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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990년대를 중심으로) 시네필에 부치는 편지, 그들이 영화를 파고든 까닭은

단절과 연속. 1990년대 시네필을 말하자면 그들이 연속된 개체인가, 아니면 단절된 개체인가, 라는 질문부터 하게 된다. 선사시대 시네필(들)은 습관처럼 문화원 세대임을 내세운다. 자막도 없이 그 어려운 영화를 어떻게 보고 소화했는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런 시대가 있었다, 고 전해진다. 1980년대가 되면, 문화원을 새롭게 출입하는 층의 성격이 바뀐다. 돈이 없는 데이트족 가운데 특이한 몇몇이 찾아가는 곳, 문화원은 그런 곳이 되었다. 1980년대에 시네필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극장부터 그랬다. 극장사 전체를 통틀어 그렇게 암울한 시기는 없다. 한국과 서구의 에로영화가 극장 간판을 온통 차지하던 시기,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은 간혹 걸리는 아카데미와 영화제의 수상작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국도극장에서 <욜>을, 명보극장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파리, 텍사스>를, 대한극장에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같은 영화를 거대한 스크린으로 본 기억 같은 게 당시 관객의 자랑일 것이다. 물론 눈 밝은 극소수가 찾아가는 곳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다수의 나 같은 사람들에게 그건 그들만의 세상이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80년대에 생성된 몇몇 영화 집단과 대학교 내 영화 서클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나는 그 존재의 크기가 다소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가치는 재평가되어야 하지만, 학교와 영화의 울타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80년대와 90년대의 경계에 선 장산곶매와 <파업전야>는 이례적인 경우였고, 그것조차 시네필보다는 사회운동의 한 영역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면 1980년대 시네필의 존재는 어떤 것이었나. 오히려 1990년대가 되면서 그들, 개별적인 시네필의 존재가 더 드러나게 된다. 시네마테크, 영화 잡지, 영화제 대학가에 상존했던 최루탄 가스의 냄새가 옅어진 1990년대, 청년들의 영혼을 낚아챈 새로운 존재 중 하나가 영화였다. 기존 극장의 스크린에서 <광란의 사랑>, <블루 벨벳>(벨벳 커튼이 걸린 서울극장과 <블루 벨벳>의 도입부는 환상의 조합이었다)을 보던 와중에, 종로에 생긴 두어 소극장, 그리고 혜화동에 자리를 튼 소극장에서 예술영화의 기치를 내세우며 그간 보지 못한 작가들의 영화를 걸기 시작하자 시네필의 불꽃이 폭발했다. 뒤늦게 <이레이저 헤드>가 스크린에 걸리는가 하면, 종로 소극장의 필름 클럽에선 레오스 카락스 같은 작가들을 놓고 토론했고(이건 전해 들은 이야기다, 나는 어디에 소속된 적이 없다), 신촌의 지하 소극장에 난데없이 안제이 바이다의 <아이 원트 유>가 상영되곤 했다. <아이 원트 유>를 나 혼자 보는 경험은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의 상영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보기가 힘들어진 아오야마 신지의 <쉐이디 글로브>가 서대문로터리의 극장 간판에 오를 때, 바로 뒤의 소극장에서는 <녹색광선>과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가 관객과 만났다. 그렇게 조용히 극장을 찾던 관객이 조그만 모임들을 형성했는데, 구심점은 PC통신이었다. 그중에는 하이텔의 ‘시네마천국’처럼 거대한 그룹이 운영되는가 하면, 10여명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소규모 모임도 있어서 저마다 색채를 뽐냈다.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에 산재했던 영화 모임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 거기에 모인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는 가히 엄청났을 것이다. 이름을 내건 영화 집단이 영화의 창작으로 길을 낸 것과 달리, 소위 영화광들이 모인 집단의 성격은 대충 몇 가지로 분류된다. 제각기 영화를 보는 것이 기반이 되어, 영화를 본 뒤의 감상을 아마추어의 글솜씨로 쓰고 읽는 섹션이 중심을 이뤘고, 저녁 시간에 만나는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침 튀기며 영화를 이야기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그것도 모자라면 주말에 변두리 카페나 특정 장소를 임대해 밤새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통신의 특성상 온라인 게임의 형태로 영화의 지식을 다투는 특이한 분과가 있었는데, 영퀴방(영화퀴즈방)이라 불리는 곳이 대표적이다. 문제를 맞힌 사람이 다음 문제를 낼 권한을 이어받고, 대화방 내 사람들이 다음 문제를 서로 먼저 맞히려고 애쓰는 그런 형태였다. 지금 보면 유치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대화방의 유명 고수– 예를 들면 듀나 같은 사람에게 이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문화와 더불어 비디오테이프는 마지막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영화를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는 열의는 저렴해진 대여료, 황학동 주변에 형성된 비디오테이프 판매점(셀스루는 아니고, 대여점이 문을 닫으면서 나온 테이프 등이 거래되었다)과 연결되면서 영화광이 밤새 영화를 보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영화 집단 가운데 접근성이 높은 곳은 시네마테크였다. ‘문화학교 서울’이 이후 살아남았으나, 당시에는 대학 주변의 몇몇 유명한 시네마테크가 자웅을 겨루었다. 말이 시네마테크지 희귀한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볼 수 있는 장소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영화제나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젊은 시절 시네마테크의 운영진으로 활동했는데, 그들이 관람 전에 간략하게 영화를 소개한 뒤, 비디오테이프가 돌아가면 불편한 의자에 앉은 시네필이 작은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런 영화의 화질이란 게 보기 괴로울 정도로 열악했다. 예를 들어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감독과 군집한 배우 지망생들이 등장하는 도입부의 경우, 사람을 분간하는 게 힘들어 자막으로 대충 내용을 짐작해야 했다. 그나마 색이라도 보이면 다행인 것이,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처럼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예도 있었다(소리를 제대로 듣기만 했어도 이 영화의 제목은 요나가 아닌 ‘조나’가 되었을 터다). 그래서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1990년대 이전에, 소위 시네필의 초기 멤버들이 쓴 글이나 서적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씨네21>에서 펴낸 <영화감독사전>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상기한 <2000년에 25살이 되는 요나>를 찾아보면 엉터리 소개에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의 옛 시네필은 태생적으로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서구인처럼 태어나면서부터 티브이를 통해 고전영화와 함께 성장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고, 동시대의 예술영화를 주변에서 본다는 것 또한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때가 1995년이다. 1995년 봄, 영화 잡지 <씨네21>과 <키노>가 나왔고, 가을엔 부산국제영화제가 거창하게 문을 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씨네21>을 읽거나 손에 든 사람이 눈에 쉽게 들어올 만큼 청년층을 중심으로 영화가 생활 속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씨네21>이 영화 문화의 일상화에 기여했다면, 시네필이란 단어가 심어진 것은 <키노>와 부산국제영화제의 결합으로 가능했지 싶다. 한국 시네필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던 동시대 영화 감상이 부산국제영화제를 빌려 드디어 해갈된 것과 더불어, <키노>는 그들의 존재에 자기 인식이 가능하게끔 도왔다. 기실 영화광이란 단어 대신 시네필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도 이즈음부터다. 아울러, 세계의 예술영화 진영도 1970, 80년대의 작가들로부터 1990년대 작가로 탈바꿈하던 때라 부산국제영화제가 불러온 바람은 강력한 만큼 신선했다. 브루노 뒤몽의 <위마니테>의 도입부를 부산 국도극장의 거대한 화면으로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며, 장선우의 <거짓말>이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의 티켓을 구하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옆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특히나 예술영화의 토양이 부실했던 부산 시내 극장의 화장실에서 관금붕과 부딪히는 사건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나. 떠오르는 거장으로 소개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보다 매번 잠을 잔 기억은 하도 많이 이야기돼 이젠 별 이야깃거리도 못 된다. 영화를 본 뒤 술자리나 숙소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문화 또한 부산국제영화제로 인해 정점에 올랐던 것으로 평가된다. 요즘 같은 해운대의 현대식 분위기와 달리, 남포동 구시가지의 정서와 영화 이야기와 사람들의 만남이 결합해 멋들어진 아우라를 형성한 시기였다. 세기말 시네필 그렇게 세기말이 다가오고 새로운 세기를 앞둘 즈음, 시네필의 풍경은 또 다른 혁명적인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것이 대체로 디지털로 인해 벌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당시 서구의 영화 잡지마다 디지털에 대한 예측으로 분주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세기의 전환과 함께 영화가 디지털로 제작됨에 따라 독립영화, 예술영화의 제작 편수가 이전과 비교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공교롭게도 그즈음 한국영화는 긴 침묵에서 깨어나 새로운 르네상스의 단계에 진입했다. 자연스레 시네필은 영화라는 문화와 산업의 거대한 홍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여러 국제영화제가 생기면서 시네필이라면 연중 열리는 영화제 사이에서 순례지를 선택하는 즐거움을 누리느라 바빴다. 영화제가 외적으로 확장했다면, 이 시기의 시네마테크는 내적으로 변화의 깊이를 도모하고 있었다. 비디오테이프를 상영하는 구석방 문화에서 벗어나 필름으로 상영하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공식적으로 상영권을 얻어 프로그램을 짜게 되었다. 그 중심에, 문화학교 서울을 전신으로 둔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 스크린으로 옛 고전영화를 제대로 된 화면비율로 보는 역사는, 그러니까 얼마 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초기엔 상영비율을 잘 몰라 웃지 못할 해프닝– 존 포드의 <수색자>를 4:3 화면비율로 마스킹 없이 상영해, 촬영 조명이 텐트를 비추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도 있었다. 시네필 개인도 외부로부터 변화의 바람을 맞이했다. DVD와 블루레이라는 매체를 거치면서 영화 컬렉션의 품질이 급등한 단계를 지나 스트리밍과 디지털 파일의 생성으로 꿈의 개인 라이브러리라는 게 점차 가능해졌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어느덧 보지 못할 희귀 영화는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감상의 부담이 역으로 작용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무엇을 볼 것인가, 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 선택을 못하는 코미디. 개인 라이브러리와 함께 웹의 발달은 시네필을 집합적인 모임에서 다시 개인적인 존재로 몸을 틀게 했다.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상황은 이미 그 시기에 싹을 틔우고 있었던 셈이다.

