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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멀티버스를 완성하는 방식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무한 확장을 거듭하는 멀티버스의 혼돈을 정리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새롭게 탄생한 주문은 아니다. 시간여행, 타임 패러독스를 다루는 숱한 이야기들이 반복해온 유명한 명제 중 하나다. 다만 이 마법의 주문을 언제, 어떤 타이밍에 사용하는지에 따라 세계가 빤한 도돌이표에 갇힐 수도, 아름답게 가치를 뻗어나갈 수도 있다. 2018년 장편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하 <뉴 유니버스>)는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세계를 열었다. 인기 있는 이야기 소재가 그런 것처럼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마음대로 문을 닫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소위 샘스파, 어스파, 톰스파 등 주인공이 교체되며 계속 새로운 옷을 갈아입어 왔다. 성공한 프랜차이즈의 숙명, 자본의 욕망은 코믹스에서 출발한 ‘다중우주’라는 개념으로 스파이더맨을 계속 소환해왔다. 다른 우주에 다른 스파이더맨들이 산다는, 이야기를 무한히 찍어낼 수 있는 요술 방망이 같은 설정이다. 마스터피스, 그 너머를 엿보다 더이상 새로운 걸 보여줄 수 있을까 싶었던 스파이더맨 세계관을 뒤집으며 게임 체인저로 등장한 건 마일스 모랄레스(샤메익 무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애니메이션 <뉴 유니버스>였다. <뉴 유니버스>는 차원을 연결하여 사물을 이동시킬 수 있는 알케맥스 가속기를 통해 온갖 다중우주의 스파이더맨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흑백 세계의 스파이더맨 누아르, 로봇을 조종하는 일본 여학생 페니 파커, 방사능에 물린 돼지 스파이더 햄까지 다양한 스파이더맨들이 벌이는 소동은 즐거운 혼란 그 자체였다. 다중우주의 스파이더맨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상상 자체는 재밌지만 그럴 법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을 한자리에 초대한 무대를 꾸민 표현 방식은 그야말로 혁신적이라 할 만했다. 본래 자극은 예측 가능한 범주 바깥에서부터 발생하는 법이다.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은 프레임과 상상력의 틀을 부수며 우주가 뒤섞이는 행복한 혼돈을 선사했다. 이제껏 나온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들이 그랬듯 무릇 이야기는 적어도 3부작은 돼야만 안심이 된다. <뉴 유니버스> 역시 말미의 쿠키 영상을 통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쿠키 영상에선 스파이더맨 2099=미겔 오하라(오스카 아이작)가 등장해 홀로그램 라일라와 대화를 한다. 그는 멀티버스가 아직 닫히지 않았다며 모든 것이 시작된 지구-67로 향한다. 왜 67인가. 그곳은 1967년 방영된 스파이더맨 TV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이다. 67년판 스파이더맨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면서 삿대질을 하는 스파이더맨 2099. 누가 먼저 삿대질을 했는지를 두고 싸우는 장면을 끝으로 쿠키는 마무리된다. (해당 시리즈 19화 <더블 아이덴티티>라는 에피소드로 두명의 스파이더맨이 서로 삿대질하는 걸로 깨알 같은 재미를 주는 장면이지만) 단지 잔재미만을 위한 쿠키는 아니다. <뉴 유니버스>의 쿠키는 적어도 두 가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하나는 멀티버스가 미처 닫히지 않아서 이를 수습하고 다니는 존재가 있다는 스토리의 목표점, 다른 하나는 스파이더맨들끼리 서로 싸우는 장면이 주는 난장판의 즐거움이다. 속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이 두 갈래의 미션을 성실히, 그리고 성대하게 수행한다. <뉴 유니버스>를 봤을 때만 해도 이걸 뛰어넘는 속편이 나오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여러 우주의 스파이더맨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설정은 <뉴 유니버스>의 매력 중 일부에 불과하다. 이 파격적인 애니메이션이 선사한 쾌감의 진가는 표현의 고정관념을 부수는 역동적인 연출에 있다. 코믹스의 질감을 베이스 삼아 스크린 위에 움직이는 만화를 옮겨놓은 <뉴 유니버스>는 기존에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다양한 작화, 디자인 컨셉을 과감히 시도한다. 이건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명제는 간단하다. 애니메이션에서 작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하나의 우주에 하나의 표현. 작화는 애니메이션의 존립 근거이기에 여러 우주가 겹친다면 당연히 표현 방식도 충돌해야 한다. <뉴 유니버스>는 실사영화가 시도하기 힘든 다채로운 표현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충돌시켜 빅뱅을 일으켰다. <뉴 유니버스>의 성취는 이런 새로운 에너지였는데 속편이 나올 땐 이게 고스란히 넘어서야 할 벽이 된다. 경험과 자극은 반비례하는 법이라 더 강한 자극을 위해선 새로운 걸 내놓아야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뉴 유니버스>의 연장선에 있어 새롭게 시도해볼 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달랐다. 익숙해진 패턴에 자극에 무뎌졌으면 어쩌나 하는 건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넘쳐흐르는 표현과 정보량, 에너지에 도파민이 과다하게 분출되는 걸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이 작품은 현대 애니메이션이 시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작법을 화면 위에 쏟아붓는다. 현대미술이라 해도 좋을 과감한 아트워크의 충돌은 한층 더 커지고 과감해졌다. 특정 구간의 경우 멈춰놓고 봐야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장면의 밀도가 높고 정보량이 많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속도감과 리듬도 한곡의 음악처럼 처지는 구간 없이 매끄럽다. 그야말로 스크린이라는 미술관에서 열린 코믹스아트 전시처럼 다가온다. 그렇다고 딱딱하고 어려운 것도 없다. 본질은 어디까지나 재미난 코믹스이고, 긴 이야기 끝에 남는 교훈도 언제나 그렇듯 간단명료하다. 2024년 개봉할 3부작의 마지막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스파이더버스>(이하 <비욘드 더 스파이더버스>)까지 3부작으로 구성된 이야기인 만큼 3편을 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이미 단독 작품으로도 전작을 가뿐히 뛰어넘은, 문자 그대로 비욘드 마스터피스라 할 만하다. ‘위대한 거미줄’의 구심력, 되짚어보면 보이는 것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시작점과 끝점은 전작의 주인공 마일스 모랄레스가 아니라 그웬 스테이시(헤일리 스타인펠드)의 것이다. 전작에서 사건이 마무리되고 자신의 우주로 돌아간 그웬은 공허감에 시달린다. 자신의 우주에서 피터를 잃은 그웬에겐 진심을 털어놓을 친구가 한명도 없다. 유일하게 동질감을 느꼈던 마일스도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웬의 우주에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벌처가 난입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멀티버스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활동하는 스파이더맨들의 비밀조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그웬은 조직의 리더 미겔에게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한다. 사실 그웬의 선택은 새로운 모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피에 가깝다. 스파이더우먼이라는 비밀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아버지와 갈등을 빚던 그웬은 아버지에게 진실을 밝힌 후 자신의 우주를 떠나버린다. 그렇게 스파이더버스의 수호자 그룹에 합류한 그웬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마일스를 만나러 간다. 한편 마일스도 그웬과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다. 부모의 반응이 두려워 스파이더맨이라는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마일스는 크고 작은 갈등을 빚는 중이다. 사실 비밀로 인해 본래의 삶이 피곤해지는 건 스파이더맨들의 정해진 운명이기도 하다. 몸은 하나인데 히어로 활동을 병행하려니 시간도 없고 갈수록 힘이 든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우주로 다시 찾아온 그웬을 만난 마일스는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안심이 된다. 그웬을 통해 차원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스파이더맨들의 존재를 깨달은 마일스는 본인도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지만 단번에 거절당한다. 이에 투명화 능력을 사용해 몰래 그웬을 쫓던 마일스는 그웬이 자신의 차원으로 온 이유를 알게 된다.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 빌런 스팟(제이슨 슈워츠먼)이 실은 시공간을 왜곡시키는 위험한 존재였고 그웬은 이를 감시하기 위해 온 것이다. 스팟을 추격하던 그웬을 미행하던 마일스는 급기야 다른 차원까지 몰래 동행하기로 결심한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6개의 우주를 관통하며 모험을 펼친다. 단순 계산해도 여느 작품들에 비해 몇배의 물량과 작화, 아트워크가 필요한 작업이다. 이 정도의 물량을 한 사람이 컨트롤하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인 만큼 조아킹 두스 산투스, 켐프 파워, 저스틴 톰슨 세명의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았다는 게 납득이 된다. 게다가 <뉴 유니버스>에서 시작된 3부작은 서로 다른 우주를 충돌시킨다는 컨셉이라 톤이 다른 연출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뉴 유니버스>도 그랬지만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본격적인 팀 무비다. 어떤 스파이더맨이 오리지널인지를 두고 다투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스파이더맨들의 사연을 거미줄처럼 아름답게 엮어나가는 게 중요하다. 세명의 감독들은 280여명의 스파이더맨들과 함께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항상 그랬듯 비밀의 열쇠는 가까운 곳에 있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뉴 유니버스>의 마지막 쿠키에서 제시한 두개의 힘, 구심력과 원심력을 따라간다. 이야기를 뭉치는 구심력은 스파이더버스다. <뉴 유니버스>가 새로운 우주의 문을 열었다면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스파이더맨들의 우주, 이른바 스파이더버스들을 가로지른다. 이번 작품에는 크게 보면 6개의 스파이더버스가 등장하는데 전작에서 마일스 모랄레스의 우주로 다른 우주의 스파이더맨들이 모였다면 이번에는 해결사들이 미션에 따라 새로운 스파이더버스로 모험을 떠난다. 대전제는 간단하다. 전작의 마지막에 등장한 스파이더맨 2099, 미겔 오하라는 여러 방식으로 연결되는 스파이더버스들이 서로 충돌하여 붕괴하지 않도록 관리 중이다. 여기서 이른바 ‘위대한 거미줄’이라 불리는 개념이 등장한다. 스파이더맨들의 세계는 다른 차원에 있음에도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연결지점에 존재하며 수정 불가능한 사건들을 ‘공식설정 사건’(Canon event)이라고 부른다. 스파이더맨이 스파이더맨일 수 있는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예를 들면 방사능 거미에 물리는 사건이나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사건 등이다. 