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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 · 각색자 · 감독 · 주연배우 존 카메론 미첼 인터뷰

서면으로 질문을 보내고 답을 기다리기 며칠. 아뿔싸, 존 카메론 미첼이 ‘떠나버렸다’는 전갈이 왔다. 인터뷰에 답을 쓰고서? 아니다.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고(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얼마나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그냥 그거 보고 쓰라고 그래!”라는 엄청난 말을 남기고)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를 여행을 떠났다는 거다. 존 카메론 미첼은 2001년 <헤드윅>이 발표되었을 당시 실로 엄청난 양의 인터뷰에 응했다. 영화잡지, 일간지, 게이잡지, 온갖 온라인 매체, 음악잡지 등 <헤드윅>이 걸쳐져 있는 모든 영역- 영화, 음악, 성정체성, 팬덤, 일반 뉴스- 의 언론매체들에서 그에게 이야기를 걸어댔다. 그런 모든 시끌벅적한 일들을 끝내고 당분간 연기마저 쉬며 조용히 아동영화의 대본을 쓰고 있던 그는, 갑자기 어느 날 ‘광희’의 나라 한국에서 인터뷰가 날아들자 떠나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그의 바람대로, 2001년 영화 발표 당시 존 카메론 미첼이 응했던 수많은 인터뷰 중 주목할 만한 문답을 간추려 여기 싣는다. 헤드윅이나 앵그리 인치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 앵그리 인치는… 내 친구 중에 성기가 작은 사람을 앵그리 인치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다. 거기서 땄고, 헤드윅이라는 이름은 헨리크 입센의 희곡 <들오리>에서 땄다. <들오리>의 주인공 헤드비 에크달(Hedvig Ekdal)은 너무나 정직해서 파괴당하는 14살짜리 인물이다. <헤드윅>은 처음 어떻게 시작됐나. → 커버송 <오리진 오브 러브>(Origin of Love)의 모놀로그를 짓는 것이었다. 실제 드랙퀸들이 모인 클럽에서 난 드랙퀸 차림을 하고 앉아서 대본을 써나갔다. 드랙 복장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난 그때까지 드랙을 해본 적도, 록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전까지 내가 했던 건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TV가 다였다. 어떻게 동베를린 출신의 드랙퀸 이야기를 생각하게 됐나. → 아버지가 장군이었다. 1984년부터 88년까지 서베를린에서 미군 사령관으로 근무했는데, 그때 대학생이었던 나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 종종 동베를린에 가곤 했다. 군용차를 타고 군복만 입고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우리집에는 52개의 방이 있었고 경비원과 집사, 프랑스인 요리사 등 9명의 사람들이 고용돼 있었다. 밤이면 나는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의 바들과 펑크 게이바들에 가곤 했다. 베를린영화제에도 갔다. 나는 바에서 만난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맨션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시위에 가담해 미군을 향해 날계란을 던진 대학생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헤드윅은 우리 가족이 워싱턴에 살 때 우리집의 베이비시터로 일하던 미군 부인인 독일 여성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미군과 결혼해 한국을 떠났다가 이혼을 당한 한국 여자들에게서도 힌트를 받았다. 성전환수술이라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나. → 온갖 갈라진 것들… 플라톤 신화 속의 갈라진 자아, 베를린이라는 갈라진 도시, 그런 것들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갈라진 성을 가진 자들이 모이는 드랙클럽에서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베를린은 수백만명이 사는 도시인데, 왜 당신만…. → (말을 끊으며) 성전환수술을 떠올렸냐구! 난 어린 시절을 떠돌이로 지냈다. 옮겨다니는 생활은 사람의 다른 반쪽을 발견하게 한다. 나에게는 어느 것도 영원해 보이지 않았고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었다. 가히 포스트 모던한 양육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나. → 난 연극을 별로 경험하지 못했다. 가톨릭 기숙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하지만 스코틀랜드며 독일이며 캔자스를 옮겨다니며 산 덕에 여러 악센트를 익힐 수 있었고, 그래서 배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린 나는 그저 만화책과 과학소설을 좋아하는 좀 웃긴 애였다. 연극을 본 건 나중의 일이다. 영화는 어떤가. → 내가 자라던 1970년대는 상업영화도 작품성이 있는 때였다. <야전병원 매쉬>와 <뜨거운 오후> <내쉬빌> 같은 영화가 히트를 했고, 그 영화들이 바로 영화의 지표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예술적으로 바뀌었는데, 한마디로 쓰레기가 됐다. 바이올런트 펨므, 허스커 두, REM 같은 굉장한 밴드들이 있긴 했지만 대중적이진 않았다. 난 1980년대 초에 커밍아웃했는데,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세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커밍아웃은 특히 날 음악에 대해 열리게 만들었고, 내 자신이 되게 했다. <헤드윅>에는 이기 팝, 데이비드 보위, 루 리드 풍의 음악이 있다. 미국인으로서 글램록과 그 문화에 친숙해지기는 어려웠을 텐데. → 1973년에 스코틀랜드의 가톨릭계 기숙학교에 다닐 때 나는 글램록을 처음 접했다. 가톨릭 소년들의 학교 세계에서 나는 계집애 같은 아이였다. 거기선 음악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학교의 도서관 담당이었는데 거기엔 작은 레코드 플레이어가 있었다. 의 <톱 오브 더 팝스>에 나온 보이는 나를 무섭게 했다. 나는 위저드, 슬레이드, 스위트 같은 밴드에 빠져 있었다. 나는 도서관에 스위트(우리에겐 으로 유명한- 편집자)의 <폭스 온 더 런> 싱글 레코드를 몰래 가지고 들어가 작은 스테레오에 그 판을 올려놓고 헤드폰으로 그 음악을 들었다. 그런데 폭발했다. 도서관 문을 잠근 채, 삶과 악마에 관한 책들을 두들겨대며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춤을 췄다. 그 레코드는 당시 나를 살렸다…. 나는 돌아와서 록시뮤직의 1집을 들었다.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믿어지지 않았다. 미국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당시의 분위기를 모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벨벳 골드마인>의 감독이자 내 친구인 토드 헤인즈가 글램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유일한 미국인이다. 영화 캐스팅은 어떻게 했나. → 밴드를 캐스팅하는 건 굉장히 재밌는 일이었다. 우리는 오디션을 많이 했는데, 가짜 언어를 오디션 참가자들에게 시키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기버리시’어라구…. “음, 기버리시로 조크를 한번 해보세요. 아주 특별한 것이어야 해요. 그리고나선 그걸 슬로베니아 사투리로 번역해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영어로도 하구요.”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린 건 토미 역 배우를 찾는 거였다. 후보자들 가운데는 아주 불가사의하게 섬뜩하게 생긴 남자들과 진짜로 잘생긴 남자들이 있었는데, 난 토미가 어떤 느낌의 록스타여야 할지 잘 결정을 못했다. 그러다가 마이클 피트를 발견했다. 딱이었다. 그는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고트 버전이라 할 만하다. 그는 정말 틴 아이돌 스타가 될 만하지 않은가. 영화에 나오는 멋진 애니메이션에 대해 알려달라. → 연극 버전에서, 나는 <오리진 오브 러브> 노래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드로잉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관객이 노래의 가사를 빠뜨리지 않고 듣기가 힘드니까. <오리진 오브 러브>는 그 내용이 아주 명확하게 전달돼야 하는 메인송이고 작품 전체의 핵심이다. 2500년이 된 플라톤의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노래인데, 난 그 이야기를 LA에서 연극으로 처음 알게 됐다. <헤드윅>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록키 호러 픽쳐쇼>인가. → 아니다. 아마 <헤드윅>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록키 호러 픽쳐쇼>와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오히려 <헤드윅>과 비교할 만한 작품은 <올 댓 재즈>다. 노래가 먼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물랑루즈>와 비슷하지만, 노래들이 각각의 장면 속에서 동기화되거나 때때로 판타지 자체라는 점에서는 <올 댓 재즈>와 더 비슷하다. 다른 뮤지컬과는 비슷한 점이 별로 없다. <카바레>나 <더 그레이트 로큰롤 스윈들>도 언뜻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아니고, <내쉬빌> 같은 경우는 노래가 내러티브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다. 당신은 당신의 반쪽을 찾았나. 헤드윅에게 토미 노시스처럼. → 몇년간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다. 헤드윅은 결국 자기자신이 그동안 자기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총합임을 알게 된다. 더이상 자신을 조각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토미도 그녀의 반쪽이었다. 토미의 이름은 그노시스파의 복음서에서 땄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은 쌍둥이를 가지고 있는데,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가진 쌍둥이가 토마스라고 나와 있다. 