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인터뷰]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장건재 감독, “이동의 감각을 표현하고 싶었다”

한국 사회에 염증을 느낀 20대 청년 계나(고아성)가 뉴질랜드로 터전을 옮긴다. 계나가 겪는 한국의 익숙한 폐단과 뉴질랜드의 생경한 활기는 곧장 관객의 피부에 닿을 만큼 생생하다.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이 싫어서>는 2016년 부산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에 선정되고 8년이 흐른 뒤 개막작으로 부산을 찾았다. - 원작을 영화화한 계기는 무엇인가. = 한국 사회를 향한 계나의 피로감에 공감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가 한국 사회의 커다란 변곡점이었다고 느낀다. 큰 재난을 마주한 사람들이 본인의 사회적 위치, 정체성 그리고 산적한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며 각성한 시점이었다. 나도 비슷했다. 원작을 접한 2015년에 한창 두살배기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아이에게 어떤 것을 남겨줄 수 있을지, 지금 내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많이 고민하게 되더라. 이런 고민과 계나의 이야기가 많이 연결된다고 느꼈다. - 초기 단편 <학교 다녀왔습니다>, 장편 <회오리 바람> <잠 못 드는 밤> 등 그간의 작업에서 감독의 실제 삶을 작품에 많이 투영했었다. 정체성이 아주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듬으려 한 과정은 어땠나. = 2015년쯤 강의를 자주 나갔다. 당시의 시류가 젊은 학생들에게도 큰 자극과 변화를 줬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20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건데… 8년이나 걸린 바람에 내가 40대 중반을 넘겨버렸다. (웃음) 한국에 사는 기혼 중년 남성이 한국을 떠난 20대 후반 싱글 여성의 삶을 대변하기에 적절한지 고민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의 객관성과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고아성 배우나 다른 젊은 배우들, 스탭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했다. - <한국이 싫어서>로 말하고 싶은 핵심은. = 이건 계나가 자신을 옭아매는 어떤 올가미로부터 도망치는 이야기다. 도망의 목적이 무엇인지, 종착점이 어디인지까지는 영화도 나도 아직 결론을 못 내렸다. 계나가 그 탈출의 과정에서 여러 타인과 관계를 맺고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는 과정일 뿐이다. 성장이라면 성장일 수 있겠다. 그러니 목표가 뚜렷하고 직관적이었던 원작의 계나와 달리 고아성의 계나는 조금 더 유보적인 인물로 변했다. 그리고 계나의 삶과 모험을 아픔으로만 그리고 싶진 않았다. 타국에서의 고생을 시련의 포르노처럼 다루려 하지 않았다. 사는 곳의 변화가 어떻게 마음의 변화로 이어지는지, 그 이동의 감각을 표현하고 싶었다. - <한여름의 판타지아> 때는 해외 로케이션의 제한된 환경으로 인해 즉흥적으로 선택한 촬영 구도가 많았다. 이번엔 어땠나. 옷 가게 장면에서 거울을 이용한 스리숏 등도 현장에서의 판단이었는지. = 그렇다. 섭외한 가게 내부가 워낙 좁다 보니 그런 카메라 위치를 자연스럽게 잡았던 것 같다. 콘티도 대부분 현장에서 짜는 편이다. 현장에서 결정하는 일의 90% 이상은 실용적인 선택이다. 컷의 수, 인물 블로킹 유무 등 최소한의 주문만 넘겨주면 나희석 촬영감독이 알아서 구도를 잡아줬다.

[인터뷰] 아시아영화의 창 ‘강변의 착오’ 웨이슈준 감독, 이성을 상실했을 때 마주하는 감정

1991년생 웨이슈준 감독은 부산영화제와 칸영화제가 사랑하는 중국의 뉴 제너레이션 중 한명이다. 첫 장편영화 <세상의 끝>을 포함해 신작 <강변의 착오>까지 4편의 장편이 모두 부산에 소개됐으며, <강변의 착오>가 올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것을 포함해 총 4번이나 칸을 찾았다. 비간, 구샤오강 감독 등과 더불어 중국의 주요 신진감독으로서 왕성히 몸집을 키우고 있다. 그의 신작 <강변의 착오>는 “내가 자랐던 중국의 90년대를 재현해 그때의 정서와 의미를 이해하고 싶었다”란 감독의 바람대로 90년대 중국의 한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16mm 필름의 노이즈와 시종일관 내리는 비의 습기는 담배의 공기를 효과적으로 상기시킨다. 의문의 연쇄살인이 발생하고 형사 마제는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던 중 자아의 분열을 겪는다. 자신이 좇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변모하는 세계에서 안정적인 삶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고심한다. 이른바 불확실성의 세계 귀퉁이에서 고통받는 개인의 혼란을 그리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이나 <큐어> <차가운 피> 등 형사물의 외피에 20세기 후반의 시대적 분열을 내재했던 동아시아 작품들과 하나의 궤를 그리는 듯하다. 영화는 “운명은 이해할 수 없다”라는 알베르 카뮈의 한 어구로 시작한다. “인물들이 겪을 운명의 전조를 예언처럼 보여주고 싶었다”란 웨이슈준 감독의 의도처럼 <강변의 착오>는 불가해한 운명을 맞닥뜨린 인물들의 무력감으로 가득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한 한 아이는 경찰복을 입고 폐건물을 거닌다. 건물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바깥의 황량한 공사 현장만을 바라본다. 이 기묘한 장면의 의미는 “주인공 마제가 상상하지 못한 수사의 운명적 결과를 겪게 될 것을 비유하는 복선”이다. 요컨대 <강변의 착오>가 택한 주안점은 어떠한 인물이 “논리적 인과나 경험, 인지에서 벗어난 외부적 상황과 충돌했을 때, 그렇게 이성을 상실했을 때 마주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강변의 착오>가 택한 흥미로운 설정 중 하나는 마제의 사무실이 극장 무대 위에 설치돼 있단 점에 있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에 독특한 환기를 유도한다. “인물들이 마제의 수사 과정을 객석에서 쳐다볼 때 마제는 마치 연극이나 각본 속의 인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 한발 떨어져 본다면 <강변의 착오>를 보는 관객들도 마제가 영화 속 인물임을 더 효과적으로 깨닫게 만든다.” 즉 메타 영화의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마제의 감정에 이입하되 인물 바깥의 상황적 배경도 고심하도록 섬세하게 설계한 영화의 구조다. 영화의 후반부, 마제는 꿈속에서 본인의 사무실이 있는 극장 객석에 앉아 불타는 필름의 이미지를 바라본다. 감독은 “극장을 이성의 방으로, 또 필름을 마지막 남은 이성과 논리, 그리고 기억의 끈”으로 설정했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필름이 지닌 수많은 상징성을 하나의 답으로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덧붙였다. “한국엔 봉준호, 박찬욱, 나홍진 등 거장들의 범죄 스릴러를 경험한 베테랑 관객들이 있는 만큼 <강변의 착오>가 겉보기에 비슷한 영화들과 다르게 뻗어가는 지점을 포착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BIAF #2호 [인터뷰] '켄즈케 왕국' 닐 보일 감독, 언어를 넘어선 교감

가족들과 바다를 여행할 계획을 세운 마이클(에런 맥그리거)은 부모님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몰래 반려견 스텔라를 배에 태운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스텔라를 구하려던 마이클은 파도에 휩쓸려 조난당하고 만다. 외딴 섬에서 눈을 뜬 마이클 앞에 수십 년 간 섬에서 홀로 생활해온 켄즈케(와타나베 켄)가 나타난다. <켄즈케 왕국>은 영화 <워 호스>의 원작자로 알려진 작가 마이클 모퍼고의 동명 소설에서 출발한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6월 열린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먼저 상영된 뒤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아시아 프리미어로 관객들을 만난다. 닐 보일 감독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90) 제작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CF, 뮤직비디오 등의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애정을 간직한 채 36년간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다. 오랫동안 협업해온 커크 핸드리 감독과 함께 그는 8년 반이라는 시간을 들여 <켄즈케 왕국>을 완성했다. - 원작의 어떤 부분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던가. = <켄즈케 왕국>은 정말 모든 연령대가 좋아하는 유명한 모험담이다. 동시에 환경에 관한 시의성 있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도 해서 공동 연출가인 커크 핸드리 감독과 나 모두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 영상화 과정에서 각색된 부분이 있다. 가령 소설에서는 일본어만 할 줄 알던 켄즈케가 마이클에게 영어를 배우는데, 영화에서는 마지막까지 서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 원작자인 마이클 모퍼고는 작품의 메시지만 명확히 전달된다면 다른 것은 자유롭게 각색해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커크 핸드리 감독과 나는 <켄즈케 왕국>의 중심 내용을 잘 전하고 싶어서 신중하게 작업했다. 