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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회 로카르노 영화제-황금 표범, 젊은 포효를 내지르다[1]

유럽영화제의 지반에 A급영화제가 또 하나 태어났다. 국제영화제의 등급을 매기는 단체인 국제영화제작자협회(FIAPF)는 올해 55회를 맞는 로카르노영화제(8월1∼11일)에 그 영광을 안겨줬다. 햇수로 따지자면 로카르노영화제는 칸보다 몇달 앞서 출발한, 베니스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행사다. 그럼에도 중간 규모의 영화제로 머물렀던 건 스위스 정부의 미진했던 지원정책과 경제적으로 가장 후진 소수언어(이탈리아어) 지역에서 영화제를 치러야 하는 경제적 취약성 때문이었다.아무튼 올해 A급영화제의 원년을 맞은 로카로노영화제의 모습은 놀랍도록 새로워진 데가 많았다. 3200석을 갖춘 경쟁영화 주상영장 페비 옆에 960개의 좌석을 갖춘 라 살라와 500석의 라 알트레 살라 상영관이 새로 문을 열었고 페비 뒤의 빈터에 설치된 텐트와 목조로 만들어진 이동성의 포럼 스페이스는 영화인과 관객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쓰여져 참가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영화제의 또 하나의 변화는 경쟁부문의 수상금액이 거의 배로 오른 점이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가 경쟁영화 수상금액을 올렸던 걸 의식해서 그랬는지 9만 스위스프랑으로 오른 상금은 젊은 감독들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고, 뒤늦게나마 중앙정부와 주정부, 로카르노시에서도 지원금을 두배로 늘려 영화제가 열릴 때마다 지적되던 적자문제가 드디어 해결된 셈이다.젊은 감독을 부르는 로카르노지난해부터 로카르노영화제를 이끄는 이렌 비냘디(59) 집행위원장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이탈리아 출신으로 1975년 창간된 유명 일간지 <라 리푸브리카> 1호부터 영화편집장을 지냈고 펠리니 감독와 모라비아 작가 등과 절친하게 지낼 정도로 작가로서 또는 영화제 전문가로서 이탈리아 문화계에 알려진 인물이다. 90년대 중반 베니스영화제의 ‘베니스의 밤’ 프로그램을 몇년간 맡다가 로카르노영화제로 자리를 옮겨 역시 이탈리아 출신인 전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의 자리를 이어받았다.비냘디 체제가 들어서면서 영화제의 스타일은 눈에 띄게 많이 바뀌었다. 첫째 영화제의 주요 팀이 조직위원장을 빼고는 모두 여성들로 이뤄진 점이다. “남자들과 같이 일하는 게 싫다”는 게 이유였는데, 큼직한 체격에 호탕한 성격의 비냘디는 첫해부터 스위스 매체의 스타로 떠오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특히 올해 베니스영화제서 집행위원장직을 주겠다는 데도 가지 않았다는 기사가 나가자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둘째는 프로그램의 중심점이 달라졌다. 뮐러 전 집행위원장은 실험성의 작가영화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중국, 일본, 이란 작품에 치중했던 반면 비냘디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답게 영화의 대중성(communicative cinema)을 중요시하는 쪽이며 한 지역에 치중하지 않는 듯하다. 비냘디는 영화제 전에 스위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영화가 꼭 예술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영화작업은 훨씬 폭이 넓고 복합적이다. 찰리 채플린은 대중을 위한 예술영화를 만든 위대한 천재였고 개인적으로 빌리 와일더, 펠리니, 트뤼포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다.셋째는 로카르노영화제가 다시 젊은 감독을 위한 영화제로 되돌아간 점이다. 전 집행위원장 밑에서는 감독의 나이와 작품 경력에 상관없이 세계 초연 영화가 선정의 주대상이었으나 비냘디는 원래 영화제의 목표였던 젊은 감독들의 첫두 번째 작품을 선정대상으로 했고 올해 주요 수상자들의 나이가 30대 전후였음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문승욱 등의 <전쟁…> 비디오 대상영화제 12일간 소개된 영화는 400편이었다. 로카르노의 주요 경쟁부문은 장편경쟁과 소니사가 지원하는 국제비디오 경쟁이며 각각 22편의 장편과 20편의 비디오 작품이 경쟁에 올랐다. 후자의 경우 올해부터 새롭게 극영화에서 실험·다큐멘터리영화까지 모든 형식의 작품이 경쟁에 오를 수 있게 됐다. 기쁜 소식이기에 비디오 부문의 수상을 먼저 말하자면, 올해 표범의 대상은 전주영화제의 삼인삼색 디지털 부문 지원으로 완성된 문승욱, 스와 노부히로, 왕샤오솨이의 공동작품 <전쟁 그 이후>와 미국 출신 제니퍼 두워르킨의 <사랑과 다이아나>에 공동으로 주어졌다. 대상상금은 3만프랑이며 비디오 미디어의 특성을 잘 활용한 작품에 주어진다.그 밖에 35mm에서 비디오에 이르는 다양한 형식을 수용하는 비경쟁의 오늘의 감독 부문에서 54편이 시사됐고 그중에는 김응수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욕망>도 들어 있었다. <욕망>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찬반으로 나뉘는 듯했는데 폴란드의 평론가 피터 반 브뢰언은 “연출력이나 주인공들의 성격묘사는 높이 평가할 만한데 다만 한국의 정서를 모르는 사람에겐 심정적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라고 평했다.로카르노영화제서 빼놓을 없는 진풍경의 하나는 피아자 그란데의 야외상영이다. 8월 한여름 밤, 별을 바라보며 유럽에서 제일 큰 스크린으로 하는 영화감상은 정말 어느 영화제서도 경험할 수 없는 감동 그 자체다. 개폐막식과 수상식 무대이기도 한 이곳은 매일 저녁 9시 반에 시작되는 영화를 보기 위해 모여드는 인파로 7천석 수용의 광장은 그야말로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채워지며 영화가 좋으면 박수로, 나쁘면 휘파람으로 관객은 그 자리에서 영화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이들의 평가는 유명 감독도 두려워할 정도로 세다. 피아자 그란데 무대는 한국영화로 국제영화제서 처음으로 1998년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대상, 박광수 감독이 <칠수와 만수>로 청년상을 그리고 2001년 문승욱 감독의 <나비>로 주인공 김호정이 최우수여우상을 받은 자리다.올해 개막작은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을 각색한 영국 올리버 파커 감독의 <더 임포턴스 어브 빙 어네스트>. 폐막작인 미국 감독 네일 라부트의 <포세션>과 함께 모두 17편 영화가 프로그램에 올라 있었으나 비가 계속 내리는 바람에 진행에 차질이 많았다.▶ 제55회 로카르노 영화제-황금 표범, 젊은 포효를 내지르다[2]

극장가에도 불륜 바람?

