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기획] 안녕? 에반게리온, 21세기 오타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탐하다

1월17일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이 국내 최초로 정식 개봉한다. 덩달아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포함한 신극장판 4부작도 함께 재개봉한다. 신극장판이야 21세기의 연작이니 그닥 놀랄 일 없지만,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총체적 내습 중심에 있단 사실이 흥미롭다. 19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시작으로 전세계 서브컬처를 지배했던 세기말의 상징이 왜 2024년 한국 극장가를 찾았을지에 의문이 이는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의 훌륭함을 새로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세기말의 거대한 문화적 현상으로 기록된 이 작품에 대해서라면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세계 오타쿠들이 각자의 경전을 집필해놨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의 손가락이 한컷에 몇번 떨렸는지가 프로이트적으로 어떤 의미냐는 것까지 의미화돼 있을 정도니 덧붙일 말이 없다. 지금 궁금한 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란 물리적 유물이 한국 극장가의 젊은 관객층을 과녁 삼아 개봉하는 배경과 이유다. 최근 한국의 SNS에서 텅 빈 눈으로 턱을 괴고 있는 신지의 이미지가 레트로풍의 밈으로 통용되는 유행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건 에반게리온이란 브랜드가 한국 문화계에 지엽적으로 살아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의 단면이지 젊은 오타쿠들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기다리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근본적 근거로 보긴 어렵다. 지금은 차라리 에바의 전성시대인 90년대를 몸소 겪지 않은 20~30대 초반 관객들이 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자신의 시대처럼 여기는지, 신극장판이 아닌 20세기 에바의 도래를 기다리는지가 더 궁금하다. 에반게리온 3세대, 애니메이션보다 큰 텍스트를 경험하다 한국의 에반게리온 세대는 크게 3개로 구분된다. 1세대는 동시대의 에바를 실시간으로 체험한 90년대 오타쿠들이다. “90년대 말 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에반게리온과 함께 성장”(<씨네21> 1380호,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실패에 머물지 않은 힘과 끝내 버릴 수 없는 마음’, 송경원)했으며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덕질을 시작”(<씨네21> 1320호, ‘안녕, 모든 에반게리온’, 이경희)한 80년대생의 이른바 에바 키즈를 일컫는다. 이들은 조악한 DVD나 해적판 CD 등으로 에반게리온을 봤고, 일본 문화 개방의 시류에서 재패니메이션을 탐닉하며 에반게리온에 대한 현지의 신격화도 수입했다. 2세대는 신극장판 4부작으로 유입된 세대다. 2008년 <에반게리온: 서>로 에바 경험을 시작한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태생이다. <에반게리온: 서>가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고 공식 개봉하면서 2세대는 “생각보다 별거 없다”라는 냉소를 보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00년대 후반은 에반게리온이 나가이 고의 <데빌맨>을 혼성 모방한 결과라거나, 비슷하게 영지주의를 기반으로 한 엔도 히로키의 이 더 낫다든지, 니헤이 쓰토무의 <블레임!>이 더 깊고 진한 SF라는 등의 다양한 취향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을 때였다. 1세대 에바 키즈마저 이미 완벽하게 마무리된 원작을 굳이 21세기에 리부트하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3세대는 90년대 중후반 이후에 태어나서 에반게리온의 황금기를 실시간으로 체험하지 못한 세대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탄생과 함께 1997년 7월에 태어난 필자처럼 에반게리온이란 작품보단 그것의 공고한 신화를 텍스트로 먼저 접했던 이들이다. 우리는 성장기에 애니메이션 전문 TV 채널인 투니버스와 챔프를 통해 <포켓몬스터>, <디지몬 어드벤처> 시리즈,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명탐정 코난>, <이누야사> 등을 보면서 재패니메이션과 친밀해질 수 있었다. 그 친밀함이 과해진 몇몇 아이들, 흔히 말하는 오타쿠 친구들은 2010년대 초반 무렵부터 <케이온> <슈타인즈 게이트> 혹은 하쓰네 미쿠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들은 더 마이너한 작품과 고전을 디깅하려는 욕구를 나타냈고, 그런 욕구의 끝에는 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기성세대도 구하기 어려웠던 정식 발매 DVD를 사기란 꿈도 꾸기 어려웠고 TV에선 작품을 제대로 방영해주지 않았으며 합법 스트리밍 서비스도 없었다. 물론 반에 2~3명씩 있는 모종의 전문가들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작품을 접하고 PMP에 파일을 받아오곤 했으나 그것을 모두가 돌려 볼 만큼 당시 오타쿠 문화가 양지에 있진 않았다. 그럴 노력으론 <은혼>을 돌려 보거나 만화방에 가서 <기생수> <20세기 소년> 같은 걸작 만화를 보는 편이 수월했다. 다만 동시대 오타쿠들은 에반게리온에 대한 표면적 정보에 다들 신기할 정도로 해박했다. 작품을 보기도 전에 ‘1행성 1씨앗의 원칙’이니 ‘세피로트의 나무’니 하는 정보들을 착실히 예습해놓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아즈마 히로키 같은 공인된 저자를 중학생이 볼 리는 만무하다. 대신 인터넷의 온갖 위키나 커뮤니티를 탐독했고, 온라인의 에바 사도들이 적층해놓은 파편적 텍스트를 풍족하게 수집했다. (우리 세대에 에반게리온의 대표적 석학으로 알려진 네티즌 ‘엄디저트’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표합니다.) 이처럼 텍스트로 배운 ‘인류보완계획’을 에반게리온이란 시청각 교보재로 실습했던 것이 3세대의 일반적인 에반게리온 경험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2021년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를 통해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이 유통될 때쯤이었다. 3세대에 속하는 오타쿠들이 “안녕, 모든 에반게리온”이란 문구를 마주하며 자신의 시대를 떠나보내는 양 눈물을 흘렸다. 2년 후,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기다리는 반응은 더 심하다. 극장에 가기도 전에 (필자 역시) 이미 울고 있다. “안녕, 디지몬. 네 꿈을 꾸면서 잠이 들래~”(<디지몬 어드벤처> ED)에 우는 일이 시대적으론 더 마땅할 이들일 텐데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울고 있는 거야? 왜 울고 있지?”라며 영문도 모르게 눈물 흘리던 3번째 아야나미 레이(<신세기 에반게리온> 23화)처럼 우리는 직접 겪지도 않은 에반게리온에의 향수와 애정, 어떠한 성장의 기억을 만끽하고 있다. 3세대들이 에반게리온을 자신의 시대로 끌어온 이유는 오타쿠로서의 본능이다. 이를테면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긴 다소 머쓱하다. 그러나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와 유사한 주제를 지닌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좋아한다고 말하긴 쉽다. 80~90년대 재패니메이션 산업의 황금기가 만든 고품질의 외양과 90년대 한국 오타쿠들이 쌓은 철옹성 같은 경전들이 이것을 가능케 만든 것이다. 의도적으로 선정적이거나 별 뜻 없이 장황한 데쿠파주일지라도 에반게리온은 걸작이고 현상이며 공인된 소비이므로 괜찮단 의견이 가능하다. 애니메이션 문화를 좋은 예술로 추대하고자 하는 오타쿠들의 정당한 욕구가 2024년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개봉을 고대하는 무의식적 집단 전략으로 발현되었다고 하면 과도한 해석일까. 의도했든 아니든, 에반게리온이 3세대 에바 오타쿠들의 동시대적 신화로서 조작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의 일본애니메이션 저변을 확대 시킨 동력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지속 가능한 오타쿠의 꿈, “있을 것”으로서의 에반게리온 그렇다면 왜 3세대의 조작된 향수이자 생존 전략으로 선택받은 것이 시대적으로 더 가까운 21세기의 신극장판이 아니라 20세기의 구 에반게리온일까. 이는 구 에반게리온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이란 매체의 근본적이고 음습한 욕망을 가장 잘 충족해줄 수 있는 덕택이 아닌가 싶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의 허구성을 ‘여기-있음’으로 여기고, 사진 매체의 경험을 ‘여기-있었음’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든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고, 사진은 놀라울 만큼 이전의 시간을 비논리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다(<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 유운성 지음, 보스토크프레스 펴냄). 애니메이션은 ‘여기-있을 것’을 바라는 매체다. 영화, 사진과 달리 애니메이션은 현실에 없는 시공간을 창조한다. 창작자의 순수한 망상일 뿐 실제로는 “없던 것”이자 “없는 것”의 표현이다. 내가 선택받은 에반게리온 파일럿이고 예쁘고 능력 있는 어른(미사토), 또래(아스카, 레이)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세계가 “있을 것” 혹은 “있기를 바라는 것”의 욕망이 이 망상을 생동하게 한다. 애니메이션이란 매체는 현실감과 동떨어져 있을수록, 실재에 재현되지 않을수록 매체의 존재론적 가치를 충족하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 에반게리온을 향수를 부르는 과거 시제의 작품도 아니고, 동시대를 함께 나아가는 현재 시제의 작품도 아닌 미래 시제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솔직하다. 하나의 사례가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26화 중후반엔 신지가 맞이할 수 있었던 대체 현실이 잠깐의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아스카는 매일 아침 신지를 깨우러 온다. 토스트를 물고 처음 등교하던 전학생 레이는 신지와 부딪히며 얼굴을 붉힌다. 아스카와 레이가 신지를 두고 아웅다웅하는 식의 청춘 코미디가 그려진다. 그러나 이 상상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결말보다 행복한 대체 현실이 (적어도 오타쿠들에겐) 아니다. 잠깐 반짝하는 청춘의 삼각관계 속에서 철없이 웃는 신지의 모습은 현실과 어느 정도 가깝기에 공감할 수 없다. 여학생 둘과의 삼각관계야 (내가 아니더라도) 주변 친구들에게 으레 있는 일이겠지만, 철저한 하렘의 세계 속에서 인류의 최종 병기 에반게리온을 조종하고 서드 임팩트를 일으켜 본인의 의지대로 세계를 재편한단 로망이란 너무 허무맹랑하기에 “있을 것”을 가장 잘 욕망할 수 있게 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26화의 사례처럼 신극장판의 낙관 역시 오타쿠들의 진정한 필요가 아니었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결말은 “그럼에도 다시 한번 인간들과의 소통을 이어가보자”는 단언적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세기말 오타쿠들의 니즈는 달랐다. 한줌의 희망보단 거대한 절망을 지지했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결말 이후에 있을 신지와 아스카의 미래보단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신지와 “기분 나빠”라고 말하는 아스카의 이미지에 열광했다. 내면의 결핍이란 극복의 대상보다 멜랑콜리한 감수성이 되었고, 레이와 아스카를 향한 이성적 욕망과 신지의 그릇된 행위들은 묘한 신비감과 정당한 사랑으로 포장됐다. 이에 안노 히데아키는 구 에반게리온이 본인의 미완성 작품이며 실패작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대놓고 희망적이고 건전한, 착한 어른들이 나오는 신극장판 4부작을 내놓았다. 신지와 아스카(혹은 레이)의 커플 관계를 공식적으로 무너뜨리기까지 한 것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둘러싼 일련의 부작용을 일축하겠단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기말 1세대 에바 키즈의 경전을 고스란히 학습한 3세대에게 신극장판은 거절당했다. 영화와 다시 비교해보자. 프랑스 누벨바그 시대의 자유나 고전기 할리우드의 낙관,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가 보여준 90년대 한국 시네필 문화의 황금기가 불가역의 과거임에도 현재화하길 바라는 시간이라면 구 에반게리온은 지금에도 그 바람이 유효한 모든 오타쿠의 불가능한 미래다. 90년대든 2010년대든 2023년이든 사회 어딘가에 있는 아웃사이더와 몽상가들의 지향점, 오타쿠가 꿈꿀 수 있는 최적의 이상향인 동시에 현실엔 절대 도래하지 않을 불가능한 시간이다. 그러니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개봉을 기다리며 흘리는 오타쿠들의 눈물은 에반게리온을 매개로 하여 꿈만 같던 어릴 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년들의 순수가 아니다. 어딘가 어긋난 소년의 욕망이 완전무결의 걸작으로 남았으니 이 상황을 적절히 만끽하자는 설렘과 죄책감의 혼합에 가깝다. 이 욕망과 서브컬처의 소비 방식을 부정하거나 매도할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다. 작품의 훌륭함에 흠집을 내려는 목적도 아니다. 에반게리온을 각자의 취향에 맞춰 소비하는 것 역시 에반게리온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이들의 특권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며칠 후 극장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보러 갈 때 무작정 “안녕, 에반게리온”이라며 낭만적인 재회의 인사를 건네기는 영 찝찝하다. 대신 “안녕? 에반게리온”이라며 조금은 낯설게 첫인사 나눌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듯싶다.

