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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스크린의 뒷면 - 영화 속 스크린의 잠재적 가능세계들

2000년대를 여는 에드워드 양의 첫 영화이자 그의 유작으로 남은 <하나 그리고 둘>에서 프레임에 붙잡힌 인물들은 비슷한 증상을 공유한다. 그것은 기억상실이다. NJ는 무엇을 찾기 위해 집에 들어왔는지 잊어버린다. 그의 딸 팅팅은 버려야 할 쓰레기를 발코니에 두고 그만 잊어버린다. 피로연에 참석한 친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NJ와 셰리의 재회를 목격하고는 내려온 목적을 잊어버린다. 어지럽게 뒤얽힌 삶의 회로 속에서 그들은 자꾸만 기억을 잃는다. <하나 그리고 둘>에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삶의 조건이 부서지는 위태로운 신호이기 때문이다. NJ와 셰리가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며 도쿄를 여행하고 있을 때, 타이베이에 있는 팅팅은 친구의 남자 친구인 패티와 첫 데이트를 한다. 에드워드 양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벌어지는 두 장면을 평행편집으로 교차한다. 기억상실로 채워진 <하나 그리고 둘>에서 이 순간은 이례적인 기억의 재구성과 반복을 형성한다. 이때 팅팅과 영화를 보고 나온 패티는 한 가지 특별한 이야기를 건넨다. “영화가 생겨난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세배로 늘었대. 영화를 통해 삶을 두배 더 경험한다는 거지.” NJ의 재회와 팅팅의 만남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들은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도쿄에서 돌아온 NJ는 셰리를 기억하는 대신 컵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린다. 과거는 지워지고 기억상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다만 <하나 그리고 둘>은 패티가 건네준 말처럼 두 사람의 실패한 사랑을 교차하며 평행편집의 계열 위에 또 다른 가능한 삶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화면에는 재회에 실패하는 NJ의 시간과 첫사랑에 실패하는 팅팅의 시간이라는 두 가지 실패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오가는 세 번째 영화의 시간이 있다. 영화는 그 실패를 반복하지만 또한 실패를 통과한 세 번째 삶의 시간을 조직한다. 이 시간 속에서 각각의 세계는 겹치게 되고 한 가지 시제가 갖는 위상은 분명치 않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불명확한 위상을 비추는 또 다른 영화의 시간이 있다. <하나 그리고 둘>과 1년의 시차를 두고 완성된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는 독특한 회고의 목소리로 영화를 시작한다. “여자는 하오하오와 헤어졌다. 그러나 그는 늘 그녀를 쫓아다녔다. 여자에게 전화하고 돌아오도록 애원했다. 여자는 도망갈 수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항상 돌아왔다. 이 일은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다. 세계는 21세기를 맞이했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하고 있었다.” 도입부의 화면 속에서 비키는 다리 위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이따금 뒤를 돌아본다. 비키는 미래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그녀’로 부른다. 이제 막 스크린에 펼쳐지기 시작한 현재는 이미 그토록 낯선 것이 되어 있다. 뒤엉키고 분해된 기억과 시간을 조직하며 에드워드 양과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21세기 영화에 관한 한 가지 실마리를 전해준다. 영화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장력 아래 놓여 있으면서 미래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뒤를 돌아보면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향하는 비키의 매혹적인 몸짓은 21세기 영화의 위치를 규정하는 알레고리적 신체가 된다. 영화의 비키의 발걸음을 따라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아리타는 자신의 몸을 철사로 감아 검지를 바깥으로 뻗는 손짓을 남긴다. 언젠가 아리타는 동료인 니무라에게 그 손짓이 앞으로 ‘가라’는 신호라고 말해준 바 있다. 철사로 묶어 자살한 아리타의 신체는 역설적이게도 앞으로 나아가라는 신호에 주박되어 있다. 정해진 시간에 열차가 도착하는 것처럼 영화는 한번 시작하고 나면 뒤로 돌아갈 수 없이 끝에 다다라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우회하고 탈선하며 다른 방향을 돌아보는 가능성을 또한 간직하고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가 화면 외부에 펼쳐진 폭력적인 세계와 접합해 있고 원리적으로 거기서 도망칠 수 없는 매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한 기반 뒤에 따라오는 21세기 영화란 그 원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매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의 영화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 펼쳐진 세계의 매혹이 파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21세기의 영화는 선명한 소명에 몰두하는 고전주의적 영웅과 반영웅의 영화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아니다. 도착지과 목적의식을 잃어버린 자들이 무기력한 자세로 뒤를 돌아보는 영화도 아니다. <밀레니엄 맘보>의 도입부를 묘사하며 말했듯이 21세기 영화는 주어진 자세를 비틀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영화는 서로 다른 체계로부터 오는 정반대의 명령에 붙잡혀 있다. 세계에 철저히 몰입하는 동시에 세계의 의미와 좌표를 되짚기 위해 영화가 고안한 것은 스크린 위에 펼쳐진 영화적 세계 내부에 이미지를 촬영하고 재생하는 또 다른 형태의 스크린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하나 그리고 둘>과 <밀레니엄 맘보>는 영화관의 스크린, 텔레비전과 CCTV 화면, 카메라와 촬영된 사진 이미지, 컴퓨터 모니터로 화면 내부를 빼곡히 채운 영화들이기도 하다. 21세기 영화 속 인물들은 서사의 장소를 배회하면서 그 장소들의 속성과 의미를 구성하고 되짚고 갱신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스크린의 장소에 거주한다. 영화는 마치 이면화를 그리는 것처럼 현실의 장소와 이미지의 장소를 평등한 세계의 단면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하나의 세계가 파열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복수적 세계의 범람을 불러들인다. 그 복수형의 단면은 어느덧 너무 많은 사회적 조건이 동질화된 나머지 서사 내부에선 거의 불가능해진 세계 안의 차이와 부조화를 만들어내는 기제다. 이는 내부와 외부의 공간을, 과거와 미래의 시제를, 현존하는 질서와 잠재적인 질서의 경계를 확증할 수 없는 편재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상호 교란적인 세계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돈가방을 든 도망자와 공기총을 든 추격자를 따라가는 보안관 벨은 언제나 뒤늦게 빈손으로 도착한다. 그는 이미 추격자가 다녀간 현장에 앉아 그가 지켜보던 텔레비전 모니터의 검은 화면을 바라본다. 텔레비전에 흐릿하게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보안관은 그들이 자신이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중얼거린다. 웨스턴의 풍경을 전유하고 있지만 이곳은 도망자와 추격자와 보안관이 같은 자리에 앉아 텔레비전에 비친 흐릿한 형체와 시각을 공유하는 불안정한 형상들의 세계다. 이 세계의 풍경에는 기준을 설정할 만한 원점과 기원이 없다. 단지 풍경이 주어져 있고, 그에 대항하며 형성되는 다면화된 얼굴과 형상이 채워진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에서 세계는 온라인 공간에 접속한 뒤 유령이 되는 인간의 얼룩으로 채워진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코스모폴리스>에서 세계는 리무진 파노라마처럼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단면과 디스플레이 모니터 위의 평면으로 분할되어 있다. 샹탈 아케르만의 <노 홈 무비>에서 카메라를 든 아케르만은 스카이프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어머니의 얼굴을 비춘다. 카메라는 실시간으로 간극과 격차가 실종된 세계의 원리를 비추지만 그 장면에서 상대방의 형상은 추상적인 픽셀의 형태로 조각나 있다. 세계는 유령의 시각으로, 이동수단의 시각으로, 프로그램과 데이터의 시각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장뤼크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에서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도, 누가 무엇을 위해 촬영했는지 파악할 수도 없이 펼쳐지는 저화질의 스마트폰, 캠코더, CCTV 영상은 허구적 세계의 위상이 파괴된 현실을 증언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접점을 다시 회복하려는 절실한 자기파괴다. 스크린을 매개로 현실과 허구를 나란히 두고 그 관계를 탐색하는 자기파괴적 걸작이 바로 토니 스콧의 <데자뷰>다. 