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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긴 연휴, 타인의 취향이 궁금한 당신께, <씨네21> 고정 필자들의 LIST ①

“배우나 감독같이 ‘셀럽’들만 하는 거 아니었나요?” 어느새 소소한 인기 코너로 자리 잡은 ‘LIST’ 지면의 손님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자 몇몇 필자에게서 반가움과 의구심이 뒤섞인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매주 프런트 라인(비평), 디스토피아로부터(칼럼), 에세이 지면을 책임지는 8인의 고정 필자들이 <씨네21>의 셀러브리티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요즘 그들의 관심 영역을 사로잡고 있는 5개의 문화·예술 목록을 물었다. 복길 대중문화평론가 /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 유튜브에 젊은 심신이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 약간 지친 얼굴로 이 노래를 부르는 무대가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쓸쓸하고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했다. 올해 가장 많이 들은 노래다. 에세이스트 건강 문제로 요양을 하고 있어서 사람을 못 만난다. 그래서 에세이를 많이 읽게 됐는데 고명재, 이반지하, 비비언 고닉의 글이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이담의 웹툰 <똑 닮은 딸> 이 웹툰을 보고 난 뒤로는 어떤 막장 플롯을 접하더라도 머리와 가슴이 고요하기만 하다. 극을 뒤흔드는 반전보다, 인물에 대한 거리감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작가의 집중력이 더 무섭다. 김옥영의 책 <다큐의 기술> 이 책을 읽고 나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 더 재밌어졌다. 연출자 입장에서 쓴 글인데 다큐는 시청에도 연출자의 관점이 작용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산 부산은 레이어가 복잡한 도시다. 매년 수십번씩 방문해도 늘 새롭다. 요즘엔 범일동과 부산항에 자주 가는데 그냥 길 위에 서 있기만 해도 좋다. 김소영 작가 <어린이라는 세계> / 디스토피아로부터 너태샤 리온의 드라마 <포커 페이스> 매회 맹렬한 욕망이 생긴다. 날렵한 단편소설을 읽고 싶다는 것과, 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것. 그리고 풀어헤칠 수 있게 머리를 기르고 싶다는 것. 송미경, 장선환의 그림책 <나는 흐른다> 잡을 수 없지만 마음껏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늘, 바람, 햇빛, 반짝이는 물결과 내 안의 많은 ‘나’들. 그림과 글이 서로의 결을 맞추어 흐르는 그림책. 조예은의 소설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사랑스럽고 잔혹하고 무섭고 귀여운 호러 소설. 조예은의 소설은 시간 계산을 잘해서 읽기 시작해야 한다. 끼니를 반납하고 읽게 되니까. 루시의 K팝 <아지랑이> 친한 중학생의 추천으로 알게 된 밴드. 음악이란 이렇게 몸을 채우는 것이었지, 나도 열네살 무렵에 알았지. 그 중학생의 세계에 지금 어떤 선율이 있는지 짐작해본다. 황인찬의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나를 그림 속으로 불러들였다가 문득 액자 밖으로 쫓아낸다. 예를 들면 <봄의 반>. 사랑이란 너무 비참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느린 사랑>. 김병규 영화평론가 / 프런트라인 지하철역 심심하면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지하철역에서 내린다. 지난 주말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일정을 마치고 오는 길에 대곡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오면 보이는 독특한 구조물을 봤다. 살면서 또 대곡역에 올 일이 있을까?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승부> 스스로 바둑을 뒀던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창피하지만, 바둑 두는 사람들의 병적인 무던함과 예민함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이 다큐는 ‘바둑 두는 사람’이라는 종족에 관한 짧은 보고서 같다. 스승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이창호 9단과 16살 제자를 상대로 승기를 잡고 슬쩍 웃는 조훈현 9단의 얼굴을 떠올린다. 학교 급식 일주일에 이틀, 집 근처 고등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중 하루는 급식을 먹는다. 그럴 때면 식단을 짜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끔은 정해진 식단과 다른 음식을 만들고 싶진 않을까? 식단의 만족도는 높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도 몰래 와서 먹고 싶을 정도로. 폴 오스터의 소설 <뉴욕 3부작> 마음에 남는 마지막 페이지. “나는 공책에서 종잇장을 하나씩 하나씩 찢어 손으로 박박 구긴 다음 플랫폼 옆에 있는 쓰레기통 속으로 떨어뜨렸다. 내가 마지막 장까지 다 찢어냈을 때는 기차가 역에서 막 출발하고 있었다.” 호세 루이스 게린의 영화 <실비아의 도시에서> 사람이 걸어가는 속도가 있다. 그것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트램(tram)이 이동한다. 서로 다른 두 속도를 지나치며 영화가 움직인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 프런트 라인 팸플릿들 과거의 기록을 들춰보곤 한다. 최근 연극 동아리 팸플릿에 실린 연출 노트를 읽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기분이 더러웠다고 쓰다니…. 무모했던 과거와 소심해진 현재가 동시에 부끄럽다. 윤경희의 책 <분더카머> 끝에 도달한 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찬찬히 읽는다. 새로운 규칙의 보물찾기에 투입된 듯 조바심이 인다. 지성과 감성은 물론 몸을 자극하고야 만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백인 추장> 아빠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셨어요? 뒤늦게 그 영화를 찾아보았다. 결혼식을 앞둔 신부가 갑자기 사라지고 모험은 시작된다. 이 영화를 좋아한 사람의 마음을 오래 상상하고 오해한다. 연애 예능 <하트시그널> 시즌4 시들해진 먹방을 대신할 혼밥 메이트로 호기심에 클릭했다가 길티 플레저가 되어버렸다. 어디든 자꾸만 가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다가 귀차니즘에 굴복하고 만다. 허밍 검색 기억 속에 흐릿해지던 멜로디가 덕분에 선명한 음조와 가사로 살아났다. 바시아의 와 클라우디오 발리오니의 가 허밍으로 발굴한 노래들이다.