[인터뷰] 말맛 나게, 속도감 있게, <러닝메이트> 한진원 감독

<기생충>의 공동 각본을 맡았던 한진원 감독이 저택과 반지하 집이 아닌,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자신의 첫 연출작으로 선보인다. <러닝메이트>는 ‘발기남’이라는 별명을 얻는 바람에 이미지 쇄신이 필요했던 영진고 모범생 세훈(윤현수)이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는 친구 원대(최우성)의 러닝메이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머지않아 자신이 원대의 유일한 러닝메이트가 아니란 걸 알게 된 세훈은 ‘지역구 핵인싸’ 상현(이정식)과 손잡고 새판을 짠다. 한진원 감독은 연출은 처음이라 모든 게 부족했다며 겸손을 표하면서도 <러닝메이트>가 유망한 젊은 신인배우들의 보고와도 같은 작품이 될 거라 확신한다며 눈을 반짝였다. - 2014년에 한 친구에게 이메일로 연재한 소설 <소라게>가 <러닝메이트>의 원안인 걸로 알고 있다. 여러 가지 포인트가 맞물려 시작된 이야기다. 연출부를 그만두고 다시 뭘 써볼까 작정하고 고민하던 시기에 1인칭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경도되어 있었다.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버리게 해준 <미생>을 보면서 어떤 세계관 속에서 부딪히고 성장해나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았다. 여기에 학생회장 선거에 관한 실제 기억까지 붙으면서 이야기가 점차 꼴을 갖췄다. 일인자가 1등 하는 이야기에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인지라 이인자가 주인공인 <러닝메이트>를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주인공감이 아닌 세훈이 어떻게 선거의 중심에 서게 되는지를 비롯해 다양한 캐릭터를 살려줄 세계관 설명이 총 9부작 중 3부까지 이어진다. 신선하고 젊은 배우들, 내 또래의 80년생들로 꾸린 키 스탭들과 비만 안 오면 뭐든 찍을 수 있다는 열정으로 만든 내 첫 연출작을 못 잊을 것 같다. - 2020년대의 10대들은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한 자료 조사가 필수였을 것 같은데. 10대 동생이나 학생 조카가 있는 연출부가 그들에게 들은 바를 전해주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조사도 하고, 때에 따라서 직접 취재를 나가기도 했다. 그랬지만 결국 원안에서 크게 바뀌진 않았다. 단어 하나를 두고 요즘 쓰는 신조어가 맞다 아니다 따지고 드니 대본 쓰면서 감당이 안되더라. 조금만 지나도 그 신조어들이 다 옛말이 될 걸 생각하니 더더욱 고증에 집착하지 말아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 각양각색의 선거 유세, 각종 꼼수와 비리, 네거티브 전략을 보는 재미가 클 것 같다. 당연히 빠질 수 없는 재미다. 실리를 따져 캠프를 이리저리 옮겨다니기도 하고, 크고 작은 배신이 이어지고 빌런이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빌런이 아닌 반전도 벌어진다. 특색 있는 선거송과 응원 구호를 만들기 위해 구본춘 음악감독과 처음부터 신경을 많이 썼다. 배우들은 촬영 몇달 전부터 서강대학교 응원단 학생들과 함께 연습에 매진했다. 어디서 훈련하든 늘 과한 열정으로 시끄럽다고 쫓겨나 송준 프로듀서가 장소를 물색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웃음) 모두가 불사른 퍼포먼스 장면들이 뮤직비디오 스케치처럼 극에 담겼는데 아주 마음에 든다. - ‘본격 명랑 정치 드라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 빠르고 발칙한 느낌의 드라마일 거란 예상도 든다. 에드거 라이트 작품의 속도까지는 엄두가 안 나고 평소 존경하고 좋아하는 에런 소킨 작가의 <소셜 네크워크>처럼 리드미컬한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작업했다. 편집 과정에서 질질 끈다고 느껴지는 구간이 없도록 신경 쓰고 대사의 말맛, 인물들의 티키타카를 살리고자 했다. 레퍼런스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작품은 알렉산더 페인의 <일렉션>이다. 역시 고교 학생회장 선거를 다루는데 다양한 인물이 가진 각자의 사정을 맛깔나게 풀어나가는 방식을 보며 도움을 받았다. - 기존의 익숙한 어른들의 정치 드라마와는 어떻게 다를까. 음흉하고 속을 모르겠는 어른들에 비해 10대들은 솔직하고, 감정을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다는 게 내가 파악한 젊은이의 특징이다. 그런 모습을 대놓고 담았다. 화난다고, 이기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사고뭉치처럼 보이는 친구는 진짜 사고를 치고 다닌다. 그래서 보면서 시원하다고 느낄 수 있겠다. 끝까지 학생들이 주축이었으면 해서 교사, 학부모 등 어른들은 거의 등장시키지 않았다. - 세훈 역의 윤현수, 상현 역의 이정식 등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 젊은 배우들에게서 어떤 매력을 발견하고 캐스팅했는지 궁금하다. 윤현수 배우는 첫 만남에 ‘이 친구가 세훈이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막연히 떠올렸던 세훈의 얼굴과 말투를 다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오자마자 화장실 먼저 가겠다면서 어딘가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것까지 세훈 그 자체였다. 함께 작업하면서 <미생>에서 임시완 배우를 발견했을 때만큼의 충격을 윤현수 배우에게 받았다. 이정식 배우는 데뷔한 지는 꽤 됐으나 아직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보석 같은 친구다. 보통 오디션에서 신인들은 폭발시키고 자신을 드러내는 연기를 하기 마련인데 이정식 배우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풀어냈고 그 와중에 연기력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다. 서늘한 면과 아주 나이스한 면을 동시에 가졌는데 그 점이 상현에게도 있어 잘 어울렸다. 세훈과 상현이 상반된 느낌이었으면 했는데 윤현수 배우가 본능적이고 상큼 발랄한 매력이 있다면 이정식 배우는 진중하고 무거운 매력이 있어 흡족하다. 촬영 다 끝나고 이정식 배우에게 이런 말을 건넨 적 있다. “앞으로 네가 어떤 배우인지는 <러닝메이트> 하나로 다 설명될 거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 모두에게 <러닝메이트>가 든든한 데모 영상이 될 거란 기대와 확신이 있다. 작품이 공개되고 나면 아마 모두가 배우들 때문에 들썩일 것이다. 한진원 감독이 말하는 관전 포인트 “제목에 ‘러닝’이 들어가서일까. 세훈이 버스 정류장으로, 학교로, 그 어딘가로 달려가는 장면이 정말 많다. 달리는 순간마다 세훈의 감정 상태가 다 다른데, 그때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뛰는지 주목해주길 바란다. 세훈의 감정을 매번 고스란히 띄우는 윤현수 배우의 얼굴도 놓치면 안된다.” 제작 블레이드이엔티, 에이스메이커 스튜디오, 러닝메이트 / 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 감독 한진원 / 각본 한진원, 홍지수, 오도건 / 출연 윤현수, 이정식, 최우성, 홍화연, 이봉준, 김지우, 옥진욱, 윤도건 / 채널 티빙

[WHO ARE YOU] ‘이재, 곧 죽습니다’ 전승훈

하정우의 온라인 연기 클래스를 구독했다. 바리캉으로 직접 머리를 밀었다. 오디션 결과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까까머리를 하고 본 오디션 <피타는 연애> <신병> <도적: 칼의 소리>에서 전승훈은 끝내 배역을 거머쥐었다. “깡패, 일진, 군인 그리고 외국인” 역할을 다 해봤을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운동선수”를 더하며 웃었다. 192cm의 키. 개성파 장신 배우 계보 속 뉴 페이스는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 일진 그룹의 이인자 나태석 역으로 <씨네21>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왜, 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 지독한 해석파인 그는 단 한회 등장하는 작은 배역의 깊은 마음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일진 사회의 역학에서 치욕만을 느껴온” 웹툰 캐릭터 나태석은 전승훈을 만나 “힘으로 이진상(유인수)을 제압해 일인자가 되고 싶지만 반란이나 혁명이 차단된 상황에서 갈등하는 입체적인 양아치”로 완성됐다. 동네 교회에서 성극을 하면서 연기의 맛을 본 중학생 전승훈은 모델학과 입시를 준비하며 처음으로 연기 수업을 받았다. 전역 후엔 엎어진 독립영화 연출부에서 반년을, 캐스팅 에이전시 말단 직원으로 2년간 일하며 치열하게 오디션에 도전했다. 그는 자신이 차곡차곡 프로파일링해온 필승법을 풀어놓았다. <피타는 연애>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난닝구에 페인트칠한 조거 팬츠를, <신병> 때는 <피키 블라인더스>에 나올 것 같은 빵모자를 쓰고 오디션을 봤다. <이재, 곧 죽습니다>는 비니로 눈을 덮고 바람막이에 슬리퍼를 신고 나가 감독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맞는 옷을 찾기 위해 어디든 간다”는 그는 동묘 구제시장을 돌며 다음에 올 오디션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배우로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곳도, 그리고 가면을 쓰지 않은 온전한 내가 있는 유일한 장소도 침실”이라 말하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정의 전승훈은, 오디션에서만큼은 오늘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된 홈 메이드 배우다. FILMOGRAPHY 영화 2021 <샤크: 더 비기닝> 2020 <운봉> <깡치2> <조선주먹> <미스터 보스> 드라마 2023 <이재, 곧 죽습니다> <도적: 칼의 소리> <신병2> 2022 <신병> 2018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

[인터뷰] 현실적인 얼굴, ‘선산’ 배우 김현주

모든 문제에 명랑하게 맞서 싸우는 로맨스의 여자주인공. 하이틴 스타. 겨울철 우동 광고의 주역. 배우 김현주는 대중에게 해사한 얼굴로 기억돼왔지만 그는 차갑고 날 선 맏딸의 얼굴로(<가족끼리 왜 이래>),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선 변호사로(<왓쳐>), 광기에 치달은 세상에 저항하는 사람으로(<지옥>) 계속해 변주해왔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과 <정이> 이후 세 번째로 연상호 감독과 항해하는 김현주는 그의 기획 아래 민홍남 감독과 <선산>의 윤서하를 그려낸다. 김현주가 처음 바라본 서하는 메마른 가지 같았다. “윤서하는 알 수 없는 불운에 둘러싸인 피폐한 인물이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에 차 있거나 의협심이 넘치기보다 필요에 의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비굴함도 지니고 있다.” 가족 관계에서 불어나는 재앙 앞에 선 서하를 이해하기 위해 김현주는 그의 결핍을 먼저 생각했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다. 그런 절대적 존재에게 버림받은 경험으로 서하는 상처를 끌어안고 자랐다. 서하가 결혼을 빨리 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서하가 남편을 뜨겁게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어릴 적 결핍과 연쇄적으로 이어져온 실패들에 자존감이 무척 낮아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삶에 이렇다 할 미련도 바람도 없는 서하가 선산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고 판단했다. 상속과 선산이라는 단어가 자극하는 강렬한 이미지는 보상 없는 서하 인생의 잠든 욕망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가족들 사이로 기묘하게 벌어지는 사건의 범인을 찾는 건 <선산>이 의도한 재미이기도 하다. 추리의 기로에 시청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김현주는 의구심을 높이는 디테일을 살렸다. 서하는 범인인가 아닌가. 이 질문에서 사람들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발걸음부터 문 닫는 제스처까지 신경 써 표현했다. 일종의 재난 같은 상황 속에 속절없이 애타 하면서도 중간중간 묘한 개운함을 드러내는 건 극을 자유자재로 이끌어가는 김현주의 힘에서 탄생한다. 특히 <선산>이 누적해가는 불행에 서하가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서사의 진도에 따라 감정의 밀도를 높여갔다. “작품 속에 중복되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 감정을 점층적으로 표현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단계별로 인물의 상태를 쌓아가서 마지막에 폭발시킬 때 시청자가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인물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게 내게 주어진 과제라 생각한다. 그래서 같은 한숨이어도 조금 더 얕거나 크게 내뱉고, 상대방의 말에 반응을 해도 무음으로 하거나 작은 욕설로 내뱉는 차이를 준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몇 차례 MBTI를 빌려 자신을 설명하던 김현주의 모습은 앳된 서울 사투리를 쓰던 지난날의 김현주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MBTI로 표현된 상상력과 계획성은 그를 만나 전문가의 항목으로 분화된다. 장르물이 지닌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현실적인 얼굴로 다가오는 윤서하가 그의 힘을 증명한다.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넌 Roller Coaster

