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 비틀거리는 걸음, 초췌한 얼굴, 일그러진 표정의 마흔살 남자. 우리가 영화에서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이 사내는 불행해보이지만 별 동정은 가지 않는다. 야유회장에 술 취한 채 나타나 분위기 깨는 이런 인간은 가능하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다행히 사라졌나 했더니, 어느샌가 철로 위로 올라가 소리를 질러댄다. 뻔하다. 저 한심한 인생이 더러운 꼴 크게 한번 당한 게로군, 하면서도 놀던 사람들은 불편하고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기차가 달려오는데, 사내는 물러서기는커녕 눈을 부릅뜨고 울부짖기 시작한다. 왜 저럴까. 정말 죽을 작정인가. 아무리 꼴보기 싫은 인간이라도, 죽겠다고 나서면 썩 내키진 않지만 놀이를 멈추고 일단 만류한 뒤 그의 사연을 들어주는 도리밖에 없다. 그런데 눈물이 흐를 듯 고인 채 파르르 떠는 사내의 눈은, 피하고 싶은데도 결국 속을 울렁이게 만든다.
<박하사탕>은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며, 결코 호감은 안 가지만 냉큼 외면하기도 힘든 이 사내의 2
한 사내의 20년에 걸친 개인사, <박하사탕>
-
<벌이 날다>는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연상케 하는 가난하고 간결하며 착한 영화다.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에서 만난 민병훈과 잠셋 우스마노프 두 감독이 공동연출한 이 영화는 토리노 국제영화제 대상, 비평가상, 관객상,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 은상 등 해외 평단의 지지를 얻어 개봉기회를 잡은 드문 예다.
<벌이 날다>는 아주 고집스런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법을 빙자해 가난한 자의 권리를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남자는 아주 독특한 보복을 준비하는데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다. 전 재산을 털어 검사네 옆집을 사고 화장실로 쓸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자 검사는 남자의 아들을 경찰서에 잡아다놓고 협박을 한다. 아들을 구하려면 당장 화장실 파는 걸 중단하라는 검사의 요구에 그는 맘대로 해보라며 경찰서 문을 박차고 나온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같은 분위기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사내의 우직한 저항이 전적으로 개인의 성격에 기인하며 해결책도 엉뚱한 곳에서
가난하고 간결하며 착한 영화, <벌이 날다>
-
그런 날들이 있었다. “네가 없었다면 벌써 자살했을 거야”라는 말을 서슴없이 던지던 때가. 자라서는 연인에게조차 입 밖에 못 낼 대담한 고백을 수백번 속삭이고도 성에 차지 않아 온종일 붙어다닌 단짝에게 다시 편지를 쓰던 시절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소녀가 소녀를 만난 첫사랑의 비극적 기록이다. 난청으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육상부원 시은과 가끔 이상한 소리를 듣는 중창반 반주자 효신. 또래들의 명랑한 공기를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그들은 둘만의 방을 짓고 빗장을 지른다. 하지만 서로의 다리를 묶고 고요한 물 속에 잠겨 있던 두 소녀 중 하나가 짝을 뿌리치고 수면으로 떠오르는 영화 도입부대로, 언약은 깨어진다. 효신의 지독한 애정으로 봉인된 ‘밀실’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시은은 “뭇사람 앞에서 연인에게 등돌리지 말라”는 사랑의 첫 번째 계율을 어긴다.
우리 스크린에서 소외되어 온 10대 소녀들의 공간을 매혹적인 영화 소재로 발견한 전편에 이어, 속편은
소녀가 소녀를 만난 첫사랑의 비극적 기록,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
흥건한 피와 토막난 팔과 몸뚱이, 동강난 머리… 엽기적인 연쇄 토막살인사건의 정점에 가냘픈 한 여자가 서 있다.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하다. 감성멜로 <접속>을 만든 그 장윤현 감독이 2년 만에 내놓은 영화는 ‘피 범벅, 사지절단’의 하드고어 스릴러. 게다가 뭇 여성 관객들을 설레게 하는 한석규와 정갈하고 수려한 마스크의 심은하까지 피바다에 뛰어들었다니, 뭔가 범상치 않은 이야기인 듯하지만 어떤 그림인지 쉽게 떠올릴 수 없다.