[인터뷰] 1970년대의 오마주이자 2023년 영화인을 향한 응원가, ‘거미집’ 김지운 감독

- 이번 <거미집>에 대한 언론 반응을 살펴보았는지. 대체로 재밌다는 평이라 다행이다. 세세하게 살펴보니 “나는 재미있었는데 일반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다”는 평이 다수였다. 생각해보면 <조용한 가족> 때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웃음의 재료를 사방팔방 뿌려놨는데 그 방식이 생소해서 어떻게 조합될지 낯설다고 해야 할까. 이게 지금 웃어도 되는 건가, 지금 무서워야 하는 건가 헷갈리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한번 터지기 시작하면 무장해제가 되는 순간이 온다. <조용한 가족> 때는 송강호 배우의 “저 학생 아닌데요?”라는 대사가 그랬던 것 같다. <거미집>은 한명의 감독이 마음속 불씨를 꺼내고 활활 태워 모든 걸 전소시키는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언젠가 어떤 수업에서 연출의 과정을 점화, 착화, 발화라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이번 영화는 그 마음가짐을 충실히 구현했다. 점화 - 얼어붙은 시대와 멈출 수 없는 열정 - <거미집>에서 웃음의 발화점은 어디인가. 여기서부터 터지겠구나 생각한 곳은 여러 지점이었는데 시사 후 반응을 보니 미도(전여빈)와 유림(정수정)이 세트 뒤 통로에서 한판 붙을 때를 말하는 분들이 많았다. 어느 정도 인물관계나 상황이 쌓이고 공감이 되면서 웃음이 터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적절한 타이밍이다. 솔직히 나는 김열, 아니 송강호가 깨어나는 거의 첫 장면부터 웃기다고 생각했다. 나도 감독 김열처럼 영화 촬영을 마치고 악몽을 자주 꾼다. 현장의 답답했던 상황이 꿈속에서 무한 반복되기도 하고 “아, 이거 찍었어야 하는데 안 찍었네!” 하면서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웃음) 개봉 때가 되면 특히 심해진다. 개봉날인데 극장에 셔터가 안 열려 있어서 발을 동동 구르다 꿈이라는 걸 깨닫고 안심한 적도 있다. 그렇게 불면과 불안의 밤을 오가다 보니 꿈에서 깨어나는 김열이 눈을 뜨는 첫 장면부터 이미 밀착되어 터졌다. 나는 그 절박함과 불안함을 잘 아니까. - 칸영화제 버전에서 편집을 추가로 꽤 했다고 들었다. 많진 않고 흐름을 좀 다듬었다. 칸 버전보다 좀더 흐름에 박차를 가하고 빠르게 가야겠다 싶어 사무실에서 전체회의를 하는 장면을 걷어냈다. 감독으로서 늘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공간집착형 스타일이라는 거다. 정신을 차려 보면 공간 구석구석을 다 쓰려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냐 공간의 예술이냐는 평행선을 달리는 문제지만 내가 공간에 애정을 쏟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다보면 종종 전체적인 흐름이 느려질 때가 있다. 처음 <거미집> 대본 리딩을 할 때부터 배우들에게 말했던 건 이 영화가 음악처럼 흘러가면 좋겠다는 거였다. 대사를 주고받는 리듬이 한곡의 음악처럼 느껴지길 바랐다. 우선순위는 리듬감이었고 스스로 특정 공간에 매료될 때 내가 세운 대명제를 잊지 않으려 애썼다. - 말한 대로 소동극처럼 우당탕탕 흘러갈 것 같은 컨셉의 영화지만 사실 전반부와 후반부가 분리되어 있다. 전반부가 감독 김열의 불안과 고뇌에 집중하며 내레이션을 자주 사용하는 반면 후반부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같은 영화처럼 촬영이라는 상황에 정신없이 휩쓸려간다. 전반부가 불안 속에서도 열망을 숨기지 못하는 김열 감독의 시점이라면 후반부는 확신을 얻은 감독이 모든 걸 불사르는 전개다. 그리고 불은 혼자 붙지 않는다. <거미집>의 장르를 구태여 설명하자면 앙상블 코미디다. 촬영장 곳곳을 다양하게 보여주며 세트가 바뀌지만 큰 틀에선 신성필림 스튜디오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인물마다, 장면마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들려주거나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 종종 다른 속도로 전개되지만 전체 흐름하에서 어느 한 장면에 치우치지 않고 나름 잘 배분했다고 생각한다. - 1970년 영화 촬영 현장을 무대로 삼았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신성필림 사람들이 다 벌벌 떠는 문화공보부 국장의 존재로 상징되는 이른바 검열의 시대인데. 당시의 엄혹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 시절에 존재했던 영화적 활기를 되새겨보고 싶었다. 70년대를 고른 건 내가 그 시절 문화를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70년대 대중문화 속에서 자랐다. 태어나서 가요, 영화 등을 처음 접했던 게 70년대다. 초등학생 무렵 영화를 자주 봤는데 아버지가 영화 포스터를 담벼락에 붙이는 걸 허락해주고 초대권을 받으면 그걸로 온갖 영화를 봤었다. 예전 MBC 다큐멘터리 중에 미국 할리우드영화와 팝송을 총망라해서 소개한 <멋지고 힘나는 70년대>라는 다큐멘터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내게 70년대는 그런 콘텐츠의 파노라마, 그리고 돌아가고픈 노스탤지어로 기억된다. - 동시에 엄청난 검열과 금지의 시대였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맞다. 그 간극이 이 영화를 찍게 된 계기다. 70년대는 유신정권의 시대였고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한 암흑기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를 되돌아보면서 두 시절 사이 기시감을 느낀다. 60년대는 한해 200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되고 1인당 영화관람 편수도 높았던 한국영화 르네상스였다. 그러다가 70년대의 겨울이 왔다. 감독이 된 지 햇수로 25년째인데 단편 혹은 광고라도 아무것도 찍지 않았던 해는 없다. 팬데믹 이후 1년간 모든 작업이 중지되면서 혼자 과거를 되돌아볼 시간을 강제로 가지게 됐다. 그 기나긴 겨울밤이 <거미집>의 바탕이 됐다. 팬데믹이 지나도 봄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절을 어떻게 돌파해나갈 수 있을까. 영화감독 김지운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을 건네고 싶었다. 지지 마. 한번 더 힘내봐. - 어떤 면에서는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한 부분이 있다.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감독이라거나. (웃음) 아니 내가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닌데, 전체 흐름을 위해 시범을 보여준 정도지. (웃음) 자전적이라면 사연이라기보다는 창작의 고통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을 이어가는 정도일 거다. 현장에서 느꼈던 크고 작은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70년대를 향한 오마주인 동시에 2020년대 영화 현장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을 향한 응원가다. 어떤 감정들을 직접 대사로 표현하기도 하고 에둘러 상황에 투영하기도 했다. - 김열은 왜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그 장면을 다시 찍어야 했던 걸까. 김열에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어쩌다 괜찮은 데뷔작을 찍은 감독의 자기 증명일 거다. 이것만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될 것 같다는 게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치 않다. 전하고 싶은 만큼 절박하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느냐는 거다. 소설가가 단어 하나에 며칠을 고뇌하는 것처럼, 대중은 이해하지 못해도 평론가에게 꼭 필요한 분석의 미세한 지점이 있는 것처럼, 감독에게는 이 장면이 아니면 안된다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그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수십번을 다시 찍고 오랜 불면의 밤을 보내는 거다. 정말 잔인한 건 그렇게 꼭 필요했던 장면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때부턴 이 장면이 맞나? 진짜인가? 하는 믿음의 시험이 시작된다. 창작은 그렇게 끊임없이 어떤 욕망에 몸을 불태우는 일이다. 그렇게 얼어붙은 시대에 여전히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있는 영화인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한번 웃어넘기고 힘내자고, 괜찮다고, 잘했다고, 앞으로도 할 수 있다고 등을 두드려주고 싶었다. 아무도 두드려주지 않아서 일단 내 등부터 셀프로 두드리고. (웃음) 착화 - 감독 김지운의 송강호 사용법 - 고뇌, 괴로움 같은 의미를 말했지만 영화는 전반적으로 귀엽다. 국밥집에서 김열 감독은 영화인들의 비판에 의기소침해 있다가 현장에서 누가 조금만 칭찬해줘도 어깨를 들썩거리며 기뻐한다. 그 솔직하고 가벼운 모습에 홀려 끝까지 쫓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감독은 제일 높은 자리에서 현장을 바라본다. 지위가 높다는 게 아니라 현장을 조망하는 조감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그 부담감에 자연히 몸이 굳거나 딱딱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그런 욕망을 아이처럼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호세(오정세)가 유림을 챙기며 너무 가혹하다고 투덜거릴 때 김열이 “이게 나만 좋자고 이런 거야?”라고 하는데, 툭 하고 던져서 웃기게 하지만 실은 저 밑바닥에서 우러나온 솔직한 고백인 거다. 예전 <달콤한 인생> 촬영 때 이병헌 배우가 땅에 묻혔다 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물을 막 뿌려야 하는 상황에서 다들 배우가 너무 힘들어하니 조심조심 뿌리는 거다. 내가 과감하게 막 정면에 물을 뿌렸더니 나중에 이병헌 배우가 정색하며 왜 이러시냐고 한 적이 있다. 너무 이해가 갔지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만 좋자고 이래?” (웃음) - 허술하고 귀여운 매력의 상당 부분이 김열 감독으로 변신한 배우 송강호에게서 흘러나온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정확히는 김지운 감독이 바라보는 송강호는 언제나 인간적인 허술함과 웃음으로 표현된다. 송강호 하면 생각하는 건 생활형 연기, 자연스러움 같은 거다. 동시에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 정서를 장악하는 힘을 갖췄다. 쥐락펴락 호흡 조절이 자유자재다. 그 서늘한 연기의 바탕에는 결국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들의 송강호 사용법에 대해서 누가 써놓은 짤을 본 적이 있다. 봉준호는 송강호를 지질하게 그리고, 박찬욱은 송강호를 멋지고 근사하게 그리고 싶어 하고, 김지운은 자기가 웃으려고 송강호를 찍는다고. (웃음) 어떤 면에서는 일리 있는 분석이다. 사실 송강호 배우에게 특정 연기를 주문한 적이 거의 없다. 전체적인 상황과 뉘앙스 정도만 공유하고 본인의 해석으로 연기한다. 그때 카메라 앞에서 송강호가 펼치는 템포와 타이밍은 거의 동물적이다. 