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OTT 추천작] ‘하이 데저트’ ‘하모니움’ ‘멜랑콜리아’ ‘숨 쉬어라’

<디 아워스> Apple TV+ ▶▶▶ 액정이 다 깨진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금방이라도 시동이 꺼질 것만 같은 고물차로 난폭 운전을 하고 있는 한 여자. 이 여자의 이름은 페기 뉴먼이다. 과거 마약상이었던 페기는, 지금은 서부개척시대를 재현한 민속촌에서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아직도 가끔씩 마약에 손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이 데저트>는 이 문제적 인물이 큰돈을 벌기 위해 사설탐정 일을 시작하면서 생기는 일화를 다룬 시리즈물이다. 주연은 <보이후드>의 퍼트리샤 아켓, 감독은 <미트 페어런츠> 시리즈의 제이 로치이며 코미디의 대가 벤 스틸러가 제작에 참여했다. <하모니움> 왓챠, 웨이브, 시리즈온, 티빙 ▶▶▶▶ 7월19일 개봉예정인 <러브 라이프>의 감독 후카다 고지가 2016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이 영화는, 살인을 저지른 한 전과자가 친구 집에 머물면서 발생하는 어떤 분열을 무자비하게 그려내는 영화다. 분열의 파편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대상이 어린아이라는 점이 이 영화의 아픈 지점이다. 마치 어른들이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을 때, 후손들이 대신 벌을 받게 되는 것을 ‘조화’로 일컬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 것만 같다. <멜랑콜리아> 웨이브, 시리즈온 ▶▶▶▶ 퍼트리샤 아켓이 <보이후드>를 통해 커리어를 다시 한번 끌어올렸듯, 아역 배우 출신 커스틴 던스트 역시 <멜랑콜리아>를 통해 64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자신의 부활을 알렸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우울증’이라는 거대 행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SF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포함한 많은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우울증이 어떻게 한 인간의 머릿속을 쑥대밭으로 만드는지를 표현해낸다. 그곳에서 커스틴 던스트(그리고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미친 연기’에도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숨 쉬어라> 넷플릭스 ▶▶▶ 생존/서바이벌 애호가들을 만족시킬 만한 시리즈 한편이 나왔다. 주인공은 북부 캐나다의 외딴 숲속에 홀로 남은 변호사 리브다.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동승자 전원이 사망했고, 아무도 이 사고를 알지 못한다. 게다가 지병이 있는 리브는 물과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도 없다. 그렇게 간신히 생존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속세의 리브를 곤란하게 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쉴 틈 없이 리브를 괴롭힌다. 서바이벌의 난이도나 주인공의 기발한 위기 대처 능력이 돋보이는 시리즈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역경 속에서 성장하는 한 인물의 서사는 늘 울림을 준다.

씨네21 추천도서 - <제주도우다>

현기영 지음 / 창비 펴냄 역사소설은 결말이 정해져 있다. 특히 4·3 사건처럼 수많은 주민이 죽어간 참사라면, 책에서 아무리 밝고 희망찬 내용이 펼쳐진다 해도 결말에 대한 근심과 불안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육지에서 제주로 건너온 거대한 뱀의 신화에서 시작하는 제주 이야기는, 식민지 시대 제주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히고 수탈한 일제와 그에 맞서 싸우고 끌려가고 죽어간 청년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는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미군이 공습을 가하는 바람에 섬은 암흑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이 어두운 시절에도 두 소년 창세와 행필은 바닷가에서 일본군을 향해 방귀 뀌는 시늉을 하며 웃음을 터트린다. 드세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힘들게 말 다루는 법을 배우는 창세의 누나 만옥 등 여성들 또한 제 삶을 개척해나간다. 청년들의 생기, 미래를 향한 꿈은 시대가 아무리 엄혹해도 절대 부서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슬프다. 꿈과 희망이 어떤 식으로 굴절될지 알기 때문이다. 해방 후 강렬한 집단적 열망이 섬 전체에 번져나간다. 제주만의 자치적 공간을 꿈꾸는 청년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같은 단어들이 밤의 토론 자리를 수놓는다. “종기처럼 곪아 있는 치욕과 증오, 그것이 터져나와야 해방이었다.” 그렇지만 미군정 또한 일제처럼 폭압적이고 비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청년들은 실망한다. 남북이 갈라지고 서북청년단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또다시 폭력이 일상을 파고든다. 격화된 시위에 경찰들은 총을 쏘고, 중산간 지대에 숨어든 무장대원들과 전투를 벌인다. 결국 학살이 벌어지고 수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는다. 절망의 시대가 희망과 해방의 시대로 변했다가, 다시 폭력과 어두움의 시대로 급변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상처를 입지 않을 사람 누가 있을까. 4·3 사건의 피해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중편 <순이 삼촌>이 제주에서 서울에 올라온 순이 삼촌이 기이한 모습을 보인 이유를 찬찬히 설명하는 형식을 취한 것처럼, <제주도우다> 또한 “허깨비”처럼 살아온 창세가 후손들에게 힘겹게 끔찍한 과거를 알리는 액자소설 형식이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적 비극이기 때문이리라. 71쪽, 3권 “희망이 살해당했다는 크나큰 좌절감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몰고 왔다.”

[인터뷰] ‘그림책이 가진 제한성과 원시성을 참 좋아한다’, 백희나 작가 인터뷰

- 올해 4월9일 SNS에 전시회 제목을 추천해달라는 포스팅을 올렸다. 인스타그램에 달린 174개의 댓글을 포함해 많은 이들의 의견을 받았을 텐데, 최종적으로 <백희나 그림책>이 됐다. = 전시회 제목 짓기가 정말 힘들어 여러 차례 고민했지만 가장 확실하고 직관적인 제목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건 <달 샤베트>의 늑대 할머니다. 전시의 시작이 <달 샤베트>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 뻔한 기획이 아니었으면 했다. 백희나가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전시를 한다면 대개의 관람객은 평면 그림과 입체 조형물이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것보다 조금 더 의외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달 샤베트>의 늑대 할머니는 조그마한 종이 인형이다. 이 늑대 할머니를 실제 늑대의 몸집 크기만큼 키워, 살아 숨 쉬는 동화 속 캐릭터가 관람객을 맞이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마침 <달 샤베트>의 배경이 여름이라 여름에 개막하는 전시회와 잘 맞아떨어졌고, 내가 그림책 작가로 다시 시작하게 만든 작품이어서 여러모로 <달 샤베트>로 전시의 문을 여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 이제껏 만든 인형이나 세트 중 오래된 것들은 보수 작업을 거치기도 했나. = <달 샤베트>의 아파트는 우체국 택배 상자로 지은 세트다. 이번에 다시 꺼내 보니 지난 세월 동안 습기를 먹어 그런지 점점 부풀며 기울었다. 내겐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세트라 바로 보수 작업에 돌입했다. 보수까진 아니지만 새로 손본 작품도 있다. 책을 만들 때는 아무래도 마감 시한이 정해져 있다 보니 그림에 자세히 나오지 않는 부분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서 카메라 프레임 내부에 잡히는 세트만 제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트가 오브제로 전시될 경우, 모든 각도에서 세트와 인형을 관람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림에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로 제작하기도 했다. - 전해 듣기론 전시회가 개막한 이후에도 전시장을 계속 방문해 전시물들을 손보고 있다고 들었다. 휴관일에도 전시장에서 근무 중이라고. =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버려야 하는 B컷들이 정말 많다. B컷들이 책의 의도와는 벗어났지만 ‘장면 자체로’ 좋았던 기억이 많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선 내가 기억하는 B컷의 아름다움까지 구현하고 싶어 계속해 수정 중이다. 어제는 <이상한 엄마>의 구름 세트를 손봤다. - <달 샤베트> 아파트 세트의 경우, 관람객들이 CCTV를 통해 아파트 내부를 일일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전시 중이다. 집별로 다른 벽지를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 집별로 다른 벽지를 만드는 과정이 상당히 재밌었다. 창작 당시 내가 살던 집 뒷베란다로 나가면, 건너편 아파트의 세대 풍경 하나하나가 <달샤베트>의 아파트처럼 보였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관음하는 집들을 인형의 집으로 만든 것이랄까. 책과 다른 감상 포인트를 제시하고 싶어 전시장에 CCTV를 두었고, 육안으로 집의 구석구석을 모두 확인하길 바랐다. 독자들이 <달 샤베트> 부스 앞에선 모기가 됐으면 했다. 모기에겐 아파트 내부의 먼지나 실밥이 얼마나 크게 보이겠나. 관람객도 전시의 일부로 합류할 수 있는 느낌을 줄 수 있어 좋았다. - <알사탕>을 보면 동동이가 아빠의 진심을 알게 되는 장면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그 장면에 숨겨둔 비밀 하나가 드러난다. 관람객은 한부모 가족의 세대주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 기울이는 무심한 노력들을 목격하게 된다. 책에는 흐리게 찍힌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이 괜히 뭉클했다. = 나 역시 동동이 아빠처럼 일하는 엄마지 않나.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양육자라면 삶이 비슷할 거다. 나도 매번 멸치볶음 레시피와 불고기 레시피를 부엌 찬장에 붙여두고, 아이들마다 하원 시간을 정리해놓아야만 했다. 마침 <알사탕>을 작업할 당시 우리 아이들과 동동이가 비슷한 나이였다. 