당신의 전설적인 팬클럽 ‘헤드헤즈’의 정체는 무엇인가. → 헤드헤즈는 12명으로 시작했다. 뉴저지의 지방검사 사무실 비서, 평범한 보통여자들, 아직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 십대소년들, 몇명의 로큰롤러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쿠키를 만들어 갖고 오기도 했고 극장 안내인으로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헤드윅>의 아주 진지한 팬이었다. 예를 들어 도나라는 팬은 <헤드윅>을 450번이나 봤는데, 450번째 왔을 때 우리는 그녀가 항상 앉는 좌석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넣어주었다.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한 고등학생들에게는 <헤드윅>의 공연장이 대피소와도 같았다. 당신에게는 어떤 성공모델이 있나. →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가 이뤘던 것 같은 것? 브라이언 이노는 언젠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을 샀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앨범을 산 사람은 모두 밴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헤드윅>으로 이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찾은 것 같나. → 그렇다. <헤드윅>을 하면서 나는 자유를 얻었다. 정말이지 드랙퀸을 연기하는 건 치유효과가 있는 것 같다. 드랙이라는 것은 순전히 그것을 하는 사람의 창조물이고 어떤 차용도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 몇년간 연기는 쉴 생각이다. 더 재미있는 게 따로 있기 때문에. 난 몇년 동안 연기를 하며 재미있게 살았고 언젠가는 배우 일에 컴백할 것이지만, 지금은 더이상 연기에서 스릴을 못 느낀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보면 “아, 헤드윅이구나” 할 것이다. 그건 나쁜 일은 아니다. 내가 배우가 아닌 작가로서 혹은 감독으로서 일할 때 사람들이 나를 헤드윅으로 기억한다는 건 말이다. 지금 난 인디밴드 뉴트럴 밀크 호텔의 줄리언 코스터와 동화작가 로알드 달 풍의 <그랜마폰>이라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대본을 쓰고 있는데, 아마 연출도 하게 될 것 같다. 거기에도 노래가 있다. ‘비치 보이스와 피어 우부에 몸담았던 닥터 수스’가 할 것 같은 음악이다. 조금 과격하지만 아이들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또 하나는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노골적인 섹스 프로젝트’라고만 정한 비디오다. 엄청난 분량의 노골적인 섹스를 담지만 관객을 울고 웃고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다. 최수임 sooeem@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기쿠지로의 여름> 맡은 일본 최고의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

“작품에 가장 알맞는 재능을 찾아가다보면 도착지는 결국 히사이시 조였고, 그렇게 반복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까지 이어진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53)와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똑같은 과정이 기타노 다케시와 작업하는 동안에도 되풀이됐으리라.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부터 올해 베니스영화제 출품작 <인형들>에 이르는 기타노의 영화에서도 히사이시 조의 선율은 화면 가득 넘실거렸다. 현대 일본영화의 두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기타노 다케시에게 전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는 단순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멜로디와 리듬으로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토토로와 함께 하늘을 나는 장면, <키즈 리턴>에서 마사루를 태운 신지의 자전거가 텅 빈 운동장을 도는 장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용을 타고 날아오르는 장면,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마사오와 기쿠지로의 즐거운 놀이가 이어지는 장면 등 뇌리에 깊이 새겨진 명장면마다 히사이시 조의 신비롭고 투명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영화음악의 대가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공연을 갖기도 한 히사이시 조는 4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일본 국립음악대학을 졸업한 뒤 82년 개인음반 <인포메이션>을 발표하면서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연주가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TV드라마와 광고음악에서 출발해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을 맡은 것은 84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미야자키 하야오, 기타노 다케시 외에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과도 여러 차례 작업했으며 92년부터 3년 연속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음악상을 받았다. 영화음악 외 활동범위도 넓은 편. <피아노 스토리즈> <아이 엠> <웍스> 등 10개가 넘는 개인앨범을 발표하며 콘서트 활동도 계속하고, 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때는 문화이벤트의 종합연출을 담당했다. 99년 발라네스쿠 4중주단과 2개월 투어연주를 하면서 영감을 얻어, 2001년 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지난 7월31일, 도쿄의 한 녹음스튜디오에서 진행된 히사이시 조 인터뷰는 <기쿠지로의 여름> 홍보차 수입사에서 주선한 것이었지만 <기쿠지로의 여름>에 관한 문답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음악의 거장이지만 그는 격식이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며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함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 시종 미소를 잊지 않으며 질문에 답했다. 문답이 끝나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요청하자 즉석에서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한곡을 피아노로 연주해 취재진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아래 인터뷰는 7월31일 진행된 인터뷰 내용에 지난해 서면으로 주고받았던 문답을 첨가한 것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공연을 했는데 당시엔 음향시설이 안 좋았다. 다시 한번 한국에서 공연할 생각이 있나. 그때 너무 즐거웠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하고 싶다. 한국음식이 대단히 맛있더라(웃음). 미야자키 하야오와 기타노 다케시, 두 감독의 영화음악으로 유명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작업하다가 이 음악은 기타노 다케시 영화에 맞겠는걸 하거나 기타노 다케시와 작업하면서 이건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에 넣어야지 하는 일은 없나. 두 감독과 처음 일할 때부터 둘의 스타일이 워낙 달라서 그런 적은 없다. 기타노 다케시는 미니멀한 리듬을 반복하는 스타일인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멜로디가 풍부한 곡을 요구하는 편이다. 하지만 요즘은 둘다 비슷한 걸 요구할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누구 영화음악을 만들고 있었지?’ 잘 모르겠는 때가 있다. 영화음악가로 자리잡은 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음악을 맡으면서부터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어떤 계기로 알게 됐나 나는 원래 도그마재팬이라는 회사에 소속된 음악가였는데 회사를 통해 섭외가 들어왔다. 그전에 개인적으로 알았던 사이는 아니다. 적당한 영화음악을 찾고 있는데 내가 만든 이미지앨범을 듣고 마음에 들어했다. 그래서 영화음악을 하게 됐다. 미야자키 하야오, 기타노 다케시, 두 감독과는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이인가. 그렇지 않다. 개인적 친분은 전혀 없다. 일로 만나는 관계일 뿐이다. 두 사람 다 존경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그렇다. 개인적으로 친하다고 표현할 순 없는 관계다. 각자 열심히 몰두해서 일할 때는 개인적인 정이 끼어들 시간이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일에 대한 기본 자세가 그런 것이다. 친구 관계에선 일을 함께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음악가로서 영화음악 작업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영화음악을 하는 최고의 매력은 뛰어난 감독과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나 혼자만의 세계인데 다른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기본적인 것은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영상과 음악이 함께 있을 경우 음악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을 그릴 수 있다. 영화음악을 하다 보면 왜 이런 영상에 음악이 들어가야 하는 거지, 하며 불만스러울 때도 있지만 영상이나 음악, 하나만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을 그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영화에서 영화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영화에서 음악의 역할은 대단히 크다. 