[기획] 이토록 영화로운 순간, 제36회 도쿄국제영화제 현지 리포트

마침내 도쿄의 무더위가 가신 10월23일, 제36회 도쿄국제영화제(이하 도쿄영화제)의 막이 올랐다. 예년처럼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를 중심으로 축제의 열기는 긴자지구와 유라쿠초 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안도 히로야스 도쿄영화제 이사장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영화제가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회복했음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해보다 훨씬 많은 영화와 영화인들을 초청했다”며 그간의 노력을 전했다. 실제로 올해 개막식에는 “430명을 기록한 지난해 개막식 참석자 수의 2배를 웃도는 892명이 참석”(안도 히로야스)했다. 첫날의 에너지가 강렬했던 덕일까. 개막식 이후로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당일의 상영 시간표를 확인하고,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 앞에 마련된 야외극장을 방문하는 관객의 발길이 계속됐다. 36번째 도쿄영화제의 개막작은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였다. “숲속에서 조용히 삶을 영위하는 듯한”(야쿠쇼 고지)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일상을 차분히 담아냈으며 히라야마 역의 야쿠쇼 고지로 하여금 제76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게 한 작품이다. 개막작이 상영되기 전, 빔 벤더스 감독은 야쿠쇼 고지를 비롯한 출연배우들과 무대 인사를 가졌다. 작품을 연출하게 된 경위를 묻는 질문에 일본 건축가들이 시부야의 화장실을 리모델링한 “‘THE TOKYO TOILET’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답했다. “화장실이라는 장소가 몰라보게 변해 있었고 이 장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앞서 칸영화제에서 상영하긴 했지만 도쿄영화제에서도 선보이길 바라던 차였다.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꿈같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영화산업에 공헌한 감독에게 주어지는 도쿄영화제 특별공로상 시상식의 주인공은 장이머우 감독이었다. 그는 1986년 도쿄영화제에서 <노정>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때를 상기하며 “이것은 결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 여러분과 또 만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48개국 219편의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을 만났고 이중 15편이 경쟁부문에 올랐다.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는 3편의 일본영화 <정욕> <안개 낀 낙원> <우리가 누구였지?> 외에도 <성스러운 거미>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자르 아미르가 가이 나티브 감독과 공동 연출한 <타타미> 등이 포함됐다. 이치야마 쇼조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설표> <롱숏> 등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린 세편의 중국영화를 가리키며 “돋보이는 중국영화들이 많았다”고 평을 남겼다. 개막작 감독 외에도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겸한 빔 벤더스 감독은 영화감독 알베르트 세라, 프로듀서 구니자네 미즈에·트란 티 빅 응옥, 배우 겸 프로듀서 자오타오 등 다른 4명의 심사위원과 함께 “마음을 열고 지적이고 교양 있게 심사를 진행하겠다. 논쟁은 폐막식이 거행된 후에 치르겠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진정한 교류의 장 “도쿄‘국제’영화제인 만큼 국내외 영화인들의 교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안도 이사장은 “지난해엔 104명의 해외 게스트가 방문했으나 이번에 초청한 해외 영화인은 2천명에 육박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토크 프로그램, 심포지엄을 비롯한 이벤트에서 여러 국가가 협업한 작품을 소개하고 일본과 해외 영화인들의 소통의 장을 형성하고자 한 시도가 눈에 띄었다. 아마존 오리지널 영화 <너클 걸>을 소개하는 스페셜 토크 세션 ‘한일 영화 제작의 미래’ 심포지엄이 대표적인 예다. <너클 걸>은 동명의 한국 웹툰을 원작으로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 크로스픽쳐스와 일본의 아마존 스튜디오가 공동 제작했다. 복서 란(미요시 아야카)이 범죄 조직에 납치된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불법 격투에 참여하고,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는 범죄 액션물이다. 연출을 맡은 창감독, 프로듀서 토머스 김, 복서 란 역의 미요시 아야카, 이시자카 다구로 촬영감독이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영화 <표적> <계춘할망>,드라마 <장미맨션> 등을 만든 창감독은 “합작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건 시나리오의 개발이라고 생각한다. 장르 면에선 액션, 로맨틱 코미디, 판타지물이 전세계 관객에게 소구하기에 좋다. 앞으로도 타국간에 교류하는 프로젝트가 활발히 진행됐으면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10월26일 열린 ‘아시아 영화 학생 교류 프로그램 마스터클래스’에는 일본, 중국, 홍콩, 태국, 싱가포르, 베트남 등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초청됐다. 참여한 학생 수가 많아 의자를 새로 가져다가 자리를 채워야 했고 금세 라운지가 메워졌다. 젊은 영화 창작자들이 모인 현장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함께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1993년, 자신이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감독에 관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일부 보여주며 말문을 열었다. “20~30대 시절에 TV프로그램과 영화 중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마찬가지로 처음 영화계에 입문할 여러분들에게 당시의 내 경험을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 대화는 <환상의 빛>을 제작할 때 그가 허우샤오시엔 감독에게 들은 조언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완성작을 본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기술은 좋다. 그렇지만 모든 숏의 스토리보드를 미리 그려둔 채 작업한 게 아닌가. 배우의 연기를 보기 전에 어떤 신을 어떻게 촬영할지 어떻게 알겠나”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배두나가 출연한 <공기인형>을 찍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허우샤오시엔과 여러 번 합을 맞춘 마크 리핑빈 촬영감독과 협업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스토리보드를 그려서 보여주려고 했는데 리핑빈은 먼저 배우의 연기를 보고 싶어 했다. 배우의 연기를 본 뒤 촬영할 위치를 지정하고, 거기서부터 내가 원했던 그림의 동선을 정리했다. 그 경험이 내겐 굉장히 중요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미리 준비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에 얽매인다면 눈앞의 흥미로운 상황을 놓치게 될 것이다. 나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나에게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려 했다고 믿는다.”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한 날은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은퇴 뉴스가 들려온 날이기도 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대만뿐 아니라 홍콩,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의 젊은 감독들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나를 부르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의 목표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여긴다. 때문에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아시아의 젊은이들에게 그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열띤 질의응답과 함께 이날의 마스터클래스가 마무리됐다. 밀도 높은 감상의 자리 2023년은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탄생 120주년이자 사후 60주년이 되는 해다. 안도 이사장은 “지난해 영화제가 끝난 직후부터 오즈 감독의 120주년을 기리는 이벤트를 계속 고민”해왔다고 전했다. “오즈 감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빔 벤더스 감독이 심사위원장으로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도쿄영화제는 축제 기간 동안 일본의 영상자료원인 일본 국립영화아카이브와 협업해 “30편이 넘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디지털 복원본에 영어 자막을 첨부해 상영”(이치야마 쇼조)했다. 안도 이사장과 이치야마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못 말리는 꼬마>(1929) 최장판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세계 최초로 상영하게 된 점 역시 강조했다. 일본 국립영화아카이브에선 관객들이 실제 피아노 연주와 함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는데, 덕분에 다양한 국가와 나이대의 관객이 즐겁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이번 상영이 새로운 관객들에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소개할 기회가 되길 바란다”던 이치야마 프로그래밍 디렉터의 바람이 마침내 실현된 순간이었다. ‘오즈 야스지로 120주년 기념 토크: Shoulders of Giants’는 행사가 열리기 전부터 일찍이 관객과 기자들의 기대를 모았다. 빔 벤더스 감독의 개회사와 함께 <안녕하세요>의 디지털 복원판이 상영된 뒤 구로사와 기요시, 켈리 라이카트, 지아장커 감독이 오즈 감독의 영화에 관해 논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에 관한 짧은 감상을 전한 세 감독은 자신들이 인상 깊게 본 오즈 야스지로 작품을 중심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무네가타 자매들>을 고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즈의 작품이 조용하고, 천천히 흘러간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오즈는 전쟁이 일어난 후 10년 동안 강렬한 감정과 관계를 묘사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무네가타 자매들>의 일부 구간에선 폭력적인 모습이 연출되는데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해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일지 모른다. 아티스트들은 전쟁과 같은 강렬한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을 하곤 한다. 나는 이러한 시도가 오즈의 작품이 보다 풍부해지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아장커 감독은 <늦봄>에 관한 의견을 전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 작품의 대부분이 일본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탐구하고 장기적인 변화의 기간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묘사한다. <늦봄>에서는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는 부녀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는 가족 관계의 따뜻함이 때로 구속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늦봄>은 가족 관계에 동시대성이 미치는 영향을 강력하게 묘사하고 있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이번 심포지엄을 위해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도쿄 이야기>는 로드 무비지만 미국의 로드 무비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미국의 로드 무비는 주로 주인공이 자아를 찾는 여정이며 가족의 제약에서 벗어나 집을 떠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것은 굉장히 흔치 않은 반응이다.” 곧이어 “오즈의 초기작은 다소 붐비는 느낌이지만 후기로 갈수록 미니멀해지고 세트와 배우 등을 최소화해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놀라웠다. <도쿄 이야기>에서도 카메라가 단 한번 움직이는데, 그 정적인 분위기가 아름다웠다”고 덧붙였다. 심포지엄이 치러진 다음날, 인터뷰로 만난 조조 히데오 감독은 자신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지나가는 마음>을 드라마로 리메이크하는 과정에 관해 들려주었다. 100년 전 완성된 거장의 작품이 디지털로 복원돼 상영되는 동시에 동시대 감독의 손에서 새롭게 재해석되는 광경을 마주하는 것은 꽤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뿐인가. 다른 문화를 바탕으로 다른 결의 작품을 만들어 온 세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를 논하는 한편, 데뷔작을 손에 든 신예 창작자가 떨리는 마음으로 관객들 앞에 선다. 시공간의 경계를 가뿐히 무너뜨리며 신선한 감상의 기회를 선사하는 영화제의 힘을 다시금 실감했다. 폐막식이 치러진 11월1일, 최우수작품상은 페마 제덴 감독의 <설표>에 돌아갔다. 지난 5월 갑작스레 별세한 감독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조하오 프로듀서와 배우들이 대리 수상했다. <정욕>의 기시 요시유키 감독이 관객상, 최우수감독상을 차지함으로써 주연을 맡은 이나가키 고로는 지난해 초청된 <창가에서>와 더불어 2년 연속 관객상을 받는 영예를 안게 됐다. 영화제측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총 7만4841명의 관객이 도쿄영화제를 찾았다. 5만9541명의 관객이 든 지난해와 비교해 성대한 행사였음을 의미하는 지표다. 폐막작으로 선정된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의 <고질라 1.0> 상영과 함께 도쿄영화제는 10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도쿄영화제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비평] 미야자키 하야오의 우정, 그리고 식탁의 소멸에 관하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후반부, 나츠코를 찾아 탑 안의 세계로 떠나온 마히토는 마침내 히미의 도움을 받아 나츠코가 잠들어 있는 산실에 도착한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깨워 데려가려 하지만 눈을 엘 듯 춤을 추는 종잇조각이 둘의 접촉을 가로막고, “나츠코 엄마!”라고 외친 마히토는 의식을 잃는다. 종잇조각의 우윳빛 색감이 산실의 적막한 어둠과 대조를 이루는 이 장면은, 마히토가 전쟁의 화마 속에서 어머니를 상실하던 도입부의 장면과 포개어지며 시적 서정을 새기고 간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 작화의 매혹을 잠시 차치하고 곱씹어본다면 이 장면의 감흥은 얼마간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마히토는 이세계에 잠입하기 전까지 별다른 접점도 없던 나츠코를 왜 돌연 엄마라고 부르는 걸까? 