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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 인도에서도 말썽

X등급 상영 합법화 주장하던 등급위원장 비헤이 아난 사퇴인도영화등급위원장 비헤이 아난이 X등급 영화상영의 합법화를 둘러싼 마찰 때문에 사퇴를 선언했다. 지난해 9월 취임한 아난은 <밴디트 퀸> <엘리자베스>를 연출한 세카르 카푸르의 삼촌이자 그 자신도 1980년대까지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던 인물. 그는 1952년 제정된 인도영화 법령이 변할 때가 됐다고 주장하면서 특정 상영관에서는 소프트포르노를 상영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건의해왔다. 섹스와 누드, 폭력,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엄격히 제한하는 인도의 영화검열 기준은 보수적이기로 악명높지만, 대부분의 극장은 법망을 피해 삭제된 필름을 상영하기 때문이다. 개봉일 아침에 잘라낸 필름을 끼워놓고 지방경찰에 뇌물을 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 아난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면 합법화시킨 뒤 감시하는 편이 낫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성단체에서 아난의 사퇴를 촉구하는 등 반발이 거세지자 정부는 “포르노영화의 상영은 바람직하지도 건전하지도 않다”는 문서를 보내 아난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난의 사퇴에 대한 인도영화계의 입장은 신중한 편이다. 아난은 퇴임할 때까지도 등급위원회가 의사결정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고집한 반면, 정부는 위원회가 도덕적인 가치를 충실히 반영하는 오락만 대중에게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믿고 있다. 영화감독 시암 베네갈은 “시나리오에 필요하다면, 영화의 성(性)적 요소는 허락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지 자극을 위해서 삽입된 섹스장면은 금지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밝혔다. 여섯명으로 구성된 인도영화등급위원회는 텔레비전과 극장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를 사전심의하고 등급을 결정하는 조직. 그동안 <카마수트라>의 미라 네어와 <밴디트 퀸>의 세카르 카푸르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많은 인도 감독들이 상당 부분의 필름을 잘라내는 수모를 겪어왔다.

영국영화주간 - 8월2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홍차보다 아늑한 영국영화의 향취“음, 해가 안 나온 지 3주일째야.” “음, 30분째 기다려도 기차가 안 오는군.” “음, 할리우드영화보다는 재미없고 프랑스영화보다는 얄팍한 것 같지 않냐?” 궂은 날씨, 버릇처럼 연착되는 철도와 함께 영국영화는 영국인들의 애교어린- 없으면 심심한- 불평거리다. 이와 같은 열등감에는 할리우드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세계 시장에 나서면 약자라는 영국영화의 특수한 입지도 한몫 거든다. 하지만 국외자의 눈으로 볼 때 영국영화는 다양한 지역문화의 흔적, 절제와 야한 유머가 혼재하는 독특한 감수성, 문학과 연극의 탄탄한 전통이 제공하는 우수한 텍스트와 일급 연기의 향이 고루 담긴 한잔의 맛있는 홍차다. 주한영국문화원과 시네마테크 부산,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함께 주최하는 ‘영국영화주간’은 2000년과 2001년에 걸쳐 제작된 영국의 신작 대중영화들을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자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8월2일부터 8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8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영국영화주간’에는 국내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했던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의 2000년작 <클레임> 등 여섯편의 장편영화와 SF판타지적 상상력을 다양한 양식에 담은 여섯편의 단편이 소개된다. 서울, 부산에서 공통으로 상영되는 장편 여섯편 외에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8월 말 극장 개봉을 앞둔 부천영화제 개막작 <슈팅 라이크 베컴>이 첫날 첫회를 장식한다. 관람료는 5천원이며 예매는 인터넷(www.maxmovie.com)과 현장에서 가능하다(문의: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02-720-9782, 시네마테크 부산 051-742-5377). <섹시 비스트>(Sexy Beast)감독 조너선 글레이저/ 출연 레이 윈스턴, 벤 킹슬리/ 88분/ 2000년 <섹시 비스트>는 이상한 갱스터다. 메인 이벤트인 범죄의 실행보다 범죄의 전주와 후주가 훨씬 길고 중요한. 고단한 암흑가 경력을 마감하고 스페인의 빌라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은퇴생활을 즐기는 개리 도브(레이 윈스턴)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찾아온다. 동업자들 사이에서 ‘사이코’로 통하는 위협적인 사나이 돈 로간(벤 킹슬리)이 보스가 계획중인 범죄에 그를 끌어들이려고 방문한다는 것. 영화는 개리의 은퇴생활, 돈의 위협, 런던의 범죄로 이뤄진 3막 구조를 취하지만, 불길한 안개처럼 영화 전체를 뒤덮고 지배하는 것은 맹목적 적개심과 파괴 본능으로 날뛰는 야수 같은 남자 돈이 주도하는 2막이다. “말해봐, 난 남의 얘기 잘 들어주는 인간이야… 닥쳐!”와 같은 대사를 표창처럼 내뱉는 벤 킹슬리의 연기는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얼마나 미미했는지 절감하게 한다. 데뷔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는 심리적 긴장을 최고조로 이끄는 시각적 감수성으로 기네스맥주 광고 등 CF 명감독으로서 쌓은 공력을 증명한다. <도니 다코>에서 종말을 예언했던 괴물과 매우 닮은 토끼 사나이도 우정출연(?)한다.<한밤의 쇼핑>(Late Night Shopping)감독 솔 메츠슈타인/ 출연 루크 드 울프슨, 케이트 애시필드/ 90분/ 2000년 생전 해외여행이라곤 가지 않으면서도 늘 시차에 시달리는 청춘남녀가 있다. 전자제품 공장의 야간 작업조 조디, 문닫은 심야의 슈퍼마켓에서 상품을 진열하는 빈센트, 병원의 포터로 일하는 숀, 통신회사의 전화 교환원 레니는 남들이 퇴근할 때 출근해 새벽녘에 퇴근하는 올빼미 인생들. 