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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소년시대’ 이명우 감독, 꿈은 운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이루는 것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시대>는 안 맞고 사는 게 목표인 병태(임시완)가 어쩌다 부여농고의 짱이 된 좌충우돌 소년기를 다룬다. 1989년 충청남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그 시절의 입말을 생명력 있게 재현하면서 젊은 세대에는 레트로 베이스의 즐거움을, 병태 또래 세대에는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를 이끌어낸다. 우스꽝스러운 5:5 가르마를 장착한 배우 임시완이 능청스럽게 “그러면 다음에 키스 혀~” 하는 장면을 완성해낼 거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이 세계관의 싸움짱 흑거미 지영(이선빈)부터 병태의 거짓말을 아슬아슬하게 조여오는 진짜 아산백호 정경태(이시우), 어수룩한 10대 청소년들의 혈투기를 현실처럼 전환시킨 부여농고 학생들까지 개성 넘치는 모든 이가 <소년시대>의 DNA다. 드라마 <열혈사제> <편의점 샛별이> 등으로 유머의 완급 조절을 유려하게 펼쳐온 이명우 PD를 만났다. - <소년시대>는 처음부터 안전한 흥행을 담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출연배우 대부분이 신인이고, 대본을 쓴 작가도 <소년시대>가 첫 시리즈다. 유통 플랫폼 또한 공룡 OTT가 아닌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소년시대>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 간단하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느꼈던 감정을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이란 게 그렇지 않나. 살면서 고민과 갈등이 가장 많지만 친구도 가장 많은 시절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갈피조차 잡기 힘든 질풍노도 시기를 대중성 있게 그려보고 싶었다. 물론 고민도 컸다. 남성 시청자가 열광하면서 볼 거라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열혈사제>를 통해 어떤 코미디 코드가 그들에게 유효한지 학습한 덕이다. 그렇다면 시청자의 절반인 여성을 어떻게 아우를 수 있을까. 그게 주요한 맹점이었다. 그래서 남고생이 등장하지만 남자 이야기로 가면 안된다고, 여성 시청자들도 자신을 이입하거나 선망감을 느낄 만한 인물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소피 마르소 같지만 단단한 선화(강혜원)와 세계관 최강자 흑거미 지영이 탄생했다. 남자들의 성장담이라기보다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두려 했다. - 지영 캐릭터 설정이 눈에 띈다. 성장물에서 싸움을 잘하고 싶은 소년은 대개 재야의 고수를 찾아가거나 자신이 몰랐던 힘을 발휘하는데, 병태는 같은 집에 사는 흑거미 지영에게 재능 기부를 받는다. = 극 중에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지영이가 유명한 흑거미라는 걸 모든 사람이 아는데 엄마 아빠와 본인만 몰라. (웃음)” 거기서 아이러니를 주고 싶었다. 모든 사람이 지영을 싸움짱 흑거미라고 인식하는데 정작 자기는 모르는. 근데 이 친구는 단순히 싸움만 잘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 의협심 강하고 괴롭힘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싸울 줄 안다. 절대 불의를 못 참는다. 일부러 남자 캐릭터 중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러한 성향을 부여하지 않았다. 흑거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어도 그의 존재만으로 극 전체의 균형이 맞아떨어지는 이유다. - <소년시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짱이 되고 싶은 도토리의 이야기’인데. 콘텐츠로서 이런 이야기가 어떤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나. = 사실 <소년시대>가 10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소 폭력적이고 어른스럽다. <소년시대>는 그 시절,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이 갖고 있던 로망을 건드린다. ‘어디 가서 안 맞았으면 좋겠네’에서 ‘어깨 펴고 살고 싶다, 장악하고 싶다’는 욕망까지. 이건 단순히 힘의 논리가 아니라 리더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 가깝다. 그래서 비슷한 바람을 가져본 시청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병태를 응원하게 된다. 병태의 거짓말이 들키지 않길 바라며 조마조마해하기도 하고, 더 나은 행운이 찾아오길 바라기도 한다. 실제로 병태는 약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학생회장 후보로 꼽혔을 때도 “너희들이 괴롭힘 받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게 해줄” 거라는 공약을 내세운다. 이런 철학을 갖고 행동하는 리더들이 현실에도 필요하다. 하지만 <소년시대>가 궁극적으로 달려가야 하는 방향은 그쪽이 아니다. 운 좋게 얻은 힘으로 꿈을 이루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 힘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거기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것만이 진정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실질적인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 우직하고 차분한 역할 혹은 섬뜩한 악역을 맡아온 임시완에게서 어떻게 코미디의 가능성을 발견했나. = 제일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임시완 배우를 실제로 만나보면 엄청나게 진지하다. 무엇이든 논리적으로 스스로 납득해야 안심하고 움직이는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그가 지닌 진중함과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믿었다. 코믹 연기는 웃기는 순간 망한다. 다른 사람을 웃기기 위해 중요한 건 웃긴 행동이 아니라 그 본연의 캐릭터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시완 배우에게도 장병태로만 살아주면 된다고 얘기했다. 병태는 병태대로만 살아갈 뿐인데 상황이 자연스럽게 웃기게 흘러간다. 임시완 배우가 그 지점을 본능적으로 잘 낚아채줬다. - 많은 시청자의 호응과 관심을 받으며 5주가 짧고 굵게 흘러갔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면. = 여기저기서 <소년시대> 이야기가 들려올 때 얼떨떨했다. 이 작품은 캐스팅에 가장 큰 공을 들였다. 부여농고의 주요한 역할을 신인배우들이 안정적으로 연기해줬다. 낯선 배우가 나오면 시청자는 어색함을 느끼고, 연출자는 걱정이 앞서는데 그 모든 게 잘 정착됐다. 배우들이 이전에 했던 배역의 이미지가 남지 않은 상태에서 그 캐릭터로만 받아들여지길 바랐다. 마치 흰 도화지처럼. 그게 잘 적중한 것 같아서 기쁘다. 아쉬움을 꼽자면… 20부작을 할걸 그랬나? (웃음) 현재 시즌2나 스핀오프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흑거미의 이야기나 친구 관계 등 다양한 활로로 세계관이 확장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설계해놨다. 너무 늦지 않게 시청자들을 다시 만나면 좋겠다. 너무 오래 기다리면 화나니께! (웃음)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윷놀이

봄이가 독서 교실에 윷놀이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어린이들은 독서 교실에 놀거리를 잘 가지고 온다. 공깃돌부터 트럼프 카드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그런데 윷놀이는 정말 뜻밖이었다. 게다가 봄이가 가져온 윷은 척 봐도 아주 좋은 나무로 만든 ‘작품’이었다. 놀이 방법을 적은 책자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영어로만 쓰여 있었다. ‘백도’(표준어다)도 ‘BACK DO’라고 표시되어 있어 색다르게 느껴졌다. 봄이는 어머니가 회사 일로 어찌어찌 갖게 된 걸 자기한테 주셨다고 했다. 짐작하건대 외국인들에게 선물로 주는 고급 기념품인 것 같았다. “윷놀이는 전통 놀이야. 알고 있지?” 봄이는 “그걸 누가 몰라요?”라며 나에게 핀잔을 주더니 “근데 전 몰랐어요” 하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학교에서 배우긴 했는데 이해가 잘 안 가더라고 했다. 독서수업을 먼저 하고 시간이 되면 윷놀이를 하자고 했지만 봄이는 완강했다. “선생님이랑 하고 싶어서 일부러 가져온 건데, 그냥 먼저 하면 안돼요?” 많은 한국인이 알겠지만, 윷놀이는 결코 쉽게 끝낼 수 없는 게임이다. 일단 시작했다 하면 최소한 땡땡이다. 나중에 봄이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고하는 수밖에 없다. 방석을 모아 윷 던질 판을 만들었다. 봄이한테 윷의 점수를 읽는 법과 윷판에서 말을 움직이는 요령을 설명했다. 봄이는 규칙은 뒷전이고 윷을 던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나의 특기 중 한 가지는 어린이한테 ‘잘’ 져주는 것이다. 진지한 태도로 점수 차이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가끔 내가 앞지르기도 하다가 아깝게 져준다. 