켄즈케가 결국 끝까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것으로 연출한 건 일정 부분 의도가 있다. 극중 등장하는 동물들도 인간과 대화가 불가능하지 않나.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떻게, 어디까지 교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고민의 답으로 옛날 무성영화처럼 이미지나 몸짓으로 끝까지 이야기를 끌어가보고 싶었다. - 말은 통하지 않지만 켄즈케와 마이클이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나가는 과정이 집중적으로 그려진다. = 원래 마이클은 남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아이였다. 결국 그로 인해 스텔라와 조난당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지혜로워진다. 말하자면 타인을 존중하고 배우려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켄즈케는 가족을 포함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비극을 경험했고 그래서 사람을 싫어하고 동물과 지내는 걸 선호한다. 하지만 그도 실제로는 타인과의 교류가 필요한 사람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필요로 하고 환경, 동물과도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켄즈케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 켄즈케가 머무는 트리하우스의 미장센이 무척 섬세하다. 수십 년간 혼자 섬에서 어떻게 삶을 꾸려왔는지 느껴졌다. = 사실 초반에 스케치를 하고 아티스트들이 스토리보드 작업을 할 때만 하더라도 트리하우스에 관해 구체적으로 정해진 게 없었다. 프로덕션 디자인도 아직 다 구성되지 않은 상태여서 아주 러프한 아이디어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마이클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켄즈케의 그림들이 보이고, 그 다음에 발코니가 드러나는 식의 동선을 그렸고 그걸 기초로 공간을 유기적으로 구성해나갔다. - 셀리 호킨스, 킬리언 머피, 와타나베 켄, 그리고 래피 캐시디 등 성우진이 화려하다. = 운 좋게도 다들 <켄즈케 왕국>을 읽었거나 자신의 아이들에게 읽어준 기억이 있어서 이 작품에 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더라. 덕분에 1순위로 고려하던 캐스팅이 전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마이클 역의 에런 맥그리거는 오디션을 통해 만났다. 당시 11살의 어린 소년이었는데도 녹음이 시작되면 완벽히 몰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저할 것 없이 캐스팅했다. 녹음이 시작됐을 땐 코로나19 락다운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킬리언 머피는 아일랜드에, 와타나베켄은 일본에서 비디오 링크를 통해 녹음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마이클이 물에 빠진 채 대사를 읊는 장면이 있었는데 현실감을 위해 사운드 엔지니어가 에런의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에런의 얼굴에 계속 물을 뿌렸다. 덕분에 에런은 ‘어푸, 어푸’하며 실감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에런의 아버지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는 비스킷을 먹으며 촬영해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계속 비스킷을 먹고 싶어서 일부러 여러 차례 촬영을 거듭하곤 했다. (웃음) - 밀렵꾼이 섬에 들이닥치면서 극의 분위기가 반전된다.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도록 부츠, 총 등을 클로즈업할 때마다 위압감이 상당했다. = 마이클이 섬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행복해하고 평온함을 느끼는 모습 이후에 의도적으로 밀렵꾼들을 등장시켰다. 밀렵꾼의 얼굴은 거의 실루엣으로만 보이게 하고 이미 지나간 발자국 같은 것들을 보여주면서 어떤 동기로 이곳에 왔는지를 모호하게 하려고 했다. 작곡가 스튜어트 핸콕과 상의한 끝에 드럼 비트가 많이 쓰인 웅장한 8분짜리 O.S.T를 넣어 더욱 드라마틱하게 연출했다. - 영화의 또 다른 드라마틱한 장면은 켄즈케가 오랑우탄 가족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허밍과 함께 이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 각색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등장인물 각자의 언어가 전부 다르다는 점이었다. 후에 켄즈케가 마이클에게 오랑우탄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하는데, 그 소통 방법으로 음악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켄즈케와 마이클이 서로 노래로 합을 맞추기에도 자연스러울 테니 말이다. 스튜어트 핸콕은 감정을 응집력 있게 표현하는 데에 특화된 작곡가다. 그가 만든 허밍 곡이 상황을 더욱 아름답게 연출해줬다. -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을 통해 처음으로 내한했다. 언어가 다른 한국 관객들에게 <켄즈케 왕국>을 선보이는 것 또한 감독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듯하다. = 아직 한국의 관객들을 많이 만나진 못했지만 다행히 들려오는 반응이 나쁘지 않더라. 언어가 달라도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며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구와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여러 메시지가 영화에 담겨있다. 앞으로 <켄즈케 왕국>을 관람할 한국의 관객들에게 그 의도가 잘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획] 높고 넓은 스코세이지의 산맥 속 ‘플라워 킬링 문’

※본문에서 인용한 마틴 스코세이지의 언급은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대화>에서 빌려온 것임을 밝힙니다. <플라워 킬링 문>이 원작으로 하는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소설 <플라워 문>은 (현재는 FBI라 불리는) 수사국 요원 톰 화이트(제시 플레먼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마틴 스코세이지는 그 중심을 어니스트 버크하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턴), 그리고 어니스트의 삼촌인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니로)로 옮겨놓는다. 만약 <플라워 킬링 문>이 원작처럼 톰 화이트 중심이었다면, 이 작품은 백인의 탐욕에 희생양이 된 오세이지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구원자-백인’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실제로 원작 소설의 부제는 ‘오세이지족의 살인과 FBI의 탄생’이다). 스코세이지는 동일한 사건을 정반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 결과,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구원자 백인이 아니라, 오세이지족을 죽여 그들의 부를 가로채려는 킹 헤일과 어니스트의 추악한 탐욕과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코세이지가 1920년대 서부의 땅에서 발견한 미국의 역사다. 스코세이지가 이제야 첫 웨스턴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이 사뭇 놀랍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지금까지 스코세이지가 보여준 영화적 세계는 ‘수정주의 웨스턴’의 세계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웨스턴과 스코세이지, 그 늦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플라워 킬링 문>은 가장 스코세이지다운 것이 가장 수정주의 웨스턴다운 것임을 증명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플라워 킬링 문>은 웨스턴의 아이콘인 기차의 도착과 함께 본격적인 서사를 시작한다. 서부에 발을 내딛는 어니스트는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문구와 마주한다. 서부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코세이지는 주인공이 ‘갇힌(또는 갇힐) 세계’, 또는 그 세계가 인물에게 각인되는 순간을 보여주며 영화를 시작하곤 했다(흔히 눈의 빅 클로즈업으로 표현된다). <택시 드라이버>(1976)에서 혼란스러운 뉴욕의 밤거리를 바라보는 트래비스의 시선, <에비에이터>(2005)에서 어린 시절의 하워드 휴스의 뇌리에 박히는 ‘검역’이라는 단어, <좋은 친구들>(1990)과 <디파티드>(2006) 등에서 거리의 갱스터에게 빠진 소년의 눈, 그리고 <분노의 주먹>(1980)에서 화면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링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에게 주먹을 날리는 제이크 라모타의 모습까지, 스코세이지의 인물들은 그렇게 마주한 세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삼촌 킹 헤일은 어니스트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오세이지족의 여성과 결혼하는 것, 그것이 가난한 백인이 부유해질 수 있는 가장 손쉽고 ‘합법적인’ 방법이다. 