빈센트는 동틀 무렵 자포자기한 여자들을 유혹하는 데에 선수고, 3주째 연인의 얼굴을 못 본 숀은 그녀가 아직 같은 집에 사는지 의심하고, 포르노 잡지에 기고하는 소심한 레니는 모든 여자가 에로영화 포즈로 보이는 환각에 시달리고, 냉소의 여왕 조디는 세 친구에게 칼같은 조언을 한다. 같이 일하는 교환원에게 교대 직전 들르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친구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관계를 맺은 네 젊은이는 약속도 없이 매일 어울려 수다를 떨고 더 나은 인생을 상상한다. 마주앉아 대화하고 싶은 캐릭터와 인물의 성격이 배어나는 유머가 <한밤의 쇼핑>을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만드는 힘. 에드워드 호퍼의 도시 풍속화처럼 세련되고 아늑한 촬영은 <쉘로우 그레이브>와 <빌리 엘리어트>를 찍은 브라이언 투파노의 작품이다. <청춘보고서>(The Low Down)감독 제이미 트레비스/ 출연 에이단 길렌, 케이트 애시필드/ 96분/ 2000년 언뜻 뒤늦게 도착한 영국판 ‘슬래커영화’처럼 보이는 <청춘보고서>는 지겹도록 눈에 익은 겉표지와 달리 대단히 독창적인 붓질로 그린 ‘젊은 날의 초상’이다. 한때 미술도였던 프랭크는 친구인 존, 마이크와 함께 TV쇼의 무대장치 소품을 만드는 일을 하며 생활하는 20대 후반의 남자. 룸메이트와의 생활을 매듭짓고 자기만의 첫 번째 아파트를 구하기로 결심한 프랭크는 부동산 소개소 직원 루비와 데이트를 시작한다. <청춘보고서>는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 일화들이 자아내는 무늬의 모음에 가깝다. 애써 털어놓는 고민은 친구의 기타 소리에 먹히고, 섹스는 어색하게 중단되며, 모르는 사람과의 마주침은 어처구니없는 대화로 빠진다. 영화는 숙취처럼 흐느적대고 카메라는 인물의 심장에 연결된 듯 느릿느릿 세상을 둘러보지만 치밀한 캐릭터 연구에 기반한 <청춘보고서>는 생동한다. ‘영국영화주간’의 또 다른 상영작 <청춘보고서>에도 출연한 케이트 애시필드의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매력도 주목할 만하다. <클레임>(The Claim)감독 마이클 윈터보텀/ 출연 피터 멀란, 밀라 요보비치/ 120분/ 2000년마이클 윈터보텀의 <버터플라이 키스> <쥬드> <광기>는, 영국영화가 자연주의자의 냉철한 눈으로 바로크적 로맨스를 그려내는 작가를 갖게 됐음을 알렸다. 윈터보텀 감독의 2000년 베를린영화제 공식 경쟁부문 출품작인 <클레임>에는 눈밭 위로 집채를 끌고 그 테라스에 서서 죽어가는 여인에게 청혼을 하러 가는 사나이가 나온다. 이쯤 되면 베르너 헤어초크가 눈썹을 꿈틀할 법하다. 1867년 캘리포니아 시에라. 황금으로 부자가 된 사내 딜런이 지배하는 마을 킹덤 컴에 한 병약한 여인과 그녀의 딸이 찾아온다. 두 모녀는 20년 전 골드러시 속에서 딜런이 광산의 소유권 대신 다른 사내에게 팔아 넘긴 아내 엘레나와 갓난아기다. 한편 대륙횡단철도가 마을을 비껴감에 따라 딜런의 왕국에는 몰락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토머스 하디의 작품처럼 들린다면 탁월한 직관. 하디의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시나트라처럼>(Strictly Sinatra)감독 피터 캐펄디/ 출연 이안 하트, 켈리 맥도널드/ 97분/ 2001년 <오션스 일레븐>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를 밀어내고 쿨한 과거를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듯한 프랭크 시나트라. <시나트라처럼>은 시나트라를 모창하며 아주 조금 남은 꿈의 불씨를 지키고 싶어하는 스물여덟살의 글래스고 청년 토니 코코자의 무용담이다. 공연이 범죄조직 보스의 아내 맘에 드는 바람에 조직이 운영하는 카지노를 초대받은 토니는 담배 파는 아가씨 아이린과 만나 사귀게 된다. “결코 그들에게 술을 사게 해선 안 된다”는 반주자와 아이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토니는 뜻하지 않게 갱들의 범죄에 말려든다. 갱들의 도움으로 전파를 탄 토니는 클럽의 가수로 채용되지만 갱들의 손에서 소년을 구한 토니는 청산을 결심하고 <마이 웨이>를 부르며 새로운 삶을 향해 탈출한다. <트레인스포팅> <고스포드 파크>의 켈리 맥도널드가 건강하고 순수한 처녀로 호연한다. <톰과 제시카>(My Brother Tom)감독 돔 로스로/ 출연 제나 해리슨, 벤 위쇼/ 110분/ 2001년 <톰과 제시카>는 성적으로 착취당한 기억을 공유하는 두 틴에이저의 일그러진 러브스토리이며 서로를 구원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현대판 아담과 이브 이야기다. 약하고 다친 존재에 친밀감을 느끼는 소녀 제시카는 숲에 숨어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외톨이 소년 톰을 알게 된다. 이웃의 교사 잭에게 성폭행당하는 충격적 경험 이후 제시카는 톰의 연인이 되고 그가 아버지에게 추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시카의 발견 이후 한동안 사라졌던 톰은 제시카의 평범한 새 남자친구와 잭을 공격한다. <어둠 속의 댄서>의 로비 뮐러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이 영화는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슈팅 라이크 베컴>(Bend It Like Beckham)감독 거린다 차다/ 출연 파르민더 나그라, 케이라 나이틀리/ 2002년 <슈팅 라이크 베컴>은 <빌리 엘리어트>의 토슈즈를 신은 소년을 축구화 끈을 질끈 맨 소녀들로 선수 교체한 유쾌한 성장드라마다. 제스와 줄스는 축구를 “반벌거벗고 사내아이들과 뛰어다니는 짓”으로 여기는 부모님 몰래 잔디 위를 달리는 소녀들. 특히 보수적인 인도계 공동체 문화의 규율 속에서 나고 자란 제스에게 골문은 더욱 좁다. 줄스와의 만남으로 여자축구팀의 선수로 재능을 펼칠 그라운드를 얻은 제스에게 원하던 미래가 성큼 다가오지만, 가족의 요구와 매력적인 코치를 사이에 둔 단짝 줄스와의 다툼은 마지막 위기를 불러온다. 거린다 차다 감독은 왁자지껄한 인도식 결혼과 축구 결승전을 리드미컬한 교차편집으로 오가며 모든 갈등을 상쾌하게 해소한다. 그리하여 두 소녀는 마침내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인생의 프리킥을 찬다. 그들이 동경하는 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그것처럼. 김혜리 vermeer@hani.co.kr▶ 영국영화주간 - 가상현실을 꿈꾸는 작은 SF천국 상영시간표 서울아트시네마 일시 8월2일(금) 8월3일(토) 8월4일(일) 8월5일(월) 8월6일(화) 8월7일(수) 1시 청춘보고서 시나트라처럼 톰과 제시카 한밤의 쇼핑 3시 섹시 비스트 단편 시나트라처럼 한밤의 쇼핑 클레임 5시20분 슈팅 라이크 베컴 클레임 톰과 제시카 섹시 비스트 단편 청춘보고서 7시40분 시나트라처럼 한밤의 쇼핑 청춘보고서 클레임 섹시 비스트 톰과 제시카 시네마테크 부산 일시 8월10일(토) 8월11일(일) 8월12일(월) 8월13일(화) 8월14일(수) 8월15일(목) 8월16일(금) 4시50분 톰과 제시카 클레임 단편 청춘보고서 클레임 한밤의 쇼핑 시나트라처럼 7시30분 섹시 비스트 청춘보고서 시나트라처럼 한밤의 쇼핑 섹시 비스트 톰과 제시카 단편

개봉불가?이민소망!

