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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다이어리 5] 크로넨버그, 숀 베이커 그리고 트럼프
김혜리 임수연 조현나 2024-05-26

김혜리, 임수연, 조현나 기자가 전해온 칸영화제 일지 ⑤

한국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올해도 어김없이 <씨네21>은 칸영화제 현장을 찾았다. 전 세계 영화인들과 언론인들이 모이는 칸에서는 공식 행사 외에도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올해는 칸 현지 소식을 좀더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지면보다 발 빠르게, 온라인에 칸영화제 소식을 먼저 전하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77회 칸영화제 기간 동안 <씨네21> 기자들의 일기장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예정이다. '77회 칸영화제 다이어리’는 영화제 개막부터 폐막까지 쭉 이어진다.

<수의> 스틸

5월 21일 화요일 – 김혜리 기자

올해 경쟁 부문에서 제일 멋진 제목을 나더러 고르라면,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All We Imagine as Light)과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수의>(The Shrouds)를 꼽겠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수의와는 조금 다른 형태지만 망자의 몸을 감싸는 천이라는 점은 같다. 단, 크로넨버그의 ‘수의’는 무수한 카메라로 짠 것이라 시신의 살과 뼈가 분해되는 과정을 묘비의 액정과 스마트폰 앱으로 지켜볼 수 있다. “도대체 왜?”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대의 시신은 사랑하는 존재의 ‘끝의 끝’이기에 크로넨버그가 상상한 애도의 방식은 충분히 말이 된다. 차갑고 어두운 땅 밑에 홀로 있는 상대의 외로움을 상상하고 슬퍼하는 대신 어떤 식으로든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이 밝힌 대로 이 영화는 40년 이상 동반한 부인과의 사별을 계기로 구상됐고, 과연 사랑하는 아내(다이앤 크루거)를 그리워하는 주인공 카쉬(뱅상 카셀)의 외모는 광대뼈와 머리칼까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아바타 같다. 위에 설명한 디지털 묘지를 개발한 비즈니스맨 카쉬와 죽은 아내를 빼닮은 처제 테리(다이앤 크루거, 말하자면 <현기증>) 그리고 IT 기술자이자 전처를 스토킹하는 테리의 전남편(가이 피어스, 그러니까 <아이언맨3>)이 <수의>의 서사를 끌고 간다. 갑자기 일어난 파묘 사건을 둘러싼 스토리는 후더닛 미스터리처럼 보이나 실상은 애도의 해부에 가깝다. 상영 전부터 미국 평론가와 마켓 쪽에서 흘러나온 다수의 혹평과 소수의 호평으로 갈렸던 이유는 영화가 30분을 넘어서자 납득이 되었다. <수의>는 일부러 차갑게 식히고 딱딱하게 굳힌 영화처럼 보인다. 흔히 “말로 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영화의 금과옥조를 뒤집어 보여줘도 될 걸 차차곡 말로 하고 그 설명이 이뤄지는 동안 카메라는 평범해서 이상한 앵글을 잡는다. 말이 많은 크로넨버그 영화하면 <데인저러스 메소드>도 생각날 법하지만 그 작품과도 또 다르다. 인물이 슬픔을 자제한다기보다 영화 자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표현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동시에 <수의>는 애도의 육체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깊은 슬픔은 육신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우리가 죽은 이를 그리워한다고 말할 때 상대의 몸에 대한 갈망은 얼마나 포함돼 있는지와 같은 문제들 말이다.

라운드 테이블에서 만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수의>가 개인적인 영화라는 점은 긍정하면서도 <수의>를 결코 셀프 테라피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예술은 여느 사람들에게는 테라피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예술가에게는 테라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의 자세한 내용은 <씨네21> 칸 영화제 특집 기사에)

5월 21일 화요일 – 조현나 기자

프랑스로 출발하기 전 야심 찬 계획이 하나 있었다. 한국에서 레토르트 식품을 소포로 부쳐 조금이라도 짐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소울 푸드인 김치찌개”(임수연 기자), 라면, 햇반, 컵밥, 김 등을 간단히 구매해 소포로 부쳤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일주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소포가 수취인 부재 문제 등으로 (에어비앤비 숙소를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소포를 받아주기로 했었다) 수령이 늦어진 것이다. 그렇게 12일째가 되던 날에야 마침내, 소포가 우리 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한국의 맛을 즐긴 것도 잠시 이젠 남을 것이 분명한 음식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과제로 남았다. 언젠가 다시 칸에 오게 된다면 식품을 소포로 보내는 야심 따윈 품지 않으리. 그래서 오늘 저녁엔 뭘 먹지?