몇수 앞을 보아야 하고 연기도 잘해야 한다. 솔직히 나는 둘 다 잘한다. 특히 졌을 때 약 올라 하는 연기는 나 자신도 깜빡 넘어가서 ‘아, 괜히 져줬나’ 싶어질 정도다. 그런데 윷놀이만은 그럴 수가 없다. 연기는 둘째치고 윷 점수를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십수년 만에 윷을 던지는 순간에야 그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좋다. 오래간만에 승부다운 승부를 보겠군. 첫판은 내가 이겼다. 말을 잘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말 두개를 업어서 움직였는데 봄이는 그냥 하나씩 하겠다고 한 게 승패를 갈랐다. 한판 하면서 감을 잡았는지, 두 번째 판에서 봄이는 더 의욕을 보였다. 말을 야무지게 놓고 다음에 무엇이 나와야 좋은지 헤아렸다. 그러다 너무 힘껏 던지는 바람에 윷이 방석 밖으로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건 무효라고 했더니 봄이는 “진짜예요?” 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런 의심을 받을 바에는 그냥 지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윷은 눈치도 없이 자꾸 내 편을 들었다. 윷과 모가 연달아 나오더니, 심지어 거의 다 난 봄이 말을 내가 잡게 되었다. 봄이는 제발 지나가 달라고 애원했지만, 규칙은 규칙이라 그럴 수 없었다. 봄이는 내 말을 잡고서 “선생님 말도 제가 업어주면 안돼요?” 했는데. 이렇게 괴로운 게임을 해외에 내보내도 되는 걸까? 나는 세판을 내리 이겼다. 실망한 봄이한테 사탕 통을 건넸다. 색깔마다 다른 과일 맛이 나는데, 흰색 사탕은 무슨 맛인지 우리 둘 다 몰랐다. 똑같이 흰색 사탕을 입에 넣었다. 무슨 맛이지? 파인애플 맛인가? 봄이랑 마주 보고 사탕 맛을 생각하는 게 좋았다. 그래, 세상에 이기고 지는 것만 있는 건 아니지. 봄이는 어린이니까 승부 같은 건 벌써 잊었을 거야. 그때 봄이가 말했다. “제가 윷놀이 열심히 연습해서 다음에는 이길게요.” 그래요, 승부를 다시 시작합시다. 연말에는 사탕을 먹고, 새해에 다시 겨룹시다. 열심히 살면서 행운도 바라봅시다. 우리 모두 새해 복을 많이, 아주 많이 받읍시다.

[인터뷰] “작품으로만 인정받고자 하는 지브리의 철학을 존중한다”, 정동훈 대원미디어 대표

역사가 긴 항목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세대를 가르는 것이다. 아이폰 1세대(디지털 디바이스), 싸이월드 세대(SNS), 4세대 걸그룹 뉴진스(아이돌) 등등. 그중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대원미디어는 한국 관객으로부터 일명 ‘지브리 세대’를 이끌어냈다. 지브리 세대는 전 연령대의 생애 주기를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과 함께한 세대를 가리킨다. 다정한 <이웃집 토토로>와 함께 유년기를 보내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의 경쾌함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뒤, <마루 밑 아리에티> <코쿠리코 언덕에서> <추억의 마니> 등 잔잔한 감성 곡선과 함께 청년기를 보낸 세대. 대원미디어는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 수입을 통해 공통된 문화적 교집합으로 쉽게 뭉치는 관객을 가로질러 하나의 세대를 형성했다. 애니메이션 작품이 곧 그 세대이자 시대를 상징하는 풍경 앞엔 늘 대원미디어가 자리하고 있다. 정동훈 대원미디어 대표와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 스튜디오 지브리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누적 관객수 200만명을 돌파했다. 전례 없는 극장 침체기에도 수입사로서 해당 작품이 관객에게 선택받을 수 있던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나. = 올해 2월 직접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시사를 마쳤을 때, 대원미디어 직원 사이에서도 반응이 살짝 나뉘었다. 전쟁 관련 배경이나 물음표를 남기는 아리송한 장면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큰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이 컸다. 이들은 아름다운 작화와 연출기법, 개성 있는 테마와 메시지까지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고유한 자산을 쌓아왔고, 관객들도 그것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수입하기 위해 정동훈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전해들었다. 대표 자리에서 실무 과정을 직접 확인하고 싶을 만큼 작품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컸던 걸까. = 내가 일본에서 직접 시사를 마친 직원 중 한명이었고, 작품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잘하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 하지만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던 건 나보다 현장에 앞선 영화사업팀과 마케팅 커뮤니케이션팀, 유관부서의 구성원 덕분이다. 다만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들이 프레임에 갇히지 않도록 더 큰 그림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쉬운 과정은 아니다. 의지와 다른 난관도 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제공하는 소스가 한정적이라 마케팅 자료로 클립을 만들거나 콘텐츠를 선보이기가 어려웠다. - 방금 이야기한 어려움처럼, 스튜디오 지브리는 판권 활용에 상당히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스튜디오 지브리와 함께하면서 익힌 지브리 맞춤형 전략이나 대처가 따로 있나. = 보통은 마케팅을 위한 자료를 수급해주는데 이번 작품은 오로지 작품으로만 시장과 관객의 판단을 받고 싶어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삶을 관통하면서 자신이 주요하게 생각한 질문을 담은 작품이라 더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싶어 한 듯하다. 어떤 면에선 공감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다양한 해석이 중요한 작품인데, 마케팅적으로 관전 포인트를 짚어내는 순간 관객들은 하나의 코스로만 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스튜디오 지브리와의 소통 과정에서 큰 노하우는 따로 없다. 너무 상투적인 답일까. (웃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스튜디오 지브리의 정책과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작품으로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지점들,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성장에 더 집중하는 면들을 대원미디어가 적극적으로 존중하고 있다. - 일본 애니메이션을 발굴하고 수입할 때 국내 관객에게 공개되기까지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사이에 트렌드나 관객의 관심사가 변할 수도 있는 데 이런 격차는 어떻게 좁히려 하나. = 보편적인 프로세스를 보면 원작 만화가 먼저 나오고 애니메이션화 된 뒤에 극장판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원작 만화를 통해 원석을 먼저 찾아내는 경우가 있고, 또 대원미디어가 인연을 맺고 있는 관계자나 아티스트들과 직접 소통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인적 자원과 네트워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대원미디어의 자산이기도 하다. - 대원미디에서 진행한 <짱구는 못말려> 팝업 스토어는 연일 오픈 런을 갱신하며 흥행 사례를 기록했다. 만화 <짱구는 못말려>를 보고 자란 세대가 이제는 “풀매수!”를 외칠 만한 경제력을 지닌 주요 소비층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한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라이프타임 IP의 특징을 꼽아보자면. =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건 보편성과 참신성이다. 애초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부족하면 초기 마켓 형성부터 어렵다. 또 유연성을 갖고 관객의 변화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은 필연적으로 동시대성과 당시의 트렌드, 현안 과제를 품고 만들어진다. 이 말은 어느 작품이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부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관객의 가치관, 일상적 기술 등을 작품 안에 부지런히 녹여내는 게 중요하다. - 2023년에 대원미디어는 만화 <슬램덩크>,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등 원천 스토리의 힘을 관통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앞으로 어떤 시도와 계획을 준비하고 있나. = 콘텐츠의 트랜스 미디어적 확장을 고민하고 있다. 일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무직타이거는 웹툰화, 영상화 등으로 세계 시장 진출을 계획하고 있고, <아머드 사우르스>는 미국 MGA사와 세계관을 좀더 직관적이고 흥미롭게 가다듬어 완구 시장을 겨냥하고자 한다. 