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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사회풍자적으로, 때로는 원초적으로 - 김한결 감독의 파일럿을 만나다
임수연 2024-08-08

*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대형 항공사 3사 동시 합격.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성으로 SNS 스타로 떠오르며 <유 퀴즈 온 더 블럭>까지 출연 했던 화제의 인물. <파일럿>의 한정우(조정석) 같은 유명인일수록 구설수는 크게 터지고 치명 적인 타격을 입는 법이다. 그는 한국항공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여직원들의 외모를 입에 올리는 노상욱 상무(현봉식)에게 “요즘 그런 말하면 큰일 난다”고 말리다가 그 또한 여성 동료들을 “꽃다발”이라 비하하는 과오를 저지른 다. 당시 자리에 있던 직원이 언론사에 녹음 파일을 제보하면서 논란이 커지자 노상욱 상무는 여느 재벌 총수들처럼 휠체어를 타기 시작하고 정우는 회사에서 잘린다. 정우의 아내(김지현) 는 오래전부터 지속된 남편의 무관심을 지적 하며 이혼을 요구한다. 코너에 몰린 그에게 노상욱 상무의 누나 한에어 노문영 이사(서재희) 가 여성 파일럿을 우선 채용하는 성평등 정책을 펼친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정우는 홧김에 ASMR 뷰티 크리에이터를 표방하는 여동생 정미(한선화)의 이름을 빌려 한에어에 입사 지원 서를 내는데 웬걸,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문자가 날아온다.

남성 한정우에서 여성 한정미로, 젠더를 가로 지르며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과제는 어느덧 여성에게 당연하게 요구되는 꾸밈노동을 집약한 다. 메이크업, 제모, 심지어 승모근을 지적하며 일자로 뻗은 ‘제니 어깨’를 만들라 권유하는 헬스트레이너도 있다. 반면 한에어 입사 후 그와 가까워지는 윤슬기(이주명)는 해외 유학 시절 인종차별을 경험한 동양인 여성으로서 비혼을 선언하고 외모 언급이 왜 성차별인지 상사 에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성 파일럿으 로서 슬기의 친구로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정미는 짧은 머리에 펑퍼짐한 옷, 바지 정장을 입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는 등 초반보다 전통적 여성성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다. 그렇게 정우의 젠더 수행성이 보여주는 여성성의 변화는 <파일럿>의 디테일에서 발견할수 있는 재미 중 하나다. 정우의 후배이자 정미의 동료 서현석(신승호)은 동료 여성들을 잠재적 연애 대상으로만 취급하고 “위급 상황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대처를 잘한다”고 주장하는 뿌리 깊은 성차별주의자다. 그의 끊임없는 플러팅을 방어하고 동시에 꾸밈노동을 이어가야 하는 정우가 예전엔 몰랐던 여성의 삶을 경험하며 즉시 각성에 이르는…. 교과서 같은 전개를 <파일럿>은 택하지 않는다. 한국항공 성희롱 파문을 폭로한 이가 슬기라는 사실을 알고난 뒤 “한정우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닐수 있지 않냐”고 반발하는 주인공은 여전히 성희롱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분열적인 모습을 보인다.

정우가 1년 전 피해자들에게 뒤늦은 사과를 결심한 것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정미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미투 폭로자를 매장시키려는 노문영 이사의 음모가 드러나면서 다. 그는 한에어의 ‘여풍’을 상징하는 한정미의 존재를 1년만 더 유지해줄 경우 한정우로서의 복직을 약속하겠다고 제안한다. 그렇게 남성에서 여성 그리고 다시 남성의 위치로 돌아온 정우는 젠더 계급의 낙차를 경험한다. 권력을 쥔쪽은 그렇지 않은 쪽보다 젠더 기반 폭력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심지어 “성별이 아니라 능력을 봐야 한다”며 양성평등 정책에 불만을 터뜨리는 현석처럼 역차별을 운운하는 이들도 있다. 두번의 성별 전환은 한 사람의 계급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중 젠더의 영향을 추려 내며 남성 권력의 존재를 직시하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혐오는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는 단순 구도가 아닌 젠더 역할을 규정하는 사회 전체 의식을 논하는 개념이다. 능력 있는 노문영이 사고치는 남동생에게 밀리는 전통적 성차별의 피해자인 동시에 여성 파일럿의 진보적인 이미지를 이용하고 슬기의 미투 폭로를 약점으로 삼는 가해자가 되는 복합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이유다.

<파일럿>의 주인공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반작용으로 아예 일각에서 부정하기도 하는 페미 니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즉 젠더에 따른 위계를 깨닫는다. 이는 영화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의 계급은 성정 체성, 학력, 재산, 거주지 등 다양한 층위에서 결정될 수 있지만 그것이 사회적 성별의 영향을 거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새삼스러운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만 100만부 이상 팔린 <82년생 김지 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여성 연예인에게 악플이 쏟아지는 한국 사회에서 상업영화 <파일럿> 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지는 건 납득 가능한 타협이다. 영화는 젠더, 성역할, 페미니즘 등의 표현을 삼가며 정우의 반성이 ‘자기만 아는 이기심’을 돌아본 결과라고, 보다 보편적인 층위의 이야기를 끌어와 그의 변화를 설명한다. 회식 자리에서 여성 직원의 외모를 ‘칭찬’하는 행위가 문제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슬기의 대사를 제외하면 차별 문제를 직접적으로 꼬집는 신도 없다. 정우의 아들 시후(박다온)가 전통적인 성역할을 벗어나 발레리노를 꿈꾸는 설정도 애써 구구절절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남성을 악마화한다는, 그리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될 잡설이지만 현실에서 존재하는 주장을 고려하듯 평생 열심히 살아온 장남 정우의 안타까운 입장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 보여준다. “꽃다발”이 지탄받아야 마땅한 잘못된 언행이 라는 점은 확고히 하되 젠더 수행성을 따르느라 분투하는 정우의 소동극은 누군가에게 사회 풍자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원초적인 코미디로 안전하게 다가갈 수 있다.

기획에서 실제 개봉까지 수년이 걸리는 영화 산업 특성상 사회의 의식 변화가 즉각 투영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개봉 첫주의 흥행 추이가 사실상 흥망을 결정짓는 상황에서는 작품을 둘러싼 논란도 철저히 예측하고 관리해야 한다. 한국 기준 지극히 평범한 기혼 여성의 삶을 옮겼을 뿐인 <82년생 김지영>이 급진 페미니스트의 상징으로 떠오르며 별점 테러를 당하는 촌극이 벌어진 2019년, <파일럿>의 기획이 시작됐다. 젠더 갈등과 젠더 수행성을 다루되 이를 적극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 <파일럿> 은 아는 만큼 보이는 코미디영화다. 누군가는 페미니즘부터 퀴어까지 다양한 층위로 작품을 읽어낼 수 있지만(뒤에 이어지는 손희정 평론 가의 크리틱 ‘성공적인 포스트 #미투 대중 서사 <파일럿>을 향유하는 몇 가지 경로’ 참고) 누군 가는 “꽃다발”의 부적절함만을 깨달으며 킬링 타임 코미디영화로 소비할 수 있다. 그리고 <파일럿>은 후자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의미 있다 고, 그렇게 하나씩 시작해보자고 믿는 온건한 영화다. 과연 <파일럿>의 전략은 지금 시장에서 얼마나 유효타를 날릴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여성 서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거나 젠더 문제를 중심 소재로 끌어오지 않더라도) 앞으로 기획되고 마케팅할 한국 극장영화에 더 과감하거나 주저하거나 타협하거나를 결정할, 상징적인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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