마찬가지 이유로 마히토에게 별 감정이 없을 나츠코는 왜 그의 애절한 외침에 “너 같은 건 정말 싫어!”라고 쏘아붙이는 걸까? 마히토가 탑에 잠입하기 전까지인 1부의 세계에서 가족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격리돼 있던 두 인물 사이에 흐르는 이 격정적인 감정은 쓰라리다기보다 당황스럽지 않은가. 이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난해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데 기여했을 여러 기묘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결론부터 당겨 말하자면 나는 이 작품을 인상 깊게 본 편이며, 앞에서 언급한 장면의 이물감이 의도적인 효과였다고 보는 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영화의 공간과 정서에 스며든 이물감을 시종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부조리한 뉘앙스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키리코가 마히토에게 여행의 이유를 물으며 “나츠코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할 때, 잠시 주저한 마히토가 “제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히토와 나츠코 사이에 정서적 연결고리가 희미하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설하면서 산실 장면의 격정적 몸짓에 의문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히토의 아버지가 군수산업에 종사한다는 지엽적 사실을 영화 전체에 대한 비판적 논거로 삼는 견해나, 몇몇 대사를 근거로 영화가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다는 식의 상찬 모두가 불충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주장은 영화 전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왜곡과 자기 훼손의 뉘앙스를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짧게나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관통하는 매혹적인 이물감에 깃든 조형의 원리를 말하고 자 한다. 하지만 다분히 전적인 성격이 있는 이 영화의 왜곡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영화를 미야자키 하야오의 기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작업이 불가결하다고 느낀다. 잠시 우회하며 지금까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양식화한 세계의 특징적 미학을 검토하도록 하자. 우정 어린 동작의 소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서로 무관하거나 적대하는 인물들이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기묘한 친교의 순간이 존재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소피에게 저주를 건 원흉인 황야의 마녀는 설리번으로부터 도피하는 과정에서 소피 일행과 잠시 동행하더니 성의 구성원으로 천연덕스럽게 편입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구직 요청을 성가셔하던 가마 할아범은 몇 장면 뒤 린에게 치히로가 본인의 손녀라는 돌연한 거짓말을 하며 치히로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뇨와 소스케처럼 아기자기하게 꿈틀거리는 성장기의 아이들이 있다. 서로 초면이거나 적대하는 인물은 때로 역동적으로 흐르는 자연물로, 때로 오래된 괘종시계처럼 아늑한 질감으로 수놓인 시공간 안에서 잠시 부대낀 후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한 관계로 거듭난다. 마치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토토로와 빗방울을 맞는 것처럼, 사건의 의미값은 0으로 수렴하지만 그렇기에 현대적 타산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일상적이고 우정어린 몸짓들. 놀이터의 아이들이 어울리는 데 통성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듯, 이 꾸밈없이 자유로운 우정의 성립에 거창한 해석의 사족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판타지의 거장이지만, 그 판타지의 개연적 질감을 지탱하는 사소한 생활 감각의 묘사에 충실하다는 측면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와 자크 드미에 뒤지지 않는 일상의 대가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라면, 티격태격하던 마히토와 왜가리가 입천장을 메꾸는 공작 활동 후 가까워지는 장면이 이같은 친교의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면은 이런 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이질적이다. 마히토는 학교에서 고립을 선택하며, 집에서는 부모와 분리된 사적 공간에서 독서와 같은 내면적 활동에 침잠한다. 인상 깊은 장면 하나. 마히토는 퇴근한 아버지가 나츠코와 입맞추는 광경을 보지만, 그 입맞춤은 1층 반자를 통해 마히토의 시야에서 가려져 은밀한 성애의 뉘앙스를 배가한다. 같은 공간에서 뒤엉키던 캐릭터의 집단적 활력이 만개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과 달리, 마히토의 집은 공간을 적극적으로 분절하며 개별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성인의 활동을 담아낸다. 이런 단절의 증상은 시공간적 비약과 폐쇄적 공간감각을 징후로 드러내는 이세계도 마찬가지다. 그곳은 키리코의 말처럼, 죽음의 기운만이 만연한 세계다. 요컨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 특징적이었던 우정 어린 동작의 소멸을 드러내는 영화다. 그리고 이는 줄곧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근심해왔던 그가 작품을 만들며 새롭게 직시한 동시대에의 관찰을 투영한 결과일 것이다. 우정의 몸짓이 이념이나 가치의 동일성과 무관하게, 서로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다는 무심한 공존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그런 몸짓이 사치가 된 세계를 살고 있다. 노년의 인물조차 아이처럼 약동하던 미야자키의 전작 속 군상과 달리, 오늘날 우리는 각자의 방 안에 흩어져 육체적 실감이 거세된 디지털 신호를 주고받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추상의 세계를 빚을 때조차 그려진 동작이 사실적 세계의 관찰에 기반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예술가였고, 그런 그에게 오늘날의 파편화된 현실로부터 우정의 몸짓을 빚어내는 작업은 어렵고도 기만적이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이것은 미야자키뿐 아니라 다수의 현대적 작가가 공유하는 곤경이기에, 올해만 해도 <더 웨일>과 <어파이어>처럼 외부 세계와 단절된 예술가의 자기 파괴적 초상을 다룬 작품은 빈번하게 발견됐다. 각별히 그 단절의 기운이, 삼킨다는 동작의 전략적 변용을 통해 나타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미야자키는 삼킨다는 몸짓을 누구보다도 역동적으로 묘사한 작가다. 본 작품에서 자신의 머리를 삼키는 왜가리, 하울의 성을 움직이며 소피의 요리를 삼키는 캘시퍼는 물론, 미야자키의 영화에 빈번한 식사 장면은 삼키는 몸짓의 동사적 활력을 애니메이션만의 매혹적 질감으로 구현한다. 애니메이션은 타자와 세계의 미세한 인상을 즉물적으로 포착하는 사진적 이미지와 달리, 예술가의 손길에 의한 조작의 여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예술이다. 이 점에서 애니메이션은 피사체의 순수한 시간적 지속을 응시하기보다는, 형태의 자의적 가소성을 담는 데 유용한 분과다. 미야자키의 특징은 이 가소성을 식사의 활동과 연관시키며 삼키는 몸짓의 물질성을 극대화한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똑같이 식사 장면을 일상적 의례로 활용한다고 해도 그 의례를 수행하는 인물의 미세한 동작에 주안점을 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지적처럼 인물들이 먹는 음식을 보여주지 않지만, 미야자키는 삼키는 활동을 과장된 양감으로 부각하곤 한다. 앞서 언급한 미야자키의 일상성은 식사의 활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주목할 점은 공동체의 식사가 우정을 강화하는 것과 달리 타인과 식탁을 공유하지 않는 식욕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제니바의 도장을 몰래 삼켜 저주에 걸린 하쿠, 과식을 통해 온천장의 질서를 파괴하는 가오나시, 주인이 부재한 식당에서 음식을 삼켜 돼지로 변신하는 치히로의 부모는 삼킨다는 활동이 타자와 동석하는 식탁과 분리된 채 이뤄졌을 때 저주를 동반한다는 규칙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강의 신의 유동적인 몸에 삼켜지는 치히로가 과식의 소화물을 토해내게 하는 경단을 받고, <모노노케 히메>에서 아시타카가 데이다라봇치의 액체에 삼켜질 때 비로소 육체에 각인된 저주의 날인이 지워진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삼켜진다’는 현상은 미야자키가 문명의 파괴적 활동으로 은유한 과식의 활동을 피동형으로 전복함으로써 바람과 물로 표상되는 자연의 타자성을 수용하게 하는 환경적 치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세계가 미야자키의 공간치고 전에 없이 파편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또한 캐릭터들의 식욕이 식탁이라는 공동체의 장소를 결락한다는 점과 유관할 것이다. 마히토는 수직의 벡터로 뻗어 있어 식탁이라는 수평적 가구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폐쇄적인 미로를 헤매며, 펠리컨과 앵무새는 통제 불능의 식탐을 앞세우며 습격을 감행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온천장은 고유명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는 현대적 노동에 대한 은유적 공간이었음에도(온천을 운영하는 유바바에 지브리를 운영하는 스즈키 도시오와 본인을 투영했다는 미야자키의 말처럼) 공동체의 질서와 구성원의 온기가 움트는 장소였다. 가오나시처럼 파괴적인 식탐을 지닌 군상만이 도사린 여기에는 그런 온기가 없다. 그런 파괴적 몸짓 또한 생태계의 순환고리가 단절된 데서 비롯한 불가피한 생존 활동이라는 펠리컨의 말은, 이 비극이 개별적 욕망을 넘어선 거시적 무질서의 효과임을 지시한다. 그런데 미야자키는 그 일그러진 세계에 친숙한 지브리적 도상을 채워 넣는 한편 키리코와 히미처럼 마히토의 향수를 자극하는 기지의 존재 또한 투입함으로써 세계의 인상을 이중화한다. 향수 어린 기호로 가득하지만 위태롭게 쌓아올린 13개의 돌조각처럼 불안정하기 그지없어 회한의 실감조차 낭만의 정서를 머금지 못하는 세계. 그 분열증이야말로 현실의 활력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하는 데 실패해 익숙한 기호만을 재조합해야 하는 예술가의 운명에 관한 성찰의 결과다. 그것은 또한 나츠코의 산실에서 벌어지는 재회가 기묘한 이물감을 내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몰락과 미국의 걸프전 공습을 계기로 정치적 이상주의를 버렸다고 고백한 미야자키는 현대 도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에 대한 구상을 폐기한 후 거만한 미국 청년과 대결하는 “붉은 돼지”의 이야기를 만든 바 있다. 거기에는 중년적 비애감과 자기모순에 대한 성찰이 쓰라리게 배어 있었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분열증은 보다 각별한 위상을 지니는 것 같다. 그 증상이 개별적 인물의 심경을 넘어 영화 전체를 감싸 안은 형식적 구조로까지 번져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관객이 그 난해함에 반감을 표할 때 나는 단단한 일상적 질감을 형성하지는 못하되 현란한 색채로 흩어지는 기호들의 임시적 매혹으로 가득한 이 영화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 분열의 리듬이야말로 식탁에 마주 앉는 우정이 소멸한 시대, 환상조차 피안의 위로를 제공하지 못해 진부해져버린 이 세계를 견디는 우리가 같은 시대를 공유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아릿한 우정의 징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이 요정처럼 뛰노는 아이들의 순수를 묘사하는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 순수가 사라진 세계 안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각자 다른 공간에 흩어져 슬픔을 삼키는 성인들에게 전하는 새로운 유형의 우정을 그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인터뷰] 타인과의 여정을 고민하며,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감독

<수성못>을 본 관객이라면 차기작으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내놓은 유지영 감독의 행보가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온전히 자기 경험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지만 유지영 감독은 일과 임신, 출산에 대한 고민을 재이(한해인)과 건우(이한주)에게 솔직하게 투영했다. 두 사람은 가족을 이루기로 어렵게 합의했으나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품으려 할수록 더 많은 것이 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이토록 불안정한 두 연인의 관계가 각자의 성장으로 이어지게끔 유지영 감독은 섬세한 연출에 심혈을 기울였다. - 오랜만의 장편 연출작이다. = 항상 힘든 시기를 지날 때 이 시간을 글로 쓰고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과 두려움이 해결됐거나 혹은 이것을 글로 풀어내 정리하고 싶을 때 말이다. -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 자전적 요소가 많이 반영됐나. 임신과 같은 사건은 전부 픽션이다. 아주 오래 만난 연인과의 관계에서 불안을 느낀 적이 있다. 이대로 관계를 이어간다면 삶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수순으로 흘러가는 건지, 아이를 낳은 뒤에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나의 지인들은 내가 영화를 완성할 때까지 그 시간을 기다려주고 본의 아니게 희생해야 하는 부분이 생긴다. 과연 그게 옳은 일인가 싶은 생각까지 복합적으로 든 시기였다. 그래서 한 커플에게 예기치 못한 아이가 찾아오는 사건을 설정하고, 이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결말을 정하지 않은 채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 고 정미경 작가의 소설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 본래 처음 정한 제목은 였다. 정미경 작가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재밌게 읽었는데, 작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 김병종 화백이 신문사에 추모글을 기고했는데 마침 그 글의 제목도 소설에서 따온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었다. 글을 읽으니 작가가 예술가이자 엄마, 아내로서 얼마나 충실한 시간을 살아냈는지 알겠더라. 삶을 대하는 강인한 태도와 글에 대한 몰입력을 보면서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유가족의 허락을 받고 제목을 사용했다. - 임신부와 워킹맘의 사연을 많이 수집했을 것 같다. = 임신 경험이 없어 주변의 사례를 듣고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같은 관련 서적도 찾아봤다. 때마침 가까운 지인이 임신해서 만삭 때까지 주기적으로 만났다. 곁에서 보니 미디어에서 묘사한 임신과 출산이 전부가 아니었다. 