이민 가야겠다는 말을 부쩍 자주하게 된다. 농담투로 하는 말이지만 불쑥불쑥 정말 그러고 싶을 때도 있다. 아무개가 대통령 되면 이민 가버릴 거라는 말은 투정이라고 해도, 터무니없는 인습이나 촌스러운 관행에 맞닥뜨릴 때면 그렇다. 친절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손님으로 탄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짜증내는 택시기사를 만나거나, 옆에서 우당탕탕 빈그릇을 치우는 식당 종업원 눈치보며 밥을 먹어야 할 때면 이민을 생각한다. 몇 백만원 대출받으러 은행에 갔다가 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때도 그랬고, 관공서에 드나들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겨우 그 따위 일로 이민 타령을 하느냐고 타박하거나, 참 까탈스럽고 피곤한 사람이려니 하는 게 보편적인 ‘국민정서’다. 타고난 불평불만주의자의 대수롭지 않은 투덜거림 정도로 치부해도 하는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이어도 당사자가 용인할 수 없는 일에는 첨예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곱씹어주기 바란다. 나는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이어서 나름의 곡절이 많다. 무던하지 않은 성격 탓인지 뭣 때문인지 모르지만, 깐깐하고 피곤한 사람으로 매도당하지 않기 위해서는(매도당해도 상관없지만 벌어먹고 사는 데 큰 장애가 되기 때문에) 그런 내 취향과 정서를 일일이 해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 너무 귀찮다. 택시기사가 어떻다는 둥 이런저런 거슬리는 일은 그렇다치더라도, 우리 사회가 보편적(보편성이라는 통념에 대해서도 이의가 많지만)이지 않은 각자의 개성을 너무 업신여긴다는 게 내 이민 충동의 뿌리다. 최근, 영화 <죽어도 좋아>에 대해 제한상영가 등급(현재로서는 사실상 개봉 불가 조치!!!)을 부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이민을 생각했다(<죽어도 좋아> 파문에 대한 사실관계나 경위 등은 다른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람). 영화내용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접어두고라도, 우리나라의 영화에 대한 검열, 심의, 등급분류 따위의 말을 더이상 입에 담는 것조차 시쳇말로 쪽 팔린다. 수년째 하나도 바뀌지 않은 이론과 논리로 버티는 견고한 구태와 이에 한결같이 거세게 부닥쳐보지만 다시 제자리인 상황이 진저리를 치게 한다. 칸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은 영화를 놓고, 막말로 인터넷에 포르노가 둥둥 떠다니는 세상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리얼한’ 섹스가 나오고, 성기가 좀 보인다고 어른들의 소화불량 걱정까지 해야 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 기준과 원칙이 어떻다느니 선례가 어떻다느니 하는 논리도 말 그대로 문화후진국의 진면목을 짜증스럽게 확인시켜 주는 데 불과하다. 최근 열린 부천영화제에서 ‘블루무비’라는 이름으로 상영한 단편 포르노 프로그램을 보고, 문화 건달로 알려진 미국인 스콧 버거슨이 “한국의 도덕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한국사회가 폭발해서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단다. 내겐 심한 욕으로 들린다.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kookia@jowoo.co.kr

카를로비 바리에서 만난 로저 에버트

영화제 취재차 머문 카를로비 바리에서 로저 에버트를 인터뷰한 것은 예정됐던 일은 아니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고 할까? “혹시 로저 에버트를 인터뷰할 생각없나요?”라는 이스트필름 대표 명계남씨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져 대뜸 약속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지난 7월13일 폐막한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두 사람은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매번 옆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던 참이었다. 한 차례 약속이 어긋나고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누는 우여곡절 끝에 7월9일 에버트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인터뷰가 성사됐다. 당신의 영화평은 한국의 영화저널리즘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많은 영화담당 기자와 영화평론가들이 새로운 할리우드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당신의 영화평을 들춰본다. 당신의 영화평을 미국식 저널리즘 비평의 표준으로 여기는 셈이다. 하지만 미국의 비평과 프랑스의 비평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자신의 비평이 프랑스의 비평에 비해 엔터테인먼트에 비중을 많이 두며 좀더 대중적이라고 생각하나. 음, 그건… 나는 일간지에 영화평을 쓰는 사람이다. 그것은 잡지나 학계 논문집에 글을 쓰는 것과 다르다. 글을 쓸 때 이 글을 읽을 독자가 알 수 있는 말로 써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때로 심각하고, 때로 웃기며, 때로 엔터테인먼트가 되려고 노력한다. 나는 신문장이이며 저널리스트다. 신문을 사서 읽는 사람들이 글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 소용없는 것이다. 프랑스의 일간지와는 다르다. 대부분 미국의 일간지는 독자층이 구분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위한 매체다. 하지만 프랑스는 우익 신문, 좌익 신문, 지식인 신문, 대중 신문이 나눠진다. 영국도 비슷해서 <더 타임스> <인디펜던트> <데일리 텔레그래프> <가디언> 등이 각기 다른 성향이다.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미국의 신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쓴 글이 어디에 실리는지, 누가 읽는지를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심각한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쓰는 경우도 있다. <뤼마니테> 같은 영화의 평은 그렇게 썼다. 하지만 <맨 인 블랙2> 영화평은, 그렇게 진지하지 않다. 영화평론가가 된 계기는 어떤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직업인가. 그렇지 않다. 난 15살 때부터 신문기자로 일했다. 아마추어 신문이 아니라 진짜 일간지였고 스포츠 지면에 기사를 썼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문학 교수를 꿈꾼 적도 있다. 시카고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 선타임스>에 들어가 일했는데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평을 담당하던 전임자가 은퇴하는 바람에 영화평을 쓰라는 제의를 받게 됐다. 나로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전에 영화평론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하겠다고 했고 그 결정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그뒤로 35년간 영화평을 썼다. 1975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로 수상했나. 신문사에서 퓰리처상 후보로 내 영화평 10개를 보냈다. 나로선 놀라운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연극이든 문학이든 비평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후보로 보낸 영화평에는 잉마르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 등에 대한 평이 포함돼 있었다. 