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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드라마 ‘연애시대’가 남긴 것

이혼한 뒤에도 감정의 끈을 놓지 못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에스비에스 〈연애시대〉(연출 한지승, 대본 박연선)는 시청자가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불편한 드라마였다. 화면, 인물, 이야기, 어느 것 하나 머리 비운 채 볼 수 있을 만큼 전형적이지 않았다. 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카메라는 인물과 거리를 유지하며 즉각적인 감정이입을 지연시켰다. 〈연애시대〉에 몰입하게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이 텅 빈 공간에 있다. 생소한 드라마는 지난 25일 막을 내렸지만 긴 여운을 남겼다. 이 드라마가 거는 게임에 응하면 몰입의 강도는 세진다. 평균 10% 중반대 시청률에 머물렀지만, 요즘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여성 20대(15.4%)와 남성 30대(12.1%)를 붙들어 맸다. 텅 빈 공간에서 자기 마음도 몰라 헷갈리는 동진(감우성)과 은호(손예진)를, 나아가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은 삶을 견디려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애시대〉는 쓸쓸했다. 부잣집 아들 현중과 활달한 미연을 끌어들여 상대적으로 발랄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더니 드라마 중반에 이들을 모두 이야기 밖으로 밀어버렸다. 유부남 대학교수 윤수와 동진의 첫사랑 유경이 나오며 드라마는 더욱 묵직해졌다. 후반부로 갈수록 〈연애시대〉는 사랑의 밑자락에 놓인 삶이란 큰 그림을 잡아냈다. “먹고 일하고 자고…. 지구의 이동진은 무얼 위해 살까.” 이 독백을 하면서도 동진은 신호등이 바뀔세라 횡단보도를 잽싸게 건넌다. 시청자가 동진의 독백에 동감할 즈음 “자기 연민에 빠져 배영을 치고 있네”라는 은호의 핀잔이 이어진다. 〈연애시대〉는 희망만 보는 낙관주의자나 절망만 되새기는 비관주의자를 위한 드라마가 아니다.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다는 걸, 노력해서 얻는 결과가 항상 거창하고 달콤하진 않다는 걸 알아버렸지만 그렇다고 행복해지려는 발버둥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의 드라마다. 마지막회에서 은호의 긴 독백과 함께 여러 인물의 모습이 이어진다. 유방암에 걸린 은호의 동생, 동성애 커플…. 그 불행과 행복 속에 아이를 낳고 함께 사는 동진과 은호가 있다. “돌아보면 이때의 나는 나른한 졸음에 겨운 듯 염치없이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은호의 독백)

[명예의 전당] 오스틴의 수다와 통찰은 걸작! <오만과 편견>

지금보다 수십살 어린 시절이었음에도 <오만과 편견>을 내놓고 읽기는 겸연쩍었다. 그리고 ‘수다쟁이 노처녀’의 작품이라고 결론지었다. 얼마 전 극장에서 <오만과 편견>(2005)를 신나게 웃으며 본 뒤, 새로 번역된 <오만과 편견>을 단숨에 읽었고, 다시 10년 전에 에서 만든 미니시리즈 <오만과 편견>을 박수까지 쳐대며 보았다. 결론은? 역시 ‘수다쟁이 노처녀’의 작품이다. 그러나 의미는 달라져, 수다쟁이라는 건 말하는 재주가 좋아 그 이야기가 즐겁다는 것으로, 노처녀(제인 오스틴이 <첫사랑>을 <오만과 편견>으로 개작한 건 서른을 훌쩍 넘긴 뒤였다)라고 함은 세상을 제대로 알 만큼 살았다는 걸로 바뀌게 됐다. 아무리 유쾌하고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물경 500페이지를 넘기는 게 고역인 사람에겐 뭐가 좋을까? 원작의 역동성을 느끼기엔 영화도 좋긴 하지만, 단시간에 뛰기가 숨찬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미니시리즈가 낫겠다. 제시와 전개 그리고 절정에 이르며 거대한 소나타를 듣는 듯한 원작의 구조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나름대로 원작에 충실해서 여유있게 장편을 읽는다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무도회 장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춤이란 추지 못해도 읽는 맛보다 보는 맛이 한결 좋으며, 무엇보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역을 맡은 두 배우가 주고받는 눈길은 영상이 아니고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이다(콜린 퍼스에 빠진 수많은 여자의 찬사를 들어온 바지만 나는 제니퍼 일리의 미소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그리고 멜빈 탕의 피아노를 따라 흥얼거리다보면 심지어 푼수 엄마조차 사랑스러워 보일 지경이다(셋째 딸 메리의 우울함은 여전하지만). <오만과 편견>을 다시 보고 읽으며 이 이야기는 현대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살이 다 된 <오만과 편견>에서 다루는 사랑과 다툼, 결혼의 과정 그리고 그 아래 자리한 전통과 새로운 질서의 충돌은 지금 시대에 놓아도 하나 다를 게 없다. 현대판이라 할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비교하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간혹 ‘신데렐라 플롯’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그 또한 이야기가 해피엔딩에 이르기까지 벌어지는 노력과 우연의 연속과 오스틴의 통찰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걸작이다. 10년 전 텔레비전물이어서 그런지 DVD 화질은 좋지 못하며, 부록으론 영화의 제작과정(27분)을 제공한다.

