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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편집장] 전주를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

10년 전, 수행이 필요했던 저연차 기자 시절. 백흥암에서 수행 중인 비구니들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를 감명 깊게 보고 이창재 감독을 인터뷰했다. 이후로도 감독의 차기작에 늘 관심은 기울이고 있었지만 대면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그러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에서 10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다큐멘터리 <문재인입니다>를 들고 전주를 찾은 그는 미소를 머금은 편안한 얼굴로 고생담을 술술 들려주기 시작했다. 최소 1박2일은 들어야 전말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 이번주 특집 ‘전주에서 만난 사람들’ 인터뷰 기사에서도 그 고생담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선 기사에서도 빠진 뒷이야기 일부를 전하려 한다. 기사에선 이창재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이가 하나 빠졌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2.5개의 이가 빠졌을 만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섭외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전공과 무관한 국가 기념식 연출을 두번이나 맡았다. ‘제안서 한번만 확인해주십시오.’ 이 한마디를 하고 싶었는데 웬걸, 악수만 하고 끝났다. 그러다 2022년 7월, 최종적으로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 답변 속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연 단위의 사연이 뭉텅이로 생략되어 있다. 첫 번째 국가 기념식 연출을 맡았을 때 문 전 대통령과 악수만 하고 ‘제안서’의 ‘제’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감독은 두 번째로 국가 기념식 연출을 맡으며 절호의 기회를 노리지만 두 번째 기념식엔 대통령이 아닌 국무총리가 참석하는 바람에 준비한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식이었다고. 최종적으로 장문의 손편지를 전달해 촬영 허락이 떨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감독은 최대한 압축해 들려주려 노력했는데(이 이야기를 또다시 압축해 기사로 정리한 이자연 기자도 만만치 않은 압축의 기술을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나는 다음 약속이 있어 이 흥미진진한 인터뷰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어렵게 엉덩이를 떼야 했다. 그러자 새삼 영화를 보고 궁금한 것들을 창작자에게 직접 질문할 수 있는 자리가 귀하게 여겨졌다. <토리와 로키타>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다르덴 형제 감독과의 인터뷰는 물론,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씨네21>이 만난 영화인들과의 풍성한 대화가 독자 여러분들에게도 부디 생생히 전달되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올해 전주에선 예정에 없던 반가운 만남으로 빼곡한 시간을 보냈다. 5년 전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아카데미 담당 직원이 된 친구를 만났고, 역시나 10년 전 인터뷰한 또 다른 감독을 만나 “10년 만이네요”라는 인사를 나눴다. 어쩐지 10년 동안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길 위에서 이어진 우연한 만남들로 2023년의 전주는 기억될 것이다.

JEONJU IFF #8호 [수상작 인터뷰] 한국경쟁 대상 '당신으로부터' 신동민 감독 , 아버지를 기억하는 증언집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의 영예는 신동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당신으로부터>에게 돌아갔다. 첫 장편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가 동일 부문 대상에 선정된 이후 3년 만이다. 이로써 신동민 감독은 해당 대상을 2회 수상한 최초의 감독이 됐다. <당신으로부터>의 형식과 내용이 전작과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이 의미 있는 족적이다. 먼저, 실제 신동민 감독의 어머니 김혜정 배우가 다시 등장한다. 신동민 감독이 직접 출연하여 모자 관계를 연기하기까지 한다. 다만 <당신으로부터>에 연기라는 단어를 무턱대고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3부엔 신동민 감독이 실제로 겪었던 아버지의 상실, 전작에서 경험한 어머니와의 영화 촬영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 2부에서도 신동민 감독의 주변인들이 각자의 일상을 영화 속에 녹여낸다. 시상식 직후의 신동민 감독은 들뜬 맘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본인의 연출론을 진중히 읊어냈다. - 3년 전에 이어 다시 대상에 선정된 소감은. = 3년밖에 안 지났으니 절대 안 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웃음) 솔직히 사람이니만큼 아주 조금의 기대를 하고 시상식에 오긴 했다. 그래도 다른 감독들 축하해 주자는 마음이 컸다. 이번 작품은 영화를 만든다기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 삶과 시간을 담는다고 생각했다. 나와 어머니를 포함해서 말이다. 관객들이 우리 모자, 우리 배우들의 삶을 응원해 준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더 기쁘다. - 전작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의 연장선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구상을 시작했나. = 전작이 가족 사이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다뤘다면 이번엔 서로를 전혀 모르는 타인들의 연속적 유대, 그로부터 발견되는 차이를 포착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발견되는 닮음들을 발견하려 했다. 최근엔 닮음과 다름이 한 곳에 공존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영화를 3개의 챕터로 구분하며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세 이야기 간의 공통점을 추출해 보려 한 이유다. - 실제 어머니 김혜정 배우의 출연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 전작의 GV에서 어머니에게 질문하며 우는 관객이 종종 계셨다. 