히어로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명제로 움직여온 스파이더맨은 아픔을 극복하고 희생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영웅으로 거듭난다. 방사능 거미에 물리는 게 육체적인 능력을 얻는 조건이라면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영웅으로 각성하기 위한 시련이다. 스파이더버스의 모든 스파이더맨들은 형태는 다르지만 이런 경험을 공유하면서 스파이더버스에 속할 자격을 얻는다. 거미줄은 얼핏 마구잡이로 뻗어 있는 것 같아도 실은 이런 수정되어선 안되는 공식설정 사건을 쐐기로 하여 아름다운 구조를 완성하는 것이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구성도 마찬가지다. 혼돈과 혼란은 다르다. 멀티버스를 넘나들며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먼 시각에서 보면 일정한 규칙과 법칙하에 움직인다. 시공간을 소재로 한 많은 이야기들이 이미 쐐기로 삼았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명제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다시 한번 거미줄을 완성하는 구심점으로 작동한다. 스파이더버스의 원심력, 21세기 캐논의 확장 한편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우주를 확장하는 원심력은 한마디로 난장판의 미학이다. 스파이더버스의 혼란을 관리하는 위대한 둥지, 미겔 오하라의 본거지인 지구-928의 누에바요크에서는 온갖 우주에서 모인 스파이더맨들이 머문다. 이들이 스파이더버스의 이레귤러 같은 존재인 마일스를 추격하는 장면은 이번 영화의 백미라 할 만하다. 280명의 스파이더맨이 모여 서로 삿대질하는 장면은 농담의 규모를 어디까지 늘릴 수 있는지 물리적인 한계치를 시험하는 듯하다. <뉴 유니버스>가 초신성의 탄생이었다면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우주가 팽창할 수 있는 한계점까지 상황을 밀어붙인다. 마일스, 그웬을 비롯하여 스파이더 펑크(대니얼 컬루야), 스파이더 인디아(카린 소니), 스파이더맨 2099 등 주요 스파이더맨들의 우주를 각기 다른 작화로 묘사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더 새로운, 더 기발한 세계를 체험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결국 스파이더버스의 확장을 위한 동력을 제공하는 셈이다. <뉴 유니버스> 쿠키에서 보여줬던 짧은 농담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물이라 해도 좋겠다. 스파이더 인디아가 속한 지구-50101 뭄바튼이 선보이는 극한의 2D풍 작화나 지구-928 누에바요크의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서 280명의 스파이더맨과 벌이는 추격전에서의 애니메이션은 가히 광기에 가까운 작화와 표현력을 자랑한다. 거미줄의 세계관은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서사 자체는 의외로 단순하다. 지도가 아무리 미로처럼 얽혀 있어도 결국 지나온 길은 하나라는 단순한 비결을 감독들은 잊지 않았다. 이야기의 시작점과 끝점을 매듭짓는 게 그웬이라면 히어로물의 핵심인 빌런과의 상관관계를 구축하는 건 역시 마일스다. 이번 작품의 빌런인 스팟은 전작에서 차원이동기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피해자다. 연구원이었던 그는 차원이동장치를 활용하여 스파이더맨의 거미를 다른 세계에서 옮겨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차원의 문을 자유자재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스팟은 능력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하찮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다 스파이더맨이 자신을 무시하자 분노하며 일갈한다. “내가 널 만들었고, 네가 날 만들었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짝지어진 히어로와 빌런은 스파이더맨뿐 아니라 모든 히어로물의 또 다른 ‘공식설정’일지도 모르겠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그웬과 마일스뿐 아니라 빌런 스팟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하찮기 이를 데 없어 보였던 스팟이 스파이더버스 전체를 위협할 빌런으로 각성하는 과정에서 숨겨졌던 세계의 진실이 밝혀진다. 2024년 공개될 <비욘드 더 스파이더버스>에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스팟과의 대결이 기대되는 이유는 그것이 히어로물 전체가 짊어진 숙제와 같은 테마이기 때문이다. 빌런과 히어로가 한몸으로 엮여 창조한 우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던, 폐허와 같던 히어로물이 다시금 꿈틀거린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사에 남을 3부작, 21세기 히어로영화 캐논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평범함을 파고들다, ‘라방’ 박선호

동주와 여자 친구 수진(김희정)의 싸움이 시작된 건 동주의 친구가 그에게 불법촬영 라이브 주소를 보내면서부터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해보지만 수진은 이미 마음이 돌아선 듯 냉담하기만 하다. 불법촬영 라이브 방송은 어느새 수진을 위협하며 동주의 숨통을 조여온다.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 <루갈>, 영화 <챔피언> 등으로 대중 앞에 나선 배우 박선호는 동주를 통해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며 우리가 놓친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긴장감 높은 추격전을 생생히 그리기 위해 박선호는 동주의 모든 감정을 나노 단위로 분석했다. - 동주는 수진이 불법촬영 라이브 방송의 피해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감정 변화가 가장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지점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려 했나. = 처음 시나리오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겁이 많이 났다. 동주가 느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어려워 보였다. 작품 특성상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기보다 개별적으로 촬영을 해야 해서 망설임이 더 컸다. 하지만 배우로서 이런 스릴러 추격물을 꼭 해보고 싶었다. 고민 끝에 동주를 분석해갔더니 최주연 감독님께서 그러시더라. “선호씨가 동주예요.” 그 뒤로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동주가 현실적으로 보였다. 동주는 이미 영화 초반부터 감정과 텐션이 높은 상태다.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더 강한 분노를 보여주기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변주할 수 있을까 고민이 컸다. 그래서 오히려 탈진한 상태로 연기했다. 분노로 인해 땅을 치고 책상을 내리치다가도, 더이상 발악할 에너지가 없어 힘이 쫙 빠진 듯한 모습이 다른 결의 분노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 손을 많이 사용했다. 젠틀맨(박성웅)의 악행을 보는 표정은 극적인 분노를 드러내지만 한편으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손끝을 떨었다. - 동주의 모든 감정을 세세하게 연구한 덕일까. 비언어적인 요소를 섬세하게 파악했다. = 어릴 적에 눈앞이 캄캄해진 적이 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블랙아웃됐는데, 동주의 상황도 그럴 것 같았다. 내가 경험했던 감정을 반영하면서 연기하니 한결 편안했다. - 모니터 앞에 앉아 혼자 사건을 처리하는 동주처럼 박선호 배우도 홀로 카메라 앞에 앉아 연기를 펼쳐야만 했다. 상대 배우가 없는 연기는 어땠나. = 철저히 상상에 의존했다. 다행히도 촬영 현장에 가기 전에 미리 연습하고 준비해둬서 동주를 다양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1번 방식으로 연기하다가 2번 느낌으로 가보고 둘을 섞어보기도 하고. 이때 젠틀맨이 동주를 자극하기 위해 하는 말들을 가장 많이 떠올렸다. 또 몸 안의 근육을 활용하고자 했다. 온몸에 힘을 주고 숨을 참으면 쇄골부터 이마까지 빨개져서 흥분한 상태의 피부를 표현할 수 있다. 한 장소에서 상대 배우 없이 계속 이어지는 촬영이었기 때문에 동주의 세세한 감정 변화로 프레임을 가득 메워야 했다. 막연한 감정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해낸 과정이 개인적으로 무척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 내내 방 안에서만 이야기를 끌고 가던 동주가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컴퓨터를 들고 길 위를 달리고 구른다. 실제 촬영 과정은 어땠나. = 일단 세트장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았다. 야외에서 촬영한다니! (웃음) 동주의 방은 내내 감정을 쏟아내기만 하던 공간이라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차분해지고 엄숙해진다. 그런데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동주가 밖으로 나섰을 땐 다른 사람도 있고 바람도 쐴 수 있어서 힘이 났다. 길거리를 배회하며 젠틀맨을 신고할지 말지 고민하던 장면만 이틀을 촬영했다. 내가 그렇게 달리기가 빠른 편은 아닌데 촬영감독님이 속도감 있게 찍어주셨다. - 동주는 사건에 얽힌 이후 또래 친구들에게 사이버 성범죄의 문제의식을 강조하지만, 과거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며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동주에게 어떤 현실성이 반영됐다고 생각하나. = 동주는 평범하디 평범하다. 주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이랄까. 실제로 자신의 일이 되기까지 동주는 불법 동영상이나 불법 사이트를 공유하는 친구들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바라봤다. 만약 그게 정말 싫었다면 더 강경하게 말하거나 친구들을 멀리할 수도 있었지만 동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동주는 범죄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자신이 직접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라고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현실에서도 이런 인식이 미비하다 보니 동주의 태도 변화가 영화의 주요 메시지를 잘 담아낸다고 느꼈다. - 젠틀맨과 동주의 이파전으로 보이던 갈등은 동주 친구들의 등장으로 복잡한 이면을 마주한다. 이 과정에서 김균하 배우, 조정원 배우와 함께 많은 것을 의논하고 나눈 것 같다. = 촬영을 함께하며 정말 크게 믿고 의지했다. 호흡을 주고받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더 끈끈해졌다. 연기를 잘하기 위한 직접적인 자극도 받았다. 다 같이 둘러앉아 시나리오 공부를 많이 했다. 감독님께 적극적으로 의견을 보태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동주야” 하고 부르는 장면에서는 여느 친구들이 그러하듯 “야 똥주!”라는 식으로 바꾸었다. 실제 또래가 쓰는 말투와 어휘를 사용해서 현실성을 높이고자 했다. - <라방>을 통해 스스로 어떤 통찰과 의미를 얻었다고 생각하나. = 기존에 주로 참여했던 로맨스물이나 코미디와는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졌다. 사이버 성범죄가 무거운 주제이지 않나.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더 진중하게 소화하고 의미가 왜곡되지 않게 전달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스스로도 사이버 성범죄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더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건강한 사회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관객도 <라방>을 통해 자신이 모르고 놓쳐버린 것들을 다시금 곱씹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비평] 너의 눈에 시간을 새긴다는 것,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시간이 품고 있는 리듬을 담은 영화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공간과 그 안의 사물들과 사람들, 그들의 물질성과 운동이 자아내는 리듬이 하나의 세계를 이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미야케 쇼는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응시하며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 세상의 리듬을 영화 속으로 흘려보낸다. 