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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진 시먼스

무엇보다 먼저 손은 행위를 나타낸다. 손은 계약서에 사인해 결정을 완료하고 도시를 건설하며 손가락 한 번의 클릭 실수로 한 국가의 경제나 국방 시스템이 마비될 수도 있다. 사랑이 시작될 때, 처음 나누는 육체적 접촉도 상대의 손을 잡는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몽정을 경험했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의 1965년산 제품으로선 너무 빠른 신체적 조숙이었다. 그러다보니 피도 안마른 어린 초딩 녀석이 벌써부터 밝힘증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호통재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이면 4학년 바로 그 즈음에 담임선생으로 온 분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 초등학교 선생 일을 시작하는 23살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외람되지만 수업시간 내내 담임선생이 칠판의 좌우를 오갈 때마다 따라 파동치는 가슴에 온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밤마다 담임선생에 대한 환상으로 몽정을 하는 횟수가 더욱 잦아진 반면, 성적은 육중한 물체가 낙하하듯 빠르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갔다. 이렇게 나의 초딩 4년 시절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야릇하고 은밀한 쾌감, 그러면서도 왠지 불결하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감정의 혼돈 상태에서 유쾌하지 못하게 끝났다. 5학년 무렵, 주말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던 외화프로그램을 보다가 우연히 진 시몬즈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0년 작 <스팔타커스>였다. 당시 흑백 화면에서 그녀를 처음 보고 나도 모르게 화면을 향해 뻗는 내 손을 발견하게 되었다. 경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온몸으로 진동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행위였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 여선생에 대한 성적인 호기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오히려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듯한 그런 순수함이 가슴 쏙에 “쏴~”하고 퍼지는 듯했다. 진 시몬즈는 어린 나에게 성적 매력을 초월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스크린 속의 내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한 동네에 전화가 있는 집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시절인 만큼 이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강렬해져만 갔다. 고교시절까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빅 컨트리>(1958), 리차드 버튼 주연의 <성의>(1953), 버트 랭카스터와 함께 전도사 샤론 역으로 나왔던 <엘마 갠트리>(1960), 그리고 전혀 의외의 캐릭터로 등장했던 <검은 수선화>(1947) 등등 여러 작품들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봤다. 진 시몬즈가 나오는 영화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고1때였다. 등교길이면 언제나 같은 버스에서 마주치던 여고생이 있었는데, 옆모습이 진 시몬즈와 흡사했다. 무언가 멋진 프로포즈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고민하고 또 했다. 당시 문화방송 장학퀴즈에 출연해 장원을 하고 소감을 밝히는 과정에서 공개적인 사랑 고백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결국 장학퀴즈 445회에 출연(당시 차인태, 조일수 진행)했지만 공개홀의 수많은 조명과 방청객들을 보자 너무 떨고 긴장한 나머지 작전은 100%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사회생활을 하며 이성에 대한 취향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진 시몬즈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신부와 소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가시나무 새>에서도 열연했고, 근래에는 저 유명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늙은 소피의 영어 목소리를 맡기도 했다. 비록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목소리만 들려주는 것이었음에도 그리고 그것이 70대의 할머니가 된 진 시몬즈였음에도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 존재로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게 만드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보여준 진 시몬즈는 내겐 영원한 스크린 속의 첫사랑인 것이다.

제7회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3]

