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기획] 세계와 나 그리고 지브리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

대중적이지 않다. 스토리가 불친절하고 난해하다. 지나치게 많은 상징과 의미들이 부담스럽다. 제목부터 가르치려 드는 것 같다. 1930년 일본의 군수업자를 배경으로 하여 태평양 전쟁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점이 불편하다. 남편이 아내 사후 처제와 결혼한다는 몇몇 설정이 낯설고 이상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쏟아지는 혹평과 아쉬움은 당연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했다는 이번 작품은 지브리의 전작들과 비교한다면 지나치게 진지하고 딱딱한 면이 있다. 전개 과정에서 충분한 설득과 설명 없이 ‘이세계 허용’이라는 식으로 눙치고 지나가는 지점도 종종 눈에 띈다. 심지어 논리적인 전개보다는 의식의 흐름과 작가의 생각이 혼란스럽게 펼쳐지는 탓에 스토리의 개연성만 따진다면 지브리의 흑역사라 해도 좋을 <게드 전기>의 조각난 전개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일 정도다. 한마디로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넘친 끝에 누구의,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진정 놀라야 할 지점은 감출 수 없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호평 역시 만만치 않게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높은 평가가 단지 스튜디오 지브리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광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대중적인 결함과 스토리텔링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호소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이 있다는 것.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본질을 탐색하고 싶다면 이야기 너머에 있는 무언가, 감정을 직접 형상화하는 애니메이션의 근원부터 살펴봐야 한다. 물론 이 또한 많은 에너지와 애정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므로 대전제가 필요하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속으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가. 달리 말해 마음이 흔들리는가. 오프닝 대화재 시퀀스가 증명하듯 이 작품에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정념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이제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좋은 작품이란 영화 바깥의 정보에 기대지 않고 독립된 개별 작품 하나만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실패한 영화다. 정확히는 결연한 마음으로 실패를 향해 돌진하는 영화다. 이 작품은 미완의 질문, 그럼에도 질문을 멈출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실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집대성이다. 각자의 해석과 고찰을 통해 완성되길 기다리는 불완전한 세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관객이 보고 싶은 것보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걸 먼저 제시하는 불친절함에 발길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를 또렷이 마주하고자 하는 장대하고 무모한 야심 앞에서 기꺼이 이 어지러운 결과물에 대한 변명을 대신 할 용의가 있다. 책에서 제목을 빌려와야 했던 이유 제목이 내용을 전부 담진 못한다. 이름은 설명이라기보다는 명명한 자의 소망에 가깝다.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갔으면 하고 바라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도 좋겠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0년 만의 복귀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제목과 아무런 상관없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책을 원작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제목은 도리어 힘을 얻는다. 그만큼 강력한 의지와 소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한 이 제목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펼쳐 보인 다소 난해하고 불친절한 미로를 탐색하기 위한 최적의 이정표다. 우리는 마땅히 질문해야 한다.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왜 굳이 이런 거창하고 교조적으로 보일 우려가 있는 제목이 필요했는지에 대한 변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제목이 붙은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선물받은 책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작품 속에서도 마히토(산토키 소마)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이 책을 정리하는 장면이 짧게 등장한다. 소년 미야자키의 가치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소년 코페르의 성장과 방황을 담은 고전이다. 10개의 꼭지마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불합리에 대해 질문하고 외삼촌의 댓글 같은 답변이 이어진다. 예컨대 나폴레옹은 영웅인지 독재자인지, 훌륭한 사람과 훌륭해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다른지 등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탐색하는 질문을 통해 세계의 고통과 모순을 직시하도록 사색의 기회를 부여한다. ‘나’라고 하는 송곳으로 세계에 균열을 내는 법을 일러주는 이 책에는 당대 일본 소년들이 군국주의의 악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를 소망했던 작가의 염원이 담겨 있다. 미야자키 역시 그 염원의 씨앗을 받아 자신만의 색으로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져 마침내 피어난 한 봉오리의 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의 근간에는 전쟁을 반대하고 권력을 혐오하는 아나키스트적인 기질이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생태주의, 전설과 민담에 매료된 애니미즘 등의 특색은 이런 자유로운 사상을 근간으로 꽃피운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은 인간 미야자키 하야오의 시작점이자 아직도 멈추지 않는 질문이다. 여전히 확신할 수 없기에 다시금 붓을 들어 또 한번 외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몇 가지 단호한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안에 답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답이 있는 척 위장하여 쉽게 옳고 그름, 흑과 백을 단언한다. 훌륭함이란 자신의 입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되돌아오는 메아리와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모호해야만 한다. 질문을 던지되 답을 내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작품은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질문 자체가 답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 속의 유일한 질문은 오직 제목에만 허락된다. 정작 본편에 들어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본편의 장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질문을 탄생시키기 위한 과정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소년 마히토의 모험을 함께 겪은 관객만이 끝에서 이렇게 자문할 수 있다. (현실)세계로 돌아온 나는 어떻게,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하야오와 지브리의 연대기 위에 놓인 현실과 이세계 1930년대 일본, 마히토의 어머니 히사코는 입원 중인 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해 세상을 떠난다. 태평양전쟁의 군국주의 시절임을 감안하면 아마도 폭격으로 인한 화재일 가능성이 높다. 