입덧이 심해 말라가는 임신부도 있고, 영화에 인용했듯이 임신부를 위한 약은 전무하다시피 한 게 현실이었다. 소설을 쓰는 재이를 위해 작가들의 루틴도 찾아봤는데, 크게 다를 바 없어서 글에 대한 진심만 강조하고 과장된 표현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재이가 글을 쓰기 전 촛불을 켜는 건 내가 항상 하는 습관이다. - 재이와 건우가 다투는 장면을 눈여겨봤다. 두 사람이 가장 크게 충돌하는 순간인데 이들 사이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마스터숏으로 촬영했다. = 원래 마스터숏을 잘 안 찍는다. 그 장면도 먼저 화면을 크게 잡은 뒤 컷을 분할해 들어가려 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두 배우의 에너지가 어마어마했다. 나만이 아니라 스탭들이 전부 느꼈다. 촬영분 그대로 써도 되겠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연출부에서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며 콘티대로 한번 더 찍자고 제의했다. 한번 더 찍는 대신 배우들에게 마음대로 해보라고 했는데, 기존 시나리오에서 한 단계 확장된 연기를 보여줬다. 그렇게 찍은 두 번째 컷을 영화에 썼다. - 그만큼 배우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캐스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 배우들의 열연으로 완성된 장면이 많다. 한해인 배우는 내가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너의 극장에서>의 다른 에피소드에서부터 눈여겨봤다. 독특한 목소리에 연기도 섬세하고 그만큼 존재감이 강한 배우다. 이번 영화의 캐스팅을 고민할 때 재이 역으로 한해인 배우가 떠올랐다. 만나보니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이미 재이 같았다. 불안해 보이면서도 속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이한주 배우는 단편 <파테르>를 보고 연기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대구단편영화제 기간에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건우랑 비슷한 면이 있더라. 그때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꼭 보내겠다고 했고 그렇게 출연이 성사됐다. - 결말을 정하지 않은 채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상 여러 외적 요소로 인해 재이와 건우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적다. 오히려 이들의 향방에 대한 연출자의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 극의 분위기를 증폭하기 위해 넣은 영화적 장치들이 있기는 하다. 어느 순간부터 틀어진 인물들을 묘사하고 싶었다. 그 인물들이 연이은 사건으로 눌러온 욕망을 서서히 드러냈으면 했다. 다만 한 사람은 에너지를 폭발시키는데 다른 한 사람은 계속 침잠한다. 이런 상반된 반응은 처음부터 설계해둔 흐름이었다. 이 영화는 건우가 불 꺼진 가로등을 마주하면서 시작하고, 재이가 걸어갈 때 가로등이 다시 켜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건우가 재이를 위해 가로등을 고쳐달라고 재차 민원을 넣었다는 사실을 재이는 평생 모른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이가 생긴 뒤 재이와 건우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지만 그만큼 본인이 원하는 바를 알게 된다. 그런 깨달음만 있다면 타인과 함께하는 여정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았다. 파도에 휩쓸리다 결국 그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서퍼처럼 캐릭터들이 중심이 잘 잡힌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 고 정미경 작가가 15년간 쓰던 노트북이 고장 나 그간 쓴 글이 전부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얼마 전 내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8년 정도 함께한 노트북이 폭발한 것이다.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올해로 40대에 접어든 만큼 글도 새롭게 시작하라는 계시 말이다. 글 쓰는 것도 좋지만 타인의 시나리오를 연출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시나리오를 해석하고 현장에서 배우나 스탭과 소통하며 촬영하는 과정이 훨씬 재밌어서다. 좋은 각본과 인연이 닿길 바란다.

[리뷰] ‘여귀교: 저주를 부르는 게임’, 엘리베이터 안에서 귀신의 세계로 접속하다

대만 한 대학교의 ‘다런관’이란 건물은 애초에 팔괘로 설계해 악령을 물리치려 했다. 하지만 건축 과정에서 사악한 역팔괘로 바뀌는 바람에 귀신이 나타나고 초자연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카이(시백우)는 동생 위팅(왕유훤)과 함께 이곳을 배경으로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카이는 불의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위팅은 대학교 친구들과 함께 이 게임을 완성하려고 한다. <여귀교: 저주를 부르는 게임>은 저주받은 한 건물에서 게임을 만들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공포영화다. 게임으로 제작되며 화제를 모은 <여귀교…>의 새로운 이야기인 이번 영화는 캠퍼스 괴담에 AR 게임을 접목해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실제 공간에 실시간으로 증강하는 게임 정보는 점차 가상에서 현실이 되며 공포감을 안긴다. 악령에게 벗어나기 위한 힌트를 제공하는 인물인 경비원 더취안(임철희)이 흥미롭다. 귀신과 관련한 사건 때문에 그는 건물 밖을 나가지 못한다. 더취안은 위팅을 도와 게임 제작에 참여하며 트라우마인 악령의 실체를 마주한다. 영화는 <상견니>의 시백우가 출연한 작품으로 대만 박스오피스에서 흥행을 거두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특집] 지금 MCU에는 영웅이 없다, 마블 코믹스 신작 발표로 보는 마블의 청사진, 리부트는 가능할 것인가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한 게 2019년이니 계산하면 얼추 들어맞는다. 2008년 <아이언맨>에서 시작해 11년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한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은 슈퍼만 강조하며 정작 히어로는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내놓으며 연명해왔고, 그 대가는 3년이 지나 비어버린 곳간에서 쥐어짜낸 <더 마블스>를 통해 톡톡히 치르고 있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필자는 관련 업계 종사자로서 누구보다도 슈퍼히어로 장르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라는 개국공신 두명을 날리는, 마블 스튜디오를 제외하고 세상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과감한 결정과 함께 거창하게 포문을 열었던 페이즈4와 5는 역시 거창하게 출범한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방영하는 시리즈를 꼬박꼬박 챙겨보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든 대사와 캐릭터라는 벽을 스스로 쌓아올림으로써 신규 관객 유입의 기회를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블이 왜 그랬을까? 언뜻 납득할 수 없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자. <어벤져스: 엔드게임> 개봉 다음해인 2020년, 마블은 IP 확장을 목표로 에이도스 몬트리얼 제작, 스퀘어 에닉스 유통으로 <마블 어벤져스>라는 AAA급 게임을 발매했다. 인섬니악의 <스파이더 맨> 게임 시리즈가 거둔 대성공을 보고 고무되어 기획했음이 분명한 이 게임은 안타깝게도 처참하게 실패했다. 라이브서비스를 핑계로 터무니없이 빈약한 게임을 내놓고는 6만4800원 풀프라이스 가격표를 붙여둔 것이다. 게다가 어디서 배워온 건지 영웅들의 코스튬 언락을 위한 현질 요구에, 알맹이 없는 8만6600원짜리 딜럭스 에디션은 귀엽기까지 했다. 필자는 이것이 이후 마블이 팬을 대하는 오만한 태도의 전형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마블이 소프트 리부트를 고려 중이라는 루머가 얼마 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코믹스 <시크릿 워즈>를 기반으로 리부트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건 지난 8월이며, 10월에는 케빈 파이기 마블 스튜디오 대표의 입을 빌려 이 소문에 힘을 실어주는 기사도 공개됐다. 며칠 전에는 배우 크리스 에반스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속편 출연에 합의했다는 루머까지 올라오며 여러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궜다. 루머가 루머에 그치기를 바라지만, 지금 같아선 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성이 없어 차라리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퇴장시킬 때부터 큰 그림을 그려둔 것이라고, ‘마블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고 믿고 싶을 정도다. MCU 리부트가 가능할까? 쉽게 답할 순 없지만, 이미 검증된 코믹스 원작을 기반으로 신중히 진행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분명 아니다. 멀티버스의 충돌 및 평행 세계 영웅들의 갈등과 협력을 그린 <시크릿 워즈>는 현재 중구난방으로 펼쳐져 있는 MCU 멀티버스 사가를 마무리하고 새출발하기에 적절한 스토리인 동시에 인피니티 사가 못지않은 무게감을 선사할 수 있는 원작이다. 다만 코믹스가 잊을 만하면 한번씩 리부트한다고 해서 영화 리부트를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하면 위험하다. 수십년에 걸친 역사를 지닌 코믹스는 10년, 20년 단위로 달라지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포화 상태의 캐릭터와 복잡하게 얽힌 여러 설정을 정리하기 위한 리부트가 필수에 가깝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연속성을 포기하고 한편의 독립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매체인데, 현재 MCU가 딱히 스토리가 꼬였다거나 캐릭터가 많다거나 해서 지금과 같은 문제를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리한 리부트는 거부감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MCU가 페이즈4 이후 고전하는 이유는 첫째, 서두에 언급했듯이 지금의 마블 영화에는 영웅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실 생각보다 답이 간단하다. 영웅은 내가 아닌 남을 위해 힘을 쓰며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다. 스티브 로저스는 누구보다 빈약한 육체를 지닌 채 태어났으나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상대도 되지 않는, 타노스라는 극강의 존재에게 난타당하면서도 기어코 다시 일어나 부서진 방패를 고쳐 쥘 수 있는 것은 그가 영웅이기 때문이 다. 가망 없는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함께 주먹을 쥔 채 응원하게 되고, 그의 입에서 나지막이 “어벤져스, 어셈블”이 흘러나올 때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이기적 인간이었던 토니 스타크 역시 <어벤져스>에서 잠깐이나마 미래를 본 후 사랑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고민하고, 결국 “나는 아이언맨이다”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를 희생해 우주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영웅으로서의 삶을 끝낸다. 도중에 있었던 잠깐의 갈등과 부침(<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은 그의 인간적인 면을 더욱더 부각하는 장치가 되어준다. 영웅은 인간적인 흠이 있을 때 더 영웅적이지 않은가. 만일 마블이 그저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리부트를 생각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MCU의 문제는 영웅이 없다는 점이며, 이는 리셋 버튼을 누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은 재미가 없다’는 문제 역시 각본과 연출로 보완해야지 리부트로 해결할 일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MCU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공감하기 힘든 템포의 PC 달리기를 리부트로 해결할 수 있을까? 이는 극장을 향하는 관객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직접적인 장애물이다. 감히 예상컨대 마블은 리부트 후에도 마블의 하락세를 불러온 여러 요인을 버리지 못하며 오만함을 고집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만 봐도 미래는 밝지 않은데, 심지어 문제의 진짜 핵심인 디즈니는 아직 언급도 하지 않았다. 디즈니가 건재한데 리부트가 MCU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리부트 루머 중 하나인 크리스 에반스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복귀 소식은 참혹하기까지 한데, 최고의 엔딩을 선사하면서까지 퇴출시켰던 영웅을 되살리는 최악의 선택은 제발 피했으면 하며 혹여 등장시키더라도 중요한 순간 전환점이 되는 역할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해본다. “여러분이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그립다고 하여 되살려드렸습니다”가 되어선 곤란하다. 코믹스에서는 캐릭터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이 그야말로 병가지상사이지만 이는 100년 가까운 코믹스 역사 동안 수천, 수만편의 작품이 나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 MCU의 역사는 이제 15년밖에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슈퍼히어로 장르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한 지금, 리부트는 그 피로감을 배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면 애초에 MCU로 인한 피로도 자체가 만만치 않으므로 똑똑한 리부트는 적절한 처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리부트를 하게 된다면 마블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등 MCU에서도 좋은 평을 받는 작품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되짚어보았으면 한다. 또한 많은 작품들이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도 보석처럼 빛났던 작품이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였다는 사실 역시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부디 함정에 빠져 옴짝달싹 못한다고 해서 자충수는 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함정을 던진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마블 본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과연 마블이 ‘망한 부자’에서 ‘재기에 성공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기엔 그동안 마블에 쌓인 애정이 너무나도 크다. 제작진만 뿌듯해하며 만족하는 결과물이 아닌 관객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작품, MCU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고 싶다.