세상의 시선 따윈 상관없어! 헤이, 맨∼! 무엇보다 인생에는 록 스피릿이 필요하다고. 응? 알아? 음악, 음악 말야. 그리고! 남들 신경쓰지 않고 하고 싶은 건 하는 정신이지. 우리가 이상한 영화를 좋아한다고? 보고 싶은 건 보는 거야. 식충이, 게으름뱅이, 미친놈, 괴짜, 변태…. 저놈들이 뭐라 해도 신경쓰지마. 그런 소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려. 우리는 속박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냐. 즐기고 놀려고 태어난 거라곳! 어둠 속의 심장박동 Heart, Beating in the Dark 나가사키 슌이치/ 일본/ 2005년/ 104분 두근거리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세 커플의 기이한 고백록. 한때 연인이었던 링고와 이나코는 23년 만에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난다. 잊고 살았다지만, 두 사람에겐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악몽이 있다. 그리고 젊은 부부 토루와 유키. 두 사람 또한 과거의 링고와 이나코가 그러했듯이, 똑같은 이유로 경찰의 수배를 피해 도주 중이다. 갑자기 치밀어오른 두려움과 좀처럼 떼내지 못하는 불안에 떨며 섹스를 거듭하는 두 커플은 결국 바닷가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조우한다. 마지막 커플은 23년 전 링고와 이나코. 나가사키 슌이치가 1982년에 만든 동명영화의 리메이크작이고 후속작이기도 한 <어둠 속의 심장박동>은 과거 오리지널 필름을 여러 차례 삽입해 두 커플이 억누르고 싶어하는 죄의식의 근원을 젊은 날의 링고와 이나코를 통해 보여준다. “우리는 인생의 어떤 것을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또 다른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라는 말로 리메이크를 받아들인 감독처럼, 배우들 또한 만회의 기회를 쥐고자 애쓴다(메이킹 다큐멘터리의 형식도 취한다. 원작의 링고와 이나코를 연기했던 두 배우가 실제 중년 커플로 나온다). 극중에서 링고가 과거의 자신이기도 한 토루를 만나면 실컷 패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이토. 하지만 결국 그는 주먹을 날리지 못한다. 거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과거, 그것은 떠안고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광기 Lunacy 얀 슈반크마이에르/ 체코/ 2005년/ 118분/ 불면의 밤 세상에는 많은 선들이 그어져 있다. 그중 어떤 선은 정상 혹은 비정상이라는 말로 세상을 양분한다. 얀 슈반크마이에르의 <광기>는 그 선의 어느 쪽 너머가 진짜 광기인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일이 가능한지 묻는 영화다. 장이라는 남자는 가끔 환상을 본다. 두 괴한이 나타나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두려는 환상이다. 그의 어머니는 정신병자였고, 장이 보는 환상은 자신도 어머니처럼 감금될지 모른다는 데 대한 강박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는 길에 장은 정체불명의 후작을 만난다. 그는 분명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장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행동과 장광설에 알게 모르게 설득당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는 가운데 장은 한쪽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광기의 실체를 보여준다. 스톱모션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감독답게, 슈반크마이에르는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혀, 고깃덩어리, 눈알이 등장하는 수십편의 스톱모션신을 영화에 삽입했다. 이 영상은 처음엔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지만 반복해서 보고 있자면 꽤나 사랑스럽게 보인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광기>의 스토리 역시 곧 현실에 대한 우화로 다가온다. 하바나 블루스 Habana Blues 베니토 잠브라노/ 스페인, 쿠바, 프랑스/ 2005년/ 110분/ 영화궁전 음악이 곧 생활인 쿠바에는 재능있는 뮤지션들이 넘치지만 산업으로서의 음악은 없다. 12년간 쿠바에 살았던 스페인 감독은, 성공하기 위해 유럽시장에 진출해야만 하는 쿠바 뮤지션들의 상황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밴드의 리더인 루이와 티토는 오랜 지기다. 꿈꾸던 유럽 진출을 앞두게 되지만 무명인 그들에게 제시된 계약 조건은 열악하다. 루이는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돌아서고, 쿠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티토는 계약이 깨졌음에 불같이 화를 낸다. 밴드를 떠나 혼자 스페인행을 결심하는 티토. 티토 없는 콘서트를 준비하는 루이. 또 다른 한편에선 아내와의 이별이 루이를 기다리고 있다. 쿠바의 색감으로 칠해진 여러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은 <하바나 블루스>가 선사하는 가장 큰 기쁨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에 머물지 않는다. 쿠바의 젊고 펄떡이는 음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현실이다. 사랑하고 아끼던 이들에게도 헤어짐의 순간은 온다. 각자가 선택한 이별 앞에서, 이들은 아린 마음을 여미며 서로의 앞날을 응원한다. 따로 걷는 걸음이 쓸쓸해 보이지만 빛나는 과거는 그들에게 늘 힘이 되어줄 것이다. 쿠바인들의 건강한 생명력은 보는 이의 가슴에도 힘을 불어넣는다. 홈커밍 Homecoming 조 단테/ 미국/ 2005년/ 60분/ 시네마스케이프 조 단테가 지옥의 사자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공화당원으로 추정되는 정치고문이 TV에서 “전사자들이 돌아와 그들의 죽음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죽은 군인들이 무덤을 뚫고 지상으로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문제는 돌아온 사자들이 원하는 것이 공화당 정치고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 썩은 살을 흘리며 나타난 시체들은 그들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투표권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홈커밍>은 원래 다리오 아르젠토, 토브 후퍼, 존 카펜터 등 13명의 공포영화 거장들이 모여서 만든 미국 쇼타임 채널의 프로젝트 <마스터즈 오브 호러>의 한 에피소드로 기획됐다. 물론 조 단테가 순수한 의미로서의 공포영화 감독이 아닌 만큼 <홈커밍>도 정공법적인 공포영화로서의 흥미는 덜하다. 사실 조 단테(<그렘린> <하울링>)가 애초에 원했던 것은 좀비영화 장르의 관습을 빌려 현실정치를 꼬집을 수 있는 풍자코미디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홈커밍>은 노골적으로 부시 정부를 놀려먹는 반공화당-좀비영화이며, 오랜만에 메가폰을 쥔 조 단테의 반골정신 또한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까뮈 따윈 몰라 Who’s Camus Anyway? 야나기마치 미쓰오/ 일본/ 2005년/ 115분/ 시네마스케이프 고다르와 베르톨루치 그리고 카뮈. 영화 워크숍 작품을 준비하는 문학부 학생들은 쉴새없이 서양 영화감독과 작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범위도 대중이 없어서 트뤼포와 타란티노를 오갈 정도다. 야나기마치 미쓰오 감독은 서양의 영화와 문학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하는 일본의 현재 젊은이들에게서 불안을 잡아낸다. 극중 영화감독 마츠카와 어시스턴트인 히사다, 주연배우 이케다 등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문제가 있다. 마츠카는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골치가 아프고, 히사다는 남자친구가 멀리 떠난 사이 다른 두 남자와 키스를 하게 되면서 고민에 빠진다. 여자 같은 복장을 즐겨입는 이케다는 연기에 대한 감독과의 의견차로 힘들어하고 문학부 교수 나카조는 남몰래 여학생을 훔쳐본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영화 속 내용처럼 점점 미묘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고, 영화는 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는 <불의 축제> 이후 야나기마치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지진 속의 피아노 조율사 The Piano Tuner of Earthquakes 퀘이 형제/ 영국, 독일/ 2005년/ 99분/ 시네마스케이프 몽환적인 작품들로 유명한 퀘이 형제의 신작. 그들의 첫 장편인 <밴야민타 학원> 이후 10년 만의 작품으로, 아돌포 비요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을 모티브 삼았다. 오페라 가수 말비나에게 드로즈 박사라는 인물이 보낸 백합이 배달된다. “신이 우리의 두 영혼은 단단히 묶을 것”이라는 기분 나쁜 쪽지와 함께다. 약혼자 아돌포와의 결혼을 앞둔 말비나는 노래를 하다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둔다. 어디선가 나타난 드로즈 박사가 절규하는 아돌포의 눈앞에서 시신을 거두어간다. 그는 자신의 세상에다 그녀를 되살린다. 그러나 말비나는 인형처럼 멍하게 앉아만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드로즈 박사는 피아노 조율사를 성으로 불러 이상한 기계 7개를 조율해달라고 한다. 아돌포와 똑 닮은 피아노 조율사는 말비나와 마주치자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영화는 퀘이 형제가 대세인 디지털을 따르면서 어떻게 자신들 고유의 색감과 질감을 살릴 것인지 고민한 결과물이다. 쌍둥이 형제는 매킨토시 컴퓨터를 샀고 파이널 컷 프로를 설치했다. 스토리는 다소 지루하지만, ‘바로크 판타지’라고 일컬어지는 환상적 영상은 작업 방식이 바뀌어도 여전히 아름답다. 3일간 불면의 밤을 위하여 컬트, 음악, 광기의 밤이 기다린다 올해 전주는 마니아 취향의 심야상영 3회를 준비했다. 각회의 키워드는 컬트, 음악, 광기 정도가 된다. 심야상영 첫날인 4월28일 밤에는 컬트의 제왕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초기작들이 기다린다. 장편 데뷔작인 <스테레오>를 비롯,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호러·고어영화에 경도되기 시작한 당시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텔레파시, 정신병, 성애 등의 소재를 마구 뒤섞어놓은 이 영화들은 이후 <비디오드롬> <플라이> 등의 모태가 되었다. 29일 밤에는 3편의 음악영화가 관객을 부른다. 샴쌍둥이로 결성된 록그룹에 대한 가짜 다큐멘터리 <브라더스 오브 더 헤드>, ‘물건’을 제거하고 여자가 되려는 성전환자의 이야기 <20센티미터>, 그리고 앞서 소개한 <하바나 블루스>다. <하바나 블루스>와 <20센티미터>는 성장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음악에 관심이 없는 이라도 즐겁게 볼 수 있다. 마지막 밤엔 광기와 망상이 힘을 떨친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거장 얀 슈반크마이에르의 <광기>와 그에게 영감을 받아왔다는 퀘이 형제의 신작이 함께 상영된다. <람포 지옥>은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 에도가와 람포의 단편 4편을 영화화한 것. 네명의 일본 감독이 각자의 방식으로 람포의 공포를 풀어놓는다.

