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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s’ Talk]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새로운 영화적 경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이제훈 배우를 만나다 ②

“확신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없었습니다” 이제훈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가후쿠의 이야기가 있고, 또 오토와 가후쿠가 만드는 ‘칠성장어’ 이야기와 가후쿠가 하고 있는 연극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담겨 있습니다. 글을 쓸 때 이야기의 레이어들이 잘 융화될 수 있을까, 라는 확신이 있으셨나요. 어려운 작업이겠지만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여러 해석으로 이어져 놀라웠거든요. 하마구치 류스케 확신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없었습니다. (웃음) 이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원작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쓴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단편소설집이 원작인데, 거기에 가장 먼저 실린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만 읽고 상당히 재밌어서 언젠가 영화화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자 없는 남자들>은 단편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다르지만 공통 테마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주인공들의 감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 속 요소를 잘 융합할 수 있다면 단편 <드라이브 마이카>만으론 말할 수 없는 주인공의 감정 해방, 혹은 회복까지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다만 인용되는 연극 <바냐 아저씨>와 어떻게 엮을지 전혀 모르겠기에 영화화를 목표로 몇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가후쿠와 미사키의 관계가 바냐와 소냐의 대응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지금으로선 그 역시 무라카미 작가가 미리 마련한 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쓴 것을 풀어낸 결과 같아서 그렇게까지 제가 썼다는 느낌은 안 듭니다. 원작 각색은 배우가 시나리오를 보고 분석하는 것과 꽤 비슷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배우가 시나리오에 이끌려서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행동한다든지, 여기에 이런 감정이 담겨 있구나 발견할 때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가요. 이제훈 시나리오를 보고 연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준비하죠. 대사를 외우고,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일까 고민하는데 현장에서 감독의 이야기, 환경, 그리고 상대 배우의 액션과 리액션에 따라 제가 준비한 것들이 많이 바뀌는 것 같아요.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액션을 주는가. 그 영향으로 준비한 것이 크게 표현이 될 수 있고 아예 표현되지 않을 수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상황에 맞춰 연기하는 배우인 것 같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경우, 배우들의 대사량이 엄청나게 많고 그걸 해내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여러 테이크를 갈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감독님의 배우 연출 스타일이 궁금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대전제입니다만 시나리오 읽기를 합니다. 신에 나오는 배우 전원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서 시나리오를 몇번이고 읽습니다. 감정 없이 억양 없이. 그렇게 몇십번 읽는 게 일종의 소통이 돼요. 역할에 관해 토론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배우들에게서 언뜻 새어나오는, 말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를 바꿔나가면서 본 촬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어느 장면이든 10번 이상 촬영합니다. 이렇게 해석 없이 시나리오를 배우 몸에 넣은 상태에서 현장에 가면 배우들이 상대 배우와의 관계에 따라 시나리오가 어떤 의미였는지 직접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라는 건 기본적으로 굉장히 다의적이고 읽는 방법도 여러 가지죠. 그래서 몇번이고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시나리오만으론 할 수 없는 풍부함을 배우가 알아차리고 연기하기 때문에 10번, 20번을 촬영해도 배우의 연기가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배우가 여러 가지를 발견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저도 즐거워요. 이제훈 아, 저도 감독님의 연출 세계에 함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네요. (웃음) 하마구치 류스케 연기의 어려움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영화 <박열>의 마지막 재판정 신에서 제훈씨가 길게 연설할 때 한숏은 박열(이제훈)이 판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프레임으로 찍었지만 다른 숏에서는 판사를 등지고 돌아서서 청중을 향해 발언합니다. 최소 두번 이상 연기를 해야 했고 상당히 텐션이 높은 장면이라 감정을 이어가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힘들지는 않았나요? 그 장면을 위해 준비한 게 있었다면 듣고 싶습니다. 이제훈 그 장면은 감독님이 말씀하신 연기 연출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고 대부분의 대사가 일본어인 장면이 많아 대사를 숙지하는 과정이 엄청 길었어요. 수십번, 수백번을 읽고 들었습니다. 처음엔 감정 없이 대사를 체득해야겠다는 목표가 일차적이었어요. 그다음 상대 배우와 청중 앞에서 감정을 실어서 연기할 땐 일본어 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기 쉽지 않아도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표현했어요. 굉장히 어려웠고 다시 하라면 절대로 못하겠지만(웃음) 배우가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마 감독님의 배우 연출법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볼 때는 일본어를 못할 거라 생각지 못해서 그렇게까지 힘든 작업이었을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준비했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드셨을 것 같네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연기였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새로운 영화적 경험 이제훈 가후쿠는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아내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이런 결과를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서 그의 아픔이 안타까웠는데요. 동시에 가후쿠는 히로시마에서 연극 <바냐 아저씨>를 준비하면서 다국적 배우들을 만납니다. 일본 배우뿐 아니라 한국, 중국 배우와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언어로 대화하는 오디션 장면과 유나(박유림)가 수화로 연기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내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을 받았거든요. 그 찰나의 순간 제가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경험을 하니까 놀라웠어요. 어떻게 ‘다언어 연극’을 구성하셨는지 궁금했어요. 하마구치 류스케 원래 다른 작품에서 다언어 연극을 쓰려고 했습니다. 가후쿠가 어떤 연극을 할지 고민하다가 제가 가진 아이디어를 가져왔죠. 다언어 연극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평소 흥미가 있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영화제에 가거나 해외에 가서 말이 통하지 않지만 소통해야 할 때가 부쩍 늘었거든요. 그렇게 되니 뭐랄까요. 모국어인 일본어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통쾌하게 소통할 수 있단 느낌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지금 제훈씨가 한국어로 말할 때 뜻을 전혀 모르지만 무언가가 전달됩니다. ‘설마 욕을 하고 있진 않겠지?’(웃음) 그리고 제훈씨가 손을 움직이면 손이 예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감각이 재밌지 않나요?’라는 게 영화 속 다언어 연극이었습니다. 이제훈 바냐 역을 맡은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인가요? 그 친구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가후쿠가 바냐 역을 맡아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가후쿠는 아내가 오버랩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 바냐 역을 피해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연극을 위해, 고생한 단원들을 위해 바냐 역을 맡으면서 과거와 마주하는 것 같아요. 하마구치 류스케 지금 제훈씨가 말씀한 대로 받아들여질지 말지는 배우에게 달린 것 같아요. 니시지마는 전체적으로 억제된 느낌으로 연기했고 홋카이도에서 그 감정을 한번에 내보낸 뒤에야 바냐를 연기합니다. 니시지마가 가후쿠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바냐로서 관객에게 비쳐지는데, 바냐가 아닌 가후쿠로 느낄 수 있게끔 만드는 건 온전히 배우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감정을 정의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연기해 달라고 부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배우가 표현하는 감정은 전부 배우 자신으로부터, 또는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나오니까요. 배우가 처음으로 시나리오의 의미에 대해 깨달은 것 같은 장면이 탄생하면 매번 놀라죠. 그 표현을 통해서 제가 놀랄 수 있다면 ‘오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미사키가 한국에 와 있습니다. 미사키가 한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 차를 타는데 유나와 남편이 키우는 강아지가 함께 있고요. 그러면서 미사키가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이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가 궁금했어요. 그러고 보니 가후쿠와 오토 사이에는 아픔이 있었잖아요. 잃어버린 딸을 늘 기억해 두 사람은 매년 기일에 절에 가 딸을 기리고. 그런데 앞서 등장한 전생에 관한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와 미사키가 연결되면서 죽은 딸이 미사키로 환생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이야기가 희망차게 끝난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그 시작하는 기분을 왜 한국을 무대로 표현했을까 궁금했어요. 하마구치 류스케 일단 그런 방식으로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장면을 이해하기 어렵다고들 하실 줄 몰랐어요. 지금 말씀한 것처럼 심플하게 희망이 느껴지는 엔딩입니다. 미사키는 가후쿠가 타던 차에 타고, 거기에 강아지가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하며 영화를 찍었습니다. 윤수(진대연)와 유나의 강아지라고 말씀들 하시는데 사실은 다른 강아지입니다. 제훈씨 말처럼 관객에게 희망이나 해방감, 새로운 무언가 앞으로도 계속되어간다는 메시지가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장면을 한국에서 찍은 이유를 말씀드리면, 원래 미사키가 고향인 홋카이도로 돌아가는 시나리오가 있었어요. 하지만 같은 장소로 돌아가면 재미없을 것 같아 전혀 다른 곳을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처음 기획할 당시 가후쿠와 미사키가 만나는 히로시마 장면을 부산에서 찍으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준비한 기억도 있고요. 그래서 엔딩을 한국에서 찍으면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표현이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제훈 직접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님의 얼굴을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 시간이 아직도 믿기지 않고 정말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한국에 많이 오셨으면 좋겠고 계속 좋은 작품 많이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를 깊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제훈씨의 질문을 통해서 느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개봉했던 제훈씨의 영화 <건축학개론>과 <박열>을 보고 오늘 대담에 임했는데요. <건축학개론>에서는 지금 말씀을 나눈 것처럼 섬세한 청년이란 느낌을, <박열>에서는 난폭함과 상냥함을 겸비한, 일본말로 표현하면 ‘호방뇌락’한 느낌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두 역할을 같은 사람이 연기했다는 게 믿을 수 없다는 느낌으로 제훈씨를 바라봤습니다. 정말이지 박열과는 다른 느낌이네요. 배우로서 제훈씨를 만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음에도 작품에서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이제훈 저는 오늘 성공한 ‘덕후’입니다. (일본어로) 혼토니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하마구치 류스케 (한국어로) 진짜 감사합니다!