입추도 이미 지났고 이제 막바지 더위 한바탕만 더 겪으면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은 멜로의 계절. 사랑 이야기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금지된 사랑, 불륜이다. 「위기의 남자」, 「거침없는 사랑」, 「고백」등 한동안 TV 드라마를 휩쓸었던 불륜 바람이 이제 스크린으로 불어닥칠 기세다. 이미 올 상반기 개봉된 <결혼은 미친 짓이다>나 <생활의 발견>, <미워도 다시 한번 2002> 등은 불륜이 직ㆍ간접적 소재가 된 영화. 여기에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여름, 다시 한번 ‘불륜 영화팬’들을 찾아오는 영화가 오는 22일 개봉하는 <언페이스풀>이다. <나인하프위크>에서 관능의 영상미를 보여줬던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새영화 <언페이스풀>은 ‘본격 불륜 영화’라고 이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불륜에 빠져드는 남녀의 모습을 관능적으로 그리고 있다. 자상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 등 부러울 것 없는 한 여자(다이안 레인)가 우연히 만나게 된 젊은 남자(올리비에 마르티네즈)의 매력에 사로잡혀 육체적 욕망에 빠져든다는 내용. <귀여운 여인>, <뉴욕의 가을>의 리처드 기어가 아내의 불륜을 눈치챈 남편의 심리를 연기한다. 금지된 사랑의 아름다움을 내용으로 하는 우리 영화 두 편도 가을 개봉을 앞두고 막바지 촬영 중에 있다. 현재 경상남도 남해에서 촬영 중인 변영주 감독의 <밀애>는 남편의 외도에 상처입은 부인이 낯선 도시에서 한 남자와 불륜에 빠진다는 내용의 영화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미흔은 남편이 바람 핀 사실을 눈치채고 남해로 가 동네 의사인 인규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며 자신에게 내재된 욕망을 표출한다. <낮은 목소리1,2> 등에서 정신대 할머니들의 아픔을 다큐멘터리로 담았던 변영주 감독의 첫번째 장편극영화로 김윤진과 이종원이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남녀로 연기한다. <밀애>는 오는 10월말 관객들을 찾아간다. 이미연, 이병헌 주연의 영화 <중독>에서 보여주는 금지된 사랑은 형수와 시동생간의 사랑. 죽은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는 '빙의'라는 현상을 소재로 지독하고 치열한 사랑을 보여준다. 같은 시간에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대진(이병헌)은 형 호진(이얼)의 영혼을 가지고 깨어난다. 시동생 대진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던 형수 은수는 혼란스러워하지만 결국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충무로 베테랑 조감독 출신 박영훈 감독의 데뷔작으로 섬세한 인물묘사와 화면구성으로 '치명적인 로맨스'를 보여준다는 각오다. 한창 낙엽이 지고 있을 10월 중에 개봉할 예정이다. 불륜은 현실에서는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지만 영화속에서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세련된 연출과 인물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있으면 잘 만들어진 사랑이야기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올 가을 관객들을 찾아오는 불륜 소재의 영화가 TV 드라마에 이어 영화계에도 불륜 바람을 일으킬 것인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Review] 언페이스풀

■ Story 결혼 11년차인 에드워드 섬너(리처드 기어)와 코니 섬너(다이앤 레인)는 이상적인 부부다. 안정된 직장, 교외의 주택, 착하고 개구쟁이인 아들. 코니는 별다른 욕구불만이나 스트레스 없이 가정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코니는 쇼핑을 하기 위해 뉴욕 시내로 나간다. 물건을 잔뜩 들고 택시를 잡으려 하지만 그날따라 한대도 서지 않는다. 거센 바람 때문에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던 코니는 폴 마텔(올리비에 마르티네즈)와 부딪혀 넘어진다. 폴은 물건을 주워주고 택시를 세우려 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잠시 들어가 상처를 치료하고 가라는 폴. 반창고만 붙이고 나온 코니는 에드워드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해준다. 그러나 다음날 코니는 시내로 나가 폴에게 전화를 건다. 갔다가 돌아서기를 반복하던 코니에게 폴이 다가서고 두 사람은 지독한 사랑에 빠져든다. ■ Review 모든 것이 파국으로 귀결되고, 늪에 가라앉은 코니가 상상한다. 처음 만난 폴이 택시를 잡아주던 그 순간을. 상상에서는 택시 하나가 서고 코니가 뒷좌석에 올라탄다.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코니는 유리창 밖으로 ‘고맙다’고 감사를 표한다. 웃으며 헤어지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날 수도 있었다. 충실한 가정주부이며 인자한 어머니로 행복한 미래를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택시는 서지 않았고, 코니는 폴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아니 다음날 전화만 걸지 않았더라도, 다시 폴의 아파트에 찾아가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코니와 가정의 목을 조인다. <언페이스풀>에서 ‘왜’라는 질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에이드리언 라인은 구차하게 원인을 끄집어내지 않는다. 