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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는 이처럼 황량하고 음울한 것인가. 우리는 ‘교통 사고처럼’ 이렇게 느닷없이 만나고 헤어지는가. 어차피 우리네 삶이 근원적으로 외롭고 불안정한 것이라지만 광기로 버텨내야 할 만큼 공포스럽단 말인가. 사는 것이 때로는 익숙하게, 때로는 낯설게 거듭되는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기억의 착각으로 끊임없이 빨려들어가는 ‘구멍’ 속 같은 것일까. 이곳은, 사랑이란 어디에도 없는 마음의 연옥인가.
‘나’라는 중년 남자, 직업은 외과의사, 평온하게 살 것 같은 인텔리다. 하지만 ‘나’는 매일 술을 마시고 밤거리를 배회하다 난잡한 파티에도 따라간다. 끝을 알 수 없는 쾌락에 탐닉하며 고립 무원의 소외감을 이겨보려 한다. 존재의 불안에서 비롯된 공포는 미치지 않고는 견딜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수술을 하다가 메스를 떨어뜨릴 정도로 손을 떤다. 외과의사에게 손떨림 증세가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알코올 중독 탓인가, 위기의식이 들지만 이혼소송 때문에 법정에 나가야 한다.
‘
낯설고 폭력적인 도시 공간과 현대인들의 음울한 정서,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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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드레스>는 한국과 일본의 합작 애니메이션이다. 일본 스탭들이 제작에 참여한 애니메이션으로선 국내 최초의 극장 개봉작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개방을 앞둔 시점에서, 일종의 실험 프로젝트라 할 만하다. 동화와 원화 부분은 한국에서, 그리고 시나리오와 연출 등은 일본 스탭들이 담당했다. 많은 이들의 이목이 쏠린 것도 당연한 이치다.
<건드레스>는 제작과정이 복잡하다. 일본의 닛카쓰와 파나소닉 디지털 콘텐츠, 이너브레인 등의 회사가 동아수출공사와 공동으로 제작비를 댔다. 거대 프로젝트라 일컫어도 어색하지 않다. 국내 스탭이 기획 및 제작, 배급에 참여했고 각본과 캐릭터 설정 등 주요 부분은 주로 일본인 스탭의 손을 거쳤다. 스탭 진용은 쟁쟁한 편이다. 주목할 인물은 <애플시드>와 <공각기동대> 등의 SF물로 잘 알려진 만화가 시로우 마사무네. 캐릭터 설정을 맡아 예의 날렵한 사이버펑크풍의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연출자 야타베 가쓰요시는 &
한국과 일본의 합작 애니메이션, <건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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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땐 누구나 한번쯤 ‘난 혹시 미운 오리새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봤을 것이다. 나만 유별나다는 섣부른 자의식은 견디기 힘든 형벌이었고, 친구들로부터 외돌아졌다는 소외감은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의 감옥’을 들락거리게 했다. 그 시절의 상처는, 무뎌지기는 해도 잊혀지지는 않아서, 지금도 기억 속에서 느닷없이 기어나와 그때의 나를 뼈아프게 각성시킨다. 조시 또한 그랬다. 유능하고 현명한 어른인 조시는 취재기자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서 다시 고등학교로 뛰어들지만, 정작 그녀가 맞닥뜨린 건 ‘특종거리’가 아니라 그녀의 옛날이다.
<25살의 키스>는 이렇듯 어른을 주인공으로 한 10대 코미디 영화. 조시의 시선으로 요즘 10대들이 사는 법을 유머스럽게 스케치한다. 조시가 잠입한 학교는 더이상 꽉 막힌 공간이 아니다. 무엇도 아이들을 가두지 않으며 아이들은 경쾌하고 풍요롭다. 그럼에도 친구 만들기는 여전히 만만치 않으며, 그곳에서 조시는 ‘또다른 조시’를 발견하고 분노한
요즘 10대들이 사는 법, <25살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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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를 표방한 <인코그니토>는 <토요일 밤의 열기> <블루썬더> <니나> <고공침투> <닉 오브 타임> 등을 연출했던 존 바담 감독의 최신작. 렘브란트의 그림 한점을 그려주면 50만달러를 주겠다는 브로커들의 덫에 걸려든 해리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렘브란트 작품을 모조하는 데 혼신을 다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진품(?)을 훔쳤다는 누명. 체포되어 법정에 선 그는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위작을 또 한번 그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해리의 인생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두장의 그림 사이에 <인코그니토>는 익숙한 스릴러 장르의 복선과 장치들을 채워놓았다.