그러고선 도쿄에 자리한 아담한 복싱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리듬을 형성하고, 전철의 기척을 알리는 소리가 도시의 순환하는 리듬을 일깨우며, 도심지의 소음과 작은 동네의 고요함이 개별적인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부드럽게 각인시킨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깊고 단단하며 신비롭다. 이 영화엔 사사롭지만 눈길을 끄는 장면들과 주인공 게이코(기시이 유키노)의 세계를 이루는 순간들이 느슨하게 들어찬다. 영화는 복싱 선수 게이코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게이코의 삶과, 그녀와 이어진 인물들과 그들이 스쳐가는 사람들과 공간의 모습들까지 모든 풍경들을 세심하고 평등하게 다룬다. 이 영화의 비상한 자질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선 누구라도 환희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체육관에서 게이코와 마쓰모토(마쓰우라 신이치로)가 콤비네이션 미트 훈련을 완벽하게 소화해낼 때다. 이 장면은 회장 부인(센도 노부코)의 내레이션으로 게이코의 일기를 낭독할 때 나오는데, 게이코와 마쓰모토의 안무와 같은 훈련은 리드미컬하게 맞아떨어지며 쾌감을 안긴다. 둘도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기뻐하는데 이 운동이 일으키는 리듬은 아름답다. 그런데 두 신체가 일궈내는 운동의 리듬만큼이나 아름다운 운동이 있다. 체육관 창가에 해가 비치고 먼지가 날리는 모습을 찍은 인서트다. 먼지의 운동이 만들어낸 고요한 리듬은 게이코와 마쓰모토가 만든 리듬과는 또 다르게 빛난다. 영화는 다른 속도와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개별 존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응시한다. 간혹 그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을 소중하게 여기는 듯도 보인다. 그 장소, 그 시간에 일어나는 운동과 그것의 리듬을 기록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는 점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힘의 근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세계 안에서 게이코는 살아간다. 몸의 언어를 들리게 만들다영화에서 게이코가 첫 경기에서 승리한 후 이뤄지는 인터뷰에서 기자는 체육관 회장(미우라 도모카즈)에게 “오가와 선수가 프로가 될 수 있었던 건 재능과 소질이 있어서였던 건가요?”라고 묻는다. 청각장애가 있음에도 장애를 넘어설 만큼의 재능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리라. 그러자 회장은 “재능은… 없어요.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고요. 하지만 뭐랄까요.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라고 신중히 답한다. ‘인간적인 기량’이 좋은 복서가 되는 데 얼마큼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이 말은 멋있다. 하지만 그 멋스러움에 감동이 이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게이코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기량을 투명하게 내비치기 때문이다. 알려졌다시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오가사와라 게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2011)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오가사와라의 생을 재현하지 않았으며, 많은 부분이 픽션이다. 말하자면 게이코란 사람을 왜곡하지는 않되 그가 가지는 관계들은 창조한 것이다. 장소와 주변 인물과 그날그날의 훈련과 지나친 풍경과 빛을 달리하면서 말이다. 게이코가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무엇보다 육체를 통해서다. 청각장애가 있는 그녀는 사람의 입모양으로 언어를 알아차리거나 수어나 문자로 소통한다. 훈련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히면서 트레이너와 함께 동작을 연마해간다. 그녀가 훈련하는 모습에선 운동성과 음악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마쓰모토와 콤비네이션 미트 훈련을 하는 장면은 하나같이 안무처럼 유연한 데다 마찰음이 리드미컬해 어떤 음악성이 담겨 있고, 회장과 함께하는 섀도복싱에선 두 인물이 나누는 육체의 대화가 친밀하게 들려오는 듯도 싶다. 영화는 게이코가 가까이 여기는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 친밀하게 소통하는지 그 동그란 눈으로 대상을 들여다보며 온몸으로 함께 전율하는지 세심히 응시한다. 그러한 응시는 게이코가 동생 세이지(사토 히미)와 소통할 때에도, 낯선 이들과 스쳐 갈 때에도 지속된다. 흥미로운 점은 게이코가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 따라서 카메라의 거리감도 온도도 딱 그만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흥미로울 점인가 싶겠지만 사건을 키우지는 않되 게이코가 일상에서 부닥칠 수 있는 일들이 영화에서는 소소하게 일어나고 영화는 그 상황을 더없이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예컨대 게이코가 편의점에서 점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 본의 아니게 점원을 무시하게 된 때에도 점원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상황을 넘기고, 게이코가 계단에서 부딪친 남자가 아무리 뒤에서 욕을 해본들 게이코에게는 들리지 않으며, 게이코가 밤의 강변에서 어슬렁거릴 때 다가오는 경찰들은 최소한의 임무만 마친 후 돌아간다. 게이코에게 이들은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다. 영화는 이 바람도 담는다. 이것이 게이코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만 게이코가 이들에게 갖는 거리만큼이나 먼 거리에서 담고 흔적은 확실히 남긴다. 일상이 사라졌다, 하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시간이 품은 리듬을 담는 동시에 그 리듬이 바뀌어 갈 미래를 예견한다. 영화 시작부에 체육관이 등장하기 전, 가로등 불빛이 비치고 작은 눈발이 날리고 있다. 그때 줄넘기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복싱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고 이내 줄넘기 소리는 샌드백을 치는 소리와 미트 훈련하는 소리와 함께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인물들이 훈련하는 소리는 체육관의 일상을 보지 않아도 보이게 만드는 일상의 리듬을 형성했다. 소리만 들어도 어떤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지 체육관에 얼마큼의 사람이 훈련하고 있는지 가늠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리듬은 체육관이 폐관하면서 사라진다. 게이코에겐 일상의 리듬을 이루던 일부가 사라진 것이다. 경기에서 패한 것보다 이 상실감이 그에겐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상실감에 젖어 있기엔 그녀의 몸은 아직 가볍다. 그는 강변 위로 올라 걸음을 옮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미야케 쇼의 청춘영화의 계보 안에 그냥 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은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영화는 그의 영화가 무언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동시에 거장들의 이름을 상기시킨다. 이미 많은 평자들이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을 말했다. 나 역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를 보며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떠올렸고,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앞서 거론한 감독과 더불어 허우샤오시엔을 다시 떠올렸다. 다만 특정 영화라기보단 카메라 위치와 응시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의 세계가 점점 우리의 언어가 닿지 않는 곳, 언어로 풀기 어려운 깊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리뷰] ‘노트르담 온 파이어’, 완벽한 재건을 위한 셀프 재점화

“믿기 어려우나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리바롤의 말로 문을 여는 <노트르담 온 파이어>는, 파리 시민들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노트르담대성당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던 믿지 못할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재난영화다. 영화는 사건 당일 성당에 신입 관리인이 첫 출근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것을 제외하곤 성당을 둘러싼 공기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을 구경하러 온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곳곳을 누비고 있고, 한쪽에선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의 첨탑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그들은 휴식 시간을 틈타 흡연이 금지된 구역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지만, 이 또한 노트르담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을 흔들리게 할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곳엔 제대로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가 남아 있었고, 바람을 타고 본당 다락에 도착한 작은 꽁초는 기어코 파리의 심장을 불태워버리고야 만다. 그 시각 한가로이 도시 외곽의 베르사유궁전을 구경하고 있던 노트르담의 유물 관리자 로랑 프라드(미카엘 쉬리냥)는 소식을 듣자마자 황급히 성당으로 향한다. 장자크 아노 감독의 신작 <노트르담 온 파이어>는 모든 프랑스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노트르담대성당 화재 사건이 발생한 2019년 4월15일을 픽션의 형태로 재현한 영화다. 2024년 12월을 목표로 재건 중인 노트르담은 아직까지 화재에 관한 명확한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인데, 감독은 과감히 사건의 원인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극의 장르적 성격을 분명히 한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걸면서까지 화재 진압을 포기하지 않는 소방대원들의 영웅적 면모가 드러난다. 이 영화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있다. 바로 성당에서 보관하고 있던 예수의 가시 면류관을 비롯한 성유물들의 구조 문제다. 대원들의 진화 작업은 건물도 건물이지만 반드시 성유물만큼은 지켜달라는 사제의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다. 영화는 촬영이 불가한 노트르담성당 대신 그 외양과 내부 구조가 비슷한 부르주, 아미앵 성당 등에서 촬영되었으며, 극 중간 삽입된 불타는 노트르담의 모습은 시민들이 실제 촬영한 영상을 웹사이트에서 공개적으로 제보받음으로써 구현된 것들이다. 말 그대로 파리 시민들의, 파리 시민들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극 중 유물 관리자가 금고의 비밀번호를 떠올리지 못했던 일과 현장 주변에서 발생했던 교통 혼잡, 그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네명의 소방대원 중 두 사람이 첫 화재 현장 출동 상황이었다는 등의 디테일은 전부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노트르담은 아닐 거예요. 대성당이 불탈 리 없죠. 파리 시민들은 노트르담 주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은 늘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영화는 이번에도 뒤늦게 현실을 따라가기 바쁘다. CHECK POINT <15시 17분 파리행 열차>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2018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2015년 발생했던 ‘탈리스 열차 테러 사건’을 재현한다. IS 연계 테러범의 파리행 고속열차 테러 계획은 휴가 중인 세명의 미군에 의해 저지됐는데, 감독은 실제로 이들 셋을 캐스팅해 본인 역을 연기하게 한다. 픽션 속 삽입되는 현실의 이미지는 <노트르담 온 파이어>와 함께 재현의 방법론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기획] 넷플릭스와 시너지 내고 있는 한국 제작자들의 제언

