새로운 틀에 무엇인가를 담는 것은 또 다른 방식의 창작과 제작 방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께>를 보면서 느낀 어떤 형식적인 아름다움도(내용도 아름다웠습니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오지은 작가와는 인디 신에서 비슷한 시기에 음악을 발표하고 활동해왔다. 이제 음반은 끝났어 하던 시기에 용감하게 자체 제작 앨범을 내 직접 판매하며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디지털 세상으로의 변화 속에서 음악을 해오면서 시대의 변화에 나름 맞추어가면서 애써왔던 시간도 있었다. 작가로 활동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곤 했었는데 같은 연재처(<씨네21>입니다. 하하)에서 연재를 하게 되어 뿌듯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나 역시 ‘노래가 끝났지만’의 연재를 마무리하게 되면서 그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씨네21> 연재는 나에게 분에 넘치는 기회였기 때문에 ‘나같은 사람의 글을 실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연재를 해왔던 것은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글이나 노래나 통하는 바가 없지는 않겠지 하고 나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점이 더 많았고, 연재 내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모자란 내용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틀을 갖추어 세상에 나올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다. 귀한 자리를 기꺼이 내어준 <씨네21>과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오지은 모든 것은 지나가 갖고 있고 싶은 것들 비루한 나를 남겨두고 모두 지나가네 아주 가끔 세상이 명료하게 보일 때가 있지 비루한 나의 눈에도 아주 잠시뿐인 눈을 뜨고 오늘 하루도 힘들고 산다는 것은 무얼까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어 아름다움 속에서도 무정함 속에서도 나는 이제 허무함을 노래해 피고 질 것을 노래해 열심히 삶을 노래해 죽 노래를 해 아주 가끔 세상이 살 만하게 보일 때가 있지 비루한 나의 눈에도 아주 잠시뿐인 눈을 뜨고 오늘 하루도 무사했어 살아 있는 건 무얼까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어 아름다움 속에서도 무정함 속에서도 나는 이제 눈을 뜨고 오늘 하루도 무사했어 살아 있는 건 무얼까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어 아름다움 속에서도 무정함 속에서도 나는 이제

[인터뷰] ‘흐르다’ 김현정 감독, 배우 이설, “관계의 불편함을 포착하다”

취직을 준비 중인 30대 진영(이설)과 무뚝뚝한 경상도 아버지(박지일) 사이에는 다정한 대화가 없다. 가정과 일터에서 관계의 중심을 담당하던 어머니(안민영)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진영과 아버지는 어색하게나마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만, 다른 미래를 꿈꾸는 두 사람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흐르다>는 단편영화 <나만 없는 집>(2016)으로 제16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입문반>(2019)으로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현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진영 역은 데뷔 3년 만에 드라마 <나쁜 남자>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의 주연을 맡은 배우 이설이 맡았다. 이설은 <흐르다>를 “표면은 잔잔해 보여도 끊임없이 흐르는 호수” 같은 영화라고 소개하면서, 관객이 이번 작품을 통해 “고여 있는 것 같아도 매일 조금씩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첫 장편영화의 소재로 ‘부녀 관계’를 택한 계기는 뭔가. 김현정 가까운 관계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포착하는 데 흥미를 느끼는 편이다. <흐르다>는 관계가 소원한 부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구상에서 시작됐다. 경상도 가족의 서먹함 내지 강압적인 분위기를 영화에 표현하고 싶었다. 가족 내의 어떤 문제는 표현의 부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내고자 했다. 지금까지 제작한 단편의 아이디어를 모아 오롯이 다 쏟아내려 했다. 전작에 이어 <흐르다>의 배경도 대구로 설정했다. 촬영도 대구에서 했다고. 김현정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잘 이해하는 환경을 배경으로 삼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단편영화처럼 대구에 사는 경상도 가족을 소재로 택했다. <흐르다>는 대부분 대구에서 촬영했는데,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어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다만 지역의 영화 제작 후원이 장편보다 단편에 치중되어 있어, 장편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아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지역에서도 장편영화 제작에 관심을 기울여주면 좋겠다. 진영 역에 이설 배우를 낙점한 이유가 궁금하다. 김현정 처음에는 진영과 이설 배우의 성격이 반대여서 궁금했다. 이설 배우는 에너제틱하고 소신 있는 모습이 많은 반면 진영은 자주 주춤하곤 한다. 이설 배우가 어떻게 진영을 연기할지,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같이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시나리오를 전달했다. 