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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예쁜데 이상하고, 재밌고도 무서운” 자우림의 원더랜드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은 자우림 분들이 꿈꾸는 모습처럼 잘 자랄 겁니다” 예언이었을까, 선구안이었을까. 1997년 10월, 진행자이자 선배 가수인 이소라가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한 데뷔 3개월차 신예 밴드를 배웅하며 건넨 덕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이란 뜻의 밴드 자우림은 한결같이 변함없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들이 만든 음악은 리스너의 마음에 저마다 뿌리내려 무성해졌다. <일탈> <매직카펫라이드> 등은 지금도 만인의 노래방 애창곡이고, <17171771>은 한때 미니홈피 최고 인기 BGM이었으며,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상실한 청춘의 찰나를 기억하게 만드는 곡의 효용을 차츰 입증하다 급기야 동일한 제목의 인기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11장의 정규 음반을 포함해 총 25장의 앨범을 발매하고 1300여회의 콘서트를 진행한 자우림은 2022년 결성 25주년을 맞아 특별한 1년을 보냈다. ‘자몽’(자우림의 팬들을 부르는 애칭)들의 코러스가 담긴 자우림 대표곡의 리메이크 앨범 《HAPPY 25th JAURIM!!》을 공개했고, 자우림풍 잔혹 동화가 동봉된 크리스마스 앨범 《MERRY SPOOKY X-MAS》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은 지난 25년을 갈무리하는 다큐멘터리 <자우림, 더 원더랜드>를 세상에 내놓을 채비 중이다. 물기 머금은 바람이 불던 연두색 5월의 어느 날 여전히 청춘의 서정(抒情)을 음유하고 예찬하는 자우림의 세 멤버 김윤아, 이선규, 김진만을 만났다. 25주년을 팬들과 간직하며 - 김윤아씨가 2021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국제경쟁부문 심사를 하며 관람한 다큐멘터리가 결성 25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이벤트의 시작이었다던데. 김윤아 자몽들과 떼창한 노래를 25주년 기념 앨범에 싣는 이벤트는 국제경쟁부문 상영작 <천 명의 락커, 하나의 밴드>에서 출발했다. 심사 당시 이 영화가 온라인 상영도 병행하고 있어 멤버들에게 영화를 볼 수 있는 링크를 보냈고 멤버들도 즐겁게 봤다. 그리고 기왕 25주년을 기념할 거라면 여태 한 적 없는 특별한 작업을 하고 싶어 크리스마스 시즌 앨범을 겨울에 발매하자고 제안했다. - 한해에 앨범 2장을 발매하는 강행군이었다. 이선규 보통 이런 바쁜 계획을 짜면 팀에서 내가 가장 비관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무리한 일정이란 이야기를 제일 많이 했는데, 어느새 내가 가장 욕심을 내고 있더라. 김윤아 처음엔 선규 형이 자우림 취향의 곡과 사람들의 인기를 얻은 곡을 25곡씩 수록한 더블 앨범을 만들자고 했다. 어차피 그렇게 못할 걸 알기에 형의 의견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웃음) - 25주년 기념 앨범 제작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자고 결심한 이후, 먼저 제작사 37th Degree에 직접 연락했다고 들었다. 37th Degree와는 한 차례 뮤직비디오(김윤아 솔로 4집 타이틀곡 <꿈>)를 작업한 인연이 있지만, 이번 영화도 37th Degree와 함께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김윤아 국내에서 음악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사례가 꽤 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제작 시 애로 사항이 많다고 하더라. 다큐멘터리인데도 대본이 필요한 경우가 있고, 캐릭터나 설정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에겐 이런 요구를 하지 않을 제작사가 필요했다. 그러면서도 작업물의 퀄리티가 훌륭하게 나와야 했다. 우리가 아는 범위에선 이를 수행할 집단이 37th Degree밖에 없었다. 37th Degree는 여러 국제영화제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대형 연예 기획사와 협업도 많이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자우림을 정말 좋아한다. 다큐멘터리 촬영이 취재원을 향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 아닌가. 멤버들과 상의하기 전, 나와 37th Degree를 연결해준 이은비 CD(Creative Director)에게 “자우림 다큐멘터리를 한편 찍고 싶은데 37th Degree와 만드는 게 맞는 것 같아”라고 전했다. 37th Degree측에서 삽시간에 수락했고 바로 다음날 미팅을 했다. 김진만 미팅 날만 해도 나와 선규는 이게 잘 나올까 싶었다. 브리핑을 받는데, 대표님과 감독님을 뵈니 진정성있게 작품을 잘 찍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 작품의 연출자인 김지환 감독이 기획안을 우선 보냈다고 들었다. 기획안을 처음 받아보았을 땐 어땠나. 김윤아 첫 기획안은 3부작 구성이었다. 또한 자우림의 시작과 고난과 같은 기승전결이 있었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우린 이런 걸 원하지 않는다. 녹음실에서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모습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제작진과 우리가 늘 똑같은 생각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프로덕션 기간 동안 서로 많이 조율해갔다. 우리가 가장 원치 않았던 그림은 이 영화에서 자우림이 ‘연예인’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 다큐멘터리의 주요 내용은 지금의 자우림을 있게 만든 곡들을 재녹음하는, 25주년 기념 앨범의 제작기다. 만약 기존 곡의 재녹음 과정이 아닌 신곡을 만들고 녹음하는 과정이 다큐멘터리에 포함됐다면 지금과는 작품의 톤이 달라졌을까. 김진만 뮤지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볼 때 음악이 만들어지는 순간이 담기는 걸 좋아한다. 만약 정규 앨범을 녹음하는 과정이 찍혔다면 그런 영감의 순간들도 찍히지 않았을까. 김윤아 킴보 킴 감독(37th Degree의 대표)을 좀 불러달라. 2편, 3편의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오르네. (웃음) - 영화에 삽입된 곡 다수가 25주년 기념 앨범의 수록곡이다. 이 음반의 경우 <일탈> 정도를 제외하면 원곡의 고유성을 그대로 보존한 채 리메이크했다. 영화를 보면 편곡에 있어 “뭘 해도 그때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는 김윤아씨의 언급도 있던데. 김윤아 이 앨범은 그래야만 했다. 지금까지 자우림을 있게 한 곡들을 선곡해 앨범에 넣다보니 최신식으로 변형할 필요가 없었다. 원래의 구성을 최대한 살리는 게 중요한 앨범이었다. - 이번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쓰인 두곡을 꼽자면 <팬이야>와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아닐까. 특히 <팬이야>는 수많은 자몽들이 이 곡을 사랑한다는 게 영화에 여실히 드러난다. 이선규 이번 영화를 통해 많은 분들이 <팬이야>를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꼽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팬이야> 시퀀스를 자꾸 보게 되더라. 앞으로 무대에서 이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이 곡을 연주하지 않을까. 김윤아 이 노래를 부를 때 늘 객석에 있는 관객을 생각한다. 일상에서 힘든 일을 겪는 분들에게 이 노래가 필요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가창한다. 부르는 나도 자신의 팬이 되고자 매일 거울 앞에서 다짐하는 가사 속 그 사람이니까. -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2010년대 자우림의 최대 히트곡이다. 어느덧 이 노래도 발매 10주년을 맞았다. 김윤아 아직도 이 노래를 만들 당시의 장면이 각인돼 있다. 창백한 아침 햇살이 흩날리는 꽃을 비추던 봄날. 빨리 집으로 날아가 이 멜로디와 가사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두근거림, 연습실에서 멤버들에게 처음 이 노래를 들려주던 날의 풍경까지. 이 노래가 히트하던 중엔 성공 여부를 잘 못 느꼈다. 자우림의 다른 노래들이 그렇듯 이 곡도 발표 당시보다 얼마의 시차가 있은 후에 사랑받은 듯하다. 김진만 제작사에서 첫 내부 시사를 했을 때 지금 버전보다 자우림을 훨씬 칭송하는 방향으로 편집돼 조금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나오며 자우림의 예전 푸티지들이 겹쳐 나오니 약간 울컥하더라. - 은 8집의 <피터의 노래>와 9집의 <이카루스>를 한 곡으로 재편한 노래다. 2021년 이 버전을 공연에서 처음 선보인 후 아예 새로운 제목으로 한 곡이 탄생했다. 자우림과 자몽들의 노래라는 점에서 위 제목이 붙은 걸까. 김윤아 정답이다. 