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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 평론가의 ‘엔데믹 극장론2’

올여름 박스오피스가 말해주는 것

낯선 풍경은 계속되고 있다. 코로나19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여파를 남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엔데믹 시대다. 관객은 얼마나 극장에 돌아왔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 기준으로 올해 7월1일부터 8월7일까지 관객 집계를 2019년 같은 기간의 수치와 비교해봤다. 2022년 해당 기간 관객수는 21,433,249명. 2019년 같은 기간은 28,825,027명으로, 올해가 2019년의 약 74%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실상 해제되고 <범죄도시2>가 ‘이제 사람들이 극장에 간다’는 신호를 준 뒤 여름 대작들이 개봉한 시기, 2019년 대비 4분의 3 정도의 관객이 극장을 찾은 것이다. 이유는? 상영작들도 다르고 코로나19 영향 또한 잔존해 있지만, 역시 관람료 인상의 영향이 클 것이다. 같은 기간 매출액을 비교해보자. 올해 해당 기간 극장 매출액은 222,270,137,116원. 2019년 같은 기간엔 241,936,701,679원이었다. 92% 수준이다. 4분의 3 정도의 관객만으로 90% 이상 매출을 회복한 셈이다. 2019년 당시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과 <라이온 킹> <알라딘> <토이 스토리4> <엑시트>에다 <기생충>까지 버티고 있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극장 매출은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약하자면 관객은 좀더 깐깐해졌고, 돈은 예년만큼 회수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탑건: 매버릭>과 <헤어질 결심>이라는 예시

이 질문에 답을 내놓기에 앞서 현재 스크린에 걸려 있는 주요작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엔데믹 극장론-<탑건: 매버릭>(이하 <탑건>)과 <헤어질 결심>을 극장에서 본다는 것’에 대해 짚어본 지난 글(<씨네21> 1364호 ‘프런트라인’)에 더해, 이후 두 작품이 박스오피스에서 보여준 의미를 이어붙여야겠다. 이 지점에서 최신 주말 차트(8월7일 일요일)의 숫자들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개봉 7주차를 채운 <탑건>은 여러 최신작들을 제치고 일간 박스오피스 3위에 올라 역주행했다. 심지어 이 영화의 좌석판매율(해당 영화가 점유한 상영관의 전체 좌석 중 티켓이 판매된 좌석의 비율)은 줄곧 40%를 상회하고 있다. 대작들의 격전이 벌어진 올여름 시장에서 좌판율 40%를 넘는 작품은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과 <탑건>뿐이다. 개봉 6주차의 <헤어질 결심>은 개봉 3주차인 <외계+인> 1부를 앞지른 6위다. 한달을 버티기 어려운 한국 영화 시장에서 <헤어질 결심>은 VOD 서비스를 시작해놓고도 꾸준히 관객수를 유지하고 있다(포털 사이트의 이 영화 VOD 페이지에 달린 베스트 댓글은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영화의 VOD가 출시되었다고 극장 관람을 중단합니까?’이다). 이는 팬데믹 이후 극장에서 답을 찾는 작품들이 보여주는 하나의 영화 외적 트렌드인 동시에, 코로나19 사태를 겪고도 우리가 극장에 갈 이유를 증명한 영화로 기록될 사례들이다.

박스오피스는 요동치고 있다. 이른바 ‘여름 빅4’의 관람 후기는 극과 극이다. <외계+인>과 <비상선언>은 다수 관객으로부터 각기 다른 지점에서 호되게 매를 맞고 있다. 온라인 일각에선 이들 두 작품에 비교적 높은 점수를 준 기자·평론가마저 도마에 올리는 분위기다. <외계+인>은 개봉 일주일 만인 7월27일 <한산>이 극장에 걸리자 <미니언즈2>와 <탑건>에도 자리를 내주며 일간 박스오피스 4위로 곤두박질쳤다. 급기야 개봉 3주차 토요일에 이르러 일일 관객 1만명대로 추락한 <외계+인>은 최종 성적 200만명도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다. 티켓 파워 한국 최상위권의 최동훈 감독이 김태리·류준열·김우빈·소지섭·염정아·조우진을 캐스팅한 결과가 이렇게 됐다. 특히나 사상 최대 규모 제작비의 2부작 동시 촬영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외계+인>이 안긴 실망은 영화 안팎으로 커다랗다. 역시 총제작비 300억원이 넘어가는 <비상선언>은 개봉 이튿날부터 <한산>에 1위 자리를 내줬다. 관객 913만명의 <관상>과 531만명의 <더 킹>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이 최상급을 초과한 수준이라 할 수 있는 송강호·전도연·이병헌·임시완·김남길·김소진·박해준을 기용했으나 실관람객의 혹평은 예사롭지 않다. 호평을 받고 있는 <헌트>가 선보이는 8월 둘째 주 <비상선언>의 시계는 더 어두워질 것으로 보인다(이 글은 <헌트> 개봉 전 작성한 것이다).