<엑스맨> 카운슬러의 임상 노트 [2]

미스틱은 일을 하려면 철저히 한다는 주의다. 다른 존재로 둔갑할라치면 아예 성문, 지문, 망막까지 복사하고 무술, 총검술, 컴퓨터 정보처리 기술도 완벽하다. 요컨대 007보다 유능하고 본드걸보다 섹시하니 인간 스파이들이 비공개 팬카페를 결성했다는 소문이 돌 만도 하다. 그러나 누구의 모습을 훔치더라도 미스틱은 미스틱이다. 미스틱은 타인의 외모는 그대로 베껴내지만 능력은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스틱을 정의하는 것은 오직 변신 능력 자체다. 미스틱도 매그니토처럼 오래전 인간들에게 혹독한 짓을 당한 모양이지만 과거에 대해 입을 여는 법이 없다. 과거를 꽤나 찾아해매는 울버린을 상당히 비웃는 눈치다. (※비록 냉소의 형식으로라도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 그녀로서는 특기할 만하다.) 솔직히 미스틱은 내 도움이 필요없다. 그녀만큼 자아정체감이 확실한 돌연변이는 본 적이 없으니까. 오래전,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나이트크롤러가 미스틱에게 “누구든지 다른 사람 모습이 될 수 있다면 왜 평소에도 남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죠?”라고 물은 적이 있다. 미스틱은 딱 잘라 답했다. “왜냐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 자긍심이 허약한 로그가 미스틱과 친분이 생기면 많은 정신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됨. 술자리를 마련할 것.) 사실 스톰의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와 진 그레이-울버린-싸이클롭스-로그를 거쳐 결국 매그니토의 뒷모습으로 돌아가는 미스틱을 보면, 그녀로서도 진자 상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심심풀이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쌀쌀맞은 유머감각에다가 비주얼 조크도 가능한 미스틱과의 대화는 즐겁다. 덤으로, 다른 엑스맨과 상담할 때를 대비해 연습할 수도 있다. 아이스맨이 한눈 판 것도 사실이지만, 로그가 섀도캣을 질투하는 것은 운명처럼 보인다. 좋아하는 대상에게 가 닿는 행위 자체가 공포인 로그와 반대로, 섀도캣은 이물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접촉한 상태와 순간적으로 일체가 되는 능력을 지녔다. 몸의 분자구조를 물체와 동화하는 방식으로 통과해버리는 것이다. ‘벽’과 맞닥뜨린 엑스맨들의 전략은 성격대로다. 쿼터백 스타일의 저거노트(비니 존스)는 그냥 뚫고 나가고, 수줍은 나이트크롤러(앨런 커밍)는 텔레포트한다. 섀도캣은 스며들었다가 곧장 제 모습을 찾아 자기 길을 간다(그녀의 별명은 유령이다). 13살 때 침실 바닥에 낙상했다가 그대로 투과해버리는 바람에 능력을 각성한 이 소녀는 내가 엑스맨이라서 멋진 점이 무엇인지 묻자 “세상에서 전혀 영웅 대접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섀도캣의 동화능력은 에너지 흡수를 이용한 공격무기로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새벽 우연히 목격한, 학교 뜰에서 홀로 허공을 걷는 섀도캣의 모습은 병기를 연상하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기체 분자와 동화한 결과겠지만 그 순간만큼 소녀는 공기의 요정 실피드 같았다. (※상담실 출입시 반드시 문을 이용하도록 주의 줄 것.) 미국 연방정부 돌연변이성 장관이 되어 모교를 찾은 졸업생으로, 초기 엑스맨 멤버다. 처음에는 <몬스터 주식회사>의 설리가 온 줄 알고 “애니메이션 히어로는 옆방으로”라고 말할 뻔했다. 그는 울버린에게 “야수 같다면서?”라고 인사를 건넸다가 “남 말 한다”는 면박을 들었다. 비스트는 알고 보니 동업자로, 엑스맨이 되기 전 전 시애틀에서 정신과 상담의 프레지어 박사라는 이름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 경력이 있다.(※NBC 시트콤 <프레지어>, <치어즈> 비디오자료 참조) 실험 중 사고로 푸른 털과 근육으로 뒤덮인 지금의 모습이 된 만큼, 비스트는 내면의 셀프 이미지와 외모가 일치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괴리감을 앓고 있다. 평소 호모 사피엔스와 구별하기 힘든 대다수 엑스맨과 달리 외양부터 ‘이족’임이 분명한 그는 아마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누구보다 숙고했을 것이다. 비스트는 유전학, 생화학, 진화생물학의 대가인 동시에, 엄청난 스피드와 민첩성, 지구력과 파워를 가진 전사이기도 하다. ‘치료제’를 선택하는 돌연변이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갈등하는 그는 돌연변이 최초의 공직자답게 윤리적으로 매우 강직한 자다. 비스트의 슈퍼히어로다움은 힘도 지성도 아닌 그 두 가지의 놀라운 균형에서 나온다고 나는 확신한다. (※비고-스톰을 향한 비스트의 특별한 감정을 계속 관찰할 것.) 내가 굳이 엑스맨 영재학교 근무를 고집한 데에는 멋진 여성 슈퍼히어로 여럿과 교유할 수 있다는 매력이 컸다. 특별히 <스파이더맨>의 메리 제인이나 <수퍼맨>의 로이스에게 반감은 없지만, 엑스우먼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다. 그 중에서도 진 그레이는 엑스맨을 통틀어 최강자다. 알칼리 호수 전투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그녀는 매그니토 진영의 다크 피닉스로 부활해 경천동지할 파괴력을 발휘한다. 자비에 교수는 처음부터 진 그레이의 엄청난 힘을 감지했으나 “본인과 사회의 안전을 위해” 그녀의 파워를 은밀히 제어하고 봉인했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진 그레이는 두통이 염동력과 텔레파시의 부작용인 줄 알았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그토록 많은 진통제를 처방해야 했던 이유다. 진 그레이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전형이다. ‘아버지’의 권력을 선망하면서도 파워를 억눌러왔고 결국 인격이 분열된 경우다. 장녀 역할이 몸에 밴 진 그레이는 교사 시절 무던히 공명정대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구애자 사이클롭스와 울버린 사이에서도. 동료 엑스맨들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그래서 사악한 다크 피닉스로 거듭난 그녀의 거침없는 자태는 은연 중에 ‘비너스의 탄생’과 같은 통쾌함을 내게 안겨주었다. (*비고-진 그레이가 죽었다고 믿은 그녀의 약혼자 싸이클롭스가 상담 시간을 독점하고 기물을 다량 파손했음. 다크 피닉스 앞으로 청구할 것.)