제7회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7]

전대미문의 시청각적 융합물 인도영화의 대표적인 거장으로 손꼽히는 샤티야지트 레이는 리트윅 가탁이 생전에 남긴 글과 인터뷰를 모은 소책자 <영화와 나>의 서문에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존경어린 찬사를 바친 바 있다. “리트윅 가탁은 이 나라가 배출한 소수의 진정 독창적인 재능의 소유자 가운데 하나였다… 서사시적 스타일 속에서 그가 창조해낸 강력한 이미지들은 사실상 인도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로 작고한 지 꼭 30주년이 되는 인도 영화감독 리트윅 가탁은 우리에겐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듯하다. 심지어 영화광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그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의 정치학과 시학을 동시에 고민한 위대한 작가들- 예컨대 로베르토 로셀리니, 장 뤽 고다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글라우버 로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오시마 나기사 등- 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화사의 거목이 이런 식으로 잊혀져가고 있다는 건 진정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가로 출발해 인도민중극회(IPTA) 배우이자 연출가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옮겨갔던 그의 행보는 좀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였다. 심지어 그는 (로셀리니와 유사한 태도로) 기꺼이 영화를 버리고 텔레비전으로 옮겨갈 것이라 말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진정한 관심은 영화에 놓여 있지 않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곤 했다. 그런데 정작 가탁이 만들어낸 영화들은 민속적인 형식과 브레히트적 장치간의 기이한 결합, 다큐멘터리적 터치와 놀랄 만큼 표현적인 촬영의 교차, 거의 당혹스러울 정도로 이례적인 사운드 편집 등이 불가사의하게 어우러진 시청각적 융합물,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영화들이었다(후일 가탁의 초기 걸작 가운데 하나이자 그의 유일한 ‘코미디’인 <감상적 오류>(1957)가 파리에서 상영되었을 때, <카이에 뒤 시네마>는 그의 독특한 사운드와 이미지 병치 방식을 장 마리 스트라우브, 자크 타티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의 그것과 비교하기도 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비타협적인 예술가였으며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했던 이 괴벽의 시네아스트를 평생토록 사로잡았던 주제는 1947년의 벵골분할(과 그 귀결)이었다. 그 자신 동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출신이었던 가탁에게 이 강요된 분할은 돌이킬 수 없는 문화적 단절을 초래한 참을 수 없는 비극이자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별, 그리고 더욱 큰 비극을 초래할 뿐인 재회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미심장한 알레고리가 된다. 특히 1960년대 초반에 그가 내놓은 일련의 작품들- <구름에 가린 별>(1960), <사랑스러운 간다르>(1961) 그리고 <강>(1962)으로 이어지는 ‘콜카타 3부작’- 은 이상 언급했던 가탁 영화의 스타일과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난 대표작들로 손꼽힌다. 가탁의 영화 가운데 생전에 비교적 따뜻한 반응을 얻은 작품은 <구름에 가린 별> 정도였다. <사랑스러운 간다르>와 <강>의 연이은 실패는 가탁을 오랜 기간 침묵하게끔 만들었다. <강> 이후 1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탁은 당시 신생국가였던 방글라데시 영화계의 자본으로 <티타시라는 이름의 강>(1973)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가히 가탁 영화세계의 총결산이라 할 이 작품은 그가 얼마만큼의 예술적 야심과 깊이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가늠케 하는 현대의 위대한 서사시이다. 동벵골 티타시 강가 말로(Malo) 공동체의 몰락의 과정을 유장한 리듬에 실어 보여주면서 가탁은 자신의 유년기를 사로잡았던 40여년 전의 과거에 대한 숭고한 기념비를 완성했다. 그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 지식인으로 출연하는 <추론, 토론 그리고 이야기>(1974)는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고 이는 그가 죽은 지 일년이 지난 1977년에야 개봉되었다. 씁쓸한 후일담 한 토막. <추론…>이 개봉되기 열흘 전, 가탁의 데뷔작 <시민>(1952)이 콜카타의 한 극장에서 ‘비로소’ 개봉되었다. 샤티야지트 레이는 만일 이 영화가 제때 빛을 보았더라면 자신의 <길의 노래>(1955)가 차지했던 ‘최초의 대안적 벵골영화’ 자리는 <시민>의 몫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것이 의례적인 겸손의 발언이 아니라 진정 정당한 평가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노희경과 <굿바이 솔로> [1]