함께 <흐르다>를 만들어가면서 이설 배우에게 반했다. 동물적으로 연기하는, 감각이 탁월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설 평소에 김현정 감독님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했다. 단편영화 <입문반>을 본 후에는 감독님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을지 궁금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감독님의 작품은 삶의 어떤 조각을 떼서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적으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듯해서 매력적이다. <흐르다>의 시나리오는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어서 흥미로웠다. 무미건조하면서도 무언가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상을 받았고, 이 이야기를 어떻게 감독님만의 방식으로 풀어낼까 궁금해서 함께하게 됐다. 진영은 지방에 사는 젊은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가부장적이고 기회가 적은 지역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려고 애쓰는 장면은 현실적이어서 안타깝기도 했는데. 김현정 진영이라는 인물에는 나의 경험도 스며들어 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 관계를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틀어지고 만 경험들이 개인적으로는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실 나는 관계 안에서 답답함과 불편함을 느껴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진영을 통해 평상시에 하지 못했던 것을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자신을 옥죄는 상황에서도 진영이 끝내 캐나다로 떠나는 장면엔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진영 어머니의 장례식 장면은 생략됐다. 대신 10초 넘게 정적이 흐르는 검은 화면을 삽입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김현정 <흐르다>는 진영의 서사이면서 부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부녀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발생하는 딸과 아버지의 상황에 빨리 돌입해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감정이 격해질 수 있는 장면은 배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어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묘사할지 고민이 컸다. 정적이 흐르는 검은 화면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설명이 될까부터 시작해서 그 장면의 길이는 얼마가 되어야 할지 편집감독과 계속 논의했다. 이설 개인적으로는 정적인 검은 화면으로 처리된 신이 마음에 들었다. 인물이 상복을 입고 영정 사진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장례식 장면은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 않나. 사람이 큰 충격을 받으면 시공간이 잠시 멈추는 것처럼, 검은 화면은 그런 순간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영화적인 체험으로 다가와서 좋았다. 지금 우리 곁의 수많은 진영에게 한마디 한다면. 이설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가 오지 않았나. 스스로 고이지 말고 계속해서 도전하면서 살면 좋겠다. 이제 그래도 되는 것 같다. 김현정 우리 사회에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누구나 엎어질 수 있는데도. 그런 분위기 탓에 진영이 더 움츠러들 것 같았다. 진영을 관용적으로 기다려주는 분위기가 되길 바란다.

[기획] ‘파벨만스’의 슬픔과 자책감을 떠올리며

소년은 거인이 아니다 극장 앞에서 새미는 겁을 먹고 있다. 그런 아이를 두고 미치(미셸 윌리엄스)와 버트(폴 다노)는 양쪽에서 열심히 강변한다. “영화는 꿈과 같은 거야.” 그러나 아직 어린 새미는 이 “거인”의 세계가 두렵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에서 기차가 실시간으로 육박해오는 듯한 실감이 관객에게 충격을 주었다면, <파벨만스>의 새미는 자신보다 큰 것, 높은 것, 그래서 올려다봐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영화에 불안을 느낀다. 여기에는 작은 몸으로 맞은편의 (영화 속) 어른들을 올려다봐야 하는 구도 또한 중요하게 작용한다. 현대로 오며 극장의 상영/관람 형태와 규모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일반적으로 관객은 극장에서 영화를 올려다본다. 일단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면 <파벨만스>는 무릎을 꿇고 마주 앉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기입한다). 극장은 고정된 중심인 스크린이 일방적으로 이미지를 방사하는 공간으로, 꼭대기에서 연주자를 내려다보는 배치가 가능한 공연장이나 선 채로 돌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장과는 다르다. 스필버그는 이 물리적 조건을, 영화와 처음 만난 아이의 입장에서 정서적 자극을 증폭하는 기제로 사용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밀고 나가자면,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이야기가 우리 ‘위에서’ 펼쳐지길 기대하게 되지 않던가? 개인이 통제할 수 없고 시선이 가닿을 수도 없는 모종의 영역이 저기 위 어디쯤 있음을 상상하며, 거기서 불거진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언가 건네주리라고 예상하면서. 