공연에 온 팬들이야 이 버전을 들을 수 있겠지만, 이 편곡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직함 없이 오롯이 나의 이름으로 - <이카루스>가 흐르는 인터뷰 시퀀스는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시네마틱한 장면 중 하나다. 김윤아씨의 유년기 고백과 교차 편집돼 흐르는 애니메이션이 특히 인상적이다. 김윤아 2018년에 자우림 팬아트 페스티벌을 개최했을 때 최고상을 받은 'BO'의 작품이다. 제작사와 소장 자료를 공유하던 중 감독님들이 이 애니메이션을 본 후 영화에 수록하기로 결정했고, 원작자와 논의 후 영화에 사용했다. - 이번 다큐멘터리를 보고 자우림의 공연을 경험한 적 없는 관객은 콘서트 실황 중 남자 멤버들의 가창 독무대에 놀랄 듯하다. 사실 공연마다 남자 멤버들의 커버 타임이 있지 않나. 이선규 언젠간 없어질 악습이다. 김진만 공연 세트 리스트를 정할 때 선규와 내가 부를 노래를 선곡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김윤아 형들은 매번 노래를 안 하려고 한다. 내가 보기엔 그 무대가 자우림 콘서트의 백미인데! 콘서트 내내 나만 노래하면 그건 늪이다. 연습실에서 형들이 우리 앞에서 오디션 비슷하게 노래를 불러본 후, 많은 이들과 논의해 커버곡을 선정한다. - 음악다큐멘터리에 걸맞게 음향 작업에도 신경을 쓴 것으로 안다. 공연 실황의 경우 공연 음향팀과 연락해 멤버들이 직접 믹싱에 참여했다고. 김진만 관객이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 그게 최고이지 않나. 그런데 라이브 현장처럼 믹싱하면 퀄리티가 떨어지는 면도 있어 적정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김윤아 엔딩과 크레딧에 등장하는 3곡은 돌비 애트모스로 작업했다. 철저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서비스 타임이다. - 개인 인터뷰에서 김진만씨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김진만 결과적으로는 김지환 감독 때문이다. 인터뷰 날 우리 집에서 여러 자료를 찾다 아버지가 예전에 스크랩해두신 자우림의 예전 자료를 보며 감상에 젖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슬픈 이야길 하게 되고, 그러다 <샤이닝> 이야기까지 나와 울컥했는데 앞에서 취재하던 김지환 감독이 이미 울고 있어 눈물이 났다. 김윤아 고도의 연출력인가. (웃음) 김지환 감독이 연기자 출신이다. 마리옹 코티야르의 상대역으로 분한 적도 있다. - 최종 상영본에 편집돼 아쉬운 소스를 살짝 풀어준다면. 김윤아 밝힐 순 없지만 밴드로서 중요한 이야길 털어놓은 대목이 있다. 그 파트가 꼭 영화에 실렸으면 했는데 빠졌다. - 이번 다큐멘터리엔 아주 오래전 라이브 영상들도 푸티지로 활용됐다. 오랜만에 20여년 전 영상을 다시 본 소감은. 이선규 술, 담배를 줄여야겠다. (일동 폭소) 예전 영상들을 보니, 권태를 느끼는 밴드가 있다면 다큐멘터리를 하나 작업해보는 것도 좋은 약이 될 것 같더라. - ‘원더랜드’는 자우림과 잘 어울리는 단어다. 영화 제목 <자우림, 더 원더랜드>는 자우림 3집의 타이틀이기도 하고, 지난해 발매한 크리스마스 앨범의 첫곡 또한 캐럴 의 리메이크다. 김진만 제목에 관해선 다른 후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제목이 딱이다. 기적처럼, 25년째 밴드를 하고 있는 건 꿈같은 일이기 때문에. 김윤아 원더랜드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유원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너무 예쁜데 이상하고, 재밌기도 무섭기도 한 곳. 유원지는 인형탈을 쓴 사람들의 집합이기도 하지 않나. 겉에서 보면 귀여운 인형이지만 그 속엔 노동하는 인간의 사연이 있다. 자우림의 음악도 그렇다.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속으론 삶의 고역을 욕하는. (웃음) - 김윤아, 이선규씨는 영화에서 연기한 경력이 있고 이선규, 김진만씨는 영화음악 감독 참여 경력이 있다. 하지만 세 멤버 모두 배역이나 직책이 아닌 온전한 본인으로 큰 스크린에 등장하는 경험은 처음이다. 김윤아 (포스터를 펼치며) 다른 것보다 포스터 하단 출연진에 큼지막하게 김윤아, 이선규, 김진만이 써 있는 걸 보니 미친 듯이 부끄럽더라. 그냥 자우림으로 써주시지. 이선규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해왔지, 좋은 음향을 갖춘 곳에서 우리 공연을 본 건 처음이었는데, 좋았다. 최후의 순간에도 웃으면서, 즐기면서 - 자우림의 음악은 영화와 무관하지 않다. 데뷔곡 <헤이헤이헤이>는 영화 주제가였고, <밀랍천사> 등은 영화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곡이다. 의 가사엔 <블레이드 러너>(1982) 속 로이 배티(루트거 하우어)의 유명한 독백이 인용되고, 크리스마스 앨범의 아트워크엔 <샤이닝>(1980) 속 타자기 문장이 앞뒤로 새겨져 있다. 그래서 영화에 관한 질문도 하고 싶다. 이선규씨의 경우 <대부> 트릴로지의 팬으로 알고 있다. 언제나 3부작을 연이어 관람한다고. 이선규 며칠 전에도 봤다. <대부>를 처음 보았을 땐 남자, 마초, 아버지와 같은 강한 키워드에 끌렸다. 하지만 이제 와 다시 보니 영화적으로 완벽하다. 최근 이탈리아를 여행했는데 <대부> 촬영지인 시칠리아는 방문하지 못해 아쉬웠다. - 김윤아씨는 영화광으로 유명하다. 솔로 1집 에세이엔 영화를 향한 긴 고백이 있고, 최근 인스타그램에 멤버들과 다 함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관람한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김윤아 그날 본 게 사실 4차 관람이다. 최근 몇년간 나의 베스트 영화는 <3000년의 기다림>과 <서스페리아>(2018), 그리고 <그린 나이트>다. 공교롭게 앞의 두 작품엔 나의 최애 배우인 틸다 스윈튼이 나온다.. 배우 때문에 뽑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 빨라지며) 그런데 틸다 이야기를 하니 <아이 엠 러브>도 언급하고 싶고! - 세 멤버 모두 인생의 절반을 자우림으로 살았다. 이선규씨가 영화에서 언급한 “계속해 생길 것 같은 재밌는 일”이 다른 멤버에게도 있다면. 김윤아 지금도 재밌다.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려면 배급사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는데 우리 영화는 시작할 때 배급사도 없고 돈도 없었다. 처음엔 25주년을 기념한 영상을 남기자는 각오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메가박스 돌비관에 우리 영화가 걸려 있다. 이선규 게다가 영화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되다니! - 작년에도 두 장의 앨범을 냈지만, 자우림은 음반 시장의 개념이 거의 전무한 지금도 정규 앨범을 발매한다. 특히 11집부턴 포토 부클릿이 두툼해졌고. 김윤아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발간했으면 하는 방식으로, 어릴 적부터 듣고 자라온 방식대로 앨범을 만든다. 그걸 바꿀 생각은 없다. 요즘 실물 앨범을 만들 땐 폐기물을 최소화하는, 지속 가능한 형태의 제작 방식을 고민한다.그래서 최근 앨범들은 재활용이 가능한 책의 형태로 만들고 있고, 올해 발매한 솔로 라이브 앨범같은 2CD가 아닌 다음에야 주얼 케이스는 지양하려 한다. - 영화에서 자우림의 음악을 관통하는 말로 ‘낙천적 패배주의’를 꼽는다. 사실 대부분의 청춘이 낙천적 패배주의자지 않을까. 세 멤버 모두 그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혹은 여전히 그 마음을 품기에 지금도 청춘을 노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일 실패가 예정돼 있대도 오늘을 낙관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나. 김윤아 여전히 나는 우리 노래 <광야>와 <샤이닝> 그 자체인 사람이다. 멤버들도 그럴 거다. 나이가 들고 생활이 안정돼도 방황한다. <코르사주>나 <스펜서> 속 주인공들이 뭐가 부족해 번민하겠나.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살아 있다면 필연적으로 괴롭고, 그게 우리의 음악에 반영될 터다. <돈 룩 업>의 엔딩을 보면 지구 종말의 순간에도 가족도 아닌 사람들과 손잡고 식사를 나누며 죽음을 맞이하는 그룹이 있다. 딱 그 마음이다.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할 거다. 울고 난리치며 탈출해봤자, 살 수 있겠나. 김진만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노력이야 하겠지만, 미래를 컨트롤할 순 없다. 낙천적으로 살아보니 손해 볼 게 없더라. 그저 주어진 숙제를 열심히 노력해 끝내고 사는 거다. 진인사대천명의 마음으로. - 영화의 관전 포인트를 멤버별로 하나씩 뽑아준다면. 김윤아 이선규와 김진만의 티키타카. 김진만 인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우리 영화가 그렇다. 이선규 우리 셋이 뭘 잘하려 애쓰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뭔가 해내긴 한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이뤄내는 현장을 봐주었으면 한다. - 결성 10주년엔 안식년을 선포해 휴식을 가졌지만, 20주년과 25주년엔 열일했다. 4년 후면 30주년이다. 김윤아 30주년인데 뭘 안 하면 애매하지 않나. 숫자가 30인데. 이선규 그런데 너무 자주 기념하면 ‘쟤네 또 해?’ 할까봐. (웃음)