또 판타지 소설 <묵향> 1부의 웹툰화를 비롯해 오리지널 IP를 개발하고 지속적으로 비즈니스 포트폴리오를 확장해가고 싶다. 어린이들을 어른처럼 대하는 곳 -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으로 2001년 10월1일 개관한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거장 미야자기 하야오 감독이 직접 디자인해 만든 곳이다. 영혼이 편안해지는 곳. 흥미로운 것을 잔뜩 발견할 수 있는 곳. 명확하지만 일관된 철학이 담긴 곳. 미야자키 감독은 공간 설립 단계부터 스튜디오 지브리의 세계를 현실로 확장하기 위한 명확한 신념과 철학을 쥐고 있었다. 특히 여느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 그러하듯, 바람과 햇빛이 자유롭게 흐르는 온화한 분위기의 공간을 자아내고자 했다. 그만의 운영 방침도 눈에 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을 찾는 어린이들을 어른처럼 대하라는 방침을 두었다. 어린이를 어엿한 1인 방문객으로 존중하고 공감을 경험하는 방식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방문객을 정해진 코스대로 통제하지 않는 것도 미술관 안에서만큼은 자기만의 자율적인 모험이 이뤄지도록 돕는다. 미타카 지브리 미술관에 도착하면 방문객을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상당한 크기의 토토로다. 토토로가 비밀스럽게 가리키는 입구를 따라오면 지브리 캐릭터, 생기 넘치는 꽃과 식물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먼저 보인다. ‘영화가 탄생하는 곳’이라는 주제의 1층은 총 5개의 객실로 구성돼 있다. 불과 몇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은 작업실을 엿볼 수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고가 필요한지 가늠해볼 수 있는 공간 전시이기도 하다.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은 원칙적으로 실내 전역이 촬영 금지다. 이 금기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운 공간이 바로 옥상정원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 동상이 세워진 이곳은 미술관 방문을 사진·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은 이들이 붐비기 때문에 때에 따라 다소 긴 줄을 서야 한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단편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미술관 지하에 위치한 새턴극장은 약 80석 규모의 작은 극장으로 단편애니메이션을 상영한다. 2024년 1월에는 <애벌레 보로>가, 2월에는 <코로의 즐거운 나들이>가 상영될 예정이다.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은 일시 지정의 예약제로 진행되며, 매월 10일에 다음달 1개월분이 발매된다.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 ※ 티켓은 일시 지정 예약제,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ghibli-museum.jp/

[리뷰] 결국은 사랑을 말하는 온기 가득한 마침표, <사랑은 낙엽을 타고>

초월하는 단순함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머와 패러디를 더하는 것이 코미디의 사명이라면,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여기에 한때 금욕주의라고도 불렸던 일관된 미니멀리즘의 스타일을 더한 희귀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 관해 1차적으로는 배우의 연기, 카메라, 세트에 이르는 모든 것이 절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단순함이 삭막한 현실을 보다 극적으로 노출하면서 때로 비애감과 시적인 감흥까지 짙게 불러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니멀리즘은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극히 일부만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남는다.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 <르 아브르> <희망의 건너편>까지 감독의 2000년대 이후 영화들이 절망 위의 희망을 꾸준히 노래해온 것에 비하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외려 건조한 영화일 수 있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당황시킬 법한 국내 제목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시사하듯 그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은 멜로드라마적 낭만과 비애를 아낌없이 불러들이고 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자주 수식하는 또다른 말은 데드팬 코미디다. 감정을 거세해 차갑게 식은 코미디를 구사하는 것치고 그의 영화는 인간적 온기로 가득하다. 어쨌든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경우 그 제작 자체만을 놓고 보아도 데드팬 코미디임에 틀림없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1986년작 <천국의 그림자>, 1988년작 <아리엘>, 그리고 1989년작 <성냥공장 소녀>가 완성한 3부작의 ‘잃어버린’ 4편을, 그것도 은퇴 선언까지 번복해가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내놓은 것이다. 광산, 성냥공장, 쓰레기가 뒹구는 거리를 떠돌던 빈곤하고 내성적인 이들이 영혼의 연결고리를 찾아나섰던 앞선 작품에서, 카우리스마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일생이 인간 됨의 조건 중 일부를 영속적으로 상실하는 과정임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면서도, 그에 굴복하지 않는 놀라운 유쾌함과 서정으로 주의를 환기하곤 했다. 여전히 1980년대라고 해도 무리는 없어 보이나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가 상영되는 것으로 보아 근과거쯤으로 보이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시절도 비슷하다. 우리는 안사(알마 푀위스티)가 판매일이 지난 음식을 가져갔다가 해고당하고, 홀라파(유시 바타넨)가 안전 장비가 부실한 환경에서 부상을 입어도 보상받지 못하는 날들을 본다. 그것은 보드카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의 깊은 실의, 일련의 저임금 노동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40대 여성의 불운에 다름 아니다. 최소한의 움직임과 표정, 때로 정지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카메라와 침묵을 유도하는 리듬감으로 인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얻는 부수적이지만 확실한 효과는 다음과 같다. 어딘가 아둔해 보이는 관료 스타일의 식료품점 주인과 북유럽 곰처럼 생긴 경비원이 뚱한 얼굴로 안사 앞에 서 있다. 안사가 그들 앞에서 치욕적으로 가방의 소지품을 게워내야 할 때, 옆에는 지금껏 함께 일해온 두명의 동료가 곁을 지키고 서 있다. 안사가 몰래 넣은 샌드위치가 발견되자 급기야 동료 한명이 자신 또한 가게의 물건을 챙겼음을 당당히 고백한다.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사회파 리얼리즘 영화였대도 명백히 감동적인, 그러나 어딘가 교과서적으로 느껴지는 이 설정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는 경직된 얼굴의 능청스러운 대치, 어색한 대화의 공백, 희한한 위트로 점철된 말싸움으로 탈바꿈한다. 이내 기가 꺾인 관리자들을 버려두고 (비록 해고되었으나) 위풍당당한 중년의 여자들이 일터를 걸어나온다. 비극성은 그제야 각인된다. 간결함의 마술을 굳이 코미디의 효과로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로베르 브레송의 엇나간 후예로 간주해볼 때,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비롯한 그의 영화의 동화적 면모는 일상의 인과를 초월해 본질로 다가가기 위함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이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오늘날에 홀라파가 안사의 번호가 적힌 종이를 말 그대로 손에서 떨어트리는 바람에 잃어버리는 장면도 그 일환이다. 유사한 설정이 동시대의 영화 일반에서는 거의 유효하게 적용되기 힘들 것이란 합리적인 추측과 함께,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통용되는 초월적인 리얼리티는 동시대의 노동 환경과 디지털 중심주의에 대한 단순하고 힘 있는 묘파로 기능한다. 공간과 음악이 말하는 것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묵함을 닮은 영화지만 배경막에 존재하는 멜로디에까지 인색한 것은 아니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자주 그러했듯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공연 장면은 안사와 홀라파가 노래방에서 처음 눈을 마주치는 저녁처럼 만남의 가교가 되어주는 동시에 현실의 차가운 공기에 막간을 부여하는 일종의 영화적 콩트로서 자리 잡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치거나 엇갈리는 시선들이 선율과 맞물려 욕망과 희망, 우울과 고독의 결정들을 흘리는 효과는 놀라우리만치 미묘하다. 