“거기 떡볶이 집이 아직 있으려나?” <굿바이 솔로>의 대본을 마치고 <씨네21>이 있는 마포로 노희경 작가를 불러냈을 때만 해도 우리의 발걸음이 공덕시장 어딘가를 어슬렁거리게 될지는 몰랐다. “예전에 이 동네에 배가 들어왔거든요.” <내가 사는 이유>의 배경이 되었던 마포의 선술집 언덕, 선원들을 상대했다는 ‘삐어홀’(맥주홀)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그 공간엔 이제 고층 아파트들만이 빽빽하게 서 있다. “지독하게도 바람을 피웠던 아버지”와 “너무 순해서 가슴이 아팠던 엄마”의 품을 떠나지 않고 응석을 부렸던 마포 토박이 소녀는 “오랜만에 왔더니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며 옛 동네를 이방인처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짧은 머리에 마냥 소년 같은 모습이지만 그러고보니 노희경 작가도 이제 마흔이다. 그녀가 마흔 나이에 써내려간 <굿바이 솔로>는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같은 따로 액자를 해놓아도 좋을 선언적인 대사는 줄었지만, 극 안에서 오가는 생기있는 대사의 호흡은 그 어느 작품보다 찰지다. 다중인물을 내세우고 추리 형식을 더한 <굿바이 솔로>는 기존 노희경의 팬에게나 보통의 시청자에게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드라마다. 봄이 오는 마포, 연기 자욱하게 깔린 시장통 생선구이집에서 낡은 호텔 커피숍으로 이어졌던 <굿바이 솔로>에 대한 혹은 작가 노희경에 관한 이야기. “외국드라마에 충격받고 눈 부릅뜨고 공부했다” -KBS 특집극 <유행가가 되리>를 선보이긴 했지만 미니시리즈로 치자면 <꽃보다 아름다워> 이후 2년이 흘렀다.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된 동력은 어디서 왔나. =‘심한 좌절’이 동력이었다. (웃음) 나는 외국드라마를 거의 안 보던 사람이다. 예전에 <섹스&시티>를 잠시 보고 저 여자들은 왜 저렇게 섹스만 하나,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러다 쉬는 동안 와 <섹스&시티> 등 외국드라마를 챙겨보면서 솔직히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은 연애를 하면서도 수사를 하면서도, 무인도에 떨어져서도 철학을 하고 있었다.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진지했다. 물론 드라마에 투자되는 자본의 규모가 다르지만 그 짧은 시간에 단지 상황이 아니라 이야기와 삶의 본질을 기막히게 비벼내더라. 저 작가에 저 감독에 저 배우에 저 시청자라니! 문화적 충격을 넘어 드라마가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멸감에 빠졌다. 부들부들 떨면서 봤다. -어떻게 그 충격에서 벗어났나. =그러다가 눈을 부릅뜨게 됐다. 언제까지 탓만 할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심리학책, 철학책을 파기 시작했다. 드라마 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본질에 다가가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겠다는 긴장감이 몰려왔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기도 하고, 한국 드라마판이 그동안 가진 것 없는 노희경을 먹여살렸으니 계속 공부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의무고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름다운 대사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고민의 끝에 뭐가 있었나. =지금껏 내가 써왔던 대사들을 보게 되었다. “날 잊어줘”, “이해해줘” 같은,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썼던 대사들까지 혼란스러웠다. 그게 내가 잊어달란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간 포장을 하느라 본질을 이야기할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노희경표 명대사’를 기대하는 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드라마를 써오고 그 대사들을 기억하는 팬들을 보면서, 나 역시 할 수 있는 대사, 아름다운 대사를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작가는 인상적인 대사를 쓰는 사람이라고 착각한 거지. 그런데 어느 날 TV를 보고 있으니 여기저기 드라마에서 온갖 아름다운 대사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와, 나는 저렇게는 못 쓰겠다, 느낄 만큼 휼륭한 대사들이었다. 그런데 그 눈부신 대사를 듣는데 이상하게 쓸쓸하고 허전했다. 예전에 선배 PD들이 날 보고 “넌 오만방자해, 넌 테크니컬해, 넌 자아도취야, 너는 마스터베이션하고 있는 거야”라며 충고했을 때는 흥, 했던 말들이 희미하게 무엇인지 알겠더라. 정말 많이 울었다. 그러다보니 대사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요즘은 그냥 지나가는 대사가 좋아졌다. 대신 배우나 연출에 훨씬 많이 기대게 되고, 그런 여유가 더 좋은 연기나 연출을 끌어내는 것 같아 기쁘다. -정감가는 노희경표 캐릭터들은 눈에 익지만 그들이 만드는 이야기도,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수희가 계속 받게 되는 정체 모를 문자메시지처럼 추리 요소도 긴장감을 주고, 영숙의 환영이나 과거의 플래시백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앞서 말했지만 추리 요소는 <로스트>나 의 영향이 크다. 그렇다고 좋은 외국드라마 그대로 베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웃음) 내 색깔과 내 방식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추리’라는 사고 전개는 결국 무언가가 일어난 심연을 돌아보게 만든다. 내 경우를 볼 때 성격이 고집불통에 교만해진 이유에는 어린 시절 무시받았던 상처가 있었던 식으로. 그렇다면 나는 사건의 추리가 아니라 심리의 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멜로에 다중스토리로 얼개를 짜게 되었다. 물론 반응(시청률)을 보면서 여전히 멀었구나 했지만. (웃음) 대신 1년 공부해서 안 해본 거 해보려고 한 거니까, 앞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은 생겼다. “첫사랑은 처음이란 뜻밖에 없는 건데, 텔레비전 보면 온통 첫사랑 때문에 목매는 거 비현실적이라 싫었거든. 두번, 세번 사랑한 사람들은 헤퍼 보이게 하잖아. 성숙해질 뿐인데. 지금 이 순간 니가 내 전부이고, 지금 이 순간 너만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미치게 사랑한다고 해야지, 왜 건방지게 ‘영원히’를 앞에 붙여들.” - <굿바이 솔로> 영숙과 미리의 대화 중 총 16회로 이제 막 반환점을 돈 KBS 미니시리즈 <굿바이 솔로>는 주인공들에 대해 일일이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지면이 꽉 차는 드라마다. 설치미술가에 바텐더, 건설회사 직원에 밥집 아줌마까지 그들을 직업군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도 힘들고,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를 사랑한 청년과 하자투성이 ‘나쁜 놈’을 조건없이 사랑하게 된 아가씨와 젊은 날 준 마음을 되돌려받지 못한 채 시체처럼 살아가는 중년 여자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라고 말하기에도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든다. <굿바이 솔로>는 그보다 저마다 “죽어도 말 못할” 과거에, 저마다 하나씩의 거짓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힘들게 시작한 고해성사 같은 드라마다. “모두 과거에 대해 변명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지안(이한)도, 영숙(배종옥)도, 민호의 엄마(정애리)도, 대부분 <굿바이 솔로> 주인공들은 모두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겐 화해하지 않은 과거의 순간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영숙이는 길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먹고 도둑질을 하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짜 치유는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거나 과거를 잊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정말 소문난 효녀였다.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3년간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살았다. 밥을 먹다가도 ‘내가 어떻게 밥을 먹어’라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엄마보다 오래 살고 있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죽은 엄마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수술실에서 살아 나왔을 때 모든 가족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던 표정은 ‘아, 또 시작이구나’였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엄마가 죽기를 바랐다. 내가 진짜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건 과거로 돌아가 그 순간의 나와 대면했을 때였다. 여전히 그 시절의 나는 부끄럽지만 이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은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주인공 모두 환자 같고 의사 같다. 서로의 치유에 기꺼이 동참하기도 하고. =모두 과거에 대해 변명하고 그것을 들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것이 합리화가 될지라도. 우리는 가끔 지나간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나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면 진짜 현재와 만날 수 없다.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말인데, 나는 어릴 적에 도둑질을 많이 했다. 학교 공중전화를 거꾸로 해서 동전을 빼는 식이었는데 이후 DDD전화기가 나오면서 장비가 필요하게 되어서 힘들었다. (웃음) 그런데 그때는 그게 죄인지 몰랐다. 나는 가난했고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지했다. 하지만 지나간 나를 욕해도 그건 이미 과거다. 변명하고 싶으면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싶으면 합리화를 하라고 하고 싶다. 단 지금,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거다. “우린 남에게보다 늘 자신에게 더 가혹하다. 당연히 힘든 일인데 자신을 바보 같다고 미쳤다고 미워하고, 남들도 욕한 나를 내가 한번 더 욕하고, 그것도 모자라 누군가는 가슴에, 누군가는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면서 우리가 얻으려 하는 건 대체 뭘까? 사랑? 이해? 아니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 - <굿바이 솔로> 미리의 내레이션 노희경 작가의 캐릭터 사랑을 넘어선 배우에 대한 애정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시절, 주인공들의 사진을 집 벽에 붙여놓고 “잘 잤니? 재호야, 밥먹었어? 신영아” 하고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상상 가능할 것이다. ‘만학도’ 노희경의 단짝 학우인 나문희, 배종옥, 이재룡은 물론이고 천정명, 윤소이, 이한 등 제 몫 하는 어린 배우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김민희,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인 윤유선까지 <굿바이 솔로> 역시 실로 배우들의 드라마라 할 만하다.

