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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싱글 인 서울’ 심재명 명필름 대표,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2015년 명필름은 파주로 터를 옮기면서 명필름 사무실과 제작실 그리고 영화관을 운영하는 명필름아트센터, 영화 인재를 양성하는 명필름 영화학교를 세웠다. 어느덧 파주출판도시의 터줏대감이 된 명필름의 신작 <싱글 인 서울>은 <접속> 이후 무려 7편의 로맨스영화를 만든 명필름이 파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을 한껏 활용해 효율적으로 찍은 로맨스영화다. 극 중 등장하는 출판사 사무실, 영화관 등 주요 로케이션을 명필름 건물 혹은 파주출판도시에서 찾았다. <접속>의 PC통신, <후아유>의 아바타 등 당대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것이 명필름표 로맨스영화의 특징이라면, 이번에는 싱글 라이프와 인스타그램을 꼽을 수 있겠다. <싱글 인 서울>은 혼자이길 택한 파워 인플루언서 영호(이동욱)가 출판사 편집장 현진(임수정)을 만나 싱글 라이프에 관한 책을 쓰다가 사랑이 싹트는 로맨스영화다. 지질했던 시절 첫사랑에 대한 회고를 담았다는 점에서 <광식이 동생 광태> <건축학개론>과 같은 계보에서도 읽어볼 만하다. 현재 공사 중인 명필름아트센터 건물에서 개봉을 일주일 앞둔 심재명 명필름 대표를 만나 <건축학개론> 이후 11년 만에 로맨스영화를 개봉하는 배경에 대해 들었다. - <싱글 인 서울>은 명필름이 위치한 파주출판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어떻게 시작된 작품인가. = 명필름이 파주에 온 이후에 계속 파주출판도시 출판사 분들과 교류가 있었다. 출판사를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를 기획해보자고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2016년 신보경 보경사 대표가 “디씨지플러스에 출판사를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가 있다”는 말을 전해주면서 신혜연 인사이트필름 대표에게 연락을 하게 됐다. 신혜연 대표와는 <극락도 살인사건> 때 투자·제작으로 만난 적이 있다. 디씨지플러스가 개발하기 전에는 신혜연 대표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지구를 지켜라!> 제작팀에 있었던 장미애 프로듀서가 <싱글남>이라는 제목으로 준비하던 영화다. 디씨지플러스 그리고 명필름이 가세하면서 속도가 붙었다. 금방 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데 3년이 걸렸으니 햇수만 따지면 <건축학개론>만큼 걸린 셈이다. - <레드카펫>의 박범수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 개인적으로 <레드카펫>을 좋게 봤다. 프로덕션이 좀더 여유 있었다면 더 좋은 퀄리티였겠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에로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비애가 잘 묘사되고 B급 정서도 잘 녹아 있다.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태도에서 만드는 이의 따뜻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신혜연 대표와 장미애 프로듀서도 명필름이 추천하는 감독이라면 괜찮다며 함께하게 됐다. - <싱글 인 서울>에 등장하는 많은 장면을 파주출판단지에서 찍었다. 주40시간 근로와 코로나19로 상업영화 제작비가 업계 전반에서 상승했지만 알뜰하게 프로덕션을 운용하는 길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 파주출판도시 배경의 멜로영화를 만들었기에 많은 신을 이곳에서 소화할 수 있었다. 제작자로서 소원 성취를 한 것이다. 먼지 많은 세트장이 아닌 명필름 아트센터와 카페, 1층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찍으니 현장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분위기도 밝고 촬영 환경도 쾌적했다. 장현성 배우는 월급 받으면서 매일 여기에 출근하며 영화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 (웃음) - 출판계가 바로 인근에 있으니 자료 조사를 하기도 수월했겠다. = <건축학개론>도 건축학과 출신 이용주 감독이 만들어서 건축가 이야기가 잘 녹아들지 않았나. 사실 전문직이 나오는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 한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출판 업계의 사정을 리얼하게 담아내고 싶어서 박범수 감독님에게 내가 파주에서 섭외한 출판사 편집장들을 인터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다. - 텍스트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접속>, 첫사랑의 기억을 다룬다는 점에서 <광식이 동생 광태>나 <건축학개론>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 사회파 영화 <카트> <노회찬6411> <태일이>, 휴먼 드라마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나의 특별한 형제> 등 그동안 45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중 로맨스영화가 <접속>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후아유>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 연애조작단> <건축학개론> <싱글 인 서울> 등 총 7편이나 된다. 사실 명필름이 처음 출발할 때 한국의 워킹 타이틀이 되어보자는 포부가 있었다. (웃음) 그동안 만든 로맨스영화들을 돌아보면 당시 트렌드를 적용해 동시대성을 담아내면서 보편적인 감정을 녹여낸 작품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름 성과도 다 좋았다. <접속>은 남녀 주인공이 한번도 만나지 않고 PC통신으로 교류하는 이야기였고, <후아유>는 아바타를 통해 소통한다. <광식이 동생 광태>는 광식이 편과 광태 편으로 나뉜 구조로 서로 다른 남자들의 지질한 연애 성장담을 보여주고,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연애를 조작해주는 대행업을 한다는 발상을 가져왔다. <건축학개론>은 영화 속에 건축 코드를 넣는 시도를 했다. <싱글 인 서울>은 지질했던 시절 서로 다른 기억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이야기다. -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 연애조작단> <건축학개론>은 두 남자 캐릭터(<건축학개론>의 경우 2인1역)를 중심으로 남자들의 첫사랑, 남자들이 지질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영화다. 반면 <싱글 인 서울>에는 여자에게 첫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는 인상적인 신이 존재한다. 사실 여자들은 첫사랑을 지우고 싶은 ‘흑역사’로 취급하는 경우도 많고 남자들만큼 첫사랑 판타지가 강하진 않으니까. (웃음) 그리고 두 남성 캐릭터가 중심축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던 전작과 달리 임수정과 이솜, 두 여성 캐릭터가 과거와 현재의 사랑을 보여준다. = 사실 의도한 변화는 아니다. <싱글 인 서울>의 원안은 <싱글남>이었고 지금보다 훨씬 영호에게 집중된 영호의 성장담이었다. 시나리오를 고치는 과정에서 영호와 현진의 비중을 대등하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출판사라는 배경과 편집장 캐릭터가 중요해졌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도 브리짓 존스의 캐릭터 덕분에 재밌지 않나. 로맨틱 코미디에 나오는 ‘허당’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잘 구축하면 영화를 재미있고 사랑스럽게 만들어준다. 현진은 일은 잘하는데 연애 촉은 꽝이다. 차를 더럽게 쓴다는 설정은 신혜연 대표의 실제 모습에서 따온 거다. (웃음) 주옥 캐릭터는 과거 장면의 배경과 소품 등이 이솜 배우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배우 덕분에 비로소 완성됐다고 생각한다. - <건축학개론> 개봉 당시 여성 관객과 지금의 여성 관객은 다르다. 2017년 이후 온라인상에서 <건축학개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 않나. 지금 시대에 맞는 멜로영화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 당연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필요 이상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돼 대사 하나하나도 조심하고 걱정한다. 감독님과 편집 과정에서 이견도 있었다. 예를 들면 회식 자리에서 병수(이상이)가 야자 타임을 할 때 윤정(이미도)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욕을 한다거나 서점에서 호객 행위를 할 때 “어려 보인다”고 하는 신은 개인적으로 좀 걸렸다. 