임승용 용필름 대표(<로기완> <20세기 소녀> <콜>) “어떤 이야기든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넷플릭스의 장점 아닌가. 기성의 감독들,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창작자들을 우선적으로 기용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신인들이 갖고 있는 혁신적인 이야기들을 더 눈여겨봐주길 바란다. 신인배우의 기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소녀>처럼 신인 노윤서 배우가 합류한 작품을 제작할 때 넷플릭스가 그 부분에 의구심을 보이지 않고 작품 자체만 놓고 픽업해준 경우가 좋은 예일 것 같다. 현재 생성되고 있는 모든 스토리가 첫 번째로 향하는 글로벌 1위의 회사인 만큼 초심을 잃지 말아달라.” 김지연 퍼스트맨스튜디오 대표(<오징어 게임> 시리즈) “어제 테드를 잠깐 만났을 때 우스갯소리로 나눴던 이야기가 미국에서 택시를 타고 넷플릭스로 가자고 하면 택시 기사마저 스토리 피칭을 시작한다는 말이었다. 그런 농담이 나올 만큼 현재 전세계적으로 넷플릭스에 많은 작품들이 몰리는 게 사실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밸런스를 잘 맞췄으면 한다. 가령 모든 작품이 꼭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제작될 필요가 있을까. 해외로 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로컬에서 진정성 있게 시청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 더 다양하게 개발되어야 한다. 넷플릭스가 이런 부분까지 상당 부분 서포트해주길 기대할 수밖에 없는 시장 상황이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와 같은 한국 콘텐츠가 나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변승민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대표(<정이> <지옥> <발레리나> 시리즈) “한국 콘텐츠는 현재 활황이면서 위기이기도 하다. 우선 개별 작품의 흥행에 따라 제작사, 창작자들이 지속적인 창작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수익 배분에 대한 룰이 더 다양하게 보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령 PPL의 경우, 한국 창작자들에겐 시청자들이 불편하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이를 잘 소화할 수 있는 창의성을 발휘할 역량이 있다. 제작자로서는 OTT 관람 방식에 따라 시청자들의 주의를 붙잡고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무래도 좀더 자극적인 부분을 고민하게 되는데, 이제는 다른 리듬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갈증도 느낀다. 한국의 <로마>나 <파워 오브 도그>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플랫폼이 지속되고 꾸준히 재미와 감동을 주려면 다양성이 공존해야 한다. 클래식한 문법을 선보이는 작품들에도 기회가 늘어야 한다. 또 시즌1과 <지옥>을 통해 인상적으로 경험한 것 중 하나가 넷플릭스 마케팅의 획기적인 기획력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제작 면에서 물량공세가 시작되면 작품당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자원들의 한계도 뚜렷해지지 않을까. 열심히 제작된 작품 한편 한편이 정확하게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마케팅 영역에서의 넷플릭스의 장점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길 바란다.” 김수아 시작컴퍼니 대표(<솔로지옥> 시리즈) “일단 예능 물량 자체가 시리즈에 비해 적다. 물량이 많아야 좋은 작품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 단순한 사실이다. 그러면 넷플릭스를 대표할 수 있는 IP들이 한국 제작자에게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 단위로 작업하는 것이 익숙하다 보니 예능은 제작 사이클이 빠르다. 한국 넷플릭스에서도 이것을 알고 예능 콘텐츠의 사이클을 유연하게 가져가려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부분에서 더 적극적인 시너지가 생성되길 바라며, 아무래도 리얼리티 쇼는 현지화가 중요하므로 더빙과 자막 작업도 완성도 있는 작업이 계속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BIFAN #3호 [스코프] 메가토크 '최민식을 보았다'의 최민식, “배우에겐 엄격한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

"아주 큰 생일상을 받은 느낌이다". 6월30일에 열린 '최민식을 보았다' 메가토크의 시작에서 배우 최민식이 밝힌 소감이다. 본 행사는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마련한 '최민식을 보았다' 특별전과 연계된 프로그램이다. 특별전은 30년이 넘는 배우 최민식의 연기 역사를 그러모았다. 장편 상영작은 장편영화 데뷔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부터 <쉬리>, <해피엔드>, <올드보이>, <악마를 보았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등 10편이다. 더하여 최민식이 학생 시절 작업한 단편 <수증기>, <겨울의 길목>이 최초 공개된다. 메가토크에서 최민식은 각 작품의 촬영 당시를 마치 몇 달 전의 일처럼 생생히 복기했다. 그리곤 긴 세월 동안 지켜온 배우의 필수 덕목까지 진중히 읊어냈다. "죽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라는 그의 바람이 청중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간이었다. 특별전의 상영작은 최민식이 영화제 측과 논의해 선정했다. "비록 10편만 선정하게 됐으나 그간 참여한 모든 작품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나." 그는 <쉬리> 촬영 당시 실제 남파공작원을 만났던 경험을 풀었다. "영화 작업에 도움을 주던 안기부 직원에게 그분과의 만남을 부탁했다. 여러모로 많이 배우며 어느덧 친해진 통에 술 한잔 같이 마시고 싶었지만, 그것까지 성사되진 않아서 무척 아쉬웠다. (웃음)" <조용한 가족> 촬영을 위해서 체중을 85kg까지 증량한 상황이었기에 고도로 훈련된 남파공작원을 연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운동을 노동으로 생각하던 인간이 매일 보라매공원을 3바퀴씩 뛰고 군사 훈련을 받으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난 아직도 사랑을 잘 모른다." <파이란>의 멜로 연기를 떠올리며 밝힌 최민식의 고백에 청중 사이 웃음이 퍼졌다. 그의 농담은 "상대역으로 장백지 배우를 불러 놓고 둘이 만나는 장면을 너무 적게 줬다. (웃음) 아주 불만 가득한 멜로 현장이었다"로 이어졌다. 그리곤 영화의 후반부, 방파제에서 편지를 읽으며 오열하던 장면을 회상했다. "그 장면에서 내가 어떤 연기를 할지는 나조차도 몰랐다. 순전히 그때의 감정에 나를 맡겼고, 나도 모르게 통곡했다." 최민식의 메소드 연기 비결이 무엇인지 질문이 이어졌다. 그의 답변은 겸손했다. "아직도 연기, 메소드 연기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저 각본을 열심히 읽고 감독과 끝없이 대화한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감독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어떤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배역에 대한 깊은 몰입은 때로 그의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부추기기도 한다. <악마를 보았다>의 살인마 장경철을 연기할 때를 언급했다. "피를 물청소하는 장면에서 피가 물론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피비린내가 코에 진동하더라. 휴식 시간에 속을 게워 내고 다시 촬영에 임했다." 명실상부 최민식의 대표작인 <올드보이>의 제작 과정에서 그는 배우로서의 부끄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제작사 대표에게 <올드보이>의 원작 만화책을 건네받아 읽은 그는 “솔직히 재미는 없더라. (웃음) 다만 하나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이 사라진다는 영화적 소재가 무척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만화책을 추천받은 박찬욱 감독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 달 후, 박찬욱 감독이 들고 온 <올드보이>의 트리트먼트에 최민식은 적잖이 놀랐다. 영화의 파격적인 성적 묘사와 선정성에 "이런 게 우리나라에서 가능하냐"고 감독에게 물었던 그는 이내 "내가 배우로서의 나를 검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부끄러웠고, 박찬욱 감독의 의지 덕에 '그래. 갈 데까지 가보자'라고 결심했다"고. 그렇게 마주한 <올드보이>의 촬영 현장은 "박찬욱의 영화 세계에서 한없이 자유로이 뛰어놀았던 기억"이며 "전 연기자, 스탭이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던 때"로 남았다. 최민식을 언급하는 감독들의 공통 의견은 그가 언제나 촬영 현장에 1등으로 도착하는 성실한 배우란 것이다. "밥차 메뉴가 뭔지 궁금해서 일찍 가는 거다. 기미도 좀 할 겸…"이라고 너스레 떨며 답하던 그는 배우의 태도에 관해 자신의 오랜 가치관을 꺼내 놓았다.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 수업> 첫 장을 보면 모름지기 배우란 군인처럼 철저한 규율을 지켜야 한단 말이 있다." 더불어 그는 대학교 1학년 시절 친구와 밤새 술을 마시느라 연극에 늦어 선배에게 혼났던 때를 복기했다. '네가 무슨 권리로 열심히 연습 중인 동료들의 노력을 앗아 가느냐'란 지적이었다. "그때 선배의 말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어느 정도냐면 그날이 1982년 8월8일 말복이었던 것까지 기억난다." 좌중의 폭소가 이어졌다. 최민식의 '배우 수업'은 계속됐다. "영화는 수많은 이의 열정, 노동, 희생, 자본으로 만들어진다. 배우란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하면서도 절대 그들의 노력을 경시해선 안 된다"라며 배우가 지녀야 할 성실함의 이유를 강조했다. "피아니스트와 무용수가 손가락, 발가락에 수억의 보험을 들어 관리하듯 배우 역시 자신에 대한 직업적 존중과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 물론 난 행사 끝나고 술 마실 생각을 하고 있지만…. (웃음)" "철저한 상업주의와 예술 매체의 중간에서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배우란 직업을 더욱더 매력적으로 느낀다." 끝으로 그는 배우란 직업에 대한 애정을 듬뿍 쏟아냈다. "난 행복한 놈이다. 아직 연기를 사랑한다. 좋아하는 일로 밥 벌어 산다는 것에 늘 감사하다. 이 일이 의무로 느껴질 때가 돼야 그만둘 것 같다." 본인의 작품만으로 영화제를 가득 채울 만큼 대성한 배우의 비결은 결국 영화, 연기에의 '애정'이란 하나의 순수함으로 수렴됐다.