영화의 세계관이 음악으로도 드러난다. 화면과 화면이 이어질 때 음악이 둘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시켜준다. 음악을 잘못 쓰면 중요한 장면이 깨지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일본에선 영화음악을 제대로 평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평론가들이 있지만 영화음악에 대해 평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음악가를 둘러싼 환경은 일본의 경우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4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음악을 어떻게 만났나. 마을의 악기점에서 가끔 보았던 바이올린을 갖고 싶었던 게 계기였다. 가정환경이 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화학 선생님이었고 영화를 매우 좋아해서 내가 유치원 때부터 영화관에 함께 갔다. 수년간 1년에 300편에 달하는 영화를 봤다. 같은 감독과 여러 번 작업을 하면서 서로를 잘 알아서 생기는 편한 일이나 불편한 일이 있을 것 같다. 어떤 면이 좋고 어떤 면이 나쁜지. 같은 감독과 여러번 할수록 일은 점점 힘들어진다. 작품마다 음악의 분위기를 바꾸지만 감독의 기대는 점점 커진다. 반드시 기대에 응해야 하기 때문에 압력은 계속 커진다. 기대에 못 미치면 다음 작업을 못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기는 것이다. 지난해 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감독을 한 경험이 영화음악에도 도움이 되나. 사실 감독을 해보고 나서 많이 변했다. 예전엔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가 좋은지 나쁜지 그다지 평가하지 않고 일했는데 이제는 나라면 이렇게 연출했을 텐데 하는 식으로 비평하는 자세를 갖게 됐다. 전에는 감독이 원하는 것을 아무 비판없이 그 자체로 받아들였는데 연출이 자꾸 보이니까 고민이 된다. 감독을 해서 마이너스인 부분인 셈이데 역시 모든 인생사는 모르는 게 행복, 이라는 생각이 든다. (웃음) 반면에 감독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감독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면서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점도 있다. 지금이 내겐 과도기라는 생각이 든다. 연출경험을 살려서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방법을 모색할 때인 것 같다. 에 대한 대중과 평론가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나. 한마디로 실패했다. 지금도 얘기가 나오면 화가 난다. (웃음) 하지만 어디까지나 음악가로서 만든 음악영화이고 일반적인 평가도 내 생각과 다르지 않다. 는 지난해 몬트리올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영화음악을 맡을 때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가장 큰 건 영화의 내용에 공감할 수 있는가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야 된다. 그 다음은 개런티이고 스케줄이다. 개런티가 적을 경우는 내용이 굉장히 좋아야 된다. 내용이 안 좋은데도 하는 경우는 개런티가 많아야 되고. 아, 개런티 얘기는 많이 쓰지 말아달라. 이런, 내가 쓰지 말라고 했으니 개런티 얘기를 더 쓰겠군. (웃음) 스케줄이나 개런티가 맞지 않아서 하고 싶었는데 못한 작품이 있나. 아무리 스케줄이 빡빡해도 미야자키 하야오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반드시 하고 있다. 사실 어떤 감독이 내게 영화음악을 부탁할 때는 내 음악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되도록 거절하지 않는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감독과도 일해보고 싶다 영화음악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감독과 의견 차이가 생기는 일이 있을 것이다. 심혈을 기울인 음악을 퇴짜놓는다거나 이렇게 저렇게 바꿔달라는 요구를 들을 텐데. 감독과 의견차이가 있는 경우는 있지만 다투는 일은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영화음악을 만들 때 나는 1년 정도를 생각해서 작업한다. 하지만 감독은 3년, 혹은 그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그 영화를 생각한 것이다. 감독이 훨씬 오래 생각했고 더 많은 것을 걸고 하는 것인만큼 감독의 견해에 따르려고 노력한다. 기타노 다케시는 <기쿠지로의 여름>을 찍을 때 완성된 시나리오가 없었다고 하던데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음악을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하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처음 구상했던 것과 다른 영화가 나왔지만 기타노 다케시는 처음부터 피아노를 위주로 부드러운 음악을 쓰자고 말했다. 사실 감독에게 시나리오는 설계도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것을 만들고 싶어하는가에 있다. 그게 확실하면 큰 문제는 없다. 기타노 다케시나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음악에 관해 당신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편인가. 기타노 다케시는 촬영소나 조감독 출신이 아니어서 첫 작품부터 꾸준히 성장하는 감독이다. 영화음악에 관한 주문도 거기에 맞게 성장하는 것 같다. 이번에 만든 <인형들>은 영화음악에 대해 확실한 주문을 했다. 기타노 다케시가 음악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일 뿐이다. 기타노 다케시나 미야자키 하야오나 음악에 관해 일반인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 영화감독들이 음악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한 표현이다. 사실 그들은 음악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구현한 이미지와 스릴

잘못된 캐스팅, 잘못된 연출방향,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터리티 리포트>는 스필버그가 <쥬라기 공원> 이래 지난 10년간 만들어온 장르영화들 중 가장 재미있고 가장 덜 잘난 척하는 작품이다. 스필버그는 를 편집하는 중에 이 사이언스 픽션스릴러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촬영하였으며 그래선지 만듦새에 있어서 그 큐브릭 각색 작품보다 덜 들떠 있고 내용은 더 멜랑콜리하다. 사이언스 픽션의 대가인 필립 K. 딕의 56년작으로부터 예상 밖으로 화제가 되는 배경을 빌려온 이 작품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살인사건 혐의를 잡아내 범죄가 일어나기도 전에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는 일이 가능한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다. “법을 어겼기 때문에 피고인을 체포한다”가 이 영화의 흥행포인트다. 스필버그 자신도 부시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을 법적 타당성을 이유로 지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러한 21세기 초기 감성에 덧붙여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데이비드 핀처의 생생하고 피로 얼룩진 예시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수석 수사관인 존 앤더튼(톰 크루즈)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멋지게 깔린 가운데 마치 영화편집이라도 하듯이 되감아 돌려보기도 하고 증거를 이리저리 맞춰보기도 하며 이 이미지들의 흐름을 처리한다. 그는 6년 전 아들을 잃으며 얻은 상처 때문에 폐인이 되어 약물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범죄예측에 의한 처벌이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앤더튼은 예지자가 자신을 예비살인범으로 지목했음을 알게 된다. 아직 미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곧 죽이게 될 거라는 것이다. 이것은 음모인가? 그런들 아닌들 우리가 무슨 상관인가? 크루즈가 수사국에서 가장 신비로운 애거서(사만다 모튼, 눈썹 없음)와 탈출을 시작하면서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조차 그보단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긴 하지만, 스필버그식 편집능력의 정교한 리듬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안개로 싸인 듯한 무정형의 2054년을 배경으로 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세계는 야누츠 카민스키가 촬영을 맡아, 범죄가능성과 함께 모든 색깔들이 다 피 빨리듯 빨려나간 모습이다. 조명은 창백하게 분사되고 공간은 놀랍도록 찐득찐득해진다. 워싱턴 D.C.의 잔해는 과거에 대한 안타까운 증인으로 남는다. 주마등같이 펼쳐지는 시각효과를 추구하는 스필버그는 카메라를 거의 계속적으로 움직이도록 해, 신마다 색깔이 바뀌게 하면서 유려하게 동작을 잡아나간다. 그러다가 친숙한 의미에서의 스필버그식 놀라움이 순간 린치식 위협으로 변하여 웰스식 바로크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하수구를 향해 굴러 달아나는 눈알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앤더튼의 모습에서 잘 살아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편집증을 잠시 접어놓자면, 예지자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오웰의 경찰사회보다는 보르헤스의 수수께끼 풀이 같은 상상력에 더 가까워지긴 했지만, 딕의 원작소설은 그 두 갈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주로 맞춰졌다. 