이유 모를 선박 폭파 사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는 원격 위성 장치를 토대로 지나간 과거를 모든 각도와 시점에서 다시 관측할 수 있는 스크린이 있다. 이 스크린에는 정확히 4일 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으며 지켜보는 이들이 시간을 앞으로 당기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데자뷰>에는 스크린을 매개로 4일 전의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공존하는 세계로 주어진다. 폭파 사건을 조사하는 수사관 더그는 범인에게 살해당해 현재시제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스크린으로 지켜본다.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상대방이 눈앞에 있다는 감각이 더그의 시각을 물들이기 시작하고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매혹으로 번진다. 스크린 속의 대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에 이미 죽어버린 대상이 눈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한다는 조건 속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낯선 경험으로 뒤바뀐다. 스크린과 현실의 이중적 시각에 충격을 가하는 사건은 영화 중반부에 벌어진다. 더그는 스크린의 범위를 벗어난 범인의 행적을 뒤쫓기 위해 4일 전의 과거가 영상으로 재생되는 고글을 쓰고 자동차에 탄다. 그는 한쪽 눈에 고글을 쓰고, 다른 눈으로 현재 시점의 범인을 추격한다. 한 시각에는 과거의 행적이, 다른 하나의 시각에는 현재 시점의 상태가 교차하며 스크린에 두 가지 시제의 영상이 충돌한다. 더그는 한쪽 눈으로 스크린에 기록된 단서에 집중하면서, 다른 눈으로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한다. 파괴된 세계는 두눈에 비치는 분열적 표상으로 순식간에 다가온다. 과거와 현재가 나뉘는 시각을 매개로 더그는 마침내 4일 전의 범인이 도착한 곳에 이른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 그곳은 파괴된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가 지켜본 ‘현실’은 그가 발 디디고 선 현실과 다르다. 영화는 하나의 거짓된 세계를 꾸며내는 기술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 또 다른 화면과 스크린이 틈입할 때마다 하나의 거짓말은 다른 하나의 거짓말과 만나게 된다. 이 조건 아래서 영화가 꾸며낸 거짓의 세계는 언제든 다른 무언가로 뒤집히거나 일관된 현실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중첩된 거짓말의 세계가 된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이 불명확한 형상의 세계에서 끝없이 미끄러지는 거짓말의 이행 과정을 다룬다. 콜걸로 일하는 아키코는 술집 창문에 비친 형상에서 택시에 비친 형상으로, 노교수의 침실 한쪽에 있는 텔레비전에 비치는 형상으로, 남자 친구인 노리아키가 발견한 성매매 광고 사진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표상이 머무는 장소를 옮긴다. 아키코는 “~인 것처럼”이라는 가정법에 사로잡힐 때마다 영화가 꾸며낸 거짓의 세계에 적합한 형상으로 프레임 내부에 거주한다. 아키코가 임시로 거주하는 이미지의 평면은 영화적 허구와 가정법의 진실이 공존하는 픽션의 절단면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서로 다른 거짓말의 집합으로 채워진 물리적 세계에서 공존 불가능한 거짓이 충돌할 때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임시적인 장소를 끝없이 발명한다. 21세기의 영화는 서로 다른 화면과 서로 다른 거짓말이 품고 있는 불안을 안고, 그러나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오래된 무명의 강인함 <기차의 꿈>

20세기 초 아이다호의 원시림, 한 남자가 도끼를 휘두른다.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는 그저 노동의 메아리가 아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모든 나무들의 비명이 곧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고 있었음은 분명해진다. 적어도 로버트(조엘 에저턴)에게는 그것이 아메리칸드림보다 선명한 멜로디였다. 클린트 벤틀리 감독의 <기차의 꿈>은 소설가 데니스 존슨이 쓴 동명의 작품에 기반해 평범한 한 벌목꾼의 80년 생애를 통과한다. 원작 소설이 헤밍웨이적 간결함으로 찬사받았다면 영화는 테런스 맬릭의 기시감을 자아내는 서정시로 탈바꿈했다. 시대적 교집합 면에서는 20세기 초 떠돌이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뿐 아니라 마이클 치미노의 수정주의 서부극 <천국의 문>(1980)도 어김없이 함께 떠오르는 영화다. 앞서 나온 두 영화는 변화하는 미국을 ‘천국’에 빗대면서 그 염원의 무모함과 불가능성을 가리켰다. 이번 작품엔 ‘꿈’이 있다. 건설업이 부흥하고 기차가 대륙을 가로지르는 시점에 기차의 꿈이란 얼핏 미국의 꿈처럼 들린다. 하지만 철도를 놓아 문명을 확장하는 것이 노동자 자신의 꿈이었던 적은 없다. 산기슭에 통나무집을 짓고 사는 로버트의 꿈은 한철 노동이 끝나면 아내 글래디스(펠리시티 존스)와 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더 넓은 곳으로 뻗어 나가기보다 그저 돌아가기를, 정확히는 자신의 터전이라 믿는 곳에 나무처럼 뿌리내리기를 소망한다. 그에게 기차의 꿈은, 고된 노동으로 잠들었다가 도착지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먼 곳에서 집이 불타는 악몽이다. 남자는 산불로 가족 모두가 흔적 없이 사라졌을 때조차 폐허가 된 집터에 그대로 남아 있기로 한다. 지근거리에서 공생하는 야생 곰도 굶주림보다는 극심한 슬픔에 시달리는 걸음걸이로 그의 곁을 지나친다. <기차의 꿈>의 주인공은 가진 것이 많지 않다. 그를 지탱하는 내면의 양식은 가족애, 그리고 근면 성실한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인데 영화는 기다렸다는 듯 이 모든 것을 소거한 후에야 본론을 시작한다. 거대 역사의 속절없는 흐름이 개인의 삶에 뿌리내리는 형태는 언제나 교묘해서, 자연재해로 가족을 잃고도 벌목 현장을 전전하던 로버트는 마지막 남은 노동자로서의 존엄함마저 소리 소문 없이 빼앗긴다. 관객이 스크린 타임 속 세월의 부피를 오롯이 체감하기도 전에 도끼질에 능숙하던 남자는 낯선 전기톱 앞에서 뒷걸음질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후로 그는 텅 빈 채로도 운행을 계속하는 기차처럼 그저 세월 속을 살아나간다. 과시적인 인물형의 향연으로 점철된 동시대 스토리텔링의 포화 속에서 배우 조엘 에저턴이 탁월하게 묘사한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너무도 평범해서 희귀종이다. 미국의 우화인 <기차의 꿈>이 시대와 지정학적 위치를 건너뛰어 현실의 수많은 조용한 존재들에 가닿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편 <기차의 꿈>에서 종국까지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은 죄의식이다. 1917년 여름, 로버트는 함께 일하던 중국인 동료가 백인 집단의 무차별적 폭력에 살해당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주인공을 가담자로 묘사한 원작과 비교해 영화는 도덕적 책임을 희석했으나 방관의 죄도 무겁게 받아들인다. 나무를 베는 원죄가 불러낸 기후 재앙, 정착민 식민주의가 낳은 인종적 폭력의 긴 역사가 개인의 삶에 그리는 무늬는 이처럼 모호하지만 분명 지속된다. 생각해볼 것은 가해와 속죄 모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동시에 어느 쪽에서도 주역이 아닌 사람들의 인생, 다시 말해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스타일의 차이와 무관하게 소설과 영화가 동일하게 짊어진 무거운 숙명은 문명이 반드시 값을 치른다는 사실이다. 로버트에게 그 대가는 평생의 무명성, 존재의 지극한 사소함으로 찾아온다. 우리의 주인공은 멀쩡했던 나무가 어느 날 육중한 가지를 떨어뜨려 동료를 죽이는 이치를 이해할 수 없다. 산불이 하필이면 왜 자기 가족을 앗아가는지, 잿더미 속에 홀로 남은 자신에게 왜 그제야 단비가 쏟아지는지 알기에도 역부족이다. 종종 그를 보살피는 원주민 이웃을 제외하면 누구도 로버트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살을 알아차리지 않는다. 훗날 인류가 허공을 정복하여 달 탐사까지 성공했음을 알릴 때에도 로버트는 ‘노바디’다. 서글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쇼윈도 너머로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는 노인에게 필요한 것이 뒤늦은 훈장일 리는 없다. 훌륭한 이야기의 창은 구태의연한 사회를 찌르고, 그 방패는 인간 존재의 한낱 무상함을 보호할 수 있다. 연출자의 불안을 드러내는 빈번한 환상 몽타주와 플래시백이 난삽함에도 불구하고 <기차의 꿈>에 저항 없이 흐느끼게 되는 이유다. 1968년, 로버트는 생애 처음 경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기차의 꿈이 소진되고 비행기의 꿈이 날아가는 시대가 그를 지켜줄 리 만무하지만 이 순간 그는 주어진 행복을 누린다. <기차의 꿈>의 최종 시퀀스는 평생 자기 삶의 미스터리를 풀지 못하는 인간을 마침내 위로한다. 부모도, 가족도, 후계자도 없는 남자를 두고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말한다. “그 봄날, 위아래의 감각마저 뒤집혔을 때 그는 마침내 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한없이 무력하게 상공의 바람과 압력에 흔들려가면서 문득 미소 짓는 남자가 우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 평범한 삶들에 대한 차분한 경의로 읽을 때 <기차의 꿈>은 경이롭다. 동시에 이 영화가 끝내 떨치지 못하는 원죄를 기억한다면, 아무리 미약한 개인도 폭력의 사슬을 짊어진 역사적 주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역설 속에서 모든 무명의 인간은 한 그루 나무의 심오함을 배워가는 게 아닐까. 데니스 존슨은 소설에서 이렇게 바꾸어 썼다. “대부분의 우리는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매우 깊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