소년 마히토는 이때부터 온갖 부조리를 마주한다. 사람을 살리는 병원에서 어머니가 불에 타 사망한다는 부조리. 게다가 아버지는 폭격기에 납품될 조종석 덮개를 만드는 방산업체 사장이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인 나츠코(기무라 요시노)와 관계를 맺어 임신을 시키고, 아버지의 재혼을 위해 마히토는 나츠코가 살고 있는 시골로 이사를 간다. 나츠코는 마히토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소년에게는 그 친절 역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조리다. 뒤틀림은 학교에서도 이어진다. 부유한 집안의 자식인 마히토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사소한 다툼이 이어지자 소년은 스스로 자해하여 학교와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소년을 둘러싼 세계는 모두 부조리하게 다가온다. 마히토는 그럴수록 속마음을 숨기고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동시에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공상의 세계가 소년을 방문한다. 어느 날 사람의 말을 하는 왜가리가 나타나 마히토에게 말을 건다. 왜가리 남자(스다 마사키)는 마히토의 엄마가 아직 살아 있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다. 마히토는 처음엔 거부하는 듯하지만 마치 왜가리에게 매혹된 듯 대응한다. 왜가리의 깃털로 화살을 만들고 왜가리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마히토는 왜가리가 안내해줄 세계를 기다린 것처럼 보인다. 이윽고 임신 중인 나츠코가 사라지자 왜가리는 자신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겠다며 저택 뒤에 있는 오래된 탑으로 향한다. 마히토와 왜가리는 우여곡절 끝에 탑을 통해 이세계로 함께 떨어진다. 마히토가 속한 현실 세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이세계에선 이해하기 힘든 일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소년 마히토는 마치 예정된 일인 양 크게 놀라는 일 없이 담담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난해하고 불친절하다고 느껴진다면 상당 부분은 마히토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소년 마히토는 펠리컨과 앵무새들이 자신을 공격하고 잡아먹으려 해도 딱히 리액션을 하지 않는다. 마히토는 마치 관찰자(혹은 관객)처럼 세계를 유람한다. 이세계를 여행했다가 돌아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류의 서사는 로드 무비와 성장 서사, 그리고 판타지적인 상상력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여기서 판타지는 은유와 상징으로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 이세계가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지가 핵심 포인트라는 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현실 세계와 탑 속 세계가 명확히 구분된다. 현실 세계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 시절이 기억의 편린처럼 녹아들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삼촌은 항공기 회사 사장이었고 아버지는 공장장이었다. 그런 미야자키의 손에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어머니의 손을 거쳐 쥐어진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짝 비켜난 미야자키는 역설적으로 전쟁의 그림자를 누구보다 세밀하게 또는 뒤틀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속 마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린 학생들만 있는데 이는 지극히 현실 반영적인 묘사 중 하나다.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비정상적인 세계의 모순을 어린 미야자키는 온몸으로 체험하며 창작의 자양분으로 삼은 것이다. 어린 미야자키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속 마히토처럼 그걸 제대로 분출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해하는 등 뒤틀린 방식으로 표출했다.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던 마히토는 탑이라는 이세계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어쩌면 마히토가 탑으로 향하는 건 새어머니 나츠코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택한 도피일지도 모르겠다. 탑이 상징하는 바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직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스튜디오 지브리로 상징되는 애니메이션 업계가 아닐까 싶다.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는 인터뷰를 통해 마히토가 미야자키 하야오, 왜가리 남자가 자기 자신, 탑의 큰할아버지가 하야오의 친구이자 스승이기도 했던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모델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게 대입하면 은유는 명료해진다. 탑은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운석을 둘러싸기 위해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다. 오늘날의 스튜디오 지브리가 있기까지 여러 스탭들이 몸을 던졌고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다. 잔혹하고 냉정한 해석을 한다면 수많은 펠리컨들은 꿈을 좇아왔지만 끝내 안식처를 찾지 못한 창작자들처럼 보인다. 이 잔혹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한 큰할아버지는 완벽하게 보이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국 허물어져가는 걸 돌이키기 불가능한 일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이어받길 바랐던 소년에게 말한다. 너는 나가서 너의 세계를 펼치라고. 이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에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는 문구가 쓰인 문이 있다. 이는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미야자키의 경고처럼 보인다. 탑 안에는 죽음을 기다리며 떠도는 왜가리들이 있고, 식욕에 먹혀 포화 상태에 시달리는 앵무잉꼬들이 있다. 이것이 자신의 길을 제대로 찾아 걷지 못한 창작자들의 말로다. 포기하고 좌절하거나 적당히 다른 것을 흉내내어 그럴싸해 보이는 작품을 양산해 배만 불리거나. 미야자키는 다음 세대에게 자신을 그대로 배우고 모방하지 말고 넘어서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탑 안의 세계는 시간이 정지한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이다. 불의 소녀 히미는 히미코의 과거가 탑 안의 세계에 남겨진 모습이다. 히미는 자신이 언젠가 불에 타버릴 운명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불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아들이 될 마히토를 축복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자신의 과거이자 소년 마히토의 미래를 탐방하고 돌아온다. 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세계를 창조하는 대신 원래 세계로 돌아가 왜가리 같은 친구들과 함께 살겠다는 미야자키의 바람은 이뤄졌을까. 아니면 이건 지금 자신에게 건네는 각오일까. 알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자는 현실 세계의 마히토는 물론 탑 세계의 큰할아버지와도 겹쳐 보인다. 시간이 뒤섞인 탑 안은 미야자키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이기도 하다. 두 세계를 넘어 확실히 전달되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애틋한 마음이다. 증오와 악의가 넘쳐나는 세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을 확인하고 지키는 것 정도다. 세계를 의심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의심하는 행위를 통해 자아를 지켜온 한 인간이 마침내 되돌아간 근본이자 도착점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다. 