(청하, 2018) 청하의 를 들을 때 나는 언제나 B를 떠올린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에 만난 B는 PC방 야간 아르바이트 동료였다. 빈자리가 도통 나질 않는 대학가 인기 PC방에서 나는 청소와 고객 응대를 맡았고, B는 간편식품을 조리하고 배달하는 것을 담당했다. 기억 속 B는 항상 바쁜 사람이었다. 일찍 졸업하고 싶어서 계절학기를 듣는다던 그는 편의점, PC방, 교습학원 보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친구들의 펑크난 아르바이트를 메꿔주는 만능 대타로도 활약했다. 그래서 B의 무단결근은 큰 사건이었다. PC방 사장은 B가 일하는 1년 동안 단 한번도 연락 없이 잠수를 탄 적이 없었다고 몇 차례나 반복해서 말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 B가 걱정되는 건 사장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일전에 딱 한번 가본 적 있는 B의 집을 찾아갔다. B의 이름을 부르면서 초인종이 없는 쇠문을 노크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곧장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갑자기 너무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몇번 반복하니 내가 피운 소란 때문에 옆집에 살던 사람이 나와서 항의를 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나는 또 한번 비명을 질러 그를 놀라게 했다. 계단에서 B가 나타난 것이었다. B는 몇 개월간 같이 일하면서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방긋 웃으며 ‘언니!’라고 해야 할 B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띠껍게 바라봤다. 갑자기 화가 난 나는 “그렇게 연락 없이 안 나오면 어떡해! 니 일까지 내가 다 했잖아!”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B는 대꾸 없이 문을 열었고 내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B는 신발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술 취한 고객이 짜증을 내며 시비를 걸 때도, 환기가 하나도 안되는 창고 안에서 궁상맞게 끼니를 챙길 때도 늘 노래를 흥얼거리던 B가 그날 밤은 내 앞에서 통곡을 했다. 우리는 서로 많은 걸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각자의 사정도 대충 이해하며 일의 고충을 나누는 데에만 모든 우정을 다 썼다. 나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도 내게 그걸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B는 울음을 멈추고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나 또한 괜찮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골목까지 배웅을 나온 B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B가 눈이 퉁퉁 부은 채 말했다. “언니 혹시 내일 롯데월드 같이 갈래요?” 다음날 나는 모든 일정을 미루고 B와 잠실로 향했다. 태어나 한번도 놀이공원을 가본 적 없다던 B는 ‘타고난 놀이공원 플레이어’였다. 기구와 스낵바를 번갈아 다니면서도 한번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 ‘천재적 동선 설계자’이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타는 미니 기구부터 롤러코스터까지 거침없이 섭렵한 B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까지 ‘몇번 더 탈 수 있었던 기회를 먹는 데 썼다’고 아쉬워했다. 우리는 환승역인 교대역에서 헤어져야 했다. 먼저 내릴 채비를 하고 있는데 B가 중얼거리듯 내게 말했다. “언니 저 이제 죽고 싶을 때마다 ‘후렌치 에볼루션’ 탈 거예요”라고. ‘후렌치 에볼루션’은, 아니 롤러코스터는 대기줄에서 나의 탑승 순서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경험이 시작된다. 저렇게까지 높이 올라간다고? 저 구간에서 저런 속력을 낸다고? 사람들의 비명이 섞인 바람이 귀에 꽂히는 순간부터 뱃속이 간지럽다. 뚱, 땅땅, 뚱, 땅땅, 뚱 땅. 앞에 탄 이용객이 전부 내리고 나의 탑승만을 기다리는 열차가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일정한 경고음을 낸다. 떨리는 마음으로 탑승을 하고 안전벨트를 맨다. 잔잔히 주행하던 열차는 조금씩 상승하다 작은 경사를 타면서 겁을 준다. 그리고 드디어 상승한다. 칙.칙.칙.칙.칙.칙. 뒷자리에 앉아 있을수록 그 진동은 더 크게 느껴진다. 열차가 가장 꼭대기에서 잠시 머물 때 숨을 훅 하고 들이쉰다. 전경을 눈에 채 담을 새도 없이 하강이 시작된다. 긴장감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에 온몸의 맥이 풀린다. 잠시 죽음을 경험한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열차는 그 순간 다시 상승을 하고 이후 거침없는 속도로 레일을 질주한다. 그러니까 청하의 는 이때 느낀 감정 일체를 고스란히 구현한 음악이다. ‘아-리-멤-버-베리-펄슽타임-인-럽’이라는 구간을 설레는 맘으로 조심스럽게 달리다 보면 ‘어머 이래도 되는 지 싶어’ 하는 고개를 만나고, ‘조금 서두르는 것 같아도 baby’ 하는 가짜 오르막 구간도 만난다. 그러다 열차가 조금씩 느려진다. ‘심장이 훅 내려앉는’, ‘상처받을까 걱정되’는 진짜 오르막이 시작된 것이다. 그 순간은 괜히 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상황인데 어쩔 것이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하.지.만.난.다.던.져.볼.래”를 외친다. 쉿, 하고 잠시 적막이 흐르다 나는 떨어진다. 아찔하고, 위험한 느낌이 든다. 안전벨트를 꼭 안은 나는 바닥까지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뒤이어 멈춤 없이 고개를 질주하는 구간. ‘넌 롤러코스터, 오오오’ 하는 멜로디는 여기서 붙은 것이겠구나. 눈앞에 보이는 모든 환상이 ‘꿈이 아니기를’ 바랄 때 열차는 이미 끝을 향해 달려 간다. 곡 전반에 깔린 마림바 소리는 그제야 들린다. 열차가 멈추어야 놀이공원 전체에 흐르는 오르골 소리가 들리듯이. ‘롤러코스터.’ 세차게 달린 기억과 상반되는 조금은 허무한 외침으로 곡은 끝난다. 마치 놀이공원을 퇴장하는 아쉬운 기분처럼. 청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청하를 싫어할 순 있다. 하지만 청하의 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 이상 반박하지 않길 바란다. 어쨌든 나는 이 노래가 청하를 만나 비로소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 그 이유는 몹시 주관적이다. 청하는 항상 누군가를 유혹하는 순간에 대해 노래하고, 그에 걸맞은 매혹적인 이미지를 연출하지만 그렇게 간절한 느낌이 아니다. 뭐랄까… 그건 마치 “안 넘어오는겨? 됐어~ 그럼~ 말어~” 같은 충청도 바이브에 가깝다(청하가 충청도와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전혀 애달프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나를 미치게 한다. 확실하게 유혹하지 않고, 뭐 하나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그 아리송한 마음에 왠지 나를 맡겨도 될 것 같은. 지금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이에게, “롤러코스터를 타보세요!”라고 하면 욕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청하의 를 들어보라고 권하는 것은? 그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이 노래가 만드는 수많은 긴장과 그에 대비되는 청하의 아리송한 바이브를 즐겨보라. 고통을 줄이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B 역시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때를 추억하고 있길 바라며.