김기덕과 <시간> [1]

김기덕의 열세 번째 영화 <시간>의 최초 시사회가 지난 5월25일 <씨네21>과 KT&G 공동 주최로 열렸다. <시간>의 개봉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영화를 개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씨네21>은 개봉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시간>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미리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여기에는 김기덕 영화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해외 필자들의 소중한 글을 같이 실었다. 한국영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피력하고 있는 프랑스 영화잡지 <포지티프> 기자인 아드리앙 공보의 글과 이탈리아의 영화평론가 안드레아 벨라비타의 글이 그것이다. 두 필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각각 자국어로 김기덕 감독에 관한 책을 낸 저자들이다(유럽에서 한 한국감독에 관한 책이 두 권씩 나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검은 화면에 두번 연거푸 쓰인 <시간>이라는 제목이 뜬다. 마치 찌그러진 데칼코마니인 양 양편으로 비스듬히 붙어 있는 그 두개의 같은 글자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초침 소리에 맞춰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자리에서 두번 쓰인 시간, 그러나 서로 어긋나게 등을 맞댄 문자의 형상. 그 기이한 예고로 시작한 김기덕의 열세 번째 영화 <시간>을 지난 5월25일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427석을 가득 채운 관객이 보았다. <씨네21>과 KT&G가 독자 시사를 빌려 마련한 <시간>의 최초 시사 자리였다. 때문에 이 자리에는 아직 완성된 영화를 보지 못한 주인공 성현아, 박지연 등 배우와 주요 스탭들이 함께했다. 이 영화에 관심을 두고 기다려온 몇몇 저널리즘 종사자들과 충무로 관계자들도 동석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중요한 참석자들이라면 어떤 인연이나 의무감없이 오로지 김기덕의 신작이 보고 싶어 치열한 접수 경쟁을 뚫고 찾아온 대다수 일반 관객이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나머지 관객이 지금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시간>의 개봉일 것이다. 한 수입·배급사가 <시간>의 국내 판권 협의 중 최근 <시간>의 불투명한 개봉 소식이 전해지면서 <씨네21>의 독자 중에는 “스타들을 비롯한 한국영화 관계자 분들, 문화다양성 말로만 하지 말고 서로서로 한푼 두푼 조금씩 모아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한국 관객이 극장에서 볼 수 있도록 지원 좀 하십시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감독이고,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알려지면 거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시위하는 것보다 열배 백배 더 효과가 있을 겁니다”(newcross) 등의 다소 감정 섞인 호소를 표시한 이도 있었다. 김기덕 감독이 <시간>의 개봉과 관련해 관례적인 극장 개봉 절차를 밟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거대 배급 구조에 회의를 느껴, 단 한 차례의 언론 시사도 없이 단관 개봉하여 직접 관객을 만나고자 했던 전작 <활>의 시도가 철저한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전국 1634명이라는 <활>의 관객 수는 독창적인 세계를 지닌 한 영화 창작자가 관객과 직접 대면하기 위해 용기있게 선택한 만남의 과정에서 큰 실망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이런 근황에 대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시간>은 한국의 배급 구조가 갖고 있는 모순을 보여주는 명증한 징후다. 스크린쿼터 문제만큼 프린트 제한 쿼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크린쿼터의 이름으로 문화의 다양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왜 프린트 제한 쿼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일종의 질책과 대안을 내놓았다. 동시에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어떤 정책이나 일종의 준강제적 조치로 이 영화가 국내 개봉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그건 왠지 부끄럽다. 이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잠재된 관객의 열망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현재화할 수 있는 영화사의 혜안과 능력을 기다린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 바람에 대한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이 될 수 있을까? 현재 국내의 모 수입·배급사가 <시간>의 국내 판권 계약을 놓고 김기덕 감독쪽과 긍정적으로 협의 중이다. 지금으로서는 적어도 해외 영화사에 수출된 뒤 다시 역수입해 상영하거나, 그것마저 없이 외국영화처럼 DVD 등으로 출시되어 보게 되는 최악의 결과는 피할 공산이 크다. 깊은 우려와 달리 <시간>을 극장에서 보는 일은 비교적 이른 시일 안에 성사될 가망성이 큰 셈이다. 만약 그럴 경우, 이제 남는 건 다시 관객의 능동적인 선택이다. 