박범수 감독이 그 신이 굉장히 중요한 웃음 코드이고 관객은 그렇게까지 불편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해서 결국 영화에 들어가게 됐다. - 2020년 11월에 크랭크인했는데 이후 출연배우들의 주가가 올라가면서 지금 덕을 보고 있다. (웃음) 캐스팅은 어떻게 결정했나. = 이동욱, 임수정 캐스팅은 감독님, 제작자들의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원래 로맨틱 코미디는 휴 그랜트처럼 매력적인 남자배우가 나와야 한다. <싱글 인 서울> 같은 영화에는 이동욱 같은 ‘훈남’이 필요하다. 임수정 배우는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때부터 섬세하고 예민한 연기를 잘하는 관록의 배우라고 생각했다. 이솜 배우는 <나의 특별한 형제>로 인연을 맺고 이번 작품도 함께해준다고 해서 정말 고마웠다. 병수 역은 오디션을 많이 봤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상이 배우가 비의 <레이니즘>을 커버한 영상을 보고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감독에게 추천했고, 시나리오를 보낸 뒤 2시간 만에 하겠다고 답이 왔다. 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와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로 대중적인 인기를 많이 얻기 전이라 ‘심봤다’고 생각했다. 예리 역의 지이수 배우는 <동백꽃 필 무렵>이 끝난 직후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하게 됐다. 이미도 배우는 <레드카펫>에도 출연했던, 박범수 감독의 ‘절친’이다. 명필름과도 <파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함께했다. 장현성 배우와 작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캐릭터와 참 잘 어울렸다. 전반적으로 ‘지인 찬스’를 쓰며 캐스팅했다. (웃음) 팬데믹 이후 명필름의 길 - 한국영화 제작비가 상승한 시점에서 팬데믹으로 산업이 위축됐다.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긴 상업영화는 네편뿐이다. <싱글 인 서울>은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상업영화 기획으로서 최선의 결과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2019년 한국영화 매출과 관객수가 정점을 찍었다. 당시 제작비 200억~300억원대 영화들이 속속 프로덕션에 들어갔지만 당시 명필름에는 대작 시나리오가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영화들이 시장에서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업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동안 명필름은 퀄리티 있는 프로덕션을 운용하면서 예산 대비 웰메이드한 영화를 계속 만들어왔다고 자부하지만 팬데믹 때문에 산업이 움츠러들면서 영화를 개봉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창고 영화’라는 표현은 영화에 안 좋은 낙인을 찍는 것 같아서 싫어한다. “영화사 안에는 창고가 없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아서 개봉 시기를 기다리던 <싱글 인 서울>은 거대한 변화 속에서 던져진 작품이다. - 단순히 팬데믹 때문에 초래된 위기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극장 외에 스포츠, 공연쪽은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했으니까. = 과거에도 영화계는 위기와 기회가 반복됐다고 하지만 지금은 정말 앞이 보이지 않는다. 더 바닥을 칠 것 같다. 결국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태계 자체를 바꿔야만 한다. OTT 플랫폼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영화 자체의 경쟁력이 떨어진 점도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근본적으로 과거 스크린 독과점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다. 개봉한 지 한달도 되지 않아 천만 관객이 들던 시대가 영화계 다양성을 실종시키고 산업 침체를 가져왔다. - 올해 극장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코미디영화가 기대 이상의 흥행을 하는 등 기존 공식을 깨는 결과들이 눈에 띄었다. = OTT 플랫폼에서 유혈 낭자한 장르물을 소비하다가 극장에서는 웃기고 힐링되는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관객도 있는 것 같다. 지금 극장 관객을 주도하는 층이 다시 20대 여성이 됐다고 들었다. 그리고 10대 청소년들의 선택이 중요하다. 이들은 OTT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랐고 성인이 된 후 극장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소비하는 세대다. <짱구는 못말려> <명탐정 코난> 등 극장판 시리즈 관객수가 오히려 예전보다 증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여러모로 흥행의 판도가 달라졌다. - 제작자로서 올해 가장 인상적으로 본 상업영화는 무엇인가. = 사실 한국영화는 저예산 독립영화들을 더 좋아해서 <비밀의 언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상업영화 중에서 꼽자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다. 나는 <슬램덩크> 세대도 아니고 그 만화책을 본 적도 없는데 이거야말로 정말 시네마틱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캐릭터 구현, 프로덕션의 퀄리티, 심장을 박동하게 만드는 사운드와 음악 등 모든 요소가 훌륭했다. 마니아와 대중 관객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최고의 콘텐츠이자 영화였다. 올해 명필름아트센터에서 가장 많은 관객이 든 영화이기도 하다. 만화책 종이의 질감까지 보여주는 색 온도, 공 튀기는 소리가 제대로 구현되는 시스템을 갖췄다며 이곳의 상영 시설을 굉장히 좋아해줬다. (웃음) - <노회찬6411> <태일이> <길위에 김대중> 등 사회파 영화도 꾸준히 만들고 있다. = <접속>을 만들 때 20대 메인 관객과 10살 차이가 났다. 지금은 30년 차이가 난다. 환갑이 됐는데 아직도 로맨스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웃음) 트렌드를 좇아 흥행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점점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신 지금 시대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생겼다. 앞으로도 동시대인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계속 제작할 것이다. <노회찬6411> <길위에 김대중>을 만든 민환기 감독과 천재 조각가 권진규에 대한 이야기도 준비하고 있다. - 앞으로 명필름을 통해 만나볼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나. = 내년 1월 <길위에 김대중>이 나온다. 명필름이 공동투자, 공동제작한 <옆에서 숨만 쉬어도 좋아>는 고시원에서 살다가 함께 살고 싶어서 집을 얻었는데 그만 전세 사기를 당하고 만 커플이 주인공이다. 현실적인 로맨스 장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을 받은 <해야 할 일>도 있다. 명필름이 제작한 영화들 1996 <코르셋> 1997 <접속> 1998 <조용한 가족>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1999 <해피엔드> 2000 <섬> <공동경비구역 JSA> 2001 <와이키키 브라더스> 2002 <버스, 정류장> <후아유> 2003 <질투는 나의 힘> <바람난 가족> 2004 <욕망> 2005 <몽정기 2> <그때 그사람들> <안녕, 형아> <광식이 동생 광태> 2006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사생결단) <아이스케키> <구미호 가족> 2007 <극락도 살인사건> 2008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걸스카우트> <소년은 울지 않는다> 2009 <파주> 2010 <작은 연못> <시라노: 연애조작단> 2011 <마당을 나온 암탉> 2012 <부러진 화살> <건축학개론> <두레소리> 2014 <관능의 법칙> <카트> 2015 <화장> 2017 <아이 캔 스피크> <7호실> 2018 <당신의 부탁> 2019 <나의 특별한 형제> <니나 내나> 2021 <빛나는 순간> <노회찬6411> <태일이> 2023 <싱글 인 서울>

