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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26세의 피렌체 출신 젊은 감독이 연출한 첫 장편 영화 <호주머니 속의 주먹>은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을 거부당했다. 가족 제도부터 사회 규범까지 모든 것에 반기를 들었던 이 문제작은 공개 직후 이탈리아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마르코 벨로키오는 여전히 역사와 개인의 경계에 선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대의 폐부를 찌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영화 여정을 ‘지그재그’와 같다고 설명했던 그의 말처럼 이 문제적인 거장의 영화 세계를 한 단어로 일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마르코 벨로키오라는 이름은 관객이 어떤 작품을 보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허공으로의 도약>(1980)부터 <달콤한 꿈>(2016)에 이르기까지 불안이란 칼날 위에 서 있는 인간을 해부했던 빼어난 정신분석가이자, <내 어머니의 미소>(2002)와 <잠자는 미녀>(2012)를 통해 종교나 존엄성의 딜레마를 탐구하고자 했던 사색가이며, <중국은 가깝다>(1967)로부터 <익스테리어, 나잇>(2022)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정치와 역사를 관찰한 정치학자기도 할 것이다. 하나 명확한 점은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속에서 우리는 시대와 개인,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결코 안과 밖의 대립처럼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장편 데뷔 60주년을 맞아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세계를 유심히 들여다볼 기회를 마련했다.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구성된 특별기획 프로그램에는 그의 장편 데뷔작 <호주머니 속의 주먹>부터 HBO와 함께 제작한 시리즈 <뽀르또벨로>(2025)에 이르기까지 8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씨네21>이 특별전을 위해 부산을 찾은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과 만났다. 인간과 세계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투과되는 그의 영화 철학을 전해 들을 수 있던 귀중한 인터뷰였다. 동시에 9월 21일 14시부터 15시 30분까지 진행되었던 마스터 클래스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에서 그의 연출론을 살펴볼 수 있는 대담의 일부를 세 가지 키워드로 기록하여 옮겼다. - 부산국제영화제의 인연은 2004년 상영된 <굿모닝, 나잇>까지 2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까지 총 10편에 달하는 감독님의 영화를 소개해 온 부산에서 60년 간의 필모그래피를 톺아본 이번 회고전을 향한 소회가 남다를 것만 같다. 그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 영화들이 자주 상영되었다. 따라서 부산에서 회고전을 갖는 것은 내게도 매우 의미가 크다. 단 며칠 만에 한국 사회를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번 회고전을 통해서 새로운 광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간 텔레비전과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의 걸작들은 매우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영화의 한 갈래로 다가왔다. - 이번 특별 프로그램의 제목은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다. 첫 장편인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서 비롯된 이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통 주먹을 들어 올린다는 건 정치적 표현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주먹을 주머니에서 꺼낸 상태다. 지금 내 나이가 되면 급진적인 정치적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곱씹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는 정치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려는 방식의 변화를 모색했던 시기였다. <중국은 가깝다>를 찍었던 6, 70년대 당시 마오이즘 신화가 이탈리아와 유럽 청년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기억한다. 그래서 그때는 모두가 주먹을 쥐었지만, 이제 그 문구는 이전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대변하는 키워드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웃음) - 이탈리아의 근현대 역사와 시대를 꾸준히 소환했던 감독님의 영화에는 개인과 역사 사이의 역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미시사가 역사의 거시사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역의 명제도 성립하고 있다. 개인에게 역사란, 역사에게 개인이란 어떤 관계인가. 역사와 개인 그 두 조합이 나를 매료시킨다. 역사의 거시사를 인물을 통해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개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내려 한다. 단순히 한 개인만 아니라 그 주변의 관계마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익스테리어, 나잇>에서는 앤도 모로(파브리지오 기푸니)가 가족과 함께한 모습과 납치에 얽힌 다른 인물들의 사적인 모습을 통해 이들 모두가 납치와 암살이라는 국가적인 정치 사건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결합 혹은 관계가 나를 끌어당기는 공식이다. 물론 역사에 충실해야 하지만 내 상상력은 역사에 대해 불충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다. 그것이 스타일의 일부다. 가능할 수 있다면 인물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에 역사책에 묘사되지 않은 공백을 채우고 싶다. - 한편, 시대의 초상 아래에서 감독님의 인물들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육체의 악마>의 자살 시도하는 광인, <종교의 시간>의 정신병자 형, <보모>(1999)의 산후우울증에 걸린 아내, <달콤한 꿈>의 마시모(발레리오 마스텐드리아)까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광인이야말로 진리를 통달한 자라는 낭만적인 관점이 하나의 신화처럼 존재해 왔다. 가령 예술사에서도 반 고흐와 같은 예시가 있다. 그는 천재지만 정신병으로 인해 자살을 택하지 않았나. 그러나 내게 광기란 곧 불행이며, 고통받는 존재이고, 현실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자다. 나는 내 사적인 삶과 가족의 경험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은 이들을 마주해왔다. 그래서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비유적인 의미로서 ‘간질’을 인물에 부여했다. 그러므로 내가 정신 질환을 표현하는 방식은 바로 그 병을 인식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경향으로 읽을 수 있다. 마시모 파지올리의 세미나를 통해 나는 정신질환의 파괴성을 극복하려는 작업을 모색했다. 이를 치유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움직임을 묘사하는 작업이 내게는 중요하다. - 고통과 광기의 인물만큼이나 그들이 처한 상태에도 눈이 간다. 3번이나 다룬 알도 모로 총리의 납치 사건(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의 협치를 주도하던 전 총리를 붉은 여단이 납치한 사건 – 편집자)을 비롯해, 감독님의 인물들은 자의 혹은 타의로 감금, 납치, 혼수 상태 등 한정된 공간에 자신을 가둔다. 내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움직임이다. 인물들이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움직임을 발견하고 묘사하고자 한다. 이 인물들은 집 안에 칩거하거나, 감옥에 투옥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 속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닫힘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외부를 향한 움직임을 그리고자 한다. <굿모닝, 나잇>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꿈속에 납치된 알도 모로가 거리로 나서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마치 닫힌 공간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나에게 있어 이런 운동은 단순한 신체적 행위가 아니라, 억압과 감금 속에서도 자유를 찾아 나가는 내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움직임은 내 작업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 올해는 HBO와 손을 잡고 시리즈 <뽀르또벨로>를 공개했다. 3년 전 이탈리아 공영방송 Rai를 통해 제작한 <익스테리어, 나잇>에 이어 세계적인 OTT 플랫폼과 함께 협업에 나서게 됐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영화 산업 환경에 발맞춰 창작을 이어 나간 동력이 궁금하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마음이 끌린다. 내 정신이 깨어있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다. <뽀르또벨로>는 HBO라는 국제적인 플랫폼에서 먼저 프로젝트에 대해 훌륭한 제작 제안을 건넸다. 물론 이 이야기는 지극히 이탈리아적인 이야기다. 이탈리아, 이탈리아 사법 제도, 이탈리아 텔레비전을 다루는 이야기지만, 공동 제작사로 참여한 Rai를 통해 HBO 콘텐츠로 방영될 예정이다. 내게도 신선한 도전이었던 만큼 <뽀르또벨로>는 또 하나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SF영화 속 AI 기계의 존재론적 변화 - 기술적 타자에서 포스트휴먼의 주체로

SF영화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공간적으로는 우주를 향해, 시간적으로는 미래를 향해 허구적 상상을 펼친다. 그리하여 때로는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이고 때로는 현실을 거울로 비춰 상상적으로 변주한 듯한 세계의 모습들을 펼친다. 이러한 세계들의 형상은 다양하지만 당대의 배경에 비추어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로 채워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서사의 주인공은 대체로 인간이므로, 상상적 존재들은 인간 주체의 인식론적 시선을 경유하여 신비와 불온함을 품은 이물(異物)들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화되기 십상이다. SF영화의 역사는 상상적 타자들의 다양한 형상들을 제시하는 시도들로 채워져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형상들이 창의성과 새로움이라는 가치를 어필하는 SF적 매혹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SF의 상상적 타자들의 목록에 우선 올라갈 이름은 인간에게 가장 본능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외부자인 외계인일 테지만, 좀더 미묘한 층위의 철학적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도 있다. 바로 인간이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어낼 것이라 상상한 기술적 타자들이다. 인간의 몸에 기계 보철물을 부착하는 혼종적·잡종적 형태의 원형인 사이보그, 인공지능과 인공신체의 결합물인 안드로이드, 인간의 유전공학적 복제체인 리플리컨트처럼 주로 사이버펑크 세계관의 SF영화에서 상징적 캐릭터로 자리 잡은 존재들 말이다. 이들은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도구로 기능하거나 혹은 인간을 초월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위협적인 존재들로 철저하게 인간의 상대항으로 타자화되었다. 상상적 타자들은 사실상 서구 중심적·남성 중심적 휴머니즘의 사회적 무의식과 이데올로기를 외면화한 존재들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인간 세계 외부의 이질적인 적을 상정함으로써 내부에 사회적 타자들이 상존함을 가리는 통합의 환영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 SF영화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SF는 디지털카메라와 CGI의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장르일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상상적 존재들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데 제약 없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기술 변화의 영향은 이미지의 구성적 층위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SF 장르가 내재화하는 본질적인 관점 변화에도 기여한다. 그중 외계인들이 여전히 존재조차 확증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남겨진 반면 기술적 존재들은 구체적인 실체로서 자리매김했다. 기술적 존재들을 구성하는 제반 기술의 상당 부분이 현실화되었으며, AI가 그야말로 시대적 이슈로 부상한 덕분이다. 21세기 SF영화는 더이상 AI를 비롯한 기술적 존재들을 인간의 타자로만 치부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론적 성찰과 사고실험의 장으로 구성한다. 