본인의 삶과 너무 닮아있다는 이유였다. 가끔 외부에서 왜 네 일기장을 영화로 만드냐는 말을 듣는다. (웃음) 그런데 저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나의 시간, 어머니의 시간이 타인의 삶과도 맞닿을 수 있겠단 생각이 깊어졌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선 아예 나와 어머니의 GV 장면을 넣기도 했다. - GV 장면에서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영화에서 실제 어머니의 모습을 구현하고 싶단 생각에서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이번 영화엔 ‘실제 어머니 모습’이 얼마나 구현된 것 같나. = 어머니의 진짜 모습을 구현한다는 목표가 나쁜 건 아니지만, 다소 어리석은 생각인 것 같다. 전작의 어머니를 보면서도 영화 속 어머니가 실제 본인이면서 본인이 아닌 순간이 있다고 느꼈다. 내가 명확히 ‘이건 우리 엄마야!’라고 단언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느끼는 누군가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관한 생각은 지웠다. 지난 10년은 이런 진위의 판단에 혈안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가치 판단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고 느낀다. - 가족이라도 동업은 피하란 말이 있는데. 어머니와의 연기 협업은 순탄한지. = 그렇다고 믿는다. (웃음) 어떻게 보면 어머니를 괴롭히는 걸 수도 있겠으나 난 효도의 마음으로 일하는 중이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어머니 집에 들르지만 사실 영화를 찍을 때만큼 많은 시간과 대화를 나누진 못한다. 이렇게 말하니까 불효자 같긴 한데. (웃음) 특히 이번에 함께 연기를 하면서는 난생처음으로 어머니의 눈을 깊게 바라봤다. 그동안 어머니와 제대로 눈 마주친 적이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어머니와의 시간을 이제야 직면한다는 느낌이 강렬히 들었다. 또 지난 작업에서 관객들의 호응을 들으신 어머니가 정말 큰 행복을 만끽하셨다. 내가 본 어머니의 모습 중 가장 행복해 보이셨다. 그래서 이번에도 출연을 부탁하게 됐다. - 다른 배우들과 그렇듯 어머니와도 사전 대본 리딩 같은 절차를 거치는지. = 하지 않는다. 1, 2부에도 다큐멘터리적 접근법을 가미했긴 하지만 3부는 대본이 아예 없었다. 정말 대책 없이 찍었다. (웃음) 어머니께 시나리오를 보여드리지 않았고 전작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우리가 대화할 장소들을 먼저 정한 후에 거기서 그냥 열심히 대화했다. 실컷 이야기 나누며 촬영한 다음에 편집하는 방식이었다. - 1, 2부의 주인공인 의상학도 민주, 연기학도 승주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했나. = 또 다른 ‘신동민’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만약 어머니가 낳지 못했던 아이가 딸이었다면, 내가 딸로 태어났다면 어땠을지 궁금했다. 다른 작품에서 만났던 강민주 배우 겸 프로듀서, 이금주 배우와 함께 캐릭터 구축을 시작했다. 이들은 실제 의상학도, 배우들이다. 그들의 삶을 영화에 그대로 반영한 셈이다. 혹자는 영화를 너무 대충 만드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웃음) 그러나 영화란 내가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기보단 사람들의 삶을 콜라주 하는 작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나로부터 시작했으나 종국엔 그들과 나의 접점이 생겨났다. 덕분에 3부의 혜정과 동민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었다. - 각 단락의 끝마다 유령이 등장한다. 1부에서 모양이 불특정한 검은색 형체였다가 3부에 가까워질수록 명확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 기획의 첫 단계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 장면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영화에 되살리고 싶었다. 두 분의 대화 시간을 나뿐 아니라 관객들도 체험해 주길 바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문득 아버지와 내 외양이 참 닮았다고 느꼈다. 코, 손톱이나 특히 두상이 비슷했다. 그래서 그린스크린에서 추출한 내 신체와 영정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을 합성해서 유령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역순으로 유령의 형태를 주조했다. 쉽사리 정의되지 않는 내 마음 같기도 하고, 심장이나 실타래 형태 같기도 한, 친근하고 낯설면서 이질적이고 귀엽기까지 한 불확실의 형체를 만들게 됐다. 너무 난해한 설정이라서 전문가인 이해미 애니메이터님께 큰 도움을 받았다. (웃음) - 3부의 후반부, 아버지의 유골이 뿌려진 산기슭에서 어머니와 긴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모자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산의 풍경만 길게 이어진다. = 실제로 아버지의 유골을 그 산속에 뿌려드렸는데, 이 사실이 늘 부끄러웠다. 유골을 강에 뿌려 달라고 하셨는데 당시 상황이 너무 힘들었던 터라 계단 옆 나무쯤에 뿌려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나무 옆의 유골이 산 곳곳, 강까지 퍼지지 않겠나. 그렇게 아버지의 모습이 산이 되고 강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기리는 장면에서 특정 부분을 촬영하기보단 산의 전체 모습을 찍게 됐다. 그 위로 올라오는 자막은 아버지의 실제 유서다. 이렇게까지 아버지의 개인사를 영화에 투영해도 될지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뭐 아들로서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나. (웃음) 전작부터 그랬지만 최근의 작업은 일종의 증언집이다. 아버지가 여기에 살아있었단 사실을 잊지 않고 남기고 싶다. - 가족에 관한 이야기, 3부 구조 등 특징적인 내용과 형식을 계속 고수하려 하나. = 구체적인 방법론을 추구하진 않는다. 굳이 특정하자면 사람을 찍고 싶다는 것뿐이다. 나중엔 공포영화 형식도 찍어보고 싶다. 이번에 유령도 등장시켜 봤으니 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사실 지금 말하던 중에 문자 하나를 봤는데 좋은 소식을 확인했다. 단편영화 제작지원에 선정됐다고 한다. 겹경사네. (웃음) 차기작 얘기 중에 마침 이런 일이! 말 나온 김에 설명하자면, 차기작에선 성남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들을 촬영해 보려 한다. 앞으로도 내가 보는 사람들과 내가 찍고 싶은 사람들을 영화로 잘 만들어 보겠다.