[인터뷰] ‘겨울의 언어’ 김겨울 작가, 나를 던지는 말들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를 배우고 <책의 말들>을 넘어 <겨울의 언어>를 짓는 작가, 유튜브 <겨울서점>의 운영자,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의 DJ, 클래식을 사랑하고 피아노를 두드리고 춤을 추는 예인, 그러나 눈 밝은 친구들인 이슬아, 이훤 부부와의 수다에 따르면 오히려 무인의 성정에 가까운 김겨울에겐 다재다능이라는 수식어가 식상할 지경이다. <겨울의 언어>는 그처럼 수많은 김겨울의 다양태를 담고 있는 여러 글들을 엮은 산문집이다.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씨네21>의 ‘디스토피아로부터’와 <릿터> <자음과 모음> <보스토크> <서울 리뷰 오브 북스> 등 각종 지면에 수록한 원고를 재배열하고, 가장 최신의 김겨울이 담긴 새 글을 일부 더해 총 3부로 구성했다. “깊이 잠수하거나 웃기고 싶어 안달난 두개의 다른 자아”가 때로 팽팽하게 교차하는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분명 산발적으로 쓴 글들의 묶음에서도 끊임없이 추구하고 연마하려는 사람의 열망이 일관되게 읽힌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일찍 이룬 것이 많은 출판계의 스타가 아니라 “자신을 휩쓸어도 좋을 바람” 앞에 선 사람, “책 앞에 엎드린 사람”,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삶/책을 받아들이며 열린 세계의 자녀”로 남으려는 사람을 만난다. - 7번째 단독 저서 <겨울의 언어>는 김겨울이라는 작가를 낯설게 다시 보도록 하는 책 같다. 사색적인 1부 ‘새겨울’의 글들이 특히 그렇다. = 확실히 글을 쓸 때의 자아는 유튜브나 방송에서 비치는 모습보다 낮게 가라앉은 무엇이다. 1부에 배치된 글들을 두고 이혜인 편집자는 약간 산문시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최근에 쓴 글들일수록- 이번 책을 위해 새로 쓴 글 6편을 포함해- 언어 힘에 집중해서 글을 만졌는데, 개인적으로는 무척 마음에 드는 방향성이지만 대중성이나 가독성 측면에서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기도 하다. - 1부의 글 <4000주>에서 화자는 매일 아침 작은 죽음에서 깨어나 조용한 축하 만찬을 즐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비탄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을 거쳐 자신의 “마지막 아침 식사가 언제일지 가늠”해보는 사람이라서다. 김겨울에게 부과된 건강하고 다재다능한 사람의 이미지, 그로부터 기대할 법한 자기계발적 루틴과는 사뭇 다른 맥락이다. = 그게 내게는 너무도 중요한 질문이니까. 죽음을 가정하고 하는 질문은 사람을 발가벗기는 데가 있다. ‘왜 살지?’가 너무 절박한 질문인 시절도 있었고, 지금은 그냥 습관처럼 한다. 프리랜서로 일을 수락하고 거절할 때, 특히 중요한 선택을 내릴 때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겨야만 한다. 말하자면 인테그리티(integrity), 자기 통합성을 추구하는 과정일지도. - 오늘 아침도 충분한 만찬이었나. = 전혀…. 어제는 감기로 몸져누웠고 오늘 아침엔 급하게 시리얼 말아먹고 나왔다. 그리고 인터뷰 끝나면 집에 들렀다 바로 대학원 수업에 가야 한다. (웃음) - 작가, 유튜버로 탄탄한 커리어를 쌓고 다양한 활동으로 분주하던 상황에서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일을 줄이고 공부를 하기로 한 이유는. = 공부는 하면 할수록 엄청 자책하게 되는데 그게 재밌다. 내가 멍청이라는 사실이 나를 너무 기쁘게 한다. 아주 무한히 반짝거리는 세계의 입구를 열고 들어가서 초심자의 흥분을 누리는 일이 좋다. 그리고 책에서도 묘사했듯이 내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정복이란 걸 할 수 없는 세계의 무한성에서 어떤 위안을 얻는다. - 바로 직전의 두 책이 <언제나 다음 떡볶이가 기다리고 있지>와 <아무튼, 피아노>였으니 공부하는 요즘엔 떡볶이, 피아노와의 관계가 어떤지도 궁금한데. = 둘 다 자제 중이다. 들으면 치고 싶을 테니 피아노곡을 적게 듣는다. 또렷한 정신으로 계속 공부하고 싶으니까 졸린 음식을 먹어선 안되고 그래서 떡볶이도 줄였다. 평일엔 참다가 주말에 가끔 먹는다. 한마디로 브레인 포그를 경계하는 중이다. - 유튜브 <겨울서점> 채널과 MBC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를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두개의 커뮤니티가 김겨울에게 갖는 의미는. = 처음 <겨울서점>을 열 때의 바람은 쉬는 시간에도 항상 책만 읽고 있는 애들, 그러니까 나같이 한반에 한명쯤 있는 애들이 전국적으로 모이면 그래도 꽤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지금은 ‘뭘 그렇게 재밌게 보고 있어?’ 하고 기웃거리는 교실의 다른 친구들까지 모인 훨씬 크고 다양한 커뮤니티가 되었다고 느낀다. 라디오는 확실히 내가 호스트로서 게스트를 잘 맞이하고, 잘 듣고, 잘 리액션하는 역할이 더 중요한 매체다. 라디오에선 훨씬 더 타인의 이야기를 많이 접하고 그것에 귀 기울이게 된다. - 이번에 새로 쓴 글들 중 지금의 김겨울을 가장 생생하게 반영하는 글이 있다면 무엇인가. = <완벽한 삶-책>에서 쓴 대로, 단 하나의 정답을 찾지 않고 텍스트와 텍스트를 거치면서 내가 끊임없이 변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따르려 한다는 점에서 나는 책과 삶을 비슷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 같다. 프리랜서 연차가 차면 찰수록 ‘그냥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나갈 수 있겠다’ 싶은 관성의 유혹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래서 되어가는 대로 두지 않고 스스로를 방황에 노출하고 싶다는 아주 오랜 다짐에서 쓴 글이다. 최후의 승리를 경계하고, 책이든 타인의 삶이든 계속 열려 있는 것, 내가 나에게 머무르지 않아야만 오로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역설이 내 삶에선 아주 중요한 기반이다. (이어지는 <삶을 좀 아는 사람>에서 작가는 이렇게 쓴다. “세포는 계속 죽고 태어난다. (…) 하루에 3300억개가 교체되고, 한두해 정도가 지나면 몸 대부분의 세포가 교체된다. (…) 이것들은 결단코 나지만 ‘나’는 조금씩 바뀌어왔다. 이 ‘나’는 저 ‘나’를 향해 착실하게 항해해왔다.”) - 책으로부터 삶의 정답을 구하는 독자들의 목소리도 줄곧 접해왔을 텐데, 그것에 대한 가이드도 되어주는 말이다. = 책을 많이 읽어서 인생을 바꾸고 부자가 되고, 그런 게 나쁘다는 건 아닌데 읽기가 상호작용이란 것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독서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책만 일방적으로 쓸모를 내놓는 그런 행위가 아니라 결국은 대화라는 것, 어쩌면 귀를 열어놓고 듣는 일에 더 가깝다는 것이 독자라는 존재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축복 아닐까. 그런 경험이 본인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는지 알게 된 사람은 결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 여러 매체에서 쓰고 말하는 사람으로서의 무게감을 어떤 방식으로 감당하고 있나. 가령 이번 책에선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춤추는 영상을 그만 올려야 하나?” 고민하는 김겨울도 담겨 있다. = 고민은 늘 돌아오지만 결론도 늘 같더라. 사람들의 기대에 관해 너무 깊이 생각하게 될 땐 박막례 할머니가 남긴 유명한 말씀을 지침 삼는 게 좋다. (웃음) 본인의 장단에 맞게 춤추면 그 박자에 맞는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와 같이 놀 거라는 말.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하려고 한다. - 마지막으로 시를 쓰는 김겨울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 높은 확률로 다음 책은 시집이 될 것 같다. <겨울의 언어>는 시로 가는 징검다리 같은 책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저 써야 할 시들을 째려보고 있다. 201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최종심에 올랐을 때까지만 해도 시에 대한 자의식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시집을 묶어야 하니까 어떤 식으로든 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내려놓아야 할까? 내게 시를 쓸 자격이 있나? 모든 것들이 약간은 혼란스러운 상태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시도 마감을 잘 지키며 쓸 것이고, 산문처럼 정확한 전망을 내다보기보단 언어가 나를 이끄는 방향으로 좇아가보고 싶다. 글의 요구 <겨울의 언어>에서 김겨울은 피아노 콩쿠르에 매진하던 유년기, 괴로웠던 입시 기간, 곡을 쓰고 노래하던 20대 초반 등 과거에 많은 시간을 쏟았으나 지금은 나를 대표하지 않는 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삶의 의미망 안쪽으로 거두어들인다. 그것은 “에세이에 담긴 ‘나’가 실제의 나인 동시에 글 자체의 요구이기도 해서”다. “비비언 고닉이 <상황과 이야기>에서 썼듯, 화자가 거리를 두면서 하나의 글 안에서 상황과 이야기를 완결성 있게 발생시킬 때 생기는 힘이 있다. 특히 이 책에 새롭게 쓴 6편 중 1부에 나란히 실리는 3개의 글(<완벽한 삶-책> <삶을 모르는 사람〕> <삶을 좀 아는 사람>)을 쓸 때 글이 나를 당겨주는 대로 한 발짝 더 나아가보고 싶었다. 나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읽는 이를 위해서라도.”