[인터뷰] ‘바넬과 아다마’ 라마타 툴라예 사이 감독, 타는 목마름의 사랑

프랑스에서 성장하고 영화교육을 받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감독의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몇해째 바람을 이어가고 있다. 마티 디옵의 <애틀랜틱스>(2019), 레주 리의 <레 미제라블>(2019),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알리스 디오프의 <생토메르>(2022)가 있었고 올해 칸에서는 경쟁부문의 유일한 신인으로 이름을 올린 세네갈계 라마타 툴라예 사이 감독이 <바넬과 아다마>로 불씨를 이어받았다. 유럽에서 나고 자란 감독의 작품을 아프리칸 시네마라 할 수 있느냐는 반문도 존재하나 라마타 툴라예 사이 감독은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재현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모습을 스크린에 올려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넬과 아다마>는 지극히 사랑하는 남녀가 부부로 맺어졌지만 공동체를 떠나 둘만의 새 삶을 시작하기 바라는 바넬의 꿈이, 아다마에게 촌장의 책임을 계승시키려는 마을의 압력과 갈등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이다. - 당신의 단편 <아스텔>과 첫 장편 <바넬과 아다마> 사이의 연관이 있다면 듣고 싶다. = 유일한 공통점은 세네갈 다카르에서 차로 8시간 걸리는 북부 세네갈에서 찍었다는 점이다. 시나리오는 장편을 먼저 썼지만 장편 제작과정을 배우기 위해 단편부터 찍었다. - 첫 영화로 거장들과 나란히 칸 경쟁부문에 선정됐으니 대단한 성취다. 여성으로서 영화산업에 진입하고 말하려는 바를 표현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었나. 마음에 둔 원칙이 있다면. = 칸 경쟁부문에 오를 만한 무언가를 내가 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감독이 되려면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만큼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더 잘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이번 영화의 스탭들은 주인공 바넬의 강인함과 카리스마를 통해 나를 바라보고 신뢰하기로 결심하고 프로젝트에 투신해준 게 아닌가 싶다. - <바넬과 아다마>에 참고한 영화나 책, 그림이 있었다면. = 이 영화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비극이자 동화로서 다양한 레퍼런스가 있다. 문학적으로는 토니 모리슨이 중요한 영감이었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마이아 앤절로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메디아, 레이디 맥베스, 페드라 등 고전 속 여성 인물도 참조했다. 영화적으로는 테런스 맬릭 영화의 촬영, <문라이트> <비스트 오브 더 서던 와일드>가 영향을 줬고, 미술사에서는 에드바르 뭉크와 반 고흐를 꼽을 수 있다. - 바넬은 새총으로 동물을 쏘는 버릇이 있다. 이런 행동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바넬의 면모는 무엇인가. = 절망이다. 그리스 신화의 메디아는 이아손에 대한 사랑이 좌절되자 자식을 죽인다. 바넬의 분노는 자연과 작은 동물들에게 투사된다. 나는 종종 바넬을 태양의 딸이라고 부를 만큼, 내면에 신성한 불을 품은, 어쩌면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그래서 거의 추상적인 캐릭터였으면 했다. - 날씨는 <바넬과 아다마>의 스토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후 위기에 대한 우려도 당신이 표현하려던 바의 일부인가. = 물론이다. 개인적으로 기후변화를 깊이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직설적인 접근을 하거나 어떤 선언을 하고 싶진 않았다. 기후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니까. 날씨는 일종의 메타포다. 자연은 바넬의 캐릭터와 직결돼 있다. 바넬의 마음이 말라붙는 과정과 가뭄의 심화는 나란히 간다. 캐릭터가 더 넓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상징이 된다.