하여간 그 (불)완전한 지위에 대한 경외로 작동되는 공간이 극장이(었)다. 이렇듯 <파벨만스>의 오프닝에서는 설령 으스스한 것이더라도 대면하고픈 역설적인 욕망이 드러난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만지작거리고 싶을 만큼 황홀하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그래서 새미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기어코 레일 위의 장난감 기차를 충돌시킨다. 그런데 충돌과 연계된 스펙터클을 묘사하는 지점에서 <파벨만스>는 어른-미치와 소년-새미의 세계를 양분한다. 새미는 장난감 기차와 미니 자동차를 여러 번 들이받을 수 있지만, 미치에게 이와 같은 기회는 실제 재난 현장에서 벌어지기에 무력감을 안긴다. 토네이도 시퀀스에서 미치는 막내를 버트에게 맡긴 채 다른 자식들을 차에 싣고 달린다. 뭔가에 홀린 듯 보이는 이 질주는 위험천만하다. 그럼에도 꽤 신나 있던 미치는, 자신의 차 맞은편에 수십개의 카트들이 비바람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제야 운전을 멈춘다. 미치는 충돌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뒤에 아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아이인 새미는 무언가 충돌시킬 수 있는 주인의 손을 갖는 반면 미치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 무너진다. (<파벨만스>에서 인물들이 운전할 때면 조수석에 탑승한 이가 “앞에 봐”(Watch the road)라고 말하는 것은 초반부에 징후적으로 새겨진 충돌에 대한 불안 탓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파벨만스>의 제목은 모든 식구들을 포괄하는 이름이지만, 결국 그 ‘파벨만스’에서 미치가 이탈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매우 아이러니한 단어가 된다. 보리스 할아버지의 일화가 일러주듯, 새미가 영화와 성장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찢겨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파벨만스>는 새미와 미치를 통해 가족 내부에 예견된 분열의 징조는 물론, 무엇보다 아이와 어른에게 각기 다르게 매겨진 현재의 무게를 시사한다. 다 자라지 않았을 때만 수용 가능한 충돌이 있다는 점 말이다. 빚의 손, 빛의 손 한편 <파벨만스>의 종장에 다다르면 나는 스필버그가 영화에 부정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첫 장면에서 새미를 향해 영화에 관한 명제들을 열거하는 들뜬 부모의 말을 반박이라도 하듯이. 새미가 청소년기를 통과하며 연출한 영화들, 즉 서부극을 비롯해 캠핑영화, 베니(세스 로건)와 미치만 따로 떼어놓은 편집본, 졸업 기념 영상 등은 그의 손에서 빚어졌음에도 명쾌한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다. 새미의 성장은 영화라는 총체를 단번에 설명하기에는 많은 부분이 누락된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체험의 여정이다. 물론 <파벨만스>는 영화의 위력이 발휘되는 가능성이나 그것의 매혹까지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과정을 거쳐 도달되는 영화를 온전한 포용과 화합의 예술이라고 일컫지만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식구들은 새미의 작업에 지지를 보내고 노동력 또한 보태지만 결과물에 관한 한 공동의 권리를 위임받지 못한다. 영화를 향한 찬사도 비판도 전부 새미의 것이며 이 점에서 영화 작업은 민주적이지도 개방적이지도 않다. 그리하여 <파벨만스>는 영화와 연루된 상황들 틈으로 발생하는 ‘흔적들’을 에두르면서, 영화를 좇는 일이 아무리 타자들과 함께하더라도 철저히 혼자로 좁혀지는 절차임을 드러낸다. 이는 오로지 주체만이 감각 가능한 물리적 고통의 흔적들로 위시된다. 미치에게 얻어맞아 등에 각인된 손자국, 채드의 주먹이 남긴 혈흔과 보리스 할아버지가 이 순간만은 기억하라며 볼을 잡아당길 때의 따가운 통증처럼. 그러고 보면 영화를 만드는 행위 또한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하는 일이다. 또 한번 초반부의 어느 장면이 떠오른다. 파벨만스 부인은 며느리인 미치에게 플라스틱 포크를 쓴다며 타박한다. 피아니스트인 미치는 설거지를 하지 않기 위해 일회용 접시와 식기를 쓰며 식사가 끝나면 이 모든 것을 비닐에 쓸어버린다. 식구들이 비닐 속으로 쓰레기를 던지는 숏 직후에는 새미의 첫 영화가 재생되는 숏이 맞붙는다. 어린 새미는 제 손바닥을 펼쳐 거기 반사된 화면을 비춰 본다. 쓰레기를 던지는 손들과 빛이 명멸하는 아이의 손. 이 의미심장한 장면의 배열에는 (아직 손이 더럽혀지지 않은) 새미의 꿈이 어디에 빚을 지고 자라는지 엿보인다. 필름을 훼손하자 영화가 새로워졌듯, 끊임없이 자르고 이어 붙여야 하는 영화란 애초부터 손을 번거롭게 움직이고 자주 더럽혀야 하는 것이다(물론 이는 단순히 물리적 행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낱장의 사진들이 ‘활동’하기 위해 동원되는 몽타주의 절차도 지시한다). 그래서일까, <파벨만스>에는 물려받거나, 베끼거나, 공짜로 얻으면서 지속된 영화에 대한 은밀한 죄책감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스필버그는 지금 영화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하느라 불가피하게 파괴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고 여동생들이 울고 소리칠 때 새미는 이들과 약간 떨어져 계단참에 앉아 있다. 그 순간 맞은편에 카메라를 들고 이 상황을 촬영하는 자신의 환상이 보인다. 내가 카메라를 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사랑이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미치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궁극적으로 소년의 영화 작업은 가족의 와해에 가담하게 된 셈이다. <파벨만스>는 그것의 매혹에 어김없이 항복하면서도 동시에 질문한다. 정녕 영화 ‘하는’ 손은 바람직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