한발 더 나아가 킹 헤일은 몰리 가족의 재산을 빼앗을 큰 그림을 그린 뒤, 어니스트라는 늑대 한 마리를 그 속에 던져넣는다. 어니스트는 킹 헤일의 조력자가 되어 몰리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에 앞장선다. 심지어 마지막 생존자인 아내 몰리를 죽이는 일도 거부하지 않는다. 어니스트는 전형적인 스코세이지의 인물이면서도 어리석기로만 따진다면 최고라 부를 만한 인물이다. <비열한 거리>(1974)의 자니, <좋은 친구들>의 헨리 힐, <카지노>(1996)의 니키, 그리고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의 조던 벨포트 등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는 상관없이 무모하리만큼 가속을 높이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오직 현재의 시간만 있다는 듯이 브레이크 없이 그 세계를 질주한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분노의 주먹>의 제이크 라모타다. 감방에 갇혀 “난 짐승이 아니야. 나도 인간이야”라고 외치며 벽을 주먹으로 내리치고(“왜! 왜! 왜!”), 엔딩 무렵의 스탠딩 코미디 극장에서 “나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회한의 고백을 하지만, 그가 자신이 더 내려갈 바닥이 없을 만큼 추락해야 했던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내부로부터 파열하는 삶 스코세이지의 인물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 알지 못하거나, 안다 해도 자신의 속도를 좀처럼 줄이지 못한다. 어니스트가 당뇨에 걸린 아내에게 투약하는 인슐린에 ‘어떤 약’을 함께 넣을 때, 그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 짓’을 한다. 그는 자신을 멈춰 세우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전형적인 스코세이지의 인물이다. 킹 헤일과 어니스트에 제동을 거는 것은 ‘자각’이 아니라 ‘자멸’이고, 이는 외부의 어떤 힘이 개입한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 내부에 뿌려진 ‘자멸의 씨앗’이 자라난 결과다. 스코세이지는 유전을 소재로 탐욕의 역사를 써내려간 또 다른 작품인 <데어 윌 비 블러드>(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 2008)의 엔딩 장면, 그러니까 대저택의 볼링장이 붉은 피로 물드는 그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점은, 바깥으로 폭발하는 대신 내부로 파열한다는 겁니다”라고. 그러고 보면 스코세이지의 인물들이 구축한 세계 역시 언제나 그 안에 “자멸의 씨앗”을 품고 있곤 했다. 그것이 폭력에 기반해 건설된 왕국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리 톰슨의 동명 작품을 리메이크한 <케이프 피어>(1992)는 스코세이지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작품이지만, 그 속에는 스코세이지의 비전으로 가득하다. 스코세이지는 원작과 달리 파국에 봉착한 미국의 가정이라는 화두를 삽입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 함께 노래하던 화목한 가정은 바람 피우기에 바쁜 남편과 그런 남편 덕분에 마음의 문을 닫은 아내와 비뚤어진 딸로 뒤바뀐다. 스코세이지의 <케이프 피어>의 가족은 단순히 외부에서 침입한 미치광이 살인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속이 썩어 붕괴될 위험에 놓여 있었다. <에비에이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미국의 꿈을 표상하는 인물이자 세상의 변화를 이끌 만큼의 힘을 가졌던 하워드 휴스가 스스로의 강박에 종속된 채 그 내부에서 파열되는 이야기다. 심지어 <셔터 아일랜드>(2010)에서는 인물의 붕괴된 내면으로 우리를 초대하기까지 한다. 중요한 것은 ‘자멸의 씨앗’이 자라 ‘내부에서 파열되는 세계’야말로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스코세이지의 비전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스코세이지가 <에비에이터>를 두고 “오직 미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또는 “미국적 대서사시”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과잉된 세계는 그 안에서 무너지기 마련이다. <플라워 킬링 문> 역시 마찬가지다. 킹 헤일의 왕국이 무너진 것은 과잉된 탐욕을 자양분으로 자멸의 씨앗이 자라난 결과다. <좋은 친구들><카지노>에서 범죄로 세운 왕국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주가 조작범 조던 벨포트를 가능하게 한 미국식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고, 또한 이들 세계는 <플라워 킬링 문>의 1920년대 서부와 구별되지 않는다. 멈출 수 없는 탐욕 앞에 무릎을 꿇은 인간 군상과 그렇기에 내부로부터 파멸할 운명의 삶. 원작처럼 톰 화이트 중심의 서사였다면, 이러한 세계의 묘사는 한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스코세이지는 어리석은 자신의 인물에 대해 굳이 해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분노의 주먹>의 제이크 라모타가 대표적인 사례일 테지만, <플라워 킬링 문>의 어니스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코세이지는 어니스트의 어리석은 선택과 그 결과를 보여줄 뿐, 그에 대해 구구절절 해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 빈틈이야말로 스코세이지가 생각하는 관객의 자리고, 관객의 세계와 영화의 접점으로서 (롤러코스터가 아닌) 시네마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친구의 얼굴을 한 폭력 스코세이지가 묘사하는 폭력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좋은 친구들>의 한 장면일 것이다. 한참 웃고 떠들던 토미가 갑자기 얼굴을 바꿔 “내가 우습냐?”라며 헨리 힐을 쏘아붙이는 그 장면 말이다. 그렇게 스코세이지 영화의 폭력성은 ‘불쑥’ 튀어나온다. 그래서 웃고 떠들다가도 갑자기 목숨이 날아갈 것 같은 긴장감이 스코세이지가 그려내는 폭력의 특징이다. 이는 마치 연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를 담은 듯한 연출을 통해 폭력의 잔혹성을 배가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스코세이지는 폭력 장면의 양식화된 연출을 기피하는 감독이다. 즉 배우들이 멋들어지게 합을 맞추거나 스타일리시한 방식으로 폭력 장면을 연출하기보다는 뉴스에서나 만날 것 같은 평이하고 단조로운 구도 속에 ‘안무 없는 폭력’이 불쑥 펼쳐지는 것이 스코세이지 영화의 특징이다(<카지노>에서 리키의 최후를 보여주던 옥수수밭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의 오세이지족에게 행사되는 폭력 장면 역시 이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영화에는 너무도 많은 죽음이 등장하지만 그 어떤 죽음도 합당한 이유를 갖지 못한다. 스코세이지는 마치 웃고 떠들다 “내가 우습냐?”라며 돌변하던 토미의 얼굴처럼 느닷없이 분출하는 그 폭력의 순간을 관객의 시야에 불쑥 들이민다. 그것이야말로 오세이지족이 느꼈던 공포의 실체였을 것이다. 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단순히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가족이나 친구,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스코세이지에게 폭력의 세계는 평범한 삶과 나란히 놓여 있곤 했다. 스코세이지가 갱스터를 경유해 그린 폭력의 세계는 <대부> 시리즈의 상류층 갱스터의 비장함처럼 우리의 평범한 삶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었다. 스코세이지가 성장하며 실제로 경험한 갱스터(또는 범죄자)는 그저 “매일의 일상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평범하게 회사에 출근하는 누군가의 삶처럼, 스코세이지의 갱스터들은 폭력과 범죄를 생존의 한 방식이자 평범한 삶의 일부분으로 수용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대부>가 그린 갱스터의 세계가 성화에 가깝다면 스코세이지가 그린 갱스터의 세계는 풍속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유일하게 성화에 가까운 인물은 몰리다. 어니스트가 <좋은 친구들>의 헨리 힐을 닮았다면, 몰리는 <비열한 거리>의 찰리를 닮았다. 찰리가 거칠고 폭력적인 거리의 삶과 영혼을 구원하는 삶 사이에서 방황했던 것처럼, 몰리 역시 (당뇨병 환자라는 사실이 잘 보여주듯) 백인의 달콤한 삶에 매혹되어 있으면서도 오세이지족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려는 양립 불가능한 바람 속에 힘겨워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땅에서 솟구친 검은 물기둥에 몸을 검게 물들이며 추던 춤과 영화 엔딩에서 마치 희생된 자들을 위한 위령제처럼 재연된 오세이지족의 전통적 군무가 공존하는 세상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몰리 역시 <비열한 거리>의 찰리처럼 궁극적으로는 실패한 인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세이지족은 ‘친구의 얼굴을 한 폭력’ 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죽어야 했다. 