[인터뷰] 식탁 위의 위로, ‘3일의 휴가’ 육상효 감독, 유영아 작가

죽은 지 3년째 되던 날, 복자(김해숙)는 혼자 남은 딸 진주(신민아)를 만나기 위해 인간 세상에 돌아온다.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며 바쁜 삶을 살고 있을 거란 복자의 예상과 달리, 진주는 김천에 위치한 복자의 텅 빈 집에 남아 홀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메뉴판도 없이 그날그날 자기 기분에 맞춰 백반을 내어놓는 숙련된 솜씨는 진주가 지난 3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가늠하기 충분하다. 복자는 딸에게 말을 걸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는 영혼이 되어 사흘간의 휴가를 얻었지만, 마음은 영 소란스럽다. 도대체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엄마와 딸의 미묘한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 유영아 작가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3일의 휴가>를 써내려갔다. 어머니의 딸이기도, 딸의 엄마이기도 한 그는 중첩된 교집합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애증을 끄집어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한참 동안 마음의 파도를 마주했다는 육상효 감독은 따스한 겨울 볕을 활용해 진주와 복자의 시간을 저장했다. 부엌을 통해 느슨한 연결 고리를 잃지 않는 복자와 진주의 사흘을 들여다보기 위해 육상효 감독과 유영아 작가를 만났다. - 죽은 엄마가 사흘간의 휴가를 받아 딸을 만나러 온다는 주요 골자를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유영아 내가 꿈을 많이 꾼다. 그중엔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생생한 꿈들이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날이면, 그 사람이 어딘가에 잘 살아 있어도 내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왔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그 관계에서 다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 그런 꿈을 꾼다. 여느 모녀 관계처럼 나 또한 엄마를 향한 서운한 감정들이 있다. 가끔은 그것 때문에 격하게 싸우기도 하고, 20대 초반인 내 딸도 나를 향해 그런 감정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렇게 마음의 인식 차이가 있는 사이에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그려보고 싶었다. 모녀 관계의 정수, 진심에서 나오는 에센스 같은 것들을 모아보고자 했다. 육상효 시나리오를 처음 접했을 때, 읽는 내내 많이 울었다. 당시 연로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고, 나 또한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자연스레 이야기에 몰입되었다. 나만 그런가 싶어 나의 오랜 동료인 아내에게 보여주었는데 아내도 펑펑 울더라. (웃음) 그때 이 시나리오가 건드리는 보편적인 감성을 이해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작업하고 싶었다. - 영화는 선한 위트와 유머를 무기로 장착하고 있다. 서로 엇박자처럼 어긋나는 대사들이 인상적인데, 영혼이기 때문에 가능한 유머가 눈에 띈다. 유영아 쑥스럽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코미디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웃음) 나는 내가 코미디를 잘하는진 잘 모르겠다. 특별히 웃기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복자는 딸에 대한 오래된 부채감으로 살아온 엄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고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직접 건넬 수 없어 답답할 것이다. 엄마를 보낸 뒤 백반집에서 일하는 딸의 모습에 환장할 것 같고. 그런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내뱉는 여느 엄마들의 모습을 담아보고자 했다. 특히 강기영 배우가 지상의 안내자로 등장하는데, 웃음 포인트를 잘 살렸다. 사실 시나리오 단계에서 가이드 캐릭터는 없었다. 그런데 엄마와 딸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영화적 한계를 조율하기 위해 감독님의 아이디어로 만들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너무 재미있는 장치가 되었다. 육상효 워낙 배우들이 코미디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김해숙 배우는 연기의 폭이 넓다 보니 훨씬 더 개성 있고 깊이 있는 어머니의 연기를 보여주셨다. 영혼이라는 정체성을 코미디로 활용하기 위해 얼굴을 바짝 들이밀거나 대화 사이사이에 자유롭게 끼어드는 모습들에서 본능적인 연기 감각이 느껴졌다. 강기영 배우는 대사 타이밍에 대한 자기만의 리듬과 흐름이 있다. 자기만의 호흡이랄까. 배우로서 굉장한 자산이다. 상대 배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몸소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과잉되지 않은 연기로 웃음을 준다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 맛있는 음식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3일의 휴가>의 묘미다. 스팸 김치찌개, 솥뚜껑 커피, 만두, 잡채, 손두부 등 다양한 음식이 등장하는데 메뉴 선정은 어떻게 이뤄졌나. 유영아 엄마가 요리를 뚝딱뚝딱 잘하신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솥뚜껑을 활용하거나 “여기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맛있으니까 내려와라” 하는 복자의 대사들은 모두 나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어머니가 1939년생인데, 워낙 옛날 분이시라 생일이면 국수를 해주셨다. 그래야 명이 길어진다면서. 내가 성인이 되어 따로 살게 되었을 때는 생일에 짜장면이라도 먹으라고 전화를 주시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엄마와의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메뉴를 선정해나갔다. 육상효 음식은 복자와 진주의 기억을 연결하는 매개이기 때문에 공들여 담아내고 싶었다. 우리가 선정한 메뉴들은 모두 집밥이다. 요즘의 유튜브 먹방이나 음식 다큐멘터리 등에서는 슬로모션도 걸고 선명하고 화려한 방식으로 음식을 보여주지만, 우리의 방향은 그 결과 달랐다. 예뻐 보이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집밥을 보여줘야 했다. 호텔 카탈로그처럼 정교한 조명 아래에서 촬영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여느 집에서 볼 법한 풍경들. 동네 식당에서 마주할 수 있는 친근한 모습들. 그런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촬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김을 많이 냈다. 음식은 무조건 따뜻해야 맛있어 보인다. (웃음) - 하지만 엄마와 집밥, 엄마와 요리라는 소재는 익숙한 나머지 다소 구시대적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이 지점에 대해 어떤 고민을 담았나. 유영아 우리 엄마 집에 가면 작은 텃밭이 하나 있다. 엄마는 거기서 키운 채소들을 투박하게 뚝뚝 뜯어다 밥상 위에 올려주신다. 마트에서 파는 것처럼 예쁘진 않다. 못생겼다. 엄마가 쓰는 그릇이나 프라이팬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들을 통해 만들어진 음식을 먹으면 너무 맛있다. 엄마 세대가 부엌에 간직한 기억들을 나와 같은 자식 세대가 정서적으로 전달받고 소환하기 위해서는 같은 공간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악영화를 보면 음악이 나를 그리운 과거로 데려간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우리를 어떤 기억으로 데려간다. 그런 것을 말하고 싶었다. 또 자기 엄마만의 맛이 있지 않나. 김치 맛도 집집마다 다 다르고. 물론 이 소재가 뻔하게 다가올 수는 있다. 하지만 엄마의 음식이 지닌 인류의 보편적 감성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 집에도 엄마한테서만 얻을 수 있는 반찬이 있다. 멸치무침이다. 볶음이 아닌 무침. 내가 흉내낼 수 없는 엄마만의 방식으로 만든 것인데, 이 멸치무침을 보다 보면 언젠가 아무리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날 거라는 예감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을 영화에 담고자 했다. - 미완된 상처를 끌어안은 딸과 할 말이 없는 엄마. 모녀 관계의 미묘한 순간들을 디테일하게 담아냈다. 딸과 엄마의 관계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특징은 무엇이라 생각했나. 유영아 엄마한테 제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바로 딸이다. (웃음) 툭툭거리고, 신경질 부리고. 내가 그랬다. 분명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데 엄마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엔 에너지가 없다. 근데 한편으론 억울한 생각이 든다. 내가 어렸을 땐 엄마가 돈 버느라 바빠서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더니. 난 그때 하도 혼자 일기를 쓰다가 글솜씨가 늘어서 작가가 되었는데, 지금은 내가 바빠 당신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신다. 딸과 엄마 사이엔 엇갈리는 타이밍이 있는 듯하다. 영화에서 파출부 일을 하는 복자를 지켜보는 어린 진주의 이야기는 사실 나의 기억이다. 부잣집에서 엄마가 빨래하고 설거지를 하느라 정신없던 모습을 모두 보았다. 아이, 왜 눈물이…. (잠시 짧은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때는 엄마가 너무 바쁘고 지치셨고, 엄마가 여유 있어진 지금에는 내가 지쳐 있다. - <3일의 휴가>에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반영된 듯하다. 유영아 맞다. 서울에 올라온 복자가 진주와 한바탕 싸우고 늦은 밤 김천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이것도 나와 엄마가 싸웠던 어느 날을 반영한 것이다. 이 장면을 쓰면서 많이 아팠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에 돌아가겠다던 엄마는 내가 찾으러 가기 전까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생각이 내내 가슴에 맴돌았다. 이 장면을 찍을 때 마침 촬영장에 놀러 갔다. 군중 사이에 홀로 걸어가는 복자를 보는데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더라.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복자와 슬픔과 허탈함. 외로움과 서운함. 그게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감독님의 힘이다. 육상효 많은 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지점이라 생각했다. 이 장면에서 어느 타이밍에 어떤 음악을 집어넣을지 가장 공들였다. 관객의 감정을 극적으로 끌어올려줄 후속 장치들을 계속 고민했다. 그래서 음악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다. 여러 번 반복해 작업하면서 가장 잘 어울리는 결과가 완성됐다. - 영화는 궁극적으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3년간의 고립된 생활을 스스로 끝낸 진주는 어떤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유영아 진주는 엄마가 홀로 지내던 공간에서 엄마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3년을 보낸다. 그 시간 동안 엄마의 계절, 풍경, 이웃을 경험한다. 분명 후회와 자책감에 시달리는 순간도 많았을 테지만, 잘 몰랐던 엄마의 모습들을 알아가며 힘을 얻었을 것이다. 사람은 슬플 때 과거에 머무른다. ‘그때들’이 너무 많다. 괴로운 그때, 날카로운 그때. 3년의 터널을 벗어났을 때 진주는 이전과 달리 그때들을 버틸 힘을 얻었을 것이다. 앞으로 좀 덜 힘들게 살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육상효 근본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오랫동안 묵혀온 감정을 해소시킨 뒤 비로소 진주가 자유로워진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챙기는 따뜻한 밥 한끼의 힘이 담겨 있다. 식탁을 나누는 행위만으로 상처가 치유되고 일상을 돌볼 근육을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인터뷰] “신인 작가들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사업의 목적이다”, 이선유 경기콘텐츠진흥원 영상산업팀 매니저