그러나 스필버그 영화는 미래예언이라는 커다란 문제가 가져올 여러 가지 길의 가능성에는 관심이 덜하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시간의 흐름에 논리를 부여하는 데 실패한 각본에도 기인한다. 원작에서 딕에게 굴곡과 반전을 가져다준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컨셉이 여기서는 영리한 유전공학자의 멋진 설명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위치지워져 별다른 구실을 못하고 오히려 영화를 산만하게 만들 따름이다. 각본은 딕의 디스토피아에서 또 다른 주요 개념들인 ‘보정적 약물사용’이나 ‘광고의 홍수’ 등도 함께 소개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중 ‘광고의 홍수’는 특히나 스필버그의 구미를 당겼다. 마치 TV프로그램 순위라도 매기듯 ‘지나치게 신뢰성 있는’(all-too-credible) 사회, 그래서 소비자들이 그들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갈리고 달라지는 그런 사회를 꿈꾸는 그의 구미를 말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눈이란, 말 그대로, 영혼의 창이다. 그리고 그것은 브랜드네임에 목말라하며 그득 충족되기 원하는 그런 영혼이다. 모든 전자 광고보드는 개개의 소비자들 중 잠재 소비자를 가려내고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소비제안을 하게끔 프로그램돼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혼을 빼갈 정도의 놀라운 이미지들과 생각없는 스릴로 가득하다. 의도가 뭐였든지 간에, 이 영화는 무의식이 완전히 정복된 미래사회를 생생히 보여준다. 어떠한 범죄적 상상도 국가의 처벌을 받는 단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욕망은 자본주의적 만족을 향해 제분된다. 스필버그 스스로는, 법적인 자유를 팔아 테러로부터의 안전을 사고 싶을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경찰이 개개인의 삶에 끼어드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반복적 이미지는 뒤죽박죽 괴롭게 뒤섞인 플롯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울림을 전해준다. 이와 비슷하게, 마치 경찰견처럼 경찰을 보좌하는 로봇거미들은 이 영화 주요 컨셉에 대한 공격적이리만치 스펙터클한 열쇠다. 잃어버린 아이와 파괴된 가정이라는 배경을 가진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스필버그식 진부한 설정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런 감성만이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앤더튼이 애거서의 비전을 다운받으려고 하는 대목 등을 보면서 우리는 연민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미스터리에 대한 씁쓸한 자각이야말로 매력적이다: 만약 제대로 된 영화를 편집해낼 수만 있다면,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짐 호버먼/ 영화평론가·<빌리지 보이스> (<빌리지 보이스> 2002.7.2.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독립·단편영화 <바람> <괜찮아 괜찮아>

독립영화 속에도 일상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나온다. 이번주 독립영화관(KBS2TV, 8월16일, 밤 12시50분)에서 방영하는 <바람>(박현진 연출/ 16mm/ 컬러/ 13분) 또한 일상과 그 쓸쓸한 후일담에 관한 영화다. 남자가 자꾸 약속을 변경하는 바람에 짜증이 난 여자가 친구 결혼식장에서 초등학교 남자 동창생을 만난다. 그는 출장 사진사다. 둘은 우연히 같이 빨래를 하던 중 라디오를 듣다가 야구장으로 간다. 그리고는 강릉행 기차를 탄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위악도 위선도 없다. 그냥 그랬다. <괜찮아, 괜찮아>(이정화 연출/ 16mm/ 컬러/ 18분)는 실연한 한 남자가 과거의 사랑을 더듬는 영화다. 같이 껴안았던 그 골목, 낡고 초라했지만 둘이 누워 있기에 딱 좋았던 빈방, 함께 나눈 대화들…. 그런데 다른 식으로 볼 수도 있다. 귀신이 된 그가 옛 애인을 찾아갔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골목에서 껴안고 있거나 빈방에 누워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식스 센스>의 M. 나이트 샤말란 버전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는 차를 타고 가면서 카메라쪽을 향해 썰렁한 농담을 한다. 이후에도 카메라는 조금씩 흔들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등장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화면 안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좀 괴이하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이 우연과 일상을 발견했다면, 독립영화는 다른 것을 발견하려는 중이다. 이효인/ 영화평론가·경희대 교수 yhi60@yahoo.co.kr

신중현 사단의 LP 복각-이정화, 김정미 앨범 발매

드디어 말로만 듣던 신중현 사단의 전설적인 LP들이 본격적으로 CD로 복각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복각 작업은 그동안 대표적인 앨범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루어져 왔으나 희귀 LP들은 이른바 소수 ‘마니아’층의 귓전에만 한정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복각되어 나오기 시작한 CD들은 이제 고전적인 한국 록음악의 현장이 마니아층을 넘어선 다수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검증, 음미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번에 나온 신중현 곡집은 우선 2장이다. 이정화의 앨범이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김정미의 앨범이다. 모두 오리지널 음반이 발매된 연도가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정화의 앨범 속지에는 ‘1969년’이라는 연도 표시가 ‘당시 67년도에 22세이던’이라는 신중현의 증언과 함께 있고 음반 날개의 띠지에는 ‘1968년작’으로 표시되어 있다. 김정미의 앨범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유니버설 레코드에서 나온 오리지널 음반이 1972년 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적인 앨범들이니만큼 연도 표시에는 철저한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이정화의 음반은 신중현이 ‘덩키스’(Dunkeys)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만들어낸 앨범인데, 이정화를 앞세워 한국 대중가요 무대에 본격적으로 ‘사이키델릭 록’을 선보인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앨범이다. 모두 6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싫어> <봄비> <꽃잎> <마음> 등 곡 제목이 모두 두 글자다. 원래의 LP B면에 수록된 <마음>은 20분에 이르는 대곡이다. 정말 ‘주옥같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훌륭한 노래들이 앨범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당시의 록음악 음반에는 곳곳에 뽕짝의 색깔을 포진시켜 대중을 안심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음반에는 전혀 그런 색깔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인’ 앨범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아닌게아니라 신중현은 “음반은 6개월에 걸쳐서 녹음되었고 출시되었지만 일반무대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고 음반은 그대로 사장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그뒤 이정화는 월남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하고 월남으로 떠났다고 한다. 김정미의 <바람> 역시 전설적인 앨범이다. <바람> 직후에 나온 와 한쌍인 이 앨범은 타이틀곡인 <바람> 하나로도 신중현의 작곡 실력과 김정미의 관능적이고 사이키델릭한 매력을 일시에 확인할 수 있다. 김정미에게 늘 따라다니는 ‘70년대 최고의 사이키델릭 보컬리스트’라는 수식어는 그저 헛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신중현 명반 시리즈>는 펄시스터즈, 김추자, 더 맨 등 고전적인 명반들의 CD발매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물론 시장성의 부족, 마스터 테이프의 열악한 상태나 존재 유무 자체의 모호함, 그리고 저작권이나 판권 당사자들의 의지 부족 등으로 인해 앞으로도 어려움이 많겠지만 일단은 고무적인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문서보관소’ 같은 형태의, 마스터 테이프 복원 및 보관을 전문으로 하는 공적 연구소 내지는 기관이 생겨나야 한다고 믿는다. 고전적인 한국 록음악의 ‘소리’ 역시 일종의 무형문화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 개인들의 이해관계나 의지에만 맡겨져서는 안 될 것이다.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썸 오브 올 피어스>등 톰 클랜시 소설의 주인공 잭 라이언

