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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초월에 필요한 시간, <프렌치 수프>
김소미 2024-08-08

*<프렌치 수프>의 엔딩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식은 음식은 미식의 세계에서 폐기 대상이다. 제철 식재료가 무르익는 계절을 기다렸다가 주방에서 준비와 조리에 몇 시간을 투자해도 코스 식사의 지속시간은 길어야 몇 시간. 순간을 위해 강도 높은 노동과 극도의 섬세함에 헌신하는 요리사를 다루는 오늘날의 인기작들이 퍽 전투적인 까닭도 이해가 간다. 대표적으로는 <보일링 포인트>(2021)와 <더 베어>(2022~) 시리즈가 있다. 전쟁터로서의 주방 재현에 충실한 이들 영화는 속도가 중요한 요리전에 걸맞게 카메라를 채찍처럼 휘두르고, 그보다 빠른 칼날 같은 편집으로 주방을 해부한다. 폭발하는 감정과 고함 소리로 동요하는 일도 예사다. 그에 비하면 트란 안 훙 감독의 새 영화는 다분히 시대를 역행하는 작품이다. <프렌치 수프>의 진원지가 19세기 프랑스 전원저택 1층에 자리한 커다란 주방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입부부터 무려 40분 동안 하나의 만찬을 준비하는 주방과 이를 즐기는 미식가들의 식탁에 머무는 영화는 느긋함 가운데의 생동으로 가득 차 있다. 날것의 재료 상태에서 공예품을 방불케 하는 요리 예술로 탄생 중인 음식들이 주방 곳곳에서 동시에 끓는 동안, 트란 안 훙은 조나탕 리퀴에부르 촬영감독을 설득해 스테디캠과 헨드헬드를 뒤섞었고 3일 동안 촬영한 세개의 롱숏을 조합했다. 결과적으로 유일한 컷 어웨이는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 추앙받는 도댕 부팡(브누아 마지멜)이 만찬에 참여할 친구들을 위해 위층 식당으로 이동하는 단 한번뿐이다. 요리의 철학으로부터 삶에 관한 심오한 은유를 애써 긁어내지 않고도 감독은 “관객에게 시간을 선물”하는 데 성공한다. <프렌치 수프>의 제작 과정에 투여된 인고란 것이 결국은 빛과 시간을 최대치로 보존하기 위함이라서다.