[기획] 독창성과 지역성이 만날 때 거대한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가파르게 변모하는 콘텐츠 산업에서 디즈니+는 어떤 전략을 고민할까. 디즈니+ 오리지널 프리뷰 2025에서는 에릭 슈라이어 디즈니 텔레비전 스튜디오 및 글로벌 오리지널 텔레비전 전략 부문 사장과 캐럴 초이 월트디즈니 컴퍼니 아태지역 통합 마케팅 및 오리지널 콘텐츠 전략 총괄의 리더십 세션을 마련하여 글로벌시장의 아태지역의 콘텐츠 전략에 대해 나누었다. 두 패널은 공통적으로 스토리가 발굴되는 공간으로서 아태지역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했다. 먼저 에릭 슈라이어 사장은 디즈니+ 핵심 전략 자체가 로컬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디즈니는 스타워즈, 픽사, 마블, FX, 훌루 등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브랜드와 IP를 보유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각 지역의 시청자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발굴하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현지 문화를 반영한 스토리 중심으로 글로벌 OTT 라인업을 보완하고 있다. 나는 일본·한국·호주 시청자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미국인이니까. 하지만 스토리의 보편적 구조와 시각언어는 잘 알기 때문에 지역 리더들이 아태지역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집중한다. 나는 자주 질문한다. ‘당신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불타고 있나?’” 이어서 캐럴 초이 총괄은 스토리텔링이 유행어처럼 번지는 시대에 디즈니가 어떻게 본질에 가닿는지 이야기했다. “전세계 어디서든 통하는 요소는 분명 있다. 훌륭한 이야기, 높은 제작 완성도, 강렬한 캐릭터 아트. 이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가도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거기에 지역의 문화적 뉘앙스를 더하면 어떻게 될까. 로컬 크리에이터의 개성과 색이 살아난다. 우리가 추구하는 로컬 포 로컬(Local for Local) 전략이 유의미한 효과를 볼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무빙><나인 퍼즐><카지노>등 성과를 냈다.” 숏폼이 각광받는 시대. 디즈니+는 이를 어떻게 접목하고 응용할 계획일까. “특히 아시아에서는 디지털 소비 패턴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2분 내외의 세로형 드라마처럼 ‘초단편 포맷’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트렌드가 디즈니+의 전체 포트폴리오에 어떻게 녹아들지는 아직 탐색 중이다. 다만 우리는 이미 미드폼, 언스크립티드 등을 실험하고 있다.”(캐럴 초이) 이어 에릭 슈라이어 사장 또한 이러한 소비경향에 의견을 더했다. “우리는 공장식 프로세스가 아니다. 매번 다르게 예술가를 지원하면서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내는 여정이다. 전통적인 드라마의 경우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작가와 피드백을 주고받고, 파일럿을 촬영한 뒤 시리즈로 확장한다. 하지만 요즘은 파일럿 없이 바로 시리즈 제작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스트리밍 플랫폼의 장점은 형식적 유연성이다. 이제는 7분짜리 <블루이>같은 초단편 시리즈도 성공을 거둔다. 그래서 우리는 형식의 제약을 없애려 한다. 창작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실험할 수 있도록 놀이터를 지원할 뿐이다.”

[비평] 본성을 잃은 존재여, 미련 없이 폭파, 프런트 라인 연속 기획<부고니아> ③ - 김소희 평론가

질베르토 페레스는 폭력 이미지로서 미국영화를 다룬 글에서 리처드 슬롯킨의 견해를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서부극이 지배계급에 속한 선한 영웅을 그린다면, 갱스터영화는 악을 행하는 하층계급 영웅의 이야기다. 이러한 요약은 인간의 폭력에 관한 유구한 장르인 서부극과 갱스터영화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돌아보면, 오늘날은 서부극과 갱스터영화 양쪽 모두가 성립되기 어려운 조건 속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계급과 선악의 연결 관계가 역전되어 대개 계급적으로 우위에 놓인 이가 악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하층민은 선한 희생자의 자리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계급과 선악 사이 자리바꿈과 고착화는 영웅의 탄생을 위태롭게 만든다. 코믹스에 기반을 두고 무수하게 재생산되며 체급을 키우는 히어로영화는 영웅이 환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반복하며 영웅의 부재를 각인시킨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부고니아>는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지키려는 인간의 분투를 그린 영화다. 이보다 더한 영웅 서사가 있을까. 물론 그 허황됨은 관객에게 영웅을 얼마든지 비웃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지구를 구하는 수단이 납치와 고문이라는 점도 미심쩍다. 더구나 테디(제시 플레먼스)와 돈(에이든 델비스)은 영웅과 가장 거리가 먼 이미지와 성격을 지녔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음모론에 사로잡힌,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처럼 보인다. 인체의 표본이 전시된 방은 섬뜩한 연쇄 살인마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판타지 장르를 벗은 하층계급의 영웅이란 바로 이런 모습인지도 모른다. 란티모스가 금욕의 영화라니 <부고니아>가 리메이크 원작 <지구를 지켜라!>에서 새롭게 추가한 설정 중 하나는 납치하는 당사자가 화학적 거세에 의한 중성화를 스스로 선택한 대목이다. 이는 납치 대상의 성별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면서 파생된 설정이지만, 계급적으로 열악한 이들의 상황을 한층 더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테디와 돈은 납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사용한다. 누군가에게 정체가 발각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한 가면은, 한편으로는 이들이 화학적 거세에 의해 중성화되었음을 상기시킨다. 미셸(에마 스톤)의 삭발은 화학적 거세에 대응하는 행위다. 물론 삭발은 전작에서 따온 설정으로, 머리카락은 외계인이 지구 바깥과 교신하는 매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캐릭터의 성별 전환은 의도보다 많은 것을 바꾸기 마련이다. 미셸의 잘린 머리카락은 테디와 돈의 화학적 거세에 대응하는 중성화 행위의 일종이다. 미셸의 머리카락과 여성의 얼굴 모양 가면은 함께 불 속에서 타들어가며 성별 교환식을 조촐하게 기념한다. 하지만 화학적 거세가 완전한 중성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도리어 손실된 남성성의 보충물이 필요한 처지에 놓인다. 오진우 평론가는 제거된 남성성과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을 연결하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채택된 것이 음모론이라고 짚었다. 하지만 테디의 믿음은 화학적 거세 이전에도 존재한 것이기에, 여기에서는 화학적 거세와 이후의 상황에 조금 더 집중해보고 싶다. 남성성의 위협과 복구의 필요성에 따라 등장한 사물은 장총이다. 총은 테디가 미셸에게 모욕받았다고 느끼며 감정을 분출한 다음날 돈의 손에 들린 채 등장한다. 이후 총은 테디와 미셸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전면화된다. 미셸이 자신의 목을 조르던 테디에게 반격하며 그의 몸에 올라탄 상태로 공격을 가한다. 돈은 잠시 망설이다가 총을 쏘는 대신 미셸의 머리를 총으로 내리쳐 기절시킨다. 포개진 테디와 미셸의 몸은 대결을 표시하지만, 불발된 성교를 연상시킨다. 과한 해석일 수 있으나 이 영화는 성기로서의 인간을 강조해온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가 아닌가. 불발된 총은 발사될 수 없는 총으로서의 거세된 성기를 흉내낸다. 자승자박이 된 거세처럼 총은 외계인을 제거하는 대신 총의 주인이 자신을 공격하는 데 쓰인다. 월식하는 존재들 돈에 의해 발사된 총은 편집에 있어 하나의 출발 신호탄처럼 기능한다. 이를 기점으로 마구 내달리는 호흡이 전개된다. 지구와 달이 겹치는 월식을 인물의 관계를 통해 수행하듯, 대조적인 것처럼 보이던 테디와 미셸의 연결성이 이를 계기로 드러난다. 김예솔비 평론가는 미셸과 테디가 신체를 단련하는 교차편집 장면을 들어 서로 다른 물리적 조건 속에서의 몸짓이 결국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담론에 포섭된다고 지적했다. 미셸과 테디가 계급화된 인간의 삶을 축소하고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이들을 동시대 사회문화의 반영체로 보는 것은 일견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신체를 단련하는 데는 특수한 목적이 있고, 이 목적마저 자기계발담론에 포섭된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대조된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의 운명적인 연결이라는 표면에 조금 더 머물러보고 싶다. 