나는 그 상황의 첫 번째 관객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다. - 그러고 보면 감독님은 송강호 배우를 찍을 때 클로즈업보다는 롱숏을 즐겨 찍는 것 같다. 전체적인 몸의 실루엣을 오래 담고 싶어 한달까. 이번에도 문공부 부장을 피해 세트 뒤편으로 전력 질주하는 김열의 모습이 맛깔나는 웃음을 자아낸다. 웃음만큼 섬세한 뉘앙스가 필요한 것도 없다. 정확한 타이밍에 웃으라고 요구하는 게 일반적인 코미디의 방식이라면 나는 그게 살짝 비틀려 있는 타이밍을 좋아한다. 웃긴 장면에서 조금 어긋나 있거나 살짝 떨어져 있는 박자가 주는, 한 박자 뒤늦게 찾아오는 메아리 같은 웃음이랄까. 그런 호흡을 기가 막히게 표현하는 게 송강호다. 감독으로서 내가 할 일은 자연스럽게 그 상황이 만들어지도록 적절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거다. 여기서 무대는 단지 공간이 아니라 한 타이밍 길게 찍는 호흡, 그러니까 시간에 대한 거다. 여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목적과 필요, 딱 보여주고 싶은 대상에서 살짝 초점이 벗어나 있는 순간. 때로 진실은 거기에 담기는 거 같다. 비단 송강호 배우뿐만이 아니다. 이번 영화에선 모든 배우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그런 호흡을 만들어주고자 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말했던 ‘여기 지금 무언가 일어난’ 순간들이라고 할까. 그래서 영화 현장을 무대로 택했다. 대상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찍는 과정으로서의 영화.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을 누락된 순간들을 함께 보는 영화. 그런 의미에서 끊어지지 않는 플랑 세캉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 김열 감독이 신상호 감독(정우성)의 환영을 보는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의 톤이 바뀐다. 달리 표현하면 그 장면이 김열의 내면에 집중하던 전반부의 실질적인 하이라이트다. 이틀만 더 찍으면 걸작이 된다는 김열의 말은 사실 공허하다. 아무 근거도 없고, 들이미는 시나리오는 더 황당하다. 심지어 자기도 확신이 없다. 그래서 백 회장(장영남)이 들이닥쳐 촬영이 중지됐을 때 김열도 주저앉아버린다. 김열에겐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겐 확실한 절박함이 있다. 이대로 삼류 감독이 될 순 없다는 절박함. 그 감정이 <거미집>의 출발이었고 모든 감독들의 안타까운 욕망일 것이다. 거기서 제일 희망적인 말을 건네고 싶었다. ”자신을 믿어.” 어쩌면 유일한 답이기도 하다. 많은 조언과 도움이 있지만 결국 현장에서 결정, 판단, 책임까지 오로지 감독의 몫이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 한 줄기를 찾아 헤매는 고독에 익숙해져야 한다.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 다만 이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라기보다는 끊임없는 불안을 전제로 한 자기 확인에 가깝다. - 감독님이 지새운 무수한 불안의 밤은 조금 밝아졌나. 지금도 불안하다. (웃음)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하다. 예전에는 현장에서 엄청 예민한 상태였다. 예민함을 즐겼다고 해야 할까. 날이 바짝 선 몰입의 감각이 만족스러워 스스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은 편안해졌다.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물론 숱한 시행착오의 결과인데, 실패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하나 있다. 어차피 감독의 일이라는 게 선택의 연속이라면 설사 틀리더라도 멋지고 근사한 선택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 신상호 감독은 “꺼내서 다 태워버려”라는 말과 함께 불에 타 사라진다. 그때 정우성 배우의 하이톤의 목소리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시키지 않았다. 알아서 했다. (웃음)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됐다. 신상호 감독 역을 정우성 배우에게 부탁한 건 근사하기 때문이다. 60, 70년대 영화인들은 하나같이 멋쟁이들이다. 근사한 게 좋다. 극 중 신상호 감독은 문자 그대로 다 태워버리고 사라진 분이니까 그 환희의 음악을 따라가다 보니 내면의 음악이 삐져나온 거 아닐까. 웃기고 슬프고 애처롭고 숭고한 황홀경의 순간이다. 어떤 면에서는 정우성 배우가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준 건데, 나는 이 영화를 음악처럼 전달하고 싶었다. 내면에 숨겨진 욕망, 각자의 리듬이 충돌하고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앙상블 말이다. 즉흥적이지만 조화로운 재즈의 잼(Jam)이라고 해도 좋겠다. 마지막 플랑 세캉스 장면에 재즈 음악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다. 발화 - 오인된 것이 우리를 불태울 때까지 - 김열은 집에 불이 붙는 장면을 플랑 세캉스로 찍고 싶어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장면이 흑백영화 ‘거미집’에 꼭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김열 감독의 ‘거미집’은 클로즈업과 역동적인 앵글, 컷의 연결이 중요한 영화인데 말이다. ‘김열은 왜 플랑 세캉스를 고집하는가.’ <거미집>에선 중요한 질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열의 ‘거미집’에 플랑 세캉스는 필수가 아니다. 김열은 걸작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배우나 제작자가 플랑 세캉스가 뭔데, 라고 되물을 정도로 이건 익숙한 연출이 아니다.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 있어 보이는, 예술적인 무언가를 찍어야 한다는 게 김열의 강박이다. 그 욕망의 1차원적인 집착이 플랑 세캉스로 표출된다. 하지만 김지운의 <거미집>에서는 플랑 세캉스 장면이 꼭 필요했다. 말했다시피 내가 찍고 싶었던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대상이 아니라 여백이었다. 카메라 뒤편의 공기와 분위기, 동선의 연결과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다. 플랑 세캉스의 연결은 그런 바깥의 에너지와 과정을 보여주는 핵심이다. 물론 김열의 집착은 오인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열의 욕망은 진짜다. 오인된 행위를 통해 거꾸로 김열의 욕망과 절박함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 나도 오인한 게 하나 있다. 이만희 감독에 대한 애정을 자주 드러낸 만큼 김지운 감독님이 언젠가 한국영화의 과거를 찍는다면 그 대상은 이만희 감독일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었다. 그 시절의 모든 감독들을 애정하고 존경한다. 그중 이만희 감독은 다양한 장르를 완성도 높은 결과물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내 관심사와 일치하는, 나와 비슷한 유형의 연출자라고 감히 생각해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스릴러 <마의 계단>(1964)을 연출한 분이 <쇠사슬을 끊어라>(1971) 같은 만주 웨스턴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떤 의미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이미 그분을 향한 헌사를 마친 셈이다. 의식한 건 아니지만 다양한 장르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빼어난 미장센뿐 아니라 어떤 영화, 어떤 장면에서도 품격이 있다. - 공간과 미장센은 감독님 영화에서도 핵심이다. 언제나 화면을 아름답고 예쁘게 찍는다. 공간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다. 마음에 드는 장소라면 구석구석 담아내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그래서인지 평론가들에게 자주 듣는 칭찬이 미장센 부분인데, 어떨 땐 그 표현이 전혀 칭찬처럼 다가오지 않을 때도 있다. 미장센은 단지 장면을 예쁘게 찍었다, 스타일과 표현이 도드라진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되어야 한다. 미장센에서 미술적인 요소는 일부에 불과하다. 진정 중요한 건 장면의 필요다. 이 순간에 왜 저런 표현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말이다. 예전에 이명세 감독님이 장면이 안 풀릴 때 자문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장면을 마틴 스코세이지가 찍었다면 어떻게 할까. 구로사와 아키라라면? 누구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이 있다. 하지만 그건 답습이 아니다. 그 질문이 계속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결국 마주하는 건 자기 자신이다. 내면의 불꽃. 김열이 마주했던 것도 그런 불씨다. - 흑백영화 ‘거미집’에서 민자(임수정)와 유림이 다투는 2층 공간이 무척 근사하다. 거미들의 집이니까 거미 눈알처럼 작은 원형의 거울을 빽빽하게 배치했다. 욕망을 드러내는 공간인 만큼 그로테스크한 배치와 녹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색감을 배치했다. 어차피 흑백인데 왜 원색을 썼냐고 한다면 공간성이란 그런 애착과 디테일, 태도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는데, 주인공의 치마 속 원단을 최고급으로 해달라는 요청에 보이지 않는 걸 왜 그렇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이 배우가 최고를 입고 연기해야 진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진짜는 그렇게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 엔딩 장면에서 김열은 자신이 만든 영화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시사회장 관객 모두가 박수와 칭찬을 보내고 있지만 그의 표정은 밝은 기색이 없다. 그것도 일종의 여백이다. 각자 다른 걸 발견했으면 좋겠다. 다만 내 의도는 두 가지 정도 있었는데, 하나는 주변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거였다. 아까 말했듯이 이만하면 잘 만들었다, 고생했다, 괜찮다는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 또 하나는 내가 김열의 입장이라면 무슨 생각을 할까였는데, 나는 일종의 주마등을 볼 거 같다. 스크린에 상영되는 화면, 그러니까 결과물이 아니라 이걸 찍기까지의 과정과 지나온 시간, 쏟아냈던 감정들을 마주하는 거다. 카메라 뒤에 존재했던 시간들이라고 해도 좋겠다. <거미집>은 큰 틀에서는 그 뒤편의 경험들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고자 했던 영화다. 모든 걸 다 태운 뒤에 남는 하얀 재와 같은 시간을 마주할 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너를 믿어, 무엇이든 해봐라. 요즘 말로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나? 자신 안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을 함께하셨으면 좋겠다. 물론 재미있게. 재미와 의미는 언제나 한몸이니까.