[비평] 그럼에도 '드림'을 긍정하는 이유

<드림>이 받은 혹평 중에는 이병헌 감독의 장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극한직업>(2018), <바람 바람 바람>(2017) 등 전작에서 선보인 시원한 유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확실히 웃음 측면에서 <드림>은 전작들과 결이 다른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병헌표 웃음’이 줄었다는 것이다. 집의 부재가 가져온 변화 이병헌표 웃음은 뭘까. 그의 인물들은 뻔뻔한 소리를 또박또박 쉴 새 없이 떠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주로 불리할 때) 어이없는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때때로 고함에 상욕까지 시원하게 쏟아낸다. 그들은 속물스럽지만 귀엽다. 그러나 이병헌 코미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조적인 유머’다. 그들은 자신의 한심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대해 물색없이 떠든다. 상황의 엿같음을 폭로하면서도 별일 아니라는 듯 능청을 떤다. <드림>에서 소민(아이유)이 “페이가 열정을 못 따라와서 열정을 페이에 맞췄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놀리는 과정에서 웃음이 터져나온다. 이때 웃음은 상처와 꼭 닿아 있다. <극한직업>의 형사들은 범인은 못 잡았는데 치킨은 잘 팔리는 아이러니에서 웃음을 만들어낸다. 시뻘건 상처를 시원하게 드러내서 선선한 바람을 쐬는 것. 잠시 따가움을 견디고 딱지가 앉도록 기다리는 것이 이병헌표 웃음의 작동 방식이다. 유머는 일상의 불행을 비료 삼아 만개한다. <극한직업>에서는 마약단속반의 무능력함과 궁핍함이, <스물>(2014)에서는 실수를 남발하는 서투른 사랑이 유머의 재료가 됐다. 그리고 홈리스 월드컵을 다룬 <드림>의 메인 테마는 ‘집의 부재’다. 여기서 잠시 이병헌 영화에서 ‘집’의 의미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2019)에서 은정(전여빈)이 친구들에게 안겼던 곳. <드림>에서 홍대(박서준)가 다음 행선지를 결정한 곳. 이곳들이 이병헌의 집이다. 단순히 가족(family)이나 주택(house)이 아니고 가정(home)이라 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지친 마음이 쉬어가는 곳. 나의 사람으로 채워진 나의 공간.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에서 온전한 집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엄마는 아들에게 충분한 애정을 줄 여력이 없고(<스물>의 동우(이준호)) 아이의 친부는 떠나버리고(<멜로가 체질>의 한주(한지은)) 남편은 아내 눈치를 살피느라 전전긍긍이다(<극한직업>의 고 반장(류승룡)). 이들의 집은 어딘가 결함이 있거나, 존재감이 없다. 그런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서로를 보듬는 것이 이병헌 영화의 줄기를 이뤄왔다. 무너진 집에서 걸어나와 새로운 집을 꾸려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는 해왔다. 그런 이병헌의 세계에 처음으로 ‘홈리스’가 등장했다. 이들은 그간 보아왔던 주인공들과 좀 다르다. 조금씩 무너지고 금이 갔지만 그래도 존재했던 집은 이제 완전히 허물어져 공터만 남았다. “우리 집은 이상하다”는 불평도 못하는 상황. 이병헌이 홈리스를 주제로 각본을 쓰게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관련 실화도 있고, 우연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가 늘 작품 안에 녹여왔던 ‘온전한 집의 부재’라는 테마를 끝까지 밀고 나가 마침내 이곳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가 이런 생각과 의도로 소재를 골랐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병헌의 영화적 세계를 생각할 때, 집이 불완전한 것을 넘어 완전히 사라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에 끌리게 된 것은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벼운 웃음의 자리를 메운 것 홈리스의 등장은 영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병헌표 웃음은 작동을 멈추기 시작한다. <드림>은 홍대와 소민을 제외한 홈리스 선수들의 비중이 높다.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이 너무 적다. 간혹 웃기더라도, 삶에 진득하게 붙어 있는 대신 가볍게 스쳐가는 내용(예를 들어 감수성이 풍부한 조직폭력배)이다. 반면 다른 인물들은 여전히 이병헌표 유머를 던진다. 능력만큼 벌지 못하는 소민, 엄마의 합의금을 벌어야 하지만 욱하는 성격을 못 참는 홍대, 도망 중에도 연애를 하는 홍대 엄마(백지원)의 상황은 웃음으로 연결된다. 그나마 홈리스 선수 가운데 유효한 유머를 터뜨리는 것은 귀가 아픈 범수(정승길)다. 거리 생활로 귀를 제때 치료하지 못한 아픔은 유머로 모습을 바꾼다. 그러나 그가 동료들 가운데 사실상 유일하게, 연인이 기다리는 자신만의 단단한 집을 찾은 인물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병헌표 웃음은 사실 집의 ‘결함’이 아니라, 집의 ‘존재’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을까.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버티고 선 집 때문에 이들이 웃고 까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이병헌은 집에 간 금을 두고 소란스럽게 놀려대지만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진 공터를 보고서는 웃지 못한다. <드림>에서 이병헌표 웃음은 왜 줄어들었나. 단순히 홈리스라는 약자를 소재로 해 조심스러워 그렇다는 설명은 투박하다. 전작에도 약자들은 많이 등장했으니까. 중요한 건 그들이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 아니라 집이 없다는 점이다. 이병헌에게 집은 이야기의 시작이면서, 웃음이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인 것 같다. 터전이 없고, 딸과 이별하고, 가족에게 내쳐진 사연 앞에서 이병헌표 웃음은 작동하지 않는다. 아니, 작동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병헌은 <드림>에서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지 않은 게 아니라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것이라고 짐직한다. 이병헌 감독의 흥미로운 선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드림>이 이병헌의 필모그래피에서 의미 있는 도전이자 도약이라고 생각한다. 집의 결핍을 다루던 연출자에게 집의 상실은 언제고 만나야 할 주제가 아닐까. 그것과 마주했다는 점에서 이병헌은 자신의 세계를 넓히며 나아가고 있다. 나는 그가 <드림>을 통해 자신의 영화적 세계에서 가장 무겁고도 진지한 화제와 대면했다고 느낀다. 다만 그가 이것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소재에 눌려 <드림>은 종종 경직돼 보인다. 홈리스를 앞에 두고 관객을 웃겨야 할지 울려야 할지 영화가 고민하는 듯하는 순간이 보인다. 마지막에는 신파와 감동 코드로 달려간다. 자주 깔리는 웅장한 음악, 마치 이렇게 보라고 주문하는 듯한 축구 해설자의 멘트(“한국팀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드림>의 후반부는 담백한 개그를 구사하는 이병헌의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느끼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드림>을 긍정한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인상은 영화 속 한국팀의 경기와 비슷하다.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다. 섣불리 말하기 어렵지만 <드림>으로 이병헌은 여태 들어본 적 없는 혹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극한직업>이 거둔 성과가 크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게, 이번에도 영리한 개그로 관객을 웃기는 매끈한 작품을 들고 나타날 것이라 짐작했던 내게, 어려운 길을 택하고 사정없이 깨지는 이병헌은 처음으로 흥미로운 연출자로 다가온다. 그의 영화에 또 어떤 이들이 초대될지, 그들이 자신의 불완전한 집을 어떤 방식으로 끌어안을지 궁금하다. 이병헌의 다음 영화가 기다려진다.