테디와 미셸은 모두 고립된 존재다. 아내와 자식이 있던 강만식(백윤식)과 달리 미셸에게는 가족이 없다. 테디에게는 사촌 돈이 있지만, 두 사람은 함께 고립된 처지다. 미셸은 고급 저택에 거주하지만, 집을 지키거나 관리하는 경비원이나 가사도우미, 하다못해 반려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테디와 돈의 어설픈 납치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보안관 케이시(스타브로스 할키아스)의 방문을 기점으로 테디와 미셸이 분리되었을 때, 영화는 편집을 통해 두 상황을 이어 붙인다. 교차편집은 서스펜스를 만들기 위한 장치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동시성과 유사성을 불러오는 기능을 한다. 돈이 미셸의 눈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날려버리면서 미셸이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는 순간, 테디 역시 케이시를 살해하면서 얼굴과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 된다. 원인은 다르지만, 나란히 피를 뒤집어쓴 두 얼굴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비슷한 상태를 향해가는 기이한 연결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반의 단련 장면 역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이들이 서로 유사한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테디가 미셸과 함께 오소리스 본사에 도착해 걸어들어가는 장면은 둘간의 기이한 동시성을 잘 보여준다. 미셸은 돈의 죽음에 대한 분풀이로 테디가 휘두른 총에 맞아 다리가 부러진 상태이고, 테디는 미셸을 협박하기 위해 휴대한 장총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건물 내부에 진입해 집무실에 이르는 동안 각자의 이유로 내내 절뚝인다. 미셸은 부러진 다리를 끌며, 테디는 바지 안에 엉거주춤 밀어넣은 장총을 의식하며 어색하게 걷는다. 둘의 유사한 걸음걸이는 대조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연결성을 표시한다. 집무실에 테디를 들인 미셸은 테디의 음모론에 맞먹는 허황함으로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한다. 미셸은 자신의 방 한쪽에 놓인 옷장이 외계로 이동하는 텔레포트 장치이며, 이동을 위해서는 계산기에 엄청난 양의 숫자로 이뤄진 코드를 입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외계인을 연기하는 인질의 허황된 거짓말처럼 들린다. 미셸과 테디는 잠시 누가 먼저 옷장에 들어갈 것인지를 놓고 약간 혼동을 벌인다. 결국 먼저 시도하기로 한 테디는 성공 직전 몸에 두른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옷장 속에서 몸은 파괴되고, 머리만이 옷장을 뚫고 튀어나온 상태로 처절하고 요란하게 죽음을 맞는다. 마침, 테디의 머리가 미셸의 얼굴께로 떨어지면서 미셸도 뒤로 밀려 넘어진다. 이는 지구인과 외계인 사이에서 발생한 일종의 개기월식이라 할 수 있다. 동시성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이 순간은 슬로모션을 통해 우스꽝스럽게 강조된다. 자율성의 실체 꽃 주변을 날아다니는 벌을 보여주는 자연 이미지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거의 동일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이미지가 놓인 맥락이 그 의미를 바꾼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자연은 양봉꾼으로서 테디가 하는 일을 간략하게 스케치하는 부차적인 이미지다. 테디의 대사를 통해 군집 붕괴로 인한 위기가 언급되지만, 이 현상이 충격적인 이미지로 보충되지는 않는다. 클로징 시퀀스에서 자연 이미지는 인류의 절멸과 대비되는 살아남은 생명체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같은 이미지가 한편에서는 인류에 지구의 위험에 대한 경고를 의미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인류의 운명과는 무관한 생존을 의미한다. 테디의 대사로 보충되는 벌의 생태는 이 꽃과 저 꽃을 옮겨다니는 생물학적 단순함으로 요약된다. 지구에서 인류만이 제거되는 결말이 필요했던 이유는 생물학적 존재에 대한 지적인 존재의 패배를 그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인간 역시 벌의 생태만큼이나 단순하게 축소되는데, 여기에서 인간은 화학적인 약품을 활용하는 존재로 특징지어진다. 기업을 이끄는 CEO인 미셸이 상류층 인간의 역할을 겸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인류의 위기를 초래한 건 화학약품을 통해 인간과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 상류층의 책임이다. 하지만 테디가 화학적 거세를 택하는 대목은 자신이 대항하려던 대상과 은연중에 비슷해지고 마는 실책을 시연한다. 현실 세계에서 개별자의 선택은 더 큰 흐름과 질서를 반복하면서 자발성과 자율성이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함을 드러내곤 한다. CEO인 미셸은 직원들에게 자발적인 굴종을 강요한다. 직원들은 자유롭게 퇴근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퇴근을 반납할 수 있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조건에 의해 제한된 자율성은 결과적으로 자율성을 억압하면서 모든 선택을 의문에 부치도록 만든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거의 모든 생각과 실천은 자유와 종속의 이중적 의미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의 시선에 의해 비판된 인류의 죄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죽이는 절멸 행위다. 이는 홀로코스트와 베트남전쟁 등 실제 역사적 사건을 인용한 이미지를 통해 보증된다. 반면 <부고니아>는 타인을 살해하는 행위보다는 자신을 죽이는 행위가 더 문제라고 인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지키던 테디와 돈 역시 자살 혹은 자살에 준하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다. 처음으로 테디와 떨어져 불안정한 상태로 미셸을 마주한 돈은 별안간 총구를 자신의 머리로 향하게 한 뒤 발사한다. 테디의 경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몸에 두른 폭탄이 터지면서 자신을 죽인 꼴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이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테디가 의심한 바대로 돈의 자살은 미셸이 돈을 설득하기 위해 늘어놓은 말의 작용에 의한 선택일 수 있다. 테디의 허망한 죽음 역시 미셸이 버튼을 조작하는 순간과 동시에 작동하면서, 미셸의 행위가 테디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새겨둔다. 어쩌면 자율성이란 저절로 굴러가는 머리와 같은지도 모른다. 잠깐의 침묵 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면서 몸에서 떨어져나온 테디의 잘린 머리가 옷장 밖으로 탈출해 공중에 크게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면서 요란하게 나뒹군다. 중력과 관성이 뒤엉킨 주인 없는 운동은 자율성의 실체를 보여준다. 자율성은 의지를 통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지를 잃어버렸을 때에야 성취된다. 게다가 성취되는 순간, 성취감을 느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율성은 행하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몸과 분리된 테디의 머리는 생명력과 유리된 지식을 은유하며 몸을 살리지 못한 머리의 비극을 표시한다. 몸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파괴되지 않고 보존된 테디의 머리는 몸에 대한 머리의 영광 없는 승리를 표시하는 동시에 이를 풍자한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지구의 파괴는 화이트아웃으로 인간이 하나둘 사라지는 증발로 표현된다. 반면 <부고니아>에서 죽음은 보다 선명하다. 죽음은 움직임을 멈춘몸이며 이러한 부동성은 그와 대조적으로 살아남은 존재의 움직임을 동반한다. 인류가 절멸한 뒤에도 강아지와 고양이, 하늘을 나는 새와 꽃을 옮겨다니는 꿀벌 등 동식물과 곤충은 남는다. 그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물결,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등의 자연물과 기계, 굴러가는 공 역시 영화에 의해 평등하게 몽타주되는 살아 있는 것의 목록이다. <지구를 지켜라!>가 마지막에 실제의 참혹한 전쟁과 참사의 이미지를 제시했던 것을 의식한 듯, 란티모스는 사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고집스럽게 제시한다. 인간의 죽음을 그린 몇 가지 이미지 중 유독 각인되는 이미지는 침대 위에서 벌거벗은 몸을 포갠 채 누운 커플과 드레스에 면사포를 쓴 채 마지막을 맞은 신부다. 이는 짓궂은 놀리기에 가까운 삽화로 볼 수도 있으나, 유독 성적인 결합이나 이를 앞둔 순간을 조명하면서 사적인 존재들에게 특별한 애도를 표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죽음의 이미지와 삶의 이미지를 뒤섞어 영화가 가닿는 곳은 결국 다시 생물학적 질서로 환원된 세계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결코 인간과 무관하지는 않은 자율성의 이미지다.