도입부, 토막시체를 발견하는 장면부터 보자. 세기말의 음울함이 배어 있는 서울, 카메라가 향한 곳은 화사한 진열대 사이로 롤러브레이드를 탄 직원들이 일렁이는 도심 대형 할인매장. 엘리베이터 안, 모두 무심하게 층수를 가리키는 숫자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사이 한 꼬마는 엄마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봉투를 자꾸 건드린다. 순간 엘리베이터 바닥은 피로 물들고, 찢어진 봉투 사이로 보이는 건 토막난 사람 머리. 엘리베이트
단절에서 오는 절망감, <텔 미 썸딩>
-
-
금세기 초의 제주 민란을 소재로 한 <이재수의 난>의 도입부는 유장하고 비범하며 초월적이다. 까마귀가 제주 상공을 날아 한라산 꼭대기에서 구름을 뚫고 내려오면 제주섬의 풍광이 화면에 펼쳐진다.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의 영화화를 83년부터 별러온 박광수 감독의 미학적 야심은 시작부터 계시적이다. 요컨대 그는 땅 위를 굽어보지만 금방이라도 하늘로 박차고 비상할 것 같은 까마귀의 시점처럼 위에서 아래로 굽어보되, 결코 세세한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프랑스 신부들의 후원을 받는 천주교인들에 맞선 유생들과 민중들의 싸움을 다루면서도, 외세와 토착 또는 근대와 봉건의 충돌이라는 대주제보다는 제주섬 민중 전체의 희생에 주목하면서 굳이 피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고 민란을 이끈 이재수의 내면 묘사에도 무심한 편이다.
<이재수의 난>은 그 당시 민란의 정황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무뚝뚝한 화술이라
민란에 가담한 인간 군상, <이재수의 난>
-
<보이지 않는 위험>은 <스타워즈> 열성팬을 위한 영화다. 최첨단의 특수효과와 화려한 디자인들로 장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위험>에서는 <스타워즈>에 대한 ‘향수’가 물씬 풍겨난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시리즈를 한 가지 주제를 놓고 다양한 음조로 변형시켜 되풀이하는 교향곡에 비유한다. <스타워즈>가 루크의 이야기이고, <보이지 않는 위험>은 그의 아버지 아나킨의 이야기이지만 스토리 전개는 거의 비슷하다. 우주에서 위험에 처한 레아, 아미달라는 구원을 요청한다. 타투인 행성에 살고 있던 루크, 아나킨은 제다이의 꿈을 안고 집을 떠난다. 그래서 새로운 장면들이 등장할 때에도 관객들은 <스타워즈> 3부작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무역연합과의 공중전이 벌어질 때는 ‘데스 스타’와의 격전이, 겅건족의 전투에서는 이워크족의 전투가 연상된다. 이야기만이 아니다. 기본의 <스타워즈>
특수효과로 뒤덮은 미국인의 신화, <스타 워즈 1:보이지 않는 위험>
-
제작을 맡은 앨리슨 오웬은 ‘헨리 8세, 크롬웰 등 여러 역사적 인물을 검토해 보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만큼 현대적 감각에 맞는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요, 상상력으로 역사의 틈을 메운 문학작품이 아니다. 단지 역사를 불러세워 회고하는 것은 어떤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신 엘리자베스에 대해 문외한이었다고 고백하는 인도출신 감독 세카르 카푸르의 관점은 어떤 것이며, 그는 엘리자베스라는 한 권력자를 어떻게 서술하려는 것일까?
<엘리자베스>에서 무엇보다도 도전적인 관점은, 확인된 바 없이 소문으로만 남았다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이며 그녀의 상징과도 같이 알려진 처녀성일 것이다.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하며 음모스릴러의 진면목을 보여주던 영화가 가장 밝게 스포트라이트를 두는 부분은 자연의 대지에 맘껏 취해 있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이다. 이 생기발랄한 처녀에게 사랑이 그냥 지나쳐 갔다는 사실을 감독은 아마 믿을 수 없었던 모
영웅적인 삶을 꿈꾸며 살다간 여성, <엘리자베스>
-
운명적인 사랑이란 없다. 적당한 우연과 강철 같은 의지와 끈질긴 노력으로 사랑은 만들어진다. 사랑의 완성이란 곧 거듭되는 노력의 결과다. 그 짜릿한 사랑의 느낌이 그렇게 공들여 만들어낸 것이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운명처럼 온 것이라고 그냥 속고 마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그렇게들 산다.