[김조한의 OTT 인사이트] 오리지널 콘텐츠 줄이는 디즈니의 승부수

글로벌 OTT 서비스의 양대 산맥인 디즈니+의 1분기 실적이 공개되었다. 가입자 증가 수치보다 얼마나 수익을 올리느냐가 중요한 시대라고 하지만, 400만명의 구독자가 줄어든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디즈니+는 지난 4분기에도 이미 가입자 240만명을 잃었다. 600만명의 구독자를 다시 모으는 것도 어려운데 오히려 더 감소한 건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디즈니+의 총가입자 수는 1억5780만명이다. 디즈니+의 하락세는 지난해 12월 말의 가격 인상 여파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기존 요금제에 3달러를 추가해 월 10.99달러로 변경했고, 기존 요금으로는 광고를 봐야만 콘텐츠를 볼 수 있다. 가입자가 줄었고 수익도 당장은 나아지기 어려운 상황이라 디즈니+는 북미에서 직접 제작하는 분량을 줄이고, 특정 콘텐츠를 3분기에 제거하는 결정도 내릴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외부 유통을 더 늘리지 않을까. 디즈니의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자체를 줄일 예정이라 밝힌 디즈니의 승부수는 디즈니+보다 다양한 콘텐츠가 있고 북미에서 여전히 성장 중인 훌루에 있다. 2023년 말 출시 예정인 원앱을 이용하면 디즈니+에서 훌루의 콘텐츠를 볼 수 있고 훌루에서도 디즈니+의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다. 현재 훌루의 북미 가입자는 4820만명이다. 아시아에서는 디즈니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플랫폼인 훌루의 콘텐츠를 스타 채널에서 일부 감상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불가능했다. 아시아에서 실험을 하면서 디즈니+가 디즈니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 디즈니+는 넷플릭스, 그리고 합병이 완료된 디스커버리 워너브러더스의 맥스, 파라마운트+와의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방송사 콘텐츠와 오리지널 콘텐츠가 많은 훌루와의 결합은 최근 주춤한 디즈니+ 오리지널 콘텐츠에 아쉬움을 느낀 가입자들에게 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제작한 디즈니+ 오리지널 콘텐츠는 훌루에서 볼 수밖에 없었는데 미국 디즈니+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온다는 것도 우리에겐 환영할 만하다. 다만 훌루의 지분을 33% 가지고 있는 미국 1위 케이블TV 사업자 컴캐스트의 반응이 관건이다. 그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이 전략이 잠깐의 전략이 될지, 앞으로 디즈니의 확고한 전략이 될지 판가름날 것이다.

씨네21 추천도서 -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 허진 옮김 / 다산책방 펴냄 아일랜드의 어느 가난한 집 소녀가 어머니의 출산을 앞두고 여름 동안 먼 친척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겨진다. 친척 집으로 가면서 소녀는 아주머니가 자신에게 팬케이크를 구워줄지, 아니면 밭에서 돌을 고르는 일을 시킬지 궁금하다. 낡은 집인지 새집인지, 화장실은 집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도 궁금하다. 드디어 만나게 된 아주머니는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주고, 욕조에 아낌없이 물을 채워 목욕시켜주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발가락이 길고 멋지다고 해준다. 아저씨는 소녀가 달리기하는 시간을 측정해주고, <빨강머리 앤>의 매튜 아저씨처럼 새 옷을 사준다. 누군가 소녀에게 무례하거나 대답하기 곤란한 말을 하면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소녀를 칭찬하며 보호해준다. <맡겨진 소녀>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영화 <말없는 소녀>의 원작 소설이다. 카드 게임에서 소를 잃은 아버지와 집안일이며 육아에 시달리는 어머니 아래서 여유 없이 자란 소녀의 처지가 어떤지, 인생 처음으로 여유롭고 다정한 공간으로 가게 된 소녀의 마음이 어떤지 몇 마디 묘사와 대화만으로도 마음속 깊이 사무친다. 100페이지가 안되는 분량이지만 그 몇배의 이야기가 여백에 쓰여 있다. 우물 주변의 고요한 공기, 옷을 사고 나오는 길에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 간식을 실컷 사고도 남은 잔돈이 짤랑거리는 소리. 그렇지만 풍요로운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에도 죽음이 슬그머니 끼어든다. 1981년 단식투쟁을 하던 어느 공화주의자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가 전해지는가 하면, 동네 이웃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밭을 별안간 휘감는 거센 바람처럼 닥친다. 불편한 장례식에 이어지는 노골적 폭로 앞에, 소녀는 새로운 비밀을 품게 된다. 아무것도 숨긴 것이 없다고 믿었던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집에도 사실은 숨긴 일이 있었다는 비밀. 그렇게 훌쩍 자란 소녀는 달리기 속도가 더 빨라지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워 원래의 집으로 향한다.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30쪽 “나는 물을 여섯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거신: 바람의 아이' 신창섭 감독, 신주영 그리메 대표, 가족이 함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것