[리뷰] ‘길위에 김대중’, 쉽게 굽히지 않고 쉽게 미끄러지지 않고 오직 전진

영화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다시 들여다보기 위해 역사가 비추지 않았던 조각을 찾는 데 집중한다. 사상 최초로 공개되는 미공개 영상과 시각 자료, 김대중 전 대통령 주변인의 목격담과 증언은 그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공들인 시간을 증명한다. 작은 배 한척으로 시작한 해운회사로 목포의 유망한 청년 사업가가 된 김대중은 사업 규모를 빠르게 전국 단위로 키워나갔다. 경제 순환의 중심에 선 그는 가장 먼저 전국에서 가장 큰 지방 신문사인 <목포일보>를 인수했다. 6·25전쟁 발발 이후,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이승만 정권의 횡포와 폭압, 무책임을 목격한 김대중은 사상과 이념,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자기만의 답변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꿈을 직접적으로 이룰 수 있는 방안으로 정치인의 길을 선택했다. <길위에 김대중>은 그가 정치에 입문하고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긴 역사를 다양한 관점을 빌려 나열한다. 혼돈의 시대를 통과하는 근현대사적 관점에서부터 굳건하게 자신의 꿈을 밀고 나간 개인의 의지, 민주주의를 열망한 시대정신까지 하나의 메시지에 머물기보다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양한 장면을 그러모은다. 순탄치 않은 삶의 굴곡은 김대중의 투지를 더 빛나게 비춘다. 납치, 살해 위협, 투옥과 사형선고 등의 극적인 사건들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쉽게 굽히지 않았던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렇다 보니 그가 맞닥뜨린 역경과 어려움을 따라가다 보면 대한민국의 시대상과 정치적 긴장감, 국민적 열망과 바람, 역사적 분기점을 자연스레 습득하게 된다. 다섯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사형수, 네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세번의 대선 낙선을 거친 낙선 전문가. 그를 가리키는 표현에 담긴 함의가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해석되는 이유기도 하다. <길위에 김대중>의 영화적 연출과 구성은 다소 단순하다. 밋밋하거나 늘어진 듯 느껴지는 구간도 있다. 하지만 역동적이고 극적인 역사적 사실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 영화 전반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그 결과 현재적 관점으로 인물의 소신과 결단에 몰입하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실제 음성 기록과 주변인의 증언, 미디어 기록을 꼼꼼하게 활용한 장면들은 다큐멘터리영화로서의 성실성을 보여준다. <청춘 선거> <노회찬6411> 등 정치적 일상, 일상적 정치를 영화로 연출해온 민환기 감독은 궁극적인 메시지를 제안하기보다 관객이 오늘의 자화상을 돌아볼 수 있도록 엔딩을 활짝 열어둔다. <길위에 김대중>은 1월10일 전국 개봉과 함께 해외 27개 도시에서 동시 개봉한다. “민주주의는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무수한 음모에도 흔들리지 않는 김대중의 외침이다. 납치, 살해 위협 등 지난한 고개를 넘어서고 죽음을 선고받은 마지막 순간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되새겼다. CHECK POINT <문재인입니다> 감독 이창재, 2023 문재인 전 대통령의 소담한 생활과 일상을 담은 기록영화. <길위에 김대중>이 주인공의 자전적인 기록을 현대사적 관점으로 정리했다면 <문재인입니다>는 피사체의 업적으로부터 한 발자국 거리를 갖고 일상과 보통의 나날을 보여준다. 다만 사실에 입각한 기록들, 주변인의 증언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영화의 객관성과 사실성을 잃지 않았다는 교집합을 지닌다. 특히 선과 악, 흑과 백, 피와 아 등 단편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정치적·사회문화적 맥락을 전체적으로 살펴 관객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는 게 인상적이다.

[인터뷰] 전작들의 장점만 가져왔다, <파묘> 장재현 감독

<검은 사제들> <사바하>로 한국 오컬트 영화의 신기원을 적립했던 장재현 감독이 풍수지리와 무속 신앙을 소재로 한 <파묘>로 돌아온다. 여러 종교적 색채를 뒤섞으며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적용해온 장재현 감독 고유의 인장이 다시금 두드러진다.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 무당인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이 기묘한 묘를 파헤치며 일어나는 이야기다. 늘 그래왔듯 장재현 감독은 1년 동안 실제 장의사와 함께 일하며 파묘와 이장에 몸담는 등 철저한 사전 조사와 고증을 거쳤다. - <파묘>의 기획은 어디에서 시작됐나. = 어렸을 때 살던 시골 동네에서 100년 넘은 무덤을 이장하는 걸 본 적 있다. 묘를 팔 때 나오는 흙의 색깔과 냄새, 작업하기 전에 제사를 지내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이장하는 이유도 몰랐지만,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무서우면서 궁금하고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 이후부터 관에 대한 페티시가 생겼다. (웃음) 장의사를 하던 친구 집에 가서 관에 누워 있던 적도 있다. 그런 경험과 취향에서 <파묘>를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자료 수집을 한 뒤에 이야기를 만들었다. - 자료 조사는 어떻게 진행했나. = 1년 동안 장의사, 풍수사, 무속인들과 함께 일하여 이장 작업을 하고 다녔다. 장의사는 내 인력을 공짜로 쓸 수 있으니 좋고 나도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장례지도사 자격증도 거의 땄다. 실습만 몇 시간 더 채우면 수료하는데 영화 찍느라고 아직 못했다. - 직접 묘를 파본 소감은. = 어느 날은 새벽에 갑자기 진안까지 가서 무덤을 판 적이 있다. 옆에 공장을 짓는데 수로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묫자리로 물이 들어오는 탓이었다. 급하게 관을 꺼내고 열어서 깨끗하게 태우는 일련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완전히 없앤다는, 숨겨져 있던 과거를 들춘다는 것에서 정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발에 오래된 티눈이 있는데 ‘파내야지, 파내야지’ 생각만 하다가 정말 곪아 터져서 파내는 듯 무언가를 치유한다는 느낌이었고 이런 감각을 영화에 담으려 했다. - 주인공 상덕은 풍수사다. 풍수사에 대한 조사는 어땠나. = 풍수지리를 보통 미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지질학, 민속지학, 미생물학을 기반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작업이다. 집을 짓는 걸 양택, 사람이 묻히는 걸 은택이라고 해서 풍수사마다 전문 분야도 다르고 커다란 학회도 조직돼 있다. 학회 내에서도 토지, 산, 도심 개발 등 학파가 다양하다. - 상덕 역시 <검은 사제들>의 김 신부(김윤석), <사바하>의 박 목사(이정재) 같은 전문가 캐릭터로 등장한다. = 내가 좀 게을러서 그런가 보다. (웃음) 주인공이 전문가면 여타 설명 없이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으니 효율적이다. <파묘>를 호러영화로 찍진 않았지만, 호러의 색채를 갖곤 있다. 보통 호러영화에선 귀신들에게 당하는 피해자가 자주 등장해야 하는데 난 예전부터 그런 방식이 재미없더라. 영환 도사가 나오는 <강시선생> 시리즈나 <반 헬싱> 같은 작품을 더 좋아했다. 귀신 입장에선 가해자들인 캐릭터들이 나와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낀다. - 유해진 배우가 연기한 영근이 상덕 옆에서 코미디의 밸런스를 잡아주는지 궁금하다. = 최근 영화를 보면 그런 식의 티키타카에 일종의 강박이 있는 것 같은데, <파묘>엔 특별한 서사적 목적 없이 재미로만 소비하는 대사를 넣고 싶지 않았다. 