[기획] 12·12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회는 어떻게 신군부가 되었나

1979년과 1980년. 한국 현대사에서 ‘핵심 권력의 전면적 교체’와 ‘독재 체제의 연장’이 동시에 이뤄진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드라마와 영화로 수차례 다뤄진 것은 당연하다. 1980년 5·18을 그린 영화는 <꽃잎>(1996) 이후 여러 편이다. 1979년 10·26 박정희 시해 사건을 재구성한 <그때 그 사람들>(2005)이 개봉한 지도 18년이 넘었다. 그런데 1980년 12·12를 집중해서 다룬 영화는 <서울의 봄>이 처음이다. 이전에는 TV드라마에서 10·26, 5·18과 함께 다뤄진 수준이었다. 절대 권력이 기습적으로 붕괴된 10·26은 묘한 뒷맛을 남긴다. 5·18의 경우는 잠시 악마적 권력이 승리했지만 시민 항쟁이 영원한 승자로 새겨졌다. 영화화 자체로 애도의 의미가 있고, <스카우트>(2007), <26년>(2012)처럼 가상 인물을 내세워도 당대 민주 시민에 대한 헌사가 된다. 반면12·12는 독재 권력이 새롭게 태어나 출발한 사건이므로 관객에게 주로 분노와 불편을 안길지 모른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군인끼리의 투쟁이라 평범한 보통 시민을 개입시키기 어렵고, 기록만 따도 타임라인이 빽빽하므로 상상이 들어설 여지가 작아 보일 수도 있다. 12·12는 이제 더욱 오래전 사건이 되었고 관객들이 받을 스트레스도 크게 줄었다. 다만 다들 뻔히 결말을 알고 있다는 난점은 더 커졌다. <서울의 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여러 방증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실존 인물인 최규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관해 형성됐던 대중적 이미지에 비해 최한규는 강단 있고 노태건은 터프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정승화 체포 재가를 두고 버티던 최한규는 신군부에 굴할 때 뒤끝을 남긴다(실화다). 전두광의 친구 노태건은 중간중간 격하게 동요하지만 고비고비에서 전두광 이상의 추진력으로 쿠데타를 밀어올린다. 이들은 당시의 체제와 환경이 신군부에 그저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표현한다. 이것은 영화적 과장으로 치부할 수 없다. 아무리 유리한 구도에서 일으킨 반란이라고 해도 “실패하면 반역”인 이상 쿠데타 세력도 극도로 긴장하는 법이다. 실제 12·12 가담자 군상은 다양했다. 반란 본부에 들어오고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거나, 반란을 지지하면서도 병력 동원은 기피하거나, 자축 파티가 시작된 뒤에야 도착하는 군인이 있었다. 영화는 종반부 전두광의 행동거지에 반란군의 내면을 응축시켜두었다. 하나회의 불안과 오만이 야기한 것은 신군부가 군권의 주요 부위를 진작에 장악한 것이 어떻게 반란의 성공으로 귀결되는지는 영화가 충분히 묘사하고 있다. 관객이 가질 만한 큰 의문은 ‘그렇다면 신군부는 그 이전에 군권을 어떻게 장악했는가’일 것이다. 10·26 이전 박정희 권력은 철옹성이었다. 박정희 본인이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뒤이은 쿠데타의 가능성을 철두철미하게 분쇄했으리라는 추정은 누구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5·16의 주역이었던 해병대의 힘을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남산의 부장들>(2020)에서도 조명되었듯 박정희는 자신의 지척까지도 분할해서 지배했다(devide and rule). 그럼에도 박정희 질서, 즉 박정희의 권력 유지 체계는 어떻게 해서 박정희 사후 곧장 신군부에 접수되는가. 박정희 주위 여러 인물들이 막강한 권세를 누리다가 효용이 다하면 배제되었던 것이 신군부의 밑바탕이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는 그 속에서 더욱 강하게 살아남았다. 12·12를 배태한 것은 5·16이었고, 그 이후 장기 독재가 12·12를 육성했다. 1961년 5·16 쿠데타에 동원된 병력은 60만 대군의 0.6% 정도인 3600여명이었다. 5·16은 사전에 계획이 새어나갔는데도 사망자 없이 성공한 쿠데타이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은 기습적인 성공이 역공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가졌다. 거사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병력의 지지가 절실했고, 일단 대세가 기울었음을 웅변해줄 지원군이 필요했다. 5·16 직후 쿠데타 주체는 육군사관학교를 압박한다. 군의 미래를 짊어질 생도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젊은 장교들이 운집한 곳이다. 육사 교장 강영훈은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5·16에 놓인 첫 문턱을 제거한 주인공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ROTC 교관 전두환 대위다. 전두환은 5월16일 오전 8시부터 육사 11기 동기인 이동남과 함께 육군본부에서 동창생들을 만나며 누가 혁명 주체인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5월16일이 저물기 전에 박정희가 주도자임을 알아채고 혁명에 가담하기로 결의한다. 육사 11기에 박정희-김종필은 낯익은 선배들이었다. 육사 11기인 손영길은 육사 2기 박정희의 부관이다. 전두환도 5·16 직후 육사 8기 김종필에게 “왜 중대한 일을 하면서 연락하지 않았냐”고 직접 물어볼 정도였다. 5월18일 오전, 전두환의 주도하에 육사 생도와 졸업생 장교를 합쳐 1천여명이 서울에서 5·16 지지 행진을 펼친다. 신호탄이 터지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쿠데타에 얹혀가기로 하고 명목상 최고 지도자로 이름을 올린다.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도 5·16 지지 시가 행진을 벌인다.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에 발탁된 데 이어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부임한다. 이 직책은 12·12 당시 그가 맡은 보안사령관직과 수미상응을 이룬다. 인사와 정보를 맡는다는 것은 상관과 선배도 조회 내지 조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1950년대 박정희의 출세 코스와도 닮았다. 전두환이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는 박정희의 권유를 고사한 이유는 자명하다. 군에 남는 것이, 남는 장사였다. 쿠데타의 주력군이 아니었던 육사 11기가 곧바로 전면에 부상한 원인은 육사 역사에 나온다. 1946년 개교 이래 초기 입학자인 1~9기는 주로 광복군·일본군·만주군 등을 경험한 이들이었다. 건군이 시급하기도 해서 반년도 안되는 교육을 받고 장교가 되었다. 1949년 2년제 교육과정이 도입되었을 때 입학한 10기는 절반 가까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 1952년 도입된 4년제 교육에 처음 들어선 것이 육사 11기 생도 200명이다. 전쟁 이후에 임관한 덕에 희생되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다녀오는 행운까지 누렸다. 그들에게 쿠데타의 상비군 자리가 돌아갔다. 주전 선수가 은퇴하면 신인이나 후보 선수가 비집고 갈 여지도 커진다. 5·16 세력 내부의 쟁투가 치열해지고 패자들이 줄줄이 퇴장한 것이 육사 11기의 앞길을 연다. 가령 박정희-김종필 세력이 장도영을 축출할 때 그를 ‘반혁명’ 혐의로 체포한 장교가 노태우였다. 이들 11기 정치 군인이 1961년 말에 만든 것이 각 구성원을 ‘별’로 지칭한 ‘칠성회’이며 칠성회가 확대된 것이 ‘하나회’다. 하나회 꼭대기의 육사 11기는 ‘우리가 진짜 육사 1기’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들과 나이 차가 크지 않지만 고위직을 꿰차버린 육사 8기를 질시했다. 이들의 초조함과 오만은 두 차례의 중대 사건을 부른다. 하나는 무려 16년 전 12·12를 예고한 1963년 7·6 거사 시도였고, 그다음은 윤필용 사건이다. 박정희에서 시작된 역사의 굴레 5·16 세력이 군정을 종식하고 민간 정권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이끄는 민주공화당 창당 추진파와 당시 현직 중정부장 김재춘(육사 5기)이 지원하는 이른바 범국민정당 운동이 부딪힌다. 후자는 그 무렵 일어난 증권파동 등 4대 의혹 사건을 공화당 창당 자금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간주하고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전자를 맹렬히 수사한다. 그러나 1963년 6월27일 증권파동 연루자들에게 무죄판결이 떨어지며 저울추는 다시 김종필과 공화당쪽으로 기운다. 이때 노태우, 손영길을 위시한 육사 11기 사이에서 김종필계 인사 40여명을 7월6일경 체포하자는 시나리오가 피어난다. 육사 8기에 막혀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불만이, 박정희에게는 충성하되 그 아랫선인 김종필 라인 일부를 타격하는 ‘친위 쿠데타’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계획은 김재춘이 노태우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이 사건을 수사했던 방첩대장은 공교롭게도 훗날 12·12에서 체포되는 정승화였다). 전모를 파악한 이들은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고, 박정희도 처음에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직접 지목하며 구속하라는 방침을 내렸다. 그러나 김재춘이 ‘실행하지 않았다’, ‘허술한 계획이었을 뿐’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감싸자 박정희는 어쩐 일인지 별다른 조치 없이 넘어가고 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3년에는 윤필용 사건이 터진다. 유신 체제가 들어서던 1972년 가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은 사석에서 중정부장 이후락에게 “박 대통령은 노쇠했다.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것이 박정희 귀에 들어가면서 보안사령관 강창성이 윤필용을 낱낱이 수사했고, 윤필용과 가까웠던 육사 11기의 손영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나회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강창성은 이 군내 사조직을 발본색원하려 했지만(이런 악연 탓에 그는 후일 전두환 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는다), 이번에도 박정희와 경호실장 박종규는 전두환을 비호한다. 동기인 손영길이 몰락하는 바람에 전두환이 하나회에서 갖는 리더십은 되레 훨씬 더 강력해진다. 왜 박정희는 하나회 인사들을 아끼고 전두환 등을 싸고 돌았을까. 시간과 공간, 두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박정희는 육사 2기로 임관해 11기와는 아홉 기수나 차이가 났다. 박정희는 1917년생이고 하나회 주도자들은 1930년 전후에 태어났으니 연령상의 차이는 더 벌어진다. 박정희에게 하나회 세대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박정희의 경계심을 부추긴 것은 바로 아랫선이나 나이 차가 적은 후배들이다. 하나회는 오히려 저들을 견제하는 데서 박정희에게 유용했다. 둘째, 박정희가 권력을 굳히는 과정에서 영남 인맥이 부상했다. 여당 공화당에서 김종필을 억눌렀던 김성곤이나 백남억 같은 정치인들부터 ‘티케이’(대구경북 출신)였다. 하나회의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도 대구에서 성장한 티케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을 때도 지역 구도는 선거의 뼈대였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출신 지역은 인맥과 파벌의 형성에서 가장 큰 변수였다. 박정희가 1979년 생전 마지막 해에 단행한 조치들도 전두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박정희는 전시나 계엄 상태에서는 보안사령부가 중정과 검찰, 경찰 등 모든 수사 권력을 통제하도록 제도를 바꿔놓았다. 마침 육군 제1보병사단장 시절 북한이 판 제3땅굴을 발견한 공적에 힘입어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올라섰던 때였다. 보안사 권력을 강화한 박정희의 조치에는 전두환에 대한 신임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보안사령관이 된 전두환은 뜬금없이 전문가에게 ‘과외’를 받으며 경제 공부를 한다. 그가 학습한 철칙은 ‘물가와 통화의 안정’으로, 박정희 정부가 오래 견지하던 국가개입주의보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펴는 시장만능주의에 가까웠다. 아무리 전세계 경제 기조가 뒤바뀌는 상황이 확연했다 해도, 하필 전두환이 그 준비를 했다는 것은 소름 돋는 대목이며 누가 이 공부를 기획했는지 몹시 궁금하다. 이즈음 전두환 위에는 몇 사람 남지 않았다. 그가 절대 충성해야 하는 박정희, 전두환보다 후생이지만 5·16 주역으로서 먼저 출세한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등. 그런데 김재규가 나머지 둘을 살해하고 그로 인해 자신까지 파멸로 몰아넣음으로써 10월27일부로 전두환에게는 거칠 것이 별로 없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5·16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사조직 하나회가 돌출되었을 때 박정희 정권이 이를 뿌리째 솎아냈거나, 박정희가 대통령을 두어번만 하고 안정적으로 후임자에게 권력을 이양했다면, 신군부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12·12와 5·18의 발포 주체는 전두환 신군부지만 그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18년간 단련시킨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박정희가 죽기 직전 일어난 부마항쟁을 되짚어보라. 사태가 더 악화되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는 것이 박정희의 입장이었다. 5·18을 부마항쟁과 갈라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망한 이후에도 신군부를 받쳐준 박정희 시대의 관성은 결코 은폐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역사기념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뚜렷하게 차별 대우하고 있다. 우리는 신군부가 박정희의 상속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터뷰] 욕망과 신념이 자아낸 사건을 제대로 포착하고자 했다,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