그래서 한창 그림책을 만들다가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엔 “악!” 소리를 내며 뛰어나가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삶의 연속에서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사수해야 했던 것이 아이들의 서로 다른 스케줄이었다. 혼자 아이를 키웠던 동동이 아빠는 더 하지 않았을까. - 이번 전시엔 1996년 만들었던 애니메이션 <잠 오는 밤>도 함께 상영된다. 전시회의 제일 끝에 작가의 제일 첫 작품을 상영하는 구성이 오묘하더라. = 미국 유학 시절 만든 작품이다. 내가 이런 작업도 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 전시가 아무래도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다 보니 세트뿐 아니라 미디어 전시까지도 욕심낸 부분이 있다. - 이번 전시회의 경우, 작가의 책 속 세계를 하나하나 해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책 속에 가려져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부분을 전부 개방하는 셈인데, ‘책은 책으로만 남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없었나. = 내가 독자와의 만남 같은 행사를 꺼리는 이유다. 물론 걱정이 많았다. 책을 만드는 데 쓰인 철사나 나사까지 적나라하게 보이는 게 독자의 환상을 깨는 건 아닐까 고심했다. 하지만 재밌을 것 같았다. 늑대 할머니가 만든 ‘달 샤베트’를 실제로 보고, <알사탕> 속 동동이의 집에 직접 들어가 구석구석을 살피는 경험이 얼마나 재밌나. 고된 준비 과정 중에 스스로에 의구심이 드는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이번 전시가 애독자들에겐 선물이 되겠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철저하게 계획한다 - 책의 구성이 영화처럼 느껴지는 작품이 몇 있다. 그중 하나가 <어제 저녁>인데, 연관이 없을 것 같은 플롯이 하나씩 얽히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책인데, 아이들에게 그닥 인기가 있진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개별 캐릭터의 스토리를 모두 깨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어제 저녁>은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하듯 장난감처럼 다루길 희망했다. 아이들이 병풍처럼 이 책을 자기 앞에 두르고 양육자와 한 장면씩 뜯어보며 놀길 바란다. - 영화적이라 생각한 또 다른 작품은 <나는 개다>다. 다중 시점 내러티브를 동화책으로 시각화했다고 볼 수 있는데, 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캐릭터의 시점이 한 페이지 내에서 전개된다. = 그림책은 매체 특성상 제한점이 많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순전히 독자가 감상 속도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독자를 잡아두기 위한 스토리의 전달 방식을 고민할 수밖에 없고 책 너머에 있는 가상의 독자를 상정하며 이야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 <나는 개다>의 다중 시점 장면도 수많은 고민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다중 시점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연출이지만 독자들에게 이 장면이 혼동보다 즐거움을 주리란 확신이 있었다. 나는 그림책이 가진 제한성과 원시성을 참 좋아한다. - 그림책의 원시성은 무엇인가. = 386 컴퓨터가 보급되던 젊은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래픽 보드가 컬러 지원을 못했다. TV 하나를 봐도 NTSC인지 PAL인지를 따져야 했던 때다. 그런 매체의 제약이 많던 시기에 청춘을 보내다 보니 그림책만이 가진 특유의 원시성을 사랑하게 됐다. 쉽게 소장할 수 있고,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해상도가 선명하며 다른 매체에 비해 비교적 저렴하다. - 대부분의 작품에 아이들이 사는 집 내부가 등장하지만 집별로 구조가 모두 다르다. 집의 구조에 관한 아이디어는 작품 속 아이 캐릭터의 속성에 따라 맞추는 편인가. 가령 <이상한 엄마>의 집은 중문이 중요한 인테리어 요소다. = 언제나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역사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동화 속 호호는 엄마와 단둘이 살지 않나. 이 가족이 사는 집의 구조는 옛날 아파트다. 엄마가 지금은 홀로 아이를 양육하지만 작중 시점(時點)처럼 평생 홀로 산 존재가 아니라 인생의 어느 순간엔 곁에 누군가가 존재했던, 나름의 가족 연혁이 있는 사람이란 걸 집을 통해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집에 선녀가 내려와야 하니 신축 아파트면 안됐다. 물론 그림의 구성 또한 고려한다. <이상한 엄마>의 경우 선녀 옷의 끝자락과 집 안의 여러 사물이 흩어진 걸 한 페이지에 드러내야 해서, 긴 복도 끝에 현관문이 있는 집 구조가 필요했다. -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상한 손님> <이상한 엄마> 그리고 <알사탕>의 아파트가 모두 구축 구조다. 무조건 물 호스가 딸린 베란다가 있고, 베란다 확장도 안 했다. (웃음) = 그건 내가 베란다 트는 걸 안 좋아해서…. (웃음) - 장면의 후경을 세트로 만들지 실사로 찍을지에 관한 판단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 계획을 철저히 하는 편이다. 작품을 구상할 때 스스로 제작 가능한 부분과 불가능한 부분을 모두 설정해놓고, 공정이 어느 정도까지 성공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정하다 보면 이 장면을 어떻게 구상할지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그림을 계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복기하는 것은 나만의 공식이다. 그 공식은 작품마다 다르지만 스토리의 내적 공식을 깨지 않아야 작품에 판타지가 개입돼도 독자가 그럴듯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언제나 근간에 둔다. 근작 <연이와 버들 도령>을 예로 들면 연이가 상추를 찾아 헤매는 설산의 배경은 실사로, 버들 도령이 사는 봄 동굴은 그림을 그려 만들었다. 실제 설산을 배경으로 작품을 찍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던지라 기뻤다. 봄 동굴의 경우 그곳의 개별 꽃과 나무를 모두 입체로 만들 경우 오히려 그림 전체가 가짜 티가 과하게 나서 유치해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안이 전통 민화로 봄 동굴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그릴 수 있고, 형식의 구애도 크게 받지 않는 그림으로 표현하면 멋있으리란 생각이 들더라. 마침 작품의 내용도 구전설화라 작품과 잘 어울렸다. - 평자와 독자들은 <이상한 엄마> <알사탕> 등 백희나의 그림책 속에 한부모 가정이 자연스러운 가족의 형태로 드러나는 점을 자주 언급한다. 여기에 하나를 추가하자면 <어제 저녁> <삐약이 엄마> 등 작품에서 다양한 동물들이 무리 없이 공생하는 것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성별, 인종 등의 생물학적 인자가 차별과 혐오의 요소로 악용되는 시대에 사는 대한민국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사실 인터뷰마다 내가 굉장히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그래서 작품 속 메시지에 관한 평을 들을 때마다 나를 많이 돌아본다. 인간 백희나는 도덕적이거나 착한 사람이기보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다. 마음이 섬약하고 예민해 상처를 받는 것은 물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까지도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내 작품이 다양한 처지에 놓인 독자들에게 상처가 되질 않길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나는 영화도 쉽게 못 본다. 영화 관람 후 다가오는 감정의 여파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못 보는 장르가 재해영화다. 하지만 그런 재해 상황을 상상하면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서로 물어뜯고 싸우기보다는 단 몇명이라도 서로 도우며 살길 희망한다. 작가가 품은 그 정도의 마음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라 생각해준다면 감사할 듯하다. - 본인이 생각해도 정말 고되게 만든 작품이 있나. = 다 힘들다. 수천장의 사진을 찍고 원하는 한컷을 얻어냈을 때 정말 재밌지만, 그 한컷을 위해 사진을 찍는 과정은 정말 고되다. 잠시 태국에 살던 시절 만든 <나는 개다> 속 구슬이의 산책 장면이 으뜸이다. 산책 장면은 동동이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므로 시간대가 정오여야만 했다. 그런데 작업 공간에서 아무리 조명을 조정해봐도 정오의 햇볕이 살지 않아 직접 인형과 세트를 들고 옥상에 올라갔다. 끝까지 안 들어도 고생일 것이 빤하지 않나. 바람이라도 불면 세트가 넘어지고 구름은 계속 해를 가리고…. 심지어 휴대폰에 연결한 리모컨이 카메라 셔터를 대신하는데 뙤약볕 아래서 휴대폰 배터리는 금세 닳고, 사진을 찍을라치면 계속 전화가 왔다.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던 중 작업을 못 끝내고 아이를 픽업하러 갔다.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탈수가 와 근처 상점에서 계산도 안 한 레모네이드를 집어 벌컥벌컥 마셨다. (웃음) 내가 전문 포토그래퍼를 고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캐릭터를 만든 사람이 인형들의 감정선을 가장 잘 살게 찍을 것이란 확신도 있지만, 만족할 만한 사진을 몇천장씩 찍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의 전문성을 포기하더라도 내가 다 해내는 수밖에 없다. - 의외로 잔혹한 묘사가 서슴없이 드러난다. <삐약이 엄마> 속 니양이도 병아리 삐약이를 입양하기 전까진 닭들의 유정란을 먹어치우는 포식자고, <연이와 버들 도령> 속 나이 든 여인이 저지르는 악행도 그 수위가 상당히 세다. = 동화책 작가로서 언제나 유해하지 않은 방식으로 세상의 어두운 단면을 어떻게 묘사할지를 늘 고민한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이 어디까지 세상의 어둡고 잔인한 면을 보여주어야 하는가’에 관한 담론이 근래 많이 논의된다. 이에 관한 내 입장을 밝히자면 세상의 어두운 면은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양육자들이 내 그림책의 간접적인 묘사를 통해 지구에 도사리는 수많은 험한 구석들을 간접적으로 안전하게 안내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작가인 나 또한 선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내 안에도 분명 잔혹함과 나쁜 부분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건 백희나 개인의 결함이 아닌, 인류 전체의 공통점 아닌가. 