이 가운데 손꼽게 사랑스러운 순간은 안사를 위해 금주를 결심한 홀라파 앞에 나타난 핀란드의 여성 2인조 그룹 마우스테튀퇴트(Maustetytöt)의 열연, 핀란드국립오페라 소속의 베이스인 미카 니칸데르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장면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영화 엔딩 크레딧에 미카 니칸데르를 ‘노래방 가수’로 표기하는 짓궂음으로 응수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집과 술집, 노래방과 같이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실내극의 무대는 명도가 낮은 원색이 재치 있게 배합되어 그리 시리게만 보이지는 않는,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공허한 공간들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북유럽의 조립식 원룸 아파트 구조는 인테리어를 삶의 과제로 불러들일 기회가 없는 인생의 고독을 발설한다. 그보다 장식과 인파가 들어찬 술집조차 음악이 끊긴 뒤의 고요까지 걷어내지는 못한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실내는 그것이 심지어 이국적인 것으로 오해받아 때로 지나치게 스타일리시하게 보이는 순간에조차 한 꺼풀의 벽지를 벗기며 이면을 드러낸다. 안사가 누리는 찰나의 평화가 라디오에서 흐르는 전쟁 소식으로 중단될 때,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거실 식탁 위로 알코올중독에 관한 논쟁이 오갈 때 관객은 문득 푸르다 못해 시퍼렇게 놓인 창밖의 현실을 실감한다. 촬영감독 티모 살미넨은 곳곳에 푸른 조도를 부여해 어둑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균형이 거스르는 구도로 텅 빈 공간을 스크린에 남겨둠으로써 언제나 일말의 불안을 남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위협에도 불구하고, 펼쳐진 길 앞에서 안사와 홀라파는 사랑하기로 한다.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너를 만난 건 어느 추운 겨울 날, (원타임, 2000)

한동안 계절의 변화에 둔감했다. 나는 바람이 차가운 초겨울까지 반바지를 입고 외출했고, 걸으면 땀이 나는 늦은 봄에도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다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거나 에어컨 없이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여름옷’, ‘겨울옷’을 입었다. 그래서 내 방 옷장엔 언제나 사계절 옷이 함께 걸려 있었다. 엄마는 반팔 티셔츠와 롱패딩이 같은 행거에 걸린 것을 보고 화를 냈고, 동생은 나의 무신경함이 정신적 문제일 수 있다며 상담을 권유했다. “게을러서 그래, 미안해.” 나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곤 했다. 억울하다. 비록 옷차림 때문에 대충 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도 엄연히 나만의 계절 의식(Ritual)이 있다. 봄에는 두릅을 사서 먹는다.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고 튀겨서 간장에 찍어 먹었다. 올해는 전에 꽂혀서 두릅전에 도전해보았전. 여름에는 공포영화를 본다. 이번 여름엔 끌리는 영화가 없어서 강태진 작가의 공포 웹툰 <사변괴담>을 재밌게 봤다. 가을이 되면 시를 읽는다. 신간 시집을 사 읽고 ‘최애’ 시 한편을 선정한다. 이번 가을에 산 시집은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 그중에서 나의 심금을 울린 시의 제목은 <건강에 좋은 시>다. 겨울엔 모든 사람들이 의식을 치른다. 붕어빵 트럭을 찾거나, 전기요를 꺼내거나, 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그러나 나의 겨울은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겨울, 그 차가운 슬픔. 그것은 오직 원타임의 노래 를 들어야만 시작되는 것이다. 는 원타임의 2집 《2nd Round》에 수록된 곡이다. 수만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나의 영원한 캐럴이지만, 원타임 멤버들이 뒤를 돌아 소변기에 소변을 보는 듯한 해당 앨범의 재킷 사진은 겨울의 시작을 기념하는 이미지로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앨범의 재킷만 봐도 알 수 있듯이 90년대 후반, 수많은 보이 그룹 사이에서도 원타임은 조금 달랐다. 힙합이 지금만큼 주류 음악 장르로 분류되지 않았던 그 시대, 원타임은 무려 ‘보이 밴드 리그’에 힙합을 끌고 온 낯설고 수상한 불한당이었다. 그들은 눈웃음을 보이거나 날렵하게 디자인된 옷을 입지도 않았고 사랑을 약속하는 노래에 맞춰 귀여운 안무를 선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헐렁한 ‘이태원 교포 패션’을 하고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무대에 올라 불량하게 힙합 리듬을 타며 지껄이고, 들썩였다. ‘10대의 전사’도 ‘나만의 연인’도 아닌 네명의 ‘교포 날라리’는 스트리트 브랜드의 옷과 힙합에서 착안한 세련된 팝으로 ‘뭔가 다른 것’을 찾던 여자애들을 매료시키며 시장에 안착한 최초의 ‘힙합 아이돌’이 되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대다수의 보이 그룹이 힙합 음악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을 상기한다면, 당시 원타임에게서 느낀 차별화된 정체성은 시대를 앞선 잠재력이 아닐까. ‘겨울 K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오르골과 종소리, 전통 캐럴의 멜로디를 직접적으로 차용하는 K팝 캐럴. 그리고 곡 전체에 겨울의 쓸쓸하고 외로운 정서가 깔린 K팝 러브송. 후자에 속하는 원타임의 는 곡의 모든 부분이 시리고 아프다. 가느다란 기타 선율 위에 나지막이 깔리는 도입부 내레이션은 마치 한겨울의 입김 같고, “너를 처음 만난 건, 어느 추운 겨울날”로 시작되는 테디의 랩은 이 곡의 배경을 단도직입적으로 겨울에 한정시키며, 기억 속 ‘첫 만남의 순간’들을 극적으로 끌어낸다. 곡의 노랫말은 지금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담고 있으나, 지나치게 애절한 멜로디는 이 가사를 지난 사랑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들리게 만든다. ‘비록 세상이 그대를 힘들게 하더라도’라는 공감과, ‘여기 나 언제나 그대 것이라오’라는 위로와, ‘영원히 내가 너를 지켜줄게’라는 다짐까지. 김종서가 작곡했다는 곡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나는 이 모든 것이 이미 사라진 상대의 빈자리를 보며 반복하는 혼잣말임을 확신한다. 가사가 현재 시제로 쓰인 것은 사랑이 끝났음을 믿지 못한 이의 슬픈 착각이다. 이 곡에 나는 수많은 겨울을 묻어두었지만 그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2015년의 겨울이라고 단번에 말할 수 있다. 서울 고척동의 반지하 원룸은 해가 언제 지고, 언제 뜨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집이었다. 몸을 씻지도 않고, 외출하지도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하루 종일 누워 불면증에 시달리던 때 내가 살던 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700g 정도 되는 노란색 새끼고양이 세로를 처음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세로는 현관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시끄럽게 울어댔다. 주민센터에 민원을 넣을까? 집주인 할머니에게 전화를 할까? 동물과 함께 살아본 적 없는 나는 세로가 빨리 다른 곳으로 사라지길 바랐다. 그렇게 사흘이 지난 아침. 세로의 울음이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심 기뻤고 이제 잠을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더러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명치 끝이 아프더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세로를 찾아 이곳에서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주체 못할 감정이 가슴에 덜컥 들어앉았다. 세로를 씻기고 나도 씻었다. 세로를 먹이고 나도 먹었다. 세로를 돌보기 위해 다시 일을 했다. 세로를 만나서 나는 그렇게 구조되었다. 사람마다 취약한 계절이 있다면 나에겐 겨울이 그렇다. 오늘도 감상에 젖어 눈물겨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처럼. 겨울의 추위에 온몸은 위축되고, 언 상처의 통증은 더욱 깊어진다. 도시엔 화려한 전등이 가득하고 거리엔 포근한 캐럴이 흐르지만 외로운 사람에겐 그 빛과 선율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만의 어둠을 만들기 딱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지. 왜 안된다는 건지는 여전히 명확하게 답할 수 없지만, 겨울을 피해 우울함으로 숨어드는 것은 나에게 너무 많은 부작용을 만들었다. 그래서 감정의 월동 준비를 부지런히 한다. 겨울에만 그 맛을 알고 즐길 수 있는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다. 원타임의 , 샵의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빅뱅의 , 온앤오프의 , 뉴진스의 . K팝의 겨울 앤섬(ANTHEM) 계보에 나만의 사적인 겨울이 담긴 노래들을 하나둘 추가하며 두께를 만들자.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패딩 점퍼처럼.