섬너의 가정에 뭔가 부족했다거나,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냥 서로에게 끌린 것이다. 그게 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서로를 갈구한다. 그렇게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고, 예정된 파국으로 달려간다. 그건 운명이다. 운명적인 사랑이란 게 가끔 존재한다. 이성과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근원적인 갈망 같은 것들. 차를 몰고 가다 뉴욕이라는 표지판을 보고는 미친 듯이 방향을 돌려 폴에게 달려가고, 다른 여인과 함께 지나가는 폴을 보고는 바로 달려가 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과거의 코니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그러나 폴을 만난 뒤의 코니는 그렇게 행동한다. 그것이 사랑 때문인지, 아니 자신이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인지조차 코니는 알지 못한다. 식탁에 혼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코니는, 자신이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방법이 없다.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가정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내린다. <나인 하프 위크> <위험한 정사> <은밀한 유혹> 등 에이드리언 라인의 영화는 늘 스캔들을 다뤄왔다. 비일상적인 사랑, 극단적인 광기가 지배하는 사랑 혹은 돈에 이끌리는 사랑까지. <언페이스풀>은 그중에서도 가장 단순하다. 중년 여인의 광포한 사랑. 잘생기고 멋진 육체를 가진 젊은 남자에게 빠진 가정주부. 끈적한 이야기지만, 에이드리언 라인은 쿨하게 그들의 육체를 잡아낸다. 그들의 사랑은 육체다. 달콤하게 속삭이기보다는, 거칠게 서로의 육체를 탐한다. 육체를 잡아내는 에이드리언 라인의 연출은 언제나처럼, 지극히 감각적이다. 폴이 코니의 쭉 뻗은 다리를 응시할 때, 남성 관객이라면 당연히 그 시선에 동조된다. 에이드리언 라인은 육체를 선정적으로 잡아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아니 그 육체의 선정성이야말로, 코니를 폴에게 빠지게 만든 유일한 원인이다. ♣ 코니의 불륜은 잔잔한 중산층 가정에 불어온 거센 태풍이다. 부정을 눈치채고도 평온을 가장하던 남편 에드워드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만다. 마치 아내가 지독한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우연히.♣ 프랑스 청년 폴의 육감적인 매력은 코니의 이성과 자제력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다.♣ 코니의 불륜 사실이 밝혀진 뒤, 부부는 가족을 지키려 애쓰지만 그들의 마음도 평화로운 가정도 이미 군데군데 금이 가버린 상태다 장 자크 베넥스의 로 데뷔하여 <지붕 위의 기병> <내 안의 남자> <비포 나잇 폴스> 등에 출연했던 올리비에 마르티네즈의 이미지가 튀긴 하지만, <언페이스풀>은 온전히 리처드 기어와 다이앤 레인의 영화다. 리처드 기어와 다이앤 레인은 1984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코튼 클럽>에서 공연했다. 두 사람 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거의 20여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리처드 기어와 다이앤 레인은 중년이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와 <브레드리스>의 바람둥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중년의 리처드 기어에게는 온화한 미소를 짓는 가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때 잊혀졌다가 90년대 중반 재기한 뒤 <저지 드레드> <머더 1600> <퍼펙트 스톰> <글래스 하우스>에 출연했던 다이앤 레인은 <언페이스풀>에서 여전히 ‘섹시한’ 다리를 과시한다. 청춘을 날려보내고, 세월의 무게가 쌓인 얼굴로 돌아온 리처드 기어와 다이앤 레인은 <언페이스풀> 내내 안정된 연기를 보여준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가정까지 등한시하게 되는 여인, 아내의 부정을 눈치채고도 평온을 가장하지만 끝내 일그러져가는 남자의 초상을. 에이드리언 라인의 연출은 한동안 갈팡질팡했지만, <언페이스풀>에서는 세련되고 안정적이다. 에드워드는 부정을 알아채고 조사를 부탁한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난 에드워드는 어떻게 할까? <위험한 정사>처럼 스릴러로 가지 않을까, 라는 일반적인 예상은 빗나간다. 에드워드와 코니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중산층 부부다. 어떤 돌발적인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들의 행동은 제한되어 있다. <언페이스풀>은 충실하다. 쉴새없이 요동을 치면서 극한으로 치달아가는 에드워드와 코니의 마음과 행동을 치밀하게 따라간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공감하게 만든다. 영원한 사랑과 맹세가 부질없음을 보여주는 <언페이스풀>은 현실적이고, 그래서 보고나면 좀 우울해진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어바웃 어 보이/쓰리/언페이스풀/피너츠송/패밀리