인류는 지금껏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도움을 주기도 하며 살아왔다. 그 어떤 독자도 착하고 나쁜 구석이 혼합돼 있을 것이므로 독자들이 내 작품에서 인간 내부에 공존하는 다양한 속성을 발견했으면 한다. 내가 다 해내는 수밖에 없다 - 백희나의 세계 속 어린이들은 늘 양육자와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 말하고 싶은 것을 전하지 못하고, 어른들도 어린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건네지 못한다. =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내가 여전히 사회생활을 비롯한 소통에 서툰 사람이라 그런 마음이 작품에 절실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순 있을 것 같다. - 인터뷰마다 “내 책이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책일 거란 마음에 상당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말을 자주 언급했다. = 책임감 이야기도 이제 그만하려 한다. (웃음) 거듭 말하지만 나는 부족한 면이 참 많은 사람인데 자꾸 그런 말을 공식적으로 하다보면 스스로가 결벽해지는 것만 같아 부담스럽다. 다만 직업에 관한 책임감은 확실히 있다. 일로써 이 직업을 잘해나가고 싶다. 나는 내가 만든 작업물을 파는 사람이라 내가 만든 작품의 값어치를 언제나 생각한다. 소비자들이 내 상품을 구매해 읽고 속았다는 마음을 받으면 안되지 않나. - 한동안 책의 판권장에 두 자녀의 이름이 ‘영감과 응원’의 이름으로 올랐다. 아무래도 지척에서 관찰 가능한 어린이였기 때문일까. = 두 아이들이 나의 첫 독자였다. 그래서 둘의 반응이 내게 굉장한 힘이 됐다. 엄마가 만든 책을 읽고 눈이 반짝반짝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게, 작품을 끝까지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이젠 아이들이 다 컸는데 이번 전시회에 와서 “다 봤던 거네~”라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더라. 아이들은 항상 하교하면 엄마의 작업실에 와 엄마가 만드는 인형을 직관했던지라 이런 대규모 전시에 새삼스러워하지 않았던 듯하다. - 바비 인형 수집이 평생 취미인 것으로 안다. 최근 바비 인형들을 가지고 <그렇다고 업혀갈 순 없잖아>라는 제목의 돌(doll) 드라마를 차기작으로 기획 중인 것을 개인 SNS에서 봤다. 마침 10년 전 출연한 다큐멘터리에서 성인 여성 시청자를 타깃으로 한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발언도 했던데, 이 둘은 동일한 작품인가. = 그렇다. 10년째 작업 중인 것은 아니지만. 10년 전 돌 드라마를 기획할 당시만 해도 작품을 업로드할 플랫폼이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유튜브가 굉장히 활성화됐지 않았나. 10년 전에도 유튜브는 있었으니 그때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후회가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10년 전 이 작품을 처음 기획했던 이유와 이제 와 다시 이 작품을 만들려는 이유는 같다. 우선 이 드라마는 내가 시청자로서 보고 싶은 작품이다. 그리고 스토리텔러로서 공부가 될 작품이라 꼭 완수하고 싶다. 나는 언제나 유아를 주 독자층으로 한 책을 만들었고, 작품별로 한권의 단행본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업혀갈 순 없잖아>는 성인이 시청하는 드라마고, 단행본이 아닌 연재로 일정 간격을 둔 채 업로드된다. 내 입장에선 과감한 시도인데 좋은 공부가 되리라 확신한다. 지금 시즌1의 마지막 에피소드 준비만 남겨놓은 상황이다. 아마 추석이 오기 전 유튜브를 통해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용산구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바비들의 이야기다.

[기획] 비밀의 무게, 성장의 서사, 영화 ‘비밀의 언덕’ 살펴보기

선물 상자에 금색 리본을 붙일까, 분홍색 리본을 붙일까. 명은이 이토록 마음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 가족환경조사 면담을 교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하고 싶기 때문이다. 친구들 앞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엄마와 무직인 아빠의 이야기는 영 꺼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명은의 바람은 어그러지고 결국 명은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비밀의 언덕>은 자신의 거짓말을 지켜내려는 12살 명은의 여정을 담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평범한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친구들, 제 수고를 모르는 무심한 선생님, 조금의 낭만도 허용하지 않는 부모와 전학생 혜진(장재희)을 만난다. 명은의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저보다 더 복잡하고 열악한 가정사에도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혜진은 명은의 마음에 파동을 남기고, 명은은 자신이 간직한 비밀의 무게를 다시 재보기로 한다. “글쓰기라는 연결고리로 두 인물의 마음을 확장시키고 싶었다”는 이지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비밀’과 ‘성장’ 사이의 상호관계가 <비밀의 언덕>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한국 성장영화의 계보에 따라 <비밀의 언덕>을 살펴본 소은성 영화평론가의 글도 함께 전한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비밀의 언덕> 리뷰와 이지은 감독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인터뷰] “영화 찍을 때, 우린 나이 같은 거 몰라요”, ‘작은정원’ 배우들과의 인터뷰

- 오늘 저도 네분 선생님께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일동 너무 좋지요! 김혜숙 하긴, 우린 이미 늘 언니라고 불리는걸. (웃음) - 이마리오 감독이 완성한 다큐멘터리 <작은정원>을 보니 어떠셨어요? 문춘희 솔직히 말하면, 우리 모습이 너무 부족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그런데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지니까 오히려 영화에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하나, 나는 꽤 좋더라고요. 최순남 처음엔 내가 영화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미안시루왔어요.(미안했어요) 그런데 영화에서 우리가 움직이는 거 하나하나가 너무 새롭고 고맙고. (이마리오 감독을 향해) 정말 고생 많으셨어. 김혜숙 다 우리 마리오 감독님을 만나서 영화가 된 거죠. 우린 그냥 매일이 실수덩어리인데 그걸 섬세하게 편집해서 이런 작품을 만든 거니까. 나같은 사람 이야기도 영화가 된다는 게 신기하고요. - 영화에 나온 본인들의 모습은 마음에 드세요? 처음에 자신을 찍는 셀프 카메라로 촬영하는 과정도 적응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문춘희 처음엔 내 모습이 너~무 미워. 도대체 왜 저러고 있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화면 속 내 모습을 보다보면 몰랐던 습관 같은 걸 발견하게 되니까 신기했어요. 김희자 내 목소리는 또 왜 그런대요? (웃음) 남을 찍어주는 건 적응이 됐는데 내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여전히 너무 어색해요.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잘 모르잖아요. 영화가 나를 비추면 그제야 알게 되니까 의미 있는 일이죠. 처음엔 내 얼굴이 너무 늙은이 같아서 못 보겠다 싶었는데 자꾸 보니 이 얼굴에 익숙해져.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날 받아들이게 된 것이 좋았어요. 문춘희 난 내 걸음걸이도 처음 알았어. - 또 예를 들면요? 김희자 화면을 보니까 내가 자꾸만 고개를 푹 숙이고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더라고. ‘아이 참, 진짜 꼴보기 싫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일동 웃음) 그 뒤로는 의식적으로 자세도 고치고 그랬어요. 최순남 나도! 고개를 시도 때도 없이 흔들고 있어서 깜짝 놀랐는데 이제 곤친다고 곤칠킬지 모르겠네.(고친다고 고쳐질지 모르겠네) 어쩌다 시작한 영화 만들기 - 여기 계신 ‘동네 학교’ 선생님들(최승철, 최제헌 연구자)과 사진 찍고 영화 만들기를 배우게 된 게 이제 벌써 8년차라고요. 김희자 다 명주동 덕분이지요. 할머니들이 뭐 할 일이 있어요? 그런데 이 선생님들이 우리 동네에 터를 잡으면서 2016년부터 스마트폰 사진을 배웠어요. 그땐 꽃만 잔뜩 찍었지 나를 찍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근데 숙제를 내주니까 어떻게든 나를 찍고, ‘나 내일 이거 어떻게 가지고 가나’ 밤새 창피해해요. 다음날 숙제를 갖다주면 그걸 또 엄청 큰 화면에 띄워서 같이 봐. (웃음) 선생님들이 이게 이래서 좋고 저게 저래서 좋고 막 칭찬을 해준단 말이에요. 그러면 다음엔 좀더 잘 찍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더 열심히 하게 된 거죠. 그게 계속 이어져가지고 나중에는 동영상을 배웠어요. 어쩌다 여기까지 왔네요. 문춘희 선생님들 말을 듣고 조금씩 고쳐나가는데 어느새 내가 발전하고 있더라고요. 나이 들면 느끼기 어려운 감정 아닌가요. 그러면서 재미가 붙었고 우리가 정말로 ‘언니’들처럼 살게 된 게 아닌가 싶어. - 처음에 스마트폰 사진 동아리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요. 문춘희 우리가 동네 계모임처럼 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화단 가꾸기를 했거든요. ‘작은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명주 동네의 화단을 열심히 가꿨지요. 나중에 그 모습을 담은 사진 전시가 열렸는데, 어느 날 이 언니들이 우리가 직접 사진을 배워서 찍으면 어떻겠냐고 그러더라고요. 마침 그 시기에 젊은 선생님들이 명주동에 터를 잡은 거예요. 무작정 찾아가서 가르쳐 달라고 그랬죠. 김희자 우리 선생님들이 쾌히 승낙하셔가지고 그날부터 시작해 동네 학교 6학년까지 다니고 지금은 벌써 8년째니까…. 김혜숙 근 10년, 우리 참 행복했어요. - 평균 연령 70대인 동네 학교 졸업식에서 어떤 분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시던데요. 학사모 던질 때 기분이 어땠나요. 문춘희 그러게 말이에요. 다큐에도 우리 졸업하는 모습이 나가서 참 기분이 좋아. 그냥 정말로 학교 졸업하는 느낌이었어요. 우리끼리는 불가능했어요. 다 선생님들 덕분이죠. 