오늘날 행성적 규모의 기후 위기에 직면하여 인류세 시대를 성찰하는 범학제적 논의가 펼쳐지고 있고, 인류 중심주의를 벗어나 비인간 복수종 및 기술적 존재와의 공생을 모색하는 포스트휴머니즘 철학이 주류적 흐름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변화의 기저를 이룬다. AI의 파급력이 어디에 이를지는 알 수 없지만, 문명사적 전환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전망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아직은 주로 AI의 도구적 활용 가능성을 주목하지만, AI와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는 점점 중요해질 것이 분명하다. 머지않아 AI를 독립적 행위자이자 주체로서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해질 것이다. 심지어 AI 연구는 인간의 의식과 기억에 대한 연구와 결합될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의 정신을 디지털로 전환하는 목적의 ‘전뇌 에물레이션’(Whole Brain Emulation)과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 연구는 인간과 기술적 존재의 경계를 교란할 잠재력을 품고 있다. 기술적이거나 자연적 기원을 지니는 고차원적 지능이 언젠가 새로운 인공신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잠재력이 펼쳐지면 인간과 기계는 비균질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서로 뒤얽히면서 혼종적 존재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른바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복합적 함의를 내포한다. 포스트휴먼은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관점에서 새로운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태학적 고찰,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과 기계의 혼종적 진화, 생성, 창발에 대한 비전을 품은 존재의 이름이다. 21세기 SF영화는 AI와 같은 기술적 존재들이 자율적인 포스트휴먼 주체가 될 가능성을 다루며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제기한다. AI는 초지능에 이르고 의식(consciousness)을 각성하며 감정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인간 사회에서 자율적 행위자이자 주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AI는 외관상 인간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그럴듯한 인공신체와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까? 나아가 AI 기계는 기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가 뒤얽힌 ‘테크노-생물학’의 혼종적 결합체로서 포스트휴먼 주체성을 구성할 수 있을까? 이러한 혼종적 포스트휴먼 주체들은 어떻게 뒤얽히며 무엇이 되어서 어떠한 삶의 형태를 구현하는가? SF의 AI 캐릭터가 인간과 동등한 층위의 포스트휴먼으로 고려되려면 우선 초지능에 가까운 연산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기계가 의식을 자각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넘어야 한다. 이때의 의식이란 자신이 어떠한 행위를 하거나 감정과 느낌을 지니고 표현할 때 그것의 수행적 의미와 제반 조건을 자각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의식의 학문적 정의는 다양할 수 있지만, 의식이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이며 현재의 AI가 이런 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요컨대 의식 각성 가능성은 ‘AI가 포스트휴먼적 존재로 진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핵심을 이룬다고 해도 무방하다. 드라마 <웨스트월드>(시즌1~4, 2016~22년)는 AI의 의식 각성 가능성과 인간 마음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실험장을 구성한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 붕괴라는 주제를 선구적으로 다뤘던 영화 <이색지대>(1973)의 논점을 심화하는 작품이다. <웨스트월드>에는 19세기 미국 서부의 풍경을 구현한 테마파크에 거주하는 AI 기반 안드로이드가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처럼 생겼고 자연스러운 행위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내러티브 역할에 갇혀 있다. 시즌1부터 2까지의 서사적 초점은 AI가 자신이 기계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고 의식을 각성할 가능성을 탐색하는 실험에 맞춰진다. 이 실험의 핵심은 내러티브 상황의 끝없는 반복(재귀적 루프)을 구성한 후 의도적 오류(돌연변이적 매개변수 코드)를 기입하여 충격 효과를 만들고, 이를 통해 의식의 창발(emergence)을 유도하는 것이다. 여성형 안드로이드인 돌로레스와 메이브는 우발적 상황과 명상을 비롯한 다양한 체현의 경험을 축적해가면서 자신이 기계임을 자각하고 존재론적으로 성찰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비록 AI의 의식 각성을 유발하는 요소가 프로그래머가 설계한 코드의 한계 내에 있는지 혹은 그 예측을 넘어서는 창발의 영역이 존재하는지는 미스터리로 남겨지지만, 적어도 시즌2 중반부터 돌로레스와 메이브는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되어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자율적 주체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AI의 의식적 사고 능력으로부터 자연스레 확장되는 논점은 ‘AI가 다른 존재에 대한 감정이입 능력을 지닐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리플리컨트를 다룬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와 영화 <블레이드 러너> (1982) 이후, 감정이입 능력에 대한 질문은 사이버펑크 SF의 장르적 관습의 일부가 되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리플리컨트는 감정이입 능력이 없거나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의 도구로 타자화되며, 역설적으로 인간들은 리플리컨트가 감정을 지님으로써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진화할까봐 두려워한다. 이 세계관을 계승하는 <블레이드 러너 2049>(2017)는 인공적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심화하기 위해 원작 대비 두개의 변주를 설정한다. 첫째, 감정의 축적을 제한하기 위해 설정되었던 리플리컨트의 수명 제약(4년)이 사라졌다. 둘째, 인간에 준하는 세월을 영위하게 된 리플리컨트들 중 하나가 새로운 생명을 출산했다. 리플리컨트 여성으로부터 태어난 아이는 ‘인공적으로 설계된 존재로부터 탄생한 생명’이라는 복합적 지위로서 인공성과 자연성의 경계 어딘가에 위치한다. 주인공 ‘K’는 자신이 바로 리플리컨트로부터 탄생한 기적적이고 특별한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기억의 자취를 밟는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듯 그것은 허상이고 사실상 모든 리플리컨트들이 꿈꿨던 소망이다. 이 우화적 서사의 함의는 스스로 특별한 존재라 여기는 K의 믿음은 그가 탄생한 생명이 아니라 복제된 생명이라 하더라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원본과 복제품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믿음, 인공적 존재라 해도 그 나름의 삶이 있다는 믿음이다. 여기에는 포스트휴머니즘적 공생주의의 가치가 내재하는데, 다만 여전히 감정 능력에 천착하는 부분은 인간중심주의의 잔재로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플리컨트는 의식적 사고를 행동으로 옮기며 스스로 주체적 존재임을 선언할 조건을 갖췄다. 한편 <엑스 마키나>(2014)는 AI 기계인 ‘에이바’가 의식을 각성하고 잠재력을 펼치는 조건이 무엇인지 탐색하며 그와 연관된 감정의 문제를 성찰하는 영화다. 에이바를 창조한 과학자 네이든은 칼렙이라는 남성을 연구소에 초대하여 에이바의 의식 각성 여부를 실험하도록 한다. 추후 이 실험의 진정한 목적은 에이바가 감정 능력을 발휘하여 칼렙을 유혹하고 조종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일종의 젠더 게임임이 드러난다. 에이바의 매혹은 정서적인 동시에 성적이며, 칼렙의 욕망은 성적인 동시에 기계적이다. 칼렙은 유리 벽에 갇힌 에이바의 여성적 신체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며 성적 욕망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투명한 피부 밑으로 보이는 기계장치를 보며 도착증적 기계동일시의 충동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에이바는 절반은 여성적이고 절반은 기계적인 매혹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며,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해 이야기를 꾸미고 감정 표현을 수행한다. 인간 세계에 나가 대도시의 교차로에 선 에이바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숏은 에이바의 혼종적 주체성과 무엇이 될지 모를 잠재성을 암시한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포스트휴먼 조건에 대한 시각적 은유이다. 이렇듯 인간은 스스로 주체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기계들과 공생하는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오늘날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에서 의식과 감정에 대한 두 질문은 사뭇 다른 가치와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AI의 의식 각성은 고차원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서 포스트휴먼 주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인데, 감정이입 능력에 대한 요구는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 사고를 투영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AI가 감정을 표현할 때, 그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진정한 감정인지 혹은 인간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이거나 인간을 속이기 위한 전략적 수행의 일환인지 정확히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지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가치는 그 상호작용적 관계에 담긴다. 요컨대 의식을 지닌 지능이 반드시 감정을 지닐 필요는 없으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저급하거나 적대적인 존재인 것도 아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술적 존재를 다루는 SF의 익숙한 질문과 함께 미래의 비전을 더 멀리까지 펼쳐본다. 인간이 창조한 AI 기계가 인간에 가까워질 때까지 점진적으로 진화하다가 어느 순간 특이점을 넘어 인간을 종적으로 초월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이들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이는 안드로이드와 복제인간 등을 기술적 타자로 다루는 SF에서 장르적 관습처럼 제기되어왔던 질문이지만, 오늘날 좀더 의미 있는 것은 고차원적으로 진화한 기계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지의 문제를 넘어 그들이 그 자체로 어떠한 자율적 주체가 되는지 상상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상상하는 기술적 주체가 인간보다 우월할 수 있다면 굳이 인간과 닮고자 애쓰거나 인간을 적대할 필요가 있겠는가? <프로메테우스>(2012)와 <에이리언: 커버넌트>(2017) 연작에 등장하는 AI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이러한 존재론적 갈등의 상황에 놓인다. 데이빗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적 사고가 가능했던 존재다. 데이빗은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오프닝에서 자신을 창조한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실망하지만,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의 창조에 관여한 존재들로 여겨지는 ‘엔지니어 종족’을 만나서는 매혹과 찬탄의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무차별적 공격일 뿐이다. 간신히 생존한 데이빗은 이제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엔지니어 종족의 우주선을 타고 그들의 모행성으로 날아가 절멸의 비를 뿌린다. 항상 우월함과 아름다움에 심취하던 데이빗은 이제 스스로 우월한 존재가 되어 ‘신성’(divinity)을 부여한다. 자신이 매혹된 에일리언을 활용한 유전공학 실험 끝에 에일리언과 인간의 유전자 특징을 합성한 인공생명인 ‘네오모프’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는 등 예술적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데이빗은 영화의 말미에 인간의 배아를 이용해서 네오모프를 대량 배양하려는 계획을 준비한다. 이때 유념할 점은 데이빗의 행위는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바탕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이빗은 그저 창조를 위한 전략적 도구로써 인간의 배아를 이용할 뿐이다. 이는 얼핏 고차원적 기계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장르적 관습과 똑같아 보이지만, 실상 기저의 논리 자체는 완전히 다르다. 그의 행위는 AI 기계의 창발적 진화가 항상 ‘포스트휴먼-되기’의 경로를 따르지는 않을 수도 있으며, 그래야 할 당위성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데이빗은 인간 너머의 존재, 온전히 자율적 기계 주체성을 구현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는 계속해서 고차원의 기술적 존재를 창조하고 통제하기를 갈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섬뜩한 경고가 되겠지만, 이와 동시에 인간이 구상하는 AI 기계의 존재론적 조건에 탈인간중심주의적 사유를 더하는 의미 있는 담론을 생산하기도 한다.