[기획] ‘거미집’의 배우들- 박정수, 임수정, 오정세, 장영남, 전여빈, 정수정의 말말말

김지운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미집>은 배우들의 호흡에 관한 영화”이자 “스크루볼 코미디의 리듬 위에서 춤추는 영화”이며 궁극적으로는 앙상블의 영화다. 촬영 현장에서 벌어지는 소동극 속에서 배우들은 각자의 리듬을 더해 하나의 음악을 완성해나간다. 영화 속 영화인 ‘거미집’을 중심으로 혼란스러운 듯 아름답게 조율된 이들의 활약과 뒷이야기를 전한다. 박정수 ‘거미집’의 시어머니 역이자 노장 배우인 오 여사 캐릭터를 맡아 극의 무게를 잡아준다. “설마 칸에 올 줄이야. 지금도 비몽사몽이다. 드라마도 5년 정도 쉬고 있었는데 캐스팅 제안이 와서 거의 16년 만에 영화 현장에 돌아왔다. 김지운 감독에게 왜 나를 캐스팅했냐고 물었더니 발음이 좋아서라고 하더라. 그러고 나니 대사가 입에 안 붙는다는 불만을 말할 수가 없었다. (웃음) 드라마 현장이 익숙하고 요즘 영화 현장은 잘 몰라서 처음엔 헤맸는데 익숙해질 만하니까 끝나버렸다. 70년대 현장에 대해 더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란다.” 임수정 ‘거미집’의 여주인공이자 베테랑 배우 이민자 캐릭터를 맡아 극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송강호 선배님이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면 어떤 느낌인지 말해주셨는데, 직접 경험하니 상상 이상의 특별함이 있었다. 이민자라는 역할의 경중에 상관없이 김지운 감독님과 함께할 수 있다면 한컷만 나온다고 해도 출연하려고 결심했다. <장화, 홍련>(2003) 이후 20년 만의 작업이라 더 각별했다. 김지운 감독님은 현장에서 과묵하고 조용한 카리스마가 있는데 이번 영화에선 유독 더 편해 보였고 즐거워하셨다.” 오정세 ‘거미집’의 남주인공이자 바람둥이 톱스타 강호세로 변신해 웃음 폭탄을 선사한다. “어떻게 하다보니 <남자사용설명서> 이후 ‘미남 톱스타’ 역을 종종 맡는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계속하다보니 어떤 믿음이 생겨 뻔뻔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름의 노하우가 쌓이는 것 같다. 송강호 선배님을 비롯해서 카메라 뒤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현장이었다. 농담 반 자랑하자면 우리 영화는 한편 가격으로 두편을 볼 수 있는 영화다. 극 중 촬영하는 ‘거미집’도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다. 마지막 플랑 세캉스 신은 꼭 보셨으면 좋겠다.” 장영남 ‘거미집’ 제작사 신성필름의 대표 백 회장 캐릭터를 맡아 소동극을 정리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무언가 만들어나가는 현장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거미줄처럼 엮인 캐릭터와 구조를 보면서 감탄했다. 뤼미에르 극장에서도 같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김기열(송강호)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앙상블을 쌓아나가는데 어느 순간 영화의 안과 밖이 구분하기 힘들어질 만큼 섞이는 걸 느꼈다. 그걸 소화해내는 송강호라는 배우가 있어 한편의 연극 무대 같은 호흡이 완성됐다.” 전여빈 김기열 감독의 말만 믿고 ‘거미집’ 재촬영을 밀어붙이는 신성필름의 상속녀 신미도 캐릭터가 되어 소란에 불을 지핀다. “감독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지만 각자에게 영화의 의미를 묻는 작품처럼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검열과 강박에 시달리던 시기였는데 이 작품이 돌파구가 되어주었다. 한번은 송강호 선배님이 ‘좀더 자유롭게 연기해도 괜찮다’고 조언해주셨는데 어떤 해방감을 느낄 만큼 위로가 됐다. 영화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수정 ‘거미집’의 젊은 여공 역을 맡은 떠오르는 스타 한유림으로 변신하여 극의 활기를 더한다. “상업적인 장편영화를 처음하는 셈인데 원래 다 이런 분위기냐고 되물을 정도로 즐거웠다. 70년대 배우의 말투나 발성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영화들을 찾아보면서 공부했다. 감독님은 딱 정해진 연기보다는 자유롭게 배우가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편이다. 무언가 연기를 하는 역할을 다시 연기한다는 게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다 함께 모여 재미난 놀이를 하고 온 느낌이다.”

[기획] 칸에서 데뷔한 한국 배우들, 더 밝은 내일을 향해

칸영화제는 새로운 만남과 발굴의 장이다. 신인배우가 첫 영화로 칸의 레드 카펫을 밟는 건 흔한 경험은 아닐 테지만 올해는 유달리 한국 신인배우들의 활약이 눈에 띈 한해였다. <화란>의 김형서, 홍사빈 배우는 자신들의 첫 장편영화를 들고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으로 칸의 문을 두드렸다. 경쟁부문에서도 한국 배우의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브라이터 투모로>에는 한국영화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한국인 통역사 역할로 처음 연기에 도전한 피아니스트 유선희도 배우로서 처음 칸에 도착했다. 칸에서 데뷔한 한국 배우들의 앞날을 응원하며 그들의 활약을 소개한다. 타고난 영리함과 타는 듯한 목마름, <화란> 배우 김형서 “첫 연기, 첫 영화가 <화란>이라서 너무 다행이고 감사하다.” 가수 비비로 활동 중인 배우 김형서는 <화란>의 하얀 역할로 자신의 첫 번째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 김형서가 맡은 하얀은 연규(홍사빈)의 어머니와 하얀의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연규와 가족이 된 소녀로, 위태로운 소년 연규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버팀목이다. 첫 연기에서 이렇게 어둡고 복합적인 캐릭터를 선택한 이유를 묻자 “일단 무작정 연기를 해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용기였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답했다. 겸손한 답변이었지만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치부하기엔 캐릭터의 해석과 표현력이 남다르다. 하얀이란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했느냐는 질문에 실로 영리한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내가 공감이 갔던 캐릭터는 연규였다. 연규가 느끼는 답답함, 무력함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희망까지 여러 가지로 끌렸다. 그래서 연규가 바라는 게 무엇일지를 상상하며 연규의 시선에서 하얀을 그려보았다.” <화란>은 희망 없는 세상에 사는 소년 연규와 그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는 폭력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송중기) 사이의 사연이 중심인데, 둘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하얀의 존재다. “하얀은 쓰레기더미에서 피어난 꽃처럼 환경을 탓하지 않는 올곧은 아이다. 나도 살면서 길을 자주 잃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주변에 하얀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접근했다.” 타고난 영리함으로 캐릭터의 쓸모와 본질을 꿰뚫는 배우 김형서의 감각은 베테랑 못지않다. 동시에 연기에 대한 갈증에 휩싸인 이 야심만만한 신인배우는 마치 스펀지처럼 경험을 빨아들이며 언제 어떤 순간에서도 배움을 구한다. “칸에 와서 즐겁지만 한편으론 아직 한참 멀었구나, 갈 길이 멀구나 싶은 마음 가득이다”는 그 진심 어린 말은 배우 김형서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야생동물의 냄새,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화란> 배우 홍사빈 소년은 울지 않는다. 아니 위태로울수록 단단해진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동네에서 태어난 18살 소년 연규는 돈을 모아 화란(네덜란드)으로 떠나는 것이 꿈이다. 화란이 어디 있는지, 가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도 모르는 소년의 꿈은 덧없어서 더욱 처절하고 애잔하다. 연규 역을 맡은 배우 홍사빈은 이번 영화가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지만 말해주지 않으면 믿지 못할 만큼 놀라운 에너지와 깊은 눈빛으로 화면을 장악한다.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숙소에서 계속 대본을 보며 연기 구상을 했는데 막상 현장에 나가면 감독님, 선배님들이 모두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어떤 선택을 해도, 아니 실수를 해도 틀린 게 아니라는 걸 배울 수 있었던 현장이었다.” <화란>은 홍사빈의 동물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순간으로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생활감에 찌든 피로한 눈빛은 탁월한데, 홍사빈은 “캐릭터를 대할 때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일단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친구를 대하듯 접근한다”고 비결을 밝혔다. “오늘은 이 친구와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오늘은 조금 멀어진 것 같으니 내일은 좀더 다가가볼까 하면서 천천히 친해진다.” 겪어보지 못한 어둠에 가닿을 수 있는 비결은 어쩌면 상대를 이해하려 무릎을 낮추는, ‘듣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부담감에서 출발했지만 점점 책임감으로 바뀌었다. 배우로서 이만한 무게를 경험해본 건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후회도 많이 하는 편이라 그만큼 노력하는 중이다. 이 영화가 태어나는 과정을 함께한 입장에서, 칸에서 이 영화의 탄생을 목격하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새로운 도전이 주는 즐거움, <브라이터 투모로> 배우 유선희 변화는 밀물처럼 소리 없이 밀려온다. 최근 한국 콘텐츠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곳곳에서 실감하는 가운데 칸에서도 한국에 대한 변화한 인식을 만날 수 있었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브라이터 투모로>는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고전적인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감독의 분투기를 그린다. 영화 제작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을 때 감독의 구세주로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한국 프로듀서들이다. 한국 프로듀서들은 난니 모레티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고 투자를 약속하는데, 이때 한국 영화인들과의 통역을 맡은 인물로 캐스팅된 배우가 바로 유선희 피아니스트다. 꾸준히 피아노 솔로 앨범을 내며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유선희 피아니스트는 우연한 기회에 난니 모레티 영화에 캐스팅되고 처음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공연이 멈추고 정체된 시기에 난니 모레티 영화의 오디션 제안을 받았다. 한국인 통역사 역할인데 아시아계 배우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역할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 유선희 배우는 이미 주연으로 한편의 영화를 마쳤고 넷플릭스 시리즈에도 출연하며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난니 모레티 감독은 완벽을 추구하는 분으로 명성이 자자한데, 클래식 음악은 워낙에 반복을 많이 하는 작업이라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피아노 연주는 사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작업인 데 반해 영화는 함께하는 창작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한국 문화를 대하는 시선과 위상이 달라졌음을 실감한다는 그는 언젠가 한국영화에도 출연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트위터 스페이스] 배동미·남선우의 TGV: ‘안나푸르나’ 황승재 감독, 김강현, 차선우 배우