[디스토피아로부터] 내부자들

“이준석은 언제 박차고 나갈까요?” 2023년 3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즈음 한 방송국 PD가 물었다. “아직은 있고 싶은가 봅니다. 영부인 못 건드리는 거 보세요.” 2022년 9월 도이치모터스 사건의 진상이 더 불거지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한 발언이 반박되었지만,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김건희’라는 금은 차마 밟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저도 살려고 그랬던 겁니다”?). 탈당을 예고할 무렵에야 야권의 김건희 특검론에 편승했는데, 그때도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천사”, “군계일학” 따위의 상찬을 늘어놨다. 고발사주 사건 전날 손준성 검사에게 보낸 이미지 60여장이 뭔지 설명하지 못하는 천사, 딸이 부당하게 만든 스펙을 대입에서 쓰지 않았음을 입증 못하는 일학이라. 그는 대통령을 바로잡으려다 밀려난 게 아니다. 자신이 밀려나는 수준에 맞춰 명분을 갖다붙였을 뿐. 그들이 한창 쿵짝이 잘 맞던 시절은 어땠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윤석열), “20대 여성은 어젠다 형성에서 뒤처져”(이준석), “여(女) 썰고”가 대표작이었다. “미공개정보 이용 주식거래 등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가 내려졌다는 것은 수사의 명분이 없었음을 증명합니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 후보 경선 중이던 2021년 8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정경심 전 교수 부부에 대해 낸 입장이다. 정 전 교수는 그 직전 항소심과 후일 최종심에서 입시 비리 혐의만이 아니라 미공개정보를 이용한 주식 장내매수 및 범죄수익은닉, 차명계좌 거래, 관련 자료 인멸 교사 등의 혐의에서도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국무총리로서, 또 여당 대표로서 당 주류와 극성 지지층의 허위 선동과 오판에 늘 봉사했다. “어차피 주인공은 다 정해져 있는 거란다”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일행이 아닌 척하는 것이다. 또 다른 탈당자 이원욱 의원은 2023년 8월 입시 비리로 기소된 조민씨에게 “어른으로서 사과”했다. 물증이 확보되고 4년 뒤에야 기소(이 기소편의주의는 민주당이 검찰개혁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된 공범에게 사과하며 “이런 실 하나 걸쳐주십사”. 이재명 대표 비판만 하면 쇄신파인가. “윤석열(이재명)만 아니었으면 국민의힘(민주당)은 쓸 만한 당이었다”고 믿는 이들끼리 이준석(이낙연) 신당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신당은 당권 투쟁의 확장이니까. 하지만 궁정 전투로 민란 분위기를 내려는 것은, 이강희나 조 상무 같은 ‘핵관’ 내부자들이 안상구나 주은혜, 우장훈을 연기하는 것은 관객 모독이다. 저들의 폐해는 거대 양당에 몸담고 있을 적 자당의 도덕적 문제를 악화시켰던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저들이 수시로 떠들던 ‘공정’이나 ‘청년’에 저소득층/블루칼라/비수도권/소수자들은 없었다. 다수면서도 배제된 2차노동시장과 따로 노는 정치판에 ‘개혁’이니 ‘대안’이니 달달한 것들이 남아 있기는 한가. “번데기 배때지를 갈라봐야 아는 것”이라던 안상구씨도 그냥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나 한잔할 일이다. 김수영의 시처럼, 태국에서 행동전진당이 그랬듯, “바람은 딴 데서” 외부자들로부터 불어올 것이다.

[리뷰] ‘비욘드 유토피아’, 지나치게 연민하지도, 지나치게 관여하지도

<비욘드 유토피아>는 탈북민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북한의 인권 실태를 폭로한 다큐멘터리다. 지금까지 낙원이라 믿고 자란 자국을 스스로 탈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기록했다. 어려서부터 서양 국가들은 야만적이고 참혹하다는 메시지의 동화와 동요를 접하고 자란 아이들은 오로지 북한만이 유일한 천국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북한에서 자행되는 아슬아슬한 정치 싸움과 지속되는 국민적 빈곤, 생존하기 위한 일상적 사투 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목숨을 내어놓고 강을 건넌다.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히면 극악한 고문이 이어지고, 북에 남은 가족들은 하릴없이 추방되고 만다. 탈북의 희망인 브로커들은 오직 돈으로만 움직이며, 그사이에 어린 여성들은 인신매매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만큼 벗어나는 것에도 엄청난 용기와 감내가 필요하다. 어릴 적 거쳐온 탈북 과정을 낱낱이 고백하는 이현서씨, 북한에 두고온 아들의 월남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소연씨, 이제 막 탈출을 감행하려는 노씨 가족 그리고 이들의 안녕과 무사를 지지하는 김성은 목사까지 영화는 국가적 현실만 조망하기보다 구체적인 개인의 이야기로 들어가 낯선 문화를 마주한 관객의 이해와 몰입을 돕는다. 또한 탈출 도중에 타의적으로 헤어지길 반복해야 하는 가족의 슬픔은 국가가 방치하고 외면한 북한 주민들의 현실을 가늠하게 한다. 이산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듯 이들은 그저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게 바람이고 소원이다. 무엇보다 <비욘드 유토피아>는 지옥 같은 현실을 눈앞에 둔 이들을 관찰하면서 지나치게 연민하지도 지나치게 관여하지도 않는 적절한 거리를 지켜낸다. <도희야> <시> 등을 제작한 김현석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다큐멘터리로서 지켜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또한 북한 인권의 실상을 드러내는 동안 그 말을 뒷받침하는 증거 영상과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신빙성을 높이고 감정적인 접근을 배제했다. 사실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을 첫 번째 미덕으로 삼은 정직한 다큐멘터리다.