[포커스] 인도영화의 진정한 거목 리트윅 가탁을 만나다

인도영화의 대표적인 거장으로 손꼽히는 샤티야지트 레이는 리트윅 가탁이 생전에 남긴 글과 인터뷰를 모은 <영화와 나>의 서문에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바친 바 있다. “리트윅 가탁은 이 나라가 배출한 소수의 진정 독창적인 재능의 소유자 가운데 하나였다… 서사시적 스타일 속에서 그가 창조해낸 강력한 이미지들은 사실상 인도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로 작고한 지 꼭 30주년이 되는 인도 영화감독 리트윅 가탁은 우리에겐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다. 영화광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그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의 정치학과 시학을 고민한 위대한 작가들-로베르토 로셀리니, 장 뤽 고다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글라우버 로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오시마 나기사 등- 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목이 이런 식으로 잊혀져가고 있다는 건 진정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가로 출발해 인도민중극회(IPTA) 배우이자 연출가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옮겨갔던 그의 행보는 좀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가 무엇인가를 고민한 결과였다. 심지어 그는 기꺼이 영화를 버리고 텔레비전으로 옮겨갈 것이라 말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진정한 관심은 영화가 아니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곤 했다. 그런데 정작 가탁의 영화들은 민속적인 형식과 브레히트적 장치간의 기이한 결합, 다큐멘터리적 터치와 놀랄 만큼 표현적인 촬영의 교차, 거의 당혹스러울 정도로 이례적인 사운드 편집 등이 불가사의하게 어우러진 시청각적 융합물,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영화들이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비타협적인 예술가였으며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했던 이 괴벽의 시네아스트를 평생토록 사로잡았던 주제는 1947년의 벵골분할이었다. 그 자신 동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출신이었던 가탁에게 이 강요된 분할은 돌이킬 수 없는 문화적 단절을 초래한 참을 수 없는 비극이자 폭력이었다. 따라서 그의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별, 그리고 더욱 큰 비극을 초래할 뿐인 재회는 이 사건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특히 1960년대 초반에 그가 내놓은 일련의 작품들- <구름에 가린 별>(1960), <사랑스러운 간다르>(1961) 그리고 <강>(1962)으로 이어지는 ‘콜카타 3부작’- 은 이상 언급했던 스타일과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난 대표작들로 손꼽힌다. 가탁의 영화 가운데 생전에 비교적 따뜻한 반응을 얻은 작품은 <구름에 가린 별> 정도였다. <사랑스러운 간다르>와 <강>의 연이은 실패는 가탁을 오랜 기간 침묵하게 했다. <강> 이후 1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탁은 신생국가였던 방글라데시 영화 자본으로 <티타시라는 이름의 강>(1973)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가탁 영화세계의 총결산이라 할 이 작품은 그가 얼마만큼의 예술적 야심과 깊이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가늠케 하는 위대한 서사시이다. 동벵골 티타시 강가 말로(Malo) 공동체의 몰락의 과정을 유장한 리듬에 실어 보여주면서 가탁은 자신의 유년기를 사로잡았던 40여년 전의 과거에 대한 숭고한 기념비를 완성했다. 그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 지식인으로 출연하는 <추론, 토론 그리고 이야기>(1974)는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고 이는 그가 죽은 지 일년이 지난 1977년에야 개봉되었다. 씁쓸한 후일담 한 토막. <추론…>이 개봉되기 열흘 전, 가탁의 데뷔작 <시민>(1952)이 콜카타의 한 극장에서 ‘비로소’ 개봉되었다. 샤티야지트 레이는 만일 이 영화가 제때 빛을 보았더라면 자신의 <길의 노래>(1955)가 차지했던 ‘최초의 대안적 벵골영화’ 자리는 <시민>의 몫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것이 의례적인 겸손의 발언이 아니라 진정 정당한 평가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투덜군 투덜양] 옆나라의 미래가 걱정돼, <오늘의 사건사고>

내가 봤던 일본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가운데 가장 미스터리한 건 TV애니메이션인 <아따 맘마>다. 일본의 평범한 서민 가족의 일상을 그린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엄마는 지금까지 봐왔던 일본영화나 드라마 속의 여성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속된 의미로 ‘아줌마’스러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뚱뚱하고 억척스럽고 수다스러우며 뻔뻔하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순풍 산부인과>에서 옆집 아줌마로 등장할 법한 캐릭터다. 뭐 그게 이상하냐 싶겠지만 일본영화나 드라마에서 한번도 이런 캐릭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봤던 일본 여성 캐릭터는 과하면 <도쿄 타워>의 여주인공, 덜해봤자 <메종 드 히미코>의 여주인공 정도로 그들은 여성스럽거나 귀엽다. 30∼40대 여성들은 언제나 상냥하고 조용하며 10∼20대 여성들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특히 그런 느낌을 강하게 주는 건 말투인데, 이게 얼마나 본래 일본어 말투와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어 더빙판인 <아따 맘마>를 볼 때마다 일본어판이 늘 궁금하다. 마트에서 공짜 사은품 받기에 사활을 건 아줌마가 ‘스미마셍’을 연발하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새치기한 옆사람과 얼굴이 벌게져서 싸운다면 그건 또 얼마나 웃길까. 유키사다 이사오의 청춘영화 <오늘의 사건사고>는 추측건대 오늘의 일본의 평범한 20대, 또는 대학생들의 일상을 과장없이 그린 영화일 것이다. 과장이 없으니 대단한 사건사고도 없다. 여기에는 세명의 여성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이상한 건 이 여성들이 ‘평범한’ 대학생이라기에는 너무 귀엽고 깜찍하다는 거다. 다른 게 아니라 말투가 그렇다. 좋게 말해 깜찍하다는 거고 제대로 말하면 유치원생들을 데려다놓은 것 같다. 이들은 끊임없이 징징거리는 아기 말투로 남자친구와 남자친구의 친구들에게 투정을 부리고 애교를 떤다. “에잉, 꼭 사려던 치마가 벌써 팔렸다고 몰라몰라, 나 삐졌어” 식의 말투를 연발하는 마키와 그 친구, 소심한 남자친구에게 끊임없이 아이 같은 말투로 푸념을 쏟아놓는 치요가 과연 지금 일본을 살아가는 젊은이의 초상 맞나. 맞다면 나와 상관도 없는 일본사회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는 일이다. 그리고 여자 셋이 앙상블로 연기하는 콧소리 섞인 징징거림을 보는 건 영화에의 집중을 방해할 지경으로 피곤했다. 이 세 여자의 말투가 진짜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몹시 부럽기도 하다. 남자친구한테 “뭐야뭐야 미워미워”를 연발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리는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페미니즘 따위는 상관없다. 얼마나 편하겠는가. 그러나 “뭐야뭐야 미워미워”를 연발하다가 여러 남자를 떠나보내며 본의 아니게 주체적인 여성으로 성장한 나로서는 이 여자들의 말투가 딱하고 한심스럽다. 더불어 적어도 이런 도착적 캐릭터를 요구하지 않는 한국에 사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이케와키 치즈루