러스 메이어의 <인형의 계곡 너머>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는. 러스 메이어를 좋아한다. 대학 다닐 때부터 그의 영화를 좋아했다. 그는 위대한 오리지널 미국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섹스영화라기보다 코미디다. <월 스트리트 저널>에 그의 영화에 관한 호의적인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기사를 쓴 사람에게 나도 동감이며 러스 메이어에 대해 더 많이 주목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얼마 뒤 러스 메이어와 친구가 됐고 이십세기 폭스사에서 내게 시나리오를 쓰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인형의 계곡>의 속편 시나리오를. 흔쾌히 승낙했고 <인형의 계곡 너머>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TV프로그램 <시스켈과 에버트>을 시작할 때, 이 프로그램이 영화비평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나. 당시 TV의 영화관련 프로그램은 대부분 단순한 홍보 프로그램이었다. 시청자는 어떤 영화의 나쁜 점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고 오직 장점만 이야기했다. 감독 인터뷰건 배우 인터뷰건 모두가 프로모션용이다. 우리 프로그램은 영화의 장단점에 대해 터놓게 얘기했다. 내 견해는 이렇다고 솔직히 말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홍보의 기회를 잡을 수 없는 영화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다큐멘터리, 인디영화, 클래식영화들에 대해서 말이다. 모두가 <스파이더 맨>에 대해 떠들 때, 좀더 작은 영화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영화정보가 온통 하나의 영화에 집중돼 있을 때 대중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유용한 일이라 생각한다. <시스켈과 에버트>의 영화 선택에 있어서 어떤 압력을 받은 적은 없나. 모든 영화가 이 프로그램에 나오길 희망하지만 선택은 항상 우리 스스로 했다. 일반적으로는 <스파이더 맨>이나 <스타워즈> 같은 메이저영화들이 전파를 타지만 다큐멘터리나 저예산영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진 시스켈과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궁금하다. 나는 <시카고 선타임스>의 영화평론가였고 시스켈은 <시카고 트리뷴>의 영화평론가였다. 말하자면 나의 적이었다. 두 신문은 경쟁지였고 우리 역시 경쟁하는 사이였다. TV에서 우리 둘을 불렀을 때도 역시 상대에 대한 견제가 만만치 않았다. 수차례 격렬한 공방을 벌였는데 그게 쇼를 돋보이게 하는 데는 좋은 일이었다. 시스켈과 격렬히 논쟁했던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을 든다면. 자주 논쟁을 했고 그중 예를 들자면 <지옥의 묵시록>이다. 시스켈은 <지옥의 묵시록>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내 견해에 동의했다. 남들이 걸작이라고 말하는 영화를 홀대한 경우는 없었나. 물론 있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비디오 출시명: <여인의 음모>) 등이 그렇다. 하지만 평론가가 할 일은 대중의 견해를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내 견해가 항상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평은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써서 평을 본 사람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평론가의 견해가 나와 다르더라도 좋은 평은 그 영화를 잘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영화평 자체에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영화평론가에게, 또는 영화평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선 평론가는 자기 견해대로 글을 써야 한다. 또한 독자가 글을 읽고 어떤 영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독자가 이 영화를 볼지 말지를 결정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평론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영화에 대한 어떤 뚜렷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디어가 있다면 평론가가 별로라고 썼지만 나라면 좋아할 영화 같다는 식의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나중에 다시 보고 이전 견해를 수정한 경험이 있는가. 일반적으론 없는 일이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예를 들자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두 번째 봤을 때 훨씬 좋았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봤을 때는 대체로 개봉 전에 다시 보고 영화평을 쓴다. 칸이나 토론토영화제에서 하루에 5편씩 보면서 평을 쓸 시간을 갖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확실히 영화제에서 보고나서 나중에 다시 보면 훨씬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 느긋하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하지만 대체로 나는 처음 봤을 때 견해에 따르는 편이다. 많은 감독들이 영화평론가에게 불만스러워하는 점은 한번 보고 어떻게 단정하느냐는 것이다. 두번, 세번 거듭 보기를 요구하는데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신문장이다. 그건 내가 매일 기사마감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어떤 영화든 대체로 한번밖에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두번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나도 두번 보고 쓰고 싶다. 하지만 대학에서 영화에 대한 강의를 할 때는 한 영화에 대해 10시간 동안 가르친다. DVD로 장면마다, 프레임마다 정지시켜놓고 설명하고 토론하는 식이다. 그것은 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며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일간지의 영화평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3∼4번씩 보는 게 불가능하다. 영화를 보고 회사에 돌아와 기사를 쓰면 끝이다. 가능한 시간은 그게 전부다. 나는 프로페셔널 신문장이이지 아카데믹한 교수가 아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본 적 있나? 올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는데. -못 봤다. 올해 4월에 어깨가 부러지는 바람에 칸영화제에 못 갔다. 올해는 25년 만에 처음 칸영화제에 못 간 해다. 김기덕 감독의 <섬>을 보고 영화평을 쓴 적이 있던데. -와우, 마음에 드는 영화였다. 아주 강력한 영화이고 폭력과 아픔이 넘치는 영화다. <섬>은 흥미로운 상황을 제시한다. 상징적인 의미로서 남자는 생존하기 위해 여자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남자는 섬에서 혼자 살고 있고, 여자는 해안에 산다. 매우 강한 영화다. 선댄스영화제 때 보고 호평을 쓴 적 있지만 미국에서 상업적인 배급망을 탄 적이 없어서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미국에서 개봉한다 해도 성인영화로 취급받을 것이다.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다. 감독은 필요한 묘사를 했고 그것은 영화에 적합한 것이었다. 오늘날 미국영화에서 뉴-뉴 아메리칸 시네마라고 부를 만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나. 인디영화는 여전히 흥미롭다. 매우 적은 예산으로 찍는 디지털영화들 가운데도 주목할 만한 영화가 나오고 있고. 