서로의 직업적 특징을 배우고 서로의 성향을 살리는 대사 외에 최대한 절제했다. - 무당인 화림, 봉길은 상덕, 영근과 어떤 관계인가. = 맡은 분야가 아예 다르다 보니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배우는 구도는 아니고 종종 대립하면서 협업하는 모양새에 가깝다. 각자의 분야에서 사건을 진행하며 거의 반반 정도의 분량을 교차하게 된다. <검은 사제들>이 캐릭터 위주로 가느라 서사가 다소 빈약했고 <사바하>는 서사가 너무 무거워서 캐릭터들이 손해 보는 느낌이 있었다. 이번엔 그 중간의 균형을 딱 잡아서 전작들의 장점만 가져 오려 했다. <사바하>의 헤롯왕 이야기, 사천왕 이야기 같은 다소 어려운 배경 설명 없이도 직관적으로 쭉쭉 나갈 수 있게 썼다. 각본을 쓸 때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다. 극장, 영화의 미래에 여러 이야기가 나올 때 나도 자주 극장에 가면서 고민했다. 관객들이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순수하게 재밌고 오락적인 영화를 만들자라는 결론을 냈다. - 화림과 봉길이 돈 때문에 파묘에 집착한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상덕은 화림, 봉길의 금전적 동기에 반대하는 것인지. = 오히려 상덕이 더 심하다. (웃음) 그 돈 받고는 이렇게 위험한 일 못하겠다는 거지. 다 프로들이다. 돈을 받은 만큼 일하는 자세가 더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만나는 분들도 그런 직업인 분들이다. - <사바하>를 찍을 땐 소포모어 징크스를 꽤 우려했다고. 세 번째 장편을 만드는 마음가짐은. = 기술적으로 어려운 장면이 많았다. 웬만하면 CG를 지양하면서 배경과 물체를 실제로 찍으려고 했다. 최대한 세트를 짓지 않고 힘들게 찍었고, 혼령 사진 같은 것도 실제 배우가 6시간 동안 분장한 뒤에 일부러 흐릿하게 찍곤 했다. 오컬트 장르는 현실 판타지에 가깝다. 촬영이 힘들더라도 관객들이 실제 같은 느낌을 받고 배우들 역시 실물 배경이나 소품을 보면서 연기에 임하도록 했다. - 오컬트 색채가 짙었던 전작들과 다르게 접근한 연출 의도가 있다면. = 전작들을 찍을 때 내 한계를 느꼈다. 장면 하나하나를 멋지게 만들고 연기를 멋지게 담는 것에만 집중하니 영화가 단조로워졌다. 관객들은 극장에서 장면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영화의 어떤 기운을 느낀다. 그래서 <파묘>에선 장면에 대한 집착을 아예 배제했다. 편집으로 여러 장면이 이어지고 교차할 때 느껴지는, <황해> <아수라>에서 느꼈던 어떤 기운 혹은 에너지, 기세를 담고 싶었다. 한컷 한컷이 다소 투박할 순 있다. 카메라 초점이 잘 안 맞아도 이상한 느낌이 찾아오면 그 컷을 썼다. <파묘>의 이 장면 “<파묘>에선 극장이란 환경에서 접할 수 있는 극도의 긴장감, 낯선 것이 등장했을 때의 실감을 최대화하려 했다. 지금 직접 얘기할 순 없지만, 영화 후반부에 정말 예상치도 못한 ‘낯선 것들’이 등장한다. 관객들이 그것들에게 굉장히 불편한 긴장감과 생경함을 느끼길 바란다.” 제작 쇼박스, 파인타운 프로덕션 / 감독 장재현 / 출연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 배급 쇼박스 / 개봉 2024년 2월

[인터뷰] ‘고려 거란 전쟁’ 배우 지승현, 연기,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거란이 쳐들어왔는데 결방이 웬 말이냐.” “나라(고려)가 위기인데 연회가 다 무어냐.” 2023년 연말 KBS2TV가 시상식 중계를 이유로 <고려 거란 전쟁>을 2주간 결방하자 시청자들이 보인 반응이다. KBS가 공사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야심차게 내놓은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은 최근 시청률 10%를 넘기는 등 많은 시청자들의 성원을 받고 있다. 정통사극 최초로 넷플릭스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아직 방영 중인 드라마임에도 2023년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최수종)을 포함해 7관왕을 차지했다. 이중 화제성을 독점하며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한 이는 단연 양규 장군으로 분한 배우 지승현이다. 전장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수십만명의 거란 대군과 맞서 싸우며 고려인 포로를 구출하는 데 온몸을 바쳤던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그는 역사서에 단 몇줄의 기록만 남아 <고려 거란 전쟁> 방영 전까지 다수의 한국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형형한 기개와 단단한 카리스마로 양규를 소생해낸 배우 지승현의 놀라운 저력에 힘입어 이제 양규는 이순신, 강감찬 못지않게 온 국민이 기억하는 전쟁 영웅으로 자리하게 됐다. 그 공로로 지승현은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연기와 인기를 모두 인정받아 우수상과 인기상을 수상했다. <고려 거란 전쟁>의 16회 방영 직후, <씨네21>과 배우 지승현이 처음 만났다. 평생 연기에 충성해온 데뷔 18년차 배우 지승현의 <고려 거란 전쟁> 이야기와 지금껏 그가 연기한 수많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 연일 뉴스와 라디오, 라운드 인터뷰를 돌며 양규 장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터뷰를 거듭하며 양규에 관해 새로 깨닫게 되는 부분도 있나. = 시간을 되돌려 다시 연기하라고 해도 더는 못할 만큼 양규 장군과 진득한 시간을 보냈다. 장군을 내 안에서 시원하게 털어내는 중이다. 보통 한 작품을 끝내면 시원섭섭한 마음이 드는데, 이번엔 정말 시원한 마음이 든다. 많은 분들이 양규 장군에 관해 알게 된 것 자체로 기분이 좋아 섭섭한 마음이 들진 않는다. - 이전에도 사극 출연 경험이 없진 않았지만 <고려 거란 전쟁>은 깊은 명맥에 비해 점점 제작이 품귀해지는 KBS 대하사극이다. 작품에 임하는 무게감이 전과 다르던가. = 솔직히 말하자면 대하사극이라고 하여 느끼는 부담은 전혀 없었다. 그보다는 내 배역인 양규 장군에 연기로서 힘을 싣고픈 욕심이 있었다. 국궁, 승마 등 액션 연습을 철저히 했다. 진짜 양규처럼 보임으로써 이분을 알리고 싶었다 - 덕분에 국민 모두가 양규를 기억하게 됐다.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양규 장군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목표다”라고 선언했는데. = 내가 양규 홍보대사다. 양규는 이순신, 강감찬 등의 인물과 비해봐도 화려한 전훈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쓰고 연출한 드라마는 아니지만(웃음) <고려 거란 전쟁>을 통해 한 성웅을 세상에 알렸다는 뿌듯함이 있다. 작품 공개 전부터 촬영장에서 스탭들에게 “빨리 양규 장군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우직한 양규의 결기 - 제작진으로부터 배역 낙점의 이유에 대해 들은 적있나. = 김한솔 감독님이 양규 장군의 캐스팅 후보군 중 내 이름을 보고 ‘이 사람이 양규다’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 목소리가 양규를 표현하기에 제격이라고 판단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사실 저음의 목소리 때문에 데뷔 초창기엔 캐스팅이 잘 안됐다. 주인공의 20대 친구를 연기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형’이었다. (웃음) 오히려 중년에 접어드니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많이 들어 감사하다. 목소리 덕분에 <고려 거란 전쟁>도 만났고 말이다. - <고려 거란 전쟁>의 초반엔 강조(이원종)와의 관계가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둘은 각자를 향해 깊은 신뢰를 보이는 듯하다. = 양규가 강조의 뒤를 이어 서북면 도순검사가 되지 않나. 당시 서북면은 고려의 최전방이라 지리적 요충지였다. 그 지역을 통솔하는 요직을 물려줄 정도니 강조와 양규는 평생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느낄 줄 안다고 상정했다. 