누구를 위한 욕망인가

<외계+인>의 실패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할리우드를 향한 욕망에 가장 큰 잘못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도 이 영화를 보며 수많은 미국영화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맨 인 블랙>부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까지, <미션 임파서블>부터 <우주전쟁>까지…. ‘<외계+인>이 차용한 할리우드영화 제목 말하기 대회’를 열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딸려나올 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겠냐고 할 수 있으나, 문제는 따라하기만 했는지 아니면 빌려온 걸 자기 것으로 소화했는지 여부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 속에 수많은 히치콕이 들어 있지만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면서 모방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이나 <도둑들>도 마찬가지다. 반면 동시대 상업영화에서 흥한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가져오려면 그럴 만한 이유를 작품 속에서 밝혀야 한다. 뭇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도심 파괴 장면들이 비윤리적인 이유는, 화면 속 빌딩에 머물고 있었을 수천, 수만명의 시민들이 팔이 잘리고 내장이 튀어나올 규모의 폭력을 전시하면서도 상업적인 계산에서 불필요한 것들만 쏙 빼는 방식으로 우리의 시선을 교란시킨다는 데에 있다. <외계+인>의 도심 장면들은 이를 어설프게 답습한 아류에 가깝다. 거대한 외계 비행 물체가 빌딩 숲을 가르고 촉수 달린 괴수와 로봇들이 도시를 휘젓는다. 우리는 이미 <트랜스포머>는 말할 것 없고 액션 디자인이 한결 정교한 <어벤져스> 시리즈에서조차 피로감을 느끼던 참이었다. 뭔가 현란한 걸 잔뜩 보긴 했는데 극장 문을 나서면 내가 정확히 뭘 봤는지 모르겠는 기분. 관객은 피곤하다. 사이즈는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얼마나 정확히 보여주느냐가 문제다.

<외계+인> 곳곳에서 보이는 기술적 패착은, 정확히 보여주기보다 그저 할리우드를 욕망하려다 실패에 이른 것으로 보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예컨대 근접 숏에서 보이던 도심 군중이 다음 장면의 풀숏에서 단 한명도 보이지 않는 등 성의 없어 보이는 대목들은, 제작진이 이만한 규모의 프로덕션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자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실 VFX로 점철된 이런 화면들의 흠결은 성의가 아니라 돈이 부족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렇다면 330억원이 들어가기 이전 단계에서 시퀀스별 사업 타당성을 조사했어야 했다. 이와 같은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백억원이 집행되는 프로젝트는 여타의 산업 영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누구를 위해 할리우드를 욕망했나.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이를 적절히 제어할 시스템은 한국 영화산업에 있는가. 자율과 효율 사이에서 현명한 선택을 가져올 의사결정 구조를 우리는 갖추고 있나. <외계+인>은 한국 영화산업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불안정성과 투자 환경의 예측 불가능성을 고스란히 확인시켰다. 한국영화가 잘할 수 있는 걸 외면하고 할리우드의 성취를 뒤좇는 방식으로 욕심내는 일은 그래서 위험하고도 곤란하다.

2022년 한국 관객의 경향

<비상선언>에 쏟아지고 있는 비판적 견해들은 우리 시민들 사이에 감염병과 관련한 과학적 상식 수준이 높아진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다수 시민들은 코로나19를 겪으며 공기 중 전파, 2차 감염, 바이러스와 세균의 차이, 백신과 치료제의 차이를 비교적 정확히 알게 됐다. 우리는 하나의 백신을 만들기 위해선 장기간에 걸쳐 수만명을 테스트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고, 선박이나 건물을 코호트 격리하는 실제 상황을 뉴스에서 보았다. <비상선언>이 촬영과 편집에서 충분한 성취를 평가받을 만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작위적인 설정들에 비난이 이어지는 데는, 전반부부터 극적 위기를 위해 과학과 동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출발시킨 탓이 크다. ‘저런 방식으로 탑승객을 분리한다고 해서 극중 설정대로 인물의 의도가 이뤄질까’에서 시작한 의아함은 ‘코호트 격리하면 될 일을 왜 저렇게까지’라는 실망으로 확장한다. 아마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코로나 팬데믹을 거친 이후 <컨테이젼>(2011)을 만들었다면,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가 자신에게 시험 주사를 놓는 방식으로 갑작스레 백신 효능을 검증하는 결말은 넣지 못했을 것이다. 관객의 상식이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 말이다. 단 한명의 실험 대상에게 주사 효과가 있다 해서 지금껏 착륙 허가를 내주지 않을 만큼이나 위험하게 여기던 항공기를 땅에 내리도록 한다는 설정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정도는 이제 전 국민이 아는 것이다. 요컨대 백신인지 치료제인지 개념까지 헷갈리게 하는 인호(송강호)의 결단 장면 이후로 다수 관객이 더이상 이 영화를 지지하지 못하게 되는 출발점은 사실 영화의 전반부부터 있었다는 말이다.