오늘날 할리우드 대작영화들은 대체로 너무나 예측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나는 둘을 인더스트리얼시네마와 아트시네마로 나눠 부르는데 인더스트리얼시네마는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것으로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다. 디지털영화가 적은 예산으로 작업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지만 오늘날의 미국영화가 30년 전보다 덜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미래의 작가로 주목하고 있는 미국 감독이 있다면.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이크 존스, <쓰리 킹즈>의 데이비드 O. 러셀, <매그놀리아>의 폴 토머스 앤더슨, <한 가지에 대한 13개의 대화>의 질 스프레처, <너스 베티>의 닐 라뷰트, <줄리안 동키보이>의 하모니 코린 등을 들 수 있겠다. 당신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영화를 꼽는다면. <시민케인>이다. 17살 때 이 영화를 보고 여러 가지를 배웠다. 감독의 존재를 알았고 영화의 내면에 감독의 비전과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까지 영화를 엔터테인먼트로만 대했는데 <시민케인>은 나를 눈뜨게 했다. 또 다른 영화를 든다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다. 대학 1학년 때 외국영화를 보는 동아리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베리만이나 펠리니의 영화도 이 시절 처음 접했지만 <이키루>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위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키루>에 대한 평은 나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쓰는 ‘그레이트무비’라는 코너에 들어 있다. 당신의 영화평에는 별점이 들어 있다. 영화에 별점을 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별점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신문사에서 시켜서 하는 일일 뿐이다. 미국의 수많은 신문이 별점을 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최근엔 별점을 좀 보완하려고 별의 개수를 5개로 늘렸다. 3개가 정확히 중간점수가 되게끔…. 어찌됐든 멍청한 짓이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읽기를 바라지, 내가 별 몇개를 줬는지만 보는 것은 원치 않는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결코 없다. 나는 신문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에 글쓰는 걸 꿈꿨다. 글쓰기를 그만두고 방송출연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신문장이다.카를로비 바리=글·사진 남동철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콘티북 윤곽따라 미리 보는 <오아시스>(4)

S#33 거리(외부, 낮) C#1 꽃을 들고 걸어가는 종두 <크게보기> 그림 1) 카메라, 부감으로 걸어가는 종두의 손에 들인 꽃을 보여주며 따라가다가 tilt up한다. 종두의 뒷모습. 공주의 아파트가 앞에 보인다. 아파트 쪽으로 걸어가는 종두, 승용차에 달려오자, 뛰어서 길을 건넌다. 카메라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S#34 공주 아파트 문 앞(내부, 낮) C#1 종두 단독에서 2숏. W.S. 정도 409호에서 410호쪽으로 본 방향. 계단을 올라오는 종두. 벨을 누른다. 반응이 없자, 주먹으로 문을 두드린다. 그래도 마치 빈집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 계단 아래에서 앞집 여자가 올라온다. 종두를 지나 자기 집쪽으로 와서 문을 열려다가 종두를 쳐다본다. C#2 종두, 옆집 여자 2숏. (C#1의 reverse방향. 계단 아래에서 잡은 약간 앙각 F.S.) 그림 1) 옆집녀: (자기 집쪽에서 문을 열려다가 돌아본다) 어떻게 오셨어요? 종두: 저기요, 꽃배달 왔걸랑요. 옆집녀: 꽃배달이요? (웃으며) 공주가 꽃선물도 다 받네. 잠깐 기다려보세요. 여자는 종두쪽으로 다가온다. 종두를 지나 계단턱으로 간다. (카메라,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follfw) 계단턱에는 고무 양동이, 겨울에도 치우지 않은 죽은 화분 같은 것이 지저분하게 놓여 있다. 여자가 화분에 숨겨진 열쇠를 집어들고 다시 문쪽으로 다가간다.) 옆집녀: (열쇠로 공주의 아파트 문을 열며) 누가 보냈어요? 종두: 아, 그런 거 아무한테나 가르쳐주면 안 되죠. 여자, 꽃을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열려진 문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는 종두. C#3 종두와 옆집 여자 2숏(W.S. 정도) 안을 들여다보다가 얼른 문에서 물러서는 종두. 뒤이어 옆집 여자가 문을 열고 몸을 내민다 옆집녀: 누가 보냈냐고 묻는데요? 종두: (얼떨결에) 홍종두요. 홍종두란 사람이 보냈어요. 옆집녀: 알았어요. 됐으니까 가보세요. 종두, 하는 수 없이 돌아서 걸어간다. 그의 뒤로 문이 닫힌다. 계단을 내려가던 종두, 다시 공주의 집쪽을 쳐다본다. S#34 공주 아파트 문 앞(내부, 낮) C#4 (insert) 종두 시점의 인서트. 옆집 여자 단독 M.S. <크게보기> 그림 1) 열려진 문 사이로 보이는 아파트의 내부. 옆집 여자가 공주의 방쪽을 들여다보며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나오는 여자. S#35 아파트 앞(외부, 낮) C#1 종두 단독(넉넉한 F.S.에서 W.S.까지) 공주의 아파트 옆. 종두가 아파트에서 걸어나오고 있다가 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파트쪽을 올려다본다. C#2 inseret. 종두 시점의 앙각. 그림 1) 종두의 시점으로 본 공주의 집. 베란다의 빨랫줄에 널린 여자의 원피스 하나가 보인다. 바람에 약간 나부끼고 있다. S#36 아파트 문 앞(내부, 낮) C#1 종두 단독. F.S.에서 W.S. 정도까지. 그림 1) 공주의 아파트 문 앞. 종두가 계단을 올라온다. 공주의 집 앞으로 다가간다. 벨을 몇번 눌러보다가 대답이 없자, 계단턱쪽으로 걸어간다. 마치 주변 풍경을 구경하듯 둘러본다. 그러면서 뭔가를 찾고 있다. 이윽고 깡통 화분에 숨겨진 열쇠 하나를 찾아낸다. 열쇠를 집어들고 다시 공주의 집 문 앞으로 다가와 문을 연다. C#1→C#2 사각으로 보이는 종두 얼굴. 카메라, tracking out(휠체어 시점으로)하며 멀어진다. S#59 C#1 그림 1) 눈물 흘리는 공주 B.S. 뒤로 종두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C#2 그림 1) 종두, 공주 2숏(L.S.에 가까운 F.S.) 뒤로 아파트가 꽉 차 보인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Review] 싸인

■ Story 이웃의 수의사 레이(M. 나이트 샤말란)의 과실로 빚어진 참혹한 교통사고로 6개월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신앙까지 잃어버린 전직 신부 그래험 헤스(멜 깁슨)는 열살짜리 아들 모건(로리 컬킨)과 다섯살 난 딸 보(아비게일 브레슬린), 마이너리그 선수생활을 청산한 동생 메릴(와킨 피닉스)과 함께 필라델피아 45마일 외곽 옥수수 밭에서 살고 있다. 악몽에서 깨어난 어느 아침, 그래험과 식구들은 밭에 나타난 거대한 매직 서클을 발견하고 충격에 휩싸이고, 어둠이 내리자 정체 모를 침입자가 집 주변을 맴돌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 인도를 비롯한 도처에 매직 서클이 나타나고 급기야 UFO가 멕시코 상공에 나타나자 전세계는 공황상태에 빠지고, 그래험은 창문에 못질을 하고 식구들과 집안에 숨는다. ■ Review 당신은 M. 나이트 샤말란의 서명이 든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반전? 초능력? 병든 아이의 예언? 길 잃은 중년남자의 각성? 극진히 사랑한 부부에게 닥친 부당한 불행? 따지고 보면 샤말란의 새 영화 <싸인>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싸인>은 뱀 같은 영화다. 파충류처럼 땅에 배를 깔고 지독하게 조용히, 아주 느리게 전진한다. 