[인터뷰] 맛있는 ‘혐관’의 절대공식, <시티보이_로그> 이지한 × 이재준

로맨스 내러티브의 절대 공식은 이른바 ‘혐관’이다. 가치관이 다른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서로 혐오하다 결국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만고불변 모두의 사랑을 받아왔다. 시럽(<시티보이_로그>의 구독자명) 사이에서 ‘2J’라 불리며 사랑받는 지한×재준 커플도 마찬가지다. 오해에서 시작한 첫 만남 이후 지한은 거듭 재준에게 치대지만 재준은 지한과 불편한 몇뼘의 거리를 둔다. 하지만 지한은 직진을 주저하지 않고 재준 인생의 모든 첫 경험을 짧은 오키나와 출장지에서 선사한다. 정과 반이 만나 이룬 합. 모두가 기대하는 공식의 정답처럼 이윽고 두 사람은 달콤한 연애에 돌입한다. - <시티보이_로그>에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요. 이재준 몇년 전 <믹스나인>이라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때 <시티보이_로그>의 제작사인 블루바이블루의 신성진 대표님을 알게 됐어요. 올해 초 우연찮게 대표님을 다시 만났을 때 <시티보이_로그>에 관한 이야길 들었고 늦여름 즈음 오디션을 보았죠. 오디션장에선 지금까지의 제 아이돌 인생 등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이지한 몇년 전 모델 활동 당시 한 행사장에서 신성진 대표님을 처음 뵈었어요. 그러다 지금 회사에 있는 제 프로필을 보시고 미팅을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재준 형처럼 저도 오디션장에서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요. - 작품엔 각 배우의 실제 커리어가 반영돼 있어요. 네분 모두 본명으로 작품에 등장하고요. 연기하기에 수월한 점도, 힘든 점도 있을 텐데요. 이재준 오디션 때 나눴던 저의 개인사와 성격을 캐릭터에 많이 녹여주셨어요. 그래서 편하게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죠. 그런데 본명을 사용하는 만큼 이 콘텐츠가 리얼하게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계속 있어요. 이지한 “너희의 자유도가 많을 거다”라는 제작진의 말을 사전에 듣고 오키나와에 가기 전부터 배우들끼리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각 캐릭터의 전사를 만들어갔어요. 넷이 처음 만난 날도 서너 시간 동안 각자 살아온 인생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 지한과 재준은 서로 상극으로 지내다 지한이 재준에게 인공호흡을 해주며 서로에게 시나브로 젖어들어요. 제작진의 전언을 들으니 오디션 때도 두 사람이 너무 달라서 재밌었다던데요? 서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연기할 때 중점을 둔 부분이 있나요. 이재준 재준인 저와 비슷한 점이 진짜 많아요. 아마 저희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지한이가 작품처럼 저에게 다가왔다면 실제의 저도 지한이를 약간 꺼렸을 거예요. 그런데 또 저는 살갑게 다가오는 친구들에게 호감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지한이가 리드하는 게 싫진 않았어요. 이지한 제가 서사상 오키나와에 남들보다 늦게 합류하잖아요. 이들에게 낯선 존재로 보이기 위해선 몰입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공항에서 형들에게 우리 잠깐 말을 놓지 말자고 제안했어요. (안)효상이와 원래 알고 지내던 설정이니 한동안 효상이랑만 대화했고요. - 혹시 서로의 첫인상이 기억나세요. 이재준 사실 처음엔 이 친구랑 도저히 친해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지컬도 좋고 모델 특유의 아우라도 풍기는데 자신감마저 넘치니 나랑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컸거든요. 이지한 저는 첫 오디션 자리에서부터 대놓고 “저는 ‘공’입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합격한 다른 세 배우를 보니 재준이 형이 가장 수비적으로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왠지 저희 둘이 잘 붙을 것 같았어요. 이재준 제가 아이돌 생활을 할 땐 나름 호탕하고 기도 센 편이었는데, 지한이에겐 안되겠더라고요. - 지한은 오키나와에서 재준을 두고 벽준과 묘한 신경전을 벌여요. 그러다 재준의 마음을 쟁취하죠. 배우 본인은 극 중에서 벽준보다 자신의 나은 점을 염두에 둔 채 자신감을 장착했는지 궁금해요. 이지한 제가 벽준 형보다 어리고 키가 크잖아요. (웃음) 평소의 저도 자존감이 높고 거기서 오는 자신감도 커요. 이런 마인드로 살았을 때 느꼈던 경험이 자연히 캐릭터에도 스며들었어요. 이재준 연기하며 지한이가 풍기는 자신감을 많이 느꼈어요.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니 속으로 ‘얘 되게 괜찮다’ 하는 생각이 확 드는 거 있죠. - 반면 재준은 지한과 벽준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요.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기분은 어떻던가요. 아이돌 스타로 살아온 경력이 길기 때문에 다수에게 사랑을 받는 메커니즘에 익숙하지 않을까 짐작도 해봤습니다. 이재준 팬들의 사랑은 언제나 존경스러워요. 나를 응원한다고 해서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늘 벅차요. 벽준 형과 지한이가 양쪽에서 저를 사랑해주는 경험은 새로웠어요. 나한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계속 어필하는 모습이 재밌었달까요. 극 중에선 제가 벽준 형의 마음을 모르지만 사실 티가 많이 나잖아요. 그래서 좀더 즐기면서 연기했어요. 제가 더 눈치 없는 척 연기해야 다들 더 안달나지 않을까 하면서요. (웃음) - 지한과 재준은 오디션장에서 연기를 핑계로 진실 게임을 벌입니다. 이지한 제가 거기서 토라진 재준에게 진실을 고하며 “그게 아니었어”라고 설득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 대사에 리액션을 하는 재준 형 연기가 너무 절절해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비하인드가 있는데요. 오키나와에서도, 오디션장에서도 키스 신을 찍을 때 테이크를 여러 번 갔어요. 앵글 안에 저희가 예쁘게 담겨야 하는데 둘 다 깊이 몰입하다 보니 키스할 때마다 자꾸 프레임 아웃이 되더라고요. 이재준 오디션 장면은 정말 슬펐어요. 내가 힘들게 마음을 열었던 첫사랑이 하루아침에 바람을 피웠다는 게 얼마나 허탈해요. 그래서 첫 테이크 때 제가 너무 울어서 감독님께 과하다는 피드백도 들었어요.