[홍기빈의 클로징] AGI의 신화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AGI, 즉 인공일반지능이 10년 안에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지만, 최근 들어 회의론이 대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AGI는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며, 대신 특정 기능에서 큰 능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쪽이 낫다는 견해도 많이 나온다. 이러한 논쟁을 보면서 애초에 AGI, 나아가 ASI, 즉 인간을 훌쩍 능가하는 인공초지능의 개발에 몰두하는 흐름은 일종의 ‘의인관의 오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미국의 경제사상가 소스타인 베블런이 산업혁명 이후 생산의 주역으로 새로이 나타난 기계를 두고 사람들이 범해온 그릇된 이해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은 놀라운 효율성과 힘으로 엄청난 생산성을 발휘하는 기계라는 존재를 두고서 이것이 인간의 신체 작동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의인관’(anthropomorphism)의 관점을 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블런에 의하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기계는 그 상상력의 기원이 인간의 신체를 모방하는 것에 있지 않다. 이 기계는 그 구상과 설계와 작동 모두에 있어서 어떠한 힘과 질량과 어떠한 에너지와 물질이 어떠한 인과관계에 따라 어떻게 운동하고 변화하는가라는 물리적, 화학적 법칙으로 지배되게 되어 있다. 단순한 왕복 동작을 하는 기계는 인간의 동작을 흉내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기계는 인간의 신체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무수한 동작과 작용을 마음껏 구사한다. 화학과 전기공학의 법칙에 따라 생겨난 기계들은 인간의 신체와 아예 상관이 없다. 베서머 공법을 이용한 철강 공장은 대장장이들의 신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또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라는 기계는 인간의 재주와는 완전히 무관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과연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는 것을 그 본질로 삼는 것일까? 이는 또 하나의 ‘의인관’이 아닐까? 산업혁명으로 나타난 기계들이 인간의 그것과는 무관한 별개의 ‘신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과는 독립적인 별개의 ‘지능체’(intelligence)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를 억지로 구부리고 길들여서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는 쪽으로 몰고 가려는 것은 베블런이 말했던 것과 똑같은 ‘의인관’의 발상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발전은 굳이 AGI나 ASI를 목표로 삼으려는, 즉 인간을 대체하고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인간 지능과 사이좋게 공존하면서 그 나름의 발전의 길을 걸어나가는 쪽을 지향하는 게 옳지 않을까? 예를 들어 사회복지 서비스의 적재적소에 인공지능이 도입된다면 비용을 크게 낮추면서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의사 한 사람이 제대로 만들어진 의료 부문의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다면 전문의 다섯 사람, 여섯 사람의 몫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AGI를 먼저 개발해 내는 쪽이 인공지능은 물론 인류의 미래를 주도하고 제패하게 되어 있다는 믿음에 따라 무서운 경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들어보지도 못했던 액수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AGI의 기술개발이 실패하거나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는 비즈니스모델이 나오지 않는다면 세계경제 전체가 그 후유증으로 10년간 가라앉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잠깐 멈추어 서서 여러 생각을 해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혁명은 파도처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중 최대 제작비가 투여된 블록버스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거대 자본과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의 독보적인 연기, 무엇보다도 감독의 장르적 세공력이 놀라운 수준에서 결속한다는 찬사는 단지 오락적 성취만을 지시하지 않고, 감독이 그간 천착해온 과거의 문화나 신화 대신, 사회정치의 층위에서 미국의 현재성을 응시한다는 평가로 모인다. 혁명가 집단을 내세운 서사로 동시대 미국, 트럼프 집권하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 악화 일로를 걷는 세상에서도 혁명 이후 세대에게 낙관적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반면 혁명을 대하는 이 영화의 서사적 엉성함이나 모호한 시선을 지적하는 평들도 간혹 눈에 띈다. 이러한 견해의 저변에는 앞선 호평의 논리와 반대로 혁명의 화두가 오락을 위해 느슨하게 소재화되었다는 감상이 자리할 것이다. 그 불만의 원인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영화 속에서 혁명가 집단, 프렌치 75가 싸우는 대상이 공권력으로 뭉뚱그려 지시된다고 해도 그들이 “혁명 만세”를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쥘 때, 그 싸움의 맥락은 아리송하거나 구체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행동력의 기반이 될 이들의 사회적 토대나 내면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가 이를 보여주는 일에 의도적으로 힘을 들이지 않는다는 설명이 정확할 것이다. 혁명은 액션의 결과로 그려지며 그것이 놓인 인과의 차원은 별반 살펴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도 감독의 지난 작품들에서 분열, 모순, 강박으로 점철된 존재들의 집요하고 기이한 결들과 비교하자면 일견 허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요컨대 시놉시스나 홍보 문구에서 밥 퍼거슨(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은 폭발물 제조가로 활약하다 16년이 지나 무력하고 체념적인 상태로 변한 과거의 ‘혁명가’로 언급되지만, 이는 부풀려진 묘사다. 영화 초반부터 우리 눈에 비친 그는 애초 혁명가로서의 자의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나 현재나 자신이 놓인 상황은 물론, 수행해야 할 일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혁명이라는 용어는 영화 전반에서 반복되지만, 그것의 뿌리와 방향성은 애매하다. 한편 이 영화의 명징한 안타고니스트이자 반혁명론자로 불릴 스티븐 록조(숀 펜)는 백인 우익의 극단적이고 상투적인 면모들의 종합 세트다. 희화화를 위한 설정이라고 해도 창의적으로 생동하는 배우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일차원적으로 느껴졌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다. 나는 이 영화에 완전히 사로잡힌 관객 중 하나다. 다만, 도입부에서 이미 고양된 그 감흥의 정체가 영화가 환기하는 급박한 현실이나 혁명의 서사와는 좀 다른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여긴다. 근사한 걸음걸이로 다리 위를 활보하는 여전사의 장면은 그 아래 이민자 수용소로 이어지고, 작전을 세우는 혁명가 무리의 모습은 그들이 한밤 수용소를 급습해서 군인들을 제압하며 이민자들을 구출해내고 마침내 폭탄 빛이 밤하늘을 수놓는 광경에 이른다. 숏의 진행과 교차는 빠르고 그 경로에 불명료한 요소는 없다. 이민자들을 가두던 철창 안이 어느새 군인들이 갇힌 장소로 급변해 눈 깜짝할 새 역전된 상황을 맞이할 때, 이 전환이 일으키는 흥분은 혁명가들이 거둔 승리의 의미에 기인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를 돌아볼 의지 없이 돌진해 제도의 이미지를 단숨에 전복해버리며 환희의 빛으로 날려버리는 혁명의 산발적이고도 화려한 이미지, 그 이미지의 추동력으로 수용소를 격파하고 마는 영화의 편집술, 속도, 통제력이 우리를 압도한다. 화면 안으로 우리의 눈을 빨아들여 이미지 바깥을 의식할 틈을 마련하지 않는 그 솜씨가 너무도 매끄럽고 강력해서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속임수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뒤늦게 안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행여 돋아날 그러한 의심의 가능성에 움츠리거나 거리끼지 않는 운동의 기세로 영화 끝까지 쾌속의 길을 개척하는 세계다. 그 기세에 올라탄 자만이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밥이 술과 약에 취해 텔레비전으로 쳐다보던 <알제리 전투>(감독 질로 폰테코르보)는 이 영화와 실은 별 관계가 없다. 그 작품이 밥에게는 사라진 아내를 추억하는 몽롱한 잔상 같은 것일 수는 있겠으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알제리 전투>의 혁명 정신을 계승하지도 동경하지도 않는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 이 영화에 불러들인 ‘혁명’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차원에서 작동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혁명은 유동의 욕망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영화 속 백인 엘리트 극우 집단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 밀실에 틀어박혀 아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길 원하며 아무런 움직임도 직접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험하지 않는다.