2005년 10월 그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일년 전 스크린에서 보았던 그녀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때론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마치 쓰네오에게 투정부리듯 또 어떤 때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일년 후〉를 읽는 것처럼 나지막한 말투로 얘기를 한다. 2004년 10월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에겐 특별한 영화다. 매번 남들이 말하는 좋은 영화, 꼭 봐야 된다는 영화를 수입해서 개봉했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실망할 수준이었다. 미리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인터넷에 찬사의 글을 올렸지만 그건 영화의 흥행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쓰마부키 사토시가 방한했을 때야 겨우 “음, 이 영화가 손해는 보지 않겠구나” 안심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영화를 보면 항상 내가 한 일이 아닌데, 계속 조제와 헤어진 쓰네오처럼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조제가 잘 지내고 있을까? 요즘도 혼자 그렇게 생선을 구워서 먹고 있을까? 혹시 또 옆집 변태아저씨의 이상한 요구를 들어주면서 지내지는 않을까? 정말 쓰네오와는 그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영화를 개봉한 지 정확히 일년 만인 2005년 10월 극장에 다시 영화를 걸었다. 그리고 감독님과 조제 역을 했던 이케와키 지즈루를 한국에 초청했다. 처음 만나자마자 그런 얘기들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스스로에게 “이 사람아, 저 사람은 이케와키 지즈루라는 배우야, 조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그런 다짐이 소용이 없어졌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그녀는 이케와키 지즈루가 아닌 조제였다. 웃는 모습이며, 장난치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영화에서 본 조제와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는 똑같은 사람이었다. 지난 1월, 디브이디 제작을 위해 영화의 촬영지를 찾아갔다. 조제와 쓰네오가 같이 마지막으로 여행갔던 그 바다와 또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모텔, 조제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제일 먼저 가고 싶어했던 동물원과 그리고 처음 쓰네오가 조제를 데리고 달렸던 그 둑길. 촬영을 모두 마치고 저녁에 감독님을 만났다. 우리가 찍어 온 사진을 보시면서 너무나 즐거워하시던 감독님은 갑자기 “음, 조제는 지금 뭐 하고 있지?”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하셨다. 늦은 일요일 저녁시간, 그녀는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 만화를 보고 있었다. 그녀와 몇 달 만에 다시 통화를 했다. 여전히 밝고 씩씩한 목소리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가을이 되면 이누도 잇신 감독님의 예전 작품 〈금발의 초원〉을 개봉할 생각이다. 물론 주인공은 이케와키 지즈루다. 조제가 아닌 이케와키 지즈루가 주연을 맡은 영화인 것이다. 감독님과 주연배우를 초청하는 행사를 계획중이다. 그런데 이케와키 지즈루가 아닌 조제를 다시 보고 싶고, 또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다. 아무래도 그녀의 방한 중에 다시 한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극장에서 봐야 할 거 같다. 요즘도 맑은 하늘에 걸려 있는 구름을 보면 문뜩 생각이 난다. 뚝방길을 과속으로 달리던 조제의 유모차가 길 아래로 구르고, 그리고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저 구름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던 그녀가.

[포커스] 크로넨버그와 함께 밤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밤>은 신체 변형과 질병과 정신 분열의 밤이라 불러도 좋을 법하다. 이 섹션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은 크로넨버그의 습작인 <스테레오>(1969), <미래의 범죄>(1970)와 초기의 걸작인 <브루드>(1979) <스캐너스>(1981), 모두 4편의 기괴한 모험들이다. 사실 지금의 크로넨버그는 초기와는 전혀 다른 경지에 올라있는 작가다. 88년작 <데드 링거>로부터 <크래시>(1996)를 거쳐 최근의 걸작 <폭력의 역사>(2005)에 이르기까지, 그는 섹슈얼리티와 신체에 대한 불안감을 장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에서 발전해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후기작들로부터 크로넨버그에 매료된 관객들에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밤>은 꽤나 낯선 경험일 수 도 있다. 그의 데뷔작 <스테레오>와 <미래의 범죄>는 언더그라운드 학생영화다. <스테레오>는 캐나다의 성 연구소에서 텔레파시 능력을 갖게 되는 수술을 받은 일곱명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 사이비 과학에 대한 냉혹한 풍자라고 할 수도 있을 이 작품은 사실 ‘이야기’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곤란할 정도로 불친절한 실험영화에 가깝다. <스테레오>의 쌍생아인 <미래의 범죄>는 여성들이 유해 화장품으로 얻은 병때문에 죽어없어진 미래를 배경으로, 화장품의 창조자를 찾아헤메는 제자의 카프카적인 모험을 그린다. 기계적인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두 (일종의)무성영화들을 숨겨진 컬트영화로 평가하는 것도 섣부른 예찬이 될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두 작품은 디스토피아 SF소설 작가를 꿈꾸던 생화학과 대학생이 돈없이 만들어낸 습작에 가깝다. 다만 각각의 작품이 차후 크로넨버그가 즐겨 다루게 될 두가지 주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스테레오>가 정신의 변형에 의한 진화를 그리는 영화들(<스캐너스> <초인지대>)의 시작이라면, <미래의 범죄>는 신체적 변형을 통해 진화를 다루는 영화들(<라비드> <비디오드롬> <플라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크로넨버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브루드>와 <스캐너스>는 아마도 팬들에게는 익숙한 작품일 것이다. 바로 이 영화들로부터 신체의 변형과 정신적 전이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변주곡이 본격적인 음계조율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캐나다 시절의 초기 걸작인 <브루드>는 그야말로 악몽같은 영화다. 혁신적인 정신치료의 대가인 래글런 박사(올리버 리드가 무시무시하게 연기한다)는 카베사의 아내 노라를 격리 치료중이다. 카베사는 아내 노라가 딸을 학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라의 부모가 짐승처럼 생긴 아이들에게 살해당하고, 노라는 점점 이상한 진화 과정을 겪는다. 당시 크로넨버그는 고통스러운 이혼을 겪은 직후였는데, 유아살해와 신체변형의 충격적인 이미지들은 그의 혼란스러운 심리상태가 극도로 파괴적인 창조력으로 재생한 듯 한 인상을 준다. 국내 TV에서도 방영된 <스캐너스>는 크로넨버그를 언더그라운드 호러작가에서 제도권으로 탈출시킨 크로넨버그의 상업적 성공작중 하나다. 스캐너는 텔레파시를 나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보안 업체들은 이들의 능력을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의약기업의 흉측한 음모 사이로 스캐너들의 사회를 꿈꾸는 스캐너와 그를 막으려는 스캐너의 대결이 벌어진다. 비교적 관습적인 구조로 흘러가는 이 작품은 80년대 초반 서구사회를 휩쓸던 ‘사이버 펑크’담론에 속해 있으며, 특히 인식의 힘을 이용해서 전화선을 통과해 컴퓨터에 침투하는 설정은 <뉴로맨서>같은 SF 소설들을 연상시킨다. 크로넨버그와 함께 하는 불면의 밤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스테레오>와 <미래의 범죄>는 몽환적인 최면의 밤에 가깝고 <브루드>와 <스캐너스>는 무시무시한 기면의 밤에 가깝다. 75년작인 <파편들>과 77년작인 <열외인간>이 함께 상영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이미 크로넨버그의 장기(長技와 臟器)가 모두 드러난 지금, 그의 과거를 거슬러오르는 불면의 여행이란 꽤나 흥미진진하다.