김기덕 작품 중 가장 섬세하고 복잡한 영화, <시간> <시간>을 본 국내외 평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다소 긴 국내 평자의 즉각적인 두 논평이 대표적이다. 정성일은 “김기덕이 갑자기 그 자신의 영화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후 이끌리던 불투명한 침묵의 도주로부터 선회하여 감정의 구조 안으로 돌아온 것은 신기한 일이다. 나는 그의 (이번) 영화에서 인물들이 시선의 텔레파시로부터 다시 혀의 하소연으로 돌아온 것 같은 정서적 환기를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정서에 대한 고통의 연민이, 말하자면 피와 육신이 다시 마음을 움직인다”고 말했다. 허문영은 “김기덕 영화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복잡하다. 시간과 공간 이미지에 대한 김기덕의 탐구가 결집해 미묘한 하모니를 연주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즉,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혹은 <나쁜 남자>에서의 선형적 시간을 대체하거나 교란하는 순환적 시간에 대한 영화적 사유와 <사마리아>와 <빈 집>에서의 현대 도시 공간의 반복성과 익명성에 대한 탐구가 결합돼 있다. 이를 통해 김기덕은 자신의 영화 생애에서 가장 비관적이며 비판적인 결론에 이른다. 새로워지지만 그것은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새로움이며, 자기동일성은 유령이 되어 도시 공간을 배회한다. <시간>은 근대적 시간관에 바탕한 진보의 환상에 대한 맹렬한 야유다. 그 야유를 그는 비판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독창적 탐구로 이뤄낸다”고 평했다. 한편 이번 칸영화제 마켓에서 상영된 <시간>에 대한 리뷰에서 영미권 산업지 <스크린 데일리>는 “김기덕 영화는 언제나 최소한의 흥미를 자아내는데, 그의 신작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운을 뗀 뒤, “비록 <시간>이 스스로 제기한 몇몇 이슈들을 충분히 탐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다가오는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에는 이견이 없을 정도다. 김기덕의 연출은 통제 불가능한 좌절의 발작상태로 두 여주인공을 몰아간다”며 김기덕의 연출력을 높이 샀다. 지금까지 김기덕의 영화 중 <시간>은 스스로의 영화적 중력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본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세희(박지연)라는 한 여자가 있고, 지우(하정우)라는 한 남자가 있다. 둘은 오랜 연인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지우를 만나러 오던 세희는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고 나오는 한 여자(성현아)와 부딪친다. 세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이미 운명적이다. 세희는 다른 여자들과 희희낙락하는 지우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이 지겨워졌기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성형을 결심하고 사라진다. 세희가 성형을 하고 나타났을 때 이름은 새희이며, 그 새희는 세희가 영화의 초반에 병원 앞에서 부딪쳤던 바로 그 여자다. 지우는 새로운 연인 새희와 사귄다. 그러나 새희는 지우가 여전히 세희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이전의 세희 얼굴을 오려낸 가면을 하고 나타난다. 그렇지만 남자의 완전한 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이제, 지우는 성형외과를 찾아가 그 역시 다른 사람으로 얼굴을 바꿔 새희 앞에 나타나려고 한다. 지우를 기다리는 새희는 누가 지우인지 궁금해하며 점점 광인이 되어간다. 그러다 새희는 다시 얼굴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영화는 첫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에 담긴 비극적 반복의 순환 <시간>은 김기덕 영화 중 가장 요란하고 현란한 영화다. 그 형식에서 영화는 <빈 집>에서의 그 공간적 기능을 얼굴이라는 인체의 일부로 대체하고 있으며, 정서적으로는 가장 비통한 <해안선>보다 더한 비극의 벼랑에 서 있다. 김기덕 영화에 한 가지 소명이 있다면 그건 절대적인 것 혹은 불가능한 것을 향해 온몸을 투신하여 부딪치려는 인간들의 극한적인 몸짓일 것이다. 그것이 김기덕 영화 속 인물들의 광기 혹은 같은 이름으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구도(求道)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인물들은 미쳐가거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때마다 인체는 증명의 도구였다. 차라리 그건 고상한 말 인체보다는 인육에 가깝다. <시간>은 그 인육의 일부를 바꾸어서라도 사랑을 증명하고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실패를 그린 영화다. 그러나 <시간>에서 정작 불변의 법칙은 다시 시간이다. 바꾸어도 다시 제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는 비극적 반복의 순환이 <시간> 속에는 있다. ‘시간만큼 절대적인 그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자 하는 욕망 또한 있을 것 아닌가.’ 이 간단하면서도 무구한 난제와 도전의 과정에 김기덕은 자신의 인물들을 세웠다. 이제 <시간>이 개봉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남았다.