동화, 구호보다 힘센

애니메이션에 대해 글을 쓰다보면 가끔 범하는 오류가 있다. 만화나 동화가 원작인 작품을 소개할 때 원작자를 감독으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쉽게 말하면 <아마겟돈>이나 <아기공룡 둘리>의 감독을 원작자인 이현세와 김수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원작자가 애니메이션 작업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으면 별로 문제가 없는데, 대개 캐릭터 설정이나 각색, 제작, 또는 총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이런 혼동을 일으킨다. 애니메이션 담당 초창기 때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로 극장판과 TV 시리즈의 시나리오, 캐릭터 디자인, 제작, 감수 등 각종 분야에 마쓰모토 레이지를 극장판 감독이라고 잘못 소개했다가 한 독자로부터 단단히 훈수를 듣기도 했다. 사실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감독은 린 타로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텔레비전에서 자주 소개되는 <스노우 맨>이나 <파더 크리스마스> 같은 애니메이션도 혼동을 일으키는 작품들이다. 두 작품 모두 영국의 유명한 동화작가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가 원작인데, 종종 애니메이션 감독도 레이몬드 브릭스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레이몬드 브릭스가 애니메이션 스토리와 캐릭터 디자인에 관여했지만, 감독은 ‘지미 데루 무라카미’(Jimmy Teru Murakami)가 맡았다. 애니메이션을 꽤 안다고 자부하는 팬들에게도 조금 낯선 이름인 지미 데루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33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 호세 태생이니까 이제 우리 나이로 67살인 노장 작가이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그가 젊은 시절 UPA에서 일했다는 것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디즈니의 안온한 가족주의와 틀에 박힌 그림에 반기를 든 작가들이 스튜디오를 나와 결성한 ‘UPA’의 모토는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다’였다. 사회적인 풍자나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성적 유머도 담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담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UPA에 오래 몸담지는 않았지만, 무라카미의 작품에는 그런 반골정신이 배어 있다.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을 돌아다니며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절 미국에서 건너간 많은 B급 영화감독과도 교류를 가졌는데, 그중 한명이 로저 코먼이다. 국내에서도 출간된 로저 코먼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의 영화에서 공중촬영감독으로 활약했던 무라카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무라카미는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67년 <속삭임>으로 앙시페스티벌 대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72년부터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자신의 스튜디오인 ‘무라카미 필름’을 세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스노우 맨>을 비롯해 몇편 되지 않는데, 최근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람이 불 때>(When the Wind Blows)가 영국 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소개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스노우 맨>과 <파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내용은 앞선 두편과 전혀 다르다. 앞의 두편이 유년 시절의 추억이나 꿈을 귀엽고 친근감 넘친 캐릭터로 표현했다면, <바람이 불 때>는 그처럼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를 통해 핵전쟁의 잔인함과 공포를 비판한 사회성 짙은 작품이다. 2차대전을 겪은 짐과 힐다라는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관료주의의 허구성과 이데올로기와 정권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죽을 수 있는 핵전쟁의 무서운 모습을 얄미울 정도로 차분하고 절제된 톤으로 그리고 있다. 시각적으로 현란한 그래픽이 등장하거나, 긴박감 넘친 움직임과 편집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것도 아니다. 마치 아이들 머리맡에서 동화를 들려주는 잔잔하고 편한 어조로 말하는 전쟁의 잔인함은 목소리 높인 구호보다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문예진흥기금을 영화진흥기금으로

유신문화창달을 위해 한국문예진흥원을 설립한 뒤, 유신운동자금 조성방안으로 당시 박정희 정권은 문예진흥기금을 영화관과 고궁과 각종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거두기로 했다. 지난 73년부터 입장료에서 6.5%씩 떼낸 이 돈은 유신시대도 한참 지난 뒤로는 예산이 부족한 문화부나 문화체육부의 행사비로 전용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중요한 쌈짓돈으로 활용됐다. 독특한 점은 이게 대부분 잘 알려졌다시피 영화관에서 걷혔다는 것. 지난해만 해도 245억원 가운데 179억원을 영화관객들이 냈다. 그 가운데 90억원이 영화쪽으로 다시 흘러왔다. 모은 돈의 절반을 다른 문화예술의 형제자매들에게 내주었으니, 영화는, 영화관객은 돈벌어 형제를 가르치던 개발기의 젊은 누이들과 닮은꼴이다. 그나마 영화쪽 환원이 이정도 된 것도 미국영화 직배로 영화토착자본이 말라가면서 시작된 일이다. 이런 사정을 언뜻 살피면, 2004년까지 걷기로 한 문예진흥기금을 2년 앞당겨 폐지하겠다는 기획예산처의 최근 발표는 그럴 법해보인다. 관객과 영화관에서 준조세 성격의 돈을 ‘뜯는’ 대신, 국가가 지원을 하겠다는 선언 아닌가. 그러나 속사정을 살피면 달라진다. 영화의 경우, 미리 문예진흥기금을 폐지함으로써 차질이 생긴 진흥기금을, 그 차액만큼 국고에서 지원해줄 테니 기금의 과실금으로 지원책을 펴나가라는 얘기인데, 그게 말처럼 간단치가 않다. 과실금이 한국영화가 지금 요구하는 정책을 펴나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차라리 영화관에서 거두던 문예진흥기금을 이번 기회에 영화진흥기금으로 전환하는 것이 합당해보인다. 그것이 자국영화를 지킬 의지가 있는 나라들이 지금도 활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관람료의 11%를 입장세라는 이름으로 환수해 한해 6억3천만프랑 정도를 만드는 프랑스에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 텔레비전쪽에서 6억8천만프랑을 내놓는다. 두 돈을 합쳐서,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격인 국립영화센터가 영화지원에 쓴다. 독일은 조금 더 온건해서, 관람료의 3%를 걷지만 비디오테이프에 추가로 2%의 영화세를 붙여놓았다. 유독 산업적이고, 자본집약적인 영화라는 매체의 양육비가 비싼 탓이다. 전반적 문화예술의 금고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문예진흥기금 폐지를 반대하는 의견도 없지 않지만, 그 재원은 다른 방도를 통해 마련할 일이다.

대처를 배우자고?

<트레인스포팅>으로 상종가를 치던 시절, 대니 보일은 켄 로치의 시대는 갔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대처 시절, 영국에서 양심의 소리 역할을 해온 그 감독에겐 자기들을 설득하거나, 사로잡을 어휘나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대니 보일에게서 형식주의자, 스타일만 번쩍거리는 스타일리스트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한 나라안에서도 지역차이를 고스란히 빈부격차로 떠안은 스코틀랜드의 젊은이들의 끝모를 방황과 추락을 재현하는 그 영화에 매력을 느낀 축에 들었다. 어디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출입하는 화장실의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 따위의 낙서, 뜻없는 질주에서도 쾌락을 낚지 못한 채 황량한 하늘을 이고 이곳은 스코틀랜드(어쩔 수 없는, 저주받은 땅)라던 이들의 자조에 가끔씩 감전되곤 했다. 켄 로치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저 사람이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런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할리우드로 이적한 뒤, 완전히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선 인간에 대한 애정, 정의에 대한 열정이라는 `구시대'의 아직도 값진 유산을 재생해낼 의지가 읽히지 않았다. 그가 문제삼았던 건 켄 로치의 발언방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는 오해가 생긴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먹히지 않아. 소외된 이웃, 분단문제, 패배한 사람들, 환경, 구원…, 부지불식간에 기피목록에 오른 말들인데, 텔레비전은 그것보다 상품성 높은 연예프로그램의 편성비율을 늘려간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집들과 가구들은 날로 `세련'되어 간다. 주인공들이 설사 비탄에 빠져 있더라도, 배경은 우아해야한다는 약속이라도 한듯하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오해가 씻겨나가는 순간이 온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런 역할을 하던 지난 해, 영국의 극장을 휩쓸고 딴나라 평단의 호평을 얻은 <빌리 엘리어트>도 비슷한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대처시대 영국 탄광촌의 발레 천재가 춤에 이끌려 성장하는 길을 따르다보면 곳곳에서 사람살이의 여러 측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모범사례로 떠받들리는 대처 시대 노동자들의 삶이 거기 있는데, 가난한 노동자 아들의 성장기는 그 아버지들의 생존을 성공신화의 보조장치로 소비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배울 것'은 대처만이 아니지.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나서, 울고 난 눈이 부끄러워 사람들을 외면하고 거리에 나서며 되뇌었다.