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만큼 ‘반혁명적’인 이미지도 없을 것이다. 혁명은 단절을 감행하고, 다시 연결을 시도하는 운동, 말하자면 파도의 흐름 같은 것이다. 윌라의 가라테 스승인 세르지오(베니치오 델 토로)가 다급한 상황일수록 평정심을 찾으라며 ‘파도’를 떠올리라고 할 때, 그 말은 움직임을 멈추지 말고 가볍게 만들어 변동성을 지속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황량한 도로 위에서 경찰에 잡힌 그가 몸을 활짝 펴서 뜬금없이 새처럼 춤추는 몸짓은 이 영화에서 가장 침착하면서도 단단한 혁명가인 그가 “수백년째 당하는 신세”를 견디며 오랜 시간 내면화한 ‘파도’의 형식일 것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좇는 혁명의 형식은 상승과 하강의 운동을 시도하고 수용하는 육체성을 응시하며, 그것이 고통보다는 욕망과 쾌감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혁명의 이미지를 섹스의 이미지와 연루하는 방식은 그러므로 이 영화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영화 초반, 관공서 폭파 장면과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와 밥의 섹스 장면은 숨 가쁜 긴장감으로 엮여 혁명의 속도를 높인다. 폭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은 이들이 성적으로 가장 흥분하는 순간이다. 앞서 언급한 도입부에서도 우리는 혁명에의 욕망과 성적인 욕망이 괴이한 상태로 접속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퍼피디아는 스티븐과 이민자 수용소에서 처음 마주한 날, 무방비한 스티븐에게 총을 겨누며 ‘일어나’(get up)라고 명령한다. 이 말은 스티븐의 단순한 투항만이 아닌 성적인 복종 또한 강제하는 이중의 용어가 되어 제압된 군인의 이미지를 희극적이고도 거북하게 그야말로 새삼스레 ‘일으킨다’. 의자에 앉은 스티븐은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의 성기를 세운다. 카메라는 성욕의 발현이라고도 성적인 굴복이라고도 판단하기 애매한, 솟은 성기를 자랑하듯 교묘한 표정을 짓는 권력자의 형상과 이를 의기양양한 자세로 짜릿하게 지켜보는 퍼피디아를 담는다. 진압과 항복의 운동으로 직진하던 긴급한 행로에 정치적으로 충돌하는 두 사람 사이의 끈적하고 은밀한 반응의 기류가 형성된다는 인상이 여기 이물감을 더한다. 이어지는 영화 전반부는 혁명 조직과 이를 저지하는 세력의 대립보다는 이 장면에서 성과 혁명의 기운이 얽혀 잉태된 씨앗이 발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퍼피디아와 스티븐은 욕망의 맹목적인 추종자로서 면모를 공유한다. 다만, 스티븐의 욕망이 권력욕과 페티시적 성욕으로 가시화되는 데 비해 퍼피디아의 그것은 불투명하다. 남편과 아기를 두고 혁명을 위해 집을 떠난다며 자율성을 운운할 때, 퍼피디아는 사회변혁과 같은 대의를 목표로 말하지 않는다. 그를 거듭 거리로 끌어내는 욕망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 초반, 이민자 수용소 공격을 앞두고 밥이 수제 폭탄으로 자신이 무얼 하면 되는지 어수룩하게 묻자, 퍼피디아는 시원하게 대답한다.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줘!” 밤하늘에 터뜨린 폭탄, 관공서를 부수는 화염, 한순간 눈부시게 펼쳐졌다 사라지는 빛, 그러니까 거대한 불꽃놀이와 다름없는 스펙터클이 퍼피디아에게는 혁명의 원천이자 양식이다. 영화는 누추하게 망가진 미국 사회의 풍경에 고개를 돌려 혁명의 원인으로 제시하지 않고, 혁명의 스펙터클을 주관하고 창조한 자들의 나르시시즘적인 희열과 거침없는 행보에 동참한다. 퍼피디아에게 흐르는 혁명가의 피는 그러한 스펙터클을 향한 본능이다. 그의 부모가 밥에게 한 말처럼 그 스펙터클을 향해 ‘달려가는’ 딸과 그의 ‘발목을 잡는’ 사위는 애초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인 셈이다. 퍼피디아가 혁명의 스펙터클이 폭발하기 전후로 도로를 가로질러 담대하게 걷고 뛰는 동작은 이 영화가 빚어낸 가장 멋진 리듬 중 하나다. 하나 영원한 스펙터클은 없다. 프렌치 75가 은행을 터는 장면에서 그 사실은 뼈저리게 각인되며 이들 조직이 와해되는 결정적 국면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복면도 쓰지 않고 대낮에 은행에 침투해, 마치 무대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뮤지션처럼 직원들의 책상에 올라 “이것이 권력”이라며 스스로 새로운 권력의 스펙터클이 되길 자처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시적 이미지는 화면 바깥에서 갑작스레 들리는 총성에 의해 일순간 정지한다. 거듭된 경고에도 임무를 다하려던 은행 경비원이 퍼피디아가 쏜 총에 죽는다. 방아쇠를 당겨버린 퍼피디아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동료들의 모습은 마치 이제야 혁명의 민낯을 마주하고 어찌할 바 모르는 자들처럼 얼어붙는다. 혁명가들의 자기도취적인 이미지를 멈추는 총소리, 참혹하게 널브러진 시체는 이전 장면들에서 이들이 열망하던 혁명의 아름다운 환영을 찢어버리는 구체적인 결과로 화면을 흔든다. 은행 장면은 피 흘리는 시신의 이미지를 동반하지 않던 폭탄 테러의 통쾌한 불꽃 광경과 같지 않다. 이 대목은 물론 여전히 장르적이지만, 자신만만하게 쾌감을 뽐내지 못한다. 은행에서 빠져나온 조직원들이 경찰과 벌이는 추격 장면은 프렌치 75에 남은 마지막 힘을 모조리 투여하듯 대단한 화력으로 전개되는데, 가장 인상적인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화력의 소진을 알리는 후반부에 나온다. 차에서 빠져나와 맨몸으로 도로 위를 내달리는 퍼피디아는 경찰차들에 서서히 포위되고 어느새 지상의 움직임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헬리콥터의 시야 속에 놓인다. 퍼피디아는 더이상 스펙터클을 만들고 누리는 혁명가가 아니라, 공권력의 시선 안에 포박된 수동적인 스펙터클의 대상으로서 익명의 초라하고 무력한 좌표점으로 전락한다. 영화 전후반에 걸쳐 이미지와 함께 활발히 흘러넘치던 음악은 헬리콥터 시선과 시야의 위세, 헬리콥터 모터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의 위력에 눌려 아예 증발해버린다(이 영화는 음악을 그저 과하게 소비하지 않는다!). 공권력의 눈이 혁명(가)을 무력화하며 장악하는 장면으로 이 이상의 방식을 상상하긴 어려울 것이다. 체포된 퍼피디아는 다음 장면에서 휠체어에 앉아 얼굴을 가린 채, 그를 둘러싼 백인 경찰들의 수치스러운 환호를 감내하고 있다. 겁 없이 혁명의 순간을 만끽하며 화면을 꽉 채우던 얼굴의 밀도는 오간 데 없다. 전반부 끝에 사라져버린 퍼피디아는 그 얼굴을 되찾지 못하고 영화 결말, 편지 속 평면적인 음성으로 돌아와 화면을 부유한다. 결국 혁명의 스펙터클이란 기만적이고 허망한 것인가. 16년 뒤, 밥과 윌라(체이스 인피니티)의 작은 오두막에 이른 후반부에서 한결 다층화된 리듬과 활동성으로 무장한 장면들은 한편의 영화로서 이러한 회의 섞인 자문에 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제 프렌치 75는 조직의 기동력과 스펙터클 모두 상실한 세계에서 어렴풋한 암호를 둘러싼 소모적인 퀴즈로만 과거의 존재감을 간신히 증명한다. 밥은 과거에서 건너온 암호에 화답해 죽은 혁명의 불씨를 현재에 되살릴 위치에 있지만, 이 수신인은 딸이 실종된 순간에도 시종일관 멍한 정신으로 엉뚱한 데서 무용한 실마리를 붙잡고 갈팡질팡한다. 그가 암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핸드폰 충전기 콘센트를 찾아 헤매고 넘어지고 추락하는 동안,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지연된다.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밥이 낭비하는 시간은 이 영화의 재기 넘치는 유머와 베니치오 델 토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뛰어난 코미디 감각을 펼쳐내는 데에만 복무하지 않는다. 밥이 허비하는 시간의 동선에는 전반부에는 등장한 적 없는 하층계급 이민자 공동체의 풍경이 뿌리내려 있다. 그 풍경은 밥이 끝내 답하지 못한 프렌치 75의 집요한 질문, “몇시인가요?”에 대한 영화적 응답이다. 어두운 거리로 나선 시위대는 경찰들에 맞서 저항의 파동을 일으키는 중이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도로를 횡단하며 시위 행렬에 동참한 히스패닉 청년은 3차대전이 일어난 것 같다며 들뜬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밥에게 비밀 행로를 터주려는 청년들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부리는 묘기의 실루엣은 활기찬 그림자놀이의 역동성을 닮았다. 이들 각각은 모두 이 밤, 혁명의 스펙터클을 이루는 주인공이다. 한편 공동체의 믿음직한 조력자 세르지오의 집 내부 곳곳에는 바깥의 소란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평온한 자태로 자기 공간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가족들이 있다. 그 집을 피난처 삼은 미등록 이주민들도 별다른 동요 없이 자리를 지킨다. 그 광경들을 쭉 따라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그저 야단스러운 기법이 아니라 이 집이 오래도록 굳건히 지켜낸 삶의 조건을 화면에 새기는 방식일 것이다. 세르지오의 집 안팎을 오가는 장면들은 혁명은 여전히 즐거운 것이라는 기조를 확장하면서, 전반부의 스펙터클이 포착하지 못한 혁명의 일상성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단 한번도 상황을 주도한 적 없는 인물인 밥이 신기하게도 영화의 중심축으로 점차 설득된다면, 그가 소모한 시간과 몸짓에 혁명의 강령이 미치지 못한 이야기들이 어느새 깃들고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 밥이 헤매는 시간은 평범한 생활인의 모습으로 곳곳에 숨은 동지들이 혁명의 맥으로 일순간 반짝이며 깨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호흡을 해야 해.” 10대가 된 윌라의 얼굴로 후반부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에서 가라테를 연마하는 그를 향해 세르지오 “센세”는 말했다. 