[이주현 편집장] 뉴 제너레이션

9월23일부터 시작된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10월 8일 폐막을 앞두고 있다. 길었던 추석 연휴도 아시안게임 덕분에 짧게만 느껴졌다. 올해 아시안게임이 재밌었던 건 황선우, 안세영, 신유빈 등 여러 종목에서 황금세대의 활약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대회 초반 치러진 수영 종목. 한국은 수영에서 메달 22개를 따며 아시안게임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금·은·동메달 각각 2개씩 총 6개의 메달을 목에 건 황선우를 비롯해 남자 수영 장거리의 샛별로 떠오른 3관왕의 김우민, 여자 수영 대표팀의 든든한 주장 김서영과 십대의 이은지 등 고른 종목에서 다양한 선수들이 최고의 기록을 써내려갔다. 그야말로 한국 수영의 르네상스다. 여자 탁구 복식에선 신유빈과 전지희 선수가 환상의 호흡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두 선수는 우승 직후 귀여운 큐피드의 화살 세리머니를 선보여 국민들을 절로 미소짓게 만들었다. 이밖에도 남자 높이뛰기 국가대표인 ‘스마일 점퍼’ 우상혁은 최선을 다해 도약한 뒤 은메달을 목에 걸고 우승자 바르심 선수와 훈훈하게 인사를 나누었고, 여자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고 개인전 경기를 치르고 있는 여자 배드민턴 세계 랭킹 1위 안세영은 경기장 안팎에서 늘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수들이 웃으니 응원하는 사람도 덩달아 웃게 된다. “바르심 선수와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내 실력이 느는 것 같아 흥미롭다. 이렇게 재미있는 높이뛰기를 할 수있어서 너무 행복하다.”(우상혁) 젊은 스포츠 선수들은 솔직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결과만큼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며, 활짝 웃고 맘껏 기뻐한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지켜보자니 내년 파리올림픽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한편 추석 황금연휴를 앞두고 개봉한 한국영화의 성적은 부진했다. 9월27일 나란히 개봉한 세편의 한국영화 중 100만 관객을 넘긴 건 강동원 주연의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 유일하다(1천만이 아니고 100만이다). 10월5일 기준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153만명, 하정우와 임시완 주연의 <1947 보스톤>은 74만명, 송강호 주연,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은 26만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엿새 간의 추석 대목 장사에 사실상 실패했다. 요즘의 한국영화가 관객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관객의 취향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대중의 콘텐츠 소비 패턴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시안게임을 보면서는 웃었는데 추석 연휴 박스오피스를 보면서는 웃을 수가 없었다. 물론 흥행에 실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의미 있는 실패인가 그렇지 않은가다. 운동선수가 장비 탓 하고 심판 탓 하고 관중 탓 하면 안되는 것처럼, 흥행 참패에 대한 반성도 내부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김지운, 류승완 등이 등장해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일구었던 때가 20여년 전이니,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때도 됐고 새로운 판짜기가 필요한 시점도 됐다. 비관적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땐, 일단 패기 있게 주문이라도 외워볼 수밖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김세인의 데구루루] 너그럽게 열린 극장 문 앞에서

이번 출장은 유독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커피를 들이부어도 금세 의식이 넘어가 꾸벅꾸벅대다가 그대로 꼬꾸라질 것만 같았다. 걷고 있는 내 발에 닿는 것이 땅인지 매트리스인지 모를 감각으로 무대 인사를 하러 시네테카에 갔다. 행사까지 시간이 떠서 다른 팀원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고 나는 혼자 극장 앞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강렬한 햇볕에 눈을 감아도 여전히 눈이 부셨다. 선선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자꾸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졸다 보니 시간이 다 되었다. 조용한 관객들은 이 선선한 바람처럼 극장에 흘러들어갔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에 분명 아주 적은 관객이 들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적은 관객이지만 깊은 인사를 나누자 마음을 다잡았다. 프로그래머와도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상영관에 들어섰는데 이런. 단 한명의 관객도 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는 극장에 당황스러운 기시감이 들었다. 아주 오래도록 꾸었던 악몽의 실물을 이렇게 마주하다니. 에이, 아닐 거야. 애석하게도 시계는 정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거리 비행의 수고에 대한 억울함보다 애써 상영 기회를 준 극장측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하하 이거 꿈인가요? 현실이 맞나요? 넋 나간 너스레를 떨고 있자 코디네이터님께서 나를 안심시켰다. 이곳 멕시코는 원래 이렇다고.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고. 상영관 밖으로 나가자 정말 다행스럽게도 조금씩 관객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그렇게 상영시간 30분 뒤에야 영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약속과 시간에 대한 개념이 전무하여 학창 시절부터 ‘자.영’, 즉 자유로운 영혼이라 불리던 친언니 김세영에게 멕시코로의 이주를 기필코 추천하리라 다짐했다. 멕시코시티에서 몬테레이로 이동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이미 멕시코 사람들의 성정을 파악했기에 다섯시 상영을 여덟시 상영으로 착각한 프로그램팀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상영 전 감독과 영화를 소개하기로 한 프로그래머가 행사를 깜빡 잊고 극장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스크린의 양쪽 벽면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줄지어 배치되어 있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는 후반부 암전 장면이 있기에 반드시 빛이 차단된 공간에서 관람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앞뒤 극장 문을 열고 상영이 진행되어 외부와 내부의 사운드가 섞인 상태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나에게 아주 웃기고 즐겁고 이상하게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 또한 어느 순간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의 사운드와 벌레 소리를 들으며 복도에서 보통의 말소리로 주재원 직원분과 멕시코 생활에 대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상영하는 내내 활짝 열린 극장 문을 통해 영화가 극장 밖으로, 일상이 극장 안으로 흐르고 있었다. 지금 이곳 관객들의 기억 속에 이 영화는 색색으로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 극장 밖의 한국말들, 풀벌레 소리와 함께 남겠지.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까지도 모든 것이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탄하지 않음이 오히려 너그러움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너그러운 관람의 상태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볼 때도 영화를 제공할 때도 관객이 영화와 청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에 굉장히 집착하게 되었다. 많은 영화감독들이 그렇겠지만 영화제에서 영화를 상영하면서 반드시 사운드와 스크린 기술 체크를 해왔다. 소수의 스크린을 조정하면 끝인 영화제 때는 얼추 기준점을 맞출 수 있었지만 영화가 개봉하면서는 다른 차원으로 들어섰다. 전국의 수많은 극장에 맞춰 모든 사운드와 영화의 색을 조정할 수 없기 때문에 발만 동동 구르며 스트레스만 잔뜩 받곤 했다. 멕시코에서 이렇게 상영 내내 열린 극장 문을 바라보다 보니 뭘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았나 싶었다. 초등학생 때는 찜질방 영화관에서 영화를 자주 봤다. 당시 찜질방은 전국적인 붐이었고 나와 친구들은 찜질방을 주 놀이터로 삼았다. 심지어 찜질방 노래자랑에 나가서 상으로 크레파스도 받았었다. 찜질방 내의 여러 코스 중 우리가 선호한 것은 찜질보다는 다른 것들이었다. 바로 찜질방 책장에서 19세 딱지가 붙은 야한 만화책 몰래 꺼내 보기와 찜질방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찜질방 영화관에서 틀어주는 영화들은 <아이덴티티>, <큐브> 시리즈, <발렌타인>, <드라큐라2>, <데드캠프>, <반헬싱> 등 왜인지 몰라도 공포호러 장르의 B급 무비들이 대다수였다. 찜질 후 달궈진 몸으로 매트를 질질 끌고 영화관에 들어가 식혜와 계란을 먹으며 영화를 보곤 했는데 급속도로 싸늘해지는 몸의 온도가 영화의 공포를 더욱 효과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말이 영화관이지 상영 환경은 말이 되지 않았다. 왔다 갔다 벌컥벌컥 열리던 문은 종종 그대로 열린 상태가 되기도 했는데 덕분에 홀의 텔레비전 소리와 괴성들이 섞여 들어왔다. 코 고는 사람, 떠드는 사람, 큰 소리로 지인을 찾는 사람 등 영화관 내부의 소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나는 영화를 보는 데 그 모든 것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은 영화관에서 복도쪽으로 앉게 되는 날이면 계단 비상등이 신경 쓰여 영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예민해졌다. 그사이 직업 영화인이 되었기 때문에 영화 관람 태도의 변화는 물론 어느 정도 당연하기는 하지만 멕시코와 찜질방 영화관에서의 너그러움을 떠올리다 보니 스스로 영화를 보는 것, 그리고 영화 자체에 대해 너무 강박적인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내가 아주 오랜 시간 갖고 있는 고민 중 하나는 쓰는 시나리오들이 자연스럽지가 않고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고 삶에 대해서도 스스로 통제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밴 성격인 것 같다. 삶과 영화에 대해 내가 어떤 너그러움의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면 혹은 너그러운 환경에 놓여왔다면 내가 쓰는 글은 아주 다른 빛을 띠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열린 극장 문을 통해 헝가리무곡 리코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 이런 곳에서 자라왔다면 난 분명 글을 쓰지 않고 길에서 춤을 추고 묘기를 부렸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비평] 다중몽(多重夢), ‘거미집’