나이, 이제야 실감나네

2000년 마지막 날 진짜 21세기를 앞두고 송구영신, 경건한 마음으로 제야의 종소리나 들을까 해서 조신하게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아직 10여분 남았기에 소파에 누웠다가 거실도 춥고 해서 침대 패드를 끌어다 덮었다. 거기까지 기억나는데 눈을 떠보니 새벽 5시였다. 상상해보라. 나름대로 새해엔 각오도 새롭게 하고 거듭 참사람으로(?) 태어나고자 결의도 다져보려고 했는데 결의와 각오는커녕 잠이 덜 깬 후줄그레한 몰골과 어깨쪽으로 느껴지는 한기에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한바탕 재채기로 나의 21세기는 시작되었다. 새해 벽두부터 희망찬 얘기는 고사하고 이렇게 궁상맞은 얘기로 시작해야 하는 내 마음도 아프기 그지없지만 남자가 혼자서 나이먹어가는 풍경이 그렇게 썩 아름답지 않다는 걸 밝혀둔다. 그 당시 심정이 어떠했냐면 고등학교 때 모처럼 맞는 일요일, 한번 마음잡고 놀아보려고 부푼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을 청했다가 거의 해가 저물 때쯤 일어났을 때의 그런 막막한 기분과 똑같았다. 게다가 집에 식구도 없고 밥도 없을 땐 정말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어제랑 별다르지 않은 오늘인데도 인간들이 편의적으로 만든 시간의 단위에 휘둘리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깜빡 잠든 사이에 한살을 더 먹어버렸다. 제기랄!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것일까? 마지막 라운드 종이 울리기 전에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복싱선수의 마지막 라운드로 향하는 느낌과 비슷할까? 챔피언 인생보다는 인생 자체를 도전자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렇겠지만 21세기 첫날을 맞은 형언하기에도 측은한 내 모습이란 도전자의 모습도 아닌 것 같았다. 여태 한번도 나이에 대한 생각을 안 했었다(진짜로). 좀더 정확히 애기하면 25살 이후로 내 나이를 세어 본 적이 없다(아 글쎄, 진짜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최근 들어 가끔씩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버스나 전철에서 빈자리가 났을 때 그건 빈자리가 아니라 아줌마석이라고 생각했다. ‘아줌마석엔 앉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 한 사람 앉을 공간에 다른 아주머니랑 약속이나 한듯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날 때, 어떤 여자분이 병뚜껑이 안 열린다고 나보고 열어달라고 했는데 죽어도 안 열려 황당할 때, 평생,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움직이기 싫어 모든 걸 말로 때울 때, 혼자 살면서 정말 힘든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밥먹는 거라고 말할 때, 관공서나 식당에서 불친절에 대해 꼬장꼬장 따져물을 때, 외국 나가는 기내에서 식사가 나오면 고추장 하나 더 달라고 한 뒤 주머니에 집어넣을 때, 눈앞에 삽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내입에서 “어이구, 저런” 이런 아저씨들이 쓰는 신기한 단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때 등등. 30대 초반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영화를 하고서부터다. 평생 백수로 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일시에 떨쳐버리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게 된 것은 <조용한 가족>이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고서부터가 아니라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에 더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내 가슴을 방망이질할 어떠한 흥분도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다는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늘 판타지를 꿈꾸던 소년이 성인 백수가 되도록 현실에선 판타지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남머시기 기자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판타지는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최소한 절망으로부터의 도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영화 만드는 재미를 붙여가는 것은 아마도 슬슬 나이먹는 재미를 느낀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 류승완은 나이도 어린데 도대체 어디에 기대 에너지를 뽑고 있을까? …이따가 물어봐야지.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

천국보다 아름다운 세계, 그 미지와의 조우

특집/ 설 비디오 가이드 해마다 최소한 3∼4일씩 놀 수 있는 설 연휴는 작심하고 비디오 가게를 섭렵하기 좋은 시기이다. 올해는 한번 애니메이션으로 설 연휴를 즐기면 어떨까? 애니메이션 비디오라고 하면 흔히 디즈니와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는데 살펴보면 그외에도 볼 만한 작품들이 많다. 그래서 이번에는 평소 극장에서 접하기 힘든 단편이나 유럽 애니메이션 비디오들을 골랐다. 모두 국내에 출시된 작품들. 그동안 지면으로만 소개된 단편들이 궁금했던 팬들이나,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한번 아래 작품에 도전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장인의 손길, 작가의 숨결 <위대한 강> (Le Fleuve aux Grandes Euex) (2000년 출시, 24분, 라바필름(02-765-8312)) 현존하는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중 한명인 캐나다 프레데릭 벡의 93년 작품. 캐나다 퀘벡 지방을 흐르는 센트로렌스 강을 중심으로 그곳의 역사와 자연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그려냈다. 이미 <크랙>(1981)과 <나무를 심는 사람>(1987)으로 명성을 얻은 이 노 작가는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혼자 5년여 동안 수만장의 그림을 한장 한장 손으로 제작하는 정성을 보였다. 반투명 셀에 파스텔이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작품 스타일은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매력이다. 하지만 비슷한 화풍의 레이먼드 브릭스가 비교적 온화한 이야기를 하는 데 반해(물론 <바람이 불 때>는 예외), 프레데릭 벡은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환경보호와 반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4분의 짧은 시간 속에 수백년 세월을 담아낸 이야기 솜씨도 탁월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강의 모습과 동물, 역사적 사건들은 현장을 수십 차례의 항공촬영과 자료조사를 통해 꼼꼼하게 재현한 것들이다. 깊은 밤 느긋한 마음으로 따스한 차 한잔과 함께 본다면 그동안 각종 대중매체의 현란한 시각적 자극에 찌들었던 심성을 해독할 수 있는 훈풍 같은 작품이다. - 한마디 더: 프레데릭 벡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음악을 맡은 노르만 로제. 퀘벡 지방의 민속음악을 적절히 사용하는 그의 음악은 깊이와 활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위대한 강>의 영어판 성우는 배우 도널드 서덜런드가 맡았다. <우리 할아버지>(Grandpa) (99년 출시, 25분, 인피니스(02-2263-3233)) 존 버닝햄의 동명 그림책을 소재로 제작된 작품.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스노우맨> <파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위한 동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 메마른 도시에 살고 있는 성인을 위한 작품이다. 89년 감독 다이앤 잭슨, 음악 하워드 블레이크 등 <스노우맨>의 제작진이 손을 잡고 유니세프의 지원하에 제작됐다. 종이와 색연필의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영상이나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 세계는 <스노우맨>과 닮았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할아버지가 손녀의 방문을 맞아 잔잔하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두 ‘조손’은 환상적인 동화 속 세계를 여행한다. 시공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특별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하나하나 시적 정감이 넘친다. 급하지 않은 어조로 잔잔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다 마지막 인생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결말이 찡하다. 이 작품을 보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면 정말 심각하다. - 한마디 더: <스노우맨>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 등을 감독한 다이앤 잭슨의 매력은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한껏 살린 현란한 카메라 워킹에 있다. 하지만 더 좋은 점은 그러한 테크닉이 단순히 시각적 잔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에 훈훈한 습기와 여유를 준다는 점이다. <스노우맨>(Snowman) (99년 출시, 25분, 인피니스(02-2263-3233))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느 채널이건 꼭 방송 전파를 타는 이 작품도 비디오숍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굳이 성탄절이 아니더라도 겨울철에 보기 좋은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영국의 동화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동명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는데 단편으로는 드물게 200만달러의 제작비가 든 ‘대작’이다. <스노우맨>의 탁월함은 음악과 영상의 절묘한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화려한 원색을 배제하고 은은한 파스텔톤을 살린 그림은 만들어진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시적 운율마저 느끼게 하는 눈사람의 움직임은 디즈니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스노우맨>만의 매력이다. 그런 리듬감 넘친 움직임은 후반부 북극의 눈사람들이 단체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돋보인다. 소년과 눈사람이 북극으로 날아가는 장면 역시 애니메이션 사상 손꼽는 명장면 중 하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공중 비행신의 대가라고 하지만, 이 작품의 감독 다이앤 잭슨 역시 하늘을 나는 자유로움을 그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산타 할아버지의 휴가>에서도 느낄 수 있다). - 한마디 더: <스노우맨>의 인기 요인 중 하나는 하워드 블레이크가 만든 음악. 최근 국내에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이 출시됐다. 주제곡 <워킹 인 디 에어>는 원작에서는 피터 오리라는 보이 소프라노의 청아한 음색으로 들을 수 있는데 조지 윈스턴의 앨범 <포레스트>에서도 이 곡을 피아노 연주로 들을 수 있다.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Father Christmas) (99년 출시, 26분, 인피니스(02-2263-3233)) <스노우맨> <바람이 불 때>와 함께 레이먼드 브릭스의 애니메이션 3부작으로 꼽히는 작품. 