[인터뷰] 풋풋한 이끌림, <시티보이_로그> 안효상 × 서벽준

“그대 먼 곳만 보네요. (중략)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이 가사가 BGM으로 깔린 적은 없지만 <인형의 꿈>은 효상X벽준 커플의 주제가로 더없이 어울‘렸’다. 효상은 한없이 벽준만 바라봤고 벽준은 그 맘을 모르는 채 재준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줄곧 일방향만 각자 가리키던 효상과 벽준의 사랑의 작대기는 지난 12월24일 공개된 11화를 시작으로 교점을 지난다. 효상은 “이제 와 뭐가 달라지냐”며 쏘아붙이지만, 앞으로 이 둘의 관계엔 많은 것이 달라질 일만 남았다. - <시티보이_로그>의 오디션 날이 기억나세요. 서벽준 오디션 제의를 받고 대본이 오길 기다리다 당황했어요. 대본 없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오디션은 배우 인생 6년 중 처음이었거든요. 오디션장에선 인간적인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배우로서 요즘 컨디션은 어떤지, 그간 활동하며 지쳤던 점은 없는지…. 늘 고민하던 것들을 질문해주시니 오히려 편하게 넋두리하듯 오디션을 마칠 수 있었어요. 안효상 일을 마치고 한남동에서 전동 킥보드를 타러 가던 중 뒤에서 어떤 남자가 저를 불러 돌아봤어요. 그분이 제게 <시티보이_로그> 오디션을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네셨고요. 말하자면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거죠. 오디션에 갔더니 옆자리에 벽준 형이 있었어요. 일단 기세에 눌렸죠. 배우 오디션 경험 자체도 많이 없었는데 옆의 지원자는 경력이 화려했으니까요. 그래서 어쩐지 질문도 벽준 형한테 더 많이 가는 것 같고! 만약 연기를 선보였다면 떨어졌을 수도 있었는데 그간 살아온 삶을 물어봐주셔서 편하게 오디션을 봤어요. 벽준 형이 옆에서 저를 많이 리드해주기도 했고요. - 벽준은 재준과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는 설정이 초반 회차에 등장해요. 듣기론 촬영 전 배우들끼리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몇 시간씩 전사를 짰다던데요. 서벽준 몇년 전 <대풍감>이라는 독립영화를 찍은 적 있어요. 그때 감독님이 저를 포함한 세 배우에게 서로의 전사를 공유하길 바라셨어요. 서로의 이야기가 인지돼 있는 상황에서 연기하니 정말 편했어요. 그때의 경험에 착안해 <시티보이_로그>에도 적용했죠. 이 경험이 빛을 발한 게 8화였어요. 재준이와 홍대에서 한강까지 가던 차 속 대화가 대부분 애드리브였어요. - 한국에서 재회한 효상과 벽준의 데이트 장면이 정말 예쁘게 찍혔어요. 특히 경복궁 데이트 장면이 아름다운데요. 안효상 신기한게 벽준 형과 제가 야외 촬영을 하면 늘 바람이 불거나 날이 흐렸어요. 그날도 비가 왔어요. 지한, 재준 커플이 밖에서 찍는 날은 매번 날이 맑던데. (웃음) - 경복궁을 다녀온 둘은 코인노래방에 가죠. 두 배우 모두 노래를 정말 잘해서 놀랐습니다. 그 시퀀스는 어떻게 만들어갔나요. 서벽준 제작진이 제겐 짝사랑 테마의 노래를 선곡해 달라고 하셨고, 효상이에겐 개구지고 재밌는 노래를 골라 달라고 하셨어요. <안아줘>의 가사가 딱 제 상황과 맞아떨어졌어요. - 오디션 장면에서 네 남자는 서로의 마음을 알게 돼요. 지금껏 공개된 회차 중 가장 격정적인 감정이 오가는 장면이기도 하죠. 서벽준 시청자들이 작품의 극적 요소를 받아들이려면 배우의 연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어요. 배우 개인으로선 ‘오디션이 이래도 돼?’ 싶지만, 만에 하나 일어날 일이라면 재준이를 마음에 뒀던 나는 어떤 표정과 제스처가 나올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그 공간에 존재할지 계속 고민했어요. 그렇다고 과하게 연기하면 저희 다음에 연기해야 하는 재준이와 지한이의 시선을 뺏을 수도 있으니 어떤 감정들은 절제하기도 했고요. 안효상 저는 다 내려놓고 말하자는 심산이었어요. 제 진심이 안 나오면 카메라에 감정이 전부 담기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벽준 형을 싫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형은 여태 내 마음을 안 받아주니 밉잖아요? 이 신을 기점으로 나도 형을 향한 마음을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대사를 했죠. 그렇다고 형을 미워하기만 하면 진짜 마음이 다 떠난 것처럼 보이니까 ‘형도 한번 당해봐라’ 하는 마음도 속으로 품었고요. - 영종도 숙소의 온수풀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효상은 벽준을 거부하고, 벽준은 효상을 향한 마음을 뒤늦게 알아차려요. 온수풀까지 가기 위한 감정의 경로는 어떻게 쌓아갔나요. 서벽준 벽준이 한강에서 재준의 본심을 들은 후 마음을 정리하고 울잖아요. 그런데 연기자 입장에선 7년이나 짝사랑했던 친구를 마음에서 떠나보낸 후 바로 새 남자와 잘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게 시청자들에게 당위성을 제공할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감독님과 회의 끝에 효상에게 제 마음을 여는 장면을 최대한 뒤로 미루게 됐어요. 효상에 대한 마음을 눈치채고 효상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과정을 새로 만들었고요. - 안효상 배우는 이 작품이 데뷔작이에요. 파트너인 서벽준 배우가 많이 이끌어주던가요. 안효상 형이 정말 옆에서 편히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요. 그리고 형이 “내 연기가 100% 완벽한 게 아니기 때문에 네게 연기 지도를 해줄 수 없다. 그런데 조언은 해줄 수 있다”고 말해줘서 형과 연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 선배인 서벽준 배우가 보기에 신인배우 안효상의 미래는 어떤가요. 서벽준 구독자들의 댓글을 보면 ‘<시티보이_로그>를 통해 효상이를 알게 되어 좋다’는 반응이 정말 많아요. 그 자체가 이미 배우 안효상의 매력을 입증한 것 아닌가요? 제가 경력이 좀더 있다고 해도 우리 네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 있어요. 그때 중요한 건 서로가 편히 연기하는 것이잖아요. 모델 경력이 연기 경력보다 더 긴 (이)지한이도 자신의 연기가 맞을까 틀릴까 고민하는데 저는 맞고 틀린 게 없다고 믿어요. 맞다고 생각하는 연기가 정답이죠. 지금 효상이가 보여주는 연기도 정답이고요.