김혜숙 솔직히 우리 세대는 그 옛날에 학사모 쓸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멋지게 갖춰 입고 졸업식에 선다는 게 나한테는 상상 이상의 무엇이었어요. - 사진에서 동영상으로, 극영화에서 자전적 다큐멘터리로 넘어가는 동안 성실히 숙제를 해오는 학생들이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거나 고비였던 순간이 있다면요? 문춘희 우리 나이는 일단 휴대전화 자체가 에룹(어렵)잖아요. 처음엔 고생을 꽤 했죠. 그것도 한참이나. 나중에는 핸드폰으로 찍은 걸 파일 변환해야 하는 게 좀 귀찮았어요. 그런데 우리 나이치고는 이 정도면 잘하는 편이죠? 손주들이 할머니가 이 정도 했다고 하면 깜짝 놀라니까. 김희자 나같은 경우는 동영상을 찍어야 하는데 한참 동안 사진만 찍어놓고 그랬죠. 김혜숙 선생님들이 시키니까 앞에 카메라 켜놓고 자식들한테 전화 걸어서 “엄마한테 그동안 하고 싶은데 못했던 말 없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런 걸 평생 어떻게 해보겠어요. 그때가 벌써 한 4년 전인데, 나는 참 많이 변했어요. 영화 하면서. 김희자 재밌는 게 애들마다 기억이 다 달라요. 우리 아이 중에 한 아이만 옛날에 나하고 다퉜던 기억을 말하더라고요. 나는 전혀 생각도 안 나는데…. 다른 애들도 모른다 그러고. 그런데 한참 어릴 때 속상했던 그 마음이 여전히 생생한 것 같더라고. 문춘희 와, 나는 그걸 하면서 내 자식들 성격을 새롭게 알았어. 우리 막내가 ‘오글’거린다면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렇게 민망해할 줄은 몰랐거든요. 나는 자식들한테 전화 걸어서 질문해보는 숙제 다시 하라면 또 하고 싶어. (웃음) - 감독, 스탭, 배우, 촬영감독 등등 여러 역할을 돌아가며 다 경험해보셨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 무엇인지 찾으셨어요? 김혜숙 전 내레이션을 했거든요.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싶었는데 나중에 참 뿌듯했어요. 낭독하는 일하고 잘 맞는 것 같아요. 문춘희 나는 찍는 거. ‘카메라 롤, 레디, 액션!’ 외치는 게 처음엔 어색하더니 나중엔 시원하게 나와요. 그리고 프레임 안에 거슬리는 게 있을 때 치워달라고 하면 스탭들이 막 분주하게 움직이니까 내 딴엔 신기하고. (웃음) 이거 하다보면 그래서 자꾸 내 나이를 잊어버려. 김희자 나는 촬영. 처음에 자처해서 촬영하겠다고 한 게 내 모습을 보기 싫어서였어요. 차선으로 택한 거지만 하다보니 촬영감독만의 묘미를 알게 된 거죠. 한번은 선생님들하고 감독님이 우리 집 와서 촬영을 한다는데, 화면에 걸리기 전에 치워두면 좋을 게 내 눈에 딱 보이는 거 아니겠어요. 김혜숙 소품도 마련해놓고! - 혹시 도중에 진도가 막히거나 너무 어려워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요. 지금껏 남아 있었던 분들의 동력은 무엇이라고 보세요? 문춘희 도중에 그만둔 언니들도 있지요. 지금 남아 있는 언니들은 다 서로 옆에서 당겨주고 밀어주는 바람에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최순남 감독님이 어딜 가든 우리를 따라왔고. (일동 웃음) 김희자 자그마치 3년이나! 내가 말도 안 했는데 나 있는 데 어느새 감독님이 와 있고 그래요. * 인터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인터뷰] 프레임을 벗어난 새로운 창작물을 구현하다, ‘시인의 방’ 구범석 감독

사진작가와 조명감독, 아트 디렉터와 영화감독까지 다양한 수식이 구범석 감독을 설명한다. 이 사이에는 ‘시각화’라는 교집합이 존재한다. 이제는 XR을 통해 보는 것을 넘어 느끼고 경험하도록 이끌어내고 있다. 2018년 VR 4DX영화 <기억을 만나다>를 통해 360도 시야각의 영상을 구현한 이후, 그는 영화 <기생충>이 원작인 VR 콘텐츠 <기생충 VR>을 선보였다. 실감형 콘텐츠를 대중적 문법으로 풀어내고 싶었던 그는 부천영화제에서 XR영화 <시인의 방>을 선보였다. 가상공간 속에 초현실적 메타포를 숨겨두며 사용자를 안내한 구범석 감독을 만났다. - <시인의 방>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XR로 구현한 작품이다. 주인공으로 윤동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 그동안 내가 소비해온 대부분의 영상 콘텐츠에는 프레임이 존재한다. TV와 DVD, 멀티플렉스 극장과 소형화된 스크린까지. 그러다 보니 프레임이 없는 VR 형태로 영상 콘텐츠가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2018년 VR 4DX영 화 <기 억 을 만 나 다>를 제 작 하던 당시만 해도 해당 장르에는 자극 중심의 콘텐츠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어두운 방에서 탈출해야 하는 것 등이다. 나는 반대로 크리에이터로서 상상력을 펼치면서도 감성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살다 보면 한 대상을 지그시 바라보고 조용히 관찰하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런 시간을 제공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간송미술관에서 미디어 디렉터로 고미술을 다루면서 한국적인 것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겨났다. 특히 한글! 한글의 언어적 측면뿐만 아니라 캘리그래피같이 미형적인 부분까지 다뤄보고 싶었고, 활자의 아름다움과 문학성을 함께 전할 수 있는 인물로 윤동주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윤동주의 필체엔 그만의 울림이 있다. 글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형태에도 작가의 심상이 담겨져 있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 XR 콘텐츠에서 시각적 몰입만큼 중요한 게 스토리텔링이다. 윤동주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과정에 가장 신경 쓴 게 뭔가. = 윤동주 시인은 워낙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고 사인도 여전히 불명확하다. 공백으로 남은 정보 사이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던 것은 ‘시인의 삶’이었다. 중국 명동촌에 살던 그가 연희전문학교로 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기까지의 스토리가 문득 궁금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남긴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동하게 되었는지 그 결심의 바탕을 알고 싶었다. 처음에 한국적인 것과 활자의 미형에 빠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면, 윤동주의 삶에 대한 궁금증과 몰입이 이를 계속 진행하게 했다. 다만 스토리가 어렵지 않게 풀어지길 바랐다. 그래서 시인을 현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20대 청년이라고 가정했다. 그 순간 윤동주의 순수함이 돋보였다. 그의 저항의식과 시대에 대한 죄책감 등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만큼 스토리 구성 과정에 조심스러운 면도 있었을 듯하다. = 유럽의 한 국가에서 전쟁과 살상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한 소녀의 관점으로 자신의 가족이 총살당하는 과정을 콘텐츠로 만든 적이 있다. 총을 겨눈 사람들의 죄를 묻기 위함이었겠지만 <시인의 방>은 그런 관점으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내 편과 네 편, 선과 악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는 게 목적이 아니라, 시인 윤동주의 삶과 고뇌를 돌아보는 게 원래 취지였던 만큼 본질을 잃지 않으려 했다. - <시인의 방>이란 제목대로 공간성이 두드러진다. 방, 기차, 물속 등 다양한 공간을 비춘 이유가 있다면. =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자기 방이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으로 일하는 시대도 아니고, 윤동주 시인이 극히 외향적인 사람도 아니니 조금이라도 편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에 오래 머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과거의 바람이나 미래에 대한 예지몽이 그의 방에서 펼쳐진다. 그 방이 해체될 때마다 작은 우주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도 시인의 깊은 심연을 상징한다. 송몽규와 윤동주가 명동촌에서 개성으로 오기 위해 탄 기차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순간을 말하지만, 계속 바다 위를 내달리면서 이들이 곧 일본에 가게 될 거라는 상황을 암시한다. 당시 일본에 가려면 배를 타야 했는데, 은유적인 방식으로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고 싶었다. 보통 영화는 카메라가 공간 안으로 들어가 배우를 비추지만 XR은 이용자 자신이 카메라가 된다. 그래서 공간의 의미와 상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끔 했다. - 물에 풍덩 빠지거나 기차 뒤로 올라서거나 꿈의 언덕으로 솟구치는 등 수직적인 이동이 눈에 띈다. = XR 이용자가 실제 몸으로 체험한다는 느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접근했다. 눈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로 그 상황에 놓인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을 전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물의 입자를 표현하거나 캐릭터를 더 정교하게 구현하는 데에 신경을 썼다. 영상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법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는 많은 문법을 만들어냈고, 사람들의 무의식에 그것들을 심어놨다.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영화가 무엇인지,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공부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다른 매뉴얼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VR에 있어서는 아직도 이를 즐기기 위해 학습하고 공부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체득할 인터랙티브와 경험을 조금씩 대중적으로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상윤 배우가 윤동주 시인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를 윤동주 역으로 점지한 이유가 있다면. = 이번 프로젝트는 이상윤 배우와 꼭 함께하고 싶었다. 그의 호흡 때문이다. 배우의 호흡은 작품에 따라 굉장히 다양하게 바뀐다. 로맨스와 스릴러 속 인물들의 호흡이 다른 것과 같다. 이상윤 배우가 가진 원천적인 호흡법을 눈여겨보니, 그가 윤동주 시인의 안정적이고 차분하고 진중한 면을 잘 살려줄 것 같았다. 실제로도 잘 구현해주었다. - 영상 중간중간 XR 이용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능동성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이용자는 관찰자 이상의 개입을 경험한다. = 2020년 즈음까지 VR 콘텐츠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었다.