아니, 돈이라는 절대적 이유 앞에 죽어야 했다. 킹 헤일은 현자의 얼굴로 자신의 탐욕과 폭력을 감춘 위선자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탐욕을 한없이 투명하게 추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아무 죄의식이 없다. 킹 헤일이 아무 거리낌 없이 오세이지족을 죽일 수 있었던 까닭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킬 만한 존재로 그들을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세이지족의 부를 빼앗는 일이 자신이 배푼 시혜에 대한 당연한 대가이거나 잃어버린 자신의 것을 ‘되찾는 일’(“네 집의 주도권을 되찾으란 말이야”)이라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땅은 애초에 누구의 것이었을까? 왜 킹 헤일은 애초에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으면서도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 속에 마틴 스코세이지가 서부를 통해 보여주려 한 ‘미국의 맨얼굴’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부의 땅에서 자행된 폭력을 정당화해온 논리가 바로 이 (위선적) 오인 속에 존재하니 말이다.

[인터뷰] 나는 네가 되기도 해, ‘너와 나’ 배우 박혜수, 김시은

하은과 세미의 감정선을 진지하게 설명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에게 장난 같은 농담을 건네며 <너와 나>의 현장을 회상한다.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던 하은과 세미의 모습이 여지없이 오버랩되는 인터뷰였다. 배우 박혜수가 세미 역으로 <너와 나>에 먼저 합류한 뒤, 김시은은 네번의 오디션 끝에 하은 역을 손에 쥐었다. 극 중 내내 함께하던 세미와 하은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기점으로 상반된 운명을 마주한다. “이 영화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아름다웠던 세미와 하은의 사랑”(박혜수)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두 배우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작품에 녹아들었다. - <너와 나>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나. 김시은 조현철 감독님을 선배 배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연출도 하시는구나 싶어 놀랐다. 시나리오에 쓰인 시적인 표현들도 인상적이었다. 하은이가 세미를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동물, 동물이 아닌 것들까지 애정하는 마음이 글에 가득해서 감독님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뭘까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이 결국 내가 사랑에 대한 감독님의 메시지를 좋아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 같이 작업하면 좋겠다 싶었다. 박혜수 상징이 워낙 많아서 사실 처음 읽었을 때엔 시나리오의 내용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랑과 삶, 죽음, 상실 그 모든 게 담겨 있는데 이걸 내가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다. 그래도 세미와 하은이의 사랑이 너무 아름다워서 꼭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두 배우 다 시나리오를 읽은 뒤 여러 질문이 생긴 것 같은데, 그에 관해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게 있다면. 박혜수 “감독님 이건 뭐예요? 이건 무슨 뜻이에요?” 하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여쭤봤다. 세미가 워낙 짜증이 많아서 이러면 관객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싶어 상의를 통해 대사의 어미까지 세세히 다듬었다. 그래서 어쩔 때는 조금 웃기도 하고, 어쩔 때는 더 강도 높게 화를 내는 식으로 세미의 짜증에 디테일을 더했다. 김시은 나는 감독님에게 질문을 많이 하진 않았다. 첫 장편영화라 현장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탓도 있다. 대신 혜수 언니와 사전에 합을 많이 맞췄다. 일주일에 두번씩 만나 다양한 상황 속에서 대본을 읽었다. 그렇게 하은이가 어떤 인물인지 깨달아갔다. - 하은과 세미를 각각 어떤 인물이라고 분석했나. 김시은 하은이는 겉으로는 밝고 친구들과도 두루 잘 지내지만 말 못할 힘듦과 외로움을 지녔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 영화를 보면서도 궁금했다. 하은이는 왜 그토록 속내를 숨기는 걸까. 특히 세미에겐 더욱 그렇지 않나. 김시은 세미를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 거라고 받아들였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을 굳이 세미에게까지 말해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도 있으니까. 다애한테 이야기하면 되지. (웃음) 박혜수 뭐라고요? 지금 제 앞에서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저 아직 과몰입한 상황이거든요! (웃음) - 반면 세미는 좋아하는 마음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박혜수 그렇다. 일단 하은이를 너무 좋아하고 그 마음을 도저히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화를 내고 질투도 하고 짜증도 많이 낸다. 그런 세미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인간적인 사랑을 하는 소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 미워 보이지 않게끔 세미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 두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세미는 하은이가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바라는데 하은이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관심을 나눠준다. 그런 상대 캐릭터의 태도가 잘 받아들여지던가. 김시은 의견 차이로 세미와 다투는 신을 찍다 진짜로 화를 낸 적이 있다. (웃음) 박혜수 같은 신을 여러 번 촬영하다보니 시은이가 감정이 쌓였는지 원래 준비한 것의 1.5배로 짜증을 냈다. 스탭들까지 다 당황해서 컷을 한 뒤 한참을 웃었다. 그만큼 세미의 사랑이 하은이를 힘들게 한다는 방증이다. 하은이의 배려를 모르고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해줘!’ 하는 거니까. 김시은 가끔 화는 나도, 하은이는 세미의 그런 점까지 받아들였을 거다. 전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이니까. 하은이는 상대를 온전히 바라봐주는 사람 같다. 박혜수 그렇게 보면 세미도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 재지 않고 진심을 표현한다는 게 정말 용감한 행동 아닌가. - 수많은 리허설과 연습을 바탕으로 대본이 많이 바뀌었다고. 박혜수 감독님이 신마다 두 가지 정도의 요소만 살리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표현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연습 과정에서 우리가 하는 대사를 다 녹음하고 메모한 뒤 그걸 바탕으로 대본을 재구성하셨다. 그러다보니 많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배우를 무척 배려해주는 작업 방식이라 신선하고 재밌었다. 김시은 감독님이 “힘 빼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요”라고 하신 게 기억난다. 그 뒤로는 정말 모든 게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런 시간이 쌓이다보니 내가 세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더라. 감독님이 이런 부분까지 예상하고 꿰뚫어보셨구나 싶어 신기했다. 박혜수 확실히 자유도가 높은 현장이었고 감독님이 배우들의 사기도 잘 북돋워주셨다. 감독님의 3대 오케이가 있다. ‘뷰티풀! 원더풀! 미라클!’ 좋으면 뷰티플, 더 좋으면 원더플, 정말 더할 나위 없다 싶으면 미라클! 이렇게 단계가 올라간다. 감독님이 무전기로 셋 중 하나를 외치실 때마다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 김시은 배우가 오디션을 볼 때부터 박혜수 배우가 대사를 맞춰줬다고 들었다. 이후로 계속 합을 맞추며 서로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있다면. 박혜수 우리 둘이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나는 현장에서의 순발력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부족한 편이라 그런 스타일로 연기하는 배우를 부러워하는데, 시은이가 딱 그런 타입이었다. 하은이가 할 법한 통통 튀는 포인트들을 잘 살려줬다. 김시은 서로 장점이 달라서 시너지가 좋았다. 언니는 정말 꼼꼼하고 섬세하게 연기한다. 내가 자유롭게 표현해도 언니가 잘 받아주니까 더 신나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 두 인물의 헤어스타일이 비슷해서 극 중 나란히 앉아 있을 때마다 눈길이 갔다. 