이원종 배우와도 “우리는 브로맨스다”라고 합의했다. (웃음) 이원종 선배가 현장에서도 정말 많이 이끌어줬다. 무거운 갑옷을 입을 때 몸을 풀 수 있는 갑옷 체조도 선배로부터 배웠다. 아마 양규는 강조가 반란을 주동하리라는 걸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조에게 “결심하셨습니까?”라고 넌지시 물을 수 있었다. 드라마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역할 준비를 위해 사료를 찾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했다. 강조가 죽은 이후 거란의 왕이 강조가 쓴 양 항복하라는 거짓 편지를 위조해 양규에게 보냈다. 그때 양규는 흥화진에서 “나는 왕의 명에 따라 싸우지, 강조의 명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며 답신을 보냈다. 양규는 강조가 그런 편지를 보낼 리가 없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 한편 양규는 드라마 전체에 걸쳐서 또 다른 명장인 김숙흥(주연우)과 함께한다. 유일하게 양규만이 야생마 같은 김숙흥을 구슬리는 것을 보면 어쩌면 양규도 젊은 시절 김숙흥 같은 구석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 정확히 같은 생각을 했다. 김숙흥은 젊은 양규고, 양규는 성숙한 김숙흥이다. 양규가 귀주로 김숙흥을 보내는 대사인 “귀주에도 너 같은 미친놈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여기엔 미친 내가 있으니 귀주는 미친 네가 가라”는 의미였다. - “쏴라”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양규의 대사는 “무운(武運)을 빈다” 아닌가. 혼란한 시절을 사는 이들에게 위 문장에 함축된 감정의 무게는 남달랐을 것이다. = 최고의 축복이자 무거운 인사다. 결국 그 속에 담긴 진의는 “살아서 돌아오시오”다. 처음 이원종 배우와 그 대사를 주고받을 때 선배의 연기에 담긴 에너지를 크게 느꼈다. 그래서인지 상대 배우와 “무운을 빈다”는 다섯 음절을 주고받을 때면 늘 장중한 감정과 에너지를 전하게 된다. - 양규가 치른 모든 전투는 데이터만 놓고 따지면 무모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양규는 포기하지 않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고려인 포로를 구출해내려 사력을 다한다. = 극 중에서 묘사되지 않는 1차 여요전쟁 당시 어쩌면 양규는 전장에서 아버지를 잃었을 것이라 상상했다. 양규는 한 차례 거란군의 잔인함과 가족의 죽음을 목도했기 때문에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길 절실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6회 흥화진 공성전 장면에서 양규가 고려인 포로를 방패 삼아 진격하는 거란군에 활을 쏠 때 눈물이 났다. 그땐 “내 아들이 포로로 잡혀 있어도 나는 활을 쏜다”는 극한의 마음으로 연기에 임했다. - 전쟁마다 활을 쏘느라 피딱지가 내려앉은 양규의 손 분장도 화제를 모았다. = 처음에 감독님에게 늘 활을 쏘는 사람의 손이 성치 못할 테니 손도 분장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 감독님이 무척 좋아하셨다. 그래서 흥화진에서 보내는 시간의 경과만큼 문드러진 양규의 손이 탄생했다. 꼭 언급하고 싶은 이름이 있다. 차상훈 분장감독님이 정말 고생하셨다. - 양규가 전사하는 16회의 단병접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300보, 200보, 100보 그리고 10, 9, 8, 7의 처절한 카운트다운. 김한솔 감독은 이 장면에서 거란군에 엄청난 공포를 선사하는 양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화살과 칼을 맞아가며 야율융서(김혁)를 향해 진격하는 양규의 마지막 혈전을 어떻게 만들어갔나. = 드라마 현장은 아무래도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 마지막 게릴라전만큼은 정말 제대로 준비하고 싶었다. 그래서 액션 스쿨에서부터 무술감독님을 비롯해 촬영팀, 제작팀이 모두 함께해 디테일한 합을 맞춰갔다. 나의 액션이 100합이었고, 주연우 배우의 액션이 80합이었다. 양규가 머리를 맞은 후 “100보!”를 외친 장면부터는 원테이크로 찍었다. 모든 카운팅엔 “저 새끼를 죽이리라” 하는 양규의 결기가 서브 텍스트로 깔려 있다. 양규는 카운팅 중 ‘여섯’에서 김숙흥을 바라본다. 이때도 “숙흥아, 형이 여섯 걸음만 더 가면 거란 놈들을 죽일 수 있어”라는… (울컥하며 이내 눈물이 고인다) 마음을 담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네. - 하필 거기서 죽어가던 김숙흥이 “형님”을 외치는 바람에 장면이 더욱 구슬퍼졌다. = 주연우 배우의 아이디어였다. 감독님도 매우 좋아하셨다. 연기라는 행복 - 한창 배우로서 일이 안 풀리던 시절 떡볶이 가게를 차릴까 고민했다고 들었다. = 사전 제작이었던 <태양의 후예>(2016)를 다 찍은 직후 방영을 기다릴 때 당시 논의 중이던 작품들이 전부 무산됐다. 공개 이전인 <태양의 후예>를 제외하면 작품이 없었던 터라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행히 <태양의 후예>가 크게 성공해서 이후로 많이들 나를 찾아주셨다. - 연기를 포기할까 고민하던 때에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 (활짝 웃으며) 연기가 너무 좋다! 현장으로 출근할 때의 새벽 공기와 밴 속에서 라이트 하나 켜놓고 대본을 볼 때의 안락함을 사랑한다. 그때가 내가 생각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고, 죽기 직전에도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관객, 시청자와 연기로 소통하는 것도 큰 원동력이다. 커리어를 지속할수록 연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 최근 쉼 없이 차기작이 이어졌다. 작품 사이의 휴식기엔 무얼 채우고 무얼 비우나. = 지난 3, 4년간 쉼 없이 맞물려 작품을 찍었다. <고려 거란 전쟁> 촬영을 끝낸 지금에서야 조금 휴식을 갖는데 난 며칠만 쉬어도 힘들다. 쉬는 시간에도 연기가 하고 싶다. 평소 취미랄 것도 거의 없다. 데일리 루틴이라고 해봐야 아침에 헬스장 가고 독서하는 것 정도다. 일상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관찰이다. <한국인의 밥상>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우리네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경을 관찰하고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다. 단역 생활을 할 때 오래 쉬어서 괜찮다. (웃음) 단역을 전전하던 때 일기에 써내려간 문장이 있다. ‘자유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보지 않은 사람은 자유의 무서움을 모른다.’ 최근에야 감사하게도 끊임없이 작품을 찍을 수 있었지만, 무명배우 시절이 길었기 때문에 아직도 현장이 가장 좋고 또 고프다. 연기가 취미면 좋겠다. - <고려 거란 전쟁> 13회에서 전술을 짜는 양규의 대사가 배우의 숙명과 맞닿은 대사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감춰야 하는 것은 철저하게 감추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줘야 하네.” 양규의 바람과 달리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일은 의도와 다르게 감추고 싶은 점이 증폭돼 드러나기도, 막상 보이고 싶은 것들은 잘 발현되지 않기도 하니 말이다. = 그걸 잘해내는 것이 연기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연기를 잘한다고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카메라 앞에 서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 보인다. 연기를 사랑하지만 매 현장이 쉽지만은 않다. 낯선 동료와 정신없는 현장에서 다양한 감정을 연기해야 하지 않나. 감추고 싶은 부분은 잘 가둬둔 채 내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게 배우의 몫이다.