[특집] 2023년 한국영화 & 시리즈 현장 B컷 컬렉션 ②

<너와 나> 전체 촬영 중 두 번째 회차이자 세미(박혜수, 왼쪽)와 하은(김시은)이 만난 첫 촬영 장면이다. 안산 단원고 앞 원고잔공원에서 두 배우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던 날이었는데, 날씨가 정말이지 완벽했다. <너와 나>의 스틸 컷을 담당한 김홍 스크립터는 이날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기억한다. “공원이 조용하고 곳곳에 바람이 살랑거렸다. 바람에 따라 나무가 춤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장면을 찍을 때에도 세미와 하은이 현실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수룩한 자기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하은의 마음을 엿보는 세미와 그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른 척하는 하은이 대화를 나누는 신이다. 세미가 하은을 응시하기 위해 바라보던 거울도 현장에 있던 것을 그대로 활용했다. 제주 촬영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세미 집 촬영은 후반 회차에 몰아서 진행했다. 앵무새와 배우 박혜수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미리 두어번 만나 교감을 나누었다. 친밀감이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박혜수 배우가 새를 무서워하지 않고 따뜻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앵무새도 박혜수 배우의 머리 위나 어깨에 잘 올라가 놀았다.”(김홍 스크립터) 영화 속에서 앵무새 조이가 세미에게 볼을 부비며 다가온 건 온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세미가 조이를 따뜻하게 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홍 스크립터는 “영화 촬영장에 동물과 아이가 나오는 순간 모두가 긴장하지만 이 장면은 예상보다 편안하게 진행됐다. 조이도 철창 밖으로 꺼내놨을 때부터 얌전하게 횃대에 서 있었다”고 이날의 촬영기를 선명하게 떠올렸다. 똑똑한 조이 덕분에 촬영은 원활하고 화기애애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거미집> 촬영장에 막 들어선 <거미집> 배우들을 김 감독(송강호)이 반갑게 맞이하는 장면. 영화 속 영화처럼 이어진 이 장면은 실제 영화 스탭들과 김 감독의 스탭이 한곳에 아웅다웅 뒤섞였다. 한창 <거미집>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데 카메라는 김 감독을 비추며 그의 표정과 감정 변화를 포착한다. <거미집>의 여정을 함께한 조원진 스틸 작가는 현장 분위기를 시종일관 밝게 비춘 송강호의 에너지를 기억한다. “송강호 배우는 리허설마다 재미있는 대사를 즉흥적으로 펼치며 현장 분위기를 밝혔다. 길게 진행되는 촬영에 지칠 만도 한데 다양한 장면을 유연하게 상상하는 힘이 대단하다. 테이크마다 자신만의 박자와 리듬을 선보이며 현장을 장악하는 배우다.” <30일> 이혼 30일 전, 동반기억상실에 걸린 <30일>의 ‘똘기 넘치는 커플’. 정열(강하늘, 왼쪽)과 나라(정소민)의 야외 결혼식 장면이다. 겨울에 찍었는데 촬영날 갑자기 추워져 드레스 차림의 정소민 배우가 특히 고생을 많이 했다. 정열과 나라는 내내 티격태격하며 다툼을 멈추지 않았지만 강하늘, 정소민 배우는 화기애애하게 작업에 임했다. 이병헌 감독의 <스물> 이후 8년 만에 커플로 다시 만난 두 배우는 환상의 호흡으로 현장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었다고. 송경섭 스틸 작가는 “현장에서 두 배우가 셀카를 정말 많이 찍더라. 얼마나 친한지를 알 수 있었다”라며 “배우들의 케미스트리는 화면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좋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1947 보스톤> 광복 직후 척박한 정세 속에서 마라톤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미국을 찾은 손기정(하정우, 오른쪽)과 서윤복(임시완). 존 켈리의 초청을 받아 방문한 사무국에서 서윤복을 막 소개하려는 손기정의 모습이 눈에 띈다. 이 장면의 리허설 장면을 촬영한 조원진 스틸 작가는 “영화상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만큼 두 인물이 무척 상기돼” 있다며 당시 분위기를 회상했다. 해당 장면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촬영되었는데, 미국의 사무국 느낌을 내기 위해 벽지부터 소품까지 미술품 하나하나에 섬세한 손길이 담겨 있다. <소년시대> 어쩌다 부여 짱이 된 병태(임시완, 오른쪽)가 지역 얼짱 선화(강혜원)와 처음으로 정식 데이트를 하게 된 장면. 4화에서 병태와 선화가 손을 잡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롤러장 촬영 현장이다. 데이트가 끝나고 헤어지는 길에 입맞출 타이밍을 놓친 병태가 어정쩡한 자세로 “기회? 키스 기회? 그려! 그러믄 다음에 키스혀!” 하는 장면은 화제의 클립 영상으로 오르며 <소년시대>를 알리는 데 박차를 가했다. 임시완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 베스트 모먼트. <닥터 차정숙> <닥터 차정숙>의 3인방이 엘리베이터 안에 모였다. 정숙(엄정화, 가운데)이 못마땅한 표정인 건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남편 인호(김병철, 왼쪽) 때문. 인호에게는 정숙이 이젠 주부 말고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고 밝혔을 때 혼자 잘해보라며 딱 잘라 말했을 뿐 아니라 출근길에 태워달라는데도 나 몰라라 한 죄가 있다. 인호의 표정도 밝지만은 않다. 함께 탄 가죽 재킷 차림의 동료 의사 로이킴(민우혁, 오른쪽) 때문이다. 정숙에게 간이식 수술을 해준 그가 정숙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이 내내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세 남녀의 애정 전선은 머지않아 인호의 오랜 불륜이 발각되면서 더욱 복잡해진다.

[특집] 2023년 한국영화 & 시리즈 현장 B컷 컬렉션 ③

<방과 후 전쟁활동> 고3 학생들이 입시 전쟁이 아닌 괴생물체와 진짜 전쟁을 치르는 이야기를 담은 <방과 후 전쟁활동>은 20명 넘은 젊은 신인배우들이 참여했다. 그래서인지 서지형 스틸 작가는 성용일 감독과 배우들의 모습이 담임선생과 반 아이들처럼 보였다고. 사진은 리허설 뒤 가진 모니터 타임. “신인들이 많아 감독이 배우들에게 전체적으로 아니면 개별적으로 구체적인 디렉션을 준 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곤 했다. 배우들도 감독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어찌나 귀를 쫑긋하던지. (웃음) 종일 뒹굴고 뛰느라 지칠 법도 한데 모두가 열정적이었다”며 집중도 높았던 현장 분위기를 설명했다. <박하경 여행기> <박하경 여행기> 6화 ‘비 오는 서울’ 편. 혼자 ‘걷고 먹고 멍때리’고자 서울 국립기상박물관을 찾은 국어 교사 하경(이나영, 오른쪽)이 탐방 온 같은 학교 미술 선생(조현철)과 학생들을 마주치지 않으려 숨는 장면이다. 이 신뿐만 아니라 해남, 군산, 제주 등을 돌며 찍었던 모든 신이 편안하게 진행됐다는 게 전혜선 스틸 작가의 소회다. “<아는 여자> 이후 오랜만에 만난 나영씨는 여전히 털털했고 상업 현장 경험이 많지 않은 듯한 스탭들은 순박하게 열심히 일했다. <박하경 여행기> 같은 사람들이 모여 <박하경 여행기>와 같은 현장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달짝지근해: 7510> 제과연구원인 치호(유해진, 가운데)의 연구소 촬영 장면. 실제 괴산에 위치한 제과제품 공장의 연구소에서 진행됐다. 유해진 배우를 중심에 두고 각 카메라가 어떤 방향으로 얼마큼의 깊이만큼 들어올 것인지 파악하는 중이다. 오른손을 들어올려 사이드 캠에 노출 정도를 확인하는 유해진 배우. 실제로 그는 촬영 분량이 없는 날에도 현장에 출석하는 책임과 열정을 보였다. 조원진 스틸 작가는 “오랜만에 영화로 복귀하는 김희선 배우를 위해 첫 촬영날 자신의 스케줄이 없는데도 유해진 배우가 일부러 현장에 찾아왔”다며 화기애애한 현장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그의 면모를 상기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콘크리트 유토피아> 촬영장은 한기가 아니라 열기로 가득했다. 겨울 배경의 영화를 찍던 때는 35도를 거뜬히 찍던 2021년 한여름, 거기다 잿빛의 디스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해 큰 세트장 위를 천막으로 다 덮어버려 내부는 바람 하나 통하지 않는 찜통과 같았다. 노주한 스틸 작가는 파카를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리는 배우들을 보면서 자신은 반팔, 반바지 차림이라 미안함을 느꼈다고. 사진은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이 황궁 아파트를 쳐들어온 외부인이 던진 부탄가스 폭탄을 주워 다시 던지는 장면을 찍던 순간. “이런 일촉즉발의 신마저 어려움 없이 침착하게 진행됐다”고 전한 노주한 스틸 작가는 “연천 세트장 한곳에서만 거의 촬영이 진행된 터라 근처 리조트를 잡아 몇 개월을 함께 생활하다 보니 모두가 친해졌다”며 팀워크의 비결을 전했다. <잠> 자다 일어난 수진(정유미)이 냉장고 앞에서 음식을 마구 생식하는 현수(이선균)를 보고 놀라는 장면. 평택에 위치한 세트장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조원진 스틸 작가는 신인으로 이름을 막 알리기 시작한 유재선 감독의 부드러운 힘을 기억한다. “<잠>은 유재선 감독의 젠틀하고 섬세한 면모가 두드러졌다. 리허설 과정에서 장면의 어떤 특징을 내세울지 배우들과 꼼꼼하게 조율해나갔다.” 이날은 평범한 신혼부부에게 일어나는 기괴하고 기묘한 상황 속에서 수진의 놀라는 정도를 얼마만큼 표현할지 논의했다. 조원진 작가는 짧은 시간 강한 집중력을 내보이는 정유미의 몰입력을 회고했다. “정유미 배우는 평소엔 장난도 많이 치고 해맑다. 그런데 슛 들어가는 순간 눈빛이 변한다. 해산물을 맨손으로 만져야 하는 장면을 찍을 때 리허설 때만 해도 무섭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촬영에 들어가자 덥석덥석 쥐던 모습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귀공자> 자신을 포박한 이들의 정체를 안 귀공자(김선호)가 반격의 액션을 보여주는 장면을 찍기 전 김선호 배우가 대기하고 있다. 대부분의 촬영이 제주에서 진행됐던 <귀공자>의 이날 촬영도 제주의 어느 폐창고에서 이뤄졌다. 김선호 배우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노주한 스틸 작가의 기억 속의 그는 “성실한 배우”로 각인돼 있다. “사진에서처럼 스탭들이 조명이나 카메라앵글을 맞출 땐 배우가 굳이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 보통 연출부나 다른 스탭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데 김선호 배우는 직접 자리해 스탭들이 더 정확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돕더라. 