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도 히라야마(야쿠쇼 고지)는 입을 열지 않는다. 혼자 살고, 혼자 일하고, 혼자 먹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각의 이유를 변명하며 끝없이 말을 걸어오는 동료 타카시(에모토 도키오)에게도 그저 손짓으로 말을 대신할 때는 언어장애를 지닌 인물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좀이 쑤신 데가 있다. 히라야마의 지나친 과묵함은 빔 벤더스의 1987년작,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직접 소통이 불가능했던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를 떠올리게 한다. 말없이 지켜보는 선한 시선은 오래전 다미엘의 것이자, 지금 히라야마의 것이기도 하다. 천사를 볼 수 없는 어른들과 달리 천사를 알아보는 아이들과 소통했던 다미엘처럼, 히라야마는 엄마를 잃고 우는 아이를 달래며 처음으로 입을 연다.
히라야마의 과묵함은 캐릭터의 개성을 만드는 방식도, 서사를 위한 기능적인 설정도 아니다. 그의 말 못할 상처가 뒤늦게 드러나는 일은 없다. 등장인물 중 그의 과거를 알 만한 사람은 니코(나카노 아리사)를 데려가기 위해 잠시 들른 동생이 유일한데, 짧은 안부 인사와 어딘가 여운이 남는 진한 포옹, 남겨진 히라야마의 눈물만으로는 그 사연을 짐작할 수 없다. 영화는 현재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만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 ‘고모레비’(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태양의 반짝임)가 지닌 찰나의 성격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효능은 미심쩍다. 감독의 입장에서 일상의 표현만으로 인물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관객이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정보 없이 인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진짜 이해나 공감이라 말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일상이 영화가 될 만큼 가치를 지니려면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리거나, 인물이 지닌 특수한 사연이나 아름다움을 설득해야 한다. 히라야마는 두 상황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 아니, 관객은 이를 판단할 기회가 없다. 누군가는 청소 노동자라는 특수성을 언급하고 싶겠지만, 그건 그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가 행하는 정해진 일과의 일부분이다. 그가 청소 일을 하면서 당하는 잔잔한 모욕과 노동의 고됨에 특별한 강조점이 찍혔다 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영화는 청소 노동자의 무엇으로 읽히지 않는다.
히라야마는 누구인가
관객인 우리는 맥락이나 습관에 따라 사고하게 되므로, 공백에 가까운 인물을 마주할 때조차 무의식중에 무언가로 바꾸어 인식하게 된다. 앞서 감독의 전작 <베를린 천사의 시>를 떠올리며 히라야마를 천사에 빗댄 이유도 현재의 생계와 일상 외에 손에 쥘 정보가 많지 않은 인물을 대하는 곤궁에서 온다. 과거의 천사는 당대를 사는 인물 내면의 조각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매개였다. 이를 통해 영화는 통일 직전 분단 독일을 사는 사람들의 내면이 담긴 기록물을 만들고자 했다. 히라야마의 과묵함 역시 어느 정도는 그런 역할을 한다. 일상의 단면과 그가 마주치는 인물을 통해 현재 일본을 사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이른 시간에 화장실 청소를 위해 출근하는 히라야마의 동선 안에서 술이 덜 깬 상태로 공원 벤치에 기대어 잠든 직장인과 혼자 벤치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다른 직장인, 홀로 예술적 퍼포먼스를 하는 거리의 사람, 누군가가 발견해주기를 기다리며 공공 화장실 틈에 빙고 쪽지를 숨겨놓은 미지의 사람 등이 포착된다. 그의 동료 타카시를 통해 귀 만지기를 유독 좋아하는 소년과 패티 스미스의 음악을 좋아하는 아야(야마다 아오이)를 마주할 수 있고, 히라야마의 여가 시간을 통해 목욕탕을 찾는 노인들, 중고 서점 주인, 작은 술집이나 가게를 운영하거나 찾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관객이 가장 궁금해하는 인물은 히라야마이며, 그의 동선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인물이 지닌 공백이 해소되지 않는다.