<거신: 바람의 아이>를 만든 애니메이션 제작사 ‘그리메’는 본사가 제주도에 있다. 제주의 문화를 가까이서 접한 신창섭 감독과 신주영 대표는 영등할망신화와 돌하르방의 기원을 기반으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거신: 바람의 아이>에서 영등과 유랑은 해적들로부터 제주 전설로 내려오는 ‘바람의 신주’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해적들이 로봇 ‘적귀’와 함께 나타나자 이와 대적하기 위해 꺼낸 카드가 바로 돌하르방 로봇이다. 신창섭 갑독과 신주영 대표는 작품의 아이디어부터 캐릭터 디자인, 연출에 이르기까지 긴밀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거신: 바람의 아이>를 완성했다. - <거신: 바람의 아이>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신창섭 감독 회사가 제주도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하르방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르방을 모티브로 로봇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여기서 출발해 하르방이 예전엔 골렘처럼 움직이는 거대한 석상이었으며 사람들이 그걸 보고 신이라고 여겼다는 판타지적 아이디어를 가미했다. 영등할망신화에서의 할망도 단순히 할머니를 지칭하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렇게 둘을 연결지어보았다. 신주영 대표 감독님이 주신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스토리의 얼개를 짰다. 감독님과 형제고, 어릴 때부터 시나리오와 그림을 자주 주고받아온 터라 이런 과정이 익숙하다. - 제주도 신화와 하르방에 대한 자료조사가 필수였겠다. 신주영 대표 그렇다. 제주도 신화와 하르방에 관한 책자가 잘 나와 있는 편이라 그걸 참고했다. 현재 제주도에서 생활하는데 알고 보니 하르방의 종류만 40여종에 이르더라. 이를 바탕으로 감독님이 로봇을 디자인했다. <거신: 바람의 아이> 후속편에선 더 다양한 하르방 로봇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 돌하르방 로봇인 ‘거신’과 해적들의 로봇인 ‘적귀’의 디자인 과정이 궁금하다. 신창섭 감독 거신의 경우 돌하르방처럼 보이면서도 로봇의 움직임을 잘 구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내가 기계공학도가 아니다보니 로봇의 구조, 관절의 움직임 등에 관한 공부가 필요했다. 거신과 적귀는 기본적인 구조는 같지만 돌과 철 등 재질 면에서 차이가 있다. 신주영 대표 컬러도 하르방이 검은색이라면 적귀는 이와 대비되는 붉은색을 사용했다. 거신은 신주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반면 적귀는 화력으로 움직이는데 연료가 다하면 더이상 힘을 쓸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 두 로봇만큼 주목해야 할 캐릭터가 바로 영등과 유랑이다. 신창섭 감독 영등은 영등할망신화에서 그대로 차용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유랑도 가볍게 묘사하고 싶지 않아서 작명부터 공을 들였다. 신주영 대표 복장도 고려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 구상했다. 나중에 여신이 등장했을 때에도 의상이 어색해 보이지 않게 심혈을 기울였다. - 과학자들이 타임 슬립을 했다는 설정이다 보니 고려 시대에 로봇뿐만 아니라 킥보드 같은 현대 문물이 등장한다. 신구 문화를 어느 정도로 융합할지 고민이 됐겠다. 신창섭 감독 그걸 조율하는 게 쉽지 않더라. 잘못하면 과하다는 피드백이 올 것 같아 적절히 몇몇 아이템만 가져왔다. 킥보드는 워낙 유행이고 요즘 많이들 이용해서 넣어보았다. (웃음) - 제주도의 실제 명소가 극의 배경이다. 신주영 대표 가장 우려한 것이 제주도 풍경을 그저 흉내만 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작팀과 초가집, 돌담의 구멍과 높이 등의 디테일까지 꼼꼼히 확인하고 동선까지 파악해 시나리오를 짰다. 신창섭 감독 대표님이 제주도는 초가 지붕을 엮는 방식도 다르다고 했는데 직접 가서 보니 알겠더라. 하지만 한 화면에 제주의 명소들을 다 보여주려니 한계가 있어서 성산일출봉과 용두암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식으로 압축해서 묘사했다. 감안해서 봐주길 바란다. - 거신과 적귀가 맞붙는 액션 신들에 공을 들인 게 느껴졌다. 신창섭 감독 로봇의 움직임도 고민이 많았는데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움직임을 너무 크게 가져가면 안되겠더라. 그럼에도 마지막 액션 신에선 스피드가 느껴졌으면 해서 속도감을 강조했다. 개인적으로 거신이 물속에서 튀어나오는 신을 좋아하는데 관객이 어떻게 봐줄지 궁금하다. 여신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신비한 느낌을 주려고 지직거리는 듯한 질감을 줬다. 