[인터뷰] 지승현이 이야기하는 그때 그 작품

18년의 경력 동안 배우 지승현이 남긴 몇 순간을 지승현의 목소리로 전한다. ※ 작품의 경미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바람> 지승현의 얼굴을 처음 알린 작품이자 그를 한동안 ‘짱구(정우) 옆 그 일진 선배’로 인식시킨 작품이다. 지승현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바람> 이야기만 건넬 때면 “내가 배우로서 발전이 없나” 고심했다. “<태양의 후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등에서 주목받은 후에도 끊임없이 <바람>이 소환됐다. 한동안은 ‘내가 <바람>보다 더 나은 연기를 보여준 적이 없어서 그런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 자아가 너무 작았다. 이제는 그저 감사하다. 지금은 현장에서도 스탭 동생들로부터 ‘형, <바람> 톤으로 양규도 연기해주시면 안돼요?’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나라는 배우를 처음 알린 작품이라 평생 가져갈 것이다.” <무뢰한> <무뢰한>의 명장면은 술집 외상값을 받으러 간 혜경(전도연)이 자신을 희롱하고 무시하는 쇼핑몰 사장에게 “나 김혜선이야!”라며 겁박하는 신이다. 이때 전도연의 사자후를 적절히 보조한 쇼핑몰 사장이 바로 지승현이다. 지승현은 1회차 만에 찍은 당시 현장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선배 배우를 만날 일이 많지 않았는데 전도연 선배를 보자마자 얼었다. 전도연 선배가 나를 제압하며 연기를 하는데… 대사로 뺨을 맞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연기만으로 현장을 장악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유한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반성했다.” <사바하> 평소 지승현은 슈퍼내추럴 장르를 선호한다. 그런 그에게 <사바하>의 이야기는 흥미로움의 연속이었다. 터널 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김철진으로 분한 지승현은 고통스러운 전사 속에 신음하는 철진의 아픔을 표현하려 특히 노력했다. 알고 보면 <사바하>에선 지승현의 액션 연기도 볼 수 있다. 철진이 목을 매달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실제 지승현이 스턴트 없이 와이어에 의존해 6층 높이의 건물에서 네댓번 낙하하며 소화했다. 지승현은 귀여운 푸념 하나를 더한다. “막상 영화를 보니 내가 너무 빨리 떨어져서 CG처럼 보이더라. 내가 직접 뛰어내린 장면인데, 억울하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지승현에게 ‘쓰랑꾼’(쓰레기+사랑꾼)이라는 별명을 안겨준 드라마. 지승현이 연기하는 재벌 2세 영화제작사 대표 오진우는 송가경(전혜진)과 정략결혼한 사이라 소원한 부부 관계를 보인다. 하지만 극이 후반으로 갈수록 가경과 진우는 서로를 향한 다정한 마음을 확인한다. “오진우를 연기하기 전까지 웹드라마를 제외하면 멜로를 연기한 경험이 거의 없다. 갈증이 있던 차에 이 작품을 만나 무척 감사했다. 전혜진 누나는 정말 좋은 배우다. 촬영 중 전혜진 배우와 술도 몇잔 기울여가며 즐겁게 촬영한 기억이 있다.” <연인> 돌아보면 지승현은 2023년 가장 사랑받은 두 사극에 모두 출연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고려상남자’ 양규와 달리 <연인>의 구원무는 ‘조선하남자’다. 구원무는 병자호란 당시 자신의 부인 유길채(안은진)가 청으로부터 ‘환향’하자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고 새 아내를 맞아들인다. 정작 지승현은 구원무를 ‘평생 길채바라기’라 염두에 두며 연기했다. “구원무는 그 자체로 호란 당시 조선인의 사상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지금의 관점에서야 길채를 구하러 가지 않는 원무가 한심하지만 몇대째 관직을 한 집안의 아들인 원무는 보수적인 풍습 탓에 길채를 구하러 갈 수 없었다. 원무가 재혼을 한 것도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당시 관습의 한계다. 처음 사랑에 빠진 이후부터 원무는 쭉 길채에게 진심이었다. 국밥집에서 길채에게 청혼한 원무를 보고 누군가는 ‘가성비 청혼’이라고도 하는데(웃음) 나는 그 장면에서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숙맥 구원무를 표현하고 싶었다.” <고려 거란 전쟁> 양규는 전투마다 ‘효시’(嚆矢)를 쏘아 올리며 적에 맞선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화살인 효시는 양규의 분신이다. “양규는 흥화진 전투에서 끊임없이 효시를 쏜다. 작품의 대본에도 ‘양규가 곧 효시다’라는 글귀가 명시돼 있었다. 참절한 고려를 바라보며 흐르는 양규의 피눈물을 효시의 울음소리와 일체화하고 싶었다.”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그들이 그렇게도 밉고 우스워 보이더냐?

가족 같은 회사. 나도 그렇지만, 직장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말일 테다. 가족으로만 구성된 회사는 있을 수 있어도, 가족의 화목함을 기대할 만한 회사란 없다. 가족조차도 애초에 화목함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목적이 있는 기업, 특히나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는 화목함이 아닌 다른 운영 원리에 기초를 둘 수밖에 없고 그게 훨씬 더 바람직하다. 따라서 가족 같은 회사란 가족보다도 못한 회사의 다른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십년도 전에 대학이란 곳에 학생이 되어 다닐 때에도, 같은 ‘족’(族)자가 붙는 단어인 민족이란 말이 쓰일 때 거슬린 적이 많았다. 게다가 그 거대하기만 한 민족을 좁디좁은 가족으로 환원하는 어법은 더욱 싫었다. 국토를 어미나 누이의 몸으로 환유하고, 침략자를 그 여성 신체를 유린하는 이민족 남성으로 묘사하는 발언을 들을 때마다 돋아 올랐던 소름. 내가 침략당하는 민족에 속한 남성‘으로서’ 같이 분노해주길 바랐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분노는 오히려 중간에서 턱턱 막혔다. 그런 수사법이, 적어도 진실한 마음을 담고 있는 한, 완전히 그릇된 것만은 물론 아니다. 잘못은 환유 자체가 아니라,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인 시선에 있다. 사장이자 가장의 시선으로 묶인 회사와 가족은 화목하기보단 억압적일 가능성이 높다. 가족의 평화와 회사의 안녕이란 그 각각에 맞는 인간관계를 정립하는 데에서 올 뿐이다. 내 누이나 어미가 유린당하는 건 당연히 견디기 어려운 분노를 만든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한 인간 집단에 의한 다른 인간 집단의 대량학살 자체에 분노해야 한다. 나는 배우 이선균을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넣은 그 숱한 유무형의 폭력에 분노한다. 정치적 선호를 떠나서, 정치인 이재명의 목덜미에 칼날을 꽂아넣은 그 광기에 절망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화나고 또 황망한 것은, 그걸 바라보는 이들의 냉랭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다. 죽음에 이르렀거나 이를 뻔했던 그 과정의 폭력성에 주목하기보다, 당사자들이 뒤집어써야 할 티끌과 오명에 초점을 맞추는 시선과 비릿한 냉소. ‘잘나갔던 배우’니까 그 정도 손가락질은 감당했어야 했다고? 혹은 ‘국회 안에서 큰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인’이니까 살상 행위를 한 범인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던 헬기 문제나 책임지라고? 굳이 같은 민족으로, 국민으로, 정치집단으로, 또 가족으로 환원해서 애끓는 공감을 호소할 생각, 없다. 그런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로부터 당해야 마땅할 폭력이란 것도, 없다. 그런 폭력에 의해 죽음에 이를 뻔했거나 실제로 이르고 만 이들 앞에서 가장 먼저 꺼내놓는 게 냉소라면, 이른바 ‘타자화’와 ‘대상화’의 정도가 심각할 지경에 이른 게 아닐까? 모든 폭력은 상대가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비릿한 인식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리뷰] ‘라이즈’, 공동체의 힘을 일깨우는 정갈한 상상력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발레리나인 엘리즈(마리옹 바르보)는 26살 젊은 나이에 발레 <라 바야데르>의 주연으로 발탁된 유망주다. 이 무대만 잘 소화하면 그녀는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다. 그러나 대망의 첫 공연이 열리는 날 그녀에게 예기치 못한 불운이 연달아 닥친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같은 발레단의 발레리노이자 남자친구인 줄리앙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목격하고, 설상가상으로 무대에서 왼쪽 발목을 접질리기까지 한다. 그녀는 의사로부터 재활에 실패하면 발레의 꿈을 접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평생 발레에 전념한 그녀는 자신의 꿈을 되찾으려 파리 근교의 브르타뉴로 내려가 재활에 전념하기로 한다. 그녀는 그곳의 아티스트 레지던스에서 일하며 새로운 인연을 하나둘씩 만난다. 그녀는 레지던스에 머무르는 현대무용단의 자유분방한 춤사위에 매혹돼 발레보다 현대무용이 자신에게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2018)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세드리크 클라피슈의 신작이다. 한국에서는 제7회 서울무용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감독은 20년 전부터 무용에 관련된 극영화를 찍으려는 열망을 내비쳐왔다. 그 열망은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화려한 무용 시퀀스에 여실히 드러난다. 각각 10분 가까이 되는 발레와 현대무용 시퀀스는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서사도 이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전작에서부터 인물의 일상사를 담백한 화법으로 풀어낸 감독의 장기가 돋보인다. 언뜻 보기에 청춘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듯하지만 과잉된 연출을 배제해 관객이 엘리즈의 정신적인 성장을 차분하게 따라가도록 여백을 남겨두었다. 영화는 엘리즈가 주조연이 정해져 있는 발레의 세계에서 벗어나 모든 무용수가 주인공인 현대무용의 세계로 가기까지의 과정을 정갈하게 그려내면서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다. 영화의 원제대로 ‘En Corps’(우리 함께)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준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발레리나 마리옹 바르보의 섬세한 연기가 돋보이며 현대무용가 호페시 셰히터의 안무는 영화의 아름다움을 한껏 끌어올린다. 다프트 펑크 출신 뮤지션 토마스 방갈테르의 음악도 주목할 만하다.