이선유 경콘진 영상산업팀 매니저는 동료가 인정하는 ‘경기 시나리오 기획개발지원 사업’ 전문가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업무를 맡아 왔고, 지자체 최초로 세계관 IP를 육성하는 변화를 꾀하며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스토리발굴 지원사업이자 일단 열리면 수백편의 작품이 접수되는 인기 공모전으로 자리 잡기까지 그의 공이 컸다. 이선유 매니저를 만나 경기 지원 사업의 변천사를 청해 들었다. - 올해 사업을 자평한다면. = 올해 응모작은 381편으로 지난해보다 늘었다. 호응이 괜찮았다. 지난해부터 비즈매칭 때 작품 전체를 인쇄물로 읽을 수 있는 시나리오 모니터링 룸을 운영했는데, 올해 그 자료집을 검토하기 위해 경콘진을 직접 방문한 영상 관계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철저히 보안에 신경 쓰며 계속 운영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 어떻게 시작된 사업인가. = 장편 극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육성하고 지원하고자 2017년에 시작된 사업으로 당시에는 시나리오 공모전만 열었다. 다음해에 이 사업을 맡게 됐는데, 기존과 다르게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을 찾아가 함께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작가들에게 현직 영화감독의 멘토링과 교육 프로그램, 비즈니즈 미팅까지 제공할 수 있게 됐다. - 지난해에 세계관 시리즈 부문을 신설한 것이 사업의 큰 변화다. = 영화와 시리즈간의 경계가 옅어지고 우수한 콘텐츠 IP를 확보하려는 업계의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 발맞추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DGK와 우리쪽 모두가 갖고 있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같은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컸다. 지난해 공모부터 세계관 부문을 추가한 결과 총 84편의 작품이 접수됐고 최종 3편을 선정했다. ‘한국형 세계관’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지원도 시작 단계지만 잘 키워나갈 계획이다. - 직접 참여한 작가들은 이 사업의 어떤 점이 좋다고 말하던가. = 멘토링에 대한 작가들의 만족도가 아주 높다. 작가들이 매달 제출하는 창작 보고서를 읽어보면 그 안에 담당 멘토 감독을 향한 감사로 가득 차 있다. 멘토 감독님들 모두가 정말 꼼꼼하고 세심하게 지도해주신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DGK와 함께하는 사업이다 보니 더 자기 일처럼 여기시는 것 같다. 담당자로서 감사할 따름이다. - 매년 멘토진이 화려하다. 올해도 <담보>의 강대규 감독, <모럴센스>의 박현진 감독 등이 멘토진으로 참여했다. = 역시나 DGK와 협업하기 때문에 가능한 조합이다. 현역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개발한다는 점이 우리 사업의 매력 포인트라는 걸 잘 알기에 멘토진 구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강형철 감독님이나 윤제균 감독님 같은 분들을 꾸준히 모셨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 실제로 영상화된 작품이 있나. = 3편 정도 있고, 경콘진에서 제작 지원을 한 김다민 감독의 극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가 올해 개봉 예정이다. 김다민 감독이 이 작품으로 2019년 사업에 참여했었다. 요즘 영화 시장이 어렵다 보니 실질적인 제작 단계까지 가는 데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 사업이 참여 작가들의 커리어 확장에 확실한 도움을 준다고 자부한다. 작가들이 비즈니스 매칭이나 특별교육을 통해 만난 영상 관계자들로부터 각색 등의 새로운 일을 제안받는 경우가 많다. - 지원한 작가들의 사후관리도 이뤄지나. = 물론이다. 사업에 참여한 작가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매년 조사하고 팔로한다. 나중에라도 제작·투자사가 어떤 작가를 만나고 싶다고 우리에게 연락해올 경우, 작가와 연결해준다. 신인 작가들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사업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특집] '서울의 봄' 작전 계획 완전 분석

11월22일에 개봉한 <서울의 봄>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누적 관객수 271만1447명(11월30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을 기록하며 개봉 이후 줄곧 박스오피스 정상을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SNS상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 분노로 높아진 심박수를 인증하는 챌린지까지 유행하면서 극장가에 봄을 불러오고 있다. 호평에 힘입어 벌써부터 N차 관람 바람이 일고, 신 바이 신으로 영화를 뜯어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이 늘면서 스탭을 호명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흥미진진한 영화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뒤따르는 법이다. 그 부름에 빠르게 응답하고자 <서울의 봄>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가이드를 준비했다. 우선 장병원, 안시환 평론가가 <서울의 봄>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을 제시한다. 장병원 평론가는 김성수 감독론의 관점에서, 안시환 평론가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각각 영화의 깊은 결을 해부했다. 영화는 어디까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가. 이어 <서울의 봄>의 키스탭, 이모개 촬영감독, 이성환 조명감독, 장근영 미술감독, 정재훈 VFX 슈퍼바이저, 특수분장을 담당한 황효균 CELL 대표가 들려주는 제작기를 전한다. 1979년 12월12일, 그날의 분위기를 재현하려는 동시에 영화적 재미까지 놓치지 않고자 의기투합했던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 지금부터 <서울의 봄>의 완전 분석 작전을 시작한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서울의 봄> 특집 기획이 계속됩니다.

[특집] 이름 없는 존재들,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 여문주 옮김 | 현실문화A 펴냄 수많은 영화에서 단역, 엑스트라는 이름이 없다. 그들은 거리를 지나가는 익명의 시민이거나 사건 뒤편에서 주인공을 지켜보는 행인들이다. 그들은 배경에 머물러 있으며 집단으로 화면에 포착된다. 그러나 영화가 탄생하던 즈음에 연극무대와 구분되는 영화의 특별함은 배경을 포착하는 힘에 있었다. D. W. 그리피스가 영화의 아름다움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능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안타까워하지만) 영화는 사건 뒤편에 있는 것들, 중심에서 이탈한 자들, 너무 하찮고 범상하기에 눈에 드러나지 않던 것들을 형상화하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민중들이 노출된다”라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에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민중의 형상이 결핍/과잉 노출이라는 이중적 사태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사진과 텔레비전 화면에 분명 노출되고 있지만, 이른바 ‘모자이크 처리’되어 노출된다. (…) 한편에선 가려진 얼굴이, 다른 한편에서는 흐릿해진 얼굴이 있다.”(19쪽) 오늘날의 민중은 너무 많이 드러나지만,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불투명한 얼굴을 갖는다. 민중의 이미지를 조직하는 것은 이 모순적인, 그러나 동시대의 이미지 지형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필리프 바쟁의 사진과 고야와 렘브란트의 회화, 그리고 로셀리니와 파솔리니, 에이젠슈테인과 왕빙의 영화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환경에서 나타난 시각적 도상을 시대적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결합하는 이 책은 민중의 표상을 둘러싼 이중구속을 타개하는 저항의 방법을 모색한다. 디디 위베르만은 민중의 형상을 조직하는 방법론의 한 가지 예시로 ‘단역’(figurants)에 주목한다. 단역은 예술적 위계에서 가장 하부에 존재한다. 아무것도 아닌 배우인 단역은 그러나 그 안에 모든 형상(figure)을 포함하고 있는 가능태의 단어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복수형으로 주어지는 단역의 형상에서 영화를 공동체의 장소로 수용하는 민중의 힘, 이미지를 두 사람 이상의 결합으로 제시하는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의 문장 안에서 에이젠슈테인의 <파업>에 나오는 인민들의 시신은 동시대적 민중의 형상으로 ‘시대착오적’인 형상화를 이뤄낸다. “카메라는 피사체의 얼굴과 전면을 프레이밍할 수 있는 기회를 오랫동안 놓치게 될지라도 그 피사체를 뒤따라간다. 그것이 무엇이든 예견하거나 명령하길 거부한다. 카메라는 ‘선취하지도’ ‘포획하지도’ 않는다. 그저 ‘뒤따라갈’ 뿐이다.”_ 298쪽 하지만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저술이 민중의 얼굴과 목소리가 나타나는 것을 순진하게 긍정할 뿐인 것은 아니다. 영화의 카메라는 민중의 형상을 노출하고 형상화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카메라는 민중의 뒤에서 그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디디 위베르만은 왕빙의 <이름 없는 남자>를 서술하면서 역사와 대면하는 이미지의 힘을 ‘뒤따르는’(Suivre) 카메라에서 찾는다. 강제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무릅쓰고 촬영된 사진이 그렇듯, 이미지는 현재를 일으키는 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영화는 그 이미지를 선점하거나 포획할 순 없다. 영화는 조금씩 늦게 뒤따라갈 것이다. 그 미세한 격차가 디디 위베르만의 시선에 새겨져 있다.