하나의 세계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고통, 이른바 부조리에 저항하다 보면 저절로 껍질이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세계란 언제나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만약 완성된 세계가 있다면 그건 죽은 세계, 멈춘 세계일 것이다. <그대들은어떻게 살 것인가>가 완성된 세계관에 대한 완벽한 묘사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간절한 질문이자 당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요한 건 완벽한 세계가 아니다. 불완전하기에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완벽에 다다르지 못해 더 간절한 미완의 아름다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과거를 은유한다면 이 영화의 서사는 필연적으로 불친절하고 헐거울 수밖에 없다. 지브리의 작품은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아왔지만 그 완벽에 다다르는 과정은 언제나 불완전한 모험과 실패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환상과 상상으로 은유한다는 건 애초에 차분한 설명이나 설득과는 거리가 멀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담긴 건 여전히 격렬히 불타고 있는 마음, 전해야 할 말이 넘쳐 자신의 근본으로 되돌아간 한 창작자의 근심이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근심의 형태는 서사가 아닌 그림으로 표출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글보다 그림, 시나리오보다 콘티로 먼저 상상하는 창작자이다. 말과 이야기로 내용을 설명하기 이전에 작화와 이미지가 먼저 당도하는 종류의 사람, 시각적 언어인이라 해도 좋겠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압도적인 작화는 때때로 감정의 형태를 그대로 담아 전한다. 오프닝에서 소년의 모든 것이었던 어머니를 불사르는 불은 위험하면서도 아름답다. 이후 어머니의 과거이자 불을 사랑하는 탑의 소녀 히미까지 연결하면 예술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과 슬픔마저 승화시킨 진심을 반영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과 서사가 없더라도 그 장면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벅찬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손으로 그린 작화이기에 가능한 감정이라고 단언하진 않겠다. 분명한 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야기나 상징, 의미보다 감정이 먼저 형상화되는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감정과 정서를 응축한 그림의 연쇄. 애초에 애니메이션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미술관의 영화’라는 극찬이 쏟아진 건 우연이 아니다. 물, 불, 바람을 아우르는 지브리의 곡선의 공통점은 모두 ‘흘러넘친다’는 데 있다. 심지어 빵에 바르는 잼, 물고기의 내장 묘사까지도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세계.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라보는 세계는 그러하다. 세계가 아무리 나를 위협해도 마땅히 부드럽게 받아넘길 수 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애니메이션을 향한 애정이, 다음 세대를 향한 응원과 걱정이, 아직도 할 말이 흘러넘쳐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며 근본으로 돌아간 거장의 현재다. 설사 이 불친절하고 고집스런 방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부드러운 곡선의 미학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터뷰] 미야자키 하야오의 심경이 오롯이 반영됐다,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

스튜디오 지브리에는 세명의 천재가 있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 이들은 지브리뿐 아니라 오늘날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틀을 만든 사람들이다. 이중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는 지브리의 살림꾼이자 꿈을 현실로 만들어온 실질적인 개척자다. 스즈키 도시오는 길이 없으면 새로 만들어가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불완전하고 무모한 프로젝트를 끝내 완성해냈다. - 미야자키 하야오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 거짓말쟁이! (웃음) 천연덕스럽게 아이디어를 던졌다가 다음날 되면 시치미를 뗀다. 미야자키는 내가 그렇다고 하고. 은퇴를 한다고 해놓고 계속 돌아오지 않았나. (웃음) 그가 거짓말쟁이라서 다행이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면서도 계속 함께 여정을 걸어왔다. 이번 작품 속 주인공 마히토가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왜가리는 나를 모델로 했는데 두 캐릭터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지난 세월을 보는 것 같아 많은 생각이 들었다. - 요시노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지만 사실 오리지널 스토리다. 감독 본인의 자전적 기억이 반영된 걸로 알려졌는데. = 미야자키 감독은 매번 제목을 정해놓고 작업을 한다. 타이틀이 내용을 결정한다고 해도 좋겠다. 예를 들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때 배급사에서는 <바람의 전사 나우시카>로 바꾸고 싶어 했는데 그럴 경우 아예 다른 영화가 되는 셈이다. 그동안 소녀를 주인공으로 해왔는데 본인이 잘 모르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마히토는 굉장히 어두운 면을 지닌 소년인데 본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다. - <바람이 분다> 이후 정말 은퇴를 했다고 여겼는데 또 한번 복귀했다. = 미야자키 감독이 거짓말쟁이라고 했지만 실은 그는 입이 매우 무겁고 신중한 사람으로 진심이 아니면 말을 꺼내지 않는, 솔직한 사람이다. 은퇴를 선언했을 때 매번 진심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일본 불교에 선(禪)이란 개념이 있는데, ‘지금 이 장소에서의 생각’을 의미한다. 미야자키 감독이 정말 그런 분이라 오전의 생각과 오후의 생각이 바뀐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지금 미야자키 하야오의 심경이 오롯이 반영된, 해야 할 말이 쌓인 결과다. - 2016년 각본 작업이 시작됐으니 제작 기간만 7년이 걸렸다. 장편 제작만 3년이 걸린다며 조심스럽게 시작했는데 결국 7년이었다. = 이제껏 작업한 것이 평균 3년 정도가 걸렸을 뿐 이번에는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시간과 예산을 투입할 작정이었다. 예산을 확보하고 거기에 맞추는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작비와 기간을 정해두지 않고 최고의 퀄리티를 목표로 만든 거다. 솔직히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향으로 보아 10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짧은 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웃음) - 제작비 전액을 지브리가 부담하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방식이다. 당신은 일본의 제작위원회 모델을 만든 장본인인데, 이번에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이유가 있나. = 미야자키 하야오의 복귀작이다. 해보지 않았던 방식과 완성도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을 거라 판단했다. 솔직히 <바람이 분다> 이후 체력적인 문제로 더이상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모든 상황을 뒤집을 만큼의 간절함과 의지가 있었다. 기간이 무한정 늘어나면 제작위원회에 민폐를 끼치는 일이니 지브리의 힘으로 해내야 했다. 지속 가능한 모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직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위한 케이스다. - 미야자키 감독의 경우, 더이상 은퇴는 없고 이미 차기작을 제작 중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 이제 굳이 은퇴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은퇴는 없다. 다만 차기작은 아직 아예 언급도 없다. 적어도 앞으로 1년은 혼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마주하지 않을까 싶다. 차기작은 그다음에야 이야기가 가능할 것이다.

