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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차이밍량 감독 X 이강생 배우 대담, 나이를 먹을수록 내공이 높아지는 기 수련자들처럼
최현수 사진 오계옥 2024-05-16

올해 전주에는 유달리 걷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아마 제25회 전주영 화제가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 10편을 모두 상영하는 특별전 ‘차이밍량-행자 연작’을 개최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도 ‘차이밍량-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를 통해 행자 연작 속 이강생의 느린 걸음을 직접 걸어보았다. 인터뷰장에서 만난 두 사람의 걸음도 행자 연작과 무척이나 닮아 보였다. 단호한 걸음으로 앞장선 차이밍량 감독 뒤로 느긋하게 이강생 배우가 들어왔다. 30년을 함께한 두 사람은 서로의 속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 전주영화제로 처음 행자 연작의 모든 작품을 상영하게 됐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차이밍량 꿈이 실현된 기분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부터 10편을 완성하면 모든 작품을 한곳에서 상영하기를 원했다. 행자는 느린 걸음으로 이어진 단순한 작품이다. 똑같은 내용처럼 보이지만 저마다 다른 깨달음을 얻는 수행의 시간이 될 것이다.

이강생 행자 연작은 주로 미술관에서 상영 됐다. 관람자가 이동하면서 작품을 선택하는 미술관보다는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영화관에서 행자 전작을 상영하게 되어 기쁘다.

- 이번 기회로 행자 연작을 처음 보는 관객들도 많다. 프로젝트를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차이밍량 내 영화를 아는 관객에게도 행자 연작은 낯설 것이다. 행자는 서사의 자리에 느리게 걷는 장면만이 남아 있다. 이 작품으로 관람 이라는 개념을 사고했으면 한다. 무엇 때문에 보고 있으며, 응시가 무엇인지 재고해야 한다. 행자를 보는 관객들은 자유를 만끽하길 바란 다. 자고 싶으면 자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며, 프레임의 다른 요소에 관심을 가져도 좋다.

이강생 내게 행자는 하나의 그림 혹은 책을 보는 느낌이다. 행자의 롱테이크를 경험하면서 관객들이 내면에서 떠오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 행자 연작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차이밍량 영화제작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쓰고, 일정 기간에 팀을 이뤄 촬영을 끝내야만 하는 공정이 존재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역설적으로 영화라는 창작물에 제약을 가한다. 때마침 이강생과 연극을 만들게 됐다. 무대에 올라 매우 느리게 이동하는 걸음이 인상적이었다. 이강생만이 할 수 있는 육체의 움직임을 영상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 차이밍량의 영화는 이강생의 육체로부터 시작된다. 차이밍량으로부터 자신의 걸음을 찍겠다는 계획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이강생 익숙해서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준비하는 과정이 좋았다. 내가 입는 승복은 무게 3.5kg에 길이 10m의, 어떤 재단도 들어가지 않은 붉은 천이다. 이 옷을 입는 순간 특별한 결과물이 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밍량 이강생이 다른 천을 두른 적은 말레 이시아에서 <물 위 걷기>를 촬영할 때뿐이었다. 기온이 40도가 넘어 얇은 천으로 준비했는데 이전과 같은 맛이 안 나더라. 그래서 다시 두꺼운 천으로 바꿔서 촬영했다. (웃음)

- 현장의 천축국 순례도 창작에 큰 영감을 주었다고.

차이밍량 현장은 내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천년 전 중국에서 인도까지 걸어서 불경을 가지고 온 사람이다. 아무 정보도 없는 시대에 오로지 자신의 걸음에 의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 관객에게 행자는 사색과 체험의 시간이다. 묵묵히 걷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이강생 체력과 인내력을 시험하는 시간이다. 제일 짧은 컷이 20분이고 길면 80분까지 묵묵히 걸어야 한다. 하프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걷다 보면 다리가 엄청나게 떨린다. 체력이 소진돼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속으로 불경을 읊었다. 그 순간 포기하려는 마음과 주변의 산만함을 잊게 된다.

- 행자 연작을 촬영하면서 <부재> <낭인> 같은 다른 작품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행자를 연기한 경험이 다른 연기에도 영향을 주었나.

이강생 대부분 상업영화의 출연 제의가 온다. 이때는 과거의 걷는 속도로 돌아가야 한다. 행자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영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영화 작업을 거치고 나면 본연의 속도가 어긋나게 된다. 그때마다 행자를 연기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원하는 영원한 예술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 <너의 얼굴> <데이즈>부터 행자 연작까지 차이밍량의 영화는 시간과 육체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는 인상을 준다.

차이밍량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다. 각자의 시간이 지닌 길이가 달라도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인간을 이야기할 때 육체와 시간을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삶의 번뇌다. 우리는 이따금 고통을 잊으려 아름다운 것만 보고, 늙어가는 사실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우리는 그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나의 영화는 노쇠함으로 향하는 시간을 보여주려 한다. 이 과정이 잔혹하거나 슬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즐거움과 아름다움도 있다.

- 결국 행자 연작을 관통하는 것은 걸음이다. 두 사람에게 걷는다는 행위는 무슨 의미인가.

차이밍량 ‘무소주’는 금강경에서 나온 단어로 정처가 없다는 뜻이다. 삶이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유랑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채 나아가는 행위가 바로 걸음이다. 이강생 걸음은 느리고 천천히 흘러가는 삶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작금의 세상은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너무 빠른 속도를 살고 있다. 걸음은 그 속도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든다. 기술의 속도가 세상을 지배한다 해도 나는 영원히 느린 걸음으로 살고 싶다.

- 행자 연작이 시간의 미세한 흐름을 좇는다면 특별전은 두 사람이 함께한 세월의 궤적을 좇을 수있는 자리다.

차이밍량 10년이 긴 건가? 짧은 건가? 모르겠다. (웃음) 촬영 과정이 평안했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러니까 10편을 찍을 수 있었겠지. 10년이라는 세월이 전부 이강생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이 작업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창작의 여정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행운이다.

이강생 45살에 시작해서 이제 55살이 됐다. 체력도 외모도 크게 변하진 않은 것 같다. 다만 계속 행자라는 작업을 한다면 아마 그때는 변화를 훨씬 더 잘 체감할지 모르겠다. 지금부터 신체 변화가 빠르게 온다더라. 그때쯤 되면 체력이 아닌 정신으로 승부하는 단계가 올 것 같다. 마치 나이를 먹을수록 내공이 높아지는 기수련자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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