■ <어바웃 어 보이> 윌은 아버지가 작곡했던 대히트곡의 인세 수입으로 살아가는 38살의 백수건달이다. 그에게 유일한 사회생활이 있다면 그건 여자들과 즐기는 것. 이마저도 윌의 변덕스런 성격 때문에 두달을 못 버티기 일쑤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화끈하게 즐길 수 있되, 헤어질 땐 부담이 없는 여성이 바로 독신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독신부모의 모임에 나가 수지라는 독신모를 꼬시는 데 성공하지만, 이때부터 그의 탄탄대로에 커다란 걸림돌이 등장한다. 크리스 웨이츠, 폴 웨이츠 감독, 휴 그랜트, 니콜라스 호울트, 토니 콜레트, 레이첼 와이즈 출연, UIP 수입·배급, 상영시간 100분 김봉석 인간은 섬이 아니지만, 가끔은 섬이 된다 ★★★ 박평식 낙도를 ‘낙원의 섬’으로 오독한 사내의 방랑과 환희 ★★★ ■ <쓰리> ‘공포’와 ‘미스터리’를 키워드로 한국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즈>, 타이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의 <휠>, 홍콩 진가신 감독의 <고잉 홈> 등 단편 셋을 묶은 옴니버스영화. 어느 날 집을 나간 아내, 남편은 아내가 떠난 뒤 집안에서 헛것을 보며 괴로워한다. 길에 쓰러져 있다 깨어난 여자,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녀는 쥐고 있던 세탁소 영수증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는다(<메모리즈>). 김지운, 진가신,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 김혜수, 정보석, 여명, 증지위, 콤킷 유티용, 스위니트 판자마왓, 사비카 칸차나마스 출연, CJ엔터테인먼트, 어플로즈픽처스, 사하몽콜필름 투자·배급, 상영시간 120분 김봉석 <고잉 홈>은 걸작 ★★★☆ 박평식 한목소리를 내기엔 어울리지 않는 삼인조 ★★☆ ■ <피너츠 송> 샌프란시스코의 밤을 주름잡는 ‘킹카’ 크리스티나에게 남자란 그저 하룻밤 즐기는 상대일 뿐이다. 실연당한 친구를 클럽에서 만난 남자와 맺어주려던 크리스티나는 뜻밖에 그 남자 피터에게 끌리지만,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한 채 헤어진다. 크리스티나는 피터를 보고픈 마음에 무작정 그의 형 결혼식에 찾아가기로 한다. 로저 컴블 감독, 카메론 디아즈, 크리스티나 애플게이트, 셀마 블레어, 토머스 제인 출연,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수입·배급, 상영시간 88분 박평식 시궁창에 발을 담그고 젤리를 빠는 기분 ★★ ■ <패밀리> 성대와 성준, 두 형제는 폭력조직 서남파의 주력 행동대원. 이들 형제에게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 인천을 접수하라는 상부의 미션이 주어진다. 토착 조직의 보스격인 최무영은 만만치 않은 상대지만, 인천지역 강력계 형사반장을 매수해서 끌어들이는 성대의 놀라운 수완 덕에 서남파는 인천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그러나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적이 있었으니, 룸살롱 패밀리아를 운영하는 오해숙. 성대와 성준은 최무영과 연인 사이였던 오해숙과 사고뭉치 호스티스 성초희로 인해 위기에 처한다. 최진원 감독, 황신혜, 윤다훈, 김민종, 황인영, 이경영 출연, 시나브로엔터테인먼트 투자·배급, 상영시간 107분 심영섭 죽은 조폭영화 뭐 만지기 ★☆ 박평식 관객을 부끄럽게, 평론가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 ★☆ ■ <언페이스풀> 결혼 11년차인 에드워드 섬너와 코니 섬너는 이상적인 부부다. 안정된 직장, 교외의 주택, 착하고 개구쟁이인 아들. 코니는 별다른 욕구불만이나 스트레스 없이 가정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코니는 쇼핑을 하기 위해 뉴욕 시내로 나간다. 물건을 잔뜩 들고 택시를 잡으려 하지만 그날따라 한대도 서지 않는다. 거센 바람 때문에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던 코니는 폴 마텔과 부딪쳐 넘어진다. 폴은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잠시 들어가 상처를 치료하고 가라고 권한다. 에이드리언 라인 감독, 다이앤 레인, 리처드 기어, 올리비에 마르티네즈 출연, 드림맥스 수입, A-Line 배급, 상영시간 123분 김봉석 영원한 것, 완벽한 것은 없다 ★★★

예술영화 전용관,설치 가능할까

지난해엔 <와라나고> 상영 운동(?)이 있었다. 흥행에 실패한 영화들이, 자생적으로 자신의 ‘생명줄’을 좀더 늘려보고자 하는 생각들이 모아져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이 4편을 모아 상영관을 잡고 공동 상영을 약 한달간 했고, 개별적으론 대관 상영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 롱런’을 하기도 했다. 이후,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이른바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에 대한 대안적 상영방식 및 정책이 필요하다는 논의들이 있어왔다. 연초 문화관광부가 연두 업무보고에서 예술영화 전용관 설치 계획을 시사한 데 이어, 지난 8월6일 영화진흥위원회가 전국 주요 시·도에 7개관 이상의 예술영화 전용관을 설치·운영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예술영화 전용관 사업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전국 7개관 이상의 예술영화 전용관을 확보, 운영할 수 있는 단일 사업자를 선정해 연리 1%로 총 150억원을 융자해준다는 것이었다. 연리 1억5천만원을 받고 150억원을 빌려주는 대신, 문제는 150억원의 ‘담보 능력’이 있어야만 이 사업 신청자로서의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다. 현재 이른바 예술영화를 제작하거나, 유통·배급한 경험이 있거나, 이런 일련의 사업에 대해 구체적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150억원의 담보 능력이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또한, 일반 메이저 유통 배급사가 운영하는 멀티플렉스의 경우, 1년 수익이 한 상영관당 5억∼6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대형 멀티플렉스의 경우는, 문화적 마인드가 전제되지 않는 한, 경제성만으로 보았을 때는 굳이 필요성을 느끼거나 구미가 당기는 사업이 아닐 것이다. 