[인터뷰] 한발 더 나아간 완성도를 추구하며, 혼다 다케시 작화감독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작화로 유명한 혼다 다케시는 <벼랑 위의 포뇨> <털벌레 보로>를 거쳐 마침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작화감독을 맡아 무려 7년을 이 한편의 작품에 매진했다.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가 꼭 필요한 인재로 점찍어 어렵게 초빙한 그는 미술관에 걸려도 손색이 없을 이번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평소에 시도하지 않았던 그림을 원 없이 그려보았다”는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한 단계 도약하고 성장한 것 같다”며 후일담을 풀어놓았다. - 주로 가이낙스와 작업해왔는데 이번에 작화감독직을 맡았다. = 얘기한 것처럼 가이낙스에서 오래 일했다. 가이낙스를 나온 뒤에는 여러 스튜디오와 협업했는데 지브리와의 첫 작업은 <포터블 공항>이라는 뮤직비디오였다. 이후 <벼랑 위의 포뇨>나 <털벌레 보로> 등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님과 함께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제안을 받은 건 <털벌레 보로>를 작업할 때였다.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작화를 한번 더 수정하는 걸로 유명한데, 이번에는 작화 수정 요청을 거의 하지 않을 정도로 만족도가 높았다고 들었다. =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 (웃음) 원화가 1차 완성되면 러프한 수정이 들어온다. 그걸 보고 감독님의 의도를 파악한 뒤 작업을 이어가는 게 기본 프로세스다. 그런데 미야자키 감독님이 작품 내내 건넨 말이 ‘힘을 빼고 그리라’는 거였다. - 단 한 장면도 힘을 빼고 그린 부분이 없다. = 감독님의 복귀작인데 이렇게 부담 가득한 프로젝트에서 힘을 뺄 수가 있나. (웃음) 다른 애니메이터들도 다들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어쩌면 이게 감독님의 마지막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평소엔 ‘여기까지면 충분하다’는 기준에서 한발 더 나아간 완성도를 추구했다. - 곡선과 유기적인 움직임은 지브리의 특징이다. 이번엔 물뿐만 아니라 불, 바람 등 자연의 곡선과 움직임이 모두 역동적으로 표현된다. = 미야자키 감독은 감정 표현에 굉장히 집중한다. 다만 그게 인물의 표정에 국한하지 않고 자연현상에도 자연스레 묻어나게 그리고자 했다. 초반부 화재 장면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투입됐고 첫눈에 관객을 압도하길 바랐다. 후반부에는 바람 표현을 많이 했다. 특히 새엄마인 나츠코가 머무는 산실의 경우 바람이 눈으로 보일 수 있도록 꽉 채워넣는 표현을 했다. 바람은 언제나 부딪쳐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묘사했다. 자연 묘사는 그 자체로 보는 즐거움을 주지만 연출의 의도를 정확히 표현하는 게 핵심이었다. - 음식 묘사 역시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 빠질 수 없다. 잼을 바른 빵이라든지. 그중 특히 생선을 해체하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 빵에 잼을 발라 먹는 장면에서 솔직히 속으론 “누가 이렇게 잼을 많이 올려 먹어?”라고 생각했다. 이러면 빵 맛은 하나도 안 느껴질 텐데. (웃음) 하지만 감독님의 어린 시절 물자가 부족해 이렇게 과장해서 올려 먹고 싶었던 욕망이 반영된 게 아닐까, 라고 짐작한다. 생선 해체 장면은 내장까지 세세히 묘사했는데 어쩌면 요즘 젊은이들에겐 낯선 광경일지도 모른다. 감독님이 굉장히 공들인 장면으로 이런 생소한 경험들, 실패와 불편함을 통해 젊은이들의 세계가 넓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 캐릭터 묘사도 흥미롭다. 이번 작품의 귀여움을 담당한 와라와라는 직관적이면서도 잘 디자인되었고 특히 할머니들의 둥글둥글한 모습은 마치 정령처럼 느껴진다. = 와라와라는 앞으로 태어날 생명들을 묘사한 캐릭터로 단순하고 귀엽고 한편으론 깊이가 있는 존재다. 할머니들의 묘사를 연결해 이야기하니 재미있다. 주름도 많고 동작도 복잡해서 사실 쉽지 않은 캐릭터들인데 미야자키 감독님이 워낙 노인을 등장시키는 걸 좋아한다. 디자인적으로는 와라와라의 심플함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세월과 연륜을 쌓아가면 묘사해야 하는 선, 주름도 많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기획] ‘미래소년 코난’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까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걸어온 궤적

워커홀릭의 애니메이터, 올 라운더 감독이 되다 <미래소년 코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예술가에게는 인생을 바꾼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봤던 도에이동화의 <백사전>(1958)이었다(특히 파이냥이라는 여자주인공에게 반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게 된 그는 1963년 도에이동화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터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A프로, 즈이요영상 등을 거치며 <태양의 왕자> 장면 설계 및 원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장면 및 화면 설정 등을 맡은 미야자키 하야오는 동료들의 5배에 다다르는 작업량을 자랑한 워커홀릭이었다. 그의 괴물 같은 에너지는 닛폰애니메이션으로 이적한 뒤 최초의 30분짜리 애니메이션 시리즈 <미래소년 코난>의 연출을 맡는 발판이 됐다. 여기에 더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원작의 각색에 적극 개입해 대략적인 이야기 구성은 물론 세부 줄거리까지도 작가와 논의하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증명해냈다.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 있을 당시 연출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그의 첫 극장판 장편애니메이션으로, 이 역시 시나리오작가와 줄거리에 대해 치열하게 의견을 나누며 완성한 결과물이다. 이같은 경험은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과 각본, 연출, 작화를 모두 해내는 올 라운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인정받는 토대가 됐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니메쥬>에 직접 만화로 연재한 이후 영화화 연출 및 각본까지 맡았던 작품이다(1982년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연재를 시작했고,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1984년 개봉했으며, 만화는 1994년 완결됐다). 나우시카는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난파한 오디세우스를 사랑하고 구했던 왕녀의 이름이다. 여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의 ‘쓰쓰미추나곤’ 이야기에 등장하는 ‘벌레를 사랑하는 공주’의 이미지를 결합했다. “사회의 속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감성대로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풀과 나무, 흘러가는 구름에 마음이 움직이던” 공주는 어느덧 나우시카와 겹쳐지며 미야자키 하야오만의 새로운 캐릭터로 재탄생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소녀 나우시카는 인간과 곤충을 똑같이 여긴다. 또한 곰팡이의 숲인 부해(일본 구마모토현 미나마타만에서 확산됐던 수은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편집자)가 영화 초반에는 인간에게 위협적이었지만 엔딩 부분에서는 충분히 공존 가능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후 미야자키의 영화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이어진다. 한편 미야자키가 가정하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경제 성장이나 인간 수명의 정체까지도 내포한다. 장수하는 것에 별 욕심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밝혀왔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연에 사이클이 있듯이 인간도 일정한 수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굳이 저염식이나 조깅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어린이에서 여성 그리고 중년 남성까지, 지브리의 접점 확대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마녀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천공의 성 라퓨타>(1986)는 1985년 미야자키 하야오가 스즈키 도시오, 다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 이후 공개된 첫 작품이다. 