그 밖에 교복, 인형과 같은 소품까지 세심하게 공을 들인 게 느껴졌다. 박혜수 개인적으로는 교복 핏에 신경을 썼다. 치마는 이 정도 길이일 것이며 살짝 여유 있는 핏 덕에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세미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있었다. 촬영 전에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는데 세미는 볼살이 통통한 게 어울릴 것 같았고, 마지막 10대 연기일 거란 생각에 살도 좀 찌웠다. 김시은 둘 다 학생 역할이라 화장도 하지 않았고 입술에도 바셀린 정도만 발랐다. 그래서 하은이나 세미가 화낼 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게 스크린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게 그렇게 좋더라. (웃음) - 친구들과 간 노래방에서 세미는 하은이를 떠올리며 빅마마의 <체념>을 부른다. 원테이크 촬영에 울면서 노래까지 불러야 해서 배우 입장에선 부담스러웠을 법한 신이다. 박혜수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진 않더라. 가사를 곱씹으며 부르는데, 어쩜 그렇게 슬프던지. (웃음) 준비할 땐 일단 너무 잘 부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원래 노래할 때의 습관을 많이 버렸고 머릿속이 하은이로 가득 찬 세은이의 감정을 떠올리면서 불렀다. - 하은이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다보니 감정을 분출하는 신이 기억에 남았다. 먼저 떠난 강아지 제리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릴 때나 세미와 함께 탔던 버스에 혼자 앉아 우는 신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김시은 세미랑 버스에서 장난치는 신과 똑같은 버스에 올라 혼자 오열하는 신을 같은 날 찍었다. 세미가 “멋쟁이 토마토~”를 부르며 웃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 사소한 일도 큰 행복이 될 수 있구나, 그걸 일찍 깨닫고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중요한 순간을 너무 놓치며 지내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이어졌다. 세미가 없는데 있는 것 같고 온기가 있는 듯한데 없는 그 시간이 정말 힘들었다. 박혜수 그 장면은 볼 때마다 나도 힘들다. 결국 하은이가 혼자 남겨지는 거니까. 그래서 가능한 한 세미가 어딘가 살아 있을 것처럼 느껴지게끔 연기하려고 했다. - 영화를 찍은 뒤 박혜수 배우가 <너와 나>를 작곡했고, 둘이 함께 부른 영상이 김시은 배우의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다. 이 곡은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말해준다면. 박혜수 세미와 하은이가 주고받은 말을 가사로 써보고 싶어 곡을 짓게 됐다. 감독님께 들려드렸더니 “이걸로 재밌는 걸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공연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주셨고, 마침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앞뒀을 때라 시은이와 같이 연습해 노래했다. 김시은 언니가 작곡가로 데뷔하는 순간이자 내가 꿈꿔온 가수로서의 데뷔 순간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했다. 가사도 <너와 나>를 본 분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다. - 곡의 어떤 파트를 가장 좋아하나. 김시은 ‘나는 네가 되기도 해’가 떠오른다. 박혜수 나도 그 부분이 제일 좋다. - <너와 나>는 시간순으로 흘러가지 않고 어떤 부분이 꿈이고 현실인지, 꿈이라면 세미의 꿈인지 하은의 꿈인지 모호하게 연출됐다. 이에 관해 각자 정리해본 부분이 있나. 김시은 개인적으로는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아서 더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결핍됐으면서도 충만한, 사랑으로 인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볼 때마다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박혜수 관객이 세미와 하은이 중 누구에게 이입해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다만 모든 해석이 결국 사랑으로 귀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제에서 GV를 할 때 관객들이 종종 ‘영화 잘 봤다’가 아니라 ‘저는 이 영화를 사랑해요’라고 말씀해주셨다. 이 영화에 담긴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닿았구나 싶어 행복했다. 사실 사랑은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다는 걸 더 많은 분들이 느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획] 한국영화박물관 기획 전시 <씬의 설계: 미술감독이 디자인한 영화 속 세계> 류성희, 조화성, 한아름 미술감독과의 대화

영화미술이란 무엇인가 프로덕션 디자인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기점으로 해외에서 정립된 개념이다. 그 이전에는 아트 디렉터라고 불리던 직군이 인물과 서사, 의상, 로케이션 등을 광의적으로 총괄하는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 전체 프로덕션을 디자인하는 사람, 즉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명칭이 바뀌게 됐다. 한국영화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연출부에서 세트 및 소품 등을 함께 맡는 것이 관례였지만, 1992년 아트 디렉션 시스템을 도입한 <그대 안의 블루>가 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인정받으면서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충무로에 프로덕션 디자인의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한편의 영화를 시각적 의미로 해석하고 영화 전체의 외양, 즉 비주얼과 룩을 총괄함으로써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세계관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영화의 시각 기호를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학 시절 도예를 전공한 류성희 미술감독은 노자의 말을 인용했다. “그릇의 본질은 찰흙으로 만든 벽체가 아니라 그릇이 담고 있는 내부 공간이다. 프로덕션 디자인의 본질 역시 무엇이 담기느냐다.” 이를테면 <아가씨>의 세트를 만들 때 삼면 벽체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고자 하는 무드가 무엇인지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의 방을 만들 때는 이방인 서래가 가진 고독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바다, 산 등을 벽지에 표현해 무드를 담아낸 것은 결국 서래의 고독함을 담기 위함이다. 배우는 대사로 이야기를 하지만 비주얼 스토리텔링은 직접 이야기되지 않은 것을 담을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의 미술 작업을 할 때는 ‘이들은 사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공기를 만들고 싶었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관객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인물과 공간이고, 전자에는 의상과 분장 등이 포함되며 후자는 세트 혹은 실제 로케이션이 될 수 있다. 원론적으로는 촬영 및 조명까지도 아울러야 한다. “슬픈 감정을 전달한다고 하면 인물, 벽지, 소품 모두가 슬픈 무드를 만들기 위해 배치되어야 한다. 여기서 벽지가 너무 현란하면 자칫 배우보다 배경이 먼저 관객에게 말을 걸어서 영화의 맥을 끊을 수 있다. 이른바 연결을 맞추는 작업도 모두 미술에 포함된다.” 한아름 미술감독 역시 자신의 역할을 “시각적인 요소에 있어 최종 책임자”라고 설명한다. “CG가 부족한 부분도 결국 나에게 책임을 묻는다. (웃음) 미술감독은 단지 도면만 만들어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감재와 소품을 디테일하게 보는 일까지 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수정 및 보안을 위해 감독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거나 예산 관리 역시 프로덕션 과정에서 그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영화의 본질은 협업, 소통이 중요하다 미국영화연구소에서 영화미술 석사과정을 밟은 류성희 미술감독은 당시 학교에서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여럿이 모여서 한다는 것이며 소통이 중요하다”는 점이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많이 싸웠다. 미술 전공자는 난데, 내가 보기엔 늘 다른 사람들은 이상한 선택을 하는 거다. 그때 지도교수님이 ‘이렇게 하면 더이상 학교를 다니기 힘들다’고 하는 거다. 충격받았다. 