[기획] 화제작 <추락의 해부>의 감정적 복잡성과 완성도에 대하여, 결백한 이야기는 없다

경쟁 영화들이 속속 면모를 드러내면서 일찌감치 그해의 복병으로 평가받았던 <추락의 해부>가 마침내 2023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을 때, 즉각 <피아노>(제인 캠피언), <티탄>(쥘리아 뒤쿠르노), 그리고 <추락의 해부>를 연대순으로 짚어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2013년 <에이지 오브 패닉>으로 칸 ACID에 입성한 지 10년 만에 쥐스틴 트리에는 자국의 가장 칭송받는 레드카펫에서 역대 세 번째 여성감독의 황금종려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학생 시위와 대통령선거 중에 찍은 단편영화들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은근한 반골 기질임을 추측하게 한 쥐스틴 트리에는 <빅토리아>(2016)와 <시빌>(2019)에서 여성 인물의 이면을 도발적으로 제시하는 데 겁 없는 만큼 세련된 감각을 구사하는 연출자라는 인상을 풍겼다. <추락의 해부>는 그런 기량이 정점에 달해 능숙한 테크니션의 기질도 엿보게 한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공으로 시작한 영화가 추락사한 남자, 휘청이는 신뢰와 고꾸라지는 감정들을 거쳐 마침내 소파 위에 잠든 개와 여자로 끝나기까지. 쥐스틴 트리에는 가족의 관계성 너머로 개인의 내부에 깊이 자리 잡은 수치심이나 좌절감, 예술가의 자기실현에 관한 문제를 법정의 양식 속에 녹여낸다. <추락의 해부>는 다가오는 3월, 이례적으로 프랑스 여성감독으로서는 처음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후보에 올랐을 뿐 아니라 작품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편집상까지 총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화제성을 계속 이어갈 모양새다. 남편이 죽은 후 아내가 의심받는 위치에 처하면 누아르적 긴장이 발생한다. 이때 여성은 미스터리의 영화적 현신이거나 팜므파탈로 기능하지만, 웃지 않는 독일인에 대한 편견을 제 방식대로 먹어치운 잔드라 휠러는 <추락의 해부>에서 차라리 포식자에 가깝다. 언뜻 간명하게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순간에서조차, 유능한 작가이기도 한 이 여성은 복잡하게 진술하기를 택한다. 이해와 오해, 어떤 쪽이든 철저히 타인의 역량으로 남는다. <추락의 해부>는 어느 오후 집 앞 눈밭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남자의 사망 사건을 파헤치는 법정 공방을 중심에 놓고, 독일인 작가 산드라(잔드라 휠러)와 프랑스인 남편 사뮈엘(사뮈엘 테이스), 11살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네르)이 거쳐온 복잡다단한 인생의 더께를 들춘다. 다중 시점을 효과적으로 허용하고 때로 관객과 인물의 시차를 벌리는 속임수로 흥미진진한 트릭의 문법을 선보일 수 있는 영화 매체에서 ‘진실’은 가장 각광받는 주제다. 진실의 가변성을 부각하며 그 해답 추구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영화, 진실의 다종다양함 속에서 그 불완전함을 통렬하게 꼬집는 영화, 혹은 그 모든 것들의 공존을 아름답게 찬미하는 영화들이 있다. 결론부터 끌어와 <추락의 해부>는 진실의 속성을 탐구하는 데 골몰하는 영화가 아니다. 관객을 의심하게 만들지만 카메라 뒤편의 답은 외려 견고히 설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길고 지난한 드라마가 주는 감흥은 따로 있다. 긴 시간 축적되고 변주될 뿐 아니라 산재하기 마련인 개인의 역사를 특정 시점에 성급히 간추리려 할 때에 발생하는 오류에 관해 <추락의 해부>는 낱낱이 파헤친다. 다수의 제3자가 끼어들 때, 그 어떤 기억도 주인으로부터 장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추락의 해부>는 주인공을 고집 센 작가로 설정해 그가 자기 삶의 내러티브를 어떻게 정리해내는지 관객이 지켜보게 만든다. 쥐스틴 트리에는 진실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논하기 좋아하는 시대에 모두가 얼마나 고독해질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마침내 자기 이야기를 모두 완성한 순간에, 개와 함께 소파에서 춥고 외롭게 잠드는 여자를 보여주는 장면은 가까스로 쟁취한 무고함이 깃털처럼 가벼워 되레 커다란 고독을 부른다는 사실을 발설한다. 복잡한 여자, 유죄 현재 일어난 일은 단 하나다. 알프스 산장의 다락층에서 남편 사뮈엘이 떨어져 죽었다는 것. 그러나 동시에 많은 사실들이 무질서하게 발굴된다.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여기에 다시 정리해본다. (※ 영화 관람 후 읽어주시길 바란다.) (1) 산드라는 유명 작가다. (2) 부부의 아들인 다니엘은 4살 때 오토바이에 치여 시신경을 잃었다. 이후 부부 사이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3) 산드라는 이 때문에 바람을 피운 적 있으며 남편은 한때 아스피린을 과다복용해 자살을 시도했다. (4) 산드라는 양성애자다. (5) 산드라 같은 작가가 되고자 했던 사뮈엘은 자신이 포기한 소설의 일부를 산드라가 표절했다고 주장한다. (6) 불륜, 표절, 그 밖에 가족구성원으로서의 부덕에 대해 피해를 호소하는 남편과 격렬히 싸우는 산드라의 목소리가 녹취록으로 남아 있다. (7) 그 녹취록이 아들 다니엘을 포함한 여러 방청객이 보는 앞에서 모니터에 자막까지 띄운 채로 낱낱이 공개되었다. (8) 한편 산드라의 소설 속에는 남편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서브 캐릭터가 나온다. 끝. 여기까지 적고 나서 문득 <추락의 해부>에서 산드라까지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해도 좋을까? 다행히 영화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고 법정 안의 얼룩덜룩한 진실이 언론에 모두 새어나가지도 않았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과 작가 아더 하라리가 집필과정에서부터 잔드라 휠러를 염두에 두고 쓴 <추락의 해부>는 어디까지나 산드라의 영화다. 사뮈엘의 죽음에서 ‘어떻게’를 탐구한 이들은 시신이 남긴 흔적에서 타살의 정황을 읽어내고 산드라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나 일단 법정에 선 이상 법의학적 증거는 극히 일부가 될 뿐이다. 이제 인생의 내러티브를 들고 싸워야 한다. 산드라를 의심가는 인물로 만드는 것은 두개의 교차하는 정체성이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것. 그리고 그가 대단히 강한 여성이자 유능한 예술가라는 것이다. 아니, <추락의 해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산드라를 종종 유해한 인간으로 보이게끔 유도한다. 