예술영화로 인정받은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각각 연간 상영일수의 5분의 2와 5분의 1 이상 상영해야 한다고 하는데, 예술영화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작품을 확보하는 문제도 현실적으로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영진위는 하드웨어인 상영관 확보나 소프트웨어인 예술영화 확보, 양쪽 모두에 스스로 불가능할 수 있는 ‘족쇄’를 스스로 채우고 시작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사업계획을 천명했으나, 그 실효 가능성은 불투명한 계획안인 셈이다.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생색내기가 정녕 아니라면, 구체적 묘안을 내세워야 할 것이다. 차라리, 일정 액수를 확실한 사업자에게 지원, 지급하는 방법이 이 사업의 구체화와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상반기 예술영화 시장점유율은 2%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난해의 십몇%에 비하면 급전직하이다. 지난해의 일련의 대안적 상영방식의 모색이나 극장가에서 예술영화를 자주 찾아보는 것도 힘든 형편이다. 실로 1년 사이의 큰 변화이다. 정책 입안자들에게 문화에 대한, 시장경제에 대한 기본적 상식을 기대한다는 바람은, 이 땅에서 영화를 업으로 하는 이들의 기본적 ‘소망’임을 그들이 좀, 제대로 알아주었으면 한다.심재명/ 명필름 대표 shim@myungfilm.com

미로 스페이스 대표 채희승 “작지만 좋은영화 만나는 공간됐으면”

작은 영화를 배급하는 업체들에겐 자기 극장을 갖는 게 꿈일 게다. 미로비전의 채희승 대표도 올 7월 서울 인사동에 ‘미로 스페이스’라는 전용관을 개관했다. “98년 회사를 만들 때만 해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동숭시네마텍이나 코아아트홀에서 단관개봉하는 예술영화들도 관객들이 많이 찾았고요. 근데 몇년새 상황이 확 바뀌더라고요.” <레퀴엠>의 개봉관을 잡지 못해 터덜터덜 인사동 길을 걷던 그의 눈에 새로 생긴 건물 지하극장에서 창극공연을 한다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보니 영화극장으로도 손색 없길래 당장 담당자를 만났죠.” 현재 142석의 미로 스페이스는 낮에는 창극 공연, 오후 3시대 부터는 평균 4회의 영화상영을 한다. 개관작인 <레퀴엠>은 다른 극장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5주 상영’의 기록을 세웠다. 현재 <워터보이즈>와 함께 번갈아 상영중인 <헤드윅>은 거의 전회매진이다. 경기도는 물론이고 부산에서 영화를 보러 온 사람도 있었다. 인사동이란 특성 때문에 외국인 관객도 적지않은 등 “명소 아닌 명소가 되어갈 것 같다”고 웃는다. 그는 “<워터보이즈>는 우리가 배급하는 영화지만 미로 스페이스에 걸 생각은 없었어요. 이 극장 프로그램의 색깔엔 안어울리는 ‘상업영화’잖아요. 근데 방법이 없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지난해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한국영화의 시도를 따라 <워터 보이즈>를 위해 23일부터 강남의 동영아트홀(옛 계몽아트홀)을 아예 대관키로 했다. 미로 스페이스가 애초의 목표대로 “상업성 없다고 쉽게 떼어지는 작지만 좋은 영화들이 좀더 안정적으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 지금 그의 바람이다. 글·사진 김영희 기자

<오아시스> 4인4색-유운성이 본 <오아시스>

<오아시스>가 우리 영화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으며, ‘이창동 감독은 한국의 에밀 쿠스투리차’라고 주장한 고종석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아시스>에서 현실과 판타지는 변증법적 통합을 위한 대립물로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조금도 다치게 함이 없이 온전히 자신들의 특성을 유지하며 서로를 강화한다. 영화 속에 마르케스를 불러들이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 테지만, 빈곤하고 누추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빈곤하고 누추한 상상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마르케스의 단편 <사랑 저편의 변함없는 죽음>의 한 부분, “상원의원은 지껄이면서 석판화 캘린더를 한장 비틀어 뜯어서는 나비를 접었다. 슬쩍 선풍기 바람에 태우자 나비는 방 안을 훨훨 날아다니다가 절반쯤 열린 문으로 슬쩍 빠져나갔다.… 석판화의 거대한 나비는 두세번 방 안을 날아다닌 뒤, 벽에 부딪히더니 원래대로 한장의 종이로 돌아가서 그대로 붙어버렸다”. 