내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가도 남들을 이해시킬 수 없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대중은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비주얼을 총괄하는 미술감독은 감독은 물론 촬영감독, 조명감독, VFX 슈퍼바이저까지 다양한 스탭들과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자리다. “예전에는 무조건 내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많이 다퉜다면, 지금은 당장 할 일과 그다음에 할 일을 구분하려고 하며 양보할 것은 양보하려고 한다. 무작정 논쟁할 것이 아니라 설득을 위해 다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미술감독 지망생들을 위해 영리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팁을 공유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준비한 미술을 모두 공유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상대가 당황할 때가 있다. 다만 감독이 직접 언급한 내용은 무조건 기억하고 적어놔야 한다. 그 부분을 간과하면 나중에 틀어질 수 있다. 연출자가 선호하는 것들을 반영한 다음에 자기 것을 해나가야 한다. 대신 감독의 마음에 들 수 있게 정말 잘해야 한다.” 한아름 미술감독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바꾸고 싶은 부분에 대해 의견을 전할 때 어떤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예전에는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서 장황하게 이야기했는데 그림과 함께 간결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감독의 귀가 열릴 때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원활한 설득이 되지 않으면 조감독이나 프로듀서를 통해 또 한번 아이디어를 전해야 한다. (웃음)” 영감을 얻는 법 류성희 미술감독은 <아가씨>의 컨셉 디자인을 구상할 때 제인 오스틴 원작의 시대극과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평소 아티스트가 쌓아둔 인문학 지식 혹은 콘텐츠 감상은 영화미술의 아이디어를 얻는 자산이 될 수 있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내가 영화 일을 하는 이유는 소통을 위해서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전시를 찾는 사람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과 보다 잘 교류하기 위해 요즘 힙하다고 얘기되는 것들을 의식적으로 찾아본다. 음악도 많이 듣고, 유튜브 영상도 많이 본다. 무엇보다 지금 하는 일을 재밌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내가 즐거워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스스로가 많은 것에 노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화성 미술감독 역시 “창의적 영감을 얻기 위해 다큐멘터리,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 등 닥치는 대로 어마어마하게 보고, 50대 중반이지만 아이돌 그룹도 열심히 찾아보고” 있다. 평소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봐두어야 진부한 레퍼런스를 찾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를테면 카페 공간을 만든다고 할 때 카페를 레퍼런스로 삼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찾아온 이미지를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 좋다.” 한아름 미술감독은 시나리오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분야에 지식을 쌓고 여행이라든지 색다른 경험을 의식적으로 하다 보면 시각언어를 설계하는 데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 영화미술은 그냥 혼자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나리오를 해석하는 능력이 무척 중요하다.” 좋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특정 감독이나 배우만의 예술이 아니다. 촬영감독, 조명감독, 의상감독의 예술이기도 하며 이들의 공을 인정해 걸출한 상을 수여하기도 한다. 이번 기획 전시에 참여한 류성희 미술감독은 <아가씨>로 칸영화제 벌컨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미술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볼 때 ‘미술이 좋았다’고 인지하는가. 이를테면 류성희 미술감독의 <올드보이>는 현실성을 거세하고 표현주의적인 미술을 감행한 작품이다. “영화미술을 잘할 수 있는 솔루션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쉬운 길은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고 싶을 수 있다. 박찬욱 감독님 같은 분을 만나면 좀더 모험을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도전이 영화를 망쳐서는 안된다. 미술감독의 시도가 영화를 방해하지 않고 비주얼 스토리텔링을 탁월하게 해내서 감정을 증폭해서 가져간다면 그것은 실패하지 않는 디자인이다. 작품에 따라 튀지 않고 무난한 미술이 더 적합한 경우도 있다.”(류성희 미술감독) 조화성 미술감독은 장르에 따라 미술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언급했다. “잔인한 액션영화의 경우 짧은 시간에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는 이미지를 써야 한다. 드라마나 멜로의 경우 공간에 캐릭터의 삶을 담아낼 수 있다.” 심지어 조화성 미술감독은 주인공이 이 집에서 몇년 동안 거주했으며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에 따라 벽지와 가구가 달라질 수 있다고 계산한다. 그는 “미술감독은 어떤 의미에서 셜록 홈스나 프로파일러 같은 사람”이라고 비유했다. 한아름 미술감독은 <킹메이커>에서 김은범(설경구)의 목포 선거 사무실 세트를 만들 때 디테일한 서류까지 만들어 서랍에 채워넣었다. 그래야 영화 속 상황을 진짜처럼 받아들이며 조·단역 연기자들까지 극에 몰입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좋은 영화미술은 영화의 무드를 조화롭게 조성하면서, 구체적인 대사가 말해주지 않는 캐릭터의 인생과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단지 세트나 소품의 미감과 존재감이 아닌 광의의 의미로 영화의 미술을 이해할 때, 영화 전체를 보는 시야도 더 넓어질 수 있다.

제25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순간들

10월20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제25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이 성황리에 폐막했다. 이번 BIAF에선 총 36개국에서 온 118편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됐다. “애니메이션은 상상력과 예술성, 기술과 감동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그릇입니다”라는 서재환 조직위원장의 개회사처럼, 올해 BIAF에서 상영된 애니메이션들은 저마다 경험한 적 없는 환상의 세계와 본 일이 드문 고유의 기술을 관객의 눈앞에 펼쳐 보이며 예술이 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감상인 감동을 선사했다. 올해로 25회를 맞은 BIAF의 개막부터 폐막까지의 인상적인 순간들을 전한다. BIAF 2023의 홍보대사인 YENA(최예나)가 개막식에서 개막작 <로봇 드림>과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를 소개하고 있다. 최예나는 이번 영화제 기간 중 영화 관람 전 에티켓을 설명하는 트레일러 영상에도 등장하며 관객들에게 얼굴을 익혔다. 개막식의 축하 공연은 반도네온 연주가 고상지가 맡았다. 고상지는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자작곡을 모아 음반을 발매하는 등 애니메이션의 골수팬으로 알려져 있다. 10월18일부터 25일까지 현대백화점 중동점에서 올해 애니메이션 제작 경력 30년을 맞이한 안재훈 감독의 포스터 전시회 <결: 히치콕부터 아가미에 이르기까지>가 열렸다. 이 전시에선 안재훈 감독의 단편 <히치콕의 어떤 하루>(1998)부터 내년 개봉예정인 장편 <아가미>(2023)까지, 안재훈 감독이 선보인 수많은 애니메이션들의 포스터가 전시됐다. 한편 안재훈 감독은 워크 인 프로그레스 프로그램을 통해 작업이 진행 중인 <아가미>의 제작 과정을 공개했다. 소설가 구병모가 지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아가미>는 삶의 끝에 선 순간 아가미가 생겨난 소년의 아름답고 잔혹한 이야기를 담는다. BIAF 2023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게스트는 <마크로스> 시리즈의 가와모리 쇼지 감독이다. ‘마크로스 – 노래, 사랑, 메카의 복합예술’ 특별전을 포함해 마스터클래스의 연사로 선 가와모리 쇼지 감독은 10월23일 열린 마스터클래스에서 <마크로스> 시리즈의 제작 비화와 창작 비결을 들려주었다. 강연 전후로 감독의 사인을 받으려는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올해 국제경쟁 부문 대상은 키아라 말타, 세바스티앙 로덴바흐 감독의 <치킨 포 린다!>가 차지했다. 자국 내 개봉 일정과 겹쳐 BIAF에 참석할 수 없었던 두 감독은, 직접 만든 영상으로 소감을 전했다. 이들의 소감은 영화와 꼭 들어맞는 재치를 보였다. 두 감독이 아닌 영화 속 주인공 ‘린다’가 등장해 소감을 밝혔기 때문이다. “두 감독 대신 제가 나서는 게 좋겠네요”라며 운을 뗀 린다는 “이 상은 제 거예요. 