쥐스틴 트리에는 무섭고 냉담한 여자가 사회적으로 손쉽게 지탄받는다는 맥락에서 그치지 않고, 동시에 그가 정말로 종종 독재자이거나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었다는 층위를 더한다. 자신을 인터뷰하러 찾아온 젊은 학생 앞에서 들뜬 산드라가 상대를 묘한 곤경에 처하게 할 때, 심리적 위기를 호소하는 연약한 남편에게 조금의 위선도 보여주지 않을 때 그녀는 호감 가지 않는 인간임이 분명하다. 동시에 영화는 주관이 정립된 캐릭터가 관객에게 주는 지적 희열의 측면도 놓치지 않는다. 남편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깊은 실패감을 저변에서 헤아리는 산드라의 작가적 본능은, 남편의 정신과 의사가 증언대에 서서 그의 인생을 정의하려 할 때 분노감과 함께 부부관계의 복잡함에 대한 지적 논쟁으로 표출된다. 단단한 갑옷을 두른 듯한 표정으로 일관하지만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취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에 엄청난 광휘를 내는 배우가 잔드라 휠러다. <토니 에드만>에서 아버지에 비해 무감하고 현실적인 딸을 연기하던 그가 을 자신도 모르게 열창하는 대목이 명장면으로 회자된 것이 선례다. <추락의 해부>에서도 산드라는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 문을 열다가 뒤늦게 터져나오는 눈물에 당황한 나머지, 얼굴에서 흐르는 두 줄기의 물방울을 닦아낼 여력도 없이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에게 묻는다. “파마산 치즈 줄까요?” 외부의 방아쇠를 핑계 삼아 비로소 울음을 토해내는 방어적 인간의 기질을 묘사할 때 탁월한 이 배우는, 검찰이 위시하는 문명화된 폭력의 교활함을 감당하는 여성의 재현이 감정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제어장치도 되어준다. 관객은 그답지 않게 흔들릴 때에 작중의 설계 이상으로 세밀히 연민하는 한편, 그가 강인함을 넘어 설득적인 표현을 구사할 때는 뒤로 물러나게 된다. <추락의 해부>의 스릴은 이 의뭉스러운 배우와 함께 타는 즐거운 시소 위에 있다. 떨어지는 것들 영화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공을 비추며 시작된다. 낙하에 대한 집착은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모티프다. 문자 그대로 공에 이어 남자가 추락하는 외적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개인의 위상이 하락하거나 신뢰가 고꾸라지고 감정이 허물어지는 내면의 운동으로도 지속된다. 이에 관한 쥐스틴 트리에의 고백이 제법 솔직하다. “시리즈 <매드맨>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한 남자가 계속해서 넘어지는 움직임에 매료되어 있었다.” <매드맨>의 넘어짐 이전에 <현기증>과 히치콕의 추락도 있었다. 이 몰락의 운동성에 기묘하게 사로잡힌 감독은 떨어지고 넘어지는 것의 문제를 비단 사건의 차원에만 놓지 않고, 영화의 저류에 흐르는 분위기로 놓아둔다. 달리 말해 <추락의 해부>는 대단히 기술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알고 싶은 게 뭐야?” 암전 속에서 잔드라 휠러가 질문하자 아래로 힘없이 공이 굴러 떨어져내리는 첫 장면에서 <추락의 해부>는 일찌감치 매혹한다. 검사와 변호사의 상반되는 질문을 번갈아 듣는 아들 다니엘의 얼굴을 흔들거리는 트래킹 패닝으로 오갈 때, 한밤중 산길을 내려오는 차 안에서 비로소 오열하는 산드라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쉴 새 없이 덜컹거릴 때, <추락의 해부>는 무언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거나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순간을 숏의 기운으로 포착하기 위해 애쓴다. 위태로운 인간의 장면들 가운데 정자세로 각인되는 것은 명민한 개 스눕(메시)의 절도 있는 움직임이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빼꼼 반응하는 귀, 눈밭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잽싸게 달려가는 동작, 가만히 엎드려 이후의 사태를 면밀히 지켜보는 눈동자, 모든 소동이 끝난 뒤 주인의 품에 들어와 말없이 잠드는 개는 추락도 도약도 없이 <추락의 해부>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스피린 한줌을 삼키고 기절한 뒤 구토하는 물리적으로 괴로운 연기까지 떠안아야 했던 이 보더콜리는 지난해 최고의 연기견에게 수여되는 칸영화제 팜도그상을 수상했다. 한편 감정과 신체의 차원을 아울러 이 영화에서 생의 가장 큰 시련을 맞이하는 이는 어린 다니엘이다. 좁은 법정 공간을 다종다양하게 프레이밍하는 <추락의 해부>가 노린 회심의 장면은 다니엘인지 분간이 힘들 만큼 그의 어깨와 뒤통수 뒤쪽에 바짝 붙은 카메라 너머로 문득 방청석의 아들을 바라보는 산드라를 비추는 숏이다. 다닥다닥 붙어앉은 방청객들이 시야를 가려 마치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산드라의 모습은 분명 아들의 시점으로 해석되고 있다. 켜켜이 드러나는 어른들의 복잡다단한 면모에 의혹, 충격, 실망을 거듭하다가 자기 개를 학대하기까지 한 다니엘은 영화 말미에 그 누구의 가르침 없이도 홀로 결정하고 깨닫는 법을 배운다. 소년은 아버지가 한때 자신에게 건넨 말이 유언이었음을, 작가의 아들답게 자기의 언어로 다시 쓴다. 침실의 암흑 속에서 모자가 끌어안는 조용한 피날레에서 상대를 품어 다독여주는 이도 삶의 한 구획을 큰 보폭으로 가로지은 11살 소년이다. <추락의 해부>에 플래시백은 있는가? 변론 장면들에서 당시의 모습을 담은 짧은 화면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플래시백은 아니다. 카메라는 종종 바닥을 기거나 공중을 빠르게 헤쳐나가는 방식으로 상상된 진실로 향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예리한 검사와 변호사 모두 언급하는 대로, 구체적인 언어가 반복되는 사이 우리 뇌리에 박힌 어떤 장면들의 순수한 존재감, 즉 유령적인 이미지에 가깝다. 다니엘이 죽은 아버지의 유언을 복기하면서 그 순간을 떠올릴 때 틈입하는 장면도 있지만, 역시 아버지의 중요한 대사는 다니엘의 구술로 옮겨진다는 점에서 발명품이라 부르는 것이 걸맞은 이미지다. 플래시백이라 할 만한 장면은 딱 하나. 남편이 죽기 전날의 격렬한 부부 싸움 현장이다. 그외 모든 순간은 법정을 떠다니는 녹취록과 진술의 사운드, 즉 청각적 재료들에 힘입어 각자의 뇌리 속에 재구성된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추락의 해부>는 법정이 본질적으로 더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외부자들에 의해 판단되는 진실의 장소임을 플래시백을 다루는 태도로부터 각인한다.