자신의 재능을 확인할 때라곤 남의 그림을 베낄 때 뿐인 해리와, 생계를 위해 당대 유럽의 최고 화가였던 루벤스의 그림을 따라 그려야 했던 렘브란트. 사전 정보를 조금 챙겨보면 그렇게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와 <인코그니토>의 해리
결백한 도망자, <인코그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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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지인 홍콩보다 오히려 국내에서 컬트가 된 주성치 영화는 품위와 상식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 버릴수록 재미가 더해지는 희한한 종류의 코미디다. ZAZ 사단의 패러디 정신과, 인분이나 정액을 과감히 등장시키는 패럴리 형제의 악취미가, <주성치의 007> <홍콩레옹> <홍콩 마스크> <식신> 등으로 이어지는 주성치 코미디에 고루 깃들어 있다. <희극지왕>은 그의 영화치고 좀 점잖은 축에 속해서 주성치를 섬기는 교파에 입문하기에는 비교적 적당한 코스다.
진지함을 뒤집는 데 달인의 경지에 오른 주성치가 <희극지왕>에서 패러디하는 것은 <007>이나 <마스크> 같은 할리우드영화가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현장 자체다. 홍콩에서 최고 몸값을 받는 배우인 그는 스스로 엑스트라가 되는 경험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대신한다. 영화에서 무능력한 사내가 현실에서 백마탄 기사가 된다는 <희극지왕>
주성치의 낭만과 낙관이 넘실대는 무대, <희극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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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마흔두살인데, 일년 안에 죽을 것이다. 물론 난 아직 그걸 모르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불치병에 걸린 걸까. 사고를 당하나. 자살한다는 건가. 죽는다 해도 이 말은 누가 언제 하고 있는 걸까. <아메리칸 뷰티>는 첫 내레이션에서부터 시점(時點)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슬쩍 지우며 시작한다. 목소리의 주인공 버냄은 중년의 미국 화이트 칼라다. 대도시 근교의 멀쩡한 집에서 아주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 아니, 말하는 걸 봐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다. 외양은 매끈하기 짝이 없다. 집도 근사하고, 미인 아내는 부동산 중개업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고등학교 다니는 딸도 몹시 예쁘다. 그런데도 내레이션은 이렇게 이어진다. “난 이미 죽어있는지도 모른다. 내 아내와 딸은 내가 엄청난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칸 뷰티>라는 제목의 뜻은 ‘①가장 고급스런 장미의 이름, ②금발에 파란 눈, 전형적인 미국 미인, ③일상에서 느끼는 소박한 아름다움’이라
병든 가족, 벌레먹은 꿈, <아메리칸 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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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 동안 몸을 사릴 줄 모르는 <엔터 더 이글>은 분명 홍콩 액션물의 적자다. 동유럽까지 찾아가 평원에서 고산까지 가리지 않고 쿵후 액션을 심어놓은 <엔터 더 이글>은 홍콩영화계를 대표해서 실종된 액션 명가의 자존심을 되찾아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프로페셔널 대도와 킬러, 소매치기 커플, 보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캐릭터들이지만, 적과 동료가 바뀌면서 박물관에서 경찰서로 그리고 다시 비행선으로 럭비공마냥 옮겨지는 다이아몬드를 쫓는 이들의 사투 장면이 뿜어내는 스피드의 매력은 홍콩 액션을 한물간 장르라고 싸잡아 폄하하기엔 망설여질 만큼 눈길을 잡아챈다.