돌아보면 꿈을 꾼 것 같다. 지난 4년간 다큐멘터리 13편을 취재·연출했다. 이들 중에는 세상에 내놓을 정도는 된다고 여기는 것도 있고 그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는 경우도 있다. 칸영화제 취재기처럼 한달 만에 급조한 것도 있고 오랜 기간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인류의 위기를 걱정한 특집 다큐멘터리도 있다. 모두 초저예산 독립영화 수준의 제작비와 가차 없는 제작 기간 속에 낳은 자식 같은 아이들이다. 산고는 대개 화면엔 드러나지 않는다. 난관의 시작은 카메라 앞에 등장인물을 모시는 과정부터다. 주제에 맞는 인물을 찾더라도 대중 앞에 나서겠다는 이는 몹시 드물다.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분을 찾아내더라도, 제작 기간 내 서로 일정이 맞지 않기 일쑤다. 세상 모든 영상 제작자에게 코로나19는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제약을 가져왔다. 무슨 수를 쓰든 그분을 만나야 해. 어떻게든 만나서 그 말 한마디를 받아야 한다. 가까스로 카메라 앞에 세웠는데, 전화로 나눴던 말씀을 촬영 중에는 왜 안 하는 것인가. 만나야 할 사람이 비판 대상이라면 잘해야 문전박대, 심하면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마약이 횡행하는 샌프란시스코 우범지대를 촬영하던 중 칼 든 노숙인이 달려든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취재 지역 주민이 격하게 호응하며 감정 표현을 해주신 적도 있다. 주제와 맞아떨어진다. 순식간이었다. 이때 연출자는 거미집을 쳐놓고 먹이를 기다려온 거미와 같은 심정이라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다급하게 촬영자에게 확인한다. “촬영 됐지? 다 잘 찍힌 거지?” 촬영자의 손 빠른 대응이 손 떨릴 만큼 고맙다. 연출자의 마음을 아는 연출자의 마음 현장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 다음 고비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 장면 뒤에 매끈하게 붙는 영상이 분명히 있을 줄 알았다. 어디로 사라졌지. 이 장면에 맞는 효과음이 데이터베이스에 있을 줄 알았다. 왜 없지. 재촬영을 나가야 하나. 원하는 장면 몇컷만 더 있으면 훨씬 좋아질 수 있어. 다시 찍어야 해. 제작진의 원성이 들리는 듯하다. 재촬영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아쉬움은 끊이지 않는다. 한컷의 디테일이 작품을 망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편집 리듬에 맞게 배경음악을 작곡할 여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넷플릭스 다큐에서 봤던 CG를 흉내만이라도 낼 제작비가 있다면….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다. 연출자는 한정된 자원과 시간 내에 필요한 걸 만들어 내놔야 한다. 초저예산 작업에 걸맞게도 사전 취재와 자료 학습, 기획과 섭외, 행정문서 기안, 비용 집행과 영수증 처리, 콘티와 원고, 현장 취재, 그래픽 설계와 내레이션 더빙까지를 도맡곤 한다. 촬영, 편집, CG, 음악·음향, 사운드 믹싱까지 각 분야 감독님들과 함께 지난한 선택의 순간들을 거쳐야만 한다. AD들의 헌신적인 도움은 그저 눈물겨울 따름이다. 이 세상에 단 한번뿐인 현장 앞에서 연출자는 촬영자와 함께 매 순간 애가 탄다. 주제 의식은 물론 숏 하나하나에 대한 인식까지 연출자와 편집자가 동기화돼야 편집본에 설득력이 붙는다. 2시간 동안 눈물과 함께 털어놓은 한 인물의 고백을 2분 분량으로 편집해야 할 때도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 그분의 한마디라도 더 집어넣으려다 눈물만 쏟아낸 새벽들이 잊히지 않는다. 코로나19가 끝날 즈음, 감당 못할 번아웃 증상을 겪은 나는 결국 전문의를 찾아야 했다. <거미집>을 보며 이입하다 못해 가슴 한가운데가 아려오는 순간이 있었다. “다 찍혔지? 전부 다, 다 잘 찍혔지?” 감독 김열(송강호)이 촬영기사를 붙들고 다그친다. 숨이 넘어갈 것 같다. 극 종반 극중극의 하이라이트를 촬영한 롱테이크에서 오케이 콜을 외친 직후다. 테이크는 5분을 넘겼다. 필름에 제대로 담겼는지가, 사람들이 불길에 휩싸인 사태만큼이나 시급하다. 만에 하나 저 장면이 기술적인 문제로 촬영되지 않았다면 내 심장도 내려앉았으리라. 김열이 소동 끝에 촬영을 마친 뒤 감독 김지운은 이후 상황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고생하셨습니다!” 김열의 롱테이크에 어깨라도 두드리듯. 세트장을 나선 배우들과 제작진이 각자 갈 곳으로 해산하는 장면을 끊지 않고 촬영한다. 동선에 맞춰 재빨리 카메라 방향을 돌리고 인물의 몸으로 화면을 가리면서 테이크를 이어간다. 영락없이 1950년대 후반 이후 할리우드와 유럽에서 앞다퉈 활용한 당대 최신 테크닉이다(거친 구분이지만 당시 미국의 영화 선구자들은 주로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방편으로써 롱테이크를, 프랑스 누벨바그 기수들은 주로 이미지들의 조합 또는 충돌을 운동성으로 대체·재구성해 낯선 사유를 이끌어내자는 뜻으로 플랑 세캉스(Plan Sequence)를 사용했다. 김열은 “플랑 세캉스”를 말하면서 히치콕식 서스펜스를 좇는 듯 보인다). 이 테이크의 마지막 피사체는 감독 의자에 앉은 김열이다. 그가 갈 곳은 다름 아닌 촬영 현장이라는 듯. 코로나19를 어렵게 지내온 감독은, 그렇게 극 중 감독의 마음을 살펴 보여준다. 연출자의 마음을 아는 마음이라면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극 중 극 중 극중극 그런 심정으로 시도한 김지운의 선택이 영화 속 영화다. 히치콕의 뉘앙스와 김기영 감독의 장면들을 극중극에 집어넣은 다음, 자신이 창조한 50년 전 한국영화 감독에게 응원을 전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올해 한국영화가 기록할 만한 복층 구조다. 여기 우리가 보는 <거미집>이 있고 그 안에 김열이 촬영 중인 ‘거미집’이 있으며 그 안에 <하녀>(1960)가 있고 <화녀>(1971)도 있다. 극중극의 도입부에 나오는 방직공장이나 성당 합창 장면 같은 것들은 <하녀>에서, 종반부 오컬트 호러풍의 장면들은 <화녀>에서 주로 가져온 것들이다. 그런데 김기영은, 당대 정서 등을 고려해 <하녀>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인물의 상상이었다는 듯 액자 구성을 취하곤 했다. 그러니까 김지운 영화 속 김열 영화 속 김기영 영화 속의 극중극이, 2023년 우리에게 다가온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거미집>에는 영화 속의 영화 속의 영화 속 영화가 있다. 영화가 꿈이라면 <거미집>은 4중의 꿈이다. 이게 말장난이 아닌 이유를 좀더 얘기해보자. <거미집>의 시작은 김열의 꿈이다. 깨어보니 자신의 작업실이 있는 한옥식 주택이다. 디귿자형 건물의 품 안에 오랜 세월 다져진 흙마당이 정갈하다. 이곳은 1998년 김기영 감독이 부인과 함께 의문의 화재로 숨진 명륜동 자택을 본뜬 것이다. 유튜브에서 ‘KBS 김기영 다큐’를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김기영은 유서를 남긴 채 알 수 없는 죽음을 택했다. <거미집>에서 김열의 스승인 신상호 감독(정우성)은 불길 속 죽음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스러져갔다. 김열은 이 장면을 자신의 영화에 고스란히 재현한다. 이를 촬영하는 <거미집> 세트 역시 불길에 휩싸인다. 극의 전환점은 김열의 판타지다. 신 감독이 되살아나 가르침을 전한다. 극중극의 주택에서 2층은 음모와 배신, 반전의 무대이며 극 중 촬영 세트장의 2층은 전략과 감금, 비밀을 품은 공간이다. 한국 표현주의 영화를 선도한 김기영을, 한국 장르영화의 한획이라 할 수 있는 김지운은 이렇게 오마주했다. 꿈과 환상과 현실이 서로를 투영하고 이것이 영화는 물론 영화 속 영화에 중첩된다. <거미집>의 끝은 김열의 얼굴이다. <하녀>의 마지막 장면도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주인공 동식(김진규)의 얼굴이었다. <하녀>가 그랬던 것처럼 <거미집>도 모든 게 감독의 상상인 건 아닐까. 걸작을 완성해 동료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 감독의 꿈. 