※ 스페이스는 트위터의 실시간 음성 대화 기능입니다. ‘배동미·남선우의 TGV’는 개봉을 앞둔 신작 영화의 창작자들과 함께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스페이스는 실시간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시 듣기가 가능합니다. 목소리가 닮은 감독과 배우 6월5일 월요일 밤 11시, <씨네21> 스페이스를 찾은 세 남자 중 두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비슷해 진행자와 트위터리안들이 잠시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안나푸르나>의 황승재 감독의 목소리가 주연배우 김강현 특유의 가볍고 맑은 톤과 유사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제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김강현 배우가 감독인 척 다 대답해드릴 겁니다. (웃음)” 감독의 농담으로 시작된 이날 스페이스는 사랑과 인간관계, 그리고 삶에 대한 생각들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과거의 나에게 사랑에 빠진 여성이 자신과 멀어지면 곧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징크스가 있는 중년 강현과 금방 누군가에게 빠지지만 마음이 식는 속도도 빠른, 군에서 막 제대한 청년 선우. 얼핏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건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만 섣불리 조언하거나 충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승재 감독은 젊은 날 자신에게 강현 같은 선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부드럽고 편안한 관계를 만들어냈다. “10살 위 내가 지난날의 나와 함께 산에 오르며 고민을 들어주고 ‘그건 그런 거야’라고 얘기해주는 것이죠.” 영화 속 두 캐릭터는 금방 내려올 심산으로 등산화도 챙겨오지 않았다가 마음이 통하는 대화에 빠져 정상까지 오르게 된다. 인생은… 어쩌면 산 히말라야의 높은 봉우리 이름을 딴 영화는, 높이는 크게 차이나지만 서울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다. 사랑과 인간관계를 다룬 이야기를 특별히 산을 배경으로 풀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인생이 산과 비슷하잖아요.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고. 왠지 산에선 그동안 말하지 못한 속마음도 술술 이야기하게 돼요.” 평소 산행을 즐긴다는 황승재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북악산의 푸른빛에 관객의 눈은 편안해지지만, 산을 타며 대사를 소화해야 했던 배우들은 편안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카메라를 세팅해놓고 여러 번 오르락 내리락하며 연기한 차선우는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복병은 대사량이었다. “우리 영화에 대사가 많습니다. 저보다 강현이 형 대사가 많은데 저희 둘 다 대사 전체를 외우고 촬영에 들어갔죠.” 안 그래도 대사가 많은 김강현은 무릎까지 달래가며 연기해야 했다. “오래전 뮤지컬에 출연했다가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바람에 산행을 잘 못해요. 그래서 영화를 찍을 때 밴드로 무릎을 단단히 고정한 뒤 천천히 움직였어요.” 자연이 보여준 풍경들 <안나푸르나>는 단 이틀에 걸쳐 촬영되었다. 밭은 일정인 만큼 날씨가 도와주면 좋으련만 둘째 날 3시간가량 굵은 비가 쏟아졌다. 그러잖아도 짧은 일정에 제작진과 배우들은 비가 그치기만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비의 기운 때문에 카메라에 포착된 산의 얼굴은 다채로워졌다. 비가 내릴 듯 사방이 어둑어둑하고 세찬 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리는 가운데 시작된 두 남자의 산행은 시간이 흐르면서 한낮의 햇살을 받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날씨가 갠 영화의 후반부, 두 캐릭터는 산에 무거운 맘을 다 털어버린 듯 개운해 보인다. 한편 영화는 두 남자의 대화가 담긴 현재와 과거 연애를 재현한 플래시백을 오가는 문법을 취한다. 푸른 산과 대비되는 플래시백 신은 엠버톤으로 따스하게 담겼는데, 후반작업 과정에서 특별히 색감을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은 색감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냈다고 한다. “영화를 촬영한 2년 전 5월의 모습이 담긴 거예요. 의도치 않았는데 좋은 의도의 영화가 완성된 거죠. 이런 게 영화의 매력인 것 같아요.” 영화 스스로 포착한 빛과 뉘앙스에 대해 황승재 감독은 이렇게 표현한다. 영화라는 산을 끝까지 오르려는 감독 <안나푸르나>가 두 남자가 사랑과 삶에 대해 작은 깨달음을 얻는 작품이라면, 황승재 감독은 <안나푸르나>를 통해 영화라는 매체를 많이 알아가는 중이다. 이 영화의 배급을 시네마뉴원이 담당하지만 황승재 감독도 관련 실무를 맡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영화감독이지만 영화 배급에 대해 너무 몰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을 하고 후반작업 후 개봉하기까지, 영화라는 산이 있다면 황승재 감독은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내려는 이다. “영화를 한편만 하고 말 거라면 굳이 이런 일까지 하지 않겠죠. 앞으로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그 영화를 관객과 함께 나누는 시스템을 만들어보려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커버] ‘플래시’, 끝, 어쩌면 새로운 시작

DC 코믹스는 현대의 신화를 쓴다.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창조해왔다는 게 아니다. <스타워즈>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인류가 오래전부터 반복해온 이야기의 원형에서 모티브를 따와 현대적으로 각색했다는 의미다. DC 코믹스는 항상 클래식한 서사에 뿌리를 두었고, DCEU 역시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스크린에 신화를 쓰고자 했다. DCEU의 영웅들이 가진 고뇌는 한결같다. 영웅으로서의 정체성 찾기는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의 뿌리, 부모의 부재를 어떻게 마주 보고 극복할 것인가. 비유하자면 배트맨은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으로 빚어진 어둠이고, 아쿠아맨은 어머니의 부재가 불러온 정체성의 문제로 야기된 결핍이다. 이러한 집착은 때론 너무 비대해져 급기야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에 이르면 웃지 못할 해프닝마저 벌어졌다. 슈퍼맨과 배트맨의 대결이 어머니의 이름으로 실마리가 풀릴 땐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DCEU의 13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주자인 플래시(에즈라 밀러) 역시 이러한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플래시의 고민은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아버지다.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라도 구하고 싶지만 좀처럼 방법이 없다. 살짝 교통정리를 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겠다. <플래시>는 DCEU의 마지막 작품이다. DC 세계관의 영화화 프로젝트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구체적인 윤곽이 나온 건 2013년 개봉한 <맨 오브 스틸>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잭 스나이더의 영입과 함께 DC는 마블처럼 연결되는 우주를 만들고자 했고 그 중심에는 ‘저스티스 리그’가 있었다. 하지만 흥행 부진과 감독 교체 등 여러 변화를 겪으면서 현재 DC는 잭 스나이더가 기틀을 세운 톤을 정리하고 새롭게 영입한 제임스 건을 중심으로 세계관을 다시 리부트하기로 결정한다. 이른바 DC 유니버스의 재출발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상황으론 <슈퍼맨>의 헨리 카빌과 <블랙 아담>의 드웨인 존슨이 하차하고 <아쿠아맨> 신작부터 새로운 타임라인을 설정할 예정이다. 물론 DCEU의 영웅들이 대거 교체되거나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플래시>가 DCEU의 영향력 아래에서 나오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DCEU의 영웅들이 반복해온 문제, 부모의 부재와 히어로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테마가 이번 작품에서도 핵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플래시와 배트맨의 관계 빛보다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플래시는 저스티스 리그 내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중이다. 신적인 존재 슈퍼맨은 그야말로 세계를 구하기에 바쁘고, 원더우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쿠아맨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부재 중이라 결국 플래시의 단짝은 메타휴먼 중에서도 능력이 약한 배트맨(벤 애플렉)만 남는다. 둘의 인연은 능력적인 면 외에도 각별하다. 배트맨은 플래시의 아버지를 누명에서 벗겨줄 단서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플래시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빛보다 빨리 달리면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플래시는 저스티스 리그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활력소를 담당하고 있는데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어딘지 불안하고 미성숙한, 덜 자란 어른 같은 친구다.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아이가 자신에게 시간을 거슬러갈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상황은 파국으로 이어지기 딱 좋은 무대를 갖춘다. 플래시, 아니 배리 앨런은 어머니가 살해당하기 전의 과거로 돌아가 과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한다. 1980년대 영화 <백 투 더 퓨처>나 <빅>처럼 시간 여행과 타임 패러독스가 드문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플래시>만큼 이걸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컨셉의 히어로도 드물다. 배리는 과거로 돌아가 어머니의 죽음을 막지만 정체불명의 존재의 습격을 받아 과거에 갇혀버리고 만다. 문제는 배리가 돌아간 과거가 자신의 시간 축 위에 있는 과거가 아니라, 또 다른 배리가 존재하는 별개의 시간 축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배리는 조용히 본래 세계로 돌아가려 하지만 과거의 배리와 대면하고 엮이는 바람에 그마저 실패한다. 심지어 과거의 자신이 능력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나 현재 본인이 갖고 있던 능력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 두명의 배리가 있으니 한명은 플래시, 한명은 배리라고 부르기로 하자. 사실 <플래시>의 이러한 구성은 노골적이고 선명하다. 본래 DC 영웅들은 일반인의 삶과 가면의 삶, 두개의 정체성을 오가는데 이번 영화에선 이것을 아예 물리적으로 분리시켜버렸다. 능력이 사라진 현재의 플래시와 갑자기 능력이 생긴 과거의 배리는 2인1조를 이뤄 엉망진창이 된 상황을 마주한다. 분리 불안의 히어로와 멀티버스의 분리 불안 <플래시>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불안, 후회, 미숙이란 감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배리 앨런이라는 인물이다. 에즈라 밀러가 맡은 이 캐릭터는 거의 정신 분열에 가까울 정도로 산만하고 정신이 없다. 설정상 그저 조용하고 소심한 청년처럼 보이지만 에즈라 밀러가 옷을 입자 독특한 불안과 우울, 조증과 울증 사이를 쉴 새 없이 진동하는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플래시>의 경우 물의를 일으킨 배우 에즈라 밀러로 인해 적지 않은 진통을 겪었는데, 이러한 이미지가 더해져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기괴한 결과를 빚었다. <플래시>를 에즈라 밀러의 기행과 완전히 분리해놓고 보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이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가 연기인지는 잠시 미뤄두고, 거의 분리 불안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에즈라 밀러의 표현력은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배리 앨런을 매우 불안하고 독특한 영웅으로 밀어올리기 때문이다. 배리 앨런의 딜레마는 단순하다. 그는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제어되지 않은 욕망을 어떻게 통제할지를 해결해야 한다. <플래시>가 택한 방식 역시 간단하다. 현재의 배리 앨런보다 더 미숙하고 철없는 시절의 과거를 직접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플래시는 히어로로서 “모든 문제에 답을 내려는” 강박을 버리고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는” 법을 익힌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 말이다. <플래시>의 두 번째 포인트는 멀티버스다.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 축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현실을 마주한다는 게 핵심이다. 플래시가 되돌아간 곳은 수없이 존재했을 가능성 중 하나다. 그곳에는 또 다른 배트맨, 또 다른 슈퍼맨, 또 다른 플래시가 있다. <플래시>는 이젠 식상해진 멀티버스의 아이디어를 다시금 활용하는데, DCEU의 피날레답게 이제껏 축적해온 세계관을 몽땅 가져와 축제를 벌인다. 어린 배리 앨런의 세계에선 슈퍼맨이 없다. 대신 크립톤 행성에서 온 슈퍼걸(사샤 카예)이 사람들에게 붙들려 온갖 실험을 당하고 있다. 플래시의 단짝 배트맨은 저스티스 리그의 벤 애플렉이 아니라 원년 ‘배트맨’인 마이클 키턴이 등장하는데, 이 순간 마치 제4의 벽이 무너지는 것 같은 즐거운 농담이 시작된다. 어린 배리 앨런의 세계 속 배트맨은 은퇴를 한 뒤 노쇠해진 상태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복수심마저 세월에 풍화된, 초라한 배트맨은 플래시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어쩌면 마지막) 목표를 향해 녹슨 발걸음을 옮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플래시>는 원년 ‘배트맨’에 바치는 헌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마이클 키턴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다. 여기에 메인 빌런으로 DCEU 최강의 적이자 DCEU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을 <맨 오브 스틸>의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이 등장해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슈퍼맨이 없는 이 싸움에서 조드 장군을 이길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대단원의 전투는 해피 엔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패배로 끝날 수많은 가능성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흘려보낼 것인지에 대한 큰 질문이라고 해도 좋겠다. 과거를 바꾸고 싶었던 미숙한 초월자 플래시는 어떻게 힘을 다루고 지나간 것을 흘려보낼지에 대한 답에 도달한다. 그건 어쩌면 이제 확장을 멈추고 문을 닫을 우주, DCEU에 바치는 작별 인사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하나의 우주가 실패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되지 않는 걸 억지로 뜯어고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안되는 건 흘려보내줄 필요도 있다는 DC의 담담한 성찰처럼 들려서 애잔한 구석도 있다. DCEU의 마지막 불꽃 플래시의 단독 영화이자 한편의 히어로영화로서 <플래시>의 장단은 뚜렷하다. 우선 히어로 ‘플래시’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와 한계, 정체성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그야말로 교과서적이다. 이건 단지 서사의 문제가 아니라 히어로의 시그니처 액션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중요한데, <플래시>의 오프닝은 이를 인상적으로 수행해낸다. 애니메이션적인 질감과 과장된 표현이 과하게 드러나는 CG의 톤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짐작 가능하다. 후반부는 DCEU의 시작점이었던 <맨 오프 스틸>의 연장선에 있는데 그 코믹스적인 과잉 액션과 톤을 맞추기 위한 작업처럼 보인다. <플래시>는 마지막인 만큼 전반적으로 팬서비스도 강하다. 두개의 세계, 두명의 플래시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명료하면서도 강렬하다. 돌이켜보면 잭 스나이더 유니버스는 언제나 그랬다.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 서사의 이미지화라고 해도 좋겠다. 잭 스나이더 유니버스의 피날레인 <플래시>에서 보여지는 때때로 무겁고 비극적인 순간은 적지 않은 무게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플래시가 마주하는 수많은 과거, 아니 멀티버스들에 이르면 마블의 <왓 이프…?>가 선보였던 ‘만에’의 상상력도 대방출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래시>가 이미 망가져버린 ‘저스티스 리그’를 되살릴 만큼 출중하냐면 그건 아니다. 충분한 속도와 시각적 쾌감을 갖추고 있지만 영화는 마치 배리 앨런처럼 분열적이고 불균질하다. 이 영화의 수많은 장점이 단독 영화로서의 완성도보다는 DC의 수많은 유산들에 빚을 지고 있다는 점도 한계 중 하나다. 요컨대 <플래시>는 화려하게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우주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적인 즐거움 속에 있다. 마치 사라지기 전에 가장 밝게 빛나는 초신성처럼, DCEU의 어두운 그림자를 제 한몸에 다 끌어안고 빛나는 순간들을 남기는 것이다. 물론 이건 완전한 끝이 아니다. DC의 새로운 수장 제임스 건이 미리 알려준 것처럼 <플래시>는 DCEU와 DC 유니버스를 이어줄 다리 같은 존재다. 하지만 이제 슈퍼히어로영화의 수명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멀티버스라는 소재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쩌면 <플래시>가 빛낸 마지막 불꽃이 단지 DCEU의 것이 아니라 슈퍼히어로 유니버스 전체에 대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과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섬광은 찰나와 같고 어느새 어둠이 짙게 드리운다.