감독들 것이 아니고요!”라고 웅변해 웃음과 인상을 동시에 남겼다. <치킨 포 린다!>는 특별상인 키노라이츠상 장편부문 수상자에도 이름을 올렸다. 심사위원대상은 세피데 파시 감독의 <사이렌>이 차지했다. <사이렌>은 특별상에 해당하는 한국애니메이션산업협회장상까지 수상했다. 우수상은 제레미 페랭 감독의 <마스 익스프레스>와 브누아 슈 감독의 <시로코와 바람의 왕국>이 공동 수상했다. <시로코와 바람의 왕국>은 코코믹스 음악상의 영예도 안았다. 관객의 투표로 결정되는 관객상은 개막작인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로봇 드림>에 돌아갔다. 이외에도 (사)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상은 이타즈 요시미 감독의 <북극백화점의 컨시어지>가, DHL상과 EBS상은 각각 존 머스커 감독의 <나는 힙>, 아담 레비 감독의 <플러터>가 수상하였다. 한편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애니메이션 부문 출품 자격을 얻는 단편 대상은 “비주얼과 사운드 테크닉이 돋보인다”는 심사평을 받은 <열대의 눈>이 차지했다. <열대의 눈>은 대만의 전통 종이 제작 기술을 통해 완성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파리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내러티브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영상으로 수상 소감을 보내온 대만의 장쉬잔 감독은 “언젠가 BIAF에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가겠다”라고 밝힌 후 한국어 5음절 “감사합니다”를 말하며 소감을 끝맺었다. 심사위원상은 닝크 도이츠 감독의 <호텔 미라클>이, 우수상은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기억의 정원>과 스티븐 어윈 감독의 <깨어난 세계>, 플로러 언너 부더 감독의 <27>에 돌아갔다.

[김세인의 데구루루] 청춘의 표정

친구 B와 우연히 일년 전 사진을 발견했다. 일년 전이라 하면 나나 B나 인생 최대 나락의 시기여서 거울을 보며 또 서로를 보며 우리는 모든 것이 소진되었고 한 시기가 훌쩍 지났구나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다시 꺼내본 사진 속 우리는 너무 앳되었고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은은한 광기와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거울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청춘의 심령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카메라를 통해 그 낯선 얼굴을 제대로,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청춘은 나에게 도깨비, 유령처럼 소문만 무성한 것이었다. 나는 줄곧 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모든 것이 다 지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충분히 청춘이었던 적이, 제대로 청춘이었던 적이, 그저 청춘이었던 적이 이번 생엔 없는 거구나 싶어 섭섭했다. 창문 밖의 새순을 보며 수영복을 한참 골랐는데 현관문을 여니 이미 낙엽이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만 그런가? 요즘 만나는 사람들한테 자주 물어보곤 했다. 내가 지금 완전히 청춘이구나 느낀 적 있어? 몇몇 친구는 살면서 나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청춘이라는 감각은 없었다고, 어느새 이미 이렇게 되어버려서(?) 젊은이들의 거리를 걷다 보면 괜히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 SNS에서 보이는 청춘은 자신과 너무 다른 것만 같아 괜히 그 주변만 어슬렁거렸다고. 몇몇 친구는 현재의 감각으로 청춘을 느꼈던 적은 없지만 회고의 감각으로 청춘이었다고 뒤늦게 인식된 순간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은 청춘이라고 했다. 그 답변에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나는 이렇게 호기롭게 청춘을 뽐내는 친구 곁에서 그리고 생의 유일무이한 시기를 지나는 친구들을 지켜보며 너 청춘이네? 그럼 나도 청춘이겠지? 가늠해본다. 친구에 비춰 내 청춘을 짐작해보지만 실제 나의 상이 비치는 거울 앞에서는 도무지 청춘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여러 고민과 상황들에 점철된 거울의 표면을 아무리 닦아도 더 뿌옇게 흐릿해지기만 할 뿐 본연의 청년의 얼굴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청춘은 나에게 멀게만 느껴지는데 나는 지금 청춘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며칠 전 로케이션 헌팅을 나갔다. 준비하고 있는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4개 팀으로 이루어져 있어 많은 인원으로 인해 역삼동 사무실에서 로케이션 후보지로 버스를 대절해 이동했다. 로케이션 후보지에 도착하고 자연스럽게 줄을 서서 이동했는데 클럽 앞거리를 걸으며 모두들 각자의 힘껏 반짝였던 한때에 대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그 모습이 소풍 가는 학생들 같아서 귀여워 보였다. 그 틈에서 나 또한 20대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20대 김세인의 시그니처 표정이라면 양쪽 눈썹은 살짝 올라가고 동공과 입이 똑같이 벌어진 얼굴이 아닐까. 놀라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닥쳐올 낯선 상황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 1초에 열번쯤 흔들리는 눈동자로 ‘네?’를 반문하는…. 줄곧 그런 표정으로 20대를 지나왔다 생각하니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는 꽤 충동적이었기 때문에 (물론 지금도 그렇다) 내가 하는 행동이 불러올 결과도 모르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모른 채, 내가 하는 말의 의미도 모르고 진심도 모르고,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스스로에게 어리둥절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20대 김세인의 의중을 헤아리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청춘 드라마를 준비하며 청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을 때 뭐든 잘 모르겠고 낯설었다는 감각 이외엔 쉽사리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그런데 비단 그때뿐만이 아니라 뭐든 잘 모르겠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불현듯 깨달음을 얻어 사는 것에 대해 정통하고 익숙한 상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잘 모르고 낯선 상태가 청춘의 고유함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청춘이 찬란하다는 것은 의심스럽고 그렇다고 암울하기만 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어쩌면 이 잘 모르겠다는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것만이 맞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영화를 찍으며 항상 스스로 먼저 선언했던 것 같다. 이건 슬픈 이야기야, 이건 화가 나는 이야기야, 이 인물은 굉장히 슬프고 화가 나 있어. 내가 쓰는 이야기와 인물의 성질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내렸던 정의들이 영화 속 인물에게 큰 무게를 짊어지게 했다. 인물은 그것에 짓눌렸었다. 저번 편(<씨네21> 1426호, ‘너그럽게 열린 극장 문 앞에서’)에서 언급했던 고민의 해답은 바로 이 점에 있지 않을까. 청춘 드라마야말로 카메라 뒤의 감독이 앞서 나가 인물을 이끄는 것이 아니고 인물이 충분히 그 순간을 경험하도록 의외성과 돌발성이 가능한 상태를 같이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 배우도 감독도 이 상황의 향방을 앞서 나가지 않도록 그저 지금의 얼굴을 제대로,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눈을 잘 닦아야겠다. 이 과정을 통해 카메라에 포착되는 청춘은 어떤 오묘한 빛일지, 어떤 청춘의 표정이 길어올려질지 기대된다. 꽤 엉뚱한 표정일 것 같기도. 영화를 준비하며 이성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려 하지만 극INFP인 나는 한편으로는 작품이 품고 있는 감정에 충분히 동화되려 하는 편이다. (MBTI는 별로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특히 따릉이를 타면서 장면들을 자주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아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야’ 생각하며 바람결에 눈물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솔직히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거의 1년 가까이 이 청춘 드라마의 장면을 떠올리며 따릉이를 탔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앞으로는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감상에 빠지면 안된다고. 담백하게 장면을 직시해야 한다고. 그럼 이제 따릉이 타면서 뭘 생각해야 하지?