기술만능주의를 비판하며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을 강조한 <천공의 성 라퓨타>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그리스 서사시를 기반으로 한 전작이 애니미즘의 영향을 짙게 깔고 있다면, 벨 에포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소년과 소녀의 모험 활극 <천공의 성 라퓨타>는 보다 장르적인 접근성이 높았다. 텔레비전이 없던 1950년대의 일본으로 돌아간 <이웃집 토토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과거 그림책으로 구상했던 아이템 중 하나였다. 어릴 때 왠지 크게 느껴졌던 녹나무, 실제 어린이들이 달리는 모습, 처음 이사 와서 가구 없는 텅 빈 집을 뛰어다니는 자매의 풍경 등 “토토로와 고양이버스, 검댕 외에는 전부 본 적이 있는 것들”(<이웃집 토토로> 로망앨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인터뷰)로 그림을 채워넣어 허구의 리얼리즘을 살렸다. 사실 이따금 작품이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해온 창작자다. “지금 일본에 있는 아이들의 소망을 포함해 아이들의 현실을 그리며 아이들이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필름을 만들고 싶다.”(<아니메쥬> 도쿠마쇼텐 1991년 5월호) <이웃집 토토로>는 그의 의도와 관객의 실제 반응이 오랫동안 일치한 클래식이다. 제작 전만 해도 독립된 영화로서 흥행성을 인정받지 못해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와 동시 상영했지만 특히 TV 방영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미야자키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됐다. 가도노 에이코의 원작을 각색한 <마녀배달부 키키>는 원래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젊은 신인감독이 연출할 예정이었지만 배급사가 좀더 이름값 있는 감독을 요구하면서 연출이 바뀐 경우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안을 쓰지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마녀배달부 키키>를 기점으로 그의 영화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이 훨씬 현실적이고 주체적인 양상을 띠게 됐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지방에서 상경해서 생활하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 겪을 만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동시에 ‘당신이 그리는 여자아이는 모두 공주다’라는 것에 반하고 싶은 일종의 의지도 있었다.” (<마녀배달부 키키> 로망앨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인터뷰)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온, 완벽한 해피 엔딩보다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주어진 재난 앞에 어떻게든 ‘살아가는’ 덤덤한 자세는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소년 만화보다는 씩씩한 소녀들의 용기와 더 어울린다. 돼지로 변한 파일럿이 주인공인 <붉은 돼지>는 비행 장면을 사랑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마음껏 자신의 취향을 발산한 영화였다. 직접 작성한 연출 각서에서는 “소년소녀들이나 아줌마들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하지만, 우선 이 작품이 ‘피곤해서 뇌세포가 두부가 된 중년 남자들을 위한 만화영화’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뒀다. 군용기나 군함, 전차를 좋아하는 ‘밀리터리 덕후’로 유명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탈것의 발전은 의미 면에서 “새로운 전망, 미지의 세계를 가져오는 과정”이며 영화적으로는 ‘이동하는 시점’을 보여줄 수 있다. 다만 활공의 이미지는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본질에 충실해야 하며 단순한 스펙터클로 소비돼서는 안된다는 것은 그의 오래된 지론이다. “만화영화 속에서 탈것이 땅을 달리고 물을 가르며 넓은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은 사람을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월간 애니메이션> 1980년 7월호) 역대 최고 흥행과 영화제 수상,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성기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이웃집 토토로>를 만든 후 이상한 상황이 발생했다. 자연은 지키지 않으면 망가진다는 위기의식에서 자신들 주위에 있는 식물을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식이 됐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좀더 숙업이라고 해야 할 만한 인간 존재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를 갖고 있다.”(<시네프런트> 1997년 7월호, 미야자키 하야오 인터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동화적으로 보여준 전작들은 자칫 자연을 보기 좋은 풍광으로만 소비하거나 인간 불신을 조장하는 한계에 빠질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에게 해로운 생물까지 포함한 자연관으로 인간 중심적 사고를 극복하려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묘사가 많은<모노노케 히메>는 선악 구도를 벗어나 인간과 자연의 공존 가능성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현실적으로 인류에 가능한 미래를 묻는다.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비행기나 곤충 등 동물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계를 스크린에 재현함으로써 새로운 자연관을 체험하도록 한 오랜 생태주의자다. “인간이 돋보기로 본 세계가 아니라, 풀이 엄청난 거목이 되고 땅이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며 비나 물방울 등 물의 성질도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월간 에혼 별책 애니메이션> 스바루쇼보 1979년 3월호) 애니메이션은 시점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매체이며, <모노노케 히메>는 신과 동물, 정령의 캐릭터에 입체성을 부여하는 숙제를 해낸다. 한편 대량생산, 대량판매가 불가능한 2D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면서 TV시리즈가 아닌 극장용 장편으로 살아남는 것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절실한 과제였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천착해온 주제의식을 확장하면서 회사의 생존을 위해 마지막 사활을 건 액션 대작이기도 했다. 개봉 초반에는 전작에 비해 어둡고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에서 역대 최다 관객(1450만명) 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한 <모노노케 히메>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을 시작으로 서구권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모노노케 히메>를 은퇴작으로 여겼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후 감독보다는 제작자로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검토했다. 하지만 작품의 방향에 대한 입장 차이로 원래 연출을 맡기려던 젊은 신인감독이 하차하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복귀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악을 처단하고 위기에서 빠져나온 소녀의 성장담이 아니다. “현실이 뚜렷하고 옴짝달싹 못하는 관계 속에서 위기에 직면했을 때 본인도 알지 못했던 적응력과 인내력이 솟아나와 과감한 판단력과 행동력을 발휘하는 생명을 스스로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기획서 중) <모노노케 히메>의 흥행 성적을 뛰어넘고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소설가 다이애나 윈 존스의 판타지 소설을 기반으로 한 스팀펑크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 다음을 잇는 지브리의 흥행작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담아온 반전이나 자연주의와 같은 메시지가 알기 쉽게 녹아든 가운데 하울과 소피의 캐릭터 작화와 러브 스토리가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삼은 <벼랑 위의 포뇨>는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과 달리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제작 단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히사이시 조 음악감독에게 보낸 메모에 따르면, “바다는 여성원리, 육지는 남성원리, 포뇨는 여성원리의 틀을 나타내는 존재”에 해당한다. 