김성수 감독이 운명처럼 만난 작품과 함께 돌아왔다. <서울의 봄>은 12·12에 관한 실제 기억이 있는 감독이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파헤치는 내밀한 작업이다. 무국적성을 지향한 안남시(<아수라>)에서 1979년 서울시(<서울의 봄>)로 옮겨온 김성수의 세계는 이모개 촬영감독의 육박하는 카메라와 장근영 미술감독의 집요한 터치로 전과 다른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전두광이라는 불편한 캐릭터에 도전한 황정민과 꿈이 없던 <비트>(1999)의 민이에서 목적의식 뚜렷한 군인이 되어 김성수 세계에 복귀한 정우성의 격돌하는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크다. 이번 영화로 <아수라>의 드림팀과 다시 뭉친 그는 감독의 비전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값지고 계속하고 싶은 일인지를 새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 19살 때 그날의 총성을 직접 들은 뒤 12·12가 인생의 오랜 의문으로 남았다고. = 그렇다. 1979년 12월12일 당시에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보이는 데서 살았는데, 그날 밖에 있다가 장갑차 하나가 공관쪽으로 가는 걸 봤다. 호기심에 그걸 보겠다고 육교로 올라갔는데 거기서 총소리를 처음 들었다. 이미 육교에 있던 군인들에게 가라는 소리를 듣고 내려왔는데 그다음이 궁금해서 도무지 집에 갈 수가 없더라. 그래서 근처 친구네 집 옥상에 올라가 웅크리고 앉아 간헐적으로 계속 들리던 ‘땅, 타당’ 하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오래 각인됐고 몇십 년간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살았다. 한참 지나 감독으로 데뷔할 즈음인 2003년 무렵에서야 그날 밤의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걸 찾아 읽으며 당시의 상황에 놓였던 군인들은 어떻게 행동했을지 계속 상상했다. - 2019년에 김원국 하이브미디어코프 대표로부터 <서울의 봄> 시나리오를 받고 놀랐을 것 같다. = 뭣해서 내색한 적은 없지만 시나리오가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운명적이라고 느꼈다. 그만큼 깊이 오래 생각했던 사건이니까. 처음에 고사하면서도 어쩌면 이걸 하게 되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고, 10개월 정도 지나 2020년 여름에 진행이 결정됐을 때는 결국 이건 내가 거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각색에도 참여했는데, 무엇에 중점을 뒀나. = 10·26 사태에서부터 12·12가 일어나기 전까지 약 50일에 해당하는 전반부 작업을 오래 했다. 요즘 관객들에겐 우리 이야기가 다소 낯설 것이라 극의 초반부터 영화 안으로 확 끌어들이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몸통이 되는 약 9시간, 즉 반란군이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며 총성을 울린 오후 8시부터 대통령(정동환)이 총장 연행을 재가한 다음날 새벽 5시10분까지는 르포 기자가 긴박한 현장을 밀착해서 지켜보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 일을 일으킨 사람조차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욕망과 신념에 따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거기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를 잘 살려보고 싶었다. - 영화의 전체 톤을 잡아준 이미지가 있나. = 12·12에 관한 사진과 기록 영상들이 워낙 많이 남아 있다 보니 굳이 따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들을 조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 상황과 명령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군인들을 따라잡는 이모개 촬영감독의 실력이 빛을 발한다. = <아수라> 때도 느꼈지만 이모개 감독은 카메라로 구도를 잡는 게 아니라 인물들의 움직이는 감정을 찍는다. 이번에는 그날 앉아서 전화만 받은 군인들의 요동치는 마음까지 잡아냈다. 이모개 감독과 나의 목표는 <아수라> 때처럼 인물들의 동물적인 움직임을 잡아내는 것, 일촉즉발이라 계속 움직이면서 얘기하는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바로 옆에서 본다는 느낌으로 담는 거였다. 마치 빠르게 걸어가는 정치인을 담는 카메라 기자처럼 말이다. 그랬을 때 진짜 같음, 그때 그 시절을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 살 것 같았다. - <아수라>의 장근영 미술감독이 이번에도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았다. 육군본부 벙커, 국무총리 공관, 30경비단 작전실 등 다양한 실내 공간들이 시대의 분위기와 인물의 성격을 반영해 몰입을 도왔다. = 워낙 밀착해서 찍다 보니 카메라가 잡히는 모든 공간이 더더욱 진짜처럼 보여야만 했다. 가장 훌륭한 영화미술은 시간을 가진 공간을 그대로 찍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니 장근영 감독에게 최대한 ‘만든 느낌’이 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내 요청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장근영 감독은 시간을 머금은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걸 워낙 행복해하는 아티스트라 믿고 맡긴 바가 크다. - <아수라>에 이어 협업한 키스탭을 말하자면 김상범 편집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의 봄>이 장르적으로 재밌는 영화가 된 건 편집의 힘 또한 크다. 특히 세종로에서 이태신(정우성)과 전두광이 발포를 두고 대치하는 시퀀스는 적극적인 교차편집 덕분에 긴장감이 배가됐다. = 대한민국 편집의 선생님이시다. 박찬욱 감독 작품을 다 하시지 않았나. 내가 워낙 편집에 많이 관여하는 편인데 그분을 만나 많이 배웠다. 세종로 대치 신은 어떻게 하면 긴박하게 묘사할지 고민하다 보니 굉장히 여러 번 편집했다. 반란군을 향해 진짜 포를 쐈을 때 생길 민간인 피해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들을 막을 방법이 없는 상황이 주는 아이러니와 난처함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이 비극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도록 - 황정민 배우는 어떤 역할에서든 황정민스러움이 묻어나는 것이 강점이고, 낯익은 얼굴의 스타다. 관객이 황정민 배우를 전두광으로 온전히 봐줄까 하는 염려는 없었나. = 황정민을 택했는데 황정민스러움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잘못된 거다. 나는 정민씨가 자신의 육체 언어로 맡은 역할을 해석해서 관객에게 이야기를 운반하는 전달력이 매우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한다. 2018년, 2022년에 황정민 배우가 출연한 연극 <리차드 3세>를 봤다. 잔혹하고 내면이 뒤틀린 왕을 활화산 같은 에너지로 표현하더라. 그런 배우에게 전두광 역할을 맡기는 건 당연했다. 다만 황정민의 겉모습 그대로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정민씨도 원래의 자신과 다른 모습을 하고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면 더 편할 것 같다고 의견을 줘서 같이 의욕적으로 전두광의 외형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특수분장 업체) CELL의 황효균 대표와 회의했는데 황 대표가 “감독님이 원하는 수준까지는 저희가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더라. (웃음) 그래서 내가 “관객들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하고 나왔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한번 가보자”라고 북돋웠다. 성사되고 나서부터는 R&D 공정하듯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여러 형태의 가발을 만들었다. 촬영 때마다 정민씨가 4시간씩 분장을 해야 해서 고생이 많았다. - 전두광의 적나라한 얼굴로 스크린을 채우는 데에 주저함이 없더라. 불편해할 관객도 있을 텐데. = <서울의 봄>은 전두광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그가 12·12를 야기했고, 매듭도 그가 짓는다. 그 모든 비극이 그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 그럼에도 <서울의 봄>이 ‘전두광 영화’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놀랍다. 악인의 광기에 영화가 잡아먹히지 않도록 전두광 캐릭터를 세심히 통제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 전두광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는 영화에서 그의 시점으로 전개까지 된다면 이야기의 목적과도 부합하지 않고 무엇보다 영화가 위험해질 거라 판단했다. 그를 깊이 있게 밀착해서 다루되 관객의 눈까지 되어줄 인물, 전두광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욕심과 야망을 위해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는 걸 그와 대척점에 서서 증명해줄 인물이 필요했다. 그 역할이 바로 이태신 장군이다. 책임감 있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이태신을 통해 전두광이 위법자이며 중범죄자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 <서울의 봄>까지 보고 나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의 정우성 배우는 한국영화에서 수호자를 상징하는 얼굴이 된 것 같다. = 정우성 배우와 나는 <비트>(1997)로 신인배우, 신인감독으로 만나 한국영화계에서 함께 쭉 성장해왔다. 오랜 시간 우성씨를 지켜봐오면서 이제는 그를 조금은 안다고 자부하는데, 정우성에게는 이태신 같은 면이 있다. 그와 이태신 모두 우리가 으레 신념이 강하다고 말할 때의 그 신념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가졌고, 근원적으로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성씨가 이태신 역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 <서울의 봄>을 본 어떤 관객은 이 영화를 공수혁 특전사령관(정만식)을 불법 체포하려던 반란군에 홀로 맞서다가 전사한 오진호 소령(정해인)의 이야기로 기억할 것 같다. <서울의 봄>이 ‘전두광 영화’가 되지 않은 건 이 부분의 공도 큰데, 실존 인물인 정병주 사령관과 김오랑 소령의 이 에피소드는 처음부터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나. = 그렇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의 얘기는 전체에서 메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 8분짜리 에피소드는 12·12를 압축하는 면이 있다. 극 중 공수혁 사령관을 잡으러 온 이들은 신군부의 회유에 넘어가 그를 배신한 부하들이었고 그를 지키던 오진호 소령은 동료의 총에 맞아 전사한다. 하극상, 다시 말해 같은 편의 배신이라는 데에서 오는 충격과 희생이 다 들어가 있는 신이기에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나와야 하는 중요한 타이밍일지라도, 영화적 통일성에 하자가 생기더라도 쪼개지 않고 통으로 과감하게 넣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 진짜 훌륭하고 우리가 원하는 모습의 군인이었던 두 실존 인물의 삶을 찾아봤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 앞으로도 남자들이 극한으로 부딪히고 관계 맺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여전히 그러한가. = 평생 영화를 공부하고 영화 일을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스토리텔러로서 계속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정해진 것 같다. 그게 바로 남자들끼리의 충돌과 갈등에 관한 이야기고. 한국영화계에 빚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화를 더 열심히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이야기만 좋다면 매체 상관없이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도 크다. 이야기꾼이 자리를 가리면 쓰겠나.