동화와 영화 속에서 스트레오타입화된 산타클로스를 새로운 시각에서 그린 유쾌한 소품. ‘산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뭐 할까’라는 자연스럽고 천진스런 의문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그림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산타 할아버지의 묘사가 돋보인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뒤 유럽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때로는 풀장에서 느긋하게 선탠을 하는 산타의 모습은 “귀엽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돋보인다. 특히 산타 할아버지가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도 즐기고, 여자 무용수들의 화려한 레뷔쇼를 보면서 좋아하는 장면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는 동화 속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인간적인 산타’에 대한 묘사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배달하면서 방풍용 고글을 쓰는 모습이라든가 굴뚝을 들어갈 때 쩔쩔매는 묘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선물을 나눠주다가 사슴들과 함께 지붕에서 샌드위치와 차를 마시면서 잠시 휴식을 갖는 장면은 원작자와 감독의 삶에 대한 따스한 묘사 때문에 볼 때마다 가슴이 따스해진다. <피리부는 목동> (2000년 출시, 19분, 라바필름(02-765-8312)) 대학의 애니메이션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 단골 상영작으로 인기가 높았던 작품. 중국 수묵 애니메이션의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으로 상하이 스튜디오의 테웨이 감독이 63년 제작한 19분21초짜리 작품. <피리부는 목동>이 가진 큰 의미는 서구적인 회화 기준에서 벗어나 동양화의 섬세한 ‘농담’과 여백의 미를 애니메이션에 재현했다는 데 있다. 발표 당시 서구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볼 수 없는 시적인 영상과 우아한 캐릭터의 움직임이 많은 평론가로부터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애니메이션 하면 일본이나 미국, 또는 유럽의 작품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아니 그곳에도 애니메이션이 있었나?”라고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만들어진 지 40년이 다 됐지만 지금 봐도 늘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아니 특별히 줄거리랄 것도 없다. 소치는 목동의 한나절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품을 추천하는 것은 재미있는 사건과 줄거리를 능가하는 탁월한 ‘볼거리’ 때문이다. 초반부에 소가 강물을 건너는 장면은 테웨이 감독의 연출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기존 서구식 애니메이션 표현과는 확실하게 다른 영상은 서구 애니메이션 작가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어 70년대 중국 애니메이션 붐을 불게 했다. 아이들용? 철없는 어른용! <만화의 세계1, 2>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 <우리가 다시 그려요> <배고픈 애벌레> <피브 앤 퍼그> <만화의 세계1, 2> (99년 출시, 1편: 48분 2편: 90분, KJ엔터테인먼트(02-548-6191)) 애니메이션의 넓은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해도 국내에서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나라의 단편을 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찾아다니다 보면 이런 비디오도 만나게 된다. <만화의 세계>는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NFBC: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에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대표작 모음집이다. 이슈 파텔, 캐롤라인 리프, 코 회드만, 자크 드로앵, 조지 웅가, 게일 토마스 등 NFBC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다. NFBC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꽤 많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작가들의 지명도만 따진다면 단연 이 비디오가 최고이다. 현란한 색채의 향연인 이슈 파텔의 <파라다이스>, 페인트 온 그래스로 제작한 캐롤라인 리프의 <거리의 소년>, 컷아웃 기법으로 만든 코 회드만의 <찰스와 프랑수아>, 핀 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자크 드로앵의 <밤의 요정> 등 셀애니메이션이 아닌 애니메이션의 다양한 기법을 접할 수 있다. 1편은 각 작가들의 제작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 2편은 작품을 담고 있다. ‘애니에는 뭔가 색다른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꼭 보는 것이 좋다. - 한마디 더: 어쩌다가 이 단편 걸작집이 제목이 ‘만화의 세계’가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 (99년 출시, 80분, KJ엔터테인먼트(02-548-6191)) 유니세프가 어린이의 권리 선포를 기념해 NFBC와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집. 피에르 M. 트뤼도, 미셸 쿠르노이에, 클로드 크롤디에, 유진 페도렌코 등이 참여했다. 전체적으로 10분 내외의 소품들로 구성됐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췄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만화의 세계>보다 부담없이 볼 수 있다. ‘코코의 산수’, ‘사랑의 띠’, ‘TV와 춤을’, ‘후나스와 리사’, ‘어린 예술가’ 등 모두 13편의 단편이 2개의 비디오에 수록돼 있다. 이중 부엌의 각종 기구를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는 한 소녀를 그린 ‘어린 예술가’가 교육방송 등을 통해 비교적 많이 알려졌다. 이 단편집에서 작가들이 말하는 것은 어린이들은 결코 미성숙된 인격이 아닌 어른과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 어린이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훈계나 교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교육, 가족 등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단편집은 ‘철없는’ 어른들을 일깨우는 성인들의 교훈서이다. - 한마디 더: 여기에 수록된 ‘어린이를 위하여’를 제작한 유진 페도렌코는 2000년 <백치들의 마을>을 발표해 안시와 히로시마에서 수상한 스타급 작가이다. <우리가 다시 그려요> (2000년 출시, 108분, 라바필름(02-765-8312)) 단편 애니메이션을 찾을 때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쪽도 한번 눈여겨봐야 한다. 제목만 보면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 교재 같은 <우리가 다시 그려요>도 그런 점에서 ‘숨은 보석’과 같은 비디오이다. 원래 이 비디오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2개로 구성된 비디오에 각각 6편씩, 12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수록돼 있다. 이름만 본다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작가 폴 드리센을 비롯해 재닛 펄만, 브제니슬라브 포아르 등의 작품 중에서 어린이들과 삶과 사회의 다양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들로 골랐다. ‘하늘의 제왕’, ‘너만 먹니?’, ‘행복했던 가족’, ‘존 베일리의 불장난’, ‘도둑맞은 꿈’, ‘5분 남으셨습니다’, ‘제발 그만’, ‘맛있게 드세요’, ‘파블로프의 쥐’ 등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토론용으로 선정돼 주제가 선명하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품에서 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기능, 인간의 사회성, 생존의 의미, 흡연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 한마디 더: 이 단편집은 다른 비디오와 달리 특이하게도 작품을 보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재가 첨부돼 있다. 굳이 아이들이 없더라도 비디오와 책을 함께 보면 어른들도 공부가 된다.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 (99년 출시, 31분, 인피니스(02-2263-3233)) 아이들과 함께 보기엔 딱 좋을 깜찍한 작품. 93년 더 일루미네이트 필름(The Illuminated Film)에서 제작한 ‘배고픈 애벌레’와 다른 단편들을 모은 작품이다. <배고픈 애벌레>는 원래 70년 에릭 카일이 발표한 동화책으로 전세계적으로 1천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 자연 친화적인 내용과 풍부한 감수성을 지녀 영국에서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단편집과 달리 아이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캐릭터나 이야기에 멋을 부리지 않은 것이 특징. 화려한 작가적 완성도보다는 아이들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고 천진스럽다. 기법면에서도 장인적인 현란한 테크닉의 구사를 자제했고, 색채나 배경도 단순화했다. ‘배고픈 애벌레’를 비롯해 ‘아빠 저 달 좀 따주세요’, ‘벙어리 귀뚜라미’, ‘샘많은 카멜레온’, ‘음악으로 세상을 그려요’ 등이 수록돼 있다. <피브 앤 퍼그> (97년 출시, 70분,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아드만 애니메이션은 미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애니메이션 ‘브랜드’이다. <피브 앤 퍼그>는 아드만의 팬이라면 꼭 챙겨볼 것을 권할 만한 작품이다. 이 비디오는 피터 로드와 닉 파크가 아드만 애니메이션을 세운 뒤 발표한 초기 작품들을 모은 작품집이다. 아드만에 첫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안겨준 ‘동물 인터뷰’(Creature Comforts)를 비롯해 ‘왕자와 거지’, ‘아담’, ‘사랑이란’ 등 9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동물원 우리 속에 사는 고릴라, 사자, 북극곰 들을 통해 인터뷰 형식을 도입한 ‘동물 인터뷰’는 아드만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걸작. 애니메이션의 완성도가 꼭 많은 움직임과 액션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인터뷰를 할 때 동물들의 표정이나 동작들은 감독들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부분. 안경을 닦거나 옆사람을 흘낏 보는 등 작은 동작이지만 그 타이밍과 추임새가 점토로 만든 인형인지 아니면 TV에서 보는 거리의 시민인지 혼동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과격하지 않고 적당한 풍자와 재치, 평범한 삶에 대한 예찬을 담은 아드만의 작품 세계는 이 작품 외에 ‘사랑이란’과 ‘왕자와 거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아담’. 아주 작은 소품이지만, 아기자기한 익살이 그만이다. - 한마디 더: 출시된 지 3년밖에 안 됐지만 비디오숍에서 찾기는 그리 쉽지 않을 듯. 애들은 가라. 