[비평] ‘우리’라는 따뜻하고 연약한 말, ‘우리의 하루’

“뜻을 찾지 마.” 삶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이며, 진리는 무엇이냐, 묻는 재원(하성국)에게 홍의주 시인(기주봉)이 단호하게 말한다. 무언가를 정의하기보다는 무언가의 표면을 바라보고 느끼고 틈을 내며, 온전히 존재하거나 존재감이 희박해질 때까지 밀어붙였던 방식은 홍상수의 세계를 따라온 관객에게도 체험되어온 양식 아닌가. 그래서일까. 재원이 술기운이 도는 채로 진지하게 삶과 사랑과 진리와 같이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를 물을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관객인 ‘우리’는 관성의 힘으로 웃었던 건 아닐까. 재원의 치기 어리고도 아름다운 질문에 언젠가 나도 되뇌었을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서도, 홍상수의 영화에 익숙해져 웃는다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 신에서 웃지 않은 이들도 많았을 테고 더욱이 홍상수 감독이 유머를 구사하고자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웃음은 즉흥적이지만 때론 덩달아 웃는 경우도 있는지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관람한 내가 객석의 웃음에 관심을 두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웃음에 관심이 갔던 건 관람 후의 일이 더 크다. 잘 알고 있는 평론가는 <우리의 하루>를 보고 관객이 웃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수렁인가 싶었다. 생각해보면 재원이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데 필수 불가결한 질문을 괴롭게 뱉어내며 “이게 다 뭡니까? 그냥 다 있는 겁니까? 아무 뜻도 없이 그냥”이라고 절실하게 토로할 때 이 진중한 청년의 목소리는 우리 중 누군가의 목소리이기도 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 청년은 진실되게 살고 싶다더니 술자리의 마지막에서 슬며시 거짓말을 하며 늙은 시인을 심심하게 두고 나오지 않는가. 작은 존재들의 큰 힘 홍상수의 영화를 보며 의미를 찾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지 알면서도 <우리의 하루>의 제목에 대해서만은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다. 이 영화엔 수많은 ‘우리’의 ‘하루’가 있다. ‘우리’라는 고양이와 상원(김민희), 정수(송선미), 지수(박미소)로 이뤄진 ‘우리의 하루’, 홍의주, 재원, 기주(김승윤)로 이뤄진 ‘우리의 하루’ 그리고 <우리의 하루>를 보는 관객 ‘우리의 하루’다. 홍상수 영화에서 드물게도 상원의 이야기와 홍의주의 이야기는 교차로 진행될 뿐 서로 겹치지 않는다. 그의 단순한 영화 중에서도 지극히 단순한 형식을 지닌 영화며 카메라 움직임도 적다. 마치 두개의 ‘우리’의 얼마간 비슷한 상황의 삶의 단면을 한 단락씩 나눠서 교차로 배열하며 두 이야기 사이에 세부적인 접점을 만들 뿐이다. 가령 손님이 방문하고 고추장을 타 먹는 라면과 선물과 기타가 등장하며 긴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이상한 인상이 든다. 이 영화는 분명 교차로 진행되고 있으나 교차 진행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게 만든다. 정수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이 영화가 오로지 정수, 상원, 지수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영화 같다가 홍의주 시인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시인의 방에 있는 이들만이 이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느껴진다. 교차편집하는 영화에서 한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이야기를 잠시 잊는 일이 다반사이기는 해도 <우리의 하루>는 사실 서로의 이야기를 잊기 어렵지 않은가. 상원과 홍의주 시인에게는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손님이 어떤 형태로든 조언을 구하기 위해 집으로 방문하고, 둘은 특이한 식습관을 내보이며, 더욱이 두 인물은 서로 비슷한 태도의 발언을 하는데 즉각적으로 연결점이 이어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물론 연결점은 있다. 그런데 연결점이라기보다는 비슷한 기질을 가진 두 주체가 영화라는 틀 안에 따로 기거하고 있다가 같은 바람을 맞으면 비슷하고도 다른 잔향을 남기는 것 같다. 그 잔향 속에서 느껴지는 건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고 솔직하기도 하며, 불안하기도 고독하기도 충만하기도 한 모습일 테다.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런 인물들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결속력 없이 ‘우리’라는 범주에 인물들을 넣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인물들은 만나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장력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의 숏에 어떤 힘도 행사하지 않기에 일정한 구조라는 것조차 생겨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다. 물끄러미 인물들의 삶의 단면을 바라보고 충만하게 느끼고 에피소드를 만들어 작은 존재들의 큰 힘을 마주쳐보고자 하는 소망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이를테면 정수에게는 고양이 ‘우리’가 사라지는 일이, 홍의주 시인에게는 술을 마시는 일일 테다. 단순히 보아도 좋은 것 홍상수 영화의 숏들은 아무리 이 숏과 저 숏이 떨어져 있어도 큰 구조 안에서 이어지거나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우리의 하루>는 순차적으로 나열된다. 다만 상원의 이야기가 아침나절부터 밤까지 진행되는 데 반해 홍의주 시인의 이야기는 집약적이다. 그 때문인지 두 이야기는 홍의주 시인의 이야기에 더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날카롭고 깊게 팬 이야기는 홍의주 시인의 이야기에 담겨 있고 이를 상원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감싸고 있는 인상이다. 말하자면 교차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 보고 나면 겹겹이 쌓인 이야기들을 거쳐 홍의주 시인이 위스키와 담배를 흐뭇하고도 고독하게 마주하는 장면에 도착하는 이야기 같다. 그리고 또 다른 하루가 올 것이다. ‘우리’는 따뜻하고도 연약한 말이다. ‘우리’의 범주는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그 범주에서 빠져나오기도 쉽다. <우리의 하루>는 상원의 ‘우리’가 함께 밤에 술자리를 갖는 것으로 끝을 맺고 홍의주 시인이 홀로 술을 마시는 모습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두 술자리 중 누가 더 충만해 보이냐고 묻는 건 우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우리와 같다. 홍상수 감독이 갑자기 우리가 감정이입할 만한 영화를 힘껏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 애쓰고 솔직해지려고 하나 거짓말도 하고 삶에 나태하기도 하고 충실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기쁘기도 고독하기도 한 그런 작은 존재가 있다. 그런 존재들이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보낸다. 이 단순한 영화를 보면서도 누군가는 미지의 문을 열 듯 눈을 번뜩이며 발견을 향해 나아가겠지만, 단순히 보아도 좋은 게 있는 것 같다. 원래부터 홍상수 영화는 말하기 어려웠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기 더욱 힘들어졌다. 강력한 영화 앞에서 이상하게 느낀 바를 반복해 지적하거나 다른 지점을 짚으려다 종종 길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글은 나왔고 훌륭한 비평 또한 많았다. 하지만 비슷한 불안감이 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지점을 반복해서 지적한다는 자신의 감각에 대한 불안감 말이다. 이 영화 앞에서 나는 속이 후련했다. 둔한 평자가 될지언정 느낀 그대로 본 그대로 이상한 감흥의 실체를 찾아 헤매지 않고 솔직하게 써도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의 하루>는 ‘우리’의 ‘하루’가 예리하고도 두텁게 내려앉아 있는 영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