신주영 대표 타격감을 주기 위해 거신의 움직임을 느리게 준 감이 있는데 그러려면 초당 프레임 수, 장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제작비도 오르는 거라 일정 부분 타협을 봐야 했다. 그래도 콘티보다 추가한 신들도 있고 최종 장 수도 1만 5천매로 평균 애니메이션보다 많다. - 제작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지역특화 콘텐츠 개발 지원사업으로 선정됐으나 미완성으로 인해 지원금 환수 조치가 됐고,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기도 했다. 신주영 대표 제주도 신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 다들 지역 만화라는 인식이 있어 투자받기가 어려웠다. 제작비가 부족하다보니 생각보다 완성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작품을 알리기 위해 <거신대전>이란 제목으로 웹툰을 연재하며 인지도를 쌓았고, 크라우드 펀딩을 열었을 때 다행히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다. 신창섭 감독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결국 <거신: 바람의 아이>를 완성한 것에 관해 팀원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아마 같은 상황에서 포기를 택할 이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애니메이터로서 죽기 전에 내 것 하나라도 남겨보자는 마음으로 다들 열심히 했다. 관객이 우리 영화에 관심을 가져주고, 계속 차기작을 선보일 수 있다면 그만큼 보람된 일도 없을 것 같다. 신주영 대표 우리 형제뿐 아니라 아내들도 다 애니메이터인데 이번 작품에 함께 참여했다. 가족이 함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게 어찌 보면 그리메의 자부심이다.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서로 힘내자며 최선을 다해 작업했다. 최근의 애니메이션들은 주로 일본에서 기획하고 국내로 외주 요청이 들어오거나 국내에서 기획한 작품일지라도 일본에 외주를 주고 그게 다시 한국으로 역외주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거신: 바람의 아이>가 국내에서 기획부터 전부 진행한 작품으로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길, 이런 시도를 하는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거신: 바람의 아이>를 통해 제주의 신화가 더 많이 알려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리뷰] ‘거신: 바람의 아이’, 제주 신화와 상징의 흥미로운 인용, 다소 평범한 전개

오랫동안 전설 속 ‘바람의 신주’를 찾아 헤매던 과학자들이 동굴 속에 잠들어 있던 신주를 발견한다. 마침내 신주와 마주했다는 감격에 잠긴 것도 잠시, 갑작스레 신주가 작동하며 과학자들은 과거로 시간 이동을 한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1230년대 탐라. 과학자들은 시대상에 맞게 저마다 외형과 직업을 바꿔가며 현실에 적응한다. 가령 과학자 도무(권성혁)는 대장장이로 분해 간간이 현대의 문물을 만들어 선보이는데, 마을의 소년 유랑(심규혁)이 이에 관심을 보이며 도무와 가까워진다. 어느 날, 유랑은 해적에게서 도망치다 마을에 들어선 한 소녀를 구출한다. 알고 보니 그는 신주를 지켜야 하는 운명의 소녀 영등(민아)이었다. 세계를 파괴할 힘을 가진 신주를 얻기 위해 해적들은 포기하지 않고 탐라로 다시 쳐들어온다. ‘적귀’에 맞서기 위해 유랑과 도무는 숨겨뒀던 거대한 돌하르방 로봇 ‘거신’을 선보인다. <거신: 바람의 아이>는 바람과 바다의 여신 영등할망신화를 바탕으로 돌하르방의 기원에 관해 판타지적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이다. 제주에 기반을 둔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 ‘그리메’에서 아이디어 기획, 캐릭터 디자인부터 시작해 완성한 창작 극장 애니메이션이다. 그리메는 극장판 공개 전부터 영화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웹툰 <거신대전>을 연재하고 캐릭터 페어에서 돌하르방 로봇을 선보이는 등 일찍부터 관객에게 <거신: 바람의 아이>에 관해 알려왔다. 제주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만큼 섬에 전해져 내려오는 각종 신화, 제주의 사투리, 40여종에 이르는 돌하르방의 외형뿐만 아니라 곶자왈, 비양도, 성산일출봉, 용두암, 용연계곡 등 자연경관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러면서도 1230년대에 로봇이 등장하는 상황이 어색하지 않도록 과학자들이 타임 슬립을 했다는 나름의 장치를 배치했다. 적귀와 거신이 맞붙는 해상 전투 신이 극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데, 강점이 다른 두 로봇의 집요한 대치가 관객의 집중도를 높인다. 후속작의 존재가 예측될 정도로 서사 확장의 여지 또한 분명하다. 지역 신화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거신: 바람의 아이>의 장점이며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된 개성이지만 완성도 면에서의 경쟁력은 다소 부족해 아쉬움이 남는다.