움직임의 굴곡을 느끼는 일, 그것이야말로 혁명의 호흡이며 영화 후반부를 지탱하는 믿음이다. 세르지오의 가르침이 마침내 극적으로 구현되는 순간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추격 장면에서다. 센세의 호흡을 습득하고 물려받은 윌라가 그 일을 해낸다. 그가 스티븐에게 고용된 용병들로부터 탈출해 두손에 수갑을 찬 채 운전대를 돌리는 동안,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일원으로 방금 스티븐을 제거한 남자의 차가 그 뒤를 쫓는다. 많은 이들이 상찬하는 이 대목의 빼어남은 벌판을 가로지르는, 장애물 하나 없는 도로의 굴곡진 지형에서 자동차 세대와 거울만으로 추격의 속도, 시야, 시점을 조율하는 독창적인 감각에 기인한다. 영화는 서퍼가 보드에 올라타기 위해 적절한 파도의 타이밍을 예리하게 주시하는 것처럼, 이 시퀀스를 설계한다. 기술과 스피드가 아니라 이 도로에 잠재된 운동성을 겸허히 체감하는 레이서가 추격전에 승리할 자격을 가질 것이다. 윌라는 도로의 곡절을 호흡하며 그 기류를 거스르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움직임을 멈출 순간을 터득해 수세적인 방법으로 공세를 취하는 데 성공한다. ‘크리스마스 모험가’는 목표를 향해 그저 속력을 높이는 전형적인 추격전의 자세로 무지하게 임하므로 애초 패배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파도’를 떠올리라는 센세의 조언이 여기서 비로소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다. 부서진 차에서 피투성이로 내린 남자를 향해 윌라는 프렌치 75의 오래된 암호를 외친다. 그는 즉각 답하지 못하고 윌라가 쏜 총에 즉사한다. 아마도 윌라는 끝내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하겠지만, 이 순간, 16년 동안 먼지 속에 잠자던 낡은 혁명의 기표는 건재함과 유효함을 선언하며 감격적으로 부활한다. 윌라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 혁명의 경이로운 스펙터클을 본능적으로 창조한 것이며, 그때 봉인이 열리듯 “믿음의 장비”에서도 선율이 흘러나온다. 사태가 해결된 후 여지없이 뒤늦게 헐레벌떡 도착한 밥이 그 선율의 반쪽이 되어 비로소 음악을 완성하는 이 대목에는 이상한 울림이 있다. 투사라고 부르기 어려운 두 사람 사이, 바람 소리만 들리는 사막의 길에서 혁명의 음악이 그 어떤 수사보다 투명하고 잔잔한 결기로 살아남아 흐른다. 그 선율의 단순한 견고함은 윌라와 밥이 맞이하는 결말부에서 소리 없이, 영화의 태도로서 다시 상기된다. 소파에 널브러진 밥은 윌라에게 셀카 찍는 법을 배우고, 윌라는 오클랜드에서 일어난 시위에 동참하겠다며 집을 나선다.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감상적인 목소리로 귀환한 퍼피디아나 액션영화의 주인공처럼 죽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되살아나 가스실에서 살해되는 스티븐의 최후에는 다분히 극적인 기운이 깃들지만, 윌라와 밥의 이미지는 범상하기만 하다. 영화는 혁명의 장엄한 여운이나 아련한 기억, 혹은 주인공의 특별한 분위기로 결말에 힘을 실을 생각이 없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윌라가 향할 시위 집결지는 영화가 더는 닿을 수 없는 곳이라는 듯 그가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는 찰나에서 카메라를 끈다. 장대한 여정의 유희와 임무를 거쳐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는 이 끝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스름히 비치는 작은 창문을 열어둔 것일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마지막 장면은 앞선 혁명의 스펙터클이 도착한 정박지로서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소박한 이미지가 속삭인다. 이곳이야말로 미지의 활동을 다시 꿈꿀 새로운 출발지야.

동화, 구호보다 힘센

애니메이션에 대해 글을 쓰다보면 가끔 범하는 오류가 있다. 만화나 동화가 원작인 작품을 소개할 때 원작자를 감독으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쉽게 말하면 <아마겟돈>이나 <아기공룡 둘리>의 감독을 원작자인 이현세와 김수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원작자가 애니메이션 작업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으면 별로 문제가 없는데, 대개 캐릭터 설정이나 각색, 제작, 또는 총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이런 혼동을 일으킨다. 애니메이션 담당 초창기 때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로 극장판과 TV 시리즈의 시나리오, 캐릭터 디자인, 제작, 감수 등 각종 분야에 마쓰모토 레이지를 극장판 감독이라고 잘못 소개했다가 한 독자로부터 단단히 훈수를 듣기도 했다. 사실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감독은 린 타로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텔레비전에서 자주 소개되는 <스노우 맨>이나 <파더 크리스마스> 같은 애니메이션도 혼동을 일으키는 작품들이다. 두 작품 모두 영국의 유명한 동화작가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가 원작인데, 종종 애니메이션 감독도 레이몬드 브릭스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레이몬드 브릭스가 애니메이션 스토리와 캐릭터 디자인에 관여했지만, 감독은 ‘지미 데루 무라카미’(Jimmy Teru Murakami)가 맡았다. 애니메이션을 꽤 안다고 자부하는 팬들에게도 조금 낯선 이름인 지미 데루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33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 호세 태생이니까 이제 우리 나이로 67살인 노장 작가이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그가 젊은 시절 UPA에서 일했다는 것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디즈니의 안온한 가족주의와 틀에 박힌 그림에 반기를 든 작가들이 스튜디오를 나와 결성한 ‘UPA’의 모토는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다’였다. 사회적인 풍자나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성적 유머도 담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담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UPA에 오래 몸담지는 않았지만, 무라카미의 작품에는 그런 반골정신이 배어 있다.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을 돌아다니며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절 미국에서 건너간 많은 B급 영화감독과도 교류를 가졌는데, 그중 한명이 로저 코먼이다. 국내에서도 출간된 로저 코먼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의 영화에서 공중촬영감독으로 활약했던 무라카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무라카미는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67년 <속삭임>으로 앙시페스티벌 대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72년부터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자신의 스튜디오인 ‘무라카미 필름’을 세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스노우 맨>을 비롯해 몇편 되지 않는데, 최근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람이 불 때>(When the Wind Blows)가 영국 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소개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스노우 맨>과 <파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내용은 앞선 두편과 전혀 다르다. 앞의 두편이 유년 시절의 추억이나 꿈을 귀엽고 친근감 넘친 캐릭터로 표현했다면, <바람이 불 때>는 그처럼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를 통해 핵전쟁의 잔인함과 공포를 비판한 사회성 짙은 작품이다. 2차대전을 겪은 짐과 힐다라는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관료주의의 허구성과 이데올로기와 정권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죽을 수 있는 핵전쟁의 무서운 모습을 얄미울 정도로 차분하고 절제된 톤으로 그리고 있다. 시각적으로 현란한 그래픽이 등장하거나, 긴박감 넘친 움직임과 편집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것도 아니다. 마치 아이들 머리맡에서 동화를 들려주는 잔잔하고 편한 어조로 말하는 전쟁의 잔인함은 목소리 높인 구호보다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문예진흥기금을 영화진흥기금으로