정석적인 플롯을 따르지 않고 생명과 아이, 인류의 미래와 새 시대의 희망을 관념적으로 논한 이 작품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는 ‘넥스트 하야오’를 찾아야 할 기로에 선다. 제작자 미야자키 하야오와 두번의 은퇴 번복 <마루 밑 아리에티> <코쿠리코 언덕에서><바람이 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쩌면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다고 언급하며 <벼랑 위의 포뇨>를 만들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나이는 67살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가 절실했던 스튜디오 지브리는 <벼랑 위의 포뇨>의 원화를 담당했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잠재성을 주목했고, 그는 <마루 밑 아리에티>로 감독 데뷔를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는 애니메이션 전공도 관련 경력도 없었지만 지브리 미술관을 성공적으로 론칭하면서 스즈키 도시오의 신임을 얻어 <게드 전기>를 연출한다.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 연대기 중 <머나먼 바닷가>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지브리 역사상 최악의 작품이라는 혹평도 받았지만, 차기작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전작보다 연출이 개선됐다는 평을 받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루 밑 아리에티>와 <코쿠라코 언덕에서>의 제작 및 각본에 참여했다. 특히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1990년대부터 미야자키 하야오가 마음속에 원작을 품었을 만큼 애정을 갖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로알드 달의 <비행사들의 이야기> <단독비행> 등 비행기물을 사랑하고 해외의 전쟁기록물까지 탐독하는 마니아다. 생태주의자이자 반전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로는 유엔평화유지활동을 반대했던 그가 평생에 걸쳐 밀리터리에 심취했다는 점은 지독한 위선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연출을 결심하기 전까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으로 공식화됐던 <바람이 분다>는 그의 평생에 걸친 자기모순을 아예 전면에 드러낸 영화다. 죽음과 쾌감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비행에 매혹된 소년에게서 거의 모든 필모그래피에 활공의 순간을 그려넣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아가 읽힌다. “지금 내가 일본인이 몰락하려 하는 한심한 시대를 보고 있다.” 1996년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사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일본의 미래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이 쇼와 시대 전쟁을 일으키며 저지른 죄악을 지우기 위해 양적인 성장을 위해 쉴 새 없이 내달렸다고, 버블 붕괴 역시 무리하게 전쟁을 감행한 일본이 무너진 것과 맥락을 함께한다고 주장한다. 초등학생 때 요시노 겐자부로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처음 읽었다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책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동안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고 정의해볼 법한 예술가다. 은퇴 번복 후 무려 7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소년과 소녀, 모험과 활극, 반전, 무정부주의, 생태주의 등 그동안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를 구성했던 테마들이 집대성된 작품이다. 태생적인 죄의식을 품은 전쟁 세대의 업보를 긍정하고 혐오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용기’를 후대에게 북돋는 거장의 필치는 직설적이지만 아름답다.

[기획] 어린 시절은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트리비아,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들

빛처럼 달려나가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도입부에서 우선 화면의 리듬을 지배하는 것은 소년 소녀들의 잽싼 동작을 역동적으로 처리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특유의 ‘달리는 리듬’이다. 2층 계단을 순식간에 뛰어올라 어머니의 병원에 불이 난 상황을 목격한 마히토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길로 전쟁의 포화로 물든 거리를 달음박질치는데, 만화적인 속도감과 불로 번지는 화면의 풍경은 비단 역사만이 아닌 어느 유년의 신화로 진입 중이란 사실을 생동감 있게 알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작품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부터 꾸준히 이어진 축지법에 가까운 빠른 달리기는 경쾌함과 슬픔을 동시에 견인하는 강력한 기술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활극이 시작됨을 알리는 일종의 주문이다. 조류의 향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조류 캐릭터는 주로 변신 모티프와 함께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유바바로 이들은 새(까마귀)로 변해 날아간다. 반면 이번 신작은 왜가리, 펠-리컨, 거대 앵무새가 가히 습격이라 할 만한 물량 공세를 펼치는데, 이들은 생태주의에 천착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랜 공상 속에서 자연스레 태동한 존재인 동시에 상공 위의 전쟁, 제국주의 아래 소진된 인간, 신경증적 공포 등이 점철된 저승 세계의 표상이기도 하다. 비행기의 딜레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비행선은 줄곧 가장 미학적인 사물이자 작품의 모티프로 기능하곤 했다. <붉은 돼지> <천공의 성 라퓨타>로 대표되는 미야자키 하야오, 스튜디오 지브리의 비행기 사랑은 <바람이 분다>의 가미카제 특공대 제로센을 낳아 정치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많은 한국 관객들이 난색을 표했다. 감독은 <바람이 분다> 개봉 당시 “한 시대를 살아냈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말하며 한국 관객에게 가미카제 특공대 비행기가 불편하게 다가간 만큼 수많은 일장기가 추락하는 이미지로 이미 자국에서도 비판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 “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어린 시절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애니메이터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가정환경부터 미야자키 하야오가 품었던 근원적인 슬픔과 염오까지, 모두 그 자신의 절절한 유년에 근거하고 있다. “저는 이것이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강하게 느낍니다.” 2016년, AI로 만든 기괴한 게임 캐릭터를 보며 미야자키 하야오가 가한 신랄한 비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생명체를 표현함에 있어 판타지마저 최소화한 자연주의적 접근이 두드러진다. “누구나 무의식 속 깊은 곳에 내재한 바다와 파도 치는 외재적 바다가 있다. 이것은 서로 통한다. 나는 직선을 없애고 싶다. 따스하지만 비뚤어져서 마법이 존재할 수 있고, 투시도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수평선조차 불거져 나와 뒤틀어지고 흔들리는 세계를 그리고 싶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바다에 대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히토는 죽음의 장소로서의 바다에 당도한 뒤, 곧 바다 위로 날아가는 와라와라들을 보며 그곳이 탄생의 배경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대들은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이 될 확률이 클 것으로 보이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나온 시점에 그와 같은 거장에게 애니메이션 작업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묻게 된다. 결과물은 비범할지언정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도 작업의 고통은 끝까지 평등했다. 이 제작한 4부작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한 10년>(2019)에서 하야오는 하루 종일 아틀리에를 서성이면서 신음한다. 남다른 탁월함을 소유한 그가 마감을 앞두고 중얼거리는 말들은 제법 친근하다. “뭔가를 먹어야겠어.” “졸린다, 낮잠을 자야겠군.” “집중이 안돼. 아직 리듬을 못 찾고 있어.” “이빨 빠진 빗이 된 것 같구먼.”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고.” “난 일상에서 행복했던 적이 없어.” “고통, 고통, 정말이지 고통이구나!”