진정한 키덜트 시대의 아이콘, <개구리 중사 케로로: 최종병기 키루루>

케로케로케로. 타마타마타마. 도로도로도로. 이 요상한 반복음에 웃어젖힐 수 있다면 그건 <개구리 중사 케로로>의 팬이라는 뜻이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는 1999년 만화주간지에 연재되면서 700만부의 단행본을 팔아치우고, 2004년 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면서 일본의 문화현상이 된 애니메이션. 지구를 침략하러 왔다가 정착하게 된 외계 개구리들의 성공담은 <포케몬>이나 <유희왕>과는 조금 다르다. 보기와는 달리 만만치 않은 개그의 수준이 주요 타깃층인 아이들뿐만 아니라 열혈 성인 마니아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 최종병기 키루루>는 TV시리즈의 설정을 관객이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한다. 케로로는 건프라(건담 프라모델)를 사서 돌아오는 중 괴상한 사당 안에 놓여 있는 단지를 깨뜨린다. 문제는 단지 속에 예로부터 전해져온 케론별의 최종병기 키루루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키루루는 사람들의 이마에 텔레파시가 가능한 X표를 전파하고, 서로의 어두운 속마음을 읽게 된 사람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전 일본의 히키고모리(은둔형 외톨이)화가 시작된 것이다. 알고 보니 키루루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생각의 힘을 키우는 괴물. 물론 세상을 구하는 것은 5명의 멋진 개구리들이다. 사실 <개구리 중사 케로로: 최종병기 키루루>는 케로로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외계 행성의 언어나 마찬가지다. 신나게 웃기 위해서는 케로로 만화의 설정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왜 개구리들은 지구에 살고 있는가. 왜 케로로는 건프라를 좋아하는가. 갑자기 쏟아져나오는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은 어떤 성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가. 조카에게 물어본다면 몇 시간이고 신나서 떠들어댈 것이니 인터넷으로 미리 정보를 다져두는 편이 좋다. 여느 일본 TV애니메이션의 극장판과 마찬가지로 <개구리 중사 케로로: 최종병기 키루루> 역시 무성의한 작화와 대충 써낸 듯한 각본을 타고 63분간 흘러간다. 하지만 값싼 극장애니메이션의 단점도 케로로 중대가 등장하는 순간 모두 잊혀진다. <에반게리온>을 연상시키는 전투장면 등 성인 마니아들을 위한 팁에 낄낄거리다 보면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너희들의 우정과 신뢰야”라는 대사마저 심금을 울리는 지경에 도달하는 것이다. 케로로는 진정한 키덜트(아이 같은 어른) 시대의 아이콘임에 틀림없다.

구스 반 산트의 걸작 <라스트 데이즈> [2]