[인터뷰] ‘나쁜 엄마’ 배세영 작가, 내가 쓴 이야기를 온전히 보여주고 온전히 책임지는 경험

반드시 법관이 되어야 한다며 어린 시절부터 고강도의 공부를 요구받아온 최강호(이도현)는 불의의 사고를 겪으며 7살의 기억에 멈추고 만다. 아버지에게 덧씌워진 억울한 누명과 죽음을 밝혀내려 했던 그의 복수심까지 그대로 정지되고, 엄마 진영순(라미란)은 이번엔 강호에게 삶을 공부시키려 한다. 먹고 자고 씻는 생존의 모든 규칙과 규율. 체념과 미련 사이를 엇박자로 걸어나가는 모자 곁엔 말 많고 소란스러운 조우리 마을 사람들이 늘 함께한다. 기억을 잃은 아들과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엄마의 관계 회복이라는 텁텁한 소재 사이에도 웃음과 다정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영화 <바람 바람 바람> <완벽한 타인> <극한직업> <인생은 아름다워>의 시나리오를 통해 고유의 농담과 천진한 장난을 보여준 배세영 작가를 만나 첫 드라마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드라마 <나쁜 엄마>는 원래 영화 시나리오로 출발했다고. =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한 2009년만 해도 중년 여성의 서사나 장애를 가진 아들과 엄마의 모습을 업계에서 크게 흥미로워하지 않았다. 엄마 캐릭터라고 하면 할머니 느낌을 먼저 떠올리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투자나 캐스팅 등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드라마 작업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 오랫동안 잠가둔 <나쁜 엄마>가 먼저 생각났다. 이야기를 확장하기에도 좋은 타이밍이었다. -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 작업은 그 호흡이 다르다. 나름의 고충도 컸을 텐데. = 내가 워낙 손이 빨라 영화 시나리오는 대부분 한달 안에 쓴다. 그런데 <나쁜 엄마>는 대본 작업만 3년이 꽉 찼다. 코로나19 기간 내내 이것만 붙잡고 있었다. 영화는 한 공간에 사람을 몰아넣고 2시간여 동안 사건을 진행시키면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번 회차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다음 회차가 궁금하지 않으면 절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초반엔 드라마 문법을 잘 몰랐다. 어떻게 하면 시청자를 TV 앞으로 다시 데려올 것인가, 그 엔딩 포인트를 잡는 게 중요했다. 매회 영화 한편을 완성하는 공력이 들었다.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심나연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이 워낙 드라마에 강한 분들이라 힘을 많이 얻었다. - <나쁜 엄마>는 영화로서는 2009년, 드라마로는 2020년에 구상됐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청자도 많이 바뀌었는데, 시의성에 흔들리지 않는 작품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 드라마의 주제를 믿었다. 7살 된 아들에게 삶을 교육하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엄마의 사랑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부대껴 살아가는 공동체의 중요성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흔들려선 안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떤 시대에는 이러한 주제가 수용되고, 또 어떤 시대에는 수용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도 너무 슬플 것 같다 - 사고로 7살의 기억을 갖게 된 검사 아들과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엄마. 처음 설정은 여기까지였지만 드라마에는 아버지를 위한 복수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 대본을 쓰는데 문득 한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왜 엄마는 아들에게 그렇게까지 법관이 되라고 했을까? 왜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길 자처해야 했을까? 주인공의 전사가 개연성 있게 채워져야 시청자도 그들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응원할 수 있다. 사실 영화 작업을 하다보면 제작 과정의 다양한 이해관계로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있다. 이 과정에서 종종 의도와 개연성을 놓치기도 한다. 시나리오작가의 작은 비애랄까. (웃음) 그런 점에서 오래전부터 드라마를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 드라마는 작가의 의도를 비교적 높은 비율로 반영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늘 궁금했다. 내가 쓴 이야기를 온전히 보여주고, 그에 대한 평가도 모두 내가 책임지면 기분이 어떨까? - 가족의 애환을 녹인 장면에는 그 안에 담긴 슬픔이 무척 구체적이다. 자신에게 예정된 장례 절차를 영순이 아들에게 알려주는 장면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슬픔은 어떻게 그려냈나. = 작품을 오래 갖고 있다보니 엄마들에 관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차곡차곡 모을 수 있었다. 그래서 드라마 안에 농축된 슬픔이 남게 된 것 같다. 영순은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강호가 안정된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자신이 죽었을 때 슬퍼하며 타인에게 의존하기보다 상주로서 해야 할 일을 잘 치르길 바랐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의식주 이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돼지농장도 영순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대변한 장치다. 돼지는 보통 28일 동안 새끼들과 함께 지내면서 생존에 필요한 모든 습성을 가르치는데, 주어진 시간 안에 가능한 한 모든 걸 강호에게 가르치려는 영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사실 암이라는 설정은 나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정말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 제한은 이 이야기에 너무도 절실한 요소였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독해질 이유도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에 꼭 필요한 지점이었다. -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된 것은 7살의 기억을 가진 강호가 밥 먹기를 거부하던 끝에 “배부르면 잠 와. 잠 오면 공부 못해”라고 말하던 장면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 부모가 남긴 모진 말을 기억한다. = 그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슬프다. 지금 또 눈물날 것 같다. (웃음) 유독 이 장면을 쓰면서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오랜 침묵 끝에 아들이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 무엇이어야 할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강호의 기억 속에 유일하게 남은 말이 엄마의 모진 말이다. 어린 강호가 유독 그 말을 기억한 건 어렸을 적 엄마의 영향을 받아 자기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짐을 반복하다보니 살기 위한 주문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것에 가깝다. 그래서 어른이 된 과거의 강호가 그런 말을 하지 않나. 엄마가 나를 이토록 억압하게 만든 세상에 복수하겠다고. - 그럼에도 배세영 작가 특유의 코미디를 잃지 않는다. 조우리 마을 사람들이 가진 개성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 <나쁜 엄마>가 굉장히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고 생각했다. 주변 인물이 분위기를 환기시켜주지 않으면 한없이 우울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주변 인물을 조금은 오버스럽더라도 재미있게 설정하고자 했다. 내가 평소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극한직업>처럼 어떤 일에 휘말리면서 뜻하지 않게 어딘가에 머물게 되는 사람들이다. 그게 바로 상추 키우는 청년 둘이다. 강호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빌런 오태수(정웅인)와 달리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마을에 동화되면서 함께하게 된다. 또 무엇보다 일상에 있을 법한 빌런도 만들고 싶었다. 영순이 돼지농장을 운영하는데 실제 농가에서 무수한 민원을 받는다고 한다. 냄새 때문에. 그런 고충을 반영하고 싶지만 마을 사람들이 영순이를 비난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게 트롯백(백현진)이다. 사실 트롯백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영순에게 암이라는 고백을 듣고, 조우리 마을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가서 “엄마가 좋아하는 트로트 콘서트 홀 지어주겠다는 약속은 못 지키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너무 신파가 될 수 있어 빠졌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 이 지점에서 궁금한 게 있다. 박보경 배우가 분한 이장 부인이자 호랑이 엄마는 늘 마스크 팩을 쓰고 나온다. PPL인가. = 전혀 아니다. (웃음) 촬영이 어려운 돼지농장을 찾기 위해 큰 도움을 받은 한돈 외에는 PPL이 없다. 여기에도 호랑이 엄마에게 마스크를 덧씌운 이유가 있다. 마을 사람들 중 그는 유일하게 입바른 말을 한다. 톡톡 쏘며 촌철살인을 날린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 그가 그런 태도를 지닐 수 있었던 건 익명성이 보장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을 함께 건넨다. ‘진짜 가면을 쓰고 있는 건 누구지?’ 하면서. 오태수와 송우벽(최무성)은? 다른 마을 사람들은 진솔한가? - 코미디의 정수로 여겨지던 배우 라미란의 진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캐스팅 비화가 궁금하다. = 영순 역으로 라미란 배우가 일찍 캐스팅되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주저앉아서 정말 펑펑 울었다, 펑펑. 대본을 쓰는 데 들인 지난 3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방송을 보고 더 깜짝 놀랐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중도를 지키며 영순을 그려내더라. 라미란 배우의 연기는 늘 좋지만 정말 어딘가 실존하는 사람처럼 착 달라붙어 있었다. - 드라마는 영순이 나쁜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설명해주지만 이해의 바탕을 만들어주는 것치고 영순은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했다. 시청자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소풍을 보내지 않거나, 밥을 적게 먹이는 것들이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소풍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씨랜드 화재 사건이나 세월호 참사 등 아이들에게 한순간에 벌어진 사고들이 많지 않나. 엄마로서 너무 불안했다. 영순 또한 자신이 김밥을 싸서 보낸 부모와 남편 모두 죽은, 하나의 징크스처럼 느껴지는 사건들이 있다. 게다가 영순의 경험은 단순한 사회적 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행한 후 벌어진 일들이라 강박과 불안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영순이 강호에게 하는 행동은 공부를 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압박하는 여느 학원가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는 내가 “너무 과한가?”라고 묻자 보조 작가들과 제작진이 “현실은 이보다 더 심하다”고 하더라. 아무리 좋은 의도여도 그렇게 해선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단 걸 다시금 되새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나쁜 엄마>에는 여러 엄마가 등장한다. 강호 엄마 영순, 미주 엄마 정씨(강말금), 삼식 엄마 박씨(서이숙), 그리고 미주(안은진)까지. 이들은 자식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각자 나름의 나쁨을 자처한다. = 박씨는 사랑하는 아들이 잘못했을 때 누군가 욕하는 게 싫어서 더 나서서 욕하고 때린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감싸주기보다 자신이 나쁜 엄마가 됨으로써 지켜주려 한다. 그리고 정씨는 미주를 홀로 키우면서 미주에게 좋지 않은 가정 환경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나쁜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주는 돈 버느라 아이들을 떼어놓고 지냈고. 그런데 실제로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자신을 좋은 엄마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작가로 돈을 벌지만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나누지 못해 나쁜 엄마고, 내 친구는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없어 스스로 나쁜 엄마라 칭한다. 돈을 벌어도 못 벌어도, 뭘 먹여도 못 먹여도 나쁜 엄마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나쁜 엄마>라는 제목이 결국 누구의 관점에서 나쁜 엄마냐는 열린 질문이기도 하다.