중증 뇌성마비 환자인 공주가 가지고 놀던 거울에 반사된 빛 속에서, 나는 위와 같은 마르케스적 상상의 완벽한 영화적 실현을 떠올리며 행복에 잠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창동은 공주의 뒤틀린 육체를 갑작스레 보여줌으로써 <오아시스>가 단지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색만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정말이지 이건 장식으로 덧칠된 묘사가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금세라도 거기서 눈을 돌려버리고 싶게 만드는 불완전한 형상의 폭력적인 현시(顯示)이다. <오아시스>는 이창동이 영화와 대면하여 시네마틱한 것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 그의 첫 번째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서 그가 비로소 형상에 대한 탐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종두의 건들거리는 듯한 걸음걸이와 공주의 뒤틀린 몸일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때로 깨진 유리조각이 섞인 풀을 잔뜩 먹인 밧줄로 당신의 심장을 동여매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종두의 그 걸음걸이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예기치 않은 사고를 빚어내는 그의 행동으로부터, (좀 이상하지만) 자크 타티의 윌로씨, 특히 <나의 삼촌>의 윌로씨를 떠올렸다. 이 ‘불편한’ 영화에 깃든 유머의 일부는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종두는 한마디로, ‘타티빌’이 없는 현실세계에 내던져져 졸지에 범죄자가 되어버린, 좀더 수다스럽고 모자란 윌로씨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우리가 끝까지 이 뒤틀린 형상의 세계를 응시하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 둘째, 이창동은 거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의 미장센으로 화면을 채우고(혹은 비우고), 전혀 미학적이지 않게 흔들리는 카메라를 들고 인물들 곁에서 함께 숨쉰다. 이창동은 프레임과 그 속의 형상들을 과격하게 부수는 디지털 시대의 미학적 시도들에 거리를 둔다. 여기에 새로운 미학적 탐구는 없지만, 미학의 유기로부터 길어올린 새로운 형상으로서의 프레임의 창조가 있다. <오아시스>는 스크린의 표면을 몸처럼, 피부처럼 다루면서, 뒤틀린 공주의 몸과 건들거리는 종두의 몸 모두에 호응하는 리듬을 만들어낸다. <오아시스>의 떨림은 형상에 대한 존중이 결국 그것의 포획에의 의지로 향하고 마는 오랜 미학적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암중모색의 결과물이다. 리얼리즘이 결국 ‘지적 엘리트들을 위한 판타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은, 부서지는 형상들을 포착하기 위해 끌어들인 형식이 언제나 또 하나의 미학적 자의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아쉬움은 바로 거기서 연유한 것이었고, 이창동은 <오아시스>에서 그 한계를 가까스로 뛰어넘었다. <오아시스>의 리얼리즘이 진정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여기서의 리얼리즘이란 형식적 선택이 아니라 도덕적 선택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송일곤의 <꽃섬>은 그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오아시스>는 불완전한 형상, 혹은 거푸집이 우리 자신의 형상을 완전히 깨뜨려버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든다. 우리는 종두도, 공주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아파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우리가 종두의 가족, 공주의 가족의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인식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우리 자신의 반영을 통해 우리의 성찰을 자극한다면, 이창동은 우리가 간신히 빠져나온 거푸집을 응시하게 만듦으로써 거꾸로 우리의 추악함을 드러낸다. <오아시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버려진 형상이지만, 진정 문제삼는 것은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우리 자신의 형상이다. 요약하자면, <오아시스>는 ‘형상의 발견’을 통해 ‘생활의 발견’에 이르는 영화인 것이다. 물론 <오아시스>가 답변의 나열이 아니라 의문부호로 가득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평론은 때로 영화 앞에서 오만을 부리고 싶은 법이지만 이런 영화 앞에선 잠시 겸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뒤틀린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오는 공주의 말들처럼, <오아시스>는 외침과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뒤틀린 속삭임이며, 한없이 간절한 속삭임이다.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 [2]

워킹타이틀의 일등공신! 시나리오작가 리처드 커티스 ‘휴 그랜트 4부작’으로도 불리는 이 차별화된 로맨틱코미디 브랜드 뒤에는 팀 비반(44)과 에릭 펠너(42) 두 제작자가 이끄는 영화사 워킹 타이틀이 있다. 런던 지하철 엠블렘을 연상시키는 로고를 가진 영화사 워킹 타이틀에 네편의 런던발 로맨틱코미디는 그들을 유럽영화계에서 가장 힘있는 제작 주체로 발돋움하게 한 브랜드 파워이자 그들이 추구하는 ‘고급스런 상업성’을 실물로 옮긴 간판 수출품이다. 워킹 타이틀식 로맨틱코미디의 프로토콜은 전적으로 <네번의 결혼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리처드 커티스의 손끝에서 나왔다. 미국 스타를 초빙해 자국 배우와 짝지우고 일상 묘사와 영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 대한 조크를 재치있게 배색하는 워킹 타이틀 로맨틱코미디의 요체는, 당시 무명이던 에마 톰슨과 제프 골드블럼을 커플로 맺은 커티스의 초기작 <톨 가이>에서 일찌감치 ‘베타 버전’을 보여준다. 1984년부터 사라 래드클리프와 워킹 타이틀을 공동설립해 운영하던 팀 비반은 1991년 폴리그램의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좀더 전통적인 인디 개념을 고수한 래드클리프- 뒤에 린 램지의 <쥐잡이>를 제작했다- 와 헤어지고 <시드와 낸시>를 데뷔작으로 제출한 신예 제작자 에릭 펠너와 손잡았다. 