시간의 조립과 공간의 은유와 소리의 불일치 <엘리펀트>에서 인물들은 여러 번 같은 순간을 다시 지나친 뒤에야 최종에 도달한다. <라스트 데이즈>에서 주인공 블레이크의 시간은 더 현란한 방식으로 재조립된다. 시간적으로 어떤 한 장면이 앞에 있는 것인지 혹은 뒤에 오는 것인지는 반드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나서야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그것도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시간은 왜 뒤섞여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구스 반 산트는 그걸 통해 블레이크의 몸에 관객의 감각을 입히려고 한다. 뒤죽박죽으로 시간을 느끼도록 하는 이 장치는 관객이 망가진 블레이크의 몸의 상태로 들어가 그 시간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과도 같다. 혼몽의 어지럼증은 그렇게 생긴다. 시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순간을 어떻게 연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는 <게리>와 비교하여 더 정교하게 진전된 미학적 차원을 갖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엘리펀트>에는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회적 논평이 필요할 만한 사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태도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라스트 데이즈>는 거기에 대한 대답이다.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는 실제 사건에 기초하지만, 더 정확히 말해 그저 거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영감은 본능적으로 실재를 수정할 권리를 갖는다. 게다가 영감이 어떤 미완의 사실로만 알려진 사건에서 비롯되었을 경우, 그리고 창작자가 그걸 방점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이후라면 더더욱 논리적인 해명으로 끌리지 않는다. 그 순간 그런 해명의 욕구에 끌리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하다. 어떤 나름의 시각으로 형상화할 것인지가 더 관건이다. 그런 점에서 구스 반 산트는 <라스트 데이즈>에서 혹은 <엘리펀트>에서 실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남긴 잔영을 다룬다. 다들 보고 떠드는 신문의 한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 미처 적히지 않은 인상을 잡으려 한다. 인과율이 없다느니, 무책임하다느니 하는 말은 그래서 성립이 되질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풍문과 반쪽 사실로만 전해진 그 ‘실재의 잔영을 구조화’하는 작업이며, 그 문제에 대한 구스 반 산트식의 해석 방법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이 바로 구스 반 산트가 취한 윤리적 자세이기도 하다. <라스트 데이즈>의 스토리 라인을 설명하는 것은 그래서 부질없는 짓이다. 영화가 요구한 보기의 방법을 거스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라스트 데이즈>는 스토리의 구조에 기대고 있지 않다. 영화 속에는 전화번호부 광고 직원과 모르몬교도들과 음반사 중역과 사립탐정이 번갈아가며 블레이크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블레이크는 그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술래잡기하듯 피해다니기 일쑤다. 이들의 방문은 실제와 상상의 뒤섞임인데, 커트 코베인의 생전의 인간관계들을 캐릭터의 관계 내지 영화의 플롯 안에 녹여넣은 것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반면 시간과 캐릭터의 조립만 있는 게 아니라 공간적 은유도 있다. 첫 장면에서 블레이크는 마치 약에 취한 듯 숲속을 헤매고, 계곡에서 미끄러지고, 늪을 허우적거리며 걷는다. 우리는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건 실제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왜 블레이크는, 커트 코베인은 저기 저러고 있는가, 라며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구스 반 산트는 말한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관객은 그가 어디서 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가 등장하는 방식 그대로 그를 표현하고 싶었다. 누구이고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이전의 삶이 어땠는지 등을 모두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 내내 이런 불친절함에 시달려야 하지만, 그건 흥미로운 수고다. 숲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망설이고 있는 블레이크는 더도 덜도 아닌 커트 코베인의 불행한 마지막 나날에 대한 묘사이며 공간적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블레이크가 집으로 돌아와도 마찬가지다. 그가 살고 있는 음산한 대저택과 그 옆에 달린 조그만 별채. 블레이크는 자신의 휴식처로 혹은 마지막 장소로 허름한 그 별채를 선택한다(이건 실제로도 그랬다). 이 장면들 안에는 불친절함에 몸을 맡기고 보아야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형상의 영화 혹은 시네마토그래피 시간과 공간이 마음대로인데 소리라고 현실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사운드의 활용은 <라스트 데이즈>와 그 이전의 두편을 가르는 가장 큰 요소이며, <라스트 데이즈>의 가장 아름다운 면면이다. 블레이크가 혼자 있을 때 우리는 어떤 특정한 소리들을 반복적으로 듣게 된다. 이때 우리는 눈이 아니라 귀를 열어야 한다. 종이 울리고, 풍금이 울리고, 자동차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떠들고, 새가 울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온갖 종류의 문이 닫히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닫히는 문소리… 그건 블레이크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도, 멍하니 앉아 텔레비전을 응시할 때도 들려온다. 이때 들려오는 것의 실체는 힐데가르트 베스테르캄프의 구체음악 <지각의 문들>(Doors of Perception)이다. 그러나 그게 누구의 음악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소리가 문을 여닫는 연쇄라는 것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문소리들은 아무리 화면을 들여다봐도 그 안에 소리의 진원지가 없다. 그것은 블레이크의 머리에서 그리고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이 디제시스 공간(스토리가 진행되는 프레임 내의 공간) 내에 있을 리가 없다. 텔레비전에서는 보이즈 투 맨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블레이크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위험스러운 지각의 문소리들을 들어야만 한다. 이 소리가 어디서, 왜 들려오는지 느끼려고 할 때 우리는 블레이크와 커트 코베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간다. 시간의 조립과 공간의 은유와 소리의 불일치. 그것이 예고한 불운의 끝은 알다시피 죽음이다. 커트 코베인의 죽음이 예고없이 찾아왔듯, <라스트 데이즈>에서 블레이크의 죽음도 그렇게 조용히 도착한다. 블레이크의 영혼은 육신을 벗고 천천히 일어나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알게 된 비겁한 친구들은 거기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어디론가 부리나케 도망친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킹스 싱어즈의 (원래는 발랄하게 들렸던) 음률의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온다. 구스 반 산트는 커트 코베인에 대한 생각을 그걸로 끝낸다. <라스트 데이즈>는 삼부작 중에서도 구스 반 산트의 창작력이 도달한 어떤 봉우리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합으로만 이를 수 있는 희귀한 ‘형상의 영화 혹은 시네마토그래피’다. 형상을 추구하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중에서도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정도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 난 건 <라스트 데이즈>다. 그런 영화는 일단 만들기가 어렵고, 잘 만들어도 그걸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구스 반 산트는 <파인딩 포레스터>도 만들고, <굿 윌 헌팅>도 만든다. 어쩌면 <라스트 데이즈>를 보는 관객은 불평을 할 수도 있다. 커트 코베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훌륭한 영화에는 언제나 자기만의 이미지 교육학이 있음을 믿자. <라스트 데이즈>에 있는 그것은 눈과 귀를 본능적으로 사용하라, 이다. 때문에 보고 들으며 영화가 끄는 대로 집중하면 되는 일이다. 기복이 심한 구스 반 산트가 오드리 니페네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다음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에서도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만들 거라고 장담하긴 힘들다. 그러나 <라스트 데이즈>는 경지에 도달한 작업이며, 한마디로 걸작이다. <라스트 데이즈>의 숨은 주역들 컨셉, 영상, 소리의 신세계를 비추다 컨셉과 영상과 소리. 이 세 가지가 독창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라스트 데이즈>다. 그 때문에 프로듀서 대니 울프,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스, 사운드디자이너 레슬리 샤츠를 제외하고 <라스트 데이즈>의 성과를 말하기는 힘들다. 세 사람은 모두 <게리> <엘리펀트>에도 참여한 바 있다. 바로 구스 반 산트의 삼부작 완성을 가능하게 한 3인방인 셈이다. 프로듀서 대니 울프는 단편에서 뮤직비디오, 상업광고까지 두루 걸쳐온 전문 프로듀서다. 96년에 구스 반 산트와 상업광고 및 뮤직비디오 작업으로 처음 만난 뒤, 97년에 단편 <해골의 발라드>, 98년에 장편 <사이코>를 같이 한 바 있다. 한편,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스는 전형적인 뉴요커로서 패션 사진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상업광고와 뮤직비디오를 거쳐 촬영감독으로 거듭났고, 마돈나, REM, 피오나 애플 등의 뮤직비디오 그리고 구스 반 산트의 <파인딩 포레스터>를 거쳐 삼부작을 함께하게 됐다. 제임스 그레이, 존 터투로,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와 왕가위의 BMW 상업광고를 찍은 바 있는 감각적인 장인이다. 아마도 <라스트 데이즈>의 가장 뛰어난 협력자는 레슬리 샤츠가 아닐까 싶은데, <미이라>로 99년 아카데미 베스트 사운드 부문에 노미네이션되기도 했던 그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 밥 라펠슨의 <블러드 앤 와인>을 작업한 경력이 있다. “결국 구스 반 산트는 화가다. 캔버스에 무엇을 그릴가 하는 것은 구스 반 산트에게 달려 있다. 그의 창조적 비전보다 우선하는 건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그것을 완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프로듀서 대니 울프는 그렇게 말했지만, 한편으로 이들의 협업이 아니었다면 <라스트 데이즈>라는 명작의 탄생은 요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