잭 라이언 팬사이트는 미국에서 <썸 오브 올 피어스>가 개봉되자마자 ‘잭 라이언을 연기한 벤 애플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제목의 간단한 온라인 설문을 진행했다. 그 설문 결과, 좋다(Cool)라는 답변에 41%,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볼 만했다(don’t like him much but it’s ok)에 9%, 다른 배우였으면 좋았을 것을(could’ve been somebody else)에 14%, 그래도 알렉 볼드윈보다는 낫다(better than Alec Baldwin)에 12%, 영 아니다(He’s gonna suck)에 19%, 그리고 별 상관없다(don’t care)가 2%로 집계되었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약 반반으로 갈리는 상황이 연출된 것. 총 2757명의 네티즌이 참가해 어느 정도 신빙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 설문조사의 결과는, 알렉 볼드윈, 해리슨 포드 그리고 밴 애플렉까지 다양한 배우들이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 잭 라이언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가진 매력을 살려주기에는 부족했다는 팬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톰 클랜시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잭 라이언이라는 인물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무엇보다 그의 복잡하면서도 화려한 개인사에서 찾을 수 있다. 경찰관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졸업 뒤 ROTC로 미 해병대에서 복무하던 중 훈련용 헬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등에 심한 상처를 입고 23살의 나이에 은퇴한다. 그뒤 볼티모어의 증권사에서 성공적으로 경력을 쌓다가 그 회사의 부사장인 뮬러의 딸이자 존스홉킨스 대학 의대생인 캐시와 사귀게 된다. 그리고 캐시의 소개로 잭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신경외과 의사의 집도하에 수술을 받게 되고, 그를 통해 평소 그를 괴롭히던 등의 통증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뒤 캐시와 결혼한 잭은 4년간의 증권회사 경력을 그만두고 역사학에서 박사를 따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하고, 학위 취득과 함께 미 해군사관학교에 교수로 취직을 하게 된다. ♣ 잭 라이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 그가 CIA와 인연을 맺은 것은 사관학교의 교수로 CIA에 컨설팅 의뢰를 받아 해주면서부터다. 그러다 우연히 런던에서 영국 황태자 부부에 대한 아일랜드공화국군의 암살 기도를 막아낸 것을 계기로 그와 CIA의 관계는 깊어진다. 해병대 출신이자 사관학교 교수인 그의 가능성을 높게 본 CIA 국장인 제임스 그리어의 요청에 의해 본격적인 CIA 정보분석 요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조직 내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나가면서 빠른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제임스 그리어에 이어 CIA 국장을 맡기까지 한다. 그뒤 잠시 은퇴했던 잭은 대통령이 직접 안보보좌관으로 위촉해 다시 미국 정부를 위해 활동하게 되고, 부통령을 거쳐 42살의 젊은 나이에 마침내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잭 라이언에 대한 그런 인물설정이 톰 클랜시의 작품들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어린 시절의 잭이 등장하는 것은 93년작 <복수>(Without Remorse)로, 대학생이던 잭 라이언은 이 소설에서 중요 등장인물이자 마약 수사관인 아버지와 식사를 하면서 대학 졸업 뒤 ROTC로 해병대에 입대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단 두 페이지에만 등장한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잭이 톰 클랜시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해군사관학교 교수이던 그가 영국 황태자 부부의 암살사건을 막아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다룬 87년작 <패트리어트 게임>이다. 이어 84년작 <붉은 10월>과 88년작 <크레믈린의 추기경>(The Cardinal of the Kremlin), 89년작 <긴급명령>(Clear and Present Danger), 91년작 <썸 오브 올 피어스> 등에서는 CIA 요원으로서 그의 맹활약이 그려진다. CIA를 은퇴했던 잭이 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일본과의 군사적 충돌을 막아내고 비로소 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이야기는 94년작 <적과 동지>(Debt of Honor)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적과 동지>의 마지막 장면은 극우성향의 일본 민간 항공기 기장이 미 국회의사당에 충돌하는 테러를 저지르는 것으로 끝난다. 지난해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상황의 유사성으로 인해 많이 언급되기도 했던 내용이다. 바로 그 항공기 테러로 인해 대통령을 비롯한 미 정부의 주요인사들이 사망하자 부통령인 잭 라이언이 대통령직을 넘겨받아 미국을 재건하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 95년작 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0년작 에서는 대통령 잭 라이언이 시베리아의 금광과 유전을 노리고 러시아를 위협하는 중국에 대항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 <붉은 10월>에서 알렉 볼드윈이 잭 라이언을 연기하는 장면. ♣ 가장 인간적인 잭 라이언을 연기했다는 평가는 받은 <썸 오브 올 피어스>의 벤 애플렉. 물론 잭 라이언이 냉전시대 이후 미국의 패권주의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아이콘으로 사용되었다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수>(Without Remorse), <레인보우 식스>(Rainbow Six) 등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도 잭을 도와주는 요원으로 등장하는 전직 특수부대 출신의 CIA 요원 존 클락과는 달리, 잭 라이언의 경우 상대적으로 다양한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가진 인간적인 인물로 그려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 벤 애플렉이 연기한 잭 라이언은 지금까지 다른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인간적 면을 많이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잭의 모습에 일부 팬들이 실망할 것이 분명했지만, 근육질 인간병기가 보여주는 액션에는 더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는 대중의 기호에는 딱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잭 라이언 팬페이지 --------→ http://www.jackryan.itgo.com/ <썸 오브 올 피어스> 공식 홈페이지 --------→ http://www.sumofallfearsmovie.com/ <썸 오브 올 피어스> 한글 공식 홈페이지 --------→ http://sumofallfears.movist.com/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해 (2)

9개월 만에 막내린 결혼생활, 무너진 먼로먼로가 남긴 짧은 말들은 대부분 슬픔에 차 있다. 먼로는 “만일 내가 만인의 스타라면 그건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나는 어느 곳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외로움에 시달렸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그런 먼로를 찾아온 기적 같은 연인이었다.디마지오는 54년 1월 흰 면사포 아래 동그랗게 뜬 눈동자로 웃고 있던 먼로와 결혼했지만 같은해 10월 공식적으로 이혼을 청구했다. 두 사람이 왜 그토록 빨리 헤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디마지오가 원피스 자락이 올라가며 먼로의 허벅지가 드러나는 때문에 분노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많은 언론이 디마지오가 먼로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요구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끈질기게 나돌던 먼로의 불감증 소문도 불거져나왔다. 결혼 아홉달 만에 디마지오와 헤어진 먼로는 빠른 속도로 무너져갔다. <돌아오지 않는 강>을 본 <뉴욕타임스> 평론가 보슬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의 풍경은 스펙터클하다. 그러나 미스 먼로 역시 그녀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못지않게 스펙터클하다”라고 썼다. 문제는 먼로가 스스로의 ‘스펙터클’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었다. 먼로는 샤넬 No.5 향수만 뿌린 채 알몸으로 잠든다고 말해 사람들을 자극하는 동시에 여성을 착취하는 할리우드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드러냈다. 그녀는 할리우드를 “키스를 위해서라면 1천달러라도 지불하지만 영혼에 대해선 50센트가 고작인 곳”이라고 경멸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 50센트라도 제안하는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지쳐서, 먼로는 수면제와 알코올에 젖어들었다. 대사가 조금만 복잡해도 스무번 이상 NG를 내기로 유명했던 먼로의 악습은 교육부족과 약물중독 때문이었다. 타고난, 그러나 탈출하지 못한 코미디 배우그럼에도 먼로가 끊임없이 탈출구를 찾았다는 사실은 가십에 가려진 그녀의 강인한 면모를 드러낸다. 먼로는 유명한 연기지도자 리 스트라스버그를 찾아 뉴욕으로 ‘탈출’했고, 메이크업 박스는 한개도 없었지만 책은 수백권을 사들였다. 미국과 대륙 양쪽에서 정신분석을 받으며 치유를 모색하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을 설립해 로렌스 올리비에를 고용한 사실은 그녀가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고민했으리라는 단서를 던져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녀의 몸부림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스트라스버그의 첫 번째 아내 폴라 때문에 생긴 신경쇠약,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의 실패, 치료방법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며 수면제만 처방했던 의사들. 