이들은 저예산 범위에 머물지 않는 한, 영화는 대형 비즈니스라는 현실을 냉정히 수긍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현실을 100% 이해한, 영국에서는 희귀한 제작자였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워킹 타이틀이라는 브랜드의 색깔을 이해하는 고정된 배급, 마케팅 파트너를 잡고 그들로부터 직접 직원의 보수가 나오지 않는 한, 인디 프로듀서는 돈 구하고 배우 잡다 탈진해 영화제작 본론의 주도권과 즐거움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터득하고 있었다. 영화 제작에서 워킹 타이틀의 창립작품인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의 감독 스티븐 프리어즈가 말하듯, 오로지 진정하게 영국적인 영화가 무엇일까를 고심했던 데이비드 퍼트냄이나 리처드 아텐보로 같은 거물 선배 영국 프로듀서들과 달리 비반과 펠너는 오로지 진정하게 세계적인 것이 무엇일까에 몰두했다. “영국 문화의 현주소를 반영하면서도 국적 불문의 상품성이 있는 영화”라는 워킹 타이틀의 꿈은 리처드 커티스 각본, 마이크 뉴웰 감독의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1994)으로 첫 번째 파티를 열었다. 작가 리처드 커티스는 결혼계획 없이 오랫동안 함께 살며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여자친구 에마 프로이드와의 관계와 본인의 천태만상 하객 체험을 담아서 <네번의 결혼식…>을 썼다. 다섯번의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분절된 영화의 구조는 TV시트콤에서 단련된 리처드 커티스의 시추에이션 구성능력을 발휘하기에 최적이었다. 본디 커티스는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허니문’이라는 제목으로 써서 찰스가 캐리의 신혼여행을 따라가게 할 구상이었으나 친구 헬렌 필딩(<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작가)이 “너도 이제 철 좀 들라”고 면박을 주는 바람에 W. H .오든의 아름다운 시가 인용된 심오한 분위기의 장례식 시퀀스가 들어갔다. <네번의 결혼식…>은 곧 워킹 타이틀 로맨틱코미디의 매뉴얼이 됐다. 사랑의 진심조차 장애인 동생의 수화를 통해 발설해야 하는 찰스의 잉글랜드 남자의 전형적 소심증, 그들의 심리적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여성의 적극성- 활달하고 화려한 미국 여성에 대한 판타지를 포함해- 은 워킹 타이틀 로맨스의 기본 인물형이다. 특히 리처드 커티스와 캐리 그랜트가 뒤섞인 휴 그랜트의 페르소나는 독특했다. 그는 어설프지만 무식하거나 바보스럽지는 않다. 객관적으로 잘생기고 돈도 있지만 솔직히 2류 인생이라는 열등감을 오래된 옷처럼 편안히 걸치고 있으며, 박력이 없는 대신 타인을 치명적으로 해칠 리도 없는 시대극 속 젠틀맨의 귀엽고 현대적인 변형이다. 무엇보다 그는 결코 ‘무리’하지 않는다. 심지어 7년 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거짓말쟁이 악역으로 변신한 그는 어떻게든 잘해보겠다고 약속해도 시원치 않을 터에 “당신이랑 잘 안 되면 나는 누구랑도 잘 안 될 거야”라고 말을 아낀다. 개성만발한 친구들의 서클로 주인공을 에워싸는 설정도 <네번의 결혼식…> 이후 <노팅 힐>의 윌리엄을 둘러싼 정 많은 친구들,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을 엄호하는 술꾼 친구들로 되풀이된다. 이 우정의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동성애자, 지체장애자, 펑크족 등 소수자의 속성을 지닌 인물들은 단순한 구색이 아니라 그룹에서 가장 현명한 멤버이며 친구 패거리를 따뜻한 유사 가족 집단으로 승화시키는 촉매다. 제작비 450만달러로 전세계적으로 2억5천만달러를 벌어들인 이 영화는 워킹 타이틀뿐 아니라 영국 영화산업에 터닝 포인트를 제공했다. <네번의 결혼식…>의 성공으로 영국 영화인들은 코스튬드라마나 영국의 국가 현실을 그린 영화만 된다는 1980년대의 강박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장을 상상하는 오락영화를 만들어도 좋다는 인식을 얻었고 이는 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영국영화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1999년 워킹 타이틀은 파트너 폴리그램을 인수한 유니버설과 연간 3∼5편을 제작하는 5년 계약을 통해 인센티브와 입장 수익일부를 받고 1500만달러에서 2천만달러 범위 영화에 대한 자체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디즈니 재직시 미라맥스 인수를 지휘했던 당시 유니버설픽처스 대표 크리스 맥거크가 주도한 이 계약으로 펠너와 비반은 와인스타인 형제가 디즈니와 맺은 관계와 유사한 위치를 누리게 됐다. 시나리오작가 리처드 커티스 팀 비반과 에릭 펠너가 영국영화에 우뚝 선 두개의 탑이라면 리처드 커티스(45)는 영국 영화산업이 보유한 마법사의 돌이다. 대학 졸업 직후 TV코미디쇼 의 각본팀에 합류한 리처드 커티스는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로완 앳킨슨 주연의 시대극 시트콤 <블랙애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톨 가이>로 에마 톰슨을 출세시키고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으로 휴 그랜트를 세계 영화팬들의 관심권에 진입시켰다. 파트너 에마 프로이드와 <노팅 힐>의 배경이 된 포토벨로 로드에서 사는 커티스는 개인적으로 보고 겪은 사람과 공간을 상업성 있는 코미디로 허구화하는 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재능을 자랑하는 작가. 재능도 재능이지만 <블랙애더>와 <빈>의 감독 멜 스미스와 로완 앳킨슨, 워킹 타이틀의 팀 비반, <네번의 결혼식…>과 <노팅 힐>의 프로듀서 던칸 켄워시 같은 인적 관계망은 그에게 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리처드 커티스의 네잎 클로버는 그의 감독 데뷔작 <말하자면 사랑>에서도 같이 작업할 예정인 휴 그랜트. “음, 휴가 나타나줘서 엄청 편리했죠.” 자신의 핸섬한 영화적 분신에 대한 커티스의 간단한 치하다.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 [1]