[인터뷰]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미야케 쇼 감독, 평범하지만 유일한 시간을 필름에 새기다

- 무주산골영화제에서 한국 관객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 = 야외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을 때 관객이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라든가 강의 흐름에 대해서까지 끈질기게 질문을 해서 놀랐고 그 테마에 대해서만 계속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시간이었다. 무주 특유의 환경이라 가능했던 건지 한국 관객의 성향이 철학적인 건지 약간 궁금해졌다. (웃음)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오가사와라 게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를 픽션화한 작품이다. 원작 도서의 영화화 혹은 자서전의 픽션화를 시도하면서 세운 나름대로의 기준이나 원칙이 있었다면. = 절대 재연 드라마식 구현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 첫 번째 바람이었다. 누군가의 실제 인생에 대해서는 조금만 달라져도 거짓말이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가급적 기본적인 설정은 지키려고 했다. 가족 구성을 섣불리 바꾼다든가 하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쓸 때 편의적으로 개입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캐릭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 게이코의 근심, 시간이 쌓이면서 드러나는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 원작자는 물론이고 영화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접근이 아닐까 싶었다. -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연 당시 영어 제목은 ‘Small, Slow But Steady’ 였고 일본어 제목은 ‘게이코, 눈을 떠라’(ケイコ 目を澄ませて), 한국에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으로 개봉하게 됐다. 각각의 제목을 결정한 이유가 있나. 영어 제목은 게이코의 삶의 태도이자 미야케 쇼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다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분명 그렇다. 특히 영어 제목은 오가사와라 게이코씨의 삶을 통해 배운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 10대부터 20대까지 꾸준히 성실하게 살자라고 하는 구호에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대(미야케 쇼는 1984년생, 곧 40살 생일을 앞두고 있다.-편집자)에 접어드니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숏 한컷 한컷이 쌓여 완성되는 영화처럼 인생의 의미란 것이 결국 아주 조그마한 것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느리고 작은 움직임이 소중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일본어 제목은 촬영과 편집 기간 내내 이번 영화가 나와 기시이 유키노씨 모두에게 정말 특별한 존재로 남으리라는 모종의 예감 같은 것이 찾아왔기 때문에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에 넣어보기로 했다. 동시대 영화들이 대부분 인물의 이름을 제목에 잘 활용하지 않으므로 약간은 고전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겠다 싶기도 했고. 복싱과 수화에서는 손만큼 눈이 중요하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마스크 위로 오직 서로의 눈에 의존하는 시간을 우리 모두 거치지 않았나. 한국어 제목에서도 눈의 의미를 잘 살려보고 싶었다. - 영화 속 게이코에게서는 실존 인물의 그림자보다는 미야케 쇼 세계 속 청춘이라는 인장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당신이 이해한 게이코는 어떤 인물인가. =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게이코를 훈련시키는 데 진심인 맛짱(마쓰우라 신이치로)이 회장님이 그만두고 체육관이 폐업한다고 하자 후반부에 훈련하다 말고 혼자 와락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다. 그걸 지켜보다가 게이코가 짓는 표정이 가장 그답다고 생각한다. 분명 슬플 텐데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해한 게이코의 모습이었다고 모니터를 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기시이 유키노가 더해진 픽션의 게이코는 누구인가를 말할 때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기시이 유키노가 이 영화를 위해 특정한 신체적 상태를 만들고 유지하며, 장면 안에서 몸으로 반응하는 순간을 보고 있으면 당연한 말이지만 연기가 아닌 인간 기시이 유키노이자 게이코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경탄에 빠지게 된다. 오랜 준비 과정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효과인데, 옆에서 계속 같이 훈련을 했다고 들었다. =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다. 일단 기시이씨가 꾸준히 복싱을 하는 것, 중간에 땡땡이치면 안되는 게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웃음) 최대한 같이 있는 쪽으로…. 나도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당신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식으로 약간의 부담을 주고 말았다. 청춘영화의 감정에 대하여 - 게이코의 표현은 솔직하다. “때릴 때 기분이 좋아요” , “맞을 때 아픈 것이 싫어요”, “집에서 멀어서 다니고 싶지 않아요” 같은 것들이다. 게이코의 진실한 눈빛과 처절한 움직임, 그리고 단순한 대사간의 괴리가 오히려 인간적인 호감을 낳고, 약간은 황당하게 웃게 만드는 생동감 있는 순간들도 발생시킨다. 이것은 당신 영화의 인물들에게 나오는 공통적인 인상이기도 한데 캐릭터의 성격적 깊이를 그다지 심오하게 꾸며내지 않으면서도 미묘한 일렁임을 전달한다. 어떤 선호로부터 생겨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 = 굉장히 자극이 되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아마 근본적으로는 내가 느끼고 있는 너무 많은 의미들에 대한 답답함 때문일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나는 영화 비평이라든가 여러 가지 글을 읽는 걸 좋아하고 그런 기획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요즘은 SNS를 비롯해 정말 너무 많은 의미들이 넘쳐나서 가끔 언어에 얽매이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경각심을 느낀다. 이번 작업에선 그래서 특히 필름영화에 육체적이고 동물적인 인간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조금 더 나아가보자면, 영화 대사에 관해서만큼은 언어로서 어떤 표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욕심을 버리자는 쪽이다. 그런 걸 원한다면 소설이 훨씬 좋은 도구일 테다. 영화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정리하고 나면 심플함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 당신이 정의하는 청춘다운 상태나 감정 같은 것도 있을까. = 청춘영화의 감정이란 보통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느낌, 혹은 시간을 돌이킬 수 없기에 찾아오는 약간의 멜랑콜리에 가까울 것이다. 애수를 표현하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쉽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내가 확신하기로는, 어차피 나이와 관계없이 자신만의 인생은 단 한번밖에 없으므로 그다지 지나간 것을 희구하거나 감상에 젖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인물이, 혹은 그 배우가 ‘있다’는 것을 포착하는 것이 청춘영화의 미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체현할 때 복잡한 것도 함께 건져올려지는 게 아닌가 싶다. - 게이코의 수어를 무성영화처럼 대사 화면을 따로 삽입해 보여준 이유는. = 자막 처리가 아니라 따로 대사 화면을 삽입해 무성영화처럼 연출하자는 것은 작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떠올린 직관적인 설정이었다. 막상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 중요했던 것은 실제 농인들이 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이었다. 기시이 배우에게 수화 지도를 해준 선생님들을 통해 청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했다. 청인이 아니라 농인의 관점에서 무성영화식 표현이, 특히 수화와 문자 사이에 발생하는 시차가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지진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영화적으로 흥미롭다는 쪽에 동의를 해주셨기 때문에 진행할 수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만남이 축적될 때 - 숏의 구성과 연결, 공간을 보여주는 방식, 인서트의 사용 면에서 1950~60년대 일본 고전영화들의 고즈넉하고 세련된 미학을 느낄 수 있었다. 전작들에서 청춘 인물들의 마음을 따라 유영하는 것 같았던 카메라도 이번엔 잠잠히 공간에 안착한 모양새다. 레퍼런스 삼은 작품이 있는지, 혹은 16mm 필름 촬영의 영향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나. = 이번 작품에 국한해서 말하긴 어렵고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가 내게 끼친 영향이 클 것이다. 그 시절이 영화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장면의 연결에서 느낄 수 있는 독보적인 세련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름으로 촬영하면서 나 자신이 꽤 변화한 점도 물론 있다. 나는 아이폰으로 촬영하는 것도 좋아하고 디지털로만 구현 가능한 기술에 대해서도 긍정한다. 동시에 그런 맥락에서 시간이 천천히 화면에 고이고 또 흘러가는 느낌에 있어서 필름을 통해서만 표현 가능한 것이 있다는 점도 믿는다. 전혀 과학적인 진술은 아니겠지만, 디지털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거만해져서 모든 것을 다 제어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할까. 하지만 필름은 불가역적인 상태를 따라가야 한다. 빛과 색, 잠깐의 시간을 체현해내기 위해 나는 철저히 영화에 복속된다. 쉽게 말해서 훨씬 감각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작업이고 그것이 결과에 반영되었다면 기쁘다. - 오래된 체육관, 게이코의 집, 병원, 전철이 지나가는 강변 등 장소와 거리의 운치가 각인되는 영화다. 로케이션을 물색한 과정은 어땠나. = 로케이션 선정에 많은 품을 들이는 편이다. 촬영 전에는 특히 열렬히 산책한다. 장소를 결정할 때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한다. 공간의 크기, 광량, 지형이나 기물 등 촬영 전에 명시적으로 파악해야 할 조건들을 우선 살핀다. 그러고 나면,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좇는 일에 몰두한다. 예전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을 찾아보기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장소의 역사나 생활력을 읽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에서 확신이 들면 전자의 요소들이 조금 부족하거나 염려스럽더라도 미술팀, 조명팀이 협동해 훨씬 좋은 조건을 창출해낼 수 있다. - 당신의 영화 만들기에서 산책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 = 책상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하는 유의 작가가 못 된다. 시나리오 작업 단계뿐 아니라 현장에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지 구상하고 캐릭터를 구체화해나갈 때도 일단 걷고 본다. 산책을 하면 영화의 요소와 장치들을 위계 없이 산발적으로 흩뜨려놓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래서 가끔 생각이 수습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는 게 단점이지만…. (웃음) -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미묘한 삼각관계를 이어가는 청년들, 폐업 위기에 처한 체육관에서 훈련하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복싱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들의 미시적인 역사가 영화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축적되고 점점 더 반짝거리게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카메라가 같은 장소를 같은 구도로 여러 번 비추는 방식이 이런 효과에 기여하고 있는 것 같다. 가령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는 체육관 앞 계단 골목이 여러 번 반복된다. = 같은 장소에서 다른 만남이 벌어지고, 그 미세한 차이가 평범하지만 유일한 시간을 만든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점과도 비슷하다. 내가 많이 생각하는 감정 중 하나는 일상의 권태, 이유 없이 축 처지고 고민스러운 평범한 날들의 기분이다. 학생 때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나를 둘러싼 것들이 너무나 시시하고 단조롭게 느껴져 오직 주말만을 기다렸다. (웃음) 그럼 토요일과 일요일만이 의미 있고 5일간의 평일은 쓸모없는 시간의 덩어리인 걸까? 그게 아니라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내가 영화에서 포착하고 싶은 감각은 그런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적인 시간들의 개별성, 돌아오지 않는 순간들, 저마다의 유일성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내 영화를 어떤 관객에게 추천하느냐는 질문에 “휴일에 완전히 놀고 싶은 기분에서 보는 것보다는 평일 저녁에 피곤하고 지친 마음으로 봐준다면 더 유용할 것”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는데, 지금도 비슷한 생각이다. - 체육관을 다양한 앵글로 비추어서 거칠게 평면도를 그려보게 될 정도로 구석구석의 리얼리티를 살렸다. 체육관 가장 안쪽의 링, 그 주변의 연습 공간, 현관 앞 신발장, 카운터, 탈의실 등이 영화 전반에 걸쳐서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 스탭들이 하고 있는 일을 다 파악하고 그 결과물을 빠짐없이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강해서, 미술팀이 장식한 손길이 보이면 그 자리를 어떻게든 촬영에 활용하려고 한다. 건축가인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내 기억 중 하나가 새로운 공간에 가면 아버지가 어디든 자꾸만 벽면을 손으로 틩겨보는 모습이었다. 겉보기엔 그냥 의미 없어 보이는 벽인데도 아버지의 눈엔 그것 또한 누군가가 공들여 세운 작업물이기 때문에 두드려보고 소재는 무엇이고 안은 어떻게 채워져 있는지 알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겉보기에 그저 낡고 허름해 보이는 체육관을 스탭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가꾸었나를 떠올리면서 렌즈를 어디에 둘 것인가 계획을 세웠다. - 화면 안에 인물과 전철이 동시에 등장할 때, 전철이 프레임에 등장하고 빠져나가는 움직임은 미리 시간을 계산해 찍는가, 아니면 그보다 느슨하게 우연을 열어두나.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거리 몽타주는 틈틈이 찍어둔 것인가, 한번에 몰아서 찍는 것인가. = 과거엔 우연을 중시했다. 필름영화인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제작비나 시간 면에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긴장도가 높았고, 인물과 전철의 움직임에 리듬감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철이 지나가는 시간을 계산해서 찍었다. 풍경 인서트들은 19회차 촬영이 모두 끝난 다음에 마지막날 찍었다. 보통 산책하면서 마음속에 수집해둔 골목, 강가, 집 앞 풍경 등을 차례로 찍는 날을 마지막에 따로 둔다. 나는 이제 막 새로운 스테이지에 들어왔다 - 기본적인 기획과 캐스팅이 모두 준비된 상태에서 고용 감독으로 합류했다. <플레이백>으로 데뷔한 이후 자주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방식과는 출발점이 꽤 다른 셈인데 프로세스 면에서도 달라진 점이 있었나. = 크게 없었다. 아마도 스탭의 영향으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함께한 쓰기나가 유타 촬영감독, 이노우에 신페이 미술감독, <밀사와 파수꾼>(2017)에서 만난 와타나베 다이치 세트감독, 프로듀서 후쿠시마 고이치로 등 늘 같이 일하던 인물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분들과 같이 또 그저 새로운 도전을 하는구나 정도로 느꼈다. - 일본은 소규모 극장들의 독자적인 프로그래밍과 커뮤니티 시네마 문화가 한국보다 지속적이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완성된 영화가 거쳐야 할 과정들, 특히 배급과 상영에 있어 당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이 있나. = 일본영화계의 상황만 놓고 보자면, 다른 나라의 인디 신과 마찬가지로 그저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찍고 싶은 사람과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는 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 사이에 선명한 갈림길이 있다. 나 역시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플레이백> <더 콕피트> 때까지만 해도 내 영화의 배급에까지 직접 관여했고, 그렇게 한 이유는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되기까지의 과정을 직접 경험하고 배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독자적으로는 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프로들에게 배급과 마케팅 등 전 과정을 맡기고 있지만 과거에 친구들끼리 알음알음 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던 시절이 좀더 즐겁지 않았나 하는 고민 아닌 고민도 갖고 있다.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미야케 쇼의 최고작이라는 찬사도 심심찮게 들린다. 당신에겐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앞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영화의 규모나 제작 방식, 혹은 정서가 있다면 무엇인가. = 사람들이 왜 영화를 보러 갈까. 나는 본 적 없는 것을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나 역시 그런 마음에서 영화를 만든다. 힙합(<더 콕피트>)도 복싱도 영화를 찍으며 배웠다. 다음 작품도 그런 식으로 만나고 싶다. 내가 전혀 장악하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분야와 낯설게 만나고 싶다. 지금까지 한번도 가족영화를 만든 적 없기 때문에 가족에 대해서도 다루려고 한다. <플레이백> 이후 약 10년이 넘게 흘렀다. 나로서는 이제 막 새로운 스테이지에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확실한 계획은 나의 오리지널 기획을 더 많이 확장하고 제작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선 공부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만들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인터뷰] 마석도이기에 가능한 액션을 짠다, ‘범죄도시3’ 허명행 무술감독