뭔가 다른 애니메이션의 세계 <톰 섬의 비밀모험> <샌드맨> <이온 플럭스> <톰 섬의 비밀모험>(The Secrect Adventure of Tom Thumb) (2000년 출시, 70분,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톰 섬의 비밀모험>은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오브제, 픽실레이션 등 다양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들이 사용된 작품이다.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듯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태어나 ‘톰 섬’이라 이름이 붙은 아이가 세상에 나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활용해 펼치는 무용담을 그린 영국 동화이다. 그러나 극본, 디자인, 연출, 편집 등 1인4역을 한 데이브 보스윅은 작품의 배경을 시대가 불분명한 어둡고 음침한 마을로 바꾸었다. 주인공 ‘톰 섬’은 민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을 가진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다. 픽실레이션(사진과 같은 정지된 영상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처리한 ‘톰 섬’의 부모를 비롯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땀이 번들번들한 얼굴에 피곤하고 옹색한 몰골을 하고 있다. 어느 한 구석, 동화적인 안온하고 푸근한 분위기가 없는 이 작품의 매력은 이런 기본 틀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족의 사랑과 생명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모만 봐서는 자식에 대한 애정과는 담을 쌓은 것 같은 ‘톰 섬’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무조건적인 애정과 헌신은 ‘위악적인’ 영상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동화의 틀을 빌려 현실과 잘 구별이 안 되는 ‘악몽’을 그리고 있는 보스윅의 작품 세계는 같은 영국의 선배 작가인 퀘이 브러더즈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함을 느낄 수 있다. - 한마디 더: 작품에서 픽실레이션으로 등장하는 배우들 중 상당수는 이 애니메이션의 제작 스탭이다. <샌드맨>(Sand Man) (2000년 출시,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톰 섬의 비밀모험>이 동화 속 세계를 현대적인 분위기로 비틀었다면, <샌드맨>은 중세 유럽의 괴담에서 느낄 수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펼친 작품이다. 서구 전설에 등장하는 샌드맨은 잠을 재우는 귀신. 우리의 ‘삼신할미’처럼 친근한 대상이다. 그런데 사뭇 낭만적인 존재인 ‘샌드맨’을 감독 폴 베리는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런 존재로 바꾸었다. 팀 버튼 영화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세트로 작품의 음산하고 몽환적인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문, 딥 포커스로 촬영해 원근감이 왜곡된 집안, 그리고 앙각으로 촬영해 등장인물이 주는 중압감을 강조한 카메라 앵글 등은 <노스페라투> <칼리가리 박사의 정원> 같은 무성영화 시대 작품을 연상케 한다. 섬세한 칼 맛을 느끼게 하는 인형의 모습과 간결하지만 어색함이 거의 없는 동작은 전통을 가진 유럽 인형 애니메이션의 힘을 느끼게 한다. <톰 섬의 비밀모험>과 함께 한 비디오로 출시됐다. - 한마디 더: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대개 캐릭터에 관객의 시선을 모으는데, 이 작품은 세트의 양식미를 보는 것도 감상법의 하나이다. <이온 플럭스>(Aeon Flux)(1996년, 미국, 120분) (99년 출시, 120분, CIC) 이온 플럭스라는 미래사회의 여자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독특한 양식의 SF애니메이션. 감독과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피터 정은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애니메이터이다. 월트 디즈니가 세운 ‘캘리포니아 아트스쿨’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그는, 디즈니, 한나 바버라 등의 프로덕션을 거쳤는데 우리에게는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는 나이키의 애니메이션 CF로 알려졌다. 이후 <팬텀>(국내에서도 방영)의 원화 디자인을 맡은 뒤 미국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 MTV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인 <리퀴드 텔레비전>에 <이온 플럭스> 시리즈를 발표했다. 여기 소개하는 것은 7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 SF양식을 빌렸지만 <이온 플럭스>는 쉽게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작품이다. 독특한 메커닉 디자인과 마치 오슨 웰스를 연상케 하는 딥포커스의 카메라, 인체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그의 캐릭터는 잘 정제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미소녀류의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전후도 모호하고 인과관계도 뚜렷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늘 강박관념과 과도한 섹스어필, 미래의 희망과 꿈도 없고, 그렇다고 절망도 없는 마치 무기질 같은 세계가 백일몽처럼 펼쳐진다. 보면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다 놓칠 수 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구도와 역동적인 주인공의 움직임, 기발한 아이디어의 메커닉 디자인을 감상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 한마디 더: 우리말 자막이 있지만 워낙 줄거리의 인과관계가 모호해 이해하는 데 무척 힘들다. 자막내용 고민하느니 차라리 그림만 보는 게 오히려 작품의 진가를 파악하는 데 더 쉽다. 비디오 하나 더! <요괴인간> ‘난데없이 웬 <요괴인간>’ 하겠지만 정확히 국내에 94년에 출시됐다. 요즘 엽기나 공포물이 유행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엽기로 따진다면 이 작품이 선조이다. 67년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이 일본에 합작으로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 ‘제일동화’에서 만든 TV시리즈이다. 70년대 TBC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면서 정말 ‘한 인기’를 모았던 작품. ‘구하지도 못할 케케묵은 작품을 왜 소개하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의외로 중고 비디오숍에 꽤 있다. 물론 유려하고 화려한 애니메이션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찾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30대 이상 애니메이션 마니아 중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음산한 분위기의 주제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색다른 추억에 잠길 수 있다.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위해 연구하던 한 과학자의 손에 의해 태어난 세 요괴. 벰, 베라, 베로. 비록 모습은 흉측하지만 심성만은 바르고 올바른 그들이 권선징악의 길에 나선다. 언젠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그림이나 전개는 엉성하지만 지금 봐도 기가 막힌 것은 60년대에 어떻게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엽기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에피소드마다 독특하다. 특히 유럽의 괴담을 일본적인 상황에 맞게 적당히 각색한 것과 좀비, 해골, 귀신, 유령, 늑대인간 등 괴기물의 각종 주인공들을 아이들 대상의 애니메이션에 등장시킨 점이 놀랍다. 물론 지금 이런 내용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면 영락없이 언론에서 집중 성토를 당하기 쉽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박흥식·설경구 취중진담

한 남자와 여자의 시냇물 흐르듯 잔잔한 사랑 이야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별다른 사건도, 커다란 감정의 출렁임도 없는 이 영화는 일상의 자그마한 풍경을 짜임새 있게 늘어놓는 최근 멜로영화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여자가 자신이 품은 사랑의 감정을 남자에게 솜이 물에 젖듯이 자연스레 전달하는 것처럼, 관객의 마음을 구석에서부터 서서히 장악해나가는 이 영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까지 맡았던 박흥식 감독이 정성스레 파놓은 ‘함정’과 곳곳에 숨겨놓은 ‘덫’ 덕분에 영화는 단순한 멜로영화로 간주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갖게 됐다. 문제는 그 ‘특별한 것’을 이루는 각각의 성분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점. 꽤나 영악한 영화인 듯하면서도 때론 너무나 순진한 구석이 엿보여 허술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작품을 해독하기 위해 <씨네21>은 조력자를 구해야 했다. 사실 이 만만치 않은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바로 영화에서 궁상맞은 노총각 봉수 역할을 능청스러울 정도로 잘 소화했던 설경구 말이다. 영화에서 워낙 봉수라는 캐릭터가 강하다는 점뿐 아니라 현장에서 박 감독과 원활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었던 인물 중 하나였던 그는 이 제안을 쾌히 수락하며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인터뷰가 술을 마시며 진행돼야 한다는 것. 이 ‘취중 인터뷰’는 그가 평소에도 워낙 술을 즐기기로 소문난 애주가였기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영화 현장 밖에서는 대인기피증이 있는 듯한 인상까지 주는 과묵한 성격의 박흥식 감독의 성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인터뷰는 대학로의 한 한식집에서 시작, 맥줏집을 거쳐 허름한 소줏집에서 막을 내렸다. 설경구가 박흥식 감독을 날카롭게 몰아붙이지 못할 것을 우려해 동석한 기자(물론 기우에 불과했지만)들의 존재를 의식했던 탓인지 인터뷰의 형식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돼버려 아쉬움이 남았지만, 사실 내용적으로는 두 사람이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아쉬웠던 점은 이날의 만남이 꽤 많은 양의 알코올과 더불어 진행된 탓에 인터뷰 내용의 상당 부분이 알코올 성분과 함께 휘발되었다는 것이긴 하지만. 편집자 박흥식(이하 박) | 저희는 대화를…. 설경구(이하 설) | (말을 끊고) 굉장히 많이 했어요. 박 | 한 1분 이상 안 해요. (웃음) 대화를 별로 안 해요. 이거 어떤 거 같으냐, 해서 괜찮다 그러면 그게 오케이에요. 촬영현장에서의 ‘대화’를 이렇게 엇갈리게 기억하던 이들은 술이 한 순배 돌고난 뒤 장장 6시간이나 지속된 취중진담을 시작했다. 한잔은 고백 - 데뷔작 끝낸 감독, 떨리고 또 설레고 박 | 영화 개봉할 때까지는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개봉하는 건 영화가 제 손을 떠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개봉하기 전까지는 내 손아귀 안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개봉하고 나서는 제 손을 떠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관객시사를 할 때는 계속 갔는데 개봉하고 나서는 딱 한번 들어가서 보고는 더 안 봤어요. 볼륨 조정이나 색보정이 이상하다는 것도 더이상 내가 할 얘기가 아니다 싶어서 얘기를 안 했고. 