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 그리고 3인칭 시점으로 타인을 관찰하는 방식. 이 두 방식을 합치기가 쉽지 않았다. VR이 잘못 설계되는 순간 불쾌한 어지러움을 유발하는데, 시점이 자주 바뀔 때 유독 그렇다. 그러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VR 장치를 벗어버린다. 완전히 그 세계관에서 빠져나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장면을 전환할 때 새로운 시점을 주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잠깐의 휴식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버드아이뷰, 즉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장면이 전환될 때 1인칭 시점이 되는 방식으로 사용자가 상황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왔다. - 무엇보다 감옥에 갇혀 홀로 시간을 견디는 윤동주를 사용자가 직접 토닥이며 위로할 수 있도록 한 장면이 인상 깊었다. 실제로 손에 닿는 것은 없지만 윤동주와 가상으로나마 연결된 듯한 느낌을 준다. = VR 콘텐츠 중에 인터랙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콘텐츠들이 많다. 주로 게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의 방>은 VR 시네마로서 사용자가 스토리와 감성을 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사실 윤동주를 쓰다듬지 않더라도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다만 그에게 손을 뻗고, 토닥이며 위로하는 일련의 과정은 감독으로서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구간이다. - 국내에서 XR과 영화의 접목은 어느 정도까지 왔다고 보는가. = VR과 XR이라는 언어가 상황에 따라 지엽적으로 보일 수 있어 나는 ‘실감형 콘텐츠’라 부른다. 현재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 실감형 콘텐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게임, 영화 등은 물론이고 전광판에도 입체성을 부각한 광고들이 넘친다. 미술관에도 미디어 아트 전시가 성행한다. 다만 아직 초기 단계라 구체적인 스토리텔링을 부각하기보다는 비주얼적 요소를 반복하는 정도에 가깝다. 하지만 VR 시네마가 고도화될수록 사람들이 프레임에서 벗어난 새로운 창작물을 선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 앞서 말했던 프레임 콘텐츠에 익숙했던 세대와 달리 VR, XR 콘텐츠가 익숙한 세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를 체감하는지. = 그렇다. 어린아이의 경우 실감형 콘텐츠에 대한 적응력이 성인보다 훨씬 더 빠르다. 예를 들어 성인이 공통되게 힘들어하는 구간이 있다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면서 즐긴다. 마치 세대에 걸쳐 새로운 DNA가 생겨나듯 이러한 VR 문법을 몸소 이해하는 세대가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담은 VR영화 <시인의 방>은 윤동주가 중국 명동촌에서 조국으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고, 다시 일본으로 떠나기까지의 시간을 재구성했다. 바다를 가르는 기차, 벚꽃나무로 가득한 길거리, 친구들과 함께하는 글방 모임 등 관찰자로서 윤동주의 일상을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며 챕터 사이마다 그의 시대적 고민이 가득한 시들을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인 윤동주와 사용자 사이에 놓여 있는 시대적·물리적 거리를 좁혀주는 일련의 인터랙션들이 인상적이다. 제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이머시브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인터뷰] 가장 크고 깊은 감정으로, ‘더 문’ 도경수 인터뷰

어느덧 연기 경력 10년에 이른 배우 도경수. 20대의 온종일을 노래와 연기로 채웠던 그가 <더 문>으로 돌아왔다. 아이돌 그룹 엑소의 멤버로 활동하며 2014년 영화 <카트>,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로 이름을 알린 이래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와 <스윙키즈>로 배우의 입지를 공고화했던 그가 군 공백기 이후 5년 만에 극장가를 찾은 것이다. 무대와 스크린에서 보여줬던 강직하되 청아한, 아주 큰 눈망울은 변함이 없다. 마침내 이 눈빛은 달에 홀로 고립된 우주비행사 황선우의 외로움과 흔들림, 그리고 이것들을 이겨내는 강직함까지 두루 섞어낸 최적의 무기로 거듭났다. 그는 “지금까지의 배우 경력 중 감정의 크기와 폭이 가장 크고 넓은 인물을 연기했다”라며 촬영 당시의 설렘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눈은 향후 10년의 세월을 또다시 거뜬하게 빛낼 만큼 영롱했다. - 영화로 관객을 만나는 건 대략 5년 만이다. = 너무 떨린다. (웃음) 영화를 찍고 연기하는 일도 어렵지만, 이렇게 인터뷰하거나 홍보를 다니는 게 더 긴장되곤 한다. 그래도 제작 발표회까지 끝냈으니 후련한 맘으로 일정을 즐기려 한다. - 엑소 컴백 일정까지 맞물려 한창 바쁠 것 같다. = 배우와 가수 활동 기간이 겹친 건 지금까지 몇번 있어서 괜찮다. 그나마 이번 엑소 활동은 영화 촬영 기간과 직접적으로 겹치지 않아 다행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히 노래하고 연기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충분하다. 이런 내 모습을 계속 좋아해주셨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말이다. - 황선우는 무척 진중한 인물이다. 그간 배우 도경수가 보여준 이미지, 연기 스타일과 잘 들어맞는단 인상이다. 감정 연기를 할 때 정서의 폭발보단 그것의 미묘한 변화를 드러내는 성향 때문인 것 같다. = 음··· 우선 선우와 내 실제 성격이 닮았다고까진 생각지 못했다. 선우는 나와 다르게 자신의 마음을 언제나 적확히 표현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편이다. 또 외적으로 아주 용맹하지만 내면엔 깊은 아픔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캐릭터가 지닌 감정의 크기와 폭이 크고 넓다. 질문에서 언급했듯 그동안의 연기에선 감정을 몸에서 나오는 대로, 본능적인 선에서 표출해왔다. 그러나 이번엔 선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그간의 감정 연기와는 결이 다소 다르다는 느낌이 있을 거다. - 10년 전 <카트> 출연으로 <씨네21>과 인터뷰했을 때 “어머니에게 화를 내본 적 없는데, 겪어보지 않은 일을 연기하기가 너무 힘들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10년이 흐른 지금엔 감정 연기가 좀 수월해졌나. = 훨씬 수월해졌다. 당시엔 연기 경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많이 어렸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소리도 질러보고 감정적으로 싸워보기도 했다. 이렇게 일상에서 경험한 사건과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왔으니 10년 전에 비해선 연기에 감정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묻어나오지 않을까 싶다. - <카트> 당시만 해도 “시나리오를 받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손을 떨던” 배우였다. 이제는 연기에 굳은살이 좀 생긴 것 같나. = 굳은살이라··· 굳은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웃음) 사실 내 연기를 내가 평가하거나 정량화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관객들이 보시는 대로 정해주면 좋겠다. 나도 궁금하다. 내 연기가 얼마나 늘었는지 항상 피드백을 갈구하고 있다. 평소에도 관객 평이나 주변 분들의 반응을 꼼꼼히 살피는 편이다. - 수용성이 높은 것 같다. 촬영 현장에서도 김용화 감독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안다. 김용화 감독은 “각자의 연기 해석이 다른 것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질 때가 많았다”라고 회상하던데. = 나 역시 똑같은 마음이다. (웃음) 비유하자면 똑같은 원통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인데 보는 각도만 달랐던 거다. 이 각도의 차이를 서로 설명하고 이야기하면서 결국 우리가 같은 생각이란 걸 확인하는 과정이 신기했다. - <신과 함께> 시리즈 때도 마찬가지였나. = 그때는 긴장을 너무너무 많이 했었다. 현장에 걸출한 선배들도 많고, 원동연 일병의 감정선도 연기하기에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신과 함께> 때는 감독님이 좀더 구체적인 지시를 많이 주셨던 것 같다. - 김용화 감독이 배우 도경수를 조금 더 의지하게 된 것 같기도 한데. = 그런 신뢰의 차원도 있었겠다. 또 <더 문>은 선우와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다 보니 대부분의 촬영을 다른 배우 없이 나 혼자 진행했다. 그래서 감독님과 더 자주 가깝게 붙어다녔고 밥도 늘 같이 먹었다. 이런 물리적인 접촉이 연기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 많은 도움이 됐다. - 현장에 가서 상대 배우와 눈을 마주쳐야만 감정 연기가 제대로 나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더 문>은 우주에 혼자 고립된 상황 탓에 상대 배우가 없는 촬영 현장이 대부분이었다. = 맞다. 그래서 항상 선배들의 연기가 궁금했다. 지구에 있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직접 볼 수가 없었으니까. 특히 선우의 이야기가 촬영 초반에 배치돼 있었기에 지구 이야기의 촬영본을 거의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상대역과 겪을 대부분의 감정을 감독님과의 대화, 그리고 각본을 통한 상상으로 도출했다. 이것 역시 지금껏 해왔던 것과는 다른 신선한 경험이었다. 촬영 중후반부터는 지구 촬영본을 조금씩 확인할 수 있었고, 내가 생각한 감정과 상황 그대로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설경구, 김희애 배우를 현장에서 만날 일이 드물었겠다. = 드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못 뵌 수준이다. 이것저것 염탐하면서 배우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다. 심지어 김희애 선배님은 제작보고회 때 얼굴을 처음 뵀다. 인사를 간단하게 드렸는데 너무 신기하더라. 진짜 연예인 보는 기분이었다. (웃음) - 우주 배경의 영화이다 보니 후반작업으로 구현해야 하는 화면이 많았을 텐데. CG 작업 전 세트장에서 연기하기도 쉽진 않았을 듯하다. = 아니다. <신과 함께> 때는 그린 스크린 앞에서도 자주 연기해야 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대규모의 세트 미술이 정말 상세하게 마련돼 있었다. 