<비상선언>은 위기 조성을 위해 과학과 논리, 무엇보다 관객의 상식을 무시했다. 혹평을 쏟아내는 많은 이들은 아마도 영화가 관객을 얕잡아본다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간 한국영화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쌓아올린 촬영·제작 역량으로 극 전반부까지 공든 탑을 쌓아올렸으나 후반부 들어 무너져내리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영화는 외국계 자본이나 미국·일본 당국이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 항공 관제 시스템의 최소한의 룰마저 지키지 않는 등 외국과의 대결 구도를 제조하는 설정까지 나아간다. 외부와의 갈등이 내부 결집을 낳는 효과를 노린 무리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명량>(누적관객 1762만명)의 민족주의를 넘어선 배타적인 화면들을 보면 <비상선언>의 이같은 설정들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명량>의 비판 지점을 과감히 수정한 <한산>이 여름 격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있는 형세는, 엔데믹 시대를 맞은 2022년 한국 관객의 어떤 경향성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관람료 변화와 선택 편향

여기서 가장 주요하게 짚을 지점은 역시나 관람료 인상이다. 현재 한국의 영화 관람료는 얼마나 비싼가. 영화진흥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 한국의 영화 관람료는 평균 8.2달러로, 미국(9.8달러), 일본(12.5달러), 영국(9.1달러), 독일(9.8달러), 호주(10.0달러)에 비해 적지 않은 차이로 싸다. 올해 단행된 추가 인상을 감안해도 한국은 8.5달러를 넘지 않는다(통신사 할인, 각종 이벤트 등이 다양해 극장 매출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 문제는 체감이다. 관람료 인상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여러 차례 이뤄지다보니 1만원 이하의 비용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기억이 우리에겐 가깝다. 코로나19 기간 너도나도 가입한 OTT엔 볼거리가 쌓여 있고, 저렴하고 편안한 문화생활이던 영화 관람은 ‘비싼 선택’으로 바뀌었다. 행동경제학에서 비싼 선택은 대개 극단적인 평가를 부른다. 예컨대 거액을 들여 유럽 여행을 가면, 나의 선택은 정말이지 옳았(어야 했)다는 심리 편향이 작동한다. 그 결과 우리의 여행지는 더욱 아름답고 근사한 곳으로 SNS에 기록된다. 소문난 빵집에 이른 아침부터 ‘오픈런’해 얻은 소금빵은 씹을수록 깊은 풍미가 느껴진다. 한 시간 동안 식당 앞에 줄 선 우리는 이렇게 결론내린다. 역시 평양냉면은 이 집이 진짜야.

그 반대의 경우,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해당 상품의 잘못 탓이(어야 한다)라는 평가로 우리의 마음은 옮겨간다. 그리고 이를 전파하는 일은 ‘정의로운 참여’가 된다. 참여자는 잘못된 것과 맞서는 기분이 든다. 감정은 평등하지 않다. 부정적인 의견은 긍정적인 것보다 더 널리 확산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부정 뉴스는 긍정 뉴스보다 트위터에서 6배 더 빨리 퍼졌다.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우리 뇌가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이용자의 사용 시간을 늘리는 것이 목표인 소셜 미디어들은 우리의 본성을 자극해 부정 편향을 증폭시킨다. 영화와 그 주변에 대한 평가는 더 양극화할 소지가 커졌다. 미국의 빅스텝, 러시아의 침략 전쟁, 코로나19 전후 각국의 보호주의 등이 직접적으로 내 살림살이를 어렵게 하는 가운데 먹고사는 일보다 덜 시급한 것처럼 보이는 문화생활과 관련한 결정은 더욱 ‘비싼 선택’이 된다. 엔데믹 시대 관객을 실망시킨 작품은 쏠림 현상과 함께 이전보다 더 아프게 혹평받을 수 있다. 혹평은 때로, 그만큼의 졸작은 아닌 작품에도 가해져 심각한 흥행 실패를 부를 수도 있다. 흥망과 관련한 한국영화의 불안정성은 더 커질 수 있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한국영화의 흥행 실패는 우리 영화산업의 예측 불가능성을 더욱더 키울 것이다.

코로나19로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본 이들은 저소득층, 자영업자, 청년층 등 사회적 약자였다. 영화산업이 불안해지고 양극화가 심해질 때 우선 피해를 보는 쪽은 저예산·독립 영화와 신인·무명 영화인들일 것이다. 프랑스는 넷플릭스 등 OTT 업체들의 매출액 중 20%(2%가 아니다!)를 떼어내 유럽과 자국 영화산업에 투입한다. 이중 대부분이 저예산·독립 영화를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OTT 업체들이 코로나19 사태로 수혜를 입은 만큼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취지다. 누군가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까지는 말 그대로 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만큼 희생이 뒤따랐다는 뜻을 공유하자는 얘기다. 희생 속에 얻은 기회라면 그 이익을 나누라는 인식에 프랑스 사회는 어렵지 않게 합의한 것이다. 이처럼 상황 변화에 따라 강제성을 띤 법제화가 가능하기까지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합의할 토대가 기왕에 마련돼 있던 덕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다음 승자 독식하는 게 공정이라고 인식하는 사회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승자 독식 사회가 잃어가는 것은 다름 아닌 상상력과 다양성이다. 우리는 익히 그 사실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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