[송경원 편집장] 그 많던 관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많은 관객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앞뒤로 뭔가 생략된 느낌이다. 이렇게 늘려보면 어떨까. 관심 있는 만큼 알고 싶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에 빠진다.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관심 있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는 만큼 궁금하다. 아이가 태어난 뒤 작은 변화가 있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거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더니 어느샌가 눈에 밟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과거의 내게 거리에 나온 아이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배경에 가까웠다. 지금은 이 구역에 유모차가 몇대인지부터 파악하고 각자의 꼴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시선을 사로잡는다. 세상은 마치 여러 겹으로 포개진 그림 같아서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에 따라 매번 새로운 색깔로 빛난다. 지루할 틈이 없다. 극장가에 단비를 내린 <서울의 봄>의 흥행세를 분석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여러 리포트에서 2030 관객들이 극장을 찾은 것을 중요한 동력으로 꼽았다. 1980년대를 겪어보지 못한 젊은 층이 역사에 모티브를 둔 상상에 열광하는 게 인상적이라는 반응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직접 시대를 겪고 역사를 기억하는 중장년층이 밀착하고 호응하는 게 당연하니 이례적인 반응에 신기할 법도 하다. 하지만 ‘상식’이란 단어의 편리함은 종종 시야를 가린다. 젊은 관객들이 단 한편의 영화에 반응하여 갑자기 극장에 나타났을 리 없다. 차라리 극장을 꾸준히 찾았던 이들의 행보를, 찾고 싶은 이들의 바람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게 더 설득력 있다. 젊은 관객들로 넘쳐난다는 <서울의 봄> 상영관에 앉아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힌다. 산업으로서 극장이 쇠퇴하고 있는 건 명백하다. 다만 그걸 극장의 가치와 의미의 퇴색으로 곧장 연결 짓는 건 게으른 일이다. 어떤 극장들은 여전히, 아니 전보다 더 뜨겁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며 다시 한번 놀랐다. 늦은 시간 마지막 상영 회차까지 꽉 찬 객석을 보며 여기가 2023년 한국인가 싶었다. 모두가 극장의 위기, 한국영화의 위기, 독립영화의 위기를 말하는데, 여기만 딴 세상이다. 물론 단편적인 분위기만 보고 전체를 판단할 순 없다. 합리적인 반응. 영화제에 모인 한줌의 관객이 독립예술영화를 찾아보는 이들의 전부라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다. 상식적인 추론. 그럼에도 오직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장까지 발품 팔아 먼 길을 찾아오고,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열정을 마주하면 함께 뜨거워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언젠가 대중문화 산업의 제일 앞자리에서 밀려나는 날이 올지라도, 결국 영화는 이런 식으로 살아남는 게 아닐까. 어둠 속에 둘러앉아 피운 작은 모닥불처럼. 12월을 맞이하며 2023년을 되돌아본다. 올 한해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작 강 한가운데에 있을 땐 흐름을 가늠하기 어렵다. 2023년 영화계는 과거의 수치와 지표가 무용해질 만큼 역동적인 변화 한가운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12월은 1년의 마지막 달을 핑계 삼아 지난 걸음을 되짚어보라며 받는 선물 같다. 변화는 이미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중이고 이제 바야흐로 점검의 시간이다. <씨네21>에서는 앞으로 한달 동안 2023년에 되짚어봐야 할 것을 더듬어보려 한다. 주간지의 바쁜 걸음을 핑계로 흘리고 지나갔을지도 모를 소중한 순간부터 거시적인 시야에서 조망해야 할 흐름까지, 차근차근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아직 2023년 한국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니 스크린을 향한 꺼지지 않는 관심으로 2023년은 물론 2024년에도 멈추지 않고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진 대상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자 할 것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지루할 틈 따윈 없다.

[추모] 고 김수용 감독을 기억하는 영화인들의 말

정일성 촬영감독 “김수용의 영화엔 시대정신과 인간 영혼에 대한 탐구가 깃들어 있으며, 그는 한국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는 경지를 열었다. 영화는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나쁜 영향도 끼칠 수 있다. 국적 불명의 폭력적인 영화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그와 같은 어른이 모두 떠났다는 것이 슬프다. 후학들이 그의 영화를 계속 찾아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갑내기로서 우리는 오래 함께한 동료이기도 했는데, 김수용은 언제나 귀를 열어두고 듣는 감독이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화학과 광학을 아우르는 카메라의 과학적 정보를 최대한 전하려 애썼다. 이만하면 우리는 훌륭한 친구 아닌가. 나도 머지않아 곧 따라갈 테니 친구여, 부디 쉬엄쉬엄 가시게.” 배우 신영균 “나는 죽어서도 김수용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 박찬욱 감독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은 읽었어도 그것을 원작으로 한 김수용 영화 <안개>는 보지 못한 채였다. <헤어질 결심>의 각본을 다 쓰고야 그 영화를 봤다. 윤정희 선생님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그렇게 거침 없을 수가 없었다. 정훈희 선생님의 노래가 그렇게 아련할 수가 없었다. 촬영하고 후반작업하는 내내 의식했다. 한국 문화와 한국영화의 계보 속에 내 작품을 자리 잡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야행>도 보았다. 똑같이 윤정희, 신성일 주연에 김승옥 각본이지만 <안개>는 1967년 영화고 <야행>은 1977년 영화다. 두편 다 지금 보아도 지극히 현대적이다. <야행>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안토니오니 같은 선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게 있어 김수용 감독님은 한국영화 최고의 모더니스트다. 본받고 싶다.” 배우 강석우 “신인배우였던 나를 촬영 첫날에 다방으로 불러내 비싼 담배 한갑을 말없이 쥐어주신 그 뜻은 무엇이었을까. 내 이름, 돌 석자에 비 우자를 직접 만들어주시며 비 맞은 돌처럼 평생 깨끗하게 살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며 살 것이다.” 김성수 감독 “유현목 감독님의 제자로 있던 시절에 김수용 감독님을 뵐 수 있었다. 부드럽고 유머러스하지만 자신의 생각만큼은 언제나 선명했던 멋쟁이, 내게 감독님은 그렇게 기억된다. 영화감독이 가져야 할 소신과 자기 주장, 프라이드가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나는 특히 <사격장의 아이들> <저 하늘에도 슬픔이>처럼 척박한 현실을 정직하게 관찰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따뜻하게 감싸안는 김수용 감독의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들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영화의 근간이 된 리얼리즘의 효시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를 이끈 김수용 감독님은 동시대 영화인들의 영원한 버팀목이다.”