영서는 운명 같은 사랑을 점지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동전을 떨어뜨리지만 웬걸, 사랑은 고사하고 헛웃음만 흘린다. 하지만 그에게도 ‘예정대로’ 우연은 찾아온다. 관광 안내를 맡았던 손님이 지갑을 도둑맞고, 그 소매치기는 ‘하필이면’ 태희쪽으로 도망친다. 태희는 소매치기의 칼에 손가락을 다쳐 영서의 치료를 받게 되고, 영서는 컵라면을 먹고 있는 태희를, 태희는 교통경찰과 승강이하는 영서를 우연히 보게 된다. 제주도라는 관광지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면 실제로 몇번씩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태희를 영서가 버스에 태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태희는 휴대폰을
캐릭터로 끌고 가는 멜로영화, <연풍연가>
-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묘한’ 제목의 영화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제법 오래된 일이다. 지난해 청룡영화제 시나리오 부문에서 수상하고부터 “시나리오가 좋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니 일년 정도 유명세를 치른 셈이다. 이정향 감독은 그 사이에 펜대를 놓고 메가폰을 잡았다. 올초 약관 23세의 이서군이 데뷔하긴 했으나, 충무로 현장 출신 여성감독은 이미례 감독 이후 이정향 감독이 처음. 십년 넘도록 충무로와 대학로를 넘나들며 필력과 연출력을 다진 이 감독은 진부해지기 십상인 멜로드라마를 독특한 짜임새로 솜씨있게 요리했다.
영화의 주요무대인 미술관과 동물원은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다. 공간은 제목 그 자체이기도 하며, 사건이 일어나는 주요 무대이기도 하고, 두 주인공의 취향과 성격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활기차고 본능에 솔직한 동물원의 철수와 정적이고 내향적인 미술관의 춘희. 이들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되면서 시나리오 속의 인공과 다혜도, 동물원 수의사와 미술관 안내원으
유쾌한 해피엔딩, <미술관 옆 동물원>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시작하고 있 다!” 홍보카피의 문구 그대로 <8월의 크리스마스>는 8월에 시작해서 12 월에 끝나는 가슴시린 사랑이야기다. 죽음을 앞둔 30대 남자와 생기 넘치 는 20살 여자의 만남이 전하는 온기는 헤어짐의 슬픔보다 먼저 와서 오래 남는다. <고스트 맘마> <접속> <편지>로 이어지는 멜로영화의 새로운 전 성기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점을 맞는다. 여기엔 억지로 눈물을 짜 내기 위한 속임수가 없다. 일상의 순간순간이 과거와 현재의 접점으로 다 가올 때 빛바랜 기억은 훈훈한 정서와 여운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문득 옛날사진을 들춰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전적으로 주인공 정원(한석규)의 주관적시점과 객관적시점으로 이 뤄져있다. 변두리 사진관 사진사인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주차단 속을 하는 여자 다림이 정원의 일상에 등장한 것도 그무렵. 그러나 둘
일상에 관한 섬세한 묘사, <8월의 크리스마스>
-
1년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회사로 복귀한 정아(박하선)는 안팎으로 그 어느 때보다 고군분투 중이다. 가정에선 갑자기 쓰러진 친정어머니 대신 14개월 딸 서윤을 돌봐줄 베이비 시터를 구하는 문제로 씨름하고, 회사에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계약직 후배 지현(공성하)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소개소를 통해 알게 된 조선족 보모 화자(오민애)가 서윤을 돌보게 되는데, 애초 한국인 시터를 원했던 정아이기에 처음엔 그녀를 못 미더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화자에게 신뢰를 쌓아간다. ‘비혼주의’를 공언하는 지현과의 사이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다시금 직장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가던 어느 날, 정아는 남편 우석(오동민)으로부터 서윤과 화자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회사를 뛰쳐나와 서윤을 찾아 나선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윤은 무사히 정아의 품으로 돌아오지만, 아이를 데리고 말없이 사라졌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화자에게 화가 난
[리뷰] '첫번째 아이', 복잡한 감정을 오가는 흡인력 있는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