이것이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 송강호의 묘한 표정에 담긴다. 그저 김열만의 꿈일까. 김열은 성공적인 데뷔작 이후 삼류 감독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신경증에 시달려왔다. 김기영은 <충녀>(1972) 이후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다 90년대 후반 일각의 재발견과 더불어 또 다른 불안에 휩싸였을 터였다. 그가 사망한 해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한 김지운은 20년 뒤 <인랑>으로 외면받았고 영화계의 암흑기인 코로나19를 지냈다. 자, <거미집>은 누구의 꿈인가. 김기영의 현실 바깥을 김열의 처지가 둘러싸고, 그 바깥을 김지운이 감싸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 개봉 중인 <거미집>은 현실 밖의 현실 밖 현실이다.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지점이 있다. <거미집>은 그 복층의 계단을 흐리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영화의 관객은 얼핏 극중극을 촬영하는 과정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실은 영화가 착각을 유도하고 있다. 극 중 흑백 장면의 한 시퀀스가 끝나면 김열이 “컷, 오케이”를 외치고 컬러 화면으로 바뀐다. 이내 스탭과 촬영 세트도 보인다. 아하, 영화를 촬영하던 거였군.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촬영 중의 그것이 아닌 완벽하게 편집된 화면이다. 다양한 각도에 놓였을 카메라, 촬영 장소가 바뀌며 이동하는 숏과 숏 사이 준비 작업들이 말끔히 제거돼 있다. 깨끗한 후시녹음, 70년대 정서를 살리면서도 낡은 느낌 없는 음악과 음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는 건 솜씨 좋게 후반작업한 이후의 편집본이다. 즉 이 영화의 흑백 화면들은 촬영 장면이 아니라 영화 장면이다. 일부 숲속 시퀀스처럼 촬영 중이라는 정보가 중요한 대목에선 컬러 화면을 그대로 써 정확하게 이를 알리고 있다. 애초에 촬영 과정만을 보여줄 것이었다면 흑백과 컬러로 나눌 이유도 없었다. <거미집>의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 ‘흑백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물감 없이 영화 속 영화에 진입하게 해주는 한편 그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덕분에 관객은 평소 관람 습관대로 호세(오정세)와 민자(임수정), 유림(정수정)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김열의 촬영장과 김열의 영화, 어느 쪽이 이 영화의 실체인가. 이제 모사와 가정으로서 영화의 본질을 말할 차례다. 영화라는 가정법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이 생각을 5만 번쯤 했더니/ 내가 만약이 되어간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내가 생각이 되어버린다 (중략) 그럴듯함과/ 그러지 못함과/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하여.(김소연, <2층 관객 라운지> 중) 본질적으로 모든 픽션은 가정(假定)에서 출발한다. 일단 가짜로 정하고 보자는 얘기다. 한 남자가 외도를 벌인다고 치자. 외도 상대가 집에 들어와 아이를 갖고 주인 행세를 한다면? 남자의 아내는 버려지듯 집을 떠날까, 치밀한 복수극을 꾸밀까. 감독은 수많은 가정들 속에 허우적대고 또 길을 찾는다. 미정인 가짜와 결정한 가짜들 틈에서 인생사에 숨겨진 진짜를 찾아 헤맨다. 거친 발췌지만 김소연의 시는 마치 상상과 촬영장 사이를 오가는 김열의 심정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엔딩을 보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생각이 돼버린 감독. 그에게 진짜란 어디에 있을까. <거미집>은 거짓을 품은 데뷔 이후 가정과 모사를 전제로 하는 영화에서 진짜를 건지려는 김열의 욕망을 따라간다. 그 경로에 수시로 고개를 드는 것은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오가는 영화인들의 본질적 고민이다. <거미집>을 본 이라면 다음 대사들에서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집에 철창도 갖다놨”다는 형사 전문 배우의 “메소드 연기” 연습을 보며 “이상하잖아”라고 핀잔하는 김열이지만, 전쟁 영웅 역할을 달라는 배우에게 “군대도 안 갔다온 놈이 무슨 전쟁 영웅”이냐며 연기와 실제의 접점이 없다고 타박한다. “가짜 총”을 든 배우는 “진짜 수염”을 길렀는데, 김열은 그의 대역 연기에 빠져들어 가짜 수염을 붙인 채 이렇게 외친다.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나리오가 너무 가혹”하다는 배우의 하소연에 감독은 “(허구일 뿐인) 시나리오가 가혹한 게 어딨어”라며 의아해하지만, 유림이 임신한 사실과 허구 속 설정 사이를 오가는 관객으로선 웃음을 참기 어렵다. “놀란 표정 너무 좋아, 진짜 같았어”-“나 진짜 놀란 거라고요!”-“진짜 거미를 쓰면 어떡해!”와 같은 말들로 이어지는 코미디는, 호세와 유림의 극 중 관계와 극중극 속 설정을 중첩시키며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앙상블이 중요하고 주효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짜 같은 리허설과 진짜를 욕망하는 대역 미도(전여빈)의 연기, 그리고 막장으로 치닫는 극중극의 비밀과 그 직후 밝혀지는 백 회장(장영남)과 김열의 진실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문다. 이렇게 <거미집>은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 근본적인 질문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김열의 대사처럼 “어떤 영화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욕하고 비판”하는 평론가들의 선입견과 달리, 촬영 현장에서 ‘진짜’가 나오는 건 예기치 않은 결과인 경우가 허다하다. 직관적으로 살짝 올려서 한결 설득력 있어진 배우의 입꼬리, 때마침 프레임 한편으로부터 찾아든 아스라한 바람, 이 정조를 몇 곱절로 살려준 음향감독의 감각…. 뭇 기자들은 이런 것들에 무의식적으로 매료돼놓고는 형식의 힘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의 배경지식을 작품 내용에다 풀칠해 이어붙인 다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품”이라는 등의 평을 내놓곤 한다. <거미집> 초반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평론가들의 “그러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거야”라는 대사는, 이처럼 창작자가 자주 겪는 평자들의 접착제 사용 관습에 조소를 전하는 듯 보인다. 후반부 롱테이크를 놓고 “빨갱이들 불에 타는 걸 길게 보여주자는 거지”라는 문공부 국장의 말은 이같은 가짜 해몽의 연장이다. 코로나19 이후 드물었던 위안 요컨대 한편의 영화에서 진짜란, 계획과 우연이 운 좋게 이어지는 가운데 감독과 제작진의 진심 어린 표류가 우리 삶에 가닿을 때가 아니겠냐고 김열은 전하고 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예술가 김열이 때론 타협하고 종종 맞서면서 우당탕탕 끌고 가는 영화 현장이 그 자체로 진짜일 수 있다고, 5년 만에 복귀한 김지운은 체온을 높여 말하고 있다. 거미가 제아무리 탄탄한 거미줄로 집을 지어놓아도 먹이가 날아들지 않으면 건질 것은 없다.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유례없는 성취를 거둔 와중에도 영화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역량 밖과 안을 냉정하게 보게 됐다. 제작비 200억~300억원씩을 가져다 쓰면서도 낯선 시도를 하는 데는 게을러진 여러 중견감독들과 지역·독립영화 지원 예산을 반토막낸 정부를 목도하게 된 2023년. 영화 자체에서 진심을 찾는 상업영화가 아직은 남아 있다는 사실에 영화 팬은 드물게 위안을 받는 것이다.