[커버] 마지막 건반의 시간,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피아노와 카메라, 그리고 류이치 사카모토. 어떤 영화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타계를 반년 앞둔 시점에 피아노 앞에 앉은 거장은 직접 선곡, 편곡, 녹음과 연주 데이터의 기록 방법을 조율해 8일간 20곡을 연주한 뒤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 힘겨움과 희열, 때로는 숨 고르고 건반을 조율하는 순간이 여기에 모두 담겨 있다. 올해 3월 우리 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을 돌아보며, 12월27일 전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돌비 애트모스로 개봉하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소개한다. 미완의 악상보다는 온전한 코다(악곡의 종결부)를 남기려는 자의 결정이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평소 “일본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곳”이라 평했던 NHK 509 스튜디오 무대에서 며칠에 걸쳐 20곡의 음악을 연주하게 된 것은. 혁신과 실험정신, 호기심과 비애를 평생 독특하게 결합한 예술가였던 류이치 사카모토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통해 피아노라는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의 마지막 정규 앨범인 《12》가 명상적 미니멀리즘의 아름다움과 심오함을 품었던 것처럼,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객석이 텅 빈 공연 영화이자 전기적 서술이 없는 회고록으로서 오직 한 사람의 영혼을 비추는 데 충실한 영화다. 작별 혹은 축제의 의식 “한번 더 납득할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 2022년,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류이치 사카모토가 아들에게 남긴 전언은 이러했다. 2021년 직장암 진단을 받고 대규모 글로벌 투어는 물론 단독 공연조차 일절 중단했던 그가 병과 함께 70대를 맞이한 해였다. 자신의 음악 인생을 아우르는 20개의 곡을 선별한 류이치 사카모토는 2022년 9월8일부터 15일까지 8일간 NHK 509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강행했다. 하루에 3곡씩, 곡마다 2~3번의 테이크에 걸쳐 연주할 동안 촬영감독 빌 커스테인과 30여명의 스탭들, 3대의 4K 카메라 외에 그의 주의를 빼앗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이브 공연이 불가한 신체적 조건이 이 초로의 거장으로 하여금 자신과 음악만 남겨질 수 있는 완벽한 진공 상태 속으로 걸어가도록 허락한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소수의 아이콘들이 그러하듯 음악사에서 그와 비견할 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다. 작곡가, 피아니스트,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영화음악 감독, 프로듀서, 배우, 열렬한 환경운동가이며, 클래식, 얼터너티브, 전자음악, 사운드트랙을 아우르는 장르적 실험 정신은 데뷔(1978년 《Thousand Knives》)부터 마지막 앨범(2021년 《12》)까지 꾸준히 율동했다. 오직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 한대만을 위한 편곡이 돋보이는 이번 작품도 그의 방대했던 호기심, 혁신, 서정의 궤적을 고루 흡수했다. 우선 그의 영화 커리어를 꿰뚫는 선곡이 돋보인다. 음악감독 데뷔작인 <전장의 크리스마스>(감독 오시마 나기사, 1983)의 , <마지막 황제>(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87)의 , <마지막 사랑>(감독 베르나르도 베르 톨루치, 1990)의 , <폭풍의 언덕>(감독 피터 코민스키, 1992)의 , <토니 타키타니>(감독 이치카와 준, 2005)의 , <바벨>(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2007)의 ,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감독 미이케 다카시, 2011)의 등이다. 그 밖에도 류이치 사카모토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테크노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음악부터, 2017년 발매된 《async》, 투병 생활 중에 일기처럼 써내려간 음악들에 날짜를 제목으로 붙인 마지막 앨범 《12》까지의 곡들을 폭넓게 아우른다. 엔딩곡은 1999년 앨범 《BTTB》의 다.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들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예술적 생애를 응축하듯이, 103분간 이어지는 공연의 몽타주는 해가 저물고 다시 떠오르는 하루의 시간을 빛으로 구현해낸다. 무대 위에서 천천히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조명을 따라 카메라의 무빙도 드라마틱한 전환을 이어간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얼굴은 어둠에 잠긴 뒤 이내 빛으로 돌아온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촬영을 끝낸 후 발표한 공식 성명서에 이렇게 썼다. “하루에 몇곡씩 집중해서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이 시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인지 공연이 끝나고 나서는 완전히 공허함을 느꼈고 한달 정도 몸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에 만족할 만한 공연을 녹음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육체의 시간 살면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악기에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이 그다지 유별난 일은 아닐 것이나, 종종 건반을 향해 몸을 웅크리듯 숙이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자세는 실로 피아노가 그의 신체기관 일부인 것처럼, 흡사 투명한 피부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인터뷰 푸티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등 관성적인 연출은 일절 배제하는 대신 다소 현란하게 움직이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의 카메라 무빙은 피아니스트의 손과 숨의 떨림, 피아노의 삐걱거림을 극적으로 포착해 두 기관이 점차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가는 중임을 역설하려 한다. 빛의 동선이 이 영화에 시간성을 부여한다면 풍부한 명암은 육체성을 부각한다. 버석거리는 피부의 질감, 피부 밖으로 돋아난 혈관, 종종 불안정한 호흡과 떨리는 손, 심취한 입매와 손등의 주름이 피아노의 물성을 얽히는 과정에 개입하는 것은 램프, 스포트라이트, LED 라이트, 벌룬 타워라이트 등의 조명을 배합해 만들어낸 빛의 음영이다. 다만 아쉬운 순간은 대단히 매끈하게 재단된 빛과 움직임이 종종 단조로운 구성을 탈피하기 위한 강박의 결과물처럼 느껴진다는 데 있다. 그러한 인공적 유려함이 외려 피사체 본연의 예민함을 상쇄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며, 형식적 혁신을 가미한 콘서트 영화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불균질함의 매혹을 주지 않는 영화이다. 전설적인 음악가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의미심장하게 남기는 공연(혹은 작품)이 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세상을 떠나기 약 두달 전에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말러의 교향곡 7번을 연주했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12년의 공백을 깨고 타계 2년 전인 1986년에 미국 공연을 재개해 카네기홀에 섰다. 두 공연 모두 예술가의 말년에 새겨진 상징적 작별 인사로 꼽힌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함께 연기 호흡을 맞췄던 록스타 데이비드 보위 역시 생전 발매한 마지막 싱글 《LAZARUS》 뮤직비디오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에서 의 마지막 음을 누르는 손가락이 아직 건반에서 떨어지지 않은 순간에 류이치 사카모토는 나지막이 고백한다. “힘들어요. 몰아붙이느라 무리했어요.” 음악의 황홀함에 잠시 물러나 있던 병색을 자연스럽게 불러들인 그는 건반 튜닝을 마친 뒤 천천히 다음 음악으로 나아간다. 이어지는 곡은 젊은 날을 대변하는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로, 원곡보다 한껏 경쾌하고 화려한 톤으로 시작하더니 이내 선율이 내면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는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더이상 과거처럼 빠르고 힘 있게 연주할 수 없는 대신 자신의 현재를 기입한 테크닉과 아이디어에 의지해 새로운 표현에 다다른다. 요컨대 건반만 있다면, 피아니스트는 편곡과 연주로서 자신의 육체를 현존하게 할 수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공연이기에 앞서 마지막 ‘실험’이라면 말이다. 강건했던 예술가가 흔들림과 잦아듦으로 자신의 파장을 대체해서라도 끝까지 연주하려던 작품, 오퍼스는 무엇이었을까. 뒤늦게 그 현장에 잠입하게 된 관객은 객석이 아닌 무대 위에서 넌지시 바라게 된다. 삶에 남겨진 거의 유일한 방법을 동원해 자기 존재를 기념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이것은 작별 인사라기보다 차라리 은밀한 축제의 의식일 것이라고. 아버지와 아들의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오랜 매니저이자 아내인 노리카 소라가 제작을 총괄하고, 두 사람의 아들이자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영화감독, 제작자, 번역가 등으로 활동 중인 네오 소라가 연출했다. 2020년에 단편영화 <더 치킨>으로 로카르노영화제, 뉴욕영화제에 초청된 네오 소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에 기꺼이 기록자로 나섰다. 2022년 12월, 촬영본 일부가 온라인 콘서트 의 일환으로 이틀간 공개되었고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신의 과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음에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이듬해 3월28일, 그는 고인이 됐다. 9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오퍼스>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최초 공개돼을 때, 아직 슬픔이 전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기자회견에 선 네오 소라의 말이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가 낮과 밤의 빛을 구현해 하루의 시간을 응축한 까닭을 짚는다. “(아버지 없이 혼자 서게 된 것이) 물론 쓸쓸하지만 동시에 저는 이것이 아버지의 삶을 축하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납득할 만한 작품을 한번 더 만들고 싶다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바람을 바꿔 적으면, 그는 납득할 만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인터뷰] 엄혹한 시대에도 사랑은 힘이 세다, ‘연인’ 김성용 PD