덕분에 놀랄 만큼 몰입이 잘됐다. 우주선이 실물 크기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안의 작은 스위치나 버튼, 글자까지도 실제 우주선과 같았다. 외부의 물리적 충격이 있는 장면에선 실제로 우주선이 흔들리고, 월면차를 직접 운전하기도 했다. - 선우의 우주 비행을 돕는 드론 ‘마루’와의 연기는 어땠나. = 아주 애틋한 친구다. (웃음) 나를 위해 늘 고생하고 헌신하는 친구라 정이 많이 들었다. 마루 역시 실제 드론에 와이어를 달아 촬영했다. 엄청 무거웠다. 사람들과의 감정 연기는 상상이었는데, 마루와는 아주 현실적으로 깊은 감정을 나눴던 것 같다. - 우주복도 현실적으로 보이던데. = 당연히 실제와 같은 우주복이었다. 진짜 무거웠다. (웃음) 안에서 열까지 나는 바람에 촬영 내내 땀이 줄줄 났다. 그래서 나 때문에 촬영장 에어컨을 세게 틀어야 했다. 여름이었는데 제작진 분들이 긴팔까지 입어가면서 배려해주셨다. 아직도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이···. 아무튼 이렇게 디테일한 촬영 여건이 감정 연기에도 큰 도움이 됐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겠다. 어떻게 움직여야겠다’라는 생각을 굳이 거치지 않더라도 상황마다 표정이 본능적으로 생동했다. - 촬영 현장의 기억이 무척 좋아 보인다. = 그렇다. 현장 분위기가 좋았고 나 역시 무척 재밌었다. 온통 처음 보는 비싸고 이상한 카메라, 신기한 렌즈들이 많은 현장이었다. (웃음) - <더 문>에서 맡은 배역 황선우는 UDT 소속의 엘리트 군인 출신이다. <신과 함께> 때 관심 병사 원동연 일병을 연기했던 것과는 대비되는데, 정반대 성향의 군인 캐릭터를 어떻게 준비했나. 말투나 외양부터가 달라야 했을 것 같은데. = 사실 군인 말투야 대개 거기서 거기이지 않나. (웃음) 그래서 말투나 버릇 같은 점에서 원동연 일병과 의도적으로 차별점을 두려고 하진 않았다. 또 지금의 황선우는 군인이 아니고 우주비행사이다 보니 원동연 일병과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순 없었다. 다만 군인 출신, 특히 UDT 출신 군인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강한 정신력과 용맹함을 사소한 연기에도 많이 녹여내려 했다. - 전역한 지 약 9개월 만에 촬영을 시작한 것으로 안다. 실제 군 생활이 연기에 도움이 됐는지. = 글쎄. 도움이 됐으려나? (웃음) 말투에 ‘다나까’체가 자연스럽게 묻어난 것 빼고는···. - 조리병으로 복무했다. 조리병이면 다른 병사들과 일과 시간이 많이 다를 텐데, 혼자 있는 시간엔 주로 뭘 했나. 사회에선 영화나 시리즈물 감상이 취미였던 것으로 안다. = 늘 잤다. (웃음) 이게 경험 안 해본 분은 종종 조리병 업무가 편하다고 생각하시더라. 그런데 진짜 진짜 힘들다. 종일 밥하고 먹고 자고, 밥하고 먹고 자고 치우고···. 항상 잠이 부족했다. (웃음) 취미 생활을 즐길 틈조차 없었다. 주말에나 간신히 스마트폰으로 뭐라도 조금씩 본 정도다. - 전역 후엔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는지. 팬들에게 <엘리멘탈>을 영업하고 다닌 일화가 유명하다. = 디즈니·픽사 작품이라면 다 좋아한다. <엘리멘탈> 전엔 <모아나>도 눈이 뒤집힐 정도로 재밌게 봤고, 지금은 오매불망 <엘리오>를 기다리고 있다. <엘리멘탈>은 한국계 감독의 작품이라 그런지 감정적으로도 너무 많이 공감했고 표현력에도 감탄했다. 한편으론 이렇게 애니메이션 기술이 좋아지면 조만간 배우란 직업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했을 정도다. (웃음) - 최근에 재밌게 본 작품을 꼽아보자면. = 요즘 극장에 걸려 있는 영화는 다 봤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극장에 보러 가기 전에 1편을 다시 보고 갔다. 아마 내가 1편의 기억을 가장 생생히 지니고 2편을 본 사람이지 않을까.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말이 안될 만큼 미적 표현이 탁월한데, 사실 어떤 이야기인지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더라. (웃음) 이런 영화나 <이니셰린의 밴시> 같은 영화를 본 후엔 작품의 배경이나 해석을 꼭 찾아본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다. 시리즈물 중에선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도 재밌게 봤고,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도 웬만한 건 다 챙겨본다. - 한창 군 생활을 할 때 팬들과 직접 채팅할 수 있는 플랫폼들이 활성화됐다. 전역 후에 맞이한 이런 변화가 낯설진 않았나. = 정말 어려웠다. (웃음) 사실 평소에도 SNS를 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래서 팬들이 뭘 좋아할지 많이 고민했다. 다른 사람들은 일상 사진, 셀카도 잘 보내고 하던데 난 그런 걸 잘하지 못해 미안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 영상을 자주 공유했다. 이번 컴백 때는 최대한 더 열심히 뭐라도 해보려고 한다. (그는 최근에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신설했다.) - 가수 출신 배우가 다른 배우들보다 카메라를 훨씬 잘 찾는단 말도 있다. = 난 아니다. 카메라 잘 못 본다. (웃음) 연기할 때야 카메라를 대놓고 볼 일이 적으니 괜찮다. 근데 무대에서 카메라랑 눈 마주치는 건 아직 너무 부끄럽다. 엑소 활동으로 음악 프로그램을 녹화할 때도 다른 멤버들은 카메라를 잘 보더라. 신기했다. - 멜로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도 참여했다. <더 문>과 비슷한 시기에 촬영했는데 다른 장르, 다른 캐릭터에 감정이입하는 일이 어렵진 않았나. = 캐릭터에 너무 몰입해서 일상에까지 영향을 받는단 배우들이 있더라. 촬영을 모두 마치고도 계속 그 인물에 신경을 쓴다고도 한다. 너무 신기하다. 이런 분들이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난 ‘컷’이 들리는 순간 그냥 도경수로 돌아온다. (웃음) 작품이 끝나면 미련 없이 돌아선다. 나도 저런 경험 한번쯤은 해보고 싶다. - 처음으로 연기에 도전했던 2014년에 <카트>와 <괜찮아, 사랑이야>로 큰 호평을 받았다. 심지어 가수 생활을 병행하는 와중에도 필모그래피를 탄탄하게 쌓고 있다. 이런 지금의 모습도 충분히 천재란 수식에 가깝지 않나. = 아니 그런 말은···.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웃음) <괜찮아, 사랑이야>는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고, 노희경 작가님이 많이 도와주셨던 터라 해냈던 것 같다. 노력 많이 한다. 노력.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지역과 여행 섹션 -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지난 주말에는 <홀리데이> 신간을 보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홀리데이> 매거진은 지역과 여행을 다룬 잡지로 세계에서 유명한 잡지 중 하나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이 잡지도 사연이 있다. 1946년에 창간한 <홀리데이> 매거진과 현재의 <홀리데이> 매거진은 큰 차이가 있다. 1946년과 1977년 사이 뉴욕에서 만들어지던 <홀리데이>는 작가와 사진가에게 원고 길이도, 여행 경비도 제약 없이 전세계 곳곳의 지역과 여행의 본질을 탐구하기를 원했다. 헤밍웨이, 잭 케루악 같은 작가들은 <홀리데이>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판형도, 분량도 적어지던 <홀리데이>는 갑자기 폐간을 알린다. 모든 것은 끝난다는 듯이.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홀리데이>는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그때의 <홀리데이>와 지금의 <홀리데이>는 큰 차이가 있다. 37년 만에 파리로 자리를 옮긴 <홀리데이>는 호마다 한 국가나 지역을 중심으로 다루고, 그 나라의 문학과 예술보다 패션과 스타일을 주로 다룬다. 이것을 같은 잡지라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해석은 다르겠지만 같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잡지의 미덕인 동시에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잡지를 읽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나는 광주의 작은 화랑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기 위해 다름씨와 함께 택시를 탔다. 원래 광주 사람이야? 택시 기사는 심드렁하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No, I m from New york.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아뇨… 광주 사람 아닌데요. 기사는 외지 사람이 그 동네에 가자고 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했다. 거기를 왜 가는 거야? 거긴 정말 아무것도 없어. 알아요. 그런 데를 왜 가? 아무것도 없어서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사는 도착했다고 말했다. 택시비는 1만3천원이 나왔다. 우리는 내려서 바다를 계속 걸었다. 그는 걸을 때마다 뭐라도 쓰라고 독촉한다. 수많은 작가가 당신 사고(史庫)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당신이 쓰고 싶은 문장과 서사를 끝끝내 그들이 모두 써버리고 말 것이라 경고했다. 하나의 행위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나 산책, 서점 따위에서 무슨 대단한 이야기가 더 나올 수 있을 것 같나요. 우물쭈물하다가 당신은 결국 표절 작가가 되어버릴 겁니다. 저는 요즘 일하기도 바쁜데요. 매일 쏟아지는 메일에 하나하나 회신하다 보면 더이상 쓸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입고, 인터뷰, 홍보, 출간…. 이런 제안 메일을 읽다 보면 어떤 간절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거기에 답을 해주는 행위도 일종의 픽션이 아닐까요. ‘선생님이 보내주신 제안에 대해 내부적으로 검토해보았으나’, 혹은 ‘만드시는 잡지를 매우 흥미롭게 읽어보았으나’. 결국 어떤 질문에 대한 활자적인 응답이란 점에서, 그리고 읽는 독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애쓰는 동시에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제가 하는 답신은 일종의 소설 쓰기 연습입니다. 우리는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계속 계속 걸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10센티는 족히 넘어 보이는 힐을 신고 왔는데 한번 같이 걷기 시작하면 두 시간은 족히 걸어대는 무례한 데이트 매너를 견딜 수 없었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크록스만 신고 온다. 크록스 샌들은 영혼이 충만한 사람을 위한 풋웨어다. 독립적이고 강인한 발을 가진 사람이 신는 풋웨어. 이미 자신의 정체성이 온전히 확립된 까닭에 애써 굽이 높거나 화려한 스타일로 치장할 필요가 없는 이를 위한 마스터피스. 