CF로 배우를 엿보다 [3]

스타 탄생은 때로 한편의 영화, 한편의 드라마, 한장의 음반에서 이루어지지만, 최근에는 CF가 스타 탄생의 산실이 되고 있다. 극중 배역은 스타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제이고 보통 광고는 이런 스타의 이미지를 차용하지만, 역으로 광고가 스타의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고 무명의 연기자를 일약 스타도 만들기도 한다. 욘사마의 미소, 코카콜라의 미소 일본 열도를 끓어오르게 한 욘사마 배용준의 낭만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오래전 광고에서 시작된 것이다. <겨울연가>를 제외하고 배용준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여준 드라마는 거의 없다. 이전 드라마에서의 배역은 대체로 반항적이거나 복수심에 불타거나 권위와 체계를 거부하는 인물이었다. 배용준의 부드러운 이미지는 1996년 그가 모델로 기용됐던 과일나라 CF와 LG그룹의 기업광고에서 만들어졌다. 워낙 광고는 행복하고 살 만한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행복한 미소를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광고에서 보여준 배용준의 미소는 그야말로 백만불짜리 미소였다. 새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넘치는 시골길, 지프를 탄 배용준이 LG로고가 새겨진 운동모자를 쓰고 아이들과 함께 ‘사랑해요. 사랑해요 LG’를 합창하는 이 CF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귀에 착 붙는 CM송으로 그의 미소를 더욱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광고모델이 우리에게 스타의 이미지를 주조하는 기제로 떠올랐을까? 한국 광고사를 되짚어보면 1920년대 광고모델로 무용가 최승희가 등장한다. 이미 근대 초기에도 대중스타, 셀레브리티가 광고모델로 기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광고가 명실공히 체계를 잡아가고 스타와 광고가 상승효과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는 그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톡 쏘는 맛처럼 떠오르는 여자’를 예찬한다. 바로 코카콜라 CF의 모델, 심혜진이다. 시인은 그녀의 미소를 ‘폐수 위에 핀 연꽃’으로 비유했다. 1988년 코카콜라 슬로건이 ‘난 느껴요’(I feel Coke)로 바뀌면서 등장한 당시 21살의 무명모델 심혜진은 해변이나 운동장 등이 등장하던 기존 코카콜라 CF의 분위기를 확 바꿨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시원하게 웃는 그녀는 팔꿈치로 장난스럽게 동료 남성의 얼굴을 치기도 하고, 정장 차림으로 야구장에서 홈런을 날리는 모습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영상을 선보였다. 광고에서 활동적이고 건강한 미소를 지닌 여성 모델이 등장한 것은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순식간에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이 꽃피고 여권이 신장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같은 시기 삼성전자 CF에서는 ‘남편사랑은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고 애교스럽게 말하는 새댁이 있었으니. 이 새댁이야말로 우리나라 광고역사에 기록될 만한 CF스타다. 사랑받는 아내와 산소 같은 여자 최진실이 등장한 1988년 즈음,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우리의 소비문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소비의 폭발적인 성장세와 함께 바야흐로 혁명의 시대는 욕망의 시대로 접어들어가게 된다. 수출역군이었던 가전 3사들은 내수시장에 전력을 다했고 광고는 전자제품의 경합장이었다. 특히 백색가전이라 불리는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비디오, 전자레인지 등 생활용품들이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혼수가전의 패권을 장악한 삼성전자는 “남편 귀가시간은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남편사랑은 가끔 확인해봐야 해요” 등의 가부장제 냄새가 물씬 나는 카피와 더불어 최진실의 애교있는 모습으로 소비자를 공략했고 모델 최진실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최진실은 당시까지 공식화돼왔던 광고모델과 탤런트 혹은 영화배우의 관계를 뒤집어놓았다. 탤런트나 영화배우로 성공하고 지명도를 얻어야 가능했던 광고모델은 더이상 스타의 부업거리가 아니라 데뷔무대가 되었다. 상업광고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실질적으로 여성의 이미지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이다. 1991년 태평양의 ‘마몽드’는 이영애라는 최고의 CF스타를 배출했다. ‘산소 같은 여자’라는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 CF는 ‘세상은 지금 나를 필요로 한다’는 카피와 함께 운동과 사격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사건현장에서는 남자들을 지휘하는 여형사의 모습이 등장한다. 캠페인 초기에 등장한 ‘결혼이 목표는 아니다’, ‘나의 삶은 나의 것’, ‘성취는 남자의 것만은 아니다’ 등의 카피에서 드러나듯이 20대 여성의 가치관 변화가 담겨 있다. 이후 그녀는 영화 <선물> <공동경비구역 JSA>와 드라마 <대장금>의 성공으로 아시아의 스타가 되었고, ‘CF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말 그대로 CF를 종횡무진했기에 ‘이영애의 하루’라는 인터넷 유머가 등장할 정도였다. 이영애에 이어 CF여왕의 지존에 도전하는 테크노 요정이 혜성같이 등장했으니, 1999년 말 삼성 마이젯 프린터 광고에서 섹시한 테크노댄스를 선보인 10대 소녀 전지현이다. 그녀는 춤 하나로 스타덤에 올랐다. 업계에서는 ‘전지현이 광고하면 상품이 뜬다’는 전지현 효과가 거론될 정도로 이후 그녀가 모델로 등장한 광고 상품마다 시장점유율이 호조를 보였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청순, 발랄한 이런 광고에서의 이미지가 확대재생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부침과 달리 ‘CF여왕’ 전지현의 입지는 현재 그 누구보다 탄탄하다. 20년을 함께한 CF모델, 키치로 거듭난 배우 ‘파블로프의 개’로 잘 알려진 조건반응이론은 광고의 세계에서도 통용된다. 즉 낯선 상품을 어떤 익숙한 이미지와 결합시켰을 때 자연스럽게 그 이미지가 광고제품에 투영된다는 것. 천연조미료라는 새로운 상품으로 런칭한 다시다와 모델 김혜자의 만남이 대표적이다. 드라마 <전원일기>를 통해 전통적이고 수더분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얻고 있던 김혜자는 다시다 CF에서 도시에 사는 현대인에게 고향의 맛,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을 일깨웠다. 다시다의 캠페인이 지속되는 20여년간 <전원일기>도 장수하고 있었고 덕분에 이 드라마와 광고는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김혜자와 더불어 20여년간 장기적인 광고캠페인을 벌여온 또 다른 모델은 맥스웰하우스의 안성기다. 동서식품 맥스웰하우스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커피 광고는 전통적으로 부드럽고 사색적인 망중한을 그려왔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거실 소파에 앉은 부인에게 커피를 건네주는 자상한 남편 혹은 유럽 어느 관광지의 노천카페에서 아내와 이마를 맞대고 다정하게 웃는 남편 등 영화배우 안성기는 자상하고 편안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점점 맥스웰커피 이미지는 안성기를 닯아가고 안성기는 커피 이미지를 닮아가고 있다. 광고의 세계는 섹시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의 전유물일까? 이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전원주를 모델로 기용한 1998년 데이콤의 ‘터치터치002’ CF가 등장하면서 그 공식이 깨졌다. 호들갑스러운 웃음소리로 극에서 감초 역을 해왔던 전원주는 이 CF에서 만화영화 <짱가>의 주제곡이 흐르는 가운데 지붕 위를 달리거나 공항에서 텀블링하는 기묘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부조화의 조화가 독창성을 낳았던 키치 광고다. 이 광고로 인해 전원주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중견배우가 CF모델로 대거 등장하게 된 것도 이 광고가 계기가 되었다. 원로배우 신구는 롯데리아 크랩버거 CF에 등장해 “니들이 게맛을 알어?”라는 독특한 뉘앙스의 대사로 최고의 인기를 얻었고, 김수미 역시 <대장금>을 패러디한 한국야쿠르트 ‘장라면 CF’로 인기를 얻고 있다. 식품 광고와 김수미는 이미 잘 어울리는 이미지로 변해 있었는데, 이는 그 유명한 홈쇼핑 채널의 ‘김수미 꽃게장’ 덕분이다. 어쨌든 광고전략의 발상의 전환은 모델의 전환을 가져왔고, 모델로 등장한 배우들에게 인생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렇듯 광고와 스타 이미지는 서로 공모의 관계에 있다. 스타가 매스미디어와 스타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광고는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자본의 동력이면서 스스로도 막강한 텍스트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사실 영화를 통한 이미지건 CF를 통한 이미지건 그 이미지는 스타 개인의 본질과는 무관한 가상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가상의 이미지에 대중은 물론 스타 자신도 포획되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비열한 거리’서 비열한 조폭 열연 조인성