[인터뷰] 이상을 꿈꾸는 현실주의자, ‘비밀의 언덕’ 장선

‘나에게 경희를?’ 배우 장선이 <비밀의 언덕> 대본을 받아 읽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전작이 <바람의 언덕>이라 제목의 연결성이 재밌다고 생각한 동시에, 글이 좋아서 꼭 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내게 경희 역을 제안하신 게 의외였다.” 명은(문승아)의 엄마인 경희는 시장에서 젓갈 가게를 운영한다. 시종 태평한 남편 성호(강길우)와 달리 “당차고 대차게” 가정을 일궈나간다. 영화 <소통과 거짓말>에서 어리고 미숙한 엄마를 연기해봤으나 경희는 “아이들과 보낸 시간들이 잘 드러나야 하는 역할”이었기에 고민이 됐다. 하지만 경희 역시 부모 역할에 서툰 젊은 엄마라는 이지은 감독의 설명을 듣고 ‘그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캡모자와 앞치마는 경희에게 유니폼과 다름없다. “시장의 조명이 워낙 세서 실제로 모자를 많이들 쓰신다더라. 그리고 내가 캡모자가 정말 안 어울리는데, 역설적으로 외모에 신경을 못 쓸 만큼 바쁜 경희의 상황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동에 익숙한 몸과 행동이 중요했기에 경희가 매일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그려보곤 했다. “아이들 식사만큼은 제대로 챙겨주지 않나. 현실이 녹록지 않다 여기면서도 항상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려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장선은 명은과 마찬가지로 반장에 당선됐으나 바쁜 어머니에게서 ‘꼭 해야겠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작아진 등을 감지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으로선 “우리 엄마도 참 대단했다”라며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됐다. <비밀의 언덕>을 촬영할 당시 명은과 경희의 입장에 고루 공감할 수 있었던 셈이다. 경희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집을 떠올리며 좋아하는 인테리어 이미지를 스크랩해둔다. 경희의 이 ‘비전 노트’는 장선이 직접 만들었다. “명은이처럼 경희 역시 현재의 삶이 아닌 다른 자아상을 바라며 살고 있는 거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잘 와닿았다.” <비밀의 언덕>을 계기로 눈컴퍼니와 계약한 장선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동료들과 함께하며 더 좋은 작품,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되새겼다. “‘배우 장선’의 비전 노트를 만든다면, 걸 크러시 대신 ‘할매 크러시’라고 적고 싶다. 내가 만든 말이다. (웃음) 그만큼 나이 들어서도 꾸준히 다양한 역할로 배우 생활을 지속해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다.”

[인터뷰] 모방 심리 자극 않고 몰두할 수 있는 방안 찾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백시원 PD

백시원 PD에겐 독특한 이력이 있다. 단편영화 <대청소>(2020), <젖꼭지 3차대전>(2020), <겹겹이 여름>(2022) 등 꾸준히 영화 작업을 하며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주여성영화제 등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2008년 PD로 입사한 SBS에서 휴직을 결심한 후 한창 영화를 공부했을 때, 그는 주변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글은 울면서 쓰는 거야.”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을 통해 취재원과의 거리두기를 탐사 보도의 기본 원칙으로 여겨온 그는 타인이 되는 법을 익히며 당사자의 감정을 생각하고 그에 공감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를 촬영하며 매주 울음을 삼킨다는 백시원 PD의 이야기를 들으며, 역사 속에 숨은 한편의 사연을 재현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되짚을 수 있었다. - <꼬꼬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포맷으로 화제가 되었다. 초창기 기획 단계 이야기가 궁금하다. =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최삼호, 안윤태, 유혜승 PD가 처음 <꼬꼬무>를 기획했다. 술자리에서 썰 풀듯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고 쉽게 해보자는 게 당시 기본 취지였다. 유난히 말을 재미있고 맛깔나게 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저녁 시간처럼. 처음엔 에서 배우 남보라와 다른 출연자들이 직접 지인을 초청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그 시도를 기점으로 장성규, 장도연, 장항준 감독을 섭외해 초창기 <꼬꼬무>가 완성됐다. 지금은 장성규, 장도연, 장현성씨가 함께하고 있다. - 많은 사건 중에서 되돌아볼 만한 사건을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 가장 중요한 건 호기심을 이끌 만한 이야기인지에 대한 여부다. 우선 역사 관련 책을 두고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연대기별로 중요 사건을 촘촘하게 추렸다. 그다음에 많은 역사 프로그램에서 다뤘던 아이템을 다시 정리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하고 있는 사건들을 참고하며 취재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현대사를 중심으로 탐색하는데 그중에서 드라마적 가치가 높은 이야기를 선택하려 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잘 아는 인물임에도 잘 몰랐던 일대기를 간직하고 있거나, 사건·사고 중 현대적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다루기도 한다. 예를 들어 최초로 처벌받았던 스토킹 범죄나 학교 폭력 등 현재의 문제의식과 연결될 수 있는 맥락을 신경 쓰고 있다. 또 10·26 박정희 암살 사건의 경우 이미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다루었지만 주변인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궁정동에서 실제 일했던 요리사나 경비원 등을 섭외해 다른 시각으로 사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은 대체로 어떻게 발굴하나. = 보통 그런 사건들은 기록에도 개요 정도만 나와 있다. 교과서나 역사서에 한줄 실려 있거나 기사에 짧게 정리돼 있는 식이다. 최근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사건을 다룬 적 있는데 이 사건 또한 대중적으로 노출이 거의 안되었다. 내용은 이러하다. 경기도에 위치한 한 기숙 학원에서 가출한 여성 청소년들을 감금했는데 갑자기 불이 나면서 많은 아이들이 사망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주동자가 학생들이었다는 것이다. 딱 그 정도의 정보만 얻을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여느 시사 프로그램처럼 제보를 받아 뛰어다니며 당시 관련자나 변호사를 만나 취재를 했다. 기록된 사건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사건의 디테일을 찾아나서기도 한다. - 이야기를 전하는 출연자의 재담과 구술 능력은 <꼬꼬무>만의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요 요소다. 이런 부분은 따로 디렉팅을 주는 편인가. = 이 부분은 연출자로서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 현재 출연자인 장성규, 장도연, 장현성씨의 연기력이 워낙 좋다. 물론 큐카드가 준비돼 있긴 하다. 소품을 보여줄 타이밍이나 영상을 봐야 할 타이밍 등 가이드라인을 적고 ‘긴박하게’ , ‘조곤조곤하게’같이 지문 정도가 있다. 세 출연자가 매주 리딩을 함께하면서 입에 잘 안 붙거나 이해가 잘 안 가는 대사는 보충하고 수정한다. 