<아노라> 스틸

5월 21일 화요일 – 임수연 기자

그래, 칸에 왔으면 이런 걸 몇 편 건지고 가야지. 올해 경쟁 부문 라인업이 예년보다 약한 것 같다며 투덜댈 때쯤 관객으로서의 나를 뜨겁게 만드는 작품을 만났다. 개막 전부터 <아노라>가 잘 나왔다는 소문이 돌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뒤통수를 맞지 않았음에 감사를. 숀 베이커는 아웃사이더의 삶에서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추출하는 창작자다. 철저한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하층민의 일상에 깊이 침투하는 만큼 그들이 주류에서 소외되게 된 구조적 맥락, 즉 시스템의 문제가 작품에 깃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특히 성노동은 <스타렛> <탠저린> <레드 로켓>에 이어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아노라>까지 이어지며 숀 베이커가 가장 오랫동안 부딪치고 학습해 온 소재 중 하나다.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아노라(마이키 매디슨)는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댄서를 찾는 한 손님의 요청에 응한다. 그가 받아야 하는 손님은 러시아 올리가르히(소련에 속했던 국가들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에서 국유기업의 민영화 등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흥 재벌 집단) 집안의 아들 이반(마크 에이델쉬타인). 아노라와 이반의 충동적인 혼인신고 이후 이반 부모의 반대는 여타 로맨틱 코미디라면 진정한 사랑을 막는 장애물 정도로 기능하겠지만, 이건 숀 베이커의 영화다. 스크루볼 코미디 장르에 사프디 형제가 미국을 담던 거친 에너지가 숀 베이커의 아웃사이더를 만난 <아노라>를 단순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상상하는 것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꿈과 희망이 가득한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고 싶은 무해한 어린이들의 동화로 예상하는 것만큼이나 간극이 크다. 성노동자의 일과를 노동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게 묘사하는 <아노라>는 주인공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계급을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와 동시에 관객이 그의 처지에 관심을 게끔 만든다. 아노라가 이반의 세계에 초대받는 광란의 일주일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편집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섹스신까지도)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며 그의 동요에 몰입하게끔 이끈다. 때문에 아노라가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고 희망을 품고, 합법적으로 결혼 서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를 지킬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처럼 마냥 다가오지 않는다. 나라고 달랐을까? 하지만 상류층의 권력이 하층민을 착취하며 유지되는 반면 노동자의 협력은 어렵다. 오히려 약자들의 연대를 쉽게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시혜적인 시선이 될 수 있다. 숀 베이커는 성노동자와 그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의 교감을 성급히 논하지 않는다. 한편 <탠저린>의 웨스트 할리우드와 <플로리아 프로젝트>의 올랜도에 이어 <아노라>의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는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파르테노페> 스틸

밤 10시 30분부터 상영하는 영화가 136분씩이나 된다니. 씻고 자면 새벽 2시겠네? 시간표와 러닝타임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지만 이런 영화가 괜찮으면 마음에 더 남는 법이다. 아리송한 마음을 안고 감상한 <파르테노페>는 파울로 소렌티노 감독의 고향 나폴리로 돌아가 그가 천착해 온 ‘아름다움’의 주제를 반복한다. 이 영화로 첫 주연을 맡은 배우 셀레스테 달라 포르타가 분한 ‘파르테노페’는 ‘사이렌’으로도 알려진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잠시 길을 멈추고 쳐다볼 정도로 아름다운 그는 남성들과 카메라에 의해 매혹적인 황홀경으로 대상화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지적인 교감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인류학자로 성장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외신 기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나폴리와 여성 육신의 아름다움이 역설적으로 내면의 욕망을 탐구하는 데 가닿는지, 혹은 끝까지 결국 이 역시도 시선 권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들의 논쟁을 흥미롭게 엿들으며 숙소로 걸어왔다.