〈말죽거리 잔혹사〉 유하 감독이 15일 개봉하는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선택한 ‘조폭’(조직폭력배)은 조인성(26)이었다. 하지만 ‘청춘스타’ 조인성을 ‘연기자’로 끌어올린 텔레비전 드라마들에서 조인성은, 심지어 조폭이었을 때조차(〈피아노〉) 조폭 같지 않았다. 그는 독하고 체구가 딱 벌어지기보다는 여리고 휘청거리는, 그래서 안쓰러운 느낌이 컸다. 지난 5일 언론시사를 통해 조폭 두목 병두로 분한 조인성의 모습이 공개됐다. 조인성은 순수하고, 그렇기 때문에 비열해지기도, 파멸하기도 쉬웠던 조폭 연기를 멋들어지게 소화하며, 제 깜냥의 한계를 한 차원 끌어올린 것 같았다. 조인성이 생각하는 병두의 삶은 ‘조폭의 삶’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모습’이었다. “병두가 죽여서는 안 될 사람들까지 죽여가며 먹고 살려는 이유에 공감이 가잖아요. 아픈 엄마, 속 썩이는 동생, 공부 잘하는 동생,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 …. 그건 꼭 조폭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비열한 거리에서 비열하게 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모성본능 자극? 왜 그럴까요 조폭 병두에게서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찾은 그는 “딱 조폭 이미지인 배우가 병두 역할을 했다면, 다른 조폭 영화와 차별성이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하 감독님이 ‘유약한 이미지’라고 표현한, 저 같은 배우가 출연했기 때문에 단순한 조폭을 넘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조인성은 유하 감독과 그의 많은 팬들이 그에게서 발견한 ‘유약함’, 혹은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특유의 모습’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연기는 제 안에서 출발하는 거니까, 사람들이 제 연기에서 그런 걸 본다면 저한테 그런 면이 있는 거겠죠. 하지만 모성을 자극하는 법 같은 건 정말 몰라요. 그런 걸 연습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라며 웃었지만, 그 웃음 역시 모성을 자극하는 듯했다. 일상적 장면의 힘 배웠어요 그는 시나리오 선택에서부터 촬영과 후반작업까지 꼬박 1년을 쏟아부은 〈비열한 거리〉를 끝낸 뒤 “‘생활 대사’ 연기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액션 장면에서조차 주먹질을 보여주는 것보다, 병두라는 인간의 처절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에 신경을 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잔뜩 실어 열연을 펼치면 관객들도 힘든다는 걸 알게 됐어요. 또 일상적인 장면 하나하나가 영화에 얼마나 큰 힘을 불어넣는지도 배웠고요.” 덧붙여 영화출연 뒤 처음으로 쏟아진 ‘호평’으로 한껏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았다. “〈남남북녀〉 때는 연기 그만두라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그건 너무 성급한 결론 아닌가요. 연기라는 게 삶을 표현하는 건데,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삶을 꿰뚫어 볼 수 없듯,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부분들도 있잖아요. 그래서 전 나이 드는 게 기대돼요. 서른 이후, 또 그 이후의 제 연기를 지켜봐주세요.”