가끔씩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독니를 드러내 관객의 심장을 펄쩍 튀어오르게 만들면서. 그의 짜릿한 스릴러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관객의 척추에 최초의 냉기를 흘려보내는 데 샤말란은 그렇게 많은 대사를 소모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바람이 흔드는 옥수수 밭과 풍경이 내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아침. 차갑고 끈적한 악몽의 여운을 털어내며 집안에서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 들판으로 뛰쳐나간 아버지에게 어린 딸이 천천히 묻는다. “아빠도 내 꿈 안에 들어온 거야?” 아들이 턱을 돌려주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남자의 눈에 널찍한 공터가 들어온다. 카메라가 공중으로 뒷걸음질치면서 공터는 둥그런 테두리를 드러내고 잠시 뒤에는 그것이 더 큰 문양의 한 고리임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싸인>은 그처럼 고요하지만 무작스럽게 거대한 ‘부자연스러움’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싸인>은 그러나 미스터리 서클의 비의(秘意)를 캐고 외계인들의 침략을 분쇄하는 영화가 아니다. 여기서 미스터리 서클이나 외계인은 사실상 맥거핀에 가깝다. <싸인>에서 서스펜스의 원천은, 신의 정의를 조롱하는 듯한 끔찍한 사고로 아내를 잃으면서 신앙을 포함한 삶의 믿음을 깡그리 잃은 남자 그래험과, 덩달아 그의 정서적인 진공 속에 함께 방치된 헤스 가족의 불안한 정신상태에 있다. ♣ 남자는 집안에서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들판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아들이 턱을 돌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그의 눈에, 널찍한 공터가 들어온다. 옥수수밭에 그려진 거대한 문양, 미스터리 서클이다. ♣ <싸인>의 골격을 구성하는 것은 외계인과의 충돌과 대립이 아니다. 카메라는 오직 TV로만 바깥 소식을 접하는 고립된 가족의 외딴 집안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공포에 집중한다. 당장 첫 장면부터 제목을 해명하며 시작한 <싸인>은 그뒤로도 알게 모르게 제목에 충실하다. 트럭에 하반신이 잘려 죽어간 아내의 마지막 말, 마시다 만 물컵을 잔뜩 늘어놓는 보의 버릇, 천식을 앓는 모건, 장기라고는 강한 스윙밖에 없던 메릴의 실패한 선수 경력, 배달 착오로 읍내 서점에 한권 남아 있던 외계인에 관한 책 등등. <싸인>의 실체는 영화가 궁극적으로 당도할 지점의 좌표를 알리는 수많은 ‘신호’들의 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판에 MIB 요원이 찾아와 “사실은 당신들이 외계인이었다”라고 통고하는 해프닝은 <싸인>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샤말란 영화를 단순히 기발한 ‘반전’으로 기억하는 관객에게 <싸인>은 감독을 유명하게 만든 영화들이 기실 역전 펀치 한방으로 승부하는 깜짝쇼가 아니라, 후반의 ‘폭로’가 만들어내는 앵글의 돌연한 이동에 따라 앞장면의 의미들이 일제히 뒤틀리는 잘 조립된 구조물임을 강조한다.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이 끼워지는 순간 오리인 줄 알았던 도안이 토끼였던 것으로 판명되는 그림처럼. M. 나이트 샤말란은 <싸인>에서 자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배어나는 스타일을 구사한다. 긴장이 고조된 예민한 순간에도 끼어드는, 전작보다 훨씬 늘어난 유머가 그 증거다. 삼촌과 조카들이 외계인의 독심술을 막기 위해 쿠킹호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엄숙히 앉아 있는 장면은 대표적 예. 또한 샤말란은 외딴 농가에서 TV를 통해서만 바깥 세상의 소식을 듣는 고립된 가족의 공포에 집중하고, 외계인과의 근접 조우를 가능한 한 유예함으로써 아주 적은 돈으로 은하계 전쟁을 연출해야 했던 과거 B급 SF영화의 초라하면서도 농밀한 분위기를 빌려온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싸인>에서 액션의 무기는 야구방망이고 스펙터클은 옥수수밭- 그것도 옥수수가 쓰러진 빈자리- 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반주자’ 버나드 허먼이 다시 살아온 듯한 음악과 이름 모를 새의 우짖음과 풍경소리, 전화벨이 어울리는 사운드도 고전적인 기법으로 시종일관 긴장을 흘린다. 그래서 <싸인>의 선조는 <인디펜던스 데이>가 아니라 <우주전쟁> <새>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며, 불 꺼진 지하실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블레어 윗치>의 무서운 기시감이 희미하게 포개진다. 그럼에도 <싸인>은 강렬하고 무섭다. 슬프고 교훈적이다. 첨단 특수효과로 테두리를 친 액션을 기대한 관객은 이 SF 미스터리의 망토를 쓴 애절한 가족드라마에 실망할 테지만 그것은 애초에 샤말란 영화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기대이니 위로까지 필요치는 않을 것이다. 불편한 것은 <싸인>의 상징과 은유가 그것이 표상하는 내용과 너무 밀접하게 묶여 있다는 점이다. 모든 괴담, 초인, 외계 존재에 관한 이야기에 내재된 인간과 신의 얽힌 운명에 대한 질문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순진하게 던지는 <싸인>은 <식스 센스>나 <언브레이커블>보다 먼저 나오는 편이 더 합당해 보이는 영화다. 그러나 <싸인>은 분명 기성품 장르영화의 조미료에 미각을 상한 우리가 잊고 살았던 영화의 미묘한 쾌락을 상기시켜준다.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것, 그건 확실히 샤말란의 장기다.김혜리 vermeer@hani.co.kr

<오아시스>의 두 배우, 문소리, 설경구 [2]

문소리 오빠 부부에게 버림받다시피 했지만 혼자 낡은 아파트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공주는 “몸은 장애인이지만, 똑똑하고 자기 의지가 있는 인물”. 불편한 손으로 머리를 삐딱하게 묶어올려 단장(?)하고, 휠체어를 밀어주는 종두에게 활짝 웃어 보이는 모습 등 조금씩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을 보자면, 어느새 뇌성마비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을 뛰어넘는 사랑스러움이 배어나기 시작한다. 눈동자부터 손끝 발끝까지 뒤틀린 몸을 연기하면서, 문소리는 내심 “아름다움에 도전에 보고픈” 맘도 있었다고. “예쁘거나 귀엽거나 섹시하거나 한 여배우 세명만 있으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가 아닌” 공주가, “영화에서 아름답게 보여진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가지 더 바람이라면, “경구 오빠처럼 영화를 계속 하고 싶다”는 것. 다시 <박하사탕> 이후와 같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기다림은 각오한 바라고 자세를 다지고 있다. 설경구 도대체 왜 교통사고를 낸 피해자의 집에 가는지, 뇌성마비 장애인인 그 집 딸 공주를 강간하려 하는지, 그리고는 사랑에 빠지는지. 20년을 거꾸로 살아야 했던 <박하사탕>의 영호도, <공공의 적>의 막가파 경찰 철중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일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고, 눈치보고,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종두는, 아무래도 쉽지가 않았다. 리허설에서 “걔, 바보 아니다”와 “일반인도 아니다”를 번갈아 강조하는 이창동 감독의 말에 설경구가 내린 결론은, “대책없는 장애, 정상과 비정상의 사이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 아무런 목표도, 직업도 없이 가족에게조차 냉대받는 낙오자지만, 공주의 빨래를 해주거나 머리를 감겨줄 때는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바보스러울 만큼 순수한 얼굴이 드러난다. “유일하게 목표라는 게 생기는 곳이 촬영현장”이라는 그는, 종두를 지나온 지금 <광복절 특사>의 막바지 촬영에 한창이다.