<연인>을 한 문장으로 축약해보면 어떨까. 전란 속에 이어지는 애틋한 사랑. 역사가 기록한 민중의 고통. 전쟁의 상흔과 포로들의 여생. 다양한 문장으로 함축할 수 있지만, 김성용 감독은 ‘쉽게 꺼지지 않는 삶의 의지’를 말했다. 전쟁이라는 극도의 고통과 시련이 쏟아져도 끝까지 살아내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 <연인>은 쉽게 삶을 포기하지 않는 두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한다. 보도블록 틈 사이에 피어난 작은 민들레처럼, 김성용 감독은 굳건한 생애 의지를 통해 인간다움을 재정의했다. - 올해 8월 초부터 11월 중순까지 3개월 동안 총 21회를 두 파트로 나누어 방영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지난 3개월을 돌아본다면. =많이 힘들었다. (웃음)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이 따랐다. 그런데 끝나는 순간 마법처럼 모든 게 영광처럼 느껴진다. 이제야 아쉬움이 뒤따른다. 그때 좀더 즐길걸. 하지만 그런 부담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연인>을 만들지 못했을 것 같다. 정말 마지막까지 분초를 다투며 최선을 다했다. - 사실 방영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시청률이 5회부터 반등하기 시작했으니 처음 2주 동안은 전전긍긍했을 것 같다. =워낙 작품에 대한 신뢰가 컸다. 배우와 스탭 모두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에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처음 1, 2회가 방영되었을 때 전개가 루즈하다는 시청자 의견이 나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초반은 메인 캐릭터를 구축하고 병자호란 발발 이전의 조선 분위기나 마을을 소개하는 구간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느리게 보였던 것 같다. 그때 많이 괴로웠다. 한주 한주가 더디게 느껴지고 빨리 다음편으로 넘어가서 우리 이야기의 진가가 드러나길 바랐다. 하지만 <연인>은 결과적으로 세계관을 구축하는 구간이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다. 필요한 고통이었다고 생각한다. - 코로나19 동안 OTT와 가까워진 시청자들은 그만큼 강한 자극에 익숙해졌다. 전쟁, 포로 등과 같은 키워드를 들었을 때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수준의 자극이 있을 테고, 공영방송 드라마로서 드러낼 수 있는 제한선이 있을 텐데 그 간극을 어떻게 조절하려 했나. =전쟁이 주는 참담함과 엄혹한 현실이 진짜 같을수록 배우들의 연기나 서사적 개연성도 힘을 얻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잔혹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야만 현실성을 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먼저 주변 환경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기 위해 미술적 요소를 섬세하게 살폈다. 역사적 고증에도 공을 들였다. 촬영도 다양한 각도로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고, 간접적이지만 참담한 감정이 잘 살게끔 편집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물론 직접적 묘사가 필요한 장면도 있었다. 그럴 때엔 이야기에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고 컷을 최대한 짧게 쓰려고 했다. 인물의 이야기와 감정이 자극적임에도 가려지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출연진이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무한도전>에서 <이산> 특집을 촬영한 이후 같은 방송국 내의 협업이 오랜만이었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웃음) 두 프로그램 모두 윈윈 전략을 내세울 수 있었던 기획이었다. 특히 <무한도전>을 사랑한 사람으로서 이전 무도 멤버들과 함께한다는 게 너무 즐거웠다. 배우들의 재원도 많았다. 박진주 배우, 이이경 배우가 베테랑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많이 편집되었다. 너무 시선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 같아서 균형을 잡기 위해 덜어내야 했다. 아쉬움이 크지만 배우들의 정서는 잘 전달됐다. - 장현(남궁민)은 매우 냉소적인 사람이다. 결혼은 물론, 남들이 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랬던 그가 전쟁 발발 이후 타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냉소와 무관심을 일종의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장현의 태도 변화는 어떤 메시지를 건넬 수 있을까. =장현은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다.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멋있고 완벽하다. 하지만 장현의 가장 중요한 면모는 바로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탁상공론에 빠져 있을 때, 장현은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꿰뚫어낸다. 장현 혼자서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환경이 바뀌기 위해 사람들간에 어떤 변화가 우선되어야 하는지 질문을 건네준다. 세상을 무심함으로 일관하던 사람의 인간적인 태도 변화는 강한 울림을 준다. - <연인>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오마주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의 어떤 점을 작품 안에 반영하려 했나. =이육사 시인의 생애를 다룬 <절정> 때부터 황진영 작가 팬이었다. 황 작가님이 조선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영화를 봤다. 그 뒤에 대본을 받아 보니 작가님이 영화로부터 무엇을 좇고 싶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뭐랄까. 전쟁이 주는 참담함 속에 생명력 강하게 피어나는 삶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중 가장 크게 빛을 발휘한 인물이 바로 길채(안은진)다. 길채는 시대로부터 지탄받을지언정 삶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이 돋보인다. 사실 길채와 장현은 닮은 구석이 많다. 시대가 요구하는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지점이나, 침착하게 전쟁 상황을 통찰하는 모습이 상당히 맞닿아 있다. 그래서 길채와 장현의 관계는 동시대를 관통하는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모두 의미가 있다. - 은애(이다인)와 길채의 관계도 눈에 띈다. 은애는 자신의 연인인 연준(이학주)을 짝사랑하는 길채를 질투하거나 경계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길채를 아껴주고 두 인물이 전쟁통 속에 서로를 연민하는 동병상련의 관계도 섬세하게 묘사된다.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두 배우가 워낙 가까워졌다. 실제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길채와 은애의 관계에도 그런 애정이 잘 드러났던 것 같다. 길채도 싫은 척하지만 은애를 많이 좋아한다. 은애가 오랑캐로부터 위험에 처했을 때 길채가 오랑캐를 굴러 떨어뜨리고 함께 피를 닦아내는 장면이 있다. 난 그 장면이 그렇게 좋았다. 길채도 은애도 생애 없던 일을 겪으면서, 그 동질감으로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준다는 게 무척 좋았다. 서로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명시해주는 것만 같았다. - 량음 역의 김윤우 배우, 소현세자 역의 김무준 배우, 강빈 역의 전혜원 배우까지 신인배우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이들은 어떤 힘을 가진 배우들이라 생각하나. =전혜원 배우는 강빈 역을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배우다. 생명력 있는 카리스마에 표현력이 뛰어나다. <그 해 우리는>에서 눈여겨보게 되었다. 김무준 배우는 <검은 태양> 당시 오디션으로 인연이 생겼다. 당시에도 적극적인 태도가 기억에 오래 남았는데, 다시 만나니 연기가 일취월장했더라. 온실 속 화초처럼 지내던 왕세자가 볼모가 되어 선양에서 열악한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처연한 삶을 잘 표현해줬다. 마지막으로 량음은 정말 캐스팅이 어려웠다. 나이도 어려야 하고 감정 연기도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노래까지 잘 불러야 했다. 인물 특성상 따져볼 요소가 너무 많아서 적합한 배우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오디션 현장에서 김윤우 배우를 본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심지어 첫 대면 당시 빡빡머리였는데도 그 자체로 분위기가 좋았다. 늘 열린 태도로 임해서 디렉션을 할수록 심도 있는 감정을 표현해주었다. - 전란 속의 사랑은 서로 만나기 어려울수록 애틋함이 커진다. 연결되기 쉬운 세상에서 상대의 부재와 연락의 공백은 시청자에게 어떤 감정을 전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리움이 커지기 위해서는 기능적으로 떨어짐이 필요하다.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이런 경우엔 두 남녀주인공이 만나서 교감이 이뤄지고 나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전란 속에서 헤어짐을 반복한 연인이 찰나지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그리움을 키워가는 과정이 드라마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이런 요소가 안정적인 박자를 만들 때 절절함을 키운다. 공백과 결핍, 애틋함과 그리움. 이런 감정이 비교적 흔치 않은 요즘에 더더욱 필요한 감정이었다고 생각한다. - MBC에서 처음으로 드라마 파트제를 실시했다. OTT 플랫폼의 시청 방식을 차용한 이유는. =<연인>은 처음에 24부작으로 편성돼 있었다. 옛날에는 50부작 이상의 대하 드라마도 많았지만, 요즘엔 워낙 8부작, 12부작이 대부분이라 24부작도 시청자들이 길게 느낀다. 그래서 최근의 시청 패턴을 조사하면서 10부작씩 나누어 파트제를 시행해보기로 했다. 나름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방송이 없는 공백 기간 동안 후반의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들었다. 연속성이 중요한 시청자에겐 아쉬울 수 있겠지만, 제작자 입장에선 뒷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도 시청자들의 소비 방식을 반영한 다양한 편성 방식을 시도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