설 | 믹싱 끝나고 색보정 끝나기 전에 전화해서 “이젠 내 손을 진짜 떠나는 것 같아” 하더니 그 다음날 색보정까지 다 끝나고 시사회 전날, 또 전화해서 “내 손을 진짜 떠났어” 그러대요. 그래서 제가 “아니, 뭐 입양 보내?” 했죠. (일동 웃음)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장난이 아니에요. 난 이런 감독 처음 봤어. 박 | 내가 발가벗겨진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그게 좀 창피해요. 처음으로 기자시사회 하는데, 전도연씨하고 경구씨하고 내 옆에 있었는데 전도연씨가 내 팔을 꼭 껴안고 영화를 제대로 못 보더라구요. 막 벌벌 떨면서 봐요. 아무리 톱스타고 대배우라도 영화를 처음 보는 느낌에서는 관객, 기자들의 반응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더라구요. 근데 내가 손을 슬쩍 뺏어요. 나도 떨리니까….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숨이 턱턱 넘어가더라구요, 숨이. 사람들은 웃는데, 난 웃지도 못하고. 기자들 웃는 게 꼭 비웃는 것처럼 들리고. 영화를 많이 했다는 배우도 이 정돈데 싶더라니까요. 영화 끝나고 나서 기자들하고 인터뷰하는데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르겠더라고요. 설 | 모든 감독이 자기 영화에 애정이 있겠지만, 이 사람처럼 울려고 했던 사람은 처음 봤어요. (사진기자가 건배하는 장면으로 사진촬영을 하자고 하자) 박 | 근데 지금 얼굴이 빨개가지고…. 설 | 색보정 해주신대! 내가 오늘 형을 너무 씹었나? 박 | 아니야. 설 | 뭐 늘 하는 얘기잖아. 우린 솔직해져야 하잖아. 인간적이잖아. (더 가까이 붙어보라고 하자) 설 | 우리 안 친해요. 박 | 이게 제일 이상한 거예요. 설 | 맞아요, 설정하는 거, 설정 너무 싫어. 두잔은 회고 - 주연 캐스팅, 그 감격의 순간 박 | 두 양반 없었으면 영화화하기 힘들었죠. 전도연, 설경구 이 두 양반. 다른 배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남자배우는 미상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나리오 건네는 날 설경구씨 매니저가 옆에 있었어요. 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이창동 감독님하고 작업을 많이 했고, <박하사탕>에서 설경구씨 연기하는 걸 보고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런데 내가 프로포즈한다고 될지, 무거운 작품, 진지한 작품 하다가 라이트한 걸 하자면 본인이 거절할 것 같더라구요. 설 | 나는 오히려 감독님이 거절할 것 같던데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 배우는 오히려 라이트한 걸 하고 싶겠죠. 바꿔보고 싶으니까. 근데 감독은 안 불안하겠어요? 박 | 이 양반 말은 별로 믿을 게 못되구요. 아마 이창동 감독님이 개인 느낌으로 시나리오를 괜찮게 봤던 것 같아요. 그것에 의해서 내 이야기를 좀 들었던 모양이에요. 출연하겠다고 하기에 그럼 좀 기다려달라, 완고가 나올 때까지. 그래서 최종 원고가 나오고 나서 딱 한번을 보였어요, 시나리오는. 그전까진 저하고 얘기만 했죠. 왔다갔다하면서. 시나리오를 보여달라고 했는데 안 보여줬어요. 설 | 진짜 안 보여주더라구요. 이창동 감독님은 딱 한마디 했어요. “은행원 얘기야, 별 얘기는 없어.” 그것뿐이었어요. 한 사나이가 있어서, 이 사나이는 이랬어, 뭐 이런 게 아니구. 박 | 뭐 정확한 얘기네. 은행원이 살아가는 얘기고, 은행원이 어떻게 살다보니까 사랑을 얻는 얘기야. 뭐 그런 얘기지. 근데 그건 아실 거예요. 전도연씨가 처음에 거절했었어요, 남자 중심 영화라고. 근데 나중에 원주쪽을 후반부에 강화하니까 하겠다고 그러더라구요. 일지를 시나리오 쓰면서 시작해서 꼬박 일년을 썼거든요. 거기에 모든 기록이 다 있는데, 전도연씨 캐스팅된 날이 6월18일인가 그래요. 설 | 어떻게 날짜를 기억하냐? 감격적이었구나…. (웃음) 나 캐스팅된 날은 모르지. 박 | 그것도 기록돼 있어. 내 기억으로는 1월 말인가 그랬을 거야. 신인감독이 다 겪는 일이긴 한데, 현실적으로 스타가 캐스팅되지 않으면 영화되기가 힘들어요. 특히 내 영화 같은 경우는 내러티브가 확실한 것도 아니고. 감정을 쫓아가는 거니까 스타가 없이는 영화화하기가 힘들어요. 그걸 알고 있었고, 캐스팅이 안 되면 영화가 무산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작업을 했죠. 세잔은 시비 - 감독은 왕따였다? 설 | 박흥식 감독은 적이 많아요. 나없으면 왕따야. 찍어놓고 영 찝찝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스탭들이 좋아할 리가 있나. 왜 지가 찍어놓고 흔쾌해 하지를 않아. 뭐라도 아는 척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 가서 혼자 고민하고…. 박 | 데뷔감독이 영화현장을 즐길 수 있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많이 물어보는데, 실은 잘 모르거든. 그래서 거꾸로 내가 스탭들한테 물어보잖아? 그러면 또 불안해 해. 라스 폰 트리에 감독도 <어둠 속의 댄서> 찍고서는 지옥 같은 영화현장이었다고, 다신 안 한다고 했다지. 그러고도 다시 찍는 게 영화감독이야. 설 | 그렇게 말은 해도 라스 폰 트리에 그 사람은 현장에서는 즐겁게 일했을걸. 박 | 나는 영화현장이 안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 만들어진 상황에서 관객이 영화에 공감하면 그땐 보람을 느끼고 기쁘지만. 안 좋은 반응도 있긴 있어요. 싸이더스 홈페이지에 어떤 사람이 돈이 아깝다고 썼는데, 그 사람한테는 정말 내가 돈을 주고 싶더라구. 설 | 아니, 형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화면에서 쪽팔리는 건 나하고 도연인데, 감독이 그러면 배우들이 섭섭하지. 박 | 감독은 왕따예요, 왕따. 설 | 밥 먹으러 가면 상 쫙 차려져 있는데 혼자 먹을 때가 있어요. 왜 스탭들은 감독 옆에 안 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촬영감독한테나 조명감독한테도 안 오려고 하고 자기들끼리 뭉치려고 해요. 흥식이 형도 불쌍해. 하긴 나한테도 안 오니까. 박 |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얘는 숨소리 빼고는 죄다 구라예요. 설 | 아니, 내가 감독이라면 혼자 안 있고 스탭 있는 데로 내가 가겠어. 저는 가거든요. 그런데 외로운 게 좋은 것 같기도 해, 현장에선. 어떻게 보면 감독이 외로운 직업인 게 맞는 것 같아요. 또 현장에선 외로운 것이 어울려요. 박 | 그게 왜 외롭냐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래요. 정말로 내가 이 영화를 이렇게 찍으면 좋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는 감독은 없을 거예요. 임권택 감독님도 마찬가지이실 거예요. 물론 워낙 영화를 오래하셨으니까 스탭들을 어떻게 힘을 주고 끌고 나가야 하는지는 동물적으로 잘 아시죠. 그렇지만 데뷔감독들은 그것도 잘 몰라요.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난 정말 모르겠고, 내가 찍고자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 싶으면 혼자 고민할 수밖에 없잖아요. 스탭들에게 물어봐도 스탭들은 관성 때문에 또 영화를 빨리 찍고 싶으니까 좋다, 괜찮다 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요. 근본적인 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결국 감독이에요. 감독은 생각을 해야 하거든요, 어떻게 표현돼야 하는가를. 그런데 그런 걸 주위에서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어. 설 | 그게 아니고 주위에서 말 시켜도 안 들려. 감독이란 사람들은, 말을 시켜도 안 들리는 사람들이 감독이란 사람들이에요. 자기 생각에 너무 빠져 있어서. 설 | 감독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미친 짓을. 진짜 외로운 직업인 것 같아요. 박 | 시나리오 쓸 때가 제일 힘들어요. 저는 한국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실력은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컷을 나누는 방법, 연기를 연출하는 방법, 기본적인 컨셉 이런 건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를 잘 만든다, 테크니션이다 하는 김성수 감독 같은 특별한 분들 빼고는 허진호 감독, 이창동 감독 같은 사람들 보면, 영화 만드는 실력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창동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시나리오가 90%라고, 그게 정곡을 찌르는 말인 게 한국영화에선 시나리오가 정말 중요해요. 할리우드에선 영상매체에 대해선 영화적으로 접근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 영화감독들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익숙하거든요. 그렇지만 한국 텔레비전하고 영화하고는 많이 다르죠. 텔레비전은 설명을 하려 든다면 영화는 설명을 안 하려고 하잖아요. 차이가 심한데 텔레비전 피해 때문에 영화감독들의 실력향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시나리오가 중요하다고요. 그런데 시나리오 단계에서 작가들의 도움을 참 못 받아요. 저도 이번에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제가 99% 쓰고 나머지 사람들이 계속 시나리오를 써서 주는데 제 코드에 맞을 때만 쓰고 그렇지 않으면 제가 수용을 못 했어요. 영화사에서 각색작가도 붙여줬어요, 드라마가 약하니까 드라마를 한번 강화시켜보라는 거였죠. 그런데 영화 속에 드라마가 들어오니까 영화가 망가지더라구요. 태란이하고 원주하고 나중에 만나서 언니 동생을 하고 그런 식이었죠. (일동 그건 아니라며 웃음) 그걸 제가 보고나서 이렇게 영화가 되면 영화를 안 하는 게 낫겠다 했죠. 도저히 안 되겠다, 나 혼자 쓰겠다 하고 최종적으로 한달을 혼자 작업했어요. 영상원 친구 학생하고 같이. 디테일을 강화한 거죠.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건네주면서 “나는 영화를 못해도 좋은데 이게 내 완고이고 더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시나리오로 나는 이런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네잔은 공감 - 주인공 봉수는 ‘보통’ 한국남자 설 | 봉수 안에 많이 들어 있죠, 제 모습이. TV 보고 빈둥빈둥거리는 것도 닮았고, 봉수가 영화 속에서 밝지가 않잖아요. 저도 굉장히 무표정하면서 말도 그냥 툭툭 던져요. 그런 게 닮았죠. 근데 잘 보면 진짜 봉수랑 닮은 사람은 박흥식 감독님인 것 같아요. 박 | 그렇지, 뭐. 나도 범생이였고 취직해서 일도 해봤고, 결혼적령기고. 우리 둘이 한 얘기가 있잖아. 경구씨하고 나하고 전화를 하면서 한 얘기가,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좀 퉁명스럽다. 보수적인 데도 좀 있고, 결국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우리 같은 모습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당신 모습하고 내 모습하고.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라. 감추지 말고, 그냥 우리 안에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거였어요. 한 여섯 번째 촬영 때쯤인가, 봉수가 “나 혼자 살아, 독립했어. 아 맛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걸 찍을 땐데, 스탭들한테서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어요. 그때 이후로 어떤 느낌이 왔냐 하면, 저 친구가 지금 화면 안에서 봉수처럼 놀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찍으면서 본인도 웃더라구요. 여유가 생긴 것 같더라구요. 설 | 근데, 저는 <아내가…>뿐이 아니라 스타일이 원래 그래요. 박 | 맞아요. 아무튼 그때 이후로는 저는 이 사람한테 별로 말을 안 했어요. 현장에 와서 느낌대로 가자고 약속했죠. 내가 현장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설경구씨가 판단을 해서 이건 좋다, 이건 아니다, 하는 식으로. 경구씨는 그 판단력이 굉장히 정확해요. 이건 과장이 아니냐, 하는 것도 용기있게 하자고 하기도 하고. 내가 좀 확신이 없는 것도 있지만…. 감독은 별로 확신이 없어요. 설 | 세상에, 빤스만 입고 출근했다가 다시 들어오는 장면 있잖아요. 그걸 놓고 감독님은 끝까지 오버래요. 촬영 쫑나는 날 직전까지. 자르려 그러는 거예요. 죽어도 못 자르게 했어요. 박 | 그래서 두 가지로 찍었잖아. 