[김세인의 데구루루] 이야기의 빛과 맛

2022년 여름, 당근마켓에서 2만원 주고 산 소파에 앉아 풍경 소리를 들으며 한 계절을 보냈다. 당시 나는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 출품을 목표로 이야기를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크게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단지 잠자코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바람이 가로질러가며 풍경을 울리는 소리를 듣다보면 이야기도 불현듯 방문할 것 같았다. 꽤 간절하기도 하고 심드렁하기도 했다. 나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일들을 바라보다 보면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이야기는 아무 힘이 없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감사하게도 많은 축복과 응원을 받았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안에서는 이야기에 대한 경멸이 커졌다. 다시 이야기라는 것을 믿고 싶었기에 그 방문이 간절했고 끝내 믿을 수 없을 거라 예상했기에 심드렁했다. 그래도 뭔가 떠오르기는 했다. 중년 여성 ‘동경’과 어린이 ‘을래’라는 두 인물 사이에 흐르는 시간에 대한 것이었는데 트리트먼트가 완성되었지만 스스로도 도저히 그 인물들과 이야기가 믿겨지지 않아 아무렇게나 끄적인 유치한 낙서쯤으로 여겨졌다. 당장에 부산으로 가야 할 시기는 가까워져가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믿기지 않는데 어떻게 필름마켓에서 영화에 대해 소개할 수 있겠는가? 사기꾼이 될 순 없었다. 만화책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에서 마스다 미리 작가는 뭐라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부지런히 동호회에 참여한다. 그녀는 동호회의 주제에는 전혀 흥미가 없고 혼자 가는 것도 싫고 어두운 것도 무섭다. 그러나 간다. 성실한 회사원이 출근을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간다. 이윽고 ‘쌍둥이바람초 관찰 동호회’에서는 ‘5월이 되면 싹 사라진다’는 평범하지만 설레는 한 문장을 만나고, ‘밤의 산을 하이킹 동호회’에서는 왠지 자신이 몹시 약한 존재로 느껴지는 마음을 만난다. 나도 이제는 소파에서 일어나야 할 시기가 되었다. 마스다 미리 작가처럼 떠난다고 별 소득이 있을까 하는 회의감을 품고 무작정 영화의 배경인 원주로 향했다. 일단 도착하자마자 물회를 한 그릇 먹고 이곳저곳 돌아다녀보았지만 역시나 나에게 채집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무의미하게 지났다.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가려던 차에 구룡사 근처의 계곡에서 마침내 나는 뭔가를 발견했다. 그건 초록빛이었다. 그게 뭐? 싶겠지만 나에게는 귀한 발견이었다. 이야기가 글자에서 감각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에 우연하게 흔들리는 투명한 초록빛 수면 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렀다. 트리트먼트에는 그와 닮은 장면이 있다. 이야기가 단순히 자음, 모음의 조합이 아닌 실체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 실체에 다가가고 있었다. 이야기를 쓰고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작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이미 놓여 있는, 이야기의 실체를 더듬고 받아쓰는 것이 아닐까. 내 손으로 만든 것들은 무엇이든 엉성하고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이야기와 영화는 이미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나는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편안해진다. 흔히 신들린 듯 글을 쓴다고 하지 않나. 신과 같은 이야기가 있고 작가는 보이는 대로 쓴다. 원주에서 초록빛을 발견한 것은 전설의 괴수 ‘켈피’의 머리카락 정도 본 격이니 이제 추적할 일만 남았다. 집에 돌아와 다시 이야기에 대해 의심이 들 때면 풍경 소리를 틀어놓고 소파에 누워 계곡의 초록빛을 떠올렸다. 그리고 트리트먼트 속 장면들을 떠올리다 잠이 들었다. 한참 그렇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꿈과 장면이 섞여 잠결에 ‘아, 이것이 실제 일어났던 일인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혼잣말을 했다. 얼마 전 처음으로 봄베이 하이볼을 마셨다. 봄베이 하이볼을 한입 마시자마자 속으로 ‘이거 동경(시나리오 속 인물명)의 맛이다’라고 말해버렸다. 참 이상하다. ‘동경에게 맛이 있다면 이런 맛이겠다’도 아니고 ‘동경의 맛이다’라는 확언이라니.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까. 봄베이 하이볼에서는 허브 입욕제와 목초액 향이 났다. 입안에 맴도는 맛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렸을 적 피부병을 앓았기 때문에 입욕제와 목초액을 푼 욕조에 자주 들어가 있었다. 열기로 가득 찬 욕실 안에서 초록색으로 흔들리는 하반신은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다리를 움직이면 물속의 초록색 다리는 어쩐지 한 박자 늦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나의 하반신을 노려보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다리를 흔들어보거나 양손을 물에 담갔다 뺐다를 반복하곤 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지난해 여름 떠올랐던 ‘동경의 날’(프로젝트명)의 빛이 왜 초록빛이어야 했는지. 왜 동경의 맛이 봄베이 하이볼 맛인지. 동경과 을래 두 사람 사이의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시간과 기억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신비로운 이야기는 꼭 그 빛과 맛이어야 했다. 빛도 맛도 분명한데 이야기의 실체를, 이야기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요즘 다큐멘터리를 자주 본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인물과 상황 그리고 갖가지 요소들을 세포로 환원해 오롯한 하나의 생명체가 되는 이야기를. 갈라진 다리 근육으로 마구 내달리는 이야기,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이야기, 드러누워 꼬리를 살랑거리는 이야기, 깊은 심해를 유유히 헤엄치는 이야기. 촉수를 곤두세우고 먹이를 잡아먹는 이야기. 진흙탕을 뒹구는 이야기, 구름 위를 비상하는 이야기. 호수 위에 잠시 고개를 내밀고 사라져버리는 이야기. 고유한 이야기들은 눈 밝은 작가에게 목격되고 쓰여질 것이다. 나는 꽤나 용맹한 이야기와 눈이 마주칠 것을 기대해본다. 그때까지 루테인을 잘 챙겨 먹어야겠다.