5월 22일 수요일 – 임수연 기자

“저는 이래서 영화제가 좋아요. 다양한 나라에서 온 기자들이랑 대화를 나눌 일이 흔치 않잖아요.” 감독이 라운드테이블 인터뷰를 10분 정도 지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자들의 스몰토크가 이어졌을 때 루마니아 기자가 말했다. 그리스 출신 기자가 제일 먼저 받은 질문은 당연하게도, “란티모스 좋아해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나라에서 온 기자의 입으로 그가 왜 최근 란티모스의 작품을 안 좋아하는지, 초기작을 더 높이 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들을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중국 매체 기자에게는 “올해 유독 중국 기자가 칸에 많이 온 것 같다고 체감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런가” 확인하고, 이번 지아장커의 신작 <풍류일대>를 어떻게 봤는지 물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당연히 봉준호와 박찬욱에 이어 차세대로 주목하고 있는 한국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엇보다 이번 인터뷰는 한 기자가 총대를 매고 질문 규칙을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분위기가 더더욱 화기애애해졌다. 한정된 시간에 여러 명의 기자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라운드인터뷰는 일종의 ‘눈치 게임’이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혼자서 질문 기회를 독식하려고 드는 이기적인 기자가 꼭 나오기 때문이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1인당 질문 하나씩을 공평하게 던진 후 시간이 남으면 자유롭게 추가 질문을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에 모두가 물개박수를 치며 동조했다. 아아, 그동안 은은한 기싸움을 견디느라 피가 말렸던 게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물론 룰을 깨려고 하는 자도 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이미 첫 번째로 질문을 던졌던 서구권 기자가 순서를 무시하고 자기 질문을 다시 이어갔다. 이에 지아장커의 나라에서 온 기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지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함께 눈으로 욕(!)을 해줬다. 그리고는 “지금은 저 사람 순서잖아요. 아직 질문을 하지 못한 기자가 절반이나 남았어요!” 라며 그를 자제시켰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아까 그 기자는 매너가 없지 않았냐며, 자기가 더 흥분해서 화를 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이 또한 인종차별의 한 종류인가, 혹시 나의 피해망상인가, 이같은 자기검열을 하는 것 또한 내가 변방의 한국 사람이라 그런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곤 한다. 그리고 결국 같이 싸워주는 건 같은 아시아인들일 때가 많다. 예술을 통해 인종, 성별, 성정체성 등 다양성을 지향하겠다는 영화제의 정치적인 선언보다도 분명하게 각인되는 순간들이다.

5월 22일 수요일 – 조현나 기자

미구엘 고메즈 감독의 <그랜드 투어>는 그의 6번째 장편 영화로 칸영화제에 경쟁부문에 초청된 것은 이번이 최초다. 2020년, 미구엘 고메즈 감독이 16mm카메라와 함께한 동남아 여행에서 시작된 영화로 팬데믹 기간엔 크루들의 도움을 받아 원격으로 제작되었다. <그랜드 투어>는 영국의 공무원인 에드워드가 애인 몰리와 결혼해 아시아 ‘그랜드 투어’를 위해 배에 오르길 시도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일본, 태국 등으로 두 사람의 발길이 이어질 때마다 상황을 설명해 주는 내레이션도 해당 국가의 언어로 바뀐다. 꿈의 영역으로 들어가듯 두 연인은 각자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취를 좇게 한다. 두 연인의 엇갈린 여정을 다뤘으며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는 점에서 <그랜드 투어>는 지아장커 감독의 <컷 바이 더 타이즈>가 떠오르게 했다.

<디 어프렌티스> 스틸

알리 아바시 감독의 <경계선>을 좋아하는 관객에겐 그의 차기작들이 예외적인 선택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성스러운 거미>가 연쇄살인마 '거미'를 쫓는 여성 저널리스트 '라하미'의 뒤를 따라간 영화라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디 어프렌티스>는 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젊은 시절을 다룬다. 1970~80년대 도널드 트럼프가 부동산계의 중심에 서기 위해 애쓰던 시절부터 과거 자신의 변호사이자 멘토였던 로이 콘을 만나고, 성공한 뒤 그를 냉대하기까지의 과정이 굉장히 세밀하게 그려진다. 세바스찬 스탠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다. 극장에선 공감의 웃음과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관객이 <서울의 봄>의 전두광을 가벼이 마주할 수 없었던 것처럼 <디 어프렌티스>에서 세바스찬 스탠이 연기한 도널드 트럼프도 미국 기자들에겐 타국 기자들과는 다른 인상을 안겼을 것이다. <디 어프렌티스>에는 트럼프의 전처 이바나(마리아 바칼로바)가 그로부터 강제적인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묘사됐다. 영화가 칸에서 공개된 후 트럼프 캠프에선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나섰고, 알리 아바시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사람들은 트럼프가 여러 사람을 고소했다고 말하지만, 그의 소송들의 성공률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대응했다. 영화제 이후 <디 어프렌티스>가 가져올 파란을 계속 지켜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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