건전소비 메시지 전하는 신용카드 광고

카드 CF가 참해졌다. 신용카드를 사용해 한번 폼나게 살아보자고 솔깃하게 제안해온 카드 광고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바른생활 교과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신용카드 업계의 총성없는 전쟁이 후끈 달아오른 올초만 해도 카드 광고는 앞다투어 풍요롭고 멋진 삶의 전형을 제시하느라 바빴다. LG카드 광고의 이영애와 배용준은 못하는 레포츠가 없는 만능남녀를 대변하며 ‘최고는 늘 앞서가며, 그래서 난 LG카드만 쓴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국민카드 광고의 ‘코리안특급’ 박찬호는 고가의 외산승용차, 웨딩드레스를 입은 일군의 신부들을 배경으로 일등 신랑감의 위풍당당함을 뽐냈다. 그런데 최근 이들이 한입 갖고 두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내를 위해 신용카드를 결제하는 ‘멋진 녀석’의 모습을 통해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란 노골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말을 건네온 삼성카드 CF만 갈수록 강도를 높여가며 가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그 능력있는 남성(정우성)은 얼마 전 승진한 부인을 위해 근사한 야외카페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더니 현재는 타이태닉 같은 거대한 배를 타고 우아한 여행을 즐겨 부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정우성이 신용카드 명세서에 사인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순간 그의 얼굴 주변에 푸른 액자가 나타나며 ‘♬삼성카드’란 징글(Jingle: 광고에 사용되는 짧은 음악)이 나오면 사실 약간 심란해지기도 한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준 히딩크 감독 얼굴이 교차되면서 ‘그 (승리를 만드는) 능력’과 ‘이(소비하는) 능력’ 사이의 괴리를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삼성카드 광고처럼 한눈팔지 않고(?) 독자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세는 LG카드 CF나 국민카드 CF처럼 분위기를 파악하는 쪽인 것 같다.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과소비를 조장한다는 신용카드 사용의 폐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고려하는 것 말이다. 카드업계에 건전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카드업계의 후발주자인 우리카드가 ‘마음으로 쓰는 카드’란 슬로건 아래 ‘우리’를 위한 카드사용법을 전파한 게 시발이었다. 우리카드 CF에서 신혼부부로 설정된 이병헌과 김희선은 ‘우리 아버님, 우리 어머님, 우리 도련님, 우리 처제’ 등을 다소곳하게 외치며 가족을 위해 신용카드를 사용한 것에 뿌듯함을 표하고 있다. 이기적인 소비를 조장하는 기존 카드 CF와 달리 긍정적이고 착한 이미지로 차별화를 모색한 이같은 전략은 브레이크 없이 화려한 판타지를 향해 달려가던 카드 CF의 도도한 물줄기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LG카드 광고는 변신의 폭이 워낙 넓어 처음엔 당혹스러운 기분마저 안겼다. 카드 사용을 통해 늘 최고로 살아간다던 이 CF의 화자(이영애와 배용준)가 물건을 구매하러 상점에 들렀다가 ‘갖고 싶지만 꼭 필요한지, 욕심나지만 갚을 순 있는지, 한번 더 생각해야죠. 신용카드 바르게 씁시다’라며 의젓한 자제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광고의 분위기에 맞게 튀지 않는 단정한 차림새로 깍듯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두 모델의 모습은 영락없는 공익광고 캠페인의 모범시민형이다. 국민카드 CF 역시 메이저리거 박찬호를 마무리용으로 물린 뒤 무명 여성모델을 기용해 이미지 변주에 나서고 있다. 이 광고엔 사회 초년생인 듯한 젊은 여성이 갓 발급받은 카드 뒷면에 이름을 적으며 ‘난생처음 신용카드를 발급받았습니다. 꼭 필요할 때 쓰겠다고 마음속에 한번 더 서명했습니다’란 내레이션을 들려주며 ‘국민카드가 성실한 사람들의 카드’라는 공식을 전달하고 있다. 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우리카드 대행사 코래드 제작사 까치 앤 까치(김영배 감독) 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LG카드 대행사 LG애드 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국민카드 대행사 유로넥스트 변신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만화 주인공 같은 이들의 모습은 시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광고의 숙명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한시적인 이미지 제고용으로 위선적인 자세 낮추기를 실시했다고 단순히 생각하면 곤란하다. 카드 광고의 흐름을 주도해온 LG카드 광고는 ‘건전한 카드사용, 건전한 신용카드’란 국가 공식 캠페인을 선생님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매우 유순한 태도로 적극 수용함으로써 ‘넘버1’ 이미지를 쌓는 파생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는 각종 이동통신 브랜드가 혈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SK텔레콤 광고가 ‘잠시 휴대폰을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역발상 메시지로 여유를 부리며 업계의 맏형 같은 이미지를 얻은 것과 비교할 만하다. 국민카드 광고 역시 박찬호의 성적 부진이란 예상치 못한 악재로 애를 태우는 과정에서 쉬어가는 페이지 같은 분위기 전환용으로 ‘무명모델과 풋풋한 이미지’란 전략적 변신을 이룬 듯 보인다. 어쨌든 상업광고가 본성을 감춘 채 공익성을 표방한 모습이 브랜드의 이미지를 재정비하는 데 의도한 만큼 효과를 거둘지, 또 무분별한 신용카드 사용을 억제하겠다는 사회적인 대의명분에도 과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앞으로 카드 광고는 현재와 같은 건전표만 고수하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변신 방망이를 가동해 제2의 환골탈태에 나설 터이다. 다음엔 과연 어떤 모양새로 소비자를 찾아갈지 궁금해진다.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kr

<오아시스>를 보고 새로 쓴 조선희의 이창동론(1)

드디어 <오아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7월29일 첫 시사회를 가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단번에 격정의 폭우를 쏟아붇는 법없이, 조금씩 젖어들어 마침내 깊은 슬픔과 아련한 희망에 이르는 희귀한 멜로다. 그리고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과 혈연을 확인케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창동의 자식이다. 8월15일 관객과의 해후를 앞두고 조선희 전 편집장이 그를 만나 나눈 긴 이야기와 새로 쓴 이창동론을 싣는다. 편집자 조선희 / 소설가, 전 <씨네21> 편집장 1, 세헤라자데의 운명 작가란 뭘까. 이야기꾼의 운명이란 어떤 것일까. 그건 세헤라자데의 운명과 같은 것은 아닐까. 세헤라자데는 밤마다 흥미진진한 얘기를 꾸며내고 그러는 동안 하루씩 사형집행이 늦춰진다. 원래 왕은 아름다운 여자와 하룻밤씩 자고는 목 매달곤 하는데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관례를 깬다. 세헤라자데의 입담은 대단하다. 무려 1천일 동안 이야기가 마르지 않았고 왕의 호기심을 붙들어두었다. 이야기의 효과란 강력한 것이다. 여자에게 배신당한 기억 때문에 여자들만 연쇄살인하는 남자라면 마땅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이 왕은 3년 동안 왕비에게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편집증이 말끔히 치료가 됐다. 