[기획] ‘히사이시 조의 선율, 요네즈 겐시의 목소리, 그리고 침묵’,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사운드, 음악에 관하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사운드 조형에 있어 두드러지는 특징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강조해온 ‘마’(間)에 있다. 이번 신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과되지 않은 정수 혹은 염원이 만개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독의 자전적 내용을 풀어 썼다는 것보다 침묵에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진정 미야자키 하야오답다. 전쟁 중에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의 동생인 새어머니 밑에서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소년이 신비로운 탑 주위를 배회한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서사적 동력이 없는 내러티브이기에 음악으로나마 극적인 동요를 추구할 법한데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반부까지 음악은 물론, 바람 소리 같은 배경음까지 최소화하며 면밀한 접근을 보인다. 감독은 2002년에 미국 평론가 로저 이버트와의 인터뷰에서 “이 비어 있는 상태는 의도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그 필연성을 설명했다. “침묵을 두려워하면 끊임없이 종이를 덧대게 된다. 관객이 지루해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숨 쉴 틈 없이 강도를 높인다고 해서 집중도를 발휘하리란 보장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감정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소년의 삶으로 천천히 날아오는 왜가리의 날갯짓과 발걸음에서 죽음의 소리를 듣는다. 전쟁하는 세계의 악의에 짓눌린 소년이 자기 머리를 짓이겨 피를 흘릴 때, 신음도 내지 못하는 그 무거운 고통에 기꺼이 전염된다. 충분히 인내한 후 틈입하기 시작하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슬픈 망상의 세계에 서서히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수작업으로 렌더링된 수백만개의 프레임에 율동감을 부여하는 히사이시 조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시작으로 11번째 협업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까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목받은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 함께했다. <아시타카의 전설>(<모노노케 히메>)이 대표하는 바, 그는 수려한 사운드를 점차 장엄하게 불려가는 크레셴도의 음악으로 애니메이션의 감흥을 극대화하는 작곡가다. <인생의 회전목마>(<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왈츠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뉴에이지를 재해석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 쓸쓸한 서정도 각별히 불어넣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르러 히사이시 조는 후반부에서 주술적이고 장엄한 저승 세계의 스코어를 불러낸다. 한편 가장 주목받는 음악은 따로 있다. 2018년 발표한 싱글 《레몬》을 기점으로 빌보드 재팬 톱 아티스트 1위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이한 91년생의 싱어송라이터 요네즈 겐시의 주제가 <지구본>이다. <지구본>은 요네즈 겐시가 작품의 콘티를 보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와 직접 머리를 맞대고 4년 동안 고민한 결과물로, 스코틀랜드 민요에 기반해 피아노와 드럼, 코러스로 단순한 구성을 추구했다. 작업 마지막 무렵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에서 영감을 얻어 백파이프를 추가했고 공동 편곡한 반도 유타의 어머니가 쓰던 오래된 피아노로 녹음해 페달을 밟는 삐걱이는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었다. 여기에 더해, 마히토는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떠올리며 쓴 가사가 결정적이다. 목소리는 “계절 속에서 엇갈리며 때로는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빛에 닿고 그림자는 길어지고 하늘은 더욱 멀어져”라고 상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어서 “바람을 맞으며 달려 잔해 더미를 넘어”, “비를 맞으며 노래”하고, “비밀을 잊지 않도록”, “한 조각 움켜쥐고”, “작은 나의 올바른 소망”을 품는다. 말하자면 <지구본>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마지막까지 생각하고 그려나가는 영원한 이상이자 지금 발 디딘 세계다. 요네즈 겐시의 인터뷰에 따르면 데모곡을 처음 전달한 날 미야자키 하야오는 가사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획] ‘지브리는 여전히 움직이는 중’, 스튜디오 지브리의 변화, <바람이 분다> 이후 해체부터 TV 산하로 들어간 지금

2014년 8월, 지브리 주주총회에서 제작팀 해산이 발표됐다. 수차례의 은퇴 번복 중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당시로서는) 마지막 은퇴 선언을 하면서 스튜디오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가구야공주 이야기>가 흥행에 실패하고 <추억의 마니>가 극장에 걸린 때였다. 경영난에 봉착한 지브리는 추후 신작 착수가 가능해짐에 따라 계약직 스탭을 채용하고, 대규모 정규직 제작팀은 해체해 재정적 부담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스튜디오 생명 연장의 꿈을 지속한다. 개봉작 기준으로는 <추억의 마니>가 제작팀 해산 전 마지막 작품이 된 셈이다. 이듬해 독립한 니시무라 요시아키 프로듀서와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이 스튜디오 포녹을 세우고 지브리 출신 인력들이 대거 합류해 <메리와 마녀의 꽃>을 발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담당했던 안도 마사시는 코믹스 웨이브 필름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의 작화감독으로 합류하는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엄격한 관리 감독하에 있던 주요 인력들이 지브리 바깥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지브리의 영향은 파편화되어 부상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소리 없이 녹아들었다. 2023년 9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향한 기대가 고점에 달할 무렵 미디어 회사인 니혼TV 홀딩스가 스튜디오 지브리를 자회사로 인수했다. 