[특집] 달라진 소비 패턴, 콘텐츠도 변화한다, 숏폼 열풍과 경계 흐려진 OTT 플랫폼·극장 시장 분석

앞으로 극장 산업은 어떻게 변할까. 2023년은 그간의 영화 흥행 공식이 대부분 비껴가는 해였다. “성수기와 비성수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공통된 의견을 바탕으로 “고예산 블록버스터에 의존하기보다 다양한 장르의 소재와 작품”이 주목을 이끌었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여름과 추석 등 기존 성수기를 노린 텐트폴 영화는 관객으로부터 냉랭한 평가를 받았지만 “<잠> <달짝지근해: 7510> <30일> 등 제작비 50억원 미만의 영화들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 배경에는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변화한 콘텐츠 소비 패턴을 근원적 원인으로 꼽은 의견이 다수 나왔다. 긴 침체기를 통과하는 극장의 대안처럼 떠올랐던 OTT는 그들만의 뜨거운 리그 속에서 생존을 모색 중이다.ㅁ 오리지널 시리즈 외에 다양성을 반영한 새로운 콘텐츠 발굴이 필요하다는 산업 내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이유기도 하다. 숏폼 영향권에 들어선 1020세대의 콘텐츠 소비 패턴도 시장에 변화를 일구고 있다. 콘텐츠 포맷, 상영 방식과 시청 방식 등 기존의 프레임이 흐려지는 지금 콘텐츠간의 경계는 사라지고 있다. 숏폼 콘텐츠, 이제는 막대해진 영향권 여가 활동의 기본 선택지 중 하나였던 영화 감상은 OTT 플랫폼과 숏폼 콘텐츠 보편화와 함께 그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엔데믹 이후 오프라인 활동에 대한 욕구는 강해졌지만 그 활동 내역에 영화 감상이 예전처럼 필수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극장이 아니더라도 영화에 상응하는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빨리 감기와 유튜브 요약본 보기 등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두 시간여 동안 수동적으로 앉아 있어야 하는 극장 환경”이 전보다 덜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대다수의 설문 참여자들은 숏폼 콘텐츠의 성장이 문화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짧은 시간 안에 명확한 기승전결을 제공하는 숏폼 콘텐츠에 대중이 환호하면서 산업 전반에 짧고 집중적인 콘텐츠를 개발”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막힘 없이 빠르게 이어지는 전개, 자극적인 포인트를 조명한 시퀀스 등 숏폼의 특징은 영화나 시리즈와 다른 또 다른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산업적으로도 숏폼이 강세다. “간접광고 시장이 크지 않은 영화와 달리 어떤 간접광고도 쉽게 접목할 수 있는 숏폼”은 상대적으로 수익 창출에 용이하다. 마케팅 관점에서도 숏폼은 활용도 높은 포맷의 콘텐츠다. “영화·드라마 등 비숏폼 콘텐츠들도 결과적으로 홍보 목적의 숏폼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참여하면서 이 형식의 유효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숏폼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빠르게 소비되는 만큼 빠르게 잊히고”, “쉴 새 없이 도파민을 자극하는 방식은 콘텐츠 시장을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으로 만들고”, “전통적인 영화·드라마의 한계를 깨는 시도로서 유의미하지만 서사적 완성도를 위한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이에 해당한다. 치열한 경쟁 구도에 오른 OTT 시장 팬데믹 기간 동안 비어 있던 극장을 대신한 OTT 플랫폼은 이제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좁은 내수시장에 비해 넘치는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OTT 플랫폼, TV 채널은 고유한 경쟁력을 확보한 곳들 위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로서 기능하기보다 다양한 장르와 문화를 아우르는 콘텐츠를 개발해 차별점을 두는 게 각 OTT 플랫폼의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용자들이 평균 2.69개의 OTT를 구독한다는 조사 결과처럼 다중구독이 하나의 소비경향으로 떠오르지만 콘텐츠 출현에 따라 단기결제로 이동하는” 풍경을 적잖게 볼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구독자 수 감소를 두고 “수익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신규 구독자 유입에 집중하기보다는 현재 구독자 수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대두됐다. 또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활용한 해외 세일즈를 강화하는 방식의 수익 구조 개선”도 필요한 시점이다. 2023년의 OTT 시리즈 시장이 다소 조용하게 흘러간 데에는 기존 제작 공식과 흥행 문법에 의존해서라는 분석이 두드러졌다. “기대작이었던 오리지널 시리즈들이 기존 작품을 답습하는 데 그치면서 시청자의 외면으로 이어”졌고, “캐릭터는 사라진 채 사건과 컨셉 위주로 흘러가는” 한계가 언급됐다. 이에 따라 “버라이어티 예능, 테마 다큐, 스포츠 중계 등 비스토리 콘텐츠가 스토리를 대체하며 제작될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도 눈에 띈다. “OTT 플랫폼이 태생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매대에 올리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삼는 동시에 “시리즈 제작비 증가와 OTT 시장 경쟁의 심화”라는 현 상황이 다른 활로를 모색할 발판이 될 거라는 예측이다. 극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2023년의 다소 우울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설문 참여자 중 다수가 극장가의 희망을 말했다. 그저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바람에서 비롯한 답변이 아니다. “콘텐츠 소비자는 이제 유행이나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다. 콘텐츠 소비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 <서울의 봄>이나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 지난해의 흥행작이 말해주듯 그 작품이 가진 본질만 잘 전달한다면 소비자들도 그에 따라 반응한다”는 의견이 모였다. “이전보다 극장 문턱이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잘 만든 작품은 그래도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대중적 인식이 강해진 결과다. 다만 이 과정에 “예산 규모나 배우 패키지, 스타 감독에 의해 의무적으로 작품을 찾지 않고 1인 관객의 취향을 적중했는지” 따지게 된, 이전과 달라진 특징이 두드러진다. 자성을 재촉하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극장에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극장 관객수나 스크린 수가 급격하게 줄지 않았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찾아나서는 대중의 성향 또한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2억명 관객 시대와 비슷한 수치이지만 그 시대에 문화업계 전체가 호황에 매몰돼 있었”다는 영화산업 전반의 관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올드한 기획”에 관한 논의도 거론됐다. 이들은 “예측 가능한 감동, 틀에 짜인 이야기 흐름”은 “세대 변화를 반영하지 않아 영화 주요 소비층인 젊은 세대로부터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비평] 충격의 두께, <클럽 제로>