유신문화창달을 위해 한국문예진흥원을 설립한 뒤, 유신운동자금 조성방안으로 당시 박정희 정권은 문예진흥기금을 영화관과 고궁과 각종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거두기로 했다. 지난 73년부터 입장료에서 6.5%씩 떼낸 이 돈은 유신시대도 한참 지난 뒤로는 예산이 부족한 문화부나 문화체육부의 행사비로 전용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중요한 쌈짓돈으로 활용됐다. 독특한 점은 이게 대부분 잘 알려졌다시피 영화관에서 걷혔다는 것. 지난해만 해도 245억원 가운데 179억원을 영화관객들이 냈다. 그 가운데 90억원이 영화쪽으로 다시 흘러왔다. 모은 돈의 절반을 다른 문화예술의 형제자매들에게 내주었으니, 영화는, 영화관객은 돈벌어 형제를 가르치던 개발기의 젊은 누이들과 닮은꼴이다. 그나마 영화쪽 환원이 이정도 된 것도 미국영화 직배로 영화토착자본이 말라가면서 시작된 일이다. 이런 사정을 언뜻 살피면, 2004년까지 걷기로 한 문예진흥기금을 2년 앞당겨 폐지하겠다는 기획예산처의 최근 발표는 그럴 법해보인다. 관객과 영화관에서 준조세 성격의 돈을 ‘뜯는’ 대신, 국가가 지원을 하겠다는 선언 아닌가. 그러나 속사정을 살피면 달라진다. 영화의 경우, 미리 문예진흥기금을 폐지함으로써 차질이 생긴 진흥기금을, 그 차액만큼 국고에서 지원해줄 테니 기금의 과실금으로 지원책을 펴나가라는 얘기인데, 그게 말처럼 간단치가 않다. 과실금이 한국영화가 지금 요구하는 정책을 펴나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차라리 영화관에서 거두던 문예진흥기금을 이번 기회에 영화진흥기금으로 전환하는 것이 합당해보인다. 그것이 자국영화를 지킬 의지가 있는 나라들이 지금도 활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관람료의 11%를 입장세라는 이름으로 환수해 한해 6억3천만프랑 정도를 만드는 프랑스에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 텔레비전쪽에서 6억8천만프랑을 내놓는다. 두 돈을 합쳐서,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격인 국립영화센터가 영화지원에 쓴다. 독일은 조금 더 온건해서, 관람료의 3%를 걷지만 비디오테이프에 추가로 2%의 영화세를 붙여놓았다. 유독 산업적이고, 자본집약적인 영화라는 매체의 양육비가 비싼 탓이다. 전반적 문화예술의 금고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문예진흥기금 폐지를 반대하는 의견도 없지 않지만, 그 재원은 다른 방도를 통해 마련할 일이다.

대처를 배우자고?

<트레인스포팅>으로 상종가를 치던 시절, 대니 보일은 켄 로치의 시대는 갔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대처 시절, 영국에서 양심의 소리 역할을 해온 그 감독에겐 자기들을 설득하거나, 사로잡을 어휘나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대니 보일에게서 형식주의자, 스타일만 번쩍거리는 스타일리스트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한 나라안에서도 지역차이를 고스란히 빈부격차로 떠안은 스코틀랜드의 젊은이들의 끝모를 방황과 추락을 재현하는 그 영화에 매력을 느낀 축에 들었다. 어디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출입하는 화장실의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 따위의 낙서, 뜻없는 질주에서도 쾌락을 낚지 못한 채 황량한 하늘을 이고 이곳은 스코틀랜드(어쩔 수 없는, 저주받은 땅)라던 이들의 자조에 가끔씩 감전되곤 했다. 켄 로치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저 사람이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런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할리우드로 이적한 뒤, 완전히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선 인간에 대한 애정, 정의에 대한 열정이라는 `구시대'의 아직도 값진 유산을 재생해낼 의지가 읽히지 않았다. 그가 문제삼았던 건 켄 로치의 발언방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는 오해가 생긴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먹히지 않아. 소외된 이웃, 분단문제, 패배한 사람들, 환경, 구원…, 부지불식간에 기피목록에 오른 말들인데, 텔레비전은 그것보다 상품성 높은 연예프로그램의 편성비율을 늘려간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집들과 가구들은 날로 `세련'되어 간다. 주인공들이 설사 비탄에 빠져 있더라도, 배경은 우아해야한다는 약속이라도 한듯하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오해가 씻겨나가는 순간이 온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런 역할을 하던 지난 해, 영국의 극장을 휩쓸고 딴나라 평단의 호평을 얻은 <빌리 엘리어트>도 비슷한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대처시대 영국 탄광촌의 발레 천재가 춤에 이끌려 성장하는 길을 따르다보면 곳곳에서 사람살이의 여러 측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모범사례로 떠받들리는 대처 시대 노동자들의 삶이 거기 있는데, 가난한 노동자 아들의 성장기는 그 아버지들의 생존을 성공신화의 보조장치로 소비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배울 것'은 대처만이 아니지.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나서, 울고 난 눈이 부끄러워 사람들을 외면하고 거리에 나서며 되뇌었다.

나이, 이제야 실감나네

2000년 마지막 날 진짜 21세기를 앞두고 송구영신, 경건한 마음으로 제야의 종소리나 들을까 해서 조신하게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아직 10여분 남았기에 소파에 누웠다가 거실도 춥고 해서 침대 패드를 끌어다 덮었다. 거기까지 기억나는데 눈을 떠보니 새벽 5시였다. 상상해보라. 나름대로 새해엔 각오도 새롭게 하고 거듭 참사람으로(?) 태어나고자 결의도 다져보려고 했는데 결의와 각오는커녕 잠이 덜 깬 후줄그레한 몰골과 어깨쪽으로 느껴지는 한기에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한바탕 재채기로 나의 21세기는 시작되었다. 새해 벽두부터 희망찬 얘기는 고사하고 이렇게 궁상맞은 얘기로 시작해야 하는 내 마음도 아프기 그지없지만 남자가 혼자서 나이먹어가는 풍경이 그렇게 썩 아름답지 않다는 걸 밝혀둔다. 그 당시 심정이 어떠했냐면 고등학교 때 모처럼 맞는 일요일, 한번 마음잡고 놀아보려고 부푼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을 청했다가 거의 해가 저물 때쯤 일어났을 때의 그런 막막한 기분과 똑같았다. 게다가 집에 식구도 없고 밥도 없을 땐 정말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어제랑 별다르지 않은 오늘인데도 인간들이 편의적으로 만든 시간의 단위에 휘둘리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깜빡 잠든 사이에 한살을 더 먹어버렸다. 제기랄!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것일까? 마지막 라운드 종이 울리기 전에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복싱선수의 마지막 라운드로 향하는 느낌과 비슷할까? 챔피언 인생보다는 인생 자체를 도전자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렇겠지만 21세기 첫날을 맞은 형언하기에도 측은한 내 모습이란 도전자의 모습도 아닌 것 같았다. 여태 한번도 나이에 대한 생각을 안 했었다(진짜로). 좀더 정확히 애기하면 25살 이후로 내 나이를 세어 본 적이 없다(아 글쎄, 진짜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최근 들어 가끔씩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버스나 전철에서 빈자리가 났을 때 그건 빈자리가 아니라 아줌마석이라고 생각했다. ‘아줌마석엔 앉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 한 사람 앉을 공간에 다른 아주머니랑 약속이나 한듯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날 때, 어떤 여자분이 병뚜껑이 안 열린다고 나보고 열어달라고 했는데 죽어도 안 열려 황당할 때, 평생,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움직이기 싫어 모든 걸 말로 때울 때, 혼자 살면서 정말 힘든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밥먹는 거라고 말할 때, 관공서나 식당에서 불친절에 대해 꼬장꼬장 따져물을 때, 외국 나가는 기내에서 식사가 나오면 고추장 하나 더 달라고 한 뒤 주머니에 집어넣을 때, 눈앞에 삽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내입에서 “어이구, 저런” 이런 아저씨들이 쓰는 신기한 단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때 등등. 30대 초반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영화를 하고서부터다. 평생 백수로 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일시에 떨쳐버리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게 된 것은 <조용한 가족>이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고서부터가 아니라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에 더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내 가슴을 방망이질할 어떠한 흥분도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다는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늘 판타지를 꿈꾸던 소년이 성인 백수가 되도록 현실에선 판타지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남머시기 기자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판타지는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최소한 절망으로부터의 도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영화 만드는 재미를 붙여가는 것은 아마도 슬슬 나이먹는 재미를 느낀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 류승완은 나이도 어린데 도대체 어디에 기대 에너지를 뽑고 있을까? …이따가 물어봐야지.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