[인터뷰] 한국경쟁 대상 ‘당신으로부터’ 신동민 감독, 인물들의 실제 삶과 시간을 담다

올해 전주영화제 한국경쟁 대상의 영예는 신동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당신으로부터>에 돌아갔다. 첫 장편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가 동일 부문 대상에 선정된 이후 3년 만이다. 이로써 신동민 감독은 해당 대상을 2회 수상한 최초의 감독이 됐다. <당신으로부터>의 형식과 내용이 전작과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이 의미 있는 족적이다. 먼저, 신동민 감독의 실제 어머니 김혜정 배우가 전작에 이어 다시 등장한다. 신동민 감독이 출연해 김혜정 배우의 아들 역으로 연기하기까지 한다. 다만 <당신으로부터>에 연기라는 단어를 무턱대고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3부엔 신동민 감독이 실제로 겪었던 아버지의 상실, 전작에서 경험한 어머니와의 영화 촬영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 2부에서도 신동민 감독의 주변인들이 각자의 일상을 영화에 녹여낸다. 시상식 직후 신동민 감독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본인의 연출론을 진중히 읊어냈다. - 3년 전에 이어 다시 대상을 수상한 소감은. = 3년밖에 안 지났으니 절대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웃음) 솔직히 사람이니만큼 아주 조금의 기대를 하고 시상식에 오긴 했지만 다른 감독들 축하해주자는 마음이 컸다. 이번 작품은 영화를 만든다기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 삶과 시간을 담는다고 생각했다. 나와 어머니를 포함해서 말이다. 관객이 우리 모자, 우리 배우들의 삶을 응원해준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더 기쁘다. - 실제 어머니 김혜정 배우의 출연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 주변인들에게 ‘왜 네 일기장을 영화로 만드냐?’란 말도 듣는다. (웃음) 그러나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GV에서 어머니에게 질문하며 우는 관객이 종종 계셨다. 본인의 삶과 너무 닮아 있다는 이유였다. 저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나의 시간, 어머니의 시간이 타인의 삶과도 맞닿을 수 있겠단 생각이 깊어졌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선 아예 나와 어머니의 GV 장면을 넣기도 했다. - GV 장면에서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영화에서 실제 어머니의 모습을 구현하고 싶단 생각에서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이번 영화엔 ‘실제 어머니 모습’이 얼마나 구현된 것 같나. = 어머니의 진짜 모습을 구현한다는 목표가 나쁜 건 아니지만, 다소 어리석은 생각인 것 같다. 전작의 어머니를 보면서도 영화 속 어머니가 실제 본인이면서 본인이 아닌 순간이 있다고 느꼈다. 내가 명확히 ‘이건 우리 엄마야!’라고 단언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느끼는 누군가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관한 생각은 지웠다. 지난 10년은 이런 진위의 판단에 혈안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가치 판단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고 느낀다. - 가족이라도 동업은 피하라는데. 어머니와의 연기 협업은 순탄했나. = 그렇다고 믿는다. (웃음) 어떻게 보면 어머니를 괴롭히는 걸 수도 있겠으나 난 효도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중이다. 한달에 한두번은 꼭 어머니 집에 들르지만 사실 영화를 찍을 때만큼 많은 시간과 대화를 나누진 못한다. 이렇게 하니까 불효자 같긴 한데. (웃음) 특히 이번에 함께 연기하면서는 난생처음 어머니의 눈을 깊게 바라봤다. 그동안 어머니와 제대로 눈을 마주친 적이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어머니와의 시간을 이제야 직면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1, 2부의 주인공인 민주, 연기학도 승주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했나. = 또 다른 ‘신동민’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만약 어머니가 낳지 못했던 아이가 딸이었다면, 내가 딸로 태어났다면 어땠을지 궁금했다. 다른 작품에서 만났던 강민주 배우 겸 프로듀서, 이금주 배우와 함께 캐릭터 구축을 시작했다. 이들은 실제 의상학도, 배우들이다. 그들의 삶을 영화에 그대로 반영한 셈이다. 혹자는 영화를 너무 대충 만드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웃음) 그러나 영화란 내가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기보단 사람들의 삶을 콜라주하는 작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 단락의 끝마다 유령이 등장한다. 1부에서 모양이 불특정한 검은색 형체였다가 3부에 가까워질수록 명확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 기획의 첫 단계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 장면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영화에 되살리고 싶었다. 두분의 대화 시간을 나뿐 아니라 관객도 체험하길 바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문득 아버지와 내 외양이 참 닮았다고 느꼈다. 코와 손톱, 특히 두상이 비슷했다. 그래서 그린 스크린에서 추출한 내 신체와 영정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을 합성해서 유령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역순으로 유령의 형태를 주조했다. 쉽사리 정의되지 않는 내 마음 같기도 하고, 심장이나 실타래 형태 같기도 한, 친근하고 낯설면서 이질적이고 귀엽기까지 한 불확실한 형체를 만들게 됐다. - 3부의 후반부, 아버지의 유골이 뿌려진 산기슭에서 어머니와 긴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모자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산의 풍경만 길게 이어진다. = 실제로 아버지의 유골을 그 산속에 뿌려드렸는데, 이 사실이 늘 부끄러웠다. 유골을 강에 뿌려달라고 하셨지만, 당시 상황이 너무 힘들었던 터라 계단 옆 나무께에 뿌려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나무 옆의 유골이 산 곳곳, 강까지 퍼지지 않겠나. 그렇게 아버지의 모습이 산이 되고 강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기리는 장면에서 특정 부분을 촬영하기보단 산의 전체 모습을 찍게 됐다. 그 위로 올라오는 자막은 아버지의 실제 유서다. 이렇게까지 아버지의 개인사를 영화에 투영해도 될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뭐 아들로서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나. (웃음) 전작부터 그랬지만 최근의 작업은 일종의 증언집이다. 아버지가 여기에 살아 있었단 사실을 잊지 않고 남기고 싶다. - 가족에 관한 이야기, 3부 구조 등 특징적인 내용과 형식을 계속 고수하려 하나. = 구체적인 방법론을 추구하진 않는다. 굳이 특정하자면 사람을 찍고 싶다는 것뿐이다. 나중엔 공포영화 형식도 찍어보고 싶다. 이번에 유령도 등장시켜 봤으니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 인터뷰 중에 좋은 소식을 확인했다. 단편영화 제작지원에 선정됐다고 한다. 차기작 얘기 중에 마침 이런 일이! (웃음) 말 나온 김에 설명하자면 차기작에선 성남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들을 촬영해보려 한다. 앞으로도 내가 보는 사람들과 내가 찍고 싶은 사람들을 영화로 잘 만들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