마르셀 뤼프의 1924년 소설 <도댕 부팡의 삶과 열정>에서 착안해, 원작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서사를 창작한 트란 안 훙의 작품에서 외제니의 죽음은 하나의 필연처럼 묘사된다. 내게 외제니는 잠깐의 온기, 한 접시의 맛, 유한한 수명 앞에서 시간을 조리하는 요리사로 보였다. 도댕과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평생 동반하고, 미식가들의 식탁에 합류하지 않음으로써 영향력을 지속하며, 폴린을 교육함으로써 자신의 소멸에 대비하는 외제니의 실천은 시간의 덧없음에 대한 우아한 포즈다. 요리 세트피스보다 외제니의 죽음 이후에 지속되는 일상의 정취를 담아낼 때 <프렌치 수프>의 관점이 명료히 빛난다는 점에 특히 주목하고 싶다. 푸른 그림자가 육중하게 내려앉은 동틀 녘에 침실에서 숨을 거둔 외제니를 확인한 도댕은 곧 황금빛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주방 창가에 홀로 남겨진다. 미동 없는 도댕의 머리 위에 집요히 맺힌 햇볕은 성화 속 빛의 세례처럼 찬란하다. 애도나 실연의 미장센으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정도다. 이 순간 관객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사진의 특수한 부재증명의 효과를 실감하면서 외제니 없는 부엌에서 외제니의 구원을 받는 도댕의 이미지를 지켜보게 된다. 이어서 어린 견습생 폴린의 부모가 도댕을 찾아오는 장면이 내러티브 차원에서 외제니의 소생을 알린다. 스승의 죽음으로 상심한 딸의 처지를 깊이 헤아린 부모가 도댕에게 끝까지 폴린을 봐달라고 읍소하는 모습은 일찍이 직접 그들의 영토를 방문해 폴린의 교육을 설득했던 외제니와도 겹치는 모양새다. 다시 나타난 폴린의 부모는 외제니가 자신들에게 보냈던 존중과 예의, 나아가 깊은 존경심까지 되돌려준다. 다음 컷에서 도댕과 폴린은 나란히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트란 안 훙은 <프렌치 수프>의 결말부에서 영화적 형식으로 부재를 초월하고자 한다. 엔딩에 이르러 도댕은 외제니에 버금갈 새로운 요리사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으로 폴린과 함께 집을 나선다. 외제니를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녀를 대신할 사람을 찾고, 문을 열어 나가버리고, 자리를 비우는 순간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덜컥 카메라의 존재를 감지하고 외제니와도 만난다. 이 장면의 부드러운 비범함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놀라움에 빠져 있다. (<프렌치 수프>가 음식영화, 로맨스영화, 그리고 80년대 후반에 사랑받은 프랑스 ‘가스트로노미 필름’의 전통을 복권한 듯한 인상 때문에 과소평가당하기 쉬운 위치라는 사실도 적어둔다.) 텅 빈 오후의 주방 중심에서 초점 맺을 인물 없이 남겨진 카메라가 홀로 두 바퀴 회전할 동안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간다. 곳곳에 놓인 화병 속 야생화들, 식탁 위에 꽃다발처럼 쌓인 채소들이 빛을 따라 미묘하게 변화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카메라처럼 계절이 순환하면 외제니처럼 도댕도 언젠가 떠날 것이고 폴린은 또 다른 폴린을 찾을 것이다. 조금 전 문을 열고 나간 도댕과 죽은 외제니의 대화는 그러므로 플래시백의 한 조각이라기보다는 재구성된 영혼들의 것이다. 르누아르 회화의 한폭 같았던 약혼 만찬 직후 들판을 거닐던 연인의 대사가 다시 한번 보이스오버로 반복된다는 점에서도 엔딩 시퀀스의 환상성은 설명된다.

<프렌치 수프>의 순환하는 패닝은 트란 안 훙이 예찬해 마지않던 미조구치 겐지의 카메라를 연상시킨다. 요리사가 아닌 도공의 영화인 <우게츠 이야기>(1953)의 엔딩에서 카메라는 전쟁터를 뚫고 텅 빈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과 함께 회전한다. 아내를 배신하고 욕망을 따랐던 도공에게 들이닥치는 환상이란, 따스한 모닥불이 켜지고 다시 물레가 돌아가며 죽은 아내가 되살아나는 시간으로 묘사된다. 트란 안 훙의 영화가 한결 온기 어린 관점으로 그 의미를 뒤집었다면, 근 몇년간 부지런한 관객을 자처한 이들에게는 폴 슈레이더가 <퍼스트 리폼드>(2017)의 마지막 장면에 시도한 급작스럽고 차가운 패닝이 대비될 만하다. 영화 내내 롱숏을 차분히 쌓아가는 세 영화는 결말의 패닝으로 초월적 조우를 시도한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트란 안 훙의 카메라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유려하게 고안한 미조구치 겐지의 카메라워크를 단순히 오마주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넘나듦을 가능케하는 조건의 이해에 바탕한다. 어떤 음식과 장소로부터 우리가 감히 찰나의 영원을 느끼게 되는 건 그 안에 재워진 시간 덕분인 것이다. 요컨대 <프렌치 수프>는 순환하는 시공간을 침착하게 졸여내 그 정수를 관객이 직접 맛보게 이끄는 영화다. 이때 연출자의 말대로 시간은 선물이 된다. 요즘의 스크린에서는 거의 느끼기 힘든 이 단순하고 명확한 진실이,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쥘 때까지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트란 안 훙의 프렌치 무비가 내게 남긴 오래된 격언이다.

*가스트로노미 필름

미식의 관능과 아름다움을 세련된 스타일로 소화한 프랑스영화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유행했다. <바베트의 만찬> 등.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쏟아지는 영화·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유독 치우치게 사랑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분석합니다. 편애와 애착, 새벽까지 이어진 과몰입으로 생겨난 마음의 기울기가 때로 정확한 모서리에 가닿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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