다들 연극배우처럼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 MC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의 큰 리액션은 <꼬꼬무>의 감동이나 긴장감을 극화한다. 청자는 촬영에 대한 정보를 얼마만큼 알고 임하나. =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웃음) 섭외 과정에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청자들의 반응은 100% 진짜다. 게스트들이 눈물을 보일 때에는 제작진도 함께 운다. 매주 울고 있다. (웃음)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다. 다만 섭외 과정에 이런 경우는 있다. 아이돌은 해외 활동이 중요하고 다양한 국가 출신의 멤버가 포함된 그룹도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예민할 수 있는 아이템은 일부러 배정하지 않으려 한다. - 청자로 출연하길 바라는 아이돌 게스트가 많다고. <꼬꼬무>의 어떤 점이 게스트를 이끈다고 생각하나. = 춤이나 장기자랑을 시키지 않는 예능이라서? (웃음) 인간적인 리액션을 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또 이야기를 들으며 몰입하기만 하면 된다는, 비교적 미션이 단순해서 게스트가 느끼는 부담이 덜한 것 같다. - 최근 다큐멘터리나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갖춰야 할 재현 윤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과거 사건을 다시 보여주면서 재현의 수위와 강도 등을 어떻게 조율하고자 했나. = <꼬꼬무>팀 내부적으로 재현 장면은 간접적으로 촬영한다는 원칙이 있다. <꼬꼬무>는 프로그램 특성상 누군가 꼭 사망한다. 사고든 자살이든 사망자가 발생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그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강가에 신발을 두거나 실루엣이나 그림자로 암시하거나 범인이 어딘가 들어가거나 하면서 상상을 이끌 뿐이다. 무엇보다 <꼬꼬무>는 초등학생 시청자가 많다. 그래서 더더욱 신경 쓰려 한다. 모방 심리를 자극하지 않고 시청자가 사건에 몰두할 수 있는 방안을 살피고 있다. - 온라인상에 <꼬꼬무> 형식을 패러디해 팬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놀이 문화도 많이 보인다. 콘텐츠 N차 가공 문화라 할 수 있는데, <꼬꼬무>의 어떤 점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나. = 신기하게도 정말 많이 본다. “때는 2010년…” 하면서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웃음) 얼마 전에는 현대자동차에서 사내 교육용 콘텐츠로 만든 영상을 봤다. “이번에 신차가 출시됐는데…” 하면서 마주 앉은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로 설명을 하더라. 아무래도 <꼬꼬무> 화법이 정보를 전달하는 데 적합해서 그런 게 아닐까. 또 그 정보를 스토리텔링화해서 알려주는 방식에도 잘 어울린다. 편집할 때 상대방이 놀랄 때 눈이 커지는 장면을 많이 활용하는데, 이런 패러디에 그런 묘사도 함께 적어주시더라. 하나의 클리셰가 된 것 같아서 기분 좋다. - OTT와 뉴미디어의 보편화와 함께 레거시 미디어의 위기론이 부각되기도 했다. 방송국 연출자로서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 내부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SBS에서도 일일 드라마와 아침 드라마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수익이 나지 않는 콘텐츠를 정리하고 시청률이나 수익이 담보되는 프로그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흐름도 은연중 생겨났다. 방송국은 광고가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수입원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통해 광고를 이끌어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에는 변함이 없다. - MBC에서는 올해 <피지컬: 100>의 제작을 맡아 글로벌 시청자를 겨냥하기도 했다. 방송국이 OTT 콘텐츠 제작을 선택한 이례적인 사례였다. = 이제는 방송국과 OTT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SBS에서도 배정훈 PD가 웨이브 오리지널 <국가수사본부>를 제작하기도 했다. 기획안 공모를 할 때에도 OTT용 기획안을 내기도 하고. 실제로 젊은 PD 사이에 OTT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해보고 싶어 하는 연출자들이 많이 늘었다. 시청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는 가운데 제작비 규모도 배로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출자의 지적재산권인 IP를 인정해주는 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몇년 안에 연출자의 IP 소유 여부가 더 주요하게 다뤄질 것 같다. - 2008년 입사했을 때 여성 PD 선배가 거의 없었다고 들었다. 지난 15년을 돌아볼 때 방송가에 나타난 젠더 관점의 변화를 어떻게 체감하고 있나. = 갓 입사했을 때 여성 PD 선배가 딱 둘 있었다. 그런데 각자의 사정으로 모두 팀을 이동하면서 이제는 내가 가장 높은 선배가 되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다. 그사이에 여성 PD가 급격히 늘었다. 해마다 평균적으로 3명을 채용한다고 가정하면 여자 1명, 남자 2명이 뽑히는 게 흔했고 전부 남성만 뽑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반대다. 최종 면접에 올라오는 지원자 성비도 남녀 2:8 정도로 나뉜다고 한다. 2000년대에는 방송국 일이 체력적으로 힘든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남성이 가진 신체적 조건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주 52시간 근무제가 들어서면서 정보 집약적, 효율 중심의 환경이 구축됐다. 그렇게 제도적·환경적 우선순위가 변하면서 체력으로 많은 걸 버텨야만 했던 시절과는 많은 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여성들도 강해졌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잘 버티고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보인다. 주변에 운동을 시작한 여성들이 많은데 그런 분위기가 좋은 영향을 준 것 같다. - 긍정적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지만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점이 있다면 무엇을 꼽고 싶나. = 우리 시사교양팀을 생각해본다면 부장급 이상에 여성이 없다는 점. 책임 PD(CP)에 여성이 전무하다. 드라마국에도 없다. 예능국엔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결정권을 가진 직급에 여성이 없으니 여성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고 싶어도 가로막힐 때가 많다. 그래도 요즘엔 <골 때리는 그녀들> <사이렌: 불의 섬> 등 다양한 여성 중심 콘텐츠가 대중에게 사랑받으면서 예전보다는 설득이 수월해졌다. 개인적으로 이런 콘텐츠를 처음 시작해낸 연출자들의 경험이 정말 궁금하다. 이들이 다른 여성 연출자에게 길을 만들어줬다. 대단하다. 나를 연출자로 만든 것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보임과 느낌’이라는 영화 동아리를 만들어서 어설프게 영화를 찍었다. 낡은 8mm짜리 캠코더를 들고 서로를 찍고 집에서 편집했다. 학교 축제에선 상영회를 열기도 하고. 마치 뉴진스의 처럼. 그때 나도 모르게 이런 일을 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요즘 나를 즐겁게 하는 것 주말 이른 아침마다 즐기는 소중한 루틴이 하나 있다. 인왕산 입구까지 산책하여 커피와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초소 책방에 가는 것. 큰 야외 공간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등장하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거기서부터 따릉이 타고 집까지 오면 행복 그 자체!

[비평] ‘애스터로이드 시티’, 영화의 출구는 어디에?