힐을 신던 그와 크록스를 신은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풋웨어 하나로도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시대는 변하고, 우리는 시대 속에서 변한다. 그의 발도 그렇다. 만날 때마다 크록스를 신고 두 시간씩 걸어대는 통에 더이상 그는 힐을 신지 못하는 발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했다. 근데 이런 변화는 누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강요한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달라진 모습이 더 좋아진 것도 아니고 싫어진 것도 아니에요. 어쩌라는 건지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말하면 한대 맞을 것 같아 무언가 할 말을 찾으려 그의 발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는 쿠엔틴 타란티노는 아니다.) 그렇군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 된 거군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종의 사고(事故)에 가까워 보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태풍이 삼켜버린 해만의 바다를 계속 계속 계속 걸었다. 크록스 샌들을 신은 채로. 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무얼 부르는 거지? 어쩌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 이걸 뭐라 불러야 하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계속 계속 계속 걸었다. 언어를 잃어버린 고요한 짐승같이. 아무도 가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지하 노래방 계단 너머로 누군가 진심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촌스러운 간판의 술집 사장은 울고 있었다. 전시는 이미 끝나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이 똑같아. 누군가 흔들어 깨워 일어나니 서점에 온 손님이었다. 나는 원래부터 서점을 했던 사람처럼 잡지 몇권을 골라주고 자리에 앉아 다시 <홀리데이>를 읽으며 이게 나쁘지 않은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주 좋은 시작도 아니다. 이러한 꿈을 꾼 것은 자기 전에 <홀리데이>를 읽으며 어디든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지인들이 광주비엔날레를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 사연이 있다. 애틀랜타에 있었던 나도, 뉴욕에 있었던 나도, 서울에 있었던 나도, 제주에 있었던 나도 과거의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도 그 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고 지금은 맞았지만 그때는 달라진 것은 아마 저기에서 떠나온 나는 여기에 도착했고 또 여기서 떠날 나는 어딘가에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같다. 여행을 가는 것과 영화관에 가는 일, 잡지를 읽고 그걸 다시 떠올리는 일. 우리는 다 거기서 어디론가 떠나고 다시 돌아온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각각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같은 사람일 것이다.

[기획] 모순과 함께 놀기, ‘바비’가 만들어진 세계 속에 관객을 기입하는 방식

<바비>를 보면서 마주하게 되는 혼란스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혼란스러움은 영화에 내재한 복잡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바비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뒤섞이듯 영화의 혼란스러움은 관객의 혼란스러움과 뒤섞이고 불어난다. 실사로 구현한 핑크빛 바비 월드에 홀리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대체 이게 다 뭔가. 영화는 혼란스러운 관객을 다독이듯, 마치 주문과도 같은 동어반복을 들려준다. ‘바비는 바비다’, ‘켄은 켄이다’…. 이 문장은 결국 다음 문장에 가닿는다. ‘영화는 영화다.’ 정의를 억제하는 동어반복에도 질문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은 <바비>야말로 기존에 바비가 지닌 이미지를 조정하는, (재)정의하기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비는 바비다’라는 문장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먼저 바비는 단일한 캐릭터가 아닌 다양한 ‘바비들’을 포괄한다.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바비이고, 남성 캐릭터는 앨런을 제외하고는 모두 켄이다. 바비를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해해야 함을 납득하면서도, 바비를 말할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중심에 놓인 인물은 마고 로비가 연기하는 금발의 백인 바비다. 어떤 직업이나 상태 대신 ‘전형적’이라고 수식되는 그의 위치는 흡사 메인 보컬, 메인 댄서 등으로 구별된 멤버들 사이에서 비주얼만으로 중심에 선 걸 그룹 센터와 비슷하다. 영화는 바비의 세계가 지닌 평등함을 말로 강조하지만, 정작 묘사되는 것은 다양함에 가깝다. 균형을 맞추듯 바비에게 선사한 죽음과 우울, 셀룰라이트와 평발 같은 것도 세계를 넘나드는 바비의 모험을 가능하게 하기에 부정적인 요소만은 아니다. 그런데 두 세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바비의 존재를 향한 근본적인 의문이 빚어진다. 관객은 마고 로비가 연기하는 바비를 실사화된 인형 캐릭터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영화관에 입장한다. 하지만 영화는 배우를 인형처럼 보이게 하는 것에 때때로 무신경하다. 인형다움은 외모와 몸동작보다 이들이 사는 세계가 인형의 집처럼 보이는 세트라는 데서 온다. 바비를 인형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지표였던 까치발마저 마법을 풀듯 서둘러 평발로 해제해버린다. 바비 월드와 현실 세계의 구분은 배경만 갈아치운 2D식 평면 이동이고, 현실 세계에서 바비가 줄어든다거나 바비 월드에서 인간이 거대해지는 등의 크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바비와 켄은 그저 튀는 복장을 한 인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비 월드에 온 인간들 역시 위화감이 전혀 없다. 영화 속 바비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거나 수집하는 바비 인형에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다. 관객은 ‘이들은 인형을 연기하는 배우로 보이지만 인형이라고 인식해야 해’라는 당위와 ‘인형이라고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하는 듯한 영화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유명한 장면을 패러디한 <바비>의 오프닝 시퀀스에는 혼란을 덜기 위한 작은 힌트가 담겨 있다. 실사화된 바비는 진화를 추동하던 흑백 모노리스의 자리를 대체한 채 우뚝 서 있다. 실제보다 커다랗게 확대된 거대한 바비의 형상은 비현실적인 이미지지만, 이를 스크린 속 이미지라고 상상할 때 사실적인 것이 된다. 바비는 하나의 스펙터클로서의 영화를 체현하고,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은 축소된 관객이다. 아이들은 유인원이 뼈다귀를 부수었던 것처럼 방금까지 가지고 놀던 아기 인형을 마구 부수기 시작한다. 바비 인형의 등장으로 여자아이들은 아기 인형을 돌보는 엄마 역할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여성으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는 친절한 해설이 여기에 덧붙는다. 이를 통해 바비가 일종의 개념이나 관념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 됨을 배격하며 시작하는 듯했던 영화는 부서진 인형의 잔해를 그러모으듯, 모성을 다시 논의의 테이블에 올린다. 현실 세계에서 바비의 주인은 모녀 관계인 사샤(아리아나 그린블랫)와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다. 소녀의 성장으로 시효를 다한 인형은 중년의 우울을 달래는 대상으로 재발견된다. 인형과 주인의 관계를 다룬 몇몇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그 관계가 성장한 주인과 방치된 인형으로 고정되는 데 반해 <바비>에서 인형 놀이의 주인의 이동과 변화를 그리면서 우울함에 찌든 몸과 마음 역시 바비의 세계에 하나의 요소가 되어야 함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가 도달하려 한 지향점은 아니다. 영화는 바비의 수용이나 거부 끝에 각자 제자리를 찾는 이야기에서 멈추는 대신 예상치 못한 다른 문제의 발생과 또 다른 만남으로 나아간다. 이야기와 사건은 변화하고 부풀어지며 산재하고, 영화는 하나의 주제로 이를 통합하는 대신 혼란스러운 채로 내버려둔다. 영화학자 린다 윌리엄스는 여성 관객성을 논하며 ‘여성 관객은 모순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영화는 관객을 위해 하나의 분명한 모순점을 제공하는 대신,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모순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비>를 통해 ‘완벽하지 않아도 돼’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던 그레타 거윅의 바람은 스스로 모순을 허용하는 완벽하지 않은 세계를 통해 구현된다. 이상한 바비(케이트 매키넌)는 바비에게 현실 세계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인형의 소유자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한다. 현실 세계 속 바비의 소유자가 바비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설정 역시 논리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영화의 배경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인형의 세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와 같은 소통 방식이 영화가 관객에게, 관객이 영화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기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두 세계가 소통하는 방식에서 영화에 이입하고,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으로서의 나와 내가 지닌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오프닝 시퀀스의 여자아이들처럼 자신과 닮은 인형을 신나게 부수었던 지난날의 나는 언젠가의 내가 이를 후회하며 조각난 인형을 접붙인다 해도 용서할 것이다.