[인터뷰] 정치인도 전문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한 시대다, <길위에 김대중> 민환기 감독

작은 배 한척으로 시작한 해운회사로 목포의 유망한 청년 사업가가 된 김대중. 일찍이 자기 성취를 거둔 듯 보이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방향에 있었다. 바로 정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 광복과 한국전쟁, 분단의 역사와 독재정치를 가로지른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청춘 선거> <노회찬6411> 등 일상의 정치를 주요하게 다뤄온 민환기 감독은 <길위에 김대중>을 통해 개인이나 사업가, 투사나 사상가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김대중을 집중 조명한다. 납치, 살해 위협, 투옥과 사형선고 등 그가 감내해야 했던 삶의 굴곡은 민주주의가 일상화·보편화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시간을 거쳐야 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시각 자료와 음성 자료, 영상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김대중이 그려온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궤를 깊이 있게 풀어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 소임을 다한 김대중의 일생을 담은 민환기 감독을 만났다. 인터뷰 뒤편에는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김수민 정치평론가의 에세이가 이어진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모략받았지만 가장 추모와 애정을 받는 정치인이 된, 흥미로운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 -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됐다. 처음 기획 단계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 2021년에 처음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땐 내가 정치에 고관여층도 아닌 터라 많이 망설였다. 그럼에도 제안에 응한 이유 중 하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를 찾은 영상 자료를 보았을 때였다. 그때 충격받았다. 그를 반기는 사람들의 눈빛과 시민들의 환호를 잊을 수 없다. 궁금했다. 이렇게 뜨겁고 열광적인 반응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어떤 시대적 배경과 시민들의 열망이 반영된 현상일까. 이 질문의 답을 연대기로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 영화를 기획했을 때 정치인으로서 김대중의 삶과 행보를 정리하고자 했다. 김대중을 공부하면 할수록 투사나 사상가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웃음) 하지만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노력을 정치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두 일관돼 보였다. 또 이를 보는 사람들도 정치인에 대한 이해도가 과거보다 더 유연해진 것 같다. 지금이 좋은 시기라 생각했다. - 영화를 통해 최초 공개되는 영상, 음성, 시각 자료 등이 인상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 자료를 어떻게 구할 수 있었나. = 김대중평화센터에서 자료를 적극적으로 제공해주었다. 사실 자료를 구하는 데엔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 그보단 워낙 자료가 많다 보니 이를 어떻게 정리할지, 무엇을 빼고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게 어려웠다. 그다음으로 신경 쓴 건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였다. 김대중평화센터에서 대통령 퇴임 후 자체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관여하지 않은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김대중을 돌아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김대중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영화 러닝타임상에서 1시간 즈음 지나갈 때 챕터가 전환되는 형식으로 조성했다. 앞을 담백한 사실 위주로 보여준다면 그 뒤에는 김대중의 결정과 선택을 파고든다. - 제작 과정에서 “영화가 정치적으로 치우진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다”라는 선입견을 가진 관객을 염두에 두기도 했나. = 당연히 신경을 안 쓸 수 없다. 그래서 초반 60분은 담백하게 접근하려 했다. 어떤 장면에서는 야박해 보일 정도로 사실 기반으로 구성했다. 하지만 연출자로서 사실 이상의 접근은 영화적으로도 흥미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정책들을 주요하게 다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략가에 가깝다. 정책을 만들 때 국민들이 호응하면서도 효용성과 실용성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을 내놓았다. 이를테면 향토예비군 폐지는 시민들이 그 필요성을 피부로 느낀 정책이었다. 동시에 남북관계 개선과 같은 이상적인 정책도 놓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바탕을 성실하게 쌓아올린 거라 볼 수 있다. - 김대중 납치사건, 유신선언, 계엄령과 긴급조치 선포, 사법사상 암흑의 날 등 민주주의 탄압의 역사를 연대기에 따라 보여준다.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근현대사의 민주주의 역사를 둘러보는 영화이기도 하다. = 당시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억압받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의 흐름이다.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뜨거워졌다. 그사이에 이 흐름을 끌고 간 인물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와 바람을 공유했다. 그래서 영화에도 중간중간 시민들의 얼굴을 담았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갈증을 전하고 싶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방향을 기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대중의 생을 따라가다 보니 국민들의 열망이 자연스레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목포 선거에서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천명이 기다렸다는 게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60년대에 천명이라니. - 정보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아쉽지만 영화에 담지 못한 게 있다면.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이 듣기 좋다. 그런데 너무 길다. (웃음) 어떤 것은 2시간이 넘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 연설의 의미를 전달하려면 앞뒤 맥락을 연결할 수 있도록 일정 분량 이상을 보여줘야 하는데 자칫하면 영화가 지루해질 수 있겠더라. 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뺄 수밖에 없었다. 메시지도 현대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구석이 있어 유머지만 유머처럼 들리지 않고, 일갈이어도 일갈처럼 와닿지 않는 것들이 있어 냉정하게 판단했다. - 지금 이 시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를 본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 정치에 인물도 중요하지만 여기 오기까지 무엇을 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전문화된 사회인 만큼 이제 정치인도 전문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겠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특정 사안과 인물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필요한 질문조차 건너뛰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것들을 다시금 돌아보고 질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획] 가장 미움받은 정치인,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어느 프로그램 진행자가 한 패널에게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 누구인지 물었다. “김대중 대통령이요.” 