“모든 것을 소모할 수 있다는 느낌, 이 느낌에서야말로 우리는 잘게 썰어지고 다른 배열 속으로 내팽개쳐질 수 있다.” - 마니 파버, <흰 코끼리 예술 vs. 흰 개미 예술> 사막이 흔들린다. 종군 사진작가인 오기(제이슨 슈워츠먼)와 그의 아이들이 작은 카페에 찾아올 때, 원자폭탄 실험의 여파로 실내 공간이 크게 진동한다. 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바깥의 굉음과 폭발이 무슨 전모로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오기는 눈앞의 연기구름을 카메라에 담을 뿐이다.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제목에 명시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미국 서부의 사막에 세워진 모형 도시이자 1950년대 브로드웨이 연극의 무대 배경이다. 앤더슨은 70년대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과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촬영장소로 잘 알려진 스페인 알메리아 근교의 타베르나스 사막을 로케이션 삼아, 50년대 미국의 기호적 요소들을 덧씌운다. 몇 겹의 허구로 겹쳐진 사막이 그곳에 있다. 흩날리는 모래 먼지와 탁한 공기가 없는 가상 무대로서의 사막. 이 영화에서 수많은 외부인이 방문하는 곳은 바로 그 사막이다. 하지만 사막은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사막은 침묵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50년대 미국이라는 영화 문화를 둘러싼 수많은 단면이 그 공간을 침입한다. 열차와 자동차, 원자폭탄과 운석을 포함해 종군 사진기자, 영화배우, 카우보이, 천문학 영재, 군대와 정부, 그리고 외계인이 차례로 들어선다. 단 한컷의 수평 트래킹숏으로 모든 외관을 관측할 수 있는 인구수 87명의 한정된 마을은 외계의 침입을 받아들이고 표면 위에 혼란스러운 계열을 형성한다. 사막에 세워진 평면은 서부극과 SF, 연극 무대와 전쟁영화, 4:3 비율의 흑백영화와 시네마스코프 화면, 외계인 침입의 공포와 가족 멜로드라마의 파편으로 산만하게 뒤섞인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가 종교적 믿음에 사로잡힌 두 남자의 육체적 관계를 매개로 2차대전 이후 미국의 풍경을 관찰하고, 토드 헤인즈의 <캐롤>이 더글러스 서크를 참조 삼아 레즈비언 커플의 관계에 50년대 멜로드라마의 규범과 억압을 이식해 재구성한다면, 웨스 앤더슨이 향한 1950년대 미국은 무작위적인 기호의 교란과 충돌로 혼란스럽다. 욕조에 누운 여배우 밋지 캠벨(스칼릿 조핸슨)과 오기의 죽은 아내가 남긴 사진이 유사하고, 오기가 촬영한 밋지의 자세와 소행성을 훔치는 스톱모션 외계인의 자세가 닮은 것처럼,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그 자체로 규정되는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대신 미스터리와 수수께끼가 교차하고 반복된다. 웨스 앤더슨은 50년대 미국의 사막을 중심부가 비어 있어 영화사의 기억이 무작위로 혼재되는 비정형의 무대로 간주한다. 1950년대 사막이라는 장소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이야기는 다층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도입부에 나오는 화자는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터무니없는 소동극이 극작가 콘래드와 배우들이 제작하는 연극 무대라는 것을 설명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영화가 담아내는 불투명한 물질적 대상이 과거에 속해 있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프렌치 디스패치>를 통해 20세기의 자취를 더듬던 앤더슨은 시계를 맞춰 1950년대라는 명시적 과거로 향한다. 그의 렌즈에서 미국의 50년대는 장르영화의 배경과 연극 무대의 관습이 뒤얽힌 형태로 굴절된다. 이 시기의 증상에 관해 엉뚱한 곳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고 싶다. 미국의 비평가인 마니 파버의 독특한 분석에 따르면, 1950년대는 스튜디오 시스템 시절의 미국영화가 간직하던 자유로운 공간 배열과 무심한 동작의 기예를 잃고 “공간의 전경에 평행으로, 그리고 정적으로 나열된 배우들”을 보여주는 회화적 평면성을 성취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한 시기다. 파버는 흔히 스튜디오 시스템의 마지막 황금기로 여겨지는 50년대 미국영화가 과장된 연기와 구도, 공격적인 스타일을 수용하면서 어색한 현대예술처럼 변해갔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인 영화사의 관점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파버의 평가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분석은 50년대 미국영화에 나타난 작은 전조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웨스 앤더슨이 창조한 장면에 불시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적으로 나열된 인물, 회화적 평면성의 구도, 공격적으로 도드라지는 작가의 스타일. 1950년대에 발견된 ‘타락’의 징조들은 웨스 앤더슨을 지시하는 작가적 요인들과 맞물린다. 마치 외계인의 우주선처럼 파버의 지적은 다른 시공간에 놓인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안착한다. 웨스 앤더슨은 1955년의 사막과 브로드웨이 연극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50년대에 시작된 미국영화의 ‘타락’이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도착해 극단적으로 폭발하고 있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배열과 동작은 앤더슨 영화의 것이 아니다. 그는 사소한 장식과 제스처까지 철저히 통제하는 연출자다. 그리고 그의 작가적 특징은 과장되고 부풀려진 영화들의 원점과도 같은 50년대 미국의 사막에서 연극과 영화, 인간과 외계인을 넘나들며 과시적으로 실천되고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방향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무대를 설정한다. 원자폭탄은 전조 없이 폭발하고, 우주선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찾아온다. 이곳은 과거의 유산을 갉아먹는 미국영화라는 형식의 한계점이자 웨스 앤더슨이 창안한 작가적 형식의 특이점을 동시에 가리키는 좌표인지도 모른다. 웨스 앤더슨의 사막에서 영화가 접속할 수 있는 바깥은 존재하지 않고, 화면은 기호들의 중첩과 중첩만이 화면의 활동을 이루고 있다. 장면에 비치는 대상의 위계를 분류하고 중심적인 의미와 주변적인 활동을 구분하는 데서 영화의 구조가 생산된다고 한다면, 이 영화는 어떤 사건에도 일관된 맥락을 부여하지 않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난데없는 출현과 사라짐으로 가득하다. 외계인은 왜 소행성을 가져가고 되돌려주는지, 연극의 연출자는 배우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극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무슨 의미를 말하는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세밀한 요소들은 더 높은 맥락에서 화해하거나 결합하지 않고 혼잡스러운 수평의 표면 위에 남겨진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영화는 정해진 시간에 선로를 달리는 기차의 운행처럼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지속되는 불가피한 활동이다. 왜 앤더슨이 창조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의미를 해결할 수도, 이야기를 종결할 수도 없을까? 영화의 결말을 앞두고, 무대에서 잠드는 연기를 주문하는 콘래드 앞에서 배우들은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라고 외친다.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잠과 각성의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역설하는 이 명제는 영화가 잊어버린 한 가지 경험을 환기한다. 영화의 특권은 관객을 잠들게 하는 역량에 있었다. 잠드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멈추거나 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더 넓은 맥락에서 말한다면, 영화를 보는 경험 자체가 잠자는 시간과 맞닿아 있다. 21세기에 여전히 영화를 보는 자들은 밝은 세계를 외면하고 어둠에 파묻혀 비생산적이고 비활동적인 시간을 수용하는 종족이다. 시종일관 밝은 바깥이 있다면 그에 대비되는 어두컴컴한 내부가 있다. 그렇게 활동과 비활동을 오가는 주기를 간직하면서 영화라는 경험은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누구도 잠들지 않는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연극 무대를 소개하는 화자는 조명 기사에게 당부한다. 사막의 태양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야 한다. 다만 늘 투명하고 무자비하게 내리쬐고 있어야 한다. 사막엔 어둠이 드리우지 않는다. 모두가 굴절 상자(Camera obscura)를 뒤집어쓰고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면, 우주선의 녹색 빛이 그들을 비출 것이다. 뜨고 지는 주기의 리듬을 잊어버린 빛에 상시 노출된 이들은 늙지 않는다. 마모되거나 변형되지 않는다. 외계 전파가 보내는 날짜가 언제나 ‘오늘’에 맞춰진 것처럼, 그들에게 내일은 없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완벽하게 닫힌 세계다. 앤더슨은 격자형의 창틀과 문을 강박적으로 여닫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프레임의 외부는 극단적으로 불투명하다. 그곳을 영화의 활동이 멈춰버린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격리된 내부는 멈춰 있고 바깥의 정체는 모호하다. 앤더슨은 연극의 장치를 매개로 건축적 세트장과 오래된 문화의 기호를 묘기 부리듯 넘나들지만, 그 어디에도 영화의 해답을 구할 수 있는 출구나 목적지를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여기서 나가는 문은 어디에 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지배하는 내부를 벗어나 바깥으로 향하는 길은 어디인가? 외계인이 소행성을 돌려주기 위해 지구에 돌아오면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내려진 격리 해제는 취소된다. 그들은 탈출할 수 없다. 상황은 통제를 넘어선다. 사람들이 일제히 흥분하고 난장판이 벌어지자 오기는 세트장을 탈출해 무대 바깥으로 나간다. 그는 수염 분장을 뜯고 ‘오기’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 존스로 걸어나온다. 백스테이지로 향한 존스는 연출자 슈베르트에게 말한다. 연극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존스는 이야기의 의미를 구한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이렇다 할 대답을 주지 않는다. 연극 무대의 연출자도, 그 뒤에서 타자기로 희곡을 쓴 극작가도, 액자 형식을 설명하고 인물들의 심리를 부연하는 화자도 혼란스럽게 뒤얽힌 픽션의 상태에 대답하지 않는다. 존스는 한 번 더 바깥으로 나간다. 극장 밖의 난간에서 존스는 ‘오기’의 죽은 아내를 연기한 배우와 만난다. 인공적인 눈이 내리고, 연출된 바람소리가 들리는 난간에서 두 사람은 연극에서 삭제된 부부의 대화를 연기한다. 그 장면의 대화는 알 수 없는 행동을 벌이는 인물들의 심리를 설명하는 대목이지만, 설명되지 않는 이유로 편집되었다. 그들은 ‘애스터로이드 시티’ 바깥에서, 연극을 제작하는 백스테이지 문밖에서, 인물이 붙잡고 있던 삶의 의미를 기억해낸다. 연기한 배우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연극 대본에서 삭제된 무대 ‘바깥의’ 장면을 빌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외화면과 조우한다. 하지만 규칙을 초과하는 허구의 무대인 그곳은 이 영화의 이야기를 수용하는 장소가 아니다. 카메라는 다시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사막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기호들이 중첩된 사막의 표면에서 웨스 앤더슨이 창안한 영화적 장소가 일으키는 파열음이 새어나온다. 외계인을 촬영한 오기는 사진에 남겨진 그의 표정에서 “너흰 다 끝났다”라는 의미를 읽어낸다. 그와 대화하던 밋지는 어쩌면 끝났을 수 있다고 화답한다. 종말은 그들에게도 익숙하다. 종말은 픽션의 약속이다. 사건이 나타났다면 해결되거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종말조차 도래하지 않는, ‘끝’을 가리키는 표상을 마련할 수도 없는 이해 불가능의 모형적 세계다.