먼로는 나이 많고 지적인 작가 아서 밀러와의 결혼을 통해 주부로 안주하려 했지만- 심지어 부엌에 손으로 만든 국수를 널어놓고 헤어드라이어로 말리기까지 하면서- 밀러가 대본을 쓴 영화 <미스핏> 현장에서의 마찰과 유산의 상처를 거치며 4년 만에 파탄에 이르렀다. 먼로에게 그 결혼은 단순한 사랑의 결과가 아니었다. 먼로는 “내가 그저 멍청한 금발여자였다면 밀러가 나와 결혼했을까?”라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밀러는 고작 결혼 3주 만에 “지옥에서 온 편지” 같은 잔인한 내용의 일기장을 아내가 보는 앞에 뻔히 펼쳐놓았다. 밀러는 먼로가 자신을 그늘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랐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초반부터 별거와 불화로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은 먼로를 금기의 선을 넘도록, 다시 말해 수면제와 알코올을 섞어 상습 복용하는 지경에까지 가도록 빠르게 몰아쳤다. 59년작 <뜨거운 것이 좋아>를 찍을 때 새어나왔던 악의에 찬 소문은 당시 먼로의 상태가 어땠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 영화의 작가 I. A. L. 다이아몬드는 먼로가 “버본이 어디 있죠?”라는 대사를 47번이나 되풀이했다고 털어놓았다. 누구도 그런 그녀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1962년 8월5일 먼로는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침실에서 죽어 있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옆에는 텅 빈 수면제 병이 뒹굴고 있었다. 그녀와 동시에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케네디 대통령 형제부터 마피아 관련설까지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지만, 수사는 그녀의 죽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종결됐다. 마지막까지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어했던 먼로. 그녀와 관련있는 많은 사람이 바로 그날 먼로와 대화를 나눴다고 주장했다. 먼로가 누구에게 전화를 걸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죽는 순간 그녀가 혼자였다는 사실뿐이다. 막 새로운 계약을 맺고서 다시 한번 삶을 시작하려 했지만, 먼로는 마지막 영화 속에 대사로 남긴 질문의 답을 얻지 못한 것일까. “어둠 속에선 어떻게 돌아갈 길을 찾아야 하죠?”글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제공 SYGMA ◆ 먼로의 걸작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Gentlemen Prefer Blondes┃1953년┃감독 하워드 혹스 로렐라이(마릴린 먼로)는 파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백치미 넘치는 쇼걸. 그녀는 부유한 애인 덕분에 파리행 크루즈를 타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좀더 부유한 남자를 찾아 배를 헤집고 다닌다. 결국 애인에게 들키고 만 로렐라이는 야무진 친구 도로시(제인 러셀)와 함께 파리 클럽에서 쇼를 하며 민생고를 해결하는 처지가 된다. <물랑루즈>에도 인용된 노래 로 유명한 이 영화는 소설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다시 한번 리메이크한 작품. 60년대 섹스심벌이었던 라켈 웰치는 이런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다면 자신도 좀 다른 배우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How to Marry a Millionaire┃1953년┃감독 진 니걸레스코 가난한 남자에게 진력이 난 샤츠(로렌 바콜)는 동료 모델 폴라(마릴린 먼로), 로코(베티 그레이블)와 함께 상류층 아가씨 행세를 하며 백만장자 사냥에 나선다. 잠시 빌린 아파트의 가구를 팔아치워가며 간신히 버티던 세 여자가 빈털터리가 됐을 때쯤, 석유재벌과 가난한 척하는 백만장자, 아파트의 원래 집주인 등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에서 먼로는 다른 두 배우보다 훨씬 짧게 등장하지만, 자주 이곳저곳 부딪치는 연기와 순진한 탄성으로 가장 많은 웃음을 주는 인물이다. 이 영화의 프로듀서 누널리 존슨은 긴 다리를 뻗고 의자에 기댄 먼로를 가리켜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캐니언처럼 하나의 자연현상이라 할 만하다”고 감탄했다. 국내에서도 출시된 DVD에선 당시 시사회를 찾은 세실 B. 드밀 등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The Seven Year Itch┃1955년┃감독 빌리 와일더 조 디마지오에게 이혼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의심을 받은 영화.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즐거워하며 하얀 원피스 자락을 날리는 먼로의 모습은 핀업 사진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결혼한 지 7년 되는 샐러리맨 리처드는 아내와 아이가 호숫가로 피서를 떠나자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한다. 때마침 같은 아파트에 아름다운 금발의 여자(마릴린 먼로)가 이사오고, 리처드는 그녀를 두고 온갖 상상에 빠진다. 빌리 와일더가 연출한 은 발랄하고 천진한 현실 속의 먼로와 리처드의 상상 속에서 농염하게 돌변하는 먼로를 대비시켜 먼로를 둘러싼 환상을 폭로했다. 흰 원피스와 함께 가장 유명한 영화의상 중 하나일 붉은 가운은 20세기폭스에서 먼로에게 빌려준 것이었다.<버스 정류장> Bus Stop┃1956년┃감독 조슈아 로건 태어나서 한번도 농장을 떠나본 적 없는 청년 보는 로데오 경기가 열리는 도시에 처음 와 클럽 가수 셰리(마릴린 먼로)를 만난다. 보는 창백한 피부를 가진 셰리가 천사 같다 여기면서 막무가내로 결혼하자고 우긴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보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간 셰리. 그녀는 계속 달아나려 하지만 눈 때문에 하룻밤 머문 휴게소 식당에서 보의 진실한 면을 발견한다. 먼로는 <피크닉>의 조슈아 로건이 감독한 이 영화로 코미디나 뮤지컬뿐 아니라 드라마 연기에도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낡은 무대의상을 입은 셰리가 거울을 보며 “고향을 떠날 땐 이런 걸 하려고 한 게 아니었어. 뭔가 하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초반부 한 장면은 먼로의 마음속 고백을 듣는 것 같아 애틋하기도 하다.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년┃감독 빌리 와일더 갱들이 판을 치는 금주령 시대 시카고. 색소폰 연주자 조(토니 커티스)와 바이올리니스트 제리(잭 레먼)는 우연히 창고에서 일어난 갱들의 살인사건을 목격하고 급히 달아난다. 두 사람은 여장을 하고 순회 공연중인 여성 재즈 밴드 일행에 합류해 도피 행각을 시작한다. 조는 여가수 슈가(마릴린 먼로)에게 빠져 때로 남자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제리는 엉뚱하게도 남자의 사랑을 받는 신세가 된다. 마지막 결혼식장에서 남자와 결혼하게 된 한 남자가 내뱉는 대사가 걸작인 영화. 마릴린 먼로에게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안겨줬다. 먼로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허벅지를 감추기 위해 개발했다는 ‘먼로 워크’가 매력적으로 드러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1) ▶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2) ▶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1) ▶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2)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2)

컬러와 와이드 스크린이 제조한 스타먼로가 영화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그 시기에 할리우드는 컬러와 와이드스크린이라는 기술적 혁신으로 TV에 대항하려 했다. 이미 1947년에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TV는 1948년에 100만 세트가 보급되고 1960년에는 전 가구의 90%가 TV 수상기를 갖게 된다. 늙고 지쳐 보이는 직업 정치인 닉슨이 젊고 지적인 케네디를 당할 수 없었던 것도 다 TV 토론 때문이라는 것은 이제는 상식에 속한다. 먼로는 바로 이 시기에 스타덤에 올랐다. 먼로의 시대에는 아직 베트남 전쟁도, 뉴 레프트도, 히피도, 대중적인 우먼 리브(여성해방)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운동의 성과를 10년이나 후퇴시켰다고 마돈나가 비난받게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얘기다. 먼로가 살았던 미국의 당대는 그 이후인 60년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번영기였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땃벌레니 백골단이 하는 우익 깡패 집단이 국회의 해산을 요구하면서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먼로의 죽음에 못지않은 의문사들이 숱하게 생겨나서 80년대까지도 끊이지 않았고 지금에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이런 식으로 먼로의 시대를 읽는 것은 너무 거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먼로를 핀업 걸로 직접 소비한 것이 아니라 섹스 심벌이라는 ‘풍문’으로만, 그것도 대개 사후에 추수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직후에 먼로가 한국을 방문했다지만 먼로에게 열광한 이는 미군 G.I.들이었다. 마릴린 먼로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힘, 그리고 또 미국 대중문화의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이차대전 이후 전세계에 주둔하게 된 미군 G.I.들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먼로는 미국과 전세계 대중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아이콘이 된 것이다. 