진행자가 말하길, “너무 무난한 답이라 정치 성향을 짐작할 수 없네요”. 격세지감이다. 김대중은 한국 정치인 가운데 크고 많은 중상모략을 당했다. 1959년 강원 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그는 공산당원이라는 허위 선동에 시달렸다. 처음 대선 후보로 나선 1971년에도 색깔론은 거셌다. “동네에 ‘빨갱이’라는 말이 자자했고 벽보는 훼손되었다.” 내 어머니의 회상이다. 경북 태생인 나는 어릴 적 어른들에게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박정희를 비판할 수는 있었으나, 김대중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은 그보다도 훨씬 곤란한 일이었다. 대선에서 세 번째로 낙선한 그가 은퇴를 선언한 1992년 12월19일,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을 씻었다. 어린이라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죽을 고비를 넘겨온 사람이 이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30여년이 지났다. 2023년 11월에 실시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대구·경북 지역의 김대중 긍정 평가율은 부정 평가율의 3배 이상이었다. 경영자에서 정치인으로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0년 9월 김대중은 목포에서 인민군에 처형당할 뻔했다. 해운사 경영자인 그는 인민군에 ‘반동분자’였다(김대중은 한국 최초의 CEO 출신 대통령이다). 해방 정국기에 잠시 있었던 조선신민당은 애초 비공산 계열 정당이었다. 소련 추종자들이 불어나자 김대중은 그들과 대판 싸우고 탈당한다. 그는 1950년대 중반 기고문에서(김대중은 한국 유일의 시사평론가 출신 대통령이다) “전체주의적인 통제와 생산 능률의 후퇴”라며 소련식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일본을 태평양 반공동맹의 중추로 지목하며 한일 협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1971년 4월 대선에서 김대중은 평화통일을 주창했다가 대대적으로 친북 혐의를 받는다. 하지만 김대중의 ‘4대국(미국·일본·중국·소련)에 의한 한반도 평화보장론’은 제목 그대로 우방국의 지지를 중시했다. 데탕트를 연 헨리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은 그로부터 석달 뒤였다. 김대중은 반 발짝 앞서 나갔을 뿐이다. 1980년대 반미 풍조가 퍼지던 동안에는 ‘비폭력·비용공·비반미(3비)’ 원칙을 견지했다. 김대중의 말과 글에서는 ‘민주주의를 해야 공산당을 물리친다’는 신념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김대중 자서전>은 김일성을 놓고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독재를 했다”고 적었다. 쿠데타 일당이 그를 용공 분자로 몬 것이 가소롭다. 색깔론은 ‘호남 차별’에 기반하고 있었다. 독재 정권이 1979년 10월 부산-마산 항쟁을 내란으로 모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불과 7개월 뒤 있었던 광주 5·18은 달랐다.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프레임 씌우기’도 잇따랐다. 냉정하게 전략적으로 따져보자. 호남은 인구와 면적과 개발 수준에서 늘 열세였다. 그가 뭐하러 백전백패할 구도를 짜겠나.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호남 지역 연설을 두 차례만 하고 맺었다. 대광장이 아닌 실내 체육관에서. 호남만의 대통령이 되면 호남인에게 죄짓는 것이라는 요지로. 1997년 대선에서는 호남 방문이 아예 없었다. 당시 김대중을 지지하는 호남인들은 해태 타이거즈 야구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대선에 악재가 되지 않을까 긴장했고, 타 지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오후에 투표했다. 호남은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좌우익간 보복에 시달렸다. 미국의 원조금을 배분받는 데서도 소외됐고 산업화가 경부축에서 진행되면서 경제개발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균형 발전을 서둘러야 할 시점에는 광주 학살을 겪었다. 호남의 설움과 김대중은 불가분이다. 물론 지역 내에서 한 정당이 독주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호남인 절대다수의 김대중 지지가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진실이다. 전국 각지의 지역주의 투표 행태를 한데 모아서 보면 이 또한 한국 정치가 급하게나마 균형과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이바지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김대중은 1997년 대선에서 김종필과 연합해 간신히 당선됐다. 바로 여기서, 반전이 시작된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여러 비난을 받았으나 김대중 정부가 소수파 정부임을 부인할 도리는 없었다(호남 출신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지금도 버겁다). 결국 비열한 강자로 비쳐진 것은 거대 야당과 유력 언론이었다. 색깔론도 녹아 무너졌다. 민주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진심으로 빨갱이라 믿는 것은 자신을 갉아먹는 짓이다. 김대중은 정책을 갈고닦아 빛을 내는 역량에서 세계 최정상급이었다. 그 대표작이 개발독재에 맞서며 정립한 ‘대중경제론’이다. 이것이 ‘IMF 사태 극복’이라는 당면 과제와 만나 ‘준비된 경제 대통령’을 빚어냈다. ‘IT 코리아’와 ‘한류’는 김대중 정부에서 출발했고 그는 후기 산업화 및 지식화 시대의 지도자상을 획득한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할 무렵 고교에 입학했던 나는 요즘 고교 또는 대학 동창을 만나면 “2000년대 초입 즈음이 대한민국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는 말을 나누곤 한다. 김대중은 ‘코리안 드림’이고 ‘다이내믹 코리아’였다. 정쟁을 뛰어넘어 존경받다 김대중은 국내 정쟁을 뛰어넘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에게 존경받았고 장쩌민 전 중국 주석에게 ‘따거’(큰형님) 대우를 받았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용서한 김대중은 그들보다 더한 독재자인 북한 정권과 대화할 준비를 해두었다. 국군이 서해에서 북한의 도발을 격퇴한 이듬해, 그는 비행기 트랩 위에서 정상회담 맞상대 김정일의 인사와 박수를 받는다. 김대중은 북한 독재자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인민군에 딱 반세기 만에 사열도 받았다. 나는 이토록 웅장하고 화려한 복수를 본 적이 없다. 오늘날 다수 대중은 김대중을 마음놓고 기린다. 또 작금의 세태는 그를 휘감았던 악재들까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는 대통령 임기 말 가족의 잘못이 불거지자 직접 진상을 확인하고 즉각 국민에게 사죄했다. 야당 총재 시절 같은 당 의원의 돌발적인 비밀 방북으로 안기부의 구인장 발부에 직면했을 때는 당당히 응하며 출두했다. 또 그는 지지자들을 적개심과 혐오로 몰지 않았고 항상 해학과 위로를 겸비했다.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힌 지역 문제를 두고도 “많이 좋아졌다”며 낙관했다. “지금 가장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 김대중이.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언론은 김대중이만 몰아붙이는 이 현실. 이것을 여러분이 방치하지 않고 수백만 인파가 나와서 이 김대중이를 이렇게 격려해주시니, 나는 참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1987년 11월 여의도광장 연설이다. “납치돼서 죽음을 모면하고, 바다에서 묶어가지고 던지려는 그 순간을 체험하고, 사형 언도를 받아가지고 옥중에서 가족들을 생각하고 동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산 사람 또 없으니 이런 연설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정치사의 ‘영구 결번’, 김대중.