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는 변화의 여정이 사라진 투명한 세계, 서사의 부식이 없는 곳이다. 웨스 앤더슨의 허구적 인물들은 서서히 사라질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된 세계에 던져진다. 아벨 페라라의 <4:44 지구 최후의 날>(2011)에서 세계가 끝나는 종말의 형식은 정확하고 구체적인 시간에 맞춰 예고되어 있다. 인류는 그 시간을 피해갈 수 없다. 클로즈업된 두 사람의 얼굴을 백색으로 물들이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가 가리키는 투명하고 평등한 종말의 자리를 시각화한다. 우리는 이렇게 소멸한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종말은 잠드는 것처럼 우리가 머무는 세계에 엄습한다. 지구 최후의 날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웨스 앤더슨은 다른 종말의 형식을 상상한다. 그것은 소멸의 가능성마저 백색으로 사라진 눈뜬 세계의 출현이다. 조명은 계속해서 태양빛을 방출하고, 영화의 모든 장면에 빛이 물든다. 거듭해서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다면 그 빛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콘래드가 죽은 뒤 사막의 마을로 돌아오는 에필로그를 덧붙인다. 이 세계에 결말을 내릴 수 있는 창작자라는 최상단의 근거는 사라졌다. 웨스 앤더슨은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사막에 세워진 도시의 외관을 수평 트래킹으로 관측하는 에필로그를 묘사한다. 오기는 밋지가 사라진 그녀의 집을 바라보며 묻는다. “다 어디 갔죠?” 하루 사이에 격리가 해제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첫 장면에서 본 것처럼, 마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곳은 외계인이 출현하고 마을 전체가 격리되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세계다. 사막에 세워진 건물들의 외관만 남겨진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사멸하는 것들의 흔적이 감춰진 영원한 평면적 기호의 세계다. 스크린은 어떤 맥락의 이해도 없이 순식간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기호들의 난입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아이들은 사막에 도착한다 웨스 앤더슨은 이 끝나지 않는 시공간을 바라본다. 1950년대의 흔적에 붙잡혀 썩지 않는 영화의 물질성을 들여다본다. 웨스 앤더슨이 시도하던 모험과 여행의 방법론은 20세기의 사막에서 유효하지 않다. 출발점과 도착점을 설정하고, 그 사이를 잇는 여정을 노정하던 영화의 환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이미지의 흔적과 기호들로 가득하지만, 이곳은 영화와 불화하는 장소다. 모든 것을 격리하고 소멸시키는 세계는 이미지의 흔적을, 지표로 남겨져 지속되는 미래의 시간을 삭제한다. 끝없이 이어진 사막 한가운데서 웨스 앤더슨은 바깥이 없는 영화의 부재를 직면한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의 사막은 폭발하거나(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 결말로 향하지 않는다. 한 가지 다른 비전이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안쪽의 이야기와 무대 뒤편에서 연극을 제작하는 극작가와 배우들의 이야기는 형식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세부적인 구성에서 한 가지 차이를 드러낸다. 웨스 앤더슨은 브로드웨이 극장에 어린아이들을 놔두지 않았다. 그 대신 아이들은 사막에 도착한다. 앤더슨의 아이들은 수평으로 배열된 모형 도시에 예기치 못한 행위를 불러온다. 그들은 단단한 땅을 파서 어머니의 유골을 묻어두고,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져 물건을 부순다. 바닥에 납작하게 들러붙은 동물의 사체를 발견하는 것도 아이들의 몫이다. 그들은 견고한 사막의 표면을 깨트리고 무너뜨린다. 과거의 기호들이 눌어붙은 무대에 변형의 감각을 도입한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시간을 모색한다. 무덤을 만들고 장례식을 치르며 과거를 시간에 품고 미래로 향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이들의 실천에서 온다. 오기는 그런 아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밋지가 남긴 주소를 받는다. 그는 미래로 움직일 것이다. 유년기의 충동은 멈춰버린 영화의 시간을 재생하는 유일한 단서가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1950년대의 아이들이란 1969년생인 웨스 앤더슨에게 부모 세대에 속한다. 앤더슨은 50년대라는 시제에 진입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대가 남긴 이야기를 만난다. 그 시대는 앤더슨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로 다가오지만, 단절이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앤더슨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안고 미래로 향한다. 불투명한 미래로 향하는 여정에 앤더슨의 데뷔작 <바틀 로켓>의 주인공 앤소니가 여동생에게 전해주는 말이 덧입혀진다. “그레이스, 오빠는 어른이야. 돌아갈 집이 없는 거야.”

[기획] 우수상 당선자 ‘유선아’ 작품비평, 보이지 않는 것의 형상 - ‘메모리아’를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것의 형상, <메모리아> <메모리아>는 소리의 영화다. 소리는 물질이 있어야 만들어질 수 있는 파동이기에 이것은 또한 존재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소리의 근원이 마침내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화면에 드러나는 이미지를 응시하며 시간을 고스란히 체험한다. 영화의 처음, 인적 없는 새벽에 차가 빼곡히 들어선 주차장에서 갑자기 도난방지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한 자동차에서 시작한 경보음은 같은 공간에 늘어선 다른 자동차에 전염되듯 퍼져나간다. 모든 자동차의 경보음이 차례로 울렸다가 멈추기까지의 광경을 카메라는 가만히 지켜본다. 아무도 없는 곳에 울렸다가 멎는 소리는 무언가가 여기에 있었고 그것이 떠나갔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하면 <메모리아>는 형체가 없는 소리로 존재를 다루는 영화이자 시간을 체험케 하는 영화다. 전생의 기억과 환생을 주요한 테마로 다루었던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몇편의 전작과 <메모리아>는 큰 맥락에서 결을 같이하고 있다. 위라세타꾼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는 영혼과 동물로 환생한 존재가 살아 있는 인간과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엉클 분미>에서 분미 삼촌의 죽은 아내 후아이의 영혼과 실종되었던 아들 자이가 원숭이 귀신으로 환생해 남은 가족과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함께하는 장면이 그렇다. 자이는 온몸에 털이 자란 빨간 눈의 큰 원숭이 모습으로, 후아이의 영혼은 주위 사물이 투과되어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가 점차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메모리아>에는 영혼이나 환생체로의 동물과 같은 신비한 존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에 신비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소리이다. 형체는 없지만 존재의 유무를 감지해낼 수 있는 소리는 위라세타꾼의 전작에서 태국의 정글을 떠돌던 영혼과 동일하다. <메모리아>에서 소리가 형상을 드러내는 방식은 어떤 여정을 따른다. 간밤에 불현듯 들려온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사운드 엔지니어인 에르난을 찾아간 제시카는 그에게 자신이 들은 소리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설명한다. 에르난은 곧 자신의 장비를 동원하여 소리를 만들어나가는데 소리가 가진 물체의 속성을 설명할 말을 찾던 제시카는 난관에 봉착한다. 제시카가 찾고자 하는 소리는 석조 구체가 금속성의 우물에 떨어지는 소리이기도 하면서 어딘가 지구 중심부에서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소리는 에르난이 만들어낸 단 한번의 파동을 가진 음향의 스펙트럼으로 모니터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의외인 점은 제시카가 찾으려는 소리와 가장 닮은 것이 다름 아닌 ‘나무 방망이에 맞아 이불 위로 쓰러질 때’ 나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소리의 진짜 정체와는 별개로 그것이 가진 파동은 어쩐지 인간의 몸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의 파동이 제시카의 육화한 몸을 거쳐 비로소 감응으로 전이될 때 위라세타꾼의 영화에서 영혼이 사라진 자리에 소리가 들어선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만 같다. 소리의 파동은 다른 이의 삶을 느끼는 감응의 형태로 변화하며 마침내 몸을 얻어 육화되는 데 반해 어떤 존재들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제시카는 여동생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데 식사 테이블에서 여동생이 안드레스에 대한 화제를 꺼낸다. 제시카는 치과 의사인 안드레스가 죽었다고 믿고 있지만 여동생 부부는 안드레스가 살아 있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제시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지만 안드레스의 생사와 연관된 진위는 끝내 알 수 없다. 부부는 또 정글에 길을 놓던 남자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가 여전히 살아 있는지는 대화의 말미에서 모호해진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진실이란 이후 에르난을 찾아간 제시카가 누구도 에르난을 알지 못하며 그가 마치 없던 것과 같은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사라졌거나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 존재, 소리의 근원으로 짐작할 수 있는 어떤 물질과 육화한 인간의 몸은 비선형적 시간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그것은 <메모리아>의 전반부에서 사라진 에르난이 영화의 후반부에 또 다른 에르난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며 그가 있는 보고타 어딘가의 터널에서는 여전히 6천년 전의 유해를 계속해서 발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시간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게 하는 두번의 롱테이크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눈을 뜨고 잠든 에르난의 육신과 낯선 비행 물체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에르난이 잠시 죽음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화면은 잠깐 정지한 듯 보이지만 그의 몸을 둘러싼 풀이 바람에 흔들릴 때 화면은 정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땠냐는 제시카의 말에 그는 “잠깐 멈춘 것뿐”이라 답한다. 영화를 보는 지금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그의 시간은 멈추어 있었다. 또 영화 후반부의 에르난은 지금 목격되는 현재이면서 앞서 등장한 에르난의 미래이다. 제시카가 찾아 헤매던 소리의 근원은 에르난에 의하면 “이보다 앞선 시간”이지만 지금의 우리로선 미래를 암시하는 비행 물체다. 비행 물체와 에르난의 잠든 몸을 담은 각각의 프레임 안에는 과거와 미래가 혼재하고 있으면서 지켜봄으로써 현재의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 그렇기에 비행 물체와 그 물체가 만들어낸 파동으로 생긴 동그란 모양의 연기가 사위어가는 롱테이크는 시간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장면으로 남는다. <메모리아>에서 소리는 어떤 이의 삶이며 어느 때의 시간이다. 제시카는 어느 밤 쾅 하는 정체불명의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에르난의 손을 맞잡고 지난 생의 기억을 들으며 소리의 파동을 느낄 때 어느덧 소리는 제시카라는 인물의 몸을 얻어 다른 이의 기억에 감응하는 자로 환생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