베네수엘라, 할리우드영화와 전면전 선포

“할리우드의 독재를 막겠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가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했다. 그는 6월3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영화 스튜디오 ‘필름 빌라 파운데이션’의 오픈 행사에서 총 1100만달러의 자금을 투자해 자국의 영화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세워진 스튜디오는 일종의 ‘영화종합타운’. 영화 촬영부터 후반작업까지 가능하도록 꾸며졌다. 그는 이번 스튜디오 건립과 관련해 “이는 베네수엘라의 문화적 기반을 지키기 위한 무기다. 미국의 문화적 독점을 막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스튜디오에서 제작될 첫 번째 프로젝트는 베네수엘라의 국가적인 영웅 프란시스코 드 미란다를 소재로 한 영화. 그는 19세기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싸웠던 인물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할리우드식 영웅인 슈퍼맨은 거절하겠다. 우리의 영웅을 스스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필름 빌라 파운데이션은 할리우드영화 속에 보이는 라틴아메리카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무법 지대에서 갱들이 출몰하고, 마약이 자유롭게 유통되며, 식수로 하기엔 매우 위험한 물이 있는 곳. 차베스 대통령은 “이같은 라틴아메리카의 모습은 매우 할리우드 중심적인 시선에서 비롯됐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콜래트럴 데미지>와 러셀 크로의 <프루프 오브 라이프>에서 묘사된 콜롬비아가 그 예. 차베스 대통령은 이에 대해 “이건 완전한 할리우드의 독재다. 그들은 실제 우리의 전통과는 상관없는 잘못된 이미지와 메시지로 우리를 세뇌시킨다. 미국식 삶의 방식인 제국주의로 우리를 물들게 하고 있다”며 강한 반감을 표했다. 1998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뒤 2000년 재선에 성공한 차베스 대통령은 남미 지역의 대표적인 좌파 지도자. 그는 민간 기업의 국유화를 비롯해 세계 자본주의 흐름에 반대하는 정책들을 펴왔다. 최근에는 미국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며 이란을 ‘형제국’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지난해에 설립된 <텔레수르>도 베네수엘라 정부의 자금이 70% 넘게 투자된 TV채널. 라틴아메리카의 시선으로 뉴스를 제작한다는 취지의 이 채널은 쿠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등에서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채널이 차베스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텔레수르>가 아닌 <텔레차베스>라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케이블 새 드라마 ‘시리즈 다세포 소녀’ 지휘 김의석 총감독