[기획] 비극의 순간 연대의 외침, <나의 올드 오크>를 중심으로 본 켄 로치 감독의 세계

<미안해요, 리키> 이후 4년 만의 연출작이다. 어느덧 88살의 노장이 된 켄 로치 감독은 신작 <나의 올드 오크>에서 영국 북동부의 한 폐광촌으로 시선을 옮겨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래된 술집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데이브 터너)는 갑작스레 이곳에 정착한 시리아 난민들을 배척하지 않는 몇 안되는 주민 중 한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함께한다는 것”이라는 주인공의 말처럼, 켄 로치 감독은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자신의 신념을 이번에도 올곧게 지킨다. 거장의 마지막 연출작이라 알려진 <나의 올드 오크>를 기반으로 60여년간 구축된 켄 로치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았다. “예전엔 이 동네에 탄광이 있었어”라는 대사를 내뱉으며 TJ는 펍의 안쪽 문을 연다. 열쇠로 꽉 잠긴 그 방은 거의 20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그곳의 벽에는 “폐광은 죽음이다”라는 내용의 액자들이 잔뜩 걸려 있다. 야라(에블라 마리)에게 TJ는 이 흑백사진들은 모두 1980년대 중반에 그의 삼촌이 직접 찍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88살의 켄 로치가 만든, 아마도 그의 마지막이 될 영화 <나의 올드 오크>(2023)에는 사회문제를 다루는 특유의 직설화법이 그대로 묻어 있다. 사진을 매개로 낙후된 영국 북부의 마을에서 인물들이 만난다. 먼저 TJ는 석탄 산업의 쇠퇴로 인해 가족들과 흩어져 사는 인물로, 그가 사는 곳에 시리아 난민들이 유입된다. 그중에 야라가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품이나 다름없는 카메라를 들고서 자신의 삶을 기록한다. 전쟁으로부터 도망친 약자를 대표하는 야라의 상황을 TJ가 도우면서 두 그룹이 소통한다. 다소 도식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명백한 상황의 대치를 통해 영화는 묻는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 어떻게 희망을 찾을 수 있겠냐고. 이 영화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켄 로치가 이전에 만든 무수한 영화들과 맞닿아 있다. 사실주의가 강조된 켄 로치의 미학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그가 처음 영화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63년 에 입사하면서였다. 작은 극단에서 연극 무대에 잠시 오른 적은 있지만, 방송국 입사 이후 처음으로 그는 영상연출을 맡았다. TV 프로듀서였던 토니 개릿은 그의 스승이자 파트너였다. 1960년대 켄 로치는 독립적으로 작품을 연출하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이 <캐시 컴 홈>(1966)이다. 켄 로치는 사회적 픽션드라마의 방식을 시도했고, 이때 다큐멘터리 기법을 이용한 연출에 확신이 생겼다. 사회복지제도가 어떻게 가족을 해체하는지를 영화는 홈리스가 된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한다. 여느 위대한 소셜 필름들처럼 이 영화는 사회의 규칙을 바꾸는 데 일조한다. 작품의 영향으로 노숙자를 위한 영국의 법률이 수정된 것이다. TV영화가 아니라 공식적인 장편영화 데뷔는 <불쌍한 암소>(1967)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영화는 장차 켄 로치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현실적인 스타일을 구축한다. 그리고 1970년 <케스>(1969)로 그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대받는다. <케스>는 매를 길들이면서 힘든 일상을 잊으려는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이 두 번째 장편영화가 영국의 평단과 대중 모두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이후 본격적으로 <가족 생활>(1971)을 통해 그는 해외에서도 유명해진다. 당시 <가족 생활>은 단순한 사회학적 가치를 넘어 일종의 로베르토 로셀리니적 연출법으로 조명받는다. 형식적으로는 ‘일반 다큐멘터리’의 방식을 차용하지만, 인터뷰를 병치해서 ‘시네마베리테’ 기법을 활용하며, 문제의 본질을 폭로하기 위해 TV영화의 ‘픽션’ 방식을 사용한다는 면에서 구성적 독창성을 보인다. 동시에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대상을 뒤쫓지 않는다는 특징도 지닌다. 드라마틱한 내러티브로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독은 철저히 사건을 방치한다. 액션 자체보다 이후의 해설이 더 중요한 영화, 담론 중심의 리얼리즘이 그렇게 시작된다. 켄 로치의 영화는 소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소재를 반사시키는 수단이 된다. 이것이 1970년대 켄 로치가 이룩한 미학의 본질이다. 실상 이 방식은 일찍이 로셀리니가 설명한 ‘현실의 촬영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대중을 유혹하고 싶지도 않고 설득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나는 제안하고 싶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이다.” 로셀리니의 전통적인 리얼리즘 코드가 켄 로치의 영화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영화에서 관객들은 상황과 등장인물의 논리가 끝날 때까지 그저 지켜만 본다. 오락영화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프로파간다의 방식은 더더욱 아니다. 이처럼 미장센이 아닌 카메라의 앞에 놓인 그대로가 중요해지는 사실주의를 일컬어 질 들뢰즈는 “이건 투시적 영화이지, 더이상 액션이 아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사회적 사실주의라고 정리되는 이러한 창작법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감금’의 상황을 겨냥한다. 켄 로치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오직 상황 내에서만 고통받는다. 그리고 상황의 바깥으로 결코 탈출하지 못한다. 행정적 시스템에 따른 사회의 비밀스런 사실성은 매우 단단하게 인물을 감싸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극이 전개되는지 혹은 구성되는지가 아니라, 인물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중심으로 관찰해야 한다. 심지어 켄 로치는 “정부가 사람들을 빈곤에 빠뜨리려는 고의적인 잔인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며 비난하기도 한다. 반복된 형식을 통해 드러낸 메시지 이번 영화 <나의 올드 오크>에서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84년은 마거릿 대처의 집권기이다. 사실상 켄 로치는 자신의 모든 영화에서 마거릿 대처의 반사회적 정책에 반대한다. “1960년대까지 사람들은 낙관적이었다. 급여는 낮았지만 안전이 보장되었고, 직업을 가진 이들이 모두 생계를 꾸릴 수 있던 시대였다.” 그는 그 시대를 대처가 망쳤다고 주장한다. 사실 켄 로치와 마거릿 대처는 둘 다 옥스퍼드대학교 출신이고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로치가 보기에 대처는 철저하게 특권층 지향적이었다. 2016년 프랑스 일간지 <레제코>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처의 시대를 포격했다. “가장 나쁜 점은 대처의 이념에 독창성이 없다는 것이다. 시카고학파의 이론을 유럽으로 수입한 것뿐이다. 1970년대 이미 실패한 자본주의 형태를 1980년대에 되살렸고, 기업간 경쟁에서 비용 때문에 직원 수를 줄이고 실업률을 높이는 것을 방치했다.” 대처식 자유주의경제 정책의 폐해는 영화 <하층민들>(1990)과 <레이닝 스톤>(1993)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과 살기 위해 인물은 저임금으로 착취당하거나 사회적 불의에 희생당한다. <뉴욕타임스>의 소개처럼 켄 로치는 철저하게 ‘노동자계급의 영화 제작자’이다. 그가 국제 무대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른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이다. 아일랜드 분쟁이나 스페인 내전, 니카라과의 사회주의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메시지만큼 미학적으로도 크게 인정받는다. 그 결과가 칸영화제 수상으로 이어진다. <숨겨진 안건>(1990)과 <레이닝 스톤>이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내 이름은 조>(1998)는 남우주연상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은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리고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2012)가 다시 한번 심사위원상을,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가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그에게 안겼다. 간혹 그의 영화가 너무 심심하다고 투덜대는 관객을 발견한다. 주제가 겹치지 않더라도 영화적 형식이 반복되는 것을 피로해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이번 영화 <나의 올드 오크>도 마찬가지로 사회적 빈곤의 희생양들이 영화 중심에 등장하고, 이후 그 인물들이 도망칠 방법이 없어지며 갈등이 심화된다. 결국 시스템의 반복이다. 사회의 방치로 유발되는 상황, 하지만 영화는 그 원인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으로 훼손된 어떤 삶의 일부를 묘사할 따름이다. 서사의 중심에 인간성과 개인을 배치한 뒤, 영화는 모든 관심을 일부의 현실로만 따돌린다. 그렇게 사회적 문제를 타파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남지 않는다. 무자비한 자유주의에 짓밟힌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여 기존 시스템보다 더 강해지는 것, 이 방법뿐이다. 영화 초반부에 드러나는 사진 속 ‘더럼 광부 축제’는 영화의 말미에 ‘용기 연대 저항’으로 변신한다. 생각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영화, 대신 그 속에는 뜨거운 진정성이 담겨 있다. 켄 로치가 형식적인 반복을 회피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모든 갈등의 근원을 동일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태도 때문인지 모른다. 영화 속 잉글랜드 북부의 소외된 주민들과 시리아 전쟁에서 탈출한 난민들은 모두 고통받는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질서를 들추어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비극의 순간을 바라보며, 어쩌면 그 순간들이 매우 평범해 보인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온다. 무명 배우를 유명 배우로 진정성을 연출하기 위해 켄 로치는 비전문 배우들을 선호한다. 영화 속 인물과 비슷한 인생을 산 사람들을 캐스팅한다. <나의 올드 오크>의 주인공 데이브 터너(사진)는 약 30년간 소방관으로 일했고, 잉글랜드 더럼의 펍에서 근무했다. 그는 친구의 추천으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오디션을 보았고, 이후 <미안해요, 리키>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으며, 이번에는 주연배우가 됐다. 조연급 배우가 켄 로치의 영화를 통해 이름을 알리는 경우도 있다. 로버트 칼라일은 <하층민들>을 통해 국제 무대에 처음 등장했고, 피터 뮬란 역시 같은 작품으로 활동한 뒤 <내 이름은 조>의 주연이 됐다. 이 작품으로 그는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는다. 그리고 영화배우 경력이 있는 축구선수 에릭 칸토나는 <에릭을 찾아서>(2009)에서 본인 역할로 등장한다. 이후 그는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배우로 활동한다. 켄 로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단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킬리언 머피다. 사실 그가 이름을 알린 것은 <배트맨 비긴즈>(2005)인데, 켄 로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캐스팅 조건은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일 것’ 단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