먼로가 우리나라에서 핀업 걸로 수용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이미지 소비의 전통 내지는 패턴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는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섹슈얼리티를 대중적으로 탐구하거나 소비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사진이라고 하면 주로, 고급스런 종이에 제대로 인쇄된 잡지나 캘린더의 사진을 뜻하는 것인데, 우리의 소득 수준이나 검열의 완강함이 사진 이미지의 대중적 소비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지의 소비에 있어서 사진을 건너뛴 채 TV로 이행한 것이고, 90년대 초중반의 영화 르네상스를 거치자마자 곧바로 인터넷이 도래한 것이다. 한국만큼 동영상을 선호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김지미나 문희가 여전히 최고인 줄 아는 세대와 인터넷의 IJ를 즐기는 세대가 공존하는 우리나라에서 핀업 걸 출신 먼로는 뭔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먼로가 죽자마자 앤디 워홀(1928∼87)은 잽싸게 1952년작 <나이아가라>의 홍보용 사진에서 먼로의 얼굴만을 오려낸다. 1962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워홀은 계속해서 먼로의 얼굴을 가지고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해냈는데, 제작이라기보다는 대량생산이란 말이 더 적합할 듯하다. 먼로의 얼굴은 때로는 오렌지색으로 때로는 분홍색으로 때로는 흑백이 뒤집힌 채 때로는 수십개의 그리드 안에 복제되어서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심지어 워홀은 먼로의 입술만을 한번에 200여개나 복제하기도 했다. 워홀이 먼로 얼굴에 주목하기 전에, 팝 아트의 소재는 주로 수프 깡통, 코카콜라, 광고, 만화 등이었는데 먼로 얼굴을 오려다 쓰면서부터 워홀은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작가가 되기 시작했다. 워홀 이래로 신디 셔먼이나 모리무라 야스마사, 조 레너드 같은 아티스트들이 먼로의 포즈나 이미지를 갖가지로 패러디했다. 먼로는 미술의 오브제로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것이다. 팝 아트의 오브제로 영생을 얻다 먼로를 차용해 대중문화쪽에서 성공한 이가 마돈나다. 섹스 심벌의 이미지를 더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전략을 채택한 마돈나는 초창기 자기 별명을 스스로 ‘보이 토이’라고 붙였다. 그러면서 거꾸로 그녀는 길거리의 소년들이나 자신의 백 댄서 보이들을 자신의 성적 노리개로 삼기도 했는데, 먼로와는 달리, 관습적인 성 역할에 편승하는 동시에 이를 거부했다. 마돈나는 결정적으로 뮤직비디오 <머티어리얼 걸>에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를 패스티시했다. 여기서 마돈나는 한편으로 먼로의 역을 재연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 제작 과정을 지켜보는 자기반영적 이미지도 제시한다. 미디어 자체의 포스트모던한 성격을 재현의 과정과 수법에서도 되풀이한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마돈나는 모던한 먼로에 비해 아주 얄미울 정도로 약아빠졌다. 먼로가 세계를 놀라게 했던 순간들 ˝샤넬 N.5만 입고 자요˝ ♠ 49년 촬영한 ‘붉은 벨벳’ 누드 캘린더가 막 인기를 얻고 있던 52년 공개됐다. 먼로의 에이전트는 그 사실을 부인하라고 충고했지만, 먼로는 오히려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열어 “50달러가 필요해서” 사진을 찍었다고 고백했다. 이 회견은 위기에 빠진 여배우가 시대를 주도하는 관능의 화신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됐다. 당시 “무엇을 입고(have on) 있었느냐”는 질문에 먼로가 “라디오를 가지고 갔는데요”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 잠잘 때 무엇을 입고 자느냐는 질문에 “샤넬 No.5”라고 대답해 보수적인 50년대 미국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알몸으로 잔다는 사실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렇게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먼로는 자신있는 육체를 과시함으로써 그 불안감을 달래려 했다. ♠ 을 찍으며 원피스가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휘날리는 장면을 찍었다. 광고 사진작가 샘 쇼가 기획한 이 장면은 한밤인데도 불구하고 2천명 넘는 군중과 사진기자들을 불러모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천진하게 탄성을 지르는 마릴린의 모습은 관능과 순수함이라는 결합할 수 없는 두 요소가 한 사람에게 집중된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 ♠ <왕자와 쇼걸>을 찍을 무렵 열린 기자회견 도중 드레스 어깨끈이 떨어져나갔다. 평론가 주디스 크리스트가 옷핀으로 끈을 고정시켜주는 장면이 전세계에 보도된 것이다. 계획적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순진한 글래머라는 먼로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먼로보다 한 세대 위인 롤랑 바르트(1915∼80)가 먼로를 글로 다룬 적은 없는 듯하다. 그는 <가르보의 얼굴>이라는 에세이를 “가르보의 얼굴은 이데아이고 헵번의 얼굴은 이벤트다”라는 문장으로 맺고 있다. 바르트는 먼로보다는 디트리히나 가르보와 같이 신화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채 정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저 너머에 얼음처럼 얼어붙어 있는 고전적인 스타들에게 끌렸던 것이다. 스타덤에 오르기 전의 사진에서 우리는 <플레이보이>가 내세운 ‘이웃집 여자’(girl nextdoor)라는 컨셉에 딱 들어맞는 다소간에 친숙하고도 앳된 모습의 먼로를 읽을 수 있다. 그런 이웃집 여자 중에 섹시한 여성이 <플레이보이>의 센터폴드를 장식하게 되는 것인데, 먼로는 창간호의 히로인이었다. 아무래도 먼로는 바르트의 취향이 아니다. 어쨌거나, 먼로에 필적할 스타는 험프리 보가트, 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다. 그런데 김남일이나 장나라를 좋아하는 요즘 10대들에 물어보면 보가트나 제임스 딘을 모르는 경우도 꽤 있을 것이다. 한편, 1977년에 생물학적으로 죽은 엘비스는 군대에 가서 소속부대 지휘관의 딸과 결혼한 1958년에 이미 그 문화-정치적 생명이 끝장나고 말았다. 반면에, 1958년에 태어나 77년에 대학에 들어가서 쭉 B급 학삐리로 살아온 나로서는, 먼로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이지만, 이렇게 그녀의 이미지와 아이콘이 시공을 초월해서 의미 작용을 하며 살아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그것들에 대해서 일일이 다 좇아다니면서 제대로 주석을 달기란 내 힘에 부친다. 예컨대, 외계인 내지는 ‘리빙 데드’의 외양을 띤 양성적 이미지를 CD 부클릿에 담은 어떤 밴드가 마릴린 맨슨이란 이름을 달고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 가까운 예를 들자면, 얼마 전에 컴백한 김완선의 눈동자 흰자위조차 나는 아직 충분히 감당해내지 못한다. 이주일의 권고대로 담배를 끊고 들뢰즈(1925∼95)보다 더 오래 살아야겠다. 40년 뒤에 보자. ▶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1) ▶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2) ▶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1) ▶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2)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1)

1962년 8월5일 마릴린 먼로는 술과 수면제와 외로움에 취해 침실에서 삶을 마감했다. 100만달러 남짓한 부동산과 채 고치지 못한 유언장, 전남편 아서 밀러가 쓴 책들과 좋아하는 베토벤의 레코드가 그녀 뒤에 남았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사진을 찍어주면 어린애처럼 행복해하지만, 일할 때는 겁에 질렸다”고 회상했던 상처 많은 배우 마릴린 먼로. 그녀는 너무 젊어서 죽는다면 삶을 완성하지도, 그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거라며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녀가 완성하지 못한 삶은 위대한 배우라고 칭송받았던 그 누구보다도 오래 남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흘러다니고 있다. 올해 사망 40주년이 되는 먼로는 아직도 너무나 유명해 결코 쉴 수가 없는 것이다.편집자 이재현/ 문화평론가 21세기 넘어서까지 살아남은 말론 브랜도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추악하다. 망가져 있는 그들의 육체를 영화나 해외토픽의 가십난에서 보는 것은 목욕탕 대형 거울 앞에서 우리 자신의 무너져가는 육체를 연민과 체념의 눈길로 보는 것과 다르다. 그들은, 뭐랄까, 환한 대낮에 극장에서 막 나왔을 때보다 수백배 증폭된 환멸감을 준다. 그에 반해, 서른여섯에 요절한 마릴린 먼로는 멍청하면서도 순진한 섹스 심벌로서 여전히 남아 있다. 어릴 적의 불행한 삶, 스타 탄생 스토리, 남성 편력과 염문,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의 내적 고통, 의문사, 사후에도 그칠 줄 모르는 인기 등에 관한 이야기들은 한데 얽혀 먼로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그런가 하면, 먼로 자신이 내뱉은 말들은 그녀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는 점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오히려 그 말들로 이루어진 먼로이즘에 의하면, 그녀는 스타 이미지와 스타 육체를 착취하는 할리우드 시스템을 제대로 간파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영화사적으로 볼 때 먼로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먼로와 함께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부각된 브리지트 바르도와 비교해봐도 잘 알 수 있다. 