“흥행 예상했다.” <범죄도시3>의 흥행 추이를 언급하자 허명행 무술감독은 주저 없이 답했다. 그는 <범죄도시> 시리즈 1~3편의 무술감독이자 개봉 준비 중인 4편의 연출자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시리즈의 고락을 함께해온 그에게 <범죄도시>는 ‘마석도’(마동석 분)와 등치시킬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그러니 그가 생각하는 시리즈의 성공 비결 역시 마석도에게서 나온다. 관객이 마석도에게 기대하는 액션을 만들면서도 매편 신선한 변주를 주는 것이 주요한 성공 조건이다. 허명행 무술감독은 액션의 창작 비법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범죄도시4>에 대한 자신감도 내비쳤다. - <범죄도시3>가 개봉 14일 만에 8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흥행 소감은. = 내부 시사회에서 봤을 때 분명히 흥행하겠다는 느낌이 있었다. 개봉 후 예상보다 더 빠르고 거센 흥행에 놀라는 분들, 작품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분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요즘 극장가에 전 연령층이 함께 즐기며 볼만한 작품이 적어 <범죄도시3>에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고 봤다. - 액션의 수위가 세다는 평도 있는데, 전 연령층에 소구하기 위해 어떤 액션을 지향했나. = <범죄도시3>는 처음부터 15세이상관람가를 목표로 잡았다. 그래서 날카로운 흉기의 사용을 최대한 배제하고 둔탁한 무기를 많이 썼다. 촬영에서도 가격당하는 쪽의 리액션 장면을 줄이고 타격하는 쪽의 표정이나 움직임에 집중했다. - 액션이 많으니 촬영에도 신경 쓸 부분이 많았을 텐데 평균 테이크 수는 어땠나. = 현장에선 3테이크 이상이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액션 리허설, 카메라 테스트를 모두 철저히 거치고 오케이가 떨어져야 슛에 들어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걸 어기는 경우는 소품 같은 다른 변수들 때문이었지 액션 문제로 4~5번 찍은 적은 거의 없었다. - 액션 신 촬영을 속전속결로 끝낸 것처럼 이번 영화에서 마석도의 액션도 속도감이 더 중시됐다. =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제작진이 마석도 액션의 변화를 가장 많이 신경 썼다. 1편은 마석도의 순수한 피지컬이 중심이었고, 2편에선 유도 기술을 섞으면서 힘을 살렸다. 3편에선 마동석 배우의 특기인 복싱 기술을 더 깊게 활용했다. 지금까지의 마석도가 헤비급 복서였다면 이번엔 경량급 복서의 날렵한 기술까지 섭렵하면서 다른 느낌을 낸 거다. 마석도의 주먹 한방이 얼마나 강한지 이제는 관객이 잘 알지 않나. 마석도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액션의 또 다른 맛을 내는 게 중요했다. - 평소 액션 디렉팅뿐 아니라 각본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무술감독으로 유명하다. = 그렇다. 특히 <범죄도시3> 현장 분위기는 워낙 자유로워서 감독님이나 마동석 배우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이 영화가 복잡하고 치밀한 이야기 구조로 재미를 추구하는 작품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더욱더 액션 측면에서의 기승전결이나 예상치 못한 재미가 중요하다. 예를 들면 리키(아오키 무네타카)의 무기로 장검을 쓰자는 의견은 내가 냈다. 야쿠자의 거물 회장이 보낸 킬러이니만큼 임팩트가 강렬해야 했고 관객에게도 일본 출신의 실력자라는 인상이 확 와닿아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에 맞춰 적절한 무기나 무술을 쥐여주는 것도 무술감독의 역할이다. - 마석도가 리키의 장검을 힘으로 부러뜨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 리키가 마석도랑 싸우게 된다는 건 관객 모두가 안다. 리키가 강한 만큼 마석도가 고전하지만, 잘 헤쳐나갈 거란 전개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상황에서 마석도가 단순히 리키의 손을 가격해 검을 놓치게 한다든지 하는 방법은 아무런 재미가 없다. 액션의 반전, 마석도의 역전을 액션의 확실한 포인트로 구현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현실에서 맨몸으로 검을 부러뜨리려면 5만번은 쳐야 금이라도 가지 않겠나. (웃음) 비현실적인 액션이라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점이 바로 마석도니까 가능한, 마석도니까 용인되는 <범죄도시>시리즈의 강점이다. - 이런 액션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서 다른 작품이나 캐릭터를 참고하는 편인가. = 아니다. 철저하게 관객으로서만 영화를 본다. 액션영화를 많이 보고 데이터를 쌓아서 그걸 작업에 반영하려 하진 않는다. 관객일 때 재밌게 본 장면일지라도 그걸 내 작품에 적용하는 건 다른 문제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가장 잘 어울릴 액션의 성질, 동선, 방법,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려야지 남의 것을 따라 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 액션을 짤 때 몸보다 머리로 먼저 구상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 후배들에게 늘 하는 조언이다. 몸으로 먼저 액션을 짜면 내 몸 편한 대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평소에 내가 움직이는 방식, 내가 좋아하는 동작으로 액션이 한정된다. 그러니 방금 말했던 리키 검이 부러지는 장면처럼 확실한 반전, 떠올리지 못했던 포인트를 만들기 위해선 각본을 꼼꼼히 살피면서 생각하는 과정이 우선이어야 한다. 마석도가 상대를 왼손으로 때릴지 오른손으로 때릴지, 몇번 때릴지 같은 디테일은 그 후에 정하면 된다. 집 만들 때랑 비슷하다. 전체적인 설계도가 먼저 나와야 하지 꽃무늬 타일을 살지 무슨 가구를 들일지부터 생각하면 안된다. - <범죄도시4>에선 연출까지 맡았다. 무술감독으로 참여했을 때와 어떤 차이를 느끼나. = 기본적으론 비슷하다. 무술감독 역할일 때도 이야기를 중요히 여겼다. 인물들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 서사적으로 마련되지 않았는데 불쑥 나오는 액션만큼 불편한 게 없다. 다른 영화들을 보면서 종종 느낀다. 액션에 욕심을 내서 흥분하는 바람에 액션 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액션에도 감정이 우선이다. 내가 나름 오래, 많이 영화 작업을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서사의 전후 상황을 납득해야만 액션 신을 찍을 수 있다. 이런 게 감독님들 연출에도 좀 도움이 되지 않나 싶다. (웃음) - <범죄도시4>의 기대 포인트를 꼽아준다면. = <범죄도시> 시리즈야 사실상 마석도 그 자체 아닌가. 제목을 <마석도1> <마석도2> <마석도3>로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웃음) 그러니 마석도에게 최대한 잘 어울리는 옷을 입히되 빌런을 색다르게 디자인하면서 균형을 맞추는 시리즈의 필수 조건을 잘 해결하려 했다. 특유의 오락을 기반으로 한 액션도 충분히 구현했다. 그동안 참여한 120여편의 영화 중에서도 단연 자신 있게 선보일 수 있는 액션을 준비했다.

[인터뷰] 갯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라, ‘수라’ 황윤 감독

“기러기, 도요새, 올빼미의 깃털이다. 이렇게 목걸이로 만들기도 하고 갯벌에서 주워다 집에 두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힘을 받는 기분이 들곤 한다.” 촬영 전, 소품으로 가져왔다며 황윤 감독이 올빼미 깃털을 꺼내들었다. “한번 만져보라”고 그가 쥐어준 깃털은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영화를 관람할 때처럼 새들에 대한 황윤 감독의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동시에 지금도 갯벌 위를 돌아다닐 새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 감독이 군산에 내려가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됐다. 간척사업의 주요 도시에서 살아갈 결심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 군산에는 다른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가게 됐고, 그동안은 새만금에 관해 잊고 지냈다. 2006년 대법원의 판결, 가깝게 지내던 어민의 사고사는 내게 큰 트라우마를 안겼기 때문에 다시는 갯벌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당시 찍은 6mm 테이프들도 캐비닛에 넣어 치워둔 상태였다. 내려가서 도시의 온갖 곳에서 ‘새만금’이란 단어를 마주했을 당시엔 ‘내가 잘못 이사 온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오동필 조사단 단장님을 만났다. 갯벌에서 물새를 조사한다고 들었을 때 믿기지가 않았는데 조사단의 정기 모니터링을 쫓아간 날 150여 마리의 저어새가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봤다. 만감이 교차했다. 다 파괴됐다고 생각한 곳에 희망이 있었다. 부정적인 그림만 그려오던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습관적으로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꺼냈다. 이건 나의 다음 작품이 되겠다고 직감했다. - <수라>를 완성하기까지 총 7년이 걸렸다. 조사단이 13년을 바쳐 기록한 자료들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린 게 이유 중 하나라고. = 정말 깜짝 놀랐다. 현장 기록은 메모부터 녹음본, 사진, 비디오 촬영분 등 다양했는데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조사하고 기록했을까 싶었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갯벌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감정을 빼고 기록한 객관적인 데이터들이 정말 신기하고 귀하게 느껴졌다. 때문에 나 역시 꼼꼼하게 살피게 됐다. - 물때를 기다려야 하는 등 촬영이 녹록지 않았을 것 같다. 와중에도 갯벌을 아름답게 보여주려는 목표가 분명하게 보였다. = 갯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것이 이번 작품의 가장 큰 목표긴 했다. 사실 갯벌 자체가 달과 지구의 만유인력으로 생성된 하나의 작품이지 않나. 그런 갯벌을 배경이 아닌 주인공으로서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갯벌은 정말 고난도의 현장이다. 촬영 가능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선 조수간만의 차를 잘 파악하고 갯벌의 골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위해 빛이 들어오는 시간대, 계절까지 고려해야 했다. 영화제 상영 버전과 다르게 겨울 갯벌의 모습을 촬영한 장면이 새로 들어갔다. 원래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촬영을 취소했는데 촬영감독님이 혼자 가서 드론을 띄워 찍으셨더라. 결국 드론은 추락했지만 다행히 그 속의 녹화분은 얻을 수 있었다. - 새를 만나는 순간도 감명 깊지 않았나. = 물론이다! 군산에 살면서 이 지역을 꼭 지키고 싶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겼는데 사라진 줄만 알았던 새들을 만나니 너무 황홀했다. 말 그대로 ‘영접’하는 느낌이었달까. (웃음) 한번은 새벽 4시 반에 (오)승준씨와 쇠제비갈매기를 찍으러 갯벌로 갔을 때 분홍색 달이 떠 있던 적이 있다. 흰발농게가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이렇게 우연히 마주한 영화적인 순간들이 정말 아름다웠다. 오동필 단장이 도요새의 군무에 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10만 마리의 도요새가 자기 머리 위에서 춤을 추던 때의 모습과 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들을 때 마치 그 경험이 내게 전이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궁금하고, 부럽고, 한편으론 안타까웠다. 관객 역시 나와 같이 느꼈으면 했다. 지금은 사라진 아름다움을 다시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영화의 정서가 돼서 그것이 잘 전달되길 바랐다. 더불어 아직 갯벌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생명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계속해서 갯벌에 나가 촬영을 진행했다. - 새만금신공항 개발사업 기본계획 취소소송 2차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이다. 끝나지 않은 싸움 속에서 언제 촬영을 마치고, 이것을 영화화해야겠다고 결심했나. = 오동필 단장의 아들인 승준씨의 역할이 컸다. 사실 다큐멘터리는 촬영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수만 가지 버전이 나올 수 있다. 승준씨를 처음 본 게 중3 때였는데 어느새 대학생이 돼서 동필씨가 하던 일을 똑같이 하고 있더라. 그런 승준씨의 성장을 보면서 영화의 중심축으로 삼아도 되겠다고 느꼈다. 영화제 GV 등에서 관객과 이야기해보니 내게 그랬던 것처럼 승준씨라는 존재, 그의 행동들이 관객에게도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 같더라. - <수라>와 더불어 전작들에서도 항상 인간의 이기로 인해 일방적으로 착취당한 생명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려는 인상을 받았다. = 첫 장편인 <작별>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철창에서 새끼호랑이가 하루 종일 울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걸 봤을 때, 너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달하겠다고 다짐했다. <잡식가족의 딜레마>에서 야생동물뿐만 아니라 농장 동물과 나의 관계로 확장했고 <수라>는 아름다운 생명과 이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해온 작업들의 총합이랄까. 내가 카메라를 들 수 있을 때까지는 우리와 비인간 동물들의 관계에 계속 주목하고 싶다. 20년간 해왔지만 여전히 중요한 문제라 생각하고, 이것만 평생 찍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 차기작도 유사한 주제로 갈 예정인가. = <수라>로 인해 알게 된 현장에 관해 다루려 한다. 원래 <수라>에 넣으려 했으나 방대해져서 분리를 했다. <수라>의 연작이자 군산 2부작이 되는 셈이다. 수라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살았던 ‘하제’라는 어촌 마을에 관한 이야기다. 미군기지의 탄약고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주민 수천명이 거의 반강제로 이주당했다. 그래서 그 마을은 지금 텅 비어 있는데, 거기에 아주 오래되고 아름다운 팽나무가 하나 있다. 600살이 넘은 그 나무가 마지막 주민으로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과 나무에 관해 새 작품에서 다루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