[리뷰] ‘나의 행복한 결혼’, 준수한 실사화를 넘는 영화적 만듦새의 야심

19세기 중반 메이지 시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로 판타지 계열의 작품이다. 이능을 지닌 초능력자들이 나타난다는 설정의 세계관이다. 불, 물, 바람을 다루거나 타인의 정신을 조종하는 등 각종 이능이 존재한다. 주인공 미요(이마다 미오)는 이능 명문가 사이모리 가문의 자제다. 그러나 이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계모와 계자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던 미요는 명문가간의 정략결혼을 통해 쿠도 가문의 키요카(메구로 렌)를 만나게 된다. 국가 군부의 핵심 인물로 활동 중인 이능 능력자 키요카는 허물 없이 자신을 대하는 미요에게 빠지고, 둘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이능을 사용하여 국가권력을 노리는 집단이 모종의 이유로 키요카와 미요의 신변을 노린다. <나의 행복한 결혼>은 동명의 라이트노벨을 실사화한 작품이다. 최근엔 동명의 TV애니메이션도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실사판에선 인물들의 초능력을 시각화하는 만화적 표현의 CGI가 먼저 눈에 띈다. 하지만 시대상을 적절히 반영한 고즈넉한 분위기의 미술 세트와 그것을 잔잔하게, 때론 역동적으로 담아내는 촬영 구도와 실험적인 화각의 선택이 더욱더 탁월하게 느껴진다.

[기획] ‘그 인물 그 대사 이렇게 완성됐다’, 배우들이 돌아보는 <무빙>의 캐릭터, 명장면

고윤정 “17:1 싸움 장면에서 가장 고민한 건 희수에게 재생 능력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픔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느 정도로 아픔을 표현해야 할지에 대해 강풀 작가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편 지난해 10월 말에 찍은 거라 날씨도 춥고 바람이 계속 불었다. 몸 곳곳에 묻힌 진흙이 자꾸 굳어버려서 계속 분무기로 물을 뿌려가며 촬영했다. 함께한 배우 분들, 액션팀 모두 고생을 많이 했다.” 류승룡 “조직폭력배 시절의 주원은 의도적으로 사고를 내서 합의 비용을 받는 등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만 이를 사용했다. 자기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던 조직폭력배 시절의 그는 몸보다 오히려 마음에 상처가 더 많은 인물이었다. 주원을 연기하는 동안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속은 여리고 흉터 많은 인물이라는 괴리에 대해 늘 고민했다.” 한효주 “나의 엄마를 자주 떠올렸다. 엄마가 보여준 헌신을 이미현이라는 캐릭터에 녹여내고 싶었다. 아들인 (이)정하 배우가 맑고 예뻐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했다. 서로 엄마, 아들 호칭으로 부르며 많이 가까워졌고 지금도 서로를 그렇게 부른다.” 이정하 “봉석이 희수를 만나기 전후로 달라지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삼았다. 초반에는 무거운 가방을 늘 메고 있는 것처럼 감정을 억누른 채 단지 희수를 걱정할 뿐이지만 이후에는 자신을 숨기지 않고 희수에 대한 감정도 걱정하는 마음에서 더 나아가 지켜주고 싶다는 적극적인 형태로 변한다.” 차태현 “내러티브 전개상 전계도의 등장이 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범하게 표현하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심함, 아버지와의 소원한 관계 등 인물이 가진 타고난 지점들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 초능력자가 아닌 직업인 번개맨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소화하기 위해 번개맨을 공연하는 실제 배우 분들께 노래와 안무를 열심히 배웠다.” 김도훈 “기수가 주는 스트레스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초능력을 발현할 때 혹시 강훈이 악인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도훈은 아버지로부터 초능력의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었고 요원으로 선발되기 위한 책임감도 갖고 있다. 폭력성보다는 순간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고등학생다운 미성숙함이 드러나는 장면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김성균 “물대포 장면은 지난해 11월에 찍었다. 추운 밤에 비를 맞고 있자니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윤영을 연기한 박보경 배우가 감정을 올려주어서 도움이 많이 됐다. 강훈이를 생각해요, 라는 한마디. 윤영의 그 대사가 재만과 나를 움직였다.” 문성근 “좋은 편에 인물 수도 많고 배우들도 짱짱하니(웃음) 대립축인 나쁜 편으로 기능하려면 확실히 강렬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을 시대의 잔재가 아니라 다수파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인물 스스로 확신을 갖고 살았으리라 본다.” 무빙의 멜로적 순간들 한효주 “20대 요원으로서의 이미현, 엄마인 이미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목소리, 말투, 비주얼을 많이 고민했다. 서로 다른 목소리와 말투를 연습했는데 그 차이가 잘 묻어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두식과의 로맨스는 전적으로 나보다 조인성 배우의 몫이다. 나는 인성 오빠를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웃음)” 류승룡 “다양한 의미에서 길치였던 주원에게 지희는 빛이자 이정표, 새로운 길이 되어준 사람이다. 목적 없이 방황하던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준 지희를 위해 주원은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은 듯이 사랑했다. 그래서 지희를 잃게 되었을 때는 인생과 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사람처럼 연기해나갔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다른 누군가의 삶을 총체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사랑이다.” 곽선영 “주원과 지희의 사랑이 올드하거나 진부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순수한 그 시절 어른들의 사랑이 너무 좋기만 했다. 그저 그 마음을 이해하고 인물의 모든 말과 행동에 진심을 담으려 했다.” 그들 각자의 정치 김신록 “나는 여운규에게 ‘지방 출신 여성’이라는, 어지간해서는 그 시절 살아남기 어려운 장애요인을 설정했다. 여운규는 자신의 여성성과 지역색을 거세하기 위해 20부 내내 바지만 입고 사투리를 구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민용준의 죽음과 함께 20부 마지막 쿠키 영상에서 여운규는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등장한다.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생존 방식을 터득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여운규도 비로소 새로운 시대로의 ‘무빙'을 택했다.” 김종수 “안기부에서 근무했으나 지금은 학교 수위로 위장한 황지성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지점을 찾아야 했다. 타인의 시선 속에 있는 황지성과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순간의 황지성 정도로 표현하면서 과하지 않게 드러내려 했다.” 김국희 “나주는 프랭크가 자신을 투시로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첫 등장부터 미용사답지 않은 기운을 드러낸다. 다만 그 밖엔 평범한 미용실 원장처럼 보이길 바랐고, 미용사였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나주의 헤어스타일을 만들었다.” 김희원 “학교 담임이자 국정원 요원인 그는 처음에 학생들을 그저 요원 지망생 정도로 여기다가 나중엔 그들을 진정 사랑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숙고한다. 의심스러워 보였다가 아이들을 아끼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신경 썼다.” 유승목 “조래혁은 수탐이 아주 뛰어난 캐릭터다. 느낌과 촉이 뛰어난 냉혹한 캐릭터라는 점에 중점을 뒀다. 모든 감각이 예민한데, 하필 비염이 있다는 설정을 덧붙여 자연스레 킁킁거리는 습관을 가진 인물을 만들었다.”