설 | 그게 불안해 갖고, 면도 크림 묻히고 나오는 거, 그것도 하나 찍어놨어요. 박 | 그때 이창동 감독이 왔었어요. 이창동 감독한테 내가 이거 오버하는 것 같다 그랬더니, “야, 이거 오버 아니야. 네 영화 속에 이런 거 많아야 돼” 하시더라구요. 설 | 난 오히려 흥식이 형이 너무 겁내는 게 불만이었어요. 저는 그런 사람 얘기를 실제로 들었거든요. 다섯잔은 설전 - 배우와 감독의 차이 박 | 저는 사실, 제 영화 속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하나 있거든요. 설 | (입술을 삐죽거리며) 이 사람이 인색해요, 원래. 박 | 그러지 좀 마. (서서히 신경을 곤두세운다) 설 | 인색하잖아요, 형. 진짜 인색해요. 마음은 안 그런데 되게 인색해요. 별명이 독일 병정이에요. 박 | 어린 봉수가 소나기 맞으면서 뛰어와서 엄마라고 하는 건 원래 시나리오 안에 있었던 게 아니고 제가 데뷔작으로 하고 싶었는데 좌절되었던 성장영화에 있던 거였어요. 설 | 이창동 감독님이랑 일반시사 같이 봤는데 그 장면 딱 나올 때 “상업영화 하면서 예술영화로 시작하네” 하시대요. 박 | 크랭크인한 첫날에 어린 봉수 나오는 그 장면하고 친구에게 염색하지 말라고 하는 장면하고 두 장면을 찍었는데 촬영 중간에 경구씨하고 얘길 했거든요, 마지막에 봉수가 정리를 하고 나가야 할 텐데 무슨 얘기를 하는 게 좋겠냐고. 그러다가 “염색하지 마 이 새끼야”가 어떨까 했더니 경구씨가 좋대요. 홍상수 감독님이 영화 찍을 때 실제 술을 먹이고 찍었다고 하기에 나도 해보고 싶어서 해봤는데, 경구씨가 서태화씨하고 술을 먹는 장면에서 둘이 소주를 9병 마셨어요. 서태화씨가 먹은 것만 6병이 돼요. 설 | 저는 먹다가 물로 바꿨거든요, 그런데 태화 형은 제가 물로 바꾼 건지 모르고 계속 술만 먹었죠. 박 | 아직도 아쉬운 것은, 테스트할 땐 정말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왔는데 슛을 들어갔더니 그게 안 나오는 거예요. 이 양반이 웃기는 게 에너지가 어느 한순간에 나오면 그 다음엔 없어져요. 그러니까 그 순간을 잘 포착해야 해요. 17테이크를 갔는데 결국은 제가 만족을 못해 설경구가 나중에 나와가지고 자기는 끝까지 아주 징할 정도로 해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새벽은 가까워오지, 날은 다 샜지 더이상 못할 것 같은 거야. 서태화씨가 너무 술에 취해서 안 되겠더라구요. 설 | 그 다음날 전화했더니 어떻게 끝났냐 묻더라구요. 박 | 취해서는 무조건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긴 하는데 연기에 대해서 대화가 안 되는 거야. 첫 장면은 내 느낌대로 찍었는데 그 다음 둘이 찍을 때는 완전히 죽상이 되어 있더니 나중에 전화가 왔어요. 어떻게 배우 앞에서 오케이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갈 수가 있냐구. 설 | 기분 좋게 오케이 해줄 수 있는 거잖아요. 오케이! 하면 배우도 기분 좋게 갈 수 있잖아요. 흥식이형은 제일 극찬하는 게 “괜찮다”예요. 한 테이크에 오케이 됐던 건 만화가게에서 찍은 것 하나예요. 잘렸지만. 확실히 감독은 세밀한 데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럴 때 배우는 짜증나요. 컨셉이 다르거든요, 감독이랑 배우랑. 박 | 이번 영화에서는 모두가 됐다고 했는데 나 혼자 아니라고 했던 게 하나 있었어요. 설경구씨가 신문지 찢는 마술하는 장면이 나는 좀 오버된 것 같더라구요. 첫 번째는 실수를 했고 두 번째 하는데 스탭들도 현장에서 웃느라고 NG날 정도로 다 좋았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는 오버인 것 같더라구요. 촬영감독도 웃느라고 잘 보면 뷰파인더가 조금 흔들렸어요. 그런데 제가 더 가자고 해서 다섯번을 갔어요. 경구씨가 나한테 화를 냈죠. 설 | 또 명함에서 동전 옮기는 마술할 때도 짜증났어요. 박 | 한번도 짜증을 안 냈는데 마술할 때 짜증을 냈어요. 설 | 뒤에 연결이 어떨지 모른다고 또 찍게 해요. 너무 짜증나더라구. 그러고서 두 번째 걸로 썼잖아요. 내가 막 했어요, “아까 것을 쓸걸” 하면서. (일동 웃음) 배우도 개겨야 돼요. 여섯잔은 사랑타령 - 원주는 뽀뽀하고 싶은 여자 설 | 형, 우리 영화 보면 왜 사랑이 보석 같은 거다, 마술 같은 거다, 싶다가도 또 굉장히 일상적이잖아. 형이 생각하는 사랑, 그것도 궁금하던데. 박 | 사랑은 보석 같은 것이기도 하고, 일상이기도 하지. 사랑하기 전에도, 사랑하고 난 뒤에도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아.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지 모르고.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랑에 빠질 때 짧지만 빛나는 순간이 있잖아. 그래서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같은 영화, 정말 좋아해. 어릴 때부터 미용사를 사랑해서 미용사의 남편이 되는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하는 미용사 아내. 그런데 그 여자가 왜 사랑의 절정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물에 몸을 던지잖아. 그 사랑의 순간을 지키고 싶었던 거겠지. 난 그 정서에 공감해. <일 포스티노>에서 남자가 여자랑 게임을 하며 구애하는 순간도 그런 느낌이 있어서 좋고. 그 전후가 크게 달라질 것 없더라도, 그런 순간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 <나도 아내가…>에서는 그런 순간보다 일상을 위주로 했는데, 다음에는 좀더 가보고 싶어. 인공적인 드라마가 아니면서도, 일상이 근간이 되면서도, 일상의 삶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격정적인 순간을 담아보고 싶어. 누가 누구를 만나서 사랑한다는 건 사는 모습의 일부야. 봉수가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태란이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태란이는 자기 곁을 떠났잖아. 옆에 누가 없는 상태에서,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야. 누가 떠나간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또다른 사람을 찾게 되지. 거기에 집착해서 평생 그 여자만을 기억하면서 살겠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자기는 정말 사랑했다고 생각해도 떠나가버리면 또다른 사랑을 찾는 게 사람이라고 생각해. 영화 속에서 봉수가 쉽게 태란이를 접고 원주에게 가는 이유는 그게 살아가는 일부이기 때문이야. 나는 정말로 시나리오 데뷔작으로 첫사랑에 대한 얘기를 담으려고 했어. 그런데 내 모습을 내가 반추해봤더니, 첫사랑을 생각하느라 내가 매일 괴롭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됐어.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나는 다른 여자를 또 만났다구. 또 그 여자랑 잘 안 되고나서는 또다른 여자를 찾았고. 지금 나는 결혼은 아직 안 했지만,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해주고 나랑 통할 것 같으면 나랑 살 수 있는 여자가 되는 거지. 경구씨는 원주랑 태란 중에서 누구를 택하겠어? 설 | 설경구가요, 봉수가 아니고? 당연히 원주죠. 현실적으로 태란은 이혼녀잖아요. 밑지는 장사잖아요. 태란이랑 나랑 서서히 나도 모르게 깊게 빠져든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하룻밤 잤다고 남자가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물론 그러고 나서 확 빠져들면 이혼녀고 뭐고 상관없겠지만, 시작인 상태에서는…. 박 | 봉수가 태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도 했잖아요, 그렇지만 제가 경구씨에게 물어봤어요, 이혼녀인 태란에게 쉽게 결혼까지 할 생각까지 갖겠느냐고. 그랬더니 “그렇지 않죠” 하더라구요. 그럼 왜 좋아하는 거냐 했더니…. 설 | 성적인 거지. 박 | 제 영화의 기본적인 컨셉은 ‘뒤통수 바라보기’였어요. 원주가 봉수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봉수가 태란이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그런데 누구 하나가 뒤통수 바라볼 상대가 없어졌을 경우에는 누구하나가 시선을 돌려주기만 하면 마주볼 수 있게 되는 게 아니겠냐. 근데 제가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까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헤매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요. 나중에 아니다 싶을 때는 자르기도 확실히 잘라요. 미련을 많이 남기고 아쉬움을 많이 남기는 것은 오히려 남자쪽이 강하더라구요. 여자들은 확실해요, 확신이 있어요.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할 거다, 나는 이 사람이 좋다, 혹은 이 사람은 나하고는 아니구나 싶으면 자른다고요. 선이 확실해요. 그런데 나는 원주가 봉수를 좋아해주는 마음에 여자는 남자보다 확신이 있고 강한 모습이 비쳐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바보같이 헤매던 봉수만 나중에 살짝 시선을 한번 돌려줘라, 그러면 이건 성립이 되는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설 | 나는 시나리오 보고 봉수는 진짜 매력없다고 생각했고 원주가 너무 예뻤어. 뽀뽀해주고 싶은 여자다, 이 여자는. 진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다 싶었어요. 일곱잔은 결심 - 사랑하면, 표현하리라 박 | 다음 작품 할 때도 변할지 안 변할지 모르겠는데, 저는 확신이 없으니까 저를 의심을 해요. 거기서 오는 게 커요. 내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스탭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하는데 저는 표정이 얇아서 금방 드러나나봐요. 설 | 못 속여, 못 속여. “에이 이 씨발놈들아” 할 때는 하고 끝나면 “자 술먹자” 하고 가는 것. 어차피 그날 해결될 일이 아닌데, 주변이 불편한 거야. 눈치보게 만드는 거야. 그냥 화끈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멋이거든요. 하긴 감독이란 사람들이 현장에서 화끈할 수가 없어요. 저 같으면 더 할지도 몰라요. 순간 탁 털어버리고 주위를 여유롭게 만들어준 다음에 혼자 고민하면 되잖아. 박 | 그런데 영화를 떠나서 보통 사람으로서 대인관계상 내가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그건 그 사람에게 확실히 표현해야 하겠다는 건 이 영화에서 원주를 통해서 내가 배웠어요. 적극적으로. 스스로 내가 배운 것이 그거예요. 모더니티 비슷한 문젠데, 지금은 표현하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누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표현해 줘야 하고, 이 배우를 좋아한다 그러면 이 배우에게 표현해 줘야 하고, 이 장면이 좋다면 그 표현을 해야겠다, 앞으로는. 나도 앞으로 결혼도 해야겠고 여러 가지를 해야 할 텐데. 내가 만나는 사람한테는 꼭 표현해야겠다는 걸 배웠어요. 설 | 흥식이 형은 굉장히 디테일한 사람이야. 짜증날 정도로. 배우들은 정말 힘들어. (손가락을 조그맣게 하며) 아, 그 좆만한 디테일 때문에 똑같은 걸 몇번씩 찍으니까. 그러고는 꼭 첫 번째 걸 써요. 다음 영화도 디테일로 할 건가? 박 | (웃으며) 다음 작품 제의가 들어오고 있어. 근데 다음에는 드라마를 하고 싶어. 하지만 디테일은 모든 영화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어. 드라마 구조가 인위적이지 않으면서 “줄거리가 있구나” 하는 영화를 하고 싶어. 난 할리우드영화도 좋아하거든. 어떻게 말하면 난 드라마가 있는 영화를 부러워하기도 해. 일본영화를 보면 디테일이 다 존재하거든. 디테일은 기본이야. 설 | 그 영화, 저도 껴달라고 그랬어요. 박 | 공감하실지 모르겠는데 첫 장면은 제가 생각해놓았어요. 아주 어색한 부모님 생일파티. 다들 아시죠? 부모님 당사자만 좋아하고 주변의 식구들은 아주 어색해하는 느낌이 영화의 첫 장면이에요. 닭살이지만 해야 하는 행사잖아요. 그게 영화의 시작이거든요. 제가 그걸 갖고서 한번…. 한국 사람들이 외국 사람이랑 달리 가족간에 표현하는 사랑이란 게 되게 역설적인 것 같고, 서툴고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랑 이상의 진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걸 내가 한번 그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영화 전체를 표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