주파수를 잘 맞춘 라디오처럼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던 <베를린 천사의 시>를 떠올리면 공백에 가까운 인물을 보여주는 <퍼펙트 데이즈>가 더욱 낯설게 체감된다. 근거리에 있는 인물 내면의 소리를 감지하는 천사를 통해 인간들의 속마음이 보이스오버로 표출되는데, 이 소리는 천사들의 내면이 담긴 독백과 비슷한 음질로 뒤섞인다. 세계를 사는 인간의 목소리는 곧 천사로 명명된 비인간의 목소리이기도 했으며, 목소리의 교류는 인간 세계를 선택한 천사의 미래를 예고했다. 반면 <퍼펙트 데이즈>에서 누구의 속마음도 들을 수 없다. 내면의 소리에 근접한 건 히라야마가 운전하면서 카 오디오로 듣는 올드팝이다. 음악을 듣는 순간이, 그의 내면이 언어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순간이기에 여기에 기대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사는 인물의 내면을 대변하기보다 드라이빙 시퀀스의 적절한 배경음악 정도에 그친다. 다만 올드팝은 히라야마라는 인물이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이야기를 상기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혹은 새로운 이야기 대신 이미 있는 이야기에 기대고자 하는 감독의 고백에 가까운 삽입일 수 있다.
빔 벤더스의 초기작에서 보여준 이야기의 믿음을 떠올릴 때, 그가 이야기하기를 거절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낯설다. 그에게 이야기는 천사의 인간 되기를 추동할 정도로 강력했다. <퍼펙트 데이즈>는 이야기 대신 말 없는 이미지에 몰두한다. 히라야마는 인간보다는 주변 환경, 특히 자연과 소통하는 인물이다. 그의 손에는 필름 카메라가 들려 있다. 공원 벤치에서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다가도 종종 햇살이 스며드는 나무 사진을 찍곤 한다.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그가 자연과 소통하는 짧지만, 분명한 순간이 각인된다. 히라야마가 출근 준비를 마치고 문밖을 나서는 장면이 자주 반복되는데, 이때 히라야마는 주변 풍경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흡사 오랜만에 출소한 사람이 바깥공기를 쐬는 것 같은 분위기다. 잠든 조카를 깨울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그가 빼먹지 않는 루틴은 기르는 화초에 물을 주는 작업이다. 나무 틈에 자란 여린 잎을 정성스레 옮겨 심는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식물, 자연과의 소통은 취미 생활이 아니라 히라야마의 존재 방식이다. 청소 도중 갑작스럽게 이용객이 들어오면 히라야마는 늘어놓은 도구를 챙겨 문밖에서 잠시 기다리곤 하는데, 그 잠깐 사이 그는 눈을 들어 근처의 나무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그의 과묵함은 그가 자연과 소통하는 사람임을 힘들이지 않고 설득한다.
어쩌면 얼굴
영화에서 대개 자연은 장면과 장면 사이를 잇는 휴지부로 기능할 뿐, 제대로 묘사되거나 찍힐 수 없다. 히라야마는 그 대상에 눈을 두게 하는 존재이자, 자연의 위상에 대적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영화에서 자연만큼 중요한 것은 히라야마의 얼굴이며, 그의 얼굴을 담고자 하는 영화의 태도다. 하루의 경계는 히라야마가 잠이 들고, 다시 잠에서 깨는 장면을 통해 분리된다. 그 사이에는 하루 동안에 그가 보았던 이미지나 그와 유사한 기억 이미지가 꿈의 형태로 응축되어 나타난다. 하나의 풍경으로 흐릿하게 용해되는 이미지 속에 더러는 그가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겹치고, 이미지가 멈춘 자리에는 히라야마의 누운 얼굴이 들어선다.
카메라는 깨어나는 히라야마의 얼굴을 대부분 화면에 꽉 찬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영화에서 히라야마가 잠에서 깨는 장면은 매번 다르게 찍힌다. 첫 장면에서 히라야마는 고개를 카메라 반대편으로 돌린 채 누워 있다가 똑바로 누운 옆모습을 보여준 뒤 고개를 돌려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그는 마치 카메라에 뇌를 스캔이라도 하듯, 누운 머리를 여러 방향으로 두루 보여준다. 주로 잠자는 장면과 연속해서 등장하는 몽타주는 이와 같은 스캐닝의 결과물인 것 같다. 다른 날 그는 카메라를 정면에서 마주 본 자세로 옆으로 누운 얼굴로 깨어난다. 카메라가 때로는 누운 정수리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거나 부감으로 얼굴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때로 깨어나는 얼굴이 생략되거나 하루의 경계가 모호하게 처리되기도 한다. 깨어나는 머리를 보여주는 여러 숏 가운데 그가 깨어나는 모습을 멀리서 조망한 숏이 유독 눈에 띈다. 나뭇잎이 가득한 꿈 이미지 몽타주가 히라야마가 키우는 화초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원경에서 히라야마가 깨어나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는 모습까지 하나의 숏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히라야마는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의 위치에 놓여 있다. 구도를 근거로 과장하자면 그는 식물 사이로 비치는 빛을 포착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식물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가까운 인물이다.