[특집] “시선과 구조,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 괴물 아닐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배우 송강호 <괴물> 마스터스 토크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가 한창인 지난 10월8일 일요일 오전 9시30분, 한일 국경을 초월해 오랜 시간 영화적 우정을 쌓아온 두 영화인이 대담에 나섰다. 신작 <괴물>로 부산을 찾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이사장 공석, 집행위원장 직무대행 체제로 어수선한 부산영화제를 위해 호스트가 되어 손님들을 맞이했던 송강호 배우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두 사람은 함께 호흡한 <브로커>로 제75회 칸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송강호 배우는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올해도 나란히 칸영화제에 다녀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2018) 이후 오랜만에 일본에서 촬영한 영화 <괴물>로 칸영화제 각본상이란 결과를 낳았고, 송강호 배우는 1970년대 충무로를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거미집>이 비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 칸에서 시간을 보냈다. 따로 또 같이 칸의 바닷가를 찾은 두 사람은 그곳에서도 시간을 내어 차를 마시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부산에서 마주 앉은 두 영화인은 11월29일 국내 개봉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을 두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질문을 던진 이는 송강호 배우. <괴물>의 독특한 3부 구성부터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아역배우 기용술,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과의 협업까지. 송강호 배우의 머릿속에는 질문 계획이 다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고 신중하게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송강호 배우가 누구인가. 어떤 장면에서든 그만의 재치로 웃음을 유발하는 데 천재적인, 범상치 않은 인물이 아닌가. 이날 대담은 한없이 진지해지다가도 송강호 배우의 농담에 한순간에 좌중 웃음이 터져나와 분위기가 여러 번 뒤바뀌었다. 진지하면서도 편안하고, 두터운 신뢰가 깔려 있되 웃음이 가득했던 이날의 공기가 독자들에게 잘 전해질 수 있길 바라며 두 영화인의 우정 어린 대화를 꼼꼼하게 전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이번에 <괴물>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부산에 왔습니다. 송강호 (일본어로) 곤니치와, 송강호데스! <괴물>이 칸영화제에서 굉장히 빠른 순서로 상영되는 바람에 보고 싶었으나 놓쳤는데 이번에 보게 됐습니다. <괴물>이 너무 궁금했었는데 역시나 참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이 밀려오는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 송강호 칸에서도 감독님이 호텔까지 오셔서 커피를 마셨는데, 그날이 폐막식 날이었습니다. 감독님이 폐막식에 참석한단 얘기를 듣고 “이야~ 이번에도 팜므도르(황금종려상)?” 했는데 영화를 보니 팜므도르는 받아야 할 작품이 아니었는가 싶었습니다. 이번 영화가 그 정도였습니다. 상 자체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마는 그만큼 진짜 위대한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송강호 배우가 영화 <괴물>을 봐주셨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고 지난번 칸에서 함께 만났던 것도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영화를 작업하고 이렇게까지 관계가 지속되고 있어 정말 기쁘네요. 송강호 저야말로 영광이죠. 고레에다 감독님이 늘 부산영화제는 꼭 빼놓지 않고 오셔서 한국 관객과 대화를 나누시는데요. 올해 또 제가 특별한 역할을 맡아 잠시라도 만나뵙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에 얼굴을 뵈니 정말 반갑고 좋습니다. (송강호 배우는 제28회 부산영화제에서 호스트 역할을 맡아 개막식에서 각국에서 온 영화인들과 손님들을 맞이했다.-편집자) 그런데 감독님, 이번에도 좋아하시는 간장게장을 드셨습니까? (웃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네, 제대로 먹었습니다. <괴물>의 아역배우 구로카와 소야와 히이라기 히나타를 데리고 간장게장 집에 갔습니다. 아이들은 간장게장을 처음 먹는 것이었는데도 너무너무 맛있어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밥을 두 그릇씩 먹었습니다. 송강호 다행입니다. <괴물> 이야기도 나눠볼까요. 소위 ‘다중 화법’이라고 하죠. 예를 들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처럼 다중 화법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한 사건을 여러 사람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고레에다 감독님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게 <괴물>의 다중 화법이란 느낌이 들더라고요. 다중 화법 구조 자체가 영화적 발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메시지를 적절하게 전달하는 방식이 다중 화법이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다음에도 영화를 할 때 이런 방식을 또 시도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제가 굉장히 오랜만에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었는데요. 사카모토 유지 각본가가 처음 플롯을 써서 주셨을 때부터 지금처럼 3부 구성이었습니다. 3부로 구성된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점점 더 그 이야기에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사건을 이렇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영화를 만들기 전에 글만 읽었을 뿐인데도 이야기에 의해 제 자신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라는 게 이런 것이로구나, 인간은 신이 아니라 미물에 불과하구나’를 그때 느꼈습니다. 아마도 사카모토 유지 각본가가 이 이야기의 연출을 제게 맡긴 가장 큰 이유가 제가 사람들을 많이 그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그만큼 <괴물>이 지금까지 제가 만들어온 영화, 제가 써온 글들, 제가 창조한 세계관과 굉장히 가까운 이야기란 생각이 듭니다. 송강호 저도 동의합니다. 고레에다 감독님의 작품 세계를 제가 단정할 순 없지만, 그 깊이나 세계관을 이 <괴물>을 통해 깊게 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건 여담인데 영화를 보면서 기키 기린 배우님이 살아 계셨다면 교장 역할을 맡으시지 않았을까. 다나카 유코 배우님도 너무나 훌륭하게 연기하셨지만 자꾸 기키 기린 배우님이 떠올랐습니다.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봤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영화를 보면 감동받을 대사가 하나 있는데요. 교장 선생님을 연기한 다나카 유코 배우의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라는 대사인데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사합니다. 제가 쓴 대사는 아니지만 그 대사가 제 마음도 울렸습니다. 송강호 교장 선생님이 그 대사와 함께 악기를 불잖아요. 저는 그 신이 정말 좋았어요. 그 악기 소리가 마치 내면에서 토해내지 못한 인물들의 울음같이 들리고 세상을 향한 외침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정말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송강호 소리도 인상적이었어요. “우~ 우~.” 마치 울음소리 같았습니다. 토해내지 못한 울음을 악기가 대신하고 교장 선생님이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니까, 저는 영화가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어요. (웃음) 컷! 하고 크레딧이 쫙 올라갈 줄 알았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을 그렇게 끝내도 좋았겠네요. (웃음) 말씀하신 대로 그 장면이 클라이맥스이자 영화가 향해야 할 지점이라고 늘 생각하면서 <괴물>을 만들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을 연기한 다나카 유코 배우도 시나리오를 읽고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정확하게 느꼈고, 그래서 본인이 직접 현장에서 호른을 불어 소리를 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반인이 호른을 부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다나카 유코 배우가 1년6개월 전부터 호른 연습에 들어갔어요. 영화에 담긴 소리는 배우가 직접 악기를 불어서 낸 소리입니다. 송강호 저 같으면 “그럼 이 영화 안 할래요!”라고 했을 텐데 정말 대단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런데 송강호 배우가 계속해서 <괴물>이라고 말씀하시니까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그런 큰 대작이자 걸작인 <괴물>과 똑같은 제목의 영화를 한국에서 개봉해도 되려나 압박감이 느껴집니다. 같은 제목이라서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꾸벅 인사한다.) 송강호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영화죠. 사실 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 참 역설적인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진정한 괴물은 누구인가. 그게 사람일 수도 있고, 아이들이 저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 사회의 시선과 구조, 사회 내 척박한 감성 등등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 괴물이 아닐까. <괴물>은 이런 역설적인 물음을 던지는 제목 같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금 이 말씀을 반드시 예고편에 써주십시오! (웃음) 송강호 아~ 감동입니다. (웃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굉장히 기쁩니다. 제 영화가 가진 본질을 꿰뚫어보셨습니다. 송강호 <괴물>이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님의 유작으로 알고 있습니다.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마지막에 주인공들이 세상을 향해 뛰어갈 때 찬란한 영혼의 자유를 찾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카메라도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지만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님의 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그 장면에서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님의 찬란한 영혼이 자유로워진 듯한 느낌까지 들더라고요. 이 영화를 볼 관객들은 특히 음악감독님의 음악을 감상하면 그의 깊이와 세계관, 그리고 그의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눈을 감고 끄덕이며 듣는다.)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의 와 빗물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이 올해 3월 세상을 떠나면서 <괴물>은 그의 유작으로 남았다. 그리고 약 2개월이 흐른 뒤인 올해 5월 칸영화제에서 <괴물>이 공개되었다. 3부로 구성된 <괴물>은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도시의 화재 사건을 보여주며 각각의 이야기를 구분 짓고, 마지막 국면에 큰 비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장대비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한 <라쇼몽>과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인 구성인 동시에 영화의 마지막 순간 흐르는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의 와 어울리는 엔딩이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배우 송강호 <괴물>마스터스 토크가 계속됩니다.