[기획] 머글, 덕후로부터 팬덤 플랫폼의 재미를 배우다

요즘 팬들에겐 왜 팬덤 플랫폼이 중요한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연유로 팬덤 플랫폼 서비스를 이용 중인지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에 ‘덕질’에 조예가 없는 머글 기자 A, 오래전부터 k팝 마니아로 살며 각종 팬덤 플랫폼을 섭렵 중인 덕후 기자 B의 대화를 재구성해 전한다. 회의가 끝난 <씨네21> 사무실. 기자 B가 기자 A에게 본인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회의 내용을 재확인한다. 그런데 갑자기 스마트폰에 울리는 알림. “지민이♥님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A 나 아무것도 못 봤어. 답장해 그냥. B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카리나야. A 응? 카리나? 설마 그 에스파 카리나? 카리나가 너한테 메시지를 보냈다고? B 그게 아니라. 너 위버스, 버블 이런 거 안 해봤어? A 몰라. 진짜 카리나가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너한테만? 채팅을? B 아 잠깐, 잠깐 진정해봐. 당연히 진짜 카리나고 이런 걸 팬덤 플랫폼이라고 불러. 채팅 말고도 뭐가 많아. 라이브 방송이나 무대 영상도 다 찾아볼 수 있고, 아티스트들이 올리는 게시글이나 자체 콘텐츠도 많아. 또 요즘엔 여기서 앨범이나 굿즈도 살 수 있고, 콘서트나 각종 오프라인 행사에 응모도 할 수 있어. A 그렇구나. 유튜브 보고 사진 모으는 정도가 내 덕질의 전부였는데. B 그런 덕질을 ‘사진첩 덕질’이라고 하지. 그런데 남들이 다 알고 보는 사진과 영상은 희소성이 떨어지잖아. 팬덤 플랫폼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위버스의 유료 디지털코드를 구입하면 DVD보다 좋은 화질로 비공개 영상을 어디서든 볼 수 있어. 집, 회사, 지하철 어디에서든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월드투어 영상을 반복 시청할 수 있단 매력… 거부할 수 없을 거야. 요즘엔 위버스 버전 앨범을 사면 위버스 앱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어. CD나 음악 스트리밍보다 음질이 좋아서 소리에 예민한 팬들에겐 축복이지. A 거기에서 볼 수 있는 사진, 영상, 게시글들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거랑 어떤 차이가 있는 거야? 어차피 다 비슷한 형식 아냐? B 자네, 그런 말은 위험하다고. 내가 이 사람과 조금 더 친밀해졌다는 감정, 바깥 사람들은 못 보는 내 연예인의 모습을 독과점한다는 기분이 좋은 거지. 그리고 아티스트의 사적인 취향을 공유할 수 있단 점도 중요해. 엑소의 디오는 버블에서 <엘리멘탈>을 찬양하면서 꼭 봐야 한다고 영업하고 다니는 바람에 <엘리멘탈>의 비공식 앰버서더로 불릴 정도거든. A 확실히 편한 분위기에서 얘기하나 보네. B 그치? 아티스트와 내 취향이 같고 얘기가 통할 때 더 친구 같다는 느낌이 들잖아.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라이브 방송을 볼 때였는데, 막 미국 시상식이 끝난 후에 켠 방송이어서 엄청난 얘기를 할 줄 알았거든? 팝스타를 봤다든가 하는. 그런데 <포켓몬스터> 시리즈 주인공이 바뀐다든지 하는 얘기만 한참 동안 하는 거 있지 ㅋㅋㅋ. 또 다른 날에는 <최애의 아이>가 재밌다느니, 다른 애니메이션이 재밌다느니 자기들끼리 토론회를 열더라고. 알다시피 나도 애니메이션 좋아하잖아. 정말 친구들이랑 얘기하는 느낌이 드는 거야. 한편으론 그렇게 마구마구 신나서 본인 관심사를 얘기하는 걸 보니까 아티스트에게도 이런 창구와 팬들의 존재가 의미 있다고 느껴지고… 참 좋았지. A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기분이 중요한 거구나. B 맞아. 정말 별일 아닌 이야기들 있잖아. 내가 어제 받은 채팅은 아티스트가 사랑니를 뺐는데 생각보다 안 아파서 갈치조림을 먹었다든가 하는 말이었다니까 ㅋㅋㅋ. 또 아티스트가 자율적으로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에선 공식 방송에서 못 보는 연습실, 숙소의 구석구석을 보는 맛이 있지. 최애 멤버 때문에 방송을 보던 중에 다른 멤버에게 예상치 못하게 입덕하거나 그룹 내의 몰랐던 관계성을 알게 되는 경우도 많아. 결국은 아티스트들과 내 관계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지 않으니까 그들과의 거리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게 핵심이야. A 그런데 팬이면, 같이 봐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행복하지 않나? B 틀린 얘기는 아닌데… 양가적인 감정이지. 모두가 내 연예인을 좋아하면야 당연히 좋지 . 우리가 먼저 나서서 대중이나 다른 팬에게 최애를 영업하기도 하고. 그런데 한편으론 너무 유명해져서 모든 사람이 내 최애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는 것도 은근히 마음이 불편하거든 -_-; 또 애정 없이 콘텐츠를 보고 사실을 왜곡해서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팬들만 가입하는 유료 콘텐츠를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야. 단 4500원으로 최애의 굿나이트 인사를 받으며 일상을 치유받는 느낌…. 꼭 느껴보길^^ A 설득되는데. 혹시 위버스, 버블 말고 다른 플랫폼도 있어? B 포토카드(손바닥 크기의 사진 굿즈)가 뭔지는 알지? 이 포토카드가 앨범이나 행사에서 공식 굿즈로 지급되기도 하고, 팬덤 사이에선 일종의 유사 화폐처럼 거래되거든. 그래서 전세계의 포토카드를 취급하는 거래 플랫폼인 ‘포카마켓’이 성행 중이기도 해. 원래는 온라인 중고 시장에서 거래가 이뤄졌는데 포카 교환은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정말 많이 한단 말이야. 여러 개를 살 경제력이 안되니까. 나도 한번 포카 양도하러 가봤는데 초등학생 친구들이 손잡고 오더라고 ㅋㅋ. 아무튼 10대 팬들의 안전한 덕질을 위해서라도 이런 플랫폼이 필요하지. A 유사 화폐라니 너무 웃기네 ㅋㅋㅋ. 네 최애는 누군데? 어디에서 누굴 주로 봐? B 지금 생각나는 건 방탄소년단, 에스파, 조유리, 스테이씨,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뉴진스, 르세라핌, 트리플에스, 세븐틴, 박보영, 신예은…. A 아 그래… 그런데 배우들도 이런 플랫폼에 있어? B 당연하지. 자고 일어나면 200개씩 쌓여 있는 신예은 배우의 채팅을 정주행하는 게 요즘 내 일과의 시작이라고. 매일매일 식단이 뭔지, 밤에 초콜릿을 몇개 먹었는지까지 알려준다니까. 연예인이 마냥 먼 존재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라는 걸 느낄 때 오히려 그들이 더 좋아지는 거지. A 나 샤이니 좋아하거든? 근데 방금 버블 깔아봤더니 샤이니가 안 보여 ㅠㅠ. B 아하, 버블은 소속사, 직업별로 앱이 따로 있어서 SM엔터테인먼트 아티스트는 ‘리슨’을 깔아야 해. 아직 가르쳐줄 게 산더미네. 기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