그러면서 본인도 자기 연기를 준비하는 데 그런 모습이 참 좋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범죄도시3> 모텔 방에서 마석도 형사(마동석, 왼쪽)가 김양호(전석호)를 취조하는 상황. 이 사진을 보고 다음 장면이 생각나 웃음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천만 관객을 웃긴 장면, 어두우니 불 좀 켜보라는 마석도의 주문에 불을 켜자 야릇한 음악이 흐르면서 그가 앉은 침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신 말이다. 차민정 스틸 작가에 따르면 ‘빙글빙글 신’을 찍을 당시 전 스탭들이 빵 터졌다고. “마동석, 전석호 배우, 불을 켠 김만재 형사 역의 김민재 배우까지. 세 배우의 합이 워낙 잘 맞아 보는 재미가 컸다. 모두 유쾌하고 재밌는 분들이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업되곤 했다.” 차민정 스틸 작가가 “특별한 이슈 없이 대체로 수월했다”고 기억하는 <범죄도시3> 촬영 현장은 테이크를 많이 안 가는 것이 특징인 현장이었다. 마동석 배우가 신 하나를 가지고 몇 시간씩 회의할 정도로 시나리오 및 콘티 작업을 꼼꼼히 하는 편이라 실제 촬영은 준비한 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획] '꿈, 희망, 그리고 디즈니라는 레거시',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창립 100주년 기념작 <위시> 리뷰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 2024년 새해 첫주에 국내 극장가를 찾는다. 스튜디오의 62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인 <위시>다. 100년 동안 60편이 넘는 작품을 창조해냈다는 건 단순히 숫자로만 따져도 대단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겠지만, 개별 작품들의 면면을 찬찬히 떠올리다 보면, 그 긴 세월 동안 디즈니가 전세계에 퍼뜨렸을 계산 불가능한 영향력이 느껴져 아득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위시>는 그 영향력,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디즈니의 정신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가히 ‘지적재산권(IP)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오랫동안 다양한 결과물을 선사했던 디즈니지만, 그 모든 세계들이 온 세상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하나다. 꿈꾸는 것을 절대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위시>는 위대한 마법사 매그니피코 왕(크리스 파인)이 세운 로사스 왕국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매그니피코는 불행한 유년 시절을 겪었던 인물이다. 불의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바꾸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마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며 왕국의 번영을 일궈낸다. 그의 대표적인 선행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소원 성취식’에서 그는 임의의 방식으로 대상자를 선정한 다음,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모습을 만백성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주곤 한다. 어떤 마법도 전부 시전이 가능한 그에게 이는 무척이나 쉬운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심을 보낸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팔 한번 휘저어서 평생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과 같은 리더에게 그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는다. 저기 무대 위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행운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다음에 열릴 소원 성취식에선 나의 이름이 불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사람들은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중 처음으로 이러한 세상에 의문을 품은 한 소녀가 있으니, 바로 <위시>의 주인공인 아샤(아리아나 더보즈)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아샤는 현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두개의 이벤트를 앞둔 상태다. 하나는 매그니피코 왕의 직속 마법 견습생이 될 수 있는 최종 면접이고, 두 번째는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100번째 생일이다. 12살에 아버지를 잃은 아샤이기에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다. 아샤가 이번 생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아직까지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이젠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뤄질 차례라는 말을 하지만, 아샤는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한다. 걱정을 멈출 수 없던 아샤는 결국 왕과의 면접 자리에서 섣부르게 사적인 바람을 드러내고야 만다. 왕은 그런 아샤를 나무라기보다는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연설하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다. 요점은 왕이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을 통해 왕국에 도움이 되는 소문만을 선별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더 심각한 건 소원에 대한 판단이 끝났음에도 이를 주인들에게 영원히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에게 소원을 맡긴 사람들은 말 그대로 ‘꿈이 없는 상태’로 여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데, 아샤는 그런 왕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밤 아샤는 답답한 마음을 반짝이는 별에게 털어놓는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사람들이 다시 자신들의 꿈을 스스로 꿀 수 있게 만들어달라는 소원을 빌어본다. 그러자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별의 형상을 한 요정이 아샤의 눈앞에 나타난다. 그렇게 아샤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별과 함께 왕이 가둬놓은 사람들의 소원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위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실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자한 줄 알았던 권력자가 사실은 악인이었으며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주인공이 결국 모두를 구해낸다는 서사는, 디즈니뿐 아니라 수많은 창작자들의 입에서 무수히 반복/변주돼왔었다. 하지만 아샤의 이야기에 자꾸만 귀 기울이게 되는 건, 아니 디즈니가 무려 100년 동안 굳건히 ‘디즈니’였던 건, 그 뻔한 서사에 올라타 있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 그리고 그들이 속해 있는 세계가 그 어떤 스토리텔러의 창조물보다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위시>는 그러한 자신의 장단점을 에두르지 않고 한껏 끌어올린 작품이다. 스토리는 클래식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예스러우나, 창조물들은 오랜 세월 자신의 자리에서 숨을 쉬고 있었던 것처럼 활기가 넘친다. 지난 세기의 업적을 기리려는 너무나도 상징적인 이 작품에서 디즈니가 이런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디즈니는 자신들이 무슨 이유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위시>는 분명 향후 디즈니가 선보일 작품들의 비전을 제시하는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작품이 보여준 디즈니의 씩씩한 자기 객관화는 앞으로 이어질 그들의 다음 100년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위시>는 스튜디오의 역사적 맥락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도 충분한 고유의 매력을 지녔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3D애니메이션에 수채화 느낌이 나는 2D애니메이션을 결합한 그림 스타일이다.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아 보이는 것과 동시에, 과거 디즈니 작품들에 대한 향수까지 채워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래미 어워즈에 여러 차례 후보 지명됐던 아티스트 줄리아 마이클스가 작곡한 사운드트랙 역시 두고두고 회자될 만하다. 특히 2022년 뮤지컬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통해 94회 미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던 아리아나 더보즈의 노래는, 극에 등장할 때마다 여지없이 압도적인 감동을 선사하는 데 성공한다. 본편에 삽입되진 않지만 우리나라에선 그룹 아이브의 보컬 안유진이 주제가 를 불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러나 막이 내린 뒤 우리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을 것은, 단연 <위시>에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일 것이다. 일곱 난쟁이를 떠올리게 하는 아샤의 7명의 친구들, 등장하는 매 순간 미소 짓게 하는 염소 발렌티노를 비롯한 다양한 동식물 캐릭터들, 그리고 소원 그 자체를 상징하는 별의 정령까지. 우리의 마음속엔 그렇게 또 하나의 상상력의 씨앗이 심어진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마음속에 자신의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가게 해주세요, 라고 별에게 진심 어린 소원을 빌었던 아샤의 꿈은, 10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