[특집] “감정은 컵 속의 물과 같아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배우 송강호 <괴물> 마스터스 토크 2

✽ 감정은 컵 속의 물과 같아서 송강호 그나저나 이번에도 변함없이 아역배우들이 뛰어난 연기를 펼칩니다. 그게 참 미스터리해요. 아무리 오디션을 통해 아역배우를 캐스팅했더라도 어떻게 저렇게 어린 배우들이 영화의 본질을 꿰뚫는 연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지. <브로커> 촬영 때도 제가 계속 이에 대해 질문했는데 이 자리에서 한번 더 여쭤봅니다. <괴물>의 주인공 캐릭터를 연기한 아역배우 구로카와 소야와 히이라기 히나타 두 사람을 어떻게 캐스팅했으며, 어떻게 연기 지도를 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번엔 기존과 다른 기준으로 아역배우들을 캐스팅했습니다. <괴물>의 두 주인공 캐릭터 미나토(구로카와 소야)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는 안고 있는 갈등이 상당히 깊으면서도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더 천진한 면이 있습니다. 깊이 있으면서 굉장히 순수한 내면을 표현해야 하기에 이제까지와 달리 성인배우와 같이 시나리오를 미리 읽게 하고 리허설도 했습니다. 가능하면 두 아역배우가 자주 함께 식사하고 두 배우를 데리고 길에 나가서 대사를 시켜보는 리허설도 했습니다. 준비를 길게 했죠. 또 아역배우들이 대사에만 집중하지 않도록 행동하면서 대사를 툭 던질 수 있게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밥 먹다가 대사가 툭 나오고 놀다가 대사가 툭 나오는 식으로요. 상대의 대사를 듣고 자연스럽게 리액션 대사가 나오도록 둘의 관계 속에서 대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연습을 많이 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역배우들에게 감정은 얼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가리키며) 여기에도 있고 (배를 가리키며) 여기에도 있다고, 감정을 몸의 어디로든지 표현하는 게 좋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리고 물건에도 감정이 있다고 계속 얘기했죠. 그랬더니 구로카와 소야 배우가 영화의 후반 장면에서 보리차가 든 컵을 기울여서 물이 쏟아질 것처럼 다시 되돌리는 연기를 보여줬어요. 송강호 이야~ 저도 컵에 물 좀 주세요! 한번 해봐야겠다. (웃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제가 감정을 생각할 때 자신이 컵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했거든요. 그리고 감정은 그 컵 안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그 안에는 따뜻한 물이 들어갈 수도 있고 차가운 것이 들어갈 수도 있고, 그 컵은 유리일 수도 금속일 수도 있고 플라스틱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안에는 우유를 넣을 수도, 커피를 넣을 수도 있으니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구로카와 소야 배우가 촬영 때 컵을 기울이는 연기를 펼친 겁니다. 어떻게 이런 연기를 했냐고 배우에게 물어보니 보리차가 든 컵이 자신이라 생각하고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아역배우가 그러한 연기를 발견해냈다는 것이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그 연기를 볼 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송강호 주인공을 연기한 친구들이 이번에 연기를 처음 하는 친구들이에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드라마는 몇편 했지만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건 처음입니다. 송강호 <브로커> 때도 느꼈지만 고레에다 감독님의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아역배우들의 뛰어난 창의력과 감성이 느껴집니다. 그게 참 궁금했거든요. <브로커>를 찍을 때도 제가 유심히 봤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아역배우들한테 연기를 주문하나. 그때도 놀라웠지만 아역배우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감독님의 연기 주문 방식이 저는 가장 이상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스스로 찾아가게끔 하는. 이게 가장 정석이고 가장 배우에게 자유로움을 주는 방식이면서 그 자유로움 속에서 배우가 누구도 표현할 수 없는 걸 창조하게 하는 위대한 디렉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역배우뿐 아니라 모든 배우들에게 이렇게 연기 주문을 하시는 것 같아요. 저도 다음 작품 때 구로카와 소야처럼 컵에다 물을 담아 한번 해보겠습니다. (웃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하하하하! (작게 웃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때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송강호 그럼 감독님이 “거 송강호씨, 물 흐르잖아요! 빨리 닦으세요!” 이럴 거 같아요. (웃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역배우들이 현장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건 아역배우가 자유롭게 마음대로 해도 이렇게 제대로 받아주는 성인배우들이 있어서죠. 성인배우들이 있다는 안심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죠. 송강호 고레에다 감독님이 정말 훌륭한 감독님이란 사실이 다시 한번 간접적으로 입증됩니다. 후배 배우들한테 “다음부터 오디션 갈 때 컵에다 물 담아가라”고 말해야겠습니다. (웃음) 물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물 한잔 하겠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송강호 배우가 물을 마시는 사이 취재진을 향해) 지금 이렇게 송강호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너무나 즐거워요. 송강호 배우는 현장에서 절대로 심각한 상황을 만들지 않습니다. 모두가 준비를 하고 있을 때도 어느 순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툭 던져 분위기를 따뜻하게 풀어주셨고, 그렇게 다들 긴장이 조금 풀어지면 가장 좋은 연기가 나왔어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뛰어난 연출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송강호 배우는 언제나 환기를 시켜주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요. 따뜻한 공기가 필요하면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또 다른 공기가 필요하면 분위기를 다시 바꾸는 역할을 하죠. 그것이 비단 송강호 배우가 본인의 연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작품 전체와 한신 한신에 맞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송강호 배우는 이제껏 제가 만난 적이 없는 배우입니다.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오늘처럼 취재진과 함께 대담하는 자리에서도 분위기를 확 바꾸어주죠. 통역을 하는 과정에도 송강호 배우가 한마디를 툭 던지면 분위기가 달라져버립니다. 저는 한국어 의미를 잘 모르지만 0.001초의 타이밍에 던진 말로 뭔가가 크게 바뀌네요. 그런 걸 보면 정말 두근거립니다. 송강호 인터뷰 끝나고 간장게장을 제가 사드려야 하는데 오늘 무대인사 때문에 죄송합니다. (송강호 배우는 이날 대담이 끝나자마자 대구에서 열리는 <거미집> 무대인사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을 떠나야 했다.-편집자) 무대인사 때문에 식사를 대접하지 못하고 이 말씀에 보답을 못해드릴 것 같습니다. 너무나 과찬을 해주셨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송강호 배우에게는 모자란 칭찬입니다. 송강호 (꾸벅 인사하며)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 엘리베이터에서 시작된 인연 송강호 오랜 팬으로서 고레에다 감독님의 작품을 꾸준하게 다 봐왔지만, 첫 만남은 부산 해운대의 그랜드 호텔에서 우연찮게 마주친 것이었죠. 그때 고레에다 감독님께서 어떤 말씀을 해주셨냐면 다 좋지만 특히 <밀양>에서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고. 그 말씀이 제게 처음으로 건넨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기억하고 있습니다. 송강호 그때 처음 만나뵙고 몇년 지난 뒤 또 부산영화제에서 <브로커>란 작품을 구상하고 있으니 같이하자고 제의하셨습니다. 그 뒤로 6~7년 흘러 <브로커>를 같이하게 됐죠. <브로커2>를 찍으면 더 잘할 것 같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서 다시 영화를 함께할 수만 있다면 꼭 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오늘 계속 송강호 배우 칭찬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칭찬 말고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산영화제 인터뷰 중 “한국 배우와 일한다면 누구와 함께 일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고 “송강호 배우입니다”라고 답했는데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딱 송강호 배우를 만났습니다. ‘내가 말한 그가 바로 여기 있네!’ 하고 놀랐죠. 그때 굉장한 인연을 느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관계가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송강호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 어떤 연기도 저는 칭찬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밀양>에서 전도연 배우도 정말 훌륭하지만, 그 영화가 알려준 것은 이 세계에 송강호라는 배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밀양>의 신애(전도연)를 구원해준 사람도 종찬(송강호)이고 <밀양>이란 작품을 구원한 것도 송강호 배우의 연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송강호 배우는 언제나 배역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있는 연기를 보여주기 때문인데요. 특히 <밀양>에서는 이 세상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우리가 그를 실감할 수 있게 만듭니다. 영화가 끝난 뒤 현실로 돌아와서 작품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정말로 뛰어난 연기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송강호란 배우가 항상 우리를 살아가는 쪽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배우라고 생각하고요. 심각한 연기이건 코믹한 연기이건 간에 송강호 배우가 나오면 영화에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송강호 오늘 간장게장을 꼭 사드려야 될 것 같은데…. 너무 과찬을 해주셔서. 다시 한번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송강호 배우가 꾸벅 인사하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함께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감독님도 지금 너무 바쁘시고 저도 일정이 있어 더 시간을 못 보내는 게 너무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꼭 작품이 아니더라도 늘 뵙고 싶고 또 신작이 나오면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감독님입니다. 제가 일본을 가든 아니면 감독님이 한국에 오시든 언제든 뵙고 싶습니다. 다음에 한국에 또 오시면 간장게장을 제가 꼭 사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아쉽지만 자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30여년 만에 다른 각본가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다 <괴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환상의 빛>(1995) 이후 다른 각본가의 시나리오로 제작한 작품이다. 30여년 만의 일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직접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데,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환상의 빛>의 경우 오기타 요시히사 각본가가 시나리오를 썼고, <괴물>의 시나리오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등 방송가와 영화계를 활발히 오가는 사카모토 유지 각본가가 썼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사카모토 유지 각본가와 함께 2019년부터 <괴물>의 시나리오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