로제 바딤의 1956년작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야말로 먼로가 출연한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나다. 그렇지만, 먼로가 출연한 영화를 한편도 보지 못한 세대들도 먼로를 기억한다.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를 경쾌하게 내리누르는 먼로의 브로마이드가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먼로는 통풍구 바람이 없었더라도 자신의 허벅지와 거들을 슬쩍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하얀색 홀터 톱 원피스를 올렸을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아이스께끼’(우리 어릴 때, 여자애들 치마 들춰올리는 일을 그렇게 불렀다) 이미지는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다. 현실이 아닌, 전설 속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를 세계적인 섹스 심벌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먼로가 내 몽정이나 자위의 극장에는 한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 내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고 내 세대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먼로가 등장하는 영화가 1950년대 한국의 극장에서 몇편이나 상영되었는지, 그리고 관객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단지, 나는 70년대의 흑백 TV를 통해서만 먼로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70년대의 나는 먼로보다는 준 앨리슨이라든가 내털리 우드가 더 좋았다. ‘포스트콜로니얼’ 한국 남성의 일원인 나에게 이른바 백마의 환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먼로와 같은 글래머는 아무래도 부담스럽기도 했고, 먼로의 시대가 내 시대와는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때 <허슬러>나 <펜트하우스>를 애독하며 두루말이 화장지깨나 낭비했던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물론, 이 대목에서는 사람마다 갈린다. 1954년생 소설가 김영현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의 먼로가 한때 자신의 사춘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 그럴듯하게 얘기하면서 먼로가 기타를 치며 불렀던 노래를 영어로 몇 소절 부른 적이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먼로의 애교점이나 먼로 워크에 따라 흔들거리는 그녀의 엉덩이에 푹 빠졌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내 사춘기 시절에 먼로보다는 케네디의 미망인 재키가 더 충격적이었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을 때의 이질감, 그리고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잡힌 오나시스 재키의 알몸 일광욕 사진 말이다. 불행히도 그 사진은 70년대 초반의 한국 신문 외신난에 아주 작고 희미하게 인쇄된 채 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50년대의 미국 대중문화에 퍽이나 친숙한 타란티노에게는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영화 <펄프 픽션>을 보면 비록 엑스트라이기는 하지만 식당 종업원들이 먼로 차림을 한 채 여럿 등장하니 말이다. 팀 버튼에게는 어떨까. 마릴린 먼로 연보♠ 1926년 6월1일 캘리포니아에서 출생♠ 1950 <아스팔트 정글> <이브의 모든 것>♠ 1952 <멍키 비즈니스>♠ 1953 <나이아가라>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1954 <돌아오지 않는 강>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1955 ♠ 1956 <버스정류장>♠ 1957 <왕자와 쇼걸>♠ 1959 <뜨거운 것이 좋아>♠ 1960 <사랑합시다>♠ 1961 <미스핏>♠ 1962년 8월5일 사망먼로, 체 게바라, 그리고 파농의 시대 이렇듯 먼로와 나는 그다지 깊은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먼로는 다양한 텍스트 안에서 맥락이나 의미상으로 여러 형태로 연루되어 잔존한다. 우선, 먼로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콘의 주인공이며 그리고 먼로 못지않게 전설로 남아 있는 체 게바라 얘기부터 해보자. 게바라(1928∼67) 하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티셔츠나 그룹이 떠오르겠지만, 내게는 먼로와 동시대인으로 통한다. 체포된 게바라는 미 CIA요원이 재촉하는 가운데 사살되었는데 그의 죽음을 결정한 쪽은 먼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케네디의 후계자 존슨이 이끄는 행정부였다. 게바라보다 일찍 체포된 레지 드브레의 재판 결과가 미국과 볼리비아에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게바라는 즉각적으로 사살되었다. 이렇듯 당시 제3세계에서는 식민지 해방운동이 한창이었는데, 파농(1925∼61)은 워싱턴 근처의 병원에서 급성 백혈병에 겹친 폐렴으로 죽고 만다. 1950년대에 미국은 정치, 군사적인 강대국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나기 위해 미국의 원조에 기대야만 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1950년대의 한국은 버마보다도 못사는 나라였다. 작고한 사진가 임응식이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면서 1950년대에 찍은 사진을 보면 거지, 구직자, 전쟁고아, 영세 상인들이 대부분이다. 크리스 마커가 1950년대에 북한에 가서 찍은 사진들에 담긴 북한 사람의 차림새와 살림살이는 당시 남한에서도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제3세계와는 대조적으로 당시 미국은 전후 호황 덕에 중산층의 경제적 부가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고 반면에 냉전 체제하에서 1950년 무렵부터 불기 시작한 매카시즘 선풍이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잘 알다시피 레이건은 그 시기를 틈타 출세했다. 당시 중산층 부모세대의 도덕은 매우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그들의 자식들은 매우 불만이 있었으며 현저히 증가한 이들 10대의 소비를 바탕으로 로큰롤이 유행하기 시작해서 50년대 말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이 시기 끝무렵, 즉 먼로가 사망한 1962년을 배경으로 미국의 10대 얘기를 다룬 것이 조지 루카스의 <아메리칸 그래피티>다. ▶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1) ▶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2) ▶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1) ▶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2)

영화 사업가 허우샤오시엔 - 자신의 제작,배급사 운영중

대만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허우샤오시엔이 이번에는 직접 영화배급에 뛰어든다. <버라이어티>는 허우샤오시엔이 자신의 제작·배급사를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올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배급 활동에 힘을 실을 계획이라고 보도했다.<비정성시> <희몽인생> <남국재견> <상하이의 꽃> 등을 통해 대만영화계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거장의 반열에 오른 허우샤오시엔이 뒤늦게 영화배급업에 뛰어드는 것은 침체된 대만 영화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함이다. “관객에게 좀더 새로운 영화를 선보이는 것이 나의 목표다.” 제작이나 배급 차원에서 좀더 다양한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자는 것. 대만 관객이 여전히 특수효과로 치장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매혹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켓은 작고 실험적인 영화들을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데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자 하는 바람인 것이다. “대만에는 아트하우스 극장 문화가 없다”는 것이 허우샤오시엔의 아쉬움. 허우샤오시엔이 동료 영화인들과 함께 소극장 설립을 준비하면서, 전 미대사관 건물을 사들여 리노베이션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2년 전 설립된 허우샤오시엔의 제작·배급사 시노무비는 그간 신진 영화인 발굴 및 양성에 힘써왔으며, 주로 TV영화와 광고물을 제작해왔다. 지난해 허우샤오시엔 감독 작품 <밀레니엄 맘보>의 부분 제작과 배급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제작·배급 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최근 들어서는 외화 수입쪽에 힘을 쏟고 있는데, 올 가을엔 <고스포드 파크> <몬순 웨딩> 같은 외화를 개봉할 예정. 먼저 개봉하는 <고스포드 파크>는 목표 관객이 2만명이다. 시노무비는 매년 2편의 대만영화와 6편의 외화를 구매·배급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외화는 대부분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영화들을 소개한다고. 시노무비의 야심은 대만은 물론 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제작과 배급을 성사시키는 일이라고, 허우샤오시엔은 전한다.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