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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당선자 이병현 작품비평] 카메라만이 답을 알고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인간의 눈을 빌릴 때
이병현 2024-08-09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카메라는 인간의 시점숏을 피한다. 인간의 시점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흔들림 없이 트래킹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별안간 자동차 후면이나 땅 와사비, 죽은 사슴의 시점을 취하는 숏까지. 마치 인간의 시점숏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점을 취하려는 것처럼 하마구치 류스케는 찍어나간다. 따라서 온갖 시점을 동원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작품이 그토록 기피하던 인간의 시점으로 추정되는 장면이 나올 때다.

영화는 어른들이 치열하게 글램핑장 건설 관련 논의를 하는 와중에 전날 밤 꿩 깃털을 줍는 꿈을 꾼 하나가 낮에 또 혼자서 꿩 깃털을 주우러 가는 장면을 은근슬쩍 끼워 넣는다. 여기서 하나는 사슴 발자국을 따라 들판으로 향한 후 하늘을 나는 맹금류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 나가 꿩 깃털을 줍는다. 이 장면은 사슴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걸어가는 하나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전형적인 핸드헬드 기법으로 찍혔고,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눈 밟는 소리가 카메라 뒤에서 들려오기에 사람의 시점숏으로 여겨진다.

이는 영화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핸드헬드 장면과 비교하면 명백해진다. 영화는 하나가 실종되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를 찾아 돌아다닐 때 배수로를 보며 달리는 핸드헬드 숏을 찍는다. 그런데 이 숏은 산을 달리는 누군가의 시점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용하다. 이 짧은 장면은 왼편 멀리서 한 남성이 “하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며 끝난다. 이어서 염색 머리 남성이 배수로를 보며 달리는 숏이 나오는데, 이때 나는 요란한 발소리와 “하나”를 외치는 소리 등이 조금 전 고요한 핸드헬드 숏의 주인공이 그가 아님을 암시한다. 하나가 땅을 보며 걷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유일한 사람의 시점숏이라고 한다면, 궁금해지는 것은 감독의 의도일 수밖에 없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하나의 얼굴을 비추며 수평 트래킹숏이 마치 하나의 시점인 것처럼 착각을 유도했던 감독은, 왜 반대로 땅 밑을 바라보는 장면만을 하나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일까? 혹은 왜 그토록 열심히 사람의 시점을 피해 가던 영화가 여기서는 하나에게 시점숏을 찍을 권리를 부여하는 것일까? 여기서 설득력을 얻는 가설 한 가지는 하나가 실은 사람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많은 이에게 의혹을 불러일으킨 결말 장면으로 가보자. 이 장면은 하나가 설명회가 열리던 날 꿩 깃털을 주운 바로 그 들판에서 진행된다. 하나와 마찬가지로 타쿠미와 타카하시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나무 옆 짐승길 출구를 통해 들판에 진입한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하나가 사슴과 마주보고 있는 장면을 맞닥뜨린다. 사슴 한 마리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고, 하나는 모자를 벗고선 두 사슴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관객을 혼란에 빠트린 느닷없는 살해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이야기만으로는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 장면이다. 관객이 의지할 만한 수단은 오직 시각적 힌트뿐인데, 우리는 하나가 영화 초반 사슴 사체를 봤을 때부터 조금씩 사슴에게 동화됐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꿩 깃털을 처음 주운 설명회 전날, 하나는 타쿠미와 함께 사슴 사체를 봤다. 그날 밤 하나는 꿈속에서 기묘한 도치를 벌인다. 하나의 꿈은 얼어붙은 연못의 깨진 틈 위로 나무가 비치는 숏으로 시작한다. 곧 하늘을 나는 맹금류 한 마리와 눈 위에 찍힌 사슴 발자국, 꿩 깃털을 든 타쿠미가 차례로 나온다. 이어서 노란 장갑을 낀 채 손 그늘을 만든 하나가 무언가를 집중해서 바라보는 정면숏이 보이는데, 일종의 리버스숏처럼 나뭇가지 사이로 어렴풋이 정면을 바라보는 새끼 사슴의 모습이 보인다. 이 숏은 길게 이어지다가 아버지의 울음소리로 추정되는 소리를 듣고 새끼가 오른쪽 외화면으로 사라지며 끝난다. 이처럼 죽은 사슴을 산 사슴으로 뒤집는 이상한 전도 현상은 하나가 죽은 사슴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근거다. 실제로 하나와 눈이 마주친 새끼 사슴이 울음소리를 따라 오른쪽 화면으로 걸어 나가는 장면 바로 다음, 하나는 꿈속에서 자신과 타쿠미가 오른쪽으로 걷는 장면을 긴 롱테이크로 이어 붙인다. 하나의 머릿속에서는 외화면으로 걸어 나간 사슴 가족이 자신과 타쿠미로 치환된 것이다.

꿈을 꾼 다음날 하나는 사슴이 낸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데 이때 숨을 몰아쉬며 짐승 길을 보는 이 시점숏의 주인공은 이미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자신을 사슴과 동일시하고 있기에, 사람의 시점숏이 불가능한 이 영화에서 시점숏은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타쿠미는 아마도 하나가 새끼 사슴과 동화된 상태라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총에 다친 사슴이 숲속에 누워 해골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마지막 장면은 사슴과 사람의 운명이 평행하다는 강한 내적 논리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사슴이 한 마리 죽는다면 사람 역시 한명 죽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꿈의 논리다!)

타쿠미는 이 불합리한 논리를 깨닫자 곧장 타카하시의 목을 조른다. 타카하시를 희생양 삼아 총 맞은 사슴의 비참한 운명을 그에게 뒤집어씌우려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화는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하나의 모습과 타카하시가 완전히 죽지 않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타카하시는 죽은 것일까? 산 것일까? 총 맞은 새끼 사슴의 운명은 타카하시를 향할 것인가, 하나를 향할 것인가? 영화는 오직 카메라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 속에서, 인간은 카메라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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