니혼TV는 1985년 방송사 최초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방영했고, 이후 <마녀배달부 키키> 등의 작품 제작과 2001년 도쿄 서부에 생긴 지브리 박물관 개관에 출자하면서 인연을 맺어왔다. 10월6일 발표에 따르면 니혼TV가 지브리 지분의 42.3%를 소유하고 니혼TV의 수석 운영 책임자이자 이사회 이사인 후쿠다 히로유키가 실질적인 경영을 하게 된다. 82살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명예회장을, 스튜디오 지브리의 현 사장인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는 회장직을 맡는다. 스즈키 도시오는 이번 결정을 두고 “인수가의 문제가 아닌 작품 제작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위시하여 성사된 것”이라고 밝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 역시 “혼자서 짊어지기에는 너무 벅차다”라고 후계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매각은 시대의 변화를 절감하게 한다. 1985년 도쿠마 쇼텐의 투자를 받아 인수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톱 크래프트 스튜디오가 지금의 스튜디오 지브리가 되었고(지브리의 공식적인 첫 작품은 <천공의 성 라퓨타>다), 2005년 미야자키 하야오가 도쿠마 쇼텐으로부터 완전 독립한 뒤 같은 해 9월 제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지 18년 만이다. 새로운 모회사의 우산 속에 들어간 지금, 스튜디오 지브리의 생명력은 전과 같지 않지만 달리 보면 스튜디오 지브리 1기라 할 수 있는 시작점과 비슷한 상태에 다시 놓였다.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 ※ 티켓은 일시 지정 예약제,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ghibli-museum.jp

[기획] 제 25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만난 사람들

10월20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제25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번 BIAF에선 총 36개국에서 온 118편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됐다. “애니메이션은 상상력과 예술성, 기술과 감동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그릇입니다”라는 서재환 조직위원장의 개회사처럼, 올해 BIAF에서 상영된 애니메이션들은 저마다 경험한 적 없는 환상의 세계와 본 일이 드문 고유의 기술을 관객의 눈앞에 펼쳐 보이며 예술이 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감상인 감동을 선사했다. 올해 국제경쟁 부문 대상은 키아라 말타, 세바스티앙 로덴바흐 감독의 <치킨 포 린다!>가 차지했다. 자국 내 개봉 일정과 겹쳐 BIAF에 참석할 수 없었던 두 감독은, 직접 만든 영상으로 소감을 전했다. 이외에도 심사위원상은 세피데 파시 감독의 <사이렌>이, 우수상은 제레미 페랭 감독의 <마스 익스프레스>와 브누아 슈 감독의 <시로코와 바람의 왕국>이 공동 수상했다. 관객의 투표로 결정되는 관객상은 개막작이기도 했던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로봇 드림>이 차지했다. <씨네21>은 BIAF를 찾은 애니메이션 감독들을 만나 사흘간 온라인 데일리를 발행했다. BIAF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제25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BIAF 기획이 계속됩니다.

[인터뷰] 관객 덕분에!, ‘울려라! 유포니엄 앙상블 콘테스트’ 이시하라 다쓰야 감독

일본 최대 애니메이션 제작사 중 하나인 교토 애니메이션에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클라나드> 등을 연출한 이시하라 다쓰야 감독이 BIAF를 찾았다. 그는 2015년부터 다케다 아야노의 원작 만화 <울려라! 유포니엄>의 TV애니메이션과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연출을 맡고 있다. <울려라! 유포니엄>은 키타우지 고등학교의 취주악(관악기를 중심으로 하면서 타악기를 합해 대규모로 연주하는 음악) 연주 동아리 소속 유포니엄 연주자 오마에 쿠미코의 고등학교 3년을 다룬 청춘물이다. 시리즈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실제 취주악기의 연주 장면이다. 이시하라 다쓰야는 처음 작품의 연출을 맡았을 때만 해도 취주악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실제 취주악부 활동을 하는 학생들을 취재하러 다니기 시작했”고 “그들이 악기를 어떤 식으로 다루고, 연주하지 않을 땐 어떻게 두는지를 관찰”하며 작화의 디테일을 잡아갔다. “전공자의 연주 영상을 토대로 작화에 돌입한다. (인터뷰에 동석한 프로듀서들을 흘깃 보며) 솔직히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산업이 넉넉한 제작 기간을 담보하지 않는다. 제한된 시간 안에 관악기의 운지를 표현하는 일은 정말 품이 많이 들어 꼭 필요한 컷이 아니면 손 표현은 생략하는 편이다. (웃음)” 올해 BIAF의 국제경쟁 부문에 초대된 <울려라! 유포니엄 앙상블 콘테스트>(이하 <앙상블 콘테스트>)는 <울려라! 유포니엄>의 다섯 번째 극장판으로, 취주악부의 부장이 된 쿠미코가 ‘앙상블 콘테스트’를 총괄 진행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쿠미코는 친구들을 아우르고 통솔하며 자신이 리더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시하라는 쿠미코를 바람직한 리더라 평가한다. 쿠미코의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자신감 부족으로 실수를 연발하는 마림바 연주자 츠바메와의 에피소드다. 이를 두고 이시하라는 “리더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수행한 것”이라 평가한다. 이시하라가 작품의 클라이맥스라 생각하는 장면 또한 쿠미코와 츠바메가 협동해 마림바를 운반하는 장면이다. 이시하라는 “건반이 많은 마림바를 수작업으로 일일이 그리는 일이 성가셨”다며 투덜대면서도 “서로의 진심을 공유하는 순간”이라며, 그가 생각하는 <앙상블 콘테스트>의 대주제를 은연중에 함축해주었다. 이시하라로 하여금 8년째 동일한 시리즈를 연출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관객의 피드백이다. 그는 <앙상블 콘테스트> 상영회에서 만난 한 트럼페터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울려라! 유포니엄>을 처음 보고 트럼펫을 전공하게 됐어요!”라고 말해준 것이 근래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예술가가 되기 위한 학생들의 고군분투기는 자연히 재능에 관한 담론으로 읽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시하라는 본인을 지극히 평범한 예술가라 못박는다. “지금껏 평범한 사람들이 노력해 성과를 이루는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노력이 보상을 가져온다는 명제를 맹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