내게 강같은 로맨스 넘치네 로맨틱코미디는 뻔하다고 모두 쉽게 말한다. 비단 우리 관객만의 생각은 아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여자애들이나 보는 영화’(chick flick)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영화의 많은 수도 로맨틱코미디 소속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잊을 만하면 한편씩 여자뿐 아니라 남자 관객도, 20대 커플뿐 아니라 30대 외톨이 관객도 즐겁게 하는 로맨틱코미디들이 런던으로부터 극장가로 날아들었다.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그리고 새로 개봉하는 <어바웃 어 보이>까지. 영국의 인디 프로덕션에서 유니버설이 5년간 7억5천만달러를 투자하는 파트너로 성장한 영화사 워킹 타이틀이 휴 그랜트, 리처드 커티스, 헬렌 필딩, 닉 혼비 등의 영국 대중문화의 스타들과 함께 만들어낸 이 로맨틱코미디들은 여자와 남자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덜어낸 자리에, 안 풀리는 캐리어와 각기 제몫의 실패담을 안고 술자리에 모여드는 친구들, 중산층 독신자들의 매너 연구를 넣고 마천루 대신 런던의 아름다운 공원과 건물을 새로운 스펙터클로 담아 관객을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대단한 미학적 성취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뻔함’의 가짓수를 늘려서 장르영화 팬을 즐겁게 한 영화 네편과 그들을 통해 자기 브랜드의 하위 장르를 창조하며 성장한 워킹 타이틀, 네편의 로맨스와 하나의 영화사 이야기를 엿본다. 휴 그랜트의 새 영화 <어바웃 어 보이>는, 혹시나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기대어 사는 38살의 바람둥이 백수 윌이 우연히 만난 소년 마커스의 손에 이끌려 진짜배기 사랑과 책임의 세계로 통하는 문턱을 넘는 이야기다. 그것은 오래 전 <키드>의 찰리 채플린이, <퍼펙트 월드>의 케빈 코스트너가 밟은 코스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바웃 어 보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첫머리와 똑같이 혼자인 윌과 마주친다. 그럴 리가!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면 애인 레이첼이 프레임 속으로 들어와 윌의 뺨에 입을 맞춘 뒤 지나간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다시 카메라가 시야를 넓히면 마커스와 레이첼의 아들, 윌의 옛 동료와 마커스의 엄마가 모여 있는 윌의 집안이 보인다. 윌은 레이첼에게 청혼할 거냐는 소년의 질문에 확답하지 않는다. 윌은 여전히 섬이다. 달라진 것은 이제 그의 곁에 다정한 이웃 섬이 군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어바웃 어 보이>에 나오는 독신부모 클럽의 슬로건 “혼자 또 같이!”(Alone Together!)는 이 영화의 철학이기도 한 셈이다. 로맨스가 있는 코미디 <어바웃 어 보이>가 종국에 윌에게 선사하는 트로피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가 아니라 대체가족이다. 1994년의 슬리퍼 히트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에서 주인공 남녀의 전통적인 키스와 더불어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대사는 혼인서약의 변으로 익숙한 “그렇게 하겠어요”(Yes, I do)다. 그러나 여자의 그 대답에 앞선 남자의 질문은 “나랑 결혼해 줄래요?”가 아니라 “나와 평생 결혼하지 않(고 곁에 머무르)는 데에 동의해줄 수 있어요?”다. 달착지근한 장르의 공식에 좀더 충실한 <노팅 힐>(1999)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를 포함해 <네번의 결혼식…>부터 <어바웃 어 보이>에 이르는 네편의 영국산 로맨틱코미디는 모두 어느 교차로로 인생을 몰고가야 좋을지 난감해하는 늦된 30대의 사랑 이야기다. 이들은 남녀가 라이벌로 만나 언쟁의 불꽃 속에 사랑을 확인하는 경로에 집중하는 스크루볼코미디 계보의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와 사뭇 다르다. 영화 속의 30대 남녀에게는 연애말고도 잡다한 골칫거리가 있다. 그들은 때로 자기가 어떻게 해볼 도리없는 문제는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며 하나의 사랑이 지나가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다음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푸념을 늘어놓고 홀로 잠든다. 그러나 이 덜 섹시한 30대 남녀들의 연애담은 이상하게도 번번이 전세계 로맨틱코미디 팬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 이유는 아마 러브스토리에 대한 갈증으로 멜로드라마의 티켓을 사고 스릴에 대한 갈증으로 스릴러를 찾으면서도, 좋은 로맨스영화는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을, 좋은 호러는 공포 이외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발견하는 우리의 경험과 통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