문제는 점차 상승하는 액션의 강도와 바뀌는 인물들의 동선을 뒷받침할 만한 동기가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반부에 끼어 있는 멜로와 코믹적 요소가 후반부의 다이아몬드 대신 돌연 복수를 외치는 인물들의 감정까지 감당하진 못한다. 폭발 직전 비행선에서 피범벅된 얼굴을 한 채 태연히 담배를 무
동유럽까지 찾아가 쿵후 액션을 심어놓다, <엔터 더 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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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힉스의 야심은 장대했다. <샤인>으로 선댄스를 시끄럽게 했던 감독은 차기작 <삼나무에 내리는 눈>에다 여러 장르를 비벼넣는다. 살인사건을 던져놓고 그 비밀을 풀어가는 걸 보면 미스터리이고, 법정에 선 무고한 혐의자 가츠오가 가까스로 누명을 벗는 과정을 놓고보면 법정드라마다. 이쉬마엘과 하츠오의 가슴 저릿한 로맨스가 그려지는가 하면,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했을 때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의 수난사가 또 그 사이를 비집는다. 이렇게 방대하고 산만한 이야기들을 스콧 힉스는 이미지로 엮어낸다. 이쉬마엘이 겪은 2차대전의 참상이나 일본인의 수난사가 몇개의 장면으로 요약 발췌된다. 말하자면 감독은 짧은 이미지로 긴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했다. 빛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 촬영은 오랫동안 올리버 스톤과 작업했던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의 솜씨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지가 영화의 거의 전부가 돼버렸다는 데 있다. 방만한 이야기는 하나로 묶이지 못한 채 제 갈
알맹이 없는 방만한 이야기, <삼나무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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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간 돼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꼬마돼지 베이브2>는 원제 그대로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꼬마돼지 베이브의 좌충우돌 모험담이다. 돼지고기로 식탁에 오르는 숙명(?)을 벗어나 양치기 돼지로 색다른 존재가치를 발견해가는 전편을 전제로 하되, 재탕에 그치기 쉬운 속편의 우를 피해가려 고심한 산물이랄까. 농장에서 도시로 무대를 옮긴 속편은 순박한 시골뜨기의 수난기에 가깝다. 양치기는 물론 돼지도 드문 살풍경한 도시에 간 베이브, 도시 사람들은 물론 도시 동물들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수난기의 시작은 공항. 마약 단속견이 짖는 바람에 붙잡힌 베이브 일행은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졸지에 도시의 미아가 된 베이브와 하겟 부인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심가, 동물 사절인 대부분의 숙소를 지나 겨우 허름한 호텔에 안착한다. 동물에 후한 여주인 덕에 쉴 곳은 찾았지만 앞일은 막막하다. 어릿광대 주인을 둔 오랑우탄과 침팬지, 떠돌이 개와 고양이 등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든 동
꼬마돼지 베이브의 좌충우돌 모험담, <꼬마돼지 베이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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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나의 마을>은 정말 상투적인 표현을 빌자면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다.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와 동심을 받쳐주는 신비로운 현상들이 어우러져 1940년대 말 일본 시골의 풍경 속으로 안내한다. 물론 이 시대는 동아시아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이 힘겹게 살던 시기였다. 영화 초반부는 짐마 할아버지가 ‘맥아더 장군’을 원망하는 대사나 쌍둥이의 급우인 하쯔미의 가난한 삶을 통해 그러한 역사의 단편을 들춰내기도 한다. 하지만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아이들의 삶이다. 영화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짐마 할아버지의 죽음,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로 대변되는 가족의 삶, 쌍둥이가 겪어야 했던 질병과 온갖 말썽들 그리고 성에 대한 호기심까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길게 찍기의 미학을 통해 찬찬히 그리고 과장되지 않게 동심의 세계를 전해준다. 그 위에 덧붙여지는 것은 일본 특유의 설정들이다. 바람을 일으키는 신령 같은 세 할머니의 등장이나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 <그림 속 나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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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이 살고 젊은 나이에 죽어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보니와 클라이드, <트루 로맨스>의 클레런스 같은 부류의 막 가는 청춘을 위한 이 슬로건은 뤽 베송 감독이 잿더미 속에서 부활시킨 15세기 프랑스 성녀 잔 다르크에게도 꼭 들어맞는다. 뤽 베송이 연인 밀라 요보비치의 육체에 불어넣은 잔 다르크의 영혼은 흡사 고조기에 접어든 조울증 환자다. 구원받고 구원하려는 신열에 들떠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는 그녀는 잠자지 않아도 피곤을 모르며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도 아픈 줄 모른다.
1899년 이래 열여덟편에 이르는 ‘잔 다르크 영화’가 만들어진 사실이 웅변하듯 오를레앙의 처녀는 스크린이 누구보다 경애하는 성인(聖人)이다. 칼 드레이어(<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잔이 지복에 닿은 순교자였고, 빅터 플레밍(<잔 다르크>(1948))의 여성 전사가 페미니스트의 원조였으며, 오토 프레밍거(<성녀 잔>(1957))의 히로인이 감당
스타일의 소화불량, <잔 다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