씨네21 추천도서 -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얼마 전 아내를 떠나보낸 노르웨이의 어부 요한네스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침대에서 애써 몸을 일으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끓이고 빵에 치즈를 곁들여 먹은 다음 바다와 바람이 기다리는 집 밖으로 나선다. 산책할까 아니면 배를 타고 나가 낚시할까 생각하며 흐린 날씨를 배경으로 한 노인이 느리게 움직이는 고요한 풍경이, 마침표 없이 이어지며 밀어붙이는 문장으로 어딘지 불안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어제와 같고 그저께와도 같은데 요한네스는 무언가 다르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요한네스 본인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친구 페테르를 만나 배를 타기도 하고, 게를 잡아 시내로 가서 젊은 시절의 데이트를 반복하기도 한다. 온 세상 사물이 너무나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로 가볍게 느껴지는 이 기이한 감각과 무언가에 홀린 듯한 경험이 어떤 저녁으로 향하는지는, 사실 소설의 시작이 알려주었다. 모든 아기가 그렇듯 요한네스 또한, 모든 것이 하나인 검고 고요하고 따뜻한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오며 울부짖음으로 제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아내와 아이가 무사하길 바라며 신의 존재를 사유하는 아버지의 모습, 합일의 상태를 떠나 개별적 생명으로 움직이며 존재를 시작한 아기의 모습이 긴 시처럼 하나의 호흡으로 그려진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는 해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된 바 있으며, 희곡으로도 유명한 작가이다. <아침 그리고 저녁>은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바닷가에서 아이를 기르고 생계를 꾸려온 개인의 고된 인생이 품은 무게를 온전히 전달한다. 은퇴한 부부에게 연금이 지니는 의미, 어린 시절 집 현관 바닥재가 초라해서 부끄러웠다던 막내의 고백 같은 대목이 피부에 닿을 듯 구체적이다. 거대한 파도가 뒤척이듯 한 세계가 꿈틀거리며 아기의 탄생을 빚는 순간을 숨 가쁜 의성어로 담은 대목을 읽다 보면 마음에서 그 소리가 재생되는 것만 같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마침표가 드물게 모습을 드러내는 문장이 신에 관한 서술이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25쪽 “아이의 목소리는 저 밖의 모든 것을 갈라놓고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더 커지고 커진다.”

씨네21 추천도서 - <육교 시네마>

온다 리쿠 지음 / 권영주 옮김 / 비채 펴냄 한 가지 장르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분위기의 소설’을 잘 쓰는 온다 리쿠의 소설집. <육교 시네마>에는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SF, 청춘 소설 등 장르를 넘나드는 18편의 단편이 실렸다. 첫 번째 단편은 호퍼의 그림 <철길 옆 집>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그림은 히치콕의 <사이코>에 등장하는 집의 모델이기도 하다. 온다 리쿠는 “명확히 말해서 이 집에는 출입구가 없다. 완전히 폐쇄된 집. 들어갈 수 없는 집. 나올 수 없는 집이다”라고 그림에 대해 설명한 뒤, 소설 속 화자가 어느 날 그림 속 집을 연상시키는 집과 그 안의 세 사람을 발견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큰 집의 한방에만 늘 모여 있는 닮지 않은 세 사람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단편 <풍경> 역시 그림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주간지의 표지로 쓰인 그림을 보는데, 그 그림에서 어딘지 모를 광기 어린 분위기를 읽어낸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화자의 헤어스타일리스트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미장원을 그만두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다른 헤어스타일리스트와 대화 중에 화자는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오히려 바람이 안 부는 끈적한 여름날 오후,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순간에” 울리는 풍경. 울릴 리 없는 때에 울리는 풍경의 스산한 인상. <측은>이라는 작품도 눈길을 끈다. “저는 고양이입니다. 네, 확실합니다. 이 발바닥 젤리에 걸고 맹세하죠.” 유머러스한 도입부에 이어, 고양이는 그동안 자신이 겪은 동거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양이가 바라보는 인간들에 대한 혼잣말 같은 이야기는 목적 없이 흘러 결말을 향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오마주했다. 묘한 뒷맛을 남기는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온다 리쿠의 세계에 한층 매혹되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권말에는 ‘작가 후기’가 실려 있다. 수록된 단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인데, 작품을 읽기 전에 읽어도 좋고 읽고 나서 읽어도 독서에 즐거움을 더한다. 300쪽 겁에 질린 얼굴로 불안한 듯 이야기하는데 그게 피상적인 겁니다.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관계자 전원이 똑같더군요. 은행원도, 이용객도 모두.

BIAF #3호 [프리뷰] 브누아 슈 감독, ‘시로코와 바람의 왕국’

시로코와 바람의 왕국 Sirocco and the Kingdom of the Winds 브누아 슈/프랑스, 벨기에/2023년/78분/국제경쟁 10월 21일, 12:30, CGV 부천 4관 / 10월 22일, 13:30, CGV 부천 8관 <시로코와 바람의 왕국>은 익숙한 이야기와 독보적인 표현력, 섬세한 손길과 과감한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이다.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한 줄리엣(로제 샤펜티에)은 호기심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다. 줄리엣은 8살인 언니 카르멘(마리네 베르티에오)과 함께 이웃에 사는 동화작가 아그네스 집으로 놀러갔다가 신기한 책을 발견한다. 바람을 조종하는 변덕스러운 마법사에 대한 동화 ‘시로코와 바람의 왕국’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다. 두 소녀는 책의 힘에 의해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한 채 환상적인 바람에 휩쓸려 초현실적인 세계에 떨어진다.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환상의 세계에 우연히 도착한 소녀가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여정을 다룬 동화는 적지 않다. <시코로와 바람의 왕국> 역시 큰 틀에서는 비슷한 이야기지만 시코로만의 개성과 매력이 선명히 살아 있다. 사이키델릭한 세계로의 모험의 핵심은 그림을 통한 표현력에 있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부각한 움직임, 생태주의적 시선 등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산을 진하게 물려받았으며 그만큼 이 작품의 표현력은 감각적이고 과감하다. 선이 꿈틀대고 감정이 색채로 번지는 브누아 슈 감독의 상상은 아이들을 위한 것인 동시에 예술의 본질을 건드리는 마법 같은 순간을 창조한다. 그리하여 동화 속 세계에 빠져든 두 소녀의 생기발랄한 여정은 마침내 애니메이션이라는 물리적인 실체로 전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