이야기는 왕의 광기를 잠재우고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건졌다.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책이 있지만, 세헤라자데의 캐치프레이즈는 ‘이야기가 우릴 구원할 거야’다. 이야기가 구원하는 건 이야기꾼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처럼 전면적인 해피엔딩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에드거 앨런 포 같은 위악적인 작가라면 이런 해피엔딩이 참을 수 없었을 만하다. 그는 <천일야화의 천두번째 이야기>라는 짤막한 단편을 썼는데, 여기서는 세헤라자데가 기껏 1천일을 잘 버텨오다가 한번 실수로 결국 죽임을 당한다. 왕은 왕비의 입담에 홀려 있었지만 그것도 3년쯤 되자 싫증이 났던 모양이다. 1천두 번째 밤에 세헤라자데는 신밧드의 황당무계한 세계일주 이야기를 속편으로 풀어놓는데 이 판타지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왕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릴 지르면서 날이 밝자마자 왕비를 교수대로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리얼리티로 치자면 이쪽이 훨씬 그럴싸하다. 기질적으로 타고난 변덕이 어딜 가겠으며,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 해도 편집증을 그렇게 말끔히 고치기는 쉽지 않다. 세헤라자데는 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고 나와 있다. ‘날 살려주면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리다니, 왕의 불행이지. 이렇게 죽음으로써 왕한테 복수할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세헤라자데가 현대에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왕이 없어졌다고 좋아하긴 이르다. 왕 대신 ‘시장’이라는 것이 있고, 이 시장도 변덕스럽고 잔인하기로 치면 결코 왕 못지않다. 자기가 누구이며 진정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워낙 문화적인 암시와 통제가 강력해서 정체성이나 개성을 탈취당하고 사는 현대에서 예술가란 드물게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규정했다. 그러나 프롬도 “예술가의 지위는 상처입기 쉬운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 개성이나 자발성이 존중되는 것이 실제로는 성공한 예술가의 경우일 뿐이고 만일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그는 이웃사람들로부터 괴짜나 신경증환자 취급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몇해 전 우디 앨런의 <브로드웨이를 향해 쏴라>에서 우리는 바로 그렇게 이웃사람들로부터 정신병자 취급받는 극작가를 보았다. 깡패인 투자자와 작품계약을 맺고 깡패의 애인을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극작가 셰인은 한밤중에 창문을 열고 “나는 창녀야! 돈에 팔렸어!”라고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친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에 몸을 팔았어. 내 예술, 내 작품도. 내가 그렇게 성공에 목을 맸던 걸까.”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이 대사 앞에서 속이 불편해질 것이다. 소설가는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서 쓰고, 영화감독은 관객에게 보이기 위해 찍는다. 그건 최소한의 직업의식에 해당한다. 그것까지 부인한다면 그건 작가도 아니다. 그런데 독자와 관객 앞에서도 최소한 자신의 할말을 추스르고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게 또한 작가의 자존심에 해당한다. 한국영화판에서 우리는 어떤 작가들을 보면서 ‘아무래도 저 이는 직업의식 때문에 자존심을 버린 거 같아’라는 혐의를 걸게 된다. 그런가 하면 직업의식을 발휘하면서도 자존심을 별로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작가도 리스트를 작성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리스트에 이름이 오를 가장 확실한 멤버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창동이다. ♣ <박하사탕> 2, 세 남자 이야기 <초록물고기> 이후에 나는 늘 이창동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게 되었다. 세헤라자데의 왕처럼 호기심에 가득 차서. 9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 문제작들이 수많은 캐릭터들을 생산해냈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대다수는 그야말로 트렌드따라 왔다가 트렌드 타고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이창동의 인물들은 다들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정확히 찍힌 주민등록증 하나씩 지갑 안에 넣고 우리 주위에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중에서 <박하사탕>의 영호는 실제로 나하고 동갑이다. 60년생이고, 만일 그 철로 위에서 “나 돌아갈래!” 하고 두팔을 번쩍 들었다가 기차가 덮치기 전에 잽싸게 뛰어내려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면 지금 마흔세살이다. 나머지 두 사람, 막동이하고 홍종두는 다 내 후배들이다. 이들 세 남자 중에서 아무래도 조폭의 ‘똘마니’가 된 막동이가 나하고 노는 물이 제일 다르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라난 동네가 도시개발로 사라지고, 다방 나가는 여동생을 나무라면서 그 여동생한테 용돈을 타 쓰고, 식당 하나 열어서 가족과 함께 사는 꿈을 꾸고, 뭐 그런 건 우리 자신의 모습들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그렇게 변화무쌍한 개발도상국을 살아왔으니까. 막동이가 형한테 전화를 해서 어렸을 적 초록물고기 잡겠다고 냇물에 들어갔다가 ‘쓰레빠’ 잃어버린 얘기를 할 때 나도 내가 잡으려던 초록물고기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했었다. 막동이는 노는 물은 달라도 바탕은 순진한 녀석이었는데 영호는 아주 질이 나쁜 놈이다. 광주에 진압군으로 가서 죄없는 여학생에게 총을 쏜 거야 본인의 뜻이 아니었다 쳐도, 경찰서에 잡혀온 운동권 학생을 악랄하게 고문하고, 바람 피고 아내를 패고, 이건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다. 그가 스무살엔 사진작가를 꿈꾸었고 여자친구에게 박하사탕을 건네받으면서 수줍어했다 해도 그 죄상을 용서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불평하기도 했다. “나쁜 짓을 골라서 해놓고 왜 징징 짜면서 동정을 구걸하는 거야?” 광주가 끝난 뒤 80년대 내내 진보적인 지식인들 대다수는 자신을 광주의 전사들에 투사시켜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은 윤상원 주변쯤에 자신을 놓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홍희담의 <깃발>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광주문학의 표본으로 간주했고, 나중에 <꽃잎>으로 영화가 된 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발표됐을 때는 ‘웬 핀이 나간 문제제기야? 피해의식으로 역사를 정리하려 하다니!’ 그런 평을 안겼다. 세월은 가끔 차이를 지우기도 하는 것이어서, 90년대가 되자 이젠 80년 당시 광주를 둘러싼 피아의 구분도 희미해졌고 그때 광주사람들을 폭도라 했던 이들도 마음 편히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