미장센과 서사가 명백히 지시적인 영화가 지닌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클럽 제로>에 대해 할 말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말들은 이 영화가 특별한 감응을 불러일으키기에 파생되기보다는 영화가 요청하고 있는 사회적 시각 때문이다. 예시카 하우스너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약점을 지적하는 데 관심이 있다”라고 밝히며, “<클럽 제로>는 영양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곧 너무 지나쳐서 학생들의 생각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바뀌며 급진화와 조작”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실로 영화는 국적이 불분명한 엘리트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양 교사 노백(미아 바시코프스카)이 새로운 식사법을 가르치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합리적인 생각을 점차 급진적으로 바꾸어가는 데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엄밀하게 다루며 그에 따른 결과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 결과란 아이들이 금식을 하는 ‘클럽 제로’의 회원이 되어 노백이 이끄는 그림 속 저편의 낙원을 향해 가고, 아이를 잃은 학부모가 자신의 자녀처럼 금식을 해보면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노백의 믿음에 참여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스키를 타러 가는 바람에 사라진 아이들과 동참하지 못했던 헬렌(그웬 커런트)은 이 결론을 긍정하며 “하지만 믿음이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소속감의 문제 그런데 헬렌이 말한 믿음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인가. 금식을 함으로써 노백의 말처럼 “일시적인 존재에서 영생”을 얻어 “구원받을 거”라는 믿음인가. 아니면 애초 헬렌이 노백의 첫 수업에서 “의식하며 먹기로 육류 소비를 줄임으로써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가치관을 급진적으로 바꿔 모든 음식을 완전히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환경운동에 기여한다는 믿음인가. 그리고 정작 물어야 할 건 헬렌은 정말 금식을 했던 것인가이다. 영화는 노백의 수업에 적극적이었던 다른 아이들이 주말에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의식하며 먹기’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헬렌의 가정 식탁만은 보여주지 않는다. 헬렌이 ‘클럽 제로’의 진정한 일원이 되지 않은 건 여행이라는 우연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유대 관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믿음을 위장한 것 때문이 아닐까. 노백을 처음 학무모회에 소개한 라그나(플로렌스 베이커)의 아버지는 “소비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며 노백의 수업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지켜보자는 아내의 말에 “옳은 일은 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옳은 일’이란 소비를 줄이는 것이며 이 가치관은 우리 사회에도 널리 통용되는 생각이다. 게다가 라그나의 아버지는 실제로 육류를 소비하지 않으며 올바름을 실천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노백의 ‘의식하며 먹기’에 동참하는 이가 아니다. 아이들이 휩쓸려가는 상황을 관망하며 아이들의 현실에서 밀려나는 인물이다. 반면 아이들은 노백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시점을 강화하거나 조정해간다. 더불어 위험을 무릅쓰며 세상의 이치에 저항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이 믿는 진실을 더욱 공고히 다진다. 하우스너가 말한 사회 구성의 약점은 이러한 사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황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들은 일어나는 사태의 바깥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올바름을 주장하지만 정작 맞닥뜨린 현실에서 기존의 올바름이 왜소화되는 국면을 맞아야 하고, 상황에 뛰어든 이는 오류를 무릅쓰고 자신이 믿는 진실을 강화해가며, 결국 화합하지 못하는 두 집단은 모순된 진실을 안고서 불화하는 상태를 유지하거나 한쪽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사실 말이다. 물론 하우스너는 이 영화에서 한 개인, 즉 노백 선생이 아이들을 세뇌시키며 아이들을 부모와의 관계를 끊고 자신과 유대를 강화해가는 과정을 사이비 교주가 신도를 이끌 듯이 묘사하며 개인의 공고한 가치관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행사하고 섬뜩한 국면으로 나아가는지 철저히 묘사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처음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주체적으로 ‘의식하며 먹기’에 동참하지만 종국엔 노백의 정신적 영향력 아래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어 선택의 문제가 노백에게 달려 있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며 그 영향력이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까지 미치는 현상을 직시한다. 더불어 아이들이 금식하는 이유를 부모의 권위와 체제에 저항하는 행위로 부각하지만 결국 아이들의 선택조차도 이 사회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도착한 저 그림 속 세계가 많은 사이비 교리가 도달하고자 한 공허한 공간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림 속 세계를 걸어가는 아이들의 유니폼이 눈에 띈다. 학교 교복 대신 ‘클럽 제로’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이들은 과연 진정한 해방을 맞은 것일까. 그저 유니폼 바꿔 입기에 성공한 것은 아닐까. 유니폼을 바꿔 입는 행위가 가정이나 학교에서 인정받지 못한 아이들이 ‘클럽 제로’에서만은 소속감을 얻을 수 있기에 택한 최후의 선택이지 않을까. 아이들은 ‘의식하며 먹기’의 초기 단계부터 서로의 눈을 의식하며 엄격한 식사 방법을 이행하고 서로의 유대 관계를 다졌다. 그들은 의식하며 먹는 행위에 동참하지 않는 벤(새뮤얼 D 앤더슨)을 배척하며 공동체에서 제외될 거라 위협했고, 노백은 다른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아이들과 달리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벤이 수업에 협조하지 않으면 장학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노백의 지론에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의 행태는 집요하고 폭력적이다. 카메라도 이들의 관계를 명료하게 비춘다. 첫 수업에서는 학생들과 노백을 패닝하며 평등하게 비추던 카메라가 벤이 수업 내용에 동참하지 않자 생각이 다른 아이들과 대치하는 상황을 분리해서 비추고 노백의 감시하는 시선 또한 위압적으로 보여준다. 얄팍한 충격 <클럽 제로>에서 카메라의 위치와 움직임은 위계 관계를 분명히 보여주며 주요한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들려오는 음악은 최면술을 걸 듯 들려온다. 노백이 아이들을 조종하듯 이 영화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제하며 이야기를 단일하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물론 계급의 문제를 더 이야기할 것인지, 모순된 진실을 부각할 것인지, 개별적인 아이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며 세상의 거대 담론에 개입시켜 이야기를 집대성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주제적 선택은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개인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충격은 얄팍해 보인다. 하우스너의 전작 <루르드>(2009)와 <리틀 조>(2021)의 주제적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전작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적 긴장감을 형성하던 것과 달리 <클럽 제로>는 피상적인 캐릭터 조합과 단순한 시청각적 이미지로 긴장을 떨어뜨린다. 물론 명료한 이미지와 영화의 정돈된 리듬과 믿음의 경계에 선 이들의 모순된 사회적 반응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이들도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더 확장된 반응을 보일 여지를 이 영화 스스로가 닫고 있다는 인상을 거둘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