히라야마의 누운 얼굴은 빔 벤더스가 각별한 애정을 표해온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속 누운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만춘>(1949)에서 나란히 누운 하라 세쓰코와 류 지슈의 얼굴은 오랫동안 말해졌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얼굴숏 사이에 배치된 빈 항아리 숏이 서구의 비평가들에 의해 ‘의미의 공백’으로 의미화된 것을 파훼하면서 항아리 숏에서 보이는 수많은 표층의 의미를 언급한다. 이를테면 나뭇잎 그림자가 비치는 창의 달빛이 조명을 끄는 인물의 동작과 어떻게 교류하는가를 말한다. 유독 빛과 어우러지는 그림자 이미지에 집중한 <퍼펙트 데이즈>는 이에 대한 응답처럼 보인다. <만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얼굴이다. 아버지 류 지슈가 코를 골며 잠에 떨어진 뒤에도 눈을 뜬 채 가만히 정지한, 하라 세쓰코의 밝은 얼굴은 거의 자연물처럼 보인다. 그 얼굴은 보는 이에게 어딘가 두려운 감정마저 들게 한다. 이 시퀀스는 영화 전체에서 인물들이 잠드는 모습을 보여준 유일한 장면이며, 이후 깨어나는 장면은 마련되지 않았다. <퍼펙트 데이즈>는 잠드는 장면만 있을 뿐 깨어나는 장면은 없던 <만춘>의 빈곳을 홀로 남은 얼굴을 통해 채우며 정지된 것의 위상에서 일상의 평범함으로 굴러떨어지는 이행을 지속해서 묘사한다.
일상의 주인
영화는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고 화장실이 주된 장소 중 하나임에도, 히라야마의 수많은 일상 행위 중 유독 배설 행위만은 생략된다. 화장실 청소 장면에서 영화는 여기저기에 흩어진 쓰레기로 가득한 화장실 내부를 비추는 한이 있어도, 리얼리티를 위해 변기 속의 오물을 전면화하는 식의 과도한 리얼함을 부추기진 않는다. 화장실은 배설 행위를 위한 장소라기보다는 공공의 장소이지만 충분히 개인을 숨기거나 지켜주는 장소로 그려진다. 히라야마는 청소 도중 이용객이 드나들 때, 불편한 기색 없이 기꺼이 자리를 비워준다. 그와 같은 반복된 몸짓은 개인을 대하는 다른 개인으로서 공공의 이상적 실천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생략된 배설 행위는 다른 형태로 마지막 히라야마의 강렬한 얼굴 속에 응축되어 나타난다. 그 얼굴은 영화가 보여주려는 전부다. 그것은 히라야마의 얼굴만이 아니라, 배우 야쿠쇼 고지의 얼굴이기도 하다. 혹은 하나의 얼굴에서 다른 얼굴로 이행을 반복하는 얼굴이다. 얼굴은 우는 것 같지만 웃는 것 같고, 슬픈 것 같지만 기쁜 것 같다. 운전대를 잡은 히라야마는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며 마치 카 오디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움직인다. 우리가 지금 듣는 음악을 스크린 속 그 역시 듣는다. 그는 애써 미소 짓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지만 그저 맞은편에서 비치는 태양이 눈부셔서 눈물 짓는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얼굴에 이따금 비쳐 드는 밝은 빛은 마치 얼굴을 현상하듯 일렁인다. 얼굴과 마주한 자리에 놓인 카메라는 태양의 현상 작업과 짝을 이루며 끝나지 않을 것처럼 오래도록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얼굴을 이해하거나 언어화하는 일은 태양이나 나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일이다. 물론 과학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소통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히라야마의 과묵함은 식물과 태양의 존재 양식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식물과 태양을 바라보는 자만이 아니라, 자연과 소통의 길을 마련하기 위한 영매이기도 하다. 말할 수 있는 자로서의 인간은 말없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식물과 태양 같은 다른 존재의 말을 대신 상상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히라야마와 그를 빌린 감독의 목소리는 속삭인다. 히라야마는 천사를 모방하는 인물이기보다는 스크린 너머의 천사를 요청하는 과묵한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