고등학생 ‘음란비사’ 다룬 인터넷 인기만화 원작 젊은 감독 9명 총 40편 나눠 찍어 전복적 즐거움 끌어낼까 만화 〈다세포 소녀〉는 무쓸모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청춘답지 못한 청춘들의 음란 비사다. 변태 수학 선생, 가난을 등에 업고 다니는 소녀, 성행위를 한번도 못해 왕따가 된 외눈박이, 오빠의 자위 현장을 목격하고 자살을 기도하는 도라지 소녀 등 고정 캐릭터들은 있지만 주인공은 없고, 매회 에피소드는 있지만 꾸준한 줄거리도 없다. 이 만화를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다세포 소녀〉로 옮겨 오는 8월부터 수퍼액션 채널에서 방영한다. 원작만화 자체가 독특한 만큼, 드라마도 9명의 감독들이 편당 15분짜리 2~6편씩을 제작해 총 40편으로 완성하는 특이한 방식을 택했다. 단편영화 출신의 아이디어가 싱싱한 젊은 감독들이 감독을, 〈결혼 이야기〉 〈북경반점〉 〈청풍명월〉을 감독한 김의석이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2005년 7월 삼십대 초반의 젊은 감독들과 백전노장 프로듀서가 모여 “원작 만화가 가진 전복성, 성적 판타지, 코믹성만을 살리기로 합의”하고,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시나리오 쓰고, 팀을 구성해 게릴라식 촬영에 나섰다. “파격적인 원작과 제작시스템에서 감독들만 믿고 찍었습니다. 〈어린이 바이엘 상권〉의 조운, 〈구타유발자 잠들다〉의 유정현, 〈정말 큰 내 마이크〉의 우선호 등 단편영화에서 인정받은 감독들과 김성호, 안태진 등 실력있는 현장 조감독들을 모았습니다.” 김의석 프로듀서는 〈시리즈 다세포 소녀〉를 “하나의 원작이 아홉명의 감독들로 세포 분열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성기를 표현할 때도 어떤 감독은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어떤 감독은 과일로 하는 식입니다. 우선호 감독은 아예 줄거리를 다시 썼지요. 그 결과 ‘무쓸모 고등학교’ 편에서는 원작에는 없던 교육현실을 풍자하는 대목이 생겼습니다.” 만화 내용에 너무 의존했다는 드라마 〈궁〉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시리즈 다세포 소녀〉에는 30% 이상 창작 내용을 넣었다고 한다. 인터넷 연재 당시 가장 흥미를 끌었던 캐릭터 ‘가난소녀’는 정소연 감독이 맡아 만화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을 이루어지게 하니 만화보다는 드라마가 더 판타지인 셈이다. 감독의 상상력을 제약하지 않는 대신, 현실적인 제약은 컸다. 제작비 10억원, 촬영기간 2개월, 에이치디 소형 카메라 3대로 40편 티브이 드라마를 찍어야 했다. 더한 현실적인 제약은 ‘검열’ 문제였다. 원작의 재미는 모범생들이 벌이는 에스엠(가학적 성행위) 행각, 게이인 축구부 주장, 전교 1등 일진회 등 고정관념과 마구잡이식 성담론이 충돌하는 그 순간에 있었다. 김 프로듀서는 “성기 노출 절대 금물로 시작해 성을 묘사하는 단어를 일일이 제한하는 방송윤리 심의 규정을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자체 검열도 작용했다. “만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처럼 ‘센’ 성적 코미디를 즐길 수 있을까,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프리섹스를 즐기거나 선생님들이 변태처럼 나오는 등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들에 대해서도 고심하고 있다.” 충돌을 피하면서 ‘전복적 즐거움’을 캐올 수 있을까? 지금 편집 중인 40편의 〈시리즈 다세포 소녀〉는 아직 그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아마도 참여했던 젊은 감독들은 만화 원작에서 ‘학생회장’이 한 말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대부분 재미난 것들은 반윤리적이지. 투우라든가 이종격투기라든가. 그렇지 않아?”

색깔 다른 법정 공방 안방서 불꽃

법정에서 오가는 고발과 심판의 설전에서 삶의 모습을 건지는 새로운 시선의 외화 두 편이 시작한다. 폭스채널의 휴먼 드라마 〈가디언〉(사진, 목 밤 9시50분) 시즌 2, 캐치온의 리얼리티쇼 〈로펌〉(수·목 오전 10시)이 각각 22일, 7월5일부터 전파를 탄다. 배심원들을 설득해가는 변호사들의 불꽃튀는 법정공방과 허를 찌르는 설전으로 법정을 구원의 장소, 나아가서는 즐거운 놀이의 공간으로 만든다. 〈가디언〉은 따뜻한 감동을, 〈로펌〉은 팽팽한 긴장감을 노린 프로그램이다. 〈가디언〉은 상류층 변호사 닉 팰린(사이먼 베이커)이 마약복용 혐의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알게 된 학대받는 아동들을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구하는 과정을 그린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 시비에스(CBS) 채널에서 인기리에 방영됐고 짜임새 있는 구성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주인공 사이먼 베이커는 이 드라마로 2002년 제59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텔레비전부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아동법률서비스센터에서 봉사를 하게 된 닉의 달라진 생활을 그린 시즌 1에 이어 시즌 2는 기업들의 돈벌이를 위해 법정에 섰던 닉이 위기에 처한 아이들의 변호를 맡으면서 변호사로서의 양심과 의무를 깨달아가는 모습을 쫓아간다. 방임, 성폭행, 가정불화 등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도우려는 변호사의 모습이 할리우드 영화의 변호사들보다는 현실적이다. 최종 판결로 결론을 내는 전형적인 법정 드라마와 달리 결말을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로펌〉은 ‘신성한’ 법정을 서바이벌 형식의 리얼리티쇼장으로 만든다. 현직 변호사 12명이 상금 25만달러를 얻으려고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다. 실제 사건을 두고 피고측과 원고측 팀을 나누어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짧은 시간 동안 사건의 내막을 캐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여기에 긴장감을 더욱 높이려고 재판의 승패에 관계없이 변호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두명을 떨어뜨린다.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티답게 변호사들이 서로를 “비윤리적이다” “건방져 보인다”고 비난하는 말들이 그대로 나오며, 재판에 진 팀원들이 서로 헐뜯는 치졸한 모습까지 낱낱이 카메라에 담았다. 2005년 미국 엔비시(NBC) 채널에서 방영한 이 프로그램은 법정드라마 〈보스턴 저스티스(The Practice)〉로 1999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드라마 시리즈상을 받은 데이비드 켈리가 제작했다. 법정을 소재로 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두 프로그램은 사건 재연의 반복과 뻔한 판결로 끝을 맺는 한국의 법정 프로그램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재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